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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주 삼례는 역참(驛站)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 오래 전부터 역마(驛馬)의 주둔지였고 이를 위해 존재한 마을이었기 때문이다.국가의 공문서나 공공물자의 운송을 위해 설치된 역참은 꽤 오래 전부터 있었다. 중국은 BC 1000년무렵 역전(驛傳)제도가 있었고, 우리나라 문헌(삼국사기)에는 신라 소지왕때(687년)'사방(四方)에 우역(郵驛)을 설치하고'라는 기록이 보인다.하지만 이 제도가 체계화된 것은 고려 때다. 고려사(高麗史)에는 수도인 개경을 중심으로 22역도(驛道) 525역이라는 방대한 조직이 완성된 것으로 나와 있다. 조선시대 들어서는 이를 계승 보완했으며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으로 크게 흐트러졌다가 다시 정비했다.경국대전이나 증보문헌비고에는 전국의 도로망을 '9대로(大路)'로 나누고 간선과 지선, 노선번호, 이수(里數) 등을 명기하고 있다.호남지역은 9개 간선도로망중 제6로인 통영대로(서울-통영)와 제7로인 삼남대로(서울-제주)가 지나는데 삼례역이 분기역이다. 즉 서울-수원-천안-공주-여산을 거친 역로는 삼례에 이르러 전주-오수-남원-함양-진주-통영으로 가는 길과 금구-태인-정읍-장성-나주-영암-해남-제주로 가는 길로 갈리었다.따라서 전라도 및 경상도 일부와 관련된 조정의 명령이나 보고, 군사적 통신은 반드시 삼례를 거쳐 오갔다. 새로 부임하는 전라감사나 관찰사도 이곳을 지나야 했고, 부근에서 출도하는 암행어사도 이곳의 말과 역리(驛吏)를 징발했다.증보문헌비고에는 삼례역에 971명의 역원(오수역 1440명)이 있었고 호남읍지(1793년)에는 869명의 역원과 말 15필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각 역에는 관둔전(官屯田)과 공수전(公須田)이 지급되었다. 1895년까지 이 일대에는 200여개의 마방(馬房)이 즐비하였다. 또 삼례역은 전주의 앵곡(이서) 반석(동서학동), 임실 임피 여산 함열 태인 정읍 고부 부안 김제 등 12개 역을 거느리고 있었다.이처럼 교통의 요충지다 보니 동학혁명 당시 2차례에 걸쳐 전국적인 봉기가 가능했다.마침 완주군과 (사)우리땅걷기가 세미나를 열어 삼례에 '옛길 박물관'을 건립하자고 제안했다. 좋은 아이디어나, 무엇을 어떻게 담을지 콘텐츠부터 생각하는게 어떨까 싶다./조상진 논설위원
우세남은 자가 백시(伯施)이며 여요(余姚 절강성) 사람이다. 명문가에서 태어나 형 세기(世基)와 함께 고야왕(顧野王)에게 10여 년 간 공부하며 간혹 열흘동안 세수와 빗질을 하지 않을 정도로 전념하였다. 수대에 비서랑·기거사인이 되었고, 당대에는 태종의 신임을 얻어 홍문관학사·비서감에 임명되었다. 홍문관학사 시절에 구양순과 함께 서법을 교수하였는데 그보다는 한 살이 아래였다. 외모가 매우 유약하여 옷을 이기지 못할 정도였으나, 마음은 항상 정열에 불타 올바른 의론을 전개하였다. 양제(煬帝)는 그러한 면을 못마땅히 여겨 그를 등용하지 않았으나 당태종은 정반대였다. 당태종은 우세남을 서예고문으로 여겼을 뿐만 아니라 그의 인물됨을 사랑하여 우세남의 다섯 가지 뛰어난 점으로 덕행·충직·박학·문사·서간을 꼽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명군이 명사를 알아보는 법이다.'구당서' '우세남전'에는 당태종의 총애가 잘 나타나 있다. 당태종이 우세남을 홍문관학사로 임명하고 당대의 명사 방현령(房玄齡)과 더불어 문한을 담당하게 하였는데, 하루는 「열녀전」을 써서 병풍으로 만들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당시 책이 없어 우세남이 속으로 외워 썼는데 한 글자도 틀린 것이 없었다. 태종은 그의 박식함을 중히 여겨 바쁜 정무에 틈이 날 때마다 우세남을 불러 담론하며 경사(經史)를 함께 보았고, 때로는 군신들에게 우세남을 본받으라고 교시하였다. 그가 81세로 세상을 떠나자 "우세남은 나에게 한 몸과도 같았으니, 습유(拾遺)하여 빠진 것을 보충하고 잠시라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실로 이 시대의 명신이자 인륜의 준적(準的)으로서, 내가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그는 반드시 얼굴을 들이대고 간하였다. 이제 그를 잊어서는 안될 것이니 그 애통함을 어찌 말로 할 수 있으랴."하고 탄식하였다. 세상을 떠난 후 칙명에 의하여 그의 초상이 능연각(凌煙閣)에 그려졌다. 저술로 「북당서초」가 있는데 이것이 전존하는 최초의 유서(類書)이다. 서예이론으로 「서지술(書旨述)」, 「필수론(筆髓論)」 등이 있다.우세남이 일찍이 지영 스님에게 사사하여 서명을 날리며, 홍문관에서 구양순과 함께 해서를 교수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장회관은 '서단(書斷)'에서 구양순과 우세남을 비교하여 "우(虞)는 안으로 강유(剛柔)를 머금고, 구(歐)는 밖으로 근골(筋骨)을 드러냈다. 군자는 재주를 감추는 법이니, 우가 더 낫다고 할 수 있다."라고 평하였다. 안에 엄중함을 간직하여 밖으로 표출된 뛰어난 그의 인품은 해서의 걸작 '공자묘당비(孔子廟堂碑)'에도 잘 나타나 있다. 온화하며 높은 기품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지금까지 소개한 초당삼대가 구양순·저수량·우세남 등으로 대표되는 초당의 해서는 힘의 균형이 잘 잡혀 있다. 진나라 사람들의 행·초서에서 볼 수 있는 자유로움과 미완의 감각은 이미 희박해졌다. 그것은 과불급(過不及)이 없는 합리주의 정신이 이와 같은 부동(不動)의 균제미를 낳은 것으로 보인다. 진나라와 당나라가 공통적으로 동일한 기반 위에 서 있지만 굳이 구분하자면 전자는 균형(均衡)의 조형이고, 후자는 균제(均齊)의 조형이라 말할 수 있다. 초당의 해서는 완성된 균제미에 그 특색이 있다. 이것은 그 당시 문화에서 볼 수 있는 국가성 내지 공공성을 가장 잘 상징하는 것이다. /이은혁(사단법인 한국서예문화연구회 이사장)
<< 전라감영 복원과 관련해 살펴볼 수 있는 국내 사례는 대구의 경상감영, 원주의 강원감영, 공주의 충청감영 정도다. 그러나 충청감영의 경우 1994년 기존의 감영터를 학교 부지로 활용하고 도심부 외각에 이전복원하면서 감영의 공간구조와는 차이가 생기게 됐다. 선화당과 동헌을 활용해 시민들을 대상으로 국악 교육을 실시하는 등 시민공간으로 활용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는 있지만, 이전복원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정통성 문제에 있어 논쟁의 여지가 있다. 충청감영을 원래 감영부지였던 곳에 다시 복원해야 한다는 의견이 계속적으로 제기되고는 있지만, 실현가능성은 낮다.따라서 공원으로 정비해 '도심 속 시민휴식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는 경상감영과 국가사적지로 지정해 '문화재 복원 형태'를 띄고 있는 강원감영의 사례를 살펴보고자 한다. >>대구 경상감영을 찾아간 지난 11월 13일에는 경상감영 관광자원화 사업 일환으로 징청각에 대한 유구 조사가 실시되고 있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경상감영 복원 사업은 벽체 없이 기둥만 남아있던 선화당과 징청각의 벽체와 창호를 복원하는 것.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의 주도로 징청각의 기단이 확인된 상태였다.경상감영 선화당 천장에는 용이 그려져 있었다. 대구지역 전문가들은 "용이 임금을 상징하는 것을 고려한다면 순종이 경부선 철도를 만들었을 때 경상감영에 머물렀을 가능성이 높다"고 해석했다.1601년 대구로 이전한 경상감영(대구광역시 중구 포정동 21번지 일대)은 각각 지방유형문화재 1호와 2호로 지정된 선화당과 징청각이 남아있다. 관찰사가 공무를 보던 선화당은 1730년 두차례의 화재가 있었으나 순조 7년(1807)에 재건됐다. 선화당과 함께 건립된 것으로 보이는 징청각은 감사 처소로 쓰였던 곳으로 역시 1730년 두차례의 화재가 있었지만 정조 13년(1789)에 재건됐다. 선화당 뒤 왼편에 위치하고 있는 징청각은 감영 건물이 남아있는 강원감영이나 충청감영에도 없으며 경상감영에만 유일하게 남아있다.경상감영의 대지면적은 총 1만4800여㎡. 선화당은 184㎡, 징청각은 254㎡다. 경상감영터는 원래 경북도청사로 활용됐지만 1966년 도청사가 이전하고 난 후 1970년 중앙공원으로 조성됐다. 이후 1997년 아예 '경상감영공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경상감영 복원에 있어 가장 큰 어려움은 여론 형성이 잘 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감영 건물이 있는 공원을 일상적으로 지나다니면서도 정작 시민들은 감영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 수문장 교대식이나 경상감사 도임순력 행차 등이 경상감영에서 재연되기도 하지만, 그 때 뿐 공원을 찾는 이들은 대부분 노년층이었다. 감영 주변에는 환갑 지난 마담이 아직도 한복을 입고 손님을 맞는 다방이나 일본식 정종을 파는 술집 등 노인들의 향수를 불러일으킬 만한 장소들이 많았다. 감영을 관리하는 대구 중구청은 소비력이 있는 젊은 사람들을 끌어들여 경제효과를 누리고 싶어하지만,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감영을 공원으로 활용하는 데 있어 문제도 있다. 행정적으로 문화재 관리와 공원 관리, 즉 두군데의 관리를 받는다는 것이다. 이는 곧 두가지 법이 적용된다는 의미로, 새로운 시도를 하고 싶어도 제약이 많아 결국 현상유지밖에 안되고 있었다.결과적으로 경상감영 복원은 시민단체의 요구와 정치인의 공약 사업으로 추진되기 시작했으며, 현재 향토사학자와 교수, 언론인 등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한 자문위원회를 구성해 운영하고 있다.대구광역시 이진현 학예연구사는 "결국은 예산문제였고, 문화재를 복원해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 문화관광 명소로 육성하겠다는 '경상감영 관광자원화사업'을 통해 국비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관광자원화사업은 대구근대역사관 조성과 함께 진행되는 것으로, 감영 복원 보다는 조선식산은행 대구지점으로 사용됐던 대구산업은행 건물을 대구근대역사관으로 바꾸는 사업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 이 학예연구사는 "왜세 수탈의 현장에 대구 정체성을 담을 수 있냐는 부정적 의견도 있지만, 대구의 많은 근대문화유산을 총괄할 만한 구심점이 필요했다"고 덧붙였다.경상감영 복원은 실질적으로는 복원이 아니라 보수 개념의 제한적 복원이었다. 일부 언론 보도 등을 통해 완전복원이라는 오해도 받고 있지만, 장기과제일 뿐 세부적으로 계획된 것은 없다. 대구광역시 역시 완전복원이라는 표현에 대해 부담스러워 했으며, 실제로 경상감영을 완전복원하기 위해 반드시 확보해야 할 부지인 병무청이 돌연 이전하겠다는 의사를 바꾸면서 감영터 확보는 더욱 어려워 졌다.그러나 경상감영과 관련된 자료 수집만큼은 철저하게 하고 있다. 1998년 「경상감영 사백년사」를 발간하면서 경상감영 관련 자료가 1차적으로 정리됐으며, 이후 2004년 조선시대 경상감사의 부임 과정과 연중 활동 내역을 담은 「영영일기(嶺營日記)」와 경상감사가 조정에 올려보낸 각종 공문서의 내역을 담은 「영영장계등록(嶺營狀啓謄錄)」을 국역했다. 경상북도에서 발간한 「경상감영의 종합적 연구」에는 감영 관련 자료 283건의 목록 및 해제가 수록됐으며, 2008년 「경상감영공원비석 자료집」이 별도로 발간됐다.경상감영 복원과 관련해서는 경상감영이 최초로 설치됐던 상주도 관심이 많다. 도시가 낙후되면서 경상감영을 통해 오래된 도시로서의 역사성을 내세우고 이를 도시 발전의 동력으로 삼기 위해 '상주 경상감영 테마파크 조성' 사업을 추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
"욕심 같아서는 좀더 많은 건물을 복원하고 싶지만, 자칫 영화 세트장처럼 되어버릴 수도 있다는 우려가 큽니다. 규모나 방법 등 복원 자체는 여러가지 방향이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활용방안이니까요."「경상감영 사백년사」 발간에 참여하는 등 10년 전부터 경상감영 복원을 주장해 온 조영화 대경대학 건축리모델링과 교수(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조교수는 "전국적으로 감영 복원 붐이 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며 "경제적으로 여유로워 지면서 외국 문화와 비교했을 때 우리도 뒤지지 않는다는 자부심에 일종의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대구는 오래된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전통건축물이 없다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2011년 세계육상선수권대회가 열리는데 현대 건축물 말고는 대구 역사를 보여줄 만한 게 없다는 여론이 일면서 기회가 잘 맞아떨어진 거죠. 경상감영 복원을 통해 감영의 흔적이라도 남겨 역사적 의미를 찾자는 겁니다."조교수는 "전주는 풍남문과 객사, 한옥마을 등 지금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전주다움을 나타낼 수 있는데 전라감영이나 4대문 복원을 무리해서 할 필요가 있나라는 생각도 든다"며 "전주가 너무 옛날 도시화 되는 것은 아닌가 걱정된다"고 말했다."경상감영은 부지 확보도 안돼있고 자료도 많지 않은 편이라 기록을 토대로 한 건물 복원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전라감영은 복원 규모와 관련해 여러 의견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도시 역사성을 생각해 봤을 때 전부 복원하는 것은 무리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역사의 맥락성을 무시하기 보다는 공간의 상징적 의미를 살려 중요한 건물만을 복원하는 방법을 권하고 싶어요."조교수는 옛 전북도청사에도 많은 관심을 나타내며 "도시에는 근대 역사도 필요한 만큼, 옛 도청 일부분을 남겨놓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조언했다. 또 "강원감영은 그나마 낫지만 이전복원한 충청감영은 크게 감흥이 없다"며 "건물만 달랑 있어서는 공간을 제대로 인식할 수 없다"고도 덧붙였다.1980년대 중반 전주향교와 관련된 논문을 쓰기도 했던 조교수는 "전주향교는 권위나 배치방식, 건축적 의미가 큰 데도 불구하고 그 위상에 비해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며 아쉬워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원장 김정배)은 16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한국의 문화상징'을 주제로 학술심포지엄을 개최한다. 이어령 이화여대 석좌교수가 한국사상을 주제로 기조강연을 하고 박일훈 국립국악원장과 최광식 국립중앙박물관장이 각각 무형문화와 유형문화에 대해 발표한다. 이 참 한국관광공사 사장과 조희문 한국영화진흥위원장은 각각 관광과 한류를 주제로 발표한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은 영문책자 '21 Icons of Korean Culture'(한국의 문화상징 21가지) 발간을 기념하고 한국문화 이미지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이번 심포지엄을 개최한다고 밝혔다.
'춘향전'과 '상춘곡' 등 전북을 대표하는 고전 문학의 소재를 문화상품화 해 세계화하자는 주장이 제기됐다.지난 12일 오후 2시 전북대 전라문화연구소 세미나실에서 열린'한국문화세계화전략심포지엄'에서 최종열 전주대 교수는 발제 '한국문화 상품화 통한 세계화 전략'을 통해 "익산의 '서동요'와 남원의 '춘향전' 에 담겨진 로맨스를 통해 사랑의 시장을 만들어 이를 세계화하자"며 "특히 익산은 보석산업클러스터를 주축으로 사랑을 테마로 한 영화 시장, 화장품 시장 등도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최 교수는 전주대 산학협력단이 만든 애니메이션 정극인 '상춘곡'을 예로 들면서 '단표누항(소박한 시골 생활)'을 각종 체험으로 상품화하고, 식기류인 방자유기와 칠기도 개발하면 좋겠다고 덧붙였다.군산의 대표 근대문화유산인 옛 군산세관 청사(전북도 기념물 제87호)를 근대문화교육의 장으로 만들어 한국문화를 널리 알려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됐다.김미경 나주시청 문화관광과 담당자는 발제 '스토리텔링을 통한 문화관광'을 통해 "옛 군산세관 청사가 벨기산 붉은 벽돌과 뾰족탑을 세운 지붕 등 유럽 건축 양식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곡식과 군수물자를 일본으로 보내는 창구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이를 초점에 둔 스토리텔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어 김 담당자는 "군산에 살았던 일본인 포목상 히로쓰가 지었던 히로쓰 가옥은 일본인 관광객 숙소로 활용하고, 째보 선창 일대를 주막거리로 만들어 향수를 주는 공간으로 만들자"고도 했다.전북대 국제문화교류연구소(소장 진상범)와 전북대 차세대컨버전스정보서비스 기술연구센터(소장 김용성)가 공동으로 주최한 이날 심포지엄은 '한국문화 정체성의 세계화(제1분과)', '한국음식의 세계화(제2분과)', '한국관광의 세계화(제3분과)'등으로 나뉘어 진행됐다.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한반도의 호랑이와 인간은 서로 삶의 터전을 존중한 덕분에 평화관계를 유지했으나 조선시대 들어 호랑이 사냥이 빈번해지면서 호환(虎患)이 급증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런 학설은 2010년 경인(庚寅)년 호랑이해를 앞두고 한반도 역사 속에서 인간과 호랑이가 어떤 관계를 맺어왔는지를 논하는 국제학술대회를 이틀 앞둔 13일 제시됐다. 서울대 수의대 이항 교수와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김동진 교수는 오는 15일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열리는 이 대회를 앞두고 우리 조상과 호랑이의 관계 변천사를 규명하는 논문을 발표한 것. 먼저, 이 교수는 "고려 이전까지 한반도의 인간과 호랑이는 대체로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했다"고 소개했다. 삼국과 고려 사회의 주류 사상은 짐승일지라도 까닭없는 살생을 삼가는 불교였기에 인간과 호랑이가 서로 영역을 존중하며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게 이 교수의 설명이다. 김동진 교수도 "실제 고려시대 지식인인 김부식과 이규보 등은 맹수를 쫓아내는 데는 찬성했지만, 적극적인 포획과 살상을 장려하지는 않았다"고 강조했다. 김 교수와 이 교수의 발표문에 따르면 사람이 사는 곳에서 호랑이가 물러나게 되고, 사람이 떠나면 그곳에 호랑이가 와서 살게 되는 과정이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14세기 조선의 건국을 주도한 유학자들은 맹수인 호랑이를 포획하고 죽이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사람과 호랑이의 평화관계가 적대적인 관계로 급변했다. 조선인들은 농업중시 정책에 따라 대대적인 농지 개간을 추진하면서 호랑이의 주된 서식지였던 저습지가 수전(水田)으로 개발된 탓에 호환(虎患)이 크게 늘었다. 조선이 호랑이 포획을 전문으로 하는 군사조직인 착호군(捉虎軍)을 편성하는 등 체계적인 포호정책을 펼치면서 한반도의 호랑이는 급격히 줄었고 결국 20세기 초 일제의 해수구제 정책으로 명맥이 끊겼다. 호랑이를 만난 백성의 행동도 시대에 따라 크게 달라졌다. 조선 이전의 한반도인이 호랑이의 공격을 받으면 일행 중 한 명 정도의 희생을 감수하거나 희생당한 가족의 복수도 포기하는 등 호환을 운명으로 받아들였지만, 조선 백성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호환에 맞섰다는 것이다. 실제로 태종 13년(1379년) 경상도 안동에서 남편을 물고 달아나는 호랑이를 아내가 목궁(木弓)으로 때려 쫓았고, 세종 2년(1398년)에는 역시 안동에서 호랑이에게 물린 남편을 아내와 두 딸이 몽둥이를 들고 쫓아가 살려낸 기록이 있다. 단종 1년(1441년) 함길도에서는 학생신분이었던 신경례가 보여준 모습은 훨씬 극적인 사례다. 신경례는 아내 내은덕과 함께 읍성으로 가던 길에 호랑이를 만났고, 호랑이는 상대적으로 쉬운 먹잇감인 아내를 물려 했다. 이에 신경례는 호랑이에게 달려들어 허리를 잡고 쓰러뜨리고서 발로 얼굴을 차고 배에 올라타 몸싸움을 벌였고 결국 마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호랑이를 죽일 수 있었다. 김 교수는 "신경례 부부와 마을 사람들의 행동은 상당한 군사적 준비와 훈련이 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라고 설명했다. 이항 교수는 "우리는 지금 호랑이를 민족문화의 상징이자 생태계의 최고조절자로서 지켜나가야 할 중요한 자연유산의 하나로 인식하고 있지만, 조선과 일본강점기의 호랑이는 말 그대로 해수에 불과했다"고 전했다. 이 교수는 "조선의 포호정책이나 일제의 해수구제 정책을 반성은 할 수 있어도 일방적으로 비판하거나 비난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중요한 것은 지금이라도 한반도에서 호랑이와 표범을 되살리려는 적극적인 노력이다"라고 덧붙였다.
병인양요 때 약탈해간 외규장각 유물을 반환하라며 프랑스 정부를 상대로 행정소송을 진행 중인 문화연대는 지난 4일 파리 행정법원에서 열린 심리에서 "프랑스 정부가 약탈임은 인정했다"고 9일 주장했다. 문화연대는 "심리에 참석한 프랑스측의 정부 대변인(Public Reporter)이 기존에 법원에 제출한 서면을 그대로 읽으면서 '불행한 약탈'"이라고 표현했지만 지금은 프랑스 소유이니 반환은 안 된다는 설명을 제시한 것으로 전했다. 문화연대 황평우 문화유산위원장은 "이 소송을 맡아 진행해온 김중호 변호사로부터 최근 소송 상황 등을 보고받았다"며 "외규장각 의궤를 발굴, 목록화해 반환운동을 촉발시키고 현재는 수원 가톨릭의대 성빈센트병원에 입원 중인 박병선 여사도 이 소식을 듣고 기뻐하셨다"고 말했다. 황 위원장은 "정확한 판결일은 알 수 없지만 6개월이내에 판결이 나올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문화연대는 2007년 외규장각 도서 반환을 위해 약탈 물건을 정부 재산으로 편입하는 프랑스의 관련 법령이 잘못됐다는 이 소송을 제기했으나 그동안 답보 상태를 보이다가 지난 4일 처음이자 마지막인 심리가 열렸다. 문화연대는 "이 소송에서 승리하면 의회 승인을 거쳐 외규장각 도서를 반환받을 수 있게 된다"며 "만일 패소한다면 이번 소송 때 처럼 시민 모금을 통해 소송 비용을 조달하고 항소할 것"이라고 말했다.
20주년을 맞는 한국향토사연구전국협의회(회장 이치백)가 주최하고, 30주년을 맞는 전북향토사문화연구회(회장 이치백)가 주관하는 학술대회가 11일 오전 11시 전주 코아호텔 대회의실에서 열린다.'실학과 반계 유형원'을 주제로 여는 이번 학술대회는 한국실학의 원전인 「반계수록」을 지은 유형원을 재조명하고, 그의 업적을 기리는 자리.김재영 전북대 명예교수가 '반계 유형원에 관한 연구'를 주제로 발제한다.김 교수는 " 「반계수록」은 그의 만년 저작으로 그가 지방을 유람하면서 민정을 살피고 농민과 더불어 생활하면서 얻어진 제세구민론(濟世救民論)의 집대성이라고 할 수 있다"며 "방치된 채 있는 부안의 반계서당은 하루빨리 복구돼야 한다"고 말했다.
당대종의 치세기인 정관(貞觀) 연간에 걸출한 서예가로서 또 한 사람 저수량을 들 수 있다. 저수량(596~658)은 절강 항주 전당(錢塘) 사람이며 자가 등선(登善)이다. 당태종과 고종조에 벼슬하여 고위직에 올랐으나, 만년에 고종이 무측천에게 양위하려는 것을 반대하다 노여움을 사 좌천되어 애주(愛州)에서 보내다 사망하였다. 일전에 소개한 구양순, 우세남과 더불어 초당삼대가로 불린다.정관 19년(645) 1월 7일, 삼장법사 현장(602~654)은 17년에 이르는 인도유학을 마치고 경론(經論) 657부를 꾸려 당나라의 수도 장안에 돌아왔다. 그리고 곧바로 한문 번역에 착수하여 익년 7월 인도와 서역에 대한 견문록을 완성하는 한편, 우선 75부 1335권을 번역해 내는데 성공하였다. 당태종은 국가적 사업으로 그를 후원하고 있었는데 현장의 요청에 따라 정관 22년(648) 8월 직접 '삼장성교서'를 찬하고, 동시에 황태자가 서기(序記)를 지어 저수량에게 건네주었다.바로 그해, 황태자는 생모 문덕황후(文德皇后)를 추선하기 위하여 장안의 진창방(晉昌坊)에 대자은사(大慈恩寺)를 창건하였다. 영휘 3년(652)에 새겨 안치할 것을 희망했으나 그 다음해 탑의 최상층에 두 비가 세워졌다. 그러나 탑은 붕괴되어 버렸고, 측천무후가 장안에 있을 때(701~704) 새로 7층 전탑(塼塔)을 세우고, 1층 남면 입구 동쪽벽에 서비(序碑)를, 그리고 서쪽 벽에 서기비(序記碑)를 넣었다. '안탑성교서'란 이 두 비를 포함해서 호칭하는 말이다.'안탑성교서'는 영휘 4년(653) 저수량의 나이 58세 때의 글씨이다. 같은 모양으로 제작된 두 개의 비석에는 팔분으로 '大唐三藏聖敎之序' 8자가 우에서 좌로 2행에 걸쳐 쓰여 있고, 전액 '大唐三藏聖敎序記' 8자는 좌에서 우로 2행으로 배치되었다. 본문의 글씨 역시 이와 같은 방향으로 쓰여 있어 대칭구조를 보이고 있다. 이것은 비석을 세울 당시부터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 것이다. 序碑는 21행에 매행 42자로 전 821자인데 불교의 전래와 현장법사의 공덕을 칭송하는 내용이 새겨져 있으며, 序記碑는 20행에 매행 40자로 전 642자이며 아버지 태종의 이해와 현장이 행한 사업의 의의를 서술하고 있다. 이 글씨는 살이 빠지고 골기가 강한 획을 구사하고 있으며, 태세와 강약의 변화가 많다. 구양순의 구성궁예천명이 절제미를 강조하여 전형화된 법칙을 보여주고 있다면, 저수량의 안탑성교서는 결구에서 공간의 운용이 뛰어나 경쾌하고 맑은 풍운(風韻)을 자아낸다. 저수량의 해서비 중에서 가장 늦게 쓰여진 것이므로 자신의 독자적인 서법을 완성한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초당삼대가는 왕희지 이래로 전해져 온 필법을 해서로 전형화한 인물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글씨는 비록 소해이지만 이미 체세가 확립되어 법칙화 되어 있으며, 결구의 전형성을 잘 보여준다. 저수량의 '안탑성교서'는 내용면에서는 회인이 집자한 '집자성교서'와 같은 류이며, 형식면에서는 구양순과는 차별되는 또는 당대 서법의 한 전형성을 보여준다. 이외에도 '안탑성교서'보다 1년 전에 쓰여진 '방현령비'가 있고, 20년 전에 쓰여진 '이궐불감비'가 용문석굴 벽면에 자리해 있다. 모두 색다른 면을 보이고 있으나 정관 12년에는 당태종을 명을 받고 내부에 수집된 왕희지의 글씨를 감정하여 '우군서목(右軍書目)'을 작성하고, '난정서'를 탑모한 것을 보더라도 그의 서법과 초당삼대가가 왕희지와 결코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한국서예문화연구원 이사장
창극과 창작판소리가 전통 판소리가 지닌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판소리 운동으로 주목받았다.한국유네스코연맹 전북협회(회장 윤석길)가 주최한 '판소리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 선정 6주년 기념세미나'가 8일 오후 3시30분 전주관광호텔에서 개최됐다.'판소리 공연예술의 현재와 미래'를 발표한 손태도 서울시 문화재 전문위원은 "공연예술은 어떤 식으로든 당대 시대정신과 일정한 관계를 맺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조선 후기 삶과 그와 관련된 예술 세계를 가지고 있는 전통 판소리는 그 자체만으로는 오늘날의 예술로는 한계가 있다"며 전통 판소리의 음악적 성과를 잇고 발전시킬 수 있는 근대적 공연물로서 창극과 창작판소리에 대한 기대를 나타냈다.손 위원은 그러나 "이러한 판소리 운동이 전통 판소리의 연장선상에서 해결방안을 찾아야 하는데, 창작 판소리의 경우 재담 소리나 재담극의 상태로 돌아가려는 경향이 있다"고 비판했다. 창극과 관련해서는 시대 정신과 연결될 수 있는 내용으로 창극 대본을 쓸 필요가 있다고도 덧붙였다.류수열 전주대 교수 역시 "판소리가 생명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현대인의 감정을 담아내는 예술 양식으로 변모할 필요가 있다"며 "원형은 원형대로 유지하면서도 이를 새롭게 변형시려는 노력이 동시에 시도돼야 한다"고 주장했다.'판소리 성음의 개념과 실제'를 주제로 발표한 전인삼 전남대 교수는 판소리 용어들이 주로 창자들의 구술을 바탕으로 정리되다 보니 명확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전교수는 "판소리 용어에 대한 개념이 분명하게 정리돼 있지 않다 보니 판소리 연구에 혼선을 초래하고 연구성과를 도출하는 데 어려움을 주기도 한다"며 판소리 용어 정립의 시급성을 강조했다.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김봉건)는 8일 서울 홍은동 그랜드힐튼호텔에서 '한ㆍ중ㆍ일 건축문화유산 보존 국제학술심포지엄'을 개최했다. 이번 심포지엄에서 한국 국립문화재연구소, 중국문화유산연구원, 일본 나라문화재연구소 등 3개국 문화유산 연구기관 소속 연구자들은 건축문화유산 보존의 학술적ㆍ기술적 경험을 공유하고 향후 과제를 모색했다.
경북 경산의 한 도시개발 부지에서 청동기시대 주거지가 무더기로 발굴됐다. 재단법인 영남문화재연구원은 경북 경산시 옥산동 300번지 일대 중산1지구 도시개발 부지에서 청동기시대 주거지 44기와 고려시대 기와가마 1기, 조선시대 주거지 2기 등을 발굴했다고 8일 밝혔다. 연구원은 또 현장에서 무문토기 발과 방추차, 석검, 석촉, 석도, 다량의 기와도 함께 발굴했다. 이 가운데 주거지는 청동기시대 전기 중엽과 후엽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대구와 경북지역에서는 다소 이례적으로 '울산식 주거지'의 전형적인 형태로 보이는 배수기능 관련 외부 돌출구도 확인됐다. 연구원측 은 이와 함께 유적의 중앙 부위에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동서방향의 도로 유구 등도 발굴했다고 밝혔다. 연구원 관계자는 "이번에 발굴된 청동기시대 유구는 주변에서 확인된 다수의 청동기 시대 유적과의 비교 검토를 통해 청동기시대 마을 간의 관계를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될 전망"이라고 말했다.
전라감영 복원에 있어 가장 큰 고민은 감영 복원 규모와 옛 도청사 건물 활용, 사업비 확보 문제다.특히 감영 복원 규모는 전라감영 복원의 공간적 범위와 건물의 복원규모를 결정 짓는 것으로 전라감영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따라 다양한 입장과 복원방식이 제기되고 있다.중요한 것은 전라감영이 단순히 건물 복원에 국한되어서는 안되며 원형 복원이든 부분 복원이든, 감영터 완전 복원이든 축소 복원이든, 현재와 미래를 담아내는 도심재생의 전략이 도입돼야 한다는 것이다.전라감영 복원은 매우 조심스러운 문제다. 문화재 복원이 자칫 잘못하면 개발 제한 문제로 주변 지역 주민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한 번 잘못 됐을 때 이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시간과 노력, 비용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전라감영 공간적 복원범위와 건물 규모전라감영 복원에 있어 가장 큰 논쟁은 복원의 공간적 범위와 역사적 건물의 복원규모다.역사적 건물 복원과 관련해서는 원형 복원과 상징적 부분 복원으로 나눌 수 있다. 원형 복원의 경우 대개 역사를 전공한 역사학자들을 중심으로 제기되고 있다.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목표로 전주문화가 한국문화를 대표할 수 있도록 최대한 원형을 살릴 수 있도록 복원하자는 것이다. 고고학적 발굴과 자료조사 등 철저한 고증을 통해 전라감영을 문화재적 가치를 가진 역사적 고건축물로 복원할 때 관광자원으로서도 완전한 가치를 지닐 수 있다는 주장이다.부분 복원은 전라감영의 핵심시설을 상징적으로 복원하고 나머지 지역에는 문화시설을 배치해 주변과 연계하는 상업적 목표를 추구하자는 것이다. 대개 감영복원으로 인해 생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주변 상가 주민들의 입장이다. 이 경우 관찰사가 사무를 보던 선화당(宣化堂), 안채인 내아(內衙), 감영 입구인 포정루(布政樓) 등이 복원해야 할 감영 핵심시설로 거론되고 있지만, 선자청(扇子廳)이나 지소(紙所), 인출방(印出房) 등 전라감영의 특징적인 공간이자 전주의 정체성이 담긴 공간들은 살려야 하지 않겠냐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복원의 공간적 범위와 관련한 논의는 전라감영터 완전 복원과 옛 도청사 부지 복원 정도로 나눠볼 수 있다. 그러나 전라감영터 완전 복원은 역사적 사실규명이 어렵고 엄청난 사업비가 필요, 실현 가능성이 낮다. 옛 도청사 부지 복원은 현재 부지를 확보한 상태라 재정부담이 최소화되고 단기간내 사업추진이 가능하다. 그러나 옛 도청사만을 복원 부지로 삼을 경우 주요시설의 규모있는 복원이 불가능해 역사성이 떨어질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옛 도청사 건물의 활용전라감영 복원과 관련, 옛 도청사 건물의 존치 여부도 중요한 논의 대상이다. 전라감영 복원을 위해 무작정 건물을 헐어버릴 수는 없기 때문. 특히 옛 도청사는 행정구역이 개편되고 감영이 해체된 이후에도 전라북도 행정의 중심지로서 역할을 해왔다는 점에서 전라감영의 맥을 잇고 있다. 건물 역시 근대문화유산으로서 가치가 있는 만큼 존치해야 한다는 의견이 힘을 얻으면서 옛 도청사 건물 활용에 대한 고민이 요구되고 있다.구체적으로는 가치가 높은 건물을 등록문화재로 지정하는 등 도청사 건물과 의회 건물은 존치, 증축한 건물과 경찰청 건물을 철거하자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최근에는 근대문화유산이나 산업유산을 문화공간으로 활용하는 움직임이 전 세계적으로 일면서 옛 도청사 건물을 리모델링 후 도서관이나 미술관, 호텔 등으로 활용하자는 의견도 호응을 얻고 있다.하지만 전라감영 복원을 최대한 원형에 가깝게 해야 한다는 입장에서는 전체건물을 철거, 전라감영 복원규모가 확대되기를 바라고 있다.▲ 복원 사업비 확보지난 10월 전주시가 '전라감영지 역사공간 조성사업비' 100억원과 '전주성 4대문 복원사업비' 28억원 등 총 128억원을 내년 예산으로 지원해 줄 것을 정부에 요청했지만,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전라감영지 역사공간 조성사업'에 따르면 전주시는 내년부터 오는 2021년까지 총 748억원을 투입하고, '4대문 복원사업'에도 내년부터 2020년까지 총 1800억원을 투입한다는 계획이다. 국비 확보 없이는 추진할 수 없는 대규모 사업인 만큼 시는 국비를 지원받을 수 있는 대안을 마련하겠다는 입장이다.국가 사적지로 지정될 경우 사업비 확보는 용이하지만, 전라감영 부지에서 객관적인 유구나 유물이 발견되지 않아 국가사적지 지정은 어려운 상황인 것으로 알려졌다.
전라감영은 조선시대의 전라도, 즉 전북과 전남, 제주도를 통괄했던 지방통치기구다. 전라감영 복원은 호남제일성으로서 전주의 이러한 역사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이동희 전주역사박물관 관장은 "전주가 지금은 왜소해 졌지만, 조선시대 제주도까지를 포함한 호남 일원을 전주에서 다스렸다는 것은 곧 당대 전주의 위상이 어떠했는가를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조법종 우석대 교수는 근대 관민협치의 역사공간으로서도 전라감영을 주목했다. 조교수는 "전주는 한국역사상 최초로 관과 민이 함께 논의해서 지역을 다스리는 관민협치의 민주적 정치경험을 이뤄낸 역사적 도시로, 이를 구체적으로 실천한 것이 동학농민혁명 집강소 통치"라며 "그 공간인 전라감영이 회복돼 그 현장에서 역사적 사실이 확인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관장 역시 "동학농민군은 각 군현에 집강소를 두고 이를 통괄하는 대도소를 감영과 객사에 두어 개혁을 전개했다"며 "세상을 한바탕 바꾸고 외세를 물리쳐 민족자존을 지키려고 했던 우리 민족과 전라도의 위대한 역사였던 동학혁명의 중심이 바로 전라감영이었다"고 덧붙였다.전라감영 복원은 전주 전통문화도시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관장은 "전라감영에는 전주가 자랑하는 한지를 뜨던 지소와 책을 찍어내는 인출방, 부채를 제작하는 선자청이 큰 규모로 자리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전주대사습놀이에 등장하는 통인청이 선화당 옆쪽에 있었다"고 설명했다. 조교수는 "결론적으로 전라감영은 전통교육·학술문화·음식문화·판소리예술문화·전주한지와 부채문화의 중심으로, 전라감영의 복원과 활용을 통해 전주문화를 재현하고 계승해야 한다"며 "전라감영 복원은 역사와 문화의 복원이란 측면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전라감영 복원을 통해 조선시대 지방통치기구인 감영의 모습을 제대로 읽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전라감영의 경우 현존하는 건물은 없지만, 남아있는 자료들을 바탕으로 건물을 재현해 냈을 때 경상·충청·강원감영 등과 관련지어 감영의 전면을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다. 또 경상·충청감영 등의 소재지가 중간에 이전된 것과 다르게 전라감영은 감영제가 실시되고 해체될 때까지 타 지역으로의 이전없이 전주에만 있었다.
전라북도가 2010년도 문화예술단체 지원사업(문예진흥기금 지원사업, 무대공연작품제작 지원사업, 푸른음악회)과 관련해 9일 오후 3시 도청 대회의실에서 설명회를 개최한다.2010년에는 문화예술단체 지원사업이 총 3차로 나눠 진행된다. 1차 공모(10일~내년 1월 8일 신청접수)는 문예진흥기금 20억원, 무대공연작품제작 8억원, 푸른음악회 1억원. 지원분야는 예술창작역량강화, 신진예술가지원, 생활문화예술활동, 찾아가는문화활동(푸른음악회), 장애인·소수자 문화활동지원, 문화예술교육체험, 문화예술기반구축, 사이버문화활동, 문화예술교류활동, 문화예술자료조사연구, 전통문화자료보존발굴, 예술가구술생애사기록, 계기성 프로그램지원사업, 예술전용공간지원, 무대공연작품제작 등으로 나뉜다.2차 공모(10일~24일 신청접수)는 지역특성화사업(공연예술집중육성사업 및 수도권전시지원사업)에 4억4천만원, 3차 공모(2010년 2월 중순경 신청접수)는 공연장 상주단체 육성지원에 2억원, 레지던스 프로그램 지원사업에 3억원이 지원된다.그동안 지원되던 우수기획 다년간 지원사업(공연예술집중육성사업, 지역소재창작물집중육성사업)은 기타 사업과의 중복 및 신청 저조로 중단됐으며, 무대공연작품제작지원사업은 서류심의만으로 사업대상을 선정하게 됐다. 또한 예산집행의 투명성을 위해 보조금 교부신청시 자부담액을 보조금 관리전용통장에 입금한 후 사본을 제출해야 한다.신청접수는 전북도청 문화예술과 방문 또는 우편으로 가능하다. 문의 063) 280-4844, 4846
프랑스 북부의 폐광 지대에 루브르 박물관 분관이 들어선다. 프레데릭 미테랑 문화장관과 루브르 박물관 관계자들은 4일 북부 폐광 지대의 중심도시인 랑스에서 루브르 분관 착공식을 가졌다. 허름한 집들이 일렬로 나란히 늘어선 탄광 지대의 언덕배기에 들어설 이 건물은 유리와 알루미늄으로 외장한 늘씬한 모습으로 설계됐다. 이곳을 찾는 관람객들은 바닥에서부터 천장까지 이어진 유리벽을 통해 바깥의 정원과 숲, 산과 하늘을 바라보게 된다. 이 분관에서는 이집트 유물에서부터 르네상스 시대의 회화, 이슬람 예술품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의 루브르 소장품들이 전시될 예정이다. 하지만 이 분관이 항구적으로 소장하게 되는 유물은 없으며 모든 전시품은 파리의 루브르 본관에서 대여해 순회전시하는 형식으로 운영된다. 1억5천만유로를 들여 2012년 개관할 예정인 루브르 랑스 분관은 석탄 산업이 사양길에 접어들면서 피폐해진 이곳 경제에도 활력을 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스페인의 빌바오에 구겐하임 빌바오 미술관이 들어서면서 도시 전체가 부흥하게 된 것과 같은 효과를 노리는 것이다. 하지만 해변과 가깝고 바스크족의 독특한 음식 문화가 자리잡은 빌바오와 달리 랑스는 관광객들을 잡아끌만한 다른 요인들이 없어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랑스는 1차대전 당시 독일 공군의 폭격으로 폐허가 됐던 곳이며, 2차대전 때에는 나치 독일에 점령된 후 연합군의 폭격을 받았다. 마지막으로 하나 남아있던 탄광마저도 1986년 문을 닫은 이 곳의 실업률은 14% 정도로 프랑스 평균 9.5%보다 크게 높은 편이다.
전주시가 추진하고 있는 5대 핵심사업 중 하나인 한스타일진흥원을 건립하려면 건립사업비 외에도 운영비의 국비 지원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됐다.4일 오후 4시 최명희문학관에서 '한스타일진흥원과 한지산업진흥원의 운영 방안'을 주제로 연 천년전주문화포럼에서 김인순 전주시정발전연구원은 "한스타일진흥원 운영비가 정부로부터 지원되지 않는다면, 전국의 한스타일 네트워크를 마련하고, R&D를 기반으로 한 연구기관으로 운영되기가 어렵다"며 "운영비 확보를 위한 중·장기적인 계획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김 연구원은 이어 "문화체육관광부의 인가를 얻은 비영리 재단법인을 설립하고, 전북도와 전주시가 지원조례제정을 통해 안정적으로 운영비를 확보하는 방안도 대안이 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덧붙였다.오영택 전주대 교수는 "한지산업진흥원이 한스타일진흥원 산하 기구가 되기 전까지 운영비 확보를 위한 고민이 필요할 것"이라며 "전주시가 한지산업진흥원을 전주문화재단 산하 기구로 검토하기 보다 한지산업진흥원을 센터화해 그 명칭을 유지하면서 한스타일진흥원 산하로 들어가는 방식이 좋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오 교수는 "한지산업진흥원이 내년 운영비를 확보하지 못할 경우 법인화해 민간수탁으로 조직을 재정립하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라며 "향후 5년간 운영비 확보를 위한 방안 마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이에 대해 고언기 전주시 전통문화국장은 "한지산업진흥원이 전주문화재단 산하 기구로 가는 것에 대해 검토중이지만, 결정된 바는 없다"고 말했다.
"이것은 기원전 1500년 경에 사망한 여성의 미이라 가면입니다. 즉, 이것은 3,500년 전의 것입니다."(삿제후티의 미이라 가면)세계에서 매년 600만명이 넘는 관람객이 찾는 대영박물관에서 멀티미디어 기기를 이용해 이처럼 유명 전시품의 한국어 해설을 들을 수 있게 됐다. 대한항공은 1일 오전 8시30분(현지 시각) 런던 대영박물관 인라이튼먼트 갤러리에서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닐 맥그리거 대영박물관장, 한승수 전 총리, 유의상 주영 한국대사관 공사, 원용기 주영 한국문화원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한국어 작품 안내 서비스의 시작을 알리는 기념식과 시연행사를 열었다. 이로써 지난해 2월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을 시작으로 6월 러시아 에르미타주박물관에 이어 대영박물관까지 세계 3대 박물관에서 대한항공 측의 지원으로 한국어 작품 해설이 이뤄지게 됐다. 해설은 주요 전시 작품 220개에 대해 이뤄지며 해설 원문은 박물관 학술팀이, 음성 녹음은 성우 7명이 각각 맡았다. 조양호 회장은 인사말에서 "인류가 문화와 예술을 매개로 함께 즐기고 감동을 공유함으로써 소통과 교류를 더욱 촉진할 수 있다는 취지에서 전세계에 걸쳐 문화 예술 후원 활동을 꾸준히 펼치고 있다"며 "국민들도 세계 3대 박물관의 작품을 한국어로 감상하며 한국인의 자부심을 느끼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한국인이 많이 방문하는 다른 유명 박물관이나 미술관도 후원을 요청하면 적극 검토해 한국 관광객들이 세계 문화 예술을 한국어로 쉽고 깊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강조했다. 대영박물관에서는 그동안 구형 오디오 안내 기기를 이용해 영어, 스페인어, 일본어 등 3개 언어로만 안내 서비스가 이뤄졌으나 이날부터 한국어뿐만 아니라,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러시아어, 중국어, 아랍어, 청각 장애인을 위한 수화 등 8개 언어가 추가됐다. 1753년 설립된 대영박물관에는 이집트 파라오 석상, 파르테논 신전 조각상, 로제타석, 투탕카멘과 같은 세계적인 문화유산이 소장돼 있으며 지난 1997년 한국관도 문을 열었다. 맥그리거 박물관장은 한국관 확장 계획을 묻는 질문에 "향후 몇 년 간 전시품을 향상시킬 계획"이라며 "또 한국 문화 축제나 강연, 음악공연 등 박물관에서 할 수 있는 이벤트를 늘릴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관은 전시공간이 한정돼 있고 방문객이 많이 찾고 전시품의 질도 우수하기 때문에 물리적인 공간 확대 보다는 문화 프로그램을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날 가족들과 함께 대영박물관을 찾은 김준성 씨는 "다른 나라에 가면 문화를 이해하고 체험하기가 상당히 힘들었는데 여기 와보니 한국어 해설을 들을 수 있는 멀티미디어 기기가 갖춰져 있어 상당히 도움이 많이 된다"고 말했다.
전주 한옥마을 기와가 균형을 잃고 있다.한옥마을의 기와가 옛날 기와보다 무거워 기와 사이가 벌어지고 추녀와 서까래가 처져 곡선미를 잃는 데다 한옥의 수명이 짧아질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지난달 전주시의 전주전통문화센터 관리 자문 요청으로 한옥마을을 방문한 이근복 번와장(59·중요무형문화재 제121호)은 "한옥마을의 위상에 걸맞지 않게 기와공사가 돼 있다"며 "현재 사용되는 기와는 단단하지만 옛날 기와보다 50% 이상 무겁기 때문에 이를 얹다 보면, 서까래가 쳐지고, 한옥이 균형을 잃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이같은 문제점은 기와를 잇는 번와 와공 자격증 소유자가 전국적으로 5000여명 가까이 되지만, 공법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드물다는 데서 비롯된다. 한옥마을 뿐만 아니라 경복궁 근정전(국보 223호)의 지지대 역할을 하는 고주(高柱·높은 기둥)가 4개나 부러졌고, 경회루(국보 224호)의 추녀가 3개나 부러진 것도 기와 공사를 제대로 하지 않아 건물이 균형을 잃게 돼서다.그는 "기와가 무거워졌다면 기둥에 부담이 가는 만큼 보강공사가 필요하지만, 같은 공법으로 공사하는 게 문제"라며 "건물에 따라 상황은 각기 다를 수 있지만, 10년 내 보수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말했다.이 번와장은 "한해 문화재수리기능자가 수십 명씩 배출되지만, 한 평짜리 공간을 만들 수 있느냐는 질문을 던지면 아무도 자신있게 대답하지 못한다"며"자격증은 있어도 기술이나 현장 경험이 부족한 이들이 공사를 맡으면 앞으로도 날림 공사는 계속될 것"이라고 강조했다.또한 그는 한옥마을은 전라도 기와의 곡선미를 제대로 살리지 못한 게 아쉽다고 덧붙였다. 이 번와장은 "지자체마다 똑같은 한옥을 짓고 있지만, 지역별 특성을 살려야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며 "전라도의 경우 서까래 끝이 들어가도록 해 곡선미를 드러내는 게 특징이지만, 한옥마을은 그게 없어 아쉽다"고 했다.장대수 전주시청 한스타일 담당자는 "대개 한옥을 지을 때 번와 와공 자격증 소유자의 조언을 통해 토기와(흙으로 구운 기와)를 쓰고, 30~40년이 지나면 교체 공사 시 필요한 경우에 한해 시멘트기와를 쓰도록 하는 것으로 안다"며 "전문가의 자문을 통해 기와의 균형을 찾는 방법을 고민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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