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인생] "소 발에 짚신 신기고 수백리 길을 다녔지"
소(牛)와 뗄레야 뗄 수 없는 삶을 살아 온 한 촌노의 우직한'소지기 인생'이 소띠 해인 기축년(己丑年) 새해를 맞아 새롭게 의미를 더해주고 있다.진안 백운면 원동창마을(일명 나들목)에 사는 임동호씨(74·사진).그는 어릴 적, 소 등을 타고 풀피리를 불며 시작된 소와의 질긴(?) 인연은 장년기 한때 '소몰이꾼' 삶으로 이어졌고, 소몰이를 그만 둔 지금까지도 여전히 소와 동거동락하고 있다.임씨가 허름한 외양간에서 손수 기르는 소는 현재 2마리. 2년 전 502만원을 주고 산 4살 난 암소 한마리와 그의 새끼 송아지 한 마리가 그의 전 재산(?)이다.지난해 가을 논산장에 내다 판 스무살 소가 14차례에 걸친 산고 끝에 나은 20여 마리의 송아지까지 더할 경우 그의 손길을 거쳐간 소는 족히 30마리 남짓 된다.그런 만큼 자식같은 이들 소에 대한 애착은 남다를 수 밖에 없다. 그는 송아지 코청을 뚫어 코뚜레를 매고, 큰 소(누렁이)에 달구지를 매 달아 동네 어귀를 나서는 모습부터 유별나다.직접 일구는 7000㎡(2300평) 규모의 농토에서 쟁기로 논을 갈아 엎거나 논을 평평하게 고르는 '써래질'도 옛 방식 그대로 길러진 누렁이를 통해 한다.이 때문인지, 임씨는 "소를 다룰 때 내는 '워워워∼', '이리야∼'란 식상한 채찍질도 이젠 살가운 자식 농사보다 더한 정감이 넘쳐난다"고 너스레를 떤다. 소의 눈빛만 봐도 뭘 원하는 지 알 정도니 그럴만도 하다.그러한 그에게 칠순을 훌쩍 넘긴 고령은 또 다른 '인생의 족죄'다."나이가 든 탓인지, 소를 이용한 농사도 이젠 힘에 겨워. 언제까지 계속할 수 있을련지 나도 몰러. 허리가 너무 아퍼설랑." 그의 순박한 농심은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의 벽을 느끼게 한다.지친 몸 만큼이나 사료비도 건지지 못할 만큼 폭락한 소값은 삶의 의지마저 꺾어놨다."소 키워야 남는 게 거름밖에 없다."라는 푸념어린 넋두리로, 작금의 농촌 현실을 못마땅해 했다."그래도 예전이 나았지. 소만 몰면 많게는 하루 3만원은 거뜬히 벌었는데…."라고 말 꼬리를 흐리며 한때 잘나갔던 '소몰이꾼' 시절을 애써 반추해내는 임씨.혈기 왕성한 30대 후반이던 1970년, 그의 소몰이꾼 인생이 시작됐다. 3살 연하의 부인 정희순씨와 결혼하면서 얻은 자녀(2남 4녀)를 먹여 살릴 경제적 기반이 취약했던 게 소몰이에 나선 계기가 됐다.당시만해도 경작 규모라야 채 3마지기(2000㎡)도 안되는 논이 전부였던 그에게 자녀들의 교육비는 고사하고 입에 풀칠조차 힘겨운 현실에 망연자실해 있던 터였기 때문이다."(농사)품삯이 하루 1만원도 안되던 시절에, 한달에 여섯 번의 소몰이로 쌀 2가마(당시 싯가 20만원)를 벌었으니, 당시로서는 적은 돈이 아니었지."라고 그 때를 회고한다.그런대로 돈이 되는 장사인 만큼 소몰이꾼으로 살아가는 일도 녹록치 않을 뿐더러, 낯선 거리환경에 적응 못하는 고삐풀린 소를 다루는 일 또한 결코 만만치 않았다고.험한 고갯길과 비포장 자갈 길을 수없이 넘나들며 하루 100리(40㎞) 남짓한 거리를 걷고 또 걸어야 했고, 장날에 맞춰 소몰이를 하다 소가 팔리지 않으면 머나 먼 논산장까지 원정 길에 나서기도 부지기수였다."고개 넘는 소의 발에 (발이 덜 아프라고)짚신을 신길 정도였으니, 사람인 난 오죽했겠나".4·9일 마다 장이 서는 진안 길은 그래도 수월한 편이다. 물론 소가 넘어야 할 고개는 송림치, 말리(머리)고개 등 즐비했으나 소를 잘만 다그치면 해가 뉘엿해지기 전,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6일에 서는 임실 우시장에 이르기 위해선 해발 400m가 넘는 대운치를 넘어야 함은 물론 소 여물을 먹이고 재워주는 마방이 있는 임실 성수면 평지까지 12km 구간을 그야말로 쉼 없이 소를 몰아야 했다.겨우 다 다른 목적지(임실장)에서 몰고 간 소가 다 팔리면 긴 여정길은 비로소 매듭지어진다. 하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임실길 보다 훨씬 먼 전주장으로 또 다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야 했던 임씨.슬치재를 넘어 책정리에서 1박을 하고, 상관면 대성 객사동에서 또 한번의 밤을 지새야 이튿날 전주 덕진공원 주변에 선 우시장에서 소를 인계할 수 있었다고.이처럼 고개 넘고 장날마다 이뤄졌던 임동호씨의 소몰이 길은 논산-이리-전주(7km)-객사동(7km)-책정리(20km)-임실(6km)-임실 성수 평지리(12km)-백운 원동창마을(14km)- 진안으로 이어졌다.그의 소몰이꾼 삶은 아스팔트 도로가 뚤리고 차량으로 소를 운반하기 시작하던 지난 1970년 중반 이후 끝이났다. 더불어 짚신을 신고 고개를 힘겹게 넘던 소들도 문명의 이기인 트럭 위에서 편안(?)해졌다.그러나 소와 평생을 같이하고픈 욕망은 우직한 소를 닮은 그의 환한 미소 속에 여전히 남아 숨 쉰다.임씨는 "소는 인간에게 모든 걸 바친다. 농사 짓는데 인간의 몇배 일을 하는 것도 모자라 죽어서도 뼈, 가죽, 뿔 등 온 몸 하나 남기지 않고 인간에게 보시하지만 불평 한마디 없는 게 소"라고 예찬했다."젖소 송아지 값이 '등심 1인분' 가격도 안되는 현실이 말이 되냐"고 반문한 그는 "하루가 멀다고 치솟는 배합사료값을 내리고 수입 쇠고기 물량도 줄여야 축산 농가들이 그나마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사항을 남겼다.한편 세월의 흐름 속에 묻힐뻔한 임동호씨의 소몰이꾼 삶은 '월간 백운' 2008년 5월호에 정병귀씨가 관련 글을 실으면서 빛을 봤으며, 쇠코뚜레를 매단 누렁이와의 동업(?)은 오늘도 어김없이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