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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다는 이유만으로 당신을 멀리 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삭신이 쑤시며 온몸에 신열이 생기어 숨도 못 쉬고 금방 죽을 것만 같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이나 부처님을 찾지 않고 혼미해지는 정신 속에서도 당신의 이름을 부름은 아직 사랑이 남아 있음이오 당신만이 치유할 수 있는 열병을 앓고 있음이기 때문입니다. △누구에게나 절대적으로 필요한 게 있다. 어떤 때는 그게 사람이기도 하고 물건이기도 하다. 그러나 물질적인 것이 아니고, 생의 결핍이나 삶의 허기와 맞닥뜨린 사람은 절실하게 신을 찾는다. 시인은 지금 열병을 앓고 있다. 어떤 절대자도 시인의 병을 치유해줄 수 없다. 금방 숨이 끊어질 듯 아픈 시인은 오직 ‘당신’만을 찾는다. 절절한 연애시로 읽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의 ‘당신’이라는 자리에 ‘시’를 넣어 읽어보면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진다. /김제 김영 시인
▲ 이운룡자고나면 시간과 하루는 느릿느릿 가는데 세월은 빨리빨리 간다. 응, 그래! 늙으면 시간과 하루는 느릿느릿 간다. 그러나 세월은 참 빨리빨리도 간다. 어느덧 한평생 뜨고 진 하루 하루해가 서산마루에 걸터앉았다. △이운룡 시인은 1964~69년 ‘현대문학’에 세차례 시 추천을 완료하고 ‘월간문학’에 문학평론이 당선됐다. 전북문인협회 회장, 중부대 교수, 전북문학관 관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한국현대시인협회, 한국문인협회 고문을 맡고 있다. 저서로 <이운룡 시전집>, <직관 통찰의 시와 미> 등 28권이 있다.
▲ 전근표세상이 어두우면 하늘은 해와 달과 별들을 가득히 이끌고 오지 더 어두워 봐 별들은 더욱 초롱초롱 빛나지 하늘이 제대로 머리 위에 뜨면 지상은 비로소 길이 열리고 숲들은 일렁이기 시작하며 호수들도 수면 위를 아름다운 음표로 반짝거리지 사람 산다는 게 별거야 시시때때로 번져오는 하늘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 지상에 사무치며 흐르는 바람결에 몸을 맡기는 거야 세상이 어두울수록 우리들 눈빛을 더욱 반짝거리는 거야 △전근표 시인은 2008년 한국시로 등단해 한국시문학대상 등을 수상했다. 한국문인협회 진안지부 6대 회장을 역임했다. 시집 <사랑합니다! 아버지> 등이 있다.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에게 “안녕”이라고 한꺼번에 인사하지 마 하나하나 눈빛을 맞추며 정겨운 마음으로 “안녕”이라고 빛나는 별 하나 마다 인사를 나눠. 모두가 똑같은 별이 아니니까… △선거를 앞두고 은연 중에 선거운동이 시작되었다. 여기저기서 이름을 알리느라 바쁜 후보들이 읽어보아야 할 작품이다.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이 모두 똑같은 별이 아니다. 많고 많은 유권자가 다 똑같은 유권자가 아니다. 어떤 모임의 우두머리나 자칭 힘센 사람들을 동원하지 마시라. 스스로 오피니언 리더라고 생각하지 마시라. 세상의 모든 유권자는 각자 다 다르다. 이름도 다르고, 얼굴도 다르고, 취미도 다르다. 하나하나 눈을 맞추며 정성을 다해 안부를 물으시라. 그래야 그들이 그들 고유의 색으로 반짝인다. 그래야 우리 사는 세상이 아름답다. /김제 김영 시인
술 향기 쫓아 질척이는 길 밤을 낮 삼아 낮을 안주삼아 끈적이던 불나방 기나긴 타오르는 몸부림 사방 트인 음습한 골짜기 지나 뼈 속 깊이 통풍으로 들어앉아 짓궂은 흐린 날엔 바람난 골수 구멍 숭덩숭덩 지나 낮은 저음 휘파람 소리로 욱신욱신 육자배기로 이리저리 뒤척이는 몸 연신 잠 이루지 못하고 빨판 거머리로 달라붙은 술의 기운 애먼 푸른 핏줄 깊숙이 낚아 맨입으로 나갈 수 없다며 갈팡질팡 튀는 음정 갈지자 권주가로 흥정한다. △술이 무엇일까? 물속에 들어있는 불이다. 불을 보고 덤비는 불나방도 있겠고, 타오르는 골짜기도 있겠다. 핏줄을 타고 흐르는 뜨거운 불이 빨판 거머리처럼 몸을 들쑤시고 다닌다. 이 불을 뼛속 깊이 들어 앉혀 놓으면 흐린 날엔 뼈 피리가 육자배기 가락을 쏟아낸다. 오늘 음정이 튀고 걸음이 비틀거려도 향기를 좇아 다시 권주가를 부른다. 술을 사랑하는 세상의 모든 시인이여 건필하시라. <김제 김영 시인>
내 친구 서진이가 돌아왔다 큰 도시로 이사를 갔는데 다시 왔다 왜 왔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참 좋았다 모정에선 이러쿵 저러쿵 궁금해 하지만 나는 상관없다 우리가 축구를 하는데 서진이는 골키퍼였다 이젠 걱정이 없다 서진이가 골키퍼를 할 수 있으니까 △어른들이 뭐라 하시든 상관없다. 나는 서진이가 좋다. 서진이가 없는 동안에 나는 외로웠다. 골키퍼 없는 축구경기는 아무 의미가 없다. 서진이 없는 축구는 아무 재미가 없다. 서진이가 없는 동안은 밥맛도 없었을 것이다. 친구를 대하는 순수한 마음이 좋다. 어른들이 이러쿵저러쿵하시는 말은 실은 어른들의 호기심 정도일 것이고, 우리들은 그저 친구가 돌아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좋다. 어른이 되어서도 이런 맑은 마음을 키우는 시인이 참 부럽다. <김영 시인>
사람 만날 일이 뚝 끊긴다 수다도 없어지고 땀 흘릴 일도 없어져 꽃이 피어도 햇빛이 반짝여도 그저 그렇다 기쁨도 슬픔도 다녀가지 않아 우울한 나날 오직, 밥 생각만 한다 자장면 설렁탕 김치찌개 쌀밥 파전 찰떡 사랑을 끊으면 사랑에 갇히고 밥을 끊으면 밥에 갇힌다 △짧은 시가 참 재밌다. 단숨에 읽고 나면 내 이야기를 옮겨 놓은 것 같다. 단식을 경험했을 때 마음의 변화를 현미경으로 본 듯하다. 몸맵시를 생각하면 어떠한 유혹에도 넘어가지 말아야 하는 일. 그러나 밥을 끊으면 밥에 갇힌다는 화자와 공감한다. ‘사랑을 끊으면 사랑에 갇히고’라는 행에서 내 무릎을 탁 치게 만든다. 사랑을 끊으면 괴롭다, 슬프다, 아프다 등 형용사를 피한 ‘갇히다’라는 동사가 나를 사로잡는다. <이소애 시인>
자! 우리 이제부터 시작이다 허리띠 졸라매고 보릿고개 넘던 혈육 칼날에 허리 잘리우고 눈물로 가슴 아파 온지 얼마 투쟁은 발전위한 싸움이던가 이제 용서하리라 남북이 잘못했다 고백하자 감싸안고 무릎 맞대어보라 눈부신 사명 보이지 않는가 상봉의 눈물 뜨겁게 적시어보자 시간 없다 눈물 흘릴 시간… 축제를 열자! 어서! 패자도 없고 승자만 있으리니 꽃을 피우자! 통일을 위해 한라와 백두에 무지개 다리를 놓자! △전근표 시인은 2008년 월간 한국시에서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한국문인협회 진안지부 제6대 회장을 역임했으며, <사랑합니다! 아버지> 등 다수의 시집을 냈다. 한국시 문학대상을 받기도 했다.
푸른 꿈을 꾸는 사람 뜨거운 땀의 길로 가라 붉은 꿈을 찾을 수 있다 땀으로 빚은 자기의 극복을 보라 오성의 금빛이, 컬링의 영미가 봅슬레이 용사들의 백분의 일 초가 열다섯 개의 별들이 모두 그렇다 눈과 얼음의 길 위에서 하얀 분노의 질주를 보았다 청춘의 열기에 녹아나는 얼음판 그 위에서 피어나는 꽃을 보았다 얼어붙은 남북의 길 위에도 성화를 앞세워야 한다 마니산에서 채화하여 마이산을 돌아서 서울에서 평양까지 모든 십자가엔 불을 밝히고 산사엔 향불을 피워놓고 우리 서로 손잡고 뛰어보자 평화의 성화를 앞세우고 뜨거운 땀과 눈물을 뿌리자 칠천만이 함께 같은 꿈을 꾸자 분홍빛 평화의 꽃을 피우자. △전병윤 시인은 진안문협 초대회장으로 전북문협부회장·전북시인협회 부회장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문협 청소년진흥위원, 전북문예회원, 온글문학회원, 두리문학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원고지다불 켜진 창마다언어가 사는,불 꺼진 창마다언어가 숨는소설이다시다△짧은 시 속에 고층아파트 숲이 한꺼번에 밀려온다. 숲속에 살면서도 숲을 보지 못하고 콘크리트 벽에 새긴 아파트 이름과 동을 표시하는 숫자만 읽곤 했었다. 그 속에서 살고 있을 사람은, 아니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을지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끔 새벽에 나보다 먼저 불이 켜진 아파트를 보면 불면증에 시달리는 사람일 거라고 내 자신에게 응답했었다. 이 시를 읽으면서 고층아파트 창문을 바라보니 네모난 창문이 원고지 같았다. 그런데 그 속에 언어가 살다니요. 놀랍습니다. 불 꺼진 창은 시를 쓰고 소설을 쓰는 행동하는 언어가 숨어 있다니요. <시인 이소애>
해가 뜨면일제히 고개를 드는해바라기내 온몸의해바라기는너를 향해 있다눈부신 노을을 남기고산을 넘어간 너 때문에잠들지 못하고내내너만 향해 있다.해가 뜨면너를 향해 다시 고개를 드는나는 해바라기△ ‘너’라고 부르는 강렬한 소리가 창문을 깬다. 쫘악 금이 간다. 눈부신 노을을 남기고 떠난 너, 온몸이 너를 향해 있어 잠들지 못하고 울부짖는 해바라기, 태양이 떠오르면 저절로 고개를 들고야 마는 연약한 해바라기를 불러본다. 온몸이 너를 향해 있음은 나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는 일. 온통 그리움으로 화자는 하루를 사는 걸까. 혹여 화자를 잊고 산을 넘어간다 할지라도 먼발치에서 빛의 부스러기를 맞이할 슬픔이 보이는 시다. 나는 너의 해바라기이니까. <이소애 시인>
눈빛조차 짜다내장 다 빼낸 뱃속을 소금으로 봉한 채통증을 발라먹고 있다시장 모퉁이물 간 바다 한 자락,갯비린내 풀풀 날리는 햇살 쫓느라물 한 바가지 끼얹자몸을 절였던 바다가 허공 가득 풀린다간을 쳐도 스미지 않는 몸,한 때, 꼬리지느러미로 검푸른 바다 휘감았던 그가더는 상할 것도 없는 짜디짠 고집그 힘으로좌판에 누워 온종일 시장바닥 헤엄치고 있다.△참 맛깔스러운 시다. 좌판에 누워 시장바닥 헤엄치고 있을 간고등어가 나의 마음을 끌고 갔으니 나를 흔들어 놓은 시다. 짭조름한 간고등어는 연탄불에 굽고 있을 어머니 손 냄새에서도 났다. 그 냄새는 어린 시절 햇볕 잘 드는 마루에서 귓밥 제거 할 때, 어머니 몸빼바지에 배 있어 사르르 졸음 속에서 검푸른 바다를 상상하게 하였다. 월급날 신문지에 돌돌 말아 들고 오시는 아버지의 축 늘어진 어깨가 눈에 선하다. 온종일 통증을 발라먹고 산 부모님을 생각나게 하는 시다. 이소애 시인
입으로 토해놓은 辯(변)을 씻을 방법이 있을까내장의 비밀한 나눔과 착취를 거친 便(변)은 어떤지외출하는 변은 서로 같은데하나는 무형이고 하나는 유형이네체면을 위한 가식의 그림자 속에냄새나는 辨(변)과 便(변)은서로가 너무 가여웠다삶이 계속되는 한 인생의 구역질을 맑은 하늘에 쏟으며흙으로 돌아갈 여생의 평화를 기원한다저 便(변)의 근원은 입구의 辯(변)을 우러러보다가끔 저주를 퍼부어대며 진한 향기를 바친다△살아있는 것들의 토사물 중에서 이로운 것은 꿀밖에 없다는 말을 문단 말석에 앉아 들은 적 있다. 그때는 그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아름다운 화음과 칭찬의 말도 이로운 것인데 왜 꿀밖에 없다고 하시는 걸까?시간 좀 지나니 얼핏 이해가 간다. 아름다운 화음도 누군가에게는 소음이 될 수 있고, 칭찬의 말도 상대적인 것이어서 마냥 이롭지만은 않은 듯하다. 설마 꿀이라고 다 이롭기만 할까? 오늘 하루라도 辯(변)을 토하지 말아야겠다. 모처럼 하늘이 맑지 않은가?<김제 김영 시인>
부모 곁을 처음 떠나기숙사에서 대학 다닐 때 보내온내 아버지 엽서 한 장첫째, 남 쉴 때 공부하고둘째, 남 잘 때 공부하고셋째, 남 공부할 때 공부하라. 고내 자식들 상경하여 학교 다닐 적에내가 보낸 엽서 한 장남 쉴 때 함께 쉬고남 잘 때 같이 자고남 공부할 때 그냥 공부 좀 하고 건강하면 된다. 고우리 아이들과 나보통으로 잘 살고 있다.△보통으로 산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남 쉴 때 공부하고 남 잘 때 공부한 이유가 어찌 자식 당대의 성공을 위해 부탁하신 말씀이시겠는가? 아버지 말씀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하여 차곡차곡 내공이 쌓이면, 이젠 남 잘 때 같이 자고, 남 쉴 때 같이 쉬면서 보통으로 살 수 있는 내공이 생기는 것이다. 그 시절 어른들이 견뎌내신 실패의 경험이 축적된 유전자의 힘으로 후손들은 이제야 보통사람의 삶을 누리는 것이다. <김제 김영 시인>
아프리카 별들은 죽어 바다에서 다시 태어난다물보라처럼 솟아오르는 것은 하늘의 영혼동그란 똥 덩어리 하나면 평생을 먹을 수 있는쇠똥구리가 제 몸보다 큰 먹이를 지고서 간다무게를 지탱하기 위해 물구나무서기를 한 채길을 재촉하지만 끝내 모래밭에 갇히고 말았다시지프스처럼 모래 언덕을 오르다 미끄러지고다시 일어서 굴려도 보는데 먹이는 그새 말라버렸다먹이를 짊어지고 있을 때에는 앞을 볼 수 없었던 그는먹이를 버렸을 때 비로소 하늘을 올려다볼 수도사막을 바로 걸을 수도 있게 되었다별들은 바다에 떨어져 새로 태어나고쇠똥구리는 편안한 잠을 청하였다△아프리카의 밤은 온천지가 다 별 밭이다. 낮 동안 하늘을 우러러본 모든 것들이 바다에서 다시 태어나기 때문이다. 주린 배를 밤새 달래는 아이의 눈동자도, 그런 아이를 우두커니 지켜볼 수밖에 없는 유칼립투스 이파리도, 그걸 밤새 채록하는 시인의 눈도 모두 모두 별로 태어나기 때문이다. 목적지를 목전에 두고 끝내 굴러떨어진 쇠똥구리가, 최소한의 먹이조차 말라 비틀어져 버린 쇠똥구리가, 사막을 건너간다. 갈증이 비구름 쪽으로 길을 잡는다. 밤하늘의 별들이 왜 그렇게 그렁거리는지 아프리카는 안다. <김제 김영 시인>
눈을 감고 바라보았다 지렁이의 시간 속에서 두더지의 뾰족한 털이 자라나길 기대하면서 거꾸로 박힌 털을 하나씩 길러내며 역모(逆謀)를 꿈꾸듯 더듬거려보았다 삶을 자꾸만 실험하면서 실패를 반복하면서 어떤 가설도 정설로 받아주지 않는 암실에서 이 실험실의 각성제와 수면제의 틈에서 썩지 않는 화학공식을 깨면서 희미하지만 더듬거리는 손가락들에게 램프를 쥐어준다면 지렁이의 눈에 안대를 씌어준다면 삶도 자꾸 닳아져서 희미해지겠지 살을 닮아가면서 몸의 털들이 일어서며 삶을 살아가겠지 삶이나 살이나 화살을 뒤쫓아가겠지. 두더지의 시간이나 지렁이의 시간이나 텅텅 울리는 암실에서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 텅 빈 교실에서△시를 쓰는 사람은 항상 사물들과 암중모색 중이다.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는 텅 빈 교실에서, 혼자만의 암실에서 고독한 모색을 한다. 어둠에 익숙한 두더지가 되어 역모를 꿈꾸듯, 기존의 시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참신한 시를 꿈꾼다. 그런 시를 무럭무럭 기르고 싶어 한다. 그러나 시에는 정설이 없다. 모든 가설은 그냥 가설인 채 존재할 뿐이다. 훗날, 과거를 토막 내는 시대 안에 하나의 사조로 군말 없이 엮일 뿐이다. 자판을 누르는 손가락 끝에 램프를 켜들고 자꾸 닳아가는 시인이여, 생은 실패를 실패라고 기록하지 않는 법이다. <김제 김영 시인>
저것은 아직 주검이 아닐 것이다.전주 덕진공원 덕진호반에는 붉게 마른 연대들이 고개꺾고 허리 꺾고 팔 다리 툭툭 꺾어 물속으로 서걱서걱 들어가는 중이다.바람 아래무수히 나부대는 한 마당 도리깨질 같다. 한 바탕행진 같다. 무성영화 같다.저것은 물론 죽은 아버지들의 이름이다.물 깊은 바닥 캄캄하게 쌓여 썩을 것이다.거기 또 불 질러새로 한 세상 꽃 피는 법일 것이다.△외롭고 쓸쓸할 때 겨울 연(蓮)을 만나보라. 칼바람에 꺾인 고요와 부러진 영혼이 숨어 있는 무성영화를 볼 것이다. 물속으로 서걱서걱 들어가는 마른 잎맥은 햇볕 한 줌 품고 있어 찬란한 슬픔이 보인다. 겨울 연이 강인한 것은 물 깊은 바닥에서 앙금도 품어 꽃피울 태세를 하기 때문이리. 말라비틀어진 꽃대를 꺾지 말지어다. 주검이 아닌 살아 있는 초록이다. 이소애 시인
가을이 오고 단풍이 물들면가슴 속 숨은 암반수 넘쳐흐른다그대 떠난 날추적추적 비는 내리고, 부르튼 입속으로슬픔을 꿀꺽 삼키던 통증,달력 걸린 못에 고무줄 걸어 첫 표시하고찰랑찰랑 저울 수 헤어보며성냥개비 숫자로 표시한 후긴 손톱 새끼손가락으로 휘휘 저어맘 놓고 마시던 때가 아련하다할머님이 빚었던, 시큼 달큰한 우리쌀우리밀의 농주 한 사발 마실 때면울긋불긋 가을 산으로 물들었다쌀쌀한 늦가을 해질녘에두 눈 붉게 충혈되어, 그대 떠난먼 산 바라보며멍먹한 목구멍으로 들어붓는 술부추전 손으로 집어서우적우적 눈물 섞어 삼키고 있다△농주 한 사발 마시면 상처만 남긴 옛사랑이 떠오른다. 바바리코트 깃을 세우고 부추전 손으로 집어서 또 한 잔 마셔볼까? 늦가을의 풍경은 화사한데 황금 옷을 벗어버린 은행나무 꼭대기 옥탑방이 아슬아슬하게 보인다. 둥지를 떠난 사랑. 그 위태로웠던 사랑은 별리 이후에도 통증만 남는다. 새끼손가락으로 저어서 취하도록 마시고 싶은 농주가 아른거린다. 이소애 시인
퍼렇게 사무치다가노랗게 부끄럽다가홀로 몸 뒤틀며고뇌까지 다 털고혼곤히 철학을 한다△무작정 걸어보고 싶은 가을이다. 목덜미를 스치는 바람은 머플러로 감싸주면 따뜻한 온기로 마음의 문이 열린다. 은행나무에 투사된 시인을 떠올려 본다. 가슴이 시퍼렇게 멍이들 정도의 사무치는 그리움이 마냥 부럽다. 시간이 쌓여 노랗게 물든 추억을 생각하면 부끄럽기도 한 그 사랑이 단풍들었구나. 이젠 소멸의 아픔을 견디어내는 인내가 필요하다. 고통을 통하여 기쁨을 만날 수 있도록 수북하게 쌓인 은행잎에 내 몸무게를 올려 본다. 소멸의 철학을 경험해 보기 위해서다. ·이소애 시인
가을이 오는 길목에서모악산을 오른다진달래 활짝 웃는 봄매미들이 합창하는 여름오색 단풍 아롱진 가을하얀 이불 펴 놓고 손짓하는 겨울철마다 반겨주는 모악산은어머니의 품이다안항 친구들아 올 가을에도모악의 어머니 품을 찾아돈독한 우정을 다지자△바라만 보아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산이다. 시의 힘은 어머니를 사계절로 치장하고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풍경에서 눈물과 웃음과 기쁨 그리고 고통의 모습으로 떠오르는 어머니가 존재한다. 사유의 폭이 경이롭도록 깊다. 금방이라도 내 이름을 불러줄 것 같은 모악산의 바람. 그 바람 품속으로 안기기 위해서 화자는 가을을 등에 짊어지고 간다.<이소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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