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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ㆍ피천득 올해 탄생 100주년

천재 시인 이상(1910-1937)과 국민 수필가 피천득(1910-2007)이 올해 나란히 탄생 100주년을 맞는다. 시대를 앞서간 뛰어난 시와 소설로, 또 국민의 심금을 울리는 감성적인 수필로 한국 현대문학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긴 두 문인의 삶과 문학이 탄생 100주년을 맞아 다시 한번 조명된다.'천재시인', '한국 현대시 최고의 실험적 모더니스트', '한국 시사 최고의 아방가르드 시인' 등의 수식어가 붙는 이상은 1930년 장편 '12월12일'을 '조선'에 연재하며 처음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1934년 조선중앙일보에 난해시 '오감도'를 발표한 후 거센 논란과 함께 주목을 받았고 1936년 소설 '날개'를 발표해 문단의 총아로 떠올랐다. 서울에서 출생한 데다 스물일곱의 나이로 요절해 지자체나 유족을 중심으로 한 기념사업이 상대적으로 빈약했던 이상은 이번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도 학술행사나 출판 등을 중심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이상의 문학세계를 조명하는 학술대회가 연내 마련되며 지난해 이상전집을 발간하기도 한 권영민 서울대 교수가 올해 이상 문학을 키워드로 정리한 저서를 출간하는 등 연구서 출간도 잇따를 예정이다. 수필가이자 시인, 영문학자였던 금아(琴兒) 피천득은 올해 탄생 100주년과 함께 3주기도 맞는다. 1930년 신동아를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한 피천득은 특히 일본 유학시절 연모의 정을 품었던 소녀 아사코와의 만남과 헤어짐을 담담한 문체로 풀어 낸 수필 '인연'을 통해 국민 수필가의 반열에 올라섰다. 서울 잠실 롯데월드 내에 2008년 개관한 '금아 피천득 기념관'과 시인의 묘소와 시비가 있는 경기도 남양주시 모란공원 등에서 유족과 제자 등을 중심으로 시인의 삶과 문학을 기리는 움직임이 이어질 예정이다. 이와 함께 북한에서 활동한 문학평론가 안함광(1910-1982)과 월북 소설가 겸 시인 허준(1910-?)도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는 문인들이다. 황해도 신천에서 태어난 안함광은 1930년 조선일보에 평론을 발표하면서 등단한 후 1931년 백철과의 농민문학 논쟁을 통해 문단에 이름을 알렸다. '민족과 문학', '문예론' 등을 통해 민족문학론을 전개하던 그는 분단 이후에도 북한에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다 1967년 발표한 평론을 빌미로 당과 대학에서 숙청 당한 후 활동을 중단했다. 1934년 시인으로, 1936년 소설가로 등단한 허준은 각각 10여 편의 시와 소설만을 남긴 과작(寡作)의 작가다. '탁류'와 '야한기', '습작실에서', '잔등' 등 심리주의적 색채를 띤 모더니즘 계열의 소설을 발표한 그는 1948년 월북 이후 더이상 작품 활동이나 행적이 알려지지 않고 있다. 해마다 탄생 100주년 문인 기념문학제를 열고 있는 대산문화재단과 한국작가회의는 올해에도 이들을 비롯한 1910년생 문인들을 기리는 다채로운 행사를 마련할 예정이다.

  • 문학·출판
  • 연합
  • 2010.01.04 23:02

시 김혜원씨 "삶의 진실이나 진정성 시로 표현"

'먼지'로 시부문에 당선된 김혜원씨(49·우석대대학원 문예창작학과)는 개인전을 네차례나 한 사진작가다.우석고 국어교사로, 동료교사인 이세재 문정희씨가 신춘문예에 당선되는 것을 보며 한편으로 부러운 마음이 없진 않았지만 시란 모든 예술 중 인간 정신의 가장 높은 영역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동안 쓸 엄두를 내지 못했다.그가 시를 쓴 것은 순전히 사진때문. 어렸을 때부터 미대에 가고 싶었지만 경제적 여건상 국문학과에 들어갔고, 좌절된 꿈 때문에 결국 사진을 뒤늦게 전공했다. 사진을 찍게 되면서 카메라로 다하지 못한 말들이 마음 속에 시로 남기 시작했다."사진과 시의 차이를 많이 생각하고 있는데도, 솔직히 아직도 많이 헷갈려요. 사진적 주제를 가지고 시로 쓰면 늘 실패하거든요. 사진은 시보다 현실 가까이에 있고 시는 현실 너머 저쪽, 상상의 세계를 사진보다 훨씬 많이 필요로 하는 장르여서 그런 것 같습니다."그는 "시도 결국 허구지만, 잘 만들어진 허구 속에서도 배어나올 수 밖에 없는 육화된 삶의 진실이나 진정성을 나누고 싶다"고 덧붙였다."제가 사진과에 처음 들어갔을 때, 한 교수님께서 사진가는 먼지 같은 존재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카메라를 메고 괜히 재고 다니지 말라는 뜻이었던 것 같은데, 그 때부터 모든 먼지가 제 눈에 의미있게 띄게 시작했어요."당선작 '먼지'를 쓰면서는 먼지가 단순히 개인적인 이야기로 그치지 않도록 일반화하려고 노력했다. 가난하고 허름하고 고단한 인생살이를 성찰하고 그 견딤과 희망을 드러내어, 우주 속 하찮은 한 점 먼지를 모든 인간존재의 초상으로 만들고 싶었다. '먼지' 안에 세 편의 시를 묶어놓은 것은 개성적이면서도 한 편으로 말할 때보다 더 큰 힘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동안 사진으로 지형과 환경에 대한 작업을 해왔습니다. 그래서 시도 생태환경주의 쪽으로 갈 것 같기도 해요. 하지만 아직은 공부 중이니 행로가 바뀔지도 모르겠습니다."그는 "신춘문예 출신이 많이들 문단의 미아가 된다던데, 지금 시를 못 쓰는 것은 괜찮지만 앞으로 시력이 쌓이고도 못 쓸까봐 걱정이 된다"며 수줍게 웃었다.▲ 나에게 시란? 시는 내가 꿀 수 있는 가장 맑고 간결하고 섬세한 꿈. 맑다는 것은 시경에 나오는 사무사(思無邪), 마음에 사악함이 전혀 없다는 경지를, 간결하다는 것은 시의 압축성을, 섬세하다는 것은 유일무이를 위한 지극히 미묘한 차이의 결을 말한다. 그리고 꿈은 상상력이다.▲ 문학의 힘이란? 문학에는 현실을 위무(慰撫)하는 힘이 있다. 개인적 현실이든 시대적 정치사회사적 현실이든, 현실을 위안, 위로, 격려, 고무, 고양하는 힘이 바로 문학의 힘이다.▲ 시를 통해 나누고 싶은 것은? 육화된 삶의 진실 혹은 진정성.

  • 문학·출판
  • 도휘정
  • 2010.01.04 23:02

소설 정희경씨 "글쓰기 통해 상처 치유하고 또 성장"

무엇을 해도 힘겹게 따라가기 바빴다. 학창시절에는 공부를, 사회에 나와서는 직장생활을, 겨우 겨우 턱걸이하며 버텨왔다. 그런 그에게 소설이란 자기 구원. 처음에는 일기를 썼고, 다음에는 책을 읽고 감상을 썼다. 일기도, 독후감도, 형식은 달랐지만 글쓰기를 통해 상처를 치유하고 또 성장할 수 있었다.'액땜'으로 소설부문에 당선된 정희경씨(42). 그는 "사람으로 살면서 상처를 받지 않고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사람들은 그런 상처를 자기가 사랑하는 분야에 몰입하면서 극복할 수 있다"고 말했다.신춘문예 당선이란 그에게 헛되게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는 칭찬과도 같은 것. 그렇게 그는 한단계 뛰어오를 수 있는 자기변신의 기회를 얻었다."모든 소설의 원형질은 똑같아요. 사람들이 만들어낼 수 있는 사건은 톨스토이의 소설이나 텔레비전 막장드라마나 마찬가지죠. 사랑하고, 미워하고, 죽고, 복수하는 것이 별반 다를 것이 없는데도 어떤 것은 인류역사에 길이 남을 고전이 되고 또 어떤 것은 막장이라고 손가락질을 받습니다. 그건 작가가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기 때문이죠."정씨는 "같은 사건이라도 남들이 미처 살펴보지 못하는 측면을 보고 새롭게 만들 때 독자가 그 사건을 통해 자신의 삶을 반추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다"고 말했다.그는 자신의 소설을 읽는 독자가 무릎을 치며 경탄할 수 있도록 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그것은 마치 독자와의 기싸움과도 같아서 작가로서 독자에게 지는 순간, 독자는 작가의 소설을 손가락 끝에서 튕겨버린다.'액땜'은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하면 안정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세상은 고정돼 있는 것이 아니며, 변화가 불안하기는 하지만 결코 두려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문체와 상상력은 생기발랄한 20대 같지만, 그의 소설을 읽어본 사람들은 입심이 좋아 '아줌마 소설'이라고 한다."단편소설은 밀도가 높아야 하기도 하지만 사유의 응집이라고 생각해요. 제 소설은 아직은 어떤 사유의 지점을 만들지는 못하는 것 같아요. 소설 형태는 만들어 내지만 실험정신이나 새로움은 부족한 것 같아 더 노력해야 할 것 같습니다."제부가 운영하는 동물병원에서 일하는 정씨. 수의사인 제부가 동물을 보러 밖으로 도는 동안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앉아서 소설을 쓰는 것 뿐이었다. 그는 앞으로도 입심이 끝없이 달려가면서도 재미있는, 그런 소설을 쓰고 싶다고 했다.▲ 나에게 소설이란? 자기구원을 통한 성장의 통로▲ 문학의 힘이란? 작가가 만들어놓은 이야기를 통해 독자가 자기 삶을 되돌아 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드는 것.▲ 소설을 통해 나누고 싶은 것은? 자기구원의 끝은 타인과의 공감. 상처 입은 개들이 서로의 상처를 핥아주듯 내 상처를 양분으로 만들어진 이야기를 통해 다른 사람들이 위로받기를 원한다.

  • 문학·출판
  • 도휘정
  • 2010.01.04 23:02

동화 백상웅씨 "어렵지 않은 글, 아이들에게 꿈 안겨줘"

한 살 어린 여동생이 아이를 낳았다. 돈 없는 학생 신분이었던 삼촌은 조카에게 선물하기 위해 동화를 쓰기 시작했다. 2년 전 겨울부터 써온 동화. 시는 쓸 때 힘들고 쓰고나면 성취감이 느껴진다면, 동화는 쓸 때에도 즐겁다.'꽃 켜는 아저씨'로 동화부문에 당선된 백상웅씨(29·우석대 문예창작학과4). 그는 2008년 '제8회 창비신인시인상'에 당선된 젊은 시인이다. 창비에 당선되기 전까지만 해도 그 역시 신춘문예의 열병을 앓고있던 문청(文靑·문학청년). 이번에는 신춘문예를 준비하던 후배들의 시를 봐주다가 써놨던 동화를 고쳐 같이 보내게 됐고, 엉겹결에 당선돼 주적(主敵)이 됐다.'꽃 켜는 아저씨'는 여자친구와 벚꽃이 활짝 핀 밤 캠퍼스를 걷다 얻은 소재. "벚꽃이 한꺼번에 밤 중에 켜진 것 같다"는 여자친구 말에 "그거 나 줘라"하고 동화를 쓰기 시작했다."우석대 문창과 수업은 특이해요. 안도현 교수님은 꽃이름이나 꽃 피는 순서를 자주 물으시죠. 그걸 동화로 쓴다면 아이들에게 꽃 피는 순서도 알려주고 이야기로 감동도 줄 수 있겠다고 생각했었어요. 사실 '꽃 켜는 아저씨'의 아저씨는 안도현 교수님이세요."시인이라고는 교과서에 나오던 김지하 김수영 백석 정도만 알던 시절. 수업시간 선생님이 불러주던 '타는 목마름으로'란 노래에 '시가 저렇게 멋진 것이었구나. 나도 저런 시를 한 번 써보고 싶다'라고 생각했다."요즘에는 현실과 관련된 동화가 많이 나오는데, 아이들에게 너무 일찍 현실을 알려주는 것은 아닌가 걱정될 때가 있어요. 아이들에게는 상상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판타지를 쓰되 그 안에서 현실 이야기를 다루고 싶습니다."동화를 쓰는 데 있어 지금은 어떠한 제약이나 한계를 두고 싶지 않다는 백씨. 다만, 어렸을 때 자신이 생각했던 것들, 궁금해 했던 것들을 되새김질하며 동화를 쓰려고 노력한다.그가 생각하는 좋은 동화란 어렵지 않아야 한다. 쉬운 소재와 주제, 쉬운 문장과 내용…. 어려운 내용은 쉽게 말할 줄 알아야 한다. 아이들 눈높이에 맞는 동화가 아이들에게 꿈을 주고 아름다운 세상을 가르쳐 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에게 동화란? 동심 그 자체. 동화를 쓰면 지금 머리 아픈 일들도 말끔히 사라진다. 동화로 내가 오랫동안 꿈꿔왔던 판타지 세계를 마음껏 펼치고 싶다.▲ 문학의 힘이란? 문학은 오래 남는다. 이것만이 문학이 가진 오래된, 강한 힘이다. 그러나 문학은 되도록 힘이 없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낮은 곳에서 높은 곳을 향해 이야기할 줄 알고, 누구나 읽을 수 있고 쓸 수 있을 것이다.▲ 동화를 통해 나누고 싶은 것은? 소설보다 더 소설적인 세상. 이 세상에 아직 존재하지 않은 세상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 문학·출판
  • 도휘정
  • 2010.01.04 23:02

수필 문솔아씨 "낯설게 보이는 수필 더 재미있게"

"휴대전화에 '063'이 뜨길래 달려나가면서 전화받았어요. 내년에 더 건필하자고 마음 정리를 다 했는데, 당선 연락이 와서 깜짝 놀랐죠."'누드'로 수필 부문에 당선된 문솔아씨(46·본명 문춘희). 그에게 수필이란 미처 보지 못했던 생의 발견과도 같다."생각만큼 글이 잘 안써지는데도 불구하고 막상 내려놓지 못할 때, 수필이 내게 그 무엇이 되어주지도 그 무엇을 해주지도 않으면서 끊임없이 노력을 요구할 때, 힘들었습니다. 습작시기를 건널 때는 회의도 많이 들었죠."지금은 전업주부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10년 동안 아이들에게 국어를 가르쳤었다. 학생들을 데리고 백일장을 나갈 때면 학생 지도보다는 직접 글을 쓰고 싶어 손이 간지러울 정도였다. 집에서 아이들을 키우면서도 마찬가지였다.본격적으로는 시를 먼저 썼다. 그러다 어느날 문득 자신의 시가 설명적이고 산문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산문으로도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수 있겠구나 싶어 3년 전부터 수필을 쓰기 시작했다."'누드'는 제목부터가 외래어이고 기존 수필과는 다른 시도를 했기 때문에 당선될 줄 몰랐어요. 같이 공부하는 문우들도 반응이 천차만별이었거든요. 솔직히 당선보다는 '붉새'를 쓴 작가에게 이런 신선함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어요."'누드'는 '붉새(붉은 노을을 일컫는 전라도 방언)'를 제목으로 내건 응모작을 보완하기 위해 함께 제출한 작품. 문씨는 "발가벗은 시나 소설이 많은데도 수필은 아직도 엄격주의가 지배하고 있다"며 "수필에도 낯설게 보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수필을 쓰면서 수필이 문학이란 범주안에서 다른 장르에 비해 밀려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때로는 수필도 문학이냐는 말을 들을 때면 열등감이나 열패감도 느껴지죠. 글에 대해 고뇌하고 절망하는 것은 똑같은데, 대중들한테 멀어지고 문학평론가들로부터 생활문 정도로 취급받는 현실이라면 수필 쓰는 사람들이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새로운 수필. 그는 수필을 시보다 더 잘 읽히고 소설보다 더 재미있는 장르로 만들고 싶다고 했다. 그가 "수필도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라며 질문을 던졌다.▲ 나에게 수필이란? 남편과 아이들 외에 내가 간절히 기댈 어깨같은 존재. 내 삶의 숨구멍 같은….▲ 문학의 힘이란? 문학은 치유의 힘을 가졌다. 꼭 전문 작가가 아니더라도 자신의 고통, 절망, 슬픔, 분노 등을 글로 표현하다 보면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되고 내면도 한결 다듬어지게 된다.▲ 수필을 통해 나누고 싶은 것은? 누군가의 고단한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 누군가의 시린 가슴을 데워줄 수 있는 따뜻한 손을 나누고 싶다.

  • 문학·출판
  • 도휘정
  • 2010.01.04 23:02

어린왕자, 어리석은 지구인을 꾸짖다

"사람이라고? 숲에다 도로를 만든다면서 너희 별에선 사람들한테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단 말이야? 당연히 나무들한테 물어봐야지. 나무들은 베이는 게 싫을지도 모르잖아."스위스 작가 찰스 레빈스키의 동화 '499살 외계인, 지구에 오다'(비룡소 펴냄)는 어린이를 위한 동화이지만, 오히려 어른들이 읽으면 뜨끔할 만한 내용이 많다. 주인공인 소설가에게 어느 날 다른 별 출신 '늙은 아이'가 수학여행을 온다. 겉모습은 10살 남짓한 아이이나 사실 499살이나 됐다. 그 별에서는 어른으로 태어나 다 자라야 비로소 어린이가 될 수 있고 학교도 다닐 수 있다. 소설가는 동ㆍ식물과 대화하고 신기한 재주를 부리는 아이에게 미셸이란 이름을 붙여주고 함께 살며 지구의 풍습을 하나씩 알려주는데, "넌 뭘 모르는구나", "그렇게 살면 참 불편하겠네"라며 호통을 치는 것은 소설가가 아니라 미셸이다. 이들의 선문답에는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연상케 하는 철학이 있다. 동물과 식물을 짓밟으며 지구의 주인인 양 행세하거나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목적과 가치를 향해 허덕이며 달려가는 인간 문명에 대한 풍자다. 사자를 숲에 풀어주자는 미셸의 제안에 소설가가 "그러면 경찰과 군인들이 총을 들고 사자와 전쟁을 벌일 거야. 사람들은 사자를 무서워하니까"라고 말하자 미셸은 "전쟁을 하는 이유가 단지 겁나서라고?"라고 서글픈 얼굴로 묻는다. 검표원에 대한 설명을 듣고는 "전철을 타려면 차표부터 사야 한다면서? 당연히 차표를 안 산 사람은 전철을 안 탔겠지"라고 의아해하고, 감옥에 대한 설명을 듣고 동물원에 가서는 "원숭이가 어쩌다 범죄자가 됐어?"라며 운다. 작가는 인간이 당연시하는 사회 규범과 관습, 가치가 과연 옳은 것인지 묻는다. 다만, 아이들을 가르치려 하기보다 그저 재기와 해학이 넘치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동화에는 아이가 고향별에서 배운 여러 학문의 '교과서'가 한쪽씩 실렸는데, 언중유골이라 읽다 보면 웃음을 터뜨리다가도 목에 무언가가 걸린다. "인생학(63학년용 교과서). 어른들은 '정치'라고 부르는 놀이를 좋아한다. 어른들은 이 놀이를 하면서 만날 싸우지만, 그렇다고 이 놀이를 금지해서는 안 된다. 어른들이 현명하고 지혜로운 어린이로 자라나려면 누구 한 사람이 미래의 일을 결정하면 안 된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아야 하기 때문이다."흐리겔 파르너 그림. 김영진 옮김. 232쪽. 8천500원.

  • 문학·출판
  • 연합
  • 2010.01.01 23:02

국제법·역사적 관점에서 본 독도 문제

독도 문제를 둘러싸고 한일의 갈등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동북아역사재단(이사장 정재정)이 '독도와 한일관계'라는 연구총서를 발간했다. 역사적 사실 관계를 정확하게 진단하고 분석해 독도 현안을 풀어보자는 취지로 펴낸 이 책은 동북아역사재단 독도연구소에 재직하고 있는 연구자 5명의 논문을 실었다. 홍성근 연구위원은 '일본의 독도 영토 배제조치의 성격과 의미'라는 글에서 일본이 1905년 이전에는 독도를 영유할 의사가 없었고 1945년 이후 독도를 실질적으로 점유한 적이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일본이 1905년 독도를 시마네현으로 편입시킨 조치는 러일전쟁이라는 한반도 침탈 전쟁 중에 은밀하게 내린 것으로 일본이 정당하게 평화적으로 관할권을 행사한 시기는 없다고 설명했다.그는 1667년 '은주시청합기', 1877년 메이지 정부의 태정관 지시문, 1946년 연합국 총사령부 훈령 제677호, 1951년 일본 총리부령 제24호 등 일본이 독도를 자국의 권리행사 대상에서 제외한 사례를 제시하면서 "일본은 1905년 이전에는 독도에 대한 영유 의사를 표시한 적이 없다"고 강조했다. 곽진오 연구위원은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의 한계'에서 1951~1953년 일본 의회의 독도와 관련된 속기록을 분석했다. 그는 일본 의회가 독도가 일본 영토라고 주장하지만 '근거가 없다'든지 '논리가 빈약하다'는 등 독도 영유권 주장이 한계에 부딪히는 내용이 자주 등장한다고 밝혔다. 김용환 위원은 '독도와 한일 해양경계'에서 도서 영유권 및 해양경계 획정에 관한 최근의 국제판례를 분석, 분쟁의 앙금을 남기는 국제재판보다도 나라 외교 실무진과 전문가로 구성된 조직을 통해 화해와 협력의 정신으로 타협점을 찾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하영 위원은 1876년 조일수호통상조규를 시작으로 1910년 한일병합조약에 이르기까지 근대 조약과 식민법령 등 근대 한국법 체계와 일본의 식민지 법체계를 비교분석해 일본이 법을 통해 한국을 침략하고 식민지배하게 된 경위를 밝혔다. 김영수 위원의 '근대 독도와 울릉도 명칭 문제를 둘러싼 논쟁과 그 의미'는 일본이 '죽도'(일본이 칭하는 독도)라는 명칭을 의도적으로 사용해 마치 독도가 무주지(無主地)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어 1905년 소위 독도 영토편입 조치를 했다고 논증했다. 동북아역사재단. 202쪽. 1만원.

  • 문학·출판
  • 연합
  • 2010.01.01 23:02

[2010 전북일보 신춘문예] 동화 당선작 심사평

본심에 올라 온 글의 수준이 여느 해보다 높아 글을 읽는 내내 행복했다.  예심에서 올라 온 작품은 <꽃 켜는 아저씨> <윤아와 알록이> <알을 품은 요강> <부거리8282> <손수레 여행> <잊은 거 아니지>, 이렇게 여섯 작품이었다.  각기 장단점이 있었다. 이 중에서 어른 투의 문장, 진부한 소재, 아쉬운 결말 처리 등으로 세 작품이 우리 손에서 떠났다. 남은 세 작품을 가지고 얘기를 진행했다. <윤아와 알록이>(홍인재)는 문장 구성이 매끄럽고 탄탄했으나 곤충과 대화를 하는 부분은 좀 느닷없었다. 연결 장치를 만들었더라면 화자의 시점이 무너지는 실수를 하지 않았을 것 같다. <알을 품은 요강>(남주희)은 강점이 많은 작품이었다. 잘 짜인 이야기 구조와 버려진 요강에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난다는 결말 처리는 무릎을 치게 만들었다. 약간의 비약과 항아리와 요강을 불분명하게 사용한 부분이 옥에 티였으나 마지막까지 고민하게 만든 작품이었다. 이 작가는 다음을 기약하고 싶다.  <꽃 켜는 아저씨>(백상웅)를 당선작으로 올린다. 시적, 동화적 상상력이 근래에 보기 드문 작품이었다. 세상의 꽃들은 그냥 피는 것이 아니라 요절한 영혼들이 세상에 내미는 손이라는 상상력에 박수를 보낸다. 아쉬웠던 점은 왜 봉이 아저씨가 꽃 켜는 일을 하게 되었는지 알려주었더라면 어린 독자와의 소통이 더 쉬웠을 것이다. 눈 오는 날에 두 번 세 번 반복해 읽으며 세상의 봄꽃이 한꺼번에 피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좋은 동화 작가의 탄생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김자연(아동문학가) 김종필(동화작가)

  • 문학·출판
  • 전북일보
  • 2010.01.01 23:02

[2010 전북일보 신춘문예] 동화 당선소감 - 백상웅

동생이 아이를 낳았습니다. 저는 그 아이를 조카라고 부르고 그 아이는 저를 삼촌이라고 부릅니다. 삼촌이 되었을 때부터 동화와 동시를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조카가 삼촌이 쓴 동시와 동화를 읽고 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조카가 어서 글을 읽는 나이가 되었으면 합니다. 우석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전공 수업은 특이합니다. 느닷없이 교수님께서 꽃 피는 순서를 물어보거나, 야외수업을 나가서는 나무와 꽃, 풀의 이름을 배웁니다. 그걸 모르면 '글을 못 쓰는 놈'이 되어버리니, 이제 봄이 되면 눈을 크게 뜨고 골목을 천천히 엿봅니다. 방에 누워서는 귀로도 엿듣습니다. 그곳에서는 많은 일이 일어납니다. 꽃이 피고지고, 아이들이 뛰어놀고, 사람들이 지나갑니다. 문학이란 것이 멀리 있지 않고 가까이 있다는 것을 우석대학교에 입학하고 배웠습니다. 우석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님들께 큰절을 올립니다. 10월, 11월 함께 밤을 지새우던 문예창작학과 시륜 동인들. 그대들 덕에 신춘문예의 계절을 다시 느낄 수 있었습니다. 힘든 시간들, 도망치고 싶은 시간들을 참 잘 견뎌준 그대들이 올 겨울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그대들이 몇 년이고 견뎌야할 길입니다. 그 길을 조금이라도 함께 걸어주고 싶었습니다. 제 자신이 몹시 부족해서 다행입니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은 시를 쓰는 사람입니다. 시를 쓰는 애인을 갖은 남자 중, 제가 가장 아름다운 애인을 갖은 남자입니다. 그리고 가장 시를 잘 쓰는 애인을 갖은 남자입니다. 그래서 행복합니다. 「꽃 켜는 아저씨」의 모티브를 준 윤희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전합니다. 그리고 서른이 된 못난 아들 뒷바라지 하느라, 눈물 꽤나 쏟았을 부모님. 무릎을 꿇고 죄송하다는 말을 수천 번해도 모자랄 부모님. 사랑합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있어 제가 쓰고 사랑하고 살아갑니다. 고맙습니다.  못생긴 동화를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고개 숙여 인사드립니다. 아이들을 생각하며 동화를 쓰고, 그 글을 읽으면서 아파할 줄 아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열심히 쓰겠습니다. 다른 것은 모르겠고, 열심히 쓰겠다는 것, 이것 하나만은 제 생을 걸고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 백상웅 : 1981년 전남 여수 출생, 2006년 최명희청년문학상 시부문 당선, 2006년 대산대학문학상 시부문 당선, 2008년 창비신인시인상 당선, 현재 우석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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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1.01 23:02

[2010 전북일보 신춘문예] 동화 당선작 - 꽃 켜는 아저씨(백상웅)

"음, 보자……. 산수유 3월 15일, 매화 3월 17일, 목련 4월 10일, 자목련 4월 12일……"  봉씨 아저씨가 수첩을 뒤적이며 중얼거립니다. 수첩에는 봄꽃이 피는 순서가 날짜 별로 차례차례 적혀 있습니다.  아저씨는 허공에 리모컨을 대고 빨간색 버튼을 눌렀습니다. 그러자 이름표가 붙은 새끼줄들이 하늘에서 빼곡하게 내려왔습니다. '목련나무'라고 적힌 이름표를 찾은 아저씨는 형광등을 켜는 것처럼 힘껏 줄을 당겼습니다. 방금 전까지 입을 꼭 다물고 있던 목련 꽃망울이 금세 입술을 활짝 열었습니다. 아저씨도 목련꽃처럼 크게 웃음을 터트렸습니다.  "아, 이런 늦었네? 이젠 옆 마을로 가볼까?" 봉씨 아저씨는 서둘러 자전거를 페달을 밟으며 마을을 빠져나왔습니다. 아무도 아저씨를 본 사람은 없었습니다. 아저씨의 직업은 '꽃 켜는 사람'입니다. 기어도 없는 구식 자전거를 몰고 이 동네, 저 동네를 떠돌며 하늘에 연결 된 새끼줄을 당깁니다. 그러면 봉오리는 꽃잎 열고 봄소식을 전합니다. 요즘은 주로 목련꽃을 켜는 일을 합니다. 아저씨가 지나간 동네는 어김없이 전구처럼 환한 목련꽃이 피어납니다. 아저씨의 자전거가 막 옆 마을로 들어설 무렵이었습니다. 어디선가 아이가 우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으앙, 엄마! 엄마!" 아이는 애타게 엄마를 찾았습니다. 봉씨 아저씨는 꽃 켜는 일을 젖혀두고 아이에게 달려갔습니다. 아이는 어깨를 들썩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를 잃어버렸어요. 아무 것도 기억이 안나요. 집 주소도, 학교도, 전화번호도 기억이 안나요." "그것참 큰일이구나. 이름은 뭐니?" "정호에요. 정호. 으앙. 엄마!" 정호는 다시 울음을 터트렸습니다. "얘야. 그만 울고 이것 좀 보렴. 목련나무를 잘 보렴. 네 주먹같이 생긴 목련 봉오리 말이야." 아저씨는 리모컨으로 하늘 속의 새끼줄을 끌어내렸습니다. 그리고 '목련꽃'이라고 적힌 새끼줄을 당겨 마을의 목련나무의 꽃을 활짝 피게 했습니다.  정호는 신기한 광경에 울음을 뚝 그치고 방긋 웃으며 아저씨에게 물었습니다. "와! 그게 뭐에요 아저씨는 천사죠?" "아니란다. 아저씨는 '꽃 켜는 사람'이란다." "에이. 거짓말 말아요. 꽃은 그냥 피는 것이에요." "아니란다. 사람들은 그냥 비가 오고, 그냥 꽃이 피고, 그냥 열매가 여는 줄 알고 있지만 그게 아니란다. '비 내리는 사람'이 먹구름을 짜내서 비를 뿌리고, '꽃 켜는 사람'이 새끼줄을 당겨 꽃을 피워내고, '열매 맺는 사람'이 나무에 씨앗을 풍선처럼 불어서 나무에 매다는 것이란다." 정호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아저씨가 하는 말을 귀담아 들었습니다. 그리고 활짝 벌어진 목련꽃을 바라보다가 꽃잎을 벌리지 못한 봉오리를 발견했습니다. "저 꽃은 이상해요. 아직 안 폈는데요?" "아이고. 또 고장이 났구나. 요즘에는 나무가 고장이 자주 나거든." 아저씨는 가방에서 사다리를 꺼냈습니다. 정호는 아저씨가 작은 가방에서 기다란 사다리를 꺼내는 모습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아저씨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고장 난 봉오리를 빼고 다른 봉오리로 바꿔 끼웠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꽃을 갈아 끼운다고 말한단다. 옛날에는 꽃을 갈아 끼우는 일이 거의 없었어. 요즘은 자동차가 많아지고, 공장 굴뚝에서 연기가 끊임없이 나오고, 나무에 못을 박거나 끈을 묶고, 그래서 나무가 고장이 나는 거야." 봉씨 아저씨는 슬픈 표정을 짓더니 정호에게 물었습니다. "혹시 네가 살던 마을에 어떤 꽃이 많이 폈는지 생각해낼 수 있겠니?" "음……. 마을 입구의 커다란 벚나무가 생각나요." "그래? 벚꽃 켜는 일도 곧 해야 하니까. 아저씨랑 같이 찾아보자." 봉씨 아저씨는 정호를 자전거 뒤에 태우고 길을 떠났습니다. 정호는 아저씨 등을 꼭 안았습니다.  한참을 달려가는데 낯선 아줌마가 길을 가로막았습니다. 그 아줌마는 봄인데도 하얀 털옷을 입고 털모자를 쓰고 있었습니다. 봉씨 아저씨는 낯선 아줌마의 등을 떠밀며 돌아가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두 사람이 티격태격 다투는 동안에 하늘에서는 싸락눈이 내렸습니다. 윙윙거리며 꿀을 모으고 있던 꿀벌들과 나비들은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별처럼 핀 별꽃이 덜덜 몸을 떨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못살아. 저 여자는 일을 끝낼 줄을 모른다니까!" "저 아줌마가 누군데요?" "응. '눈 내리는 사람'이거든. 겨울이 지났는데도 돌아다니면서 눈을 내리게 한다니까. 내가 애써 피운 꽃들이 다 얼어 죽게 생겼네. 어서 여기를 떠나는 게 상책이야." 봉씨 아저씨는 다시 자전거를 몰고 꽃을 피우러 출발했습니다. 몇 시간을 달렸을까요? 자전거는 튼튼한 목련나무가 여러 그루 자라고 있는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안 돼! 정호야! 뭐하는 거야?" 봉씨 아저씨가 한 눈 판 사이에 정호가 일을 저질렀습니다. 아저씨가 하는 일이 재미있겠다고 생각한 정호가 아저씨 몰래 새끼줄을 당겼던 것입니다. 이름표도 확인하지 않고 새끼줄을 내려 엉뚱한 꽃이 피어버렸습니다.  다음 날 뉴스에서는 난리가 났습니다. 가을에 피는 코스모스가 봄날에 피어나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며, 기상학자와 식물학자가 나와 환경오염 때문에 이상기후가 생긴 것이라고 떠들어댔습니다. 라디오를 듣던 아저씨와 정호는 서로 눈을 마주치고 깔깔깔 웃었습니다. 봉씨 아저씨와 정호는 쉬지 않고 길을 재촉했습니다. 아저씨가 정호를 만나 쉬엄쉬엄 일을 하면서 꽃 피우는 일이 밀렸기 때문입니다.  정호는 아저씨의 일을 도왔습니다.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아저씨의 수첩을 함께 보며 꽃 이름을 몇 번이고 다시 확인했습니다.  "이 마을인 것 같은데? 네가 말한 커다란 벚나무가 저게 맞니?" 정호는 그제야 자전거 앞에 버티고 있는 아름드리 벚나무를 발견했습니다. 벚나무에는 꽃 피지 않은 작은 눈들이 수없이 달려 있었습니다.  "정호야. 기억나니? 잠깐만 기다려. 아저씨가 마을 좀 다녀올게." 정호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봄날이면 화사하게 핀 벚나무 밑에서 일 나간 엄마를 기다렸던 것 같습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쏴아 벚꽃이 흩날리면 벚꽃을 잡으려고 뜀뛰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도저히 엄마 이름도 집 주소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정호가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 아저씨가 돌아왔습니다. "정호야. 이 마을도 아닌 것 같아." 아저씨의 말에 정호는 실망스런 표정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저 아랫집에서 며칠 전에 아이가 한 명 죽었다는데……. 너는 살아 있는 것 맞지?" "당연하죠. 엄마가 저를 애타게 찾고 있을 거예요." "그래 가자. 네가 말한 벚나무는 이것보다 훨씬 커다랄 거야." 봉씨 아저씨와 정호는 자전거에 올랐습니다. 마을을 빠져나오는 동안 두 사람은 입을 떼지 않았습니다. 자전거 페달을 밟는 소리만 들렸습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아저씨였습니다. "정호야. 다음에는 네가 새끼줄 당겨볼래?" "네? 정말요?" "응. 정호 너도 공부 많이 했으니까." "알았어요! 대신에 실수해도 화내면 안 돼요!" "녀석도 참. 그래 알았다!" 다시 침묵이 오갔습니다. 마을이 점점 멀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호야." "네?" "아저씨도 너 만할 무렵부터 이 일을 시작했단다." "정말요? 우와. 그럼 정말 오랫동안 꽃을 켰겠네요." "응……. 그런데 정호야." "아, 왜요!" "실수하면 절대로 안 돼!" 정호는 아저씨의 옆구리를 간질이며 장난을 쳤습니다. 자전거도 간지러운지 비틀비틀 북쪽으로 향했습니다.   어느새 일 년이 흘렀습니다.  자전거가 다시 아름드리 벚나무가 자라던 마을에 찾아왔습니다. 이번에는 정호 혼자 찾아왔습니다. 봉씨 아저씨가 몰던 자전거를 벚나무 밑에 세운 정호는 불 꺼진 마을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능숙하게 하늘에서 새끼줄을 끌어내려 '벚꽃' 이름표가 붙은 새끼줄을 잡아 당겼습니다.  순식간에 벚꽃이 켜졌습니다. 수천, 수만 개의 꼬마전구가 한꺼번에 켜진 것 같습니다. 캄캄한 밤이었는데도 환하게 빛났습니다.  일을 마친 정호는 자전거를 돌려 세우고 마을을 빠져나왔습니다. 때마침 아이를 잃었다는 아주머니가 대문을 열고 마을 바깥을 바라보았습니다. 아주머니는 정호의 뒷모습이 보이는지, 안 보이는지 그저 방긋 웃고만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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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1.01 23:02

[2010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심사평

요즈음이야말로 그 어느 때보다 시 쓰기가 어려운 시대가 아닌가 한다. 첫째는 광야에서 골리앗 장군처럼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내던 시대의 공동과녁이 유체화된 데에다, 또 하나는 그 옛날 감히 다가서지 못했던 시 쓰기의 엄위한 비의(秘義)가 이곳저곳에서 그만 해킹되고 만 것이다. 이런 때에 빠지기 쉬운 함정이 바로 아무 고민 없는 사적(私的) 요설이다.이런 몇 가지를 상정하면서 조심스레 심사에 임했다. 807편을 상회하는 응모작 속에서 예심을 거쳐 우리에게 넘겨 온 작품들은 10명의 것이었다. 이 가운데에서 마지막까지 남은 작품은 <먼지> <신발 고르는 저녁> <호후(虎侯)> 등 세 편이었다. 이 세 작품은 어느 작품을 내세워도 당선작으로 손색이 없으리만치 수준이 가즈런하나, 규정에 따라 고심 끝에 <먼지>를 택하였다.<신발 고르는 저녁>은 세차원인 '쑤안'(이주여성)이 파장에 신발을 고르는 모습을 통해 그려낸 인간애가 눈물겹기만 한 작품이다. 그러나 심사자는 응모자를 바라봐야지 시 속의 '쑤안'에 빠져서는 안된다는 냉정 때문에, 그리고 화살이 빗나간 날들의 변두리에 박힐 때마다 손가락질이나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과녁으로 서보라는 <호후(虎侯)> 역시 시대의 정곡을 찌르는 훌륭한 작품이나 아무래도 주제의 깊이에서 <먼지>에 밀릴 수밖에 없어 아쉬움이 크다.당선작 <먼지>는 한 주제를 가지고 세 편으로 나눈 일종의 연작시 형태를 취하고 있는바 신춘문예 응모작으로는 대단히 모험적인 기법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이 세 작품은 내적으로 교묘하게 연결되어 있다.이 작품 속의 하찮은 <먼지>는 화자 자신, 나아가 우리 인간존재의 등가물로서 내밀한 삶과 그 가치를 성찰하고 긍정코자 한 시도로 이해된다. '1. 무게'에서는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의 '먼지'처럼 버리고 비우며 가뿐하게 사는 소박한 모습을 통해 가진 자들의 욕망에 대한 반성을 꾀하였고 '2. 높이' 역시 고단한 삶을 견뎌내게 하는 힘은, 바로 내일이라는 희망에 물꼬를 대고 있다. 특히 "먼지도 세월을 견디며 높이를 갖는구나"라는 아포리즘적인 시행이 두 심사자의 눈길을 오래 머물게 하였다. '3. 길'은 쌓였다가 깎였다가 하면서 오랜 시간 존재해온 '먼지'와 그들이 걸어온 '길'을 통해 무한한 시간 속에서의 부단한 자기 성찰을 드러내려 한 작품으로 속도감 있는 운율이 돋보인다.그리고 '방구석→차 안→허공→우주'로 확대되는 공간배치의 기법도 탁월하다. 자칫 관념으로 떨어지기 쉬운 소재를 끝내 작은 것들의 '견딤'의 미학으로 이끈 것은 오랜 동안의 습작의 뒷받침이 아닌가 싶다.요즈음 시인은 많으나 시가 없다라든가 아니면 시는 지천으로 흐드러지는데 정작 시인이 안보인다 라는 말을 뒤집어보면 같은 맥락의 이야기가 된다. 금번 최종심으로 넘어온 10명의 응모작들은 그 궁핍증을 덜어주는데 족히 일조가 될 만한 수준이다. 그럼에도 노들강변으로 널려 있는 등단길을 외면한 채 연마에만 몰두해온데 대해 박수를 보내고 싶다.그러므로 낙심은 금물, 응모자 제위의 행운을 빌어마지 않는다. /허소라(시인) 김용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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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1.01 23:02

[2010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소감 - 김혜원

시와 사진과 길먼저 사진이 있었다. 문학을 전공하고서도 시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건만, 사진을 찍으면서부터 카메라로 다하지 못한 말들이 마음속에 시(詩)로 남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시가 내게로 왔다.'당선 소식도 내게로 왔다. 본격적인 시쓰기를 시작한 것은 작년. 아직도 혹독한 습작기련만 예상보다 일찍 당선 소식을 들은 지금, 그래서 내 앞길은 더 캄캄하고 아득하기만 하다. 하지만 '당선'이란 습작기의 성실함을 '운 좋게도' 인정받은 것일 뿐이고, 시집 한 권도 내지 않은 사람을 시인이라 부를 수 없다는 내 지론이 있지 않은가. 다만 나는 내게 더욱 겸손해지고 엄격해지고 가혹해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부족한 시를 뽑아 주신 허소라, 김용택 심사위원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또한 굼뜨고 더딘 나를 질책과 채근으로 길러 주시고 앞으로도 키워 주실 우석대 문창과 정 양, 안도현 교수님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쓰고쓰고쓰고 고치고고치고고쳐 더 큰 성장으로 보답해 드리는 길밖에 없음을 나는 잘 알고 있다.그리고! 어렸을 적부터 음악과 미술과 문학을 동경할 수 있도록 키워 주신 부모님! 나의 피붙이 형제들과 그의 가족들! 이들 모두의 묵묵한 지원이 아니었더라면 '나밖에 모르는 삶'은 애초 불가능했을 것이다.마지막 감사는 홀로 걸어온 길!'먼지'처럼 함부로 떠도는 그 길에는 언제나 시와 사진이 함께할 것이다.△ 김혜원 : 1961 전주 출생, 전북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백제예술대학 사진과 2년 중퇴, 중앙대 일반대학원 사진학과 졸업, 현재 우석고 국어교사, 사진가, 우석대 경영행정문화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재학, 개인전 4회, 단체전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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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1.01 23:02

[2010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 먼지(김혜원)

1. 무게체중계를 꺼내려다나보다 먼저 올라앉은 먼지를 본다저것도 무게라고 저울 위에 앉았을까털어내는 순간 허공으로 날아오르는저 가뿐한 내공내가 눈금처럼 꼼꼼히몇 장의 졸업장과 얼마간의 통장으로몸집 불리는 동안 너희는 세상을깎고 갈고 부서지며 삭으며 살아왔구나저울 위에 앉아 제 발자국 헤아리다가세상 변두리 어디쯤 다시 찾아 날아올랐겠지버려야만 이루어지는 저 가뿐한 무게달 수조차 없는 그 삶에문득 마음 무겁다2. 높이먼지도 세월을 견디면 높이를 갖는구나어둠 속에서 말을 잊다보면 눈이 밝아지는 법, 나는저 허름한 생의 목록을 다 적을 수 있을 것 같다양말이 벗어놓은 하품 바스러진 각질의 한숨 비틀대던 머리카락과 맥없이 흘러내리던 낡은 옷의 넋두리 나뒹굴던 보풀의 푸념 몇 낱 희미해진 거울의 깨진 비명도 몇 개, 그런 것들이그런 것들이 뒷걸음쳐 이 구석 찾았을 게다내일이 꼭 오리라 믿었을 그들나는 오지 않은 날의 달력을 찢어숨죽여 쌓인 어제의 높이를 가만히 들어 올린다3. 길차 안에 쌓이던 먼지어느 날 흔적이 없어졌다닦은 적도 없는데 저희끼리 뭉쳤다가알갱이 되어 바닥으로 떨어졌나 보다어디든 다시 떠돌고만 싶은 것 같아조심조심 발판을 걷어 밖에 뿌려준다순간 바람의 어깨를 딛고 올라서서일제히 질주하는 저 하얀 맨발들길이란 열망이란 얼마나 서늘한가천 길 절벽은 허공에도 있어지상으로 추락하여 얼룩지는 생이여흙물이 제 지나온 길 가라앉히듯빗물에 씻겨 다시 먼 길 떠나는구나밤하늘에 담겨 반짝반짝 눈을 뜨는 별들도떠나온 별을 찾아 몇억 광년 속으로저렇게 먼지처럼 뛰어든다던데나 이제 몇십 킬로의 동력을 켜고내게 남은 시간의 벌판으로 달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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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1.01 23:02

[2010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심사평

문솔아의 <누드>를 심사위원의 의견일치로 당선작으로 뽑았다. 축하한다.<누드>는 수필문학의 조건과 장점을 두루 갖췄다.수필은 지성과 교양과 사유의 글일 때 읽을 맛이 난다. 회화적인 제목과 자연이라는 흔해터진 소재와의 신선한 연결, 현실성을 끌어들이는 삶의 현장성과 문장의 함축미가 당선에 도움이 되었다.야생초목을 누드로 인식하는 건 일종의 독창성이다. 예술은 결국 언어인지에 의해 생산되고 이해되는데, 주로 미술용어로 쓰이는 누드라는 단어를 문학적으로 해석한 점이 독특하다. 게다가 정서를 말살시키며 문명의 신에 사로잡혀 생활이 풍족해진 현대인의 속성에 대하여 회의하는 과정이 철학적이다. 간접경험 곧 학(學)으로 타 예술과 소통하는 방법과, 자연 속에서 인생을 관조하는 연결도 편안하고 부드럽다. 기승전결의 기본 작법과 구성도 매끄럽다. 한 가지 더. 문학성의 최대장점인 상상을 통해 누드아파트, 누드학교, 누드정상회담이란 어휘를 끌어낸 점이 미학적이다. 같이 보내온 <붉새>도 고른 수준이다.총 응모 460편 중에서 본심에 올라온 15명 45편에 전북의 응모작이 없어 서운했다. 전북일보의 신춘문예가 전국의 수필가 지망생의 관심을 끌고 있어 대단히 기쁘긴 하지만 문도(文道) 또는 문향(文鄕)이라는 전북의 수준작이 한 편도 본심에 오르지 못해 못내 아쉬웠다.수필은 경험문학이라는 단견 때문인가. 대부분의 작품이 자기경험 곧 소재를 이야기하는 데 그치고 인식과 사유를 통해 인식하는 체험으로 승화시키는 문학성이 적다. 이야기꾼은 많으나 문학적 미학을 드러내질 못했다. 최아란의 <이음>, 이정순의 <인생소묘>가 최종심에서 탈락한 이유다.아깝게 밀쳐놓은, 정진규의 <생 날 것 그대로의 진실>은 내려놓기 아까웠다. 개인잡기 같은 글들 속에서 심리적이고 분석적인, 수필의 다양성에서 후한 점수를 주었다. 그러나 수필은 사색적이나 대중적인 지성의 이미지가 강한 글이다. 일반적이고 대중적이어야 하는 신문의 신춘문예가 아니라면 기꺼이 선했을 것이다. 정진규씨가 정진하여, 논리적이고 철학적인 중수필로 인정받는 수필가로 만나게 되기를 빈다. /심사위원 전일환(수필가·전주대 언어문화학부 교수) 김용옥(수필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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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1.01 23:02

[2010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소감 - 문솔아

몇 해 동안 나는 간이역 주변을 서성이며 오지 않는 기차를 기다렸다. 기차가 서지 않는 간이역에서 톡, 톡, 기다림을 발로 차는 동안 패랭이꽃들은 피었단 지고, 바람은 들녘을 건너갔다 건너오고, 눈발은 나뭇가지 위로, 침목 위로 내려앉았다.기다림에 지친 나는 가끔씩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철로 위를 달려보기도 하고, 기차가 산모롱이를 돌아오고 있는지 레일에 바짝 엎드려 귀를 대어 보기도 했다. 이제 그만 기차를 포기할까 생각하고 있을 때, 차창에 노란 손수건을 매단 기차가 끼이익! 내 앞에 멈추어 섰다. 성탄절 전날 저녁이었다.노란 손수건은 필시 오래전 돌아가신 아버지가 하늘에서 보내준 성탄절 선물이리라. 손수건을 바라보는 동안 따뜻한 손 하나가 내 어깨에 걸쳐졌다. 그때 지나가던 구름이 눈발 몇 개를 흩날려도 좋았으리라. 아니면 은하수의 별 몇 개 내려와 크리스마스트리 위에서 반짝여도 좋았으리라.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크고 억센 손등에 가만히 내 손을 얹었다.낱말과 낱말, 문장과 문장 사이를 부유하던 시간들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순간들이었지만 행복한 시간이기도 했다. 나를 절망하게 했던 글들이 내가 넘어질 때마다 오히려 손을 내밀어주었듯이, 이제는 내 글이 다른 이를 찾아가 따뜻한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수필의 길을 가르쳐 주신 교수님들께 오롯이 당선의 영광을 돌린다. 언제나 큰 힘이 되어 준 김영식 시인께는 어떻게 감사의 말을 전해야할지 모르겠다. 늘 격려의 말씀으로 힘을 북돋아 주던 김은주 작가님께도 감사를 드린다. 문학을 함께 공부한 '동목수필문학회', '문맥' 식구들과 덜 자란 글들을 보고도 매 번 칭찬을 마다않으며 용기를 세워준 '미리내' 식구들에게도 감사를 드린다. 나만이 부를 수 있는 애틋한 이름인 남편과 글을 쓰는 엄마를 자랑스러워하는 아이들에게도 사랑한다는 말을 전한다.끝으로 부족한 글에 눈 마주쳐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과 전북일보사에 감사드린다. 어쩌면 이제 더 아파해야할 시간들만 남았는지 모르겠지만 이 순간만은 세상 누구보다 행복하다는 걸 굳이 감추고 싶진 않다.△ 문솔아 : 본명 문춘희, 1964년 부산 출생, 영남대 사범대학 국어교육학과 졸업, 2008년 시흥문학상 수필부문 금상 수상, 2008년 대구문학 수필부문 신인상 수상, 경주대 사회문화교육원 문예창작반 수료, 동리목월 문예창작대학 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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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휘정
  • 2010.01.01 23:02

[2010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 누드(문솔아)

모두들 옷을 벗고 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걸 부끄러워하긴 커녕 깔깔대며 웃는 소리까지 들린다. 나는 잠시 어리둥절해진다. 내연산 수목원, 화단에 핀 야생초들이 모두 누드다. 구절초, 꿩의비름, 물옥잠들이 나체로 피어 저마다 아름다운 몸매를 자랑하고 있다.꽃들뿐만이 아니다. 울타리처럼 둘러선 물푸레나무, 서어나무, 오동나무들도 모두 나체다. 수목원 연못으로 흘러드는 시냇물 소리도, 화단가에 잠든 고양이털을 슬쩍 만지고 가는 바람도 누드다. 지금 막 덤불 위로 날아오르는 새들이며 백양나무 꼭대기 위로 흘러가는 솜털구름, 이 모든 것들이 누드다. 지금 이곳에서 누드가 아닌 것은 나뿐이다.한때 누드열풍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누드화장품, 누드폰, 누드속옷. 너나없이 누드를 표방하며 상품화했다. 누드가 풍기는 약간의 에로티시즘과 자연으로의 회귀본능이 상품구매 욕구를 야기시킨 건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들은 누드에 열광했으며 다투어 누드상품을 구매했다. 그건 어쩌면 문명화된 현대인들이 문명 이전의 원시를 그리워하는 마음의 발로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사리가 분명해져 어떤 것에도 혹함이 없어야 한다는 불혹지년(不惑之年)을 몇 해 전 지났다. 그러나 여전히 욕망과 허영의 덩어리를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다. 특히 지인들의 모임에 갔다 온 날에는 끊임없이 마음에 물결이 일기 일쑤이다. 오래간만에 만난 반가움보다는 건네받은 명함의 지위에 따라 품격이 달라지는 것 같아 자리가 불편하다. 걸치고 있는 보석, 들고 있는 가방이나 입고 있는 옷에 따라 묘한 괴리감을 느끼기도 한다. 살고 있는 거주지와 집의 크기, 타고 온 차의 종류에 따른 생활상의 차이를 확연히 느끼게 되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씁쓸해진다. 출발은 똑같이 했건만 이미 속한 세계도, 생활상도, 성취의 결과도 확연히 달라진 친구들을 보며 인생의 성패에 대한 성급한 판단과 그로인한 열패감 때문에 가슴앓이를 하기도 하는 것이다.그러고 보니 나는 너무 많은 옷을 입고 있다. 하나도 모자라 여러 겹의 옷을 덧입고 있다. 어디 옷들뿐이겠는가. 몸을 치장하고 있는 장신구며, 학벌, 명예, 권력, 아이와 남편에 대한 욕심까지. 나는 너무 두꺼운 가식과 위선의 옷으로 나를 휘감고 있는 것이다. 그런 내가 슬며시 부끄러워진다.존클리어의 걸작인 '레이디 고디바'는 고디바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하얀 말을 타고 가는 그림이다. 고디바의 남편 레오프릭은 11세기 중엽 영국의 백작으로서 지방 영주였다. 당시 그는 농노들에게 가혹한 세금을 매기기로 악명이 높았다. 꽃다운 열여섯 살의 고디바는 남편의 세금정책을 과감히 비판하고 세금을 낮추어달고 요구했다. 백작은 '알몸으로 말을 타고 영지를 한 바퀴 돌면 세금 감면을 고려하겠다.'라고 빈정댔다. 그녀는 정말 그렇게 했다. 주민들은 그날 창문과 커튼을 닫고 밖을 내다보지 않았다고 한다.애벌레의 몸을 벗지 않으면 나비는 자신을 완성하지 못한다. 뱀은 일생동안 여러 차례 허물을 벗는다고 한다. 누드는 이처럼 제 자신을 덜어내는 것이다. 덜어내어서 본래의 자연 상태인 자신을 회복하는 일이다. 법정스님은 무소유의 철학을 이야기했다. 무소유란 모든 번뇌와 욕심으로부터 자신을 덜어내는 일이다. 무위자연의 도(道)를 설파한 노자도,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외친 루소도 결국은 누드에 닿아있는 것이다.쉽지 않은 일인 줄 알면서도 나는 요즘 벗는 연습을 자주 해본다. 손톱의 매니큐어를 벗겨낸다든지, 집안의 잡다한 장식품을 떼어내고 빈 공간을 많이 만든다든지, 살림살이를 조금씩 줄이는 일이 그것들이다. 그건 일견 아주 작고 사소한 일이겠지만 작은 것들을 비워내야만 큰 것들도 비워낼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은 성적을 위하여 아이들을 밤늦게까지 학원으로 내모는 일이며, 더 높은 지위를 위하여 남편을 다그치는 것들도 요즘은 조금씩 자제를 한다. 그러다 문득 비워낸 공간에 다른 것들이 들어와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빈 벽으로 빗살무늬처럼 비쳐드는 햇살이며, 출렁이며 창을 넘어 오는 노을이며,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남편의 사랑이 빈자리를 따뜻하게 채워주는 것이었다.김미루는 누드사진작가이다. 폐쇄된 기차역, 버려진 건물, 지하철, 터널 같은 도시의 폐허 속에서 자신의 누드를 직접 촬영한 작품들로 개인전을 열었다. 그녀는 문명의 더께를 벗고 벌거벗음으로써 오히려 자유로웠고, 놀이터에서 뛰어놀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었다고 밝혔다. 동양화에선 여백을 중요시한다. 화폭을 가득 채우는 것보다 비우는 것의 아름다움을 추구한 때문이리라. 수묵화법도 먹의 농도를 풀어 풍경을 투명하게 함으로써 사물의 본래 모습을 들여다보려는 것이다.근래에 들어 누드열풍이 사라진 것이 개인적으론 무척 아쉽다. 누드열풍을 조금 더 연장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누드학교, 누드국회, 누드정상회담. 이처럼 갈등과 분쟁이 있는 곳에 누드를 놓으면 어떨까? 그렇게 된다면 개인과 개인, 나라와 나라, 종교와 종교 간의 거리가 훨씬 줄어들 것이고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며 평화와 화해를 모색하게 될 것이다.올해도 어김없이 환경운동가들이 모피반대 시위를 벌였다. 거리에서 전라(全裸)의 몸으로 시위를 하는 데모대의 모습을 본다. 인간의 벗은 몸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때가 이 순간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거리로 나서지 않았다. 사회적 약자를 위해 스스로 높은 지위에서 내려온 고디바처럼 이들은 개인의 이익이 아닌 지구보호라는 큰 이익을 위해 옷을 벗은 것이다.아이들의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저만치 수목원을 뛰어다닌다. 꾸미지 않은 아이들의 천진한 모습이야말로 누드일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긴 내게 꽃들과 나무와 바람이 손을 내민다. 나는 하나 둘 옷을 벗는다. 어느새 나도 누드가 되어 있었다. 어느 시인은 민둥산에서 옷을 벗고 구름의 자식들을 낳고 싶다고 했지만 나는 지금 수목원에서 옷을 벗고 꽃의 자식들을 낳는다. 나무와 바람의 자식들을 낳는다. 훌쩍 커버린 꽃과 나무와 바람들이 내 젖꼭지를 빤다. 어느덧 나는 꽃이 되어 있었다. 나무와 바람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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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1.01 23:02

[2010 전북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심사평

예심을 거친 작품을 반씩 나누어 읽어 보았다. 이들 작품 가운데 우선 <몸살> <가슴 다이어트> <하늘길> <액땜> <태평원룸 202호> <미륵댕이> <재떨이를 비우는 여자>가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작품 나름의 광택과 흠결이 있었지만 결함을 보상할 장점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하늘길> <액땜> <재떨이를 비우는 여자>로 압축하였다.<몸살>은 다소 거칠지만 심연의 상처를 가진 젊은이의 방황과 고뇌를 그린 비유적 언술이 인상적이다. 그러나 서술의 긴장이 부족하고, 소재의 상투성도 흠이라고 할 수 있다. <가슴 다이어트>는 광고회사 직원인 '수아'의 스트레스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쳐 나가지만 단조로운 구성,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서술, 불안한 문장 등이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태평원룸 202호>는 이야기의 박진감은 돋보였으나 서술 전략이 효과적이지 못하였다. 그 결과 '있을 수 있는'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전달하는데 역부족이었다. 화자의 감상적 개입을 자제하여 독자가 심리적 거부감을 느끼지 않도록 적정한 거리를 확보하면서 주제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더라면 더 좋은 작품이 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륵댕이>는 좋은 소재에도 불구하고 너무 많은 이야기를 쏟아놓아 서사의 일관성을 훼손한 것이 큰 흠이라고 할 수 있다. 단편소설은 무엇보다 단일한 시츄에이션을 지향해야 한다. 그래야 효과적이다. 이야기의 초점을 모았더라면 토속적 소재가 가진 장점이 잘 드러났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재떨이를 비우는 여자>는 자칫 사소할 수 있는 사랑의 밑그림을 곡진하게 보여주는 좋은 작품이다. 그러나 과불급(過不及)이랄까, 그 원숙함이 오히려 단점으로 작용하여 내면화가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았다.최종적으로 <하늘길>과 <액땜> 두 작품을 두고 논의한 결과 <액땜>이 가진 강점이 많다는 결론에 다다라 이를 당선작으로 하고 <하늘길>은 차후를 기약하기로 하였다. <하늘길>은 죽은 언니를 생각하며 티벳 고지대 사원을 찾아가는 여행담 형식의 작품이다. 언니의 불행한 일생이 잃어버린 사랑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차분하면서도 깊이 있게 천착한 서술의 밀도도 돋보이고, 사원에서 화자가 언니의 옛 연인을 뒤로하고 돌아서는 결말도 인상적이다. 그러나 객창감을 잘 살리지 못하면 로드픽션이 빠지기 쉬운 함정인, 무의미한 여행 기록이라는 인상을 주기 쉬운데 <하늘길>도 이러한 점 때문에 지루한 감이 없지 않았다. <액땜>은 몸에 신기를 지닌 스무 살 화자가 액땜을 위해 뜻밖의 결혼을 하게 된 내용이다. 그 과정에서 남편과 생부의 운명, 자신의 태생 비밀 등 등장인물들의 타고난 굴레를 모티브로 잘 활용하였다. 이 작품은 무당집은 물론 남편의 서점 분위기도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다. 물론 캐릭터의 설정도 탁월하다. 그네들의 행적을 피력하는 거침없는 서술 태도도 매력적이다. 응모자의 작가적 재능을 담보하는 강점이 많아 당선작으로 결정하는데 의견일치를 보았다. 당선을 축하하며 큰 작가로 대성하길 바란다. /전상국(소설가·김유정문학촌장) 정영길(소설가·원광대 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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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전북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소감 - 정희경

국민학교 이학년 여름방학 숙제가 독후감 쓰기였습니다. 국민학교 들어가서야 한글을 배운 제가 그 때까지 읽은 것이라고는 교과서가 전부였습니다. 방학숙제를 하기 위해 책을 사러갔습니다. 시장에는 서점을 겸하는 작은 문방구가 있었습니다. 삼십년 전이라 까마득했었는데 이글을 쓰다 보니 생각나네요. 문방구 이름은 북부문구사였습니다. 소심한 저는 책 한 권 사는데도 뜸을 들이다 아저씨가 집어 주는 책을 가지고 왔습니다. 책 제목은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였습니다. 그게 처음이었습니다.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이라고 하지만 제게 있어 첫 키스보다, 첫사랑보다 더 황홀한 첫 경험은 바로 소설(이야기)이었습니다. 이야기는 삽시간에 저를 매혹시켰고 열병에 들뜨게 만들었습니다. 부모님은 이야기책에 홀린 저를 위해 100권짜리 동서문화사 딱따구리 문고를 사주셨습니다. 그 때부터 저는 방구석 귀신이 되었습니다. '빨간 머리 앤'을 읽으면 '키다리 아저씨'가 튀어나오고 '꿈을 찍는 사진관'을 읽으면 '만년셔츠'가 튀어나왔습니다. 저를 키운 것은 팔 할이 이야기였습니다.이부자리 속에서 이야기를 만들었습니다. 밤마다 조금씩 이야기는 길어졌지만 머릿속 저장장치는 부실해서 오늘 이야기만 만들어지면 지난 번 이야기가 사라졌습니다. 이야기는 그렇게 토막토막 끊어지고 저는 그 이야기를 어디에 써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리고 삼십년이 지났습니다. 어디다 써야할지 몰라 방치해 두었던 이야기들이 아우성을 쳐댔습니다. 그제야 알았습니다. 제가 이야기를 쓰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가 저를 선택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조금 늦되고, 많이 부족한 저를 이야기가 선택했다면 거기에도 다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썼습니다.당선소식을 듣고 제가 사랑한 이야기가 다른 분들에게도 사랑받을 수 있게 되어서 기뻤습니다. 방구석 귀신 노릇을 어여삐 보아 주신 부모님, 같이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어 주던 형제자매, 지칠 때마다 위로와 격려를 보내준 남편과 민정, 그리고 내가 소설공부를 위해 시간을 낼 수 있도록 배려해준 나의 오너인 제부 모두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그 분들의 지지와 성원 덕분에 A4용지 속에 영원히 갇혀 있을 뻔한 제 이야기가 빛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아울러 언제나 의지가 되는 소행성 문우들과 선생님께도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되먹지 못한 합평으로 많은 분들에게 상처를 주었음에도 언제나 따뜻한 마음으로 감싸주시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끝으로 제 이야기가 살아 날 수 있도록 마지막 숨을 불어 넣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 관계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정희경 : 1968년 충북 청주 출생, 충북대 경제학과 졸업, 현재 경기도 광주시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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