텔레비전, 또 하나의 가족
■ 제시문〈자료 1〉 텔레비전 키드의 탄생나는 텔레비전 키드이다. 텔레비전은 나에게 문명의 놀라운 발명품이라기보다 '환경'에 가깝다. 이런 점에서 텔레비전의 도입이 삶의 충격이었던 세대와 나는 텔레비전에 대해 전혀 다른 경험을 갖고 있는 셈이다. 사회학자 세실리아 티치는 미국 텔레비전의 문화사를 다룬 흥미로운 책 『전자화덕』에서 텔레비전을 중심에 두고 두 가지 형태의 세대를 구분했다. 첫 번째 세대는 텔레비전이라는 미디어를 '불연속'으로 지각하던 세대이다. 이 세대에 속하는 사람들은 텔레비전 없이 살았던 시절과 텔레비전 이후의 시절을 모두 경험했고, 두 세계를 비교할 수 있는 위치에 놓인 사람들이다. 반면 두 번째 세대는 첫 번째 세대와는 전혀 다른 위치에 놓여있다. 두 번째 세대는 첫 번째 세대와는 달리 텔레비전을 '불연속'으로 인지하지 않는다. 그들은 텔레비전이 없던 시절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이다. 나는 텔레비전이 없던 시절의 의사소통 방식, 가정 환경을 알지 못한다. 텔레비전에서 중요한 역사적 단절과 불연속성을 떠올리는 1세대 학자들과 달리 나에게 텔레비전은 이미 상용화되어 있던 전기, 전등, 라디오 혹은 전화기처럼 텔레비전은 그저 나를 둘러싼 환경이었다. 나는 텔레비전과 함께 성장했고, 전문적인 학자가 된 지금도 여전히 텔레비전을 본다. 텔레비전 1세대에게 교수라는 직업과 텔레비전 시청자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텔레비전 키드인 내가 교수라는 직업에 종사한다고 해서 텔레비전을 보지 않아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텔레비전은 내가 전문적 학자로 성장하는 데 방해요인이 아니라 오히려 촉진 요인이었다. 나는 책을 통해 얻는 지식 못지 않은 양의 지식을 텔레비전을 통해 습득한다. 사회학자로서 나는 학술논문의 중요한 모티프를 텔렙비전에서 얻기도 한다. 이렇듯 텔레비전은 나에게 '부재'를 짐작조차 할 수 없는 '환경'이다.텔레비전 또 하나의 가족, 노명우〈자료 2〉 대량생산 - 대량소비의 경제학인쇄 미디어의 확산은 정치적 변동을 가져왔다. 성경의 번역과 인쇄술의 발전은 종교개혁이라는 거대한 물결을 만들어냈고, 신문의 보급은 부르주아혁명을 앞당겼다. 신문이 보급되면서 공론장이 형성되었고, 공중(Publc)이 등장했다. 프랑스 대혁명 과정에서 출발한 '대중'이라는 사회학 개념은 포드주의를 내재한 텔레비전 시대에 와서 찬란한 꽃을 피우고 있다. 정치적 개념이었던 대중은 텔레비전의, 시대에 경제적 개념이 되었다. 대량생산된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시청'이라는 행위를 통해 소비하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동일한 상품을 소비하고 대규모 인간 덩어리의 일부로 편입된다. 텔레비전만큼 동일한 상품에 대한 소비가 대량으로 일어나는 산업도 없다. 매일 저녁 인기 드라마가 방송되면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몰입하여 동일한 상품을 시청(소비)한다. 아무리 인기있는 자동차라 하더라도, 아무리 혁신적인 핸드폰이라 하더라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소비를 이끌어낼 수는 없다. 오직 텔레비전전 산업만이 그 꿈을 실현한다.그리고 텔레비전 자체가 '최신'의 은유가 된다. 텔레비전에 등장한 것은 다른 미디어에 등장한 것보다 항상 '최신'이다. 따라서 '최신'을 알기 위해서는 텔레비전을 봐야 한다. 텔레비전이라는 미디어에 붙여진 '최신'이라는 이미지는 텔레비전을 '신상품'의 전시장으로 만든다. 텔레비전은 매일매일 신상품들이 넘쳐난다. 광고는 매일매일 새로운 신상품을 소개하고, 홈 쇼핑 채널에서는 아예 한술 더 더 일 년 365일 신상품을 소개한다. 텔레비전 또 하나의 가족, 노명우〈자료 3〉 시청자가 호명당하는 통로텔레비전의 체널을 통해 공적 영역이 지속적으로 침투하면 텔레비전 시청자는 단순히 개인으로 머무를 수 없다. 그는 원하지 않아도 공적 논리에 의해 규정되며, 개성 외에 다른 특징을 부여받는다. 텔레비전은 시청자를 호명한다. 텔레비전은 때로는 시청자를 국민이라 호명하고, 때로는 세계시민, 또 때로는 붉은 악마라 호명한다. 채널은 시청자가 갖가지 이름이로 호명당하는 보이지 않는 길을 제공한다.20세기에 여러 미디어가 개발되었지만, 대중 미디어로 발전한 것들은 모두 무선 기술을 채용했다는 특징을 지닌다. 유선의 한계 속에 갇혀 있는 전화는 양방향성이라는 놀라운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결국 대중 미디어라기보다 사적인 용도로 활용되는 미디어로 전락하고 말았다. 반면 무선 기술과 전화가 결합한 미디어 즉 라디오는 대중 미디어로 발전할 수 있었다. 무선 기술의 채택 여부는 커다란 차이를 낳는다. 영화가 대중 미디어로 발전할 수 없었던 이유도 영화기술에 내재되어 있는 한계, 즉 특정 공간 내에서만 상영할 수 있다는 조건 때문이다. 동영상 기술이 무선 기술과 결합하여 등장한 텔레비전은 영화와 달리 대중 미디어로 발전할 수 있었다. 방송 전파에 의한 경계는 정치적 국경보다 더욱 강고한 힘을 발휘한다. 정치적 경계인 국경이 형식적 선이라면, 텔레비전의 시청 범위는 정치적 국경보다 강고하며 정서적인 힘을 발휘하는 문화적 국경을 만들어낸다. 텔레비전은 동일한 전파망 속에 있는 사람들은 문화를 공유하는 집합체로 구성해낸다.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올림픽과 월드컵 같은 국가간 경쟁 스포츠 메가 이벤트는 끊임없이 국민을 호명해내는 메커니즘이다. 텔레비전은 국가간 경쟁 이벤트를 거실로 전달하고, 시청자는 이러한 이벤트에 노출될수록 자신과 동일한 경험을 한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과 집단 정체성을 공유한다. 공동의 경험만큼 개인들을 집단으로 강력하게 응집시키는 요인도 없다. 텔레비전 또 하나의 가족, 노명우■ 쟁점 논제1. 논술 논제자료 1, 2, 3을 바탕으로 텔레비전이라는 또 하나의 가족을 낯설게 본 다음, 텔레비전이 올드 미디어가 아닌 뉴 미디어로 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논해 보시오. (900자 내외) * 보낼 곳; yimza@daum.net2. 면접 논제미디어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의소소통 양식, 인간이 세상을 지각하고 자신의 경험을 조직하는 방법에 대해 논해 보시오. (면접은 주변 학생들과 해보기 바람)쟁점 확대하기1. 익숙한 텔레비전 낯설게 바라보기텔레비전 키드에게 텔레비전과 매개된 삶은 특별한 이상 현상이 아니다. 우리는 미디어를 통해 세상을 배웠다. 대변 의사소통은 오히려 사적 의사소통에 불과하고, 텔레비전과 매개된 공적인 의사소통이라는 점을 기이하게 여기지 않는다. 성인이 된 지금 우리가 행하는 의사소통의 거의 대부분은 텔레비전을 통한 것이다. 텔레비전은 여전히 우리가 의사소통에 할애하는 시간이 제일 많은 미디어이다. 1970년대로 접어들면서 텔레비전 구입은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정상적인 삶의 구성요소로 자리잡았다. 그리고 소란스럽게 신기술의 경이로움을 보도하던 텔레비전에 대한 수다스러운 담론은 텔레비전이 정상화되기 시작하면서 급격하게 사라졌다. 2. 텔레비전 광고와 소비주의고대 아테네인들은 도시 설계를 할 때 정치의 장소인 프닉스와 경제의 장소인 아고라를 공간적으로 분리했다. 정치의 공간과 경제의 공간을 분리해야 하는 이유는 명확했다. 아테네인들은 경제는 욕망에 따라 움직이지만, 정치는 정의에 따라 움직인다고 생각했다. 경제의 원리와 정치의 원리는 상호 충돌한다. 따라서 경제의 공간과 정치의 공간은 분리되어야 했다. 그런데 텔레비전은 이러한 분리를 쓸모없게 만든다. 현대인들은 자신의 몸을 움직여 신상품들이 미로처럼 전시되어 있는 백화점을 산보할 필요가 없다. 광고가 있기 때문이다.3. 텔레비전과 대결하기텔레비전이라는 새로운 미디어에 대해 찬성과 반대로 양분되었던 세대가 있다. 그들은 시청자로 행세할 때는 텔레비전을 켰지만 교육자의 외양을 지닐 때는 텔레비전을 버려야 한다며 우리에게 이중적인 태도를 보여주었다. 그들은 교육적 목적에서 텔레비전을 버려야 한다고 가르치기만 했지, 텔레비전이 갖고 있는 반혁명성의 진실을 몰랐던 것이다. 혁명을 복원하기 위해 교육적 목적을 구실로 텔레비전을 버리고 금단 증상에 시달릴 필요는 없다. 만약 우리가 텔레비전으로 인한 문제와 진정으로 거리를 두고 싶다면, 텔레비전이 알게 모르게 체화시킨 실어증에 빠져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말을 하라. 그리고 숫자로 전락한 또 다른 시청자와 대화를 시도하라. 대화를 통해 잃어버린 말을 되찾고 고유명사로 복귀하라. 그것이 현대를 지배하는 가장 거대한 매스 커뮤니케이션 도구인 텔레비전과 대결하는 방법이다.■ 쟁점 기출문제논술 : 2007학년도 동국대학교 정시[문제1] 제시문[가]와 [나]에서 주장하고 있는 지적재산(知的財産)에 대한 두 가지 관점의 차이를 서술하시오.〈11~13줄(275~325자)〉 [20점] [문제2] 제시문[가]와 [나]에 나타난 행위의 성격을 비교하시오. 〈10~12줄(250~300자)〉 [20점][문제3] 제시문[가]와 [나]의 내용을 바탕으로, 제시문[다]에서 드러난 행위유형들과 그 정당화의 근거를 서술하시오. 〈11~13줄(275~325자)〉 [25점][문제4] 제시문[가] [나]의 내용과 제시문[다]의 사례를 참조하여, 현대사회의 인간관계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과 해결방안에 대해 논술하시오. 〈20~22줄(500~550자)〉 [35점]쟁점 관련 도서1. 텔레비전, 또 하나의 가족2. 미디어 리터러시쟁점 관련 영화1. 텔레비전 2. 브이 포 벤데타■ 학생 글과 교사 총평1. 학생 논술문2013년인 지금, 우리는 수많은 뉴미디어를 접하며 살고 있다. 페이스북, 트위터와 같은 새로운 SNS가 바로 그 예이다. 전파력 강한 SNS 등장으로 우리가 지금까지 늘 시청하고 정보를 얻었던 텔레비전의 역할이 점점 위축될 수밖에 없다. 계속해서 커지는 SNS의 힘을 버티기 위해서 필요로 해지는 것은 바로 더 이상 올드 미디어가 아닌 뉴 미디어로 바뀌어야하는 점이다. 먼저 텔레비전을 낯설게 보면 텔레비전은 삶의 구성요소이자, 의사소통의 도구라는 것이다. 텔레비전이라는 환경이 없는 의사소통은 상상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그리고 텔레비전을 통해 상품과 채널을 소비하며 그 소비를 즐긴다. 내가 세상의 주인공이 아니라 대량생산 - 소비에 내가 끌려가는 불편한 진실이 되는 것이다. 또한 내가 채널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국가에 호명당한다. 올림픽과 월드컵 같은 메가 이벤트를 통해 국가는 끊임없이 국민을 호명해내는 것이다.하지만 텔레비전은 페이스북, 트위터, 스마트폰에 점점 그 위치를 빼앗기고 있다. 올드 미디어가 되고 있는 것이다. 다른 미디어는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텔레비전은 싫어증에 빠져있는 것이다. 즉 사회 속 수백만 상자들은 동일한 송신자와 연결되어 있지만 서로 간에는 연결되어 있지 않는 일방적이라는 한계가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는 텔레비전이 올드 미디어에서 뉴 미디어로 가기 위한 방법으로는 제일 중요한 것은 바로 '커뮤니케이션' 이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즉 상호 작용을 통해서 가장 중요한 빠른 소통과 전파력을 얻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2008년 5월 광우병 사태와 촛불집회가「PD수첩」의 결정적 역할을 통해 사건이 전개될 수 있었다. 이처럼 텔레비전이 올드미디어에서 뉴미디어로 바뀔 수 있는 방법은 좀 더 시청자와 소통할 수 있고 빠르게 전파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는 점이 관건이 된다. 전북사대부고 2학년 김효현2. 교사 총평텔레비전은 또 하나의 가족이 아니다이번 주제는 텔레비전이다. 집안의 중심에 위치한 텔레비전. 그 텔레비전을 통해 우리는 소비하고, 붉은 악마로 뭉친다. 그러나 그 속에 포디즘이 있다. 대량생산을 위한 대량소비의 메커니즘이 존재하는 것이다. 텔레비전을 낯설게 보아야 하는 이유이다.△독해력항상 지시문에 대한 이해는 논제에서부터 시작한다. 논제에서 텔레비전을 낯설게 보아 달라고 했고, 뉴 미디어가 될 수 있는 방법을 논하라고 하였다. 이번 논술문은 이 논제에 충실하게 답한 것은 논제에 의거하여 제시문을 충실히 읽었다고 볼 수 있다.△논리력논리력은 논증이다. 논증은 자기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 논증이 아니다. 자기 의견을 제시한다면 그것은 수필이 될 것이다. 이번 논술문에서 텔레비전이 뉴미디어가 될 수 있는 방법은 소통이라 했고, 이에 대한 근거로 빠른 소통을 제공한 광우병 사태와 촛불시위를 예로 적절히 활용하고 있다. △표현력논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논증이다. 그런데 현재 4개의 문단 중에서 마지막 문단이 논증으로 이루어져 있다. 큰 무리가 없는 글이기는 하나 전체적인 모양새가 4문단보다는 3개의 문단 정도가 적절하다. 양의 적절한 배분도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