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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열(1929-2021)의 물방울은 단순히 아름다움을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다. 그것은 16살에 홀로 38선을 넘고, 21살에 목도한 전쟁터의 비극을 기억에서 닦아내기 위한 ‘생존의 산물’에 가깝다. 피난처 제주에서 경찰관으로 순찰을 돌며 죽음의 공포를 마주해야 했던 청년에게 그림은 숨을 쉴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평생 물방울 하나에 매달려온 거장의 여정을 담은 기획전 ‘물방울, 존재를 묻다’가 전주아트이슈프로젝트에서 열린다. 전북에서 처음 열리는 이번 전시는 ‘물방울 화가’라는 익숙한 수식어 너머, 작가가 평생을 걸쳐 찾아 헤맨 삶의 본질을 추적한다. 캔버스 위에 맺힌 영롱한 방울들은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듯 생생하지만, 사실은 물감으로 만든 정교한 눈속임이다. 전시를 기획한 한리안 관장은 실재와 환영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작가의 시선에 주목했다. 거장의 물방울은 반세기 동안 끊임없이 변화해왔다. 1970년대 작품은 실제 물방울이 맺힌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면, 이후에는 화면 위에서 흐르고 흡수되는 등 다양한 모습으로 확장됐다. 1980년대부터는 천자문이나 도덕경 같은 글자 위에 물방울을 얹는 과감한 실험을 시도했다. 1990년대 이후 ‘회귀(Recurrence)’ 연작으로 이어지며 절정에 달한다. 빽빽한 글자들을 투명한 방울로 덮었고 그 의미를 지워나가는 과정은 복잡한 세상사를 비워내고 맑은 평온을 채우는 수행과 닮아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총 22점의 작품이 1부와 2부로 나눠 선보인다. 50호 크기의 작품부터 벽면을 가득 채우는 300호 대작까지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어 거장의 호흡을 더욱 입체적으로 느낄 수 있다. 한리안 관장은 “거대한 물방울 앞에 잠시 멈춰 서보기를 권한다”며 “물방울이 품은 빛을 가만히 응시하다 보면 일상의 소란함은 사라지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평온함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전했다. 전시는 오는 5월 31일까지 이어진다. 박은 기자
아이와 어른이 함께 읽는 동화 전문 잡지 <동화마중> 2026년 상반기 통권 8호가 발간됐다. 이번 호는 권두언 ‘동화를 쓰는 마음’에서 박운규 동화작가의 글 ‘날개와 옹달샘’으로 문을 연다. 특집에서는 ‘2025 전주 올해의 책’에 선정된 김근혜 아동문학가의 <베프 떼어내기 프로젝트>를 읽고 김순정 작가가 쓴 서평 ‘베프 떼어내기? 베프 찾기!’와, 강경수 작가의 그림책 <세상>을 다룬 백명숙 작가의 서평 ‘세상으로 향한 관문에서 세계를 마주하는 용기’ 등 두 편의 글이 실렸다. 이어 마중초대 작가 코너에서는 김은숙 작가의 ‘새가 되고 싶은 왕자’와 신동일 작가의 ‘새’를 만나볼 수 있다. 또 이번 호에는 ‘제5회 동화마중 신인문학상’ 당선자로 선정된 김경숙·이윤재 씨의 작품 ‘혹성탈출’과 ‘내 친구 버디’를 비롯해 당선 소감과 신인문학상 심사평도 함께 수록돼 신인 아동문학가들의 설렘과 기대를 전한다. 이 밖에도 ‘동화 마당’ 코너에는 김영주·김일환·노영희·도건영·배다인·안수연·이선화·이옥근·주미라·허진호 작가의 작품이 실렸으며, 평론 섹션에서는 서철원 작가의 시선으로 바라본 김민서 작가의 작품 <율의 시선>을 다룬 글도 만나볼 수 있다. 전현아 기자
매일 같이 반복되는 복잡한 행정 절차와 예상치 못한 민원이라는 거대한 파도에 지친 의료인들에게 든든한 방패가 되어줄 책이 출판됐다. 김기범 내과의사와 장성환·박형윤 변호사가 의기투합해 발간한 신간 <자신만만 병원민원>(군자출판사)가 바로 그것이다. 책은 의료기관에서 실제로 빈번히 마주치는 각종 민원 해결을 위한 실무 지침서를 목표로 기획돼 출간됐다. 이번 책은 단순히 법령을 나열한 딱딱한 이론서가 아닌, 20년 현장 경험을 가진 개원의와 의료계의 굵직하고 민감한 사건들을 해결해 온 베테랑 변호사들이 의기투합해 만든 ‘의료기관 맞춤형 생존 전략서’다. 책의 구성 또한 매우 치밀하고 실용적이다. ‘제1장 서류의 해석과 작성요령’에서는 김기범 내과의사가 오랜 개원 현장의 경험과 의사회 보험, 법제 관련 활동으로 쌓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건강보험공단의 방문 확인부터 의료기관 서류 발급의 세세한 원칙까지 현장에서 즉각 활용할 수 있는 실무가 정리돼 있다. 이어지는 ‘제2장 의료행위 관련 민원’에서는 장성환 변호사가 의료법의 날카로운 통찰력을 통해 현지조사와 의료사고 등 의료기관의 존립을 흔들 수 있는 위험 요소들에 대한 명쾌한 대응 방안을 제시한다. 마지막 ‘제3장 환자 민원과 의료기관 운영 관련 민원’에서는 박형윤 변호사가 수사기관의 자료제출 요구에 대한 대응방법부터 악성 댓글 대응, 노무 관리까지 환자의 접점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중재하고 해결하는 실전 비법이 담겼다. 기획부터 교열까지 애쓴 김기범 원장은 “애매한 상황에 부딪히면 의사들도 사회관계망과 AI를 통해 지식을 습득하며, 당황한 상황에는 책을 찾아볼 여유도 없을 것”이라며 “그럼에도 이번 책을 발간하게 된 이유는 AI와 사회관계망에서는 정답이 아닌 대다수가 선택하는 트렌드를 알려주고, 아주 중요한 상황에서는 AI의 답변만을 신뢰하고 결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이어 “바쁜 일상으로 체계적으로 공부하기 쉽지 않은 상황에서 의료기관 종사자가 찾기 쉬운 참고서가 필요하다 느꼈다”며 “책자는 분야별로 비교적 흔히 접하는 내용을 엄선해, 소제목만 읽더라도 접근이 쉽게 구성했다. 원칙만을 정리하기보다는 전문가들이 실제 겪고 느낀 현실적 소회를 첨부했지만, 불특정 다수에게 공개되는 책자인 만큼 보수적으로 작성할 수 없었다는 점이 아쉽다”고 덧붙였다. 김태빈 경기도내과의사회 회장은 추천사를 통해 “의료인에게 법적 위험을 점검하는 안전벨트로 이 책을 추천한다”며 “의료인들이 더 이상 서류 작업과 민원 앞에 당황하지 않고 오로지 환자 진료에만 매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전현아 기자
좋은 음식을 한꺼번에 다 먹지 않는 것처럼 좋은 글을 만나면 서둘러 읽지 않는다. 이번에 만난 24절기를 다룬 『제철 행복』은 오래 두고 천천히 음미하고 싶은 음식과 같았다. 처음에는 봄 절기 중 곡우까지만 읽어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몇 장 넘기다 보니 호기심이 일어 조금 더 욕심을 내기로 했다. 내친 김에 여름까지 읽어버렸다. 그동안 살면서 많은 글을 읽었지만 벚꽃을 이처럼 다룬 이는 처음 만났다. 대부분의 글이 벚꽃의 화사함과 눈부심을 다루지만 이 책에서는 우리가 익숙하게 보아 온 봄과는 다른 깊이의 봄을 보여준다. 벚꽃과 더불어 살지 않고서야 그 내밀한 아름다움을 이렇게 표현하기 힘들다. 문장을 따라가다 보니 한 편의 장면들이 저절로 그려졌다. 어떤 이들은 꽃과 나무를 책으로 보고 머리로만 이해한다. 이런 이들과 만나면 지식은 늘지만 재미가 없다. 지식은 늘지만 자연의 숨결은 느껴지지 않는다. 반대로 어떤 이는 현장에서 들려오는 자연의 이야기를 온몸으로 받아들인다. 그런 사람과 떠나는 여행은 언제나 즐겁다. 자연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더 많이 들리기 때문이다. 이 책은 후자에 가깝다. 이 글을 쓴 저자는 그런 점에서 숨은 고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삶에서 길어 올린 이야기를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말로 건네는 솜씨가 만만치 않다. 그가 들려주는 생활 이야기들은 솔직하고 담백하며 문장마다 생명이 흐른다. 친구와 가벼운 농담을 하는 느낌이 들다가도 자신의 속마음을 다 털어놓는 게 아닌가 싶었다. 저자가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 사람에게 철마나 편지를 건네는 심정으로 썼다는 말이 빈말이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글에는 저자가 겪은 일을 독자가 함께 경험하는 느낌이 들게 하는 진심이 느껴진다. 책을 덮고 나서도 제목이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아마도 ‘제철’이라는 단어가 주는 힘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글의 결이 고르게 이어진다는 점이다. 문장은 잔잔하지만 깊이가 있다. 다시 펼쳐보고 싶게 하고 오래 여운을 남긴다. 좋은 차를 마신 뒤 다른 것을 입에 대기 싫은 것처럼 책을 덮고 난 뒤에도 그 여운 속에 머물고 싶게 만든다. 아직 가을과 겨울편은 읽지 않았지만 이미 내가 읽은 부분과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가 만났던 봄과 여름의 이야기는 내게 가을과 겨울편을 아껴 두게 만들었다. 나는 서늘한 가을바람을 기다리며 가을편을 읽을 것이고, 흰눈 펄펄 내리는 추위를 기다리며 겨울 편을 읽을 것이다. 그가 들려준 24절기의 이야기를 내 몸 구석구석 채워 넣으리라. 바쁘다는 이유로 잠시 미루어 두었던 자연을 다시 찾아가야겠다. 자연이 내 곁을 스쳐 지나가는 순간을 오래 바라보고 싶다. 눈 밝은 이가 들려주는 절기 이야기처럼 앞으로 내가 만나게 될 계절도 또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기대가 된다. 장창영 작가는 전주 출신으로 2003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됐다. 불교신문·서울신문 신춘문예에도 당선돼 창작활동을 하고 있으며,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사업과 전주도서관 출판제작지원사업에 선정되기도 했다. 시집으로 <동백, 몸이 열릴 때>, <우리 다시 갈 수 있을까>, <여행을 꺼내 읽다>, <나무의 속살을 읽다>가 있으며 인문서로 <나무의 문을 열다>, <디지털문화와 문학교육> 등이 있다.
최선을 다하는 행위가 때로는 본의에 어긋날 때가 있다. 중요한 일정을 위해 정성껏 고른 옷차림이 어색하게 겉돌고, 잘 써보려고 애쓴 문장들이 오히려 조잡해 보일 떄가 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잘해내고 싶은 마음으로 잔뜩 힘을 줘서 진행한 일들이 얼굴을 화끈거리게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도원 스님의 시집 <연잎에 조아리는 빗방울 소리>(신아출판사)는 놀라움의 연속이다. 스님이 써 내려간 150편의 시는 유난히 담백하고 절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먹고 자고 싸고/ 놀고 웃고 성내고/ 날마다 싫고 좋고”(‘산다는 것’ 전문)처럼 군더더기 없는 문장들은 읽는 이의 마음을 단숨에 정화시킨다. 스님은 이 시집을 통해 자신만의 우아한 사색이 담긴 필치로 일상과 맞닿은 마음을 관찰한다. 연민을 앞세우지 않는 담백한 시선은 일상의 장면을 직관적으로 풀어내며 독자를 일상 너머에 존재하는 다른 차원의 정경으로 안내한다. “사람의 사람/낮은 곳을 향하고/ 존중과 공존/자유로울 줄 아는 사람/무뚝뚝한 마음도 녹아드는/ 그런 사람이 그립다”(‘참사람’ 전문) 시집은 제법 골똘한 구석을 갖추고 있다. 먹고 자고 울고 웃는 삶의 행위부터 이상적인 인간상에 대한 바람까지 스님은 이 모든 것을 공들여 사유한 후, 최소한의 언어로 남겨놓았다. 그래서인지 정해진 양식에 맞춰 구구절절하게 배치한 행이 아니다. 힘을 뺄수록 오히려 선명해지는 삶의 이치를 짧고 함축적인 문장으로 표현한다. 김남곤 시인은 “도원스님은 좀처럼 자벌하지 않는다. 그래서 청하산 청운사 도량의 일상 역시 있다가도 없는 듯 없다가도 있는 듯 이런저런 일들로 크게 소란 떨지 않는다”라며 “소리내지 않고 우는 소리를 이 시의 흐름 속에서 찾아보는 의미도 연꽃향기를 듣는 만큼이나 경이로운 일이려니 싶다”고 밝혔다. 도원 스님은 평생을 불교 예술의 정수인 탱화(幀畵)와 수행에 헌신해온 구도자다. 1950년 9월 김제 청운사에서 태어나 1971년 전주 승암사로 출가하며 본격적인 수행의 길에 들어섰다. 이후 1990년 봉원사에서 비구계를 수지했다. 지난 2002년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27호 탱화장 보유자로 지정됐다. 김제 귀신사의 16나한 탱화, 제주 원당사의 각란탱화, 전북 한국불교 태고종 괘불탱화 등은 스님의 깊은 사유로 빚어낸 대표적인 성보로 꼽힌다. 현재는 청운사 회주(법회를 주관하는 승려)로 주석하고 있으며 불교 수업과 정진을 위한 안거(安居)에 전념하고 있다. 박은 기자
만해 한용운의 정신을 계승하는 시 전문 계간지 <유심>이 2026년 봄호를 통해 독자들과 만난다. 이번 호 ‘유심 초대 시인’의 주인공은 남진우 시인이다. 권두에 배치된 신작시 ‘휘이휘이시마(詩魔)가 온다’와 ‘진공묘유’는 삶과 죽음, 존재의 본질을 통찰하는 시인 철학적 사유를 정교하게 담고 있다. 특히 이번 호에서 시인은 신작 에세이를 통해 침묵의 미학을 언어의 가락으로 풀어낸다. 그는 산문에서 “침묵은 너무 시끄러워 일체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라 역설하며 시인이 지향하는 침묵의 진미를 우회적으로 드러낸다. 이를 통해 독자들에게 언어 너머의 세계를 탐구하는 깊은 지적 즐거움을 선사한다. 신작시조와 신작시 섹션에는 한국 문단의 현재를 대표하는 필진들이 대거 참여해 풍성함을 더했다. 김범렬·김연동·윤경희 등은 정형의 틀 안에서 현대적 변주를 시도한 시조를, 고영민·권혁웅 등은 봄의 생동감을 담아낸 신작시를 각각 선보이며 한국문학의 역동성을 증명한다. 인문학적 깊이를 더한 다채로운 기획도 눈길을 끈다. 신달자 시인과 이광형 카이스트(KAIST) 총장이 참여한 ‘내 마음의 시 한 편’과 우찬제 평론가의 ‘예술가의 산문’은 시적 언어와 산문의 문법이 교차하며 발생하는 통찰을 전한다. 무엇보다 <유심>의 정체성을 응축한 ‘다시 읽는 무산 시’와 ‘다시 읽는 만해 한용운’ 섹션은 묵직한 울림을 준다. 이승원 교수의 무산 오현스님 시 고찰과 1926년 발행된 시집 <님의 침묵> 후기를 재조명한 기획은 유심이 지향하는 이정표를 선명하게 제시한다. 이 밖에도 서평 섹션인 ‘이 계절의 책’을 통해 한국문학이 도달한 현주소를 입체적으로 조망한다. 박은 기자
박태건·김춘기 시인이 봄을 맞아 진안에서 독자들과 만나는 문학 북토크를 연다. 두 시인의 작품세계를 엿볼 수 있는 ‘초록의 시, 보라빛 문장: 김춘기×박태건’ 북토크가 오는 14일 오후 5시 진안읍 당산길에 위치한 책방사람에서 진행된다. 이번 행사는 지난해 나란히 시집을 펴낸 김춘기 시인과 박태건 시인이 한 무대에 올라 작품 세계와 창작 이야기를 나누는 문학 대담 형식으로 마련된다. 행사에서는 시 낭독과 함께 독자들과의 대화도 이어질 예정이다. 진안 출신인 김춘기 시인은 첫 시집 <상수리나무 책방>을 통해 고향과 부모, 유년의 기억을 정갈한 언어로 풀어내며 따뜻한 서정 세계를 선보였다. 시집에는 고향 풍경과 가족의 기억, 삶의 그리움을 담담하게 담아낸 시편들이 실려 있다. 박태건 시인은 익산 출신으로 시집 <이름을 몰랐으면 했다>로 불꽃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섬세한 감각과 깊이 있는 언어로 삶의 흔들림과 존재의 의미를 탐색하는 시 세계를 펼쳐왔다. 특히 이번 북토크는 진안에서 태어난 시인이 고향에서 여는 문학 행사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날 행사에는 지역에서 활동하는 유순예 시인과 윤일호 작가도 함께해 지역 문학인들과 독자들이 교류하는 자리로 꾸며질 예정이다. 행사 참여 등 자세한 사항은 전화(010-6409-9318)로 가능하다. 전현아 기자
전주 효자동에 거주하는 직장인 김유림(42)씨는 최근 가족들과 영화관을 찾으려다 발길을 돌렸다. 4인 가족 관람료와 간식비를 합치면 10만원에 육박하는 비용이 부담됐기 때문이다. 김씨는 “예전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가기엔 극장 문턱이 너무 높아졌다”며 “차라리 저렴한 OTT로 집에서 보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든다”고 토로했다. 영화진흥위원회가 최근 발행한 ‘영화 콘텐츠 소비 트렌드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관객들이 체감하는 적정 관람료(8,000원~12,000원 미만)와 실제 티켓 가격(14,000원~15,000원) 사이의 괴리가 발길을 돌리게 하는 원인으로 분석됐다. 특히 전북 등 중소도시 관객의 가격 저항감이 더 컸다. 지역 관객 26.3%는 극장 대신 OTT를 택한 이유로 ‘저렴한 비용’을 꼽아 전국 평균(22%)보다 높은 수치를 보였다. 실제 주된 관람 수단으로 극장을 이용하는 비중도 7.4%에 불과해 서울(8.8%) 등 대도시보다 낮았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단순히 ‘가격’만이 문제는 아니라고 지적한다. 조지훈 무주산골영화제 프로그래머는 “전북의 1인당 연간 관람 횟수는 1.77회로 결코 낮지 않으며 인프라도 충분하다”며 “본질적인 이유는 가격 부담을 상쇄할 만큼 ‘극장에서 볼만한 동기’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과거 젊은 층의 필수 데이트 장소였던 극장의 기능이 약해진 상황에서 관객을 끌어들일 콘텐츠 유인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보고서에는 위축된 지역 극장가를 살리기 위해 ‘청년시네마패스’나 독립‧예술영화 무제한 관람권인 ‘인디패스’ 모델 도입 등 지역 맞춤형 정책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에 대해 조지훈 프로그래머는 “인디패스 모델 도입의 경우 취지는 좋지만 전주독립영화전용관은 단 한 곳뿐”이라며 “오는 6월 시행 예정인 멀티플렉스의 독립‧예술영화 상영 지원 정책과 연계해 물리적 상영 기회부터 확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결국 보고서에서 제시한 맞춤형 정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단기적인 가격 할인을 넘어 극장을 특별한 경험의 공간으로 재정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지방은 수도권에 비해 감독이나 배우를 만나는 관객과의 대화(GV)와 같은 부대행사에 제약이 크다. 때문에 바우처 지급을 넘어 지역 청년 기획자들이 영화문화를 조직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야 전북 영화 생태계의 선순환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된다. 조 프로그래머는 “획일적인 예산 투입보다는 지역의 인적자원을 활용한 기획력을 키우고, 관객들에게 차별화된 경험을 제공하는 시스템 구축이 핵심이 돼야 한다”고 제언했다. 영진위의 제안처럼 지역 관객의 요구를 관통하는 정책적 시도가 지역 영화산업의 위기를 타개할 마중물이 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박은 기자
전쟁과 차별의 시대 속에서도 환상적인 색채와 독창적인 판화 기법으로 ‘사랑과 희망의 예술’을 피워낸 거장의 작품을 전주에서 만날 수 있게 됐다. 전주문화재단은 오는 6월 21일까지 팔복예술공장 A동 2층 전시실과 이팝나무홀에서 세계적인 현대미술 거장 Marc Chagall 특별전을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한불 수교 140주년과 전주문화재단 설립 20주년을 기념해 기획됐다. 세계적 거장의 작품을 지역에서 직접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함으로써 국제 문화교류의 의미와 지역 문화 향유권 확대를 함께 조명하고자 했다. 국내에서 열린 샤갈 전시 가운데서도 손꼽히는 규모로 마련된 이번 전시에는 오스트리아의 기업가이자 유럽을 대표하는 컬렉터인 한스-페터 하셀슈타이너 이사장의 소장품 348점이 공개된다. 특히 이번 전시는 복제본이 아닌 작가가 직접 제작에 참여한 원작 판화를 중심으로 구성된 것이 특징이다. 샤갈은 일반적인 판화가들이 3~5개의 색 판을 사용하는 것과 달리 20~30개의 색 판을 겹쳐 찍는 방식으로 유화에 가까운 풍부한 색채를 구현해 ‘색채의 마술사’로 불린다. 판화라는 매체를 통해 더 많은 사람이 예술을 누릴 수 있도록 하겠다는 그의 ‘예술의 대중화’ 철학 역시 이번 전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전시는 △사랑을 노래하다 △환상의 세계에서 △파리, 파리, 파리 △신에게 다가가다 △빛과 색채 △영원한 이방인 등 6개의 섹션으로 구성됐다. 전쟁과 망명의 시대를 살았던 샤갈이 인간과 삶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구축한 독창적인 조형 언어와 상징 세계를 조명한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여진 작품들은 지역 전시 이후 대구를 거쳐 오스트리아로 돌아갈 예정이다. 이후에는 샤갈 작품을 중심으로 한 전용 박물관이 건립돼 상설 전시될 예정이어서, 이번 전시가 지역에서 거장의 작품을 직접 만날 수 있는 드문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전시 기간 샤갈의 작품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도슨트 프로그램도 운영된다. 프로그램은 매주 화~금요일 오후 3시에 진행되며,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오전 11시와 오후 3시 하루 두 차례 열린다. 장소는 B동 2층 이팝나무 그림책도서관이며 단체 해설 문의는 전화(063-212-8801)로 가능하다. 또 관람객이 직접 판화의 색과 질감을 체험할 수 있는 ‘판화 체험존’도 함께 마련됐다. 전시 굿즈도 다양하게 준비됐다. 드로잉 노트와 열쇠고리, 포스터, 책갈피, 엽서, 에코백 등이 판매되며 수익금 전액은 ‘이팝프렌즈’ 후원금으로 지역 예술가들에게 기부될 예정이다. 유료 전시인 이번 전시는 온라인 예매 플랫폼 티켓링크를 통해 사전 예매할 수 있으며 현장 구매도 가능하다. 관람료는 성인 1만 2000원, 청소년 1만 원, 어린이 8000원이며 48개월 미만 영유아는 무료 입장할 수 있다. 최락기 전주문화재단 대표이사는 “전주에는 아직 공공을 대표하는 미술관이 없지만, 그렇다고 시민들이 수준 높은 예술을 접할 기회를 미룰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며 “이번 전시는 재단이 먼저 씨앗을 뿌리자는 의미에서 준비했다”고 말했다. 이어 “향후 전주시립미술관이 건립되면 세계적인 작가 전시는 공공미술관의 역할이 되겠지만, 지금은 과도기인 만큼 재단이 그 역할을 일부 맡아 시민들이 서울 등 다른 지역에 가지 않아도 좋은 작품을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도록 하고자 했다”며 “이번 전시가 프랑스와 한국 간 문화교류의 가치를 되새기고 시민들에게 수준 높은 문화 향유의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전현아 기자
도내 불교계가 다가오는 지방선거를 앞두고 공명선거를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전북불교신도회 신행단체회장단(회장 한광수)은 지난 8일 성명을 통해 “선거는 국민의 뜻을 모아 올바른 지도자를 선택하는 민주주의의 소중한 제도인 만큼 그 과정 또한 공정하고 깨끗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최근 일부 도지사 후보자 측에서 확인되지 않은 음모성 소문이 유포되고 있는 것과 관련해 “당선만을 목적으로 한 비방과 음해는 유권자의 올바른 판단을 흐리게 하고 지역사회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는 바람직하지 않은 정치 문화”라고 지적했다. 이어 불교의 가르침인 ‘정어(正語)’를 언급하며 “거짓과 험담을 멀리하고 진실되고 바른 말을 하라는 가르침처럼 선거 또한 상대를 비방하는 정치가 아니라 정책과 비전으로 경쟁하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비방과 음해 즉각 중단 △선거 관계자와 지지자들의 거짓 정보 확산 자제 △유권자의 정책과 자질 중심의 현명한 선택 등을 촉구했다. 전북불교신도회 신행단체회장단은 “선거는 누군가를 무너뜨리는 과정이 아니라 더 나은 공동체를 세우는 과정”이라며 “이번 지방선거가 거짓과 비방이 아닌 정직과 공정, 갈등이 아닌 화합과 희망의 선거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전현아 기자
헛바퀴 굴렸습니다. 어렵사리 꿈속을 빠져나와 천변, 자전거가 쓰러져있습니다. 힘이 달렸을까요? 구르지 못하면 더 이상 바퀴 아니지요. 자전거를 세워두고 거슬러 오릅니다. 세내〔三川〕도 둥글게 굴러 바다로 가는 것이겠지요. 또르르 중인리 들판 풀잎에 내린 이슬과 데굴데굴 구이 모악산 계곡에 내린 빗방울과 장승배기 어디 퐁퐁 솟아오른 샘물이 모여 굴러가는 것이겠지요. 자맥질하는 오리가 자꾸 동그라미를 그립니다. 희미한 어머니도 먼동이 틀 무렵 두레 밥상을 차리셨었지요. 유년을 굴리던 도롱테가 사라졌습니다. 세상은 둥글다는데, 걷고 걸으면 제자리에 데려다 줄 줄 알았건만 걸으면 걸을수록 길이 멀어집니다. 섶다리가 있던 어디쯤 공터에 달집을 지었네요. 정월 대보름입니다. 달집 허리에 두른 새끼줄에 소원이 둥그렇습니다. 저녁이면 탁 탁 타닥 달집 대나무 타는 소리에 자꾸 헛바퀴만 내미는 악귀도 액운도 줄행랑치겠지요. 망월이야! 어른들은 노란 양재기에 달빛을 가득 부어 마시겠지요. 아이들은 불깡통을 돌릴까요? 앞장선 꽹과리 뒤를 날라리가 따르고 징은 또 지잉 징 달집을 돌겠지요. 밤하늘 가득할 보름달을 굴리며 둥글게 둥글게 먼 골목에 찾아들고 싶습니다.
전북특별자치도립국악원이 조직의 활력을 이끌 리더십을 새롭게 구축하며 본격적인 도약에 나선다. 전북도립국악원은 6일 공연기획실장에 전주희(44)씨를, 무용단 예술감독에 박기량(46)씨를 각각 최종 합격자로 발표했다. 공연기획실장 합격자 전주희씨는 원광대학교 국악과를 졸업하고 단국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화예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전주세계소리축제 조직위원회와 고창문화의전당, 부산동래문화회관을 거쳐 현재 클래식 부산(부산콘서트홀) 공연기획 프로듀서로 재직 중인 실무형 전문가다. 무용단 예술감독으로 발탁된 박기량씨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실기과를 거쳐 고려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정통파 무용가다. 2006년부터 17년간 국립무용단 단원으로 활동하며 기량을 입증했으며, 프랑스 국립 메종 드 아트 크리테일(Maison des Arts de Créteil) 연출 안무가 등 해외 무대에서 활약한 경력을 보유하고 있다. 현재는 국립남도국악원 안무자로 재직 중이다. 이들의 임용 기간은 2년이며, 성과에 따라 1회 중임이 가능하다. 최종 합격자는 오는 17일 오후 5시까지 도립국악원 운영팀에 후보자 등록을 마쳐야 한다. 국악원은 신원조회 등 행정 절차를 거쳐 오는 4월 초 정식 임용을 완료할 계획이다. 박은 기자
지역 시민사회와 동학 관련 단체들이 동학농민혁명 항일무장투쟁 참여자들에 대한 독립유공자 서훈을 촉구하고 나섰다. 도내 53개 시민사회·정당·동학 단체는 최근 성명을 통해 전봉준 등 동학농민혁명 항일무장투쟁 참여자들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하기 위한 국회 입법을 조속히 추진할 것을 요구했다. 이들은 성명에서 “1894년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이후 동학농민군이 재봉기해 공주 우금치까지 북상하며 일본군에 맞선 것은 명백한 항일 독립운동”이라며 “전봉준을 비롯한 참여자들이 아직까지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지 못한 것은 역사적 불합리”라고 주장했다. 단체들은 특히 을미의병(1895) 참여자 150명이 이미 독립유공자로 인정된 것과 달리, 그보다 앞선 시기 일본군에 맞서 싸운 동학농민군은 국가 차원의 공식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국회가 제정한 ‘동학농민혁명예회복법’에서 재봉기 참여자를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혁명 참여자’로 규정하고 있음에도, 국가보훈부가 기존 독립운동 기점 기준을 유지하면서 서훈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들은 “동학농민혁명 재봉기는 한국 독립운동의 출발점으로 평가되고 있다”며 “22대 국회가 관련 법안을 당론으로 추진하고 신속 처리해 역사 정의를 바로 세워야 한다”고 촉구했다. 전현아 기자
전주 서학동 예술마을의 상징인 ‘서학동 사진미술관’과 진안 ‘계남정미소’가 개인의 손을 떠나 공공자산으로 거듭날 변곡점에 섰다. 평생 사진예술에 헌신해온 김지연 서학동사진미술관 관장이 최근 전북도립미술관에 두 공간을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면서다. 다만 실제 기증 성사까지는 행정의 수용의지와 예산확보 등 복합적인 과제 해결이 선행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5일 전북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전북도와 전북도립미술관은 이번 기증 제안을 두고 공유재산 편입을 위한 실무 차원의 내부 검토를 준비 중인 것으로 파악됐다. 김지연 관장은 기증에 대한 확고한 의사를 밝힌 상태지만 도가 이를 공공자산으로 수용하기 위해 이행해야 하는 행정적 조치는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다. 문제는 사유시설 공공전환에 따른 법적‧재정적 부담이다. 서학동 사진미술관이 도립미술관 분관으로 운영되려면 ‘공유재산 및 물품 관리법’에 따른 심의를 통과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건물 노후 정도에 따른 정밀 안전 진단과 리모델링 비용, 연간 운영비 등 막대한 예산 투입이 불가피하다. 상시 운영을 위한 전담 인력 배치와 콘텐츠 운용 방안 등 지속가능한 전략 수립도 필수적이다. 이러한 부담에도 불구하고 지역 문화계에서는 이번 기증이 전북 문화 거점 확장의 기회로 보고 있다. 완주군에 위치한 도립미술관은 그간 지리적 접근성이 낮아 도민들의 이용이 쉽지 않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이런 상황에서 서학동 사진미술관이 도립미술관의 분관 역할을 수행하면 시민들과 문화적 접점을 넓힐 수 있다는 분석이다. 실제 도립미술관에서도 이번 기증을 전주 도심권 진출의 핵심 동력으로 삼으려는 의지가 강하다. 도립미술관 관계자는 “이미 인지도가 높은 서학동 사진미술관의 브랜드 가치는 도립미술관 입장에서 놓치기 아까운 자산”이라며 “회화와 서예 위주의 소장품 범위를 사진과 영상 등 미디어 장르로 확장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기증자인 김 관장은 공간의 예술적 정체성 보전을 유일한 조건으로 내걸며 운영권 등 모든 개인적 권리를 내려놓겠다는 입장이다. 김 관장은 “재정적‧체력적 한계로 직접 운영은 어려워졌지만 평생 일군 공간의 역사와 맥이 사라지지 않고 지역사회에 남길 바란다”고 말했다. 전북도의 수용여부와 구체적인 예산확보 방안이 이번 기증성사의 핵심변수가 될 전망이다. 박은 기자
K-컬처의 세계적 확산 속에서 전통문화는 단순한 문화유산을 넘어 영화·게임·관광 등 다양한 산업으로 확장되는 ‘원천 콘텐츠(IP)’로 재조명되고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K-컬처 수도’ 도약을 선언한 전주가 보유한 문화 자산을 콘텐츠로 연결하는 선순환 구조 마련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세계 곳곳에서 코리아 붐이 확산되며 한국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가운데, 판소리·한옥·한식 등 한국적 문화 자산을 다수 보유한 전북특별자치도 역시 지역 문화유산을 어떻게 기록하고 데이터화해 활용할 것인지가 새로운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전북은 전국에서도 전통문화 자원이 풍부한 지역으로 꼽힌다. 전주 한옥마을과 익산 미륵사지 등 대표적인 역사문화 자산은 물론, 판소리와 전통 공예 등 다양한 무형유산이 집적돼 있다. 이러한 자산을 체계적으로 기록하고 산업·교육·관광 분야에서 활용하기 위한 기반으로 ‘문화 데이터 뱅크’ 구축 필요성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결국 핵심은 문화 데이터의 축적에 그치지 않고 이를 실제 콘텐츠로 구현할 수 있는 기획과 운영 구조를 함께 마련하는 데 있다. 지역 문화 데이터가 의미 있는 문화 자산으로 기능하며 산업과 콘텐츠로 이어질 수 있는 체계가 요구된다는 지적이다. 전북자치도는 무형유산 기·예능 기록화와 전통 건축물 구조 데이터 축적, 고문헌 디지털 아카이브 구축 등을 통해 문화유산을 데이터 자산으로 관리하려는 시도를 이어가고 있다. 문화유산을 단순히 보존하는 것을 넘어 다양한 콘텐츠 제작에 활용할 수 있는 기반 자원으로 전환하겠다는 취지다. 다만 문화자원의 디지털화 자체가 곧바로 활용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분석도 나온다. 최근 전북학연구센터 학술지에 실린 연구 결과에 따르면 역사문화자원은 단순히 보존되는 것만으로 가치가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관람객과 기획자, 지자체 등 다양한 주체의 관계 속에서 활용될 때 새로운 의미가 형성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에서는 전주의 역사문화 공간을 활용한 몰입형 콘텐츠 사례를 분석해 문화유산 공간이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서사와 체험을 구성하는 핵심 자원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밝혔다. 실제로 경기전과 전라감영 등 전주 원도심의 역사 공간을 활용한 프로그램에서는 장소의 역사성과 상징성이 콘텐츠의 주요 요소로 활용된 것으로 분석됐다. 또 이러한 프로그램을 통해 문화유산이 단순한 ‘관람의 대상’이 아니라 ‘참여와 해석의 대상’으로 경험되는 경향이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역사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체험형 프로그램은 문화유산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제공하고, 지역 역사와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전문가들은 문화 데이터 축적이 실질적인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이를 콘텐츠로 연결할 수 있는 제도적·운영적 기반이 함께 구축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서국선 중앙대학교 문화예술경영학과 박사는 이번 연구를 통해 “전북은 이미 풍부한 전통문화 자산을 보유한 지역”이라며 “이제 관건은 이러한 자원을 어떻게 데이터화하고 현대적 콘텐츠로 재구성해 K-컬처 시대의 새로운 문화 자산으로 확장하느냐에 있다”고 말했다. 이어 “지역이 보유한 전통문화에 대한 디지털 아카이브 구축과 콘텐츠 제작 역량, 지자체의 제도적 지원이 균형을 이루지 못할 경우 문화 데이터가 또 하나의 저장소에 머무를 가능성도 있다”며 “전북 문화 데이터 뱅크가 단순한 기록 사업을 넘어 지역 관광과 콘텐츠 산업을 연결하는 실질적인 플랫폼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고 덧붙였다. 전현아 기자
일상의 소음이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 전주교육대학교 아트스페이스에서 오는 15일까지 열리는 김동욱 작가의 개인전 ‘조용한 장면들’은 우리가 무심코 지나쳤던 찰나의 정적을 캔버스 위로 불러낸다. 화려한 사건 대신 반려견과 함께하는 거실, 햇살이 머무는 숲, 여행지의 낯선 구석 등 지극히 사적인 기억의 단면들을 시각화한다. 작가의 시선은 특별한 서사보다 머무는 시간 그 자체에 집중한다. 화면 속 반려견은 단순한 그림 소재를 넘어 인간과 같은 무게의 시선을 공유하는 서사적 주체로 등장한다. 침대 위에서 몸을 웅크린 채 잠든 모습이나 빛이 스며드는 공간 한복판에 우두커니 선 작은 몸짓은 교감이 만드는 관계의 따뜻한 온도를 보여준다. 시각적 화법도 주목할 만하다. 미국과 영국에서 텍스타일 디자인을 전공한 작가의 이력이 투영된 듯 선명한 색면과 깊은 음영의 대비가 돋보인다. 분홍빛 매트와 어둡게 드리운 그림자, 보랏빛 저녁하늘과 초록 숲의 배치는 현실의 풍경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비현실적 감각을 자아낸다. 기억 속 장면을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입혀진 강렬한 색채와 회화적 붓질은 단순한 재현을 넘어선 리듬감을 만든다. 작가는 전시 서문에서 “특별한 사건보다 오히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순간에 더 많은 감정이 머문다”며 “조용함은 결핍이 아니라 일상이 단단해지는 순간의 상징”이라고 밝혔다. 미국과 영국에서 텍스타일 디자인을 전공한 작가는 경북대 서양화 박사과정을 수료하며 디자인과 순수미술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업을 이어왔다. 2021년 대구문화예술회관 ‘올해의 청년작가’ 선정 및 이랜드문화재단 공모에 당선됐다. 현재 전주교대와 경일대에서 강의와 연구를 병행하며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박은 기자
첫 작품집이 나온 지 5개월이 됐다. 막 책이 나오고 난 뒤에 무언가 한 가지 해냈다는 안도감에 숨을 고르느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특별히 쫓는 이 없이 쫓겼던 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2018년, 얼떨떨하게 시상식을 나오는 길에 나와 약속했다. 10년 안에 성과를 내지 못하면 어떤 벌을 받겠노라고. 다짐이 무색하게 모든 시간을 알차게 쓰지는 못했다. 때때로 방황했고, 때때로 쫓기며 애썼다. 다행히도 10년이 지나가기 전에 작품집을 내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오랜만의 성취를 핑계 삼아 한참이나 마음과 정신을 놓고 시간을 보냈다. 결국, 머지않아 다시 길을 잃었다. 무엇을 쓰려고 했는지 헷갈렸고, 어디서 시작했는지도 잊었다. 그래서 최근에 나와 다시 약속을 잡았다. 일종의 5개년 계획 같은. 계획을 한창 세우던 차에 『고려인 만두』를 만났다. 긴 여행에서 만두를 실컷 먹고 돌아온 참이었다. 여행의 추억을 되짚을 수 있을까 싶어 열었던 시집에서 갖고 싶었고, 또 잊고 있던 것들을 찾았다. 박태건 시인의 시에는 지역이 있고, 사람이 있다. 그래서 이야기가 있다. 땅 위에 발 딛고 선 사람들의 목소리가 있다. 김제 금산사의 말사 귀신사가 있고, 흐린 날의 웅포가 있다. 우스또베에도 갔다가 군산 하제마을에도, 하동에도, 광주에도 간다. 그의 품에서 지역은 한정되지 않고 이곳저곳이 된다.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찻잔에 전생 같은 앙상한 나무 한 그루를 담아 마시는 여승이 있고, 세상 누구보다 부지런한 용현 아재가 있고, 버스비 대신 시집을 내고 싶다는 시인이 있다. 여러 공간에 여러 사람의 얼굴이 쉴 새 없이 등장하는 통에 끊임없이 이야기가 흐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이미지는 마침내 활기를 얻어서 마치 본 적 있는 상황인 양, 머릿속에서 동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한다. “어떤 날은 버스비 대신 시집을 내고 싶다 버스 안에서 사람들과 좋아하는 시에 대해 얘기했으면 좋겠다 입이 근질근질한 운전사가 가로수 아래 버스를 세우고 어제의 날씨와 내일 만날 사랑에 대해 얘기했으면 좋겠다” (47쪽, 「첫, 시집」) “어떤 기억은 유적이 되고 어떤 울음은 닮는다 눈물로 수로를 내어 한 줌의 볍씨를 심는다 처음 보는 꽃에도 이름을 붙여 주는 휴일에는 광주 간다 나라도 집도 없는 사람들이 배회하는 거리 당신을 잃게 된다면 나는 헤엄쳐 사막을 건너야 하리 수메르 우크라 가나안 팔레스타인” (42쪽, 「당신을 잃게 된다면」) 시집을 덮고도 한참 동안 시인이 부른 땅과 사람들에 대해 생각했다. 하루가 다르게 뉴스에는 새로 되짚어야 할 땅과 이름이 없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가 쏟아진다. 기억과 닮아 있는 울음은 반복되고, 부도덕한 침묵은 태도를 바꾸는 법이 없다. 페이지를 넘기는 동안 시와 뉴스가 어지럽게 섞여 줄기에 매달린 알감자처럼 이야기가 딸려 나왔다. 내가 소설에 쓰려고 했던 것, 시작하려고 했던 곳이 그의 시에 있었다. 덕분에 당장 무언가가 쓰고 싶어졌다. 최아현 소설가는 2018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소설 <아침대화>로 등단했으며, 저서로는 소설집<밍키>가 있다.
“노동자가 일하러 나가는 것은/ 햇볕이 필요해서다/ 사무실 따위에 갇혀/ 창백한 얼굴로 평생을 살지 않겠다고/ 책상머리를 박차고 용접기를 손에 잡은 거다/ 햇볕이 부족한 지구에서 살아가려면/ 인공으로라도 불꽃의 온도를 올려/ 스스로 광합성을 이루는 거다/ 그래야 폐 속의 더러운 공기를 정화할 수 있다/ (중략)/ 영혼을 맑게 하는 것은 노동의 푸른 몸짓이다/ 사라진 희망을 만드는 열정으로/ 세상을 바꾸려는 강한 의지여서/ 용접봉에서 빠져나온 불꽃으로/ 노동은 언제나 푸른 산소의 시간이었다.”(시 ‘노동은 푸른 산소다’) 남원 출신의 박철영 시인이 노동 문학의 현장과 현주소를 가늠해 볼 수 있는 노동시집 <노동은 푸른 산소다>(실천문학)을 펴냈다. 시인은 30여 년 넘게 포스코 제철소 일터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정년을 마쳤지만, 아직도 여수 율촌공단 현장에서 뭇 노동자들과 함께 근무하며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가는 노동자다. 이번 시집의 시들은 대부분 일상 속 노동자의 삶 그 자체를 형상화한다. 실제 작품은 노동자로 살면서 노동자를 외면하지 않는, 시인의 신산한 눈으로 포착한 장면이 담겨 시들 곳곳이 노동 현장으로 점철돼 있다. “아무것을 알려주지 않은 날들과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를 모른 채 4월은 오고 어딘가로 흘러가고 힘들다며 외면하려 한 꽃들이 흙을 비집고 나와 하늘을 쳐다본다/ 4월은 기쁨이나 슬픔만으로 말할 수 없어 서로를 들여다보다가 잊었던 말 떠올랐다는 듯 사랑한다는 말 생각났다는 듯/ 현장 떠난 뒤로 소식 한번 오지 않는 작업장 막둥이가 몸 다쳤던 날이 하필이면 꼭 이맘때였다.”(시 ‘4월’) “물려받은 가난은 진창처럼 엉겨/ 떨어져 나갈 날이 없었다/ 세상의 구석을 떠돌다가/ 철근쟁이가 되어서는/ 반듯한 허리 꺾어가며/ 스스로 벽이 되거나 모서리가 되어 살아온/ 마흔 살을 지나/ 눈이 오거나 비가 오거나/ 허리를 구부려야 들어서는 단칸 방/ 공친 날에는/ 욱신거리는 제목들을 내용 삼은/ 시 한 편이 떠오르기도 하는데/ 발목 언저리에서부터 시작된 통증이 심해져/ 첫 구절부터 종종은/ 하루가 위태롭게 휘청거렸다.”(시 ‘철근챙이의 詩’) 노동 현장을 드러내면서도 몇몇 시들에서 보이는 서정의 시학 또한 사치스럽지 않다. 작가의 문장들을 통해 노동 현장의 가학성이나 불균등, 차별 같은 것들보단 인간 근원의 심성에서 바라보는 노동에 대한 얼굴을 다채롭게 조망한다. 박 시인은 시인의 말을 통해 “다들 살기 힘들다고 하는 세상에 정말로 힘든 사람들은 온몸으로 살아가는 노동자들이다”라며 “그들은 시곗바늘처럼 하루를 마치고 다음 날을 위해 잠들지만 힘들다고 할 겨를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시는 현실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상상하고 상징적으로 발현한 문장이라 하지만 노동 현장의 하루는 그렇게 낭만적일 수가 없다는 것이 가슴아픔 뿐이다. 시를 세상에 내놓으며 그들의 모습을 말해주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시인은 한국방송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2002년 <현대시문학> 신인상에 당선돼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비 오는 날이면 빗방울로 다시 일어서고 싶다>와 <월선리의 달>, <꽃을 전정하다> 등이 있다. 현재 그는 <미래시학> 편집위원과 <현대시문학> 부주간으로 활동 중이다. 전현아 기자
삶을 진솔한 언어로 기록해온 김계식 시인이 서른여덟 번째 시집 <시로 그린 나의 삶>(인간과문학사)을 펴냈다. 예순을 넘긴 나이에 문단에 나온 시인은 묵묵하고 결연한 걸음으로 삶의 정서를 노래하고, 독특한 시적 문법을 구사하며 자신만의 시 세계를 다져왔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소박한 삶의 이모저모를 질박한 언어로 표현해낸다. 24년의 시력이 증명하듯 깊은 통찰력을 겸비하면서도 여든일곱이라는 나이가 무색할 만큼 활달하고 다채로운 시편들을 통해 문학의 생명력을 증명해낸다. “산은/ 층위에 층을 포개 쌓아/ 태산 준령이 되고// 물은/ 끊임없이 흐르고 흘러/ 뿌리 깊은 샘이 된다// 목숨을 부지한 온갖 생명체들/ 한 해 한 해 살아온 삶/ 겉드러나는 일 없으니/ 어느 누가 쉬 헤아릴 수 있으랴// 한 생명 다 한 나무/ 저 밑동에 그려진 나이테로/ 그 나무의 바라본 방향과/ 연륜을 알듯// 우리네 삶/ 그 남긴 발자취가 나이테일지니/ 모남없는 둥긂으로/ 굵게굵게 그려나가자”(‘나이테’ 전문) 순박하고 따뜻한 시집에는 삶의 가치와 의미를 일깨우는 단정한 문장의 울림과 서정시의 묘미를 만끽할 수 있는 75편의 시를 5부로 나눠 실었다.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살아온 연륜이 쌓일수록 부단히 이어온 삶의 족적도 알게 모르게 살이 오르는 것을 느낀다”라며 “시집을 출간할 때마다 일기를 시로 쓴 것인지, 시로 일기를 쓴 것인지 구분할 수 없어 염려를 안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좀 더 가까워지는 도구가 되리라는 믿음으로 용기를 냈다”고 덧붙였다. 정읍 출생인 저자는 <창조문학>으로 등단했다. 한국문인협회, 전북문인협회, 전북시인협회 등에서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시집 <사랑이 강물되어>를 비롯해 시선집 <자화상>, <청경우독>, <서른, 그 푸르른 별밭> 등이 있다. 박은 기자
“이제부터는 바쁘다. 유치원 차 놓치면 큰일이다. 허리에 끼고 화장실로 직행. 싫어요. 안돼. 치카치카하고 얼굴 똑똑똑 단장하고 옷 입고 나서 횡단보도 건널 땐 잡은 손 의지하고 폴짝폴짝 뛰어서 차에 올랐다(…중략…) 우리 민준이는 따복따복 커야 한다. 갑자기 뻥튀기해서도 안 되고 하나하나 알아가고 배워가며 조심조심 눈치코치 받으며 컸으면 좋겠다.”(‘천하태평 손자’ 일부) 김수곤 수필가가 2021년부터 2025년까지 외손자를 돌보며 경험한 내용을 담은 육아에세이집 <육아일기>(북매니저‧비매품)를 펴냈다. 전북도청과 전북도의회에서 근무하다 퇴직한 저자는 요즘 육아라는 일정으로 인생 황혼기에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다. 딸 부부의 사정으로 손자 민준이를 돌보고 있는 저자는 손자를 씻겨서 유치원에 등원시키고, 밥을 챙겨서 먹이는 일이 기쁘면서도 힘들었다고 고백한다. 총 5부로 나눠 엮어낸 책에는 허둥대며 배운 육아부터 어린이집 등원을 거부하는 어린 손자와 투닥거린 일화까지 총 300여 편의 소소한 일상 속 육아 에피소드가 수록되어 있다. 저자 김수곤은 전북대학교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저서로는 <중국의 경제 1‧2>, <중국 투자관련 법규집>, <할아버지가 쓴 민준이의 육아일기>, <황방의 아침>등이 있다. 박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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