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2025-11-10 01:06 (Mon)
로그인
phone_iphone 모바일 웹
위로가기 버튼
chevron_right 문화 chevron_right 문학·출판

술에 얽힌 에피소드 다시 맛보다

실험적인 소설 쓰기로 한국 소설의 지평을 확장한 전북 작가 서정인의 장편소설 <달궁> 등 절판됐지만 가치 있는 소설을 복간해온 출판사 최측의농간(대표 신동혁)이 신작을 출간했다.무애 양주동(1903~1977) 선생의 <문주반생기>다. 위트의 달인이자 인간적인 천재였던 저자가 대중이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수필을 청탁 받아 쓴 책이다.문학이란 워낙 단순한 문자의 놀음이 아니라 그 이상의 대단한 무엇, 야무진 생각이 있어야 한다는 데, 이 글이 과연 얼마나 그렇게 풍류로운채 진지하고 얄팍한 양 깊숙한 삶의 기록, 내지 그 반성과 해석이었는지 그것은 내사 모르겠다(<문주반생기> 중)술에 얽힌 에피소드를 담은 가장 유명한 수필집으로 꼽힌다. 그러나 가볍지 않고 격동의 시대에 겪은 고난역경을 풍류와 해학 속에서 긍정할 줄 알았던 한 지식인의 기록이다.책은 1960년 첫 출간된 후 두 번 더 세상에 나왔지만 세로 쓰기로 된 국한문 혼용체였다. 동서양의 고전 작품이 별다른 설명도 없이 원문 그대로 인용됐고, 중국어일어 등이 한자로만 표기돼 읽기가 매우 힘들었다. 출판사 최측의농간은 약 2년에 걸쳐 한글 세대를 위한 <문주반생기>를 완성했다. 내용의 누락 없이 초판 원고의 전문을 담았다.신동혁 대표는 당대의 글말소리를 보존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해 원고의 맛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한자를 한글로 바꾸거나 병기, 초판에 없던 1996개의 각주를 보충했다며 작성해 놓은 주석을 벗 삼아 촘촘한 저자의 문로(文路)를 따라가다 보면, 고진감래라는 말의 의미를 체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문학·출판
  • 김보현
  • 2018.01.12 23:02

['긁적긁적' '더듬더듬'…왜 우리 아이는 읽고 쓰지 못할까] 진실한 수업…문맹·문해맹 아이들 웃다

글을 읽고 쓰지 못하는 아이, 글을 읽고 쓰더라도 더듬더듬 읽는 아이, 겨우 더듬더듬 읽고 쓰는 수준이라 교과 학습이 불가능한 아이.이른바 문맹, 문해맹 아이들이다. 이런 아이들은 어떻게 지도해야 할까? 대부분 교사는 교사대로, 아이는 아이대로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보내다가 한글 지도의 골든 타임이라 할 수 있는 초등학교 1~2학년 시절을 그냥 흘려보내고 만다.홍인재 전주 금암초등학교 교감이 쓴 <읽고 쓰지 못하는 아이들>은 지금도 교실 한구석에서 글을 모른다는 사실을 들킬까 봐 숨죽이고 있을,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싶어도 잘 하지 못하는, 세상을 이해하는 언어라는 도구를 갖지 못한 문맹과 문해맹 아이들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이야기한다.저자는 장학사로 근무하면서 글자를 읽지 못하거나 읽어도 뜻을 알지 못하는 아이들, 더 나아가 쓰지 못하는 아이들을 만나서 지도하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4학년과 1학년 두 아이에게 문자 지도를 하면서 겪은 시행착오를 바탕으로 현 언어 교육정책의 문제점과 한계를 냉정하게 분석했다. 아무리 가르쳐도 제자리인 아이도 학교와 교사의 몫임을 인식하고, 어떻게 가르칠 것인지를 고민하면서 읽으면 좋을 것이다.1부에서는 학교와 사회에 어른거리는 문맹의 그림자에 관해 이야기한다. 문맹이 학교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반에 어떻게 걸쳐 있는지 보여준다. 2부와 3부에서는 저자가 지도한 두 아이의 사례를 통해 문자 지도 방법과 언어에 관해 서술한다.이어지는 4부에서는 두 아이를 가르치면서 깨닫게 된 아이의 언어 발달 과정과 그에 따른 국어 수업 방법을 소개한다. 왜 아이들이 고학년이 되어도 맞춤법과 띄어쓰기를 제대로 못 하는지, 글 한 편을 제대로 읽지 못하는지, 해독과 독해의 문제를 어떻게 다뤄야 할 것인지에 대해 알려준다.5부에는 문맹과 기초 학력 정책 이야기를 담았다. 저자는 두 아이와 함께한 한글 지도 시간 덕분에 현장의 교사가 겪는 어려움을 세밀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김승환 전북교육감은 서평을 통해 지은이가 두 아이의 문자 지도를 위해 기울인 정성과 집념은 놀랄 만하다며 이 책이 힘이 있는 것은 지은이가 자신이 경험했던 오류를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밝혔다.홍인재 교감은 1990년 전주 외곽의 작은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처음 만났다. 동료들과 함께 아동미술, 독서교육, 통일교육 등 연구 모임을 만들어 운영하는 등 배움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나이 마흔이 넘어 우석대 문예창작학과에 들어가 동화를 공부했다. 2011년 전북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탈로 등단했다. 그 무렵 전북에 혁신학교 정책이 들어왔고, 근무하던 학교를 선생님들과 함께 혁신학교로 만들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전라북도교육청 교육혁신과와 전주교육지원청에서 장학사로 5년간 근무했다.특히 전주교육지원청에서는 기초학력 정책을 펼치면서 2년 동안 문맹인 아이를 가르쳤다. 얼마 전 학교로 다시 돌아왔다. 아이들의 언어와 삶을 담은 동화를 쓰는 꿈, 평생 언어연구자로 살아가는 꿈을 꾸고 있다.

  • 문학·출판
  • 문민주
  • 2018.01.12 23:02

[불멸의 백제] (7) 1장 칠봉성주(七峯城主) ⑦

다음 날 아침, 계백이 아침 밥상을 들고 오는 여자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그 뒤를 물병을 받쳐 든 여자가 따른다. 어젯밤에 덕조가 산 여종 둘이다. 나중에 들어선 덕조가 헛기침을 하더니 멀찍이 앉았다. 마룻방 안에 넷이 둘러앉은 셈이다. 작은 세다리 밥상을 앞에 두고 계백이 앉았고 좌우에는 여종이, 문 앞에는 덕조가 자리잡은 것이다. 그때 덕조가 말했다.“밥상을 들고 온 년이 우덕이라는 언니고, 물병을 가져온 년이 고화라는 동생입니다. 주인.”계백이 우덕부터 보았다. 튼튼한 몸에 둥근 얼굴, 계백의 시선을 받더니 머리를 굽신 해보였는데 서글서글한 인상이다. 다음은 고화, 언니와는 대조적으로 갸냘프고 갸름한 얼굴, 시선도 마주치지 않는다. 치맛자락을 움켜쥔 손가락이 가늘고 길다. 계백의 시선을 쫓던 덕조가 다시 헛기침을 했다.“노예상 말을 들었더니 이것들이 말을 타고 나왔다가 백제 정탐군에게 잡혔답니다. 신라 삼현성에서 행세깨나 하는 집안이었던 모양이요.”계백이 밥상으로 시선을 옮기고는 조밥을 한수저 떠서 입에 넣었다. 상 위에는 조밥 한그릇과 나물 2종류, 군량으로도 쓰이는 소금에 절여 말린 돼지고기 서너조각과 더운물이 전부다. 덕조가 말을 이었다.“노예상은 동생되는 고화를 도성의 유흥가에 팔 작정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금화 네냥을 부르길래 제가 엄포를 놓았지요. 객사에 잡아놓고 칠봉산성 밖으로 나갈 수 없게 만든다고 했더니 금화 세냥에 언니까지 얹어서 산 겁니다.”“………”“잘 샀지요?”“너, 어젯밤에 아무일 없었느냐?”입안의 음식을 삼킨 계백이 묻자 덕조가 숨을 들이켰다. 계백을 쳐다보는 눈동자가 흔들렸다.“주인, 무슨 말씀이시오?”“내가 여자들한테 물어보랴?”“주인.”어깨를 편 덕조가 입안의 침부터 삼키고 나서 말했다.“저는 단지, 그러니까…”그때 계백이 여자들을 둘러보았다.“어젯밤에 저 사내가 방에 들어왔느냐?”“네.”대답을 언니 우덕이 했다. 우덕이 똑바로 계백을 보았다.“하지만 제가 막았습니다.”“어떻게?”“동생을 겁탈하려고 하길래 제가 죽겠다고 했지요. 칼을 목에 붙였습니다.”“그랬더니?”“순순히 물러갔습니다.”계백의 시선이 고화에게로 옮겨졌다. 고화는 지금까지 한번도 계백과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넌 벙어리냐?”그때 고화가 머리를 들었다.“아닙니다.”목소리가 맑아서 여운이 일어난 것 같다. 계백에 고화의 검은 눈동자에 박힌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계백의 시선이 다시 고화의 몸을 훑었다.“너희들 주종간이지?”순간 둘의 몸이 굳어졌다가 먼저 우덕이 흔들렸다.“나리 아닙니다. 저 분은, 아니, 쟤는 제 동생입니다.”그때 계백이 머리를 끄덕이며 수저를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덕조에게 말했다. “한번만 더 여자 방에 들어간다면 네 물건을 뽑아버릴테니까 명심해라.”이것으로 첫 대면이 끝났다.

  • 문학·출판
  • 기고
  • 2018.01.11 23:02

[불멸의 백제] (6) 1장 칠봉성주(七峯城主) ⑥

“멈춰라!”앞장선 기마군사가 소리치자 대열이 멈춰섰다. 20여인으로 구성된 대열이다. 그 중 7,8명은 말을 탔고 10여명은 말 2필이 끄는 수레에 탔다. 말을 탄 사내들은 제각기 칼을 찼거나 창을 들었는데 관리는 아니다. 그때 계백의 옆에 선 덕조가 말했다.“노예상입니다. 주인.”이미 알고 있었으므로 계백이 시선만 주었다. 백제에서도 신라군의 기습을 받아 아녀자를 빼앗기듯이 신라도 마찬가지다. 백제군이 기습을 해서 신라인을 납치, 종으로 파는 것이다.“어디서 오는 길이냐?”기마대 조장인 좌군(佐軍)이 나서서 호통치듯 물었다. 칠봉산성에서 동북쪽 30여리 지점의 황야다. 계백은 좌군 지휘 하의 기마군 50기를 이끌고 영지를 순시하는 중이었다. 오후 미시(2시) 무렵, 햇살이 밝은 청명한 날씨, 그때 대열 앞으로 가죽 조끼를 걸친 30대쯤의 사내가 나섰다.“예. 아남성에서 나와 사비도성으로 가는 노예상이올시다.”아남성은 남방의 동쪽 산라와의 국경에 위치한 성이다. 사내가 말을 이었다.“아남성에서 노예 12인을 사오는 길인데 오늘은 칠봉성에서 머물 작정이었소.”“도시부(都市部)의 증표는 있는가?”“물론이지요.”사내가 저고리 품 안에서 가죽으로 감싼 증표를 꺼냈는데 역시 돼지가죽에 도시부의 허가서가 적혀 있다. 좌군이 건네준 증표를 읽은 계백이 수레에 실린 포로를 훑어보았다. 건장한 사내가 넷, 여자가 다섯, 열 살 미만의 아이가 셋이다. 머리를 끄덕인 계백이 증표를 건네주면서 말했다.“내가 칠봉성주다. 성 안의 객사가 비었으니 이 길로 곧장 가도록 해라.”“성주를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사내가 넉살 좋게 웃으면서 말했다.“노예는 아남성에서 열흘 전에 잡아온 년놈들이라 아직 손도 타지 않았습니다. 성주께서도 골라 보시지요.”그때 덕조가 앞으로 나섰다.“이봐. 내가 저녁때 객사로 갈 테니까 그 때 보자구.”“장사는 뉘시오?”“난 성주 나리 집사다.”덕조가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마침 내가 종을 구하는 중이었는데 잘 되었어.”“내가 값을 잘 쳐 드리지요.”둘의 수작을 듣던 계백이 말고삐를 당기며 말했다.“자, 가자.”문독이 정지한 기마대에 출발 신호를 보냈고 기마대가 움직였다. 백제는 상업이 발달하여 상업교육을 맡은 도시부(都市部)를 따로 두었는데 외관 10부(部) 중의 하나로 부장(部長)은 달솔이 맡았다. 그날 밤, 객사에 다녀온 덕조가 계백에게 말했다.“주인, 여종 둘을 샀소. 신라 삼현성 근처에서 잡았다는 년들인데 둘이 자매간이랍니다. 서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해서 같이 샀습니다.”덕조가 얼굴을 펴고 웃었다.“값은 금 3냥을 줬는데 연남군보다는 비싸지만 장사가 잘 되는 것 같습니다. 주인께서도 출정하실 때 꼭 포로를 챙겨 오시지요. 전리품으로는 포로가 가장 낫습니다.”“시끄럽다.”계백이 꾸짖자 덕조는 순순히 물러났다. 덕조는 대를 이은 종이어서 계백이 어렸을 때는 업어 키웠다. 계백에게는 형 같은 종이다. 종으로 생각한 적도 없다.

  • 문학·출판
  • 기고
  • 2018.01.10 23:02

[불멸의 백제](5) 1장 칠봉성주(七峯城主) ⑤

윤충과 연신이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사비도성의 후부(後部) 상항(上巷)거리를 지나고 있다. 폭이 1백자(30m)가 넘는 대로(大路)에는 행인이 가득 찼다. 행인 중에 왜인과 당인(唐人), 남만인, 인도인까지 섞여 있었는데 당시의 백제는 해상 무역의 중심이었고 인도까지 해상 무역로가 개척되었기 때문이다. 가끔 고구려 상인도 지났으므로 윤충의 얼굴에 쓴웃음이 띠어졌다.요즘은 고구려 배가 많이 들어온다고 하더군.예, 하지만 아직 뱃길이 서툴러서 우리 상선단에 끼어서 갑니다.남만을 거쳐 인도까지 가려면 항해술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도중의 길목에 자리잡은 백제령 담로에서 물과 양식을 조달받고 배도 수리해야 된다. 옆을 지나던 후부(後部) 순시군(軍)이 윤충을 향해 군례를 했다. 사비도성은 부소산성 밑의 왕궁 아래로 바둑판처럼 조성된 거대한 성안 거리로 이루어져 있다. 나성(羅城)으로 둘러쌓인 도성은 5부(部) 5항(巷)의 행정체제로 편성되었는데 상(上), 전(前), 중(中), 하(下), 후(後)의 5부에 각각 5항으로 나뉘어진 것이다. 도로는 모두 직선이며 각 부에는 5백명의 군사가 주둔하여 치안과 방어를 맡았다. 도성 안의 가구 수는 1만가(家)가 되었으니 인구 10만이 넘는 거도(巨都)다. 윤충이 혼잣소리처럼 말했다.적의 적은 우군(友軍)이지만 언제 또 적이 될지 알 수가 없는 세상이지.백제와 고구려는 근래에 들어 동맹관계나 같다. 신라 진흥왕대에 한수유역의 거대한 영토를 빼앗긴 고구려는 절치부심하여 기회를 노렸으며 백제 또한 같은 입장이다. 신라와 연합하여 한수땅을 빼앗았지만 곧 신라의 배신으로 한수유역 6개군(郡)을 빼앗긴데다 성왕(聖王)까지 관산성에서 신라군에게 패사(敗死)했기 때문이다. 그때 윤충이 연신에게 말했다.덕솔, 아무래도 올해 안에 다시 전쟁이 일어날 것 같다.연신은 대답 대신 말몸을 바짝 붙였고 윤충의 말이 이어졌다.이번 대야성 공격이 성공하면 신라는 극심한 내분이 일어날 거야.허나 대야성이 만만치 않습니다.주위를 둘러본 연신이 목소리를 낮췄다.김품석이 지용(知勇)을 겸비했을뿐만 아니라 보유한 군사가 2만이 넘습니다. 수성(守城)만 한다면 장기전이 될 것이오.대왕께선 기어코 김춘추 세력을 꺾으실 작정이야.연신이 길게 숨을 뱉었다. 작전은 극비로 진행되고 있다. 대왕은 방령 윤충만을 불러 명을 내리는 것이다. 연신이 윤충에게 물었다.방령께서 계백을 부르시는 이유가 기마군 장비 때문입니까?전령을 통해 기밀이 새나갈 수도 있어.그렇지요.계백에게 대야성 정찰을 시키려는 것이네. 대왕께서 계백을 기마군 선봉으로 세우실 계획이야.연신은 입을 다물었다. 의자왕은 효자다. 죽은 부친 무왕(武王)의 염원을 잊지 않고 있다. 어디, 관산성 싸움에서 패사한 성왕의 한(恨)뿐이겠는가? 무왕(武王)의 부인이며 의자왕의 모친은 진평왕의 둘째딸 선화공주인 것이다. 신라 진평왕은 딸만 셋을 두었는데 첫째가 덕만(德萬)이요, 둘째가 선화(善花), 셋째가 천명(天明)이다. 현재의 신라여왕 선덕이 바로 덕만이요. 선화는 의자왕의 모친, 천명은 곧 김춘추의 생모가 된다. 신라 성골(聖骨)왕족은 이 셋 뿐이니 선덕여왕 다음 순위가 누가 되겠는가? 김춘추? 의자대왕?

  • 문학·출판
  • 기고
  • 2018.01.09 23:02

450년만에 빛 본 퇴계 이황의 부안 읊은 시

조선시대 중기 문신이자 학자인 퇴계 이황(1051~1570) 선생이 전북 부안 실상사와 직연폭포(현 직소폭포), 마천대를 제목으로 지은 시가 공개됐다. 이는 <퇴계선생문집 별집>에 수록된 시로 도산서원 이동구 별유사가 전북향토문화연구회 이치백 회장에게 내용을 전달하면서 공개하게 됐다. 조선시대 대유학자인 퇴계 이황이 부안에 관해 남긴 귀중한 자료다.이치백 회장은 <부안군지>에도 이규보(1168~1241), 이매창(1573~ 1610), 신석정(1907~1974) 등의 시는 실려있으나 퇴계 이황의 시는 찾아볼 수 없다며 약 450년 만에 빛을 보게 된 소중한 자료라고 설명했다.이 시는 퇴계 선생이 부안 변산을 직접 유람하고 지은 시는 아니다. 이동구 별유사는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광산(光山, 현 광주시 광산구)에 살았던 칠계 김언거(1503~1584) 선생이 변산을 유람하고 시를 지어 퇴계 선생에게 보내니, 그 운자를 사용해 답시로 지은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아쉽게도 칠계 선생의 원운시는 찾지 못했다.퇴계 선생과 칠계 선생에 관한 기록은 1544년 7월 22일 칠계 선생이 금산부사로 부임해 송별하는 시가 처음이다. 퇴계 선생이 풍기군수로 부임한 며칠 후 칠계 선생이 풍기에 찾아와 하루를 묵어가기도 했다고 한다. 칠계 선생은 퇴계 선생보다 나이는 3살이 적고, 문과 급제는 3년 먼저 했다.이동구 별유사는 <퇴계선생 문집>에 칠계 선생과 관련된 시가 20제이고, <칠계유집>에 퇴계 선생의 시 22제와 간찰 1편, 칠계 선생이 퇴계 선생에게 드린 시 2제가 실려 있다며 따로 두 분의 관계와 당시 영호남의 교류에 대해 추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경북 안동 출신인 퇴계 이황(1051~1570) 선생은 조선시대 중기 문신이자 학자다. 1534년 문과에 급제하고 예조판서, 우찬성, 대제학 등을 지냈다. 퇴계 선생은 풍기군수로 부임한 후 나라에 건의해 우리나라 최초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을 만들기도 했다.實相寺南溪韻(실상사 남계 운)千古名山斷俗埃 천고의 명산이 속세의 티끌을 끊었으니得君街償寄山隈 그대의 칭찬은 산모퉁이에 붙여두네水經寶地全然潔 물은 사찰 있는 곳을 지나니 더없이 깨끗하고雲向叢林別樣堆 구름은 총림을 향해 다른 모양으로 뭉쳤구려瘦竹微吟閒遶石 파리한 대는 낮게 읊조리며 돌을 막아 둘러있고淸尊高興晩登臺 맑은 술에 흥이 돋아 늦게야 대에 오른다從來造物嫌多取 원래 조물주는 많이 갖는 것을 싫어하니莫把風烟騁逸才 세상을 쥐고 뛰어난 재주를 펼치지 마소直淵瀑布韻(직연폭포 운)白練橫飛翠障圍 흰 명주가 가로 날려 푸른 장벽을 둘렀고劈開山骨滅雲肥 산 바위가 쪼개져서 구름이 살찌는 것을 덜었구나漲時河落深春地 넘칠 땐 은하수가 깊은 학으로 떨어진 듯하고急處雷奔下激磯 빠른 곳은 번개같이 물가 돌을 내려치네何許靈源連海窟 어디쯤에서 靈源이 바다 굴로 연했을까?幾多餘沫散林霏 수두룩한 남은 거품 林 로 흩어진다雄觀未遂罏峯勝 웅장한 향로봉의 승경을 아직 구경 못했으나且向玆山欲拂衣 또 이 산을 향해 옷소매를 털고 싶어라摩天臺韻(마천대의 운)但警海闊與山崇 다만 바다 넓고 산 높음에 놀랐으니誰識元初辦結融 누가 원초의 신비로움을 깨달았을까日月低垂氛翳絶 해와 달 낮게 드리워 가 끊어졌고靈仙遊集瑞光叢 신선이 모여노니 瑞光이 결집한 곳胷襟浩氣三杯後 가슴 속의 호기는 三杯 후에 떠오르고羽翼培風六月中 깃날개로 바람타고 유월 중에 오르네矯首西雲無計往 머리 들어 서쪽을 봐도 갈 계책이 없는데因君豪句喜披蒙 그대의 좋은 글귀 때문에 어둠을 깨우쳤네

  • 문학·출판
  • 문민주
  • 2018.01.09 23:02

[불멸의 백제] (4) 1장 칠봉성주(七峯城主) ④

방령, 대야성의 현재 병력은?청에 둘이 남았을 때 의자왕이 불쑥 물었다.사비도성의 청 안, 의자왕은 신하들의 보고를 받은 후에 윤충만을 따로 남도록 한것이다.윤충이 상반신을 조금 숙이고는 옥좌에 앉은 의자왕을 보았다.김품석이 군사 5백여명을 더 충원 받았습니다. 대야성의 병력은 7천이 조금 넘습니다.김춘추가 대권을 쥐려고 제 사위놈에 병력을 증강시켜 주는 거야.소신의 생각도 그렇습니다.김춘추만 무력화(無力化) 시키면 신라는 무너지게 돼.의자의 이맛살이 찌푸려졌다.태자 때부터 아버지 무왕(武王)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고 형제간의 우애가 깊었기 때문에 칭송을 받았던 의자다. 해동증자(海東曾子)라고 불리우기도 했다.의자는 무왕의 뒤를 이어 왕좌에 오른 후에 신라에 대한 적극적인 공세를 시작했다.즉위 2년인 작년에 의자는 직접 대군을 이끌고 신라를 공격해서 40여개의 성을 공취했지만 아직도 양에 차지 않는다.신라에게 기습적으로 빼앗긴 한성유역의 영토까지 회복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 때 윤충이 말했다.대왕, 신라왕 선덕이 또 당에 청병(請兵) 요청사를 보냈다고 합니다.외우내환(外憂內患)이군.밖에서는 고구려와 연합한 백제군의 공격을 받고 안에서는 상대등 비담 등이 여왕의 통치에 반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의자가 말을 이었다.세작이 많으니 장수들을 은밀하게 준비 시키도록.예, 대왕.칠봉성(七峯城)의 계백은 부임했나?예, 대왕.그곳에서 대야성까지는 몇 리나 되나?3백리 가깝게 됩니다, 대왕.계백은 대륙에서 기마군을 이끌고 하루에 5백리를 왕래한 장수야.대륙은 땅이 넓고 평탄하지만 이곳은 산이 많고 지형이 험합니다, 대왕.그래도 계백은 하루 300리 거리는 주파할 것이다.의자가 눈을 가늘게 뜨고 윤충을 보았다.그렇다. 담로 연남군 기마대장이었던 계백을 본국으로 불러들인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의자와 윤충은 본국은 물론 대륙의 담로에서도 무장(武將)을 선발하여 은밀히 배치시킨 것이다.의자가 말을 이었다.방령, 그대가 계백을 불러 영(令)을 내리게.예, 대왕.허리를 굽혀보인 윤충이 청을 나왔다.내성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방좌(方佐) 연신이 윤충을 보더니 다가와 물었다.방령, 신시(오후 4시)가 다 되었으니 방성(方城)으로 가기엔 늦지 않았습니까?밤에라도 닿아야지.병사한테서 말 고삐를 받아쥔 윤충이 말에 오르면서 말했다.나선군의 칠봉성주 계백에게 전령을 보내게.칠봉성주 계백에게 말씀이오?그러네. 기마군 일로 물어볼 것이 있으니 바로 나한테 오라고 하게.연신의 시선을 받은 윤충이 말을 이었다.기마군 장비 때문이라고 하게.계백 가문이 기마군을 오래 했지요.방좌 연신이 전령을 소리쳐 부르더니 지시했다.말을 걸리면서 윤충이 눈앞에 대야성을 떠올렸다. 거성(巨城)이다.신라의 남쪽 국경 부근에 위치한 대야성 성주는 김품석, 김춘추의 사위이며 오른팔이나 같다.대왕 의자는 대야성 공취를 오래전부터 계획해왔던 것이다.

  • 문학·출판
  • 기고
  • 2018.01.08 23:02

74. 삿대질 - 나룻배 노를 젓는 막대기 '상앗대' 준말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으로 시작하는 윤극영의 동요 ‘반달’에는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라는 부분이 나온다. 여기서 나오는 삿대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상앗대의 준말이라고 나와 있다. 상앗대는 ‘물가에서 배를 떼거나, 또는 물이 얕은 곳에서 밀어 갈 때 쓰는 장대’다.1970년대까지만 해도 도시 근교나 시골에서 다리가 놓이지 않은 개울이나 얕은 강물을 건너기 위해서는 나룻배를 이용했다. 그런데 돛을 달아 바람으로 움직이기 어려운 좁고 얕은 강에서는 노를 젓거나 기다란 막대기로 배를 밀며 건너곤 했는데, 이때 배에서 강바닥을 밀기 위해 사용하는 긴 막대기가 바로 상앗대다. ‘질’은 ‘장난질’에서 보이듯이 어떤 행위를 하는 ‘짓’과 같은 의미이지만 부정적인 의미가 담긴 접미사이다. 그래서 ‘삿대질’은 배를 강에 띄우기 위해 배 위에서 긴 막대기인 상앗대를 들었다 놨다 하는 것처럼, ‘말다툼을 할 때 주먹, 손가락, 막대기 따위로 상대방의 얼굴을 향해 내지르는 짓’을 말하는 것이다.사람들이 싸울 때 손가락으로 상대방을 향해 내지르는 품이 뱃사공이 삿대를 이리저리 놀리는 품과 비슷하다 하여, 오늘날에는 상대방을 향해 함부로 손가락질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 문학·출판
  • 기고
  • 2018.01.05 23:02

담담하게 풀어낸 자연의 소리

어떤 꽃에서 퍼 왔느냐고/ 묻지는 못했다/ 들에서 산에서/ 깊은 산골 이름 없는 꽃에서/ 얼마나 애를 끓이며 퍼 날랐으면/ 맑고 붉고 투명하다 못해 달콤하기까지 하던/ 꿀은 ( ‘벌꿀 2’ 부분)이봉명 시인이 시집 <바람의 뿌리>를 내놨다.시집은 1부 너를 위하여, 2부 뿌리로 깊어진다, 3부 누군가 있다, 4부 열어 두고 싶은 것이다, 5부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등 모두 5부로 구성돼 있다. 시인은 여러 미학적 장치를 제거하고, 언어 자체를 목적으로 내세운다. 그러면서 서정시가 가진 유연성에 충실하다.이병초 시인(웅지세무대 교수)은 발문을 통해 “시집에 수록된 시들은 솔잎에 맺힌 이슬방울이 새소리에 놀라 튀어나가는 듯 자연스럽다”며 “이미지에 포획된 언어의 날렵한 섬광, 시상 비약의 경쾌한 상상력과 과감한 생략을 통한 시상의 돌연한 울림은 있을지라도 텅 빈 기표에 불과한 언어의 휘발성은 없다”고 밝혔다.이봉명 시인은 무주 출생으로 1991년 ‘시와 의식’으로 등단했다. 무주작가회의, 전북작가회의, 한국작가회의, 잔국장애인문인협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시집 <꿀벌에 대한 명상>·<아주 오래된 내 마음속의 깨벌레>·<포내리 겨울>·<지상의 빈 의자>, 산문집 <겨울엽서> 등이 있다.

  • 문학·출판
  • 문민주
  • 2018.01.05 23:02

전북 지역 문인 '한해 결실' 동인지 잇따라 발간

지난해 전북지역 문단을 이끌어온 문인들의 창작 결실인 동인지가 잇따라 발간됐다.한국문인협회 전주지부는 <문맥> 제49호를 발간했다. 전주문인협회가 한 해 동안 흘린 땀방울이 고스란히 배어있다.<문맥>은 덕진연못에 핀 시를 주제로 한 시 낭송 축제, 전주문인대회, 전주문학상 소식 등을 엮었다. 제5회 전주문학상 본상작 안평옥 시인의 소나기 외 4편, 문맥상 수상작 이희근 수필가의 깨소금 여인 외 2편도 특집으로 실었다. 시인 47명, 수필가 13명, 동시작가시조시인 3명, 소설가와 동시작가 각각 1명 등 전주문인협회 회원 65명의 작품도 게재했다.이소애 전주문인협회장은 가장 힘이 강한 새는 날개를 젓지 않고 난다는데, 날갯짓 소리를 참아내기 위해서 오늘도 조용히 내가 해야 할 봉사가 무엇인지 찾는 일에 골몰하겠다며 관심과 사랑을 당부했다.한국동인지문학아카데미는 <한-몽 문학> 제4호를 출간했다. 한국과 몽골의 문학 교류를 기념하는 문집이다.특집으로 나혜경 씨가 한국의 근대 시와 역사적 배경, 촐롱체첵 바트뭉흐 씨가 몽골 문학(1990년 이후)을 주제로 글을 실었다. 모든 글을 한글과 몽골어로 번역됐다. 또 몽골을 자연과 시를 주제로 정군순, 김동수, 선산곡, 전근표, 전용직, 송희, 윤현순 시인이 시를 써 게재했다.소재호 시인(문학평론가)은 머리말을 통해 한국과 몽골이 문학 교류로 문화 교류의 큰 강을 이뤄가고 있음은 가히 의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며 양국 문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심리적, 지리적 충돌도 매우 유익한 정서의 확산과 깊이 있는 사유의 증대로 이어질 것이라고 밝혔다.샘문학동인은 <샘> 제3호를 펴냈다. 시인 9명, 수필가 3명이 저마다의 작품으로 동인지를 수놓았다. 특히 고영 시인이 읽은 샘 코너를 통해 샘문학동인의 작품과 함께 고영 시인의 감상 글을 수록했다. 시인의 마음에 들어가 이야기하듯 서사로 어우러진 에세이가 뭉클한 감동을 준다.문학을 통해 교구민과 함께 소통해 온 전주교구 가톨릭문우회는 <빛무리> 제27집을 발간했다. 특집판으로 피정을 이야기하다, 성경 구절을 주제로 교구민들이 쓴 글을 수록했다. 시와 수필 등 전주교구 가톨릭문우회원 작품은 물론 사진 에세이도 함께 담았다.

  • 문학·출판
  • 문민주
  • 2018.01.05 23:02

[불멸의 백제](3) 1장 칠봉성주(七峯城主) ③

백제는 동, 서, 남, 북, 중의 5부(部)로 구분되었으며 부(部)는 곧 방(方)이다. 5방에 37군, 200개 성을 보유했고 본국의 호구는 76만호에 주민 620만의 대국(大國)이다. 당시의 대륙에서 패권을 쥐었던 수(隋)가 대륙 전체를 통일한 전성기 때의 인구가 890만호, 4천6백만 정도였으니 대백제(大百濟)는 본국의 인구만으로도 압도적이었다. 더구나 대륙에 담로(檐魯)라고 부르는 영토를 보유한 상황이다. 5부, 즉 5방(方)에는 각각 방령(方領)을 두었으며 2등급 품위인 달솔(達率)이 맡았다. 각 방에는 10개 정도의 군(郡)이 소속되었는데 군장(郡將)은 4품 위인 덕솔(德率)이다. 또한 방에는 방좌(方佐)가 방령을 보좌했고 군에서는 도사(道使)가 군장을 보좌한다. 백제 관등은 16관등이며 중앙관서는 내관 12부와 외관 12부로 나뉘어져 있다. 계백은 지방의 남방 방령인 달솔 윤충이 지휘하고 있는 42개 성주중 하나인 것이다.주인, 연남군이 이곳보다 나았습니다.아침상을 앞에 놓으면서 덕조가 투덜거렸다. 세다리 소반에는 조밥 한그릇과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 말려 놓았다가 더운 물에 불린 산채 한접시가 차려졌다. 잠자코 수저를 드는 계백에게 앞에 앉은 덕조가 말을 이었다.연남군에서는 7품 장덕이었지만 1천5백 기마군을 이끌었고 숙소에는 하녀가 셋에 하인 다섯이 있었습니다. 더구나 식사는 산해진미는 아니더라도시끄럽다.씹던 것을 삼킨 계백이 덕조를 노려보았다.이놈, 하녀는 네가 다 건드렸지 않으냐? 내가 모르고 있었는 줄 아느냐?아니, 그것은덕조의 검은 얼굴이 더 검어졌다. 덕조는 35세, 조부 때부터 계백 가문을 모신 씨종이다. 계백 가문은 대륙 우측에 위치한 백제령 담로 연남군에 뿌리를 내린 호족이다. 계백의 부친은 연남군의 태수 보좌역인 방좌를 지냈으며 조부는 3급품인 은솔(恩率)로 좌장군이었다. 덕조는 계백을 어릴적부터 보살핀 큰형같은 존재인 것이다. 정색한 덕조가 몸을 세우더니 계백을 보았다.주인, 군사들 말을 들었더니 마을에 혼자 있는 여자가 많답니다. 하녀 셋 쯤 구하는 건 어렵지 않다는데요.안된다.지난 성주는 식구가 다섯에다 데려온 종이 여덟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거기에다 가끔 마을에서 여자들을 불러 일을 시켰다는데요.그러다가 사공부(司空部) 감찰에 적발되어서 나솔에서 시덕(施德)으로 2등급이나 강등되어서 도성으로 돌아갔지 않으냐?주인께서 하녀 구하시는건 해당이 안됩니다. 오히려 먹고 살길이 막막한 여자들을 도와주는 것이 됩니다.안된다.주인께서도 여자가 필요하시오.마침내 덕조가 본색을 드러내었다.본국에 오신지 넉달이나 되셨는데 한번도 여자를 안지 않으셨소.안지 않으면 병이 나느냐?수저를 내려놓은 계백이 덕조를 보았다. 시선을 받은 덕조가 숨을 들이켰다. 계백의 눈동자가 흐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먼곳을 보는 것 같다. 어깨를 웅크린 덕조가 두손으로 방바닥을 짚었다.주인, 말을 함부로 내놓았습니다. 때려주십시오.아니다.계백이 똑바로 덕조를 보았다.나는 항상 너한테서 배운다. 그래, 마을에서 하녀를 구해오너라. 의식주를 이곳에서 해결시키는 것이 성주가 해줄 일이기도 하지.

  • 문학·출판
  • 기고
  • 2018.01.05 23:02

등단 50주년 맞은 윤흥길 소설가 "아직도 써야 할 작품 많아…주변에 관심 가져야"

전주여고를 다니던 막내 누이가 눈길을 헤치고 운동장으로 걸어와 빙긋이 웃으며 노란 종이를 건넸다. 당선을 축하한다는 전보였다. 윤흥길(75) 소설가는 그 광경이 눈에 선하다고 했다. 그로부터 50년이 흘렀지만.윤흥길 소설가는 196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회색 면류관의 계절>이 당선돼 등단했다. 올해로 꼭 등단 50주년이다.전주사범학교를 졸업한 그의 첫 발령지는 당시 익산 춘포국민학교였다. 그는 1966년 1월 1일 춘포국민학교 숙직실에서 서울신문에 크게 실린 장편소설 당선자 기사를 봤다. 교사를 그만둘 궁리만 하던 그는 기사를 보자마자 소설가가 되면 교사를 그만둘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했다. 그 길로 호남서점에서 문학 관련 이론서 5권을 샀다. 첫 습작이 사상계 신인문학상 결선까지 올랐다. 길이 보였다. 벽지 초등학교를 자원해 내소사 밑 분교로 발령받았다. 그곳에서 네 살 어린 전주사범학교 후배에게 원고지 쓰는 법부터 다시 배우면서 소설 공부를 했다.그는 9살 때 625전쟁을 겪었다. 백지 위에 먹물을 뿌린 듯 선명한 이 기억은 평생을 좌우했다. 성인이 돼서는 전라도에 대한 타지 사람들의 왜곡된 시각을 군대 생활부터 시작해 서울 생활 곳곳에서 체감했다. 분노와 환멸을 느꼈다. 그럴수록 고향이 소중해졌다. 차별은 그의 고향 사랑을 부채질했고, 고향 이야기에 더 집착하게 했다.그래서일까 그의 작품은 고향에 대한 기억, 625전쟁에서 시작된 사회적 갈등으로 점철된다.독재, 전쟁 위협, 빈부 갈등 등 한민족이 겪는 불행과 비극은 모두 625전쟁과 직결돼 있어요. 독재 정권은 625전쟁으로 인한 분단을 권력 유지 핑계로 사용했어요. 자유는 유보됐죠. 더 이상 분단을 빌미로 국민을 억압하는 일은 없어야 해요.요즘 그는 고(故) 박경리(1926~2008) 선생이 내준 오래된 숙제를 하고 있다.박경리 선생은 젊을 때부터 나를 보면 작가는 땅을 밟고 흙냄새를 맡으면서 살아야 한다고 말했어요. 선생이 나에게 내준 숙제는 시골에서 단독주택을 짓고 살아라, 대작을 써라, 대학교수를 그만둬라는 것이었죠. 제일 먼저 한 숙제는 정년이 되면서 대학교수를 그만둔 거죠. (웃음) 그다음 완주로 내려오면서 시골에서 단독주택 짓고 살라는 숙제를 했어요.이제 남은 숙제는 하나. 그는 예전에는 대작이 대하소설을 의미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대작은 길이나 분량 얘기가 아니었어요. 인간이나 세상을 얼마나 진지하게 보고, 그 이면에 숨은 진실을 포착해 치열하게 다뤘는지를 뜻하는 거였죠.일제강점기 말부터 625전쟁 직후까지 아우르는 장편 3부작을 계획했다. 3부작 중 3부에 해당하는 <낫>이 제일 먼저 나왔다. 1부에 해당하는 작품은 5권으로 출간할 예정이다. 한민족이 가진 고유의 귀소 본능 다룬 <문신>이 바로 그것.호사다마라고 했던가. <문신>은 사연 많은 책이다. 사실 <낫>보다도 먼저 집필하기 시작한 작품이다. 출판사가 자진 폐간하면서 수년간 출판권 분쟁을 겪었고, 출판권 시효까지 집필을 중단했다. 이어 다른 출판사도 자진 폐간하면서 같은 문제를 되풀이해야만 했다. 결국, 계약금을 배상하고 출판권을 되찾았다. 고향에 내려와 개작하면서 스토리를 변화하고 모티브도 추가했다. 지난해 9월부터는 건강상의 이유로 집필을 잠시 중단했다. 현재 5권 중 4권을 집필한 상태다.<문신>을 이루는 큰 뼈대는 부병자자(赴兵刺字) 풍습과 북해도에 강제 징용된 조선인이 부른 아리랑이다. 부병자자 풍습은 병정으로 뽑혀 나갈 때 몸에 바늘로 새기는 글씨 즉, 문신을 말한다. 외침이나 내란으로 전쟁이 발생해 객사할 경우 가족들이 시신을 알아보도록 하기 위함이다. 죽어서라도 고향 선산에 묻히길 바라는 귀소, 귀향 본능이다. 또 북해도에 강제 징용된 조선인들은 수모와 치욕을 견디는 방법의 하나로 아리랑을 불렀다. 이를 형편과 처지에 맞게 개사해 부른 밟아도 아리랑도 귀소 본능과 관련된다.그는 집필하면서 문신이란 소재에 대한 문학적 보편성, 토속어 사용에 대한 대중적 반응 등을 걱정했다. 그러나 괘념치 않을 생각이다. 향수, 귀소 본능 등은 인간의 본성으로 형식만 다를 뿐 본질은 같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50년간 습득한 순우리말과 토속어도 최대한 활용할 생각이다. 모국어의 아름다움을 알리는 것도 작가의 의무 중 하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그는 윤흥길적인 작품으로 단편은 <황혼의 집> <기억 속의 들꽃>, 중편은 <꿈꾸는 자의 나성> <쌀>, 장편은 <에미> <묵시의 바다>를 꼽았다. 반백 년 동안 그는 대중들이 대표작으로 언급하는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장마> <완장> 등 왕성한 집필 활동을 이어왔다. 50년간 글을 썼지만 아직도 쓰고 싶은, 써야 할 작품이 많다. 그래서 초조하다. 자꾸 살아생전 어디까지 쓸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젊을 적 나로서는 최선을 다해 집필했다고 자부했어요. 그런데 나이가 드니 허점과 구멍이 많이 보여요. 쓰고 싶고, 써야 할 작품이 줄 서 있어요. 나이 들어도 현역으로 활동하고 싶어요. 완주를 소재로 한 작품, 전주 한지에 대한 작품, 손주를 위한 동화도 쓰고 싶고요.지빠귀 울음소리가 세시 이십 분 전으로 들린다는 작가. 그의 집 주변은 딱새, 지빠귀, 고라니 등 동화 소재로 가득 차 있다.그는 창작 근원에 대해 관심이 커지면 애정이 되고, 애정이 커지면 작품 쓸 의욕이 생긴다며 자신의 눈에 비치는 것에 대해 끊임없이 관심 두고, 자신이 처한 세계를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

  • 문학·출판
  • 문민주
  • 2018.01.05 23:02

[불멸의 백제] (2) 1장 칠봉성주(七峯城主) ②

강이 산줄기를 따라 흐르고 있어서 방어에 아주 적당합니다.장덕 진광이 성을 안내하면서 말했다.10명으로 능히 1백여명의 적을 막을 수가 있지요.석성(石城)은 높이 15자(4.5m) 정도인데다 틈이 많아서 넘기에 어렵지가 않다. 그러나 산 아래쪽 강이 막힌데다 숲이 짙어서 칠봉성(七峯城)은 지금까지 한번도 함락된 적이 없다고 했다. 계백이 성루에서 좌우를 둘러보았다. 왼쪽은 넓은 평야였고 바다에 닿는다. 그리고 오른쪽은 산맥이 펼쳐져 있다. 마치 칠봉성을 뒤에서 막아주는 것 같다. 평야쪽으로 군데군데 마을이 보였는데 이곳저곳에서 밥짓는 연기가 올라오고 있다.성주께선 연남군에서 기마대장을 지내셨다고 들었습니다.문득 진광이 말해서 계백이 시선을 주었다. 진광은 30대 초반쯤으로 계백보다 10년쯤 연상같다. 진광이 웃음띤 얼굴로 말을 이었다.열흘쯤 전에 군(郡)의 도사(道使)가 다녀갔거든요. 공을 많이 세우셨다고 하더군요.싸울 기회가 많았으니 죽기 아니면 살아서 승진하는 것 외에 다른 수가 있겠나? 덕솔이 그곳에 있었다면 지금은 군장(郡將)쯤 되어 있을 거네.과분한 말씀.젊은 상관에 대한 거부감이 조금 가셔진 진광의 어깨가 늘어졌다. 성주로 부임한 계백은 장신의 호남이다. 눈매가 날카롭고 입은 꾹 닫쳐져서 위압감이 느껴졌지만 웃을 때 보면 얼굴이 환해진다. 진광이 알아본 바에 의하면 계백은 지금까지 바다건너 대륙의 백제령인 담로(檐魯) 연남군에서 기마대장을 지냈다. 가족은 없고 시종 하나만 데리고 다닌다고 했다. 그때 발을 뗀 계백이 말했다.대륙에서는 당과 싸우고 귀국해서는 신라와 싸우게 되는구려.전시(戰時)지요.옆을 따르면서 진광이 말을 이었다.이곳 칠봉성은 내지여서 가끔 신라군의 기습군에게 피해를 입을 뿐입니다.성루를 내려간 계백이 이제는 전력 점검을 했다. 칠봉성의 보유 병력은 기마군 125인, 보군 236인이며, 말은 220필, 보유 양곡은 110일분이다. 성(城) 지휘부는 나솔 관등의 성주 계백과 보좌역인 장덕 진광, 그리고 소장급 10품 계덕 2명과 11품 대덕 3명, 조장 보좌역격인 12품 문독 3명, 13품 무독 4명이 있다. 전력 점검을 마친 계백이 성안의 마룻방에 진광과 계덕, 대덕급의 조장들을 불러 둘러앉았다. 진광이 먼저 보고했다.칠봉성에서는 근처 50리 안의 9개 마을을 방어하고 있습니다. 가구수 5백호 정도에 3천명쯤 되는데 각 마을에 연락병과 정탐병을 배치시켰습니다.작년에 신라군이 기습해왔나?계백이 오면서 들었던 말을 물었더니 진광이 대답했다.예. 원산(元山) 마을이 기습을 당했지요. 밤에 갑자기 기습을 해서 성에서 출동했을 때는 사라진 후였습니다.신라 별동군인가?아닙니다.나선 사내는 계덕(季德) 왕수, 30대 후반쯤으로 수염이 잡초처럼 무성한 사내다. 어깨를 핀 왕수가 말을 이었다.국경 근처의 고선성에서 나온 기마군입니다. 그때 잡아간 마을 사람들이 지금 그곳에서 종이 되어 있습니다. 일부는 팔려갔구요.그러자 진광이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왕수는 세작을 관리합니다. 성을 지키려면 세작도 관리해야 됩니다.

  • 문학·출판
  • 기고
  • 2018.01.04 23:02

[불멸의 백제] (1) 1장 칠봉성주(七峯城主) ①

백제 의자왕 3년(643년) 8월, 백제 남방(南方) 소속의 산성을 향해 2명의 기마인이 다가가고 있다. 오후 미시(2시) 무렵, 초가을의 햇살이 강하게 쪼이는 맑은 날씨, 기마인의 옷은 땀과 먼지로 얼룩졌고 말은 피로한듯 자꾸 머리를 떨군다.주인, 산성이 보이지 않소.마신(馬身)쯤 앞서가던 사내가 앞을 향한채 말했다. 3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사내는 건장한 체격으로 손에 창을 쥐었다. 그 창으로 앞을 가로막는 나뭇가지를 후려쳐 길을 내거나 풀숲을 휘젓는다. 그때 뒤를 따르던 사내가 머리를 들고 앞쪽을 바라보았다.군사 셋이 내려온다.놀란 듯 앞장 선 사내가 말을 세웠을때 과연 잔나무를 헤치면서 군사 셋이 내려왔다. 둘을 발견한 군사들이 주춤거리더니 앞장 선 군사가 물었다.뉘시오?칠봉산에서 오는 길이냐?뒷쪽 기마인이 되묻자 군사들이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예, 그렇습니다만내가 신임 성주 계백이다.놀란 군사들이 제각기 허리를 꺾어 절을 했지만 앞장 선 군사가 또 물었다.그러시다면 군성(郡城)에 들렸다 오시는 길이십니까?그렇다. 군장(郡將)께서 안내역을 붙이신다고 했지만 내가 지리도 익힐겸 찾아오는 길이다.그럼 저희들이 성주를 모시지요.앞장 선 군사가 몸을 돌리며 말했다.저희들이 7봉 좌측 순시를 나가는 길이었으니 성주를 모셔도 됩니다.이제 기마인 둘은 군사들의 안내를 받으며 길도 없는 산을 오른다. 산은 높지는 않지만 굵은 나무가 빽빽했다.그때 기마인이 앞장선 군사에게 물었다.7봉성이라고 했으니 봉우리가 7개란 말이냐?예. 그러나 주봉(主峯)의 남쪽과 서쪽으로 각각 봉우리가 6개씩 있어서 7봉이 2개인 셈이지요.숲속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말대답하는 군사는 셋중 선임인 모양이다. 군사가 말을 이었다.산성은 주봉에 있습니다.오면서 보았더니 아랫쪽 고을이 제법 풍족했다. 아이들이 잘 먹어서 몸에 살이 붙었고 어른들은 깨끗했다. 근래에 우환이 없었느냐?그때 군사가 머리를 돌려 기마인을 보았다.제가 듣기로 성주께서는 바다건너 내륙의 담로(檐魯)에서 오셨다지요.그렇다. 연남군(郡)에서 왔다.그래서 잘 모르시는군요. 작년에 신라군이 기습해와서 아녀자 20여명을 잡아갔습니다.여기까지 기습을 해왔단 말인가?예. 기마군 1백기 정도였지만 산성에서 나갔을 때는 이미 도망친 후였습니다.산성에 기마군이 2백여기가 있는 건 맞느냐?지금은 1백여기에 보군 2백 정도입니다. 나리.그때 앞쪽 시야가 트이더니 돌로 만든 낮은 석성(石城)이 드러났다. 앞장선 군사가 먼저 성 안으로 뛰어 들어가더니 곧 갑옷차림의 무장이 달려나왔다.성주가 오십니까?사내가 두손을 모으고 다가와 묻는다.제가 성주대리를 맡고 있던 장덕(將德) 진광입니다.나솔(奈率) 계백이요.신임 성주 계급은 6급품(品)이었고 진광은 7급품이다.

  • 문학·출판
  • 기고
  • 2018.01.03 23:02

[2018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자 뒷이야기] "사람 냄새 나고 위안이 되는 글 쓰고 싶어요"

겨울이면 눈처럼 신춘문예 열병이 찾아온다. 이 열병은 흠씬 앓지 않고는 낫지 않는다. 스스로를 치열하게 갈고 닦는 습작 기간, 수없이 도전하고 좌절하는 기다림의 시간을 견뎌내야만 한다. 그래야 비로소 새봄을 맞이한다.비 오는 크리스마스이브, 당선 소식을 알리는 전화 한 통으로 남들보다 일찍 새봄을 맞은 이들이 있다. 전북일보 2018 신춘문예에 당선된 김헌수(51시), 최아현(23소설), 이경옥(57동화), 김영주(53수필) 씨가 그동안의 준비 과정과 앞으로의 활동 계획 등을 들려줬다.김헌수 씨에게 시는 숨구멍과도 같다. 시는 삶의 동기를 부여하고, 성취감을 느끼게 했다. 사는 맛이 났다.그러다 2010년 전북여성백일장 차하로 당선되면서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전북여성백일장 모임인 문학동인 글벗에서 활동하다 2015년 우석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에 진학했다. 10여 년 간 신춘문예 문을 두드렸고, 결국 문이 열었다.그는 짓밟아도 얼어붙어도 봄이 되면 멀리 날아가는 민들레 홀씨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소리 없는 아우성을 외치는 약자의 시선, 낮은 곳의 시선을 담아내고 싶다며 각박한 세상 속에서 따뜻한 시, 사람 냄새나는 시를 쓰고 싶다고 밝혔다.최아현 씨는 생애 첫 신춘문예 응모에 덜컥(?) 당선됐다. 아직도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다고 할 정도.전주대 역사문화콘텐츠학과 학생으로 소설은 이제 막 배우는 단계다. 홀로 습작하고 이를 몇몇 지인에게만 보여줬기 때문에 부모님은 물론이고 지인 대부분이 소설 습작 자체를 몰랐다고 한다.그는 여성 간의 연대에 큰 관심을 보였다. 여성이 주인공인 이야기를 쓰고 싶어요. 제가 자라면서 그런 글을 많이 접하지 못했거든요. 조금 더 다양한 여성상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그래서 더 많은 걸 꿈꾸는 사람들이 늘어났으면 좋겠어요.15년간 독서 지도를 한 이경옥 씨는 3년 전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 15년간 매달 읽던 동화였다. 자신을 위한 치료 또는 치유 목적이었다. 그는 동화를 쓰면서 스스로 정화되는 걸 느꼈다고 한다. 그 글을 읽은 아이들의 상처도 치유되길 바랐다.그는 동화에 대해 누구나 읽어도 공감할 수 있는 글이라고 정의했다. 아이들 시점에 맞춰 단어를 선택하기 때문에 엄격하고 정제된 글이라는 것. 그 자신도 누구나 읽고 공감하는, 마음의 위안을 얻는 동화를 쓰고 싶다고 했다. 동화 안에 담긴 철학적 사유도 강조했다.김영주 씨는 2014년 학부형에서 학생이 됐다. 그는 우석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14학번, 그의 아들은 우석대 문예창작학과 12학번이다. 그의 나이 쉰, 대학원 진학을 결심했다. 멀리 떨어져 사는 딸을 늘 마음 아파하셨던 아버지는 등록금으로 딸의 도전을 지지했다. 그는 메모지를 들고 다니면서 글을 썼다. 종이가 없을 때는 영수증 뒷면도 메모지로 활용했다.그는 사물의 이면을 바라보는 예민한 감성을 지녔다. 꽃을 꽃이라고 보는 사람, 꽃을 장미꽃이라고 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꽃대의 상처를 보는 사람이다. 신춘문예 당선은 이 예민함을 피곤한 성격이 아닌, 축복받은 창작 도구로 받아들이게끔 했다.그는 위안이 되는 글을 쓰고 싶다고 했다. 세상 사람들은 마음 속에 장애를 하나씩 가지고 있어요. 남들이 별 것 아니라고 하지만 나에게는 큰 장애죠. 누군가 내 글을 읽고 힘을 얻길 바랍니다.

  • 문학·출판
  • 문민주
  • 2018.01.03 23:02

3일부터 전북일보에 '불멸의 백제' 연재하는 이원호 작가 "전라도 1000년 맞아 백제 자긍심 드높이는 소설 쓸 것"

삶을 포기하고 싶은 순간 펜을 들었다. 27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102종 237권의 책을 썼다. 요즘도 하루 평균 50~60장의 원고를 쓴다.새해 아침부터 불멸의 백제를 전북일보에 연재하며 고향 독자들과 만나는 이원호 작가(70).그는 샐러리맨이었다. 전주고와 전북대 섬유공학과를 나와 BYC에 입사했다. 수출부에서 10여년 일하다 퇴사한 뒤 중소기업을 차렸다. 창업 후 탄탄대로를 밟는 듯 했다. 사우디와 쿠웨이트에 지사를 둘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1990년 8월 2일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했습니다. 80~90%를 수출하던 중동시장이 막혀버린 거죠.수출길이 막혔지만 버텨보려 했다. 녹록지 않았다. 3개월 만에 부도가 났다. 넉넉하진 않았지만 평범했던 일상이 나락으로 떨어졌다. 하루하루가 고통의 연속이었다. 삶의 희망을 놓으려했다.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자서전이라도 쓰고 마무리하자는 생각에 글을 썼다. 수배자 신분으로 1991년 할증여행이란 책을 냈다. 이 책을 접한 출판업계에서 제안이 왔다. 소설을 써보자는 것이었다. 밤의 대통령을 출간했다. 하루 만권씩 팔려나가며 밀리언셀러가 됐다. 샐러리맨이었던 그의 삶을 180도 바꿔놓았다.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출판하는 책마다 좋은 성과를 냈다.그러나 그는 자만하지 않았다.책 좀 팔렸다고 자만하고 독자를 무시했다면 지금의 이원호는 없었을 겁니다.이 작가는 지금도 원고를 쓰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하루의 대부분을 자료수집 등 앞으로 쓸 소설의 재료를 찾는데 할애한다. 계층별 독자들의 취향을 맞추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인터넷을 통해 독자들과 소통하면서 그들의 취향에 맞는 소설을 쓰기 위해 노력합니다. 시대에 뒤처지지 않게 끊임없이 공부도 하고 있습니다.이 작가는 이원호 닷컴을 운영한다. 스마트폰도 곧잘 사용한다. 그러나 원고는 꼭 200자 원고지에 직접 손으로 쓴다. 집안에 원고지만 10만여 장이 쌓여있다. 컴퓨터를 사용하면 편하지만 원고지를 쓰는 이유는 글에 정성을 담기 위해서다.전북일보 연재를 앞둔 이 작가는 고향에 돌아온 느낌이다. 고향 분들이 내 소설을 매일 아침 읽는다고 생각하니 뿌듯하다면서 더 유익하고, 더 재미있고, 기억에 남을 만한 소설을 써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낀다고 말했다.그러면서 올해가 전라도 1000년이다. 제 소설을 통해 백제에 대한 자긍심을 느낄 수 있도록 열심히 작업하겠다. 이 소설로 많은 사랑을 보내준 고향 분들께 보답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불멸의 백제-개요- "계백이 승자였다면 긴 기록 남았을 것 1300년전 백제 영혼 끌어모아 보겠다"서기 660년 7월 10일, 황산벌에서 백제 장군 계백이 5천 군사와 함께 패사(敗死)하면서 백제는 멸망했다. 의자왕 20년, 신라 태종무열왕 7년, 고구려 보장왕 18년 때였다.우리는 기록으로 역사를 배운다. 의자왕이 3천 궁녀를 거느리면서 방탕한 생활을 하며 충신을 배척하고 간신들과 함께 국사를 그르쳤다고도 배웠다.역사는 승자(勝者)의 기록이다.패자는 변명할 여지도 없다. 그래서 부여 낙화암에서 3천 궁녀가 떨어져 죽었다는 기록이 아직도 남아있다. 너무 알려졌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기록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계백이 이끈 황산벌 싸움 같은 경우다. 계백이 5천 군사로 김유신의 5만 군사를 네번 싸워 네번 이기고 다섯번째에 패사했다는 기록. 계백이 전장에 나서기 전(前), 처자를 죽이고 나섰다는 기록.계백이 싸움에 임하기 전 군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던가?옛날 월왕 구천은 5천 군사로 오나라 70만 대군을 물리쳤다! 너희들이 죽기로 싸우면 신라군을 몰사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 뿐이다.계백이 승자였다면, 백제가 승전국이었다면 긴 기록이 남았을 것이다. 나는 1300여년 전 사라진 백제국의 땅에 계백과 기록에도 없는 영혼들을 다시 끌어 모아 보겠다.몇 점 되지 않는 기록을 뼈로 삼아서 살과 핏줄, 그리고 혼까지 불어넣어 볼 작정이다. 그래서 먼저 계백을 완산칠봉의 칠봉성주(七峯城主)로 부임시켜 소설을 시작한다. 백제인, 그 뿌리가 무엇이건 1300여년후, 같은 땅을 밟고 선 우리 모두가 조상의 혼에 자긍심을 갖도록 하는 것이 이 소설의 목표다. 작가 이원호● 소설 줄거리현재 '완산칠봉'이 소설 첫 무대 서기 643년~백제 멸망 17년간 다뤄의자왕 3년(643년) 8월에 계백(階白)이 백제 남방(南方) 소속의 칠봉성(七峯城) 성주(城主)로 부임하는 것으로부터 소설이 시작된다. 칠봉성(七峯城)은 봉우리가 7개였기 때문에 1300여년 전에도 그렇게 불렸다고 가정한 것이다. 바로 지금의 전주 완산칠봉이다.계백은 24세, 바다 건너 대륙의 백제령인 연무군에서 기마대장으로 복무하다가 본국으로 온 것이다. 신라와의 전운(戰雲)이 가득 덮인 시기다. 백제는 고구려와 협력하여 신라를 압박했고 전년(前年)인 의자왕 2년에는 신라의 40여개 성을 공취했다.계백은 칠봉성에서부터 의자왕과 함께 백제의 역사를 만들어 나간다. 물론 지금은 다 소실되어 사라진 역사와, 기록에 한두줄씩 남아있는 윤충, 성충, 의직이 계백과 함께 한다. 또한 고구려의 연개소문, 신라의 김유신과 김춘추가 당시대의 인물인 것이다.나는 서기 660년 7월 18일, 백제가 멸망할때까지 17년 간의 격변기를 소설로 꾸며볼 계획이다. 1300여년 전 우리의 조상들이 어떻게 살았고 어떻게 죽었는가를 다양하게 그려내면서 반면교사(反面敎師)의 소득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소설은 재미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재미가 있어야 읽히고, 읽는 독자가 있어야 소설의 가치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 재미속에서 의미를 찾게 된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다.■ 이원호 작가는- 전주출신에 무역업 경력 밤의 대통령강안남자 등 여러 장르 마니아층 형성전북 전주 출신으로 10여 년간 무역업에 종사하다가 (주)경세무역을 설립해 경영했다.1991년부터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해서 1992년 <밤의 대통령>, <황제의 꿈>으로 연속 밀리언셀러를 기록, 단숨에 대중소설 최고의 작가로 부상한 후 현재까지 끊임없이 각종 소설을 발표했다.기업가 출신이어서 기업소설은 물론이고, 협객, 역사, 무협, 연예, 정치 등 모든 장르를 아우르며 마니아층을 형성했으며, 문화일보에 <강안남자>를 연재, 한때 외설소설로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적도 있다.월간조선에서 <대통령>을 시작으로 정치소설을 연이어 출간한 적도 있으며 신동아에 <2014>를 연재, 남북한 가상 전쟁소설을 써 연평도 사건을 부각시켰다.<계백>, <난중무사>, <바람의 칼> 등은 역사소설이며, <천년한 대마도>는 대마도의 한국령을 주장한 소설이다.현재에도 매년 7, 8권의 소설을 발표, 독자들과의 인연을 이어가고 있으며, 현역 소설가로서 유일하게 닷컴(http://leewonho.com)을 활성화시켜 운영 중이다. 서울=박영민 기자△주요작품<밤의 대통령> <황제의 꿈> <할증여행> <할증인간> <영웅의 도시> <계백> <대한국인> <레임덕> <도시의 남자> <유라시아의 꿈> <초인의 전설> <불야성> <대영웅> <반역> <약속> <질풍시대> <2014> <무법자> <냉혈자> <강안남자> <려명> <난중무사> 등

  • 문학·출판
  • 박영민
  • 2018.01.02 23:02

[전북일보 신춘문예 소설 심사평] "풋풋한 감성 유지·찬찬한 글쓰기 강점"

우리에게 전달된 단편소설 작품은 모두 6편이었다. 언제나처럼 심혈을 기울인 이 작품들 가운데 어느 것 하나를 선택하는 행위에는 긴장감을 느낀다. 하지만 우리도 이런 과정을 통해 소설가라는 ‘자격증’을 얻었고 거기 기대어 오랜 세월을 살아왔다. 소설이란 단순한 장르가 아니라 인간학이며 인류학임을 알았고, 삶의 망(網)에 정점을 이루는 매듭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 주장의 근거에 ‘소설은 문장이다’라는 선언적 명제가 자리잡고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아침 대화’, ‘휴가’, ‘삼중주’로 좁혀 살피게 되었는데, ‘삼중주’는 상당히 연마한 솜씨에 ‘복어’라는 사물이 신선하여 눈길을 끌었다. 다만 나중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나 사물들이 너무 많아 집중도가 약해지는 흠을 안고 있었다. 이런 결점은 ‘휴가’에서도 반복된다. 인물과 장소가 여럿 나와서 작품을 흐트러지게 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든 여럿 등장하면 합쳐놓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럼으로써 작품의 의미와 이미지가 모아져 뚜렷해진다. ‘아침 대화’는 제목이 평범하여 처음에는 눈에 띄기 어려웠다. 그러나 편의점의 ‘CCTV’를 매개체로 끝까지 이끌어가는 힘을 높이 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풋풋한 감성이 유지되고 있어서 다시 눈길을 사로잡았다. 찬찬한 글쓰기 또한 강점으로, 숙고 끝에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험난한 앞길에 영광이 있길 빈다.

  • 문학·출판
  • 전북일보
  • 2018.01.02 23:02
문화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