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효준 칼럼] 문화 예술과 느림의 미학
어떤 정치학자는 한국?한국인의 속성으로 획일성, 집중성, 극단성, 조급성, 역동성 등 들었다. 물론 이들 속성이 부정적인 함의만을 갖는 것은 아니다. 특히 조급성, 그러니까 ‘빨리빨리 근성’ 은 우리의 그 유례없는 경제적 급성장을 이룩한 원동력이 되었다는 평가가 나오곤 한다. 사설 투기자본이 한 나라의 경제 전체를 위태롭게 할 수 있는 살벌한 국제경제체제 속에서, 실질적으로는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냉혹한 국제정치 무대에서 조급성, 즉 재빠름은 높은 적응력을 뜻하므로 좋은 것이다. 그래서 축구든 야구든 취약한 저변과 일천한 역사에도 불구 성취도가 높게 나타날 경우 더더욱 감격하고 열광하게 되며 또 언제 그랬냐는 듯 빨리 잊어도 큰 흉이 되지 않는다. 이제 ‘냄비근성’이 새로운 미덕이 된 듯하다. 획일성, 집중성, 극단성이 가해지면 조급성은 역동성으로 승화(?)되고 국제 경쟁에서 앞서고 국가 경제가 발전한다. 문제는 그 부작용으로 심화되는 사회의 양극화 현상과, 그 와중에 팽배하는 구성원들의 상대적 박탈감, 소외감, 무력감, 자괴감, 분노, 적의(敵意) 와 그에 따른 온갖 사회병리적 현상들이다. 이 병리현상은 결국 ‘유족한 일극(一極)’을 포함한 사회전체의 삶의 질을 떨어뜨리게 될 것인데 사실 양극화 문제는 본질적으로 해결책을 찾기 어렵다.연전에 도립미술관에 단체로 전시 관람을 온 유치원생들이 있었다. 그 어린이들이 그룹별로 인솔 선생님들의 차분한 도움 말씀을 귀담아 들으면서 아주 느린 움직임으로 전시장안에서 진지하게 작품 감상을 하고 있었다. 학생들의 단체관람이라면 속보로 열을 지어 분열하듯 왁자지껄 떠들며 전시장을 훑어 자나가는 것이 보통인지라 그 광경은 참으로 인상적이고도 놀라웠다. 종교재단에서 운영하는 그 유치원은 평상시 수시로 고전음악을 들려주고 교사에 의한 명령조의 지시를 금하고 어린이들을 인격적으로 대해 주어 아이들의 자발성을 극대화시키며 장애아와의 통합교육을 일상화하는 등 각별한 교육철학을 구현하는 기관임을 알게 되었다. (그 아이들 사이에서 장애아에 대한 차별의식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느림을 추구하며, 생각하며, 느끼며, 살아가게 유도한다면 우리 아이들이 혹 '빨리빨리’ 경쟁 사회에서 낙오자가 되지 않을까하는 걱정이 들 수 있다.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선택의 문제일 것이다. 많은 우리 선조들이 선택했던 이 ‘자발적 낙오’와 ‘느림의 미학’은 선비정신과 통하는 것이며 깊은 예술적 감수성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다. 초라한 외양(外樣)에 깃든 품격 있는 정신을 귀하게 여기고, 치졸함과 어눌함과 서투름 속에서 오히려 격조와 아취(雅趣)와 고졸미(古拙美)를 찾았던, 지금은 거의 잃어버린 우리 전래의 가치를 이제 어디에서 되찾을 수 있을 것인가? 전시장에서 아이답지 않게 조용히, 진지하게, 느리게 움직이던 그 아이들의 눈망울 속에서 나는 희망을 보았다. 그리고 그 아이들이 훗날 애정과 열정과 희생으로 이 사회의 병리현상을 치유할 수 있는 작지만 더할 수 없이 귀한 ‘수원지’를 구성할 물 분자가 되리라는 믿음을 가져본다. 그들을 키워낼 가장 중요한 자양분 하나를 제공해야 하는 것이 이 시대 참 문화, 참 예술의 역할일 것이다. /최효춘(전북도립미술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