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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 500년 심장에 파일 박은 느낌"

옛 청사 바로 뒤편 서울시 신청사 건설 현장은 두 구역으로 뚜렷이 구분된다. 한 곳은 기초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고, 다른 한 곳은 문화재 발굴이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눈대중으로 그 면적 대비를 보면 전자가 9할, 후자가 1할 정도를 차지한다. 서울시 관계자는 구체적으로 발굴현장이 차지하는 비중이 전체 예정지 중 9%라고 말했다. 하지만 발굴 현장에도 일정한 간격으로 대형 철제 H-빔이 곳곳에 박혀 있다. 나아가 이들 빔은 필연적으로 발굴현장에 노출된 유적을 군데군데 이미 파괴했다. 통상 고고학 발굴현장은 발굴조사가 완료되기까지는 어떠한 새로운 건축행위도 할 수 없다. 그럼에도 왜 유독 서울시 신청사 건설현장만큼은 H-빔이 박혀 있을까? 1일 오전 발굴현장에서 발굴조사단인 한강문화재연구원(원장 신숙정)이 개최한 발굴지도위원회에 참가한 서울시와 발굴단 관계자들의 전언으로 쉽사리 그 의문은 풀린다. 애초에 신청사 예정 부지는 발굴이 예정돼 있지 않았다. 발굴조사 없이 바로 공사에 돌입할 예정이었다. 이유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미 이 일대 지하는 이전에 있던 건물이 들어서는 과정에서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혹시나 해서 문화재청에서는 입회 조사를 명령했다. 이는 고고학 발굴 전문가가 공사 현장에 상주하면서 혹시 모를 유적이나 유물이 확인될 때는 즉시 공사를 중지하고, 발굴조사를 벌이게끔 하는 제도다. 이렇게 해서 입회 조사를 한강문화재연구원이 맡게 됐다. 이에 의해 서울시는 우선 신청사 건설 예정지 곳곳에 H-빔을 박고서 터파기 공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조선왕도 500년이 남긴 흔적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완전히 망가지고 사라진 줄 알았던 조선왕조 500년 수도 한양은 이곳에서도 어김없이 고개를 내밀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지난 6월, 유물과 유적이 확인된 곳을 중심으로 공사는 중지되고 본격 발굴로 들어갔다. 그 성과는 놀라웠다. 조선초기 이래 근현대에 이르는 각종 건물 유적은 물론이고 전혀 생각지도 못한 귀중한 유물이 쏟아진 것이다. 특히 불랑기자포와 승자총통을 비롯한 조선 중기 때 무기류는 그 전체가 당장 보물로 지정돼도 손색이 없을 만큼 귀중한 성과로 기록됐다. 이날 공개된 발굴현장과 출토 유물들을 둘러본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이자 지도위원인 지건길 문화재위원회 매장분과 위원장이 당장 목소리를 높였다. 지 위원장은 특히 발굴현장 곳곳에 박힌 H-빔들을 지칭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곳뿐만 아니라 (서울시가 대형 재개발 공사를 추진하는) 동대문운동장이니 청진지구 현장을 둘러볼 때마다 한양 500년의 역사가 파괴되는 모습을 보고는 가슴이 아팠습니다. 저기 파일(H-빔)을 박아 놓은 것이 한양 500년, 아니 600년 심장을 박은 듯한 느낌을 줍니다." 그러면서 지 위원장은 현장에 배석한 서울시 관계자들을 향해 "현장 유구(遺構)를 어떻게 할지는 문화재위원회가 최종 결정하겠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현장에 그대로 유구를 보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서 "마침 서울시도 (발굴현장에) 서울역사를 전시하는 시설을 세운다고 하니, 그 취지에 맞춰 발굴현장을 보존하는 방안을 강구하라고 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지금처럼 발굴 완료 뒤 공사 진행이라는 식으로 서울 사대문 안 개발을 추진하다가는 한양 500년 역사의 상당 부분이 사라지고 말 것이라고 경고한 지 위원장은 "서울은 비단 500년 조선 도읍일 뿐만 아니라 백제 500년 도읍이기 때문에 천년 고도(古都)라는 점에서 경주와 다를 바가 없다"고 강조했다. 같은 지도위원이자 문화재위원인 건축학 전공 김동욱 경기대 교수는 유적의 이전 복원을 제안하긴 했지만, 문화재위 매장분과 위원장이 현장 보존 방침을 공식 천명함에 따라 서울시의 서울시 신청사 건립 계획은 적어도 이번 발굴현장에 대해서만큼은 일정 부분 수정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문화재청은 조만간 문화재위원회를 소집해 이 유적에 대한 처리 방침을 확정할 계획이다.

  • 문화재·학술
  • 연합
  • 2009.12.02 23:02

[이은혁의 글씨로 만나는 옛 글] ⑫왕서(王書)를 집자한 '흥복사단비(興福寺斷碑)'

'흥복사단비(興福寺斷碑)'는 본래 서안성(西安城) 안의 흥복사(興福寺)에 세워져 있었는데 어느 때인가 망실되었다가, 명나라 만력(1573-1620) 말년에 남쪽의 공호(空濠)를 준설하다가 발견되었다. 그러나 온전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하반부의 약 93×126cm의 잔비 밖에 없었다. 출토 후 얼마 되지 않아 공자묘(孔子廟)로 이치되었으나, 지금은 서안의 비림(碑林) 제2실에 열치되어 있다. 비문은 35행, 행내의 자수는 22~25자, 전문 약 730자를 새기고 양측에는 화려한 당초문양과 선인기승(仙人騎乘)의 서수(瑞獸)를 선각(線刻)하고 있다. 비를 세운 시기는 비주(碑主)의 매장에 가까운 개원(開元) 9년(721)으로 추정된다. 비두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원명은 확실하지 않다. 십 수종의 별칭 중에는 '吳文'을 덧씌운 호칭이 많았다. 그 이유는 청대의 금석학자인 옹방강이 비문의 첫부분을 판독하면서 '惟大將軍吳公諱文'이라 석문을 달았는데, 이는 '惟大將軍矣. 公諱文'의 '矣' 상부를 'ㅁ'로 잘못 본 것을 그대로 따랐기 때문이다. 이 사실이 밝혀진 이후에는 일반적으로 '흥복사단비'라고 칭한다.비문의 제2행에 '(…) 大雅, 集晉右軍將軍王羲之行書勒上'이라는 문장에서 알 수 있듯이 이것 역시 '집자성교서'와 같은 집왕서비(集王書碑)의 하나이다. '집자성교서'(672)보다 50년 뒤에 조성되었는데, 이 사이에 오광벽(吳光璧)이 집자한 '건복사 삼문송성비(建福寺三門頌成碑)'(717), 행돈(行敦)이 집자한 '회소율사비(懷素律師碑)'(718)가 있다. 이처럼 왕희지의 글씨를 집자한 비는 집자성교서 이후 원대에 걸쳐 20종 정도가 금석서에 열거되어 있다. 집서자인 흥복사의 대아(大雅)와 그 집서(集書)의 사정에 대해서는 일체 밝혀지지 않고 있다. 필자의 생각에 대아(大雅)는 그 자체만으로 이름이 될 수 없고 이름 뒤에 붙여 고상함을 나타내는 말이므로, 이 두 글자 앞에 흥복사에 거주하며 집서를 담당했던 스님의 이름이 있었을 것이다. 이 비를 가장 먼저 거론한 명나라 조함은 왕희지의 진적에서 직접 집자한 것이 아니라 '집자성교서'에서 모집(摹集)한 것이라고 보았다.그 서품에 대해서는 '집자성교서'와 우열을 다투고 있으나 훼예는 서로 반반이다. 청대의 학자 고상선(郭尙先)은 "'집자성교서'는 천고의 걸작이지만 글자와 글자가 지나치게 붙어 자유로움을 해치고 있는 것이 결점이며, 이 비는 행을 세움에 융통성이 있어 고목(古穆)한 정취를 갖추고 있는 것이 장점이다."라고 평하였다. 또한 '집자성교서'가 왕법을 잘 보존하고 있다고는 인정하면서, 요컨대 당인(唐人)으로서 회인(懷仁) 자신의 해석이 들어간 서법이라고 말한 것은 탁견이다. 일본의 西林昭一는 '집자성교서'는 원래의 글자를 비교적 충실하게 본뜨고자 유의하고 있으나, '흥복사단비'는 집자에서 진인(晉人)의 여유 있는 풍운(風韻)과 폭 전체의 기맥을 중시한 점에 특색이 있다고 하였다.당태종의 왕희지에 대한 열정에서 볼 수 있듯이 당대는 왕서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당대의 초당삼대가는 왕서에 대한 치밀한 해석력으로 해서의 전형을 확립하고, 나아가 왕희지 진적을 통한 집자가 처음으로 행해졌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특히 '집자성교서'와 더불어 '흥복사단비'는 진적에서 느낄 수 없는 굳건한 필력과 골기를 체득할 수 있는 집자비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 문화재·학술
  • 전북일보
  • 2009.12.02 23:02

태조 어진 '국보' 승격 추진한다

내년에 경기전 봉안 600주년을 맞는 태조어진을 현재 '보물(제 931호)'에서 '국보(國寶)'로 승격시키는 작업이 추진된다. 국보는 최상급 유물에 지정되는 것이어서 태조어진, 나아가 경기전, 전주시의 위상을 크게 강화시킬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전주시는 내년도 태조어진 경기전 봉안 600주년 기념사업으로 기념행사와 학술행사를 추진하는 가운데 기념사업의 하나로 태조어진의 국보 승격 작업을 벌일 계획이라고 30일 밝혔다.태조어진의 국보 승격이 추진되는 것은 민족사적으로, 미술사적으로 국보 이상의 대접을 받을만한 충분한 가치를 인정받기 때문으로 전해졌다.경기전의 태조어진은 현존하는 유일한 태조어진이다. 애초 전주 경기전과 영흥, 경주, 평양, 함흥 등에 있었으나 임진왜란 등을 거치면서 현재 경기전 태조어진만 남아있기 때문.특히 조선시대 25대 임금 중 어진이 3점(태조, 영조, 철종)밖에 남지 않았으며, 그중 철종은 3분의 1쯤 불에 탔기 때문에 제대로 남은 것은 2점 밖에 없다는 것에서 그 가치를 더욱 인정받고 있다.여기에 태조어진은 조선초의 어진 제작 방법 등을 담고 있어, 미술사적인 가치도 인정받고 있다.또 어진을 봉안할 어진박물관이 들어설 경기전은 남한에 남아 있는 유일한 지방의 진전이며, 태조어진이 봉안됐던 경기전 정정이 지난해 11월에 보물로 지정된 것을 감안, 태조어진의 국보 승격에 설득력을 더한다.앞으로 태조어진이 국보로 승격되면 우선 태조어진의 가치 상승이 예상된다. 국보(國寶)는 우리나라에서 건축물이나 유물 등의 유형 문화재 가운데에 중요한 가치를 가져 보물로 지정될 만한 문화재 중 인류 문화적으로 가치가 크고 유례가 드문 것, 희귀한 것 등에 한해 지정된다.나아가 어진을 봉안할 경기전 건물은 물론, 태조어진과 경기전을 보유한 조선왕조의 발상지, 전주시의 위상강화에도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태조어진은 지난 1410년(태종 10년) 경주에 모신 태조어진을 모사, 경기전에 봉안해왔다. 하지만 지난 2005년 국립고궁박물관 개관기념 전시에서 훼손사실이 알려지면서 지난해 10월23일 환원될때까지 전주에 돌아오지 못했다.이 과정에서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대대적인 환원운동이 벌어졌다. 우리의 전통문화를 걱정하는 남다른 지역사회의 의식 또한 태조어진을 국보로 지정할만한 자격이라는 게 관계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전주역사박물관 이동희 관장은 "태조어진의 국보 지정은 전주시가 조선왕실의 정신적 본향으로서의 의미를 대내외적으로 다시 한 번 확인받는 계기가 되는 것은 물론, 전통문화도시로서의 전주의 위상 역시 격상될 것"이라고 말했다.

  • 문화재·학술
  • 구대식
  • 2009.12.01 23:02

서울시 신청사 부지서 조선시대 무기 무더기

서울시가 새로운 시청 청사 건물을 계획 중인 중구 태평로 1가 31번지 일대 옛 서울시청 북편에서 보물급으로 평가되는 임진왜란 이전 각종 무기류가 무더기로 출토됐다. 나아가 발굴조사 결과 신청사 부지 일대는 조선시대에 각종 무기류를 제작하던 관청인 군기시(軍器寺) 관련 건물이 있던 곳임이 확실해진 데다, 조선전기 이래 후기를 거쳐 근현대에 이르는 각종 유적이 밀집한 곳으로 드러남으로써 신청사 건립 계획 자체에도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매장문화재 전문조사기관인 한강문화재연구원(원장 신숙정)은 지난 6월11일 이후 신청사 부지 5천919㎡를 발굴조사한 결과 조선시대 호안석축(護岸石築. 물가에 돌로 쌓은 벽) 1기와 건물지 21동, 담장 9기, 우물 2기를 비롯해 근현대에 이르는 각종 유구(遺構) 44기를 확인했다고 30일 말했다. 이 중에서도 15세기 이래 사용한 조선시대 건물지인 1ㆍ2ㆍ12호에서는 '가정(嘉靖) 계해(癸亥) 지통(地筒) 중(重) 75근(七十五斤) 8량(八兩) 장(匠) 김석년(金石年)'이라는 명문이 적힌 대포 일종인 불랑기자포(佛狼機子砲)를 비롯해 승자총통 다수, 화살촉이 유별나게 커서 '대장군전촉'이라 일컫는 대형 화살촉 등의 무기류가 대량으로 출토됐다. 이 중 불랑기자포는 출토지가 확실한 최초의 유물이며 그 명문을 통해 제작연대가 1563년(명종 18)이며, 그 외에도 그 무게(75근8량)와 제작자(김석년) 등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발견으로 평가된다. 이 유물은 확실한 출토지는 모른 채 1982년 9월11일 서울 강서구 목동 칼산 지하철매립 작업장으로 어딘가에서 옮겨온 흙더미에서 발견됐고, 현재는 육군박물관이 소장 중인 불랑기자포 3점(보물 861호)과 제작 연대가 똑같다는 점에서 비상한 주목을 요한다. 불랑기자포는 불씨를 손으로 점화해 발사시키는 화기로 15세기에 포루투갈을 포함한 서구제국에서 제작돼 1517년 무렵 중국 광동 지역에 서역상선을 통해 동양에 전래됐다. '불랑기'가 어떤 말에서 유래했는지는 불확실하며, 서양 사람 이름에 흔한 '프랑크'(Frank)를 옮긴 표기라는 말도 있다. 발굴조사단은 이런 무기류는 "민가에서 소장할 수 없으며, 조사지역 건물지와 군기시의 관련성을 볼 때 군기시 본건물 외곽의 부속 건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서울시 신청사 부지를 비롯해 주변 청진지구 등지에서 최근 추진되는 각종 대규모 공사 현장에서 조선시대 유적과 유물이 쏟아짐에 따라 문화재위원회는 4대문안 재건축 방향을 전면 재검토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 문화재위원은 "이런 식으로 재건축을 남발하다가는 조선왕조 500년 역사가 고층건물에 파괴, 매몰되고 말 것이라는 위기감이 팽배하다"면서 "서울시 신청사 부지에 대해서도 유적과 유물의 성격을 면밀히 검토한 다음에 그 보존 여부를 논의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움직임은 "신청사 부지 중 91%가량은 경성부청사를 포함한 여러 시설이 들어서는 과정에서 지반이 훼손된 상태다. 이번에 발굴된 유물은 지층이 훼손되지 않은 나머지 9% 부지에서 나온 것"이라면서 "발굴조사를 마무리하고 유구를 이전하고서 전체 지하층 골조공사를 본격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라는 서울시 관계자의 말과는 정면 배치된다. 이 문화재위원은 "그건 서울시의 바람일 뿐이며, 그 유적과 유물 처리에 대해서는 어떤 방향도 정해지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 문화재·학술
  • 연합
  • 2009.12.01 23:02

[전라감영과 4대문복원] 도시문화 관점서 접근해야

오랫동안 방향을 잡지 못한 채 논란만 계속되고 있는 전라감영의 위치는 전주시 완산구 중앙동 4가 1번지 일대, 옛 전북도청 자리다. 전라감영터 전체규모는 5만3395㎡(약1만6150평). 현재로서는 옛 도청사 자리와 맞은 편 완산경찰서는 물론, 웨딩거리를 지나 객사까지라고 할 수 있다.전라북도와 전주시는 지난 9월 전라감영 복원사업에 전주 4대문 복원사업을 더해 '전라감영 복원과 전주 4대문 복원사업 추진을 위한 통합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최근 전주시가 정부에 요청한 '전라감영지 역사공간 조성사업비'(100억)와 '전주성 4대문 복원사업비'(28억원)가 내년도 국가예산 편성 과정에서 전혀 반영되지 않으면서 당장 사업 추진에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보이지만, 전주시는 국비 지원 없이는 사업 추진이 불가능한 만큼 반드시 국비를 확보하겠다고 밝혔다.전라감영 복원사업은 단순히 고건축의 복원에 그치지 않는다. 전라감영 활용문제가 전라감영의 역사성과 구도심 활성화라는 문제를 같이 풀어야 한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전라감영 복원 배경전라감영 복원 문제는 1951년 전라감영의 정청이었던 선화당이 화재로 소실된 지 40여 년만인 1996년 처음으로 제기됐다.전라감영을 복원하기로 하고 본격적으로 논의가 시작된 것은 2004년, 서부 신시가지로의 도청사 이전을 앞두고 부터였다. 그러나 어떻게 복원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합의를 끌어내지 못하고 2005년 도청사 이전 후 현재에 이르기까지도 그 해결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전라감영 복원은 도청사 이전으로 전라감영 복원의 필요성과 구도심 활성화의 필요성이 동시에 부각된 것으로, 전북과 전주로서는 조선시대 500년 동안 전라도와 제주도를 관할하고 근대화 과정에서 100여년 간 전북행정의 중심이었던 감영 복원을 통해 역사문화도시로서의 상징성을 부여할 수 있는 의미있는 사업이다. 또한 구도심 활성화를 유도하고 주변 한옥마을과 연계해 관광을 활성화시킨다는 보다 현실적인 기대도 포함돼 있다.원도연 전북발전연구원 지역발전정책연구소장은 전라감영지가 전주의 전통성과 현대문화를 대표하는 '한옥마을-경기전-풍남문'과 '객사-영화의거리'의 중간에 위치해 있는 점을 주목, 전라감영의 공간적 의미를 여기에서 찾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원소장은 "전라감영을 감영 자체의 관점이 아니라 도시문화라는 관점에서 관찰하고 분석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라감영 복원에 대한 기존 연구2004년 전문가와 공무원이 참여한 '전라감영 복원 추진 간담회'를 시작으로 전라감영 복원 의견을 수렴하는 간담회와 심포지엄, 토론회 등 크고 작은 자리들이 이어져 왔다. 일부 역사학자들을 중심으로 장기적인 시각으로 전라감영을 완전복원하자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기는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부분복원이 될 것이라는 의견이 다수다.이 과정에서 감영 복원과 함께 중요하게 대두된 것이 바로 옛 도청사 건물의 가치다. 옛 도청사 건물이 근대문화유산으로서 가치가 높은 만큼 철거가 아닌, 보존과 재건에 대한 별도의 논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전라감영 복원과 관련 학술용역도 추진됐다. 2004년 전북발전연구원의 '도청사 이전에 따른 구도심 활성화 방안'은 전라감영 복원의 기본방향을 장기적으로는 전주시가 진행 중인 전통문화중심도시 육성에 맞춰 전주의 역사적 전통성을 확립하는 방안과 단기적으로는 구도심 활성화라는 이중적인 측면을 고려하는 차원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때까지만 해도 감영 대표 건물을 복원하는 1단계를 거쳐 도청사 주변 사유지를 대상으로 감영 건물을 복원하는 3단계까지 결과적으로는 부분복원에서 시작해 완전복원으로 나아가는 방식이었다.2005년 10월부터 2007년 4월까지는 전라감영지 시굴 및 발굴조사가 이뤄졌다. 감영지 조사결과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에 걸친 유구가 확인됐지만 감영의 주요 건물로 50년대까지 남아있던 선화당의 위치를 확인할 만한 결정적인 유구는 없었다. 전문가들은 도청 조성 당시 콘크리트 지하구조물로 인해 대부분 파괴되거나 교란됐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원광대 지역개발연구소가 진행한 '전라감영복원 기본계획 학술용역'(2006∼2007)은 도청 이전으로 감영 복원 및 장소 재활용의 필요성이 부각되면서 감영을 주변과 연계(객사-전라감영지-풍남문-전동성당-경기전-한옥마을)해 구도심 활성화를 유도하는 종합적 감영 복원 계획을 내놨다. '도심 속의 역사공원'을 컨셉으로 감영복원의 공간적 범위는 축소복원(1만6117㎡)과 완전복원(5만3395㎡)의 중간 형태인 절충안(2만9520㎡)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 용역은 복원의 범위가 감사의 영역만으로 한정돼 전라감영이 가지는 군사 및 문화적 기능 등 역사성이 축소되는 경향이 있다는 지적을 받았다.2008년 6월에는 전주역사박물관과 전북대 전라문화연구소가 공동주최한 학술대회 '전라감영의 원형과 활용'이 개최됐다. 경상감영과 강원감영 등 감영이 있는 다른 지역에서 감영에 대한 연구서들을 발빠르게 간행하고 있는 상황에서 전라감영은 역사에 대한 연구가 부족했던 게 사실. 학술대회에서 발표된 논고들은 「전라감영연구」로 묶여 감영 복원 사업에 있어 전라감영을 이해하는 기본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추진위원회 결성고고·고건축·도시계획·역사·향토사 등 학계 전문가 및 언론인, 주민대표 등으로 전라북도와 전주시가 함께 구성한 '전라감영 복원과 전주 4대문 복원사업 추진을 위한 통합추진위원회'는 그 의미가 크다.전라감영 부지 소유권은 전라북도가 가지고 있으며, 복원 사업에 대해서는 전주시가 주도적으로 나서고 있기 때문. 무엇보다 전라감영 복원사업에 대한 시민들의 공감대는 형성된 상태지만, 복원 범위나 규모 등 구체적인 로드맵에 있어 좀처럼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있어 추진위의 역할에 기대를 걸 수 밖에 없는 현실이다.추진위는 전라감영 복원과 관련 쟁점사항에 대해 최종 합의점을 마련하게 되며, 전주 4대문 복원 문제의 시기와 규모, 사업비 등 기본방향을 설정하게 된다. 추진위원장은 채병선 전북대 교수. 이종민(전북대 교수) 이동희(전주역사박물관장) 이용완(전 도의원) 부위원장을 비롯해 홍승재(원광대 교수) 최완규(원광대 교수) 홍성덕(전주대 교수) 이재운(전주대 교수) 이양재(원광대 교수) 김재식(전북대 교수) 원도연(전북발전연구원 지역정책개발연구소장) 임동찬(시의원) 장성화(전북발전연구원 지역개발팀 연구위원) 남해경(전북대 교수) 윤덕향(전북대 교수) 조법종(우석대 교수) 송석기(군산대 교수) 김은정(전북일보 편집국장) 김명성(KBS전주방송 기자) 박영근(전주중앙로 상가연합회장) 이흥재(전주정보영상진흥원장) 송재복(사이버시정발전연구원) 안기현(전 KT지점장) 이재균씨(전 시의원)가 추진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추진위는 전라감영과 4대문 복원 방안이 확정될 때까지 한시적으로 운영되며, 임기는 2년이다.

  • 문화재·학술
  • 도휘정
  • 2009.12.01 23:02

진보적 문화이론지 '문화/과학' 60호 발간

1992년 여름 '과학적 문화론'을 내걸고 창간호를 낸 계간 문화이론지 '문화/과학'이 통권 60호(2009년 겨울호)를 12월 1일 발간한다. 강내희 중앙대 교수와 심광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가 각각 발행인과 편집인을 맡고 여러 진보적 지식인들이 편집위원으로 참여한 '문화/과학'은 '비판적 문화연구', '문화사회', '코뮌주의', '생태문화네트워크', '학문 통섭' 등 다양한 이론적ㆍ실천적 의제를 제기해왔다. 지식인 사회에서 큰 관심을 받지 못하던 '언어', '욕망', '육체', '공간' 등의 화두를 제기했으며, 자본주의 사회의 지배 구조를 과학적으로 인식하고 대중의 심리구조를 파악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왔다. '문화/과학'은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를 극복하겠다고 나선 국내 이론지로는 드물게 '장수'하고 있다. 최근 40호를 낸 '진보평론'이 비교적 오래됐지만 1980년대에 처음 나온 '현실과 과학', '노동해방문학' 등과 '문화/과학'과 비슷한 시기에 창간한 '이론'은 20호의 고비를 넘기지 못했다. '문화/과학'은 통권 60호 발간을 기념해 '즐거운 혁명과 주체형성'을 주제로 12월 1일 서강대 다산관에서 심포지엄을 개최한다. 주최 측은 "신자유주의 위기를 맞아 사회적 배제와 파괴행위가 대규모로 진행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대중이 더 나은 삶을 꾸리려면 혁명적 태도가 필요하다"면서 "우리에게는 당위의 수준을 넘어서는 즐거운 혁명이 필요하고, 그런 혁명은 우리 스스로 새로운 주체로 설 때에만 가능하다"고 말했다. 우희종 서울대 교수는 '즐거운 과학기술의 달콤한 유혹'을, 이동연, 심광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가 각각 ''문화적 다중'의 출현과 대안문화행동', '문화사회로의 이행을 위한 교육적 실험'이라는 발제문을 발표한다. 문학평론가 이명원씨는 '회상과 혁명'을, 박영균 서울시립대 교수는 '구성과 연대의 정치학'을 발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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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
  • 2009.11.30 23:02

"다문화가정 지속적인 지원 논의해야"

전라북도가 조례 제정과 센터 운영으로 다문화가족 지원 기반을 조성하기는 했지만, 예산부족으로 활성화 및 지속적인 활동조건을 만들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전북민예총(회장 신형식)이 주최한 '2009 문화정책 전국대토론회'에서 김선태 전주효자문화의집 관장은 "전북지역에서 다문화가족에 대한 관심은 인권 및 시민단체들의 노력으로 열악한 조건에서도 활동이 지속되고 있다"며 "지방정부 차원에서 항구적인 다문화지원 정책을 수립하는 등 지역사회의 다양한 영역에서 다문화에 대한 현실적 논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관장은 "전북도의 국제협력과와 문화예술교육사업, 지원조례 따라 구성된 '전라북도다문화가족지원협의체' 등이 유기적으로 협조해야 한다"고도 덧붙였다.이날 참석자들은 다문화사회나 다문화정책에 관한 담론이 유행처럼 번지면서 관련 연구소나 사업을 목적으로 한 실행 조직들은 날로 늘어나고 있지만, 이런 움직임이 올바른 방향성과 해법을 가지고 대응하고 있지는 못하다는 데 공감했다. 신형식 전북민예총 회장은 "우리는 그동안 단일민족·단일문화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도록 교육받아 왔지만 최근 사회가 다양화되고 다문화되면서 소수자 문제가 부각되고 있다"며 "이런 변화가 우리 문화의 폭을 넓히고 깊이를 깊게 하는 기회로 작용할 수 있도록 대토론회를 마련하게 됐다"고 말했다.26일 전주한옥마을 학인당에서 열린 문화정책 대토론회는 '문화적 다양성의 실천과 문화예술지원정책' '다문화사회와 문화적 다양성' '지역문화를 통한 지역공동체 형성 방안' '지역문화 예술프로그램 우수사례' 등 총 4개 분과로 나눠 진행됐다.특히 1분과 '문화적 다양성의 실천과 문화예술지원정책'에서는 현 정부의 문화정책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다. 이원재 문화연대 사무처장은 "이명박 정부의 문화정책·문화행정은 무늬만 문화지 실제로는 맹목적인 경제개발주의의 성격을 내재하고 있다"며 "국가 문화정책이 가장 우선해야 할 사회적 공공성, 공공영역은 방기한 채 자신의 입맛에 맞는 고급문화, 상업문화, 주류문화 등에 대한 맹목적인 편향성을 드러내고 있다"고 분석했다. 손동혁 인천민예총 부회장은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에는 지역문화정책을 수립하거나 실행하는 단계에서 지역의 의견을 묻거나 합의를 끌어내기 위한 노력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며 "현 정부 문화정책의 새로운 목표인 '지역문화의 특성화를 통한 경쟁력 강화'는 결국 지역의 문화적 자원을 팔릴만한 상품으로 만드는 것을 가리킨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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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휘정
  • 2009.11.27 23:02

[오목대] 벽골제와 사야마이케 - 조상진

김제 벽골제(碧骨提·사적 제111호)는 농업용 저수지다. 현존하는 저수지로는 세계에서 가장 크고 오래되었다.벽골제는 제천의 의림지, 밀양의 수산제와 함께 일찍부터 한반도에 쌀 재배가 융성했음을 보여준다. 1975년 발굴조사 결과 330년(백제 비류왕 27년)에 축조되었음이 확인됐다. 당시 수문 5개와 총 제방길이 3.3㎞, 만수면적 37㎢(1120만평)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였다. 공사에 동원된 일꾼들이 신에 묻은 흙을 털거나 낡은 짚신을 버린 것이 쌓여 신털뫼라는 언덕이 생겼다고 할 정도다.여러 차례 개축이 있었으나 임진왜란 이후 관리가 되지않아 주변 농민들이 헐어서 경작지로 사용해 왔다. 일제때인 1925년에는 동진농지개량조합이 제방 한 가운데로 수로를 내는 바람에 원형이 크게 훼손되었다.지금은 제방과 남쪽 끝 수문인 경장거와 북쪽 끝 수문인 장생거, 그리고 중앙수문 자리에 돌기둥이 남아 있을 뿐이다. 저수지 내부는 논으로 변했다.벽골제는 평지를 막아 진흙을 다져 쌓은 제방이다. 여기에 쓰인 축조방식은 판축기법과 부엽토공법이다. 부엽토공법은 글자 그대로 기초부분에'나뭇잎이나 풀을 까는 방식'이다. 중국(안풍당 유적)에서 기원해 한반도를 거쳐 일본에 전해졌다. 물이 흐르는 곳에 제방이나 성벽을 쌓을 때 적용하는 아주 과학적인 기법이다.이 기법은 일본의 고대 댐식 저수지인 오사까의 사야마이케(狹山池)에 대한 발굴조사에서 처음으로 확인된 것이다. 616년 무렵 바닥에 진흙을 깔고 그 위에 나뭇잎을 다져 층층이 쌓아 올린 구조다.일본은 이 사야마 저수지를 지속적인 보수와 개축으로 명소로 만들어 자랑하고 있다. 특히 이 저수지 옆에 일본의 세계적 건축가인 안도 타다오가 설계한 박물관은 일본의 수리관개시설과 토목기술을 소개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건물 양쪽 3층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와 떡 자르듯 전시한 제방단면(높이 15.4m, 폭 62m)은 관람객을 압도한다.마침 김제시와 일본 사야마시가 이 두 저수지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함께 등재하기로 합의했다. 양국이 하나의 쌀 문화권임을 보여주는 사례로 공동등재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드물다고 한다.고대 동아시아 수리시설의 역사를 보여주는 문화자산에, 좋은 결과가 있었으면 한다./조상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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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상진
  • 2009.11.27 23:02

국내 最古 한글성서본 발견

국내에 남아있는 한글 성서본 가운데 간행시기가 가장 빠른 책이 발견됐다. 한성대 인문과학연구원장인 강순애 교수는 "간행년도가 청나라 연호인 광서 8년(1882년)으로 적힌 '예수셩교 요안내복음젼셔(예수성교 요한복음전서)'를 최근 인사동 고서점에서 입수했다"면서 "국내에는 1883년본만 남아 있었는데 이번에 발견한 책은 간행 시기가 더 빠르다"고 26일 밝혔다. '예수셩교 요안내복음젼셔'는 영국인 존 로스(1842~1915) 목사가 이응찬, 이성하 등과 함께 중국 심양에서 1882년과 1883년에 발간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최초의 한글성서본으로 국내에는 숭실대에 1883년본만 남아 있다. 1882년본은 영국 대영성서공회 도서관과 미국성서공회가 소장하고 있다.당시 기록에 따르면 심양의 문광서원에서 1882년 5월에 3천부를 인쇄하고 1883년 10월에 300부를 간행했다. 강 교수는 이번에 발견된 책은 표기법으로 볼 때 1882년의 초간본과 1883년본 사이에 간행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초간본에는 '하느님'이라고 표기하다 1883년본에는 '하나님'으로 바뀌었는데, 이번 발굴본은 '하나님'이라고 나와있으며 모음 '아래아(ㆍ)' 사용이 많다"며 "이로 미뤄 이번 발굴본은 1882년본과 1883년본 사이 과도기에 나온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본문 뒷면은 백지가 아니라 관청의 서식을 모은 '간독요취(簡牘要聚)'가 필사돼 있다. 강 교수는 "외국 종교서적 유입이 금지된 상황에서 관리의 눈을 피하려고 '간독요취'가 필사된 면으로 장정(裝幀)해 밀반입했다가 복음 선교를 위해 성경이 인쇄된 부분으로 재장정한 것"이라면서 "어느 지역에서건 초기 복음의 역사는 고되고 슬픈데 이 책을 국내에 들여오기가 얼마나 어려웠는지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중국에서 수입하는 폐지 속에 장정하지 않는 복음서 낱장을 끼워 밀반입하는 방식도 이용됐다고 그는 덧붙였다.본문은 모두 39쪽이며 40쪽은 단어를 해설했다. 책은 목판활자로 인쇄했으며 크기는 가로 14.3㎝, 세로 23.6㎝로 가로, 세로 각각 0.5㎝ 이하의 작은 글자가 사용됐다. 식자층이 아니라 일반대중을 염두에 두고 어려운 한자어보다 순 한글을 쓰고 문어체보다 구어체로 번역했다. 문장은 띄어쓰기를 전혀 하지 않았지만, 존경을 표시하기 위해 하나님, 예수, 키리스토(그리스도), 쥬(주) 등의 단어 뒤에 글씨를 띄어 썼다. 강 교수는 "근대 기독교자료가 거의 남아있지 않은 상황에서 나온 이 자료는 국내에서 발굴된 최고(最古)의 한글성서로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크다"고 평가했다. 로스 목사는 스코틀랜드성서공회와 영국성서공회의 지원을 받아 한국인 번역자 십여 명의 도움으로 1882년부터 1889년까지 9종의 성서를 발간했다. 강 교수는 한글성서 발굴본에 대해 연구한 성과를 27일 한성대 미래관에서 열리는 '한성대 인문과학연구원 제10회 학술대회'에서 발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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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
  • 2009.11.27 23:02

광화문 144년만에 다시 상량식

조선의 법궁(法宮)인 경복궁의 정문이자 남대문인 광화문(光化門)이 고종시대 경복궁을 중건할 당시 모습으로 재탄생하기 위해 144년 만에 다시 상량(上粱)을 한다. 2006년 이후 광화문의 원위치 복원 사업을 진행 중인 문화재청은 27일 오후 4시 현장에서 상량식을 갖고 제 모습을 찾기 위한 막바지 작업에 들어간다. 상량식은 목조 건축에서 기둥을 세우고 보를 얹은 다음 마룻대를 올리는 가장 중요한 의식이다. 이날 상량식은 중요무형문화재 제56호인 종묘제례 보존회가 상량문 봉안(奉安) 의식을 거행하고 문화재 전문가 및 관련단체, 공사 관계자 등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된다. 상량은 중요무형문화재 제74호 대목장(大木匠) 기능보유자 신응수씨를 비롯한 많은 전통 건축 장인이 기둥을 세우고 대들보를 올리는 등의 목조 가구재 조립을 마친 다음에 이뤄진다. 상량문은 서예가인 김양동 계명대 서예과 석좌교수가 글씨를 썼다. 문화재청은 이날이 144년 전인 1865년, 고종이 광화문을 중건(重建)하면서 상량한 뜻깊은 날이라고 말했다. 광화문 복원은 2006년 12월 '경복궁 광화문 제모습 찾기' 선포식을 시작으로 철근콘크리트 구조물인 구 광화문 철거, 원위치 확인을 위한 발굴조사, 가림막 설치, 육축(陸築.성문을 축조하기 위해 큰 돌로 만든 성벽) 축조 등의 과정을 거쳤다. 상량이 끝난 뒤에는 추녀와 서까래 설치, 지붕 기와 잇기, 단청 등을 거쳐 내년 10월 광화문 복원은 대단원을 고할 예정이다. 현판은 1900년대 초 사진을 근거로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디지털 복원기술로 원형 복원한다. 광화문은 조선 태조 4년(1395)에 경복궁의 정문으로 지어져, 세종 때 광화문이라는 현재의 이름을 갖게 됐으나 임진왜란 때 경복궁과 함께 소실됐다. 그 뒤 고종 2년(1865)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다시 지을 때에 중건(重建)됐으며 경술국치 후 일제가 조선총독부 청사를 신축함에 따라 1926년 해체돼 건춘문(建春門) 북쪽으로 옮겨졌고, 한국전쟁 때에 목조부가 소실되고 석축부만 남게 되는 수난을 겪었다. 그 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1968년 광화문은 그의 한글 친필 현판을 달고 중건됐지만, 당시 중앙청(中央廳)으로 사용하던 옛 조선총독부 청사 축에 맞춰 건립되면서 원래 위치에서 옮겨지고 더구나 목조건축이 아니라 콘크리트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옛 총독부 청사가 철거됨에 따라, 이후 광화문을 원래 위치에 목조건축으로 다시금 중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져 복원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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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11.27 23:02

한일역사공동연구委 서울서 전체회의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한국측 위원장 조광)는 28일 오후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제5회 한·일 합동 전체회의를 연다고 26일 밝혔다. 회의에서 양측은 2007년 6월 출범해 2년6개월 동안 진행해온 제2기 위원회의 공동 연구 내용을 점검하고 최종보고서의 가제본을 교환하는 한편 '일본 역사교과서 쟁점 주제 개설서' '한일 역사교과 교육과정 비교연구서' 등의 발간에 합의할 예정이다. 회의가 끝나고 나서는 오후 5시30분 양국 위원장이 기자회견을 열어 전체회의 결과와 그간의 연구활동 상황, 향후 일정 등을 설명한다. 2002년 3월부터 2005년 5월까지 활동한 1기에 이어 양국 정상의 합의로 2007년 6월 일본 도쿄에서 출범한 이번 2기 위원회의 운영기간은 올해 연말까지다. 위원회는 양국 정부 차원의 공동 연구기관으로, 교과서 문제 및 한·일 관계사와 관련한 쟁점을 함께 연구해 인식을 같이한 부분에 대해서는 양국 교과서 편수 과정에 참고하도록 노력하기로 한 바 있다. 2기 위원회는 ▲고대사(고대 한일관계 성립, 고대 왕권의 성장과 한일관계 등) ▲중근세사(14~15세기 동아시아 해역세계와 한일관계, 동아시아 세계와 임진왜란 등) ▲근현대사(한일 근대국민국가 수립과정과 한일관계, 일제 식민지시기 조선과 일본의 사회변동 등) 등 3개 분과와 교과서위원회를 구성해 활동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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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
  • 2009.11.27 23:02

"부안 죽막동 제사 유적지, 세계문화유산 가치 지녀"

부안 죽막동 제사 유적지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한 움직임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제기되고 있다.이 유적지는 1992년 국립전주박물관에 의해 발굴 조사된 우리나라 최초의 제사 유적지. 최근 일본이 죽막동 유적지와 비슷한 오키노시마 제사 유적지를 세계문화유산 후보로 등재하기 위한 물밑 작업을 하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현재 도지정문화재인 죽막동 유적지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25일 전북을 방문한 세계동아시아고고학회 사라 넬슨 회장과 함께 죽막동 유적지를 돌아본 임효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심사위원(서울대 고고학과 명예교수)은 "일본이 오키노시마 유적지를 내년 1월 세계문화유산 후보로 등재하기 위해 힘을 쏟고 있는 만큼 이에 못지 않은 가치를 지니고 있는 죽막동 유적지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임 위원은 "일본은 오키노시마를 1958년부터 발굴해 작은 파편까지 세세하게 추려 8만 여 점에 이르는 유물을 발굴해 놓은 상태"라며 "죽막동 유적지에서 발굴된 유물은 746점(파편을 담은 100박스 포함)으로 전체 유적지의 10분의 1이 발굴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이들과 동행한 윤덕향 전북대 교수는 "죽막동 유적지를 부안의 띠뱃놀이, 적벽강, 채석강과 연결시키면 복합유산으로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가능성이 더욱 높아지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사라 넬슨 회장은 "죽막동 유적지는 동아시아 교류를 연구하는 데 있어 대단히 중요한 장소"라며 "죽막동 유적지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려면 교육성, 보존성, 접근성을 갖춰야 하는 만큼 고고학자들이 이곳의 가치를 재조명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오키노시마 유적지에서 출토된 유물은 죽막동에서 출토된 제사용품과 비슷한 것이 많다. 이는 서해를 중심으로 백제시대부터 일본의 해상교통의 전진기지였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 문화재·학술
  • 이화정
  • 2009.11.26 23:02

다문화사회에서 인류 평화의 길은?

한국학중앙연구원(이하 한중연)이 매년 해외 석학을 초청해 지구촌의 당면 문제를 논의하고 우리 시대를 조망하는 '문명과 평화 국제포럼'이 다음 달 2~3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다. 5회째를 맞는 이번 포럼의 기조강연자로는 2003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이란의 시린 에바디 변호사와 미국 철학자 리처드 번스타인이 초청됐다. 에바디 변호사는 이란 최초의 여성판사 출신으로 변호사, 인권운동가로 활동하며 여성과 어린이, 정치적 망명자들의 인권을 신장시키는 데 공헌한 업적을 인정받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번스타인 교수는 미국 실용주의와 비판이론의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 중 한 사람으로 뉴욕에 있는 뉴스쿨(The New School)에 재직하고 있다. 포럼은 '글로벌 현상으로서의 다문화 사회'를 주제로 '문명간의 대화', '차이와 차별', '아시아전통과 새로운 인간', '문화다양성, 상호존중, 화해', '디지털 윤리' 5개 분야로 나눠 진행하며 미국, 독일, 인도 등 7개국 학자 12명이 참가한다. 기조강연자로 나서는 에바디 변호사는 인권, 특히 여성과 아동의 권리가 이슬람 문화와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또 여성을 포함한 인간의 권리와 민주적 가치는 현대 서구사회의 산물이라기보다 페르시아 왕조에서 현대에 이르는 이란과 이슬람의 역사에서 존중돼온 것으로 인류가 공유할 가치라고 설명한다. 번스타인 교수는 기조강연에서 냉전은 끝났지만 르완다, 보스니아 등지에서 집단 학살이 끊이지 않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9.11 테러 이후 만연한 '우리-타자(他者)' 이분법의 허구성을 밝히는 것이 지성의 의무라고 말한다. 발표자 가운데 에드워드 장 미국 리버사이드 캘리포니아대 교수는 미국 내 한국인들을 조명하면서 다문화의 문제에 접근한다. 그는 오바마 대통령의 당선은 비백인계 미국인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고 예측하면서 한인 사회의 관심이 국내정치와 자기 정체성 문제에서 미국내 한인 정치세력화로 이동하고 있다고 말한다. 바쌈 티비 독일 튀빙겐대 교수는 세계가 개인의 인권, 민주주의, 다원주의, 관용 등의 원칙에 동의할 때 합리적 토론을 거쳐 가치관과 담론을 공유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한다. 최정무 미국 얼바인 캘리포니아대 교수는 한국과 일본의 과거사 문제 해결 방식, 특히 종군 위안부와 친일파 문제 해결 방식을 우간다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과거사 해결 사례와 비교한다. 아린담 차크라바티 미국 하와이대 교수는 인도의 고대서사시 '마하바라타'에서 비폭력, 모든 삶에 대한 존중, 평등과 공정 등 삶의 원리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번스타인 교수는 포럼에 앞서 30일부터 다음 달 1일까지 경기 성남시에 있는 한중연 한국학대학원 강의실에서 프래그머티즘 전통의 거인인 윌리엄 제임스와 존 듀이의 철학을 주제로 강좌를 연다. 포럼 운영위원장인 이상훈 한중연 한국문화교류센터장은 "다문화 사회의 도전 속에 인류가 어떻게 평화를 구축할 수 있는가에 대해 세계적 석학들의 진지한 견해를 들어보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중연은 지난해까지 성남에서 포럼을 개최해오다 올해는 더 많은 사람이 쉽게 참가할 수 있도록 서울 도심에서 행사를 연다고 덧붙였다.

  • 문화재·학술
  • 연합
  • 2009.11.26 23:02

"저작권 공정이용 지침 조속 마련해야"

정부가 도입을 추진 중인 저작권 공정이용 제도와 관련, 제도의 실질적인 보장을 위해서는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을 조속히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해완 성균관대 교수는 25일 용산구 동자동 저작권교육원에서 문화체육관광부, 한국저작권위원회, 한국저작권법학회 공동 주최로 열린 제1회 저작권 포럼에서 주제발표를 통해 이처럼 주장했다. 이 교수는 디지털 환경 속에서 공정이용 제도의 도입은 저작물의 이용 활성화에도 의미가 있다고 전제한 뒤 "그러나 공정이용 제도의 실질적 보장을 위해서는 권리자와 이용자 단체 등이 참여해 구체적 가이드라인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공정이용 제도는 UCC(손수제작물) 처럼 저작권자의 이익을 크게 침해하지 않으면 저작권자의 허락 없이 저작물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로, 정부는 저작권법 개정 등을 통해 이를 도입할 계획이다. 이와 관련, 토론자로 나선 윤종수 판사(논산지법 지원장)는 "공정이용 제도의 도입을 통해 패러디와 같은 행위들을 포섭하기 쉬운 장점이 있을 수도 있다"며 "하지만 현재의 입법안은 해석상 오히려 현재의 제한 조항보다 더 엄격하게 운영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또 김병일 한양대 교수는 일반조항 형태의 공정이용 제도보다는 일정한 범위 내에서 공정이용을 포괄적으로 허용하되, 이에 해당하지 않는 것을 명시적으로 열거하는 방안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저작권 포럼은 저작권 권리자와 이용자의 상생 및 균형을 모색하려는 문화부의 '신(新) 저작권 구상'에 의해 합리적인 정책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지난 9월 전문가들로 구성, 발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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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
  • 2009.11.26 23:02

16세 순장 가야여인 이렇게 복원했다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가 경남 창녕군 창녕읍 송현동 고분군 중 15호분에서 귀고리를 찬 1천500년 전 가야계 여성 인골을 발굴했다고 언론을 통해 공개한 것은 2007년 12월20일이다. 이 15호분은 도굴로 인해 유물 대부분이 사라졌지만, 무덤 주인공과 함께 안치된 것으로 추정되는 순장자 4구의 인골이 발견됐다. 연구소는 바로 이 순장자 인골을 잘만 연구하면 그 인체까지 복원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만큼 일부 인골은 보존상태가 좋았고, 더구나 국내외에서 인골을 활용한 인체 복원 사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외국에서는 2005년 이집트의 파라오인 투탕카멘 미라를 토대로 그 얼굴을 복원했으며, 네덜란드를 비롯한 북유럽에서는 뼈대는 사라진 대신, 피부는 잘 남은 미라인 '보그 보디'(bog body 습지미라)를 복원한 사례도 몇 번 있었다. '가야사람 복원연구'는 이렇게 해서 문화재청 책임운영기관 연구과제로 선정되어 2008년 7월에 닻을 올렸다. 올해 10월까지 계속된 이번 프로젝트는 가야문화재연구소 주관 아래 국립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연구실이 협동연구 형태로 참여하고, 가톨릭의과대학 가톨릭응용해부연구소와 충청문화재연구원 한국고고과학연구소가 공동연구자로 합류했다. 이 중 출토 인골에 대한 유전학ㆍ생화학적 연구는 연구소 보존과학연구실에서 수행했으며, 인체복원 연구는 한승호 교수가 이끄는 가톨릭의대 팀이 맡았다. 가톨릭의대팀이 참여하게 된 것은 2001년에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얼굴을 복원한 경험이 계기가 됐다. 이를 통해 순장자 4명 중 유일하게 귀고리를 찬 채 발견된 인골은 여성이며, 더구나 성장판이 채 닫히지 않은 상태 등을 고려할 때 16세 혹은 16.5세에 죽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더불어 이 여성은 출산 경험이 없으며, 종아리와 정강이뼈, 그리고 치아 분석을 통해 "반복적인 사용과 앞니로 무언가를 자르는 작업을 했다"는 흔적을 발견했다. 전신적 질환과 빈혈이 있었으며, 충치도 확인됐다. 이를 토대로 이 여성은 무릎을 꿇는 일을 많이 한 시녀이거나 노비였을 것이라는 추정이 나왔다. 다만, 금귀고리를 한 점으로 보아 노비보다는 시녀에 무게가 실렸다. 복제한 뼈로 인체를 조립해 보니 신장은 151.5㎝로 나왔으며, 인체를 복원한 뒤 신장은 153.3㎝였다. 복원 과정은 우선 셀아트라는 기관에서 촬영한 컴퓨터 단층 촬영 자료를 이용해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에서 108개의 복제뼈를 제작하고 이를 가톨릭의대팀이 조립했다. 이어 B.H 인체조형 조형연구소 김병하 소장이 얼굴을 복원하고 근육과 피부 조직을 표현했으며, 피부를 마감했다. 전신상은 실리콘을 재료로 활용했다. 단국대 석주선박물관에서는 머리 형태를 자문했으며, 임정연 한복에서는 가야시대 의복 수선을 담당했다. 25일 가야문화재연구소가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공개한 1천500년 전 가야 여성, 즉, 가야 복식을 걸치고, 머리는 가운데 가르마를 탔으며, 오른손은 악수하듯이 앞으로 내밀고, 왼쪽 한 곳에만 금귀고리를 찬 모습은 이런 복잡한 과정을 거쳐 탄생했다. 강순형 가야문화재연구소장은 발굴 당시에 이 여성의 귀걸이가 한쪽만 남게 된 사연에 대해 "소설적 상상력"이라고 전제하면서 "시신을 묻는 사람이 다른 쪽 귀걸이는 슬쩍했을 수도 있다"는 기발한 '해석'(?)을 내놓기도 했다. 이제 이 가야 여성에 어떤 이름을 부여할까 하는 과정이 남았다. 강순형 소장은 "무덤 지명을 따서 '송현'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창녕 땅이 옛날 가야시대에는 비화 가야 땅이었으므로, '비화'라는 이름을 줄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문화재·학술
  • 연합
  • 2009.11.26 23:02

"마한의 신비로움, 내년 교과서에 반영"

"우연히 한국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중국 동북부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이 지역이 한반도와 고고학적으로 연결돼 있었기 때문이죠."사라 넬슨 세계동아시아고고학회장(미국 덴버대 교수)가 25일 국립전주박물관(관장 김영원)의 '마한-숨쉬는 기록'展을 찾았다. 그는 세계 고고학계에서 한국 전문가. 한국과의 인연은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3년 한강 유역 신석기 시대 빗살무늬 토기로 미국 미시간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어 2005년엔 8000년 전 강원도 양양군 오산리 신석기 유적을 배경으로 한 소설 「영혼의 새」를 써서 호평을 받았다.그는 "반만년 전 한반도에 살았던 이들의 신비로움에 반했다"며 "금방이라도 신석기 시대 사람들이 튀어나와 음식과 토기를 만들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이번 방문은 임효재 서울대 명예교수의 소개로 이뤄진 것. 넬슨 회장은 충주 금룡동에서 발굴된 뚜껑 항아리를 비롯해 구슬, 토기 등을 둘러보면서 "국보감이네"라고 연발하며 감탄했다. 특히 마한의 유물을 직접 확인한 그는 "마한의 유물이 고구려와 신라와도 구분되지만, 토기와 색깔 등을 볼 때 백제와도 확연히 차이가 난다"고 강조했다."마한특별전은 획기적인 사건입니다. 그간 고구려 백제 신라의 역사는 뚜렷했지만, 마한은 희미했거든요. 마한의 역사성과 정체성을 조명하는 전시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습니다."이번 방문을 계기로 한국의 유적에 관한 마한의 역사와 이후 둘러본 고대 제사 터인 부안 죽막동 유적지도 자신의 저서이자 미국 대학 교재인 「Gender in Archaeology」 개정판에 담을 계획."부안 죽막동 제사 유적지는 일본의 오키노시마 보다 규모도 크고, 대단히 잘 보존된 공간입니다.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준비를 서두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그는 1992년 강원도 양양군 손양면 오산리 유적을 세계고고학 사전에 등재시킨 주인공이다. 1996년 하와이 세계동아시아고고학대회에서 일본·중국고고학의 일부로 들어가 있는 한국고고학을 독립 분과로 만들기도 했다.그가 펴낸 책은 「The Archaeology of Korea」(한국의 고고학) 을 비롯해 한국의 선사시대와 관련된 연구 논문만 수십 편에 이른다. 그는 이런 업적을 인정받아 1996년 '존 에반스 교수상'을 수상한 바 있다.

  • 문화재·학술
  • 이화정
  • 2009.11.26 23:02

한국 최초기녀 '전화앵' 묘 발굴…성역화한다

경남 진주에 조선시대 의기(義妓) 논개(論介)가 있었다면 울산에는 명기(名妓) 전화앵(900-1100년 사이 생존 추정)이 있었다. 역사서와 구전을 통해 기록되고 있는 한국 최초의 기생으로 추정되고 있는 울산의 이름난 기생 전화앵의 묘에 대한 발굴과 묘역 보존 성역화 사업이 함께 추진된다. 울산시 울주문화원(원장 변양섭)은 23일 오전 11시 울주군 두서면 활천리 산 57번지 일원에 전화앵의 묘로 추정되는 곳에서 변 원장, 서우규 울주군의회 의장 등 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신라명기 전화앵 묘 발굴 고유제(告由祭. 중대한 일을 치르고 나서 그 내용을 적어서 사당이나 신명에 알리는 제사)'를 지냈다. 전화앵은 신라가 멸망할 당시의 기생으로, 새로 들어선 나라인 고려에까지 널리 이름이 알려졌을 정도로 춤과 노래가 뛰어난 예기(藝妓)였다. 그는 신라 멸망 후 망국의 한을 품고 절개를 지켜 추앙을 받아왔다고 소개돼 있다. 이날 고유제는 전화앵으로 묘로 알려진 이곳을 발굴, 전화앵의 유물을 찾기 위해 기원하는 의식으로 진행됐다. 1996년 처음 발견된 전화앵 묘는 1530년(중종 25년) 이행, 홍언필이 완성한 조선시대의 인문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경주부 고적조 열박령편에 '열박령은 경주 남쪽 30리에 있고 동도(東都.경주)의 기녀 전화앵이 묻힌 곳'이라고 기록돼 있다. 울주문화원은 고유제를 지낸 뒤 곧바로 울산발전연구원 측과 함께 묘에 대한 발굴에 들어갔다. 이날부터 시작된 발굴은 일주일 이내에 마무리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변양섭 울주문화원장은 "전화앵 묘 발굴에서 유물이 나오면 묘역 보존을 위한 성역화 사업을 추진한다"고 말했다. 전화앵 묘 주변에 120만여㎡ 규모의 활천일반산업단지를 조성 중인 울산의 개발업체인 티에스산업개발㈜(회장 이성우)도 이번 사업이 순조롭게 이뤄질 수 있도록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또 울산지역의 대표적인 문화단체인 울산학춤보존회는 올해로 8년째 추모제를 열고 있다.

  • 문화재·학술
  • 연합
  • 2009.11.24 23:02
문화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