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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청장 이건무)은 영ㆍ정조의 어필과 이황의 글씨 등 조선전기 서예작품 20건을 보물로 지정했다고 31일 말했다. 이번에 보물이 된 작품은 영조와 정조 어필 각 3건, 숙종ㆍ효종ㆍ인목왕후 어필 각 1건, 어찰집인 신한첩 2건 등 어필류가 11건이며, 한호(한석봉)ㆍ황기로 필적 각 2건, 이황ㆍ서거정ㆍ성수침ㆍ양사언ㆍ김현성 필적 각 1건 등 명필이 9건이다. 영조어필 '숙빈최씨 사우 제문 원고(淑嬪崔氏祠宇祭文原稿)'는 영조가 1726년 친어머니 숙빈최씨의 생신을 맞아 숙빈묘에 올린 제문의 원고다. 낱장이 아닌 왕실의례용 공첩(空帖)에 직접 쓴 희귀한 예이며,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절절히 나타난다. 16세기 문신 양사언(1517~1584)의 초서 작품은 당나라 저광의(儲光羲)의 오언시 '낙양도(洛陽道)' 5수 가운데 제1수를 쓴 것이다. 자유분방하고 도가적 기풍의 예술세계를 지닌 양사언의 성품과 그가 지향한 초서의 경지를 잘 보여준다. 그의 초서는 미친 듯 써 내려갔다 해서 광초(狂草)라고 한다. 조선후기 명필 이광사의 발문과 조명교의 발문이 붙어 있다. 이번 보물 지정은 문화재청이 2005년 이후 추진 중인 동종(同種) 문화재 일괄공모 사업의 일환이다. 이 사업에 의해 2005년 백자대호(달항아리) 5건, 2006년 초상화 33건, 2007~2008년 옛지도 35건을 보물로 지정하는 등 이번까지 모두 93건의 보물을 지정했다. 문화재청은 이번에 보물로 선정된 문화재의 내용과 상세 사진을 수록한 보고서를 곧 발간하고 내년에는 조선후기 명필을 대상으로 일괄공모 사업을 추진할 예정이다.
19세기 조선 궁중화원인 이형록(李亨祿.1808~?)이 그린 6폭짜리 책가도(冊架圖. 서가를 그린 그림) 병풍이 보존처리를 거쳐 원래 모습을 되찾았다. 국립민속박물관(관장 신광섭)은 이 병풍은 2008년 구입 당시 심한 충해(蟲害. 벌레에 의한 피해)와 구조적 뒤틀림 등으로 화면 손상이 심했고 병풍 자체도 양호하지 못한 상태였지만 10개월에 걸친 과학적 보존 처리를 통해 새롭게 태어났다고 29일 밝혔다. 수리가 끝난 이 병풍은 최근 박물관에서 일반 공개를 시작했다. 아울러 건식 클리닝ㆍ해체ㆍ옛 배접지 제거ㆍ습식 클리닝ㆍ결손부 보강ㆍ배접ㆍ장황 등으로 이뤄지는 보존처리 과정도 함께 보여준다. 박물관은 이와 같은 단계별 전통적 보존처리 방법 외에도 이번 병풍 보존처리에는 "국내 최초로 개발 생산한 인공 열화견(劣化絹)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말했다. 인공 열화견 기술은 "화면 결손부를 보강하는 견직물을 옛 원본의 노화 정도와 비슷한 강도로 약화시켜 주는 기술로, 처리 후 원본과 보강부 사이의 힘의 균형을 맞춰주는 역할을 한다"며 "그동안 인공 열화견은 전부 일본에서 수입했지만, 국립민속박물관 보존과학실은 이를 자체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고 박물관은 덧붙였다. 이 병풍에 대해 한국미술사 전공인 국립광주박물관 이원복 관장은 "최상급 궁중 장식화로 제작 당시의 전통을 잘 보여주며 학계에서도 매우 귀중한 작품"이라고 평가했다고 민속박물관은 전했다.
경북 경주 불국사의 다보탑이 1년만에 해체 수리를 끝내고 말끔하게 새단장했다.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는 29일 오후 불국사에서 다보탑 수리완료 보고회를 열고 그 모습을 일반에게 공개했다. 문화재연구소는 2층 난간부에 배수가 제대로 되지 않아 1층 받침 등이 오염되고 풍화로 인해 훼손이 발생하는 등 보수가 시급해 작년 12월 해체 수리에 들어갔다. 다보탑은 1층 옥개석 이음부에 빗물이 유입돼 생물이 서식하고 박리 및 오염현상이 발생했으며 부재 균열과 부분적인 파손뿐 아니라 부재 연결부가 이완된 상태였다. 이번 해체 수리에서는 3D스캔, 풍화도면 작성 등의 사전 조사 후 2층 사각 난간 및 팔각 난간, 상륜부를 해체해 보존 상태가 좋지 않은 부재 8개를 교체했다. 또 균열 및 박리 부위의 보존처리를 하고 일제강점기에 타설한 콘크리트와 이음부 시멘트 모르타르를 제거한 후 세척 작업을 실시했다. 수리는 상륜부, 팔각난간, 사각난간 등 총 78개의 부재를 해체해 이뤄졌다. 사각난간 배수시설에는 일제때 타설한 콘크리트가 발견돼 정과 드릴 등을 이용한 수작업으로 해체하고 콘크리트를 제거했으며 상륜부의 모르타르도 제거하고 해체 수리가 진행됐다. 풍화, 균열 및 박리 등으로 다시 사용하기에 불가능한 부재 8개는 암석 종류 및 산지 조사를 통해 신석재로 교체했다. 사각난간은 배수시설 보존처리와 부재조립, 연결부 마감 등을 통해 배수시설 원형을 복원하고 상륜부는 보개의 파손된 부분을 신석재로 제작한 뒤 교체했다. 이와 함께 부재 세척과 보존처리가 이뤄졌고 균열부는 접합한 뒤 강화처리도 했다. 다보탑은 1925년 일제강점기에 전면 해체 수리를 하고 1972년에도 2층 하부 사각난간과 상륜부를 보수했으며 작년에 36년만에 다시 수술대에 올랐었다. 배병선 국립문화재연구소 건축문화재연구실장은 "곳곳에 시멘트가 타설돼 있어 시멘트와 철심을 모두 제거했다"면서 "일반인들이 가설 구조물을 통해 2층 수리 부분을 가까이서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내년 설까지 가설 구조물을 철거하지 않을 계획"이라고 말했다.
올 초 국보 제11호 미륵사지석탑 보수정비를 위한 해체조사 과정에서 발견된 사리장엄은 국보 중의 국보로 큰 관심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백제 문화 연구의 새 지평을 열게 됐으며, 익산역사유적지구를 세계유산으로 등재시키기 위한 움직임도 본격화됐다.몇 년째 제자리걸음이었던 전라감영 복원사업은 추진위원회 구성으로 강력한 추진주체는 만들어졌지만, 막대한 예산을 확보해야 한다는 숙제를 안고 있다. 내년 태조 어진 경기전 봉안 600주년을 앞두고 기념사업을 위한 위원회도 구성됐지만, 시기적으로 늦었다는 지적이다.▲ 미륵사지석탑서 사리장엄 출토미륵사 창건 배경 및 발원자, 석탑 건립 시기를 확인해 준 700여점의 미륵사 사리장엄 발견은 무령왕릉 발굴과 능산리 금동대향로 조사 이래 백제지역 최대의 고고학적 성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석탑 조성 내력을 적은 금제사리봉안기(金製舍利奉安記)를 통해 미륵사가 백제 제30대 무왕 시절인 서기 639년에 그 왕후가 창건한 사실이 밝혀졌다. 그러나 왕후에 대한 해석은 분분해 백제 서동왕자와 신라 선화공주로 대표됐던 백제와 신라간 문화교류설은 흔들리게 됐다. 이에 대한 논란은 역사학계는 물론, 국문학계까지 확산돼 전국에서 학술대회 및 세미나 등이 활발하게 개최됐다.또 사리장엄 전북 봉안 추진과 함께 미륵사지유물전시관 국립박물관 승격, 미륵사지와 제석사지, 왕궁리 유적, 무왕릉인 쌍릉, 입점리 고분, 웅포리 고분 등 익산역사유적지구 세계유산 등재 등이 의욕적으로 진행되고 있다.1989년부터 발굴조사만 해오다가 올해 본격적인 정비작업에 들어간 익산 왕궁리 유적에서는 7세기 백제 궁궐의 후원(後苑)과 수로가 발견되기도 했다.▲ 「여지도서」 등 고전 번역 부활조선후기 인문지리지인 「여지도서(輿地圖書)」 번역작업은 8년여의 노력끝에 마무리됐다.1757년부터 1765년 사이에 편찬된 「여지도서」는 「조선왕조실록」 「비변사등록」 「승정원일기」 등 조선시대 대표적 정사(正史)에 버금가는 조선후기 인문지리지로 평가받아왔다. 본문만 200자 원고지 6만매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으로, 2002년 한국학술진흥재단에서 공모한 기초학문육성 인문사회분야에 선정됐으며 총 16억원의 예산이 투입됐다. 변주승 전주대 교수가 연구책임을 맡았다.일본에 의해 쓰여진 책으로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던 「전주부사(全州府史)」 번역도 의미있는 작업이었다.전주역사박물관은 정조대 편찬된 것으로 보이는 「호남읍지」 전라도·전주부편을 영인해 지역학 전문학술지인 「전주학연구」 2집에 수록했다.▲ 전북 정체성 담긴 전시 이어져한국 박물관 개관 100주년을 맞아 전북박물관협의회는 전북의 국보와 보물을 모아 '전북의 명품, 시간의 경계를 넘어'를 개최했다. 이 전시에서는 국보 제123호 왕궁리석탑 출토 금동불과 사리갖춤, 국보 제232호 의안백 이화 개국공신녹권, 보물 제931호 태조 어진 등이 소개됐다.국립전주박물관은 '전북, 전북사람들' '전북 명품의 맥' 등 그 어느해 보다 지역밀착형 전시를 선보였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마한의 역사성과 정체성을 조명한 '마한, 숨쉬는 기록'도 기획했는데, 세계적인 고고학자 사라 넬슨이 방한해 이 전시를 관람했다. 세계동아시아고고학회 회장을 맡고 있는 사라 넬슨은 우리나라 최초의 제사 유적지인 부안 죽막동 제사 유적지에도 들러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권했다.마한과 관련해서는 고창군 아산면 봉덕리 백제시대 마한 분구묘(墳丘墓)에서 지금까지 국내에서 출토된 것 중 가장 완벽한 형태의 금동신발 1켤레가 발굴되기도 했다. 마한식 전통 묘제에서 백제, 중국, 일본 등 4국의 유물이 모두 확인됐으며, 주변이 고인돌 유적지 인근이라 고창이 선사는 물론, 마한 백제시대 중심지였음을 밝혀주는 귀중한 자료가 됐다.▲ 문화재 보호의식 위험수위도내 국보 및 보물 목조문화재가 대부분 화재경보기나 CCTV를 확보하지 않고 있으며 화재보험에도 가입돼 있지 않아 화재에 무방비 상태라는 지적이 이어졌다. 특히 금산사 경내에서 쓰레기를 태우거나 객사나 경기전에서 시민이나 작업 인부들이 담배를 피우는 장면 등이 목격되면서 문화재 보호 의식이 위험수위를 넘어서고 있다.
흔히 중국의 서예는 크게 두 조류로 분류한다. 하나는 왕희지를 중심으로 한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안진경을 중심으로 한 것이다. 이것은 전통적인 서와 현대적인 서라는 기준에서 설정된 개념이지만 최근 이러한 개념설정이 다소 수정되었다. 기존에는 왕희지를 전통파로 확정하고 안진경을 혁신파로 규정한 데에서 안진경이 반왕희지의 서예적 성향을 보이고 있다고 보았으나, 안진경이 결코 왕희지를 반하지 않았다는 점이 확인되면서 개념 수정이 불가피하게 된 것이다. 안진경은 전통서예에 대한 혁식이 분명하지만 결코 왕희지를 반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를 초월한 서예가로 인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전통과 혁신의 개념에서 혁신의 입장에 선 안진경은 후대에 끼친 영향이 지대하다. 그만큼 서예사가들은 중국서예의 조류를 바꿀 만큼 안진경의 서예적 위치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초당의 전형주의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서예문화를 형성하고, 또 인문학에서 성대하게 꽃을 발하는 북송대의 서예문화가 안진경과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주목한 결과이다. 거기에는 그의 높은 인품과 충절이 한 몫을 하였다.'신당서'에 안진경의 전기가 보인다. 안진경은 안사고(顔師古)의 5세 종손(從孫)으로 자가 청신(淸臣)이며, 어렸을 때는 선문자(羨門子)라 하였고, 호는 응방(應方)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훗날 세상사람들은 그의 사람됨을 존경하여 성명을 부르지 않고 다만 노공(魯公)이라 호칭하고 있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모친의 슬하에서 직접 훈도를 받아 26세 때 진사에 급제하여 평원태수(平原太守)에 올랐다. 장안 출신으로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였는데, 당조의 재건을 위해 헌신하다 덕종(德宗) 정원(貞元) 원년(785) 8월 정적 이희열(李希烈)에 의해 채주(蔡州 : 河南省) 용흥사(龍興寺)에서 액살(縊殺)되었다. 그때 나이 77세였다.그의 글씨는 대부분 비에 남아 있으나 이외에도 임금에게 올린 세 개의 표(表)와 세 편의 초고 즉 삼표(三表)와 삼고(三稿)가 유명하다. 금년 여름, 필자는 경주에서 발견된 신라시대 무장사비의 복원이라는 과제를 맡아 왕희지 글씨를 탐색하기 위하여 서안(西安)의 비림(碑林)을 방문한 적이 있다. 이때 왕희지의 '집자성교서' 뿐만 아니라 안진경의 '안근례비'와 '안씨가묘비'를 직접 목도하였다. 그 때 석경을 비롯하여 왕희지류의 글씨들이 대부분 정교한 소자였으나, 안진경의 글씨들은 활기찬 대자서로 쓰여져 웅혼한 기상과 고풍스런 면모가 참으로 아름다워 닳아진 비면을 어루만지며 감탄하였다.여기에 소개하는 '안씨가묘비'는 안진경이 72세 때 쓴 최만년의 글씨이다. 사면에 글씨가 새겨져 있어 '사면비'라고도 지칭되며, 전액은 이양빙(李陽?)이 썼다. 이 비는 이전에 쓰여진 '안근례비'나 '다보탑비'의 정연한 세련미가 한껏 성숙되어 고풍스럽고 소박한 풍격을 자아내고 있다. 원필의 맛을 살려 주경한 필획을 구사하고 있는데 대자서로 쓰여진 '마고산선단기(麻姑山仙壇記)'와 더불어 안진경 후기 해서의 대표작으로 불린다.참고로 구양순이 76세 때 쓴 '구성궁예천명'과 안진경이 72세 때 쓴 '안씨가묘비'를 비교해보면 그 심미적 특징을 쉽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왕희지를 전형으로 삼은 구양순과 이를 탈피하여 독자적 서의 경지를 개척한 안진경은 모두 당대를 대표하는 작가들이지만 서로 다른 필세를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이은혁(사단법인 한국서예문화연구회 이사장)
1930년대 '모던 경성'의 최고 번화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지도가 나왔다. 여환진(연세대 건축공학과 석사과정)씨는 한동수ㆍ도미이 마사우라 한양대 건축학과 교수와 함께 일본인 상권인 혼마치(本町.지금의 충무로)와 조선인 상권인 종로 거리를 표시한 길이 40m, 폭 2m 크기의 지도를 최근 완성했다고 28일 말했다. 혼마치는 신세계백화점 본점(옛 미쓰코시백화점)부터 그랜드앰배서더호텔까지 2km 구간이며, 종로는 세종로 일민미술관(옛 동아일보)부터 동대문까지 2.9km 구간이다. 여씨는 "도시의 특정 시기를 복원하는 작업이 이제까지 없었는데 우리가 어느 시기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그는 고서점에서 당시 서울 전화번호부를 구해 상점 주소를 확인했고, '경성상공명록' 등 70여 권의 책과 일본인이 남긴 지도를 참조했다. 또 당시 신문을 일일이 뒤져 광고에 나오는 상점을 확인했다. 신문 화재 기사에 나오는 주소까지 꼼꼼하게 챙기기도 했다. 1년이 넘게 작업하면서 3천 개 넘는 상점을 찾아냈다. 이름 있는 상점만 수록한 것이 아니라 이발소부터 작은 담뱃가게까지 거의 모든 상점을 지도에 실었다. 또 한 자리에서 상호가 바뀐 과정을 모두 기록해 30년대의 변화상을 쉽게 볼 수 있게 했다. 여씨는 "종로는 아직 자본주의에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1년에 2~3번씩 바뀌는 곳도 있었지만, 혼마치는 장사가 잘돼서인지 상점이 잘 변하지 않았다"면서 "혼마치는 상호가 있지만 종로는 간판도 없이 장사하는 경우가 많아 조사하기 힘들었다"고 말했다. 최고 번화가였던 혼마치에는 중국인을 비롯해 러시아인, 터키인, 이탈리아인, 영국인 등이 차린 상점도 있었다. 여씨는 "당시 경성은 생각보다 국제적 모습을 갖췄다. 심지어 카페 여급 중에 영국인이나 독일인도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종로는 혼마치에 비해 쇠락했지만 1930년대 들어 콘크리트로 된 건물이 많이 지어져 외형적으로는 만만치 않았다"면서 "다만, 전 세계의 물건을 팔던 혼마치에 비해 내용 면에서는 밀렸다"고 설명했다. 여씨는 완성한 지도를 내년에 일본과 한국에서 전시할 계획이다.
일본 나라현을 방문한 지난 2일 헤이조쿄(平城京) 유적지의 다이고쿠텐(大極殿) 복원 사업이 한창이었다. 헤이조쿄는 710년 일본 최초의 율령국가가 나라현에 천도한 뒤 세운 궁. 다이고쿠텐은 헤이조쿄의 중심 건물이다. 2010년 헤이조 천도 1300년을 기념하는 '헤이조(平城) 천도(遷都) 1300년제'를 준비하고 있는 일본 나라현은 내년 3월 다이고쿠텐의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밝혔다."헤이조궁(平城宮) 유적지는 일본의 국가특별사적지이자 세계문화유산입니다. 헤이조궁 유적지 복원사업은 과거 나라의 수도가 있었던 곳이니 만큼 국민적·국가적 사업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현재 진행 중인 다이고쿠텐 복원도 국가사업으로 지정돼 추진되고 있죠. 우리의 목표는 정비와 복원을 통해 헤이조궁 유적지를 국영공원으로 만드는 것입니다."'헤이조 천도 1300년제' 추진위원장을 맡고 있는 나라현 지역진흥부 문화관광국 이치류 시게루 국장은 "헤이조궁 유적지 복원사업이 국가사업으로 가능했던 것은 나라가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며 "아직 복원이 이뤄지지 않고 있는 곳은 계속해서 국가사업으로 정비해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헤이조궁 유적지 복원사업은 50년에 걸쳐 진행돼 왔고, 국영공원으로 정비되기까지 약 30여년은 더 걸릴 것으로 보입니다. 복원사업은 오랜 시간과 노력, 막대한 예산이 필요한 작업이지만 멀리 내다보고 진행하고 있습니다."그러나 1998년까지 일부가 복원되고 향후 완전복원될 예정이었던 주작대로는 더이상 복원 계획이 없다. 이치류 국장은 "나라현 지사가 바뀌고 예산이 1/3로 줄어들면서 주작대로는 일부만 복원하기로 했다"며 "다이고쿠텐 주변의 회랑은 앞으로 복원할 계획이 있다"고 덧붙였다."'헤이조 천도 1300년제'는 1300년의 긴 역사 속에서 100년에 1번 있는 기회입니다. 이 행사를 위해 10년 전부터 나라현, 나라시, 나라현내 민간기업 등이 참여해 기념협회를 만들어 준비해 왔습니다. 당시 협회를 만들면서 나라현에서 60억엔, 나라시에서 20억엔, 민간기업에서 20억엔을 출자했습니다."이치류 국장은 "이번 행사를 통해 헤이조궁 유적지 방문 관광객은 260만명, 나라현 전체로는 1200∼1300만명의 관광객을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내년 '2010 대백제전'을 여는 충청남도와 협력하기로 했습니다. 원래 나라는 경주와 자매도시지만, 아주 옛날 백제와 아스카와의 관계를 고려해서 충남과 우호교류도시로서 협정을 맺었습니다. 한국인들을 위한 팸플릿도 따로 만들었는데, 한국과 중국 등 일본을 둘러싼 주변국과 관련된 여러 역사가 표시됐습니다."이치류 국장은 "나라현에서 이러한 팸플릿을 만들게 된 것은 나라의 문화가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닌, 중국 대륙으로부터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전해진 글로벌한 문화라는 것을 소개하기 위해서"라며 "민주당 정권도 그동안 미국에만 의존해 왔다면 앞으로는 동아시아 나라들과 긴밀하게 협력해 나가고자 한다"고 강조했다.
일본의 옛 도읍 헤이조쿄(平城京)를 만나는 '헤이조(平城) 천도 1300년제'는 헤이조 천도 1300년을 맞는 2010년 헤이조궁(平城宮) 유적지를 중심으로 4월 24일부터 11월 7일까지 7개월 여동안 펼쳐진다.축제를 개막하는 4월 24일은 도읍지를 나라로 천도하겠다고 천명한 날. 1300년제는 봄철·여름철·가을철 등 시즌으로 나눠 진행되는데, 4월 후반에 '다이고쿠텐 완성 기념식전'이, 10월 전반에 '헤이조 천도 1300년 기념축전'이 열린다. 나라현은 지형적으로 남북으로 길기 때문에 지역마다 관광시즌이 달라 1년 가까이 이벤트를 진행하는 것에 대한 주민들의 거부감은 별로 없다.헤이조궁 유적지는 다이고쿠텐 정전·앞뜰 및 남문 광장, 만남의 광장, 정문입구 광장, 스자쿠몬 광장, 도인정원 광장 등 다섯개의 광장과 유구전시관, 헤이조궁 유적자료관, 헤이조쿄 생활체험관, 헤이조쿄 역사관 등 네 개의 전시 및 체험관으로 크게 구성된다. 1300년제 기간 동안 이 곳은 축제 현장이 된다.1300년제 마스코트로는 나라의 상징 사슴과 불교 승려의 이미지를 합쳐 만든 '센토군(遷都君)'이 있다. '센토쿤'을 활용한 문화상품은 일본에서 10억엔 정도가 팔리고 있을 정도로 인기가 많다.이 기간 한국, 중국, 일본의 지방정부를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지방정부회합'도 개최된다. 현재 동아시아 19개 도시가 참가 신청을 했는데, 전북에서는 참가 도시가 없다.나라현은 '헤이조 천도 1300년제'에 맞춰 방문할 관광객들을 위해 나라에 있는 3개의 세계유산과 6개의 명소를 중심으로 당일치기, 1박2일, 2박3일 등 체류일정에 따른 추천 모범코스도 개발해 놓았다.
일본의 대표적인 경제 및 사업, 쇼핑도시 오사카(大阪)와 수많은 문화유적과 다양한 관광자원을 갖고 있는 교토(京都)와의 도시경쟁력을 극복하기 위해 나라(奈良)시가 선택한 것은 고대 도읍지라는 것. 일본의 정신문화의 출발이라는 타이틀로 접근하면서 도시가 가지고 있는 역사·문화자원을 최대한 근대화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특히 나라현에서는 헤이조(平城) 천도 1300년이 되는 2010년에 대규모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있다. 이를 위해 헤이조쿄(平城宮)와 다이고쿠텐(大極殿)을 복원해 과거의 유물을 현재에 조명하고 미래 문화산업의 동력으로 삼는 데 매진하고 있다.▲ 황권으로 형성된 불교문화나라(奈良)는 710년 일본의 도읍지로 정해진 이래 784년 교토 부근의 나가오카 궁(長岡宮)으로 도읍이 옮겨질 때까지 고대 일본의 중심지 역할을 한 도시이다. 수도를 나라로 옮긴 사람은 겐메이(元明) 천황으로, 당나라의 수도 장안을 본떠 만든 헤이조쿄(平城宮)을 거처로 삼았다.이 때를 흔히 나라시대라고 하는데, 이 시기에 일본은 천황과 황족에게 모든 권력과 부가 집중되는 중앙집권적 국가체계를 이룩했다. 이를 기반으로 형성된 융성한 문화를 덴표(天平)문화라고 하며, 도다이지(東大寺), 고후쿠지(興福寺) 등 자신의 권력을 과시할 만한 거대한 불사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강력한 불교세력과 결탁한 귀족세력을 차단하기 위해 간무(桓武) 천황은 교토로 천도하면서 큰 절의 교토 이주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로써 나라는 교토에 수도의 자리는 내주었지만 종교적 색채가 강한 도시로 탈바꿈되었다.▲ 나라시대 헤이죠쿄(平城京) 복원헤이조쿄 유적은 면적 120ha, 동서 1.3㎞, 남북 1㎞에 달하는 거대한 궁이다. 궁궐유적지로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곳이어서 일본의 특별사적지이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 유적지는 1951년 유적지 인근에 설립된 나라문화재연구소의 헤이조쿄 유적조사부에서 발굴조사를 전담해오고 있다. 발굴조사가 마무리된 지역은 당시의 건축공법을 사용해 복원공사를 진행했다.대표적인 복원 건축물은 헤이조쿄 북쪽에 자리 잡은 스자쿠몬(朱雀門). 이 주작문은 유구(遺構)를 그대로 놓아두고 그 위를 1m 정도 흙으로 덮은 뒤 건물을 세운다는 점이 특이하다. 이유는 세월이 지나 새로 지어진 건축물은 사라지더라도 원래 건축물이 있던 자리는 남겨두기 위해서란다.이곳의 또 다른 복원 건축물은 헤이죠쿄 동쪽에 있는 도인 테이엔(東院 庭園). 이 정원 역시 주작문 복원과 마찬가지로 정원 원형을 보존하기 위해 다시 묻었고, 그 위에 연못과 건물을 만들었다고 한다. 새로 복원된 정원은 일본의 전통적인 정원 설계 원형을 그대로 복원했다. 따라서 이곳을 찾는 관람객들은 잠시나마 덴표시대의 귀족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로 고풍스런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한편 헤이죠쿄 유적지 내에는 국가행사 및 외국사절단을 맞이하는 의식이 거행되었던 다이고쿠덴(大極殿) 복원공사가 한창이다. 이 다이고쿠텐은 천도 1300주년 기념식이 진행될 2010년 4월 24일 이전에 복원을 마무리할 계획이라고 한다.▲ 시민에게 돌려주는 정비·복원사업헤이죠쿄 유적지 복원사업은 그 목적이 신선하다. 유적지 발굴조사를 통해 건물을 복원하여 과거 영광을 재현하는데 목적을 둔 것이 아니라 결국 시민에게 되돌려 주기 위한 사업이라는 것. 그래서인지 나라현 지역주민들도 복원사업에 적극적이다.원래 이 유적지는 경작지로 이용되던 곳이었다. 하지만 개인적 이익보다는 대의적 차원의 이익을 위해 국가에게 무상으로 양도한 것이다.이러한 내용은 현재 국내 대부분의 지자체에서 추진 중인 유적지 정비·복원사업에 던지는 시사점이 크다. 그간 정비·복원 초기 단계에서는 지역주민의 의사가 배제됨으로써 지역주민들의 적지 않은 희생은 물론 지역주민과 마찰을 일으켜 중간에 중단되거나 철회되는 사태가 발생되기도 했다. 결국 유적지 정비·복원사업은 시민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문화유적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 시민들의 고통해결 없이는 세계인에게 내놓을 수 있는 역사 문화도시로 자리매김 할 수 없다. 따라서 지자체에서는 전문가의 의견을 수렴해 역사성과 진정성이라는 실익을 챙겨야 하며, 더불어 시민과 공유하는 시스템 정립도 필요하다.지역주민 역시 유적지정비·복원에 대한 심도 깊은 이해와 관심이 필요하며, 때로는 과감한 희생도 필요하다. 개인적인 이해관계에 대한 관심에서 미래에 투자하는 관심이 절실한 때이다.▲ 역사성이 담긴 전주의 복원사업한 장소에 부여된 특정의 기능과 의미가 시대를 관통하여 지속될 때 이를 그 장소의 역사성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나라현의 헤이죠쿄 유적지 정비·복원이 이러한 맥락에 있다. 발굴조사를 통해 헤이죠쿄의 역사성을 찾고, 이를 토대로 역사복원을 시도하여 궁극적으로는 시민을 위한 국영공원화 하는 것. 이를 위해 현(縣)·시(市)·민(民)이 합심해 복원의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가고 있다. 관에서는 시민을 위한 공간조성이라는 복원에 대한 명확한 원칙과 장기적인 관점에서 철저한 검증을 통한 복원을 꿈꾸고 있다. 이에 지역주민은 스스로 정비·복원사업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해 유적지 보존에 앞장서고 있다.현재 전주시에서는 전라감영과 전주부성 4대문 복원사업을 수행하고 있다. 수많은 논의 절차를 거쳤지만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란 비난을 면치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단기간에 성과물을 내놓을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다. 잘못된 복원은 전라감영과 전주부성 4대문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역사의 단절을 가져올 뿐이다.단순히 조선시대 감영 건축물을 재현해 놓았다고 해서 감영자체가 가지고 있는 상징성까지 복원된 것이 아니다. 역사문화적 기억에서 가치를 발견하고 구체화하는 과정으로 전주다움을 만들어가야 한다. 따라서 헤이죠쿄 복원사업처럼 미래지향적인 복원 방향도 생각해 볼 일이다. /일본 나라=최우중 문화전문객원기자
전주천은 전주 동남쪽 20㎞ 지점 노령산맥 분수령인 임실군 관촌면 슬치에서 발원하고 있다. 완주군 상관면을 거쳐 전주의 동남쪽에서 북서쪽으로 시가지를 관통하며 흐른다.인류가 강을 끼고 문명을 발전해왔듯 전주시의 취락형성도 전주천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다리는 하천 양쪽 통행을 목적으로 가설된다. 전주천의 다리도 당초 목교(木橋)나 섶다리 형태였다. 전주천 최초의 콘크리트 다리는 1929년 가설된 전주교(현 싸전다리)와 완산교였다. 이 두다리는 1936년 전주천을 넘쳐 전주시내를 덮친 대홍수에 완산교는 유실되고 전주교만 살아남았다.이 두 다리외에 1900년대 초까지 중요한 구실을 했던 다리가 남천교(南川橋)다. 현재 전주시 교동에서 남원에 가기 위해선 꼭 건너야 했던 다리였다. 1753년 홍수로 유실된 것을 1790년 다시 가설했다고 기록됐다.남천교는 단순한 다리가 아니라 하나의 예술작품이라고 부를 만큼 아름다운 석교(石橋)였다. 5칸의 홍예(紅霓) 즉 다섯개의 무지개형 아치로 가설돼 주민들은 '안경다리'라고 불렀다. 또 다리위에는 남쪽하늘을 우러러 보는 석각(石刻)의 용두(龍頭)를 세웠다. 다리 전면에 있는 승암산(僧巖山)이 화산(火山)이기 때문에 부중에 화재가 자주 일어났는데 이를 예방하기 위한 '액막이'로 설치한 것이다. (이봉섭著 '전북백년')남천교는 이후 여러차례 홍수를 견디지 못하고 유실된뒤 조선조말 평교형태로 가설됐으나 계속되는 물난리로 다시 도괴됐다. 1957년 콘크리트 교량으로 가설될 때 까지는 다리가 없었다. 이 다리도 안전 위험판정을 받아 지난해 새로운 다리 가설공사에 들어갔다.전주천 교량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던 남천교가 어제 개통식을 갖고 새로운 모습을 선보였다. 총 125억원의 사업비를 들여 옛 오룡홍교 형식을 살린 형태로 지어졌으며, 다리위에 길이 27.5m, 폭 4.8m, 높이 6.5m 규모의 한옥누각을 올려 전통미를 한껏 살렸다. 새로 가설된 남천교가 전주 한옥지구와 연결된 새로운 명물로 사랑받길 기대한다./박인환 주필
익산역사유적지구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2004년 익산이 공주·부여·경주와 함께 고도(古都)로 지정되면서 부터. 하지만 올 1월 미륵사지석탑에서 금제사리봉안기 등 700여점의 사리장엄이 출토되면서 학계는 물론, 대중적으로도 큰 관심을 끌게 됐다.이와 함께 익산역사유적지구를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시키기 위한 노력들이 구체화됐다. 특히 그동안 고도와 문화유산 지정 등으로 사유권 침해 등 경제적인 측면에서 부정적이었던 일부 지역 주민들이 사리장엄 출토로 백제 왕도로서 익산에 대한 자긍심을 느끼게 되면서 세계유산 등재 여론이 확산됐다.최근 문화재청이 익산역사유적지구를 비롯 총 7개에 대한 세계유산 잠정목록 등재 신청서를 외교통상부를 통해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 보내겠다고 밝히면서 세계유산 등재에 대한 기대는 더욱 커졌다. 세계유산 등재 신청은 잠정목록에 오른 뒤 1년의 유예기간을 거쳐야만 신청이 가능하기 때문.세계유산 잠정목록 등재는 특별한 하자가 없으면 이름을 올리는 데 문제가 없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익산역사유적지구는 세계유산 등재에 한 발 더 가까이 다가섰다.
1962년 제정 이후 단일법제 체제를 유지한 문화재보호법은 문화재 보호에 관한 사항 전반을 관장한다. 정부 조직 중 문화재청은 이 법률을 존립 기반으로 삼는다. 하지만 시대가 흐르면서 관련 업무가 폭증함에 따라 문화재보호법이 3개 법률로 쪼개진다. 문화재청은 24일 발표한 '2010년도 업무추진계획'을 통해 현행 문화재보호법이 "1962년 제정 이후 34회에 걸친 개정으로 입법체계가 복잡ㆍ난해해진 데다, 보호대상 문화재가 대폭 증대하는 등 행정환경이 변화함에 따라 이를 3개 법률로 나누기로 했다"면서 이를 위한 "'문화재보호법 전부 개정법률(안)'이 국회 상임위를 통과한 상태"라고 말했다. 개정안이 통과되면 현행 문화재보호법은 '문화재보호법'(104개 조문)과 '매장문화재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7장 38조문), 그리고 '문화재 수리 등에 관한 법률'(7장 62조문)로 분할되며, 그에 따라 문화재청은 각 법률에 대한 하위법령 제정 등의 후속조치에 착수한다. 개정 문화재보호법에서는 비지정 문화재에 대한 기초조사 제도 도입과 화재 및 재난ㆍ도난 예방 등의 시책수립에 관한 규정, 국외소재 문화재보호 및 환수 정책 추진 규정 등을 담게 된다. 또, 매장문화재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은 문화재 보존조치에 따른 해당 토지의 매입근거를 신설하고 매장문화재 조사기관 등록제도 도입 등의 내용을 포함하며, 문화재 수리 등에 관한 법률에서는 문화재수리 의무감리제도를 규정하게 된다. 문화재청은 또한 "문화재 관련 각종 영상 및 사진자료 통합해 관리하고, 문화재 현장의 체계적 기록화 작업을 통해 기록유산 및 영상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내년에는 헤리티지 채널을 구축하기로 했다. 이에서 생산하는 콘텐츠 중에서 고화질 영상물은 지역케이블방송 채널이나 기존 프로그램 채널(아리랑, KTV 등 PP)을 통해 내년 상반기에 방영하기 시작하며, 인터넷 포맷 영상물은 네이버 등의 국내 포털과 YouTube, My Space 등의 글로벌 영상네트워크를 통해 배포하기로 했다. 더불어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및 보존강화를 위해 내년 7월 브라질에서 열리는 유네스코 세계유산회의에서 '한국의 역사마을(양동ㆍ하회마을)'을 세계유산에 등재하도록 하며, 익산 역사유적지구와 대곡천 암각화군을 비롯한 9건은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등재한다. 일성록에 대한 세계기록유산 등재 신청서는 3월에 제출되며, '가곡'과 '대목장' 등은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대표목록에 추가등재를 추진한다.
불국사 다보탑이 해체 수리에 들어간 지 1년만에 수리를 마쳤다. 훼손이 심했던 2층 사각난간과 팔각난간, 상륜부에 대한 수리가 이뤄졌다. 탑을 일부 해체한 다음 방수처리를 하고, 균열이 일어난 부위는 접착ㆍ강화처리를 했다. 탑 내부에서 발견된 콘크리트가 빗물을 스며들게 한다는 판단으로 콘크리트를 제거했다. 다보탑은 1925년 전면 해체수리가 이뤄지고 1972년에도 2층 하부 사각난간과 상륜부를 보수했으나 풍화 등으로 인해 내부로 빗물이 침투하고 균열현상이 일어나 36년만에 수술대에 올랐었다. 국립문화재연구소 경주석탑보수정비사업단은 29일 오후 2시 경주 불국사 현장에서 다보탑 수리 완료 보고회를 개최하고 다보탑을 공개한다.
서울성곽의 내부 지역인 사대문 안은 경주처럼 고도(古都)라는 관점에서 문화재 보존을 염두에 둔 개발이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문화재위원회는 지난 18일 매장문화재 분과(위원장 지건길) 소속 전 위원과 사적ㆍ건조물ㆍ세계유산의 3개 분과위원장이 참석한 가운데 회의를 열고, 사대문 안 문화재보존 문제에 대해 제반 현안을 논의한 결과 "사대문 안은 고도"라는 데 인식을 같이했다고 회의를 주재한 지건길 위원장이 24일 말했다. 이에 따라 문화재위원회는 사대문 안의 건축행위에 필요한 문화재 조사와 보존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이 문제를 전담할 '소위원회'를 별도로 두기로 했다. 지 위원장은 "같은 사대문 안이라고 하더라도 지금 종로구는 부족하나마 전문가 입회 조사나 사전발굴조사가 이뤄지는 데 반해, 중구 지역은 이런 문화재 조사 절차도 없이 대규모 공사가 진행 중"이라면서 "이런 주먹구구식 문화재 행정을 지양해, 어떤 원칙이나 가이드라인을 확실히 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예컨대 사대문 안 모든 건축행위에 대해서는 반드시 사전 문화재조사를 의무화하는 방안 등을 앞으로 구성될 소위에서 정할 것으로 예상된다. 소위원회에는 여러 분야 전문가가 고루 참여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회의는 서울시 신청사 부지와 인근 청진동 피맛골 등지의 건설현장에서 조선시대 유적과 유물이 쏟아지고, 그 보존 문제가 심각히 대두함에 따라 지건길 위원장 요청으로 마련됐다. 한편, 이날 문화재위 회의는 서울시 신청사 건설 구간 중 조선시대 관공서 터와 무기류가 다량으로 발굴된 지역만큼은 보존 방침이 확정될 때까지는 어떠한 공사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서울시 신청사는 발굴 전문가 입회 아래 공사를 진행하다가 일부 구간에서 유적과 유물이 발견돼 이 지역에 대해서는 본격 발굴조사가 진행됐으며, 그에 따라 이곳은 공사가 중단됐다. 이와 관련해 서울시 관계자는 "그 유적을 (서울시가) 훼손하거나 없앨 생각은 없으며, 신청사 지하에 조성될 서울역사갤러리 공간에 그대로 보존할 계획을 강구 중"이라면서 "다만, 일단은 (유적을) 다른 곳에 이전했다가 다시 옮겨와야 한다"고 말했다.
손과정(648?~703?)의 자는 건례(虔禮)이며 부양(富陽 절강성) 사람이다. 그에 관한 전기는 보이지 않고 여러 서론에 단편으로 언급되어 있어 그 대략만을 추정할 수 있다. 40세에 벼슬하여 우위주조참군과 솔부록사참군(率府錄事參軍)에까지 이르렀으나 참언으로 물러나 빈곤하게 살다가 낙양 식업리(植業里)의 객사에서 죽었다. 진자앙(陳子昻)이 묘지를 썼다.고전을 좋아하고 문학적 명성도 있었으나 특히 초서를 잘 썼다. 이왕(二王)을 배워 임모에 뛰어난 기량을 발휘하였는데, 당대의 서론가 장회관(張懷瓘)은 「서단」에서 손과정의 글씨를 신(神)·묘(妙)·능(能) 3품 가운데 능품에 배열하고 "儁拔剛斷 尙異好奇"라고 평하였다. 이왕의 글씨를 배워 힘이 넘치는 남성적인 글씨를 구사하였으며, 글씨에 기이한 풍도가 깃들어 있음을 말한 것이다. 그리고는 "왕소종(王紹宗)과 친하게 지냈는데 그의 글씨는 지나치게 느리게 써서 느슨한 폐단이 있었고, 손과정은 늘 급하게 써서 버리곤 하였다. 이에 왕소종의 너그러움(寬)과 손과정의 사나움(猛)을 중화하면 좋을 것이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그 가운데 특히 '少功用有天材'라고 평한 구절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손과정이 천재성을 보이며 힘써 연습하지 않아도 금새 일정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말한다.일반적으로 공부에서 천재설과 장인설을 일컫는데, 대부분의 경우 장인설을 높이 평가한다. 천재가 쉽게 일가를 이루는 것보다 평범한 사람이 오랫동안 공부하여 마침내 깨달은 뒤 뛰어난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 보다 드라마틱하기 때문일 것이다. 장회관의 말대로 손과정은 천재적인 재능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정작 손과정은 자신의 천재성을 꾸준한 노력과 체계적인 학습을 통해 발현했다고 토로하고 있다. 이렇게 결실을 맺은 「서보」는 그의 문재과 필재를 동시에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서품이다.손과정이 직접 글을 지어 초서로 쓴 「서보」는 초서에 관한 의견을 진술한 것으로 시작한다. 변려문의 형식으로 작성된 글은 왕희지를 전형으로 삼고, 위진 이래의 능서가들을 품제하면서 서예술의 가치 및 학서이념을 논하였다. 특히 창작론으로 제시한 오합오괴(五合五乖)는 매우 유명하여 일찍이 추사 김정희도 작품으로 써서 남긴 바 있으며, 이외에도 집사용전(執使用轉), 삼시삼변(三時三變)의 설을 통하여 작가와 운필의 관계를 설명하였다. 「서보」의 글씨에 대하여 당대에는 천편일률적이라서 변화가 적고 운필이 너무 빠른 단점이 있다고 폄하하고 있으나, 북송 이후에는 초서의 전범으로 존중되었다. 예컨대 미불은 당대의 초서 중 이왕의 법을 회득(會得)했다는 점에서는 손과정을 앞서는 자가 없다고 추켜세웠다. 이후 왕희지의 「십칠첩(十七帖)」과 더불어 초서 학습의 지남서로 지칭되었다. 지면 관계상 앞서 언급한 오합오괴 중에 오합(五合)만을 여기에 소개한다."늘 기쁜 마음으로 여유를 가지고 힘씀이 '一合'이요, 민감한 감수성으로 두루 아는 것이 '二合'이요, 좋은 날씨에 원기가 풍부한 것이 '三合'이요, 종이와 먹이 서로 발하는 것이 '四合'이요, 우연히 쓰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 '五合'이다." (一時而書, 有乖有合, 合則流媚, 乖則彫疏. 略言其由, 各有其五. 神怡務閑, 一合也; 感惠徇知, 二合也; 時和氣潤, 三合也; 紙墨相發, 四合也; 偶然欲書, 五合也.) /이은혁(사단법인 한국서예문화연구회 이사장)
문화재청(청장 이건무)은 고양 행주성당과 강릉 임당동성당 등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근대 종교 건축물과 일제강점기 민간회사 사택을 국가지정문화재인 등록문화재로 예고했다고 21일 밝혔다. 행주성당은 1909년 지금의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주외동에 세웠다가 1928년 인근에 옮겨 지으면서 기존 자재를 대부분 재사용했고 1949년에 증축하면서 기록한 자료도 보존돼 있다. 특히 건물의 목조 뼈대는 최초 건립 부분과 증축 부분이 잘 남아있어 성공회 강화성당(사적 제424호)과 함께 대표적인 한식 목조 건축물로 평가된다. 1955년에 지은 강릉 임당동성당은 뾰족한 종탑과 지붕장식 등 고딕성당의 건축기법을 정교하고 세련되게 구사한 건물이다. 이들 성당과 함께 등록문화재로 예고된 동해 동부(구 삼척개발) 사택 및 합숙소는 1937년에 지어진 단층 목조 건축물로 기혼자 숙소와 미혼자 숙소 등 모두 4동으로 구성됐다. 내부 복도형 서양식에 온돌을 사용한 절충형 양식으로 한국 근대 주거사의 중요한 자료라고 문화재청은 설명했다.
"가장 큰 고민은 사적 공간을 어떻게 하면 시민들을 위한 공간으로 활성화시킬 수 있을까입니다. 사적지 관리나 보조 정도였다면, 굳이 전문학예직을 소장으로 뽑을 필요가 없었겠죠."지난 4월 강원감영 사적지 관리소장으로 임명된 이진형 소장은 "강원감영을 활용한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 학예직 소장의 의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현재 강원감영에서 진행되고 있는 프로그램은 다례·예절교육 등 시민단체와 연계한 프로그램 정도. 일제시대 감영 관련 유리 원판 사진들을 상설전시하기도 하고 수문장 교대식을 진행하고는 있지만, 차별성이 없다고 분석했다."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것은 감영에 대한 역사교실 프로그램입니다. 해마다 가을에 열리는 '강원감영문화제'의 축제 전담 법인인 감영문화제위원회와 감영문화학교를 만들자는 의견을 나누고 있습니다. 아직 예산이 확정되지는 않았지만, 시에서도 관심이 많기 때문에 내년부터는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이소장은 "2차 복원을 앞두고 콘텐츠 개발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며 "강원감영과 관련된 기록들은 많이 남아있는 편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소스를 찾고 스토리텔링 과정을 거쳐 일반인들이 흥미를 가질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예를 들어 감영에서 검시하고 사건을 해결하는 '감영 CSI'나 감영의 교육 프로그램을 패스하면 '선비자격증'을 주는 것도 재밌을 것 같다"며 "현재 관찰사를 비롯해 강원감영과 관련된 인물도 정리하고 있다"고 덧붙였다.그는 "감영이 있는 도시간, 혹은 감영 전문연구자들의 교류도 필요한 것 같다"며 곧 전주도 방문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전주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원주 역시 역사도시입니다. 감영이 500년 동안 존재했던 조선시대 지방정치의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통일신라시대 5소경 중 유일하게 한강이북지역에 있었던 역사도시입니다. 시민들도 이러한 역사에 대해 의식이 있었지만, 감영을 빼앗기면서 사라지게 된 것 같습니다."1990년대부터 연세대 근대한국학연구소를 통해 원주학을 제창해 온 오영교 연세대 인문예술대학 사학전공 교수(연세대 원주박물관 관장). 그는 "원주지역에서는 과거의 역사성과 지역성을 회복하기 위한 작업이 바로 강원감영 복원"이라고 말했다."역사적 건물 복원의 대부분이 정자 하나 짓고 정려각 하나 지어주는 고건축업자들의 배만 불려주는 수준이지만, 강원감영을 단지 건물로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단순한 건물 복원은 고양이 놀이터나 취객들의 배설구가 될 뿐이지요. "그는 "시청 이전이나 신도시 형성 등으로 원주가 서쪽으로 발전하고 있고 현재 감영 자리도 슬럼화가 될 것으로 예상되지만, 그래도 감영 복원의 의미는 크다"며 "원주 토박이가 30% 밖에 안되고 도시가 황폐화되면서 떠나는 사람이 늘고있는 상황에서 강원감영이 원주의 구심체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문화정책은 한 번 삐끗하거나 감정에 의해 하다보면 그 후유증이 큽니다. 김영삼 정부 시절이지만 강원체신청에 생각없이 감영 부지를 내어준 사례가 대표적이죠. 강원감영 역시 허허벌판에 짓자는 소리도 나오고 있지만, 유물이나 유적은 현장에 있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오교수는 "복원 규모는 합의가 필요하지만 역사학자로서는 다다익선이라고 생각한다"며 "강원감영은 역사적·건축학적으로 의미가 있을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지역민들의 당시 자존심과 자긍심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전라감영의 위상을 생각했을 때 상징적으로 몇 개의 공간만을 복원하는 것은 너무 가볍지 않은가라는 생각도 듭니다. 상징공간을 형상화하는 것도 다양한 방법이 있겠지만, 형상화를 잘못하면 추상화가 될 수 있습니다. 직접 눈으로 확인시켜 주지 못하고 일반인들에게 추상적으로만 느끼게 하는 것은 어려움이 따를 수 밖에 없거든요."하지만 그는 "전주는 문화를 활용하는 힘이 대단한 것 같다"며 "전라감영이 어떤 형태로 복원되든 이를 활용할 수 있는 역량이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또한 "역사학자와 도시 디자이너들의 생각과 역할이 다른 것처럼 작업 진행 단계에 맞춰 전문가들이 적절한 시점에서 투입돼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강원감영은 강원도 원주시 일산동 54-2번지 일대다. 부지면적은 총 9608㎡. 선화당과 포정루, 청운당, 내삼문, 중삼문, 행각 등 대구 경상감영에 비해 비교적 많은 건물이 남아있고 복원돼 있지만, 이는 전체의 20분의 1 정도다. 강원감영은 국가사적 439호로 지정되면서 시민 휴식공간으로 활용하는 데 있어 어려움이 있다. 문화재 복원 형태로 다른 시설 설치가 제한돼 있기 때문이다.강원감영 복원사업은 1995년 9월 강원감영 기본계획을 수립, 1997년도 국비 보조사업으로 책정돼 이듬해까지 선화당 창호 및 기와 보수공사가 실시됐다. 2000년 2월에는 강원감영지 발굴작업을 실시, 2001년 1단계 복원공사를 발주했다. 2004년 청운당 복원공사를 착공했으며, 2005년에는 1단계 복원공사를 완료했다. 2006년과 2007년 옛 후원공간에 자리하고 있는 우체국 건물을 이전하고 연못자리, 봉래각, 관풍루 등을 복원하는 2단계 복원사업을 계획했다. 2007년까지 강원감영 복원에 투입된 비용은 총 158억8000만원. 국비 68억원, 도비 82억2000만원, 시비 8억6000만원이다.강원감영 복원은 그러나 단순히 수치로만 이해할 수 없다. 감영 복원과 그에 얽힌 원주 시민들의 바람을 읽으려면 춘천과 갈등 관계에 놓여있는 원주의 복잡한 역사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영동-영서간, 춘천-원주간에 소지역주의가 남아있다'는 칼럼이 등장하고, 직장 내 순환근무에 있어서도 원주 사람들이 춘천을 기피하는 것이 현실. 지역에서 역사를 연구하는 전문가들은 원주와 춘천의 경쟁 관계는 강원감영 이전과 관련돼 있다고 말한다.원주시 도심 한 복판에 위치하고 있는 강원감영은 고정형 관아로 1395년(태조 4년) 설치됐다. 특히 선화당은 우리나라 감영 건축물 중 유일하게 원형이 그대로 보존돼 있는 건물. 그러나 1895년 감영은 춘천으로 이전했다. 일제시대부터 인적·물적 자원들이 춘천으로 몰리기 시작하면서 현재 원주는 군사도시에 머물고 있다. 강원감영 맞은편 번화가의 중앙로가 여전히 'B도로'로 불리는 것도 이 곳이 군사도로였기 때문. 따라서 강원감영 복원은 과거 상처로 인한 원주 시민들의 피해의식을 위로하고 자긍심을 되찾는 역사적 과업이다.문제는 국가사적지 지정 이후 주변 지역 개발이 제한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원주시에서는 문화재 현상변경허용기준안을 만들고 있지만, 중앙로 일대 건물 신축 공사가 시작되기만 하면 감영과 관련 흔적들이 대거 나오고 있다. 전문가들은 지하층을 포기하고 대신 건물 층수를 올리는 방안 등 언젠가 있을 수 있는 사적지로서의 원형복원에 대해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강원감영 관람료는 따로 없지만, 사실 받을 여건도 조성돼 있지 않다. 시민들을 위한 사적공원이라면 쉴 수 있는 의자나 고즈넉한 풍경이 있어야 하는데 그늘 하나가 없다. 소방시설 때문에 공간 구획도 제대로 돼있지 않으며, 감영 뒷문은 철문으로 돼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원감영 방문객은 1년 동안 3만2000명~3만8000명 정도에 이른다. 주로 고건축이나 역사를 전공한 전문가들로, 가족 단위 방문객이나 단체 관광객들은 별 의미없이 다녀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최근에는 외국인의 방문 횟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 일가의 유물이 공개됐다. 문화재청(청장 이건무)은 17일 오후 국립고궁박물관 회의실에서 영친왕 일가 복식 및 장신구류를 공개했다. 이 유물은 영친왕비가 일본에 거주할 때 소장하다 1957년부터 도쿄국립박물관에 보관됐고 1991년 한일 정상회담 합의로 환수돼 궁중유물전시관(현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관리하다 최근 유물 333점이 국가지정문화재인 중요민속자료 제265호로 지정됐다. 영친왕 일가가 1922년 순종황제를 알현할 때 입었던 복식류와 각종 장식물과 장신구들로 조선왕실의 복식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왕이 의례시에 착용한 곤룡포(袞龍袍), 익선관(翼善冠), 옥대(玉帶) 등과 평상복인 저고리, 바지, 두루마기, 마고자 등이 있으며 왕비의 대례복인 적의(翟衣), 중단(中單.적의 안에 입었던 두루마기), 금직 당의(錦職 唐衣.저고리 위에 입는 예복), 왕자의 자룡포(紫龍袍), 두루마기, 바지 등이 있다. 의장품(衣裝品.의복을 장식하는 물건)은 왕의 익선관과 탕건(宕巾), 망건(網巾), 행전(行纏), 목화(木靴)등과 왕비의 가체, 족두리, 옥대, 당혜(唐鞋.가죽신) 등이 있다. 왕자의 것으로는 옥대, 타래버선과 향낭(香囊.향을 담은 주머니) 등이 있다. 장신구류는 왕비의 것이 대부분인데 용잠(龍簪.비녀머리를 용의 형상으로 만든 비녀)과 봉잠(鳳簪.봉황의 형태로 만든 비녀), 각종 비취잠, 매화잠, 떨잠 등의 비녀류, 마노 등으로 만들어진 가락지 등이 있다. 이들 유물 가운데 곤룡포와 적의, 자룡포는 왕과 왕비, 왕자의 것으로는 유일한 것이며 한 가족의 것이어서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된다. 국립고궁박물관은 내년에 특별전을 개최해 영친왕 일가의 유물을 일반에도 공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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