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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1770~1847)은 추사 김정희(1786~1856), 눌인 조광진(1772~1840)과 함께 조선 후기의 3대 명필로 손꼽혔다. 창암의 서예는 조선 말 석정 이정직과 일제 강점기 벽하 조주승, 유재 송기면, 효산 이광렬을 거쳐 석전 황욱과 강암 송성용으로 이어지며 전북 서단의 뿌리를 일궜다. 전북 서예가 전국적 위상을 갖는 것은 걸출한 인물들이 맥을 지켜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창암은 아쉽게도 한국 서예사에서 전북 지역 작가로만 대접 받고 있다.국립전주박물관(관장 김영원)이 개관 20주년 특별전'조선의 명필, 전북의 인물 창암 이삼만'을 통해 창암 탄생 240주년을 기념한다.창암이 '해서'(楷書·필획에 생략이 없는 서체)를 잘 썼다는 평도 있고, '유수체'(流水體·흐르는 물과 같이 쓰는 서체)'가 뛰어났다고도 한다. 이번 특별전을 둘러보면 그는 모든 서체를 넘나들며 잘 썼으며, 서예와 문학에 대한 조예도 깊었던 것으로 보인다.창암은 문집이나 유고집을 남기지 않아 구체적인 행적을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오세창의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 따르면 창암이 베에 글씨를 쓰고 빨아서 다시 썼다고도 하며, 벼루 세 개가 닳을 정도로 먹을 갈아 하루에 1000자씩 글씨를 썼다고 전한다. 얼마나 많은 노력과 정진을 해온 인물이었는가를 실감케 한다.창암은 추사와 비슷한 시기를 살았다. 추사가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수용하고 한국에 뿌리내리고자 했던 개혁적인 유학파였던 데 반해 창암은 혹독한 자기 수련과 공부로 조선의 고유색을 풀어낸 국내파였다. 광산김씨의 묘비와 김양성 묘비엔 두 사람의 글씨가 적혀 있다. 앞면은 추사가 쓰고 뒷면과 옆면은 창암이 썼다. 창암이나 추사의 서체 모두가 뛰어났다는 방증이다.창암은 스스로 진나라 주정과 당나라 유공권, 신라시대 김생의 글씨를 토대로 서체 공부를 했다고 밝혔다. 위진시대 고법과 조선 선대 서예가들을 연구하고 실험정신을 가미해 '동국진체'를 완성한 것. 이어 '창암체'를 개발해 자신만의 필법을 확립해 나갔다.그는 서법 전수를 위한 공로도 크다. 창암은 이를 위해 우리나라와 중국 서예의 대가들의 진적을 모아 「화동서법」(華東書法)으로 엮고 목판본으로 인쇄했다. 「화동서법」 뿐만 아니라 함양의 임석여, 홍주의 주경의 에게 써준 서첩을 통해 과거 시험에 대한 비판과 함께 중국과 우리나라 글씨에 대한 평가도 만나볼 수 있다.이번 특별전은 미공개 작품들을 한자리에 모아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창암의 선학과 후학의 계보를 통해 조선시대 서단의 흐름도 파악할 수 있게 됐다.김영원 관장은 "전북의 인물, 창암 이삼만 선생이 보다 많은 관심 속에서 조선의 명필로 재조명받기를 기대한다"며 "작품에 담긴 글들은 창암의 학문과 서법 연구에도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전시는 20일부터 6월13일까지 계속된다.
"두 사람이 함께 맹세하여 쓴다. 하늘 앞에 맹세하노라. 지금부터 3년 이후에 충성의 도를 확실히 잡고 과실이 없기를 맹세한다. 만약 이 맹세를 어기면 하늘로부터 큰 죄를 얻게 될 것이다. …시(詩), 상서(尙書), 예기(禮記), 춘추전(春秋傳)을 차례로 익히기를 맹세하되 3년으로 한다."1934년 경주에서 발견된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 보물 1141호)의 내용이다. 비석 맨 앞에 임신이라는 간지가 있지만, 학자에 따라 그 연대를 552년, 612년, 혹은 732년으로 보기도 한다. 두 화랑의 맹세를 기록한 글로 널리 알려졌지만, 사실 정확한 저자에 대해서도 아직 밝혀진 바가 없고, 화랑과 관계되는지도 알 수가 없다. 국립경주박물관이 소장한 이 비석이 처음으로 서울 나들이를 한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이달 20일부터 6월20일까지 여는 테마전 '6세기 신라를 보는 열쇠-文字'에 전시하기 위해서다.국호를 신라(新羅)로 확정하고, 마립간이라 불리던 임금의 호칭을 왕(王)으로 바꾼 신라의 발전기에 문자가 이바지한 것이 무엇인지를 조명하는 전시다. 전시에는 임신서기석 외에도 신라의 영토 확장을 증명하는 북한산 진흥왕순수비(국보 3호)와 최근 발견된 포항 중성리비, 영일 냉수리비 등이 전시된다. 새로 정복한 지역에 지방관을 파견하고 성쌓기에 주민들을 동원한 모습을 보여주는 남산신성비와 댐을 쌓아 농업생산력을 늘렸다는 내용을 담은 영천 청제비 등도 볼 수 있다. 그 밖에 세금 징수 등의 내용이 있는 각종 목간과 글씨가 있는 토기도 자리를 함께한다. 전시와 연계해 20일에는 '신라의 6~7세기를 어떻게 볼 것인가'를 주제로 신형식 서울시사편찬위원장과 홍보식 부산박물관 문화재조사팀장의 강연회도 개최한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 아래에서 백제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들이 대량 발굴됐다.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김봉건)는 지난 16일 백제시대 석탑인 미륵사지 석탑(국보 11호) 기단부 발굴조사에서 토제 나발(螺髮·소라 모양으로 틀어 말아 올린 부처의 머리카락), 금동 장식편 등 백제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 27종 290여점을 출토했다고 밝혔다.석탑 1층 남측 통로 바닥석 해체 과정에서 이번에 출토된 유물들은 토제 나발, 금동장식편, 유리구슬 등을 비롯해 여성들의 머리 장식품인 청동뒤꽂이, 청동구슬, 청동방울, 청동고리 등 청동제품과 호신용 작은 손칼인 도자(刀子), 쇠못 등 철제품으로 그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특히 토제 나발은 89점으로 다량 출토된 가운데 청동뒤꽂이는 조각만 남은 다른 청동제품과 달리 형태가 온전하게 남아 있었다.이 유물들은 탑이나 건물의 붕괴를 방지하고 액을 예방하려고 땅속에 묻는 공양품들인 진단구(鎭壇具)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국립문화재연구소는 "이번에 출토된 유물들은 백제 석탑에서 발견된 진단구로서의 의의가 매우 크다"면서 "이번 유물들은 지난해 1월 출토된 사리장엄과의 관계성 및 유물의 성격 등에 대해 앞으로 계속해 심층적 조사 연구를 벌일 계획이다"고 설명했다.한편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지난 2009년 1월 석탑을 해체 보수하는 과정에서 백제 무왕 왕후가 조성한 사리봉안기(舍利奉安記),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를 발견한 바 있다.
전북 익산의 미륵사지 석탑 아래에서 백제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들이 발굴됐다.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김봉건)는 백제시대 석탑인 미륵사지 석탑(국보 11호)기단부 발굴조사에서 토제 나발(螺髮: 소라 모양으로 말아 올린 부처의 머리카락)과금동장식편 등 백제시대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 27종 290여점이 출토됐다고 16일 밝혔다. 출토된 유물들은 토제 나발과 금동장식편을 비롯해 금박, 유리구슬, 여성들의머리 장식품인 청동뒤꽂이와 청동구슬 등의 청동제품들, 호신용 작은 손칼인 도자(刀子), 쇠못 등으로 다양하다. 특히 토제 나발은 89점이나 나왔고, 청동뒤꽂이는 조각만 남은 다른 청동제품과달리 형태가 온전하게 남아있었다. 이 유물들은 탑이나 건물의 붕괴를 방지하고 액을 예방하려고 땅속에 묻는 공양품들인 진단구(鎭壇具)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연구소 측은 이 유물들이 백제 석탑에서 발견된 진단구로의 의의가 크다고 설명했으며, 유물들의 성격과 지난해에 출토된 사리장엄과의 관계에 대해 심층 연구를계속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지난해 1월 석탑을 해체 보수하는 과정에서 백제 무왕 왕후가 조성한 사리봉안기(舍利奉安記),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를 발견한 바 있다.
대한민국 최초 항공기로 한국전쟁 초기에 맹활약한 'L-4 연락기'와 대한민국 최초의 전투함인 백두산함에 사용한 돛대를 비롯한 근현대 군사유물 7건이 한국전쟁 60주년을 즈음해 문화재로 등록 예고됐다고 문화재청이 15일 말했다. 공군박물관이 소장한 'L-4 연락기'(기장 6.82m, 기폭 10.73m)는 1940년대 미국에서 생산해 제2차 세계대전 중 미 육군이 사용하던 2인승 연락용 경항공기로, 1948년 9월13일 대한민국 공군 전신인 육군항공대가 미군에서 인수한 10대 중 1대다.한국 공군이 보유한 최초의 항공기인 이 경항공기는 한국전쟁 초기에는 후방석에 앉은 관측사가 폭탄을 품에 안고 출격, 투척하는 방식으로 동원됐고, 여수ㆍ순천사건 진압과 지리산 무장공비 토벌작전에도 쓰였다. 이후 육군에 파견되어 여러 기능으로 사용되다가 1954년 L-19 연락기 도입에 따라 퇴역했다. 해군사관학교박물관이 보관 중인 백두산함 돛대(폭 5.2m, 높이 11m)는 대한민국 최초 전투함인 백두산함(PC-701)에 사용한 마스트다.이 함선은 해군 창설 이후 제대로 된 전투함 한 척 없던 상황에서 해군 장병과 그 가족의 성금으로 1949년 10월17일 미국에서 구입한 것으로 한국전쟁 발발 당일 대한해협을 초계하다가 북한 무장선박을 발견하고 이튿날 격침한 '대한해협 해전'의 주인공이다.이 외에도 흥선대원군의 지시에 따라 무명 30장을 겹침으로써 총탄에 대비하고자 만든 '면천갑옷'(국립중앙박물관)과 한국광복군 갑옷(육군박물관), 대한민국 육군 초창기 깃발(육군박물관), 한국전쟁 휴전협정 체결 때 사용한 책상(전쟁기념관), 경상 안동 지방 의병장 김도현(金道鉉.1852-1914)의 칼(독립기념관)도 함께 문화재 등록이 예고됐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2000년 12월 29일부터 이듬해 2월 11일까지 한국서예사특별전(19)이라는 제하에 '韓國書藝二千年'이라는 전시가 예술의 전당의 기획 주최로 열린 적이 있다. 지금 필자의 손에는 그때 발간된 사진자료집과 해설집이 있는데, 돌이켜 아직껏 우리나라 서예 관련 전시 중에서 가장 대규모의 기획전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나라에도 엄연한 서예문화가 자리하고 있으며 그 역사가 2000년이라 하니 가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아쉬운 것은 그동안 우리의 서예문화가 중국문화에 예속되어 있다는 사대적 관념에 사로잡혀 그 영향관계만을 논하면서, 우리의 정체성과 독창성 등을 탐색하는 데에는 소홀했다는 점이다. 이 전시가 기획된 이후, 학계에서 우리 서예문화의 정체성과 독자성을 탐색하는 학술대회가 연이어 열리면서 새로운 입장과 시각을 달리한 연구성과들이 집적되고 있는 실정이다. 통론이 거론되고 각론들이 집적되어 하루빨리 조화와 균형을 갖춘 총론이 구성되기를 고대한다.한국서예사를 논하고자 할 때 가장 우선하는 것은 그에 대한 문헌적 자료를 갖추는 일이다. 뛰어난 감식안을 지닌 구안자가 문헌과 작품의 상관관계를 면밀하게 고증하여 논술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역대 문헌을 탐색할 수 있는 인문학적 소양과 작품을 분석할 수 있는 직관과 심안이 전제되어야 한다. 필자가 선뜻 한국서예에 대한 순례를 떠나지 못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렇다고 마냥 혜안을 갖춘 군자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릴 수도 없는 형편이다. 이러한 이유로 서재에서 그동안 홀시되었던 한국서예에 대한 자료들을 추려보았다. 그 중에서 가장 눈에 드는 것이 김기승의 「신고 한국서예사」이다.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서예가가 집필한 단행본 서예사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이와 더불어 뛰어난 감식안을 지닌 김응현의 논고들이 산견되는데 하나의 완정본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이것들은 해방 이후 체계적으로 한국서예사를 정리하기 위해 집필된 최초의 시도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좀더 거슬러 올라가면 금석학자로 이름이 높은 오세창의 「근역서화징」을 꼽을 수 있다. 역시 우리나라의 서화사 연구를 위해 역대 문헌자료를 채록한 편저인데 삼국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문헌적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1998년에 동양고전학회에서 이를 국역하여 시공사에서 발행하였다.필적을 확인할 수 있는 도판자료는 금석탁본과 진적 두 가지가 있다. 먼저 체계적인 금석탁본집으로는 조선후기 낭선군 이우(1637-1693)가 편집한 「대동금석서」(1938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에서 영인간행)와 1979년부터 원광대학교 출판국에서 연차적으로 발행한 「한국금석문대계」, 한국국학진흥원과 청명문화재단에서 발행한 「한국금석문집성」 등의 금석탁본집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진적 자료집으로는 최근 칼라영인된 「근묵」을 비롯하여 중앙일보사에서 발행한 「서예」가 비교적 풍부한 자료를 선명하게 게재하고 있다. 이와 별도로 역대 문인들을 필적을 판각하여 엮은 「해동역대 명가필보」도 있으며, 도처의 박물관 자료와 각종 기획전 등에 부수된 문헌들이 즐비하다.모두에서 밝혔듯이 우리의 서예문화는 장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금석문이든 필적이든 그것들은 기록물로서 한결같이 역사적 가치와 예술적 가치를 동시에 함유하고 있다. 이제 시대에 따라 한국서예를 순례하면서 혹 역사적 가치에 의미를 부여하고, 또 어떤 곳에서는 예술적 가치에 경탄할 것이다. 창작의 주체자인 인물됨을 통해 작품을 들여다보고, 작품을 통해서 시대의 문화를 가늠하며, 또 이를 역으로 탐색하며 추론하기도 할 것이다. 이번을 기회로 필자 역시 학문의 목표로 삼고 있는 한국서예사에 다소 공부가 되었으면 한다. 독자제현의 따뜻한 질정을 기대한다. /이은혁(한국서예문화연구회 이사장)
청말 민국초에 예원을 주도하며 중국 최후의 문인으로 일컬어지는 인물로 오창석이 있다. 오창석(1844~1927)은 초명이 준(俊), 후에 준경(俊卿)이라 하였으며, 자는 향보(香補), 창석(倉碩), 창석(蒼石)이라 하였는데 민국 원년 이후의 작품에는 거의 창석(昌碩)으로 사용하였다. 호는 부려(缶廬)를 비롯하여 고철(苦鐵), 대농(大聾), 파하정장(破荷亭長)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절강성 효풍현(孝豊縣)에서 출생하였는데 이곳이 옛날 안길현(安吉縣)에 소속되어 있었으므로 관지에 간간이 '安吉'이라 쓰곤 하였다.학서이력을 살펴보면, 29세 때부터 친구 김걸(金傑)과 항주, 소주, 상해를 유력하며 견문을 넓혔다. 항주에서 유월에게 문장과 문자훈고를 배우고, 소주에서 양견산(楊見山)에게 서법과 시문을 배웠는데 특히 양견산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또 금석수장가로 이름이 높았던 반조음(潘祖蔭), 오운(吳雲), 오대징과 가까이 지내며 고문물과 고탁본을 직접 접하였고, 그에 대한 경험은 자연스럽게 서법과 전각으로 이양되었다. 1904년에 항주 서호(西湖) 가에 인장가들의 모임인 서령인사를 설립, 초대이사장으로 추대되면서부터 예원을 주도하였다. 시집으로 「부려집」, 인보로 「삭고려인존」 「부려인존」, 서화집으로 「고철쇄금(苦鐵碎金)」 등이 전한다.흔히 오창석의 예술을 종합하여 "전각이 제일이며, 서가 다음이고, 그림이 그 다음이다."라고 일컫는데 실제로 시서화각 사절로서 손색이 없다. 특히 전각의 근간이 되는 전서를 깊이 탐구하여 독자적 서풍을 확립하였으며, 이는 다시 전각과 문인화의 밑거름이 되었다. 전각을 제일로 손꼽지만 사실 그것은 전서의 연구에서 발양된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어느 분야나 서를 근간으로 삼아야만 전각과 그림에 품격이 생긴다는 점이다. 이는 서의 격에 따라 전각과 그림의 격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오창석이 어려서부터 부친을 통해 인장을 접하였지만 유독 전서를 연구하며 필력을 연마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그가 전각가로서 또는 서화가로서 평생 임모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은 석고문(石鼓文)이다. 오창석이 임서한 석고문은 여러 본이 있다. 참고로 일본의 이현사에서 중국법서선60으로 영인한 전4폭의 임본은 75세 때에 서원사(西園寺) 공망(公望)의 부탁을 받아 쓴 것이다. 여기에 소개하는 임본은 관기에도 보이듯, 최말년기에 해당하는 82세 때(乙丑, 1925년)의 작품으로 오창석은 "을축년 한가을에 간 질환을 앓고 있던 초기에 썼으나 굳센 기운이 있다."라고 자평하였다. 오창석의 임석고문은 오늘날 문자학적 입장에서 보면 다소 이견이 있을 수 있으나 필법과 결구를 터득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다. 마종곽은 오창석이 쓴 석고문을 보고 '매화를 그리는 법으로 썼다'고 평하였는데 그만큼 금석미가 풍부함을 지적한 말이다. 이외에 창작품으로 서령인사기를 비롯하여 수진택허당기(修震澤許塘記)가 널리 알려져 있으며, 록소융시삼장(錄小戎詩三章)이 뛰어나다. 오창석의 많은 작품들을 수습해보면 법고를 통한 창신이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어떻게 자기세계를 구축해야 하는지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이상 30회를 끝으로 중국서예에 대한 순례를 마치고자 한다. /이은혁(한국서예문화연구회 이사장)
문화재청은 '옹진 굴업도 해식지형' 2만5천785㎡를 국가지정문화재인 천연기념물로 지정 예고했다고 1일 말했다. 예고 지역은 굴업도에 딸린 작은 섬인 토끼섬에 있는 해식와(海蝕窪)라는 침식지형으로, 기후와 화산암의 암석조직, 조석간만의 차에 따른 해수의 침식작용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형성됐다. 문화재청은 30일간의 예고기간 동안 일반인과 관련학자, 지방자치단체 등의 의견을 수렴하고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천연기념물 지정 여부를 확정한다. 한편, 옹진군은 개발사업에 대한 제한 등을 우려해 토끼섬의 천연기념물 지정에 반대하는 의견을 담은 공문을 지난 4월 문화재청에 보낸 바 있다.
조지겸(1829~1884)의 자는 익보(益甫)였으나 후에 휘숙으로 고쳤으며, 호는 냉군(冷君), 철삼(鐵三), 매암(梅庵), 무민(無悶) 등이 있다. 본래 소흥(紹興) 회계사람으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점차 가세가 기울었고, 30세를 전후하여 장발적의 대란이 미치자 고향을 떠나 온주(溫州)와 서안(瑞安), 복주(福州) 등을 전전하였다. 그러던 와중에 부인을 잃었는데 그때부터 자신을 비암 또는 사비옹(思悲翁)이라 호하였다. 난이 평정된 후에는 북경으로 올라가 세 차례나 회시를 치렀으나 낙방, 동치 11년(1871) 강서성에 초빙되어 강서통지(江西通志) 편집에 종사하면서부터 이곳에서 생활하였고, 남성현(南城縣) 지현(知縣)으로 재직하다 병사하였다.글씨는 처음에 안진경을 배웠으나 후에 북비를 공부하였고 예서는 등석여를 사사하였다고 한다. 그 역시 비학파의 영향으로 북비를 탐구하고 은주시대 금문을 연구하여 「육조별자기(六朝別字記)」를 저술하고 「환우방비록」을 보충하는 등 금석학적 업적을 남겼다. 그림은 진도부와 이선을 사숙하였는데 화훼에서 발군하여 양주팔괴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진다. 조지겸의 서품을 보면 한눈에 북비의 영향을 강하게 느끼면서도 고법을 답습하지 않고 독특한 개성으로 새로운 서예세계를 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널리 알려진 장맹룡비(張猛龍碑), 가사백비(賈思伯碑), 정문공비(鄭文公碑), 용문조상기(龍門造像記) 등의 북비에서 필력을 얻어 여러 서체에 적용하였다. 특히 정도소의 글씨를 매우 숭상하여 "北碑書無過熒鄭僖伯"이라 하였다.비학적 입장에서 살펴보면, 북비를 탐구하여 서법에 적용한 이로 앞서 소개한 등석여와 금농(金農), 서삼경(徐三庚) 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 북비에서 득력하였지만 그 표현양상은 제각기 다르다. 등석여는 전서와 예서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금농은 양주팔괴의 한 사람으로 예서를 평필처럼 써서 칠서(漆書)라는 호칭이 있을 정도로 개성적인 필치를 선보였다. 조지겸은 등석여의 서를 배웠으나 북비를 탐구하면서 그만의 독특한 필법을 표출하였다. 가장 두드러진 특징으로는 전서와 예서에서 역필을 강조하지 않고 순필로 들어가 필획의 절주를 강조하고 있는 점이다. 그로 인하여 북비에서 엿보이는 팔분의 특징이 해서에서도 적용되어 나타나며 독특한 풍격을 이룬다. 전서에서도 횡획을 순필로 시작하여 율동의 미를 강조하는 한편, 수획에서는 교봉(絞鋒)에 의한 탄력 있는 필획을 구사하며 강하고 예리하게 수필(收筆)함으로써 우아함을 드러내 보였다. 이를 대비시켜 본다면, 역필을 강조한 등석여의 투박함과 자태의 운치를 추구한 서삼경의 섬세함을 다 아우른 감이 있다. 이들은 모두 전각에도 일가를 이루고 있는데 전서의 개성적인 특징은 곧 전각에서 다시 재현된다.진진렴(陳振濂)은 하소기의 해서와 행초서가 위삼안칠(魏三顔七)이라면 조지겸은 위칠안삼(魏七顔三)이라고 평하였는데 흥미롭다. 이로서 조지겸의 해서와 행초서를 일언이폐지하여 안저위면(顔底魏面)이라 하는 이유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만청의 개성적인 서화가들을 비교하여 등석여의 혼후(渾厚), 이병수(伊秉綬)의 웅장(雄壯), 하소기의 고졸(古拙)이라고 일컫기도 하는데, 조지겸은 이들과 다른 또 하나의 파를 만들어 자성일가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서학계에 휘몰아쳤던 비학의 영향권에서 뚜렷하게 독자적 행보를 보인 여러 서가들의 특징을 잡아내는 것도 좋은 공부라 생각한다. /이은혁(한국서예문화연구회 이사장)
하소기(1799-1873)의 자는 자정(子貞), 호는 동주(東洲) 원수이며, 호남성 도주(道州) 사람이다. 집 앞에 동주산이 있어 이를 취하여 호로 삼았고, 한나라의 명궁 이광(李廣) 장군이 원숭이처럼 팔이 길었다는 고사를 취하여 활을 당기듯 팔뚝을 들고 써야 한다는 현비직필(懸臂直筆)의 집필법을 주장하며 스스로를 원비옹(猿臂翁) 또는 축약하여 원수라고 지칭하였다. 호부상서 하릉한(何凌漢)의 장자로 소업(昭業)과는 쌍둥이였다. 평생 대련작품을 많이 남겨 서련성수(書聯聖手)라는 칭찬을 받았다.20대 후반기에 포세신(包世臣) 장백생(蔣伯生) 등과 교유하며 금석연구에 열중, 마침내 장흑녀묘지(張黑女墓誌) 구탁본과 설직(薛稷)의 신행선사비(信行禪師碑) 송탁본을 수중에 넣었다. 37세에 호남의 향시의 합격하고 익년에 북경의 회시에 급제하여 한림원 서길사(庶吉士)에 편입되어 3년 간 연수하였는데 그 때 완원(阮元)의 교습을 받았다. 향시의 시험관이었던 오영광(吳榮光)과 완원은 모두 비학자들로서 하소기의 서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하소기는 두 선사를 통하여 금석학의 세례를 받고 비탁본을 널리 수집하는 한편, 이를 토대로 「동주초당금석발(東洲草堂金石跋)」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수장했던 명품으로는 한의 장천비(張遷碑), 북위의 장흑녀묘지, 당 설직의 신행선사비, 이옹의 법화사비(法華寺碑), 안진경의 이원정비(李元靖碑)를 비롯하여 삼고와 마고선단기, 송 소식의 금강경 등이었다. 하소기는 천하의 보배였던 장흑녀묘지 탁본의 발문에서 "매번 임서할 때마다 반드시 회완(回腕)으로 팔뚝을 높이 쳐들고 몸의 힘이 붓에 통하도록 글씨를 썼는데 반도 못 가서 옷이 땀으로 흥건했다."고 회고하며 현완법을 강조하였다. 자신의 서력에 관해서는 법화사비 발문에서 밝힌 것처럼, 40년 가까이 안진경과 이옹의 서법에 경도되었다가 중년 이후에는 북비로 눈을 돌리고, 만년에는 한비로 거슬러 올라갔다고 밝혔다. 이는 당시 유행한 비학의 영향이다. 기본적으로 완원의 남북서파론과 북비남첩론을 계승하며 북파의 연원을 좇아 서법을 탐구하였다. 이로 인하여 하소기의 서는 안진경의 쟁좌위고와 장천비 및 석문송의 필의가 강하게 풍긴다.여기에 소개하는 「임장천비」는 말 그대로 한나라의 팔분 중에서 양강지미(陽剛之美)의 대표작으로 불리는 장천비 탁본을 입수하여 임서한 것이다. 청대 후반기로 갈수록 금석학과 비학의 흥행과 맞물려 고비에서 서의 법을 찾으려는 경향이 농후해졌는데 하소기도 이에 다름 아니었다. 하소기는 임서의 말미에 같은 글씨체로 "壬戌七月十九六十通竟"이라 기년을 밝히고, 그 밑에 소자로 4행에 걸쳐 "平齋仁弟苦索拙書適臨此本竟則以寄之發三千里外一笑歎也何紹基記於長沙化龍池寓"라고 낙관하였다. 임술년은 동치(同治) 원년 즉 1862년에 해당하며 하소기의 나이 64세 때이다. '六十通竟'은 60번째 전임하였다는 말로 이해되며, 한편 그가 고법의 탐구에 얼마나 치력하였는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장천비만 모두 100통을 임서했다고 한다. 당시 하소기는 서예적 명성이 있어 그의 글씨를 구하는 자들이 많았는데 낙관에 보이는 평재 역시 그랬던 모양이다. 장천비를 임서한 후 자신의 글씨를 애타게 찾는 삼천리 밖의 평재에게 보낸 뒤 기분 좋게 너털웃음을 짓는 하소기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호남성 장사(長沙)의 화룡지(化龍池)는 하소기가 관직에서 물러나 함풍(咸豊) 11년(1861)부터 거처하던 성남서원(城南書院)이 있는 곳이다. 청대 비학의 학풍을 계승하여 동경의 석묵이 모두 나의 스승(東京石墨皆吾師)이라고 외쳤던 하소기는 분명 자립문호(自立門戶)와 자성일가(自成一家)의 꿈을 이룬 걸출한 서가였다. /이은혁(한국서예문화연구회 이사장)
청나라 건륭·가경시대에 활동한 비학파 서예가 중에 등석여(1743~1805)가 있다. 본명은 염(琰)이며 자는 석여(石如)였으나 인종의 휘가 옹염이었으므로 피휘하여 자를 이름자로 사용하고, 다시 자를 완백(頑伯)이라 하였다. 환공산 출신으로 '환'자를 파자하여 완백산인(完白山人)이라 호하였다. 글씨는 물론 전각에서도 두각을 나타내어 등파(鄧派)의 시조로 지칭된다.수많은 필적 중에 널리 알려진 것으로 전서로 쓴 백씨초당기(白氏草堂記)가 있고, 고전(古篆)을 섞어 쓴 음부경(陰符經), 예서작 오도손시평(敖陶孫詩評) 등이 있다. 초기의 전서작들은 당나라 이양빙의 필적을 배워 그의 필의가 담긴 완정한 결자와 원숙한 용필에 주력하고 있다. 그러나 앞에서 제시한 전서작들은 비교적 후기의 작품으로 비학(碑學)을 토대로 연찬한 등석여만의 개성미가 돋보인다. 예서작 역시 초기에는 한비 중 조전비의 필의가 강하게 드러나는 것이 특징이나, 후기의 예서는 전서의 자형이 가미된 특유의 형태에 고졸미가 배가되었다.공부와 관련하여 서법에 능숙한 사람이 변화의 묘와 고졸한 필의를 위하여 일견 잠심할 필요가 있으나, 초학자의 경우 등석여의 서품으로 입문을 삼는 것은 경계할 필요가 있다. 서의 법은 이미 전형으로 정평이 난 고전적인 자료를 통하여 터득하는 것이 순서이고, 그것을 토대로 서의 예술적 발양을 꿈꾸고자 할 경우 등석여의 경우는 하나의 모범이 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청대에 유행한 비학파들이 고비(古碑)를 통하여 법을 발견하려 했던 이유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등석여가 당의 이양빙을 모범으로 삼아 진력하다가 태산의 각석과 고전에 눈을 돌린 까닭을 상기해야 한다. 그의 서품을 일별하면 전서에 대한 편력을 엿볼 수 있는데 이는 비학파 서가에서 흔히 보이는 현상이다. 우리나라에서 비슷한 시기의 추사가 학서의 문경을 제시하며 소원(溯源)을 강조한 것도 같은 경우이다. 일언이폐지하여 학서의 경우에는 전형적인 고전을 모범으로 삼아야 하고, 창작의 경우에는 개성을 드러낼 수 있는 문자학적 지식이 풍부해야 한다. 이렇게 된다면 서는 단순히 필묵을 통하여 문자를 서사하는 수준을 넘어 학문과 예술의 수준에 도달하게 된다. 등석여가 학서 시절에 고전을 학습하면서 그 일환으로 「설문해자」를 수사(手寫)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단지 몇 글자를 자전에서 집자하여 변화를 추구하기보다 서의 근원인 문자학적 구조를 밝혀냄으로써 자유로운 자형의 변화를 시도할 수 있었다. 주의해야 할 점은 자형의 변화만을 위하여 벽자(僻字)만을 골라 써서 「중용」에서 이른바 색은행괴(索隱行怪)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실로 오랫동안 착실하게 천착하며 본질과 근원에 다가서는 독실한 공부가 필요하다. 등석여의 경우는 그 좋은 예이다.등석여와 통감했던 포세신은 「예주쌍즙(藝舟雙楫)」을 저술하여 그의 이론을 계승하는 한편 그를 칭앙하였고, 오양지(吳讓之), 양기손(楊沂孫), 조지겸(趙之謙) 등 전서와 전각에 두각을 나타냈던 청조 후기 서예가들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뿐만 아니라 청대의 고증학과 비학을 수용한 것으로 알려진 추사가 그의 아들 등전밀(鄧傳密)과 교류한 사실로 미루어 등석여의 비학 서법이 추사에게도 적잖은 영향을 미쳤음을 추측케 한다. 등석여의 전예에서 예술성을 따지기에 앞서 청대 비학의 학문적 결정을 엿볼 수 있으니, 그 의미가 자못 심장하다. /이은혁(한국서예문화연구회 이사장)
태조 어진 구본 발굴 사업이 문화재청으로부터 두번이나 반려되면서 전주시의 준비가 치밀하지 못하고 안이했던 것 아니냐는 지적이 일고 있다.지난 10일 오후 서울 고궁박물관에서 열린 문화재청 사적분과위원회 회의에서, 참석위원 12명 중 4명이 전주시가 낸 구본 발굴을 위한 '국가지정 문화재 현상변경허가'에 찬성했으나 5명이 반대하고 3명이 기권해 부결됐다. (관련기사 본보 3월 11일자 1면)문화재청은 "태조 어진 구본 발굴과 관련해 이례적으로 표결까지 갔지만, 문화재 보존관리에 저해가 우려된다는 이유로 부결됐다"고 밝혔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학자적 욕심에서 발굴하고자 하는 의지도 있었지만, 자칫 보물찾기식으로 흘러갈 수 있다는 우려도 있었다"며 "문화재 보존 차원의 큰 틀에서는 발굴 보다는 현 상태 유지가 지배적 시각"이라고 설명했다.그러나 어진 구본 발굴이 두번이나 반려되면서 시가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 아니냐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2007년에는 어진을 불에 태워 묻었다는 설과 물에 씻어 묻었다는 설이 존재하면서 구본 존재 여부가 불투명하다는 이유로 반려됐었다. 이번에는 「어진이모도감청의궤」를 통해 '어진을 물에 씻은 다음 잘 접은 뒤 백자항아리에 넣었다'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위원들이 이같은 결과를 내리면서 지역의 실망감은 더욱 컸다.사적분과위원회 회의에서 찬성한 것으로 알려진 한 위원은 "지역의 여론은 익히 알고 있고 개인적으로도 가능하다고 생각했다"며 "하지만 알고 있다고 해서 발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는 의견이 대세였다"고 당시 분위기를 설명했다.반대 의사를 밝힌 다른 의원은 "결과는 부결로 나왔지만 이 역시 좋은 뜻에서 지키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구본이 알려지면서 도굴 위험이 높다는 의견에 대해서는, "그렇게 따지면 경기전은 어떻게 지킬 것이냐. 익산 쌍릉도 있는데 궁금하니까 파보자, 그런 건 아니지 않는가"라고 반문했다. 이 위원은 "의미적으로 귀하게 해놓았으니까 현 상태로 지켜가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발굴작업을 하고서도 구본이 나오지 않을 경우 떠안게 될 부담감과 책임감도 위원들에게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 경우 「조선왕조실록」이나 「어진이모도감청의궤」 등 역사 기록을 부정해야 하는 상황에서 국내외 시선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이미 도굴됐을 경우 국가 문화재 관리 체계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등 파장이 크기 때문이다.한 전문가는 "시에서 구본 발굴에 대한 의지가 컸다면 위원들을 일일이 찾아가 설득하는 작업도 했었어야 했다"며 "특히 조선시대 전공 학자들이 반대 의견을 냈다면, 제출 자료나 연구에 대한 보완 등 재검토가 필요할 것"이라고 강조했다.이에 대해 고언기 전주시 전통문화국장은 "문화재청과 우리 지역을 비롯한 학계 전문가들의 의견을 수렴해 구본 발굴 재추진 여부를 판단하겠다"고 말했다.
충남도는 부여군 규암면 합정리 백제문화단지 내 백제역사문화관이 13일 낮 12시5분께 입장객 100만명을 돌파했다고 14일 밝혔다. 100만번째 입장객은 자녀와 함께 백제역사문화관을 찾은 이명배(36)씨로, 이씨는 국보 287호인 백제금동대향로 모형과 오는 9월 17일 개장하는 백제문화단지 1년 무료입장권을 선물로 받았다. 박국진 백제문화권관리사업소 소장은 "백제역사와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백제역사문화관을 찾는 관광객도 크게 늘고 있다"며 "관광객들이 더 편하고 효율적으로 백제의 역사와 문화를 보고 체험할 수 있도록 시설 보강과 함께 다양한 기획 이벤트 개최를 추진해 나갈 방침"이라고 말했다. 2006년 3월 16일 문을 연 백제역사문화관은 지하 1층ㆍ지상 2층, 건물면적 8천796㎡ 규모로, ▲한성시대와 웅진시대, 사비시대 등 백제의 역사(제1전시실) ▲백제인의 생활상(제2전시실) ▲백제인의 사후세계 등 장례문화(제3전시실) ▲백제문화 교류기(제4전시실) 등으로 꾸며져 있다.
"전주는 성문이 4개 있고 성곽 위에는 소포루가 8개 있다. 인가는 성내및 성외 동남면 삼방에 연담하여 호수는 약 2000여 호이다. 감영은 남문내에 있고, 그 동쪽에는 호남포정사라는 관청과 그 동북에는 완산부가 있다. 객사는 '풍패관'이라 칭하고, 관청 건물로는 선화당 내아 관풍각 군관청 포도군관청 등 40여 개가 있다."1888년에 일본 육군참모본부가 펴낸 '조선지리지'에 나오는 전주에 관한 기록이다(일제식민시대 구술실록/ 전주문화재단). 당시 동서남북 4개의 문에는 큰 종이 걸려 있었다. 아침 6시와 밤 10시에 종을 울리고 문을 개폐해 교통을 통제했다.전주에 언제부터 이러한 성곽이 있었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다. 고려 말엽인 1389년 관찰사 최유경이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훨씬 전에 구축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전주부성은 정유재란때 크게 파괴되어 1734년 관찰사 조현명이 새롭게 수축했다. 1767년 다시 대화재로 남문과 서문을 비롯 관아와 민가 수천호가 소실되자 관찰사 홍낙인이 중건했다. 이때 4대문은 완동문(完東門), 풍남문(豊南門), 패서문(沛西門), 공북문(拱北門)이라 불렀다.전주부성은 1894년 동학혁명 때도 2차례에 걸쳐 수난을 당했다. 동학군에 의해 점령된 전주성을 향해 관군은 완산칠봉 등에서 독일제 크루프포 등을 쏘아댔다. 이로 인해 7000-8000호에 이르던 전주는 거의 잿더미로 변해 버렸다. 성곽도 일부 파괴되었다.파괴되기 전, 전주 성곽은 전주우체국 부근을 중심으로 반경 500m의 다소 원형에 가까운 지역을 둘러싸고 있었다(全州府史·1942년). 동문은 현재의 동문사거리, 서문은 다가동파출소 앞, 북문은 현 오거리(북문승강장)에 있었다.천년고도 전주를 지키던 전주부성은 1905년 조선통감부의 폐성령에 의해 철거되기 시작했다. 1907-1908년 남문에서 서문과 북문까지, 1911년 이후 남문에서 동문을 거쳐 북문까지 헐어졌다. 결국 풍남문 하나만 덩그라니 남게된 것이다.며칠 전 전주출신 정동영 신건 장세환 의원 등이 참석한 가운데 복원문제가 거론되었으나 별 실속없이 끝났다. 정치적 수사보다 유구조사와 예산확보가 먼저일 것이다./조상진 논설위원
속보= 올해 경기전 봉안 600주년을 맞아 추진되어온 태조 어진의 구본 발굴작업이 또 다시 무산됐다.<관련기사 본보 3월2일자 1면 보도>문화재청 문화재 사적분과위원회는 10일 오후 서울 고궁박물관에서 열린 태조 어진 구본 발굴에 대한 국가지정 문화재 현상변경 허가건과 관련, 표결에 부쳤으나 참석위원 12명 중 찬성 4명, 반대 5명, 기권 3명으로 부결됐다.태조 어진의 구본 발굴작업 신청이 부결된 것은 지난 2007년에 이어 두번째다.사적분과위원회의 반대 위원들은 이날 '구본이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 경기전 일대를 신성시해야한다'는 것과 '구본의 존재여부가 불확실하다'는 이유를 들어 발굴에 반대한 것으로 알려졌다.찬성 위원이 "유물이 발굴되면 역사적 가치가 크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의사표명을 하지 않은 3명의 위원들이 나오면서 부결됐다.시는 이에 앞서 전주의 정체성 확립과 전통문화도시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어진을 발굴, 그 역사성을 정립할 필요가 있다는 취지로 경기전 북편 뒤뜰(600여㎡)을 대상으로 문화재 현상 변경 허가를 신청했다.
명말청초에 강직한 성품으로 개성을 드러내 보인 서화가 중에 부산이 있다. 부산(傅山, 1607~1684)은 자가 청주(靑主)이며 호는 주의도인(朱衣道人), 노얼선(老蘖禪) 등이 있으며 양곡(陽谷:山西)인이다. 「청사고」의 전기에 의하면, 여섯 살 때 황정(黃精)을 먹고 곡식을 하지 않다가 건강을 되찾고서 밥을 먹었다고 한다. 강건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명나라가 망하자 고염무 등 유민들과 명조 회복운동을 벌이다가 순치(順治) 11년에 체포되어 투옥되었으나 끝가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지식인 회유책으로 박학홍사과에 추천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명이 멸망한 갑신년 이후에는 황관(黃冠)에 붉은 옷을 입고 토굴에서 기거하며 노모를 봉양하였고, 겨울이건 여름이건 삼베 옷 하나만을 걸치고 스스로 '민(民)'이라고 칭하였으며, 죽어서도 황관과 붉은 옷으로 염을 하였다고 한다.그는 서화에 뛰어났는데 서론으로 제기한 사녕사무론(四寧四毋論)이 특히 유명하다. 원문을 인용하면 이렇다. "書寧拙毋巧;寧醜毋媚;寧支離毋輕滑;寧眞率毋安排." (글씨는 차라리 고졸할지언정 교하지 말아야 하며, 차라리 추할지언정 연미하지 말아야 하며, 차라리 지리할지언정 가벼이 미끄러지지 말아야 하며, 차라리 진솔할지언정 안배하지 말아야 한다.)그 내용이 현실에 대한 부정적인 발언이지만 부산이 추구하고 있는 서예적 경계가 무엇인지를 추측할 수 있게 한다. 부산은 당시 사람들이 앞다투어 조맹부와 동기창의 연미한 글씨를 연마하고 있는 것을 보고 불만을 가졌다. 이렇듯 강력한 부정적 서예관이 제기되게 된 배경에는 그의 학서 이력이 자리하고 있다. 부산은 20세 때 조맹부의 필적을 얻고 그것을 임서하며 공부하였는데, 조맹부는 송왕실 출신이면서 원나라에 출사한 사람으로 '心術壞而手隨之'(심술이 삐뚤어졌는데 손이 그것을 따라갔다)라고 혹평하였다. 서품이 곧 인품이라고 믿었던 그에게 조맹부는 더 이상 학습의 대상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이후 그는 당대의 충신 안진경의 글씨를 배우고 위진 및 당송원의 제가들의 서체를 두루 섭렵했다고 한다.각 체에 능하였지만 특장을 보인 것은 소해(小楷)와 초서이다. 그 중에서도 연면초(連綿草)는 자신의 감정을 가감 없이 즉흥적으로 드러내 보인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흔히 행초서를 무법유체(無法有體)라고 일컫는데 명말청초에 이러한 연면초와 광초가 유행한 것은 그 시대적 상황과도 관련이 있다. 왕탁의 자유분방한 행초서와 부산의 행초서가 서로 다른 듯하면서도 일면 상통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왕탁이 말못할 복잡다단한 심정을 울굴한 글씨로 표현했다면, 부산은 시대에 동화되는 명조의 문화현상을 분개하며 사녕사무론을 외치며 굽힘 없는 활달한 기개를 연면초로 펼쳐 보였다. 그가 스스로를 미치광이라고 자칭하며 작품에 '大笑下士'라고 서명하고 있는 것을 보더라도 거리낌없는 기개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다. 그가 시대 말기적 상황에서 절개를 강조하며 사람됨을 중시했던 명언 "作字先作人, 人奇字自古."는 그의 서품을 이해하는 키워드이다. 글씨보다 사람을 우선시할 때 비로소 글씨는 하나의 인격체로서 승화되어 마치 격조 있는 사람을 대하듯 서품을 대한다는 단순하고도 어려운 진리를 몸소 실천한 사람이 바로 부산이다. 뒤엉킨 듯 보이지만 맑게 이어지는 연면초에서 명말 유민의 불굴의 기개를 느낄 수 있다. /이은혁(한국서예문화연구회 이사장)
사단법인 김해향토문화재연구소(소장 박재민)는 가야 고도인 김해에서 출토된 유물 중 유일한 국보(제275호)인 '기마인물형 토기'의 귀환운동을 벌인다고 9일 밝혔다.이 연구소는 5년전에도 이 토기의 김해 귀환을 위해 주민 1만여 명으로부터 서명을 받았지만 이후 구체적인 귀환운동을 벌이지 못한 채 유야무야된 바 있다.연구소는 최근 이사회를 통해 이 토기의 귀환운동 필요성에 공감하고 시민 10만명 서명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연구소는 오는 10일부터 김해시청을 출발해 17개 읍ㆍ면을 직접 순회하면서 서명작업을 벌이기로 했다. 연구소는 다음달 28일부터 시작되는 제34회 김해 가야문화축제 기간에도 지역 주민들은 물론 뜻있는 국민들의 서명을 함께 받기로 했다. 이 유물은 1980년대 초 김해시 대동면 덕산리에서 도굴된 것을 문화재 수집가인 故 이양선 박사(1999년 별세)가 어렵게 구해 1993년 다른 유물로 함께 경주김해박물관에 기증했다. 강성구 이사는 "이 박사께서 유물을 기증할 당시에는 국립김해박물관이 건립되기 전으로 이 토기가 경주박물관에 갈 수 밖에 없었지만 이제는 고향으로 돌아와야 한다"며 "10만명 서명을 받아 문화재청장에게 직접 김해 귀환을 건의하고 이 박사의 유족과도 협의해 귀환을 간곡히 호소할 것"이라고 말했다. 1993년 1월15일 국보로 지정된 이 토기는 높이 23.7㎝, 폭 14.7㎝, 밑지름 9.2㎝의 크지 않는 토기로 가야의 말갖춤(마구)과 무기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며 현재 김해시 청사는 물론 시내 주요 거리 곳곳에 시를 대표하는 모형 상징물로 설치돼 있다.
전북의 민속예술이 정리된다.전북도립국악원(원장 이선형) 학예연구실이 「전북의 민속예술 50년」을 발간한다.그동안 '한국민속예술축제'에 출전했던 전북 대표 작품을 대상으로 철저한 현장조사를 통해 그 원형을 기록할 예정.'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로 시작한 '한국민속예술축제'는 전통민속예술 발굴·전승을 위해 각 시·도별로 우수 민속예술을 1∼2작품씩 출품해 겨뤄왔지만, 더이상 발굴가능한 민속이 없을 것으로 판단해 이름을 바꿨다. 조만간 경연형태의 시상 제도도 없어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한국민속예술축제' 50년 역사 중 전북은 48년 동안 57개 작품을 출품했다. 이 중 「전북의 민속예술 50년」에는 중복출품한 작품을 제외하고 총 45개 작품(민속놀이 19개, 민요 13개, 농악 8개, 민속무용 5개)이 실린다.현재 박용재 학예연구실장이 남원·임실·순창지역을, 서경숙 연구사가 전주·완주·김제·정읍지역을, 김무철 연구원이 익산·무주·진안지역을, 김정태 연구원이 고창·군산·부안지역을 현장조사 중이다. 박 학예연구실장은 "현전하는 도내 민속예술의 원형을 보존한다는 의미 이외에도 조사된 민속예술을 국악원의 작품 소재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포함돼 있다"며 "대회 출품을 위해 연출됐던 부분은 제외하고 원형대로 기록할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조사대상으로는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이리농악과 임실필봉농악, 위도띄뱃놀이 이외에도 임실 기와밟기, 말천방농요, 고창 어르마타령 등 해당지역에만 알려져 있거나 사라질 위기에 처한 종목들이 포함됐다. 현재 현장조사가 진행 중이며, 책은 10월 중 발간될 예정이다.
명말청초의 서예가 왕탁(1592~1652)은 자가 각사(覺斯), 호는 치암(痴庵)·숭초(嵩樵)이며, 하남성 맹진(孟津) 출신이기 때문에 왕맹진(王孟津)이라 불렸다. 명나라 천계(天啓) 2년에 진사로 급제하여 남경예부상서와 동각대학사(東閣大學士)를 지냈으나, 청이 남경(南京)을 점령하자 항복하여 순치(順治) 연간에 예부상서를 제수받고 「명사(明史)」 편찬시 부총재를 맡았다. 이로 인하여 원의 조맹부처럼 실절(失節)했다는 비난이 뒤따랐는데 그것을 의식했는지 남에게 이를 드러내며 웃는 일이 없었다. 시호는 문안(文安)이다.명말청초에 동기창의 서풍이 흥기하여 유행하였고, 청초에 강희제가 그것을 혹애함으로써 일세를 풍미하였다는 것은 앞에서 언급한 바 있다. 그 뒤를 이어 왕탁이 출현하여 '書不宗晉, 終入野道'의 서예론을 제기하면서 상황이 일변하였다. 명말이라는 시대적 전환기에서 기존의 가치관념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과 새로운 가치에 대한 역설이 동시에 드러나는 발언이다. 조맹부의 복고주의가 제창된 이래 진의 왕희지를 중심으로 한 형사에 치중하다가 명말에 이르러서는 왕서를 존중하면서도 그 정신적인 면을 더 중시하게 되었다. 그러한 신개념의 서예론은 진을 종주로 삼지 않고 마침내 야도(野道)로 들어가기에 이른다. 이전에 유려한 면모를 보이던 서풍은 일변하여 보다 본질적이고 숨김없는 야성적 글씨로 전이되었고, 이로써 서가들의 개성적인 면모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법(法)의 차원에서 예(藝)의 차원으로 전개되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더불어 청초에 문자학과 금석학이라는 학적 기풍이 흥기함에 따라 서예는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다양한 전개양상을 보였다.명말청초의 개성적인 서법가로 꼽히는 왕탁 역시 신필왕탁(神筆王鐸), 오백년래무차군(五百年來無此君)이라는 후세의 명예로운 칭호가 있을 정도로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행초서 중에서도 특히 초서에 뛰어났다. 행초서 대부분이 자유분방한 결구와 장법을 토대로 구속됨이 없는 운필과 구성을 이루어낸다. 이로써 청대에 분기한 비학과 첩학을 한 곳에서 용해시킨 인물로 평가되며, 일기가성의 소쇄한 운필은 거침없는 기세로 장관을 연출한다. 뿐만 아니라 석묵(惜墨)하지 않고 임리한 묵훈(墨暈)을 이루어 일필휘지의 과감성을 여지없이 보여준다. 임산지(林散之)는 왕탁의 이러한 면을 "自唐懷素後第一人"이라 높이 평가하였다. 법칙적인 면모보다 예술가적 기질이 농후함을 일깨우는 평어로 왕탁의 서예사적 위치를 가늠할 수 있다. 왕탁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는 청나라 건륭제의 칙명으로 편찬한 「사고전서(四庫全書)」 이신전(貳臣傳)에 보인다.여기에 소개하는 '자작오율'은 말 그대로 자신이 지은 오언율시를 흥을 실어 쓴 것이다. 임리한 발묵과 얽매임이 없는 자유분방한 운필이 묵훈을 이루고, 기이한 결구와 공간분할이 신기(新奇)를 자아낸다. 방원(方圓)이 곡절하고 억양돈좌하며 전변하는 필획에서 그의 복잡한 정감과 분개, 비애 등 다층적인 심미적 가치를 느낄 수 있다. 그의 서품을 보노라면 문득 그가 "萬事不如杯在手"(만사가 손에 든 잔처럼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라고 한 말이 떠오른다. /이은혁(한국서예문화연구회 이사장)<이미지캡션> 王鐸, 自作五律 (39세작)
태조어진 경기전 봉안 600주년을 맞아 태조어진 구본 발굴 작업이 본격화된다.1일 전주시에 따르면 조선시대 태조 어진의 세초(어진을 만들고서 낡은 어진을 없애는 일) 과정을 확인하고, 세초와 관련된 각종 유물을 발굴하기 위해 최근 문화재청에 국가지정 문화재 현상변경 허가 신청을 했다.이번 태조어진과 관련된 문화재 현상변경 허가 신청은 지난 2007년에 이어 두 번째로 제기한 것.현상변경은 문화재의 보존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는 문화재의 정비나 주변 지역의 발굴·매립할 때 신청하며, 허가가 나오면 발굴 작업이 시작된다.시는 현상변경 대상을 태조어진 구본이 묻힌 것으로 알려진 경기전 북편 뒤뜰(600여㎡)로 한정했다. 이곳은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된 '어진이모도감의궤(御眞移模都監儀軌)'에 고종 9년(1872년)에 낡고 오래된 태조 어진을 백자 항아리에 담아 묻었다고 적혀있는 지점이다.시는 "올해는 태조어진이 모셔진 경기전의 창건 600주년을 맞는 해"라면서"발굴작업이 이뤄지면 조선시대에 어진을 어떻게 교체해 처리했고, 교체된 구본을 어떻게 보존했는지 등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필요성을 설명했다.이에 앞서 문화재청은 지난 2007년 '구본 존재 여부가 불확실하다'며 현상변경허가 신청을 반려했었다.전문가들은 발굴 작업이 시작되면 태조 어진의 구본과 이를 담은 백자 항아리, 백자 항아리를 보호하는 석함 등을 확보하게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또 세초와 매안 등 각종 의례에서 사용한 유물과 기록물 등이 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있다.시 관계자는 "다방면으로 구본이 묻혀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알려지고 있어 문화재청의 허가 가능성이 크다"며 "이를 통해 전통문화도시 전주시를 폭넓게 완성해나가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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