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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실군 강진면 율치리 김사청(당시 28세)은 화승총을 휴대한 부하 7명을 인솔하고 임실 덕치면 물굴리 이장 양학수를 연행하여 군수금을 내라고 위협, 8명분의 음식물 2회분과 금전 2원을 절취한 혐의로 징역 15년을 선고 받았다.전주군 구이동면 안덕리 이종대(당시 26세)에게는 금구군 김문구 가택에 돌입해 우리는 호적이 아니다. 국가의 장래를 생각하는 의병이다. 너도 또한 한인이다. 있는 돈을 전부 제공하여라명령하고 4일 뒤 금 3원을 강취한 혐의로 역시 징역 15년이 선고됐다.1909년 일제의 국권침탈기에 이루어졌던 의병 관련 판결문 일부다.이들처럼 이렇게 재판기록까지 있는 의병 중 지금도 수훈되지 못한 의병이 496명에 이르며, 그 중 절반 가까운 201명이 전북의병인 것으로 집계됐다. 이 같은 사실은 의병연구가 이태룡 박사(전 무주푸른꿈고 교장)가 정부에서 발행한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의병항쟁재판기록>의 분석을 통해 드러났다.이 박사에 따르면 국가보훈처에서 1974년 발행한 이 자료집에는 의병 중 비교적 저명한 분들이 체포되어 재판 형식을 거친 1067명의 판결물이 있는 데 그중 571명에게 서훈을 추서했고, 496명이 미수훈 상태다. 1962년 독립유공자에게 서훈을 시작한지 50년을 넘겼고, 책 발행 40년이 지났음에도 이들의 공적이 묻힌 채 광복 70주년을 맞았다는 것은 후손으로서 부끄러운 일이다고 이 박사는 안타까워했다.특히 의병 재판기록에 등장하는 전북의병이 465명에 이르며, 그 중 264명만 수훈이 됐고 나머지 201명은 아직도 서훈되지 못한 실정이다. 시군별로는 순창의병 79명 중 39명이 서훈되지 않았으며, 고창 32명정읍 31명임실 23명부안 17명진과 임실 각 11명 등의 순이다.이 박사는 전북의병은 국권회복기였던 1909년 9월부터 10월까지 이른바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을 벌이는 과정에서 진도여수고흥해남 땅끝마을까지 넘나들었으며, 당시 수많은 의병이 숨졌고 재판에 회부됐다고 말했다.재판기록이 있는 전북의병 201명이 서훈되지 못한 것과 관련, 이 박사는 자치단체와 지역사회의 무관심 및 국가보훈처의 소극적 자세를 지적했다.시군 개편에 따라 일부 군이 없어지면서 서훈 초기 이를 빠뜨린 측면도 있다고 보았다. 고창군만 하더라도 재판 당시 존재했던 흥덕군과 무장군이 고창군으로 통합되면서 이를 소홀히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이와 함께 수훈이 이루어지려면 제적등본이 필요하지만, 후손이 없거나 일제치하의 호적을 정리하지 않아 절차를 제대로 이행할 수 없는 문제도 작용했을 것으로 추정했다.근본적으로는 국가보훈처의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자세가 중요하다고 이 박사는 강조했다. 서훈을 위해 10여 가지에 이르는 서류만 기다리지 말고 보훈처가 나서 의병의 공적을 찾아 서훈해야 한다는 것이다. 의병에 관한 전문 지식이 없는 후손들에게 지금 시점에서 선조의 의병기록을 찾아 심사서류 양식에 맞게 제출토록 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지적이다.이 박사는 전북은 임진왜란 때 관군과 의병들이 힘을 합쳐 왜군을 물리쳤던 첫 전투 웅치전투와 이치전투, 7백의총의 금산전투의 맥이 국권회복기의 의병으로 발현됐다며, 하루빨리 서훈이 이뤄져 임들의 피가 엉긴 재판기록을 높이 받들어 숭고한 영령들을 위로하고 후손들의 한 맺힌 가슴의 응어리를 풀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추사 김정희(1786~1856년)가 제주도 귀양길에 고창을 경유한 흔적들이 정리돼 공개됐다. 서울에서 제주도까지 추사의 유배 행로 중 그동안 불분명했던 전주~나주간 행로가 고창에서의 흔적을 통해 새롭게 조명될 수 있을지 관심을 끌고 있다.고창향토문화연구회(회장 오강석)는 12일 기자회견을 통해 추사의 고창 행로를 보여주는 다량의 주련(기둥이나 벽에 장식으로 써 붙인 글)과 관련 증언을 공개했다.고창군 아산면 반암마을의 인촌 김성수 집안의 제실에 현재 남아 있는 추사의 주련은 11점. 그 중 자첨문장세희유(子瞻文章世希有 소동파의 문장은 세상에 희귀한데) 적향강파동성두(謫向江波動星斗 귀양 갈 땐 물결 따라 별들도 흔들렸지)이 추사의 귀양길 심정을 드러낸 것으로 해석했다.이날 기자회견에 동석한 공주대 백원철 명예교수는 이 주련은 자신을 소동파에 견준 추사의 학문적 자부심과 멀리 귀양길에 오른 착잡한 심정이 다드러나 있다며, 특히 적향(謫向)이란 단어를 의도적으로 쓴 것으로 보아 귀양 중이었음이 분명하다고 풀이했다.또 추사가 쓴 상선암(상선암(上仙巖)에 나오는 시 행행모전봉회처(行行路轉峯廻處 한 가닥 맑은 샘물 천상에서 흘러오네) 일도청천천상래(一道淸泉天上來 걷고 또 걸으니 길은 굽고 산봉우리 돌아드는 곳)는 이 마을의 풍광과도 잘 어울리는 구절로 백 교수는 해석했다.추사의 글씨 외에 관련 증언도 나왔다. 미당 서정주 시인의 동생으로, 현재 고향인 고창군 부안면에서 살고 있는 서정태 시인(93)은 추사가 그곳에서 유숙했던 집안의 이야기를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서 시인이 13세 때 하오산마을에 사는 친구 이동필의 집에 갔다가 동필의 할아버지(이문술)로부터 추사와 관련된 일화를 듣고 추사의 병풍을 직접 보았단다. 이와 관련해 전주이씨 집안 후손인 이춘헌(78) 씨는 선친이 임종을 앞두고 자식들에게 집안 대대로 물려온 가보인 추사의 병풍을 자신의 대에 잃어버린 것이 가슴 아프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고 증언하고 있다.또 추사가 이씨의 선대에게 병풍 작품을 준 일화도 서 시인이 구체적으로 기억했다. 왕실의 종친으로 병조판서도승지를 배출한 명문가였던 이문술은 추사의 도착기일에 맞춰 소를 잡아 육포를 떠서 유배 길에 먹을 수 있게 융숭하게 대접했으며, 이를 고맙게 여긴 추사가 병풍을 줘 가보로 전해오다 6.25전쟁때 소실했다는 것이다.추사박물관 허홍범 학예사는 추사가 죄인이었기에 객사에 재울 수 없어 유배지까지 가는 동안 지방수령들이 대부분 유숙할 곳을 마련줬다고 이문술 집에 유숙할 수 있었던 배경을 뒷받침했다.반암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선운사에 남아 있는 백파율사비(전북유형문화재 제122호) 또한 백파와 친분이 있던 추사가 글을 짓고 글씨를 쓴 것으로, 선운사에 들렀을 것으로 연구회는 추정했다.고창 출신의 진동규 시인은 추사가 행선지인 나주~해남으로 가기 위해서는 무장 동헌을 들렀을 것이며, 무장 동헌에 있던 오래된 소나무를 보고 후일 제주도 유배 중에 세한도를 그리는 데 영감을 줬을 수도 있다고 상상력을 발휘했다.연구회는 이 같은 자료와 증언을 토대로 추사가 흥덕현 부안 하오산~반암마을(병바위)~선운사~무장현을 거쳐 전남 장성으로 갔을 것으로 추정했다.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이자 추사 금석문연구가인 이용엽 씨는 전북 지역에는 추사체의 진수로 꼽히는 백파율사비를 비롯해 추사의 금석문이 7개나 남아 있어 전국에서 가장 많으며, 특히 이번 고창지역에서 발굴된 추사 중기의 글들로 인해 추사체의 변천과정을 한 눈에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 위원은 또 해마다 많은 서예가와 역사공부를 하는 학생들이 추사의 자취를 조명하는 역사문화탐방에 나서고 있고 추사가 지나간 고창지역의 풍광이 빼어나게 아름답다는 점을 고려, 고창군이 추사의 길을 개설하는 등 추사 관련 자료를 새로운 문화콘텐츠로 개발하면 좋을 것이다고 덧붙였다.오강석 고창향토문화연구회장은 미당 탄생 100년을 기념해 서정태 시인을 인터뷰 하는 과정에서 추사 관련 증언을 듣게 되면서 자료를 수집하게 됐다며, 향후 미진한 부문은 더 보완될 수 있을 것이다고 말했다.
전북 고창에서 확인한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년)의 흔적은 여러모로 주목할 만하다.개중 하나로 그의 유배 행로를 추정할 만한 근거가 나온 점을 들 수 있다.한양에서 제주도까지 추사의 유배 행로는 여러 문헌을 통해 대체로 알려졌으나 경유지인전주와 나주 사이 행로는 그동안 안개에 가려져 있었다.고창향토문화연구회가 수집, 공개한 추사 관련 자료는 반암마을에 있는 인촌 김성수 집안의 제실 주련(柱聯)과 고창군 부안면 오산리 하오산 마을에서 채집한 이야 기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이 주련 가운데 중국 원나라 때 학자이자 시인인 우집(虞集)의 시에서 뽑아낸 다음 구절이 먼저 눈길을 끈다."자첨문장세희유(子瞻文章世希有 : 소동파의 문장은 세상에 희귀한데) 적향강파동성두(謫向江波動星斗 : 귀양길은 강물이 하늘과 맞닿은 먼 곳이네)" 귀양 길의 소동파를 노래한 이 시구 속 자첨(子瞻)은 중국 북송 때 시인인 소동파의 자(字)이며, 적향(謫向)은 귀양을 뜻한다.백원철 공주대 명예교수는 우집의 시를 쓴 이 주련은 자신을 소동파에 견준 추사의 학문적 자부심과 멀리 귀양 가는 착잡한 심정을 드러낸 것이라고 풀이했다.이번에 발굴된 주련은 이처럼 귀양가는 추사의 심정을 담은 글귀가 대부분이다.추사 금석문 연구가인 이용엽 국사편찬위원은 "추사의 주련이 대거 발굴된 것은 추사 연구의 기념비적 사건"이라며 "추사 중기의 이 글씨들은 추사체의 변천과정을 체계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고 평가했다.고창향토문화연구회가 밝혀낸 추사 주련 제실 글씨는 11점. 하지만 이곳 반암마을 주민이며 향토사학자 김모씨가 1975년 이 제실에서 탁본해 소장한 주련이 20점이 다.따라서 추사 주련은 적어도 20점 이상이었다가 1975년 이후 언제인가 9점 혹은 그 이상이 행방을 감추었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추사 글씨는 주련 외에도 더 있었다는 증언, 혹은 증거도 있다.고인돌박물관 문화해설사 강신교(67) 씨는 반암마을 주민 김모씨가 '倒影碧流'(도영벽류 : 흐르는 물에 그림자가 거꾸로 비친다)라고 쓴 편액을 갖고 있다가 1985년경 지인에게 높은 가격에 판매하는 것을 봤다고 증언했다.3080cm 크기의 먹감나무로 만든 이 편액 탁본 역시 향토사학자 김씨가 소장하고 있다.추사 주련이 어떻게 김성수 집안 제실에 걸리게 되었을까? 그 연유는 아직 베일에 가렸다.추사 글씨 외에도 인근 하오산 마을 일대에 전하는 추사 관련 일화도 흥미롭다.유배에 오른 추사는 하오산 마을에 있는 전주이씨인 이문술 집안에서 유숙한 것으로 전한다.이문술 집안은 왕실 종친으로 병조판서와 도승지를 배출한 명문가. 추사박물관 허홍범 학예사는 "추사가 벼슬을 했지만 유배길에 오른 죄인이었기에 객사에 재울 수 없어 유배지까지 가는 동안 대체로 지방 수령들이 유숙할 곳을 마련해주었다"고 말했다.이문술 집안에서는 추사가 도착할 날에 맞춰 미리 소를 잡아 육포를 만들어서 추사에게 줬다는 일화도 있다.추사는 그 보답으로 글씨를 써줬으며 이 집안에서 병풍으로 만들어 후손에게 전해오다 한국전쟁 당시 잃어버렸다는 것이다.고창 주민들은 또 추사가 제주도에 그린 세한도 소재가 된 '허리 꺾인 소나무'가 고창 무장면에 있는 무장동헌의 노송일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고창향토문화연구회는 "이 소나무가 세한도 속 노송을 닮기는 했지만 추정에 불과하다"고 말했다.오강석 고창향토문화연구회장은 "여러 증언과 추사 글씨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제주도로 유배된 추사는 1840년 9월 20일과 23일 사이 고창 하오산과 인근 반암마을 을 지나 장성을 거쳐 나주로 갔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그는 "전주 이씨 집안의 문집과 행장(行狀), 비문 등을 체계적으로 연구해보면 추사의 유배 행적 등을 더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조선 후기 실학자이자 서화가인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년)의 글씨 11점이 전북 고창에서 새로 발굴됐다.또 안개에 가린 추사의 제주도 유배 행로도 일부 추정 가능해 추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라는 학계의 평가를 받았다.고창향토문화연구회는 12일 "고창군 아산면 반암리 인촌 김성수 집안의 제실에 걸린 주련(柱聯: 기둥이나 벽에 세로로 써 붙이는 글씨) 11점이 추사 글씨임이 학계고증을 통해 확인됐다"고 말했다.이 주련에 쓴 글귀는 중국 원나라 때 학자이자 시인인 우집(虞集)의 시와 자신이 썼던 '상선암(上仙巖)'이라는 시 등이라고 연구회는 덧붙였다.주련 글귀에는 주로 귀양가는 추사의 심정이 담겼다고 학계는 보고 있다.추사 금석문 연구가인 이용엽 국사편찬위원은 "이번에 발굴된 추사 중기의 글씨들은 추사체의 변천과정을 체계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고 평가했다.고창향토문화연구회는 이 마을 주민이며 향토사학자인 김모씨가 1975년에 이 제실에서 주련 20점을 탁본해 소장한 점으로 미뤄 추사 글씨가 담긴 주련은 애초에 모두 20점이었다고 추정되나 나머지 9점은 행방을 알 수 없다고 밝혔다.이 연구회는 또 추사 글씨와 함께 그의 제주도 유배길 행로도 고창 주민들의 증언으로 일부 확인됐다고 주장했다.추사는 1840년 9월 한양에서 귀양길에 나선 이후 제주도까지 행적이 대체로 알려져 있다.그러나 경유지인 전주에서 나주 사이의 행로는 안개에 가려 있었다.연구회에 따르면 고창군 부안면 하오산 마을에는 추사와 관련된 여러 일화가 전한다.이에 따르면 추사는 하오산 마을 전주이씨 집안에서 유숙했으며 그 보답으로 써준 글씨를 이 집안에서 병풍으로 만들어 보관해왔으나 한국전쟁 당시 잃어버렸다는 것이다.이 집안 후손인 이춘헌(78) 씨는 "선친으로부터 추사가 유숙한 사실과 가보로 전해오던 추사 병풍을 잃어버려 가슴 아프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고 말했다.미당 서정주 시인의 동생인 서정태(93) 씨도 "어릴 때 이 집에 놀러 갔을 때 추사가 유숙한 일과 이 집에서 소를 잡아 육포를 만들어 추사에게 줬다는 일화를 들었다"고 증언했다.오강석 고창향토문화연구회장은 "제주도로 유배된 추사는 고창 하오산과 인근 반암마을을 지나 장성을 거쳐 나주로 갔을 가능성이 크다"며 "전주 이씨 집안의 문집과 행장(行狀) 등을 살펴보면 추사의 유배 행적 등을 더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28일 고창군에 따르면 고창 봉덕리 고분군이 국가지정문화재(사적) 지정을 눈앞에 두고 있다.지난달 26일 문화재청에서 지정 예고한 고창 봉덕리 고분군은 모두 4기의 고분이 자리하고 있으며, 도내 최대 규모의 분구묘다.분구묘는 자연구릉의 네 사면을 깎고 정지하여 방대형의 기본 분형을 조성하고, 그 상부에 석실의 축조와 동시에 분구를 성토하여 축조했다. 이러한 고분축조 방법은 영산강유역을 비롯한 마한백제지역에서 확인된 바 없는 매우 독특한 분구 축조법이다.문화재청 허가에 의해 2009년도에 고창군에서 발굴한 1호분의 분구 내부에서는 모두 5기의 석실과 2기의 옹관이 확인됐다.4호석실에서는 금동신발을 비롯한 금제이식, 목걸이, 칠기화살통, 대도, 중국제청자, 소호장식호, 청동탁잔 등 피장자의 신분을 규명할 수 있는 최상위계층의 위세품과 대외교류를 추정할 수 있는 유물이 출토돼 고인돌 박물관, 원광대학교 마백연구소, 한성백제박물관, 공주박물관에서 특별 전시회를 가지기도 했다.특히, 봉덕리를 중심으로 이 일대가 3~4세기 고창지역 마한 분구묘의 중심 세력이었으며, 결국 백제의 통합과정에서 봉덕리 고분군으로 귀결됨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유적지임을 들어 문화재청에서는 사적지정을 예고했다.한편, 문화재청장은 예고가 끝난 날로부터 6개월 안에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국가지정문화재 지정 여부를 결정한다.
익산의 백제역사유적인 왕궁리 유적과 미륵사지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가운데, 문화유산 관리정책 개선과 관광객을 끌어들일 만한 스토리텔링, 관광시설 마련 등 다양한 대안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더불어 관공서와 전문가뿐만 아니라 익산시민도 함께 참여하는 대안 모색도 필요하다는 의견이다.전북도가 주최하고 전북발전연구원이 주관하는 백제문화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기념 세미나가 23일 익산 왕궁리 유적전시관 세미나실에서 열렸다.이날 세미나는 김규호 경주대 교수와 심우석 전주대 겸임교수가 발제한 뒤 이어진 종합토론에서 이경재 전북일보 수석논설위원의 사회로 한숙영 한국 ICOMOS 집행위원, 조법종 우석대 교수, 김주성 전주교대 교수, 이상열 한국문화관광연구원 연구위원이 토론자로 나섰다.김규호 교수는 세계유산으로서 경주역사유적지구 관리와 활용이라는 주제의 발표에서 경주지역 세계유산이 관리의 문제로 인해 관광객을 유입하는 데 실패했다고 주장했다. 김 교수는 유적에 대한 안내 및 해설체계 미흡, 문화유산의 현대적 재해석 부족, 관광객의 역사도시 도심 유입 취약 등을 근거로 들었다. 특히 그는 문화유산의 현대적 재해석에 대해 강조했다.김 교수는 유적에 얽힌 설화 등을 한자어로 딱딱하게 설명하지 말고,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쉽게 한글로 풀어서 설명해야 한다며 익산은 등재된 세계유산을 관리하는 데 경주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심우석 교수는 백제유네스코 세계유산을 활용한 지역활성화 전략를 발표하면서, 전북권역의 백제역사 탐방코스 개발, 백제 문화의 인문학 콘서트 및 스터디 투어, 백제 문화 형상의 3D복원 등 9가지 대안을 내놓았다. 심 교수는 특히 익산의 웅포입접리 고분, 전주의 동고산성과 오목대, 김제의 벽골제 등을 묶어 관광코스로 활성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발제가 끝난 뒤 이어진 종합토론에서는 대중적 인지도 향상과 콘텐츠 개발 등이 제안됐다.이상열 한국문화관광연구원 연구위원은 익산지역 백제유적의 인지도가 부여나 공주에 비해 낮다고 주장했다. 그는 인지도 상승을 위해서 공주와 부여의 백제유적지구와 같이 연계해서 홍보하고 관리하는 방안이 필요하다 고 말했다. 이어 백제유적을 유적지구에 살고 있는 지역 주민들의 생활사와도 연결해야 한다고 덧붙였다.김주성 교수는 현재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지 않은 옹포리 고분군, 석불사 등도 같이 조명하고, 사료 속에만 존재하는 주류성 위치나, 백강전투지를 연계한 콘텐츠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교수는 이어 이탈리아 베로나에 가면 줄리엣의 집이 있는데, 주변유적과 스토리텔링이 잘 이뤄져 많은 관광객을 끌고 있다며 역사의 진정성과 사실성도 중요하지만, 이런 부분 역시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한숙영 한국 ICOMOS 집행위원은 관광객들의 편의를 위해 교통시스템과 충분한 숙박시설을 마련할 대안을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조법종 교수는 관광객을 유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역민들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정책을 함께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짚었다. 조 교수는 이어 백제의 역사와 관련 익산지역사는 교과서에 수록되지 않은 경우가 많다 며 교육적인 접근도 필요하다고 보탰다.종합토론이 끝난 후, 청중석에서의 문제제기도 활발했다. 지역주민의 참여문제, 익산의 지역의 정체성을 내세울 독특한 스토리 텔링, 백제 고도의 정체성과 메시지에 대한 질문이 이어졌다. 금마면 주민인 강준근 씨는 익산 시민 중에서도 이 토론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많다 며 홍보 문제를 꼬집었다.이날 좌장을 맡은 이경재 논설위원은 역사 유적 등재에 대해 생산적인 논의가 오간 것 같다며 지역 일간지 차원에서도 집중적으로 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마무리했다.
남원 고리봉 등산로에 있는 암반에서 윷판 유적과 별자리로 추정되는 바위구멍이 무더기로 발견돼 학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남원문화원은 지난 11일 해발 708m 고리봉 아래 암반 2곳에서 윷판유적 16점과 별자리로 추정되는 불규칙적인 바위구멍 80여개가 발견됐다고 14일 밝혔다.이번에 발견된 윷판 가운데 가장 큰 윷판의 지름은 40㎝이며, 작은 것은 20㎝ 내외로 마멸이 심하고 불규칙적인 흔적을 추적하면 윷판의 수는 20여점이 넘을 것으로 보인다. 또 여러 개의 바위에 산발적으로 나타나는 바위 구멍의 크기는 지름 2~7㎝, 깊이는 0.3~4㎝ 내외다.한국암각화학회 관계자는 대부분 윷판이 민가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고리봉 윷판 유적은 민가와 거리가 멀고 산중턱에 있어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윷판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만하다고 말했다.김찬기 남원문화원장은 윷판 유적은 멀리 선사시대까지 올라가는데 포항 칠포리 농밭재의 바위에서 처음 윷판 유적이 발견된 이후 주로 남부지방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며 지난해 임실 상가마을에서 발견된 39점의 윷판 유적에 이어 단일 지역으로 가장 많은 윷판이 발견됨에 따라 남원 대곡리 암각화와 임실 윷판 유적 등 선사시대 암각화를 잇는 길을 구현하는데 중요한 관계를 가지는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김 원장은 이어 윷판유적이 발견된 곳 인근에서 기후제를 지냈던 제단으로 추정되는 입석 한 점이 발견, 이 지역에 대한 다각적인 접근과 보다 정확한 발굴조사를 통해 윷판유적이 놀이문화의 유물로 가려진 의례적 상징성을 찾는데 중요한 유적이라 할 수 있다며 기존 남원지역에서 알려진 윷판, 고누판 유적을 다시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지난 2009년부터 최근까지 군산 선유도 망주봉 일대에 다량의 고려시대 유적이 발견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역사적 가치를 제대로 조명받지 못하고 있다. 이로 인해 최근에는 이 지역의 토지 소유주가 펜션건립에 나서기도 하는 등 자칫 유적지가 사장될 위기에 있어 문화재 지정을 위한 관심이 요구되고 있다.당시 시굴조사를 했던 군산대학교 박물관에 따르면 12세기(고려 중기) 군산시 옥도면 선유도 망주봉 주변에는 임금의 임시거처인 숭산행궁(崧山行宮)을 비롯해, 사신을 맞이하던 군산정(群山亭), 바다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오룡묘(五龍廟)와 사찰인 자복사(資福寺), 객관인 관아 등이 자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2009년 망주봉 동쪽 산봉오리 중단부 숲속에서 오룡묘 추정지를 발굴했던 조사단 관계자는 고려시대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지의 기단석, 석재, 기와편 등이 양호하게 보존돼 있었다고 설명했다.지난 2014년에도 고려시대 숭산행궁지와 군산정으로 알려져 있는 망주봉 남쪽 기슭의 평탄지를 조사했는데, 조사결과 건물지와 관련된 적심시설(건물의 기둥을 받치는 주춧돌인 초석(礎石)의 밑을 판 다음에 자갈 등을 채워 건물 침하를 막는 시설), 담장시설, 배수로 등이 확인됐다. 이와 함께 12세기에서 14세기에 사용되었던 최상급청자와 명문 기와편 등도 발견됐다.이와 관련된 기록은 송나라 사신인 서긍이 편찬한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 나타나 있다. 서긍은 고려 인종 원년(1123) 고려에 와서 한 달 동안 머물면서 보고 듣고 한 사실들을 기록해 고려의 실정을 중국에 소개한 사람이다. 당대에 쓰려진 기록이라 사료적 가치가 높다는 게 역사학자들의 설명이다.선화봉사고려도경에 따르면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의 주관으로 군산도(지금의 선유도)에서 국가차원의 대규모 영접행사가 열렸고, 객관인 관아, 숭산행궁, 오룡묘, 자복사 등이 있었다. 위의 기록을 자세히 보면 군산정은 두 봉우리(망주봉) 앞에 있다. 문 밖에는 10여칸의 관위(官衛)가 있고, (망주봉) 서쪽의 작은 산 위에는 오룡묘와 자복사가 있다. 또 서쪽에 숭산행궁이 있고, 좌우 전후에는 민가 10여호가 있다고 기록됐다.선유도의 고려유적과 관련해 수편의 연구결과를 내놓은 곽장근 교수(군산대학교 사학과)는 선화봉사고려도경의 내용을 고고학 자료에 접목시켜 추론한다면, 본래 선유도 망주봉 주변에는 고려시대 건물지가 상당했을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그는 이어 임금의 임시 거처인 숭산행궁이 있는 것으로 보아 국가의 왕실에서 지원하는 해상교통의 중심지였음을 추론해볼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그러나 현재 선유로 망주봉 일대는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난 4월까지 이곳의 토지소유주가 펜션을 지으려고 하는 등 우여곡절이 있었다. 문화재보존법과 공익사업법 시행규칙에 따르면 매장문화재 유존지역 내에 있는 토지는 전문가로부터 매장문화재 의견 2개만 받으면 공사를 시행할 수 있다. 수 년동안 이 지역의 토지 소유주들이 펜션을 건립하려고 했고, 결국 역사학자와 군산시 공무원, 선유도 주민들의 반대로 철회됐다.군산대학교 박물관의 조명일 조사연구팀장은 고려시대 국가 주요시설이 확인된 만틈 망주봉 주변지역에 대한 체계적인 발굴조사가 이뤄져 문화재 지정이 추진돼야 한다고 말했다.군산대학교 박물관은 군산시와 전북도에서 4000만원을 지원받아 오는 9월에 망주봉 일대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할 예정이다. 또 11월에는 학술대회를 열어 망주봉 지역의 문화재 지정방안을 논의할 계획이다.
장수 동촌리 가야고분군에서 호남지역 최초로 말발굽에 박은 편자(蹄鐵)가 출토돼 화제다. 도내를 근거로 했던 가야 세력을 재조명하고 역사를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1일 장수군에 따르면 백두대간의 서쪽에 자리한 장수읍 동촌리 지역의 고분군 80여기 가운데 지름 16m 안팎의 중대형 봉분 1기에서 말뼈와 함께 징(釘)이 박힌 편자 1점이 나왔다. 봉분 내에는 주석곽(主石槨, 돌널무덤) 1기와 순장곽(殉葬槨) 2기가 배치됐으며, 이 주석곽에서 편자를 비롯해 단경호(短頸壺, 목 짧은 항아리), 기대(器臺, 그릇 받침), 발(鉢, 바리), 개(蓋, 뚜껑) 등의 토기류가 함께 발견됐다.이번 조사는 문화재청이 예산을 지원하고 (사)한국매장문화재협회의 공모로 실시된 비지정 매장문화재 학술발굴조사사업으로 이뤄졌다. (재)전주문화유산연구원은 장수군의 토지 사용 동의를 얻어 지난 5월부터 동촌리 옆 두산리 산 4번지 일원에서 발굴조사를 진행했다.그 결과 당시의 장제(葬制)를 이해할 수 있는 유물이 출토됐다. 말의 다리뼈와 함께 출토된 편자는 국내에서 찾아보기 어려운데다 중국 길림성 집안시에 있는 고구려 태왕릉, 백제 초기 근거지인 서울 몽촌토성 주거지, 함경남도 북청군 하호리 청해토성터의 발해 유적,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의 유적이 모인 경남 산청 평촌리 등에서도 편자만 보고됐다는 게 장수군의 설명이다.편자는 말로 장거리를 이동하기 위한 장치로, 이번 발굴 조사에서 말뼈가 함께 나와 순장 제도를 실시했던 가야의 사회상을 확인할 수 있는 연구 성과로 꼽히고 있다.하지만 편자가 나온 고분은 도굴로 인해 4개의 묶음 가운데 1점만 남아 있어 아쉬움을 자아냈다.장수군 문화체육관광사업소 관계자는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삼국에서도 편자 유물이 드물고, 가야의 것으로는 전국 최초일 가능성이 커 고고학적 가치가 높다고 의미를 부여하고 백두대간과 호남정맥이 나뉘는 장수 분지의 10여곳에 제철 흔적이 발견됨에 따라 가야에서 만든 편자로 추측한다고 설명했다.그는 이어 도굴되지 않은 몇몇 처녀분에 대해서는 군이 발굴을 지속하겠다고 덧붙였다.최용득 장수군수는 이번 발굴 조사가 장수지역의 가야문화유산에 대한 중요한 학술자료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한다며 고분의 훼손을 방지하고 보존관리 방안을 강구하는 단초가 될 것이다고 말했다.이번 조사의 성과는 3일 오후 2시 발굴 현장에서 전문가의 설명과 함께 일반인에게 공개한다.한편 가야는 서기 전 1세기부터 서기 6세기 중엽까지 낙동강 주변에 있던 연맹 왕국이다. 장수군에는 장계면 월강리장계리, 계남면 호덕리화양리, 장수읍 대성리 등에 가야 고분 200여기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2013년 장계면 삼봉리의 가야 고분군에서는 토기류, 마구와 마구장식류, 무기류 등이 출토돼 가야 세력의 규모와 수준을 확인했다. 장수=정익수
문화재청은 (사)한국매장문화재협회, 국립나주박물관과 함께 16일부터 9월6일까지 국립나주박물관에서 특별전시회 호남의 발굴 유적유물 새롭게 숨 쉬다를 개최한다고 밝혔다.호남지역의 구석기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의 유적에 대한 발굴조사 성과의 의미를 되돌아볼 수 있는 자리. △선사 시대 △초기 철기 시대~통일신라 시대 △고려 시대~조선 시대 등 시대별 변천과정과 △매장문화재를 활용한 콘텐츠 전시 등 총 4부로 구성된다.호남지역의 선사 시대 유적과 유물을 소개하는 제1부에서는 순천 복다리 신기유적에서 출토된 주먹도끼, 찍개, 몸돌, 격지(몸돌에서 떼어낸 돌 조각) 등 구석기 유물을 통해 뛰어난 석기제작 기술을 가진 1만5000 년 전의 선사인을 만날 수 있다. 또한, 청동기 시대 대규모 취락인 전주 오산리 유적과 돌널무덤, 독널무덤 등 다양한 형태의 무덤이 확인된 전주 동산동 유적은 장례 문화, 주거 생활 등 당시 삶의 흔적을 보여준다.제2부에서는 초기 철기 시대부터 통일신라 시대에 이르는 고대 유적의 발굴성과를 살펴볼 수 있다. 마한 시대 집터의 모습이 잘 보존된 전주 동산동 유적, 1700여 년 전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장성 월정리 유적 출토 문짝을 비롯하여 1.4m 초대형 굴뚝이 출토되어 상위계층이 거주한 것으로 추정되는 나주 동수동 온수 유적 집터 등을 통해 고대인의 생활상에 한 발짝 더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고창 왕촌리 고분과 군산 축산리 계남 유적에서 확인된 원통 모양 토기는 국제적 교류의 산물로서 독특한 제사의례행위를 보여주며, 장성 월정리 유적에서 출토된 제련로 벽체와 송풍관은 삼국시대 제철 기술의 발전상을 가늠해 볼 수 있다.제3부에서는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의 중근세 유물들을 선보인다. 군산 축산리 계남 유적 움무덤에 출토된 청동합(靑銅盒, 뚜껑이 있는 청동 그릇)과 각종 장신구는 정성스럽게 조상을 모신 옛사람들의 심성을 엿볼 수 있으며, 조선 시대 분청사기의 대표적 산지인 고흥 운대리의 7호 가마터 출토품은 600여 년 만에 세상 밖으로 나와 분청사기 고유의 투박한 아름다움을 선보인다. 아울러 구들방 구조가 거의 완벽한 상태로 출토된 광양 마동 유적 건물터의 수저류와 청동 다리미는 정갈한 삶을 살았던 우리 선조의 온화한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제4부는 매장문화재를 활용한 종이 공예(페이퍼 크래프트) 전시로 꾸며진다. 입큰 구멍단지, 대형 옹관 등 고대 호남지역을 대표하는 유물들이 종이 모형으로 재탄생한다. 알록달록한 전시물을 구경하고 직접 만들어 볼 수 있으며, 매장문화재가 가진 디자인적 가능성과 색다른 고대의 미를 경험할 수 있다.문화재청은 특별전시 기간 매장문화재 조사와 호남지역의 유적을 주제로 한 사진전, 호남지역의 발굴성과와 그 의미를 짚어보는 명사초청 특별강연, 어린이 그림 그리기 대회 등 온 가족이 함께 참여하고 즐길 수 있는 다채로운 행사를 마련한다.박물관 측은 이번 전시회가 호남지역의 고고학적 성과를 국민과 함께 나눔으로써 생소한 매장문화재에 대한 관심을 높일 수 있는 뜻깊은 자리가 될 것으로 기대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전주성황사중건기(全州城隍祠重建記) 등의 문헌자료와 일제강점기 지적도, 항공사진 등으로만 확인됐던 후백제 성터 추정지의 일부가 드러나 역사적 실체로서 복원될 가능성이 생겼다.국립전주박물관은 11일 전주시 교동 오목대서 후백제 도성벽 추정지 문화재 시굴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날 현장에서는 오목대 동쪽지점과 남서쪽 지점의 성벽 추정지와 이 두 곳에서 출토된 유물이 공개됐다.공개된 성벽 추정지의 암반층과 퇴적단면에는 흙과 기와 돌 등이 마구잡이로 섞여있었다. 이에 대해 전주박물관 최흥선 학예연구관은 후삼국 시대에 전쟁이 잦았기 때문에 흙과 기와를 섞어 쉽게 성을 만들어야 했던 것 같다 며 철원에 있는 궁예의 도성도 이와 유사한 구조다고 말했다. 최 연구관은 이어 전근대시대 성곽중에서도 흔하지 않은 구조다고 덧붙였다. 실제 전근대시대에 성을 쌓는 방식인 판축법(토성을 쌓을 때 흙을 한 겹씩 다져 쌓는 방식)과 물림쌓기(고구려성의 기단 축조방식) 등과는 다른 구조였다.전주박물관에 따르면 성벽의 규모는 추정 너비 8m고 높이는 3~5m 내외다. 현재, 토성벽의 2분의 1은 1985년께 기린로 신축과정에서 유실됐기 때문에, 실제는 이보다 높았을 것이라는 게 박물관 관계자의 설명이다.유물은 연와문 수막새와 어골문(魚骨文) 기와 등 수 십여 점이 공개됐다. 경주박물관의 김유식 학예연구실장은 출토유물이 신라하대(9세기)부터 고려 전기(10세기)의 양식과 유사하다 며 후삼국 시대 유물로 추정된다 고 말했다. 이와 함께 후백제 산성으로 추정되는 순천 해룡산성과 전주시 동고산성 등에서 나온 유물과도 유사한 점을 근거로 들었다.특히 순천의 해룡산성은 견훤의 사위인 박영규가 주둔하던 성이다. 그는 승주(昇州-순천)출신의 지방 세력으로 견훤과 함께 고려의 왕건에게 귀부했다.그러나 공개발표 이후 간담회에서는 후백제 도성으로 추정할 수 있는 근거를 보완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차용걸 충북대학교 교수(역사교육과)는 입지조건은 상당히 특이하지만 오목대 남서쪽 부근은 잔존하는 성벽이 단절됐고, 높이도 낮기 때문에 성으로 규정짓기 어렵다 며 게다가 토석혼축(土石混築-돌과 흙을 섞는 방식)방식으로 담장을 두르는 경우도 있다 고 말했다. 차 교수는 이어 전주부사에 나온 후백제의 잔존성벽과도 비교분석을 해봐야 한다고 말했다.이에 대해 발굴 조사단 측은 이 지역이 소실되기 전인 19481954년 항공사진을 보면 남서쪽으로 뻗는 성벽의 라인이 연결되는 것으로 판독된다며 구릉지 정상과 가깝기 때문에 성벽이 높지 않아도 방어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면서 반론을 제기했다.
전주시 교동 오목대에서 후백제의 요새로 추정되는 일부 성벽(城壁)의 실체가 드러났다.그동안 일제강점기 지적도, 항공사진 등으로만 확인된 후백제 성벽이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것이다. 향후 후백제 도성과 군사주둔지대의 실증적 연구에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국립전주박물관(관장 유병하)은 후백제 역사 복원을 위한 기반 연구를 진행하는 가운데 전주 오목대에서 당시 성벽의 흔적을 발견했다고 10일 밝혔다.국립전주박물관에 따르면 조사된 성벽은 신라하대(9세기)부터 고려전기(10세기)까지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대한 근거로 돌과 흙을 섞어 만든 토석혼축(土石混築)형태의 성벽구조를 들었는데, 구조가 간단하기 때문에 전쟁이 빈발했던 상황에 적합하다는 것이다.그동안 태조 이성계의 황산전투 승전 연회지 등 조선 왕조와 관련해서만 주목받았던 오목대에서 이번 후백제 성벽이 확인됨에 따라 천년 전주의 역사적 실체를 보여주고, 오목대 전 지역에 대한 세밀한 조사가 이루어지면 보다 구체적인 후백제의 실상이 밝혀질 것으로 박물관은 기대했다.국립전주박물관은 11일 오전 10시에 오목대에서 학자와 언론인을 대상으로 발굴현장을 공개할 예정이다.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장을 위원장으로 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세계기록유산등재추진위원회가 출범하면서 동학농민혁명 관련 기록물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위한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은 2일 서울 용산역 회의실에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세계기록유산등재 추진위원회 1차 회의를 갖고 국민적 공감대를 확산하고 기록유산 등재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기로 했다고 밝혔다.추진위는 동학농민혁명 연구자,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 관계자, 유네스코 및 문화재 관계자 유관기관 관계자 등 총 19명으로 구성됐으며, 3개 분과위(학술연구분과, 대외협력분과, 행정지원분과)와 실무추진단을 두었다.동학농민혁명기록물의 세계기록유산 등재는 동학농민혁명의 세계사적 위상을 강화하고, 혁명 정신의 세계화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것으로, 재단이 중심이 돼 관련 기록물들을 정리해왔다.재단은 추진위 출범을 계기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세계기록유산등재 추진에 관한 국민적 공감대를 확산시키고, 오는 10일 서울 한글박물관에서 학술심포지엄을 열어 기록유산 등재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할 예정이다.이어 심포지엄 결과를 바탕으로 오는 8월까지 최종등재 대상을 확정한 후 8월말 문화재청에 세계기록유산으로 신청해 잠정목록에 선정될 경우 2017년까지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될 수 있도록 로드맵을 짰다.현재 동학농민혁명 기록물은 사발통문동학사김낙철역사 등 농민군 참여자기록 13건 등 총 3942건이 정리돼 있다.△위원명단= 이만열(숙명여대 명예교수)신영우(충북대 교수)배항섭(성균관대 교수)왕현종(연세대 교수)김양식(충북발전연구원 수석연구위원)조재곤(서강대 연구원)정근식(서울대 교수)임형진(경희대 교수)윤석산(한양대 명예교수)이종민(전북대 인문대 학장)이경호(IHB 주관방송경영국장)허권(아태무형유산센터 사무총장)이해준(공주대 교수)홍성덕(전주대 교수)박위진(문광부 정책관)이지성(전북도 문화관광국장)이성재(정읍시 농생명전략단장)김인환(천도교 종무원장)윤석모(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사무처장)
백제역사유적지구에 대한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코앞에 두고 그에 포함된 익산 미륵사지 서탑을 부분 복원이 아니라 완전하게 복원해야 한다는 반론이 제기되지만, 부분 복원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자문기구인 이코모스(ICOMOS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가 내세운 세계유산 등재 조건으로 드러났다.따라서 현재 문화재청이 추진하는 부분 복원 대신 익산 현지를 중심으로 제기되는 완전 복원은 전연 고려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29일 문화재청과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등지에 따르면 이코모스(ICOMOS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는 미륵사지가 포함된 백제역사유적지구를 세계유산위원회에 세계유산으로 등재할 것(inscribe)을 권고하면서, 미륵사지 석탑 복원안에 대해서는 문화재청이 추진하는 6층까지의 불완전한 부분 복원안을 충분하다고 판정했다.세계유산 등재 여부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이코모스는 등재 권고를 판정하기 전 미륵사지 석탑 복원의 방향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앞서 문화재청은 지난 28일 미륵사지 유물전시관에서 익산 미륵사지 석탑 보수정비 현장공개설명회를 통해 6층까지의 부분 복원이 현재로서는 최선의 복원안이라고 설명했지만 현지 여론은 완전복원을 요구했다.문화재청은 불완전하게 남은 미륵사지 서탑을 2층까지는 완전 복원하고 36층은 부분 복원할 방침이다.이 탑은 백제 당시에는 9층이었다고 추정되지만, 이 역시 추정일 뿐 아무런 근거도 없는 실정이다.그럼에도 그 반대편 동탑은 터만 남은 상태에서 발굴을 완료하고 현재는 9층으로 복원한 석탑을 세워놓았지만, 흉물이라는 지적이 끊이지 않고 있다.뉴스
병아리를 연상케하는 노랑 교복·모자·가방을 입은 초등학생. 한옥과 서양식·이슬람식 건축양식이 섞인 학교 건물도 노랑이었다. 군산제일초등학교는 시민에게 색으로 기억된다. 현재는 폐교돼 흔적만 남았다.동문을 중심으로 편찬위원회가 구성돼 학교의 역사를 정리하고 추억하는 <영원한 개나리 동산 군산제일초등학교사(史)>가 출간됐다. ‘서른 번 졸업식 치른 군산제일초등학교의 서른 가지 이야기’라는 부제처럼 지난 1963년 개교부터 1998년 폐교할 때까지 건립 과정, 운동회, 소풍, 상징물, 특기활동, 폐교 과정 등을 30개로 나눠 옛 사진을 중심으로 구성했다. 제일초교가 속한 동산학원은 개교 당시 동중·고를 운영했다. 설립자인 정찬홍 교장은 초등학교까지 연계한 교육을 펼치겠다는 구상으로 교실을 마련하지 않은 상황에서 초등학교 인가를 신청했다. 결국 1963년 학생 모집의 법정기일이 임박한 2월21일에 12개 학급의 설치 인가를 받아 문을 열었다. 30년간의 앨범과도 같은 이 책은 학생 문예지인 <메아리>도 실었다. 또한 학생의 어머니가 한복을 차려 입고 자녀와 함께 소풍을 온 흑백사진도 담았다.하지만 이후 동산학원이 전임과 현 이사장의 갈등으로 분규에 휩싸이면서 제일초교는 폐교의 수순을 밟았다. 한편 제일초교는 30회 졸업식을 마지막으로 남학생 1744명, 여학생 1316명 등 모두 3060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고창군이 군비 3200만 원을 지원한 가운데 지난 13일부터 9일 동안 대한문화재연구원(원장 이영철) 주관으로 고창 칠암리 고분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했다.고창 칠암리 고분은 6세기 전반에 축조된 전방후원(前方後圓)형 고분으로 알려져 왔으나, 이번 발굴조사 결과 5세기 후반에 축조된 것으로 확인됐으며, 매장시설 구조와 관련된 새로운 사실도 밝혀졌다.전방후원(前方後圓)형 고분은 앞쪽의 네모난 봉분과 뒤쪽의 둥근 봉분이 결합된 무덤을 말한다.국내에서 확인, 보고된 전방후원형 고분 13기 가운데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광주 월계동, 함평 신덕, 해남 용두리 고분, 영암 태간리 고분 등은 횡혈식(7기)과 수혈식(1기) 구조이나, 칠암리 고분은 관형(石棺形) 구조로 만들어진 매장시설임이 확인됐다.칠암리 고분의 훼손된 석실 내부에서는 백제계 기대(器臺)와 개배를 비롯해 일본 하지키(土師器) 고배와 원통형토기가 출토됐으며, 마구(馬具) 부속품인 운주(雲珠)와 철제편 등도 수습됐다.
전북민속예술축제에 대상에 김제지평선농악단과 김제청소년농악단이 뽑혔다.전북도가 주최하고 (사)한국예총전북연합회(이하 전북예총)가 주관하는 2015 전북민속예술축제가 지난 16일 고창 모양성 잔디광장에서 열렸다. 민속예술축제는 사라져가는 전통민속예술작품을 발굴·재현해 이를 보존하고, 전통문화에 대한 자긍심과 이해의 폭을 넓히기 위해 실시하는 대회다.올해는 모두 8개 팀이 경연을 펼친 결과 김제지평선농악단과 김제청소년농악단의 농악판굿이 대상을 받았다. 일반부 금상은 고창해풍농악, 은상은 임실두레놀이, 동상은 벽골우도농악, 장려상은 진안금척무와 창포마을 다듬이공연단이 수상했다. 청소년부는 김제덕암고등학교 학생을 중심으로 한 김제청소년농악단에 이어 첫 출전한 진안 한국한방고등학교농악단이 우수상을 받았다. 대상을 받은 2개팀은 오는 10월 경기 평택에서 열리는 제56회 한국민속예술축제와 제22회 전국청소년민속예술제에 전북 대표로 각각 출전한다. 그동안 도내 대표로 고창오거리당산제와 위도띠뱃놀이, 남원삼동굿놀이, 완주봉서사영산작법, 순창금과농요가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전북예총 선기현 회장은 “도내에는 소중히 보존하고 반드시 계승·발전해야 할 민속이 많지만 아쉽게도 사라질 위기에 처하거나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게 현실이다”며 “지역에서 앞장서 보존해야 한다”고 말했다.
익산 왕궁리 유적, 미륵사지 등이 포함된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가 유력해졌다.6일 문화재청에 따르면 최근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가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세계유산 등재 여부에 대한 평가 결과 보고서에서 백제역사유적지구를 등재 권고로 평가해 유네스코(UNESCO)에 제출했다.문화재청은 지난해 백제역사유적지구를 유네스코 유산으로 등재 신청했다. 백제역사유적지구는 익산 왕궁리 유적, 익산 미륵사지, 공주 공산성, 공주 송산리 고분군, 부여 관북리 유적과 부소산성, 부여 정림사지 등 9곳이다.백제역사유적지구는 다음 달 28일부터 7월 8일까지 독일 본에서 열리는 제39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21개 세계유산위원국의 합의를 거쳐 등재 여부가 최종 결정된다. 백제역사유적지구가 최종 등재되면 한국은 모두 12건의 세계유산을 보유하게 된다.평가 결과 보고서에 따르면 백제역사유적지구는 세계유산 등재 기준 10가지 가운데 △특정 기간과 문화권 내 건축이나 기술 발전, 도시 계획 등에 있어 인류 가치의 중요한 교류의 증거 △문화적 전통 또는 문명에 관한 독보적이거나 특출한 증거 등 두 가지 요건을 충족했다.이는 한국과 중국, 일본 등 고대 왕국 사이의 상호 교류를 통해 백제가 이룩한 건축 기술 발전과 불교 확산을 보여 준다. 수도 입지 선정, 불교 사찰, 성곽건축물의 하부구조, 고분석탑 등을 통해 백제의 역사와 내세관, 건축 기술 등을 살펴볼 수 있는 유산으로 평가받는다.또 효과적인 법적 보호 체계와 보존 정책을 비롯해 현장에서의 체계적인 관리로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는 점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요인이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사장 김대곤)은 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는 사발통문과 흥선대원군효유문, 양호전기 등 3건을 전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받기 위해 관련 자료를 23일 정읍시에 제출했다고 밝혔다.동학농민혁명 관련 유적지가 사적지로 지정된 사례는 있으나 관련 기록물이 문화재로 지정된 경우는 없어 이 기록물들이 첫 문화재로 지정될지 주목된다. 재단은 이들 기록물이 문화재로 지정되면 이를 계기로 동학농민혁명기록물의 세계기록유산등재 추진에 본격 나설 계획이다.문화재 지정 신청의 대상이 된 사발통문(沙鉢通文)은 동학농민군이 남긴 유일한 자료로서 상징적 의의와 함께, 사료적 가치에서도 평가를 받고 있다. 1968년 발견 당시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으며, 이듬해 사발통문이 발견된 신중리 주산마을 앞에 동학혁명모의탑이 세워지기도 했다. 사발통문은 그동안 개인이 소장해오다 올 2월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 기탁됐다.흥선대원군효유문(興宣大院君曉諭文)은 흥선대원군이 동학농민군에게 해산할 것을 종용하는 문서로, 동학농민혁명과 흥선대원군과의 관계를 설명하는데 1차적 자료로 인용되는 주요 문서다. 대원군의 효유문은 정치적 포장이며, 실제는 전봉준 등 농민군지도부에게 밀사를 보내고 밀지를 내려 봉기를 유도했다는 설이 여러 학자들에 의해 제기됐다. 현재 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서 유일하게 소장하고 있다.<양호전기(兩湖電記)>는 동학농민혁명 1차 봉기에 대한 조선정부 토벌군의 책임자인 양호초토사 홍계훈이 1894년 4월 3일부터 1894년 5월28일까지 국왕인 고종을 비롯하여 조선 정부의 각 기관과 주고받은 전보를 날짜 순서로 수록해 놓은 기록으로, 전주성을 점령한 동학농민군과 완산칠봉에 주둔한 진압군의 공방전과 전주화약(全州和約)이 성립되기까지의 과정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은 필사본 형태로 현재 2부가 존재하며, 나머지 1부는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전북도유형문화재로 신청된 것은 기념관에서 지난해 홍계훈의 후손으로부터 입수한 것이다.이 기록물의 문화재 지정은 정읍시를 거쳐 전북도에 제출되면 전북도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결정된다.
초기 청자(靑瓷) 요지(窯址)이면서 후백제의 가마터로 추청되는 진안 도통리 유적에 대한 조사가 재개됐다. 국내 청자사를 새로이 정립하는 유물 발굴이 전망되면서 문화재 지정도 요구되고 있다.국립전주박물관과 군산대 박물관은 1일 오전 11시 진안군 성수면 도통리에서 초기 청자 요지 문화제 시굴조사를 위한 개토제(開土祭)를 지냈다. 매장 문화제를 조사하기 전 토지신에게 비는 개토제를 시작으로 2차 조사가 이뤄진다.이번 조사는 유적의 정확한 범위를 파악해 문화재 지정 및 본격적인 발굴조사의 기초자료를 확보하기 위해 1차 조사지 인근 1800㎡의 면적에 걸쳐 실시한다.도통리 청자 요지는 지난 2013년부터 지난해까지 1차 조사를 통해 초기 청자의 유입과정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유적지로 평가받고 있다.이곳은 지난 1960년대 지표조사를 실시하면서 존재가 알려졌고 지난해 군산대 박물관은 중평마을의 모정이 들어서 있는 서쪽구역에서 유물을 발굴했다.당시 가마를 만들었던 돌인 벽돌편과 투박하고 문양이 없는 초기 청자의 전형적인 찻그릇인 완(碗)이 집중적으로 발견됐다. 선해무리굽, 중국식해무리굽, 한국식 해무리굽 초기청자편 등과 함께 다양한 형태의 요도구도 출토됐다. 불에 그을린 벽돌편은 전축요의 존재 가능성을 나타낸다는 게 학계의 설명이다.한반도 남부 내륙지방에서 유일하게 발견된 10세기 초기 청자의 중국식 벽돌 가마와 유물을 통해 진안 지역이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여 인근으로 발전확산했다는 가설이 제기됐다. 진안지역이 통일신라시대에서 고려 초 사이에 청자 문화를 도입했고 이는 부안지역의 한국식 진흙 가마로 이어졌다고 추측할 수 있는 대목이다.특히 후백제와의 관련성이 제기돼 그 의미를 더했다. 전주 동고산성에서 나온 초기 청자의 경우 중국제 청자로 학계에 보고됐지만 그 생산지가 진안 도통리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후백제가 중국 청자의 본향으로 알려진 오월과 45년간 외교를 펼쳐 그 결실로 청자 기술이 후백제로 전래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군산대박물관 책임조사원 곽장근 교수는 918년 견훤은 오월이 말이 필요하다는 소식을 듣고 배로 말을 보내기도 했고 927년 오월 왕 전유는 감사의 뜻을 담아 반상서를 대표로 하는 사절단을 전주에 파견할 정도로 왕성한 교류가 있었다며 후백제를 통한 청자의 전래설을 제기했다.이같은 내용은 국립전주박물관이 지난해 4월 1차 조사 성과를 알리기 위한 진안 도통리 청자전을 개최해 조망했다.하지만 이런 중요성에도 도통리 청자 요지는 아직까지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고 국가 지원이 없어 체계적인 관리가 미흡하다는 지적이다.우리나라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초기 청자요지로 밝혀진 용인 서리(사적 제329호)와 시흥 방산동(사적 제413호) 유적은 문화재로 지정됐지만 진안 도통리는 방치돼 지속적으로 훼손되는 실정이다. 더욱이 벽돌 가마터는 현재 마을회관이 들어선 상태다.곽장근 교수는 지난 2013년 1차 조사 때 유물을 대거 발견한 만큼 이번 조사도 높은 가치의 유물이 기대되며, 앞으로 사적지 지정이 뒤따라야 한다면서 청자에 관한 역사를 다시 쓰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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