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기명숙 작가, 임재정 '아돌프, 내가 해롭습니까'
여기 노동 최전방에서 시인이 쓴 ‘노동의 유물론’이 있다. 시집을 열면 노동자로서의 고독과 비애는 물론 자본 이데올로기를 조롱(저항)하며 타자들의 소멸로 근근이 살아왔던 우리에게 타자와의 연대를 자극한다. 자본의 질서에 순치되어 시를 안 읽는 당신에게 시 읽기의 명분을 제공할지도 모르겠다. 겹침에서 오는 마블링처럼 자본시장의 압력과 관계망에서 규율되고 통제되는 노동자는 “노래와 비명 사이 풀을 뜯는 한낮의 양들”(「마블링」)이다. 늑대(자본주의)에 잡아먹힐 태생적 한계 상황에서 공포와 불안을 견디며 행복을 꿈꾼다. 그러나 착취와 불합리, 이익의 관점인 자본주의 허구성(기회비용)은 노동자에게 행복 포기를 합리화한다. “밤은 그러나 조금 달라야 했”지만 “깨어보면 장미 울타리를 지나온 생각이 피투성이로 쓰러져 있”(「마블링」)을 뿐이다. 임재정 시인 또한 자본에 종속된 이 시대의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없음을 모르지 않는다. 다만 좌절하지 않고 암유와 환유로 무장한 ‘시의 현장’에서 존재와 정립을 위한 분투, 불평등한 자본주의 체제에 투쟁한다. 자신 또한 늑대에 물려 피 흘리지만 ‘고통이 없는 것은 결코 윤리적일 수 없다’는 레비나스의 명제를 드러내기라도 하듯 타자와 더불어 ‘아프기’를 주저치 않는다. 그렇다고 노동의 유물론 『아돌프, 내가 해롭습니까』는 계몽주의의 교양이념도 노동 진보주의 담론서도 아니다. 노동시장에서 견인한 골조와 파편들로 지어진 ‘시의 집’이며 견고한 무기다. 이 시집이 근사한 이유는 비극적 허무주의에 빠져있지 않다는 점이다. “빗소리는 무엇이든 될 수 있어요 환호로 가득한 응원, 위로와 치유, 빗소리를 다져 넣은 요리 (중략) 지느러미 달린 생으로 환생하는 꿈을 꿉니다”(「빗소리를 사랑하는 사람들」) 만난 적 없지만 단언컨대 시인은 이념과 형식에 있어 자유로운 노동자다. 노동자의 생래적 기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의 자본 독재에 맞서는 환상이나 꿈은 ‘도취’를 전제로 한다. “부어 곱은손을 뜨거운 물에 불려 깨우고 신기루와 오로라 사이 내일로 출근”(「나는 사막으로 갑니다」) 시인의 다소 엉뚱하고 유머러스한 방식, 노동과 전혀 무관할 것 같은 구절들 틈바구니를 헤매다 보면 그가 불합리와 구태에 어떻게 저항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주체의 정념이 인간주의적 관점으로의 확대를 모색하고 있음도 확인할 수 있다. “늙은 주인과 황구가 살았습니다 물어간 신발을 실랑이하며 (중략) 봄날 지나 깊은 밤 건너 바야흐로 아침이었는데요 시들한 몸에 아지랑이가 가장 군침 돌았습니다”(「클라이맥스라고는 없는,」) 고백건대 시의 표현양식 ‘낯설게 하기’는 필자에게 ‘비현실적이어서 오히려 극사실적’인 경험을 선사했다. 비현실‧비실재 시어들이 환기하는 이미지가 자본주의 이면, 노동의 본질과 다름아니기 때문이었다. 망치,포클레인,철근더미,전깃줄,스패너,용접아크,보일러연통,프레스,반죽기 등 노동 관련 이미지와 대비되는 풀 뜯는 양,장미울타리,비누방울,풍선,구름의 발자국,노을,나비와 같은 낭만적인 언어가 현실을 상쇄할 것으로 기대하지만 결국 삭막한 현실로 치환된다는 점은 이 시집의 중핵에 해당된다. “감쪽같이 무지개가 스패너로 바뀌는 이야기 (중략) 스패너로는 죌 수 없는 너트로 꽉 찬 무지개 이야기 미안하다는 거짓말을 뭉뚱그리면 국경이 되고 빠삐용이 되고, 우린 나비라 부릅니다”(⸢비누⸥) 자본과 노동의 마블링처럼 겹침과 분리가 철저한 상황에서 ‘노동하지 않을 자유’가 없는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노동하기’를 사랑한다. 노동 체험과 언어의 간극, 피안이 아닌 노동현장, 반문과 의문, 존재론적 실체를 표상하는 기호, 아이러니 문장들이 ‘노동 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증명하는 그만의 독특한 발상이다. 그리하여 탈출을 감행, ’양들이 풀밭에서 평화롭게 풀을 뜯으며 행복했다...’는 궁극을 기록하고 싶은 자이다. 결국 노동은 삶이자 죽음을 향한다. “완성되는 세계란 없다 내게 등기된 창문 하나 없이 늙어가는 아이가 있을 뿐이다”(⸢액자들⸥) 임재정 시인은 시로써 무자비한 현실 속 노동의 세계를 드러내고 발언함으로써 죽음이 아닌 ‘영원함’을 도모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자본주의 세계 에 굴복하지 않되 재생을 바라는 그의 작업이 가능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