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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연대 "약탈된 외규장각 도서 찾아오겠다"

병인양요 때 약탈한 외규장각 도서를 반환하라며 프랑스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하고 있는 시민단체 문화연대는 최근 파리 행정법원이 소송을 기각한데 대해 항소하겠다는 입장을 26일 밝혔다. 문화연대는 이날 서울 서대문구 합동 주한 프랑스대사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이번 주 중 프랑스 법원에 항소장을 제출하겠다고 말했다. 문화연대는 기자회견에서 "프랑스 법원은 과거 제국주의 약탈행위를 반성하지 않고 그들의 선조와 다름없는 제국주의 행태를 보여줬다"면서 "시민의 이름으로 약탈 문화재를 찾아오겠다"고 말했다. 이들은 "1만명이 1만원을 내는 소송지원단을 구성해 소송비용을 마련하겠다"면서 "정부의 외교적 협상과는 별개로 소송을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황평우 문화연대 문화유산위원장은 "한국 정부는 외규장각 도서의 소유권을 프랑스가 갖고 한국은 이를 영구임대하는 방식을 추진하고 있다"면서 "설사 외규장각 도서가 영구임대 형식으로 돌아온다 해도 점유권만 인정되는 것이므로 소유권을 찾는 소송을 끝까지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문화연대는 프랑스에서 소송을 계속하는 한편 우리 법정에 프랑스 정부를 대표하는 주한 프랑스 대사를 세워 심판을 받도록 국내에서도 다음달께 별도의 소송을 제기하겠다고 설명했다. 문화연대는 중국 등 자국의 문화재를 약탈당한 여러 나라의 단체들과 민간 차원의 국제연대를 해 반환운동을 벌일 예정이다. 특히 10만유로(약 1억6천만원)의 항소 비용 마련을 위해 시민 소송지원단을 모집하고 외규장각 도서를 포함한 해외 약탈문화재를 반환받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는 토론회를 열 예정이다. 또 반환 운동을 확산시키기 위해 콘서트를 개최하고 거리캠페인을 벌일 계획도 있다.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하던 강화도 외규장각에는 왕실이나 국가 주요 행사의 내용을 정리한 의궤(儀軌)를 비롯해 총 5천여권의 서적이 있었지만 1866년(고종 3)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습격해 서적 340여권을 약탈하고 나머지를 불태웠다. 문화연대는 2007년 2월 프랑스 파리 행정법원에 외규장각 도서를 반환하라는 소송을 제기했지만 프랑스 법원은 지난해 말 외규장각 도서는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된 국가재산이라며 소송을 기각했다.

  • 문화재·학술
  • 연합
  • 2010.01.27 23:02

'주역' 태인본, 세상밖으로?

「주역(周易)」 태인본으로 추정되는 문서가 김해정 우석대 명예교수에 의해 발견됐다. 태인본은 민간에서 판매용으로 인쇄한 책인 방각본(坊刻本) 중 전국적으로 가장 먼저 태인에서 만들어진 문서.김 교수는 완판본에 관한 책을 조사하던 중 '주역'이라는 제목을 가진 문고판 10책이 발견됐다며 주역 본문만 있고, 서문, 발문, 판권지가 없는 상태라 지배문서(책의 앞·뒤 표지 속에 들어있는 재활용한 폐지)로 확인한 상태라고 말했다. 책이 오래 되어서 판권지나 출판일자를 가늠할 수 없을 때엔 그 표지 속에 숨어있는 지배문서를 찾아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무슨 책의 폐지였는가를 조사해 그 원문의 출처를 밝혔던 것.김 교수는 주역에 1794년 태인 현감으로 부임했던 조항진씨의 호가 기록에 남아있는 점을 볼 때 이는 태인본이며, 그의 활동 연대를 봐도 병진년이 1796년임을 알 수 있게 한다고 설명했다. 「주역」 태인본으로 추정되는 이 문고판은 본래 한 질(12책 24권). 그러나 3~4책은 찾지 못했다. 책의 크기는 목판본으로 14.5cm x 20cm으로 1책 분량은 116쪽이다. 한자로 된 원문은 큰 글자는 한 줄, 그에 대한 주(註)는 두 줄로 쓰여져 있다.김 교수는"이로써 태인에서 칠서(七書)가 간행됐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 것 같아 흐뭇하다"며 "칠서의 나머지인 「대학(大學)」, 「중용(中庸)」, 「논어(論語)」, 「맹자(孟子)」, 「시전(詩傳)」, 「서전(書傳)」 등도 찾아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그러나 이를 「주역(周易)」 태인본으로 단언하기 어렵다는 주장도 있다. 이태영 전북대 교수는 "이를 「주역」 태인본이라고 보기는 힘들다"며 "1700년대 후반 판매용으로 대중화된 문고판이 나왔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이어 언제, 어디에서 찍었다는 기록이 없는 데다 나머지 칠서도 발견된 바가 없고, 주역이 200여 년이 흘렀다는 점을 감안할 때 문서 상태가 양호한 것으로 보아 「주역」 태인본이라고 확정하기엔 아직 이르다고 말했다.이 문고판이 실제 「주역」 태인본인지 아닌지의 여부는 앞으로 학계를 통해 충분히 검토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 문화재·학술
  • 이화정
  • 2010.01.27 23:02

[이은혁의 글씨로 만나는 옛 글] (20)황정견의 초서 '이백억구유시권(李白憶舊遊詩卷)'

황정견(산곡)이 북송대의 서단에서 스스로의 존재를 부각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타고난 재주에 탐구정신이 가해졌기 때문이다. 일전에 소개한 바와 같이 그의 서력은 깨달음의 연속이었다. 일개의 예술가가 평지돌출할 수 없음은 자명한 것이지만 단지 고전의 섭렵과 배움만으로는 심오한 경지에 도달할 수 없다. 진지한 배움은 반드시 끝없는 의문을 동반한다. 그것이 학(學)이고 문(問)이다. 북송대 서가들에게서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이러한 학문적 태도에 있다. 소동파는 물론 황산곡에게도 풍부한 학적 유산이 전한다. 다음에 다루게 될 미불(米?) 역시 서화에 대한 감식안은 물론 뛰어난 사적 안목이 자리한다.황산곡의 서품을 일별해 보면 그 폭이 다른 서가에 비해 넓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것은 그가 주어진 상황에 따라 심상(心象)을 필사하는 태도가 남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송풍각이나 범방전과 같은 비교적 단정한 해행과 이백억구유시권이나 제상좌첩과 같은 초서는 그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이는 황산곡의 두 면모를 보는 것이지만 달리 서예사를 통해서 보더라도 분명 이전과는 다른 혁신적인 성격을 띤다. 이왕(二王)과 손과정의 서보에서 느껴지는 초서가 전형적인 것이라면 황산곡의 초서 작품은 보편적인 전형성보다 특수적인 개성이 두드러진다.여기에 소개하는 황산곡의 '이백억구유시권'은 초서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첩의 앞부분에 80여자가 빠져 있고 기년이 없으나 대략 1094년의 작으로 추정한다. 서품을 조망하며 필획을 따라가다 보면 행간을 넘나드는 자유로운 사전(使轉)과 파격적 구성이 난무하듯 펼쳐지고, 점과 획의 대비가 강렬하게 나타난다. 지면의 곳곳에 점을 찍어놓은 듯한 점자식 구성은 연면하는 선율에 색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일설에 회소의 초서 필법에 가깝다고 평해지지만 황산곡만의 특성이 전체적인 분위기를 압도하며, 멀리 안진경의 혁신성을 계승하여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것만은 분명하다. 임서할 때는 집필과 운필에서 최대한 힘을 빼고 느긋하게 절주를 느끼면서 써야만 종횡무진 횡일하는 자태를 구사할 수 있다.황산곡은 스스로 지금까지 쓴 것이 필봉이 너무 드러나 좋지 않았으나, 소성(紹聖) 원년(1094)에 황룡산에 있으면서 문득 초서삼매를 얻었다고 회고하였다. 초서의 전형보다는 초서삼매을 얻었다는 말에서 예술가적 기질이 엿보인다. 왕세정은 황정견의 초서를 평하여 당대의 승려로서 광초(狂草)로 유명했던 회소(懷素)를 모방하고 있으나 글자의 자태가 여유로워 초서로서의 법도가 다소 부족하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전형의 측면에서 논한 것일 뿐 예술적 측면에서 본다면 결코 폄하될 수 없는 산곡만의 매력이 내재하고 있다. 서품에서 느껴지는 절주와 기개 그리고 탁월한 조형미가 시대를 대표하기에 충분하다. 이 첩의 뒤에 원나라 장탁(張鐸)과 명나라 심주(沈周)의 발문이 있으며, 뒤에 청나라 내부에 소장되었으나 청조의 마지막 황제인 부의(傅儀)가 일본에 팔아 넘겨 현재 일본 교토 등정유린관(藤井有?館)에 소장되어 있다. /이은혁(한국서예문화연구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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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북일보
  • 2010.01.27 23:02

"태조어진 국보 승격사업, 더 세심하게 준비"

전주시 교동에 세워진 자만동금표(滋滿洞禁標)를 박물관으로 이전하고 원래 위치에는 복제본을 두는 자만동금표 이전 및 보호 계획을 서둘러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또 태조 어진 경기전 봉안 600주년에 맞춰 진행되고 있는 태조 어진 국보 승격 사업은 미술사적 가치 등 전문가 연구를 보완, 국보 지정까지 걸리는 시간과 일정을 고려해 치밀하게 추진해야 한다는 여론이다.지난 22일 전주전통문화센터 다향에서 열린 '2010년 제1차 전주시 문화유산심의위원회'에서 이동희 전주역사박물관장은 "자만동금표는 보기에는 작지만 조선왕조 발상지로서 상징적인 유물로 문화재적 가치가 크다"며 "일반인이 관리하고 있는 만큼 협의를 통해 기존 박물관으로 옮기고 향후 어진박물관에 전시해야 한다"고 말했다.자만동금표는 이성계의 선조인 목조 이안사가 살았던 자만동에 벌목이나 개장, 개석 등을 금지하는 내용을 담아 설치한 표지석. 높이 70cm, 폭 23cm, 두께 12cm, 쑥색의 화강암으로 1900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전북도지정 기념물인 동고산성의 국가지정문화재 승격 추진과 관련해서는 전주성으로 명칭을 조정한 후에 승격을 추진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조법종 우석대 교수는 "이미 동고산성에서 전주성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기와들이 발견된 만큼 정확한 명칭을 되찾아 수정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변주승 전주대 교수는 전주성으로 바꿀 경우 현재 복원을 추진 중인 전주부성과 혼란을 일으킬 수 있다는 우려를 나타냈다.10월에 열리는 '태조 어진 경기전 봉안 600주년 기념행사'와 관련해서는 어진 구본 발굴 사업을 서둘러야 한다는 주장이 또다시 제기됐다. 조교수는 "매안된 어진 구본 발굴 사업을 600주년에 걸맞는 기념행사로 추진해 국가적 관심을 일으켜야 한다"며 "상징성 뿐만 아니라 땅 속에 묻힌 구본이 훼손될 수 있다는 점에서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구본이 나오지 않더라도 어진 매안과 관련된 중요 유물이 나올 수 있다는 점에서 기대를 내비쳤다.변교수는 "전통 제사문화가 급속하게 사라지고 있는 상황에서 경기전 삭망제(朔望祭)를 문화관광자원으로 활용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고 조언했다. 또 전문가들은 현재 정전에 전시된 모사본 이외에도 어진박물관에 전시될 모사본이 하나 더 필요하다며 어진 모사 작업을 진행해야 한다고 말했다.10월 개관예정인 어진박물관 운영을 위해서는 전문 관리부서인 박물관관리팀이 구성돼 학예직 2명을 포함한 6명이 보강될 예정이다. 이에 대해 조교수는 "어진박물관을 전주역사박물관 분원 등의 형식으로 운영한다면 어진박물관과 역사박물관 모두 학예연구 면에서 보완이 되는 시너지 효과가 있을 것 같다"고 제안했다.

  • 문화재·학술
  • 도휘정
  • 2010.01.25 23:02

[오목대] 자만동금표(滋滿洞禁標) - 조상진

전주시 자만동(滋滿洞)은 지금 교동으로, 한옥마을 인근 높은 곳에 자리잡은 동네를 가리킨다. 정확히 말하면 승암산(중바위) 자락을 따라 한벽루 이목대 오목대를 잇는 능선 밑으로 형성된, 향교 동북쪽에 있는 마을이다.녹엽성음(綠葉成陰), 자만지운운(子滿枝云云)의 고가(古歌)에서 따왔다고 한다. 예전엔 나무가 꽤 울창했던 모양이다. 한벽당에 사시사철 맑은 물이 흘러 옥류동(玉流洞)이라 부르기도 했다.이곳 산의 이름은 발산(鉢山)이다. 중바위에서 탁발하러 오는 스님의 바리때(鉢盂)를 닮았다 해서 붙인 이름이다. 바리때는 스님이나 부처님의 밥그릇으로, 이를 엎어 놓은 형상이라는 것이다.또 이씨 왕조가 일어난 산이라 하여 발이산(發李山)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성계의 4대조인 이안사가 태어나 산성별감과 다투고 고향을 떠나기 전까지 20여년을 살았던 곳이다. 그래서 이목대에는 고종황제가 1900년 써서 내린 목조대왕구거유지(穆祖大王舊居遺祉)라는 친필 비석이 세워져 있다.오목대는 이성계가 남원지역에 출몰하는 왜구를 소탕한, 소위 황산대첩을 거둔 후 들러 종친들을 모아놓고 크게 잔치를 베푼 곳이다. 이 자리에서 한고조 유방이 불렀다는 대풍가(大風歌)를 부름으로써 왕조창업의 뜻을 드러냈다. 이를 기리고 황혼녘 왕조를 지키고자 고종은 친필로 태조고황제주필유지(太祖古皇帝駐畢遺祉)라는 비문을 남겼다.이처럼 자만동은 조선 건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뿐만 아니라 많은 인재를 배출한 명당이다. 조선 개국공신으로 집현전 직제학을 지낸 최담이 말년에 이곳에서 후학을 가르쳤다. 조선의 명필 이삼만과 조선 중기의 풍운아 정여립(?)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또 일제 초기 옥류동 최학자로 유명했던 최병심도 이곳 출신이다.때 마침 조선왕조 직계의 생활터에 대한 출입금지를 알리는 자만동금표(滋滿洞禁標)가 문화재 등록을 추진하고 있다. 화강암으로 된 이 표지석은 높이 62㎝, 폭 31㎝로 1900년 오목대비 이목대비 조경단비와 함께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금표는 해당지역의 벌목이나 개장, 채석 등을 금하는 경계석이다.조선왕조의 뿌리가 전주임을 증명하는 또 하나의 문화 콘텐츠가 아닐까 싶다.

  • 문화재·학술
  • 조상진
  • 2010.01.22 23:02

"완판본, 한글 꽃 피우는 데 결정적 역할"

"전통문화하면 으레 정체돼 있는 것으로만 생각하지요. 하지만 한글을 목판에 새기고 찍어냈던 인쇄 문화는 지식과 정보를 전해주기 위한 것으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려고 했던 민중들의 열려있는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목판이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는 최초의 매체였던 것이지요."19일 전주한방문화센터에서 열린 '천년전주사랑모임 화요강좌'에 강사로 나선 안준영 전주목판서화체험관 대표(53). '전주에 핀 목판 문화유산 완판본'을 주제로 이야기한 안대표는 "완판본은 한글을 꽃 피우는 데 있어 결정적 역할을 했으며, 그런 점에서 완판본의 고장 전주와 한글의 관계는 밀접하다"며 "한글을 전주 한스타일 사업에 포함시켰으면 좋겠다"고 말했다."전주에서 간행된 완판본은 고대소설을 통해 전국에 한글을 널리 보급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역시 천년을 가는 뛰어난 전주 한지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겠죠. 그런 점에서 전주 한지는 우리 기록문화유산의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완판본의 예술성과 대중성을 바탕으로 한소리도 발달할 수 있었고요."완판본(完板本)은 조선 후기 전주에서 간행된 목판본의 고대소설을 통틀어 이르는 말. 그는 "완판본 중 '구운몽' '조웅전' '별춘향전' '심청전'을 제자들과 복원했다"며 "완판본에는 전라도 사투리가 많고 향토색도 짙지만 한문화가 담겨있다"고 강조했다.안대표는 전국 국어교사 직무연수를 완판본과 연결시켜 전주로 유치하고, 완판본의 글꼴을 데이터베이스화해 한글 글꼴로 발전시키는 방안도 제안했다."30년 이상 나무에 글자 하나 하나를 새기며 이렇게 소중한 문화유산을 제대로 모른다는 사실이 안타까웠습니다. 저는 고인쇄 문화를 토대로 창작 판화까지 하고 있습니다. 작가로서 대접받으며 창작만 하면 쉽겠지만, 대가 끊긴 전통의 맥을 잇는다는 생각으로 자기와의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용비어천가'를 전주에서 복각하며 2008년부터 전주와 인연을 맺게 된 안대표는 스스로를 "목판을 만들고 복원하는 사람이며 영호남에서 같이 활동하고 있는 자칭 문화활동가"라고 소개했다. 그는 "문화야말로 혼자 할 수 없다"며 "전주 시민들의 관심으로 시민의 힘으로 완판본이 복원되고 발전되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전주 한옥마을에 위치해 있는 전주목판서화체험관에는 안씨가 복원한 고목판 '무구정광대다라니경' '반야심경', 한글문화유산 '용비어천가' '훈민정음' '월인천강지곡' 등이 전시돼 있으며, 고인쇄·목판화를 비롯해 목판화 엽서 만들기, 옛 책 만들기 등도 체험해 볼 수 있다.한편 천년전주사랑모임 화요강좌는 올해 한글, 한식, 한복, 한지, 한옥, 한국음악 등 한스타일과 관련된 강의를 이어가기로 했다.

  • 문화재·학술
  • 도휘정
  • 2010.01.21 23:02

[이은혁의 글씨로 만나는 옛 글] (19)황정견(黃庭堅)의 '송풍각시권(松風閣詩卷)'

황정견(1045~1105)은 북송 사대가의 한 사람으로 자는 노직(魯直), 호는 부옹·산곡이며 홍주 분녕(洪州分寧 : 江西修水) 사람이다. 소동파의 제자인 소문사학사(蘇門四學士)의 한 사람으로서 그의 학문과 정신을 이어받아 강서시파(江西詩派)의 개창자가 되었다. 서예는 동파와 함께 안진경 이래의 혁신적인 서풍을 배웠으나 황정견은 동파보다 진일보하여 초월절진한 일기(逸氣)를 나타낸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글씨를 공부한 지 20년이 넘도록 속기를 면하지 못하다가 소씨 형제(蘇舜元·蘇舜欽)의 글씨를 보고 겨우 고인의 필의를 얻었으며, 그 후 당대의 장욱(張旭), 회소(懷素), 고한(高閑) 등의 묵적을 보고 비로소 필법의 오묘함을 깨달았다고 회고하였다.일설에 황산곡은 평소 관찰력이 뛰어났는데 일찍이 사공이 노를 젓는 것을 보고 이것을 용필에 적용하여 독특한 서풍을 이루었다고 한다. 특히 행서에서 노를 젓는 저항력과 비례하여 힘차게 전진하는 배의 형상이 용필의 긴삽(緊澁)함으로 환치되어 더딘 듯하면서도 좌우로 시원하게 뻗은 필획과 곧은 수획으로 나타났다. 서예용어로는 이것을 장별·장날(長捺)·현침(懸針)이라 하는데 그 형상이 마치 노를 저으며 나아가는 배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이른바 역수행주(逆水行舟)의 모습이다. 이러한 독특한 필의는 그의 행서작 '화기시(花氣詩)' '송풍각시권' '황주한식시권발(黃州寒食詩卷跋' '범방전(范旁傳)' 등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공부면에서 소동파가 신의(新意)를 강조하며 고인에게서 일탈할 것을 강조한 것과는 달리 황산곡은 고인의 필법을 체득하여 자신만의 독자성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소·황 모두 운(韻)을 중시하고 탈속을 강조한 점에서는 동일하였다. 이러한 사고는 자외(字外) 공부로 이어져 학문수양으로 발전하였으며, 학문수양 없이 단지 그 점획만을 얻은 글씨를 경계하였다.'송풍각시권'은 유배에 처한 황산곡이 숭녕(崇寧) 원년(1102) 호북성 악성현 번산(樊山)의 아름다운 산수를 보고 소나무 숲 속에 있는 누각을 송풍각(松風閣)이라 명명한 뒤 직접 지어 쓴 자작시이다. 58세 때의 작품으로 그의 말기작에 해당한다. 모두 21구의 칠언고시로서 유배지의 아름다운 풍광을 소개하며 유배의 속박에서 벗어나 벗들과 마음대로 종유하고픈 간절한 마음이 담겨 있다. 무창(武昌)의 아름다운 풍광을 읊던 황산곡은 문득 스승 소동파가 황주로 귀양을 갔다가 사면되어 돌아오는 길에 상주(常州)에서 객사했던 일을 떠올린다. 동파 역시 황주의 귀양시절에 이 곳 무창에 자주 들렀기 때문이다. 장뢰는 밥을 먹다가 소동파가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 새끼를 꼬아 머리에 두른 채 곡을 했다고 한다. 그런 친구가 죽기 전에 찾아왔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미약한 인간으로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한다. 그러나 아무리 탄식한들 세상이 갑자기 변할 리 없으니 처해진 환경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것도 하나의 방편일 것이다. 넘실거리는 파도소리를 베개삼아 낮잠을 즐기고, 눈을 뜨자 이양빙이 전서로 쓴 누정의 편액이 교룡처럼 얽혀 있는 것이 들어온다. 마지막 구절에서 "어느 때나 속박에서 벗어나 친구들과 자유롭게 뱃놀이를 하며 두루 돌아볼까"라고 한 것을 보면, 결코 삶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않고 여전히 자유세계를 꿈꾸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산곡의 간절한 마음과 그가 체득한 필묘(筆妙)를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수작이다. /이은혁(한국서예문화연구회 이사장)

  • 문화재·학술
  • 전북일보
  • 2010.01.20 23:02

학술적 연구 토대 역사복원 이뤄져야

전라감영 복원문제가 지지부진한 것은 예산 미확보 이외에도 토대가 되어줄 관련 연구 부족과 시민 공감대 형성 실패가 원인으로 지적됐다.지난 11일 전주한옥마을 봄에서 열린 전북일보 <도시, 역사를 부르다-전라감영과 4대문 복원, 길을 찾다> 집담회에서 전문가들은 "전라감영과 관련된 가장 기본 자료라고 할 수 있는 「완영일록」 번역이 아직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며 이같이 주장했다.또 참석자들은 "전라감영 복원이 일부 지식인 또는 관련자들의 문제로만 머물고 있다"며 "시민적 관심으로 확산시키기 위한 움직임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완영일록(完營日錄)」은 서유구(1764∼1845)가 1833년 4월 10일부터 1834년 12월 30일까지 전라도 관찰사로 수행한 제반 업무를 일지 형식으로 기록한 문헌. 지방 행정의 제반 사안들이 종합적으로 정리된 데다 개인적인 감정과 사적인 차원의 논리 진술을 배제하고 사실 중심으로 요약하고 관련 문건을 제시하는 방식이어서 전라감영 복원에 있어 유용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경상감영이 있는 대구시가 대구감영 400주년을 기념하며 「경상감영사백년사」와 「경상감사도임순역행차의 복원가장」을 발간하고, 충청감영을 복원한 공주시가 조선시대 감영 문화와 자원활용에 대한 학술대회는 열어온 것과는 대조적이다.이동희 전주역사박물관장은 "감영이 있는 도시 중 유독 전주만이 감영일지를 번역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관련 학술대회도 지난해 전주역사박물관과 전북대 전라문화연구소가 공동으로 마련한 학술대회가 유일했다"며 "복원 문제는 가장 크게 떠들면서 정작 기초적인 작업이라고 할 수 있는 감영에 대한 학술적 연구는 없다"고 말했다.전라감영 복원 논의에서 시민들이 소외되고 있다는 뼈아픈 지적도 나왔다. 원도연 전북발전연구원 지역정책개발연구소장은 "전라감영 복원은 지나치게 문화적·역사적 지식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한정된 것으로 느껴진다"며 "시민들은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무관심할 수 밖에 없다"고 분석했다. 원소장은 "동학은 밑에서부터 시작해 특별법까지 제정하지 않았냐"며 "감동이 없는 역사는 복원되기 힘들다"고 강조했다.조법종 우석대 교수는 "전라감영 복원은 전라감영이 왜 소중한 지에 대한 시민적 합의가 바탕이 돼야 한다"며 "시민들을 대상으로 전라감영 서까래 올리기, 스토리텔링 대회 등 홍보행사를 기획하거나 선화당 복원 모금 운동 등을 통해 관심을 끌어낼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 문화재·학술
  • 도휘정
  • 2010.01.19 23:02

전주 '호남제일문' 문화재 등록 추진

호남의 대표관문인 '호남제일문(湖南第一門)'의 문화재 등록이 추진된다.전주시는 오는 22일 시 문화유산심의위원회를 열고 호남제일문과 자만동 금표에 대한 문화재 등록여부 등을 심의할 예정이다.호남고속도로에서 전주시내로 들어오는 초입에 있는 호남제일문은 전주는 물론 호남지역의 관문.지난 1977년 첫 설치된 후 1994년 도로 확장공사와 함께 현재의 시설물로 새로 만들어졌다.길이 43m, 폭 3.5m, 높이 12.4m의 호남제일문은 전국에서 가장 큰 일주문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일주문은 네 개의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얹는 일반 가옥과는 달리 기둥이 한 줄로 된 것을 말한다.팔작겹처마의 전통한옥 지붕양식을 갖추었으며, 현판 글씨는 강암 송선용 선생이 썼다.여기에 육교기능까지 겸비했으며, 풍수학적으로 허술한 북쪽을 보완하기 위해 세워졌다는 것도 흥미를 유발한다.자만동 금표(禁標)는 전주 이씨의 발상지인 자만동(현 전주시 교동 이목대)의 출입금지를 알리는 표지석.높이 62cm, 폭 31cm, 두께 15cm의 화강암에 글이 새겨졌으며, 별다른 보존대책 없이 방치되면서 훼손우려가 높다.이들 시설물은 시 문화유산심위를 거쳐 도 문화유산심의위원회를 통과하면 도지정 문화재로 등록된다.시 관계자는 "우리지역 문화자산을 소중하게 관리하기 위한 취지다"며 "전주의 과거에 대한 자존심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심어주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 문화재·학술
  • 구대식
  • 2010.01.19 23:02

[전라감영과 4대문복원] ⑨전라감영과 4대문 복원, 전망과 과제

<< 올해를 전라감영 복원의 원년으로 삼자는 의견이 힘을 얻고 있다.전북일보가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기획한 <도시, 역사를 부르다-전라감영과 4대문복원, 길을 찾다>를 마치며 마련한 집담회에서 전문가들은 "복원 규모와 범위, 성격 등이 여전히 논쟁이 되고는 있지만, 우선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하자"며 "어떤 결론이 나오든 반드시 복원해야만 하는 전라감영의 핵심건물 선화당과 관련된 것이라도 먼저 사업을 추진하자"고 주장했다.이날 집담회에는 고언기 전주시 전통문화국장, 김남규 전주시의회 의원(문화경제위원장), 원도연 전북발전연구원 지역정책개발연구소장, 이동희 전주역사박물관장(전라북도·전주시 문화재위원), 이종민 전북대 교수(전라감영 전주4대문 복원 통합추진위원회 부위원장), 조법종 우석대 교수(전주시 문화재 위원)가 참여했다. 사회는 이번 기획의 전문가로 참여한 이종민 교수가 맡았다. >>▲ 이종민=전북일보 <도시, 역사를 부르다> 기획에 참여하며 전라감영 복원과 관련한 시사점을 얻기 위해 일본 취재에도 동행했다.전라감영 복원과 관련해 오랫동안 다양한 논의가 진행돼 오고 있는데, 예산 확보가 난망하다 보니 논의도 자꾸 겉도는 것 같다. 하지만 예산 확보만을 기다리며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개인적으로는 전라감영이 복원되면 전주시와 전라북도에 엄청난 의미가 될텐데, 너무 국가에 의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도 든다.이번 논의를 위해 우선 복원의 의미와 목적, 성격 등 원론적인 이야기부터 시작해 보자.▲ 조법종=<도시, 역사를 부르다>에서도 이야기했듯, 전라감영 복원은 조선 500년 전라도 수구의 상징성을 살린다는 것이 중요한 목적이자 목표다. 감영 복원은 단순하지만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 전주가 가지고 있던 역사적 위상을 공간적으로 회복하자는 것이다.전라감영의 원형을 최대한 살릴 수 있는, 복원에 가까운 재현을 하는 것이 현실적이다. ▲ 이동희=역사성 문제도 있지만, 전라감영 복원은 구도심 활성화라는 중요한 과제도 안고 있다. 역사성과 구도심 활성화라는 두가지 목적을 같이 달성해야 하다 보니 아무래도 방향 잡기가 어려운 것 같다.▲ 김남규=1996년부터 전라감영 논의가 시작된 지 14년이 경과됐다.최근 익산이 미륵사지와 왕궁리 오층석탑, 제석사지 등 백제문화로 부상하고 있는데, 익산은 백제문화로 전주는 조선문화로 집중해 나가면 어떨까. 특히 올해는 태조 어진 경기전 봉안 600주년이 되는 조선왕조의 발상지로서 뜻깊은 해 아닌가. 전라감영 복원은 전라북도 문화재 복원 및 관리라는 큰 틀에서 접근해 나갈 필요가 있다.▲ 조법종=목표를 구체화하면 감영 복원의 성격도 나올 것이다. 익산이 역사유적지구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처럼, 전라감영과 경기전, 향교, 객사, 풍남문 등 조선의 원형적 모습을 가지고 있는 전주도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목표로 한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전라감영이 어느 정도 공간성과 원형성을 회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고언기=역사적으로 전라감영이 전주 정신을 살리는 측면에서 필요하다는 것에는 충분히 공감한다. 전주시는 전라감영의 현존하는 유일한 건축물인 동헌을 전주로 옮겨오는 등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규모나 시기, 예산, 주체 등에 있어서는 전주시와 전라북도 통합추진위원회가 구성되고 자료를 검토하는 단계에 있지만, 앞으로 쟁점별로 하나씩 집중적으로 논의해 가는 자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종민=일본에 다녀오면서 복원의 또다른 의미를 되짚고 싶었다. 복원이 단순히 과거를 되살리자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가나자와성 복원과 관련해서 일본 현지에서 만난 오오바 요시미 가나자와학원대학 교수는 "백년 후 국보를 만드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당대 최고 수준의 대목술 기술이 접목돼 만들어졌을 전라감영도 복원 후 일정한 결을 안게된다면 충분히 국보화될 수 있겠다 싶었다.▲ 원도연=전라감영 문제는 과거 역사적인 상황을 그대로 복원해 100년 뒤 문화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의미가 있되 미래에서도 가치를 지닐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전라감영을 중심으로 벌어졌던 수많은 사건과 상황, 그것들이 꼭 전라감영 사이트에서만 재현돼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판을 크게 볼 필요가 있다. 전라감영은 전주의 역사와 문화를 상징하는 랜드마크였으면 좋겠다. 그 기능을 중심으로 시민들의 문화적 요구를 반영할 수 있는 공간이 되길 바란다.▲ 이종민=가나자와성은 복원을 통해 460년 동안 소수인들이 독점했던 공간을 시민들에게 공원으로 돌려준다는 것에 의미를 뒀다. 전라감영에도 그런 의미를 집어넣을 수 있을 것 같다. 감영에서 했던 문화예술의 생산적 측면을 재현한다면 문화창조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고, 한옥마을과 풍남문, 남부시장을 연계시켜 길게 본다면 구도심 활성화에 적극적으로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전라감영 복원과 관련해 가장 큰 걸림돌은 구도심 활성화에 기여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잘 만들어진 영화 한 편이 순식간에 자동차 수백대, 수만대를 판매하는 수익을 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문화가 느리고 더디게 수익을 창출해 낸다.전주한옥마을도 초창기에는 주민 반대가 만만치 않았지만, 지금은 한해 200만명 이상의 관광객을 끌어모을 만큼 성장했다. 전라감영과 구도심 활성화도 장기적 측면에서 생각해야 한다.▲ 김남규=역사성을 복원하는 데 있어 일본을 비롯해 해외사례를 들여다 보면 깊은 곳에는 구도심 문제가 자리하고 있었다. 전라감영 자리에 위치해 있던 전북도청이 이전하면서 중앙동과 경원동 등 그 일대 구도심 공동화 현상이 심각해 진 것이 사실이다. 전라감영 복원과 구도심 문제는 현대도시에서 역사건조물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대한 좋은 화두인 것 같다.▲ 조법종=만약 도청이나 교육청이 건물을 리모델링하고 서부 신시가지로 옮겨가지 않았다면 구도심이 이처럼 급격하게 쇠락하진 않았을 것이다. 구도심 공동화 현상은 행정기관들에게 큰 책임이 있으며, 그것을 전라감영 문제로만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종민=(복원규모에 있어)완전복원이냐 부분복원이냐, (추진주체에 있어)전주시냐 전라북도냐, 아직 정해진 것은 없다. 전라북도와 전주시가 공동으로 추진위원회를 만들었다는 것을 우리는 적극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 추진위에서는 시장이나 도지사의 의지, 자치단체의 예산 확보 정도를 궁금해 하지만 반대로 추진위에서 이와 관련된 것들을 적극적으로 주문할 수 있어야 한다.▲ 조법종=무엇보다 이제는 논의 구도를 정의할 단계가 됐다. 더이상 공회전시키지 말고, 나중에 변형이나 수정이 되더라도 일단 방향을 잡고 어느 정도 가이드라인을 정해야 한다. 무엇보다 다른 지역에서도 역사성 회복을 지역 정체성 확립의 핵심적 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원도연=논의가 오래돼 온 만큼 정리할 시점은 됐다고 생각한다. 사업주체를 관으로 보는 관점들이 있는데, 생각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전라감영 복원은 시민적 합의가 중요하다.또한 완전복원과 부분복원에 관한 문제도 그렇다. 물론, 큰 그림을 정해져야 세부적인 전략이 나오고 마스터플랜에 대한 총괄적인 합의를 하고 시작하는 것이 안정적이기는 하겠지만 우선 기초적인 합의에서 시작할 수 있는 것은 시작하자. 그래야 시민들로부터 신뢰를 받을 수 있다.▲ 조법종=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전라감영 일대의 현재 건물들을 전부 헐어본다던가, 원형에 가깝게 복원했을 때의 모습을 그려본다던가, 절충안으로 상징적 복원만 했을 때의 모습을 그려본다던가, 어떠한 구체적인 것이 보여질 때 일도 진척될 수 있다.▲ 김남규=전라감영에 대한 건축적 고찰과 함께 소프트 프로그램을 복원해 나가야 한다. 감영이 행정적·문화적으로 무엇을 해왔는지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인출방(印出房), 지소(紙所), 선자청(扇子廳) 등 한지 및 인쇄출판 도시로서 전주의 정체성이 담긴 공간은 꼭 복원했으면 좋겠다.▲ 원도연=전라감영은 감영 중의 감영이다. 따라서 전라감영에만 그칠 것이 아니라 감영과 관련된 모든 것을 담아내는 감영문화관으로서의 역할을 해야할 것이다.▲ 이동희=우리가 전라감영을 복원해 나가는 데 있어 우선적이고 필수적으로 해야할 일들이 있다. 복원 문제는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지만 정작 그를 위한 기초적인 작업, 감영에 대한 이론적 연구들은 거의 없었다. 감영이 있는 도시 중 유독 전주만이 「완영일록」의 번역이 안돼있다. 복원 범위만 논할 것이 아니라 전라감영과 관련된 기초적인 토대 연구를 해야 한다.▲ 조법종=역사학자들의 책무이기는 하지만, 막상 하려고 보면 지역 인력이나 연구자들의 역량으로는 한계가 있다. 했다 하더라도 개별적이지 종합적으로 안돼있다. 전라감영 복원이 현안인 지자체 입장에서는 이러한 기본 자료 구축 작업이라도 했었어야 했다.▲ 이종민=선화당은 전라감영의 핵심 건물이다. 그런데 지난번 발굴에서 감영과 관련된 유구가 나오지 않았다. 장소를 잘못 잡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시각도 있는데, 제대로 된 발굴이라도 해보자. 자꾸 국비에 의존하지 말고 우선 시나 도의 예산으로 선화당 터라도 먼저 찾아놓자. 그 성과를 인정받는다면 국비를 받는 것도 훨씬 수월할 것이다.▲ 조법종=사실 선화당은 석축을 3단 정도를 깔고 건물을 올렸기 때문에 하부구조가 남을 일이 거의 없다. 오히려 이전 발굴조사에서 3m 정도 땅을 파니 후백제 유구가 나왔다. 하지만 발굴 범위는 좀더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동희=선화당은 50년대 초까지 있었고, 전라감영의 유일한 흔적이라고 할 수 있는 회화나무는 아직도 남아있다. 그런데 전주 시민들 중 선화당과 관련된 것들을 기억하는 사람이 과연 없을까 싶다. 시민들을 대상으로 전라감영에 대한 기억을 수집해 보면 어떨까. 그런 자료들을 찾아서 보여주는 것이 시민 설득에 매우 유용한 카드가 될 수 있다.▲ 원도연=건물 자체를 짓는 물리적인 공간에만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전라감영을 둘러싼 이야기를 발굴할 필요가 있다. 역사학자들이 전라감영을 둘러싼 모든 기록을 번역해 내놓는다면 인문학은 그것을 바탕으로 더 많은 이야기를 끌어낼 것이다. 「완영일록」 번역과 함께 시민들이 참여하는 스토리텔링 대회 등을 열어보자.▲ 고언기=지금도 시민들 중에는 전라감영 복원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한옥마을의 중요성에 대한 시민들의 공감대가 형성된 것처럼, 전라감영 복원도 시민들의 의견 집결이 필요하다.규모와 관련해서는 현재 상황에서 여러가지를 고려해 봤을 때 실질적인 복원 개념 보다는 재현 개념이 낫지 않을까 싶다. 또 전라감영 일대가 슬럼화돼 가고 있는 만큼, 시에서는 경제적 효과와 묶어서 고민하고자 한다.

  • 문화재·학술
  • 도휘정
  • 2010.01.19 23:02

43.4㎝ 최대 비파형동검 출토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발견된 비파형동검 중 크기 최대인 길이 43.4㎝짜리 동검이 전남 여수시 월내동 상촌 지석묘(고인돌) 유적에서 발굴됐다. 매장문화재 전문조사기관인 동북아지석묘연구소(소장 이영문)는 여수 국가산업단지(GS칼텍스공장) 확장부지에 위치한 적량동 상적 및 월내동 상촌 일대 지석묘 유적 5곳을 조사한 이 동검과 함께 보존상태가 가장 양호한 길이 35.7㎝짜리 다른 비파형동검을 발굴했다고 18일 말했다. 이들 두 동검은 기원전 10∼9세기 청동기시대 전기 유적으로 분류되는 월내동 상촌ⅡㆍⅢ 지석묘에서 각각 발견됐다. 발견 당시 동검은 두 조각 또는 세 조각으로 의도적으로 파손한 채 매장된 것으로 드러났다. 한반도에서 비파형 동검은 대부분 조각 형태로 출토되며 완형은 부여 송국리 석관묘와 여수 적량동 7호 지석묘 출토 2점에 지나지 않았다. 이번 상촌Ⅲ 유적 116호 지석묘 출토 비파형동검은 세 조각으로 파손돼 부장됐지만 완형 복원이 가능하고 지금까지 가장 크다고 알려졌으며 상주(또는 성주) 출토품으로 전하는 것(42㎝)보다 1.4㎝가 큰 것으로 드러났다. 두 조각이 포개진 상태로 발견된 상촌Ⅱ 유적 18호 석실 출토 비파형동검은 그동안 발굴된 것 중 가장 질이 우수하고 보존상태가 양호한 것으로 평가된다. 상적ㆍ상촌 유적에서는 지석묘 및 주변 석실 231기와 주거지 16기 등 총 247기의 유구(遺構)가 드러났고 완형 석검(돌칼) 6점, 돌도끼 11점 등이 출토됐다. 이들 유적은 무덤군 약간 높은 곳에 묘역을 상징하는 바둑판식(기반식) 초대형 지석묘와 지석묘 축조 및 제의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청동기시대 전기 주거지가 위치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한반도 청동기시대 전기를 대표하는 청동기 유물인 비파형동검은 악기인 비파와 모양이 비슷하다고 해서 얻은 이름이며 중국 동북(東北) 지방에서 주로 출토되는 까닭에 요령식동검(遼寧式銅劍)이라고도 한다. 식민지시대에는 만주식동검이라 하기도 했으며, 중국학계에서는 모양에 주목해 곡인(曲刃)청동단검이라는 말을 쓴다. 이영문 소장은 "이번 출토품을 포함해 남한 청동기문화의 중심지인 여수반도 일대에서 그동안 출토된 비파형동검만 16점에 달한다"며 "비파형동검이 주로 출토되는 중국의 랴요닝(遼寧)성 못지않은 집중도를 보여주는 점이 특징"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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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
  • 2010.01.19 23:02

조선왕실 명품도서 도록 출간

한국학중앙연구원(원장 김정배)은 장서각이 소장한 조선왕실 도서 가운데 사료적 가치와 예술성이 높은 자료 126종을 소개한 도록 '장서각 명품선'(그라픽네트 펴냄)을 출간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인 조선왕조 의궤와 '동의보감' 완질본 등을 비롯해 '입학도설(入學圖說)', '월중도(越中圖)' 등 보물 20여종도 수록했다. 엄선된 자료는 대부분 책이며 최근 보물로 지정된 영조, 정조 등 역대 왕들의 어필(御筆)을 비롯해 고문서와 그림도 포함됐다.'탄생과 교육', '국정과 외교', '행사와 의례', '문예와 교양' 4가지 주제로 구성해 왕실 구성원의 출생과 교육, 국왕의 통치자료, 왕실의 행사와 국가 의례, 문학과 예술, 교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를 망라했다. 영문을 함께 적었고 쉬운 해설을 곁들여 관련 연구자뿐만 아니라 해외 한국학 관련 학자와 일반 대중도 쉽게 볼 수 있도록 했다. '문치주의와 기록유산'(이성무), '조선왕실의 문화'(이성미) 등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들의 논문 2편도 실었다.도록을 기획ㆍ편집한 한국학중앙연구원 윤진영 연구원은 "500년 조선왕조의 역사와 문화가 깃든 왕실 도서의 품격을 느낄 수 있도록 했다. 장서각 도서의 정수를 담은 자료를 우선적으로 선정했다"고 말했다. 319쪽. 4만5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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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
  • 2010.01.14 23:02

[전시] 한지로 만든 태권도복·생리대…한스타일의 진화

경기전 명품 달력, 미륵사지 사리장엄 장신구, 한지 태권도복….전북의 문화콘텐츠가 새 옷을 입고 고품격 문화상품으로 거듭났다.전라북도는 지난해 문화콘텐츠의 생활화·산업화를 목표로 '전통문화·한스타일 상품개발 공모'를 통해 업체를 선정, 이들이 개발한 명품으로 전북을 알리기 위해 '전통문화·한스타일 문화상품전'을 열고 있다.선정된 업체는 컨티뉴(대표 김병철), 전주기접놀이보존회(대표 임양원), 한국귀금속보석기술협회 익산지부(대표 김운기), 남원 지리산한지(대표 김동훈), 부안 우리농촌살리기공동네트워크(대표 이정미).컨티뉴는 올해 태조 이성계 어진 전주 봉안 600주년을 맞아 장중한 건축미와 전주 정신이 깃든 경기전 명품 작품집과 달력을 내놓았다.사진작가 정주하 백제예술대학 교수가 지난 2년간 정전(정자각)의 전 모습과 좌우 행채 전관을 동시에 촬영, 조선왕조를 탄생시킨 '풍패지향(豊沛之鄕)'의 면모와 태조 이성계 본향의 고풍스러움을 담았다. 부드러운 질감과 독특한 향이 스며 있는 프린트용 전주 한지를 개발해 격조를 더했다.컨티뉴 김병철 대표는 "경기전이야 말로 조선왕조를 태동시킨 곳이며, 전주 정신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곳"이라며 "태조 어진 전주 봉안 600주년을 기념하는 해인 까닭에 그 의미가 더욱 큰 것 같다"고 말했다.이어 김 대표는 "경기전을 상품화하는 것은 경기전에 대한 진중함과 존경심이 담겨야 하는 것"이라며 "전주의 소중한 문화유산 가치를 국내·외적으로 보급하는 데 그 의의가 있다"고 말했다.명품 작품집과 달력에 실린 작품 중 일부는 오는 10월 가나자와에서 사진전을 가질 예정. 경술국치 100주년을 맞는 해이기도 한 만큼 의미있는 전시가 될 것으로 보인다.한국귀금속보석기술협회 익산지부는 지난해 출토된 미륵사지 사리장엄구에 활용된 문양을 넣은 책갈피, 목걸이, 인주함 등을 선보이고 있다. 고급스러우면서도 세련된 문양이 새겨져 익산만의 유일한 문화상품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전주기접놀이보존회는 전통 민속소품을 만들어볼 수 있도록 지난해부터 모악산 장자마을 아래 체험장과 계룡리민속공방을 만들어 운영해오고 있다. 한지고깔과 기망(대형 깃발 들고 이동할 때 필요한 보조 소품), 전통문양을 새긴 깃발 등 다양한 기념품들이 전시되고 있다.경인상사는 한지사 태권도복을 선보였다. 친환경 소재를 활용해 원적외선을 방출하고, 향균성, 소취성(냄새제거) 등이 뛰어난 명품·품세용·경기용 태권도복이 소개됐다.남원 지리산한지는 피부 자극이 없고, 냄새가 없는 데다, 땀 흡수력이 좋은 한지사를 개발해 'Buy 전북 상품(2009)' 인증, 특허 출원도 네 개나 받았다. 한지사로 만든 생리대, 기저귀를 비롯해 마스크 팩, 자외선 차단 마스크 등을 내놓았다.우리농촌살리기공동네트워크는 뽕잎 강정과 오디 강정, 홍삼엿, 참기름 등을 통해 믿을 수 있는 우리 먹거리를 소개했다. 전시는 18일까지 전주공예품전시관에서 계속된다.

  • 문화재·학술
  • 이화정
  • 2010.01.13 23:02

"전주 정신이 담긴 경기전, 국내외에 알려야죠"

"경기전을 문화상품으로 연결시키려는 고민은 6년 전에 시작됐습니다. 경기전이야 말로 조선왕조를 태동시킨 곳이며, 전주 정신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곳이란 생각이 들었거든요. 올해가 태조 어진 전주 봉안 600주년을 기념하기도 해 그 의미가 컸던 것 같습니다."'전통문화·한스타일 문화상품전'에 경기전 명품 작품집과 달력을 내놓은 컨티뉴 김병철 대표는 "경기전을 상품화하는 것은 경기전에 대한 진중함과 존경심이 담겨야 하는 것"이라며 "전주의 소중한 문화유산의 가치를 국내·외적으로 보급하는 데 그 의의가 있다"고 말했다.지난 6년간 사비를 들여 작업해오면서 시행착오도 많았다. 하지만 고급스러운 문화상품으로 내놓기 위해 고감도가 높은 프린트용 한지까지 개발했을 만큼 완성도를 더했다.김 대표는 "정주하 백제예술대 교수를 만난 게 큰 행운이었다"며 "경기전의 600년 숨결과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 대형 카메라와 중형 카메라로 디테일까지 세심하게 신경쓴 교수님께 감사할 따름"이라고 덧붙였다.명품 작품집과 달력에 실린 작품 중 일부는 오는 10월 가나자와에서 사진전을 가질 예정. 경술국치 100주년을 맞는 해이기도 한 만큼 의미있는 전시가 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 문화재·학술
  • 이화정
  • 2010.01.13 23:02

[이은혁의 글씨로 만나는 옛 글] (18)소식(蘇軾)의 황주한식시권(黃州寒食詩卷)

소식(蘇軾,1037-1101)은 북송시대 사람으로 자는 자첨(子瞻), 호는 동파거사(東坡居士)이며, 미주(眉州:사천성) 사람이다. 문장에 뛰어나 아버지 순(洵)과 동생 철(轍)과 더불어 삼소(三蘇)로 불린다. 「고문진보」에는 아버지 소순이 두 아들의 이름을 지으면서 '車'자가 들어가는 식(軾)과 철(轍)을 택하여 지은 연유를 밝힌 '명이자설(名二子說)'이 보인다. 거기에 따르면, '軾'은 수레의 앞턱 가로나무로서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손잡이인데 이처럼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사람이 되라는 의미이고, '轍'은 수레가 지나간 바퀴자국을 의미하므로 역사에 흔적을 남기는 사람이 되라는 의미로 택하였다고 한다. 이름에 걸맞게 이들은 모두 당대에 명성을 떨쳤다. 그 중에서도 소동파는 특히 유명하여, 문장에서는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으로 그리고 서예에서는 북송 4대가의 일인으로 손꼽힌다.동생 소철이 회고하기를 "형은 어려서부터 글씨를 좋아했는데 늙어서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스스로 말하기를 진(晉)나라 사람들에게는 미치지 못하지만 당나라 제가들과는 방불하다고 하였다."고 한다. 후학인 황정견(산곡)은 "소식이 젊어서 날마다 난정서를 공부했지만 중년 이후로는 안진경을 배워 뛰어난 곳은 이북해(李北海:李邕)에게도 뒤지지 않았다."고 평하였다. 명대의 동기창은 소식의 글씨에 언필(偃筆)이 많다고 병폐를 지적하였으나, 동파 스스로는 "내 글씨가 비록 아름답지 않지만 나 자신의 신의(新意)로써 표현하고 고인을 따르지 않았으니 이것이 하나의 흔쾌함이다."라고 하고, 또 "내 글씨는 본래 뜻을 따라 써서 본래 법이 없다."라고 자부심을 드러냈다. 이는 송대에 유행하던 상의(尙意)의 서예정신을 스스로 대변한 것이다.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인물도 정쟁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당시 왕안석(王安石)의 신법당(新法黨)과 대립하며 구법(舊法)을 지지하였으나 패하여 지방관으로 좌천되고, 원풍 2년(1079)에는 하옥되기도 하였다. 이로부터 고난의 길을 걸으며 전국 각지를 떠돌다가, 휘종(徽宗)이 즉위하자 사면되어 귀환하다 상주(常州:강소성)에서 객사하였다.여기에 소개하는 '황주한식시권(黃州寒食詩卷)' 역시 함풍 3년 황주(黃州)의 폄적지에서 한식을 보내는 소회를 적은 것이다. 첫 구에 '自我來黃州, 已過三寒食' 운운한 것으로 보아 황주로 귀양온 지 3년(1082년, 46세)의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소동파가 폄적지에서의 생활을 오언율시 두 수로 지어 쓴 것이다. 억양된 감정이 파죽지세를 보이며 현침(懸針)으로 표출되어 표일한 느낌을 주며, 장단과 태세의 착란과 절주가 풍부하다. 황산곡은 이 시권에 발문을 덧붙였는데 "시험 삼아 동파로 하여금 다시 써보게 한다면 필시 이것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고 하였다. 폄적지에서 쓸쓸하게 한식을 맞는 자신의 심경을 즉흥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상의(尙意) 서풍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소동파는 유명한 「적벽부(赤壁賦)」의 말미에서 배반낭자(杯盤狼藉)라는 말을 했지만 평소 술을 잘 마시지 못했다고 전해지며, 우리 고려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시대에 소식이 시문이 크게 유행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동파가 평소 신의(新意)와 무법(無法)을 강조하며 "아름답게 쓰려고 의도하지 않았는데 아름다워졌다"는 것이 바로 이것을 두고 한 말이 아닌가 한다./이은혁(사단법인 한국서예문화연구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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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1.13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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