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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 도화선 무장기포 의의 널리 알려

고창군과 역사문제연구소(소장 김동춘)는 지난 8일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역사관(서울 종로 소재)에서 제9회 동학농민혁명 학술대회를 개최했다.이번 행사는 자유와 평등의 숭고한 정신을 구현하기 위해 1894년 발생한 동학농민혁명의 가치를 계승하고 한국 근대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동학농민혁명을 재조명하며, 전국적 봉기의 시발점인 무장기포지의 의의를 널리 알리기 위해 동학농민혁명 발발 120주년을 앞두고 마련됐다.소현숙 한양대학교 연구교수 사회로 진행된 학술대회는 동학교도 및 민중의 동향과 정부의 대응, 중앙정치세력의 동향, 동학농민혁명 이전 단계의 민중의 동향 등에 대해 역사문제연구소 이이화 고문의 기조강연으로 시작됐다.제1주제 '1890년대 초반 민중운동과 민중의 동향'은 송찬섭 한국방송통신대 교수 발표와 김양식 충북학 연구소장의 토론, 제2주제 '1880~90년대 동학의 확산과 동학에 대한 민중의 인식'은 배항섭 성균관대 교수의 발표와 홍동현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의 토론, 제3주제 '1890년대 전반 중앙 정치세력의 동향'은 김용태 성균관대 교수의 발표와 노대환 동국대 교수의 토론, 제4주제 '일본 자료에서 보이는 1890년대 동학교도의 활동과 정부의 대응'은 강효숙 원광대 교수의 발표와 조재곤 전 동국대 교수의 토론, 제5주제 '19세기 후반 고창 무장지역 유학과 동학농민봉기'는 김봉곤 순천대 교수의 발표와 정진영 안동대 교수 토론으로 진행됐다.종합토론은 충북대 신영우 교수를 좌장으로, 서울대 규장각 김선경 책임연구원 발표 후 참석자 전원이 열띤 토론을 벌였다.이강수 군수는 "동학농민혁명은 안으로는 근대 시민 사회의 수립을, 밖으로는 자주독립국가의 건설을 이루고자 한 국내 최초의 근대적 혁명으로, 3·1운동, 4·19혁명, 5·18민주화운동으로 그 정신이 이어지면서 근·현대사를 움직인 민족·민중항쟁의 근원이 된 역사적 의의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이번 학술대회가 동학농민혁명 발발 직전인 1890년대 초반 조선사회와 민중 동향에 대해 이해하고, 2014년 120주년을 맞이하는 동학농민혁명을 미래화·세계화에 중점을 두고 추진함과 아울러 고창지역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의의와 가치를 확인하여 지역민의 자긍심 고취와 고유한 정신문화로 정착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 문화재·학술
  • 김성규
  • 2013.11.11 23:02

"후백제 왕궁터, 전주 중노송동 인봉리 일대"

후백제 왕궁의 위치가 전주시 중노송동 인봉리와 문화촌 일대라는 새로운 주장이 나왔다. 전주를 도읍지로 견훤이 후백제를 세웠지만 왕궁의 위치를 놓고 지금까지 여러 설만 나왔을 뿐 구체적 고증이 미흡한 실정에서 인봉리 일대가 후백제 왕궁의 면모를 밝히는 데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된다.곽장근 군산대 교수는 '후백제 왕도 전주의 재조명'학술대회를 앞두고 두달간의 지표조사와 주변 탐문 등을 통해 인봉리 일대가 후백제 왕궁일 가능성이 크다는 결론을 얻었다고 7일 밝혔다. 그의 이같은 추론은 기존에 왕궁터로 거론되어온 '전주 동고산성설''노송동설(무랑물)''전주 감영지설' 등에 문제가 있다는 데서 출발했다. 곽 교수가 왕궁터로 주장하는 인봉리 일대는 본래 방죽이 있었던 곳으로, 일제강점기에 방죽을 메워 공설운동장으로 활용했으며, 현재는 대규모 주택단지들이 들어서 있다.곽 교수에 따르면 주민들 사이에 이 일대가 왕궁터로 전해지고 있으며, 전주영상정보진흥원 옆으로 길이 50m의 토축이 남아 있는 등 왕궁터로 추정할 수 있는 흔적들이 곳곳에 있는 점을 근거로 제시했다. 곽 교수는 영상정보진흥원 동쪽에 남아있는 토축이 궁성의 서쪽 성벽으로 추정되고, 도시 개발로 본래 지형이 대부분 훼손됐지만 동남북 성벽의 경우 기린봉 산자락을 활용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자연지형을 확인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송화섭 전주대 교수도 "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전주의 고토성(古土城)이 후백제의 도성일 가능성이 크고, 무랑물에서 발견되는 초석은 궁성이 파괴되면서 나온 돌일 가능성이 있다"고 '인봉리설'을 뒷받침했다.

  • 문화재·학술
  • 김원용
  • 2013.11.08 23:02

"후백제 왕궁 위치, 인봉리·문화촌 일대" 주장 근거

후백제 왕궁 위치로 '전주 중노송동 인봉리와 문화촌 일대'라는 주장이 새롭게 제기되면서 미궁 속'후백제 왕궁'찾기에 돌파구를 열지 관심을 모으고 있다. 후백제 왕궁 위치를 놓고 기존에 몇가지 추정이 나왔지만 구체적으로 뒷받침할 만한 똑떨어진 '증거'가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새 주장에 대한 검증과 고증을 통해 활발한 논의가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곽장근 군산대 교수는 7일 현장 설명회를 통해 '인봉리 일대'가 후백제 왕궁 위치로 추정할 수 있는 근거로 왕궁을 두른 궁성 혹은 왕성으로 추정되는 성벽의 흔적을 들었다. 전주영상진흥원 동쪽에 궁성의 서쪽 성벽으로 추정되는 길이 50m 토축이 남아있다는 것. 이를 서벽으로 가정하고 궁성의 동벽(기린봉 정상부에서 북쪽의 서낭댕이까지)북벽(우성해오름아파트에서 태고종 종무원까지)남벽(아랫마당재~전주제일고~전주풍남초)을 설정했다. 평지인 서벽을 제외하고 나머지 성벽들은 기린봉 산자락을 활용했고, 주택단지 등으로 개발됐음에도 자연지형을 통해 성벽의 존재를 추정할 수 있다고 했다.인봉리와 문화촌 일대는 본래 인봉리 방죽이 있었던 곳으로, 일제강점기에 방죽을 메워 인봉리 공설운동장으로 사용했으며, 1963년 덕진종합경기장이 건설된 후 현재의 모습으로 점차 바뀌었다. 곽 교수는 인봉리 방죽의 존재에 주목했다. 후백제 멸망 이후 그 재건과 견훤의 부활을 우려해 전주에 주둔했던 군대(안남도호부)가 방죽을 만들고 도성을 의도적으로 파괴했을 것으로 추측했다. 또 인봉리 일대에 왕궁이 있었다면 지형적 특성상 그 방향은 자연스럽게 서쪽을 향하도록 되어있어 견훤의 미륵신앙과도 연결지을 수 있다고 보았다. 금산사 미륵전이 서쪽을 향하고 있는 것과 같은 이치에서다.인봉리 일대가 왕궁 위치로 할 때 도성은 종래 고토성(古土城)으로 알려진 산자락으로 불 수 있으며, 그 평면형태가 반월형으로 중심부에 왕궁터를 병풍처럼 휘감는다. 이와함께 도성을 보호하기 위한 외성도 있었을 것이며, 외성은 기린봉을 중심으로 남쪽으로 승암산을 지나 이목대와 오목대, 북쪽으로 도당산과 매봉산을 거쳐 금암동까지 이어진 산자락 등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현지조사 과정에서 아중리 구간을 외성이라고 제보한 주민도 있었다는 게 곽 교수의 설명. 곽 교수는 또 문헌(〈완산지 향리기〉)상 전주천이 오목대 아래로 흘렀다는 내용도 후백제 도성과 관련이 깊다고 보았다. 후백제 도성을 복원했을 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평지구간인 서쪽 구간이며, 지형적인 한계를 해결하기 위해 전주천 물줄기를 이용한 것으로 추정했다. 전주천이 서쪽을 보호해주는 해자와 함께 성벽의 역할도 담당했을 것이라는 추론이다. 그러나 아직 구체적 고증이 이루어지지 않아 곽 교수의 '인봉리'설은 기존 '전주 동고산성설''전주 노송동설''전주 감영지설'등과 함께 또하나의 설로 그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인봉리설'은 8일 국립무형문화유산원에서 열리는 한국고대사학회 주관 '후백제 왕도 전주의 재조명'학술대회에서 새 쟁점이 될 전망이다.

  • 문화재·학술
  • 김원용
  • 2013.11.08 23:02

'후백제 왕도 전주 재조명' 학술대회 8일 무형유산원

전주시가 주최하고 한국고대사학회(회장 임기환) 주관하는 '후백제 왕도 전주의 재조명'학술대회가 8일 국립무형유산원 공연장에서 열린다. 그동안 학계에서 후삼국 시대에 대해 고려의 통일로 넘어가는 과도기로 이해하고 후백제에 대해서도 깊이 있는 연구가 미진한 상황에서 후백제의 역사적 성격을 규명하고 후백제의 도읍지였던 전주의 유적들을 어떻게 보존할지 논의하는 자리다.학술대회는 노중국 계명대 교수가 '후백제와 전주'를 주제로 기조강연에 나서며, '전주 동고산성 발굴 성과와 의의'(강원종 전주문화유산연구원 실장)·후백제 궁궐위치와 도성규모'(김주성 전주교대 교수)·'후백제의 역사적 성격'(신호철 충북대 교수)·'후백제 지역의 사상적 동향'(장일규 한국학중앙연구원)·'후백제 도성 동고산성의 활용과 보존'(정재윤 공주대 교수) 등 5개 주제발표, 종합토론으로 진행될 예정이다.종합토론은 조법종 우석대 교수를 좌장으로, 곽승훈(충남대)·곽장근(군산대)·김선기(원광대)·김철주(문화재청)·서정석(공주대)·성정용(충북대)·송화섭(전주대)·오평근(전주시의회)·이강래(전남대)·조인성(경희대)·채미옥(국토지리원)씨가 참여한다.

  • 문화재·학술
  • 김원용
  • 2013.11.07 23:02

제23회 동리대상에 이명희 명창

판소리 부문 최고 권위의 상인 제23회 동리대상 시상식이 6일 고창읍 동리국악당에서 개최됐다. 50여 년을 판소리 중흥과 대중화에 헌신한 이명희(67) 명창이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경북 상주 출신의 이명희 명창은 14세때 부모를 따라 서울로 상경하여 한국정악원에 기거하면서 국악계에 입문, 이후 김소희박귀희 선생께 사사 받은 후 창극무대 등 다양한 공연에 활발하게 참여했다.이 명창은 1986년 12월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이수자로 지정된 후 1990년 제16회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 판소리 명창부 장원(대통령상)을 수상했으며, 1992년 대구광역시 무형문화재 제8호 판소리 예능보유자로 지정됐다. 1991년 국립극장에서 흥보가를 시작으로 춘향가 등 지금까지 6회의 완창 공연을 했다.특히, 이명희 명창은 스승인 김소희 명창이 작고하기까지 수년간 극진히 수발하며 모셨고, 스승 사후에 유품을 고창 판소리박물관에 기증하여 유업을 기리게 했다. 이날, 동리대상 시상식에 앞서 판소리박물관에서는 '만정 김소희 유품전'이 개막됐다.이명희 명창은 "판소리 사설을 집대성하고 후학 양성에 일생을 바치신 동리 선생의 위대한 뜻을 잊지 않고 계승발전에 힘써준 고창군과 지역주민에게 국악인과 더불어 감사드린다"고 수상소감을 밝혔다.이날 축하공연은 이명희 명창의 '춘향가 중 옥중상봉' 대목에 이어 '명인명창과 함께하는 국악관현악의 향연'으로 펼쳐졌으며, 가야금 명인 지성자와 해금연주자 강은일, 전라북도립국악관현악단의 합주로 창작곡으로 초연된 고창아리랑이 연주되기도 했다.

  • 문화재·학술
  • 김성규
  • 2013.11.07 23:02

국창 김소희 유품에 서린 소리 인생

고창 출신의 국창 만정 김소희 선생이 남긴 유품들을 만날 수 있는 전시회가 6일부터 2014년 5월까지 고창 판소리박물관에서 열린다. 근현대 여성명창으로서 판소리 최고봉을 이루어 국창으로 불렸던 만정 김소희 선생(1917.12.1~1995.4.17)이 타개한 지 18년만이다.만정은 일찍이 중요무형문화재 5호로 지정(1963)됐으며, 민속예술원(현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을 설립하고, 여성국악동호회, 한국국악협회 이사장을 역임했으며, 해외공연을 통해 한국 판소리의 진수를 세계에 알렸다.이번 전시회는 만정의 제자 이명희 명창이 2001년부터 2013년까지 고창군에 기증한 유품 124점과 만정의 딸 박윤초 명창이 기탁한 89점, 고창군에서 자체적으로 수집한 80여점의 자료를 바탕으로 만정의 삶과 예술을 조명하기 위해 기획됐다.선생이 사용하던 장롱, 경대, 핸드백, 비녀, 반지, 화장품 등 생활소품과 손때 묻은 소리북, 가야금 등 악기류, 공연복식소품류 등 손때묻은 일상 용품에서부터 문화재 지정증명서, 금관문화훈장, 국민훈장 동백장,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등 각종 상패와 증명서를 통해 선생의 삶의 흔적을 더듬을 수 있다. 또 송만갑정정렬박동실정응민 등 희귀 SP음반, 만정 선생이 낸 춘향가, 흥부가, 심청가 등 다양한 음반과 일제시대 녹음한 SP음반, 서예를 배우며 남긴 붓글씨 작품, 무용에도 일가를 이루었던 만정의 춤사위가 담긴 사진, 가족이 소장하고 있던 어렸을 적부터 말년에 이르는 수십 장의 사진들, 제자들과 김소희 명창과의 애틋한 정과 격려가 담겨있는 편지 등 유품 200여 점이 선보인다.특히 작고하기 전 마지막 2년 동안 제자인 이명희 명창이 운영하던 경북 청도군 판소리전수소에 머물면서 판소리를 가르치고 지도하는 모습이 담겨 있는 동영상 자료도 전시되며, 이러한 유품을 통해 만정 김소희 선생의 예술관과 판소리의 특징을 살펴볼 수 있다.만정은 생전에 제자 이명희 명창에게 보낸 편지에서, 판소리는 "첫째로 문학이요, 둘째로 음악적이요, 셋째는 극적으로 되어 있어 듣고 보는 사람의 감정을 여러 각도로 흥미진진하게 할 뿐더러 그 뜻이 또한 교육적으로 되어 있어 더욱 가치가 있다"고 적었다.6일 개막식에는 딸 박윤초 명창을 비롯, 제자 신영희, 이명희, 안숙선, 한정하, 김미숙, 유수정, 김차경, 이영태, 오정해 등 국내 최고의 명창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전시회를 축하했다.

  • 문화재·학술
  • 김성규
  • 2013.11.07 23:02

'후백제 왕도 전주' 시민강좌 ⑧ 후백제의 역사적 평가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은 어엿한 건국의 주인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역사기록을 남기지 못했다. 국호와 연호를 사용했고 통치이념과 정치체제를 수립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 등 여러 나라와 외교관계를 맺으면서 이상 국가를 꿈꾸었던 일국의 국왕이었다.그러나 왕호나 시호도 전해지지 못한 채 견훤으로 불리고 있다. 더구나 폭군이나 무능한 인물로 폄하되기까지 했다. 이러한 역사인식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일찍이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으로부터 이어져오고 있다. 그는 후백제를 독립 왕조로 인식하지 않았다. 따라서 후백제의 역사를 기록하지 않았으며, 다만 견훤 열전에서 간략하게 언급했을 뿐이다. 그것도 독립 열전을 마련하지 않고 궁예왕과 한데 묶어 반역 열전에 실었다. 이와 같은 김부식의 인식은 이후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의 역사가들에게도 이어지며, 현재의 전문 역사학자들 사이에도 널리 퍼져 있는 실정이다.최근 들어 후백제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아지며 이러한 현상은 역사 인식의 변화라는 관점에서 분명 새롭고 고무적인 현상이다. 이제는 그동안 역사 무대의 뒤편에 물러서 우리의 관심에서 멀어져 있던 후백제의 역사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아울러 견훤왕에 대해서도 기존의 역사 인식에서 벗어나 새롭게 다가가야 할 것이다.견훤왕은 신라 말 경상북도 상주 가은현에서 아자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선대는 본래 가은현의 농민이었으나 아버지 대에 이르러서는 사벌성(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의 장군으로 성장했다. 견훤은 20여세 때에 신라의 서울인 경주에 들어가 군인이 됐고, 그 후 서남해안을 수비하던 해군으로 파견되고 해군 장교로 출세했다. 서기 892년(진성여왕 6년)에 광주를 점령해 드디어 왕이라 칭하고 후백제를 건국했다. 그 후 900년에는 광주에서 전주로 천도하고 본격적인 국가체제를 수립함과 동시에 영토를 내륙으로 확장해 지금의 전라도와 충청도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광대한 영토를 지배했다. 그러나 후백제 왕실의 내분으로 말미암아 약 반세기 동안 존속했던 후백제는 멸망했고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했다.왕건이 고려를 건국할 즈음 후백제는 이미 전주로 천도해 국가 체제를 정비하고 중국과의 외교를 통해 대내외적으로 안정된 정권을 수립했다. 아울러 군사적으로도 고려군은 후백제군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양국의 전투는 최후의 몇 년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후백제가 연전연승하는 형세였다. 그러나 결국 왕건이 최후의 승리자가 되었고 그에 의해 통일이 이뤄졌다.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왕건과 견훤을 승자와 패자로 만들었는가? 종래의 평가는 전적으로 견훤 개인의 잘못으로 초래된 필연적인 결과라는 점을 강조해 왔다. 이러한 해석은 중대한 결함이 있다. 견훤의 성격이나 능력 등 개인적인 요인보다는 오히려 양국의 지배층을 구성한 정치집단의 성격, 국가의 운영체제, 대외관계, 피지배층에 대한 정책, 경제적군사적 여건 등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보다 실증적이고 다양하게 탐구 비교해야 한다. 역사상 승자와 패자의 행위가 곧 옳고 그름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이에 대해서는 이미 율곡 선생이 명쾌하게 지적한 바 있다. 그는 역사적 사건의 시비(是非)와 성패(成敗)는 무관한 것이며, 오히려 성패는 행(幸)불행(不幸)과 관련된 것이지 시비(是非)와 연결시켜서는 안되고, 성공한 자를 무조건 옳다고 해서도 안된다고 했다. 오늘날 역사를 이해함에 있어서 우리는 율곡 선생의 이와 같은 엄정한 사관을 새삼 본보기로 삼아, 그동안 견훤에 대한 평가가 기왕의 사료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거나 선입관에 따른 결과론적인 해석이 아니었는지 겸허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다.(끝)

  • 문화재·학술
  • 기고
  • 2013.11.04 23:02

국립전주박물관 '전북의 역사문물전 12, 익산' 개막

고조선시대부터 근대까지 익산지역의 역사와 지리적 중요성을 되새기는 전시가 마련된다. 더욱이 백제 무왕의 것으로 추정되는 치아와 왕궁리 오층석탑에서 출토된 금강경판의 미공개 면 등이 일반인에게 선보여 기대를 모으고 있다.국립전주박물관(관장 유병하, 이하 박물관)은 익산시, 전북일보, KBS전주방송총국, 국립문화재연구소,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와 공동으로 28일 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전북의 역사문물전 12, 익산' 의 개막식을 열고 29일부터 내년 2월9일까지 전시를 진행한다.이번 전시는 구석기시대부터 근대까지 마한의 중심이자 오래된 수도로서 익산의 위상을 살펴보는데 중점을 뒀다. 백제가 멸망한 뒤 부흥을 꾀했던 10세기 초에서 일제 강점기 근대까지의 역사뿐 아니라 문화를 조명해 가치를 제고했다. 눈에 띄는 유물로 천년이 넘는 세월을 오롯이 견디며 무왕의 비밀을 풀 수 있는 치아 2점을 볼 수 있다. 이 치아들은 무왕의 왕릉으로 추정되는 사적 제87호 익산시 석왕등 쌍릉에서 출토됐기 때문이다. 7세기 전반에 제작돼 국보 123호로 지정된 왕궁리 오층석탑의 사리병사리함뿐 아니라 함께 나온 금강경판도 19개 중 17개를 공개한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수각형향로(獸脚形香爐)인 보물 1753호 미륵사지 금동향로, 후백제시대의 왕궁리 오층석탑 금동불입상과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보살 손, 조선시대 심곡사 칠층석탑 출토 사리호 등 가장 주목할 만한 익산지역의 유물을 한 자리에 모았다.전시는 1부 마한의 중심, 2부 백제의 고도, 3부 부흥의 터전, 4부 전라도의 첫 고을 등 모두 4개 부문으로 구성됐다. 1부에서는 고조선 준왕의 남천지(南遷地)가 금마(金馬), 즉 익산인지를 밝힐 수 있는 다양한 청동기와 철기를 살펴볼 수 있다. 2부는 백제의 지방 거점에서 새로운 왕도로 발전해가는 삼국시대 익산의 모습으로 무왕이 조성한 궁성인 왕궁리유적, 왕실사찰 제석사, 미륵사지 유물을 통해 계획도시였던 익산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3부는 익산을 근거로 재기를 꿈꾸며 보덕국을 세운 고구려 유민, 백제의 계승을 공언한 견훤의 후백제와 관계된 전시품을 살펴볼 수 있다. 4부는 불교문화, 익산이 품고 낳은 사람들, 근대도시 익산의 빛과 그늘을 주제로 다양한 불상과 지도, 문헌이 전시된다.아울러 특별전을 기념하는 강연회와 심포지엄도 함께 열린다. 다음달 6일에는 청동기 연구자인 이건무 전 문화재청장이 '한국의 청동기문화-전북을 중심으로'라는 주제로 강연하며, 같은 달 9일에는 박물관 강당에서 '익산, 마한백제 연구의 새로운 중심'을 두고 학술회의가 진행된다.박물관 진정환 학예사는 "익산은 망국의 유허가 아닌 고조선, 백제, 후백제, 조선시대에도 주요한 도시로 기능했다"며 "익산 지역 문화의 다양성을 부각시키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 문화재·학술
  • 이세명
  • 2013.10.29 23:02

'후백제 왕도 전주' 시민강좌 ⑦ 왕건의 후삼국 통일

918년 6월, 왕건은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智謙) 등의 장군에게 추대돼 왕위에 올랐다. 궁예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창업주인 태조(太祖, 918~943)가 되었다. 그는 우선 나라 이름을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고려(高麗)라 했다. 신라에 대해서도 궁예와는 달리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왕위에 오르자마자 궁예가 새로 설치한 관계와 군현의 명칭을 다시 신라식으로 환원하였다. 신라에서 오는 사람들도 후대했다. 후백제에 대해 즉위 초기에는 우호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다 920년(태조 3)에 견훤이 신라의 합천초계를 공격하고 신라의 구원 요청에 고려가 응하면서 둘 사이에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924년에 일어난 조물군(曹物郡, 구미 부근으로 추정) 전투 이후 인질 교환으로 잠시 소강상태를 보이던 그들은 927년(태조 10)에 왕건이 용주(龍州, 지금의 예천)를 선제공격하면서 다시 대립했다. 그 후 견훤의 신라 침공 후 공산(公山, 지금의 대구 팔공산)에서 후백제군을 만나 싸웠으나 크게 패했다. 그러나 930년(태조 13)에 고창군(古昌郡, 지금의 안동) 전투에서 김선평(金宣平)권행(權幸)장길(張吉) 등의 도움으로 견훤군을 크게 무찔렀다. 승기를 잡은 왕건은 견훤과 경순왕(敬順王, 927~935)의 귀순을 받고 후백제 신검(神劍)과 선산 부근의 일리천(一利川)에서 마지막 결전을 벌였다. 여기서 패배한 신검은 황산군(黃山郡, 지금의 충남 논산군 연산면)으로 도망해 진영을 정비했다. 그러나 이를 추격한 고려는 여기서도 크게 승리, 936년에 후삼국을 통일했다. 이 기념으로 왕건은 연산에 개태사(開泰寺)라는 절을 세우기도 했다.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개인적 자질과 역량 때문이기도 했지만 '호족(豪族)'의 협조 덕택이기도 했다. 그는 호족의 딸과 결혼을 추진해 29명의 부인을 뒀다. 호족의 자제를 기인(其人)으로 삼아 수도에 올라오게 하는 조치도 취했다. 한편으로 그는 일반백성을 위한 정책적 배려도 아끼지 않았다. 우선 농민의 조세부담을 경감했다. 그리고 흑창(黑倉)이라는 빈민구제기관을 설립해 가난한 백성에게 곡식을 나눠 주기도 했다. 또 억울하게 남의 노비가 된 자들을 양민으로 풀어주는 정책도 실시했다.이러한 고려의 후삼국 통일은 외부세력의 간섭 없이 진행된 것이 특징이며 북방정책을 추진해 영토를 청천강까지 확대했다. 또 경주 진골 중심의 골품제 사회가 붕괴되고 지방 호족 중심의 능력 사회로 변한 점이 특징이다. 고려의 후삼국 통일은 동북아시아사의 전개에서 중국 및 북방민족과 함께 삼각의 축을 형성하는 계기가 됐다. 고려(高麗)-송(宋)-요(遼, 또는 金)의 삼각구도를 형성해 견제와 균형을 통해 거란(遼)의 침략과 여진(金)의 압력을 물리칠 수 있었다.

  • 문화재·학술
  • 이세명
  • 2013.10.28 23:02

무형문화유산 진수 맛보세요

문화재청 국립무형유산원(원장 이길배)은 오는 11월1일부터 이틀간'해설이 있는 무형유산 공연'을 연다. 이번 공연은 국립무형유산원 출범을 기념하기 위한 시범공연으로, 수요자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는 '문화유산 3.0'의 취지에 따라 대중들이 무형문화유산을 쉽게 이해하고, 공연을 통해 우리 무형문화유산의 진수를 누릴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마련됐다. 공연은 한국문화의집(KOUS) 진옥섭 예술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11월 1일 오후7시 국립무형유산원 얼쑤마루(대공연장)에서는 '영남 춤, 호남 놀이'공연이 펼쳐진다. 영남지역 탈춤 중 하나인 고성오광대(고성오광대놀이 보존회) 전 과장(科場, 탈놀이에서 판소리의 마당에 해당하는 말)과 호남지역의 경문유희(진도다시래기 중 한 장면으로 거사가 장님으로 분장을 해서 경문을 읽는 대목, 강준섭 보유자), 설장구(김동언, 우도농악 보유자), 부포놀이(유지화, 정읍농악 보유자) 등 영남과 호남의 신명 나는 춤과 놀이판을 즐길 수 있다. 11월 2일 오후 3시 얼쑤마루(소공연장)에서는 '산조와 소리 이야기'공연으로 준비됐다. 이날 공연에서는 이생강 보유자(대금산조), 김무길 전수조교(거문고산조), 김일구 전수조교(판소리) 등 3인의 명인명창 이야기와 함께 연주를 감상할 수 있다. 공연은 무료. 문의 063)280-1400,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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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원용
  • 2013.10.25 23:02

'후백제 왕도 전주' 시민강좌 ⑥ 궁예와 견훤

△궁예의 선구(先驅), 견훤= 889년 진성여왕은 재정 부족을 이유로 사신을 보내 농민에게 세금 납부를 독촉했다. 하지만 농민들은 이에 반발해 곳곳에서 반기를 들었다. 농민봉기는 해를 넘기면서 계속됐다. 일부 농민은 떼도적이 되어 설쳤고, 지방의 세력가들은 자신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저마다 군사를 양성했다. 이처럼 혼란이 계속됐지만 신라 정부는 이미 통제할 힘을 잃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틈타 가장 먼저 큰 세력을 형성했던 인물이 바로 견훤이었다. 889년 반기를 든 견훤은 892년 무진주(광주)에 터를 잡고, 왕에 버금가는 지위를 누렸던 것이다. 궁예는 891년 죽주(안성 죽산면)의 세력가 기훤의 부하가 됐다. 기훤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자 다음 해에는 북원(원주)의 세력가 양길의 부하가 되었다. 승려였던 궁예가 신라 말의 혼란에 뛰어들었던 것은 혼란을 이용해서 자신의 나라를 세우려는 야망을 품은 탓이었다. 그런 그에게 견훤은 선구자로 비쳐졌을 것이다. 더욱이 892년 견훤은 양길에 비장(裨將)이라는 관직을 내려주었다. 양길을 주인으로 모시고 있던 궁예는 견훤을 본보기로 여겼을 것이다.견훤은 900년 의자왕의 원한을 씻겠다면서 국호를 백제라고 하고 스스로 왕이 됐다. 이를 삼국시대의 백제와 구별해 흔히 후백제라고 한다. 이듬해 901년에는 궁예가 고구려의 복수를 내세우면서 나라 이름을 고려라고 하고 왕을 일컬었다. 이를 삼국시대의 고구려나 왕건의 고려와 구별하기 위해 후고구려라고 부르거니와, 후고구려의 건국은 후백제의 건국에 대응한 것이었다. 견훤이 완산주 일대에 살던 백제 유민의 백제에 대한 향수를 자극해 건국하자, 궁예도 한산주패강진 일대에 살던 고구려 유민의 호응을 기대하고 건국한 것이다. 이로써 신라와 후백제, 후고구려가 정립하는 이른바 후삼국시대가 시작됐다. 하지만 신라는 이미 정세를 좌우할 힘을 갖고 있지 못했다. 견훤과 궁예 두 영웅이 패권을 다투기 시작했다.△궁예와 견훤의 패권 다툼= 궁예와 견훤의 첫 충돌은 906년 상주에서 벌어졌다. 궁예는 이곳을 점령해 신라를 공격할 수 있는 전진기지를 확보하려고 했다. 역시 신라를 노리고 있던 견훤도 이를 막아야 했다. 상주는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가 지배하던 곳이었던 만큼 더욱 내줄 수 없었다. 여러 차례 격돌 끝에 궁예가 보낸 왕건의 군대가 승리했고, 견훤은 907년 일선군(선산) 일대를 차지하고 궁예와 대치했다. 궁예 말년에는 이흔암이 후백제의 웅주(공주)을 습격해 차지했는데 이 때 운주(홍성) 등 10여 고을도 궁예의 소유가 됐다. 공주 일대에서도 궁예와 견훤이 일전을 겨뤘는데, 궁예가 승리했다.궁예와 견훤은 금성(나주) 일대의 지배권을 두고 여러 차례 충돌했다. 나주 일대는 후백제의 배후였고, 또한 해상 교통의 요지였다. 궁예는 차지하고 싶은 곳이었고, 견훤은 잃어서는 안 되는 곳이었다. 909년 궁예의 명을 받은 왕건은 덕진포(영암 덕진면) 일대에 화공으로 견훤의 대군을 격파하니 견훤은 작은 배를 타고 겨우 귀환했다. 이어 왕건은 견훤 편이었던 해상세력가 능창을 잡아 궁예에게 압송했다. 910년 견훤은 몸소 보병과 기병 3000명을 이끌고 나주성을 포위했는데 궁예가 해군을 동원해 이를 물리쳤다. 912년에는 다시 덕진포에서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때에는 궁예가 직접 원정해 견훤을 무찔렀다. 이후 나주 일대는 궁예의 소유가 되었다. 견훤을 본보기로 삼아 세력을 모으고 건국했던 궁예였지만, 그 후 견훤과 여러 차례 격돌해 승리를 거둬 궁예는 전국의 3분의 2를 차지면서 큰 세력을 떨치게 됐다.

  • 문화재·학술
  • 기고
  • 2013.10.21 23:02

'포쇄'를 아시나요…선조의 서책 보관 지혜

역사의 생명은 기록이다. 기록은 내용뿐 아니라보관도 중요하다. 태조 이성계부터 제25대 철종 때까지 472년 동안의 역사를 기록한 조선왕조실록이 6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전해진 것은 포쇄를 포함한 엄격한 보관체계가 가동됐기에 가능하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탄 춘추관, 충주, 성주 등 3곳의 사고(史庫)와 달리 유일하게조선왕조실록을 온전히 지켜낸 전주사고의 정신을 되새기기 위해 전주시가 포쇄를 재현한다. 고서인 조선왕조실록은 한지로 만들어져 습기와 책벌레 침범에 약하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장마철을 피해 봄이나 가을의 맑은 날을 택해 바람을 쐬고햇볕에 말리는 실록 포쇄(曝 日+麗)를 3년 혹은 5년마다 정기적으로 시행했다. 장마가 끝난 처서 즈음에 농부는 곡식을 말리고, 부녀자는 옷을 말리고, 선비는책을 말린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이를 담당하는 포쇄별감이 춘추관에 설치됐고 포쇄때마다 일지를 썼을 정도다. 포쇄는 매우 엄격하게 진행됐는데, 왕실에서 사관(史官)을 파견하고 실록포쇄 형지안에는 누가, 몇 명이 참여했는지 등 시행절차를 자세히 기록토록했다. 그 절차는 사관이 관복을 입고 네번 절을 한 다음 사고를 열어 책을 꺼내 포쇄하고 기름종이로 잘 싸서 천궁 혹은 창포와 함께 궤에 넣고 봉인했다. 이는 충해와 부식을 방지하기 위한 선조의 지혜였던 셈이다. 현대 일반 가정에서는 에어컨이나 제습기를 이용하면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습기를 머금은 책을 말려 포쇄를 대신할 수 있다. 책이 보관고에 있다면 20℃의 온도와 50% 안팎의 습도가 최적의 환경이다. 실내온도를 20℃로 유지하기 어렵다면 온도가 34℃ 높은 것은 문제없으나 습도는 최대한 맞춰야한다. 전국에서 처음으로 19일 오후 한옥마을 경기전(慶基殿) 안 전주사고에서 열리는포쇄행사는 이 같은 역사적 고증을 거쳐 재현된다. 먼저 송하진 전주시장 등 참여자들이 포쇄시작을 알리는 4배를 한다. 이어 사고 문을 열어 실록의 이상 유무를 확인하는 봉심과정을 거쳐 실록 궤를 개봉해 실록을 꺼낸다. 실록을 한 장씩 넘기며 바람을 쐬는 거풍을 마치면 실록을 궤에 넣고 자물쇠를 채운다. 이때 자물쇠에는 포쇄를 한 날짜와 책임자 등을 기록한 한지가 붙여진다. 마지막으로 장서 점검 기록부인 형지안을 작성하고 다시 4번의 절로써 예를 갖춘다. 송하진 전주시장은 "조선왕조실록이 수백년을 견뎌내고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될 수 있었던 것은 포쇄와 같은 지혜와 정성이 깃들어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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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
  • 2013.10.17 23:02

'후백제 왕도 전주' 시민강좌 ⑤ 전주 동고산성

전주 동고산성은 1981년에 처음으로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그 해에 전북도기념물 제44호로 지정됐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본격적인 발굴조사는 7차례 이뤄졌다. 그간의 발굴조사에서는 대형 건물터를 비롯해 전주성(全州城)이라고 찍힌 기와가 나와 명실상부 후백제 도읍임이 자명해졌고, 후백제 견훤왕에 의해 성을 다시 쌓았던 흔적들이 확인됐다. 그러나 아쉽게도 중요한 고고학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도기념물로에 머문 채 국가의 중요한 사적으로 끈을 잇지 못하고 맥없이 32년의 시간을 흘러 보냈다. 후백제 정통성의 희미한 맥은 전주 동고산성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전주 동고산성은 전주도성의 일부이자 전쟁시 피난할 수 있는 배후산성으로 견훤의 정치와 군사가 살아 있던 곳이다. 지난 1990년과 1994년에 조사된 대형 건물터는 정면 22칸, 측면 4칸으로 산성의 중앙부 계단상의 대지에 자리하고 있다. 규모면에서 고구려 안학궁(남궁, 정면 11칸, 측면 4칸)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아주 큰 편이다. 안학궁은 고구려 행정부가 평상시 거주하며 정치를 의결하였던 것과 상대적으로 전주 동고산성의 대형 건물터는 유사시 임시로 사용됐던 정전이었다. 더욱이 전주성이 찍힌 기와류가 이 대형 건물터에서 출토되었는데, 기와에 그려진 문양은 신라말에서 고려초에 제작된 것으로 해당된다. 이 대형 건물터 이외에도 규모가 남달리 큰 건물터가 성벽의 남쪽을 따라 줄지어 지어졌으며, 그 중에 제 7건물터는 정면 16칸, 측면 4칸에 이른다. 이러한 건물터에서는 주로 토기와 같은 그릇보다는 기와가 많이 출토되었으며, 벼슬 관(官)이 찍힌 기와가 다수 확인됐다. 이와 똑같은 기와는 전주시내 경기전과 구도청의 발굴조사에서도 확인되고 있어 견훤의 평상시 행정을 맡은 곳은 전주시내 일원으로 볼 수 있겠다. 동고산성에는 4개 성문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중에 북문터와 동문터가 확인됐다. 서문터는 아직 찾지 못했다. 다만 서문터에서는 문기둥 밑에 박았던 화금(신쇠)이 출토돼 그 빌미를 남겨주고 있다. 서문터는 동고산성의 정문으로 추정되는데 대형 건물터의 방향이 서향이고, 북문터는 어긋문, 동문터는 현문(다락문)으로 암문(비밀리 출입하는 문)인 점에서 그러하다.올해 발굴조사가 이뤄졌던 서문터에서는 성문의 흔적은 찾지 못했으나 견훤에 의해 성벽이 다시 쌓아졌던 흔적이 확인됐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전주는 신문왕 5년(685)에 완산주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견훤왕은 효공왕 4년(900) 완산주에 도읍하고 후백제왕이라 칭하고 대대적인 토목공사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 일환으로 기존의 성벽을 대신하는 성벽축조도 이루어졌던 사실이 밝혀졌다. 즉 성벽의 외부에 네모나게 잘 다듬은 석재를 사용하여 만든 성벽이 바로 새롭게 축성된 것임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의 남아 있는 전주동고산성에서 후백제 견훤왕은 도읍을 정비하면서 유사시 대피할 수 있는 피난성을 견고하게 구축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네모반듯한 성돌은 그의 지도력과 도도한 미적인 면도 엿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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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
  • 2013.10.14 23:02

국립무형유산원 출범 기념 중요무형문화재 기·예능 합동공개

"이건 열쇠 구멍 덮개를 밀어서 열쇠를 넣고 오른쪽으로 한 번 왼쪽으로 한 번 돌려야 열려. 저건 7단계를 거쳐야 열 수 있는 자물쇠인데 단수를 늘린다고 좋은 게 아니고 전체적인 완성도가 중요해."지난 11일 중요무형문화제 제64호 두석장 박문열 선생(63)이 전주를 찾아 비밀 자물쇠 여는 방법을 시연하며 "조선시대에는 많았지만 일제시대와 전쟁통에 상당수가 해외로 반출돼 안타깝다"고 말했다. 두석장은 놋쇠 장석을 만드는 장인이다. 장석은 가구 등에 결합부분을 보강하거나 열고 닫을 수 있는 자물쇠 등 금속제 장식을 말한다. 두석장 맞은 편에는 중요무형문화재 제67호 탕건장 김혜정 보유자(67)가 이수자인 두 딸과 함께 나란히 앉아 제주도산 말총을 한 올 한 올 엮어 탕건(감투)을 만들고 있었다. 김혜정 씨는 "1개 만드는데 족히 6개월은 걸린다"며 "바늘, 말총, 손 이 세가지로만 만들어진다"고 설명했다. 내년 5월 정식 개관을 앞둔 국립무형유산원(이하 무형유산원)이 출범 기념 맛보기 행사를 열었다.문화재청(청장 변영섭)이 주최하고 한국무형유산진흥센터(이사장 임돈희)가 주관한 '중요무형문화재 기예능 합동공개행사'가 지난 11일 전주시 동서학동 옛 전북도 산림환경연구소 자리에 건립된 무형유산원에서 열렸다. 합동공개행사는 오는 27일까지 매주 금토일요일에 예능과 기능 분야의 무형문화재가 일반인을 대상으로 시연체험을 병행한다. 우리나라 전통문화의 교류재현전승체험 거점공간을 표방하는 무형유산원은 전승마루 1층 교육공간에서 기능 분야의 시연 행사를 펼쳤다. 공예 관련 중요무형문화재 16개 종목의 17명의 보유자들이 참여했다. 도내 출신으로는 중요무형문화재 제117호 한지장 홍춘수, 중요무형문화재 제110호 윤도장 김종대가 포함됐다. 12일에는 도내 예능분야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 산조 강정열 보유자와 제12호 진주검무(진주검무 보존회)의 무대가 우석대 박희태 교수(실용무용지도학과)의 진행으로 이뤄졌다. 무형문화재 시연 관람은 무료이며, 매주 주말 오전 10시30분~12시30분, 오후 3~5시에 운영한다.시범운영 기간인 무형유산원은 이와 함께 '기증자료 특별전'을 오는 31일까지 진행한다.

  • 문화재·학술
  • 이세명
  • 2013.10.14 23:02

전주 국립무형유산원 출범 기념 '무형유산원 맛보기' 열려

문화재청 국립무형유산원(원장 이길배)은 유산원 출범을 기념하기 위해 시범행사 '무형유산원 맛보기'를 11일부터 11월2일까지 전주 국립무형유산원 공연장 등에서 연다고 밝혔다.문화재청 소속기관으로 지난 1일 정식 출범한 국립무형유산원이 마련한 이번 행사는 무형문화재 전승자들의 솜씨와 멋, 흥을 직접 보고 감상할 수 있는 자리다. 내년 확대 개관을 앞둔 국립무형유산원을 현장에서 미리 만나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무형유산, 전주에 깃들다= 문화재청이 주최하고 한국무형유산진흥센터(이사장 임돈희)가 주관하는 중요무형문화재 기예능 합동공개 행사가 11일부터 펼쳐진다. '무형유산, 전주에 깃들다'는 타이틀 공예분야와 예능분야 무화재 보유자들이 직접 시연하는 행사다. 공예분야는 궁시장, 소목장, 한지장, 단청장 등 공예분야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 17명이 직접 시연하는 자리로 꾸며진다. 행사는 11일부터 27일까지 3주간 진행된다. (매주 금토일, 오전 10시30~분 12시30분/오후 3시~7시 국립무형유산원 전승마루)예능분야 합동공개행사는 '진주검무'와 '가야금산조 및 병창' 공연은 12일 오후 3시 얼쑤마루(대공연장)에서 만날 수 있다.△'영남 춤, 호남 놀이'= 11월 1일부터 2일까지 무형문화유산 공연이 한바탕 펼쳐진다. 첫째 날 오후 7시 얼쑤마루(대공연장)에서 진옥섭 예술감독(한국문화의집)의 사회로 '영남 춤, 호남 놀이' 공연이 준비됐다. 영남의 탈춤 중 하나인 고성오광대(고성오광대놀이보존회) 전 과장(科場)과 호남의 경문유희(강준섭, 진도다시래기 보유자), 설장구(김동언, 우도농악 보유자), 부포놀이(유지화, 정읍농악 보유자) 등이 선보이며, 영남과 호남의 신명과 흥을 함께 감상할 수 있다.둘째 날에는'산조와 소리 이야기'공연이 오후 3시 얼쑤마루(소공연장)에서 열린다. 공연에는 이생강 보유자(대금산조), 김무길 전수조교(거문고산조), 김일구 전수조교(판소리) 등 우리 민속악의 진수를 선보여줄 명인명창이 참여하며, 가을의 정취와 함께 명연주를 감상할 수 있는 기회다.△대학 연계 교육과 무형유산 기증자료 특별전= 이달 20일까지 매주 주말(토일)에는 국립무형유산원 전승마루 2층에서 대학 연계 교육과정이 이뤄진다. 처음으로 이뤄지는 이번 교육에서는 이욱 전수조교(단청장)와 한서대학교 장경희 교수, 한서대학교 문화재보존학과 학생들이 단청의 역사와 의미를 바탕으로 단청의 전 과정을 습득하여 한국적 미의식을 알아가는 시간으로 진행된다. 또 지난 9월부터 시작된 '2013 무형유산 기증자료 특별전'도 누리마루(기획전시실)에서 이달 31일까지 진행된다.국립무형유산원 출범 기념 '무형유산원 맛보기'의 모든 행사는 무료로 진행되며, 무형문화유산과 국립무형유산원에 관심 있는 누구나 관람이 가능하다. 문의 063)280-1400

  • 문화재·학술
  • 김원용
  • 2013.10.09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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