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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으로 만나는 익산의 역사문물 ⑥ 미륵사지 서탑 사리갖춤 VS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갖춤

2009년 1월 14일 익산 미륵사지 서탑 해체조사 현장에서는 탄성이 터졌다. 639년 백제의 왕후가 가람을 창건하고 탑을 조성하였다는 내용이 새겨진 사리봉영기와 사리를 봉안한 사리호 외에도 다양한 공양품들이 당시 현장에 있던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한 것이었다. 이 사리갖춤과 공양품의 발견 이후 국립전주박물관의 대표적인 전시품인 왕궁리 오층석탑 출토 사리갖춤의 조성시기가 삼국시대 백제라는 견해들이 제시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주장이 정말로 타당한가를 밝히기 위해서는 먼저 두 사리갖춤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두 사리갖춤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좀 더 명확히 살펴보기 위해서는 미륵사지 서탑 사리갖춤이 봉안되기 62년 전인 577년에 봉안된 부여 왕흥사지 사리갖춤과 43년 후인 682년에 봉안된 감은사지 삼층석탑 사리갖춤을 함께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왕흥사지 출토 사리갖춤이 금제사리내호-은제사리외호-동제사리외함 순으로 중첩시킨 것과 달리, 왕궁리 오층석탑과 미륵사지 석탑 사리갖춤은 유리사리병-금제사리내함(호)-금동사리외함(호)의 순으로 중첩시켰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러한 구조는 금동전각형사리기-금동외함으로 구성된 감은사지 삼층석탑 사리갖춤과도 다른 것이다. 미륵사지 서탑 사리갖춤의 사리내외호는 비슷한 형태인데, 어깨 부분이 넓고 목이 길며 주둥이가 넓은 병 형태이다. 이러한 미륵사지 석탑 사리내외호의 형태는 위덕왕 재위 때인 577년에 봉안된 왕흥사지 사리내외호의 전통을 이은 것으로 보인다. 반면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내함은 감은사지 삼층석탑 사리외함과 같은 상자형이다.사리기 표면을 장식한 무늬를 살펴보면, 미륵사지 서탑 사리갖춤의 내외호와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갖춤의 내함에는 연꽃무늬와 넝쿨무늬가 결합된 것과 함께 구슬무늬가 공통적으로 시문되어 있다. 특히 미륵사지 서탑 사리갖춤 금동외호 아랫부분에 연속된 연꽃무늬와 넝쿨무늬를 한 부분만 떼어서 본다면,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갖춤의 장식 무늬와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면, 왕흥사지 사리기의 경우에는 별다른 무늬가 없고, 감은사지 삼층석탑 사리기에는 연꽃무늬나 구슬무늬가 없이 전면에 사천왕상이 새겨져 있다.이처럼 미륵사지 서탑 사리갖춤과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갖춤은 구성 방법, 무늬 등에서는 동일하지만 형태는 다른 면모를 보인다. 미륵사지 서탑 사리갖춤이 6세기 말의 전통이 강한 반면,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갖춤은 7세기의 새로운 경향을 살펴볼 수 있어 미륵사지 서탑 사리갖춤보다는 늦은 의자왕대에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진정환(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 문화재·학술
  • 기고
  • 2013.12.18 23:02

지면으로 만나는 익산의 역사문물 ⑤ 백제 최대 사찰 미륵사

미륵사는 〈삼국유사〉에 따르면 백제 무왕대(600~641년)에 선화공주의 권유로 조성한 사찰이라고 한다. 실제로 1980년부터 1989년까지 발굴조사를 통해 7세기 전반, 즉 백제 무왕대 이 사찰이 조성되었음이 확인되었다. 아울러 발굴에서는 서원, 중원, 동원으로 이루어진 사지의 전모가 밝혀짐으로써 불당, 탑, 회랑이 3개소 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이 허언이 아니었음이 밝혀졌다. 그런데 미륵사 창건에 참여한 무왕과 선화공주 이야기만 부각되어 종종 미륵사는 백제 때에만 법등을 밝힌 사찰로 오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기록과 미륵사터에서 나온 유물들은 미륵사가 조선시대까지도 법등을 꺼뜨리지 않고 이어왔음을 이야기 해준다. 통일신라시대는 삼국시대 백제의 무왕이 창건했던 당시보다 미륵사가 확장되었는데, 남문과 당간지주, 남쪽의 연못이 이때에 조성되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성덕왕 18년(719) 금마군 미륵사가 벼락을 맞았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통일신라시대의 대대적인 중창불사는 이 직후에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통일신라시대 미륵사의 대표적인 유물로는 금동향로를 꼽을 수 있다. 금동향로는 2000년 10월 23일 중원의 뒤편 회랑지 부근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다. 반원형으로 높게 솟은 뚜껑과 납작한 대야 형태의 몸체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몸체는 동물 다리 형태로 된 4개의 다리와 결합되어 있어, 흔히 수각향로라고 부른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수각향로인 미륵사지 금동향로는 다소 번잡하고 섬약했던 중국 당나라 수각향로와 달리 힘찬 동세와 단아함이 돋보인다.백제의 부활을 기치로 내걸었던 후백제 역시 백제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던 미륵사를 금산사와 더불어 국가의 중요한 사찰 가운데 하나로 여겼다. 이는 〈갈양사 혜거국사비〉에 922년 미륵사 개탑을 기념하여 선불장(選佛場)을 개최하였다는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선불장을 개최한 것으로 보아 미륵사 개탑이 대대적인 중창불사였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그러나 아쉽게도 후백제가 통일신라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인지 지금까지의 연구로는 후백제의 유물로 단정지을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고려와 조선시대에도 미륵사의 법등은 꺼지지 않았다. 특히 중국 송의 도자기는 물론 고려청자, 차도구인 다연 등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차 문화가 번성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 초 전국의 사찰을 정리하여 88개의 사찰만 남길 때에도 미륵사는 익주(益州)의 자복사(資福寺)로써 명맥을 유지하였다. 이처럼 천년 가까이 번성했던 미륵사가 언제 폐사되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미륵사에서 만력15년이 새겨진 수키와가 출토된 것으로 보아 임진왜란 직전인 1587년까지만 하더라도 지속적인 중수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그러나 영정조대 문신인 강후진이 쓴 〈와유록〉의 유금마성기(遊金馬城記)에 미륵산 서쪽 기슭 옛 미륵사의 유구가 있다. 7층 석탑이 있는데 높고 크며 동방의 석탑 가운데 가장 크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다.100년 전 벼락을 맞아 반이 허물어졌다. 밭둑 사이에 초석과 석조가 널려있다.는 기록으로 보아 18세기에는 이미 폐사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이러한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미륵사는 임진년과 정유년 왜란 때 참화를 벗어나지 못하고 폐사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진정환(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 문화재·학술
  • 김원용
  • 2013.12.11 23:02

"동학혁명 시발점은 고부봉기"

정읍시가 주최하고 한국민족운동사학회(회장 황민호)가 주관한 동학농민혁명 제119주년 기념 학술대회가 5일 전북과학대 본관 3층 회의실에서 개최됐다. 학술대회에는 김생기 시장과 김승범 시의회의장, 이석문 교육장, 동학농민혁명 기념재단 김대곤 이사장, 전국동학농민혁명유족회 이왕재 회장, 전봉준장군기념사업회 전해철 이사장, (사)갑오농민동학유적보존회 김동길 이사장, 한국민족운동사회 회원, 시민등 150여 명이 참석했다.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한국사 교과서와 문학작품 속의 동학농민혁명을 대주제로 한 기조강연과 3편의 논문이 발표됐다. 기조강연에 나선 유영렬 전 국사편찬위원장은 동학농민혁명의 전개와 성격을 주제로 설명하고 동학농민혁명의 초기 전개과정에 대해서는 고부봉기와 무장기포 그리고 백산대회가 단절이 아닌 연속선상으로 이해할 것을 강조했다.특히 고부봉기는 제1단계로서 전체 동학농민운동의 시발점으로 보고, 무장기포는 2단계인 제1차 혁명전쟁의 시발점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했다. 이어 첫 번째 주제 한국사 교과서에 나타난 동학농민운동 서술의 변화에 대해서는 서인원(동국대학교) 교수, 두 번째 주제 2011 개정 교육과정 한국사의 동학농민운동 서술의 비판적 검토에 대해서는 조성운(경기대학교) 교수가, 세 번째 주제 문학작품에 나타난 동학농민혁명에 대해서는 채길순(명지전문대학교) 교수가 각각 발표했다.

  • 문화재·학술
  • 임장훈
  • 2013.12.06 23:02

지면으로 만나는 익산의 역사문물 ④ 백제의 궁성, 왕궁리 유적

백제의 궁성유적인 왕궁리유적과 관련하여 1965~1966년 5층석탑에 대한 해체조사가 있은 이래 1976~1977년 궁성 일부와 금당지 시굴조사가 이루어진 바 있으며, 1989년부터는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시작되어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유적은 동서로 뻗은 네 개의 석축이 공간을 구획하며, 그 주변은 궁장宮墻(담장)이 둘러져 있는데, 궁성의 크기는 대체로 남북 490m, 동서 240m 내외이다. 내부에서는 폭이 35m에 이르는 대형 건물지, 서북쪽 일대의 공방 관련 건물지, 화장실 등 33기의 다양한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궁성의 북쪽은 정원과 후원으로 활용되었다. 한편 무왕 사후 본격적으로 사찰 관련 건물이 들어섰는데, 5층석탑 일대가 이에 해당한다. 석탑-금당-강당이 남북 중심축선상에 배치되어 있으며, 관궁사(官宮寺), 대관궁사, 왕궁사 등의 명문이 있는 기와가 출토되었다. 특히 왕궁리유적에서는 수막새, 인장와(印章瓦) 등 백제의 수도인 사비에서 출토되는 것과 동일한 기와가 확인되었다. 수부(首府)가 새겨진 기와도 발견되었는데, 수부는 국왕이 거처하고 중앙행정기구가 있는 곳을 의미한다. 왕궁리 궁성의 후원은 네 번째 석축 동쪽 끝부분에 조성되었는데, 이곳에는 연못과 부속 건물이 들어섰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아울러 연못에 물을 공급하기 위한 수조시설이 있으며, 이 밖에도 연못으로 들어오는 물의 양을 조절하기 위한 배수시설과 연못을 통과한 물을 모으는 집수시설이 확인되었다.그리고 왕궁리 궁성 서북편에서는 3곳의 대형 화장실이 확인되었는데, 삼국시대 유적 가운데 최초로 발견된 것이다. 그 중 하나는 길이가 10.8m, 폭이 1.7~1.8m, 깊이가 3.4m에 이를 정도로 상당한 규모를 보인다. 화장실의 내부에는 나무 기둥을 일정한 간격으로 세웠으며, 변이 밖으로 빠져나가거나 지하수로 침투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벽면에 점토를 덧발랐다. 화장실과 석축 배수로는 좁은 수로로 연결되어 있어, 화장실 내부에 일정량의 오수가 차면 수로로 배출되는 구조이다.왕궁리유적에서는 궁성에서 사용되는 도구 등을 제작하기 위한 공방터도 확인되었다. 공방터에서는 연꽃모양의 구슬과 영락 등의 금제품, 동, 유리 조각 및 찌꺼기 이 외에도 이를 만들 때 사용하던 도가니, 숫돌 등이 함께 발견되었다.무왕 사후 조영된 것으로 추정되는 사찰은 궁성 남측 대지 중앙에 자리 잡고 있다. 초기 사찰은 남북 중심축선상에 목탑-금당-강당이 차례로 배치되었다. 이 사찰터에서는 삼국시대 백제의 유물부터 통일신라시대 후기 유물까지 확인되는데, 사찰과 인접한 다른 건물터에서는 통일신라시대의 유물이 거의 출토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한편 이 사찰터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왕궁리 오층석탑의 조성시기에 대해서는 백제, 통일신라, 고려 초 등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었다. 왕궁리 오층석탑 안에 봉안된 사리갖춤 역시 석탑의 조성시기만큼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석탑의 경우, 통일신라의 가구식 단층기단과 백제 석탑의 평평하고 얇은 옥개석이 결합된 것으로 보아, 후백제 견훤에 의해서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그런데 이 석탑의 1층 옥개석 중앙 적심에 뚫린 2개의 네모난 사리공과 기단 내부 방형 심초석에 品품자로 뚫린 3개의 방형 사리공에서 다양한 사리갖춤이 발견되었다. 1층 옥개석의 사리갖춤은 진신사리와 법신사리를 함께 봉안한 유일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 가운데에서도 유리제사리병과 금제사리내함은 기법과 무늬가 2009년 발견된 미륵사지 서탑 사리갖춤과 유사하여 백제 때 제작된 것을 후백제 견훤이 재봉안했을 가능성이 높다. 진정환(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 문화재·학술
  • 기고
  • 2013.12.04 23:02

동초 김연수 선생을 기리며…정읍서 동초제 판소리 기획공연 '판' 열려

제6회 동초제 판소리 기획공연 ‘판’이 지난달 30일 정읍사예술회관에서 성황리에 개최됐다.(사)동초제판소리보존회(이사장 이일주) 주최, 동초제판소리보존회 정읍지부(지부장 손경호) 주관, 정읍시와 정읍예총, 정읍농협(하나로마트)이 후원한 공연에는 김생기 정읍시장과 강광 전 정읍시장, 유남영 정읍농협조합장, 김대중 도의원, 김희선 정읍예총회장, 동초제판소리보존회 회원및 시민등 1000여명이 참석해 축하했다.공연은 △동초소리민요단의 남도민요(성주풀이, 남한산성, 진도아리랑) △김세미, 김미숙, 김선미 명창의 입제창(심청가중 심청이 임당수 빠지는 대목) △이현희 무용가의 무용(동초소리를 위한 흥춤) △김찬미 명창의 판소리(흥보가중 박타는 대목) △서영호 명인의 아쟁산조 △ 천주미, 이슬이, 우혜영 단원의 가야금병창 △ 민요(흥타령, 육자배기) △타악 연희원 아퀴의 난타 등으로 진행되며 관객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손경호 지부장은 “판소리 명창 동초 김연수 선생의 업적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김연수 선생으로 부터 사사한 오정숙 선생이 주축이 되어 결성한 동초제 판소리 보존회의 맥을 이어가고 국악의 저변확대를 위해 기획공연을 개최하고 있다”고 밝혔다.

  • 문화재·학술
  • 임장훈
  • 2013.12.02 23:02

미륵사지 석탑 100년전 모습 복원 시작

국내 현존하는 최고(最古) 최대(最大)의 석탑인 익산 미륵사 석탑이 일제강점기에 덧씌워진 시멘트를 벗어내고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기 위한 복원공사를 시작했다.문화재청과 전북도는 26일 익산시 금마면 미륵사지 현장에서 미륵사지 석탑 복원 착수식을 갖고 탑의 중심이 되는 기둥 받침돌인 심초석(心礎石)을 원래 자리에 옮기며 복원작업의 시작을 알렸다.복원작업의 시작을 알리는 심초석 놓기에는 문화재청 최병선 건축문화재연구실장과 최종덕 문화재청 문화재보존정책국장, 월주 큰스님, 전북도 박성일 행정부지사, 이한수 익산시장, 김대오 익산시의장 등이 참여했고, 문화재청 관계자와 관람객 300여명이 함께했다.북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중요무형문화재 제120호 이의상 석장 지휘 아래 광목천에 매단 무게 1.2톤짜리 방형 심초석은 탑 중심에 조심스럽게 안치됐다. 이로써 국보 11호인 이 석탑은 일제강점기인 1915년 콘크리트로 보수한 이후 1세기 만에 콘크리트를 벗고 새 모습으로 재탄생하게 됐다. 문화재청은 이번 복원을 통해 석탑을 해체 보수 직전 모습에 최대한 가깝게 복원하기로 방침으로 정하고 원래 9층 규모 중 6층(높이 14.6m)까지만 석탑을 복원할 계획이다. 기단에서부터 2층까지는 온전하게 복원하며, 3층 이상은 해체 보수 이전 상태를 최대한 유지한다는 방침이다. 이를 위해 새 석재 사용은 최소화 하고 기존 석부재를 최대한 활용한다. 탑 복원에 쓰이는 석재는 전체 무게가 1800t에 이른다. 문화재청과 불교계는 미륵사 석탑 복원을 추진하면서 지난 2009년 미륵사지 석탑에서 발견된 사리장엄을 원래 있던 자리에 봉안한다는 계획도 수립했다. 당시 발견된 금동부처 진신사리 진품을 비롯해 모조품으로 된 발굴유물과 불교계에서 요구하는 금판발언문 등을 내년 초 봉안한다는 계획이다.월주 큰스님은 백제왕의 간절함이 담긴 사리장엄이 서기639년 미륵사 석탑에 봉안되었고 기적적으로 고귀한 사리장엄과 감동을 주는 사리가 발견됐다며 불자의 생명과도 같은 부처님을 모신 성스러운 탑이 복원되는 고귀한 자리에 섰다고 복원의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한편, 미륵사 석탑은 1998년 구조안전진단 결과를 바탕으로 역사적 가치와 진정성 회복을 위해 해체 보수가 결정된 뒤 2001년 10월31일 해체가 시작돼 2010년 완료됐다.복원의 대장정은 2016년 8월까지 계속되며, 해체에서 발굴, 복원에 이르는 총사업비는 195억원이 들어간다.

  • 문화재·학술
  • 김진만
  • 2013.11.27 23:02

지면으로 만나는 익산의 역사문물 ③ 백제의 또 다른 왕도, 익산

익산지역은 일찍부터 백제의 중요한 지방 거점 가운데 하나였다. 특히 왕궁리 일대는 위덕왕대(554~598) 말기부터 이미 개발이 시작되었는데, 명실상부하게 왕도로서 익산이 자리매김한 것은 무왕대(600~641)이다.여러 설화에서는 무왕이 익산에서 태어났고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하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신증동국여지승람〉 익산군 불우(佛宇)조에 마를 캐던 서동(무왕)이 다섯 개의 금을 얻은 곳이 오금사(五金寺)라 한 것이다. 그러나 〈삼국사기〉는 무왕이 법왕의 아들이라고 전한다. 이러한 설화와 역사의 기록은 모후의 출생지가 익산이었거나 즉위 이전 무왕의 근거지가 익산이었음을 의미한다.한편 〈관세음응험기〉에는 무왕이 익산으로 천도하였다고 기록된 반면, 〈대동여지도〉로 잘 알려진 김정호는 〈대동지지〉에 익산을 백제의 별도(別都)로 기록하였다. 즉 익산은 백제의 새로운 왕도, 또는 별도였다는 것이다.익산이 백제의 새로운 왕도 혹은 별도가 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위덕왕대 백제는 사비도성 바로 앞에 있는 알야산성이 신라군에게 공격당한 적이 있었다. 신라와 본격적인 대결을 준비하던 무왕은 적의 공격으로부터 방어에 유리한 곳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와 더불어 군비를 충당하기 위한 재원이 필요했을 것이다. 거기에 부합된 곳이 바로 익산이었다. 익산지역은 북쪽의 금강과 남쪽의 만경강이 있어서 방어에 유리할 뿐만 아니라 신라로 진격하기에도 용이하였다. 아울러 익산은 너른 평야가 있어 전쟁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그렇다면, 백제의 새로운 왕도 혹은 별도였다는 증거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그 첫 번째 증거는 궁성(宮城)의 존재다. 남북 490m, 동서 240m의 규모를 자랑하는 왕궁리유적은 궁성에 부합하는 유적이다. 아울러 왕궁리유적 북쪽에는 오금산성과 저토성이 있는데, 이 두 산성은 궁성의 방어와 유사시 대피 용도로 계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왕궁리 궁성은 궁장을 설치하고 그 내부에는 경사면을 따라 석축으로 단을 만들어 대지를 조성하였다. 이렇게 조성된 대지에는 부여 왕경지역에서만 발견되는 기와를 쌓아 기단을 조성한 건물과 폭이 35m에 이르는 대형 건물 등을 지었다. 이와 더불어 공방, 대형화장실, 정원과 후원 등의 부대시설이 만들어졌다.두 번째 증거는 왕실 사찰의 존재다. 여기에 부합하는 사찰은 백제의 새로운 궁성에서 불과 1.4km 떨어진 곳에 있었던 제석사이다. 제석사는 목탑-금당-강당이 남북 중심축선상에 배치된 전형적인 백제식 가람배치를 보인다. 또한 동서 회랑의 길이가 100m이고 중문에서 강당까지의 거리가 140m로, 백제 사찰가운데에서는 미륵사지 다음으로 크다. 한편, 〈관세음응험기〉에는 무왕이 제석정사를 지었으며, 639년 벼락으로 7층 목탑, 불당, 회랑이 모두 불탔다.고 기록되어 있어, 무왕 재위 당시 제석사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세 번째 증거는 새로운 통치이념이 제시되었다는 점이다. 법왕대까지만 하더라도 백제에서는계율종과 함께 현세에서 계율을 잘 지켜 미륵보살이 상주하는 도솔천에 태어나기를 바라는미륵상생신앙이 유행하였다. 이러한 불교신앙은 개인적, 귀족적 성격이 강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무왕이 연못 속에서 출현한 미륵삼존을 보고 미륵사를 창건한 것에서 알 수 있듯, 무왕은 미륵하생신앙을 익산시대의 새로운 통치이념으로 제시하였다. 미륵사는 잘 알려진 것처럼 서원, 중원, 동원 등 세 개의 사원을 병립시킨 사찰인데, 이는 석가모니불 입멸 후 56억 7000만년 후에 나타나 세 번의 설법으로 모든 중생을 구원한다는 미륵불의 서원을 사찰의 평면에 구현한 것이다. 한편, 〈미륵하생경〉에는 성불한 미륵불을 영접한 전륜성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전륜성왕이 다스리는 나라는 평화롭고 풍요로운 통일제국이라고 한다.스스로 전륜성왕이 되기를 바랐던 무왕은 그의 원대한 포부인 삼한일통과 평화로운 세상을 실현하겠다는 염원을 담아 미륵사를 창건한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9층탑의 조성을 미루어 볼 때, 미륵사 창건을 통해 불교의 패러다임을 개인불교와 귀족불교에서 호국불교로 전환시키고자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그리고 마지막 증거는 왕릉이다. 익산시 팔봉동에 있는 두 기의 대형 고분은 무왕과 왕비의 무덤으로 알려져있으며, 흔히 쌍릉이라 부른다. 이 고분은 일찍이 1917년에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는데, 무덤의 구조와 출토품이 부여 능산리고분과 같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럼에도 이 고분이 무왕릉과 왕비릉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 자료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능산리의 왕릉과 비교해봐도 대형인 점과 부여지역의 왕릉에서 확인된 바 없는 옥장신구가 출토된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왕릉급일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백제 왕실 인사 가운데 익산과 가장 연관성이 있는 무왕과 그의 왕비릉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이처럼 익산지역은 무왕대에 왕도로 본격적으로 개발되었다. 궁성의 건설, 왕실 사찰의 조영, 그리고 새로운 통치이념을 대내외에 과시하기 위한 기념물 즉 미륵사의 창건을 볼 때, 무왕의 익산 개발은 치밀한 계획 아래 이루어졌다. 즉 금마와 왕궁 일대는 백제의 계획도시이자 또 다른 왕도였다.진정환(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 문화재·학술
  • 기고
  • 2013.11.27 23:02

왕궁리 유적 백제 궁성 후원 전모 확인

사적 제408호 익산 왕궁리 유적에서 백제 궁성의 후원(後苑)전모가 드러났다. 문화재청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소장 배병선)는 26일 익산 왕궁면 왕궁리 유적에 대해 2009년부터 현재까지 발굴조사를 진행한 결과, 백제 후원의 전모를 확인했다고 밝혔다.익산 왕궁리 유적은 백제 무왕(武王600-641) 때 조성된 궁성으로, 1989년부터 백제문화권 유적정비사업의 일환으로 연차적인 발굴이 진행됐다. 그동안 궁성과 관련된 성벽전각정원후원대형화장실공방 터 등이 조사되었고, 인장 기와중국제 자기연화문 수막새를 비롯한 중요 유물 5900여 점이 출토되어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후원 공간의 총면적은 3만9100㎡(전체 면적의 1/3)이며 2009년부터 현재까지 발굴조사를 진행, 그 전모를 확인했다. 후원에는 돌을 반듯하게 다듬어 설치한 석렬 시설, 9부 능선을 따라 구릉을 감싸는 환수구(環水溝), 구릉 정상부에 조성된 건물지 등이 확인되었다. 또 다채로운 괴석(怪石)을 자연스럽게 배치하고 물을 이용하여 경관을 조성하였다. 환수구는 그 자체가 조경시설인 동시에 구릉 정상부에서 내려오는 물을 성 외곽으로 빼내는 수로(水路)의 역할도 담당하였다. 이 후원은 백제 때 궁성의 일부로 조성된 이후, 궁성에서 사찰로 바뀌면서도 거의 원형 그대로 활용되다가, 환수구를 대체하는 곡수로(曲水路)와 구릉 정상부 방형 초석 건물지 등이 추가로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출토유물을 통해 볼 때, 후원의 사용 시기는 후삼국~고려시대까지 이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번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후원의 다채로운 괴석과 물을 통한 경관 조성은 현재까지 이어지는 우리나라 조경(造景)기술의 시원 형태이며, 또 백제 궁원(宮苑) 관련 기록을 뒷받침할 수 있는 유일한 발굴 조사 성과로서 그 의의가 크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앞으로 발굴조사 성과를 바탕으로 융복합적 연구를 통해 백제 조경 기술의 실체를 확인하고 후원을 복원, 정비할 계획이다. 문화재청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28일 11시 익산 왕궁리유적에 대한 2013년도 발굴조사 성과를 설명하고 현장을 공개할 예정이다.

  • 문화재·학술
  • 엄철호
  • 2013.11.27 23:02

익산 왕궁리 유적에서 백제 궁성 후원 전모 확인

사적 제408호 익산 왕궁리 유적에서 백제 궁성(宮城) 후원의 전모가 확인했다. 문화재청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소장 배병선)는 전북 익산 왕궁면 왕궁리 유적에 대해 2009년부터 현재까지 발굴조사를 진행한 결과 백제 후원의 전모를 확인했다고 26일 밝혔다. 익산 왕궁리 유적은 백제 무왕(武王600-641) 때 조성된 궁성이다. 1989년부터백제문화권 유적정비사업의 하나로 연차적인 발굴이 이뤄져 왔다. 이전 조사에서는 궁성과 관련된 성벽, 전각(殿閣), 정원, 후원, 대형화장실, 공방(工房) 터 등이 발굴됐다. 이 과정에서 인장(印章) 기와, 중국제 자기, 연화문 수막새를 비롯한 중요 유물 5천900여 점이 출토되기도 했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2009년부터 현재까지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한 후원 공간의 총 면적은 3만9천100㎡(전체 면적의 3분의 1). 후원에는 돌을 반듯하게 다듬어 설치한 석렬 시설, 9부 능선을 따라 구릉을 감싸는 환수구(環水溝), 구릉 정상부에 조성된 건물지 등이 확인됐다. 또 다채로운 괴석(怪石)을 자연스럽게 배치하고 물을 이용해 경관을 조성했다. 환수구는 그 자체가 조경시설인 동시에 구릉 정상부에서 내려오는 물을 성 외곽으로빼내는 수로(水路)의 역할도 담당했다. 연구소는 "이 후원은 백제 때 궁성의 일부로 조성된 이후 궁성에서 사찰로 바뀌면서도 거의 원형 그대로 활용되다가 환수구를 대체하는 곡수로(曲水路)와 구릉 정상부 방형 초석 건물지 등이 추가로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면서 "출토유물을 통해 볼 때 후원의 사용 시기는 후삼국에서 고려시대까지 이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이어 "이번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후원의 다채로운 괴석과 물을 통한 경관 조성은 현재까지 이어지는 우리나라 조경(造景) 기술의 시원 형태이며, 또 백제 궁원(宮苑) 관련 기록을 뒷받침할 수 있는 유일한 발굴 조사 성과로서 그 의의가 크다"고덧붙였다. 연구소는 오는 28일 오전 11시에 익산 왕궁리 유적에 대한 2013년도 발굴조사 성과를 설명하고 현장을 공개할 예정이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 문화재·학술
  • 연합
  • 2013.11.26 23:02

'미륵사지 사리장엄 특별전' 백제 찬란한 불교문화 유물 한곳에

2009년 연초 온 국민을 깜짝 놀라게 만든, 익산 미륵사지 석탑에서 출토된 국보급 유물인 사리장엄 유물 전부가 일반에 처음 공개된다. 전북도가 문화재연구소익산시와 함께 미륵사지석탑 복원 착수식을 기념해 27일부터 4개월간 익산유물전시관에서 사리장엄 특별전을 갖는다. 사리장엄 출토 직후 한 차례 가졌던 특별전이 일부 유물들로 이루어진 맛보기 전시였던 데 비해 4년만에 다시 열리는 이번 전시에는 전체 9900여점의 출토품 중 석탑에서 수습된 사리와 사리장엄구 9600점이 공개된다. 직물류, 도자(칼), 사리병편 등 보존처리가 완료되지 않거나 상태가 좋지 않은 일부 유물만 제외됐다. 미륵사지 석탑 사리공에서 발견된 유물은 그동안 발굴기관인 문화재연구소에서 보존 처리한 뒤 임시보관해왔다. 당시 석탑 사리공에서 발견된 유물은 금제사리봉영기, 사리기인 금동제사리외호금제사리내호유리사리병, 공양구인 명문이 쓰인 금판 등 9900여점 이상이 확인됐으며, 석탑 하부에서 발견된 유물은 토제 나발(불상의 곱슬머리) 등 200여점 이상이 확인됐다. 이는 국내 석탑 내 발견 유물 중에서 가장 많은 수량이다. 미륵사지 석탑은 현존하는 2009년 석탑 1층 심주석에서 사리장엄이 발견되면서 구체적인 석탑의 건립시기(639년)와 미륵사 창건의 성격과 발원자(백제시대 무왕의 왕후)가 밝혀져 주목을 받았다. 이와 함께 사리를 직접 봉안했던 금제사리내호와 금동제사리외호의 양식 및 제작기법은 7세기 전반의 백제 금속공예 및 미술 양식이 매우 뛰어난 수준으로 발전해 있었음을 보여주는 유물로 평가받는다.노기환 전시담당은 창건 당시 석탑의 사리공 구조 및 유물의 배치 양상을 처음으로 완전하게 확인한 예이자, 석탑 하부 구조의 조사를 통해서 석탑 하부의 사리 공양 의례 관련 유물을 본격적으로 확인했다는 점에서, 고대 백제뿐 아니라 동아시아 탑과 사리장엄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고 설명했다.석탑 기단부에 인조 나발과 손톱을 봉안하는 의례는 중국의 불교 의례를 받아들여 백제화시킨 예로 추정하고 있으며, 미륵사지 석탑에 사리를 봉안한 사리기의 내부를 다양한 종류의 값진 구슬들로 가득 채우는 양식은 이제까지 동아시아의 사리장엄구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백제만의 사리장엄 방식으로 보았다. 특히 사리장엄 일괄품은 그동안 잊혔던 백제와 신라, 중국, 일본 등 고대 동아시아 문화 교류 양상을 새롭게 밝혀주는 귀중한 불교미술품이라는 게 전시관의 설명. 이들 유물들은 화려하면서도 우아하고 섬세한 백제 미술 양식을 잘 보여주는 중요한 작품들로서, 백제 후기 불교 및 왕실 문화의 다양성과 개방성, 국제성을 잘 보여준다는 것. 사리공과 청동합에서 발견된 진주 구슬의 존재는 백제가 중국뿐만 아니라, 동남아와 직접 교류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덧붙였다.노 담당은 미륵사지 석탑 사리공에서 발견된 수많은 유물들에 대한 기초적 연구는 이제 시작되었을 뿐이다며, 앞으로 각 유물들에 대한 개별적인 고찰 및 동시대 신라, 고구려, 중국, 일본과의 관계를 심도 깊게 고찰하여 동아시아 고대사의 새로운 이해가 이 유물들을 통해서 이뤄질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 문화재·학술
  • 김원용
  • 2013.11.26 23:02

다시 태어나는 익산 미륵사지 석탑

국내 최고(最古) 최대(最大)의 석탑인 전북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11호)이 본래 모습으로 복원된다.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와 전북도는 26일 오후 1시 익산시 금마면 미륵사지에서 '미륵사지 석탑 복원 착수식'을 연다. 착수식은 미륵사지 석탑이 일제강점기인 1915년 콘크리트 보수 이후 98년 만에 '제모습 찾기'의 시작을 알리는 행사다. 미륵사지 석탑은 1915년께 서쪽면 전체와 남쪽 북쪽면 일부가 무너져 내렸고 당시 일제가 추가 붕괴를 막기 위해 시멘트를 덧씌웠다. 원래 9층이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무너진 후엔 6층까지만 남았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은 현존하는 2009년 석탑 1층 심주석에서 사리장엄(舍利莊嚴)이 발견되면서 구체적인 석탑의 건립시기(639년)와 미륵사 창건의 성격과 발원자가밝혀졌다. 국립문화재연구소와 전북도는 2010년까지 석탑의 해체와 발굴 조사를 완료했고 복원공사는 2016년까지 마무리할 계획이다. 착수식은 전통무용과 무왕행차 재현 공연을 시작으로 미륵사지 석탑 보수정비사업 계획보고와 심초석 놓기 시연 등의 순으로 진행된다. 또 미륵사지유물전시관에서는 국립문화재연구소, 전북도, 익산시가 공동으로 개최하는 '미륵사지 석탑 사리장엄 특별전' 개막식이 열린다. 특별전에선 2009년 발견된 사리장엄을 비롯해 기단부 발굴 조사에서 출토된 진단 유물이 선보인다. 금제봉영기, 금제사리내외호, 은제관식 등 사리장엄과 진단구 9천900여점이 전시된다. 특별전은 27일부터 내년 3월 30일까지 이어진다.

  • 문화재·학술
  • 연합
  • 2013.11.21 23:02

지면으로 만나는 익산의 역사문물 ② 백제의 지방 거점, 익산

익산지역에 대한 백제의 직접 통치가 이루어진 4세기 이후 이 지역에는 마한의 전통을 고수하는 집단이 있었다. 이는 마한 전통의 분구묘에서 5세기의 굽다리토기(高杯)가 다량으로 발견된 간촌리 분구묘를 통해 추론해볼 수 있다. 묵동유적 역시 백제계 분묘가 익산지역에 집중적으로 조영되는 5세기 중엽 이후에 해당하지만, 마한 토착문화의 특징을 보여준다. 묵동유적의 분묘는 마한 전통의 분구묘지만, 짧은목항아리, 곧은목항아리, 세발그릇 등 백제의 토기가 출토되었다.이처럼 마한의 전통을 유지하려는 집단이 있었는가 하면, 백제의 귀족으로 편입된 집단도 있었다. 이를 뒷받침하는 유적이 바로 웅포리 고분과 입점리 고분이다.웅포리 고분은 구덩식돌덧널무덤, 앞트기식돌덧널무덤, 굴식돌방무덤 등이 혼재되어 있다. 구덩식돌덧널무덤과 앞트기식돌덧널무덤에서는 곧은목항아리, 굽다리토기, 뚜껑접시, 쇠도끼, 쇠낫, 칼 등이 공통적으로 확인되었다. 그러나 굴식돌방무덤에서는 앞서 두 유형의 무덤과는 달리 쇠도끼 등의 철기가 보이지 않는다.쇠도끼, 쇠낫, 칼이 세트를 이뤄 부장된 널무덤이 마한 토착세력의 전통이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구덩식돌덧널무덤과 앞트기식돌덧널무덤에 묻힌 주인공들은 마한의 전통을 유지하면서도 백제의 문화를 수용한 사람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백제 중앙 귀족의 묘제라 할 수 있는 굴식돌방무덤에 묻힌 주인공들은 완전히 백제의 귀족체계에 편입된 이들로 여겨진다.입점리 고분은 굴식돌방무덤, 앞트기식돌방무덤, 구덩식돌덧널무덤, 독널무덤 등 21기가 확인되었다. 이 가운데 백제의 고분은 19기인데, 86-1호분을 제외한 나머지 무덤에서는 토기, 꺽쇠, 쇠못 등 일부만 남아 있었을 뿐 이미 파괴되거나 도굴된 상태였다.온전하게 남아있던 86-1호분에서는 금동관을 비롯하여 금동신발, 귀걸이, 재갈등자행엽 등의 마구류와 청자 등이 출토되었다. 금동관이 출토된 1호분의 조성시기에 대해서는 한성도읍기 말기인 5세기 중엽, 웅진도읍기 초기인 5세기 후반, 무령왕릉과 비슷한 시기 또는 이보다 늦은 5세기 말~6세기 초 등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궁륭형의 천장 형태와 마구 등으로 볼 때 웅진시기 초기에 해당하는 5세기 4/4분기일 가능성이 높다.한편 금동관을 착장한 입점리 고분의 주인공은 백제의 작호제(爵號制)에 따라 왕 또는 후라고 불렸을 가능성이 있다. 아울러 〈양서〉(梁書) 백제전에 언급되어 있는 22담로 가운데 하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익산지역에서 왕 또는 후라고 불리며 백제 중앙의 고위 귀족에 편입될 수 있었던 집단은 한때 마한연맹체의 맹주를 자임하였던 건마국의 지배층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그렇다면, 웅진도읍기 금강 하구를 중심으로 백제 중앙과 관련이 깊은 무덤이 집중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금강은 웅진에서 서해로 가는 가장 빠른 교통로였다. 그러나 이 강은 양날의 검처럼 전란시에는 적군의 이동로가 되었다. 이 때문에 금강유역에 대한 방비는 백제에게 매우 중요해졌다. 백제의 입장에서는 금강 하구에 위치한 웅포리와 입점리 지역의 옛 마한세력에 대한 회유를 통해 친백제 세력으로 둘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한 노력의 산물이 웅포리 고분군의 굴식돌방무덤이고, 입점리 고분에서 출토된 금동관과 금동신발, 중국제 청자라고 할 수 있다.진정환(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 문화재·학술
  • 김원용
  • 2013.11.20 23:02

정읍 역사·문화 연구 더 깊어진다

정읍의 역사와 문화를 재정립하는 움직임이 가시적인 성과로 나타나고 있다. 정읍의 민간 향토사 연구모임인 '정읍학연구회'가 오는 22일 정읍시 시기3동 청소년수련관 YMCA 세미나실에서 창립 기념식과 함께 '정읍 지역문화 연구의 주요 과제'라는 주제로 첫 학술대회를 연다. 이날 행사는 (사)민족문화연구소 주최, 정읍문화원 주관, 정읍시청 후원으로 이뤄졌다. 정읍학 연구회는 그동안 전주·김제·고창·부안 등에서는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다양한 연구를 통해 지역적 자긍심을 일깨우는데 반해 정읍은 상대적으로 연구 성과가 미진했다는 자성의 목소리에서 출범했다. 정읍의 지역사를 보다 구체적이고 깊이있는 연구를 지향하며 점진적으로 정읍학 총서를 만들 계획이다. 출범을 준비한 전북대 김익두 교수(국문과)는 "정읍 지역은 인근 여느 지역보다 사상적 측면에서 뛰어난 자원을 간직하고 있지만 특색 있는 문화관광 자원이 기억되는 고장으로는 조명 받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고 배경을 설명하며 "지방자치시대 18년째 지역문화에 대한 지역민의 관심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지역의 고대사와 근·현대사를 아우르는 민간 차원의 향토사 연구모임이다"고 소개했다.이어 김 교수는 "인근 지역의 향토사 연구모임에 비해 다소 출범이 늦은 만큼 연중 전반기와 후반기 학술세미나를 거쳐 향토사 연구 사료를 내놓겠다"고 밝혔다.정읍문화원 정창환 원장은 "정읍의 역사·문화적 자산이 지역민의 자긍심으로 키워지기 위해서는 각계각층에서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면서 "지역민과 출향인, 학계가 힘을 모아야 한다"고 말했다.

  • 문화재·학술
  • 이세명
  • 2013.11.19 23:02

남원서 12세기 초 추정 석불입상 발견

남원에서 12세기 초인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석불입상이 발견됐다.남원문화원(원장 이병채)은 910일 남원향토대학과 전국 석불문화연구회 관계자 등 40여명과 함께 남원지역의 석불과 마애불을 답사하던 중 그동안 학계에 알려지지 않은 석불입상 1구를 발견했다고 12일 밝혔다.남원시 송동면 사촌리 원통산 중턱의 옛 원통암 자리에서 발견된 이 석불은 불신과 광배가 하나의 돌로 이뤄져 있다.석불의 전체 높이는 215cm, 광배 폭은 133cm, 불신 높이는 160cm, 불신 폭은 120cm 규모다. 눈과 코, 입은 마모가 심해 정확한 형태를 확인하기 어렵고 목은 굵은 편이다.광배(光背머리나 등 뒤 광명을 표현한 것)는 곡선을 그리며 안쪽이 깊게 패인 형태로 불신이 약 20cm 앞으로 튀어나와 있다. 이 양식은 전북도 지정문화재 제47호인 낙동리 석조여래입상과 그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당시 남원지역 석불의 흐름을 파악하는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이병채 원장은 "그동안 남원지역의 석불 및 마애불을 조사한 결과, 지정문화재 17구 외에 20여 구의 석불과 마애불은 정확한 조사가 이뤄지지 않아 그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며 "이번에 발견된 송동면 사촌리 석불을 비롯해 사석리 마애불, 수지면 포함마을의 둑적골석불입상 등 비지정 석불에 대한 면밀한 조사를 통해 문화재 지정을 서둘러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 문화재·학술
  • 홍성오
  • 2013.11.13 23:02

지면으로 만나는 익산의 역사문물 ① 마한의 중심, 익산

익산은 살아있는 역사교과서다. '익산역사유적지구'는 경주부여공주와 함께 4대 고도(古都)보존지구로 지정됐으며, 세계문화유산등재를 위한 각계의 움직임도 활발하다. 이 같은 분위기 속에 국립전주박물관(관장 유병하)이 익산시전북일보KBS전주방송총국국립문화재연구소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와 공동으로 지난달 28일부터 익산에 산재한 문화유산들을 종합적으로 보여주는'전북의 역사문물전, 익산'기획전을 열고 있다(2014년 2월19일까지). 본보는 익산의 역사유물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문화적 자긍심을 높일 수 있도록 연재 기획물을 마련했다.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의 집필로 10차례에 걸쳐 진행될 이 기획은 익산의 역사유물의 가치를 다시 살펴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역사유물에 대한 상식을 넓히는 기회가 될 것이다.〈삼국지〉 위서 동이전과〈후한서〉 동이열전(東夷列傳) 한조(韓條)에 따르면, 고조선의 준왕은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긴 후 한지(韓地)지에 와서 한왕(韓王)을 자청하였다. 고조선 준왕이 정착한 곳에 대해서 〈제왕운기〉, 〈고려사〉 지리지, 〈세종실록〉 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은 금마(金馬)로 기록하고 있다.그렇다면 '고조선 왕의 남천'은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을까?익산지역은 청동기시대부터 중국, 한반도 서북부지역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곳이라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만약 전쟁에서 패한 고조선의 준왕이 바다를 건너 남쪽으로 내려간다면, 우호적인 교류가 있었던 익산지역으로 가는 것이 당연하다.이와 관련된 고고학적 증거 가운데 하나가 왕궁면 평장리에서 나온 전한경(前漢鏡)이다. 평장리유적에서는 전한경과 함께 한국식 동검 2점, 청동창과 청동꺽창 각 1점 등이 확인되었다. 초엽문과 반리문이 새겨진 전한경은 대체로 기원전 3세기 말~2세기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고조선 왕이 위만에게 쫓겨 남천한 시기로 추정되는 기원전 194년~180년 사이와 일치한다.이와 더불어 결정적 증거로 철기를 들 수 있다. 고조선은 한반도 남부에 철기가 유입되기 전에 이미 중국 연나라의 영향을 받아 철기를 사용하고 있었다. 한반도 남부에 철기가 등장한 시기는 대체로 기원전 2세기 무렵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고조선 준왕의 남천 직후와 맞물려 있다.익산시 춘포면 신동리의 널무덤에서 덧띠토기, 한국식 동검과 함께 도끼, 새기개가 출토되었다. 특히 신동리 널무덤의 형식은 청동기시대 익산지역에서 유행하던 무덤 형식과도 다르며, 삼한시대 유행했던 분구묘와도 연결되지 않아 외래 집단이 이주했음을 보여주는 유력한 증거 가운데 하나이다.그렇다면, 익산에 정착한 고조선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후한서〉 한전(韓傳)에 따르면, '준왕 후손이 절멸하자, 마한인이 다시 자립하였다.'고 한다. 이는 곧 외래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고조선 준왕의 후손을 대신하여 토착세력이었던 마한인들이 득세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익산지역에서 고조선 세력을 대체한 마한인들이 세운 국가는 건마국(乾馬國)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익산지역 마한인의 생활 흔적은 장신리유적과 송학동유적에서 살펴볼 수 있다. 2007년에 발굴된 장신리유적은 해발 9~12m의 완만한 구릉의 사면에 조성된 마을유적으로, 총 27기의 집터가 확인되었다. 여기에서는 다양한 토기와 함께 불에 탄 쌀 등의 곡물이 발견되어 마한인들의 식생활의 일면을 살펴볼 수 있다.송학동유적에서는 다른 유적에 비해 다양한 생산도구가 발견되어, 마한인들의 생산기술을 가늠해볼 수 있다. 송학동유적에서 나온 구슬 거푸집은 작은 구멍이 많이 뚫린 형태이다. 이러한 형태의 거푸집은 열에 녹인 용액을 틀에 부어 작은 구슬을 한 번에 많이 만들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또 다른 생산 도구인 받침모루는 토기 벽을 두드리는 도구로, 토기 벽의 밀도를 높여 얇으면서도 강도가 높은 토기를 만들수 있었으며, 받침모루에 새겨진 무늬에 따라 토기 표면에 두드림무늬가 생기는 예술적 효과를 줄 수 있었다.익산지역의 마한인들은 고조선 세력과는 달리 무덤 주위에 고랑을 판 분구묘를 축조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영등동 분구묘와 율촌리 분구묘인데, 낮은 분구와 주구를 가진 저분구묘인 것이 특징이다. 이와 더불어 간촌리유적의 널무덤에서는 풍요를 가져다주는 곡령신으로 마한인들이 숭배하던 새를 형상화한 토기가 발견되기도 하였다.건마국은 처음에는 고조선 준왕 세력을 대체하여 마한연맹의 맹주를 자처하였으나, 점차 그 지위를 목지국에 내줘야만 했다. 또한 백제가 성장함에 따라, 영산강 유역의 마한연맹체처럼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지 못하고 점차 백제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되었다.진정환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 문화재·학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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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11.13 23:02

"신재효 자료 총서 발간 의미 있는 일"

고창군은 동리 신재효 선생의 자료 총서 발간사업의 일환으로 지난 9일부터 이틀간 제9회 고창판소리학술발표회를 군립도서관에서 개최했다. 동리 신재효(1812~1884) 선생은 판소리 후원가, 지도자, 이론가, 사설 집대성자로서 판소리사에 지대한 업적을 남겼다. 역사적으로 음악에 대한 뛰어난 감식안과 소양을 갖추고 음악활동을 후원했던 지도자와 후원가가 많이 있었지만, 동리 신재효와 같이 판소리를 중심으로 문화공동체를 조성하고 판소리 이론을 정립하고 가단을 이끌고 지도했던 사람은 일찍이 없었다는 평가다. 판소리는 우리 전통성악예술의 정수로서 지속될 것이며, 이러한 판소리에 그 이론의 기초를 마련하고, 사설을 집대성했으며, 판소리 발전방향을 열어나간 동리 신재효 선생의 활동을 일람할 수 있는 자료총서를 발간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이번 학술발표회 기획주제는 신재효 자료총서 발간의 과제와 전망, 판소리 자료의 재조명, 판소리 역사의 투시 Ⅲ(초기 판소리의 모습)이다. 9일 열린 제1부는 신재효와 판소리 연구 자료에 대한 몇 가지 단상(이훈상동아대학교), 신재효 자료의 현황과 총서 발간 방향(이영일고창판소리박물관)에 대해 발표했다. 제2부는 초기 심청가의 모습(서유경목원대학교)과 적벽가 원형과 형성 재검토(김상훈인하대)에 대한 발표와 토론, 10일에는 춘향전 노정기의 변모양상 고찰(이지영안동대학교), 생활양식 변화에 따른 독공의 변모양상 고찰(김정태전북도립국악원), 판소리 도제집단의 성격 변화에 관한 연구(백은철전북대학교)에 대한 발표 및 토론이 이어졌다.관계자는 "그동안 산재되어 있는 동리 신재효 선생의 사설과 자료에 대한 영인본 및 총서 발간에 대한 요구가 있어 왔으나, 지금까지 시도되지 못하고 있던 차에 이번 학술발표회를 통해 자료총서 발간의 과제와 전망이라는 주제를 집중적으로 검토하게 된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며 "초기 판소리의 모습을 고찰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대표적인 공연예술의 옛 모습과 그 발전과정을 조명하는 뜻 깊은 시간이 됐다"고 밝혔다.

  • 문화재·학술
  • 김성규
  • 2013.11.12 23:02

"동고산성, 후백제 유적으로 보존을" 백제·조선 잇는 가교역할…정밀 지표조사 등 필요

전주 동고산성의 원형을 보존해 전주의 역사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한국고대사학회 주관으로 지난 8일 국립무형유산원에서 열린 '후백제 왕도 전주의 재조명'학술대회에서 정재윤 공주대 교수는 "동고산성은 후백제 도성 유적으로서 보존할 만한 가치가 있고, 후백제 도성 유적 복원의 시발점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또 동고산성은 백제와 조선시대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함으로써 천년 전주의 위상을 확립하는 데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했다.이를 위해 무엇보다 종합정비계획을 세워 탐방로와 시설을 정비하고, 후백제 도성 유적이 갖는 가치를 시민과 공유할 필요가 있다는 게 정 교수의 지적이다. 이와함께 익산의 고도육성사업과도 연계해 백제-후백제를 잇는 벨트라인을 형성한다면 상대적으로 낙후된 백제권 개발에 탄력을 받을 수 있고, 전주의 다른 문화산업과도 연계해 문화적 다양성과 깊이 그리고 상승 효과를 가져올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시민들의 관심을 유도하기 위해서는 스토리텔링이 필요하며, 동고산성의 주건물지와 성황사를 연결시켜 전주 시민들을 지켜주는 영험한 산이라는 믿음을 널리 확산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서정석 공주대 교수는 "계속된 조사로 동고산성 성벽의 둘레나 축성법, 성내 시설물 현황, 출토유물의 특징 등이 어느 정도 밝혀진 상태이기는 하지만 발굴조사한 면적이 극히 일부에 불과한 만큼 전체에 대한 정밀 지표조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성정용 충북대 교수는 "1000년전 견훤이 도읍하였던 전주 고도의 실체가 향후 발굴조사를 통해 좀 더 명확하게 밝혀지고, 이를 바탕으로 정비 복원이 이루어져 전주의 옛 향기가 더욱 물씨나는 도시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이날 학술대회는 노중국 계명대 교수가 '견훤왕은 왜 전주를 왕도로 정했는가'주제로 기조강연을 했으며, 강원종 전주문화연구원 실장의 '전주 동고산성 발굴 성과와 의의', 김주성 전주교대 교수의 '후백제의 궁궐 위치와 도성규모', 신호철 충북대 교수의 '후백제의 역사적 성격'에 대한 발표로 진행됐다.학술대회에서는 또 곽장근 교수가 토론자로 나서 지난 7일 발표한 후백제 궁궐 위치를 전주 인봉리 일대라는 새로운 '설'을 제시했다.(8일자 1면).

  • 문화재·학술
  • 김원용
  • 2013.11.11 23:02
문화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