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문화유산, 지역의 새로운 미래다 ② 주민들 힘으로 재탄생한 오스트리아 비엔나
유럽은 여전히 세계에서 선망하는 여행지다. 유무형의 세계적 역사문화유산이 고스란히 남아있고, 그 중심에 있었던 인물들의 숨결을 도시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매력 때문이다.굳이 어떤 국가, 어떤 도시로 국한되지 않는다. 유럽의 거의 모든 주요 도시가 세계무형문화유산이라고 할 정도로 오래되고 독보적인 역사문화 자산을 보유하고 있다.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 역시 로마 제국의 군영지가 축조된 이래 2000년 가까운 역사를 자랑한다.음악의 도시로 잘 알려진 비엔나는 고전파낭만파 음악의 거장들이 활동했던 주 무대였으며, 오늘날 빈 필과 빈 어린이 합창단 등이 그 명성을 잇고 있다. 모차르트의 결혼식이 열렸던 곳으로 더 유명해진 오스트리아 최대의 고딕양식 건물인 슈테판 성당, 합스부르크 왕가의 여름궁전으로 사용했던 화려한 쉔브룬 궁전 등 관광명소도 즐비하다. 시내 중앙공동 묘지에 묻힌 베토벤, 모차르트, 슈베르트, 브람스, 요한스트라우스 등 음악 거장들만으로도 그 자체가 관광명소가 되고 있다.△황실 마구간에서 문화복합공간으로비엔나의 화려한 명소에만 눈길을 준다면 비엔나가 조상 덕에 관광산업으로 호강하는 도시쯤으로 여기기 쉽다. 그러나 그 이면에 오늘을 사는 비엔나 시민들의 땀과 노력, 고민이 담겨 있다.세계 최대 문화복합체인 뮤제엄 콰르티어(MUSEUMS QUARTIER, 엠큐)가 만들어지기까지 과정에서도 비엔나 시민들이 선대의 역사문화유산을 어떻게 활용할지 고민한 대목을 읽을 수 있다.엠큐는 넓게 펼쳐진 광장을 중심으로 현대미술관(MUMOK)쿤스트할레 빈(Kunsthalle Wien)어린이 미술관댄스 지구빈 건축센터, 젊은 예술가들을 후원하는 21지구(Qaurtier21) 등 다양한 문화시설이 들어서 있다. 특히 레오폴드 미술관은 세계 미술애호가들을 발을 잡는 곳이기도 하다. 다양한 조형물이 설치된 엠큐 광장은 24시간 시민들의 놀이터로 사랑을 받고 있다.당초 황실의 마구간이었던 곳이 이렇게 멋진 문화복합체로 탈바꿈하가까지 오랜 논의가 이루어졌다고 비엔나 시 문화국 공무원 수잔네 하이더씨가 소개했다. 1700년대 바로크시대 건물인 황실의 마구간이 1차 세계대전 후 황실시대의 종식과 함께 빈 공간으로 남게 되면서 황국박람회가 열리기도 했으며, 일부 문화공간으로 활용됐다.1985년도 다시 이 건물의 활용을 놓고 논의가 이어졌으며, 당시 백화점호텔관광마차들을 위한 마구간 조성 등 여러 방안이 제안됐다. 그러나 쉽사리 결론을 내지 못하다. 1990년대 초에서야 문화복합공간에 공감대를 형성했다. 하지만 조성과정에서도 어려움이 따랐다. 감정심사위원회 등의 동의를 받았지만, 구시가지와 구분할 수 있는 구역 타워 건설 등의 계획이 주민들의 반대로 무산됐고, 상당기간 사업 추진이 지체되기도 하고, 마구간 양쪽의 뮤지엄도 애초 계획보다 높이가 낮아졌다. 이렇게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세계적인 문화복합공간을 탄생시킨 것이다.△달동네를 보존한 주민들모든 도시에는 감추고 싶은 곳이 있기 마련이다. 엠큐에서 몇 블록 거리의 스피텔베르크가 한 때 비엔나의 그런 곳이었다. 엠큐 맞은편엔 현재 대통령궁이 자리하고 있고, 150년 전 완성된 제국의 축으로 불리는 링도 주변은 과거부터 부자와 귀족들의 거주지였으나 구시가지 스피텔베르크는 사정이 달랐다. 비더마이어(얌전하고 조용한 사람) 풍의 서민주택과 좁은 도로로 이루어진 스피텔베르크는 1950년대에는 윤락지역으로 불린 만큼 비엔나의 달동네였다.200년 전 주택과 길이 들어서 도시를 형성했던 이곳은 190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폐허로 전락했다. 창녀들의 마을이라 불릴 만큼 어두웠고, 도둑이 들끓었던 빈가이자 범죄소굴이었다. 우리의 고시원같이 주거공간도 매우 작았고, 작은 집들이 따닥따닥 붙어있었다. 전기도 없고 화장실과 상수도 등 위생시설도 엉망이었다.다른 구역들이 쇼핑가로 변하고 잘 다듬어진 데 비해 이곳은 1800년대 이후 전혀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은 외딴 섬이었던 셈이다. 오죽하면 1, 2차 대전 때 폭격이라도 받았으면 신시가지가 됐을 것이란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수잔나 하이더씨는 1980년대 학생시절 때만 해도 폐허였던 이 구역의 집을 갈 때는 조명과 가로등이 없어 언제나 무섭고 으스스해 모험적이었다고 회상했다.이런 열악한 여건의 스피텔베르크를 깡그리 밀어버리자는 의견이 1970년대 초 제기됐다. 그러나 주민들이 반대했다. 1970년대 당시 스피텔베르크를 밀어버리자는 의견에 맞서 반대운동에 앞장섰던 20대 청년 스메타나(Smetana, 현 비엔나 16구 케어전문가)씨는 동료 대학생들과 데모를 통해 지역의 문화와 역사를 지켰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철거 대신 보존으로 방향을 잡게 된 이곳은 비엔나 보존정책의 최초 구역이 됐다. 비엔나시는 1970년대 중반부터 건물들을 하나씩 구매해서 개량수리를 시작했다. 시가 직접 나서 집들을 개량해 주거용으로 만들어줬다. 작은 집들을 터서 큰 집으로 만들거나 공동주택으로 변화시키는 등의 방식으로 진행됐다.여기에 역사적 건물들을 보존하는 전제 아래 쇼핑센터문화시설들이 들어서고, 다양한 소극장 공연 등을 통해 밤 문화도 활성화 됐다. 이곳은 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도 지정돼 있다.대단위 재개발 대신 문화재보호법의 규제를 받으며 재산권의 제한을 감수하고서도 옛 것을 지키려는 주민들의 의식의 결실이다. 수잔네 하이더 씨는 자신의 집을 수리할 때도 그냥 나 하나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우리 동네의 아름다움과 환경을 고려한다고 했다.△이민자들 피난처에서 국제시장으로비엔나의 또 다른 뒷골목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 16구 오타크링이다(비엔나는 전체 23구로 이루어졌다).8000명의 거주자 중 절반 정도가 이민자다. 특히 작은 이스탄불이라고 할 만큼 터키인들이 많이 살고 있다. 1991년 유고전쟁 당시 피난 와서 정착한 옛 유고연방 사람들도 꽤 있다. 주거 환경 역시 열악해 경제적 여유가 생기면 원주민들도 떠날 생각만 했다.이 곳을 활성화하기 위해 비엔나 최초로 구역케어라는 프로그램이 생겼다. 그 중심에 브룬넨 시장이 있다. 16구 케어담당인 스메타나씨에 따르면 2000년대 초까지 주변 주거환경이 열악하고 시장 내 인프라가 전혀 갖춰지지 않아 엉망이었다. 폐쇄 직전의 시장을 활성화하기 위해 2년간 토론과 협의를 거쳐 10개의 시민참여프로그램을 만들어 실행에 들어갔다. 주택개량, 교통인프라 구축, 스탠드부스 설치, 문화행사 등의 주요 의제에 포함됐다.그 결과 사회문화 전반을 통합하는 방식으로 시장 내 환경을 꾸며 지금은 다른 지역에서도 쇼핑 겸 관광을 위해 찾아오는 곳이 됐다. 인도, 오스트리아, 터키, 이탈리아,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등을 두루 아우르는 국제적 시장으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시장 활성화 과정에서 예술인들과 긴밀한 협조도 큰 힘이 됐다. 시장 내에 자리 잡은 가톨릭이 운영하는 구호재단 카리타스의 역할이 특히 컸다. 세계 각국의 이민자들이 많다보니 청소년 문제 또한 많았다. 카리타스는 무료로 음악과 춤합창요리 등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시장과 연계해 청년 일자리를 돕고 있기도 하다. 비엔나소년합창단이 이곳의 청소년들과 함께 무대에 올라 감동을 주기도 했다.10여년 전 기회만 닿으면 떠나려 했던 사람들이 시장의 탈바꿈과 함께 떠났던 사람들도 하나 둘씩 돌아오는 곳으로 변모했다는 게 스메타나씨의 설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