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수의 불편한 진실
며칠 전 점심식사 모임에서 한 친구가 갑자기 배(梨) 이야기를 꺼냈다.어느 날 냉장고 문을 열어 보니, 보관 중이던 배가 폭삭 썩어버렸다. 딸이 사준 배를 먹지 않고 아끼던 중이었는데, 쉽게 눈에 보이지 않는 냉장고 서랍 속에 보관한 것이 실수였다고 애달아하고 있었다. 덕분에 모처럼 냉장고 속은 깨끗해졌다고 했다.나도 배 때문에 낭패를 본 경험이 있었다. 지병인 천식 때문에 기침으로 고생할 때마다 배와 도라지 대추 생강 등을 넣고 즙을 내어 마시기 때문에 배를 항상 냉장고에 보관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기침 때문에 배를 찾으려고 냉장고 문을 열었을 때, 배가 모두 얼어버렸었다.썩은 배의 모양이 어떻게 생겼던가? 하고 나는 친구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 부드러운 어투로 물었다.배의 껍질에 새카맣게 된 반점들이 군데군데 생겨서 손가락으로 가만히 눌러보았더니 물이 찌익 나오면서 포옥 들어가 버리데!친구의 대답을 듣고, 나는 그 배의 냄새를 맡아보았느냐고 물었다. 아무 냄새도 없었다는 말을 듣고, 그 배는 썩은 것이 아니라 얼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고, 그것을 동리(凍梨)라고 표현한다고 설명해주었다.동리(凍梨)란 노인의 피부에 반점(斑點)이 생기는 것이 흡사 언 배의 껍질 같다는 데서, 노인들의 피부를 이르는 말이기도 하지만, 90세의 노인을 달리 이르는 말(동아국어사전)이라고 설명해주었다. 내 말을 듣고 있던 친구는 90세의 노인을 졸수라고 하는 말은 들었지만, 동리(凍梨)라는 말은 금시초문이라고 말했다.실은 나도 많은 작가들의 수필 속에서 졸수(卒壽)라는 말을 접하고, 국어사전을 펼쳐보았다. 그러나 국어사전에서 그 단어는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졸(卒)의 약자가 아홉 구(九) 밑에 열 십(十)인 글자이기 때문에 九十(90)으로 읽어서 된 말이라고 하는 설명을 어느 친구한테서 우연히 들었다.나는 그 말을 확인하기 위해 서점으로 갔다. 그 글자를 소사전(小辭典)에서는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었다. 두툼한 한한대사전(韓漢大辭典)을 펼쳐보았다. 아홉 구(九) 밑에 열 십(十)의 글자는 사전마다 풀이가 달랐다. 졸(卒)의 속자(俗字)라고도 하고, 또 졸(卒)의 와자(訛字)라고 풀이되어 있었다. 그때서야 졸수(卒壽)라는 단어가 국어사전에 등재되지 못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사람들이 즐겨 사용하는, 나이를 나타내는 모든 단어들, 예를 들어, 종심(從心), 고희(古稀), 희수(喜壽), 산수(傘壽), 미수(米壽), 망구(望九) 망백(望百), 백수(白壽) 등은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하지만 졸수(卒壽)라는 단어는 국어사전에 등재되어 있지 않았다. 그런 불확실한 말을 사용한다는 것은 어딘지 모르게 찜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문학을 하는 사람들만이라도 그 말의 사용을 삼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나는 친구에게 얼은 배 덕택으로 90세를 이르는 말로 동리(凍梨)라는 멋진 표현을 알게 되었으니, 뿌리도 모르는 졸수(卒壽)보다는 동리(凍梨)를 사용하라고 권했다. 나의 훈수가 졸수(拙手)가 되지 않기를 은근히 바라면서.△수필가 이희근 씨는 정읍 출신으로 지난 2009년 계간 〈문학사랑〉 수필 부문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수필집 〈산에 올라가 봐야〉, 〈사랑의 유통기한〉, 〈아름다운 만남〉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