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2025-11-07 22:16 (Fri)
로그인
phone_iphone 모바일 웹
위로가기 버튼
chevron_right 기획

[도시의 시간, 성장동력을 만들다] ③ 쇠락하는 도시에 새 활력 불어넣은 '도서관의 힘'

도시는 성장을 멈추는 그때부터 쇠퇴하기 시작한다.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의 오래된 도시들 역시 수도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성장을 멈춘 지 오래다. 이미 쇠퇴하고 있는 수많은 도시는 인구가 줄어드는 ‘소멸 위기의 도시’로 내몰리고 있다. 오래된 도시의 인구 감소는 우리나라만 겪고 있는 현상이 아니다. 일본의 오래된 도시들은 우리보다 앞서 인구 감소와 지방 소멸의 위기를 맞았다. 일본 도시들의 구체적인 인구 감소현황이 공개된 것은 지난 2014년 마스다 히로야 전 총무상이 주도해 펴낸 <마스다 보고서>에서다. 보고서는 ‘현재의 인구 감소 추이로는 2040년까지 일본 도시의 절반인 896개 도시가 사라진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일본의 수많은 도시를 충격에 빠뜨린 경고였다. 그러잖아도 인구 감소로 쇠퇴일로에 놓여있던 도시들은 어떻게든 도시를 살릴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해 나서야 했다. ‘더 이상의 인구 유출을 막아야 한다’는 절박한 목표를 위해 주목한 것이 있다. 쇠락한 도시에 활기를 불어넣을 ‘거점’을 만드는 일이다. 도시의 거점으로 ‘도서관’을 주목한 도시들이 있다. 일본 규슈 사가현의 다케오 시와 구마모토현의 기쿠치 시다. 새로운 커뮤니티를 창출해낸 오래된 도시의 거점 △다케오시립도서관 사가현은 규슈에서 가장 작은 현이지만 온천으로 이름을 알린 작은 도시들이 적지 않다. 인구 5만 명 정도의 작은 도시 다케오 시도 그중 하나다. 고령화율이 일본 도시 평균을 웃돌고 전체 면적의 23%가 논밭인 다케오시의 주산업은 농업이다. 1,3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온천 도시이지만 '일본 온천 관광 100선'에는 들지 못하는 평범한(?) 소도시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평범한 작은 도시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 변화를 이끈 것은 놀랍게도 시립도서관이다. 다케오시립도서관은 2012년까지만 해도 시민들의 이용률이 낮은 전통적인(?) 도서관이었다. 사람들을 불러 모을 거점 공간을 모색하고 있던 다케오시가 기존 도서관을 고치고 새롭게 단장해 재개관한 것은 2013년. 아름다운 디자인과 편안한 내부 공간 구성, 여기에 이용자 중심으로 전면 개편된 운영방식은 도서관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 놓았다. 재개관한 지 1년여 만에 연간 이용자는 100만 명이 되었다. 더 놀라운 것은 이 중 40만 명이 지역 주민들이 아닌 다른 지역 방문객들이라는 사실이다. 도서관을 방문하기 위해 다케오 시를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식당과 숙박업소 등 지역 상권은 활기를 찾기 시작했다. 자연히 경제적 효과도 이어졌다. 이런 변화의 배경에는 다케오 시의 선택이 있었다. 다케오 시는 공공도서관을 지역 커뮤니티를 되살릴 거점이자 자랑스러운 자산으로 만들기 위해 지정관리제도를 도입해 혁신을 꾀했다. 세계적인 서점 ‘츠타야’를 만들어낸 '컬처 컨비니언스 클럽(CCC)'의 경영자 마스다 무네아키에게 운영 관리를 위탁한 이유였다. 도서관은 서점과 멀티미디어 이용관, 미술관, 커피숍과 편집숍이 들어선 복합문화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자료 보존과 도서 대출이라는 기존의 도서관 성격에서 벗어나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고 공부도 일도 대화도 가능한 다양한 라이프 스타일을 도서관에서 즐길 수 있게 했다. ‘누구에게나 편안한 도서관’을 내세운 이 도서관의 목표는 새로운 커뮤니티 창출이었다. 관심을 끈 것은 또 있었다. 운영방식의 변화다. 아침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였던 개관 시간을 아침 9시부터 밤 9시까지로 연장하고 개관일도 연간 295일이었던 것을 365일로 늘려 연중 쉬지 않는 도서관을 만들었다. 리모델링을 거쳐 문을 연 도서관의 공간은 창조적인 분위기로 바뀌었다. 넓은 공간을 차지했던 관장실을 없애고, 잡지 판매 코너와 DVD 대여점을 설치한 것도 큰 변화였다. 장서는 18만 8,321권에서 21만 1,096권으로 늘리고 좌석 수도 187석에서 279석으로 늘렸다. 다시 문을 연 이후 도서관의 일일 평균 방문자 수는 기존 867명에서 2,529명으로, 대출 이용자는 일일 평균 280명에서 460명으로 늘었다. 다케오 시민만이 아니라 일본 국민이라면 누구라도 도서 대출이 가능하게 한 것도 사람들을 끌어들이는데 주효한 방식이었다. 그 결과 도서관 회원의 60%가 지역 외 거주자이고 도서 대출 역시 외부에서 찾아오는 이용자들이 43%나 됐다. 주변 음식점과 상점은 덩달아 매출이 늘었고, 숙박시설 예약률은 두 배로 뛰었다. 다케오시립도서관의 성공사례는 일본 각 도시에도 영향을 미쳐 도서관 건립 바람을 일으켰다. 2015년 1월 가나가와현 에비나시와 2016년 미야기현 타가조시에 만들어진 도서관이 그 결실이다. 이용자 중심의 운영을 내세운 다케오시립도서관에서는 책을 읽다가 커피를 흘리거나 책을 훼손해도 책임을 묻지 않는다. 1년에 2,000만 엔(약 2억 원)을 들여 6000∼7,000권을 구입하고, 3년 동안 한 번도 보지 않는 책들은 따로 골라 폐기하거나 보육원에 기증하는 것도 특별하다. 다케오시립도서관은 지난 2017년 10월, 새로운 공간을 더했다. 지역 커뮤니티 공간으로 자리 잡게 될 어린이도서관이다. ‘어떻게 하면 많은 사람이 찾을 수 있는 도서관을 만들 것인가’를 고민해온 다케오시립도서관이 가져올 또 다른 변화가 기대된다. 지역의 자연환경을 품은 도서관, 주민의 자긍심이 되다 △기쿠치중앙도서관 기쿠치 시는 구마모토현의 북부를 흐르는 기쿠치 강 상류에 있는 도시다. 인구 5만 명이 채 안 되는 작은 도시지만, 규슈지방의 정치, 교육, 문화 중심지로 번성해 지금도 적지 않은 유적이 남아 있다. 곡창지대여서 농업이 발달하고 지리적 여건으로 쌀 집산지가 되어 한때는 상업 도시로도 발전했다. 그러나 일본의 오래된 지방 도시들이 그렇듯이 기쿠치도 성장을 멈추고 쇠퇴의 길에 들어선 지 오래다. 수십 년 동안 청년들이 대거 대도시로 이주하면서 도시는 활력을 잃었다. 시는 지역을 떠나려는 청년들을 붙잡기 위해 대책을 찾아야 했다. ‘청년들이 떠나지 않는 도시 만들기’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청년들이 왜 지역을 떠나는 것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고민하던 시는 활력있는 도시를 만드는 것이 첫 번째 과제라는 것을 알게 됐다. 도시에 활기를 불어넣어 줄 공간을 위해 시가 선택한 것은 도서관. 지역 주민이 자랑스러워하는 도서관을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기쿠치 시는 어느 도시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랜드마크로 만들기 위해 건축가 나카무라 가즈노부 씨에게 디자인을 의뢰했다. 기구치 시 만의 특별한 도서관을 만들고 싶었던 나카무라 씨는 이 도시가 품고 있는 자연환경을 주목했다. 그중에서도 시민들이 가장 좋아하는 기쿠치 강을 도서관의 주제로 삼았다. 강의 흐름처럼 곡선을 그리는 거대한 책장이 만들어져 1층 아담한 도서관을 가득 채웠다.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아름다운 도서관 기쿠치중앙도서관의 ‘BOOK RIVER’가 탄생한 과정이다. 기쿠치도서관의 외형은 예상 밖으로 소박하고 평범하다. 거대한 규모도 아니고 화려하지도 않다. 그러나 1층에 있는 도서관에 들어서면 강물이 흐르는 것처럼 책장이 곡선으로 휘감아 돌며 공간을 가로지른다. 높지 않지만 길이 100m가 넘는 책장이 가로로 이어지며 공간을 나누거나 연결하면서 다양한 기능의 공간을 만들어내는 풍경은 특별하고 아름답다. 기쿠치중앙도서관은 지난 2017년 문을 열었다. 도서관의 슬로건은 ‘사람과 정보, 문화가 만나 어울리며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교류의 공간’이다. 개관 이후 불과 두 달 만에 지역 주민의 80%가 도서관을 찾았으며 타지에서 도서관을 찾는 방문객들도 늘기 시작했다. 미국의 이름난 인테리어인 전문 잡지 <INTERIOR DESIGN>'은 지난해, ‘잠시 머물고 싶은 세계 12개의 도서관’에 이 작은 도시의 기쿠치중앙도서관을 선정했다. 도시에 활력을 가져다준 도서관은 이제 주민들의 자랑이 되었다. 공간의 힘으로 활기를 얻어낸 오래된 도시들이 적지 않다. 그 통로는 서로 다르지만 새로 짓거나 오래되어 방치됐던 건물을 활용해 지역 주민들을 모으고 외지인들을 끌어들이는 도서관의 등장은 새롭다. 도시재생의 의미와 가치가 더 다양해지고 있다는 증거다. / 일본 규슈=김은정 선임기자, 천경석 기자

  • 기획
  • 김은정
  • 2023.06.22 15:23

[한국전쟁 그리고 정전 70주년](상) 당시 학도병에게 듣는 6.25와 정전

오는 25일이면 한국전쟁 발발 73주년이자, 7월 27일에는 정전 70주년을 맞이한다. 7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한반도는 전쟁의 상흔이 치유되지 않고 있다. 당시 후방인 전북지역의 경우 남침한 인민군에 의해, 수복하는 국군과 경찰에 의해 이념 문제로 주민들이 희생되거나 행방불명되는 일이 허다했다. 이에 전북일보는 당시 스무살도 안된 학도병의 참전 이야기와 정전, 70년 전의 전북지역 민간인 학살현장 탐방, 아직도 치유되지 않는 상흔과 미래 과제 등을 세 차례에 걸쳐 다뤄본다. 1951년 전쟁이 한창이던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이름 모를 험준한 고지. 군번도 계급도 없는 앳된 얼굴의 소년이 상자를 안은 채 포탄이 마구 떨어지고 사체가 널브러져있는 산길을 힘겹게 오르고 있었다. 소년의 이름은 전주 출신 학도병 최종열. 전북일보는 화랑무공훈장 수훈자인 최 옹(90)을 완주군 삼례읍 자택에서 만나 전쟁 발발부터 정전까지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1951년 4월 18살이던 최 옹은 전주사범학교(현 전주교육대학교) 2학년 학생이었다. 어느 날 국군이 학교에 찾아와 공부하던 학생들을 징집하기 시작했고 최 옹에게도 “얼른 트럭에 타라”고 지시했다. 어린 최 옹은 앞으로 자신이 마주하게 될 처절한 전쟁터의 참상을 상상도 못한 채 트럭에 올랐다. 연천에 도착한 최 옹과 학도병들은 대대 본부중대 소속 전투지원병으로 총탄을 전선으로 나르는 임무를 맡게 됐다. 지프차를 타고 최전선인 고지로 향하는 길은 직접 전투가 벌어지지 않는 곳임에도 목숨을 걸어야 했다. 어느 날은 타고가던 지프 바로 옆으로 포탄이 떨어지는 바람에 다 같이 땅에 나뒹굴기도 했다는 것이 최 옹의 설명. 그는 맨몸으로도 오르기 힘든 고지를 무거운 총탄 상자를 들고 수습되지 않은 사체들을 밟으며 총탄을 피해 오르내렸다. 최 옹은 "총탄을 옮기던 학도병들이 포탄이나 총에 맞아 전사하거나 행방불명되는 일이 비일비재 했고 하루만에 20명의 학도병이 6명으로 줄어든 일도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1952년 군번을 부여받아 정식 군인이 됐고, 스무살이 되던 해인 1953년 7월 14일에는 공적을 인정받아 화랑무공훈장도 받았다. 최 옹은 정전일인 1953년 7월 27일도 어제 일처럼 또렷이 기억했다. 그는 "이날 국군과 인민군 모두 전쟁이 끝나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오전부터 의미 없이 서로 총알을 주고받았다"며 "아마 오후 10시쯤 됐을까 갑자기 하늘이 환해졌다"고 회상했다. 별만 보이는 캄캄한 밤 하늘에 국군과 인민군 모두 다시 못 볼지도 모르는 참혹한 장소를 기억하고 싶었던 것처럼 쉼 없이 조명탄을 쏘아댔다고 한다. 최 옹은 "낮보다 환한 조명탄 빛 아래 숨진 채 쓰러져 있는 '동포'들을 보면서 고작 이 작은 언덕 하나 차지하기위해 그렇게 참혹하게 싸웠나 하는 생각이 지금도 든다"며 지긋이 눈을 감았다. 그러면서 "살았다는 생각, 그 외에는 없었다"면서 최근 전쟁을 직접 겪지 않은 이들이 자꾸만 전쟁을 부추기는 것만 같아 답답하다고도 했다. 최 옹은 “6.25는 전선에서만 죽어나가면 됐지만 지금은 전혀 다르다”며 “이젠 완주든 부산이든 어느 곳에 있어도 전쟁의 참상을 몸소 겪어야 하는 시대”라고 설명했다. 이어 “눈앞에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 알던 사람이 죽어나가는 걸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느냐”며 “앞으로 다시는 이런 끔찍한 일이 재발돼선 안된다”고 강조했다.

  • 기획
  • 송은현
  • 2023.06.21 18:41

[전북 가담항설](6) 일생 바쳐 500년 역사 지켜낸 전북 선비들

"의병은 창을 메고 눈과 비를 잊었는데 못난 선비는 와신상담의 마음으로 아침저녁 그저 지키기만 했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전주사고에 있던 조선왕조실록을 정읍 내장산으로 옮긴 뒤, 매일 그 곁을 지킨 한 선비가 남긴 말이다. '안에 숨겨진 보물이 있는 산'으로 불리는 내장산(해발 796m)은 그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지금으로부터 431년 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조선왕조실록'이 보관됐던 곳이다. 일본군을 피해 내장산 깊은 산중 절벽 위 '은적암'이라는 곳에 전주사고에 있던 실록이 옮겨져 1년 간 보존된 역사가 있다. 지난 20일 오전 그날의 역사를 떠올리며 실록을 옮기던 선비와 같이 책 30권을 짊어진 채 내장산 은봉암을 향했다. 6월의 뜨거운 햇살을 맞으며 내장산 관광해설사의 안내를 따라 실록길을 오르고 또 올랐다. 총 8개의 다리로 이뤄진 실록길은 정읍시가 조선왕조실록 보존의 역사적 의의를 기리고자 내장산에 조성한 길이다. 지금은 반듯한 길이지만, 임진왜란 당시엔 인적이 드문 험한 산길이었다는 해설사의 설명이다. 1시간 남짓 수풀이 우거진 실록길을 지나 450여 개의 계단을 오르니 실록이 보관됐던 은봉암이 자리해있었다. 거친 산세 속에 파묻혀 있는 형국이라 무언가를 숨기기에 안성맞춤으로 보였다. 지금처럼 인위적으로 조성된 길이 아닌, 깎아지른 절벽을 1000여 권이 넘는 실록을 짊어진 채 올랐던 선비의 정체가 궁금했다. 마땅한 길도, 운송할 수단도 없던 조선시대에 자신의 일생을 바쳐 이 험난한 여정을 떠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일본군 피해 정읍 내장산으로 옮겨진 최후의 '전주사고본 실록' 기록에 '진심'이었던 조선은 개국 이래 조선왕조실록을 편찬하는데 열심이었다. 실록은 조선의 정치와 경제, 사회 뿐만 아니라 당시의 문화와 생태계까지 당대 모든 것이 담겨있었다. 그런 실록의 소실을 막고자 조선 왕실은 서울의 춘추관 사고, 충주 사고, 성주 사고, 전주 사고 등 전국 4곳의 사고에 실록을 각각 나눠 보관했다. 그러나 임진왜란 발발로 일본군의 수중에 떨어진 춘추관, 충주, 성주의 사고가 모두 불 타 소실되고, 전주사고본 실록만 온전히 남게됐다. 전국이 전쟁터로 변하는 상황에서 전주까지 일본군의 침입을 받기 전에, 실록 이전이 시급한 상황이었다. 이에 경기전 참봉 오희길과 선비 손홍록, 안의 등은 여러 논의 끝에 정읍 내장산을 실록의 보관처로 결정했다. 내장산은 산세가 거칠고 험해 일본군을 피해 실록을 숨기기에 최적이라는 판단이었다. 당시 64세의 안의와 56세의 손홍록은 이미 상당한 고령의 나이였음에도, 기꺼이 실록 운반에 나섰다. 이들은 전 재산을 털어 30명의 인부를 고용해 조선왕조실록과 고려사, 태조어진 등 전주사고에 보관돼 있던 총 1368권의 국가 서적을 전주에서 내장산까지 운반했다. 나이에 불문없이 실록이 담긴 60여 개의 궤짝을 짊어진 상태로. △'1호 문화재 지킴이' 실록 보존에 평생 바친 안의와 손홍록 그렇게 1592년 6월22일, 실록은 90도에 가까운 가파른 절벽 40m 높이의 내장산 용굴암과 은적암에 옮겨졌다. 이곳은 안에서 밖은 보이지만, 반대로 밖에선 안이 보이지 않는 천혜의 요지였다. 그럼에도 마냥 안심할 순 없었다. 전화나 통신이 없던 조선시대에 전황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실록과 함께 내장산 깊숙히 들어온 안의와 손홍록 등에겐 더더욱 그랬다. 이들은 전주에 일본군의 그림자가 점점 드리우는 긴박한 상황속에서 매 순간 일본군의 습격에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안의와 손홍록은 370일의 시간 동안 7평 남짓의 은적암에서 교대로 숙식하며 무더위와 혹독한 추위, 궃은 비바람을 이겨내고 실록의 곁을 지켰다. 이후 실록을 내장산에서 충청도 아산과 황해도 해주, 강화도와 묘향산 등으로 옮길 때에도, 안의와 손홍록은 전쟁이 마무리될 때까지 실록과 항상 함께였다. 이후 1596년, 이미 환갑을 넘긴 나이였던 안의는 실록을 강화도로 옮기는 과정에서 더 이상 몸이 버티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안의가 사망해 일기가 끝을 맺었음에도, 손홍록은 홀로 실록 보존을 이어갔다.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해 또 다시 일본군이 침입해오자, 그는 묘향산으로 실록을 옮기고 그곳에서 당직을 섰다. 이렇듯 실록 보존에 평생을 바친 안의와 손홍록은 공로를 인정받아 고향인 정읍 칠보면의 남천사에 배향됐다. 이에 대해 매년 6월 22일 내장산에서 '문화재지킴이의 날' 행사를 주최하는 정읍문화원 관계자는 "만약 이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태조부터 명종대까지의 조선 초중기 역사는 완전히 사라졌을 가능성이 크다"며 "이번 문화재지킴이의 날을 맞아 우리 역사를 지키는데 큰 공헌을 한 선조들의 희생과 뜻을 기리는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 기획
  • 이준서
  • 2023.06.21 18:02

[참여&공감 2023 시민기자가 뛴다] 이매창, 쇠뿔바위봉, 내변산 탐방

부안은 산과 바다가 공존해서 무척 풍요로우며 힐링되는 우리 고장이다. 개인적으로는 교사로서 첫 근무를 부안에서 시작하며 추억이 많아 더욱 특별하다. 또한 내변산은 100대 명산에 도전하며 첫 스타트로 등반한 산행지라서 또한 의미가 크다. 부안의 대표적인 명산인 쇠뿔바위봉과 내변산을 탐방했다. 쇠뿔바위봉은 전북 부안군 하서면에 있다. <어수대 탐방로> 코스를 선택했다. 주차장에 도착하니 한자로 御水臺라는 글자가 뚜렷한 큰 바위가 반겼다. 아래에는 한글로 어수대라는 글자와 함께 ‘우리나라의 으뜸 물 부안댐 물 시작되는 곳’이라는 설명이 적혀있다. 부안댐 시작인 지점이라 맑고 청아한 물이 반짝이고 있었다. 오락가락하는 이슬비를 머금은 바위 모습이 눈물 흘리는 것처럼 보이는 어수대 바위 오른쪽에 매창의 시비가 보였다. 그 옛날에 매창이 이곳을 다녀갔다니! 천년 옛절에 님은 간데없고 어수대 빈터만 남아있네 지난일 물어볼 사람도 없으니 바람에 학이나 불러볼까나 -매창- 매창은 조선 선조때의 부안 기생으로서 황진희, 허난설헌과 함께 조선시대 대표 여류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쇠뿔바위봉을 산행하며 매창의 시비를 만나다니! 뜻밖의 선물에 기쁨과 함께 어수대 코스로 오길 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쇠뿔바위봉 등산로는 부드러운 흙길과 완만한 암릉으로 조망이 뛰어난 능선 길로 이루어져있다. 전망대 역시 조망이 멋지며 힐링 산행 코스라 초보자도 무난하게 산행 가능하다. 빨리 걸었더니 정상까지 통상 3시간 거리인데 2시간 30분 걸렸다. 빗줄기가 굵어져 다음 주말에 부안 탐방을 이어 가기로 아쉬움을 달래며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일주일 뒤 주말에 또다시 찾은 부안, 제일 먼저 매창공원을 방문했다. 이른 오전 시간이라 조용했다. 매창공원은 매창 테마관, 부안문화원, 다목적 운동장, 놀이터, 매창·유희경 광장 등 복합 문화체육공간으로 조성되어 있다. 줄 서 있는 매창의 시비를 읽으며 가슴이 뭉클해졌다. 잘 단장된 매창의 묘를 비롯한 매창공원을 보며 부안군에 감사함이 우러났다. 매창 테마관은 매창의 일대기와 시와 관련된 인물과 배경을 알 수 있고 또한 매창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도록 다양한 배경영상을 제공하고 있다. 매창 시 세계의 감동을 가슴에 안고 내변산을 향해 출발했다. 예전에 내소사 코스로 산행했기에 이번엔 코스를 달리했다. 국립공원 내변산 주차장에 차를 주차한 뒤에 사자동-실상사-자연보호헌장탑-직소보-직소폭포-재백이고개-관음봉 삼거리-관음봉(정상)-세봉-세봉 삼거리-세봉 삼거리 갈림길-가마터 삼거리-사자동을 거쳐 내변산 주차장으로 산행계획을 세웠다. 코로나 시기 극심한 스트레스 속에서 일생일대의 큰 도전을 했었다. 2021년 8월 7일부터 2022년 7월 25일까지 우리나라 전국을 누비며 100대 명산을 완등했다. 첫 출발 지점인 내변산을 다시 방문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전국으로 소문난 명소답게 넓은 내변산 주차장에 이미 차가 가득했다. 등산로 역시 가볍고 화사하게 입은 관광객들로 시끌벅적했다. 관음봉 배경의 직소보 전망대 포토존에 도착하니 행복한 미소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함께 행복감에 젖어 들었다. 풍성하게 출렁이는 직소보 옆길을 걷는데 셀 수 없이 많은 물고기가 새까맣게 몰려있었다. 관광객 일행이 휴식을 취하면서 자신들이 먹던 과자를 던져주고 있었다. 과자있는 곳으로 이리저리 물고기가 이동을 하는 모습을 재미있게 보다, 사람들이 먹는 인스턴트 식품이 물고기들에게 괜찮을지 걱정이 되었다. 내변산의 대표적인 관광명소인 직소폭포에 도착했다. 변산반도국립공원 내에 자리잡고 있는 변산 8경의 하나인 직소폭포는 높이 약 30m 정도이며 둥근 못으로 곧바로 물줄기가 떨어져서 직소라는 이름을 가졌다. 폭포를 중심으로 내소사·봉래구곡·중계계곡 등이 있어 일대가 울창한 나무와 암벽들로 심산유곡의 비경지대를 이룬다. 직소폭포를 지나니 눈에 띄게 사람 숫자가 줄었다. 정상에 가지 않고 내변산 주차장에서 직소폭포까지만 왔다 되돌아가던지, 내소사 쪽으로 내려가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았다. 경상도 단체 관광객이 발아래로 보이는 서해안 조망에 감탄사를 연발했다. 거리가 멀어도 가을에 또 오자고 말하며 내소사를 향해 내려갔다. 괜히 어깨가 으쓱해졌다. 정상인 관음봉에 도착하니 등산객들이 삼삼오오 데크에 앉아서 점심식사를 하고 있었다. 발아래 드넓게 펼쳐진 서해안을 보며 가슴이 뻥 뚫리는 체험을 하고 급히 일어섰다. 사람들에게 빨리 자리를 비켜주고 점심 식사는 조금 더 가서 하기로 했다. 오른쪽으로 내소사가 멀리 보였다. 전라북도 기념물 제78호인 내소사는 백제 무왕 34년 혜구 스님이 창건했으며 일주문에서 천왕문까지 600m 전나무 숲길이 장관이다. 아름다운 길 100선에 선정된 길로도 유명하다. 한참 가다 보니 큰 나무 아래 한적하고 넓은 곳이 나타나서 김밥을 먹으며 쉬었다. 시원한 바람과 살랑이는 나뭇잎과 청량한 새소리를 들으며 내변산에서 내려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어느 정도 휴식을 취한 뒤에 긴 코스로 크게 돌며 환종주해서 내변산 주차장으로 원점 회귀했다. 땀을 비 오듯 흘리며 산행 후, 휴게소에서 먹는 아이스크림이 꿀맛보다 달콤했다. 차 에어컨 바람에 땀을 식히며 격포항으로 향했다. 격포항은 옛날 수군 진이 설치되었던 곳으로 위도, 왕등도, 홍도 등 서해 섬과 연계된 해상교통의 중심지이다. 수산시장에 들러 싱싱한 회를 맛보고 채석강으로 향했다. 채석강은 중생대 백악기(약8천 700만년 전)에 퇴적된 퇴적암의 성층으로 바닷물의 침식에 의해 마치 수 만권의 책을 쌓아 올린 듯한 외층을 이루고 있으며 중국 시인 이태백이 즐겨 찾았던 채석강과 비슷해서 지어진 지명이다. 마침 썰물이어서 채석강에 사람들이 가득했다. 잠시 기다리니 격포항과 채석강에 노랗고 붉은 노을이 내려앉았다. 사람들의 환호성 속에서 사진을 찍고 격포항으로 올라왔다. 격포항에 어둠이 내리니 흰 등대와 빨간 등대가 깜빡거리며 발아래 글씨와 함께 낭만이 뿜뿜 솟아나는 길로 변신했다. ‘격포의 노을은 소망을 이루어줍니다.’ 보름달도 두둥실 격포항과 부안을 축복하듯이 비추었다. 모든 소망이 이루어질 것 같은 부안 탐방이었다. 부안의 대표적인 축제로 4월 개암동 벚꽃 축제, 5월에 부안 마실축제, 10월에 부안 노을축제와 곰소 젓갈 발효축제가 있다. 가을에 명산 등반과 함께 축제에 참여하길 추천한다. 산행이 힘들면 마실길과 연계해도 멋진 부안의 매력에 흠뻑 빠질 수 있다. 하송 시인, 교사 <이 기사는 지역신문 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 기획
  • 기고
  • 2023.06.21 17:36

[후백제 역사 다시 일으키다-문헌사료로 본 후백제] ⑩ 고창·정읍 유적과 부안 포구

역사란 어떻게 어디로 흘러가는가. 인류 최고의 철학자 중 한사람인 칼 마르크스가 “역사는 비극과 희극으로 반복된다”는 말을 남겼다. 그의 주장은 일견 타당하다. 과거 후삼국 시대 후백제의 역사를 돌아보면 희극과 비극이 반복되는 영욕의 순간들이었다. 찬란한 건국의 시기와 멸망을 비껴가지 못했던 풍전등화의 위기 속에 후백제는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크고 작은 영광과 부침의 세월을 겪어야만 했다. 일행은 과거 후백제의 수도였던 전주에서 송화섭 전 중앙대 교수(후백제학회장)를 만나 고창으로 이동했다. 그 이유는 역대 왕조 중 오월과 가장 돈독한 국제외교를 펼친 나라인 후백제가 자리했던 전북에서 고창군 아산면 반암리 초기청자 가마유적지는 고려시대 이전에 초기청자 생산의 중심지로서 귀중한 보고이자 역사 현장이기 때문이다. 지난 2021년 4월부터 2022년 9월까지 조사기관인 (재)조선문화유산원구원이 고창군 아산면 반암리 산4-1번지 일대에 위치한 반암리 청자요지에 대한 1, 2차 발굴조사를 실시했다. 발굴조사를 통해 고창 반암리 청자요지는 우리나라 초기청자 생산의 중심지 중 하나임이 밝혀졌다. 고창 반암리 청자요지는 계명산(해발 191m)에서 서쪽으로 뻗어 내린 구릉의 말단부에 입지한다. 학계는 우리나라에서 황갈색을 띠는 가장 이른 시기의 청자를 초기청자라 부른다. 천하제일의 상감청자로 유명한 부안청자보다 200여 년이 앞선다. 진안 도통리 벽돌가마에서 구운 초기청자는 최상급으로 진안청자라 이름 지었다. 중국 청자의 본향이 오월이다. 우리나라 역대 왕조 중 오월과 가장 돈독한 국제외교를 펼친 나라가 후백제이다. 고창 반암리에서도 중국식 벽돌가마에서 초기청자가 쏟아져 후백제와 초기청자의 연관성을 더욱 높이고 있다. 고려는 오월과 국제외교가 거의 확인되지 않지만 후백제는 40년 이상 오월과 혈맹적인 국제외교를 펼쳤다고 전해진다. 송 전 교수는 “학계에서 후백제와 오월 국제외교의 결실로 청자문화가 후백제로 곧장 전래된 것은 아닌지 추측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현재 고창 반암리 초기청자 가마유적지에서 서쪽으로 220m 지점에는 용산천이 남서쪽으로 흐르다가 주진천으로 합류해 서해안으로 빠져나간다. 유적과 용산천 사이는 충적지가 형성됐고 현재 경작지로 활용되고 있다. 송 전 교수는 “청자 연구에서 후백제는 문헌이 남아 있지 않다는 이유로 거의 초대 받지 못하는 안타까운 실정이다”며 “국보급 도공들은 비록 떠난 지 오래지만 앞으로 국보급 사적으로서 전북에서 검증된 고고학 자료로 후백제 초기청자를 논의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일행은 고창을 지나 정읍으로 향했다. 정읍은 아직도 백제의 양식이 돋보이는 석탑과 고분이 남아 있다. 궁예가 철원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일으켰다면 전라도에서는 견훤이 민중적 지지를 기반으로 전주를 도읍으로 후백제를 건국했다. 견훤이 의자왕의 울분을 풀겠다는 선언도 전라도 지역 백제인들의 환심을 사려고 백제 역사의식을 계승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드러낸 것이라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정읍 은선리 삼층 석탑(보물 제167호)은 백제시대 탑의 양식을 모방해 만든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목탑에서 석탑으로 변해가는 시기의 건축 양식을 잘 보여준다. 지붕들은 평면으로 처리해 간결하고 소박하다. 2층 몸돌의 남쪽 면에 문 두 짝을 단 방 모양이 있는데 문짝을 하나만 새기는 다른 탑과 비교하면 특이하다. 2011년에 탑 주변을 발굴 조사한 결과 백제 시대 기와가 많이 나왔는데 이것으로 볼 때 이곳에 백제 때부터 사찰과 관련된 건축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읍 천곡사지(泉谷寺址) 칠층석탑(보물 제309호)은 고려시대에 세운 탑이다. 1층은 네 개, 2층과 3층은 두 개, 4층 이상은 하나의 돌로 만들어졌다. 정읍에 있는 유일한 칠층석탑이다. 이 탑 옆에는 오층석탑이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인 1925년 무렵 일본인들이 가져갔다고 한다. 전해 오는 말에 따르면 칠층석탑은 남승의 탑이고 일본인들이 가져간 탑은 여승의 탑이라고 한다. 발길을 돌리면서 바라본 칠층석탑은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기구한 사연을 간직한 채 신비롭고도 고요한 분위기를 품고 있었다. 이곳에서 만난 마을 주민인 조재곤(78) 씨는 말없이 칠층석탑을 바라보더니 “종종 산책을 나와 보는데 석탑의 웅장한 모습이 보기 좋다”고 말했다. 정읍 은선리와 도계리 고분군(古墳群)은 지표조사 결과 백제 고분 275기가 확인됐는데 전북지역에 위치한 백제 고분으로는 규모가 가장 크다. 이 지역에 굴식돌방무덤이 밀집돼 있어 백제 지방 통치의 영역 확장 양상을 잘 보여주는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곳에 분포하고 있는 고분은 백제의 사비 시기 고분이 대다수이지만 일부 웅진 시기 고분도 확인된다. 송 전 교수는 “웅진 시기에서 사비 시기로 이어지는 백제 굴식돌방무덤의 변화 과정을 살펴볼 수 있어 학술적 가치가 높은 유적이다”고 설명했다. 다음으로 일행은 정읍 고사부리성(古沙夫里城)을 찾았다. 고사부리성은 후백제 산성으로 현재는 복원작업이 한창이다. 송 전 교수는 “통일신라가 고사부리성에서 물러난 후 후백제의 견훤이 고사부리성을 접수한다”고 말했다. 당시 영주성(瀛州城)이라고도 불린 고사부리성은 백제시대 지방 통치의 중심인 오방성(五方城) 중 하나인 중방성(中方城)으로 사용된 이후 1765년(영조 41년)까지 읍성으로 중심적인 역할을 하던 곳이다. 정읍시 고부면 성황산(133m)에 위치해있다. 성황산 정상부와 서쪽 봉우리를 기점으로 둘레는 1055m다. 2004년부터 2011년까지 원광대학교 박물관이 5차례 발굴 조사했다. 조사결과 고사부리성은 백제 때 축조된 이후 조선시대까지 꾸준히 사용된 것으로 밝혀졌다. 산성의 내부시설 중 대표적인 것은 장방형 집수시설이다. 집수시설은 백제시대에 처음 만들어진 이후 통일신라시대 확장 개축된 것으로 파악됐다. 성벽의 축조에 사용된 것과 동일한 형태의 석재가 사용됐다. 백제 중방성으로 알려진 고사부리성에서 후백제에 의해 개축된 것으로 보이는 성벽이 확인됐다. 견훤왕은 고사부리성을 리모델링했던 것이다. 고사부리성이 위치한 정읍 고부 일원은 지정학적으로 후백제 도성인 전주에서 바닷길을 통해 중국으로 곧장 나아갈 수 있는 대 중국 교류의 관문에 해당한다. 견훤왕은 고부를 후백제의 제2도시로 육성할 구상이었다. 후삼국시대 호남지역에서 유일하게 고려 왕건의 영향력 아래 있었던 나주세력을 견제할 수 있는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고사부리성의 중턱에 올라 낮아 하늬바람을 맞으니 어느새 더웠던 날씨로 땀방울이 맺혔던 이마도 금세 시원해짐을 느꼈다. 일행은 고사부리성을 떠나 고부 눌제(訥堤)로 향해 그곳에서 곽형주 향토사학자를 만났다. 당시 견훤왕은 국가 경쟁력과 농업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고 한다. 실제 견훤왕은 고부 눌제를 개축했다고 전해진다. 정읍 눌제와 함께 김제 벽골제, 익산 황등제를 ‘3제’라 불렀을 만큼 당시 눌제는 큰 규모를 자랑했다. 눌제는 제방을 축조해 농경을 이루고 도로 역할도 해 부안 줄포면 방면으로 나룻배를 이용하도록 했다. 축조연대는 영주지(瀛州誌)에 후백제 견훤왕이 축조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영주(瀛州)는 지금의 고부라고 한다. ​눌제를 지나 일행은 또 하나 주목할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는데 후백제의 군사적 전략 요충지이자 해상교통로를 살펴보고자 부안으로 이동했다. 고부의 정방향에 ​검모포(黔毛浦)가 위치하는데 검모포는 부안의 포구 이름이다. 현재 보안면 구진마을에 위치해 있는 검모포에 대해 송 전 교수는 “현재 구진마을에는 해양 방어 체제인 토성과 군함을 만들었다는 조선소 흔적이 있다”며 “마을 주민의 증언에 따르면 200여평의 석축과 석축을 지지하는 200여개의 나무기둥이 조선소 자리에 있었다”고 말했다. 지금의 구진마을을 가보면 도로도 닦여있고 소문난 빵집도 생겨 정돈된 분위기다. 하지만 옛 자취가 사라졌다고 송 전 교수는 아쉬움을 토로했다. 신형주 시인의 시 ‘별’을 보면 “가슴에 별을 간직한 사람은 어둠 속에서 길을 잃지 않는다”고 했다. 옛것을 간직해야만 지역 소멸 위기인 어두운 터널에서도 후대는 결코 길을 잃지 않으리니. 후백제의 역사를 다시 일으키는 짧지 않은 여정에서 일행은 한때 반짝였던 후백제의 발자취를 찾아볼 수 있었다.

  • 기획
  • 김영호
  • 2023.06.20 17:35

[한국전쟁 정전 70년] 천안-금강 지연전투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한반도에 가장 먼저 투입된 미군이 24사단이다. 전쟁 발발 직후 UN은 '한국 군사원조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트루먼 미 대통령은 극동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를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고, 맥아더는 곧바로 일본에 주둔한 미 8군 제24사단을 한국에 투입했다. 윌리엄 딘 24사단장은 제21연대 1대대, 일명 스미스 부대를 한반도로 급파했다. 부산에서 대전을 거쳐 경기도 오산에 투입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1950년 7월 5일 오산 북쪽 죽미령에서 최초 전투를 벌였으나 T-34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 제4사단과 제105전차사단에 참패했다. 스미스 부대는 60명이 전사하고, 82명이 포로로 잡혔다. 곧 이어 벌어진 전투가 천안전투이다. 앞서 딘 사단장은 스미스 부대 후방으로 제34연대를 보내 안성과 평택에서 북한군을 막도록 했다. 그런데 러브리스 연대장은 전투도 벌이지 않고 남쪽으로 철수하여 천안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북한군과 접촉하면서 시간을 끌라는 사단장의 뜻을 어긴 것이다. 북한군은 7월 6일 평택을 점령한 뒤 계속 남하했다. 천안의 34연대는 사단장의 지시에 따라 7월 7일 1개 중대를 경부국도로 북상시켜 북한군의 움직임을 탐지하고 접촉을 유지했다. 이 부대는 북쪽으로 전진하다가 부대리 인근에서 북한군의 기습을 받고 철수하였다. 이날 34연대는 연대장이 바뀌었다. 딘 사단장이 안성, 평택의 무단 후퇴 책임을 물어 러브리스 연대장을 해임하고, 로버트 마틴 대령에게 지휘권을 넘긴 것이다. 마틴은 지략과 용맹함을 갖춘 장교로 2차 세계대전 때 딘 사단장과 함께 싸웠으며, 딘 사단장이 극동사령부에 전입을 요청, 하루 전날 일본에서 대전에 도착했다. 천안전투에서 직접 2.36인치 바주카포로 북한군의 T-34 전차를 공격하다가 피격 사망한 로버트 마틴 대령(제34연대장). 7월 8일 미 24사단 34연대와 북한 3사단, 105전차사단이 천안 시내에서 시가전을 벌였다. 미군이 2000여명인데 비해 북한군은 1만 2000여 명에 전차로 중무장한 터였다. 아침 6시부터 북한군은 성환 쪽 국도를 타고 천안의 서북쪽과 동북쪽의 도로 진입했다. 전날 미군이 800여 발의 대전차 지뢰를 매설했지만 한 발도 터지지 않았다. 북한군이 밤 사이 제거했거나 불량품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시가전은 북한군의 일방적 우세였다. 시내에 진입한 북한군 전차는 천안역사 등 건물과 교회, 차량들을 포격했다. 미군이 잠복했을 만한 엄폐물을 제거한 것이다. 미군 장병들이 수류탄과 2.36인치 로켓포로 2대의 전차를 부쉈지만 중과부적이었다. 이날 오전 8시 마틴 연대장은 직접 로켓포로 전차를 공격하다가 적 전차의 포격으로 사망했다. 연대장으로 부임한 지 이틀 만에 전사한 것이다. 딘 사단장은 연대장이 전사하자 부연대장 와들링턴 중령으로 하여금 병력을 수습하여 남쪽으로 철수하도록 했다. 뒤 이어 벌어진 전투가 전의전투이다. 천안 바로 남쪽 전의에서 미 24사단 제21연대는 7월 9일부터 12일까지 북한군 4사단과 3사단, 105전차사단과 싸웠다. 34연대가 천안전투에 전력 손실을 입어 뒤로 빠지고, 21연대가 전면방어전을 펼친 것이다. 연대장 스티븐스 대령은 개미고개 일원에 병력을 집중 배치했다. 이곳은 경부선 철도와 국도가 지나가는 길목이었다. 개미고개 동쪽 미곡리에 제1대대, 남서쪽 송성리에 제3대대, 개미고개 남서쪽 5km 보덕리에는 11포병대대, 그 아래 조치원에 연대본부를 뒀다. 7월 9일 북한군이 전차 11대를 앞세우고 전의 방면으로 공격해오자 포병대대의 155m 곡사포와 4.2인치 박격포를 집중하고, 미 제5공군 전폭기가 폭격을 퍼부었다. 이 공격으로 적 전차 10여 대와 차량 30여 대를 파괴했다. 10일에는 북한군이 우회하여 박격포 진지를 함락시켰고, 미 공군의 폭격이 뜸해지자 사력을 다해 미 제1대대의 미곡리 방어진지를 공격했다. 미 제1대대는 제3대대로 철수하여 합류했고, 오후 2시에 3대대가 반격하여 1대대 진지를 회복했으나 북한군의 야간공격에 대비해 다시 3대대 진지로 철수했다. 이날 미 공군의 전폭기가 대량의 화력을 퍼부어 전차 38대, 자주포 7대, 트럭 117대를 파괴했다. 미군 또 처음으로 M-24 전차 8대를 투입하여, 북한의 T-34 전차와 대전차전을 벌였는데 아군 전차가 7대, 적 전차는 1대가 파괴되는 등 화력의 열세를 절감했다. 11일 새벽 21연대 제3대대가 미곡리 진지를 다시 점령했으나 북한군에 의해 빼앗겼고, 12일에는 북한군이 새벽부터 지휘소를 집중포격하여 통신소와 탄약저장소를 파괴했다. 이때 북한군은 4사단을 대체하여 3사단이 한층 증강된 전력을 바탕으로 미군을 맹공했다. 미 제3대대는 통신이 두절된 데다가 북한군 전차 4대가 진지를 돌파해오자 대혼란이 빚어져 병사들 각자 진지를 벗어나 조치원으로 철수했다. 미 24사단 21연대는 조치원에서도 전투를 벌였다. 스미스 중령이 이끄는 제1대대가 조치원 북쪽에서 진지를 구축했는데 북한군 2000여명이 동,북,서쪽 3개 방향에서 공격해왔다. 스미스 대대장은 혼란을 무릅쓰고 1개 중대씩 축차적으로 차량으로 이동시켜, 금강을 건너 남쪽으로 안착시켰다. 34연대도 천안 남서쪽으로 철수하여 가벼운 전투를 치르고 수촌리를 거쳐 공주 금강 남쪽에 진지를 구축했다. 미군은 7월 12일부터 16일까지 금강 남쪽 세종시 대평리에서 금강 방어전을 펼쳤다. 딘 24사단장은 금강에서 적을 최대한 저지시키기 위해 제19연대를 투입, 공주-대평리-신탄진 강안 30km을 차단하게 했다. 제19연대는 북한군의 주공격로인 대평리에 화력을 집중하여 진지를 구축했다. 그러나 북한군 4사단이 14일 미 34연대가 방어하는 금강하류 공주쪽을 건넘으로써 서쪽이 뚫렸다. 북한군 3사단은 15일부터 대대적으로 대평리 일대 도하에 나섰다. 전차와 포병이 포를 쏘고 야크기까지 동원하며 도하를 거들었다. 미 19연대는 기관총과 포병, 공군기의 폭격까지 동원하여 격퇴시켰다. 그러나 북한군이 이날 밤 미군의 조명탄이 20여분 간 중단된 틈을 타 남쪽으로 강을 건넜고, 상류쪽 합강리로도 도하를 시도했다. 16일 오전에는 북한군이 중앙 정면을 건넜고, 전차의 엄호 아래 대대 진지까지 습격했다. 북한군은 후방으로 깊숙하게 침투하여 제19연대의 보급로를 차단했다. 퇴로를 차단당한 미군은 16일 밤부터 뿔뿔이 흩어져 24사단 본부가 있는 대전으로 철수했다. 뒤 이어 대전에서는 7월 19일부터 20일까지 미 24사단과 북한 3,4사단, 105전차사단 사이에 한국전쟁의 운명을 건 '대전전투'가 벌어졌다. 24사단은 오산-평택·안성-천안-전의-조치원·공주-대평리-대전에 이르는 경부 축에서 싸웠고 대부분 패했다. 북한군의 전력을 오판했고, 준비도 미흡했다. 딘 사단장은 금강(대평리)전투 직후 대전전투에서 패하고 그 자신이 북한군 포로가 됐다. 그러나 요즘 한국전쟁 초기 미 24사단의 전투를 새롭게 평가하고 있다. 이 전투를 통해 아군은 T-34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의 전력을 확인하고 화력 증강에 나섰다. 북한군은 24사단의 강력한 저항과 미 공군의 폭격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공포감을 느꼈으며, 남진을 머뭇거렸다. 천안과 전의전투에서 북한 4사단은 병력의 절반 정도가 희생됐다. 24사단이 죽음을 무릅쓰고 15일이나 시간을 끌어줬기 때문에 아군이 영동과 김천을 거쳐 낙동강에 이르기까지 전열을 정비할 기회를 얻었다. 전투는 패했지만 전략적 목표는 훌륭하게 달성한 것이다. 대전일보=김재근 선임기자

  • 기획
  • 기타
  • 2023.06.19 14:34

전북개발공사 최정호 사장 "도민과 소통, 일 잘하는 1등 공기업 만드는 데 최선"

전북도민의 복지향상과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지난 1999년 1월 전라북도가 자본금 전액을 출연해 설립한 전북개발공사. 초창기만 해도 지방 공기업이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겪었다. 하지만 조금씩 성숙해지면서 지방 공기업으로서의 역할과 사명을 다지며 설립 취지에 맞는 조직으로 발전해 나가고 있다. 올해 창립 25년째에 맞춰 지난 3월 제11대 사장으로 임명된 최정호 사장은 변화와 혁신, 소통 문화를 통한 열린경영을 표방하며 전주평화 국민임대주택 현장을 방문하는 것으로 첫 행보를 시작했다. 취임 이후 지역 전문건설업체 활성화를 위해 노력해 왔으며 LH와 긴밀하고 구체적인 상생 협의를 통해 지역사회 발전을 위한 방안도 모색하고 있다. 좀 더 성숙하고 발전하는 전북개발공사의 모습이 기대되는 이유다. “도민의 행복을 책임지는 역동적인 지방 공기업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는 최정호 사장을 만나 공사의 미래 지향적 발전 방향 등을 들어봤다. -벌써 전북개발공사 사장으로 취임한지 3개월이 됐습니다. 늦었지만 취임 소감 한 말씀.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에서 근무하며 터득한 대외업무 경험과 네크워크를 바탕으로 도내 14개 시·군 및 도의회와도 유기적으로 협력하고 전북도민을 위한 공사 발전이 무엇인지 고민하겠습니다. 이해관계자인 지역사회 리더들과도 소통하며 원하는 사항에 대해 항상 경청하며 '함께 혁신하고 함께 성공해 새로운 전북'을 만드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공기업으로 그 위상을 공고히 할 수 있도록 노력 하겠습니다." -앞으로의 운영방향은 무엇인지요. "전북개발공사는 앞으로 전북도의 정책방향에 발맞춰 지역발전을 선도하고 도민의 삶의 질 향상은 물론 지역사회에 기여하는 전북 유일의 공기업으로 매진해 나가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진행 중인 공공주택과 임대주택을 차질없이 시행해 공급하고, 신규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필요한 곳에 도민이 원하는 주거공간을 제공하고, 서민취약계층의 주거 어려움에도 큰 관심을 두고 지자체와 적극 협력해 주거 사각지대 해소에 노력하겠습니다. -서민주거공급과 함께 일자리 확대, 경영혁신도 중요한데요. "일자리와 기업유치, 인구유입을 위한 도 정책사업에 선도적인 역할을 해 일자리 연계형 지원주택을 공급하고 기업입주를 위한 산업단지 개발에도 적극 나서겠습니다. 또 공공성과 기업성의 조화와 사회적 가치실현으로 지속가능한 경영혁신을 이루겠습니다. 새로운 경영환경에 신속하고 체계적으로 대응해 나갈 수 있도록 중장기 경영혁신전략과 지속가능한 ESG 경영 전략을 수립해 적극적으로 추진하겠으며, 공사에서 추진하는 각종 공공사업에 대해서 지역업체 참여율을 높이고 지역자재를 최우선으로 사용해 지역경제 활성화와 일자리 창출에 기여하고자 합니다." -공사의 신뢰를 높이기 위한 조직 운영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도민 여러분과 끊임없이 소통하면서 일 잘하는 기관, 신뢰받는 1등 공기업이 되겠습니다. 급변하는 대내·외 경영환경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해 나가기 위해 공사의 기능과 역할을 재정립하고 일을 더 잘하는 조직으로 개편하겠으며, 도민과의 신뢰를 최고의 경영 가치로 삼고 열린 경영을 통해 도민과 직원 모두가 행복한 조직문화를 구현하고 직접 찾아가는 현장 중심의 경영을 펼치겠습니다. 이를 통해 도민에게 사랑받는 공기업으로서 자생력을 키울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현재 추진 중인 사업과 향후 계획 중인 사업은 어떤 것들이 있나요. "현재 택지조성, 공공주택건립, 도시재생, 재생에너지 발전사업 등 총 19개 사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전라북도는 인구소멸에 대응하고, 공사는 인구유입을 위한 지방공기업의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의무가 있으므로, 기업유치를 위한 산업단지 조성 및 산업종사자의 주거안정을 위한 공공주택 지속공급 등을 계획하고 있으며, 지역균형발전을 위해 그동안 개발에서 소외된 상대적 낙후지역을 중점대상으로 귀농․귀촌단지 등을 조성해 균형있는 지역발전을 도모하고자 합니다. 태양광, 풍력, 수소 등 신재생 에너지관련 사업을 육성할 수 있도록 기반시설 조성 및 발전사업에 적극 참여해 전라북도의 미래 먹거리 사업으로 육성하는 데도 앞장서도록 하겠습니다." -최근 정부의 경영평가가 저조한데, 앞으로 전망은? "최근 우리 공사 경영평가 하락의 주요 원인인 경영성과, 조직운영, 건전재정운영, 각 사업장 지표, 현장별 안전사고 예방에 대응하고, 비재무적 성과인 ESG 경영, 안전, 인권, 사회적 가치 등을 강화하는 등 올해 경영실적 평가에 적극적으로 준비하겠습니다. 또한, 신규사업 발굴을 위해 체계적인 소규모 도시개발 사업과, 서민의 주거안정을 위한 공공주택을 지속적으로 검토하고, 전 세계적 탄소중립 일환으로 신재생에너지 사업 요구와 인구구조 변화와 워라밸 등을 고려한 공사의 사업 다양화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노력들을 통해 경영평가 실적 제고를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해 경영평가 우수등급 달성을 위해 매진하겠습니다." -임대주택 사업은 공사의 대표적인 공익목적 사업입니다. 임대주택사업 추진 상황과 향후 계획은? "공사가 추진한 공공주택은 전체 16개 단지 7318세대로, 그 중 공공분양 1개 단지 992세대를 제외한 15개 단지 6326세대를 임대주택으로 공급했습니다. 그 중 분양전환된 임대주택은 4개 단지 2349세대이며, 현재 임대주택 12단지 3977세대를 관리하고 있습니다. 그 중 임대기간이 30년 이상인 장기임대주택은 1323세대로 총 관리주택의 33.3%를 차지하고 있어, 주거약자를 위한 주거안정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향후 익산 부송4지구 및 익산 함열에 추가 공공임대주택 보급을 추진 중에 있습니다. 앞으로도 전북개발공사는 14개 시․군의 특성 및 주택수요에 맞춰 인구가 유입될 수 있도록 유형별 공공주택을 적극 추진할 계획입니다. 주거약자와 청년층에 양질의 주택을 공급해 도민의 주거 사각지대를 해소하고 주거안정에 기여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겠습니다." -공사의 청렴·윤리경영, 그리고 사회 환원을 통한 상생경영 실천에 대해 설명한다면. "전북 도민이 100% 출자한 공기업으로서 지역사회의 기대치에 맞는 윤리적 행동과 사회의 공익을 위한 자선활동 등 사회적 책임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공사는 2022년도 정부의 종합청렴도 평가에서 최상위 등급(2등급)을 달성하며 타 도시개발공사 대비 뛰어난 성과를 이뤄냈습니다. 2023년은 좀 더 특화되고 혁신적인 시책활동을 모색해 ‘2023년 종합청렴도 1등급 달성’이라는 목표 달성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또한, 꾸준한 지역 사회공헌활동을 통해 경영수익을 지역에 환원하고 취약계층을 지원해 도민과 지역사회의 기대치에 부응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도민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도민의 주거안정과 주거복지 향상을 정책의 최우선 순위로 추진하고, 일자리와 기업유치, 인구유입을 위한 도정사업에 선도적인 역할을 하며, 공공성과 기업성의 조화와 사회적 가치실현을 이뤄내고 도민들과 끊임없이 소통하면서 일 잘하는 전북개발공사를 1등 공기업으로 만드는데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는 말씀을 다시 한 번 드립니다." 최정호 사장은 1958년 생인 최정호 사장은 익산 출산으로 성균관대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지난 1985년 제28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서울지방항공청장, 국토교통부 2차관, 전북도 정무부지사, 국립항공박물관장 등을 역임하며 주요 정책 업무를 수행했다. 다양한 공직경험과 비상한 두뇌로 모든 분야에 전문가급 지식을 보유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친화력과 열린 소통이 큰 장점으로 꼽힌다. 퇴임 후에는 국토부 장관 후보로 내정되기도 했다. 지난해 지방선거에서 익산시장 선거 출마를 위해 민주당 경선에 나서기도 했다.

  • 기획
  • 이종호
  • 2023.06.18 15:52

[지난 주 '핫클릭' : 6. 11~16] 6000억·1조⋯새만금에 잇단 대규모 이차전지 투자

△6월 11일~ 6월 16일 6월 셋째 주, 전북일보 홈페이지 방문자들이 가장 많이 클릭한 기사는 문민주 기자의 '엔켐·중앙디앤엠, 새만금에 리튬염 공장 건립⋯6000억 투자'다. 이 기사는 코스닥 상장사인 엔켐과 중앙디앤엠이 새만금 국가산단에 이차전지용 리튬염(LiPF6) 생산 공장을 짓는 투자협약을 다뤘다. 올 하반기 착공, 2026년 말 준공할 예정이며 700명의 신규 인력을 채용할 계획이다. 새만금 이차전지 투자 관련 문민주 기자의 'LS·엘앤에프, 새만금에 전구체 공장 짓는다'도 많이 읽혔다. LS·엘앤에프 공장 건립 예상 투자 금액은 1조 원 규모, SK온과 LG화학에 이은 대규모 새만금 이차전지 투자다. 두 번째로 많이 본 기사는 이환규 기자의 '일본산 참돔이 국내산이라고?⋯군산 수산 활성화에 찬물'이다. 일본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를 앞두고 수산물 안전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세 번째는 백세종 기자의 '먼지나는 흙바닥과 화장실도 없던 전주 파크골프장의 변신'이며, '전주 기린대로에 버스중앙차로 생긴다⋯내년 착공'도 관심을 끌었다. 이밖에 송은현 기자의 '전주한옥마을 전동차 문제 왜?⋯시·경찰 사실상 수년간 방관', 김윤정 기자의 '최강욱, 이성윤 전북 총선 등판 초미 관심' 등이 주목을 받았다.

  • 기획
  • 이용수
  • 2023.06.17 13:44

[도시의 시간, 성장동력을 만들다] ② 옛것에 대한 가치 새로운 시선으로 일군 '도시 경쟁력' 주목

오래된 도시에는 시간을 함께해온 오래된 공간이 축적되어 있다. 그 공간들은 세월에 묶여 사라지거나 새롭게 다시 태어난다. 오래된 공간의 변신은 그 자체로도 흥미롭지만, 어느 공간은 도시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도시재생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우리보다 먼저 저성장과 인구 감소를 경험한 일본은 일찌감치 도시재생에 눈을 떴다. 쇠퇴하는 오래된 도시를 살리기 위해 고민하며 찾아낸 해법 중 하나가 도시재생이다. 낡고 방치된 공간을 현재의 시각으로 재해석해 새로운 생명과 가치를 살려낸 도시가 적지 않다. 그 사례를 찾아 규슈지역의 도시를 돌아보았다. 지역의 전통 자산을 도시 마케팅으로 연계해 성공한 사가현의 도자기 마을 <아리타 세라>, 1600년대부터 200년 동안이나 일본의 유일한 국제무역 창구였으나 기능이 약화되면서 상당 부분 훼손되거나 버려졌던 공간을 복원사업을 통해 도시의 관광 콘텐츠로 거듭나게 한 나가사키의 <데지마>가 거기 있다. 지역을 떠나는 청년들을 붙잡기 위해 도시가 활력을 찾을 방법을 고민하며 얻은 기쿠치의 랜드마크 <기쿠치 중앙도서관>, 인구 5만 명의 작은 도시를 세계적으로 주목하게 만든 흥미로운 공간 <다케오시립도서관>, 상인과 장인의 공방이 된 150개의 전통 건물 거리 <야메후쿠시마>, 아름다운 도시 만들기 프로젝트로 천혜의 자연환경을 가진 구마모토현의 랜드마크가 된 <구마모토 아트폴리스>도 주목할만한 사례다. 지역의 문화자산을 예술과 접목해 브랜드를 만들고 그것을 지역주민들과 함께 발전시켜가는 <벳푸 프로젝트>도 흥미롭다. 쇠락하는 도서관을 재생시켜 아름다운 건축물로 만들어낸 <오이타 아트플라자>, 한때는 일본의 3대 항구로 꼽혔으나 쇠락의 길을 걷다 행정과 민간의 협력으로 새롭게 태어나 관광지로 변신한 <모지항 레트로>도 있다. 지역이 가진 가치를 새로운 시선으로 주목해 동력을 만들어낸 이 도시들의 노력이 일궈낸 결실이다. 그들은 어떤 가치와 철학으로 도시를 살리는 동력을 만들었을까. 오래된 공간과 사라지는 전통 문화유산을 활용해 문화의 생명력을 키우고 사람을 불러 일자리를 만드는 이 도시들이 답을 준다. △도자기의 전통, 다시 세계에 이름 알리는 <아리타 세라> 아리타(有田)는 일본 규슈 북서부 사가현에 있다. 사가현은 오래전부터 도자기 산지로 전통을 이어온 아리타 덕분에 이름을 더 널리 알렸다. 아리타 도자기는 한때 유럽 전역에 수출될 정도로 번성했다. 오늘에 이르러서도 단순한 생활용품을 넘어 예술작품으로 인정받는 대표적인 도자기다. 사가현에는 아리타 외에도 이마리, 가라쓰 등 각각의 이름을 내세운 도자기의 전통을 가진 지역이 많지만, 아리타는 일본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가장 많이 찾아오는 도자기 도시로 꼽힌다. 공교롭게도(?) 아리타 도자기의 뿌리는 정유재란 때 조선에서 끌려간 도공 이삼평이 뿌리다. 일본으로 끌려가 사가현 아리타에 정착하게 된 이삼평은 아리타의 이즈미 산에서 질 좋은 고령토(백토)를 발견하고 도자기를 만들었다. 일본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도자기였다. 그 덕분에 일본의 도자기는 400년 역사와 전통을 갖게 됐다. 오늘에 이르러 이삼평이 도조(陶祖)로 추앙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삼평이 도자 가마를 연 후 아리타 지역뿐 아니라 이마리, 하사미 등 사가현의 여러 마을이 도자기를 만들기 시작해 본격적인 도자 마을로 성장했다. 그중에서도 아리타 도자기는 도자공예의 대표적인 브랜드가 되어 세계 시장을 휩쓸었다. 그러나 오랜 역사 속에서 아리타 도자기는 여러 차례 부침을 겪어야 했다. 아리타에서 생산되지 않은 상품들이 아리타 이름을 내세워 시장을 어지럽히고 중국 도자기들은 싼 가격으로 밀려와 자리를 빼앗기도 했다. 그러나 아리타 사람들은 400년 전통을 이어온 도자의 뿌리라는 자긍심으로 어려운 상황을 극복해냈다. 도공들이 밀집해있던 거리에 세계 최대의 도자기 판매점 ‘아리타 도자 마을 플라자’를 조성했던 것도 그 일환이었다. <아리타 세라>는 바로 이곳, ‘아리타 도자 마을 플라자’를 개편해 2018년 4월 더 새롭게 문을 연 공간이다. 아리타 시내에서 자동차로 불과 5분 거리. 야트막한 언덕에 자리 잡은 <아리타 세라>는 아리타 지역의 도자기 공방 스물 두 곳의 도자기를 한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는 전문적인 도자기 공방 거리다. 언뜻 외형적으로는 거대한 쇼핑 거리처럼 보이지만 외지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해 주차장과 편의시설을 갖추고, 오며 가며 쉴 수 있는 크고 작은 공간을 만들어 마치 작은 공원과도 같은 환경을 만들었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이곳에 자리 잡은 공방과 가게마다 명확하게 드러나 보이는 특성이다. 판매를 위한 공간이면서도 각 공방의 가치와 철학을 담아낸 다양한 물건과 형태의 전시 기법은 이들 공간에 특별함을 더한다. 이미 세계적인 디자이너와 협업으로 아리타 도자기의 진가를 알리고 있는 공방도 적지 않은데, 그들 중에는 세계 각 도시와 연계해 매장을 확산해가고 있는 공방도 있다. <아리타 세라>는 2018년 문을 연 이후 불과 2년도 되지 않아 코로나의 급습으로 위기를 맞았다.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는 공간의 환경은 암담했다. 다행히 코로나 팬데믹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기 시작한 올해 초부터 <아리타 세라>에도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5월 말에 찾았던 <아리타 세라>는 아직 한적했다. 코로나 후유증이 가져온 풍경이었지만 지난 3월부터 본격적인 운영을 시작했다는 <아리타 세라> 사람들의 의욕은 넘쳐 보였다. 이곳을 아리타의 관광 거점으로 만들어가기 위해 도자 역사를 경험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만들고 교육공간으로도 활용할 수 있는 시설과 숙박을 위한 호텔을 갖추는 로드맵도 흥미로웠다. 지역의 전통 자산을 도시의 성장 동력으로 활용해가는 이들의 지혜가 어떤 성과를 가져올지 궁금해진다. △시간의 정취를 간직한 거리의 변신 '야메 후쿠시마' 야메시는 후쿠오카현 남서부에 위치한다. 중남부는 평야, 북동부는 삼림이 점하고 있는 야메 지역의 중핵 도시다. 에도시대에는 야메 지방의 물산 집적지로서 정치, 문화 중심지로 번성했다. 지금은 야메차, 국화, 표고버섯 등 농산물 생산이 활발한 농업도시로 알려졌지만, 중세 시대부터 이어져 온 수제종이 와시, 불단, 제등 등 전통 수공예로 이름을 알린 장인의 도시이기도 하다. 이곳, 야메시의 중심에 '역사적 건물군 보존지구'로 지정된 거리 <야메 후쿠시마>가 있다. 수많은 전통가옥과 수로를 끼고 이어지는 거리 풍경이 아름다운 지역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1621년 후쿠시마 성이 무너졌을 때 이 주변에 있던 성곽 마을은 온전히 살아남았다. 이후 야메 지역의 교통 중심이 되어 물산 집결지로 자리 잡은 <야메 후쿠시마>는 에도-메이지-다이쇼-쇼와 시대를 거쳐오면서도 150여 개의 전통 건물이 그대로 남아 상인과 장인의 공방으로 변신했다. 오늘에 이르러서도 전통가옥과 거리를 온전히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은 지역주민의 노력 덕분이다. 주민들은 2월 중순부터 3월 중순까지 열리는 지역 축제를 이어가며 도시를 알렸다. 다양한 전통 놀이를 통해 무형의 문화유산을 지키고 하얀 벽 거리 풍경을 보존하고 알리기 위해 힘을 모았다. 빈집을 잘 보존하기 위해 실용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 사람들이 모이는 카페나 커뮤니티 공간으로 만드는 일에도 발 벗고 나섰다. 행정적 지원도 주효했다. 야메시는 <야메 후쿠시마>의 보존을 위해 세 가지 정책을 앞세웠다. 기술자의 확보, 활기를 되찾을 소프트웨어 구축, 그리고 시 전체의 문화경관을 어떻게 키워나갈 것인지 고민하는 일이 그것이다. 그중에서도 오래된 건축물의 역사를 조사하고 기준에 근거한 설계나 시공을 위해 장인을 육성하는 일은 야메시의 중요한 과제로 안겨 있다. 주민과 행정이 연계해 빈 상점이나 가옥을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적극적으로 찾기 위한 시스템 구축도 거리의 공동화 현상을 극복하기 위한 야메시의 중요한 정책이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찾아간 <야메 후쿠시마>에서 기대했던 활기를 찾아보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순환형의 지역사회 만들기를 내세워 시민과 행정이 나서고 전문가들이 지원하는 정책을 만들어 실행해나가는 야메시의 노력은 오래된 도시들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전통가옥의 거리 <야메 후쿠시마>의 내일이 기대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김은정 선임기자, 천경석 기자

  • 기획
  • 김은정
  • 2023.06.15 17:27

[후백제 역사 다시 일으키다-문헌사료로 본 후백제] ⑨후백제와 오월국의 외교와 교류

후백제는 선후로 오월, 일본, 후당, 거란 등 정권들과 대외관계를 추진했었으나 오월과의 외교관계가 제일 성공적이었다. 오월국(吳越,907-978)은 당나라 말기 중국 강남지역에 세워진 지방정권이다. 건국의 시조는 전류(錢鏐)이다. 지배영역은 와신상담, 토사구팽, 오월동주 등 익숙한 역사전고(歷史典故)들이 발생했던 춘추전국시대 오나라와 월나라의 옛 강역을 아울렀기에 국호가 오월이다. 오늘날 익히 알려진 상해, 항주, 소주, 영파 등 중국 유명도시들을 아우르는 오월지역은 우월한 지리환경과 기후 조건으로 농업과 수공업이 발달하였다. 또한 해상무역이 발달한 대외교류의 주요 창구였으며, 당 후기에는 중원과 비견되는 중국의 또 다른 경제문화 중심지로 부상된 곳이다. △오월과의 해상통로 장악 한반도와 오월지역의 해상항로는 <선화봉사고려도경>에 개성-군산도-흑산도-명주를 연결하는 사단항로를 연상한다. 그러나 최초 양 지역을 연결하는 해상항로는 백제 남해안-소흑산도-명주을 연결하는 항로였다. 이 해상항로는 7세기 중엽에 개척되었으나 9세기경 당-신라-일본 간 민간무역이 흥성하면서 활성화되었다. 여수반도와 광양만이 한 눈에 바라보이는 마로산성 유적지에서 9세기 중후기 월주청자, 해수문포도방경 등 당나라 유물들이 발굴되었다. 여수반도 남쪽 앞바다 연도에는 아직도 당으로 가는 포구라는 당포(唐浦) 지명이 남아있다. 당포의 위치는 여수, 순천지역 해상세력들이 오월로 떠날 때 방양(放洋: 항해에 적합한 바람을 기다려 먼 바다로 출발을 의미함)하던 곳일 것이다. 이 유적과 유물은 순천 박영규과 여수 김총 등이 대오월 해상무역에 참여했음을 의미하며 이들을 통해 남해안 해상세력으로 성장했을 것이다. 견훤은 서남해 지역 방수군 비장으로 활동하면서 이 해상세력들을 흡수하고, 해상통제권도 장악하였다. 900년 후백제 도읍이 전주로 정해지면서 정치의 중심이 서해안으로 이동하였고, 해상항로도 전주-서해안-흑산도-명주를 연결하는 해상항로로 바뀌었다. <선화봉사고려도경>의 해상항로는 변형된 연장형(延長型) 해상항로다. △오월과 외교관계 결성 <삼국사기>열전에는 900년 견훤이 오월에 사신를 파견하여 후백제와 오월 간 외교관계가 시작된다. 오월이 견훤에게 검교태보를 더하고 기타는 예전과 같다는 관직을 내려 양국 간 교류는 그보다 앞선 시기에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진철대사보월승공탑비」비문에는 건녕 3년(896)에 입절사(入浙使) 최예희가 명주(영파)로 넘어갔다고 하였는데, 이는 견훤이 파견한 것이다. 이 해는 전류가 893년 진해(鎭海)절도사 이어 진동(鎭東)절도사에도 임명되어 오월(절강)지역의 실질적인 통치자 지위에 오른 해이기에 입절사는 견훤이 전류에게 보낸 축하사신이었을 것이다. 견훤과 전류 두 군주는 이미 건국 전에 서로 교류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건국 후 양국은 서로 정치적으로 지원하면서 돈독한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다. 918년 오월과 양오(楊吳) 간 전쟁을 앞두고 한창 전투 준비를 하고 있을 때 견훤은 전류에게 특별히 말(馬)을 보내어 성원의 뜻을 표시했다. 이에 927년 견훤과 왕건이 전쟁 갈등이 고조되었을 때 전류는 후백제에 반상서 사신을 파견하고 견훤을 통해 왕건에게 조서를 전달하여 전쟁을 중재함으로써 정치적으로 힘을 실어 주었다. 933년에도 견훤이 오월에 사신을 파견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후백제는 존속기간 내내 오월과 우호적인 외교관계를 유지하였다. △불교문화교류 양국 간 우호관계는 경제문화교류를 촉진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당 중후기 남종선이 중국 남방, 특히 오월지역을 중심으로 크게 흥성하자, 많은 신라 승려들이 중국으로 넘어가 새로운 선종사상을 배우고 귀국하여 새로운 불교운동을 펼쳤다. 선종 9산문 중 반수 이상 후백제 영역 내에 자리 잡고 있다. 양 지역 간 불교문화교류는 사단항로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당에서 30년간 수행한 경보스님은 921년에 오월 지역을 떠나 전주 임피현 신창진 포구로 귀국한 후 견훤의 요청으로 전주 남쪽 남복선원에 주석하였다. 또한 당에서 25년간 수행한 긍양스님은 924년에 줄포만 희안현 제안포로 입국한 후 강주 백암사에 머물면서 선풍을 진작시켰다. 후백제시기 불상 양식에서도 양국간 해상교류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군산 불주사 금동불입상, 김제 옥산리 금동불입상, 익산 심곡사 칠층석탑 출토 금동불입상의 원형 좌대 형태, 세장한 비례, 편불화 현상 등은 하나같이 오월국 수도 항주 영은사 경당 오존불, 소주 호구탑 금동좌불상과 매우 유사하다. 이러한 불교문화의 유사성은 오월지역의 불상양식이 후백제 불상양식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청자생산기술 도입 자기(瓷器)는 흙의 선택에서 유약, 온도, 소요(燒窯) 축조, 장식기법 등 다양한 고급기술이 집약하여 만들어지는 고부가치 생활용품이자 공예품이다. 고대 중국 대외무역에서 천년이 넘도록 줄곧 효자상품을 담당했던 3대 수출상품(비단, 차, 자기)가운데 하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선다문화(禪茶文化)로 사찰의 승려들이 다기를 수입하여 사용하였는데 점차 왕실, 귀족층으로 확산되었다. 다기의 수요가 급증하면서 국산화 필요성이 대두된 것이다. 이러한 수요에 부응하여 중국 오월지역의 월주요 청자 생산기술을 도입한 사람이 견훤이다. 그동안 월주요 청자는 중국청자로서 고려청자의 기원으로 알려졌을 뿐 언제 누가 월주요를 한반도에 처음 도입하였는지 학계에 의견이 분분할 뿐이다. 고고학적 발굴 성과에 힘입어 한국의 초기청자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특히 전북 진안 도통리에서 10세기 초로 판단되는 오월지역 월주요과 같은 40미터 내외의 대형 전축요(塼築窯)가 발굴되었다. 이 전축요는 오월에서 청자기술자가 후백제에 들어와 직접 축조한 것으로 판명하고 있다. 진안 도통리 전축요와 초기청자는 10세기 도요지로 판명되었고, 따라서 후백제 견훤이 오월국과의 대외교류를 통하여 월주요 청자기술을 도입하여 현지생산을 주도하였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최근 고창 아산 반암리에서도 33미터에 달하는 대형 전축요가 발굴되었다. 진안 도통리 전축요는 전주 수도권에 청자를 공급하는 요지라면, 아산 반암리 유적은 해로수송이 용이한 지역 임을 감안하면 초기청자를 후백제 전역에 공급하기 위한 목적이 깔려있는 듯하다. /백승호(중국 절강대학교 교수) 초기청자, 견성(甄城) 그리고 견훤 <고려사> 지리지에 전주는 견성(甄城)이라는 별칭이 등장한다. 견성은 견훤과 같은 견자를 사용하여 후백제시기에 생겨난 별칭으로 보인다. 그동안 견성은 ‘견훤의 도읍’이라는 뜻으로 이해해왔다. 군주의 성씨를 도시 이름을 따서 명명하는 사례는 거의 없다. 견훤은 원래 이씨(李氏)였다가 견씨(甄氏)로 고쳤다. 아버지 아자개가 농부로 살다가 光啓(885-887)연간에 장군으로 자칭했을 당시 이씨 성을 가졌을 것인데, 언제 왜 아버지의 성씨를 포기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918년 후백제 왕의 아버지인 아자개가 최대 적수인 왕건에게 귀강(歸降)하는 사건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왜 견씨 성을 택한 것일까? 옥편에 견(甄)자는 질구릇 구울 견,성씨 진이라고 나온다. 부수에서 기와 瓦자 사용은 도기생산과 관련이 있음을 시사한다. 중국의 여러 성씨를 고증한 송의 <통지-씨족략(通志-氏族略)>(1161)에 의하면 견씨는 순(舜)임금의 후손이었다. 일찍 순임금 시절에 한 곳에서 질 좋은 도기를 생산 유통시켜 지역경제가 발전하면서 점차 사람들이 모여들어 성읍(城邑)이 형성되었고, 도기를 생산 판매하는 도시라는 뜻에서 견성(甄城)으로 명명하였다(지금의 산동성 하택시 견성현이다). 순임금 자녀 중 도기를 생산 관리하는 견관(甄官)을 담당하는 이가 있었는데 그의 후손들은 견을 성씨로 삼았다. <계륵편鷄肋篇>(송)에 의하면 견자에 ‘진’이라는 새로운 발음이 생긴 이유는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 무열왕 손견(孫堅)과 수문제(隋文帝) 양견(楊堅)의 피휘(避諱:국왕 이름을 사용하지 않음)때문이었다. 최근 진안 도통리에서 10세기 초로 판정되는 오월지역 월주요의 전축요가 발굴되었다. 도통리 초기청자 유적은 견훤이 오월과 교류에서 제일 먼저 월주청자 생산기술을 도입하여 청자 국산화를 시작한 근거로 제시되고 있다. 당시 청자는 고급기술이 복합화된 고부가 상품이기에 수도 전주가 청자의 생산과 유통 총책을 맡는 중심도시 역할을 담당하면서 견성의 별칭이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자기(瓷器)가 조선 전기까지 전주특산물이었다는 사실은 후백제 청자생산의 연장선으로 이해된다. 예컨데 견(甄)자는 순임금의 고귀한 혈통과 최첨단 기술력이 함축한 글자로서 견훤의 개성(改姓) 취지와 한반도에 최초로 청자생산을 현지화하고 유통시킨 자부심을 잘 반영시킨 글자라고 하겠다. /백승호(중국 절강대학교 교수)

  • 기획
  • 기고
  • 2023.06.13 15:14

[조법종 교수의 전라도 이야기] ⑧ 전라도 최고 통치 공간, 전라감영에서 근대 물품을 만나다.

△동양의 신비로운 왕국같은 전라감영에 들어서다. 1884년 11월 10일 오후 12시 10분경 포크는 전주에 도착하자 마자 남문옆 동쪽 끝에 위치한 낡은 관아건물(경기전 전사청?)로 안내되었다. 잠시 휴식후 포크일행은 가마를 타고 수백 명의 군졸들이 둘러싸고 있는 전라감영의 첫 번째문인 포정루문을 지나고 두 번째 중삼문을 지나 가마에서 내렸다. 그리고 길나장이들이 양쪽으로 줄을 선 돌이 깔린 진입도로를 지나 마지막 내삼문이 열렸다. 그리고 포크의 눈앞에는 거대한 관아(선화당)가 나타났다. “매끈한 기와를 올린 높은 지붕과 기둥은 높고 당당한 기운이 서려있었다. 본관에는 화려하게 옷을 입은 하급 관리들이 거대한 무리를 이뤄 서 있었다. 전체적으로 놀라운 풍광을 만들었다. 지금까지 조선에 있는 어떤 외국인도 보지 못했을 광경이었다. 동양의 오만스러움과 전제 권력의 느낌이 강하게 풍기는 장면이었다.” 그리고 맨 위 계단에서 모자를 벗고 화려한 예복을 치렁치렁 걸친 회색 수염의 나이든 관리에게서 정중한 환영 인사를 받았다. 그리고 그는 손을 흔들어 포크를 오른쪽으로 안내했다. 이 역할은 전라감영의 육방권속 중 가장 수위를 차지하고 있는 이방(吏房)으로 보인다. △전라감영에서 자명종과 유리거울 등 근대물품들을 접하다. 포크는 선화당의 안쪽 방에 서 있는 전라감사와 마주하였다. 크고 검은 수염의 남자는 찬란하게 흘러내리는 비단옷을 입고 있었다. 모자에는 뒤쪽으로 기다란 빨간 술을 매달았고 앞쪽에는 공작 깃털을 꽂아 장식했다. 포크는 바깥문에서 고개를 깊숙이 숙여 인사하고 앞으로 나아가 그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포크는 깊은 산속 미지의 왕국 같은 이곳에서 화려한 스타일의 테이블과 의자, 그리고 두 개의 유리거울과 시계 등 서구의 근대 문물들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전혀 예상치 못한 서구를 대표하는 자명종 시계와 화려한 거울은 신비한 왕국같은 전라감영과는 전혀 연결되지 않아 큰 놀라움을 표하였다. 조선에 전해진 자명종은 <국조보감>에 의하면 1631년(인조 9) 7월 정두원이 명나라에서 포르투갈의 신부 육약한으로부터 천문학 서적, 천리경 등과 함께 얻어왔다고 하는 데 ‘한 시간마다 스스로 울린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자명종 전래에 대한 첫 기록이다. 또 대동법 시행으로 유명한 김육이 지은 <잠곡필담>에는 김육 자신도 중국에서 자명종을 가져왔는데 효종대(1650~1659 재위) 밀양 사람 유흥발이 일본 상인이 가지고 온 자명종을 연구한 끝에 그 구조를 깨달고 직접 만든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또 현종 10년(1669)에 이민철과 송이영은 서양식 자명종의 원리와 특징을 잘 살리되 동력을 물 대신 추로 돌게 개량하여 정확한 시간을 측정하고 천체의 운행을 한 눈으로 알아볼 수 있는 조선 특유의 혼천시계를 제작하였다. 특히, 전주사람인 이민철은 나이 아홉 살 무렵에 자명종을 분해 조립해 지켜보던 이들 모두 경악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자명종이 처음 들어왔을 때, 동래 사람들이 왜인에게 태엽 감는 법을 배워 서울에 전했다. 그러나 자세하지 않아 시계가 있어도 쓸 줄 몰랐다.(중략) 내 숙부 이민철이 조용한 곳에 자명종을 들고 가 시계 축 도는 것을 응시하고는 나사를 모두 뽑아 분해했다. 보던 이들이 모두 경악했으나 이내 조립해 이전처럼 완성했다.” 이이명(1658~1722) <소재집(疎齋集)> 1723년(경종 3)에도 청나라에서 보내온 서양문진종(西洋問辰鐘)을 관상감에서 본떠 만들었다고하여 18세기부터는 관상감원들이 자명종을 제작했고 그것을 시간 측정에 이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이같이 정두원에 의해 조선으로 도입된 자명종은 단지 호기심의 대상인 신기한 기계로서가 아니라 조선 사회에서 개량, 활용되고 마침내 제작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전라감영에서 포크가 보고 놀란 시계가 조선에서 자체 생산한 시계인지 궁금하다. 그런데 1884년 6월 평안도 유생의 상소에 “또 자명종(自鳴鍾), 시표(時標:시계), 유리(琉璃) 등의 망가지기 쉬운 완호품에 대해서는 외국인이 시장에 들여오는 것을 허락하지 말도록 하소서”라는 내용이 나오고 있다. 이때는 이미 조선사회에 이들 물건이 수입되어 판매가 이뤄진 상황을 반영한 것이어서 전라감영의 시계가 과연 조선의 자체 제작품인지 수입되어 사용된 것인지는 명확치 않다. 그러나 이같은 근대 물품이 전라감영에서 적극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사실이 포크기록을 통해 명확히 확인되었다. 한편, 1879년 2월 27일자 일본 <도쿄니치니치신문>의 ‘조선의 근황’에서 “전기, 철로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 신기함을 의심하는 것 같다. ...조선인 가운데 유리 거울을 소유함은 이른바 상류층으로 하등 인민과 같은 이들은 이것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자가 많다.”라고 보도한 내용에서 유리거울은 지위 높은 자들의 새로운 문물이었다. 그런데 유리거울이 전라감사 집무공간에 2개나 있었다는 점은 전라감영이 이 같은 근대 물건과 접하는 창구이자 근대 문물의 활용처였음을 보여준다. 거울은 우리 역사에서 청동기시대이래 쓰여진 종교적 정치적 신성성을 상징한 도구였다. 이때의 거울은 동경(銅鏡)으로 구리와 합금(구리+주석, 구리+아연)을 반사체로 하여 반듯한 면을 광내어 사용하였다. 조선 후기에 유리에 광물질인 은이나 수은을 입혀 반사되도록 한 거울이 유입되면서 상류계층에서나 쓸 수 있었던 동경은 유리거울의 보급으로 많은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는 일상품이 되었다. 유리 거울은 일명 석경(石鏡) 이라고도 불렀다. 청나라 때 중국에 들어간 사신들은 베이징의 옥하관(玉河館)에 머물렀는데 바로 아라사(러시아) 사신들의 숙소와 이웃하고 있었다. 옥하관에서 사온 물품 가운데 가장 인기가 있었던 것이 바로 유리거울로, 이를 ‘어루쇠’라 했다. 지금도 거울이 어루쇠로 통하고 있는데, 그 어원을 순조28년(1828) 사행을 다녀온 기록인 『왕환일기(往還日記)』 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아라사는 중국 발음이 어라시(於羅澌 워루어스)이니,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석경(石鏡)을 어리쇠(於里衰)라고 부르는 것이 필시 아라사에서 생산되는 아주 두꺼운 유리로서 ...그러한 것이다.” <왕환일기(往還日記)>, 무자년(1828) 6월. 현재 표준어로 거울을 지칭하는 ‘어루쇠’라고 하는 말이 19세기 초반에는 ‘어리쇠’라고도 발음한 것으로 보이는데, 중국에서 들여오는 유리 거울이 대부분 러시아제인 것으로 보인다. 이같이 전라감영에서 포크는 자명종과 유리거울 등 서구 제품들이 사용되고 있는 모습을 통해 전라감영이 근대문화수용의 중심이었음을 확인하였다. /조법종(우석대 교양대 학장)

  • 기획
  • 기고
  • 2023.06.12 15:34

[지난 주 '핫클릭' : 6. 4~9] 이차전지 특화단지 새만금 지정 당위성은 '국가 균형발전'

△6월 4일~ 6월 9일 호국보훈의 달 6월 둘째 주, 전북일보 홈페이지 방문자들은 김윤정 기자의 '이차전지 특화단지 새만금 지정, 균형발전 당위성 부합'을 가장 많이 클릭했다. 이 기사는 우리나라 미래 산업을 지탱할 이차전지 산업을 선점하기 위해 전북 새만금을 비롯해 울산·경북 포항·충북 청주 오창 등이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는 가운데, 새만금이 국가 균형발전이라는 측면과 이차전지 밸류체인을 형성하는 관련 기업의 집적화 측면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점을 짚었다. 두 번째로 많이 본 기사는 이환규 기자의 '일본산 참돔이 국내산이라고?⋯군산 수산 활성화에 찬물'이다. 일본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결정으로 수산물 안전성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국립수산물품질관리원에 따르면 원산지를 속여 판매하는 행위가 여전한 것으로 드러났다. 세 번째는 육경근 기자의 '흔들리는 교권, 전북 교원단체 뿔났다'로 학교 교육력 회복을 위한 전라북도교원단체 총연합회 등 지역 교원단체의 목소리를 전했다. 이들은 "교육활동 과정에서 부득이하게 교사와 학생 간 물리적, 정서적 접촉이 수반되는 경우가 많은데, 아동학대 신고만으로 직위해제가 될 수 있다는 불안감에 교육적 방임 현상도 발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밖에 정윤성 화백의 기린대로418 '가수 영탁 없었으면 아태마스터스대회 어쩔 뻔', 박정우 기자의 '임실군, 전북도 공모 2023년 전북형 치유관광지 선정', 김선찬 기자의 '남원시, 5000세대 규모 은퇴자마을 조성한다' 등이 주목을 받았다.

  • 기획
  • 이용수
  • 2023.06.10 13:44

[이 기자의 슬기로운 보디빌딩](3) 하체운동은 선택이 아닌 필수

안 그래도 하기 싫은 운동. 그 중에서도 가장 하기 싫은 운동이 있다. 운동 선수나 일반인을 가리지 않고 공평한 고통을 안겨주는 '하체운동'이다. 하체운동은 우리 몸에서 가장 많은 근육을 차지하는 허벅지와 엉덩이 근육 등을 사용하는 만큼, 소모하는 에너지가 다른 운동과는 차원이 다르다. 하체운동을 제대로 1시간 이상 수행했다면, 처음 걸음마를 시작한 아기로 돌아간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그만큼 고통스러운 운동이지만, 그래도 해야 한다. 하체운동은 멋있는 자신의 몸매뿐만 아니라 내면의 건강까지 잡아주는 현대인의 필수 운동이기 때문이다. △ 나이들수록 감퇴하는 성 호르몬…유독 하체 근육 감소 폭 커 일반적으로 40세 이후에는 근육이 줄어들기 시작하는데 상체보다는 특히 하체 근육의 감소 폭이 크다. 따라서 70세에 이르면, 젊은 시절에 비해 하체 근육이 40%밖에 안 남는다. 사실상 한쪽 다리로만 걷는 셈이다. 노인층이 무릎 등 여러 관절염에 시달리는 이유다. 수십년 째 신체를 지탱해 온 관절을 보호하는 하체근육을 강화하기 위한 운동은 필수다. 그러기 위해선, 걷기나 계단오르기 등 유산소 운동도 중요하지만, 적절한 웨이트 운동을 함께 병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근육은 웨이트 운동을 통한 무산소 환경에서 대사했을 때 크기가 커지고 수축력이 향상되는데, 유산소 운동으론 이런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가까운 헬스장에서 빈 봉이나 가벼운 덤벨을 동반한 스쿼트나 런지 등을 통해 하체에 강한 부하를 걸어줘야 한다. 관절에 무리가지 않게 인체 역학적인 움직임을 잡아주는 헬스 머신을 활용하는 것도 좋다. △ 고통에 비례하는 확실한 효과…각종 질병 예방 하체운동은 허벅지가 타들어가는 듯한 격한 고통을 안겨주지만, 그만큼 신체 건강에 더할 나위 없이 효과적이다. 꾸준한 하체운동을 통해 강력한 허벅지 근육을 만든다면, 심부전증 등 각종 질병을 예방할 수 있다. 일본 기타사토대 의대 연구팀은 올해 유럽심장학회(ESC) 학술회는 '2023 심부전' 포럼에서 2007~2020년 급성 심근경색을 일으켜 입원한 환자 932명(평균 연령 66세, 여성 179명/남성 753명)을 평균 4.5년 동안 추적한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연구팀은 이번 연구에서 허벅지 근육인 대퇴사두근이 튼튼하면 관상동맥질환 환자의 사망 위험이 상당히 낮아진다는 것을 밝혔다. 또한, 대퇴사두근 근육량이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에 비해 심부전을 일으킬 위험이 41%나 낮았고, 대퇴사두근 근력이 증가할 때마다 심부전 위험도 11% 낮아졌다. 연구팀에 따르면, 대퇴사두근이 다리 아래쪽의 혈관을 짜줘서 심장으로 혈액 순환을 돕는 제 2의 심장 역할을 하기 때문에 심부전 예방에 긍정적 영향을 미친 것으로 밝혀졌다.

  • 기획
  • 이준서
  • 2023.06.08 17:44

[참여&공감 2023 시민기자가 뛴다] 꿀벌 실종설, 실제 상황은?

‘위잉~’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활짝 핀 꽃 주변에는 꿀벌들이 돌아다니기 바빴다. 그러나 최근에는 길에서 꿀벌 한 마리조차 보기 어려워졌다. 이런 현상은 우리 근처 뿐만 아니라 양봉농가에서도 나타나면서 점점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올해 약 208억 마리 꿀벌 사라져 꿀벌은 꿀을 모으는 과정에서 꽃가루를 암술로 옮겨 열매가 맺힐 수 있도록 돕는 '화분 매개 곤충'이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에 의하면 세계 100대 작물 중 71종이 꿀벌을 매개로 수분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꿀벌이 생태계에서 사라지면, 곤충에 의해 수정되는 식물 대다수가 번식할 수 없게 된다. 인간의 식량인 곡물, 채소, 과일 생산에 큰 타격을 주고, 인간 역시 큰 영향을 받게 된다. 국내 대규모 꿀벌 실종 사태는 지난해 1월~2월에 발생했다. 농림축산식품부에 의하면 지난해 겨울에만 국내에서 월동 중인 약 78만의 사육 꿀벌이 폐사했다고 한다. 올해 들어서는 전국 농가 1만8826곳, 112만4000개의 벌통에서 꿀벌이 사라졌다고 한다. 벌통 1개당 평균 1만 5000~2만 마리가 산다는 점을 고려하면 올해는 지난해보다 약 3배 수치인 208억 마리가 사라진 셈이다. 지역별 벌통 피해는 경북이 25만7399개로 가장 많았고, 경남은 25만4187개, 경기는 13만8780개 순으로 피해가 컸다. 울산에서 양봉농가를 운영하고 있다는 ㄱ씨는 "매년 키우던 벌통 500개 중 올해 봄에만 약 300개 벌통에 있던 벌이 모두 사라졌다"며 황당함을 표했다. 이어 그는 “30년 넘게 양봉업 일을 해왔지만, 이런 현상은 처음"이라며 "꿀벌이 사라진 원인조차 가늠할 수 없어 황당하다"라고 호소했다. 벌통의 벌들 /픽사베이 지구온난화 등으로 꿀벌이 사라지고 있다. '세계 벌의 날'을 맞은 20일 김종화 한국양봉협회 전북지회장이 자신이 운영하는 벌통을 들어 보이며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꿀벌 개체를 확인하고 있다. 오세림 기자△농가 18만 봉군 부족, 과일 수확량 20% 감소 꿀벌 실종 여파는 양봉농가뿐만 아니라 과수농가로도 향했다. 사과, 포도, 참외와 같은 국내 농작물 중 17.8%가 꿀벌 화분 매개가 없으면 생산량이 크게 하락하기 때문이다. 과수 및 채소 농가에서도 수분을 위해서는 꿀벌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꿀벌이 실종되면서 벌통 한 통을 빌리거나 구매하는 비용도 두 배 가까이 증가했다. 성주에서 참외 농사를 짓고 있는 이영배 씨(56)는 "원활한 농사를 위해 매년 이맘때쯤에는 벌을 양봉농가에서 빌려다 종종 사용했었다"며 “벌통 한 통당 원래 빌리는 가격의 두 배 이상으로 올랐지만 이마저도 빌릴 수 없는 상황"이라며 어려움을 호소했다. 현재 성주에 있는 참외농장 5만여 동 중 4만여 동 가량이 꿀벌을 이용해 수분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농림축산식품부는 지금까지의 상황을 고려했을 때 올해는 약 꿀벌 18만 봉군이 농가에 부족했던 것으로 추측했다. 꿀벌에 의한 수분이 어려워지면서 농가의 과일 수확량은 전년보다 20~30% 감소할 것으로 추측되며 농산물 인플레이션 역시 걱정해야 할 상황에 직면했다. △꿀벌응애와 기후 변화, 밀원 부족으로 꿀벌 실종 그렇다면, 꿀벌은 어디로 왜 사라지게 된 것일까? 꿀벌 실종의 첫 번째 요인으로는 '꿀벌응애'다. 꿀벌응애는 꿀벌에게 전염병을 일으켜 집단 폐사에 이르게 하는 진드기다. 그동안 양봉농가는 꿀벌응애를 방제하기 위해 기존 약재와 살충제 등 다양한 관리 방법으로 예방에 힘써왔다. 그러나 매년 똑같은 약을 되풀이해 쓰다 보니 어느 순간 꿀벌응애의 돌연변이가 생겨버렸다. 약재에 저항성이 생기게 되면서 꿀벌응애의 몸속에 있는 유전자가 변형됐고 더는 해당 약이 듣지 못하게 된 것이다. ㄱ씨는 "꿀벌은 지구에 꼭 필요한 곤충"이라며 "정부가 꿀벌응애에 대응할 수 있는 약재 개발에 힘을 써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두 번째로 대두되는 요인은 기후 변화다. 꿀벌은 보통 3월이면 월동을 마치고 봄을 맞을 준비를 한다. 그러나 지구온난화로 지구 온도가 200여 년 만에 1.09도 상승하면서 꿀벌이 동면에서 깨기 전 꽃이 피었다가 지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동면에서 깬 꿀벌들이 채집할 수 있는 꿀이 점점 부족해졌다. 세 번째 요인은 꿀벌에게 꽃가루와 꿀 등의 먹이를 주는 '밀원'이 국내에서 급격히 줄어든 것이다. 꿀벌은 아까시나무, 유채, 밤나무 등 다양한 밀원식물에서 꽃가루와 꿀을 섭취해 왔다. 특히 아까시나무는 천연 꿀을 70% 생산할 수 있어 지난 1980년대까지만 해도 32만ha 분포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양한 토지 개발 활동, 잦은 산불 및 강수 및 이상 고온 현상으로 인해 현재 3.6만ha로 감소했다. △지역 특화형 밀원수 식재 필요 그린피스 측은 사라져 버린 꿀벌을 되찾기 위해 밀원을 30만ha 정도는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국내 밀원수는 대부분 아까시나무에 집중돼 있다. 그러나 하루 기준 꿀벌이 해당 꽃을 얼마나 찾아가는지 분석한 그린피스 자료에 의하면 아까시나무는 평균 372마리, 헛개수나무는 1470마리, 쉬나무는 1575마리였다. 또, 국립산림과학원 조사 결과에 의하면 ㏊당 꿀 생산량은 헛개나무는 301㎏, 쉬나무는 259㎏, 아왜나무는 125㎏로 이들이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일각에서는 지자체가 주도적으로 지역 특화형 밀원수를 심은 후 보급한다면 해당 문제를 빠르게 타파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 추가적인 꿀벌 집단 폐사를 막기 위해서는 응애를 없애기 위한 정부의 신약 개발 노력 등이 필요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안유진 전 전북대신문 편집장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 기획
  • 기고
  • 2023.06.07 17:07

[후백제 역사, 다시 일으키다-문헌사료로 본 후백제] ⑧덕진포 해전과 나주, 광주 생용동

역사는 승자의 기록인가? 이에 대해 <역사란 무엇인가>를 쓴 E.H. 카는 “역사는 불가피하게 일종의 성공담이라 할 수 있다”고 대답한다. 그렇다. 후삼국 역사 역시 철저한 승자의 성공담이다. 특히 견훤왕과 왕건이 서남해안 장악을 위해 영산강을 둘러싸고 벌이는 전투는 역사가 승자의 기록임을 여실히 웅변해 준다. 가는 곳마다 승자인 왕건을 칭송하는 지명으로 도배돼 있음이 그것을 증명한다. 몽탄강, 파군교, 주룡나루, 용봉마을, 왕자봉 등등. 무진주(광주)에서 900년 전주로 옮겨, 도읍을 정한 견훤왕은 국가체계가 어느 정도 안정되자 영산강 유역과 서남해안 공략에 나선다. 이곳은 뱃길로 중국·일본 등과 바로 통하는 대외교류의 창구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중심도시 나주는 인근 물산이 모이는 경제적 요충지였다. 영산강 일대 제해권을 둘러싼 물고 물리는 공방전은 909년부터 914년까지 6년에 걸쳐 8차례 벌어진다. 당시 영산강 일대는 1981년 영산강하구둑을 막기 전까지 바닷물이 내륙 깊숙이 들어왔다. 내해(內海) 또는 만(灣)을 이룬 것이다. 일행은 광주 한국학호남학진흥원에서 박해현 교수(초당대)를 만나 나주로 향했다. 나주에서는 박경중 전 나주문화원장(77) 등이 기다리고 있었다. 박 원장은 자신이 자란 용봉마을로 우리를 안내했다. 이들은 용봉마을이 견훤왕의 군대와 왕건의 군대가 마지막 격돌했던 장소라고 소개했다. 이 마을은 지금 광주시 광산구 용봉동이 되었지만 예전에는 나주군 관할이었다. 견훤왕은 광주 쪽에서 내려오고 왕건은 나주 쪽에서 올라와 승촌보 일대에서 전투가 벌어졌다는 것이다. 용봉마을 앞 왕자봉에는 왕건의 군대가, 영산강을 사이에 두고 멀리 보이는 견훤봉에는 견훤왕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고 한다. 박 원장은 “그 앞 들판을 견훤뜰로 불렀는데 싸움이 치열해 시체가 산을 이루고(積屍如山), 핏물이 한 달을 흘렀다”고 들려준다. 이에 대해 박 교수는 “912∼913년쯤일 것”이라고 거든다. 여기서 용봉마을의 용은 왕건을 가리킨다. 일행은 용봉마을 얘기를 뒤로하고 덕진포해전이 벌어졌던 영암군 덕진면으로 향했다. 나주를 중심으로 한 서남해안은 후백제의 뒷마당에 해당한다. 후백제 입장에서 이곳을 점령하지 못하면 목 뒤에 비수를 든 적을 두고 있는 셈이다. 덕진포 해전은 909년 1차, 912년 2차에 걸쳐 일어났으며 1차 해전은 견훤왕과 왕건이, 2차 해전은 견훤왕과 궁예왕이 붙은 싸움이다. 1차 덕진포 해전을 위해 견훤왕은 직접 선단(船團)을 이끌고 서해를 거쳐 영산강 내해로 진입했고 무주 성주 지훤은 육군을 이끌고 참전했다. 수륙병진정책을 전개한 것이다. 견훤왕은 서남해 부속도서를 먼저 점령한 후 영산강 하구를 거쳐 내해로 진입했다. 이러한 소식을 접한 궁예왕은 바다를 잘 아는 왕건을 나주지역으로 파견했다. 당시 왕건 가문은 송악과 그 일대 서해안의 해상세력을 장악하고 부를 축적한 호족이었다. 왕건은 서해를 따라 내려오다 염해현(鹽海縣 지금의 무안군 해제면 임수리 부근)에서 진용을 정비했다. 이곳에서 후백제군과 교전을 하지 않고 염탐활동을 하다 견훤왕이 중국 오월국으로 보내는 국서를 휴대한 선박을 붙잡아 마진으로 돌아갔다. 내친김에 궁예는 왕건에게 2500여 군사를 주어 다시 내려보냈다. 왕건은 진도와 고이도를 점령한 후 영산 내해로 진입했다. 그때 이미 후백제군은 목포(지금의 나주 영산포)와 반남현 석해포, 그리고 주력부대가 포진한 덕진포 등 3곳에 배치돼 있었다. “견훤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전함들을 포진시켜 목포에서 덕진포에 이르기까지 전함이 서로 종횡으로 연결되고, 바다와 육지에 군사의 세력이 심히 강성하였다. 그것을 보고 우리 장수들은 근심하는 빛이 있었다. 태조는 ‘근심하지 말라’ 며 (중략) 급히 공격하니 적선들이 조금 퇴각하였다. 이에 바람의 흐름을 타서 불을 놓으니 적들이 불에 타고 물에 빠져 죽는 자가 태반이었다. (중략) 견훤은 작은 배(小舸)를 타고 도망했다.”(<고려사> 권1) 우세했던 후백제군은 <고려사>에서 기술하듯 적벽대전과 같은 화공작전에 걸려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 <고려사>의 내용은 사실일 수 있으나 승자인 당당한 왕건과 초라한 견훤을 대비시키고 있어 작위적 느낌도 없지 않다. 몽탄지역에 내려오는 설화 역시 왕건 편이다. 몽탄은 지금의 무안군 몽탄면과 나주시 동강면 사이를 연결하는 나루다. 설화에 따르면 왕건이 견훤과 싸우다 영산강의 한 구간인 몽탄강(夢灘江) 부근에서 포위되었다고 한다. 그날 밤 꿈에 신이 나타나 강물이 빠졌으니 피하라고 해서 허겁지겁 도망해 살았다는 것이다. 이후 왕건은 자신을 추격하는 후백제군을 파군천(破軍川)에서 격파했다. 1차 덕진포 해전 이후 후백제군은 석해포-성주산-자미산성으로 이어지는 방어선을 구축했다. 다음 해인 910년, 견훤왕은 패전의 치욕을 씻기 위해 나주성을 공격했다. 여기서 나주성은 후대에 축성된 나주읍성이 아니라 금성산성으로 추정된다. 나주성을 10여일 동안 맹렬히 공격하자 궁예는 수군을 보내 후백제군의 배후를 기습했다. 또다시 후백제군은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후백제군이 열세에 몰린 것은 오다련 등 서남해 호족세력을 끌어안지 못한 게 원인이 아닐까 한다. 이후에도 영산강을 둘러싼 공방전은 계속되다 912년 제2차 덕진포해전이 일어난다. 견훤왕은 나주와 서남해안을 잃음으로써 항상 뒷마당이 불안했다. 912년 다시금 군사를 일으켜 덕진포에서 격돌하게 된다. 이번에는 궁예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내려왔다. 이에 대한 기록은 자세하지 않으나 결국 후백제는 영산강 일대를 내주고 만다. 또 914년에는 견훤왕이 군소 호족세력을 포섭해 반기를 들도록 하자 궁예왕는 다시 왕건에게 3000명의 병력을 주어 평정케 한다. 이후 후백제는 15년이 지난 929년에야 서남해 일대를 차지했다. 1차와 2차 덕진포해전에서 사용한 후백제 배는 재목이 울창했던 부안 검모포에서 만든 것으로 보인다. 덕진포는 지금 조그만 하천에 불과하지만 예전에는 월출산에서 내려온 물이 모이는 등 마한 백제 때 꽤 큰 항구였다고 한다. 김한남(76) 영암문화원장은 “이곳은 해남 등 남해안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길목으로 사람의 왕래가 잦았다”며 “다리가 없어 불편했는데 통일신라 말(후백제)에 강변에서 주막을 하는 덕진이라는 여인 덕분에 다리가 놓아졌다”는 설화를 소개한다. 그러면서 이곳에서 1.5㎞ 떨어진 곳에 장보고가 태어난 선암마을이 있다고 알려준다. 일행은 견훤왕의 군대가 주둔해 있었다는 나주시 반남면 자미산성을 들른 뒤, 광주시 북구 생용동으로 향했다. 이곳은 순천만과 광양일대에서 거병하여 여수, 고흥. 곡성, 구례 등 전남 동부지역을 장악한 후 오늘의 광주인 무진주로 호응을 받으며 입성한 곳이다. 892년 처음 자리를 잡아 세력을 키우다가 나중에 무진고성 옆 시가지로 치소를 옮긴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유사>에 실린 ‘광주 북촌’의 지렁이 설화를 근거로 이곳이 견훤왕의 탄생지라는 주장도 있으나 다수 학자들은 혼인설화가 탄생설화로 바뀐 것으로 보고 있다. 견훤왕이 이곳에서 건국의 기초를 다지며 토착 호족세력과 혼인관계를 맺었다는 해석이다. 이와 관련해 동행한 송화섭 교수는 “지렁이 설화는 동서고금을 통해 찾아보기 힘들다”면서 “당초 용자(龍子)설화를 패배자인 견훤왕을 비하하기 위해 변이시킨 것”이라고 주장한다. ‘용이 태어난 동네’라는 생용동에는 용(龍)자가 들어간 지명이 10개가 넘는다. 구룡(九龍) 생룡(生龍) 복룡(伏龍) 오룡(五龍) 신용(辛龍) 청룡(靑龍) 용강(龍江) 용두(龍頭) 용산(龍山) 용전(龍田) 등이 그러하다. 생용마을 뒤, 죽취봉(竹翠峰) 쪽으로 가파른 구릉을 따라가면 토축으로 쌓은 성터 흔적이 나온다. 예부터 견훤대 또는 후백제성이라 불렸다고 한다. 이곳은 광주 시가지에서 보면 산들로 가려 있어 은거하기에 좋은 곳이다. 금성 범씨(范氏) 25대 손으로 대대로 이곳에서 살아온 범희인(87)씨는 “성안에는 견훤왕이 군사를 훈련시킨 조련대, 공부를 가르친 서당골, 잘못하면 감옥에 가둔 옥도골 등 당시 명칭이 지금도 전해 온다”고 들려준다. 만일 견훤왕이 성공한 군주였다면 이곳은 역사적 명소로 가꾸어졌으리라. 끝으로 찾은 곳은 광주의 상징인 무등산에 자리한 무진고성. 이 성은 광주시 산수동 오거리에서 원효사 쪽으로 구불구불한 도로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잣고개’라는 산등성이에 자리하고 있다. 잣고개는 ‘성이 있는 고개(城峙)’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 고개 양편으로 길게 쌓아 올린 성벽이 마치 새의 양날개처럼 날렵하게 복원돼 있다. 남북 1㎞, 동서 500m의 장타원형으로 축조된 포곡식 산성이다. 둘레는 3.5㎞다. 박 교수는 “광주제일고 생활관 신축과정에서 1994년 나온 누문동(樓門洞) 및 무진고성 유물로 보아 후백제 치소성으로 보기는 부담스럽다”며 “피난성일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전체적으로 광주·전남의 후삼국 당시 지역별 분포를 보면 광주와 나주 및 서남해안은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광주를 비롯한 영산강 상류지역의 호족들은 견훤왕을 지지해 끝까지 견훤왕과 운명을 같이했다. 반면 나주와 영산강 중하류의 호족들은 왕건을 지지해 고려를 탄생시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조상진 논설고문

  • 기획
  • 조상진
  • 2023.06.06 17:16

손순욱 전북동부보훈지청장, “보훈문화, 우리 사회 핵심 가치로 뿌리내릴 수 있게 최선”

손순욱 전북동부보훈지청장(54)은 취임 후 국가유공자와 참전유공자 등의 헌신을 지역민에게 알리는데 분주한 나날을 보내왔다. 특히 올해는 국가보훈처가 국가보훈부로 승격하는 해로 그간 부족했던 나라를 위해 헌신하신 분들에 대한 다양한 정책들이 한 단계 도약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호국 보훈의 달을 맞아 손 지청장을 만나 부처 승격이 갖는 의미와 다양한 도내 보훈 서비스 내용을 들어봤다. -1월 30일 지청장으로 부임하셨습니다. 소회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전북지역은 의병활동의 본거지로 독립운동의 구심점이자, 영화 ‘고지전’의 모티브인 강원도 화천 425고지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호국영웅 김한준 대위,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민주화운동 주역 김주열 열사의 출신지로, 전북동부보훈지청장으로 부임하게 되어 매우 뜻깊게 생각하며 동시에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전북의 숭고한 보훈정신을 계승하고 확산하며, 보훈가족들의 삶의 질을 제고해 궁극적으로 일류보훈을 실현할 수 있도록 만전을 기하겠습니다.” -동부, 서부로 나뉘니까 조금 생소한데요. 전북동부보훈지청은 어느 지역을 관할 하십니까. “전북동부보훈지청은 전라북도의 14개 시·군 가운데 전주, 완주, 임실, 순창, 남원, 무주, 진안, 장수 등 전북 동부지역 8개 시군을 관할하고 있습니다. 전북에 소재하고 있는 3만여 명의 보훈가족 중 1만 5643가구를 맡아 지역 내의 유공자와 그 유족의 영예로운 삶을 위해 보상금 지급과 더불어 의료 및 복지서비스를 지원하고, 국민들에게 국가유공자의 숭고한 희생과 헌신을 알리고자 다양한 보훈 체험프로그램 및 기념행사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6월 5일 국가보훈처가 국가보훈부로 승격됩니다. 부 승격이 갖는 의미는 무엇이 있을까요? “보훈은 국가 발전의 정신적 기반을 만드는 핵심 기능이라고 생각합니다. 수많은 내·외부의 변화 속에서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지역과 세대를 초월해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데 기여하고 경제·안보 등 공동체의 위기를 극복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처(處)인 국가보훈처는 1961년 출범이래 장관급과 차관급을 반복하면서 부침이 있었고 그로 인해 국가유공자를 소홀히 한다는 인식이 제기돼 왔습니다. 2022년도 9월에 실시된 국민 여론조사 결과 국민의 61%가 보훈처의 위상을 격상해야 한다는 조사가 나왔습니다. 이처럼 보훈가족을 비롯한 국민들이 국가보훈부 승격을 적극 지지함에 따라 지난 3월 2일 보훈가족들의 숙원이었던 국가보훈부 승격을 담은 정부조직법이 공포되었으며 국가보훈처는 3개월의 준비 기간을 거쳐 오늘 국가보훈부로 새롭게 출범하게 되었습니다." -부 승격만큼 국가보훈부의 어깨도 무거워 질것 같습니다. "앞으로 국가보훈부는 높아지는 위상에 걸맞게 보훈정책을 한 단계 더 격상하고 국가를 위해 희생하신 영웅들을 최고로 예우하고 존중하며 기억하는 일류 보훈문화를 조성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보훈부로 승격하게 된 만큼 전북동부보훈지청도 더욱 바빠질 것 같습니다. 올해 어떤 사업을 추진하실 계획인가요? “올해 2023년 국가보훈부 승격의 원년을 맞아 품격 있는 예우, 국민적 공감을 이끌어내는 보훈문화 확산에 중점을 두고 다양한 사업을 추진할 예정입니다. 먼저 오늘 국가보훈부 승격을 맞이해 대통령 명의 증서 및 국가보훈등록증 제1호 전수식을 개최하며 이어서 7일 전주 한벽문화관에서 국가보훈부 승격을 축하하는 보훈가족을 위한 콘서트를 개최합니다. 6월 말에는 지역의 특색을 살려 전주대사습놀이 장원 등 무형문화재 예능자들과 우리 고유의 무용과 국악 등 전통문화를 통해 호국 정신을 표현하는 호국문화제를, 11월경에는 우석대 태권도학과와 함께 전북지역 의병활동을 중심으로 독립운동가들의 숭고한 정신을 경쾌한 태권도 액션과 함께 즐길 수 있는 독립문화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특히 정전 70주년을 맞아 참전용사에 대한 국민적 존경과 감사를 표명하고 국가안보를 위해 헌신하신 분들을 존중하고 예우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하고자 ‘제복의 영웅들’ 사업을 추진, 생존 6‧25참전유공자 전원에게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담아 새로운 제복을 지급합니다. 전북은 2395명이 해당되며 이번 6·25기념식에서 각급 기관장들이 직접 예우를 갖춰 유공자분들에게 제복을 입혀드릴 예정입니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입니다. 특별히 준비하고 계신 것이 있다면? “정부에서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순국선열과 호국영령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현충일, 6·25전쟁일, 제2연평해전과 같이 우리나라의 호국보훈 역사를 되새길 수 있는 중요한 날들이 포함된 6월을 호국보훈의 달로 지정하고 있으며 현충일 추념식, 6·25전쟁 기념식, 위문 등으로 국가유공자와 그 유족의 영예와 자긍심을 고취하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명복을 빌며 숭고한 호국 정신을 계승 발전하고자 힘쓰고 있습니다. 전북동부보훈지청에서는 올해 ‘위대한 헌신 영원히 가슴에’를 슬로건으로 국민들이 조국을 위해 빛나는 청춘을 바친 참전용사들의 숭고한 헌신을 기억하고 함께 기릴 수 있도록 다채로운 기념행사를 추진할 예정입니다. 먼저 제49회 전북보훈대상 시상식과 모범국가유공자 포상을 비롯해 6·25사진전시회 및 호국영령 합동추모제, 전주대사습놀이 장원들이 펼치는 호국문화제, 나라사랑 야외음악회, 제35사단과 함께하는 보훈가족 위안행사, 전북현대모터스와 함께 시축, 만찬 등을 제공하는 6·25참전유공자 초청 행사 등이 진행할 예정입니다.” -끝으로 전북도민께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음수사원(飮水思源)이란 말이 있습니다. ‘물을 마실 때는 그 물이 어디서 왔는지 근원을 생각하라’는 뜻으로 근본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평화로운 일상은 수많은 애국선열들의 희생과 헌신으로 잉태했음을 잊지 말고 그 숭고한 뜻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호국보훈의 달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새롭게 태어난 국가보훈부, 그리고 전북동부보훈지청은 국정과제 ‘국가가 끝까지 책임지는 일류보훈, 국가와 국민을 위해 희생한 분을 존중하고 기억하는 나라’를 달성하기 위해 국민과 보훈가족이 체감할 수 있는 확실한 변화를 추진, 국민통합에 기여하고 보훈문화가 우리 사회의 핵심 가치로 뿌리내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손순욱 전북동부보훈지청장은 경남 함양 출신인 손 지청장은 지난 1989년 마산, 진주보훈지청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국가보훈처 나라사랑정책과·운영지원과, 국립대전현충원 관리과장, 국립산청호국원장 등을 두루 걸친 보훈 행정 전문가다. 그의 다양한 업무 경험과 보훈 행정 경력은 전북동부보훈지청 관할 내 1만 5643 보훈가족 가구들이 보다 나은 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됐다는 평가다. 특히 손 지청장은 보훈은 대한민국의 정체성인 만큼 많은 분들의 관심을 당부하기도 했다. 손 지청장은 “보훈은 대한민국을 지키는 건강이자 정체성이다”며 “국가에서도 국가유공자부들을 위한 지원을 노력하고 있으나 지역 공동체도 함께 노력했을 때보다 건강한 보훈을 만들 수 있을 것으로 생각, 보다 많은 분들이 보훈에 대해 관심을 가져주시길 당부드린다”고 말했다.

  • 기획
  • 엄승현
  • 2023.06.04 19:12

[전북 가담항설](5) 전북경찰 75명 vs 빨치산 2500명 '격전'

호국‧보훈의 달인 6월 1일, 낮 12시쯤 정읍시에 있는 칠보수력발전소를 찾았다. 뜨거운 햇살이 발전소의 면면을 화사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흔히 칠보발전소라고 불리는 이곳은 1945년 첫 발전을 시작한 남한 최초의 ‘유역 변경식 수력발전소’다. 이날 발전소 뒷산에 오르자 15m에 육박하는 거대한 탑이 그 위용을 뽐냈다. 인근 정자에서 휴식을 취하던 마을 노인들에게 탑의 유래를 물었다. 탑의 정체는 오래전, 발전소를 지키다 전사한 사람들의 넋을 기리는 충혼탑이었다. 칠보면의 역사와 함께한 이들에게 칠보발전소는 단순 송전 시설을 넘어 그 이상의 의미를 간직한 장소였다. 한적한 시골에 고즈넉이 자리한 이 오래된 발전소가 과거 6.25전쟁 당시 전황의 운명이 걸린 결정적인 전투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이다. △ 남한 전력 끊고자 칠보발전소 포위한 빨치산 북한의 남침으로 개전한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월, 대한민국은 최대 위기에 놓여 있었다. 전방의 국군과 유엔군은 100만 중공군에 밀려 수도 서울을 다시 내주는 등 후퇴를 거듭했고, 후방에선 공산주의 비정규군인 일명 '빨치산'이 군경을 교란하며 주요 국가 시설을 탈취하려고 했다. 그 중에서도 빨치산이 우선적으로 노렸던 것은 정읍 칠보발전소였다. 당시 칠보발전소는 전라도뿐만 아니라 충청도와 경상도 일대의 전력 공급을 책임지는 국가 1급 시설이었다. 이곳이 마비되면, 남한 지역은 전력 공급이 완전히 끊긴 채 어둠 속에서 적군에 맞서야 할 형국이었다. 1951년 1월 10일, 빨치산 전북도당은 2500여 명의 대부대를 총동원, 칠보발전소를 겹겹이 포위하기 시작했다. 당시 칠보발전소를 지키는 병력은 45명의 경비부대가 전부였다. 신속한 병력 지원이 없으면 칠보발전소가 빨치산의 수중으로 넘어갈 위급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전방의 국군은 물밑 듯이 쏟아지는 중공군을 막느라 지원 병력을 차출할 여력이 없었다. 위기에 처한 칠보발전소를 구할 부대는 전북 경찰뿐이었다. 결국 차일혁 경무관(당시 총경)이 지휘하는 제18전투경찰대대 105명만이 급히 소집돼 칠보발전소 탈환 작전에 나서게 됐다. 이마저도 피난민을 지원하느라 이동 차량이 없어 30명의 대원을 두고 갈 수밖에 없었다. △ “1대 30” 극적인 칠보발전소 탈환 이제 2500명에 달하는 빨치산과 맞서 싸울 경찰 병력은 75명으로 줄어들었다. 칠보발전소를 구하기 위해선 1명의 경찰이 30명의 적군을 상대해야 했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차일혁 경무관은 기지를 발휘했다. 발전소로 향하는 경사진 모퉁이 길을 이용해 일종의 기만전술을 쓰기로 한 것이다. 차 경무관은 4대의 차량을 빨치산들이 잘 보이지 않는 구부러진 곳에 세운 뒤, 1대씩 전조등을 켠 채 출발시켜 수십 차례 순회했다. 이를 본 빨치산은 경찰이 많은 병력을 동원한 것으로 오인해 포위를 풀고 발전소 내부로 후퇴했다. 이 틈을 노린 차 경무관은 부대를 이끌고 인근 칠보지서에 진입, 고립된 칠보면민을 구출했다. 차 경무관의 기만전술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구출한 면민들을 나뭇가지와 풀로 위장한 채 칠보초교로 모이게 했고, 그 방면으로 적이 병력을 분산시키도록 유도했다. 그리곤 박격포를 앞세워 발전소 정문으로 기습 돌격, 칠보발전소와 인근 9개 능선 고지를 모두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기쁨도 잠시, 대병력이 온 줄 알았던 빨치산은 경찰 병력이 극소수라는 점을 알게 되자, 발전소를 향해 총공세를 감행했다. 이때 차일혁 부대는 탄환이 떨어져 전멸 직전에 몰렸지만, 죽음을 각오한 몇몇 대원이 적진 한가운데를 돌파해 실탄을 보급하는 등 분전 끝에 발전소를 사수해냈다. 이날 전투로 사살한 빨치산이 68명에 노획한 군수 물자는 셀 수 없을 정도였다. 반면 아군은 12명이 희생됐다. 75명이 2500명을 격퇴한 역사적으로 보기 드문 승리였다. 그러나 빨치산은 엄연히 정규군이 아닌 비정규군이므로, 이들에 맞선 전북 경찰의 노력은 전방에서의 굵직한 전투에 밀려 오늘날 세간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다. 이에 대해 전북 군경전몰유족회 관계자는 "전방의 국군을 대신해 수많은 지역 경찰과 학도병이 후방의 빨치산에 맞서 지역 사회를 지켰다"며 "이들의 숭고한 정신에 대해 정부와 지자체가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 사람들에게 널리 알릴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 기획
  • 이준서
  • 2023.06.04 16:25

[한국전쟁 정전 70년] 남아있는 상처 드러나지 않은 상흔

“6.25때 내가 16~17살이었는데, 밤에 금상동 마을 주민들을 동원해서 구덩이를 팠어. 구덩이를 판 자리가 구세군 교회(소리개재, 전주 동부지역) 뒤편이야. 밤에 횃불을 붙이고 했지.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죽였는데, 죽인후 기름을 붓고 불을 질렀어⋯”(백모씨∙88, 전주시 덕진구 산정동) 박모씨(86·전주시 완산구 효자동)는 한국전쟁 당시 작은아버지가 전주경찰서에 수감돼 있었지만 전쟁 발발후 어딘가 끌려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시신을 찾기 위해 아버지와 누이가 효자동 황방산 일대를 찾아다녔다고 한다. 그 이후 황방산 일대로 소풍을 오면 고구마 두둑 형태를 이루는 것이 많았는데, 그것이 유해를 매장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증언했다. -'전주지역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유해발굴 보고서 발췌(2021, 전주시, 전주대학교박물관)' 6.25전쟁 발발 전후를 즈음해 한강이남 형무소들에서는 대규모 수용자 학살사건이 벌어졌다. 비교적 후방으로 평가받는 호남지역에서도 그 아픔은 존재했다. 그리고 정전 70년을 맞이했지만 상흔들은 여전히 치유되지 못하고 있다. 전쟁 당시 이념 충돌의 희생양은 바로 민간인들이었다. 전북지역에서는 당시 형무소에 수용중인 민간인들의 학살이 군경에 의해 자행됐는데, 대표적인 곳이 바로 전주형무소와 군산형무소였다. 진실화해위원회는 2010년 조사보고서에서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7월 경 전주형무소 재소자들이 7사단 3연대 군인들에 의해 학살당했다고 밝혔다. 희생규모를 추정할 수는 없지만 70여명의 희생자 신원을 확인했다. 이들이 끌려가 학살당한 장소가 당시 전주시 진북동에 있던 전주형무소(현재 평화동으로 이전)에서 약 6㎞ 떨어진 황방산이다. 전주형무소 재소자 중에는 여순사건 관련자들도 많았다고 한다. 전주형무소에는 민간인들이 많이 수감됐었다는 것이 피해가족들의 증언이었다. 이념차이로 우익인사가 희생되기도 했다. 앞서 2009년 진실화해위원회는 조사보고서에서 "1950. 9. 26~9. 27 양일간 전주형무소에서 인민군 102경비연대, 전주형무소장 이하 간수, 내무서원, 지방좌익에 의해 ‘반동분자’로 규정된 우익인사가 1000여 명 이상 희생된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전주시 3차에 걸쳐 희생자 유해발굴, 44개체 확인 2020년 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을 앞둔 2019년 전주시 주도로 전주지역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에 대한 전주시와 전주대학교의 유해발굴이 시작됐고, 희생자 44개체(치아기준)가 발굴돼 안치됐다. 먼저 2019년 전주시 효자동 황방산 및 산정동 소리개재에 대해 사전 조사가 진행됐다. 두 지역에 대한 시굴조사 결과 전주시 효자동 황방산(효자동 3가 산 195-1번지)에서 유해 매장 추정지가 확인돼 발굴조사로 전환됐다. 산정동 소리개재에 대해서는 두 차례 조사가 이뤄졌지만 현재까지 유해 매장 추정지를 확인할 수 없는 상태다. 현재 황방산 일대 위주로 3차 조사가 진행중이다. 황방산 발굴조사 결과 유해 매장지는 3열의 구덩이 형태로 확인됐다. 구덩이는 모두 남-북 방향을 하고 있으며, 등고선이 나란하게 조성되어 있고 기다란 구덩이를 파서 학살 후 매장한 것으로 판단된다는 것이 조사단의 설명이다. 조사단은 전주지역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유해발굴조사보고서(2021년)에서 "이러한 것은 전쟁 전후에 계획적으로 학살을 진행하였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판단된다"고 설명했다. 학살의 주체가 탄약류에 의해서 구분이 가능하다고 했는데, 탄약류는 칼빈소총 탄피, M1소총 탄피, 탄두 및 철제편 등이 출토됐다. 이러한 출토품은 그 당시 군인 혹은 경찰이 착용하는 무기체계와 일치하고 무기체계의 일치는 학살의 가해자가 그 당시 군인과 경찰 등 정부에 의해 자행된 것을 보여주는 증거라는 것이 조사단의 설명이었다. 치아를 분석한 결과 마모도에 의해 당시 희생자들은 29~35세 정도로 추정된다고도 했다. 이윽고 1년 넘은 발굴 조사결과 2021년 5월 18일 전주시와 전주대학교는 "군경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된 전주지역 민간인들의 유해와 유품이 발굴됐다"며 "유해 44개체를 발견했다"고 공식 밝혔다. 특히 유품에 대한 보존처리 결과 탄두나 탄피에 인골편(사람의 뼛조각)이 흡착된 것으로 나타나 당시 민간인들이 잔인하게 희생됐음을 엿보게 했다고도 덧붙였다. 전주대학교 박물관 박현수 학예연구실장은 “유해 출토 양상이 이전 조사와 유사하고 대퇴골, 두개골, 상완골 순으로 수습됐으나, 전반적으로 유실된 부위가 많고 잔존 부위 보존상태도 열악해 절반 이상의 유해가 부위 판별이 어려운 실정”이라고 말했다. 보고서는 "전주지역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유해발굴을 통해 희생자와 유가족에게 깊은 애도를 전하며, 조사과정 및 보고서 작성 등 모든 과정에서도 마음 깊이 희생자가 영면하길 기원한다"고 밝힌 뒤 "향후 지속적인 유해발굴 및 추모사업에 대한 관심과 예산지원이 필요하며, 유해발굴 및 추모사업을 통해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에 대한 영면 및 유가족에 대한 위로가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발굴만 이뤄지지 않았다. 전주시는 1차 유해발굴 조사에서 나온 두개골과 치아, 다리뼈 일부 등 유해 34개체와 M1 소총, 권총 탄피, 벨트 등 129건을, 2차에서 추가로 발굴된 유해 10개체와 유품 84점 등 2020년과 2021년 두차례에 걸쳐 세종시 추모의 집에 안치했다. 이어 전주시는 2023년 4월 13일 다시 황방산 일대에 대한 발굴작업을 위한 개토제를 시작했다. 작업은 오는 7월까지 이어지며, 발굴된 유해는 감식작업을 거친 뒤 세종추모의 집에 안치될 예정이다. 전주시 관계자는 "아픈 과거사를 정리하고 희생자와 유족의 명예를 회복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라면서 "유해 발굴을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겠다"고 말했다. △희생자 잊지 않기 위한 전시회도 개최 전주대학교박물관(관장 김건우)은 지난 2020년 10월부터 11월까지 문화체육관광부 주최, (사)한국대학박물관협회 주관으로 2020년 대학박물관 진흥지원사업의 일환인 한국전쟁 70주년 특별전 '70년의 기억, 그리고 전쟁이 남긴 아픔 그리고 화해'라는 주제로 전시회를 가졌다. 당시 전시는 한국전쟁 70년이 되는 해 우리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가는 전쟁의 참혹한 현실과 슬픔을 어루만지고 좌·우의 대립이 아닌 과거에 대한 반성과 화해의 방법을 제시하고자 기획됐다. 전시에서는 2019년부터 전주시의 협조로 발굴조사 중인 전주 민간인 희생자의 유품으로 발견된 허리벨트, 고무줄, 단추 등 그 당시 사회상을 반영하는 각종 유품을 최초로 소개하면서 관람객들의 공감을 이끌었다. 전시유품인 허리벨트에는 올림픽 오륜기와 복싱, 그리고 영문으로 ‘KOREA’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는 것을 ‘X-Ray’촬영으로 확인, 유품과 관련된 민간인 희생자가 누구였는지 깊은 관심을 유발했다. 이외 ‘춘’ 또는 ‘大工’으로 추정되는 글씨가 새겨진 허리벨트 1점도 큰 관심을 받았다. △땅속에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군산형무소 희생자들 유해발굴과 안치까지 이뤄지고 전시회까지 개최된 전주와 달리 군산의 사정은 확연히 다르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보고서에 군산형무소는 전쟁 당시 900~1000여 명을 수용하고 있었는데 전쟁 직후 일반 수용자는 석방하고, 중형을 받은 수형자는 타 형무소로 이송했다고 하는데 좌익사범의 처리는 역시 기록되지 않았다. 간수들의 증언에 따르면 좌익사범들은 군산비행장에서 헌병과 경찰에 의해 학살당했다고 한다. 진실화해위원회에서는 피학살자 유족들의 진상규명 건의 중 9건을 확인했다. 특히 현재 군산비행장의 경우 미군 38전투비행단이 사용하고 있어 발굴 시도조차 힘든 상황이다. 구체적인 내용으로 '한국 교정사'에 따르면 군산형무소는 군산시 금광동에 위치했으며 1950년 7월 16일 일반 수형자는 일시 석방되고 중범수형자는 광주형무소로 이송됐다가 다시 대구형무소로 이송됐다. 교정사에는 한국전쟁 발발 후 소위 좌익사범들을 어떻게 했는지 기록돼 있지 않다. 다만 전쟁 수복 때부터 군산형무소에 근수했던 간수 진술에는 "10년 이상 징역형, 무기형, 사형을 받은 좌익사범들은 군산비행장에서 헌병과 경찰에 의해 처형됐다"는 내용이 있었다. 상당수가 여순사건 발생후 검거돼 군산형무소에 수감중인 이들이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 기획
  • 백세종
  • 2023.06.04 13:48

[도시의 시간, 성장동력을 만들다] ① 쇠퇴하는 오래된 도시, 재생의 가치를 주목하라

소멸 위기에 놓인 지방 도시들 대한민국의 지방 도시들이 사라진다. 2021년 7월, 감사원이 발표한 ‘인구구조변화 대응 실태’ 보고서에 따른 예측이다. 2017년 기준 대한민국 인구는 5,132만 명. 100년 전인 1917년 인구 1,697만 명(조선총독부의 통계연보)의 3배가 넘지만 우리나라 인구는 줄곧 감소하는 추세에 있다. 100년 후인 2117년에 우리나라 인구가 1,510만 명으로 급감한다는 분석도 있다. 감소세도 그렇지만 더 충격적인 것은 인구 감소에 따라 소멸할 위기에 처한 도시들의 숫자다. 이 보고서는 우리나라 시군구들이 30년 후부터 소멸위험 단계에 진입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전국 229개 시·군·구 중 2047년에는 157개, 2067년 216개, 2117년 221개가 ‘소멸 고위험지역’에 몰려 있다. ‘지방소멸위험지수’를 적용한 분석이다. ‘지방소멸위험지수’는 ‘한 지역의 20~39세 여성인구를 65세 이상 인구로 나눈 값’이다. 이 지수가 0.5 이하면 인구소멸위험 지역으로 분류한다. 이 지수를 적용하면 인구가 몰려 있는 서울조차도 100년 뒤에는 인구수가 지금의 30%에도 못 미친다는 전망이 있고, 부산 대구 광주 대전을 비롯한 대도시의 상황도 다르지 않으니 지방 중소도시들의 상황은 말할 것도 없다.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의 오래된 도시들은 대부분 성장을 멈추어 이미 쇠퇴의 길에 들어선 지 오래다. 쇠퇴에 놓인 그 도시들이 이제 인구 감소로 소멸의 위기에까지 몰리고 있는 현실은 안타깝다. 도시재생으로 쇠퇴하는 도시를 구하라 그렇다면 소멸위기에 놓인 도시들을 쇠퇴하는 환경에서 구할 수는 없을까. 정부가 모색한 해법이 있다. 이른바 도시재생 사업이다. 200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도시 재생은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 정부를 거치면서 추진되어온 지속사업이다. 도시재생 정책이 본격적으로 부상한 것은 이명박 정부 시절이다. 당시, 재개발을 전면에 내세운 이명박 정부의 '도시재생' 정책은 부산이 진원지였다. 뉴타운 공약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된 '뉴타운돌이(?)'들이 사업 추진이 어렵게되자 2011년부터 국토해양부와 주거니 받거니 하며 새로운 정책을 만들기 시작했다. 일명 '커뮤니티 뉴딜'이다. 뉴타운 사업은 물 건너갔으니 마을만들기사업을 뉴딜사업처럼 하자는 전략이었다. 이 사업을 지원하는 특별법 제정까지 추진됐다. 특별회계를 만들어 쓰기 위한 목적이었다. 특별법 제정은 무산됐지만, 이명박 정부 후기에 도시재생이 큰 이슈로 등장했던 배경이다. 물론 이들이 추진했던 재생의 바탕은 '재개발'이었다. 보다 적극적으로 도시재생 사업이 추진된 것은 문재인 정부 때다. 문재인 정부는 출범 직후 ‘도시재생 뉴딜정책’을 발표하고 2018년부터 실행에 나섰다. 5년 동안 해마다 10조 원씩 50조 원을 투자하는 도시재생 뉴딜정책의 목표는 전국 500개 지역을 재생시키는 것. 전면개발 대신 도시재생으로 지역의 경쟁력을 확보하는 것은 문재인 정부의 핵심 도시정책이었다. 도시의 확장에만 골몰해온 후유증 이제 도시재생은 시대적 화두가 되었다. 낡은 공간과 낙후되고 쇠퇴한 지역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 오래된 도시들의 절박한 과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1980년대 이후에 만들어진 신도시들을 제외하면 우리나라의 대부분 도시는 오래된 도시다. 기능으로는 ’발전과 쇠퇴를 반복해오면서 특정한 지역 산업을 갖게 된 도시’이고, 그 도시만의 ‘두드러진 향토색을 가진 도시’다. 어느 쪽이든 이 도시들이 공통으로 안고 있는 문제가 있다. 그중 하나가 구도심 활성화다. 수십 년 동안 ’확장‘의 가치를 앞세운 도시발전 정책으로 신시가지 개발을 도구로 삼았던 우리나라의 오래된 도시들은 그 결과, 너나 할 것 없이 구도시와 신도시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도시의 확장에 환호했던 시기도 잠시, 신도시 건설에만 집중하는 그사이 구도심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확장’에만 골몰한 결과는 또 있다. 신시가지가 개발되고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덤으로 따라온 난개발 후유증이다. 개발에만 집중해 인간적인 공간을 만들어 내는데 실패한 적지 않은 도시들이 미래를 위협받고 있는 현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치밀하고 미래지향적 전략이 가져온 성과 그러나 도시재생을 정책으로 실현한 국가와 도시 중에는 낡은 공간들을 동력으로 삼아 힘을 잃어가던 도시를 살려낸 사례가 많다. 무조건 확장하고 새로 짓는 개발 논리에 빠지지 않고 ‘재생’의 가치와 의미를 주목한 성과다. 공동화되어가던 옛 도심이 생기를 되찾아 사람을 부르고, 환경쓰레기로 오염되어가던 강이 살아나 다시 도시의 동맥이 됐다. 낡고 오래되어 방치되었던 건물을 고쳐 창조적인 상상력으로 새로운 옷을 입힌 공간을 가진 도시들은 다른 모든 도시들에 선망의 대상이다. 도시재생을 먼저 시행한 나라는 영국과 독일이다. 19세기를 주도했던 영국은 특히 도시재생의 모범적 나라로 꼽힌다. ‘문화’와 ‘공간’을 중심에 두어 도시재생을 성공시킨 사례가 많은 덕분이다.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도시재생으로 성공한 대부분이 치밀하고 미래지향적인 전략을 바탕에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20년 이상 방치됐던 화력발전소에서 세계적인 미술관으로 변신한 <테이트 모던>도 영국 정부가 추진했던 <밀레니엄 프로젝트>로 추진한 사업이었다. <밀레니엄 프로젝트>는 대처 수상의 뒤를 이은 존 메이저 수상이 1995년 영국의 화려한 부활을 예고하며 선언한 도시정책 프로젝트다. 세계 관광객들을 불러온 <그리니치빌리지 밀레니엄 돔>, 세계의 최대 회전 그네인 <런던아이>, 템즈강의 보행자 전용다리인 <밀레니엄 브릿지>, 그리고 낙후된 템즈강 남부의 재활성화가 이 프로젝트의 주요 사업이었다. 밀레니엄 프로젝트의 가장 성공적인 ‘테이트 모던’ 역시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라 오랜 연구 끝에 만들어진 도시정책의 전략이었다. 재생은 새로운 시대로 나갈 수 있는 기회 우리나라의 도시들도 너나없이 재생을 성장 동력으로 내세운 길을 실천하거나 모색하고 있다. 전북의 각 시군에서도 도시재생 사업이 추진됐다. 외형적으로만 보자면 개선된 주거환경의 변화가 눈에 띄지만, 실질적인 성과를 판단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도시재생의 영역은 그 스펙트럼이 넓다. 그중에서도 재개발을 통한 도시재생은 필요하지만 경계해야 할 부분이 많다. 가장 큰 문제는 무분별한 난개발의 또 다른 실행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뉴타운이나 재개발 건축 사업들은 가능한 프로젝트를 크게 만들어 큰 규모의 건설회사들이 독식하게 된다. 크고 작은 프로젝트를 다양하게 만들지 않으니 중소규모의 건설회사나 설계사무소 등 관계가 있는 업종의 작은 업체들이 일감을 맡을 기회는 줄어든다. 불균형한 구조의 악순환이 지속되면 경제민주화의 실현 또한 멀어지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도 최근 주목되는 움직임이 있다. 도시재생 사업 방식의 변화다. 이미 한 시대를 점철했던 재개발과 재건축이 되살아날 기미다. 물론 규제 완화나 철폐가 전제되어 있다. 그렇다면 재건축 재개발만이 오래된 도시의 성장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일까. 답을 주는 도시들이 있다. ‘자칫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한 순간’을 철저히 경계하며 ‘새로운 시대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를 만든 오래된 도시들의 지혜와 선택이다. 재생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한 지 10여 년, 우리의 도시 환경은 큰 폭으로 변했다. 재생사업의 성과가 도시에 스며들면서다. 그러나 어느 사업이든 공과 과가 있는 것이어서 성과와 함께 새롭게 안게 된 문제도 적지 않다. 새로 시작하는 ‘도시의 시간, 성장 동력을 만들다’는 도시재생의 성과와 과제를 진단하는 기획이다. 그동안 추진해온 도시재생의 성공과 실패의 경험을 분석하고 공유해 도시의 지속적인 성장을 위한 대안을 제시하려는 것이 취지다. 우리보다 앞서 도시재생을 시작한 일본의 도시와 국내외 도시 사례분석, 전문가 인터뷰를 통해 도시의 발전을 견인해나갈 도시재생의 성과와 과제를 살펴본다.

  • 기획
  • 김은정
  • 2023.06.01 21:14
기획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