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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전북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 액땜(정희경)

나는 스무 살이다. 머리를 틀어 올려 묶고 버스에 타면 운전기사가 학생 요금을 받을 때가 종종 있다. 귀밑으로 솜털이 보송보송하고 아직 뺨에 젖살이 빠지지 않은 것이 다른 스무 살과 다를 바 없다. 굳이 차이를 들자고 한다면 내게는 남편이 있다는 사실 정도다. 남편은 대학근처 자신의 건물에서 서점을 하고 있다. 그가 운영하는 서점은 한때 사회과학 서적으로 유명했던 곳이라고 한다. 시절이 변하면서 운영난을 견디지 못하고 문을 닫게 되었던 서점을 건물주의 아들이었던 남편이 넘겨받은 것이다. 서점은 예전의 명성을 이어받지도 못하고, 특화된 분야도 없이 문만 열고 있을 뿐이다. 드나드는 사람이라고는 담배를 사러오는 손님들뿐이다. 그래도 남편은 물려받은 건물 덕분에 날마다 출근을 하고 내게 생활비를 준다. 출근이라고 해봤자 건물 사 층 살림집에서 일 층으로 내려가는 것이 전부지만 말이다.내가 서점에 내려가 있는 날이면 어쩌다 들리는 손님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피하기 어렵다. 남편에게 조카냐고 물어보는 남학생들 심지어 따님이냐고 물어보는 사람들까지 있다. 그럴 때마다 남편의 얼굴은 너무 익어 터질 것만 같은 토마토처럼 벌겋게 달아오르곤 한다. 내가 재빨리 나서서 그의 아내라고 소개할 때 사람들의 눈에 스치는 당혹스러움을 남편은 잊지 않고 가슴에 담아둔다. 서점에는 스무 살 어린 아내와 살아가는 남편의 복잡한 감정들이 책 먼지와 같이 쌓여가고 있다.내가 이렇게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결혼생활을 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엄마 때문이다. 엄마는 강신무당이다. 한때는 오방신장 장군님도 오시고, 용 할머니도 오시고, 가끔 아기동자도 왔지만 지금은 어쩌다 한 번 찾아올 뿐 신 내림의 기회가 거의 없는 퇴물 무당이다. 장군님이 들락거리고, 할머니가 하루에 몇 번씩 찾아올 때면 상위에 돈이 넘치어 흐르는 굿판을 예사로 벌였다.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사과, 배, 감귤, 감, 팥 시루떡, 산자, 부두전, 산적, 생선적, 부침개, 삼색 나물이 보는 사람 입을 벌어지게 하였다. 그때 돼지 한 마리를 통째로 올려놓은 상은 정말 볼만했었다. 그렇게 번 돈으로 할머니가 예뻐지고 싶어서 거울만 본다고 타령하더니 얼굴을 뜯어고쳤다. 얼굴을 고치고 나니 장군님이 차가 맘에 안 드셔서 탈 때마다 기분이 상해하신다며 차를 바꿨다. 내가 먹고 싶다고 하는 것은 들은 척도 하지 않던 엄마는 아기 동자가 먹고 싶다고 하는 것은 한밤중에라도 나가서 사다 바쳤다. 아기 동자는 단 것을 아주 좋아해서 집안의 사탕이며 초콜릿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결국, 나는 아기 동자의 초콜릿 덕분에 매번 다이어트에 실패했다.이런 이야기는 옛말이고 지금은 손님 끊긴 지 오래되었다. 남의 굿에 청송을 나가기는 하지만 요즘은 그것도 뜸하다. 어쩌다 한 명씩 찾아오는 삼만 원짜리 점 손님으로 겨우 입에 풀칠하며 사는 형편이다. 그래도 거기서 내 고등학교 등록금이 나왔으니 현관에 낯선 신발이라도 보이는 날이면 엄마보다 내가 더 긴장했다. 이제 장군님이고 할머니고 찾아오지 않는다는 사실 다 아는데 사주를 본답시고 횡설수설하는 엄마를 보는 일은 정말 아슬아슬했다. 답답해서 찾아오는 손님 마음 적당히 어루만져 주면 삼만 원 값어치 하는 건데 거기서 한 건 하겠다고 살풀이 운운하다 망신을 당한다.신기 떨어진 엄마가 난데없이 내가 나이 많은 남자랑 결혼해야 액을 막을 수 있다고 했을 때는 기가 막혔다. 사기를 치려면 손님한테 쳐야지 칠 사람이 없어서 자식한테 사기를 치느냐고 코웃음을 쳤다. 더는 찾아오지 않는 귀신들을 불러들이겠다고 삼천만 원을 끌어서 굿판을 벌인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엄마의 신엄마는 삼천이나 되는 돈을 날름 집어먹고도 딴소리만 했다. 이제 신령님들이 다른 사람을 찾고 있으니 엄마는 틀렸다고 중얼거렸다. 그때 신엄마가 나를 바라보던 눈길을 생각하면 지금도 기분이 묘해진다. 육십이 다된 신엄마의 눈빛은 앞에 있는 사람을 꼼짝 못하게 만든다. 순간적으로 몸이 굳는 것만 같은데 정신은 명료해졌다. 나는 엄마에게도 신엄마와 눈이 마주쳤던 순간의 경험을 말하지 않았다. 삼천만 원은 한 때 엄마가 시퍼런 작두 위에서 날듯이 춤을 추던 시절 엄마 덕분에 병을 고쳤다는 몇몇 사람들이 빌려준 돈과 사채로 끌어들인 돈이었다. 굿을 해도 귀신들은 본 척도 하지 않고 사채 고리는 날마다 늘어나서 엄마는 궁지에 몰려 있었다."내가 들어오셨다. 천금 같은 내 손주야, 만금 같은 내 손주야. 삼대 조 할머니 할아버지 양외조상이시다. 업질정 보망이 되소서. 이방불휘 타방불휘 내 고향 남을 주고 남의 고향에 와서 어찌 살았니. 불쌍한 내 손주야. 설우시다. 슬프시다. 아무쪼록 내오는 길에 복을 주시고 가는 길에 명을 주시마. 나는 친할아버지 친할머니다."굿판에서 공수하던 것 마냥 중얼거리던 엄마는 갑작스럽게 곡을 하기 시작했다. 머리를 풀어헤친 채 장군님을 원망하고 할머니를 원망하는 엄마의 곡소리는 너무 슬퍼서 나도 모르게 동요되었다. 하나밖에 없는 딸 데려가시려거든 저를 데려가셔야지 이게 무슨 소리냐며 엄마는 신당 바닥을 구르며 가슴을 쥐어뜯었다. 보다 못한 내가 도대체 나 보고 어쩌라는 거냐고 물어봤을 때야 엄마는 울음을 그쳤다. 급살을 맞지 않으려면 이 수밖에 없다며 엄마는 마치 준비했던 것처럼 낯설지 않은 남자의 사진을 꺼내놓았다.아기 동자 혼령이 씌울 때면 엄마는 어리광 섞인 아기 목소리를 내며 칭얼거렸다. 그럴 때마다 은성 식당 아줌마는 과일이나 과자를 사서 아기 동자 비위를 맞추며 이것저것 물어보곤 했다. 아줌마는 옛정 때문인지 엄마가 전 같지 않음에도 가끔 들려 쌀도 사주고, 몇 만 원씩 놓고 절도하곤 했다. 가끔 남동생을 데리고 왔는데 누나가 절을 하는 사이 마당 귀퉁이에 엉거주춤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파리하고 해쓱한 얼굴에 금테 안경을 쓴 그의 모습은 첫눈에 소심하다는 단어밖에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내가 교복차림으로 쪽대문을 밀고 들어서자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마치 나하고 눈이 마주치면 큰일이라도 나는 양 외면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내 등 뒤에 들러붙은 찐득한 그의 시선을 말이다. 가슴의 봉곳한 선이 옷자락 밖으로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낯선 남자들의 시선 속에 섞인 욕망에 익숙해졌다. 만원 버스 뒤에서 은근슬쩍 허리를 넘어오는 손이나 치마를 입은 채 학교 담장을 넘다 걸렸을 때, 느리고 끈적이게 훑어보던 선생님의 눈길 따위는 이미 애교스런 수준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렇지만 교복 아래로 드러난 종아리를 흘끔거리던 남자의 시선은 그리 쉽게 잊히지 않는 종류의 것이었다. 은성 아줌마와 함께 남자가 들른 날이면 나는 옷을 갈아입기 전이나 화장실에 들어가서 자꾸만 주위를 둘러봤다. 그가 자리에 없어도 시선은 남아서 내 곁에 달라붙어 있는 것만 같았다.사진 속의 남자는 그였다. 그와의 인연이 평범하지 않을 거라는 예감은 적중했다.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던 나는 고개를 들었다. 아직 얼굴에 물기도 마르지 않은 엄마가 기대감에 잔뜩 부푼 눈망울로 나를 바라봤다."엄마, 지금 나보고 저 아저씨한테 시집가라는 거야?""그럼 어쩌니, 나이 많은 남자한테 액땜하지 않으면 니가 스무 살을 넘기지 못하고 급살을 맞는다고 할머니가 그러시는 걸.""아니 들어오라고 그렇게 통사정을 해도 못 본 체하던 할머니가 갑자기 나보고 시집을 가라니 지금 엄마 말이 곧이들릴 말이라고 생각해?"엄마는 다시 눈물을 글썽거리더니 옆에 있던 휴지를 집어 들어 코를 세게 풀었다. 유난히 흰 얼굴에 코를 풀어대자 빨갛게 변한 콧등이 도드라져 보였다."이년아, 그 할머니가 누구시냐? 네 삼대 조 할머니야. 무슨 일이 있어도 너를 살려야지. 그 할머니가 너 급살 맞는 꼴은 못 보실 거 아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백화점 유아복 매장에 근무했다. 명품 매장은 비정규 판매직도 대졸자를 쓴다. 같은 백화점 안에서도 몇 층 어떤 코너에 근무하는가에 따라 신분이 달라진다. 나처럼 전문계열 고등학교를 나온 신입은 식품 매장 아르바이트 아주머니들과 별반 차이가 없는 수준이었다. 내가 얼마 되지 않는 월급을 받느라 하루 열 시간씩 꼬마들 비위를 맞추고 있을 때 내 또래 아이들은 테이크아웃 커피를 손에 든 채 쇼핑을 즐겼다. 그나마 월급은 엄마가 진 빚의 뒤치다꺼리에 모두 들어가다시피 했다. 암울하기만 한 현실과 지긋지긋한 당집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다. 그렇지만, 남자의 첫인상은 두 번을 생각하기 싫도록 꺼림칙했다."엄마, 정말 미쳤구나. 이 아저씨 변태야! 변태! 스무 살이나 어린애를 올 때마다 훔쳐보더니 이제 아주 내놓고 작업을 하네.""이년아, 무슨 소리야. 그 사람이 우리 집에 몇 번이나 왔다고 야단이야. 거기다 보긴 뭘 푸짐하게 봐.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그 사람한테 가지 않으면 급살을 맞는다니까.""제발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하지 마. 시집을 가려면 엄마나 가. 그 아저씨 엄마하고 딱 맞는 나이네."처음에는 엄마 말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년에 팔자는 얼마나 더럽기에 딸마저 앞세우게 생긴 건지 모르겠다며 우는 엄마를 계속 무시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거기다 남자 이름으로 사 층짜리 건물이 있다는 말 또한 흘려버리기가 어려웠다. 결국, 나는 오래 버티지 못하고 커피숍에서 남자와 마주하게 되었다. 그는 나를 처음 만나던 그날처럼 내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고개를 수그렸다. 어린 내 맘에도 그가 밖으로 발산하지 못하는 욕망이 내면 어딘가에 차곡차곡 쌓여 있을 것이라고 짐작되었다."아저씨, 도대체 우리 엄마한테 나 얼마에 팔라고 했어요?""무슨 말인지?""뭘 시치미에요. 다 아는데. 우리 엄마한테 얼마 준다고 했냐고요?""그런 건 아닌데. 누나가 먼저 윤서 씨에 대해서 묻기에 본 적은 있다고 했지만 나도 지금 이 자리 몹시 당황스럽거든요."그는 너무 긴장해서 커피에 설탕을 다섯 스푼이나 넣었다. 커피를 입에 대고 얼굴을 찡그리는 그의 모습을 보다 실없는 웃음이 툭 터져나왔다. 스무 살이나 어린 여자애 앞에서 벌벌 떠는 남자의 모습은 어느 순간 긴장이 풀리게 했다. 만약 또래 남자였다면 마음에 들지 않는 소개팅이라도 좀 더 잘 보이고 싶어 했을 거다. 하지만 엄마뻘 되는 남자 앞에서는 내숭을 떨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난 제멋대로 굴었고 남자는 허둥댔다. 그럼에도 그가 진심으로 온 정성을 다하고 있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밥 대신 맥주를 마시고 비틀거렸다. 얼마나 마셨는지 정확히 기억나지지 않았다. 아차, 하는 순간에 균형을 잃고 그의 앞자락으로 넘어졌다. 코끝으로 낯선 냄새가 스며들었다. 엄마 방에 들락거리는 아저씨는 많았지만 한 번도 정식으로 아빠를 가져보지 못했다. 아빠 냄새는 이런 게 아닐까. 아직 경계심도 풀리지 않은 남자의 품에서 울컥 그리움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나는 결국 남성용 화장품 냄새 속에 섞인 담배냄새 때문에 그가 조심스럽게 내민 손을 거부하지 못했다.주변 사람들의 항의 때문에 당집은 매번 허름한 변두리로 돌아야 했다. 삼 년 전에 이사한 이 집은 개발 제한 구역에 자리 잡고 있다는 핑계로 주인이 화장실조차 고쳐주지 않고 있다. 대문 옆에 붙어 있는 재래식 화장실은 아무리 관리해도 여름이면 구더기가 들끓는다. 엄마가 은성 아주머니하고 무슨 이야기를 하는 모양인데 아귀가 맞지 않는 문틈 사이로 다 들렸다."걔가 원조교제 하다 여자애 오빠한테 걸려서 천만 원이나 주고 합의를 봤잖아. 정말 무슨 귀신이 쓰여서 하라는 결혼은 하지 않고 어린애들만 자꾸 찾는지 알 수가 없어. 세상에 둘도 없이 얌전하고 멀쩡한 사람이 어쩌다 저리 못된 곳에 눈을 뜬 건지. 내가 속상해서 살 수가 없다니까. 저러다 패가망신하기 순식간이지. 이 일을 어쩌면 좋아.""열아홉에 죽은 그 집 삼촌 때문이야. 삼촌이 열아홉이니 그보다 나이 많은 여자들은 보이질 않는 거야. 우리 윤서가 스무 살이긴 해도 삼촌이 마음에 든대. 내가 우리 윤서 보내서 삼촌 마음 잘 달래 보낼 수 있게 해준다니까. 윤서년 팔자도 그렇게 풀어야 한다는 걸 어쩌겠어. 그나저나 삼촌한테 한 상 차려줘야지!"나는 문을 박차고 들어가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고 대뜸 엄마의 어깨를 밀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조용히 발을 돌려 내 방으로 몸을 숨겼다. 엄마 말이 기가 막히기는 했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이기도하다. 애초부터 애비 없는 무당 딸로 태어난 내 팔자라는 것이 이보다 더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액땜을 하기는 해야 할 것이다. 사위스럽게 급살 운운하는 엄마의 엉터리 사설이 아니고 내가 가진 태생적 한계를 극복할 액땜이 필요하다.처음 서점에 방문했을 때 남자는 내가 온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계산대에 놓인 노트북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그는 손님에게는 관심이 없는 눈치였다. 나는 천천히 서점을 한 바퀴 돌아 처음 들어왔던 출입구 앞에 섰다. 유리창 밖으로 대학의 교정이 보였다. 한 번도 좌절 따위는 겪어보지 않았을 것만 얼굴들이 보였다. 갑자기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이 폭삭 늙어버린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을 손가락으로 콕콕 찍었다. 지나가던 남학생 하나가 능청스럽게 윙크를 날렸다. 나는 몸을 돌려 계산대에 앉아 있던 남자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아저씨, 우리 결혼할래요?"키보드에서 손을 떼지 못하고 있던 남자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뭐, 뭐라고요?""나랑 결혼하고 싶은 거 아니었어요? 은성 아줌마랑 우리 엄마 말대로 우리 결혼하자고요.""가 갑자기 왜 이래요?""나, 아저씨 사랑하는 거 아니거든요. 당연한 사실이잖아요. 지금 내가 어떻게 아저씨를 사랑하겠어요. 하지만 우리 집도 정말 지긋지긋해. 이제 만수향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이 나요. 도망치고 싶은데 아저씨한테 도망쳐도 돼요?"그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는 좋다, 싫다 의사 표시를 한 것이 없었다. 엄마에게 내가 결혼하겠다고 이야기하자 모든 일은 은성 아줌마 선에서 진행되었다. 그가 내게 한 말은 딱 하나 결혼을 위해서 준비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뿐이었다.그의 부모석에는 은성 아줌마 부부가 앉았다. 나의 부모석엔 엄마 혼자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호텔 뷔페에서 몇몇 가족들만 모인 가운데 치른 결혼식은 참석한 하객이나 결혼 당사자나 모두 어색한 모습이었다. 은성 아줌마는 예물이라고 우스꽝스런 순금 세트를 잔뜩 안겨주었다. 요즘처럼 금값 비쌀 때 최고의 예물이라고 함박웃음을 짓는 엄마를 보면서 나는 이것들이 곧 엄마 차지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신혼집으로 내 짐을 옮기던 날, 옷장 문을 연 그의 눈빛이 어지럽게 흔들렸다."아저씨 뭐해요?"내가 그의 어깨너머로 옷장 안을 들여다봤다. 그곳에는 미처 치우지 못한 교복이 걸려 있었다. 내가 가방을 챙기면서 교복을 넣지 않자 그가 상기된 얼굴로 슬그머니 교복을 내밀었다. 엄마가 열아홉에 죽은 삼촌 귀신에 씌었다고 하더니 아무래도 그 말이 틀리지는 않은 모양이다. 대학원까지 나와 서점을 하는 멀쩡한 남자가 할 짓은 아니었다.고등학교 이 학년 때였다. 부모님이 여행간 친구의 집에서 동네 친구로 알고 지내던 남자 아이들을 불러 밤새워 논 적이 있었다. 별로 익숙하지도 않은 술과 담배 때문에 정신이 혼미해진 아이들 몇몇은 잠이 들고 몇몇은 무슨 짓을 하는지 눈에 보이지 않았다. 거실 귀퉁이에 쪼그린 채 잠이 들었던 나는 이상한 기척에 눈을 떴다. 입고 있던 치마가 배 위로 들쳐져 있고 팬티가 반쯤은 내려와 엉덩이에 걸쳐져 있었다. 눈이 마주친 녀석은 그날 처음 본 이웃 동네 남학생이었다. 나는 멋쩍은 듯 웃는 녀석의 복부를 힘껏 걷어찼다. 그렇게 나가떨어졌으면 창피해서 도망가 버릴 텐데 그 녀석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다시 덤벼들었다. 나 처음이거든 한 번만 해보자.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대며 매달리는 녀석에게 처음엔 웃기는 소리 좀 하지 말라고 소리질렀다. 안 해주면 강제로라도 해 볼 거라며 애걸복걸했다. 팬티를 잡아챈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알았지만 더는 실랑이하는 것도 지겨워 말리지 않았다. 나도 처음이었지만 어차피 그런 것에 미련을 둘 만큼 소중한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왕이면 남들처럼 이벤트라도 몇 번 받아본 놈이라면 나을 것이라는 생각을 잠깐 했을 뿐이었다.한 번 해보겠다고 대들 때와 달리 막상 내 몸 위로 올라와서는 어떤 식으로 해야 할지 몰라 헤매기만 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삽입해야 할 곳을 찾지 못하던 녀석의 꼴을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터져 나온다. 남편은 열여덟 그 녀석과 전혀 차이가 없었다. 손 한 번 제대로 잡지 않고 결혼한 첫날밤, 그는 오래도록 나를 보고만 있었다. 내가 기다리다 지쳐 잠이 들고서 그가 얼마나 더 나를 보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다음 날 아침 입맞춤조차 없이 파고들던 그의 섹스는 고등학생의 그것처럼 거칠고 조잡했으며 서툴렀다.서점은 아침 아홉 시에 문을 열고 저녁 열 시에 닫는다. 남편은 담배를 주문하고 신간을 눈에 띄는 자리에 배치한 다음 컴퓨터 앞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외국 유학을 준비하던 그는 위독한 아버지 때문에 서점에 눌러앉게 되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곧 돌아가셨지만 그는 여전히 돌아가신 분의 소망대로 건물을 지키며 살고 있다. 나는 가끔 밖에서 서점의 유리창 너머로 그를 훔쳐보곤 한다. 우리에 갇힌 짐승처럼 초조한 그의 발걸음과 한숨은 내가 곁에 있을 때 쉽게 볼 수 없는 모습이다. 이제 아무도 그를 가두려하지 않는데 그는 스스로를 시멘트 건물 안에 가두고 있다. 남편은 새장 문을 열어 주어도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갇힌 새다. 자기한테 날개가 있는 것조차 잊어버린 새 말이다.내가 남편에게 대학을 보내 줄 것을 요구하자 그의 눈썹 끝이 파르르 떨렸다. 남학생들이 내게 치근거리거나 건물 삼 층에 있는 당구장 주인이 말을 시킬 때면 남편의 눈썹 끝이 항상 저렇게 떨렸다. 나는 그가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무시했다.처음 결혼하겠다고 말을 꺼냈을 때 나는 엄마에게 못을 박았다. 정말 내가 급살을 맞을까 봐 결혼을 시키는 거라면 앞으로 아저씨에게 한 푼이라도 받아 낼 생각을 하지 말라고 말이다. 속으로는 그런 소리까지 하고 싶지 않았지만, 엄마가 남들에게 어린 딸 팔아먹었다는 손가락질을 받지 않게 하려면 그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한쪽 경첩이 빠져서 흔들거리는 대문을 밀고 들어가려니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은성 아줌마나, 남편이나 내가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정말 엄마한테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였기 때문이다.마루 앞에 낯선 남자 신발이 보였다. 그래도 손님은 있는 모양이다 싶어 안도하며 조심스럽게 발을 들였다. 손님을 맞는 신당 안은 텅 비어 있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둘러보는데 다른 방안에서 엄마의 교성이 흘러나왔다. 비스듬히 열린 문틈 안에서 허연 엄마의 엉덩이와 허리가 요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손님이 있는 줄 알고 긴장했던 나는 그럼 그렇지 싶어 허탈감에 버럭 소리를 질렀다."엄마, 나 왔어."급하게 꿰입은 원피스는 앞섶도 여미지 못했고 뒤로 동여맨 머리카락은 반절이 빠져서 너풀거리고 있었다. 상기된 얼굴은 부끄러움 때문인지 아니면 좀 전의 흥분 때문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아직도 백 명을 못 채웠우?""지랄 마, 저도 시집가서 알 만큼 알면서 무슨 심술이야?"엄마가 모시는 장군님은 생전에 얼마나 호색한이었는지 엄마한테 남자를 백 명은 봐야 한다고 했단다. 그 핑계로 한 번 보면 그만인 사람부터 몇 달 혹은 일 년 이상 본 사람들까지 엄마 방을 거쳐 간 남자는 수도 없이 많았다. 그중에 하나라도 쓸 만한 인간이 있었으면 엄마가 아직 저 모양 저 꼴로 살진 않았을 것이다. 하기야 무당하고 잠이나 자는 남자 중에 쓸 만한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엄마의 눈썹은 먹물로 그은 듯 짙은 검은색이다. 그 검은 눈썹 아래로 푸른빛이 도는 눈동자를 보고 있으면 서늘한 기운이 든다. 한 때는 저 눈빛으로 손님들을 후려서 주머니를 털더니 이제는 고작 이불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밖에 하지 못한다."엄마, 나 우리 아저씨 보고 있자니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아빠 생각이 나. 우리 아빠는 어떤 사람이야?""너, 이 서방한테 자꾸 아저씨라고 할래? 누가 남편보고 아저씨래. 그리고 조만간 이 서방하고 너 불러서 굿할 거니까 그렇게 알아. 상은 니 시누가 차린다고 했어.""흥, 그럼 아저씨가 아저씨지 오빤가. 누가 굿판 물어봤어. 아빠 이야기 좀 해봐.""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유분수지 갑자기 웬 아빠 타령이야?"엄마가 뭉그적거리는 사이 방안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나 때문에 제대로 일도 마치지 못한 남자가 오도 가도 못하고 있다. 이런 일 한두 번도 아니면서 새삼스럽게 엄마는 피해 있으라고 눈짓을 한다.내가 아는 아빠는 스무 살도 되지 않은 엄마를 임신시켜 놓고 책임지지 않은 무책임한 인간이라는 사실 뿐이다. 엄마는 법적으로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처녀다. 그래도 엄마는 나를 버리지 않고 키웠다. 신당에 들어가면 벽에 붙은 칠성신이나 일월성신이 그려진 무신도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아 두렵다. 몸에 힘이 빠지면서 다리가 휘청거리는데 정신을 차리고 다시 보면 그 무신도를 뜯어 버리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지긋지긋한 당집서 가능한 먼 곳으로 도망쳐 버리고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가 나를 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새삼 고맙다."도대체 어떤 인간이기에 엄마를 요 모양 요 꼴로 살게 했는지 말 좀 해줘 봐."엄마는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앞섶을 여미고 머리를 가다듬으며 딴전을 피웠다. 그렇지만, 나는 고집스럽게 한 번 더 채근을 했다. 핑곗거리를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엄마 얼굴에 체념의 기운이 스쳤다. 담배를 찾아 무는 엄마의 손끝이 살짝 떨렸다."나도 한 대 줘봐.""지랄 마, 이년아. 누가 엄마하고 맞담배질해. 느이 아빠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니야. 너무 착해서 그게 탈이었지. 얼굴에 면서기라고 쓰여 있는 샌님이었어. 아버지가 노름꾼이었는데 월급날이면 아버지 노름빚 받으러 온 사람들이 면사무소 앞에 줄을 섰었지. 학교에 다니는 어린 동생들에 정신 못 차리고 징징대며 장남한테만 의지하는 엄마는 또 어떻고. 진짜 불쌍한 사람이었다."엄마가 내뿜는 담배연기는 축축해진 실내 공기를 가르고 내 코밑으로 스며들었다. 나는 엄마 눈치도 보지 않고 담뱃갑을 열었다."내가 보기에 그 남자 거기다 놔두면 딱 말라죽겠더라고. 땅이 다 썩었는데 나무가 어떻게 살겠어. 그런데 이 남자 나무 같은 사람이라 자기 힘으로는 그 땅을 못 벗어나는 거야. 그래서 내가 어떻게든 옮기려고 하니까 끝내 따라나서지 못하데. 뱃속에 든 너를 담보로 끌어내 보려고 애를 쓰다 내가 포기했다. 자기가 그렇게 떠나 버리면 노름꾼 아버지에 철없는 엄마와 어린 동생들이 어떻게 되겠냐고 울더라.""참, 그게 착한 거냐? 한심한 거지. 그리고 자기 가족만 우선이고 아이를 가진 엄마는 아무것도 아니야? 핑계도 참. 그래서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어?""죽었다더라. 결혼도 못하고 폐암 걸려 가슴이 다 썩어 문드러져 죽었다더라."엄마가 입을 다물고 산 탓에 나는 어린 시절 잠자리에서 내 출생에 비밀을 상상하며 잠들곤 했다. 그런데 고작 가족들한테 매여서 꼼짝하지 못한 무능한 말단 공무원이라니 궁금해할 건더기도 없는 아빠였다. 그럼에도 화가 났다. 아무리 한심한 사람이라도 자식 얼굴 한 번 보지 않고 죽어버리는 사람이 어디 있나. 엄마는 이미 껍질 속으로 깊숙이 몸을 숨긴 달팽이처럼 자기 생각에 빠져서 내가 옆에 있는 것조차 잊어버린 눈치다.남편에게는 일부러 엄마에게 들른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엄마가 먼저 손 내밀지 않는다고 도와줄 생각이 없어 보이는 남편한테 비위가 상해 엄마 이야기는 잘 꺼내지 않았다. 괜한 소리를 물어보는 바람에 엄마는 신당에 들어가 나오지 않는다. 나는 신당 문 손잡이를 잡았다 놓고는 그냥 돌아 나왔다. 남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지만 받지 않았다.건물 입구로 들어서는 나를 발견한 남편이 허겁지겁 뛰어나왔다."오늘 어디 갔었니?""왜?""전화를 다섯 통이나 했는데 왜 안 받아? 학원 끝나고 세 시간이나 어딜 돌아다녔어?"의처증 걸린 늙은 남편처럼 다짜고짜 들이대는 그의 질문에 나는 심보가 뒤틀렸다."내가 꼭 그런 거까지 아저씨한테 보고해야 해?""흥, 어린놈들하고 어울려 다니려니 재미가 좋은 모양이구나.""뭐? 어린놈들? 자기가 더 유치한 주제에. 내가 모를 줄 알아. 저녁마다 내 핸드폰 들여다보며 확인하고 있으면서. 아마 인터넷으로도 알아볼 수 있는 것은 다 알아보고 있을걸. 솔직히 말해봐 위치추적은 안 해?"내가 생각보다 거세게 나오자 남편은 처음의 태도에 비해 훨씬 누그러져 다소 비굴해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윤서야, 나는 잠시라도 네가 어디 있는지 확인이 되지 않으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어. 그럼 금방이라도 네가 떠나버릴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단 말야. 나는 여기서 꼼짝도 할 수 없는데 너는 어디든 갈 수 있는 스무 살이잖아."나는 그에게 아빠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다. 얼마든지 움직일 수 있었음에도 스스로 나무가 되어버린 아빠의 이야기를 말이다. 하지만 그건 잠시 스친 생각일 뿐이다."거기에 왜 나이가 나와? 공연히 나이 핑계 대지 마. 아저씨는 그저 두려울 뿐이잖아. 이 시멘트 건물 밖으로 나가는 것도 두렵고, 진짜 관계를 맺는 것도 두려울 뿐이야. 다치는 게 겁나니까 돈으로 살 수 있는 어린애들에게 집착하지. 어린애들 상대하다 보면 언제까지나 안전할 것 같지. 어림없는 소리야! 아저씨도 우리 아빠도 다 멍청해."나도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갑자기 화가 치밀었다. 남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어쩔 줄 몰라 한다. 결국 그가 가장 숨기고 싶어 하는 부분을 들춘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진짜 부부가 되려면 거쳐야 할 문 앞에 와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잠시 망설여졌다. 나는 그와 감정의 속살을 모두 드러낼 준비가 된 것일까. 내가 문턱 앞에서 고민하는 사이 그가 돌아서 버렸다. 그는 내게 화를 내지 않았다.어렴풋하게 들리던 방울소리가 점점 커졌다. 방울소리가 커짐에 따라 제금소리까지 가세해서 고막이 터질 듯 울려댔다. 어디서 들리는지 알아보려 했으나 몸이 굳어서 발끝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나는 옆에서 자고 있던 남편에게 도움을 요청하려고 애를 썼지만 입술만 달싹일 뿐 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산더미 같은 쇳덩이가 가슴을 짓눌렀다. 숨을 헐떡거리다 이제는 죽는구나 싶은 순간 눈을 떴다. 며칠째 같은 꿈이다. 등이 흠뻑 젖어 자다 말고 옷을 갈아입는 날이 반복되고 있다.오늘은 엄마가 열아홉에 죽었다는 시삼촌의 지노귀굿을 하기로 한 날이다. 큰 시누 말이라면 무조건 들어주는 남편은 기꺼이 굿판에 나가 절을 할 것이다. 나는 요즘 계속되고 있는 꿈 때문에 기력이 쇠잔해져서 내키지 않는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굿을 해야 엄마 살림에 보탬이 될 듯싶어 아무 소리 하지 않았다.우리가 도착도 하기 전에 시작된 굿은 엄마의 신엄마가 주관하고 있었다. 다섯 개의 접시로 켜켜이 쌓아 올린 과일들이 상다리가 부러질 듯 차려져 있다. 오랜만에 벌어진 굿판이어서 그런지 떡도 눈이 휘둥그레지게 차려놓았다. 계면떡, 팥떡, 방망이떡, 절편, 백설기, 인절미, 편떡, 건달떡, 웃기, 약식까지 엄마가 이번 상에 들인 정성은 아무래도 도가 지나쳐 큰 시누의 눈치가 살펴졌다. 시누는 연방 손을 비비며 왔다갔다 거린다."수이라 깊다 해도 베개 넘어가 수이로다. 월직사제는 앞을 서고 일직사제는 뒤를 서고 문신은 문을 열고 신신은 신을 신겨 길신은 길을 신겨 산신은 산을 신겨 여사제 대사제 아미타불 염불 고개 넘어서서 극락세계 연화대로 선하재천 하옵소사. 이씨 가중에 일가는 친척이며 동기는 일신 조카 방성들 손주 방성들 일가는 가속을 따라가는 사제짐 젖혀가고 상문짐 젖혀가고 꿈자리 몽사를 젖혀가고 석 달 삼 년이 곱게 나기를 발원이요."청 좋기로 소문난 신엄마가 구슬프게 풀어가는 아린말명 타령소리에 시누는 눈물을 찍어내 가며 남편을 찾고 있다. 남편과 내가 엄마 손에 이끌려 무릎을 꿇자 신엄마 타령은 한층 더 힘을 받기 시작했다."오늘은 사람이 죽어 구원되면 칠칠이 사십구제 백일제 불전 장전 받아먹게 마련하고 또 무장승은 시왕 군웅치 받아먹게 마련하고 또 그애기 기르던 바리 공덕 할미 할애비 벌배 나점배 양귀비 조밥 받아먹기 마련하고 성후망 두 망제님 후세 발원 남자 천도 부처님 인도하시는 데로 가시는 날이로성이다."벌써 얼마나 뛰었는지 신엄마의 버선바닥이 새까맣다. 버선이 하늘을 향해 뛰어오를 때마다 홍철릭 자락이 휘어 감긴다. 엄마가 시키는 대로 남편과 허리를 굽혀 절을 했다. 무릎이 먼저 닿고 고개가 땅에 닿았다. 상체를 들어 올리려는 순간 몸이 움직이지를 않는다. 갑자기 지난밤처럼 쇳덩이가 허리 위에서 누르고 있는듯하다. 조심스럽게 눈을 들어 앞을 보니 신엄마가 내려놓은 열두 방울이 저 혼자 놀고 있다. 방울은 나를 향해 흔들거리고 있는데 아무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는 모양이다. 나는 허리를 일으켜 세우려 애를 썼지만 이미 정신이 가물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별이 총총하던 하늘이 둘로 갈라지더니 상복을 입은 상주들이 여럿 보였다. 무슨 일인가 궁금한 마음이 들 사이도 없이 상주들이 온데간데없어졌다. 곧 커다란 돌멩이 하나가 나를 향해 곤두박질을 치기 시작했다. 돌멩이는 가까이 다가올수록 새빨간 불덩이로 바뀌었다. 나는 몸을 움직일 수 없었지만 그 불을 받아들이면 더는 삶이 예전 같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불은 맹렬한 기세로 돌진해왔다. 얼굴도 모르는 아빠는 자기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죽어갔다. 남편 또한 오래전부터 팔리지 않는 귀퉁이의 책처럼 자기 건물에 붙들려 꼼짝 못하고 있다. 나는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았다. 한쪽 발을 떼서 몸을 돌리는 순간 불덩이는 내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어깨가 화끈거렸다.눈을 뜨니 겁에 질린 엄마와 남편의 모습이 제일 먼저 보였다. 응급실의 요란스런 발걸음 소리가 차츰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쪽 어깨가 불에 덴 듯 화끈거렸다. 굿판을 위해 쳐놓은 천막 기둥이 넘어지면서 내 어깨를 덮쳤다고 한다. 천막과 기둥을 연결하는 송곳 부분이 어깨에 상처를 내긴 했지만 그리 심한 것은 아니라며 천만다행이라고들 수런거렸다."거봐라. 윤서야, 할머니 말씀이 맞잖아. 이렇게 액땜하고 넘어가게 된 건 다 할머니 말씀 따른 덕분이야. 아이고, 지장보살님, 일월 선신님, 칠성님, 용할머니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눈물로 얼룩진 얼굴로 엄마가 손을 비비며 읊어대는 소란스런 사설을 들으며 나는 다시 깊은 잠속에 빠져들었다.나는 이제 스물한 살이다. 요즘 유행하는 하이웨스트미니스커트에 킬힐을 신어도 어색하지 않은 것이 제법 성숙해졌다. 우리 서점이 이웃해 있는 유명 대학에는 입학하지 못했지만 수도권에 있는 전문대에 다니고 있다. 수업 끝나면 조별 과제물 때문에 절절매는 것이 여느 대학생과 다를 바가 없다. 다른 점이 있다면 친구들은 저녁에 늦어지는 일이 있으면 부모님께 전화하고 나는 남편에게 전화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가끔 쨍하게 울리는 제금 소리와 함께 친구들의 사고소식 따위가 환청처럼 먼저 들려 곤란을 겪지만 나는 모르는 척 입을 다물어 버린다. 어깨에 남겨진 흉터가 시간이 지나면서 옅어지는 것처럼 언젠가는 사라질 일들이라고 생각한다.엄마는 지노귀굿으로 열아홉 살에 죽은 삼촌의 원한을 풀어 보냈다고 주장하지만 남편은 여전히 장롱 속에 깊숙이 넣어둔 내 교복을 만지작거린다. 그는 잠자는 숲 속의 왕자다. 자신의 성채에서 아직도 깊은 잠에 빠져 있다. 엄마가 아빠를 데리고 나올 수 없었듯이 나 또한 그를 깨울 수 있는 공주는 아니다. 하지만 살다보면 그의 공주가 되지 말란 법도 없다. 나는 겨우 스물한 살이고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서 장담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으니 말이다. 엄마는 점 손님 앞에서 매번 확신을 하고 자신 있게 굿 이야기를 꺼내다 망신을 당하곤 한다. 내 앞에 펼쳐진 날들에 기대를 하는 것은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 알 수 없는 시간 속에서 우리 관계가 어떻게 변할지 자못 기대된다.

  • 문학·출판
  • 전북일보
  • 2010.01.01 23:02

철학자들, 삶의 근본을 묻고 답하다

젊은 철학자들이 삶의 근본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 답하는 형태로 형이상학, 사회 철학, 성(性) 철학 등 다양한 분야의 철학을 소개하는 시리즈가 출간됐다. 민음인이 인문 교양 시리즈인 '민음 지식의 정원' 첫 번째 순서로 내놓은 철학편 여섯 권은 일상적인 물음을 통해 철학 이론을 설명하고 인문학적 사고를 이끌어내려 한다. 편상범 박사는 2권 '윤리학'에서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면 도덕이 왜 필요한가?", "거짓말은 무조건 해서는 안 되는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면 다 되는가?", "인간의 행복은 동물의 행복과 다른가?" 등 물음을 던진다. 행복과 도덕을 연계하는 질문이 많은 것은 윤리학 역사상 "인간은 도덕률에 따라 살아야 하는가, 아니면 눈앞의 즐거움을 중시해도 좋은가?"라는 문제가 핵심을 차지해 왔기 때문이다. 윤리학은 결국 '나는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근본적으로 고민하는 학문이다. 홍은영 박사의 '성 철학'(3권)도 "사드는 잔혹극의 주인공이었을 뿐인가?", "아담과 이브에 가려진 진실은 무엇인가?", "리비도가 모든 행동을 결정할까?" 등 흥미로운 물음을 던지며 인간의 욕망과 금기, 억압의 역사를 살펴본다. 김화성 박사가 쓴 6권 '형이상학'은 철학을 "지식으로 가는 길에 떨어진 쓰레기 몇 점을 치우는 일"로 표현한 존 로크를 인용하며 "쓰레기 청소를 넘어서는 형이상학의 역할은 무엇일까?", "어떻게 세상의 중심에 인간이 자리하게 됐을까?" 등 질문을 던진다. 이 물음에 대한 여러 생각이 세계와 나의 관계를 풀어주는 열쇠가 된다. 이밖에 1권은 '사회철학'(이유선), 4권은 '인식론'(황설중), 6권은 '종교 철학'(이진남)을 다룬다. 민음인은 앞으로 '민음 지식의 정원' 경제편과 역사편 등도 내놓을 계획이다. 각 144∼200쪽. 6천800원.

  • 문학·출판
  • 연합
  • 2009.12.31 23:02

한승헌 변호사 '…고백과 증언' 자서전 출간

"풍파 속에서 살아온 세상을 되짚어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오랜 세월을 음지에서 보냈지만, 내 삶은 양지였다."40년 넘게 변호사로 활동해 오면서 법률서와 평론집, 시집, 수필 등 30여권의 책을 냈지만 정작 자서전을 펴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한승헌 변호사(75·전 감사원장). 그에게 올 한해는 특별한 의미가 따랐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늘 분주했던 그가 지금까지의 삶을 되돌아보는 작업으로 한겨레신문에 자전적인 글을 연재했고, 그 글을 다시 정리하고 보충해서 <한 변호사의 고백과 증언>이란 단행본을 낸 것이다.한해가 저물어가는 연말, 서울 남대문로에 있는 법무법인 광장 사무실에서 한 변호사를 만났다.한국 현대사를 주름잡을만한 민주화운동과 시국사건 법정의 중심에 있었던 한 변호사는 "나무는 조용히 있고 싶은데 바람이 멈춰주지를 않았다"(樹欲靜而風不止)라는 말로 회고를 대신했다.▲ 불의한 권력, 의로운 수난자를 증언하다무소불위의 군사독재정권 시대의 '시국사건 변호인 1호'.한 변호사의 이름 뒤에 항상 따라붙는 명예로운 훈장(?) 같은 수식어다. 이번에 펴낸 '한 변호사의 고백과 증언' 역시 무고한 수난자들과 고락을 함께 한 증언록이다. "나 자신에 관한 고백 외에 불의한 권력과 의로운 수난자들에 대한 증언에 무게를 뒀다"는 한 변호사는 '증언'쪽에 의미를 부여했다.신문에 연재된 83회 분량의 글에 가족과 신앙, 건강 등 개인적 삶을 보완해서 엮은 이 책의 자료 사진은 모두 한 변호사 자신이 직접 챙긴 것이었다. 그는 "살아오면서 비교적 자료를 많이 모아온 편"이라고 담담하게 표현했지만 그의 자료수집에 대한 치밀함은 널리 알려져 있다.글을 실었던 신문사 기자들이 놀랐을 정도로 다양한 자료를 갖고 있는 그는 "그 중에서 시국사건에 관련된 사진들은 널리 공유해야 할 귀중한 자료인 만큼 언젠가 따로 분류해서 공개할 생각"이라고 했다.그의 자서전은 '현대사의 굴곡과 비사를 생생하게 담은 책''반독재·민주화 시대의 실록'등등의 평가를 받고 있다. "귀한 신문 지면에 사적인 이야기만 쓸 수 없었다"는 그는 자신이 변호한 굵직한 시국사건을 알기 쉽게 정리해 실었다.▲ 법정 판결과는 다른 진실의 기록"내가 만난 피고인 중에는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 일신의 위험을 돌보지 않고 나서서 헌신하다 독재권력에 의해 박해받은 양심수들이 많았다. 그들은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역사 위에 큰 발자국을 남긴 사람들이다. 내가 법정의 판결과는 다른 사건의 진실을 기록하려고 노력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피고인은 변호사를 잘 만나야 한다고 하지만, 실인즉 변호사는 피고인을 잘 만나야 한다'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던 한 변호사는 자신이 '잘 만난' 피고인들에게서 오히려 정신적 깨달음을 얻었고, 그래서 인간적으로 성숙해질 수 있었다고 말했다.가난한 가정에서 암에 걸린 어머니가 아들의 무사 졸업을 고대하며 고통을 참고 있는데도 학생운동에 나섰다가 징역을 살면서도 뜻을 굽히지 않던 대학생, 각서 한 장 써서 던지면 풀려날 수 있는데도 이를 거부해 10년이나 수감생활을 더 하고 나온 젊은이들은 아직도 그의 기억 속에 가슴 아픈 모습으로 남아 있다.▲ 안타까운 민주주의와 인권의 역류지난 2005년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장을 맡아 사법 개혁의 근간을 마련했던 한 변호사가 바라보는 2009년 우리나라 사법부의 모습은 어떨까."오랜 고통과 수난, 그리고 끈질긴 저항을 거쳐 민주주의와 인권을 쟁취해 세계의 주목과 칭송을 받았는데, 현 정부 들어서 그것이 흔들리고 역류되는 현상이 잇달아 걱정스럽다."검찰권의 행사에 대해서'산 권력에는 약하고 죽은 권력에는 가혹하다' 는 세평이 나도는 것 또한 유감스럽고 마음 아프다고 했다."사법부가 검찰의 과오를 극히 일부나마 견제 시정하기도 했지만, 반대로 어떤 사건에서는 의문과 우려를 자초하기도 했다"며 "사법부의 독립엔 외풍도 문제지만, 법원 안의 '내풍'또한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한 변호사는 용담댐 건설로 고향(진안군 안천면)이 물에 잠겨 '통일이 돼도 갈 곳이 없는 절대 실향민'이 되었지만 고향 사랑이 각별하다.고향 발전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그는 인터뷰 말미에 이런 당부를 잊지 않았다." 전북이 국정에서 소외당하지 않도록 지역 안에서의 갈등을 접고 우리 목소리와 역량을 하나로 결집시켜야 한다. 나도 적은 힘이나마 보태고 싶다."

  • 문학·출판
  • 강인석
  • 2009.12.29 23:02

韓문학 많이 번역된 언어는 영-불-독어順

최근 5년간 한국문학이 많이 번역된 언어는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순으로 나타났다. 27일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발간한 '2009 문예연감'에 따르면 2004-2008년 해외에서 출간된 한국문학 번역작품집 331권 가운데 영어로 출간된 것이 69권으로 가장 많았다. 이어 프랑스어가 61권, 독일어가 43권, 중국어와 스페인어가 각각 35권, 30권으로 뒤를 이었다. 5년간 추세를 보면 스페인어의 증가세가 두드러졌다. 스페인어로 번역된 한국문학 작품집은 2004년 3권, 2005년 4권에서 2006년 7권, 2007년 6권으로 늘었으며 지난해에는 10권이 번역돼 영어와 더불어 가장 많았다. 올해에도 아르헨티나에서 한국 소설집이 잇따라 번역돼 주목을 받는 등 스페인어권 국가들이 새로운 한국문학의 수용처로 부상하고 있다. 반면, 일본은 지난해 한국 소설이 단 한 권도 번역되지 않은 것을 비롯해 5년간 한국문학 작품집 출간권수가 13권에 그쳤다. 매년 수백 종 이상의 일본 소설이 한국에서 출간되는 추세를 감안하면 문학 번역시장에서의 불균형이 심각한 것이다. 신승엽 민족문학사연구소 사무국장은 "일본문학의 국내 번역 소개는 시장의 자율적인 판단에 따라 이뤄지는 데 반해, 우리 문학의 일본으로의 번역은 기관의 지원에 의해서야 겨우 이뤄지고 있다"며 "이 심각한 역조 현상을 극복하는 길이 빨리 모색돼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 문학·출판
  • 연합
  • 2009.12.28 23:02

[강준만의 책으로 읽는 세상] 부와 민주주의

최근 비리 혐의로 검찰에 소환되는 정치인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분노나 짜증보다는 측은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분노와 짜증이 전혀 없는 건 아닌데, 그건 그 정치인들을 향한 것이라기보다는 '눈 가리고 아웅'하는 우리 모두의 무감각에 관한 것이라고 하는 게 옳을 것 같다. 법대로 허용된 돈만 갖고 정치할 수 있는가? 세상 물정을 웬만큼 아는 사람들은 '절대 불가'를 외치는데, 우리는 그건 모른 척 하고 "운 좋은 정치인은 빠지고 운 나쁜 정치인은 걸려드는" 기존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한국정치의 그런 현실에 대해 위로를 받고 싶은 분들은 미국 저널리스트 케빈 필립스(Kevin Phillips)가 쓴 「부와 민주주의 : 미국의 금권정치와 거대 부호들의 정치사」(오삼교·정하용 옮김, 중심, 2004)라는 책을 읽어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이 책은 미국정치가 돈에 먹힌 현실을 차분하게 역사적으로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부정부패의 제도화'라고나 할까. 이 점에선 한국정치가 미국정치보다 더 깨끗하다고 말해도 무방하다. 우리는 부정부패를 제도화까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법을 어긴 정치인들이 법망에 걸려든 게 연례행사처럼 자주 일어나지만, 그건 한국정치가 미국정치보다 그만큼 덜 썩었다는 증거로 보는 게 옳으리라.저자에 따르면, 미국정치가 거의 공공연하게 값으로 흥정되는 시장터로 바뀌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들어서였다. 금권의 정치통제력이 증대되면서 '대통령 매수하기(Buying the Presidency)'와 '의회 매수하기(Buying of Congress)'에 대한 새로운 연구와 책들이 연이어 출간되었다. 보수파 내부에서도 금권정치에 대한 비난이 쏟아졌다. 199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의 이단자 패트릭 뷰캐넌은 "나는 혁명을 원한다"고 외쳤다. 그가 말하는 혁명은 "노동자와 중산층이 공화당을 다시 장악하는 것"이었다. 그는 조지 부시를 겨냥해 미국사회가 "하버드와 예일 출신들이 장악한 귀족들의 공화당"에 의해 배신당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텍사스의 억만장자 출신 로스 페로마저도 부시를 포함한 공화당 기득권 세력을 '컨트리 클럽 멤버들'이며 '부잣집 아들들'이라고 공격했다.전문가들은 2000년 이전까지의 대통령 선거자금 모금을 "부의 예선(Wealth primary)"이라고 이름 붙였는데 이는 거액 기부자의 후원이라는 새로운 선거 요소를 압축한 표현이었다. 일부 인사들은 예비선거 자체를 '국가적 경매(national auction)'라고 조롱했다. 존 매케인 상원의원은 미국의 선거자금 모금체제를 "국가를 가장 높은 가격을 제시하는 응찰자에게 팔아 넘김으로써 공직을 유지하려는 양당 공모하의 정교한 직권남용체제(influence-peddling scheme)"라고 비난했다.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미국선거와 정치가 돈에 의해 좌우되는 정도를 넘어서 사실상 매수되었다는 걸 말한다. 물론 여전히 대통령 선거에 기대를 거는 미국인들도 많지만, 서민층은 정치에 등을 돌린지 오래다. 1996년 대선에서 소득 분포의 최하위 20%에 속하는 계층의 38.7%만이 투표한 반면에 최상위 20%에 속하는 계층은 72.6%가 투표에 참여했다. 알아서 가진 자들끼리 다 해처먹으라는 냉소의 표현인 셈이다.미국의 민주주의가 돈에 의해 먹혔다는 논지를 전개한 저자가 가장 심각하게 생각하는 문제는 서구의 유권자들이 경제에 대한 정치적이고 대중적인 통제권을 상실했다는 점이다. 이로 인한 문제는 지속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20세기의 민주주의의 세기였다면 21세기는 조금 다를 것이라는 게 그의 전망이다.그의 전망이 맞을지는 두고 보아야겠지만, 유권자들이 경제에 대한 정치적이고 대중적인 통제권을 상실했다는 점에선 한국도 미국과 다를 바가 없다. 아니 오히려 대기업들이 국제경쟁의 주요 선수들이라는 점에서 대다수 유권자들이 기업에 목을 매고 사는 형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저자의 주장 중 가장 눈여겨 볼 것은 돈에 미쳐 돌아가는 건 정치 뿐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즉, 정치는 사회의 반영일 수 있다는 것이다. 1980년대 들어 로날드 레이건 시대가 출범하면서 노골적인 탐욕이 공공연하게 예찬되었고, 「회사」, 「벤처」, 「백만장자」, 「기업가」, 「성공」 같은 제호를 가진 신간 잡지들이 쏟아져 나와 보통사람들의 경제적 야망을 자극했다.1990년대에도 「신은 당신이 부유하기를 원한다(God Wants You To Be Rich)」의 저자인 폴 제인 필저(Paul Zane Pilzer), 「용감하게 부자되기(Dare to Prosper)」라는 책을 펴낸 전세계통합교회(Unity Church Worldwide)의 캐서린 폰더(Catherine Ponder), 「성공의 7가지 영적인 법칙(The Seven Spiritual Laws of Success)」의 저자인 디팩 초프라(Deepak Chopra) 등이 '돈 예찬론'을 내놓았다.미국인들이 늘 돈에 미쳐 돌아가는 건 아니다. 역사학자 아더 슐레신저 2세는 미국사회가 약 30년을 하나의 주기로 해서 공익(public purpose)의 시대와 사익(private interest)의 시대가 교차해왔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그는 "우리의 전체적 여건을 향상시키려고 하는 '공익의 시대'는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에 대규모 변화를 축적한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이러한 혁신의 물줄기는 곧 정치를 질식시킨다. 왜냐하면 정치는 이 변화를 소화시킬 시간적 여유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 더구나 지속적인 공익 지향 성향은 정서적인 면에서 곧 고갈된다. (왜냐하면) 한 국가가 고도로 긴장된 정치적 쇄신의 추동력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은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윽고 사람들은 다시 조용한 사적 생활에 침잠할 수 있기를 갈망한다. 지속되는 전투적 구호와 요구에 지치고 끊임없는 국가적 규모의 사안들에 식상해서, 또 그 혁신 노력의 결과에 환멸을 느껴서 이들은…휴식과 기력 회복을 위한 휴지기를 추구한다. 이렇게 해서 공익을 추구하는 열정, 이상주의, 개혁 운동은 침체기에 접어들고 공공의 문제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시장 경제의 법칙이 다시 좌우하게 된다."이와 관련, 필립스는 "역사적으로 번갈아 나타나는 주기로 인해 미국은 부와 민주주의를 동시에 누릴 수 있었으며, 하나의 주기에서 다른 주기로 옮겨갈 수 있는 동력이 미국 정치가 지닌 진정한 힘이다"고 전제하면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쉽게 중첩되고 동맹을 맺기도 하지만, 반드시 분리되어 유지되어야 한다. 이 둘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이런 '공익·사익 교차론'은 미국에서만 나타나는 게 아니다. 인간이 사는 어느 사회에서건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이다. 한국은 지금 '공익의 시대'인가, '사익의 시대'인가? 물론 사익의 시대다. 그러나 주기는 미국보다는 한국이 더 짧다. 물론 '빨리빨리'의 원리 때문이다. 이제 곧 '공익의 시대'가 돌아오게 돼 있다. 그렇지만 저절로 오진 않는다. 공익을 추구하겠다고 외쳤던 사람들의 무능과 위선에 질려 사익을 택한 사람들의 상처를 어루만질 수 있는 성찰과 비전이 필요하다. 돈 문제에 대해 정직해져야 한다는 건 두말할 나위가 없다. 사익의 시대건 공익의 시대건 한가지 변치 않는 원리는 바로 이것이다. "이 바보야, 문제는 돈이야!"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 문학·출판
  • 전북일보
  • 2009.12.25 23:02

2010 전북일보 신춘문예 1395편 접수

신춘문예 응모자들의 연령대가 높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0 전북일보 신춘문예' 응모작들은 전반적으로 글 쓰는 기술들이 좋아졌다.2010년 전북일보 신춘문예에는 시 807편, 수필 460편, 소설 64편, 동화 64편 등 4개 분야에 총 1395편이 응모했다. 이는 지난해 1375편 보다 약간 늘어난 숫자. 전북과 전남, 서울, 경기, 강원, 충남, 충북, 경남, 경북, 부산, 대구, 제주도 등 국내는 물론 프랑스 등 해외에서도 접수됐다.올해 가장 큰 특징은 문학청년들의 참여가 현저하게 줄고, 응모자들의 연령층이 한층 높아졌다는 점. 과거 문예창작학과나 국어국문학과 등에 재학 중이거나 막 졸업한 20∼30대들이 주로 당선자에 이름을 올렸다면 몇년 전부터는 40대의 약진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심사위원들은 "긍정적으로 해석한다면 삶의 경험과 인생의 연륜이 작품 속에 녹아났기 때문이고 부정적으로 해석한다면 젊은이들이 문학을 멀리하기 때문인 것 같다"고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표명했다.본심에 오른 응모작들은 탄탄한 구성과 치밀한 전개 등으로 주목받았다. 각 분야별로 20일부터 23일까지 진행된 본심에서 심사위원들은 "좋은 작품들 속에서 뛰어난 작품을 뽑게돼 기쁘다"고 말했다.그러나 예선 탈락된 응모작 중 일부는 수준이 한참 미달되기도 했다. 문예교실 등을 통해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지고 대중화와 일반화가 가져온 결과로 분석된다.

  • 문학·출판
  • 도휘정
  • 2009.12.24 23:02

본보 신춘문예 중년층 대거 응모…작품별 편차 커

올해도 전북일보 신춘문예는 뜨거웠다. 특히 오랜 습작기간을 거친 중년의 문학청년들이 많아져 한층 깊어진 서사를 만날 수 있었다.'2010 전북일보 신춘문예' 예심은 지난 18일 오후 전북일보 편집국에서 진행됐다. 올해 역시 전북일보의 전통을 살려 경종호 기명숙 김재희 김형미 문 신 안성덕 장창영 최기우 황정연씨 등 전북일보 신춘문예 출신 문인들의 모임인 '전북일보 문우회'가 맡았다.이번 신춘문예에는 4개 분야에 총 1395편(시 807편, 수필 460편, 소설 64편, 동화 64편)이 응모했다.특히 소설 분야 응모자들의 관심은 다양했다. 다문화가정, 미혼모, 실직, 청년실업 등 우리 사회의 어두운 곳을 바라보는 시선을 더욱 날카롭게 했다. 지난해 미래 사회를 소재로 한 응모작들이 다수 발견되었던 것과 달리 올해는 고대사나 일제강점기·한국전쟁 등 근대사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이 여럿 있었다.몇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참신한 상상력 돋보였으나 삶과 세상에 대한 진술이 미약하고, 이야기를 끌고 가는 힘은 있으나 주제의식이 부족한 작품이 있었다.글을 쓰는 연령층이 높아지다 보니 오늘날 잘 쓰지 않는 단어나 비문 등을 써 기본 글쓰기 어법에서 벗어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러나 과거 단어 하나만을 작품 제목으로 내세웠던 것과는 달리 제목만 보고서도 읽고 싶다는 충동을 느낄 만큼 매력적인 제목을 만들어내는 능력들이 뛰어났다.시는 지난해에 이어 서정시의 강세였다. 그러나 자신의 감정이나 이야기를 시형식으로 옮겨놓는 데 그쳐 서정시의 단점과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주제를 끄집어내려는 과정 없이 관련된 단어만을 나열하는데 그쳐 시적 긴장감이 떨어지거나 감상적 향유에 그치는 경향도 있었다.시 역시 사회를 떠나 존재할 수 없는 법. 낯익은 소재와 형식으로 가슴을 치는 감동이 없고 치열하지 못하다는 지적은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러나 본심에서는 심사위원들의 탄성을 자아낼 정도로 눈에 띄는 시들이 발견됐다.수필은 자잘한 일상과 가족 이야기 등 신변잡기적인 글에서는 벗어났지만, 그 이상을 뛰어넘는 작품은 드물었다는 평가다. 여러 가지 소재를 나열하는 정도라 하나의 소재를 힘있게 밀고나가는 힘이 부족했고 전체적으로 산만하다는 인상을 줬다.특히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김수환 추기경 선종 등 사회적으로 굵직한 이슈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문학적 감수성으로 이어지지 못해 아쉬웠다는 평이다.무엇보다 지역내 수필 인구가 결코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도내 출신들의 응모가 적어 안타까움으로 남았다.동화는 '왕따' '죽음' 등으로 소재가 편중됐다. 동화를 읽는 세대들의 고민을 반영한 것이기는 하지만, 40여 편이 거의 비슷하다고 할 정도로 상상력이 빈약했다. 첫 장에서 결론이 다 보일 정도로 긴장감이 떨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어린이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 선택이나 긴 문장으로 독해하기가 쉽지 않았다는 지적도 나왔다.신문사가 공지한 단편 분량에 맞추다 보니 글을 성급히 마무리 짓거나 세밀하게 묘사하지 못한 것 같다는 문제도 제기됐다.하지만 참신한 상상력과 문장력을 가진 작품도 있었고, 초등학교 저학년과 고학년용으로 분류할 만큼 독자층을 고려한 세련된 작품도 나왔다. 물론, 심사위원들을 읽는 내내 행복하게 만든 '예쁜 동화'도 있었다.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자는 2010년 1월 1일 새해 아침 지면을 통해 발표된다.

  • 문학·출판
  • 도휘정·이화정
  • 2009.12.24 23:02

바다와 만난 문학 '문학바다' 창간

바다와 문학을 접목시킨 문예지가 나왔다. 해양수산부 산하 해양문화재단(이사장 최낙정)과 출판사 '생각의나무'는 해양문학 계간지 '문학바다'를 최근 창간했다. 오랫동안 문학인들의 상상력을 자극한 바다의 다양한 얼굴을 널리 알리고 바다와 관련된 문학의 깊이를 확장시킨다는 것이 창간 취지로, 소설가 백시종씨가 편집주간을 맡고 김애양ㆍ정일근ㆍ정해종씨 등이 편집위원으로 참여했다. 김인호 편집위원은 창간사에서 "문학은 때로는 바다의 마음을 읽고 때로는 바다의 소리로 말한다. 그리하여 인간과 바다가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제시한다"며 "'문학바다'는 그런 역할을 맡으면서 바다의 기쁨과 슬픔과 두려움을 노래할 것"이라고 말했다. 창간호에는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과 최낙정 해양문화재단 이사장이 '21세기 무한한 희망의 공간, 바다'를 주제로 진행한 대담과 더불어 '우리는 왜 다시 바다를 생각해야 하는가'에 대한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정민 한양대 교수 등의 기획특집 글이 실렸다. 소설가 전성태의 연평도 르포와 문학평론가 이태동, 소설가 한창훈ㆍ권지예 등의 바다 에세이를 비롯해 한승원ㆍ송기원ㆍ한유주ㆍ이상섭의 신작 소설, 송수권ㆍ천양희ㆍ장석주ㆍ김수영의 신작 시도 수록됐다.

  • 문학·출판
  • 연합
  • 2009.12.24 23:02

어린이를 환상의 세계로..그림책 200권

1993년 버지니아 리 버튼의 '작은 집 이야기'로 시작된 '네버랜드 세계의 걸작 그림책'(시공주니어 펴냄) 시리즈가 200권을 넘어섰다. 200번째 그림책은 어린이를 꿈의 세계로 안내하는 데 탁월한 솜씨를 지닌 영국 그림책 작가 존 버닝햄의 신작 '비밀 파티'로, 모두 잠든 한밤중에 주인공 마리 일레인이 집 고양이 말콤을 따라 고양이들의 파티에 다녀오는 이야기를 담았다. 해외 명작 그림책을 정식 계약하고 충실히 번역한 이 시리즈는 지난 17년간 버지니아 리 버튼과 존 버닝햄뿐 아니라 모리스 샌닥, 마리 홀 에츠, 헬린 옥스버리 등 외국의 유명 작가들의 작품들을 소개했다. 이 가운데 미국의 권위 있는 그림책상인 칼데콧 상을 받은 작품이 32편이며,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상, 케이트 그린어웨이 상 등 주요 상을 받은 작품도 다수 포함됐다. 시공주니어는 200권 출간과 함께 이를 기념하는 '네버랜드 그림책을 빛낸 거장들'을 펴냈다. 이 책은 시리즈에 2권 이상 작품이 포함된 작가 45명을 소개하고, 국내 어린이문학 전문가들과 함께 그림책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살펴본다. 발행인 전재국 씨는 "세대와 문화를 뛰어넘는 재미와 감동을 주는 책을 출간하는 게 '네버랜드 세계의 걸작 그림책'의 지향점"이라고 말했다. '비밀 파티' 48쪽, 1만1천원. '네버랜드 그림책을 빛낸 거장들' 256쪽, 2만8천원.

  • 문학·출판
  • 연합
  • 2009.12.24 23:02

[사람] '전북여류문학상' 이소애 시인 선정

전북여류문학회(회장 김사은)가 시상하는 '제12회 전북여류문학상'에 이소애 시인(66)이 선정됐다.1994년 「한맥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한 이 시인은 치열한 탐구정신을 갖고 시집 「침묵으로 하는 말」과 「쪽빛 징검다리」, 수상집 「보랏빛 연가」를 출간해 작가로서 문학성을 인정받았으며, 전북여류문학회원, 전북문인협회 회원으로 문단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는 평가를 얻었다.이 시인은 "춥기로 유명한 불가리아 발칸반도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장미꽃을 얻기 위해 밤12시부터 새벽2시 사이에 꽃을 딴다고 들었다"며 "마음에 '감기'가 찾아든 올해 힘든 일이 참 많았는데, 아름다운 장미 얻는 심정으로 글을 썼더니 문학이 나를 치유하게 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2009 한국미래문화상'에 이어 두 번째로 상을 받게 되는 이 시인은 "재산을 많이 가진 것보다 문학의 향기를 알게 된 게 참 다행"이라며 "사람 냄새 나는, 맑은 작품을 쓰고 싶다"고 밝혔다.태인 출생인 그는 우석대와 같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전북대 경영대학원을 수료했다.전북여류문학회 「결」 출판기념회와 세미나가 함께 열리는 이날 시상식은 29일 오후 4시 전주시 고사동 윌에서 열릴 예정이다.

  • 문학·출판
  • 이화정
  • 2009.12.22 23:02

존경과 두려움, 애정의 대상, 호랑이

'호환(虎患)마마보다 무섭다'고 말할 만큼 우리 민족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됐던 호랑이는 다른 한편으로 인간과 지혜 대결을 펼치거나 은혜를 알고 갚을 줄 아는 영물(靈物)로 여겨졌다. 한국뿐 아니라 십이지신(十二支神)의 민속 문화를 공유하는 중국과 일본에서도 비슷하게 호랑이는 애증의 대상이었다. 심지어 일본에는 호랑이가 서식하지 않았으나 십이지와 음양오행설을 바탕으로 동아시아 호랑이 문화를 공유했다. 호랑이가 한중일 3개국에서 어떤 의미가 있고, 사람과 어떤 관계를 맺어 왔는지 생태와 어원, 민담과 설화, 신앙, 문화 예술을 바탕으로 살펴보는 책 '십이지신 호랑이'(생각의나무 펴냄)가 출간됐다. 김강산 태백향토사연구소장과 류쿠이리(流魁立) 아시아 민간서사문학학회장, 야마오리 데쓰오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 명예교수, 천진기 국립민속박물관 민속연구과장 등 한중일 학자들이 쓰고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 엮었다. 한국 민담과 전설, 신앙에서 호랑이는 으뜸 동물을 넘어 산신(山君)으로 신성화해 인간을 탓하고 가르치는 존재로 그려졌다. 또, 사람들은 이웃이나 가족이 호랑이에게 잡아먹히면 호랑이를 탓하는 게 아니라 인간을 호랑이에게 유인하는 창귀가 있다고 보고 두려워했다. 창귀를 막으려 호식장(葬)이나 호식총(塚)이 나올 정도였다. 그와 동시에 호랑이는 아무리 사나워도 결국 깊은 불심(佛心)이나 뛰어난 지혜를 가진 인간들에게 지고 마는 모습으로도 등장하면서 인간과 호랑이의 차이, 도덕성과 정신력의 의미를 드러냈다. 중국에서도 호랑이는 사람과 통하는 영성을 가지며 인간의 도덕성을 심판하는 영물로 여겨졌다. 이미 신석기 시대에 도상에 등장할 만큼 숭배의 대상이 됐다. 일본 옛이야기에서는 인간이 싸움에서 호랑이를 물리치는 내용의 '퇴치담'이 주를 이뤘는데, 이는 일본 땅에는 호랑이가 없으므로 외부에서 전해진 호랑이의 이미지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근현대 들어 19세기 회화나 문학, 20세기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 등에서 호랑이는 두려움과 진실함의 상징으로 떠올라 서구화 일변도에서 벗어난 '동아시아적 국제화'가 이뤄졌음을 엿볼 수 있다. 윤열수 한국민화학회장은 호랑이를 그린 민화를 바탕으로 한중일 호랑이 문화를 풀이하면서 "삼국 호랑이 문화가 독자적으로 성립해 개별적으로 전개된 게 아니라 교류하고 융합되면서 발전했다"고 말했다. 유한킴벌리의 사회공헌 연구사업 지원으로 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이사장 이어령)가 시작한 '십이지신' 시리즈 첫 번째 책이다. 324쪽. 1만5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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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
  • 2009.12.22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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