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체육 비사] (25)유형환 전북태권도협회장
"일본이 국제무대에 내세울 수 있는게 종합상사라면, 중국은 화교집단이고, 한국은 태권도다"누가 맨 먼저 한 말인지는 몰라도 교포들 사이에서 하나의 정설로 통용되는 것으로 한국 태권도가 국제무대에서 어떤 위상을 갖는지 보여준다.전세계 태권도의 메카가 한국이라면, 그중에서도 전북은 태권도의 본 고장이다.무주태권도 공원에 모든 태권도 관련 시설이 들어오는 것만 봐도 전북 태권도의 위상을 한눈에 보여준다.평생을 태권도인으로 살아온 전북태권도협회 유형환(64) 회장의 이야기를 들어봤다.우리나라 태권도 역사가 장구하긴 하지만 대한태권도협회가 구성된 것은 1961년으로 올해로 꼭 50년이 됐다.그때까지는 각종 태권도 단체가 난립했음은 물론이다.대한태권도협회가 구성된지 2년만인 1963년 전주에서 열린 제44회 전국체전때 태권도는 첫 정식 종목으로 채택됐다.그 당시에는 단체전(5명씩 출전)만 열렸는데 전북은 총 4개의 금메달중 3개를 쓸어담으며 전국 최고의 태권도 실력을 뽐내게 된다.그때부터 태권도 매뉴얼이 보급되기 시작했고, 도내에서도 본격적인 태권도 붐이 일어나게 된다.그 중심에 있던 사람의 하나가 바로 유형환 회장이다.전주가 고향인 유형환 회장은 전주남중, 전주공고, 경희대, 해병대를 거치는 동안 20대 중·후반까지 선수로 뛰었고, 그후 37년을 체육교사로 활동하며 태권도를 지도했다.대한태권도협회가 결성되던 1961년 중학교 2학년이던 유형환은 막 태권도를 시작했다."그때만해도 정식 선수란 개념이 없었고, 몸집이 작은 나는 솔직히 맞지 않기 위해 태권도를 배웠어요"유 회장의 회고담이다.태권도를 시작한지 얼마안돼 순발력이 좋은 그는 친구들 사이에서 '짱'소리를 들을만큼 운동에 능했다.전주공고에 진학하면서 그의 운동신경을 눈여겨 본 지도자들이 축구선수로 뛸 것을 권유해 몇달간 해봤으나 스스로 축구를 포기했다.그는 "나도 좀 축구를 한다고 생각했는데 어릴때부터 정석을 배워온 전문 선수들의 기량은 장난이 아니었다"고 말했다.그런데 고 1때 그에게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제44회 전국체전이 전주에서 열렸는데 태권도가 첫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것이다.당시엔 전국체전과 소년체전이 함께 열렸다.그때만해도 어리숙한 시절이어서 체격이 작은 그는 '고산중학교 3학년'으로 둔갑돼 중등부에 출전, 금메달을 따냈다.전북뿐 아니라 다른 시·도에서도 선수 나이를 속여 출전하던 때였다.다행히(?) 그는 몸집이 작아 적발되지 않고, 전북의 태권도 석권에 일조했다고 한다.그때 함께 출전해 금메달을 땄던 사람중 하나가 고인이 된 임생수 전 도의원(완주)이다.임 전 의원은 당시 전주농고 학생이었다.전국체전에서 전북은 일반부를 제외하곤, 중등부·고등부·대학부를 모두 석권했다.명실공히 전북은 태권도에 관한한 전국 최고로 인정받았고, 때마침 태권도 바람이 불었다.고3때 열린 전국대회 5개에 불과했다.그는 5개 대회를 모두 석권하며 전국적으로 이름이 알려졌다.여세를 몰아 경희대 체육학과에 입학하면서 국가대표가 됐다.한국체대가 없던 시절 경희대는 운동하는 학생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국가대표 시절 그의 별명은 '보증수표'였다.선배나 지도자들의 기대에 한번도 어긋나지 않고 반드시 경기에서 이겨줬기 때문이다.하지만 그가 2학년때 경희대 태권도팀은 불미스런 폭력사건과 연루되면서 팀이 해체되는 운명에 처한다.자신과는 무관한 일이었으나 팀이 해체되자 유 회장은 해병대 선수로 활동했다.그 당시 해병대 코치가 전북 출신 이승완씨였다.어릴 때부터 잘 아는 선배 이승완은 적어도 태권도를 하는 사람들에겐 신화적인 존재였다.이승완씨는 훗날 국기원 원장까지 지냈고, 소석(이철승)과 정치적으로 밀접한 관계로 지내게 된다.유 회장이 해병대 선수시절 소위 김신조 사건으로 일컬어지는 1·21 청와대 습격사태(1968년)가 벌어져 긴장속에 지냈던 나날도 있었다.선수생활을 접은 유 회장은 김제 만경여중 체육교사로 부임, 이후 무려 37년을 운동선수를 길러내는데 헌신한다.전북체고 감독을 한 기간만 23년이나 됐다.함준 고양시청 감독, 정호원 미국사범, 윤철 전북체고 코치를 비롯, 숱한 제자를 길러냈다.평교사 출신임에도 불구, 그가 2008년말 전북태권도협회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태권도를 하는 제자가 많았기 때문이다.회장 취임 일성으로 그는 공정성을 내세웠다.수없이 많은 경기를 직접 뛰어본 사람으로서 인맥에 의해 심판판정이 좌우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았다.그는 심판의 판정 잘못은 결국 태권도의 질을 떨어뜨린다고 판단했다.소년체전 전북 선발전때 전자호구를 도입한 것도 결국 판정시비를 잠재우기 위한 조치였다.전북이 배출한 태권도인은 전일섭·유병용·이승완 등 쟁쟁한 사람들이 많았다.미국 뉴욕의 박연희·이형노, 시카고의 김광웅, 워싱턴 이현곤, 전 미국회장 이상철, 스페인 바르셀로나 양영관 사범 등이 세계속에 한국을 알리고, 전북 태권도를 전했다.유 회장은 "외국에 나가보면 전북이 낳은 태권 지도자들의 위상을 실감하곤 한다"면서 "전북이 세계 태권도의 성지로 굳건히 자리매김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