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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12일과 19일 조선왕조 의례 재현행사가 전주에 잇따라 열린다.전주시는 오는 12일 오후 2시 30분에 '태조어진 봉안행렬'과 19일 오후 2시에 '조선왕조실록 포쇄'재현 행사가 열린다고 밝혔다.태조어진 봉안행렬은 전주시청 앞 노송광장에서 기념식 및 영접례를 진행한 후 600여명의 행렬인원과 신연(神輦, 어진을 넣은 가마), 향정자(香亭子) 등의 가마와 함께 팔달로를 거쳐 경기전까지 1시간 동안 진행된다.봉안행렬 후에는 태조어진을 경기전 정전에 봉안하는 의식과 태조어진의 경기전 봉안을 기념하기 위한 봉안례가 조선시대 예법에 따라 경기전 정전에서 거행될 예정이다.이어 19일 열리는 조선왕조실록 포쇄 재현행사는 오목대에서 태조로를 거쳐 경기전 전주사고까지 사관행렬을 진행한 후 전주부윤 및 사고참봉의 영접례를 행한 후 전주사고에서 진행된다.포쇄는 사고에 보관된 조선왕조실록의 습기를 제거하여 충해를 막을 수 있도록 책을 말리는 행위로, 조선시대 왕의 명령에 따라 3년에 1차례 진행됐다. 왕이 명령에 의해 중앙에서 사관을 파견하여 지방의 인원을 동원해 수행했다.조선왕조실록 포쇄 재현행사는 전국에서 처음으로 시도하는 행사로서 그동안 역사기록에서만 접할 수 있던 광경을 관광객에게 보여주는 것이어서 기대가 클 것으로 예상된다.전주시는 이번 행사를 위해 지난 5월부터 전문가에 의해 봉안행렬 관련 기록을 수집정리해 전문가의 고증을 통해 행사계획을 마련하는 등 탄탄한 역사고증을 기반으로 조선시대 원형에 가깝도록 진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정부가 긴축 재정에 들어가면서 내년 2주갑(120주년)을 맞이하는 동학농민혁명 기념행사의 의미가 퇴색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기획재정부가 내년 예산안을 편성하면서 신규 사업과 행사비 등을 삭감한다는 원칙에 따라 동학혁명기념재단의 요구액보다 행사예산을 대폭 줄였기 때문이다. 다만 '동학농민혁명 기념공원 조성사업'은 신규 사업임에도 실시설계 용역비 15억원이 반영되면서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 6일 전북도에 따르면 동학농민혁명 기념재단은 내년 2주갑을 맞아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을 계승하는 대규모 기념행사를 기획, 문화체육관광부에 국비 16억원을 요구했다. 그러나 문체부는 7억원으로 수정된 예산안을 기재부에 올렸고, 다시 기재부는 6억원이 줄어든 1억원만 반영한 정부안을 확정했다. 기재부는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시대적 의미는 공감하지만 내년도 예산안을 편성하는 데 있어 신규 사업과 행사비 축소는 불가피했다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의 기념행사 관련 예산안이 대폭 축소된 가운데 이제 공은 국회로 넘어갔다. 하지만 국회에서도 딱히 증액될 명분을 찾지 못해 지역 정가의 고심이 깊어졌다. 김윤덕 국회의원은 "세수가 부족한 상황에서 행사 관련 예산을 증액하기는 쉽지 않다"면서 "하지만 여러 관계자들과 상의해 동학농민혁명의 의미가 퇴색되지 않도록 예산 증액 등 모든 가능성에 대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김대곤 동학농민혁명 기념재단 이사장은 "정부와 다소간의 시각 차이는 있으나 동학에서 2주갑의 의미는 매우 깊다"면서 "세수가 부족한 상황인 점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을 크게 알릴 수 있는 최소한의 기회는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동학농민혁명 기념공원 조성사업은 다행히 순항 중이다. 정부는 오는 2017년까지 국비 388억원을 투입해 정읍시 덕천면 33만5826㎡ 부지에 공동묘역, 위령탑, 추모공간, 연구소 등을 건립한다는 계획으로 우선 내년 15억원의 실시설계용역 예산안을 확정했다. 비록 기념재단과 도내 정치권이 요구한 총사업비 648억원보다는 많이 줄어들었지만, 이는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사업계획 적정성 검토가 나오기 전 상황이다. 예비타당성조사 면제를 받은 이 사업은 지난해부터 KDI의 사업계획 적정성 검토를 받아왔다. 지난달 적정성 검토를 마친 뒤 아직 공식 발표는 하지 않았으나, 중간 검토 결과와 이번 정부안이 거의 비슷한 점으로 미뤄봤을 때 이번 사업은 오는 2017년에 마무리 될 것으로 예상된다. 전북도 관계자는 "기념공원 부지는 대부분 도시유지로 매입비는 거의 들어가지 않는 가운데 오는 2015년부터 부지조성 공사와 함께 위령탑, 추모공간 등 건축공사가 시작될 예정이다"며 "이와 함께 공동묘역 등 조경공사는 오는 2016년에 들어가는 등 순차적으로 사업이 진행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지공예는 중국에서도 통했다. 중국 강소성 남경시에 있는 남경민속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한국한지문화공예전'에 중국 관람객들이 높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지난달 29일 중국 남경민속박물관에서 개막한 한지공예전은 사단법인 한지문화진흥원(이사장 김혜미자)이 중국과의 문화예술교류 차원에서 기획됐다. 전시회에는 한지문화진흥원 소속 한지공예 작가 50여명이 전통한지공예작품과 한지인형, 한지로 만든 원앙, 핸드백과 한지문화상품 등 50여점을 출품했다. 전시 현장을 찾은 관람객들은 한지를 갖고 항낭을 만드는 체험을 하는 등 한지공예에 많은 관심을 보였으며, 특히'심경'이라고 쓰인 한지수의에 중국 공예작가들과 관람객들의 눈길이 쏠렸다고 전시회 참가자들이 전했다.한지문화진흥원 관계자는 10일까지 이어지는 이번 전시가 중국 국경절 연휴 등에 힘입어 100만 관람객이 예상된다고 말했다.한지문화진흥원은 이번 전시를 계기로 남경민속박물관과 교류전을 갖기로 협약을 맺었다. 협약식에는 한지문화진흥원 김혜미자 이사장과 박성만(동양한지 대표)백철희(고감한지&페이퍼 대표) 이사, 윤영선설순남 한지공예 작가가 참석했다.
'삼국사기'권 제50 열전 제10 견훤전에 견훤의 인물평이 기술되어 있다. 견훤은 누구인가. 그는 신라인이면서도 신라가 당나라인 외세를 끌여들여 나당연합작전으로 백제를 멸망시킨 것에 매우 분개할 정도였고, 그는 신라의 변방을 지키는 방수군의 비장이면서 부패하고 타락한 신라 정부에 강한 적개심을 품고 경주에 쳐들어가 경애왕을 처형하고 경순왕을 옹립할 정도의 권세를 가진 정의로운 인물이었다. 경애왕의 처형은 흉년 기근과 도적떼 발호, 전염병이 만연하는 난리통에 백성을 돌보지 않는다게 직접적 요인이었다. 그리고 지방호족들을 끌어안는 포용력과 용맹스러운 기풍과 군사들의 선봉에 서는 리더쉽을 갖고 있었다. 견훤은 매우 정의로운 장수였고 민족 자주의 국가의식이 강한 지도자였다. 견훤은 백제가 익산 금마에서 일어났다는 일통삼한의식(一統三韓意識)을 갖고 있었으며, 백제의 국가계승 의식이 매우 투철하였다. 그가 892년에 무진주(현 광주)에서 지방호족들을 규합하여 국가창업의 기반을 조성하면서도 스스로 감히 왕이라 칭하지 못할 정도로 겸손함을 보여준 인물이었다. 견훤은 전주를 매우 좋아하였다. 그가 광주에서 후백제의 창업기반을 조성하면서도 전주에 도읍을 정할 구상을 하고 있었다. 견훤은 전주사람들에 대한 믿음이 강하였다. '삼국사기'열전에 "견훤이 서쪽을 순행하다가 전주에 이르렀는데, 전주고을 사람들이 열렬하게 맞이하자 견훤은 인심을 얻어 기뻐하였다(萱西巡至完山州 州民迎勞 萱喜得人心)는 내용에서 전주인들에 대한 호감을 드러냈다. 또한 백제 의자왕의 오랜 울분을 씻어주기 위해서 전주에 도읍하겠다(今矛敢立都於完山)고 천명하였으며, 마침내 900년에 전주에 후백제의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왕이라 호칭하였다. 그리고 국가 운영에 필요한 관제를 설정하고 사무를 분담하는 정부 조직도 갖추었다. 후백제 국호도 백제의 국가계승의식을 선언하는 의미가 담겨있는 것이다. 견훤은 왜 광주에 도읍하지 못하고 전주에 도읍할 정도(定都) 구상을 하였을까?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는 전남지역 호족들에게서는 백제의 귀속의식이 매우 낮다는 판단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영산강 유역의 해상교통로를 장악하지 못한 것이 직접적 요인이었을 것이다. 그런점에서 전주천도가 아니라 전주정도가 맞다. 그렇다면 왜 견훤이 전주에 도읍을 정하였을까. 첫째, 전주가 백제권의 중심이라는 인식. 둘째, 전북지역 백제인들이 앞장서서 백제부흥전쟁을 치른 호국의식을 높이 평가. 셋째는 만경강 교통로의 확보를 들 수 있다. 견훤은 국가를 세운 후에 상국에 사신을 보내 국가의 외교적 승인을 받는 일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데, 대중국 해상교통로인 영산강 교통로가 왕건의 측근 세력들에게 차단당하였기 때문에 광주에 도읍을 정할 수가 없었다. 견훤에게 영산강 교통로의 차단은 숨통막히는 일이었기에 전주에 정도한 이후에도 줄곧 영산강 교통로를 장악하고자 몇차례 공략하지만 끝내 실패하고 만다. 오로지 영산강 교통로의 장악은 대중국과 대외교류를 위한 해상교통 확보가 목적이었다. 견훤은 전주에 도읍을 정한 즉위년에 중국 양자강 유역에 위치한 오월국(吳越國)에 사신을 보내고 검교태보(檢校太保)라는 벼슬을 제수받는다. 이후 줄곧 오월국과 외교관계를 유지한다. 후백제가 중국의 오대십국가운데 유독 오월국과 외교관계를 집중한 것은 백제의 국가계승에 집착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가 중국의 남조문화를 황해남부 사단항로를 통해서 받아들였는데, 전주에서 만경강 교통로를 이용하여 사단항로를 따라 중국으로 건너갔고, 오월국의 사신도 황해남부 사단항로와 만경강 교통로를 이용하여 후백제 수도 전주로 들어왔다. 만경강 교통로는 전주 덕진에서 나룻배로 출항을 하면 회포-춘포-목천포-불포-심포-군산도-위도-죽도-소혹산도를 경유하여 중국 절강성 영파 정해현 보타산으로 건너가는 바닷길이었으며, 중국에서도 정해현 보타산에서 같은 사단항로를 따라 전주로 들어오는 바닷길이 열려 있었다. 오월국 수도 항주에서 후백제 수도 전주까지 건너오는데 1주일이면 족했다. 921년 9산선문 가운데 동리산문의 동진대사 경보스님이 중국에서 배를 타고 전주부 임피군으로 들어왔다는 기록이 있다. 경보스님이 당도한 곳은 군산시 임피면 신창진나루터였을 것이다. 후백제는 군산만, 변산반도의 황해남부 사단항로를 장악하고 있었고, 오월국도 중국 양자강 유역과 사단항로의 바닷길을 장악하고 있었기에 후백제와 오월국은 해상교통이 매우 용이하였다. 이 사단항로의 바닷길을 통해서 불교문화와 해양신앙과 성황신앙, 도자문화 등 다양한 문물교류가 양국 사이에 이뤄졌다. 전주가 도시 면모를 갖추고 품격있는 문화능력을 갖기 시작한 것도 후백제 도읍 시기부터다. 왕도의 전통은 고려시대 내내 지속적으로 유지되었으며, 이러한 왕도의 기운으로 조선왕조의 본향이 된 것이다.
익산의 불교문화를 중심으로 그 특징과 가치를 미술사적 측면에서 규명해보는 뜻깊은 자리가 마련됐다.27일 원광대에서는 '639년 금마저: 고대익산의 미술사적 고찰'을 주제로 익산역사유적지구 세계유산등재 추진 국제학술회의가 개최됐다.익산시와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사)한국미술사학회 등이 공동 주최한 이날 학술회의는 백제시대 금마저(金馬渚)로 불린 익산의 백제왕도 유적에 대한 미술사적 고찰을 통해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 중인 익산역사유적지구의 역사·문화적 정체성과 그 가치를 규명하기 위해 마련됐다.이날 학술회의에는 중국 청화대 리징지에 교수, 대만 고궁박물원 리위민 박사, 일본 대정대 가지마 마사루 교수를 비롯한 국내외 석학 10여명의 주제발표에 이어 열띤 토론이 이어졌다.먼저 주제발표에 나선 원광대 이다운 교수는 "익산은 무왕의 새로운 신도경영과 왕권강화 일환으로 대사(大寺)를 창건한 곳이며, 이러한 정책은 왜에 영향을 주었다"면서 "익산의 문화유산은 동북아시아적 관점에서 그 가치를 재조명해야 한다"고 말했다.배병선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은 "익산을 중심으로 한 백제의 건축기술은 삼국 가운데 가장 뛰어난 수준이었으며 신라와 왜 등 주변국까지 기술자의 파견요청이 끊이지 않았다"며 당시 익산의 건축기술이 뛰어났음을 밝혔다. 또한 서강대 강희정 교수는 "익산의 불교유적은 백제의 국운이 다하기 직전, 가장 찬란하고 아름답게 피어난 문화의 불꽃이다"고 강조했다.
'제6회 창암이삼만대한민국휘호대회및 창암학술대회'가 오는 28일 오후 1시부터 정읍고등학교 대강당(수덕관)에서 개최된다.창암이삼만서예술문화진흥회가 주최하는 대회는 추사 김정희 선생과 쌍벽을 이루고 시공을 초월하는 보편성과 영원성에 뿌리내린 조선의 대명필 창암 이삼만 선생을 기념하며 신예작가의 창작의욕을 고취시키기 위해 마련됐다. 휘호분야는 한글·한문·문인화·창암체 4개 분야로 국적이나 협회 소속 관계없이 누구나 출품할 수 있다.참가자는 25일까지 원서를 제출해야 하며 결과는 당일 현장에서 공개 심사 후에 발표된다.한편 창암학술대회는 오는 11월 2일정읍시 정읍차문화센터에서 열린다.
전주문화재단은 전주 기록문화의 중심인 완판본문화의 역사적 의미를 재조명하고 대중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완판본 삼매경' 축제를 연다고 21일 밝혔다. 완판본 삼매경은 오는 28일부터 이틀간 전주시 한옥마을 완판본문화관 일대에서열릴 예정이다. 이번 행사에는 왕기석 명창이 판소리와 함께 사설을 해설하는 '완판본 콘서트'와 조선시대 과거시험을 재현한 '완판본 백일장 대회', 30여명의 서예가가 참여하는'열녀춘향수절가' 필사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준비됐다. 이 밖에도 '완판본 골든벨', '완판본 판각 시연', '도전! 완판본 필사하기' 등 체험행사도 마련됐다. 이용숙 전주문화재단 이사장은 "완판본은 전주지역을 중심으로 발간된 옛 책과 그 판본을 말한다. 완판본은 기록문화로서 의미 뿐 아니라 당대 사람들의 정서와 지적 호기심을 잘 보여준다"면서 "이런 소중한 유산이 후대에 잘 전해지도록 앞으로 완판본을 전승하고 육성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전주는 역사적으로 두가지 코드를 지니고 있다. 하나는 후백제 왕도로서의 전주와 조선왕조의 발상지로서의 전주이다. 두가지 코드를 전주는 충분히 활용하여 전통도시로서의 발전을 지속시켜야 할 것이다. 그중에서도 전주가 수도로서 기능한 시기는 후백제시기이다. 왕도의 기운을 되살리는 것은 현재의 우리 몫이다.견훤이 전주로 천도한 해는 900년이다. 후백제는 고려의 왕건에 의해 936년에 망했다. 그러니까 전주가 36년 동안 후백제의 왕도였던 셈이다. 긴 역사 속에서 보자면 너무 짧은 기간이지만, 14년간 태봉의 수도였던 철원에 비하면 배가 넘는 기간이다. 철원의 풍천원에 세워진 태봉의 도성은 외성 12.7㎞, 내성 7.7㎞이었으며, 태봉은 궁궐과 누대 등을 극히 화려하게 장식하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36년 동안 전주에 세워진 후백제의 도성은 적어도 그 이상의 위용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견훤은 외교관계를 중시해 주변 여러 나라와 통교를 지속하였다. 이때 외국의 사신이 후백제를 들리기도 하였다. 이를 대비해 궁궐과 도성을 화려하게 만들었다고 해도 지나친 억측만은 아닐 것이다.화려하게 만들어졌던 도성과 궁궐은 현재 전주의 어디에 있었을까. 동고산성에 오르면 9부 능선 부근에 대단한 위용을 자랑하는 2층 건물로 축조되었다고 추정되는 터를 찾을 수 있다. 주변을 돌아보면 여러 건물지의 흔적도 찾아진다. 이 건물지를 둘러싸고 있는 성곽도 찾아졌다. 이를 근거로 이곳이 상성중성내성을 갖춘 궁궐터였다고 추정되었다. 그러나 이곳은 몇 가지 점에서 궁궐로 보기에는 주저되는 점이 있다. 먼저 이곳은 거의 동고산정상부에 위치하여 국왕의 권위를 드러내기에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다음으로 커다란 건물지에 추운 겨울에 대비한 온돌시설이 없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물이 충분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런 점들로 '신증동국여지승람' 전주부에서 찾아지는 견훤이 전주부의 북쪽 5리(현재의 물왕멀 일대)에 토성을 세웠다고 하는 기록을 근거로 그곳을 궁궐터로 추정한 견해도 있다. 이곳에서는 일제시대 편찬된 '전주부사'에 의하면 1만여개의 주춧돌이 찾아져, 그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 그런데 이 견해들은 전주천의 물길을 기준으로 해석된 견해들이었다. '완산지'에 의하면 전주천은 한벽루를 지나 오목대를 거쳐서 흘렀다고 한다. 이 견해가 '전주부사'에서 전주천이 오목대를 거쳐 구철도를 따라 북진하여 모래내를 만나고, 이어서 덕진지를 거쳐 추천으로 흘러갔다고 해석됐다. 그렇게 때문에 견훤은 전주천을 넘을 수 없어 궁궐을 물왕멀일대와 동고산에 조성했다고 주장됐다. 최근 전라감영이 발굴됐다. 이 발굴에서 뜻하지 않은 결과가 나왔다. 발굴된 지층에서 통일신라 건물지가 나온 것이다. '전주부사'의 견해에 의하면 전주천이 흐르고 있는 곳에 건물지가 조성되었다는 것이다. 이 발굴로 인하여 적어도 통일신라 시대에는 전주천이 현재와 같은 물길을 유지하고 있었음이 확실해졌다. 그리고 1912년에 만들어진 지적도에 의하면 전주는 격자형 도로 구획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 도로구획은 통일신라시대에 이루어진 것으로 파악된다. 통일신라 9주 5소경의 중심지였던 남원광주상주청주 등에서 찾아지는 도로구획과 거의 동일한 격자형 도로구획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격자형 도로 구획의 중심지는 대략 조선시대의 치소와 일치하고 있다. 조선의 치소는 고려의 치소를 이어받았으며, 고려의 치소는 통일신라의 치소를 이어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후백제의 궁궐도 당연 이곳에서 찾아져야 되지 않을까 싶다.※ 이 글은 전주시와 전주역사박물관이 공동으로 진행하고 있는 〈제12기 전주학 시민강좌〉'후백제 왕도 전주'의 강좌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고창부안지역의 곰소만과 신안군 도서 일대 갯벌의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 등재 추진이 암초를 만났다. 부안군, 전남 여수고흥보성 주민들이 어로활동 제한 등을 이유로 거세게 반발하고 있는 가운데 등재 예정 갯벌 면적이 대폭 줄어들 것으로 예상되면서다. 11일 전북도에 따르면 최근 부안군이 곰소만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하는 데 반대 입장을 밝혔다. 또 세계자연유산 등재를 함께 추진하고 있는 여수, 보성, 고흥 지역에서도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반면 고창, 전남 순천신안, 충남 서천은 세계유산 등재에 적극 찬성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서남해안 갯벌의 세계자연유산 등재는 곰소만 갯벌(고창부안), 다도해 갯벌(전남 신안), 여자만 갯벌(전남 여수순천고흥보성), 유부도 갯벌(충남 서천) 등 3개도 8개 시군에서 공동으로 진행했던 사업이다.하지만 내륙권에 있는 자치단체 4곳이 반대 의견을 내놓음에 따라 등재 예정 면적이 대폭 줄어들었다. 반대 지역의 갯벌 면적은 85.8㎢로 전체 면적 중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먼저 세계자연유산으로 선정된 독일의 와데네 갯벌이 우리나라 서해 면적만큼의 크기임을 감안하면 서남해안 갯벌의 등재에 난항이 예상되는 대목이다. 문화재청은 섬 갯벌 지역을 먼저 등재 추진 대상지로 결정하고 만갯벌(곰소여자만) 지역은 1년 동안 유예기간을 두고 반대여론을 설득한다는 방침이나 면적이 대폭 축소되면 세계유산 등재는 어렵다는 게 전북도의 설명이다. 전북도 관계자는 "유네스코에서 세계유산을 평가할 때 중요한 항목 중 하나가 진정성이다. 현재 곰소만을 품고 있는 고창과 부안의 입장이 달라 한 쪽 지역만 등재를 추진할 경우 유네스코에서 받아들이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면서 "더욱이 전남권에서도 반대하는 지역이 많아 이들 지역을 설득하지 않으면 사실상 등재 추진은 어렵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다양성과 경관면에서 세계적으로 고유한 가치를 인정받은 서남해안 갯벌은 지난 2010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됐고, 이듬해 문화재청은 이곳을 세계유산 우선 추진 대상으로 선정했다. 지난 5월에는 문화재청과 전북, 전남, 충남이 등재 추진과 관련해 업무협약을 체결하고 오는 2017년까지 등재를 목표로 사업을 진행했었다.
불교에서 사천왕(四天王)은 불국토라는 세계의네 방향인 동서남북을 분담해 지키는 네 호법신이다. 현재 한국, 중국, 일본 불교 사찰을 보면 그 구역 전체는 불국토에 비유되며,그 한복판에 부처가 자리하는 대웅전이나 극락전 등이 있다. 불교의 이상적인 관념에 따르면 사천왕은 사찰 구역 네 방향에 각각 자리해야하지만 실제는 그러지 못해 거의 예외 없이 입구를 지나서 대웅전으로 향하는 길목에 자리 잡는다. 사천왕을 봉안한 건물이 천왕각(天王閣)이다. 이 천왕각 안 양쪽편에 불국토 사방을 관장하는 네 천왕이 적절한 방위를 차지한 채 서 있다. 이들 사천왕은 공통점이 있다. 무엇보다 인상이 험악하기 짝이 없으며, 발아래에는 악귀를 짓누르는 자세를 한다. 하지만 사천왕별로 차이도 엄연히 존재한다. 그런 차별성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대목이 지물(持物)이라고 해서 그들이 휴대하는 물건이 각기 특징이 있다는 점이다. 요즘 한국 사찰 천왕문의 사천왕상 앞에는 대체로 이름이 걸려 있다. 사찰 참배객들이 헷갈려 할까봐서다. 이들 명패를 보면 비파를 타는 천왕을 동방지국천왕(東方持國天王), 칼을 든 천왕은 남방증장천왕(東方增長天王), 용과 여의주를 든 천왕을 서방광목천왕(西方廣目天王), 탑을 든 천왕을 북방다문천왕(北方多聞天王)이라고한다. 이런 도식이 자리 잡은 데는 통일신라 때 만든 석굴암 사천왕상이 결정적이었다.하지만 이런 도식이 잘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학계에서 끊이지 않았다. 특히 조선시대 사천왕상에는 이런 공식이 곳곳에서 파열음을 냈다. 그럼에도 이런 궁금증을속 시원하게 해결할 뾰족한 도리도 없었다. 현재 남은 사천왕상 중 대부분은 극심한복장(腹藏) 도굴로 그것을 만든 내력이라든가 개별 실체를 엿볼 만한 자료가 극히제한돼 있기 때문이다. 최근 김천 직지사 소조 사천왕상에 대한 해체 수리는 이런 궁금증을 일거에 해결했다. 복장 등을 조사한 결과 이들 소조상도 도굴 피해를 보기는 했지만 첫째, 종래에는 전연 알 수 없던 만든 시기와 만든 사람을 밝혀냈으며 둘째, 개별 사천왕이각각 어느 방위를 담당했는지를 밝혀주는 자료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우선 '서방천왕'(西方天王)이라는 묵글씨가 발견된 천왕상 내부에서 강희(康熙)4년(1665)에 작성한 '중창봉안기'(重創奉安記)가 나오면서 만든 시기가 밝혀졌다. 이 문서는 서방천왕상을 만들면서 그 내력을 적은 사천왕상 조성기(造成記)다. 더구나 만든 사람들은 '전라도 전주부 동쪽 종남산 송광사의 승려 화원'(全羅道全州府東終南山松廣寺居僧人畵員)들과 '전라도 전주 송광사 화원'(全羅全州松廣寺畵員)들로드러났다. 물론 사천왕상 중에서도 서방천왕상만을 이 무렵에 만들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동시에 같이 만들었다고 보는 것이 순리일 것이다. 사천왕상 조성 시기 확정은 불교미술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것은다른 무엇보다 조선시대 사천왕상 제작 연대가 정확히 드러난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사천왕상 중에서 국가지정 문화재로는 보물 제1254호 장흥 보림사 목조 사천왕상, 제1255호 장흥 보림사 목조 사천왕상, 제1467호 순천 송광사 소조 사천왕상 등 3점이 있다. 이 중에서 보림사 사천왕상은 천왕문에 걸린 목판의 '보림사 천왕금강 중신 공덕기'(寶林寺天王金剛重新功德記)와 '보림사 중창 불사기록'(寶林寺重創佛事記錄)을보면 조선 중종 10년(1515)에 만들었다가 1666년과 1777년에 각각 중수됐다고 한다. 이를 근거로 불교미술사학계에서는 이 사천왕상을 "지금까지 조사된 조선시대 사천왕상 가운데 조성년대가 가장 빠르다"고 해서 보물로 지정됐다. 하지만 두 차례 고친 일이 기존 사천왕상을 철거하고 새로 만든 사건을 지칭할 가능성도 있다. 완주 송광사 소조 사천왕상은 서방천왕 왼쪽 머리끝 뒷면에 있는 기록을 통해조선 인조 27년(1649)에 조성됐다고 하며, 순천 송광사 소조 사천왕상은 인조 6년(1628)에 다시 만들었다(重造)는 묵글씨가 있을 뿐 그것을 누가 만들었는지는 흔적이없다. 이런 현상이 빚어진 것은 현존하는 조선시대 사천왕상 대부분이 극심한 도굴로그 내력을 기록한 조성기가 대부분 도둑맞았기 때문이다. 이같은 상황에서 이번 직지사 사천왕상 조성기 출현은 그것을 만든 연대는 물론그것을 누가 만들었는지도 정확히 알려준다. 나아가 직지사 사천왕상은 논란이 끊이지 않는 사천왕의 실체에 대한 의문을 풀어준다. 이번에 이를 조사한 불교문화재연구소는 "조선후기 사천왕상의 방위 문제를 실증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자료"를 확보했다고 말했다. 이들 사천왕상은 나무 뼈대에 흙을 붙여 제작한 소조상(塑造像)이다. 한데 그내부 등을 살피는 과정에서 천왕상 머리 내부에서 '北方天王'(북방천왕)이라든가 '西方天王'(서방천왕)이라고 적힌 종이를 확인했는가 하면, 다른 사천왕상 몸체 내부에서는 '東'(동)과 '東南'(동남)이라는 묵글씨를 발견했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이런 말이 적힌 소조 작품이 해당 방위의 사천왕임을 지칭한다. 이런 통해 이들 사천왕상이 제작된 17세기 무렵 불교계가 생각한 사천왕의 구체적인 면모가 드러났다. 종래 사천왕상은 그들의 지물로 구별했다. 비파를 타면 동방천왕, 칼을 들었으면 남방천왕, 용과 여의주가 있으면 서방천왕, 탑을 들었으면 북방천왕이라고 한 것이다. 하지만 직지사 사천왕상에서는 지물과 묵서를 결합해 정리한 결과 비파를 타는천왕은 북방다문천왕(北方多聞天王), 칼을 쥔 천왕은 동방지국천왕(東方持國天王),용과 여의주를 든 천왕은 남방증장천왕(南方增長天王), 탑을 든 천왕은 서방광목천왕(西方廣目天王)임을 밝혀냈다고 연구소는 말했다. 석굴암에서 보는 사천왕상하고는 많이 다르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불교미술사 전공인 강희정 서강대 동아연구소 교수는 "이번 직지사 사천왕상을보면 북방천왕이니 서방천왕이라고 해서 각 방위에 해당하는 천왕만 밝혔을 뿐 그들이 곧 다문천왕인지, 지국천왕인지, 증장천왕인지, 혹은 광목천왕인지는 확실히 알기는 어렵다"고 조심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강 교수 "이번 직지사 사천왕상 조사를 통해 17세기 불교계가 생각한 사천왕의 개별 실체가 드러난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불교미술계의 획기적인 성과"라고평가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경북 김천 직지사(直指寺. 주지 흥선스님)의 소조 사천왕상은 조선 현종 6년, 1665년에 전라도 장인들이 만든 것으로 밝혀졌다. 이런 사실은 최근 직지사가 훼손이 극심한 사천왕상과 그것을 보호하는 건물인천왕각(天王閣)을 수리하기에 앞서 불교문화재연구소(소장 각림스님)에 의뢰한 사천왕상에 대한 정밀학술조사 결과 드러났다고 연구소가 9일 말했다. 이번 조사 결과 서방천왕상 내부에서 강희(康熙) 4년(1665)에 이 불교조각을 만들면서 그 내력을 적은 조성기(造成記)가 발견됐다. 나아가 그 내부에서는 '전라도 전주부 동쪽 종남산의 송광사에 거주하는 승려화가들이 와서 이를 만들었다'는 내용의 '全羅道全州府東終南山松廣寺居僧人畵員來造成之也'라는 문구와 함께 '전라도 전주의 송광사 화원들이 을사년 3월에 칠(혹은진흙)을 발랐다'는 뜻을 지닌 '全羅全州松廣寺畵員乙巳年三月日塗作也'와 같은 문구가 적힌 여러 문서가 같이 발견됐다. 을사년은 1665년이다. 연구소는 이들 문서를 통해 "직지사 사천왕상이 1665년에 제작되었다는 사실과함께 작품 제작에 전라도 완주 송광사의 조각승이 참여한 사실을 알려준다"면서 "이는 호남의 조각승이 영남지역으로 진출해 불상을 제작한 과정을 알려 주는 것으로조선후기 조각승들의 활동 영역을 비롯한 불교미술 연구의 폭을 확대시켜 줄 자료로기대된다"고 평가했다. 또한 천왕상 머리 내부에서는 '北方天王'(북방천왕)과 '西方天王'(서방천왕)이라는 글자가 적힌 종이가 발견되고, 이들의 몸체 내부와 복장 마개에서는 동쪽과 동남쪽 방향을 의미하는 '東'(동)과 '東南'(동남)이라고 적은 묵글씨도 발견됐다. 이런 묵서 내용을 종합해 보면 지금의 직지사 소조 사천왕상 중에서도 비파를타는 천왕(天王)은 북방다문천왕(北方多聞天王)이며, 칼을 쥔 천왕은 동방지국천왕(東方持國天王), 용과 여의주를 든 천왕은 남방증장천왕(南方增長天王), 탑을 든 천왕은 서방광목천왕(西方廣目天王)임을 알 수 있다고 연구소는 덧붙였다. 연구소는 "이번 사천왕상 조사에서 사천왕이 차지하는 각 방위를 기록한 자료는4개 천왕상 중에서 3구에서 확인됐다"면서 "이는 조선후기 사천왕상이 통일신라 사천왕상과는 다른 도상과 방위를 갖추고 있음을 보여주는 자료로 주목된다"고 말했다.사천왕(四天王)은 불교의 삼보(三寶, 부처부처의 가르침승려)를 수호하는대표적인 호법 방위신이라 해서 사찰 입구에 세운 천왕문(天王門)에 그 상을 만들어불국토의 동서남북을 방어하는 징표로 삼는다. 지금까지 사천왕은 통일신라 석굴암 사천왕상을 기준으로 삼아 비파를 타는 천왕은 동방천왕, 칼을 든 천왕은 남방천왕, 용과 여의주를 든 천왕은 서방천왕, 탑을든 천왕은 북방천왕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최근 불교학계에서는 과연 이런 도식이맞는지를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을 벌이고 있다. 이런 가운데 이번 직지사 소조 사천왕상에서 17세기 무렵 방위별 사천왕의 실체가 전모를 드러냈다. 불교미술사 전공인 강희정 서강대 동아시아연구소 교수는 "조선시대 사천왕상중에 언제, 누가 만들었는지를 분명히 알 수 있는 자료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 그것을 명확히 알려주는 자료가 발견됐다는 점에서 이번 조사성과는 불교미술사의 획기적인 성과로 본다"면서 "같은 17세기에 만든 순천 송광사 사천왕상이 보물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직지사 사천왕상은 그와 같은 보물급, 혹은 그 이상의 가치는 지니는성보문화재임이 확실하다"고 말했다. 직지사는 이들 자료를 추후 진행할 소조 사천왕상 보수와 복장(腹藏) 재납입의기초 자료로 활용할 예정이다. 이번 발굴 조사를 계기로 직지사 사천왕상에 대한 보물 지정 절차가 속도를 낼것으로 전망된다.
후백제의 역사가 객관적인 평가를 받지 못하면서 그에 비례해 후백제의 수도였던 전주도 역사의 뒤켠으로 물러나 있다. 전주시와 전주역사박물관(관장 이동희)이 지난 7일 시작한'후백제 왕도 전주'를 주제로 제12기 전주학 시민강좌를 꺼낸 배경이다. 본보는 견훤과 후백제에 대한 올바른 역사관을 정립하고 왕도(王都) 전주로서의 자긍심을 되찾는 계기가 될 수 잇도록 다음달 2일까지 8주간 매주 토요일 전주역사박물관에서 진행될 이번 시민강좌 내용을 7차례에 걸쳐 요약해 연재할 계획이다.후백제를 세운 진훤(甄萱)의 이름은 현재 '견훤'으로 읽혀지고 있다. 옥편을 찾아 보면 '질그릇 甄'에는 '견' 혹은 '진'으로 발음이 된다. 그런데 조선 후기의 대표적 역사학자인 홍여하와 안정복은 '동사제강'과 '동사강목'에서 후백제 시조왕의 이름을 '진훤'이라고 읽었다. '증보문헌비고'와 '전운옥편'및 '완산견씨세보完山甄氏世譜'에서도 이와 동일하게 읽었다. 구한 말 국사 교과서에서도 '진훤(헌)'으로 표기했다. 그 밖에 역사학자 이병도(李丙燾) 등의 저작물을 비롯하여 민족문화추진회 국역본에 이르기까지 모두 '진훤'으로 표기하였다. 그럼에도 언제부터인지 교과서를 위시하여 모두 '견훤'으로 표기하고 있지만 터무니없는 잘못이다. 진훤은 지금의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아차 마을 '갈전 2리'에서 가난한 농민의 맏아들로 출생했다. 그는 백제 유민의 후예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한 진훤이 향리를 떠나 군에서 복무했던 곳은 필자가 최초로 밝혔듯이 지금의 전라남도 순천만 일대였다. 진훤은 순천의 해룡산성과 동일한 지형구인 광양의 마로산성 일대에서 해적들을 소탕하는데 발군의 전공을 세웠다. 마로산성에서는 신라가 일본에 수출하던 동경(銅鏡) 뿐 아니라 남중국의 청자와 백자, 그리고 당나라 동경까지 출토되었다. 이러한 물증은 장보고 사후 50년만에 등장한 진훤의 서남해안 해상권 장악을 시사해준다. 진훤이 전주(全州)로 정도(定都)한 900년에 항주(杭州)에 도읍한 중원의 약소국인 오월국(吳越國)에 신속하게 사신을 파견한 것도 해상제해권 장악에 대한 열망에서였다. 진훤은 지금의 광주 광역시에서 거점을 북상시켜 전주에 도읍했다. 그와 더불어 나라 이름을 '백제'라고 선포하였다. 진훤은 대왕(大王)을 칭하면서 '정개(正開)'라는 연호를 반포했다. '정개'에는 '바르게 열고''바르게 시작하고''바르게 깨우친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질곡과 파행의 칙칙한 과거사를 청산하고 올곧게 시작하는 새로운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연호였다. 이와 더불어 진훤은 신라보다 일렀던 백제의 역사를 재정립하겠다는 일종의 '역사 바로잡기'와 더불어 의자왕의 숙분(宿憤)을 푸는 것을 당면 과제로 내세웠다. 진훤은 정치적 이데아로서 백제에 의한 국토통일을 내걸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비참하게 몰락한 백제왕조의 부활자이자, 미륵의 대행자로서 도탄에 빠진 민생을 구원하고 한 세상을 건지겠다는 포부를 지녔다.신검(新劒)의 교서(敎書)에 보면 "도탄에서 구해주셨으니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게 되고"라고 하였듯이 그는 농민들을 과중한 수탈과 질곡에서 해방시켰다. 그의 위세는 일본측 문헌에 "전주왕(全州王) 진훤이 수십 주(數十州)를 격파하여 대왕이라 칭하고 있다"는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진훤은 인재 기용에도 비상한 수완을 발휘하였다. 그랬기에 그 주변에는 잘 짜여진 우수한 참모들이 포진할 수 있었다. 그리고 922년에 있었던 미륵신앙의 요람인 미륵사에서의 개탑(開塔) 의식은 익산 금마산에서의 백제 '개국開國' 인식과 짝을 이루는 일대 사건이었다. 진훤은 927년에 경주에 입성하여 경주 포석정에서 신라 경애왕을 생포처단하였다. 더구나 구원나온 고려 군대를 대구 공산에서 포위궤멸시켰다. 그 직후 진훤이 왕건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의 기약하는 바는 평양성 문루에 활을 걸어두고 패강(대동강)에 말의 목을 축이는 데 있다!"라고 하였듯이 통일군주에 대한 자신감을 화통하게 피력했다.결과적으로 진훤왕은 역사의 패자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승부에 승부를 거듭하는 전쟁으로 숨도 돌릴 수 없는 난세를 헤쳐가면서, 한 시대의 종지부를 찍어 역사의 일대 전환점을 마련한 혁명가였다. 그는 말세와 같은 암울한 세상에, 그것도 엄격한 신분제 사회에서 농민의 아들이라는 한미한 '옷'을 입고 태어났지만, 결단코 그러한 현실에 짓눌리기를 거부했던 혁명가였다.
'시민건축학교 그리크지않은집'이 마음을 담는 집짓기를 위한'건축의례'를 주제로 한 특강을 준비했다. 과거 집을 짓는 과정 속에 여러 의례들이 행해졌지만 지금은 거의 생략되고 있는 현실에서 예로부터 행해졌던 집짓기에 관한 의례를 알고 이 시대에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살펴볼 수 있는 자리다.특강은 다음달 10일 오후 3시부터 2시간 동안 전주 한옥마을 한옥생활체험관에서 김하생 '전통문화콘텐츠연구소 연' 소장의 강의로 진행된다. 선착순 40명. 이메일(na ver.com) 접수를 받는다. 회비는 1만원. 문의 010-5628-9380
전주문화재단(이사장 이용숙) 천년전주명품사업단에서 제4기 전통짜맞춤기술 전문가교육 수강생을 모집한다. 옛 선조들의 지혜와 멋이 담겨있는 전통짜맞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요즈음, 무형문화재의 수준 높은 지도를 통해 전통 짜맞춤 가구의 제작기법을 익히고 전통가구에 대한 이해를 높여 교육생들의 창업 및 일자리 창출에 도움을 주기 위한 취지.교육은 무형문화재 소병진 선생의 지도로 9월28일부터 12월 1일까지 10주 동안 전주시공예명인관 교육관에서 이루어진다.모집은 13일까지 선착순 10명. 수강료는 50만원(수업 실습 재료 제공). 문의 063)288-9383
전북도립국악원(원장 신현창) 예술단이 5일 저녁 7시30분 한국소리문화의전당 명인홀에서 가을을 여는 '가·무·악의 바람'으로 목요국악예술무대 2013년 하반기 문을 연다. 도립국악원의 목요국악예술무대는 전통과 보존, 실험과 대안이 조화를 이루는 공연으로 가족과 연인, 청소년과 외국인 등 폭넓은 관객층에게 사랑받고 있는 도내 대표적 상설 공연. 1994년 토요공연을 시작으로, 2003년에는 금요무대로 진행됐고, 주 5일제 실시에 따른 생활패턴의 변화로 2004년부터 목요공연으로 정착했다. 국악원측은 올 하반기 공연의 다양한 레퍼토리 개발을 위해 보다 실험적인 작품을 중점 배치했다고 밝혔다.9월에는 춤과 소리와 음악이 조화를 이루는 가을을 여는 가·무·악을 시작으로, 창의적 창작무용의 밤인'춤, 그 자유로의 여행', 흥보전을 새롭게 해석한 단막창극 한마당 '놀보는 풍각쟁이'공연이 이어진다. 10월중에는 국악기의 아름다운 선율이 돋보이는'국악실내악과 중주의 밤', 예술단 창극단원의 첫 정년퇴임을 기념하는'이혜정(거문고)의 꿈과 여정'이, 여성소리의 멋과 섬세함이 묻어나는 여류명창 판소리 다섯 바탕, 10여년 세월 무용단을 이끌어온 문정근 무용단장의 삶과 예술을 담은 무용결에 실은 '문정근의 춤'이 10월의 마지막 밤을 수놓는다.11월에는 젊은 세대를 위한 국악관현악단의 국악콘서트, 서로 다른 춤의 매력과 동선을 한 무대에서 볼 수 있는 국립민속국악원 무용단과 함께 하는'춤의 향연'으로 다양한 무용의 아름다움을 만나볼 수 있다. 2013년 목요국악예술무대의 대미는 '천년의 소리, 천년의 몸짓, 천년의 음악'이 장식한다.5일 열리는 '가·무·악의 바람'에서는 각 지역의 대표 아리랑을 연곡의 형식으로 담아낸 북한저대와 25현 가야금을 위한 'the 아리랑', 우아한 학의 동태를 무용으로 형상화 한'양산 사찰학춤', 동편제 판소리의 백미중 하나인 '춘향 이별 후, 이몽룡 그리워하는 대목', 극적인 목의 사용과 구성이 돋보이는 남도민요 '농부가', 창작 초연곡으로 시'가을에서'를 형상화 한 해금과 거문고 2중주'열정'등이 관객들을 기다린다.공연은 무료. 예약문의 063)290-5539
속보= 문화재청(청장 변영섭)은 지난 30일 국립무형유산원에서 작고 보유자 유품 기증식을 개최했다. 기증식에는 변영섭 문화재청장과 정춘모 정봉섭 강덕열 양승희 조선자 김금철 등 제자와 유족 100여명이 참석해 작고한 무형문화재들의 뜻을 기렸다. (8월 29일자 1면 보도)이날 제자유족들이 기증한 자료는 중요무형문화재 제4호 갓일(갓을 만드는 일)의 故 김봉주 보유자 등 작고명예 보유자 24명이 남긴 유품소장품 736점이다.중요무형문화재 제4호 갓일 보유자 정춘모씨는 "국립무형유산원이 건립된 만큼 선생님의 작품이 이곳에 보관돼야 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무형문화재에 관심을 가지게 될 기회이자 전승자들에게는 성지와 같은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변영섭 청장은 "무형문화재들의 땀과 노력이 스며있는 소중한 자료들은 그 존재만으로도 우리를 숙연케 한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무형문화재들의 노력은 여기에 있는 전승자와 유족들이 있기에 계속 이어질 수 있었다"고 밝혔다. 문화재청은 이날 기증받은 자료와 함께 지난해 기증기탁 받은 자료를 모아 다음달 31일까지 특별전을 연다. 이번 전시에는 작고 보유자와 명예보유자 32명의 유품과 소장품, 기록물 300여 점이 나온다.
중요무형문화재 유족과 제자들의 아름다운 기부가 이어지고 있다. 전주에 둥지를 튼 국립무형유산원의 정식개관을 앞두고 작고한 무형문화재 보유자들의 뜻을 기리기 위해 지난해부터 기증 릴레이가 펼쳐지고 있는 것. 이들의 기증품으로 유산원의 콘텐츠가 더 풍성해질 전망이다.문화재청(청장 변영섭)은 28일 중요무형문화재 제4호 갓일(갓을 만드는 일)의 故 김봉주 보유자 등 작고명예 보유자 24명이 남긴 유품과 소장품 등을 유족제자 15명에게서 기증받았다고 밝혔다. 이들이 기증한 자료는 모두 543건 736점이다. 자료에는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산조 및 병창 故 정달영 보유자가 아끼며 연주하던 가야금 △중요무형문화재 제30호 가곡 故 홍원기 보유자가 친필로 작성하여 제자들을 가르치던 악보 △중요무형문화재 제32호 곡성의 돌실나이('석곡지방의 길쌈'이란 의미) 故 김점순 보유자가 자신의 몸에 맞춰서 평생 사용한 베틀과 물레 △중요무형문화재 제55호 소목장 故 천상원 보유자의 유작인 이층장(미완성품) 등이 포함되어 있다.스승과 제자가족 간에 주고받은 편지도 기증됐다. 중요무형문화재 제43호 수영야류(水營野遊)의 故 태명준 보유자는 1970년대 초반에 아들 태덕수(현 명예보유자)에게 쓴 편지에서 "수양반 역할이 중요하니 더욱 춤에 정진"하라는 내용을 담았고 중요무형문화재 가야금산조 및 병창의 故 김죽파 보유자도 제자 양승희(현 보유자)에게 "지극한 긍지와 인내"로 노력하라는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이와 함께 작고 보유자와 명예 보유자의 땀이 밴 공연의상과 소품, 손때 묻은 작업도구, 생전의 활동을 기록한 사진과 영상기록물 등 중요무형문화재의 역사를 보여주는 자료들이 다수 기증된다.문화재청은 30일 오후 2시 국립무형유산원에서 이날 기증받은 자료와 함께 지난해 기증기탁 받은 자료를 모아 특별전을 연다. 10월 31일까지 열리는 이번 전시에는 작고 보유자와 명예보유자 32명의 유품과 소장품, 기록물 300여 점이 나온다.변영섭 청장은 "문화재청은 앞으로도 무형문화재 전승자와 유족들이 보관하고 있는 무형유산 자료를 기증받아 특별전시를 열어 그 가치를 널리 알리고,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에도 활용할 예정이다"고 밝혔다.
국가지정 중요 무형문화재 이리농악 제29회 정기발표공연이 30일 저녁 8시 배산체육공원 야외음악당에서 열린다. 이번 공연에서는 내림 드림굿을 비롯한 첫째 마당부터 개인놀음인 넷째 마당까지 선보인다. 첫째 마당부터 셋째 마당까지는 이리농악 판굿의 전 과정이며 개인놀음으로 고깔소고놀이와 채상소고놀이, 쇠놀이, 설장고, 열두발상모놀음, 기놀이 등 어깨춤이 절로 나는 시간이 마련된다.호남우도농악의 대표인 이리농악은 김형순 선생이 1953년 풍물계를 조직해 운영하다 '이리농악단' 이름으로 설립, 활동하고 있다. 이후 김제, 정읍, 부안 등의 전문적 우도굿잽이들을 받으들이면서 높은 수준의 농악단을 양성해왔다. 특히 상쇠의 부포놀이와 소고춤의 기법, 진풀이가 매우 다양하고 장구의 가락과 춤이 발달된 것이 다른 지역 농악과 차별화되어 있다.이리농악 관계자는 "수준 높고 품격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자 흥겨운 이리농악 공연에 시민들의 많은 참여와 관심을 바란다"고 말했다.
담장을 허물고 공연 무대를 설치해 새 단장을 마친 전북대예술진흥관(관장 박인현)이 한옥마을과 소통에 나선다. 다음달 15일까지 전북대예술진흥관과 전주부채문화관(29일~다음달 11일)에서 열리는 '전주 부채, 풍류와 아취' 展을 통해서다. 이번 전시는 부채문화관과 공동으로 기획됐다. 담장을 제거해 한옥마을과 눈높이를 맞춘 것을 기념해 한옥마을과 전주를 대표하는 부채를 선택한 것.이번 전시에서는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0호 김동식방화선엄재수조충익 선자장이 만든 부채에 김상철 동덕여대 교수가 자연 속 아름다움을 풍부한 감성으로 그려 넣은 작품 100여점이 선보인다. 홍익대 동양학과를 졸업한 김상철 교수는 그간 한국화 평론과 한국 미술에 관한 전문적인 글을 써오면서 작품 활동을 병행했다. 특히 부채 그림을 즐겨 그려 '부채 작가'로도 불린다. 문예를 겸비한 그가 보여줄 예술 세계에는 고상한 품격과 운치가 묻어난다.박인현 관장은 "지난 2010년 전북대 총장 관사였던 건물을 미술관으로 바꾸면서 한옥마을과 첫 번째 소통을 시작한 뒤 이번에는 담장을 허물고 속살을 내보이면서 보다 한옥마을과 가까워졌다"면서 "문기 어린 서화가 있는 부채 바람은 흐르는 땀의 무게를 덜어주는 실용성보다는 품격 있는 문화 아이콘이며 이번 전시를 통해 한옥마을과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과의 소통을 늘려가겠다"고 밝혔다.
정읍문화원(원장 정창환)이 주최한 '제14회 전국 한시 공모전'에서 김상진(83대구)씨가 대상인 장원을 차지했다.정읍문화원에 따르면 현재의 정읍시 칠보면(옛 泰山) 시산리 일원에서 신라말 고운 최치원(857년 ~?)이 재현하고 즐기던 유상곡수(流觴曲水) 시회(詩會)터 유상대(流觴臺)에 대한 애찬 한시공모전을 지난 5월부터 7월까지 약 3개월여 동안 실시했다.이번 공모전에는 전국 16개 시도에서 313점이 응모하여 지난16일 박금규, 오석환,박경래씨 등이 심사위원으로 고선(考選)을 진행해 김상진씨의 작품 유상대를 장원으로 선정했다.심사위원들은 "최근에 출품되는 한시들은 너무 시제(詩題)와 압운(押韻)에 따라 시를 짓다보니 염(艶)과 대(對)의 조화가 떨어지는 작품이 많았다"고 평가했다. 또 "이번 공모전에서도 장원과 차상, 차하를 비롯한 우작 몇 점을 제외하면 시제와 압운에 따라 오직 평측법(平仄法)에 맞게 시를 짓다보니 글의 운율에는 맞지 않아 옛 선인들의 절묘하고 주옥같던 한시들이 드물다"고 아쉬움을 표했다. 한편 최치원이 재현했던 유상대는 고대 중국 동진시대의 서성(書聖) 왕희지(, 321~379)가 소용돌이치는 여울물 위에 술잔을 띄우던 유상곡수 시회를 모본으로 하여 고운이 현재의 정읍시 칠보면 여울물에 만들었던 시회 터를 말하며 현재는 유상대가 그곳에 현존했다는 비문만 남아 있는 상태다.
540억 투입 전주시립미술관, 소장품 예산은 1억...내실 부족 우려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박복영 시인-장선희 ‘조금조금 초록 벽지’
권일송 시인 30주기 추모 및 순창문학 출판기념회 성료
정읍 칠보 유무형 문화유산 백과사전⋯㈔정읍문화유산연구회, ‘하늘과 땅과 사람과’ 출간
2026 교동미술상 수상자에 조헌·강유진 선정
전북 미술의 새 물결…군산대 조형예술디자인학과 동문 ‘우담회’ 창립전
전주세계소리축제 새 집행위원장에 김정수 전주대 교수 선임
[안성덕 시인의 ‘풍경’] 입춘
발렌타인데이 전주의 밤 수놓을 재즈 스탠더드의 정수
박보검이 무주에 떴다⋯상점 하나 없는 곳에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