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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백제] (179) 9장 신라의 위기 15

비담이 눈을 치켜뜨고 앞에 선 화랑 석기수를 보았다. 정말이냐? 예, 대감, 제가 직접 들었습니다. 여왕이 죽었어? 예, 우리가 매복한 군사들에게 피살당했다는 것입니다. 황룡사 앞에서 말이냐? 예, 대감. 비담이 입을 반쯤 벌리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전 묘시(6시)무렵, 반월성의 청에는 10여명의 장수가 모여 있었는데 모두 서둘러 왔기 때문에 갑옷도 제대로 입지 않았다. 그때 대장군이며 비담의 오른팔인 염종이 말했다. 대감, 심상치가 않습니다. 이것은 김유신, 김춘추의 간계요. 글쎄, 간계라도 그렇지. 여왕이 죽었다지 않는가? 그런 헛소문을 뿌려서 군사들이 사기를 높인다는 말인가? 여왕을 우리가 죽였다는 소문을 내면 김유신군은 악에 받쳐 덤빌 것입니다. 백제 지원군까지 온 마당에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김유신의 간계는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때 잡찬 김홍무가 나섰다. 김춘추 또한 능히 그런 짓을 하고도 남을 위인입니다. 그런 소문 말인가? 아니오. 김홍무가 머리를 저었다. 김홍무 또한 진골 왕족이다. 거기에다 김춘추가 압독주 도독이었을 때 3년 동안 부장(副將)으로 측근에서 머물었기 때문에 성품을 안다. 김홍무가 말을 이었다. 여왕을 죽이고 우리가 죽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김춘추는 능히 그럴만한 위인입니다. 아니, 그럼 그래놓고 백제군의 힘을 빌려 왕위에 오른단 말인가? 아닙니다. 김홍무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비담을 보았다. 그러면 제 소행이 탄로가 날 가능성이 크니 이번에는 왕위에 오르지 않을 것입니다. 어허, 답답하구나. 비담이 버럭 소리쳤다. 그래서 어떻게 한다는 말인가? 왕위에 오를 성골이 누가 남았습니까? 김홍무가 되묻자 비담이 눈을 치켜떴다. 누구냐? 말하라. 승만이 있습니다. 그순간 청 안에 물벼락이 떨어진 것처럼 조용해졌다. 그렇다. 이 세상에 세명의 성골(聖骨)왕족이 남았다. 하나가 여왕 덕만이요. 두번째가 여왕의 동생이며 의자왕의 모친인 선화공주, 그리고 마지막 하나가 여왕의 사촌동생 승만(勝曼)이다. 승만은 덕담의 부친 진평왕의 동생 딸인 것이다. 그, 승만을 다시 여왕으로? 비담이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을 때 김홍무가 긴 숨을 뱉고 나서 말했다. 제가 김춘추의 마음이 되어서 생각을 해본 것입니다. 여왕 덕만이 백제군을 끌어들여 백제와의 합병이 목전에 닿았으니 김춘추는 이 기회에 여왕과 대감까지 제거하는 음모를 꾸몄을 것입니다. 모두 숨을 죽였다. 김홍무도 지략과 용병술에 뛰어난 무장이다. 김홍무의 말이 이어졌다. 김춘추는 일단 승만을 여왕으로 삼은 후에 백제군을 위무하고 돌려보내고 나서 신라왕이 되려고 할 것입니다. 쓴웃음을 지은 비담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내가 백제, 김유신군을 전멸시키면 달라진다.

  • 문학·출판
  • 기고
  • 2018.09.12 19:25

[불멸의 백제] (178) 9장 신라의 위기 14

무엇이? 자리를 차고 일어선 협려가 앞에 선 전령을 노려보았다. 여왕 전하가? 예, 황룡사 앞 산기슭에서. 전하를 확인했느냐? 예. 달려온 전령이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가쁜 숨을 뱉으면서 전령이 말을 잇는다. 여왕 전하의 시신을 황룡사로 모시고 들어가는 것까지 확인을 했습니다. 축시(오전 2시) 무렵, 백제군 본진이 위치한 대성벌로 달려온 전령이 여왕 덕만의 죽음을 보고했다. 그때 말발굽 소리가 어지럽게 울리더니 곧 백제 대장군의 진막 안으로 신라군 전령이 들어섰다. 불빛에 비친 신라군 전령의 얼굴이 눈물범벅이 되어 있다. 백제 대장군께 말씀드리오! 협려 앞에서 무릎을 꿇은 신라 전령이 소리쳤다. 그때 진막 안의 모든 장수가 전령을 둘러쌌다. 협려가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말하라. 황룡사 앞 산기슭에서 여왕 전하께서 매복하고 있던 비담군의 기습을 받고 돌아가셨습니다. 네가 보았느냐? 제가 시신을 황룡사에 모시고 달려온 길입니다! 소매로 눈물을 닦은 전령이 붉게 충혈된 눈으로 협려를 보았다. 여왕 전하께서는 칼에 가슴을 찔려 돌아가셨습니다. 함께 돌아갔던 이찬과 위사장은 어떻게 되었느냐? 모두 전멸했습니다! 너는 누구냐? 황룡사에 있던 위사부장 김기정입니다! 두 손으로 땅바닥을 짚은 김기정이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껴 울었다. 대장군! 이 원수를 갚아 주십시오! 그때 진막 출입구에 서있던 장수 하나가 소리쳤다. 대장군, 김유신 대장군이 오시오! 협려가 머리를 들었을 때 김유신이 10여명의 장수를 거느리고 서둘러 진막으로 들어섰다. 김유신의 본진에서 주연을 마치고 헤어진 지 두시진 만이다. 협려에게 다가온 김유신의 두 눈도 충혈되어 있다. 대장군, 여왕 전하께서 비담군의 기습을 받고 돌아가셨소.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 김유신이 협려를 보았다. 내일 아침에 비담군을 칠 것이오. 백제군과 양쪽에서 협공을 하는 것이 나을 것 같소. 좋습니다. 백제군이 좌측을 맡지요. 그때 김유신이 번들거리는 눈으로 협려를 보았다. 여왕 전하께서 비담에게 살해되었다는 말을 듣고 모두 이를 갈아붙이고 있습니다. 모두 일당백이 될 것이오. 아침 진시(8시)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불화살을 신호로 좌우에서 협공하도록 합시다. 알겠소. 퇴로는 우측 장막산성 골짜기를 틔워 놓겠소. 협려가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였다. 김유신의 용병술에 감탄한 것이다. 궁지에 몰리면 쥐도 고양이한테 덤비는 법이다. 더구나 비담군은 막강한 전력이다. 수세에 몰렸다고 뒤까지 막으면 죽기를 각오하고 역공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오히려 전세가 뒤집힐 수도 있다. 그때 몸을 돌리던 김유신이 충혈된 눈으로 협려를 보았다. 비담군을 격멸시키고 나서 전하의 장례를 치르도록 하겠소.

  • 문학·출판
  • 기고
  • 2018.09.11 19:27

전주 한옥마을에서 만나는 독서대전 기획전시

2018 전주독서대전의 문학정신을 전시로 느껴보자. 오는 14일부터 16일까지 전주 한옥마을 내 한벽문화관완판본문화관 일대에서 독서대전이 열리는 가운데 문화시설과 거리 곳곳에서 기획전이 이어진다. △야외 기획전 전주를 그리다(14일~16일 한벽문화관 외벽과 거리 등) 전주의 역사문화 콘텐츠가 담긴 문학 작품, 전주의 문학상 혼불문학상 수상작과 독후감, 작고작가전 전주 출신 소설가 이정환 등 세 가지 주제가 전시된다. 전주가 담긴 문학 작품은 전주를 대표하는 역사문화 콘텐츠를 비중있게 다룬 시, 소설, 희곡, 수필 20편을 소개하는 형태다. 태조어진과 어진화사를 소재로 한 서철원의 장편소설 <왕의 초상>, 전주의 1987년 민주화운동을 그린 최형의 시집 <다시 푸른 겨울>, 정여립을 앞세운 홍석영의 장편소설 <소설 정여립> 등이다. 신영복, 최명희, 박경리, 양귀자, 이병천, 이병초, 박성우 등의 작품 속 전주도 찾아본다. 다양한 문학상 수상작을 전시하는 전주의 문학상은 올해 혼불문학상과 혼불 독후감대회에 주목했다. 전주 출신 이정환(19301984) 소설가의 삶과 작품 세계를 보는 전시도 있다. 기획전시를 총괄한 최기우 극작가는 전주는 한국 문학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긴 튼실한 바탕이라며 전주독서대전에서 도시 전주가 가진 힘을 확인하고, 우리 사회의 온도를 높일 수 있는 건강한 독자가 많아지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기획전 책 깎는 소년 완판본에서 놀다(14일~30일 완판본문화관) 완판본문화관에서는 전주의 기록 문화를 이야기하는 전시 책 깎는 소년, 완판본에서 놀다를 기획했다. 완판본을 주제로 한 동화이자 2018 전주의 책으로 선정된 장은영 작가의 <책 깎는 소년> 줄거리를 바탕으로 준비했다. 각수(목판에 글자와 그림을 새기는 사람)가 되고 싶은 소년 봉운을 따라 완판본 제작과정이 나온다. 전주는 목판을 통해 기억과 기록을 담아내고 왕성한 출판문화를 이뤄냈던 곳이다. 조선시대 전주에서 찍은 책들은 전국으로 보급되면서 출판문화의 꽃을 피웠다. 목판을 깎아 책판을 만드는 각수, 한지를 만드는 사람, 책을 엮어 사고파는 서포(書鋪)의 주인 등 다양한 사람들의 노력이 모여 피워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가장 전주다운 문화를 만들어 낸 것이 바로 완판본이다. 안준영 완판본문화관장은 각수인 저와 장은영 작가는 완판본으로 엮였지만 각자 다른 방식으로 완판본을 기록하고 있다며 두 사람의 이야기를 펼쳐 다양한 방식으로 소개하는 것이 전시의 방향이라고 밝혔다. 박지윤 일러스트레이터가 그린 동화 속 삽화가 설명의 재미를 더한다. 저자인 장은영 작가가 전시를 소개하는 북 큐레이션도 놓칠 수 없다.

  • 문학·출판
  • 김보현
  • 2018.09.11 19:27

[불멸의 백제] (177) 9장 신라의 위기 13

이놈들! 신라 장수라면 떳떳하게 나서라! 내가 여왕이다! 여왕이 다시 소리쳤을 때 주위의 소음이 줄어들었다. 습격자들이 주춤한 것이다. 그때 김석필이 소리쳤다. 이놈들! 역적으로 몰려 9족이 몰살당하고 싶으냐! 칼을 버리고 귀순하면 오히려 충신으로 대우하겠다! 여왕 전하께서 윤허하실 것이다! 그때였다. 어둠속에서 나타난 괴한 하나가 김석필에게 칼을 후려쳤다. 김석필이 칼을 들어 막았지만 힘에 밀렸다. 찰캉! 다시 한 번 칼날 부딪치는 소리가 나면서 김석필이 비틀거렸을 때 사내의 칼날이 날았다. 으악! 어깨에서 옆구리까지 비스듬히 베어진 김석필이 처절한 비명을 질렀을 때 다시 함성이 울렸다. 이제는 살육이다. 전하! 막혔습니다! 칼을 쥔 위사장 요찬이 이 사이로 말했다. 가마를 등지고 선 여왕의 앞에 서서 요찬이 울부짖듯 말했다. 마마, 이놈들은 비담의 무리가 아닌 것 같습니다! 함성과 칼날 부딪치는 소리가 지척에서 울렸고 어둠 속에 습격자의 움직임도 선명하게 드러났다. 이쪽도 여왕의 친위 위사들이다. 20여명 밖에 안 되었지만 그 몇 배나 되는 습격자를 맞아 분전하고 있다. 가마 주위를 둘러싸고 다가오는 습격자들을 막는 것이다. 에익! 마침 빈틈을 파고 들어온 습격자의 가슴을 장검으로 깊게 쑤신 요찬이 발로 몸통을 밀면서 칼을 뽑았다. 가슴을 찔린 습격자가 낮은 신음만 뱉은 채 발 밑으로 쓰러졌다. 그때 요찬이 쓰러진 습격자가 덮어 쓴 복면을 뜯어내듯이 벗겼다. 얼굴을 보려는 것이다. 깊은 밤, 불도 없었지만 별빛이 선명했다. 아앗! 사내의 얼굴이 드러난 순간 요찬이 외침을 뱉었다. 전하! 이놈이. 요찬이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고 여왕이 머리를 돌려 죽은 사내의 얼굴을 보았다. 별빛을 받은 사내의 얼굴이 희다. 그리고 낯이 익다. 그때 요찬이 소리쳤다. 이찬 김춘추의 측근인 장군 김정복이요! 으음, 이놈들. 여왕이 가마에 등을 붙이고는 신음했다. 에익! 요찬이 다시 덮쳐온 습격자 둘을 맞아 맹렬한 기세로 칼을 후려쳤다. 여왕이 눈을 치켜뜨고 밤하늘을 보았다. 이제 알았다! 이놈! 김춘추! 여왕 덕만(德曼)의 목소리가 밤하늘에 날카롭게 솟아올랐다. 역적 김춘추! 네 짓이었구나! 에익! 습격자 하나를 벤 요찬이 칼을 치켜들기 전에 다른 습격자의 칼날이 허리를 베고 지나갔다. 으윽! 요찬의 신음에 이어서 여왕의 외침이 이어졌다. 이번에는 더 크다. 역적 김춘추! 네가 백제와의 합병을 막으려고 나를 죽이는 구나! 에익! 요찬의 기합, 그러나 후려친 칼이 빗나갔고 습격자의 두 번째 칼날이 가슴을 꿰뚫었다. 숨을 들이켠 요찬이 뒤로 물러서면서 여왕을 보았다. 전하! 그 순간 요찬은 뒤쪽에서 나타난 습격자가 여왕의 가슴을 칼로 찌르는 것을 보았다.

  • 문학·출판
  • 기고
  • 2018.09.10 19:20

[불멸의 백제] (176) 9장 신라의 위기 12

여왕의 거처인 황룡사 입구가 보였다. 대문 좌우에 모닥불을 펴 놓아서 웅장한 대문이 드러났다. 밤, 자시(12시)가 되어가고 있다. 김유신의 진막에서 나온 여왕 덕만(德曼)도 숙소인 황룡사로 돌아가는 중이다. 가마가 속도를 늦췄기 때문에 여왕이 휘장을 걷고 옆을 따르는 이찬 김석필에게 물었다. 이찬, 김춘추 공은 언제쯤 왜국에 도착할 것 같은가? 모르겠습니다. 김석필이 가마 옆으로 바짝 다가왔다. 김석필은 말을 부하에게 끌게 하고는 여왕의 가마 옆을 걷고 있다. 김석필이 말을 이었다. 백제군이 오니까 안심을 하고 간 것이지요. 나한테 기별도 없이 가다니. 무엇이 그리 급하단 말인가? 여왕이 혼잣소리처럼 말했을 때 뒤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다. 동요한 가마꾼들이 주춤거리는 바람에 가마가 흔들렸다. 휘장이 펄럭이면서 여왕이 가마끝을 쥐자 김석필이 호통을 쳤다. 이놈들! 가마가 흔들린다! 여왕의 가마는 앞뒤에 시위 네명씩 여덟이 어깨에 맨다. 1인용 가마지만 규격이 컸고 장식이 무거워서 먼 거리는 말을 탄다. 황룡사에서 김유신의 본진까지는 2리(1km) 정도였기 때문에 여왕이 가마로 행차했던 것이다. 그때다. 아앗! 뒤쪽에서 신음소리가 들리더니 이제는 가마가 왼쪽으로 기울어졌다. 이놈들! 무슨 일이냐! 어둠속이어서 김석필이 다시 소리친 순간이다. 아악! 가마꾼 하나가 비명을 지르면서 엎어졌고 그 옆쪽 가마꾼은 털썩 주저앉았다. 그 바람에 무게를 이기지 못한 나머지 가마꾼이 넘어졌고 가마가 뒤로 기울면서 땅바닥에 모로 쓰러졌다. 아앗! 전하! 놀란 김석필이 달려가 휘장을 걷은 순간이다. 이놈! 역적들의 습격이다! 갑자기 위사 하나가 소리치더니 칼날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습격이다! 역적들이다! 비담 무리의 기습이다! 이쪽 저쪽에서 외침이 울리면서 함성과 비명이 어지럽게 일어났다. 김석필이 휘장 안으로 손을 뻗어 여왕의 말을 쥐었다. 전하, 밖으로 나오시지요! 김석필이 소리쳤다. 급박한 상황이니 여왕을 가마 안에만 둘 수가 없는 것이다. 여왕이 김석필의 부축을 받아 모로 쓰러진 가마에서 나왔을 때다. 이놈! 뒤쪽에서 외침 소리가 울리면서 김석필 옆으로 달려들었던 사내 하나가 쓰러졌다. 습격자다. 어둠속에서 김석필은 습격자의 정체를 처음 보았다. 검은 천으로 얼굴을 덮고 눈만 내놓았다. 갑옷은 신라군 갑옷이다. 그때 습격자를 벤 위사장 요찬이 달려왔다. 전하! 습격자가 많습니다! 저를 따라 오십시오! 누구냐! 비담이 보낸 암살대인가? 김석필이 소리쳤다. 그러나 앞장선 요찬은 습격자 또 하나를 맞아 칼을 부딪는 중이다. 사방은 칼 부딪는 소리, 비명과 외침으로 가득찼다. 여왕을 20여명의 위사밖에 수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방이 습격자로 둘러 싸인 것 같다. 그때 여왕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이놈들! 비담이 보낸 놈들이냐! 여왕의 목소리가 밤하늘로 울려 퍼졌다.

  • 문학·출판
  • 기고
  • 2018.09.09 19:15

“병영서 탈영한 군사문화, 아직도…” 오홍근 저서 ‘펜의 자리, 칼의 자리’

1988년 8월 6일 아침 서울 강남 대로변에서 택시를 잡으려고 서 있던 오홍근 씨(당시 중앙경제신문 사회부장)가 칼부림 테러를 당해 쓰러졌다. 오 씨는 허벅지에 중상을 입고 병원에 실려 가 수십 바늘을 꿰맸다. 범인은 정보사령부 장성 두 명을 포함한 십여 명의 현역 군인들. 오 씨가 시사월간잡지 <월간중앙>에 쓴 칼럼 청산해야 할 군사문화에 불만을 품고 저지른 조직적인 범죄였다. 가해자들은 군에 대한 충정이라 판단한 군사법원에 의해 선고유예로 풀려났다. 반면 피해자인 오 씨와 그의 가족은 오랜 기간 심각한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그렇게 어언 30년이 흘렀다. 오홍근 테러 사건 발생 30년을 맞아 오 씨와 그의 동료후배들은 88 언론테러 기억모임을 조직하고 군사문화를 집중 조명한 책 <펜의 자리, 칼의 자리>를 펴냈다. 이를 통해 우리는 30년 전 오 씨를 테러한 국군 정보사령부, 촛불집회 계엄령을 검토한 국군 기무사령부 등 30년이 흘러도 반성하지 않고, 변하지 않은 군사문화를 목도하게 된다. 88 언론테러 기억모임은 오 씨와 역사학자인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정치권의 군사 전문가인 김종대 정의당 의원이 함께하는 3자 특별 좌담을 개최하고 그 내용을 기록했다. 오 씨가 칼럼니스트로 복귀해 2011년 8월부터 2018년 6월까지 인터넷신문에 연재한 칼럼도 복기했다. 재판 거래 의혹으로 검찰 수사 대상에 오른 양승태 대법원의 군사 문화 등 최근에 쓴 글까지 수록했다. 특별 좌담에서는 군사문화란 무엇이고, 우리 사회에서 군사문화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관해 다뤘다. 이와 관련해 오 씨는 군사문화는 기본적으로 승리하는 문화, 능률을 추구하는 문화로 공정함이나 정당함은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린다며 또 하나 중요한 건 졸(卒)을 사람으로 안 보는 것이다. 양승태 대법원 사태도 졸의 기본권을 무시했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다라고 꼬집었다. 이외 김 의원은 명령의 정당성에 대해 논할 수 없는 군사문화의 문제를 지적하고, 한 교수는 대학 내 군기 문화 등 일상의 군사문화를 없애 민주주의를 심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88 언론테러 기억모임은 특별 좌담을 하고 책을 출간하면서 우리가 내린 결론은 명확하다. 군사문화는 병영 안에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며 군사문화가 병영 밖으로 뛰쳐나와 민주주의를, 시민의 삶과 문화를, 나아가 한 나라 역사를 패대기치게 해선 절대 안 된다고 밝혔다. 김제 출신인 오홍근 씨는 1968년 동양방송(TBC)에 입사하면서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1980년 TBC가 통폐합되자 중앙일보사로 옮겨 중앙경제신문 사회부장, 중앙일보 부국장, 논설위원, 판매본부장 등을 거쳤다. 1999년 국정홍보처장을 시작으로 대통령 공보수석비서관 겸 대변인, 한국가스안전공사 사장 등 공직을 역임했다. 저서로 <각하 전상서>, <대통령 복도 지지리 없는 나라> 등이 있다.

  • 문학·출판
  • 문민주
  • 2018.09.06 19:40

[불멸의 백제] (175) 9장 신라의 위기 11

잘 오셨소. 신라여왕 덕만(德曼)이 웃음띤 얼굴로 협려를 보았다. 50여 명의 장수가 들어찬 진막 안은 열기가 덮여져 있다. 감사합니다. 전하. 협려가 앉은 채로 허리를 꺾어 절을 했다. 앞쪽에 놓인 상에는 술과 안주가 가득 놓여졌는데 신라와 백제 장수들이 마주보고 앉도록 배치되었다. 여왕 좌우에는 대장군 김유신과 이찬 김석필이 앉았고 이쪽은 협력 좌우에 덕솔 연자신과 백준이 자리잡았다. 나머지 장수들이 서열 순으로 늘어져 앉아서 불빛을 받은 갑옷이 번쩍이고 있다. 여왕이 지그시 협려를 보았다. 태왕비께서는 건녕하시오? 선화공주, 의자왕의 모친을 묻는 것이다. 예, 전하. 협려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선화공주는 여왕의 동생이다. 지금도 말을 타시고 도성 남쪽 수렵장에 다니십니다. 그런가? 여왕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내가 선화를 못 본 지 40년이 넘었어. 지금 그대의 대왕 연세가 어떻게 되오? 예, 마흔넷이십니다. 그럼 45년이 되었네. 못 본 지가. 긴 세월입니다. 전하. 그렇소. 이제는 여왕이 한숨을 쉬었지만 진막의 분위기는 밝다. 여왕이 술잔을 들고 협려를 보았다. 당왕(唐王)이 짐이 여자라고 왕위를 유지하지 못할 것이라고 한다는 거요. 그대도 들었소? 예, 주제 넘은 놈입니다. 어깨를 편 협려가 여왕을 보았다. 그자는 제 형, 동생을 죽이고 아비를 유폐시킨 후에 동생의 처를 데리고 사는 놈이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차별을 하다니요? 무시하십시오. 전하. 비담이 당왕의 사주를 받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오. 당왕은 안시성에서 눈 한쪽을 잃고 지금 장안성으로 도주하고 있습니다. 이제 비담만 죽이면 백제와 신라는 선왕(先王)들께서 염원하신 합병을 이룰 것입니다. 고맙소. 여왕의 얼굴도 상기되었다. 그때 협려가 고개를 돌려 김유신을 보았다. 장군, 건배를 하십시다. 좋소. 김유신이 웃음띤 얼굴로 술잔을 들었다. 양국의 합병을 위하여 건배합시다. 만세! 모두 일제히 술잔을 들고 만세를 외치자 협려가 다시 선창했다. 백제와 신라의 번영을 위하여! 만세! 여왕도 술잔을 들고 웃는다. 주연을 마치고 진막으로 돌아가는 협려에게 연자신이 말했다. 대장군, 김유신의 안색이 별로 좋지 않았소. 나이가 들어서 지친 것 아닐까요? 아직도 정정하다고 들었어. 말 걸음을 늦춘 협려가 연자신과 말 배를 붙여 걸으면서 물었다. 조금 찜찜하긴 하네. 백제군이 온다는 말을 듣고 여왕이 김춘추를 왜국에 사신으로 보냈으니 말이야. 안심을 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며칠 기다렸다가 백제군을 맞아야 도리 아니겠나? 김춘추가 말이야. 여왕이 보냈다지 않습니까? 김춘추가 며칠 기다린다면 여왕이 잡지는 못했을 거야. 대장군은 생각도 많으시오. 연자신이 웃으면서 말했다. 협려는 지장(智將)이다.

  • 문학·출판
  • 기고
  • 2018.09.06 19:40

최유라 시인 '인생을 축제처럼' 출간

암 투병생활 할 때 우연히 다른 환자 영상을 봤어요. 쉬는 시간에 신명나게 트위스트를 추더라고요. 운동을 위한 것도 있지만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마음을 다스리려는 의도였겠죠. 그때 생각이 들더군요. 내일을 고민 말고 오늘 나에게 허용된 시간을 기쁘고 즐겁게 보내자. 인생을 축제처럼 말이죠. 최유라 시인이 7년 만에 신간 <인생을 축제처럼>(도서출판 문화의 힘)을 펴냈다. 죽음의 문턱에서 가장 행복하고 나다운 것이 시 쓰기였다는 최 시인. 항암치료를 받으며 앉아서도, 누워서도 시를 썼다. 어제는 이미 흘러가버렸고/ 내일은 아직 오지 않았고/ 단지 오늘만이 나에게 속한 시간인데/ 작은 새 한 마리 풀숲에 앉았다 날아가는/ 찰나의 순간인데/ 우리/ 인생을 축제처럼 살아요(표제작 인생을 축제처럼 중). 표제작을 비롯해 신작 70여 편이 수록된 이번 시집은 삶의 위기를 이겨낸 감사함과 긍정이 저변에 깔렸다. 호병탁 문학평론가(시인)는 최유라 시인의 작품은 난해한 단어와 흐름을 배제하고 일상적인 언어를 사용하지만 감동과 깊이가 있다고 말했다. 깊은 사유에서 비롯된 기품과 같은 의연함은 삶의 가파름과 덧없음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거듭 죽고/ 거듭거듭 다시 태어나야만 하는/ 이 불가사의한 삶의 팔에 안겨// 오늘도/ 흘러간다/ 구름이 바람에 안겨 흘러가듯이(구름이 바람에 안겨 흘러가듯이 중) 시인은 삶이 곧 죽음이자, 죽음이 곧 삶이 되는 허무를 담담하게 표출한다. 하지만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빛뿐만 아니라 어둠도 가슴에 쩍쩍 금이 가는 아픔도 필요한 것(피할 수 없는 고통이라면 중)이라는 최 시인은 부정 속 긍정의 문학을 이어간다. 김제 출생인 그는 1987년 전북여성회관의 여성백일장에 당선되고, <전북문학> 회원에 가입하며 활동을 시작했다. 월간 <순수문학> 신인상과 지평선문학상을 수상했다.

  • 문학·출판
  • 김보현
  • 2018.09.06 19:40

[불멸의 백제] (174) 9장 신라의 위기 10

백제 대장군 협려는 40대 중반으로 거구다. 그동안 수많은 전쟁을 치른 터라 김유신과 휘하 장수들도 협려를 안다. 직접 협려와 전쟁을 치른 장수도 있다. 그런데 지금은 우군(友軍)으로 만났다. 진막 안으로 들어선 협려가 김유신을 보았다. 김유신은 이때 50대가 되었으니 협려보다 연상인데다 신라에서의 품위도 높았지만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어서 오십시오, 대장군. 반갑습니다, 대장군. 협려의 수염투성이 얼굴에도 웃음이 떠올랐다. 오늘에야 대장군의 존안을 뵙게 되었습니다. 저야말로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서로 추켜올렸지만 어색하지는 않다. 그만큼 둘 다 명성이 높은 용장이었기 때문이다. 협려는 부장 연자신과 백준, 그리고 휘하 장수 10여 명을 대동했고 김유신 또한 10여 명의 장수를 모아놓고 기다렸기 때문에 진막 안은 장수들로 가득 찼다. 그때 협려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물었다. 김춘추 대감은 어디 가셨습니까? 여왕 전하의 명을 받고 왜국으로 가셨습니다. 김유신이 말을 이었다. 백제군이 왔으니 여왕께서 마음을 놓으시고 사신으로 보내신 것이지요. 아아, 그렇습니까? 비담이 백제군의 위용을 보고 잔뜩 위축되었을 것입니다. 김유신이 진막 바닥에 펼쳐놓은 지도를 손으로 가리켰다. 소가죽 위에 붉은색 염료로 정교하게 그려놓은 적과 아군의 배치도다. 비담의 진은 명활산성을 중심으로 10리 넓이로 펼쳐져 있었는데 김유신의 진에서 10리 거리였다. 김유신이 말을 이었다. 비담군(軍)의 전력은 아직도 막강합니다. 더구나 산성에 박혀 있어서 기마군을 활용하려면 끌어내야 합니다. 시간을 끌려는 것이군요. 물러나지 않고 결전을 하려는 것이오. 쓴웃음을 짓고 말한 김유신이 협려를 보았다. 저녁때 여왕 전하를 만나 보시지요. 백제군을 위해 여왕께서 주연을 베푸신다고 하셨습니다. 김유신과 상견례를 마친 협려가 진막을 나와 백제군 진영으로 돌아갈 때 부장(副將)으로 수행한 덕솔 백준이 말을 몰아 옆으로 다가왔다. 대장군, 김춘추가 여왕을 구해냈다고 들었는데 이 상황에서도 여왕의 심부름이나 다니고 있군요. 왜국에 가면 백제방부터 들릴 거야. 쓴웃음을 지은 협려가 말을 이었다. 이번에 우리가 신라 도성까지 진입해왔으니 백제방의 충왕자께 부탁을 하면 왜왕을 움직여 왜병을 끌어올 수 있을거야. 그렇군요. 그러면 신라는 완전한 백제와 합병을 하게 되는거지. 왜병은 백제의 동맹군이니까 말이네. 김춘추는 백제는 물론 고구려, 당, 왜국까지 가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백준의 얼굴에 감탄하는 기색이 덮였다. 신라에 김춘추만 한 인재가 없습니다. 여왕의 충신 아닙니까? 글쎄. 협려가 말고삐를 채어 말을 천천히 걸리면서 말을 잇는다. 뛰어난 인재지. 하지만 가슴에 무엇을 품고 있는지 아직 알 수가 없어. 웃음 띤 얼굴로 협려가 백준을 보았다. 대왕께서 나한테 하신 말씀이 있어. 김춘추를 가장 조심하라고 하셨는데 지금은 내 눈앞에 없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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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9.05 19:42

[기고] 결코 무너질 수 없는 - 미륵사지에서

정양 시인우석대 명예교수 감자 캐던 마동이가 참말로 감자로 민요로 덫을 놓아 어여뿐 공주님 마음을 사로잡았는지 금덩이를 돌덩이로 여기던 마동이가 참말로 서슬 퍼런 백제왕이 되었는지 그런 걸 다 딱부러지게 알 길은 없지만 이 연못에 미륵님을 모시고 싶다는 아내의 택도 없는 소원을 듣고 아내를 위해서라면 그까짓 금덩이쯤 맘 놓고 돌덩이로 여긴 지애비가 이곳에 엄청난 연못을 메우고 엄청난 절을 세웠더란다 동서로 남북으로 갈가리 찢어져 쫓기고 피 흘리고 빼앗기고 굶주리는 땅에 사람들이 참말로 사람답게 사는 황금빛 찬란한 평화를 평등을 화해를 터 잡고 싶은 어여뿐 아내의 어여쁘고 간절한 소원을 무왕인들 마동인들 그 누군들 어찌 외면했으리 천년 세월 무너져내린 절터에 결코 무너질 수 없는 어여쁘고 간절한 소원 하나 무너지다 무너지다 만 쓰라린 돌탑으로 남아 있었다 <시작 노트> 결코 무너질 수 없었던 백제의 꿈이 마침내 세월을 거슬러 복원되었다고 한다. 역대급 문화사적 쾌거다. 평화와 평등과 화해를 갈망하던 백제의 해묵은 꿈, 남북, 북미 정상회담들이 연이어지면서 사람들이 사람답게 살자는 세상을 만나 어쩌면 그 꿈이 이 땅에 찬란하게 구현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무리 성공적으로 미륵사지석탑이 복원되었다 해도, 상처투성이인 채로 끝끝내 무너질 수 없었던 쓰라린 꿈, 그 마지막 모습은 우리들 가슴 가슴에 오래오래 남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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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9.04 19:32

[불멸의 백제] (173) 9장 신라의 위기 9

달솔 협려가 이끈 백제군 3만이 신라 도성 50여리 근처에 육박했을 때는 그로부터 사흘 후다. 전령이 기를 쓰고 달려왔지만 백제군과는 반나절 거리밖에 안 되어서 그야말로 비담 일당은 아연실색을 했다. 그만큼 백제 기마군의 기동력이 빨랐던 것이다. 5만 이라고? 되묻는 비담의 얼굴은 굳어져 있다. 예, 5만도 넘는 것 같소. 땀과 먼지로 뒤집어 쓴 전령이 비담을 보았다. 전령은 기를 쓰고 말을 달려왔지만 백제 기마군과의 거리를 떼어놓지 못했다. 더구나 왕국이 두개로 쪼개져서 비담에게 전령을 보내지 않은 성주도 있는 터라 뒤죽박죽이다. 전령이 말을 이었다. 백제군은 도중의 성을 치지 않고 곧장 이곳으로 직진했습니다. 여왕께로 간 것입니다. 신라 6백년 사직을 여왕이 백제에게 넘기는구나. 비담이 이를 갈아 붙이며 말했다. 이년, 기어코 김춘추하고 공모해서 신라를 백제로 넘기는구나. 대감. 이찬 염종이 비담을 불렀다. 진막 안은 전령의 급보를 듣고 나서 갑자기 물벼락을 맞은 분위기다. 모여있던 20여명의 장군들은 할 말을 잃고 눈치만 보는 상황이 되었다. 김춘추 김유신이 여왕을 옹위하고 도망친 후에 세력은 이쪽이 우세했지만 명분으로는 밀렸던 비담이다. 그런데 백제 기마군 5만이 순식간에 닥쳐왔으니 혼비백산할 만 했다. 여왕이 백제군 5만의 지원을 받는다면 우리가 전력(戰力)이 밀립니다. 일단 뒤로 물러나 군사를 더 모아야 될 것 같습니다. 염종이 말하자 장군 서너명이 동의했다. 현재 비담군의 전력은 그동안 더 불어나 기마군 3만에 보군 3만 5천가량이다. 여왕을 업고 있는 김춘추 세력이 기마군 1만 5천, 보군 3만 정도였는데 졸지에 백제 기마군 5만이 증원되었으니 이제는 이쪽이 열세다. 더구나 백제 기마군은 대륙을 석권한 최강의 기마군이다. 그때 비담이 눈을 치켜뜨고 염종에게 물었다. 이찬, 그대는 이번 전쟁에 명분이 없다고 보는가? 아니오. 당황한 염종의 얼굴이 붉어졌다. 명분은 대감이 품고 계시오. 여왕과 김춘추, 김유신 일파는 진즉부터 백제와 내통한 데다가 자력으로 왕국을 존속시킬 역량과 의지가 없었소이다. 김덕만을 여왕으로 옹립한 것부터 잘못된 처사요. 기회는 지금 뿐이야. 비담의 목소리가 진막을 울렸다. 신라의 자립을 위해서는 우리가 여기서 물러서면 안된다. 화백회의에서 결정된 대로 우리는 여왕을 폐위시키고 새로운 왕조를 세워야 한다. 옳습니다! 이번에는 10여명의 장군들이 소리쳤다. 김춘추는 이 기회에 가야를 신라에 바치고 신라에서 출신한 김유신의 전철을 밟을 예정이다. 그놈들의 행태를 누가 모르겠는가? 비담의 열띤 목소리에 대부분이 왕족들인 장군들이 일제히 소리쳤다. 군사를 더 모을수가 있소! 여기서 싸웁시다! 김춘추 좋은 일만 시킬 수는 없소! 백제군이 왔다고 해도 대적할만 합니다! 비담이 숨을 가누었다. 그렇다. 김춘추의 조부는 진지왕이었다. 그러나 그 진지왕은 화백회의에서 황음무도하다는 비판을 받고 즉위 4년만에 폐위되고 진평왕이 즉위했다. 그 후로 김춘추 가문은 진골로 격하되어 왕권과는 멀어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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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9.04 19:32

[불멸의 백제] (172) 9장 신라의 위기 8

아씨, 손님이 오셨습니다. 밖에서 부르는 소리에 승만(勝曼)이 숨을 들이켰다. 깊은 밤, 자시(12시)가 넘었다. 그러나 승만은 침상에 오르지 않고 수를 놓는 중이었다. 이곳은 도성에서 북쪽으로 10리쯤 떨어진 저택, 그러나 담장이 높은데다 저택 안에 1백명 가까운 사병(私兵)을 고용하고 있어서 작은 성(城) 같다. 승만이 문도 열지 않고 묻는다. 깊은 밤에 누가 왔단 말이냐? 왕국이 둘로 짜개져서 전쟁을 하는 상황이다. 여왕파와 비담파로 나뉘어진 신라는 왕조의 운명이 그야말로 바람 앞의 촛불이다. 여왕파에는 김춘추, 김유신 등 신진세력이 가담했고 상대등이며 왕족으로 구성된 화백회의의 수장 비담 일파에는 염종 등 왕족들이 뭉쳐있다. 그때 밖에서 집사가 대답했다. 예, 이찬 김춘추 대감과 김유신 대장군이 오셨습니다. 무엇이? 놀란 승만이 벌떡 일어서자 수를 놓던 수틀이 방바닥에 떨어졌다. 일어선 승만은 거인(巨人)이다. 거녀(巨女)라고 해야 맞다. 6척이 넘는 키에 팔이 길어서 늘어뜨리면 무릎까지 손이 내려왔다. 그러나 미인이다. 승만이 다시 물었다. 무슨 일이라더냐? 바깥채 앞에서 뵙자고만 하십니다. 집사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 숨을 고른 승만이 마침내 마음을 굳혔다. 내가 청으로 나갈테니 청으로 모셔라. 예, 아씨. 집사의 발자국 소리가 멀어졌고 승만이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문을 열었다. 승만은 현(現) 여왕인 김덕만(金德曼)의 사촌 여동생이니 곧 진평왕의 친동생 갈문왕의 딸이다. 김덕만도 진평왕의 맏딸인 것이다. 승만이 청으로 들어서자 기다리고 있던 김춘추와 김유신이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드렸다. 공주께서 놀라셨겠습니다. 김춘추가 허리를 굽히면서 말했다. 밤늦게 찾아와 죄송스럽습니다. 아니오. 그런데 웬일이십니까? 자리를 권한 승만이 앞쪽에 앉으면서 묻자 김춘추가 다시 허리를 굽혔다. 역적 비담의 무리는 곧 소탕될 것입니다. 승만이 머리만 끄덕였다. 비담이 신라왕이 된다면 승만도 현(現) 여왕인 덕만 일당으로 몰려 무사하지 못할 것이었다. 그때 김춘추가 불빛에 번들거리는 눈으로 승만을 보았다. 공주께 여왕 전하의 말씀을 전합니다. 전하의 말씀을 듣겠소. 전하께서는 만일 무슨 일이 일어났을 때 공주께서 신라국 왕위를 이어야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건 당치 않소. 놀란 승만의 목소리가 떨렸다. 여왕마마께 무슨 일이 일어난단 말이오? 그리고 나는 그런 생각은 꿈에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공주. 김춘추가 두 손을 청 바닥에 짚고 승만을 보았다. 부릅뜬 눈에 흰 창이 더 커졌다. 신라 사직을 위한 여왕마마의 명령이십니다. 공주께서 여왕마마의 명을 어기시렵니까? 아니, 나는. 여왕마마께서는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시는 것입니다. 받아들인다는 약속을 해주시지요. 이찬, 나는. 약속을 받고 여왕마마께 전해드려야 합니다. 그러자 한동안 정적이 흐른 후에 승만이 입을 열었다. 알겠소. 여왕마마의 명을 받겠습니다. 김춘추와 김유신이 머리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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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9.03 19:55

[불멸의 백제] (171) 9장 신라의 위기 7

김춘추가 앞장 서서 마당 끝쪽의 나무 밑에 섰다. 주위는 어둠에 덮여졌고 10여보 떨어진 담장 밑에서 위사들이 대기하고 있다. 김춘추가 웃음 띤 얼굴로 김유신을 보았다. 전하께서 마음이 흔들리시는구려. 무슨 말씀이십니까? 조심스럽게 김유신이 묻자 김춘추는 한숨부터 뱉었다. 전에는 우리한테 하대를 하시던 전하께서 이제는 존대를 하시는구려. 그렇습니까? 자신감이 떨어지셨소. 어쩔수 없는 일 아닙니까? 대장군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김춘추가 묻자 김유신은 한동안 침묵했다. 묵묵히 김춘추를 응시한 채 입을 열지 않는다. 답답해진 김춘추가 다시 말을 이었다. 대장군, 전하께선 진즉부터 신라와 백제의 합병을 염두에 두고 계셨소. 그것이 신라 주도의 합병이건 백제 주도건간에 말이오. 압니다. 그것이 전하의 부친이신 진평왕의 염원 아니었습니까? 그래서 선화공주를 백제 무왕에게 보낸 것이지요. 이제 비담의 난으로 진평대왕의 꿈이 이루어진단 말인가? 전하께서 백제군을 맞으시면 합병이 일사천리로 진행될 것 같습니다. 그렇다. 백제 기마군 3만은 비담군을 깨뜨린 후에 신라에 계속 주둔하면서 합병의 지원세력이 될 것이다. 그때 김춘추가 머리를 들었다. 두 눈이 번들거리고 있다. 대장군, 그렇게 될 바에는 차라리 비담이 신라왕이 되는 것이 낫소. 김유신이 시선만 주었고 김춘추가 말을 이었다. 신라는 백제의 속국이 될 수가 없소. 말이 합병이지 신라의 왕족은 백제 치하에서는 7품 이상으로 오르지 못 할 것이오. 그때 김유신의 얼굴에 일그러진 웃음이 떠올랐다. 대감, 우리 가야 왕족의 경우를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렇소. 김춘추도 입술 끝을 비틀며 웃었다. 가야국이 신라와 합병하면서 가야 왕족도 같은 시련을 겪은 것이다. 시련이 아니라 수모다. 가야 왕족인 김유신은 그것을 극복하려고 온갖 수모를 겪고 마침내 대장군에 올랐기 때문이다. 만일 신라가 백제에게 합병된다면 김유신의 피눈물나는 성취는 허사가 된다. 김유신이 지그시 김춘추를 보았다. 대감, 백제 기마군 3만이 달려오고 있습니다. 어찌 하시겠습니까? 대장군, 먼저 약속을 해주시오. 나하고 생사를 같이 하시겠소? 이미 대감께 내 가문의 운명을 맡긴 사람입니다.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고맙소. 김춘추가 두 손으로 김유신의 손을 감싸쥐었다. 대장군, 방법이 있소. 말씀을 해주시오. 따르겠습니다. 백제군은 사흘 후에 도착하겠지요? 그렇습니다. 비담은 아직 백제군이 온다는 것을 모르고 있겠지요? 그렇습니다. 알았다면 전력을 다해서 이곳을 공격하겠지요. 김춘추가 숨만 쉬었고 김유신이 말을 이었다. 백제군이 오는 이유를 뻔히 아는 터라 비담은 대왕전하를 가만 두지 않을 것입니다. 김춘추가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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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9.02 19:29

[전북작가회의와 함께하는 전라북도 길 이야기] 내 그림자

1 또래들보다 정신연령이 한참 모자랐던 나는 지금도 못난이 축에 낀다. 남이 하는 얘기를 제대로 못 알아듣고 남들이 다 웃고 난 뒤에야 폭소를 터뜨리는 경우가 심심찮았다. 길이란 단어도 마찬가지다. 국어사전에 나와 있는 여러 의미를 짚어보는 데도 힘이 부친다. 나는 지금 등하굣길을 쓰려고 한다. 이 길을 오가면서 나도 뭔가를 생각했을 것이고 뭔가를 확신했을 것이며 고개를 숙인 채 걷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 행위와 길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편집 의도와 다르게 글이 쓰일지라도 기억 중의 한 토막을 적어봄으로써 이제라도 내 행위를 낮게 내려놓고자 한다. 2 학교 가는 게 싫었다. 숙제하기도 싫었고 선생님께 매 맞는 것도 지겨웠다. 멍청하면 꾀라도 있어야 한다는 말부터 가난한 집 아이는 영리하다는데 너는 도대체 왜 이러냐는 말까지 무밥처럼 싫었다. 멍청한데 어떻게 꾀가 생길 수 있으며, 가난한 것하고 영리한 것하고 무슨 관계가 있는지 선생님은 말해 주지 않았다. 4학년 때부턴가 목요일엔 특별활동반이란 게 있었다. 오전 수업을 마치고 각자의 특기를 살리는 수업이었다. 그림그리기반 붓글씨반 베드민턴반 등등이 있었는데 그 속에 보이스카웃반도 있었다. 나는 저학년 때부터 이들을 유심히 봐왔다. 종아리까지 올라오는 긴 양말을 신었고 그 위에 반바지를 입었다. 그들만 신을 수 있는 운동화며 그들만이 입을 수 있는 감청색 유니폼은 가히 내 눈알을 잡아 뺄 듯이 유혹적이었다. 그들 옆에서 생글거리던 걸스카웃들은 또 어떤가. 치마 입은 유니폼도 예쁜데 얼굴 생김이며 몸매는 말할 것도 없었다. 나는 보이스카웃반에 들어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방학 땐 캠핑도 간다는데 거기서 걸스카웃반 지지배들과 폼 나게 놀고 싶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김칫국부터 마신 꼴이었다. 그 반에 들어가려면 유니폼을 살 만한 경제력을 갖춘 집 자식이어야 했고 공부도 잘 해야 했다. 공부는 좀 못하더라도 경제력은 갖춘 집 자식이어야 한다. 나는 씨름반이 되었다. 왜 내가 씨름반이냐고 선생님께 여쭐 계제가 나는 못 되었다. 선생님 뜻이 곧 법이었으니까. 하지만 공부는 그만두고 유니폼을 살 만한 돈이 없어 보이는 집 자식이기 때문에 씨름반에 들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공부를 잘하는 부잣집 아들놈은 씨름반에 들 수 없나요? 이렇게 묻지도 못하고 학교 운동장 구석에 박혀 있는 씨름장에 갔다. 보이스카웃반에 든 애들은 특별한 사람들 같았고 나는 평생 샅바나 맬 수밖에 없는 사람일 것 같았다. 그때 마침 가방 손잡이가 떨어져나갔다. 잘되었다. 어머니가 논에서 돌아오기가 무섭게 새 가방 사내라고 떼를 썼다. 모레까지 가방을 안 사주면 학교에 안 가겠다고 억지를 부렸다. 하지만 대답은 이랬다. 지금은 모내기철이니 장에 갈 수 없다, 며칠만 책보에 책을 싸가지고 다녀라, 가방은 꼭 사주마, 옛날엔 모두 책보를 들고 다녔다, 뭐 이런 것이었다. 미안하지만 이런 대답을 듣고 학교에 갈 수는 없었다. 검정 고무신은 신었을망정 책보 들고 학교에 가는 학생은 전교생 중에 나 혼자일 것이었다. 그 이틀 뒤 아침 학교에 안 가겠다고, 못줄이나 잡겠다고 떼를 썼다. 보이스카웃반에 못 든 것 때문에 학교에 안 가겠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가방 때문에 학교에 안 가겠다는 것으로 알고 아버지의 회초리가 사정없이 종아리에 감겼다. 그래도 버텼다. 그랬더니 아버지가 작대기를 들고 오는 게 아니냐. 별수 없다. 매에는 장사가 있을지 몰라도 작대기질에는 장사가 없을 거니까. 회초리에 감겨 따끔따끔한 종아리를 끌고 손잡이 떨어진 책가방을 안고 등굣길에 나섰다. 그런데 책가방을 보퉁이처럼 안고 가야 한다는 게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학교에 가는 애들이 모두 나만 바라보는 것 같았다. 가방 살 돈도 없냐, 이러면서 나를 비웃는 것만 같았다. 가방은 아무 짬도 모르고 어미 품에 안긴 돌배기처럼 내 가슴에 찰싹 달라붙어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몸체에서 떨어져 덜렁거리는 끈은 아이 다리 같았고 반원으로 온전한 끈은 아이 머리 같았다. 젖 달라고 보채는 이것을 팽개쳐버리지 못하고 낑낑대는데 내 속내를 짐작한다는 듯 눈에 확 띄는 것이 있었다. 땅바닥에 나뒹구는 세 발 가웃은 너끈한 새끼줄이었다. 지체 없이 새끼줄로 책가방을 통째로 묶고 끈을 내어 어깨에 걸쳤다. 가방을 땅바닥에 내던져 질질 끌고 앞을 향했다. 자, 볼 테면 봐라, 학교는 이렇게 다니는 거다. 가방을 땅바닥에 질질 끌고 등굣길을 휘저었다. 건너물을 지나 닭똥 냄새가 지독한 내리배기를 얼른 지나 옥남 이용원, 이쁜네 술집, 꺼먹둥이 술집, 방앗간을 지나서 한참을 더 걸으면 노락쟁이가 나왔고, 공장에 다니는 형들 누나들이 자꾸 튀어나온다는 뽕밭이 나왔고, 아침밥 먹은 게 다 꺼진 학산을 지나면 팔복초등학교 후문이었다. 십 리가 넘는 자갈길, 논밭이 나를 응원한 길을 나는 가방을 질질 끌었고 학교가 파하면 그 역순으로 집에 돌아왔다. 또래들은 내 행동에 기가 막힌 모양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주 자랑스럽게 가방을 질질 끌면서 누구든 만나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학교를 좀 쉽게 다니자고 가방을 질질 끌었다. 또래들은 나를 똥 씹은 듯 바라봤다. 정말로 너 왜 이러냐고, 죽으려고 환장한 것 아니냐고, 사람 되기 벌써 글렀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일주일이 넘도록 이렇게 등하굣길을 휘저었다. 토요일이었다. 선생님이 나를 부르더니 아주 부드럽게 앞으로 나오라고 했다. 나는 순간적으로 직감했다. 어떤 놈이 내 행동을 선생님께 꼰지른 것이다. 매품 팔러 온 흥부처럼 나는 기가 팍 죽었다. 몸으로 받아내야 할 것은 매가 아닐 것이다. 몽둥이찜질일 것이다. 선생님은 청소함 속의 몽둥이를 꺼내어 닥치는 대로 휘둘러댈 것이다. 자기 분을 못 이기고 슬리퍼를 벗어서 싸대기를 후려칠 수도 있다. 나를 들어서 창문 밖에 메다꽂을 수도 있다. 이렇게 조용히, 부드럽게,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부를 때는 곡(哭)소리가 나야 매타작이 끝났으니까. 그게 아니었다. 선생님은 가방을 왜 땅바닥에 질질 끌고 다니는지를 묻지 않았다. 어디 아픈 데는 없냐고 내 이마에 손을 갖다가 댔다. 이거 뭐가 이상하게 돌아가는데? 이 느낌이 드는 순간 선생님은 아주 다정스러운 목소리로 철둑 너머에 있는 호성초등학교로 전학을 가는 게 어떠냐고 물었다. 어차피 걸어다는 거 뭐 이 학교나 그 학교나 다를 게 없다고, 조금 더 걸을 뿐이라고, 네가 학교 다니기에는 그 학교가 여기보다 백번 나을 거라고 했다. 아아, 호성초등학교. 나는, 전학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알았다. 쫓겨나고 싶지 않았다. 팔복초등학교에 다니고 싶었다. 친구 한 명도 없이 어쩌란 말이냐. 무작정 무릎을 꿇고 다시는 가방을 땅바닥에 질질 끌고 다니지 않겠다고, 잘못했다고 싹싹 빌었다. 그러나 선생님은 요지부동이었다. 내 속이 타들어가는 줄도 모르고 선생님은 이젠 그럴 필요 없다고, 너는 왜 편하게 다닐 학교를 어렵게 다니려고 하냐고, 일이 다 끝난 듯 오히려 나를 달랬다. 그날 밤 종아리에 구렁이가 감긴 것처럼 아버지께 회초리를 맞았다. 어떤 놈이 또 꼰지른 것이다. 회초리가 부러지면 동생에게 다시 쪄오라고 하시면서 인정사정을 두지 않고 종아리를 불나게 했다. 회초리가 차악착 소리를 내며 종아리에 감겨도 나는 끝끝내 보이스카웃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일주일 넘도록 가방을 자갈길에 질질 끌었어도 나는 보이스카웃반에 들 수 없었고 새 가방도 생기지 않았다. 또래들은 내가 가방을 질질 끌고 다녔다는 행위만 중요했지 내가 왜 그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왜 내가 보이스카웃을 뽀이스카웃이라고 부르는지를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나도 보이스카웃반 얘기를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 나는 다시 호라발해져서 어떤 껀수를 잡을까, 골몰했다. 3 보이스카웃 핑계 대고 남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싶어서 가방을 질질 끌었던 길은 이제 없다. 논밭에 둘러싸여 어린 치기를 응원해주었던 꼬불꼬불한 길은 없다. 자갈길엔 아스팔트가 깔렸고 주위는 오죽잖은 공장 건물로 가득 찼다. 우두커니 서서 내 그림자를 바라본다. 욕망이 때로 엉뚱한 방향으로 튀어버린다는 것을 알았어도 내 몸은 아직도 욕망의 집이 되어 있고, 잊을 것을 잊지 못하고 산다. 그래서 반편이 머리가 자주 무거운가 보다. *이병초: 1998년 『시안』으로 등단. 시집으로 『밤비』, 『살구꽃 피고』, 『까치독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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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8.30 18:48

[불멸의 백제] (170) 9장 신라의 위기 6

그날 저녁, 여왕 선덕을 모시고 도성 위쪽의 황룡사로 왕궁을 옮긴 김춘추와 김유신이 선덕과 함께 모여 앉았다. 이곳은 여왕의 침전이 된 황룡사의 안쪽 객방 안이다. 거대한 황룡사는 9층탑을 중심으로 사방에 1백여 칸의 승방이 있는 데다 사찰 둘레가 10리 가깝게 되어서 여왕의 임시 왕궁으로 적당했다. 선덕이 며칠 사이에 핼쑥해진 얼굴을 들고 김춘추에게 물었다. 백제군이 오면 승산이 있겠소? 예, 마마. 김춘추가 웃음 띤 얼굴로 선덕을 보았다. 그리고 아직 비담은 백제군의 응원을 모르고 있습니다. 백제 기마군 3만과 합하면 전력이 비슷해집니다. 따라서 기습을 하면 승산이 있습니다. 선덕의 시선이 김유신에게 옮겨졌다. 대장군을 믿겠소. 예, 마마. 김유신이 머리를 숙였다. 김춘추는 여왕의 보호자가 된 것처럼 기세를 올렸지만 아직도 비담군(軍)에 비교해서 전력이 열세다. 상대등 비담은 여왕 다음의 위치인 데다가 왕족으로 구성된 화백회의의 수장인 것이다. 김춘추와 비교해서 월등한 지위와 권력을 장악한 상태다. 김춘추는 오직 김유신에게 의지하고 있었는데 백제군의 지원이 없다면 며칠도 견디기 힘든 상황인 것이다. 선덕이 물었다. 아군의 전력은 얼마나 되오? 기마군 1만에 보군 1만5천입니다. 비담군(軍)은? 기마군 2만5천에 보군 4만입니다. 선덕이 입을 다물었다. 비담군이 압도적인 것이다. 그때 김춘추가 말했다. 백제 기마군 3만이 오면 아군의 기마군이 우세합니다. 마마. 그렇소? 선덕이 다시 김유신에게 물었기 때문에 김춘추의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자신을 무시하는 것처럼 느껴진 것이다. 마마, 신(臣)을 믿으시옵소서. 김춘추가 굳어진 얼굴로 말하자 선덕의 얼굴에 희미하게 웃음이 떠올랐다. 그리고는 머리를 끄덕였다. 경을 믿소. 황공합니다. 이 난리가 수습되면 선화를 부를 예정이오. 순간 김춘추가 숨을 들이켰다. 얼굴도 순식간에 굳어져 있다. 선화가 누구인가? 바로 백제 의자왕의 어머니인 선화공주다. 선덕의 동생인 것이다. 진평왕의 두 딸 중 장녀는 신라 여왕이며 둘째는 백제 의자왕의 어머니다. 선덕이 말을 이었다. 선화를 내 후계자로 선포하고 백제와의 국경을 개방하겠소. 선화가 내 후계자가 되면 이어서 제 아들에게 왕위를 넘기겠지. 그러면 의자가 신라, 백제를 함께 다스리게 될 것 아닌가? 선덕이 상기된 얼굴로 김춘추와 김유신을 번갈이 보았다. 두 눈이 반짝이고 있다. 다시 선덕의 말이 이어졌다. 이번 백제군의 지원이 그 계기가 되었어. 비담의 난이 신라와 백제의 합병을 당겨준 셈이 되겠구려. 마마, 피곤하실 텐데 쉬시지요. 김춘추가 부드럽게 말하더니 몸을 세웠다. 김유신도 따라서 허리를 굽혔기 때문에 선덕이 머리를 끄덕였다. 김춘추, 김유신의 본진은 황룡사 앞쪽 반월성에 자리잡았고 비담은 10여 리 떨어진 명활산성이다. 가까워서 상대방의 북소리 호각소리가 이곳까지 울린다. 선덕의 침전을 나왔을 때 김춘추가 김유신을 불렀다. 대장군, 상의 드릴 일이 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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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8.30 18:48

소설로 만나는 몽골의 문화와 역사

몽골은 거친 대지와 양 떼를 모는 유목민 등 시야에 들어오는 형상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곳이다. 몽골의 역사와 문화, 종교와 신앙 그리고 과거와 현재를 망라해 형상화한 문학은 그런 몽골을 가슴으로 느끼는 좋은 방법이다. 김한창 소설가의 중단편 소설집 <사슴돌>, 한국동인지문학아카데미의 한몽 문학 제5호 <한국몽골 소설 선집>은 서사 문학인 소설로 몽골을 보여준다. 한국동인지문학아카데미 대표인 김한창 문학가가 중단편 소설집 <사슴돌>을 펴냈다. 지난 8년간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를 거점으로 옵스아이막, 알타이고비 등 소설과 관련된 지역을 오가면서 집필한 결과물이다. <사슴돌>은 사회주의 몽골에 불어닥친 유목민의 애환, 13세기 할하 부족과 차하르 부족의 300년 전쟁, 칭기즈칸의 몽골 통일 전쟁 등을 소설로 엮은 작품집이다. 그는 몽골의 전통 노래이자 서사시인 토올의 계승자가 되는 과정을 다룬 알탕호약(황금갑옷), 이념 분쟁으로 인해 몽골이 겪었던 역사적 질곡을 형상화한 푸렙앙흐체첵(목요일 처음 핀 꽃) 등 여섯 편의 중단편 소설을 통해 몽골의 역사와 몽골인의 생활상을 자연스럽게 나타낸다. 한국동인지문학아카데미가 내놓은 <한국몽골 소설 선집>은 한국 문학가 선산곡김한창정영신백종선, 몽골 문학가 서닝바야르냠일학와우르징한드촐롱체첵의 작품을 수록했다. 13세기 몽골의 부족 전쟁사와 유목 생활 속에서 파생된 가축과의 교감, 수많은 신화 속에서 발화한 모계사회 등을 중점적으로 다뤘다. 서닝바야르의 보름달 물결은 13세기 몽골 부족 전쟁사의 일면을 다룬 작품으로 몽골 부족 특유의 의협심이 돋보인다. 냠일학와의 소설 하이닥 암낙타는 새끼를 잃은 암낙타의 애절한 모성, 암낙타의 젖을 짜주는 할머니와의 교감에 관해 이야기한다. 촐롱체첵의 보고 싶은 어머니와 성직자 자식의 운명을 사랑한다는 어머니에 대한 신화적 발로로 모계사회의 근간이 짙게 깔려 있다. 강한창 문학가는 2010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몽골 문학 레지던스 소설 작가로 선정돼 2011년 몽골 울란바토르대 연구교수로 부임했다. 한국문인협회몽골문인협회 회원으로 장편소설 <솔롱고>, <바밀리온>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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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민주
  • 2018.08.30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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