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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백제] (169) 9장 신라의 위기 5

대감, 육기전이 어젯밤에 비담측에 가담했습니다. 장군 김정복이 김춘추에게 보고했다. 오전 사시(10시) 무렵, 도성 밖 본진에 머물고 있던 김춘추는 시선만 준다. 김정복이 말을 이었다. 육기전은 기마군 5천을 이끌고 왔는데 보군 1만7천은 사흘 후에 도착할 것이라고 합니다. 역적. 김춘추가 낮게 말했지만 진막 안의 장수들은 다 들었다. 육기전은 김춘추의 심복으로 대장군에까지 오른 무장이다. 백제와의 전쟁에서 여러 번 공을 세웠지만 김춘추의 지원이 없었다면 3품 잡찬 벼슬에 대장군으로 보기당 당주가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김춘추의 옆에 서 있던 김유신이 쓴웃음을 짓고 말했다. 대감, 육기전이 비담에 가담했지만 전력화(戰力化)시키지는 못할 겁니다. 왜 그렇소? 비담은 의심이 많아서 육기전을 측근에 두지 않을 것입니다. 육기전이 대감과 내통하고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할 겁니다. 옳지. 김춘추의 눈빛이 강해졌다. 군사들에게 소문을 퍼뜨리도록 합시다. 육기전과 연합해서 밤에 비담을 야습한다는 소문이 어떻소? 그러지요. 세밀한 계획까지 꾸며서 퍼뜨리지요. 김유신이 말했을 때 진막 안으로 위사가 들어섰다. 대감, 경산성주가 왔습니다. 오, 들여보내라. 김춘추가 반겼다. 경산성주는 서쪽 백제와의 국경에 위치한 성주로 김춘추의 친척이다. 곧 경산성주 김대영이 들어섰는데 군관 복색의 사내와 동행이다. 대감,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김대영이 절을 하더니 김유신과 눈인사를 했다. 먼 길을 달려와 주었구나. 고맙다. 감동한 김춘추가 치하했다. 예, 기마군 5백을 끌고 왔습니다. 잘왔다. 대감, 주위를 물리쳐 주십시오. 김대영이 정색하고 말했기 때문에 김춘추가 머리를 끄덕였다. 대장군만 남고 모두 밖으로 나가라. 잠시 후에 진막 안에는 김춘추와 김유신, 김대영과 군관 복장의 사내까지 넷만 남았다. 그때 김대영이 군관을 눈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백제대왕께서 보내신 밀사입니다. 머리를 끄덕인 김춘추가 군관을 보았다. 30대쯤의 사내는 김춘추의 시선을 받더니 입을 열었다. 곧 백제 기마군 3만이 대감을 지원하려고 올 것입니다. 기마군 3만이라고 했소? 김춘추의 눈빛이 강해졌다. 그렇다면 내가 살았소. 이곳까지는 언제 도착할 것 같소? 엿새 후쯤 될 것이오. 엿새라, 엿새를 버텨야겠구나. 혼잣말을 한 김춘추가 김유신을 보았다. 대장군, 가능하겠소? 여왕을 모시고 서쪽으로 물러나 있는 것이 낫겠습니다. 그러면 비담은 우리가 도성을 포기한 줄 알고 마음을 놓을 것 아니겠습니까? 옳지, 그 계략이 신통하오. 그때 밀사가 말했다. 대왕께서는 비담 일당이 제거되고 신라와 백제가 우호국으로 서로 공존해야 된다고 말씀하셨소. 당연한 일이요. 김춘추가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였고 김유신의 얼굴에도 웃음이 떠올랐다.

  • 문학·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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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8.29 19:56

[불멸의 백제] (168) 9장 신라의 위기 4

신라의 도성은 반으로 쪼개졌다. 외성 아랫쪽과 내성인 왕성은 상대등 비담이 점령했고 북쪽은 김유신, 김춘추가 점령한 것이다. 물론 여왕 선덕은 김춘추가 보호하고 있다. 그날 밤이 지난 후에 김춘추와 비담은 동조 세력을 모으기 시작했다. 당장은 군사력과 도성의 대부분을 장악한 비담이 우세했지만 김춘추는 여왕을 모시고 있다는 이점이 있다. 양대 세력은 도성 안에 성벽을 세우기 시작했고 주민들도 양쪽으로 갈라졌다. 신라의 정변은 사흘만에 백제 의자왕에게 보고가 되었는데 도성 안에 있던 첩자가 사흘 밤낮을 달려왔기 때문이다. 선덕이 시동 차림으로 빠져 나왔단 말이냐? 첩자의 보고를 들은 의자가 웃는 대신 한숨을 쉬었다. 비담의 손에 선덕이 죽었다면 신라와 병합이 더 어려워질뻔 했다. 그러나 아직 비담의 세력이 강합니다. 병관좌평 성충이 나섰다. 사비도성의 대왕청 안에는 백여명의 문무백관이 모여 있었는데 의자가 긴급 소집을 시켰기 때문이다. 성충이 말을 이었다. 대왕, 아직 비담의 세력이 막강합니다. 김춘추는 세력 기반인 대야주를 잃고 대야군주 김품석과 42개 성, 5만여명의 병력을 잃은 터라 비담에게 전력이 훨씬 뒤집니다. 머리를 끄덕인 의자의 얼굴에 쓴웃음이 번져졌다. 우리가 대야주를 차지하지 않았다면 비담이 이렇게 나서지도 못했겠지. 그때 내신좌평 흥수가 입을 열었다. 이제는 비담의 세력을 약화시켜야 할 때입니다. 대왕. 약화시키는 것보다 아예 말살을 시켜 놓는 것이 어떨까? 그러면 김춘추 세력이 급부상을 하게 됩니다. 흥수가 말을 이었다. 여왕과 김춘추가 신라를 완전히 장악하면 백제와의 병합 약속을 헌신발처럼 버릴 것입니다. 흥, 당장 병합을 압박하면 두 세력이 연합해서 대들겠지. 그렇습니다. 김춘추도 어쩔수 없이 백제에 대항해 올 것입니다. 그렇다면. 의자가 용상에 등을 묻으면서 말했다. 비담의 세력을 어떻게 약화시킬 것인가? 시급히 대책을 내놓아라. 신라와의 합병은 의자가 태자 시절에서부터 머릿속에 박아 놓은 목표다. 그것은 부친 무왕(武王)이 신라의 선화공주를 왕비로 데려왔을 때부터 내려온 소망이기도 하다. 의자왕은 그 선화공주의 아들인 것이다. 부친으로부터 합병의 대업을 물려받은 입장이다. 그때 동방방령 의직이 나섰다. 대왕, 동방의 상안성에서 비담의 주력군이 모인 신라 서부 오금성까지는 3백리 거리입니다. 동방의 기마군으로 오금성을 기습 격파하면 비담이 놀라 도성에서 빠져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비담 대신으로 김춘추를 견제할 대역을 은밀히 양성해야 될 것입니다. 옳지. 머리를 끄덕인 의자가 성충과 흥수, 의직을 번갈아 보았다. 동방과 친위군의 기마군 3만을 떼어가도록 하고 즉시 시행하라. 예, 대왕. 출전 장수는 대장군 협려가 낫겠다. 부장으로 덕솔 연자신과 백준이 따르도록 하라. 모두 허리를 굽혀 명을 받든다는 표시를 했다. 일사분란한 체제다.

  • 문학·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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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8.28 18:13

[불멸의 백제] (167) 9장 신라의 위기 3

쳐라! 김유신의 외침이 울리자 군사들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뛰어나갔다. 이곳은 외길, 비담의 1천 보군이 내성의 왕궁을 향해 소리 없이 다가가고 있던 참이다. 깊은 밤, 쌍방이 횃불도 들고 있지 않아서 함성만 일어났다. 와앗! 기습한 김유신군이 먼저 승기를 잡았다. 양쪽에서 뛰어나왔는데 비담군(軍)은 허리가 잘린 뱀처럼 꿈틀거리며 흩어졌다. 그러나 도망치는 것은 아니다. 모두 용사들이어서 금방 내성 앞 도로는 쌍방의 살육장으로 변해졌다. 와앗! 그때 뒤쪽에서 함성이 울렸기 때문에 김유신이 놀라 부장(副將)을 소리쳐 불렀다. 비담군이 2개 대로 나뉘어졌느냐? 모릅니다! 부장이 정신없이 소리치더니 어둠속으로 달려갔다. 함성은 더 커졌다. 뒤쪽이다. 와앗! 김유신이 소리쳤다. 형달은 5백을 이끌고 내 뒤를 따르라! 서둘러라! 예엣! 뒤쪽으로 돌아간다! 이제는 김유신이 장검을 빼들고 앞장을 섰다. 궁성의 문은 4개, 그중 서문으로 공격해온 비담의 주력군을 기습했던 것이다. 비담이 1개 군(軍)을 나누어 북문 쪽으로 진입시켰는지는 몰랐던 상황이다. 앞장서서 수염을 흩날리며 달리던 김유신이 소리쳤다. 놈들을 북문으로 진입시키면 안된다! 대장군! 나는 이곳을 맡겠소! 김유신의 등에 대고 김춘추가 소리쳤지만 곧 함성 소리에 묻혔다. 같은 시각, 왕궁의 침전에 있던 여왕 선덕이 놀라 침상에서 일어났다. 왕궁 안에서 함성이 일어나고 있다. 선덕은 대번에 사태를 짐작했다. 반란군이 침입한 것이다. 반란군 수괴는 상대등 비담, 마침내 거사를 일으킨 것이다. 마마! 침전 밖에서 위사장 박무가 소리쳤다. 마마! 반란군이 북문으로 진입했습니다. 어서. 그때 밖으로 뛰쳐나온 여왕이 낮게 소리쳤다. 내가 시동 차림을 하고 나올테니 잠깐 기다려라! 그러더니 잠시 후에 침전에서 시동 하나가 뛰어나왔다. 여왕이 시동으로 변장을 한 것이다. 머리에는 두건을 썼고 시동 복색을 했으니 위사장 박무도 지척에서 알아보기 힘들다. 마마. 박무가 더듬거렸을 때 여왕이 앞장서 달리면서 말했다. 멀리서 따르라! 바짝 붙으면 눈치챌 것이다! 선덕은 반란군의 침입에 당황해서 이쪽저쪽으로 내달리는 시녀 시동 사이에 끼어 동문으로 나아갔다. 북문으로 침입한 비담의 수하 화랑 석기수는 여왕의 침전까지 돌입했지만 허탕을 쳤다. 동문을 빠져나온 선덕이 달려온 김유신과 만났을 때는 왕궁이 완전히 비담에게 장악된 후다. 마마. 선덕 앞에서 눈물을 떨군 김유신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비담 일당을 기어코 소탕하여 신라 사직을 구하겠습니다. 대장군에게 맡기겠소. 시동 복색의 선덕이 흐려진 눈으로 김유신을 보았다. 북문 밖 거리에 여왕과 대장군이 서있다. 여전히 함성이 울린다.

  • 문학·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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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8.27 20:08

[불멸의 백제] (166) 9장 신라의 위기 2

저택에서 군사들이 나왔습니다. 달려온 군사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모두 보군으로 2천명이 넘습니다. 기마군을 쓰지 않군요. 부장(副將) 형달이 김유신 옆으로 바짝 다가섰다. 어둠속에서 두 눈이 번들거리고 있다. 이곳은 왕궁 서쪽의 군사 조련장이다. 짙은 밤이어서 황야는 어둠에 덮여 있었지만 소음이 들려왔다. 김유신이 모은 군사 1500명이다. 이쪽도 보군으로 구성된 군단이어서 은밀하게 움직이려는 의도다. 김유신이 바람에 날리는 수염을 움켜쥐었다. 바람이 센 흐린 날이다. 그래서 하늘에는 별 한점 보이지 않는다. 그놈들이 왕궁으로 오려면 두갈래 길이 있다. 아직 움직이지 말고 기다리도록 하자. 김유신이 말을 이었다. 내가 지금도 호곡성에 박혀있는 줄 알고 있겠지? 이렇게 나오신 줄 알았다면 비담이 움직였을 리가 없지요. 옆에 선 장군 김용무가 말했다. 비담 주위에 고관의 6할이 모여 있습니다. 대장군. 많을수록 좋지 않겠느냐? 김유신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여졌다. 그 반역의 무리를 소탕하면 신라는 새로운 기운으로 덮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말장난이다. 고관의 6할이 모였을 뿐만 아니라 비담 일당은 신라군(軍) 전력의 8할을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삼천당 등 주요 부대 지휘관 대부분은 비담에게 충성을 맹세한 무리로 채워졌고 대왕과 김춘추 무리로 분류된 장군, 관리는 변방으로 쫓겨났다. 지금 김춘추가 가 있는 신주(新州)만이 김춘추, 김유신에게 우호적이다. 그때 어둠속에 잠깐 동요가 있는 것 같더니 김유신 앞으로 한 무리의 사내가 나타났다. 그 중심에 선 사내가 김춘추다. 대감. 김유신이 다가가 김춘추의 손을 쥐었다. 무사히 오셨군요. 이틀 동안 달려왔습니다. 김춘추의 지친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성벽을 넘어오면서 도둑 무리 같은 내 신세가 한심했소. 이 난관만 지나면 신라는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자 김춘추가 김유신의 손을 움켜쥐고 흔들었다. 내가 가야 출신 대장군의 도움으로 신라 사직을 구하는군요. 김춘추는 김유신보다 6살 연하의 44세. 작년에 세력의 기반이었던 가야주 42개 성을 잃고 잔뜩 위축된 상태다. 가야주는 본래 가야왕족인 김유신의 세력 기반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때 김유신이 정색하고 말했다. 대감. 비담이 조금 전에 왕성을 향해 군사를 출발시켰소. 이제 우리가 그놈들을 급습할 차례요. 승산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군사 수는 적지만 기습을 하면 가능성이 있습니다. 비담이 직접 옵니까? 왕궁을 습격해서 여왕전하를 벨테니 비담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군. 머리를 든 김춘추의 눈동자가 흐려졌다. 이번 당의 고구려 침공은 실패할 거요. 그래서 당황제는 신라왕이 누가 되든 신경도 쓰지 못할 겁니다. 목소리를 낮춘 김춘추가 말을 이었다. 비담은 그것을 노리고 있지요. 그놈 뜻대로 되지 않을 것입니다. 김유신이 말했을 때 다시 전령 하나가 달려오더니 소리쳤다. 비담군(軍)이 장계신길로 꺾어졌습니다!

  • 문학·출판
  • 기고
  • 2018.08.26 18:12

[불멸의 백제] (165) 9장 신라의 위기 1

당(唐)과 고구려가 전쟁을 하는 지금이 절호의 기회다. 비담이 눈을 가늘게 뜨고 앞에 선 화랑 유재와 석기수를 보았다. 신라의 사직을 지키려면 여왕과 여왕 일파를 몰사시켜야만 한다. 명심하고 가라. 이제 비담은 거침없이 말을 뱉는다. 깊은 밤, 자시(12시)가 넘었지만 비담의 저택은 열기로 덮여 있다. 넓은 앞뒤 마당은 소리죽여 움직이는 군사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밖에 모인 군사는 2천여 명, 비담의 호위군에서 골라 뽑은 용사들이다. 비담은 그들을 지휘할 장수들로 화랑 유재와 석기수를 임명한 것이다. 주위에 둘러선 장수, 대신들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다. 비담이 말을 이었다. 유재, 네가 궁성의 서문으로 진입해서 곧장 여왕의 침전으로 돌입해라. 예, 대감. 유재는 25세, 왕족이기도 하다. 상대등 비담과 먼 친척이 된다. 거구에 팔이 긴 유재가 어깨를 부풀리며 말했다. 반드시 여왕의 목을 베어 신라를 다시 세우겠소. 장하다. 비담의 시선이 옆에선 석기수에게로 옮겨졌다. 석기수, 네 역할도 크다. 너는 궁성 북문으로 진입해서 여왕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예, 대감. 이미 여왕의 퇴로까지 예상하고 있는데다 궁성에는 첩자들이 나가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비담이 머리를 끄덕였다. 자, 너희들 뒤를 우리가 따를 테니 어서 떠나라. 예, 대감. 소리쳐 대답한 둘이 몸을 돌리더니 청을 나갔다. 그때 잡찬 박명이 한걸음 나서서 말했다. 대감, 김유신이 호곡성에서 닷새째 나오지 않고 있지만 군사를 보내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여왕부터 죽이고 나서. 비담이 웃음 띤 얼굴로 말을 잘랐다. 김유신 그놈을 지금 잡을 필요가 없어. 내가 왕위에 오르면 바로 내 발밑에 무릎을 꿇을 놈이야. 김춘추와 매부 처남 사이가 된 이유를 알지 않은까? 그때 옆쪽 장군들 사이에서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하나가 물었다. 대감께서 김유신과 격구를 하시겠습니까? 해야지. 비담이 웃음 띤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내가 내 손으로 옷고름을 뜯고 김유신의 누이한테 갈 수가 있네. 대감, 김유신은 이제 미혼인 누이가 없습니다. 이 사람아, 김춘추에게 준 누이를 데려오면 되지 않겠는가? 웃음소리가 더 커졌고 비담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느덧 얼굴에서 웃음이 지워졌다. 오늘밤이 거사일인 것이다. 그동안 철저하게 준비를 해 놓았기 때문에 내일 아침이면 새 왕이 즉위할 것이다. 다만 경쟁 세력이 김춘추와 그의 심복인 김유신이 걸렸지만 김춘추는 지금 북쪽 신주(新州)에 있고 김유신도 40여리 떨어진 호곡성에 들어가 있다. 그리고 비담은 김춘추하고 떨어진 김유신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왕족인 김춘추와 인연을 맺기 위해서 격구를 하다가 일부러 김춘추의 옷고름을 밟아 떼고는 제 여동생한테 데려간 김유신이다. 그래서 김춘추와 인척이 된 김유신의 속성을 비담이 알고 있는 것이다. 청을 나오는 비담의 뒤를 장군, 대신들이 따른다. 신라 고관의 대부분이 모여있다.

  • 문학·출판
  • 기고
  • 2018.08.23 20:02

마르지 않는 시작(詩作)의 열정…이운룡 시인 시집 발간

시를 담은 봇물이 저수지 둑을 무너뜨리고 쏟아져 나왔다. 시(詩)도 그 물살에 휩쓸려 나왔다. 이운룡 시인이 시집 <틈생명의 집>을 펴냈다. 2016년 팔순 기념으로 <이운룡 시전집> 12권을 펴낸 뒤 2017년 3월부터 집중적으로 쓴 시 70편을 담았다. 마르지 않는 그의 시작(詩作) 열정의 결과물이다. 시인은 보편적으로 삶의 본질, 존재의 근원 등에 대해 묵직하고 중후한 사색을 형상화해왔다. 이 주제의식을 고졸하고 담백한 표현으로 선명하게 부각하는 것이 그의 시적 특성. 이번 시집의 주제의식도 존재론적 성찰, 과거 삶에 대한 기억, 세계에 대한 치열한 응시로 점철된다. 특히 이 시집에서는 자아의 존재를 정면으로 바라본다. 묻거나 찾지도 마라./ 나는 지금 여기에 없다.// 과거와 현재,/ 미래에도 없다.// 한 순간 있는 듯, 없는 듯/ 사라졌다./ 새벽녘 별빛처럼 실구름처럼/ 한 생이 저물어간다 싶더니// 내일이 오지 않는 허와 공의/ 어둠속으로/ 늦가을 빈 들판처럼 거두어가고/ 없다. (나, 여기에 없다 일부) 노년에 이른 시인은 자아의 소멸과 관련해 삶과 죽음을 동일시하고, 인생이 근본적으로 허와 무의 상태임을 역설한다. 그는 고독과 허무를 인생의 본질로 수용하기 때문에 그로부터 도피 혹은 회피하지 않는다. 대신 유년의 공간, 부모와의 유대감을 고독과 허무를 대체할 위원의 원천으로 삼는다. 그는 자신의 시 변화 과정에 대해 한 생애를 돌이켜 생각하면 20대는 사물 현상에 관한 감각적인 정서 표현, 30대는 군사정권 하의 현실 참여적인 경향, 50대는 자연 사물에 대한 해석적인 풍격, 60~80대는 존재 본질과 생사 문제에 대한 탐구 등이 관심사였다고 말하기도 했다. 전북대 양병호 교수는 해설을 통해 시집은 노년의 삶을 시적 대상으로 생명의 근원을 탐구한 시가 그 중심을 관통하고 있다며 일상의 현상 너머에 있는 생의 본질적 의미와 의의에 대해 사색하는 가운데 그의 상상력은 존재의 무한대까지 확대된다고 밝혔다. 이운룡 시인은 전북문인협회 회장, 중부대 교수, 전북문학관 관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한국문인협회, 한국현대시인협회, 미당문학회 고문을 맡고 있다. 저서로 <이운룡 시전집>, <직관 통찰의 시와 미> 등이 있다.

  • 문학·출판
  • 문민주
  • 2018.08.23 20:02

표현문학회 제69호 발간…재도약 꾀해

표현문학회가 <표현> 제69호 발간을 기점으로 문학회의 재도약을 꾀한다. 표현문학회는 1970년 12월 31일 창간돼 약 50년간 활동해 왔으나 근래 해체 아닌 해체의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이에 이번 <표현> 발간을 계기로 문학회를 재결성하는 등 자구 노력으로 어려움을 헤쳐나간다는 다짐이다. 표현문학회 측은 이번 호를 펴내면서 <표현>의 역사를 되돌아보게 됐다며 2018년 8월 30일 <표현> 제69호 발간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지난 3년간 <표현>을 통해 등단한 문인들을 시상하고, 문학회를 재창립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번 호에서는 임미양 씨가 시 섬 외 2편, 양춘자 씨가 시 나를 찾아온 꽃무릇 외 2편, 김용주 씨가 수필 농촌 산업화의 안타까운 배면으로 신인상을 받아 등단했다. 이들의 당선작 외에도 회원들의 시와 시조, 아동문학, 수필, 단편소설, 평론 등이 담겼다. 특히 시 동인 고래 소속 강은교, 김형영, 윤후명, 정희성 시인의 시를 함께 실어 품격을 한층 높였다. 표현문학회 소재호 회장은 표현문학은 모든 형과 상을 담아낼 것이라며 각양의 소리, 각색의 정신을 잘 챙기고 담아서 이를 보고 듣는 현자에게, 감관하고 관찰하는 독자에게 민낯으로 공여하겠다고 말했다.

  • 문학·출판
  • 문민주
  • 2018.08.23 20:02

김홍광 서예가, '한국한시보감' 5권 출간

김홍광 서예가가 오탈자 걱정 없이 한시를 접하도록 돕는 <한국한시보감>을 펴냈다. 지난 2년 동안 제작한 이 책은 매화, 국화, 대나무난, 소나무학, 연모란 등 모두 5권으로 이뤄졌다. 사군자 화제에 대한 시제를 쓸 수 있도록 시제별 한시 책을 마련한 것. 이를 위해 매화 시 452수, 국화 시 407수, 대나무 시 330수와 난 시 62수 등 편마다 400수 내외의 방대한 자료를 수록했다. 특히 <한국한시보감>은 다른 한시 책과 차별성을 갖고 있다. 재단법인 민족문화추진회가 편찬한 <한국문집총간>을 원본으로 인쇄물을 사진으로 복사해 인쇄하는 영인(影印) 작업을 거쳤다. 한시마다 영인이 있기 때문에 오탈자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또 한자마다 독음을 달아 옥편 없이 해독하도록 했다. 한시마다 주해(註解)와 대의(大意)를 곁들여 이해를 돕는다. 이와 함께 전고(典故)를 검색해 실었다. 한시를 정확히 풀이하기 위해서는 전례와 고사 즉, 전고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책사에 진열된 한시 책이나 인터넷 검색으로 얻은 한시를 접하고 보면 우선 오탈자에 대한 걱정이 앞선다며 오탈자 걱정에서 해방되려면 영인이 있는 한시 책을 선택해야 한다. 한시 진본에 가장 가까운 자료인 <한국문집총간>을 한장 한장 넘기며 영인편집했으니, <한국한시보감>을 이용하면 오탈자 걱정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편찬의 배경과 과정을 설명했다. 이어 이 책이 서예를 비롯해 한시를 사랑하는 이들의 좋은 벗이 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김홍광 서예가는 전라북도서예대전 초대작가로 현재 대한노인회 전북연합회 노인지도자대학 학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 <한시로 스승 삼고 묵향으로 벗을 삼아>, <중국한시진보> 등이 있다.

  • 문학·출판
  • 문민주
  • 2018.08.23 20:02

[전북작가회의와 함께하는 전라북도 길 이야기 ] 13. 날이 흐리면 흐린 대로 좋아서 떠나는 여행 - 유수경

오전 내 비구름이 오락가락했다. 아라비카 원두를 갈아 커피를 내리는 동안 빗방울이 떨어졌다. 입안 가득 깊은 우울처럼 머물던 커피의 신맛이 사라지자 후드득 요란을 떨던 빗소리가 잦아들었다. 길을 떠날 요량이었고, 다행히 비도 멈춘지라 적당히 흐려 좋은 날이었다. 전주에서 26번 국도를 탔다. 이제 막 노란 물이 들기 시작한 은행나무가 시속 80km로 뒷걸음을 쳤다. 물안개가 걷히는 길을 따라 한 4km를 달리니 모래재가 나온다. 완주군 소양면과 진안군 부귀면을 잇는 해발 530미터 굽이굽이 험한 이 길은 1972년 개통되었다. 이미 오래전 보부상들이 넘나들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모래재는 무진장(무주진안장수) 사람들이 농산물을 싣고 전주로 넘어오는 생의 길이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생의 마디마디가 관절통처럼 쑤셔 왔을 산길을 따라 진안의 석기와 표고버섯, 인삼 등이 외지로 나왔다. 그러나 이 고갯길을 넘다 수많은 생명이 산 아래 무덤이 되었다. 1997년 새 길이 놓이면서 모래재는 이제 시계추를 멈추고 묵언수행 중이다. 세상사 번잡스러운 날들 위에 천 년의 침묵을 새기고 있는 것이다. 먼 산 잡목이 갈색빛으로 물드는 모래재를 지나자 지상의 하루가 이처럼 쓸쓸하고 아름다운 길이었나 싶은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길이 나온다. 원세동에서 웅치골까지 1.5㎞ 남짓한 이 길은 100여 년의 비포장 길에 새겨진 역사를 기억하라는 듯 장엄하게 세상을 굽어보고 있다. 가끔 이 길을 무심하게 지나치는 차량들이 백 년의 고독을 흔들어 깨우지만 이내 다시 바람이 깃드는 곳으로 나뭇잎이 흔들릴 뿐이다. 사람의 길과 자연의 길이 서로 다름을 1.5㎞ 메타세쿼이아 길에서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우주의 시간을 거스르지 않고 스스로를 내려놓는 가을날이 숭고해지는 까닭은 생의 무게만큼 자연도 버겁게 삶을 버티기 때문이다. 한적하고 고혹하여 숨이 막힐 지경인 오지 마을 날이 흐리면 흐린 대로 좋아서 떠나는 여행은 우울을 덧씌우기 십상이다. 더 우울해지려는 내 불손한 의도를 알아차린 듯 오후 들어 날이 개었다. 비구름이 걷히는 구불구불 산길을 따라 제법 높은 재를 넘으니 저 아래 금강 상류가 보인다. 여기서 4km를 더 오르니 가막골이 나온다. 가도 가도 까마득한 첩첩산중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625 전쟁 전후로 빨치산이 숨어들 정도로 외부와 차단이 된 오지 마을이다. 이곳에 마을이 있고 길이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한적하고 고혹하여 숨이 막힐 지경이다. 비무장지대의 생태를 간직한 가막골은 고라니, 오소리, 너구리가 제 집 마당인 양 노닐고, 은하수가 쏟아지는 밤이면 반딧불이가 너울춤을 춘다. 전북에서 손꼽히는 청정 지역이어서 혼자 꺼내 보는 비밀일기처럼 숨겨두고 싶은 곳이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 족히 200미터는 될 법한 돌담이 죽 늘어서 있다. 돌담길을 따라 가을꽃이 한창이다. 발길에 채일 정도로 지천이던 돌덩이로 담을 쌓자 바람이 들고 나는 숨길이 생겼다. 그 숨길에 지난봄 가막골을 지나던 풀씨들이 날아들었다. 혼자 가는 먼 길은 외롭다고 적적한 생의 하루, 말벗이나 하자고 무수한 생명들이 머물다 갔다. 참회인 듯, 위로인 듯 무심하게 한참을 걷다 보니 마을 안이다. 산 빛이 내려앉은 마을회관 입구 하늘정원 바위에 턱을 고이고 앉았다. 진안고원을 설명하기 딱 좋은 고지대에 서 있으니 머리가 하늘에 닿을 듯하다. 흐린 아침과는 사뭇 다른 이 풍경이 당혹스럽지만 구덕구덕 잘 말린 햇볕을 쬐는 느낌이 몸에 감긴다. 생각해 보니 생은 볕을 품었던 날들조차 사치였던 것, 풀씨처럼 가벼운 존재로 살다 보면 막다른 길에 서게 된다고, 그래서 생은 무거워야 한다고 습관처럼 진지했던 날들이었다. 진지함 끝에 매달린 지루한 일상이 아우성칠 때도 풀씨처럼 날아갈 수 없었다. 우울은 마을 안으로 밀려오는 산 그림자처럼 처음엔 담장 밑 그늘이었다가, 이내 담장을 훌쩍 넘는 어둠이 되곤 했다. 짓무르게 보아온 그 풍경들이 시가 되고 감투봉 아래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들을 둘러싸고 있는 산 그림자가 짙어지기 시작했다. 허공을 우왕좌왕 날아다니던 날것들의 파닥임이 풀숲으로 사라졌다. 산비둘기 울음이 마을 가까이 다가올 즈음 골목 안으로 바람이 몰려왔다. 걸음을 재촉해 느티나무 정자길로 들어섰다. 마을회관 길에서 만난 동네 어르신들의 벽화가 이 길에도 있다. 20가구가 채 안 되는 마을이지만 시인과 화가들이 살고 있다. 담길에 새긴 시도, 풍경도 도시 때를 타지 않은 순박한 것들이다.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 길을 내고 그 길을 짓무르게 보아온 풍경을 담았으니 수작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이 마을에 살면 시인이 되고 화가가 된다. 벽화가 그려진 골목을 지나다 보니 디딜방앗간이 보인다. 마을 농기구 전시관이다. 상가막마을은 족히 400여 년 이전에 생겼을 거라고 추정을 한다. 그 수많은 세월 동안 이곳에서 태어나 자라고 생을 마감했을 사람들의 흔적과 손때 묻은 농기구를 유물로 남겨 놓았다. 선조들의 삶이 후대에겐 문화유산이 되기 때문이다. 농기구 전시관을 지나 마을 막바지에 다다르니 황토 흙을 발라 지은 흙집이 보인다. 지난 3월 한국인의 밥상을 촬영한 집이다. 100년이 넘은 이 집의 풍경은 소를 귀히 여기던 풍습대로 방문 앞에 외양간이 있다. 여물을 쑤던 가마솥도 그대로다. 먹을 것이 귀한 그 옛날 식구들의 유일한 몸보신이었던 염소 고기가 소개되었다고 한다. 천반산 정여립이 못다 이룬 대동의 꿈 길이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 눈앞에 알알이 여문 율무 밭이 끝도 없이 펼쳐졌다. 용담댐 상류의 넉넉한 품으로 키워낸 유기농 율무 밭이 5만 평이다. 찰진 바람과 맑은 햇살이 쏟아지는 고원 마을에서 볼 수 있는 국내 유일의 유기농 율무 밭이다.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 산과 바람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마을 길을 한 바퀴 돌아 가장 높은 지대에 오르니 천반산과 덕유산이 보인다. 조선 선조 때 정여립이 피신하여 자결했다는 전설이 남아 있는 천반산은 많은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율곡 문하에서 수학한 개혁파 정여립은 보수파에 몰려 낙향한 뒤 대동계를 조직하고 민중을 규합해서 장차 있을지도 모를 외침에 대비하고자 천반산에 들어가 군사훈련을 했다 한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정여립이 우매한 백성을 현혹하여 모반을 꾀하고 있다는 상소문이 빗발쳤다. 모함을 받은 정여립은 정공을 모시러 왔다는 진안 군수의 전갈을 받고 포박되었다. 그 후 1589년 임진왜란이 나기 3년 전에 한 많은 생을 마쳤다고 전해진다. 밤으로 반딧불이 휘영휘영 포물선을 그리고 은하수가 빗살처럼 쏟아지는 상가막마을 돌담길을 더디게 걸어 나왔다. 마을 입구에 핀 빨간 봉선화 몇 잎 따서 손톱에 올려놓고 다시 모래재를 넘어 전주로 돌아왔다. 생의 무게를 덜어낸 하루였다. *유수경: 1992년 『현대시학』에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갈꽃 스러지는 우리의 이별은』, 동화 『한나의 방울토마토』, 『못 찾겠다 꾀꼬리』, 『봉남이의 봄』, 『소낙비 내리던 날』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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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8.23 18:01

[불멸의 백제] (162) 8장 안시성 18

군사 복장을 한 계백이 역시 군사 차림의 화청과 함께 왼쪽 성벽에 올랐다. 지키던 군사들이 계백을 알아보고는 놀라 눈을 크게 떴지만 화청이 나무랐다. 잘 지켜라. 놈들이 이곳을 겨냥해 올 수도 있다. 성문과 2백보쯤의 거리였지만 이곳에는 당군이 관심을 두지 않는다. 아래쪽이 급경사여서 성벽 높이가 배나 더 높아진데다 구덩이처럼 팼기 때문에 무덤속이나 같은 곳이었다. 실제로 성벽 아래쪽 구덩이에는 개전 초기에 멋모르고 몰려왔다가 빠져나가지 못한 당군 시체가 지금도 20여구나 쌓여 있다. 철궁을 손에 쥔 계백이 성벽의 틈 사이로 당군의 본진을 내려다 보았다. 그순간 계백의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왼쪽이 노출된 이세민의 상반신이 보이는 것이다. 거리는 150보 남짓. 이세민의 앞쪽은 쇠방패로 무장한 친위대로 겹겹이 둘러싸여 있었지만 이쪽에 상반신이 노출되었다. 은솔, 보입니다. 옆에 선 화청의 두 눈이 번들거렸고 목소리가 떨렸다. 무성한 수염은 반백이다. 마침 바람이 뒷바람이 부는군요. 3보쯤 더 나가겠소. 화청의 말을 흘려 들으면서 계백이 철궁에 화살을 먹였다. 단 한발이다. 한발로 맞춰야 한다. 화살이 근처에 떨어지면 친위대는 순신간에 이세민을 철통안에 모실 것이었다. 햇살이 비스듬히 비치고 있다. 함성과 호각, 북소리가 천지를 울리고 있었지만 이쪽 성벽 위는 모두 긴장으로 굳어져 있다. 30명쯤의 군사는 제각기 성벽 틈 사이로 붙어서서 창칼을 번쩍이고 있었지만 입을 다물었다. 성벽 틈 사이에 세워 놓은 깃발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계백은 숨을 들이켜고 나서 화살 끝을 쥐고 힘껏 당겼다. 화살은 싸리나무 대에 가는 쇠심을 박았고 화살촉은 삼각으로 길이는 한치(3cm), 끝은 바늘처럼 날카롭다. 계백은 어금니를 물고 어깨를 힘껏 젖혔다. 그 순간 철궁이 만월처럼 굽혀지면서 화살촉이 철궁을 쥔 왼손 검지 위에 얹혔다. 그때 계백이 화살촉 위에 이세민의 얼굴을 올려놓고는 그대로 겨냥을 한치쯤 올렸다. 한치 위쪽의 허공을 겨냥한 것이다. 철궁을 쥔 왼손이 나무토막처럼 굳어졌고 화살끝을 쥔 손가락의 감각이 없어졌다. 잠깐 후면 손가락이 떨리게 된다. 그순간 계백이 화살끝을 쥔 손가락을 놓았다. 팅! 시윗줄에 끊어질 것 같은 소음이 울리더니 화살이 날았다. 계백은 눈을 부릅떴다. 철궁에서 발사된 화살 속도는 빠르다. 다음 순간 계백이 숨을 들이켰다가 뱉으면서 소리쳤다. 맞았다! 맞았다! 거의 동시에, 그러나 계백보다 배나 더 큰 목청으로 화청이 외쳤다. 그 뒤에 서있던 하도리가 따라 소리쳤고 성벽에 있던 군사들이 일제히 고함을 쳤다. 당왕 이세민이 살에 맞았다! 계백은 이세민이 얼굴을 두손으로 감싸 안는 것을 보았다. 화살이 얼굴에 박혔다. 다음 순간 대경실색을 한 친위군이 방패로 이세민을 감쌌기 때문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친위군은 당황했다. 정연했던 대오가 뒤죽박죽이 되었다. 곧 뒤로 물러서면서 황제의 깃발이 비스듬히 눕혀지기까지 했다. 그러더니 뒤쪽의 중군까지 허겁지겁 물러간다. 이세민이 화살에 맞았다! 성벽 위의 고함은 더 높아졌고 어리둥절했던 이쪽 군사들이 따라서 외치기 시작했다. 어느덧 운제가 멈춰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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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8.20 21:53

[불멸의 백제] (161) 8장 안시성 17

폐하, 요동총병 한문광이 투석에 맞아 전사했습니다. 친위대장 왕양춘이 말하자 이세민이 코웃음을 쳤다. 바보 같은 놈, 장수가 돌덩이에 맞아 죽다니. 진막 안에는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황제의 심기(心氣)가 극히 나쁜 상태인 것이다. 오전에는 독전을 하다가 화살을 피해 뒤로 물러나는 중랑장 하나를 잡아 목을 베었다. 그 머리통을 창끝에 꽂아 포차 옆에 세워 두었으니 군사는 물론이고 장수들도 화살이나 투석을 피해 뒤로 물러나지 못했다. 요동총병 한문광도 뒤로 못 피하고 죽었을 것이다. 오후 미시(2시)쯤 되었다. 오늘도 아침부터 격렬한 공격을 퍼부었지만 동문 옆쪽 성벽만 조금 허물었을 뿐 수천 명의 사상자만 내놓고 일진일퇴 중이다. 그때 이세민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후에도 총공격이다! 장수들이 일제히 대답하더니 진막 안이 분주해졌다. 출동 준비를 하려고 장수들이 뛰어나갔고 전령들이 들어왔다. 폐하, 오후에는 쉬시지요. 친위대장 왕양춘이 말했을 때 이세민은 버럭 소리쳤다. 짐도 출전한다! 준비해라! 예엣. 서문으로 간다. 서문을 집중적으로 공격하라고 해라! 왕양춘이 명(命)을 전하려고 뛰어나갔을 때 이세민이 머리를 돌려 뒤에 선 시동을 보았다. 김인문이다. 김춘추가 신라왕이 된다면 네가 그 뒤를 잇겠구나. 황공합니다. 소인은. 소인이 어째? 그런 자질이. 닥쳐라! 이세민이 버럭 소리치자 김인문이 몸을 웅크렸다. 눈을 부릅뜬 이세민이 김법민을 노려보았다. 거대한 진막 안이 다시 조용해졌다. 이세민이 이사이로 말했다. 난세에 드러내도 모자랄 판인데 움츠리고 숨다니, 겁쟁이 놈들. 황공합니다. 네 애비한테 밀사는 보냈느냐? 예, 폐하. 그때 왕양춘이 들어와 보고했다. 폐하, 출동 준비가 되었습니다. 밖에서 북이 울리고 있다. 황제의 출동을 알리는 북이다. 이세민이 또 나오는 모양입니다. 오늘도 서문 성주에 서 있던 계백에게 장덕 백용문이 말했다. 이제는 하루에 두 번씩 총공격을 하는군요. 오전에는 당군 주력이 동문을 공격했던 것이다. 지금 무너진 동문 옆쪽 성벽의 보수작업이 한창이다. 동문 성벽 보수작업이 덜 끝났을 텐데 그곳을 포차가 돌을 퍼부으면 위험할 텐데요. 그때 옆에서 군사들이 소리쳤다. 운제들이 이쪽으로 옵니다. 머리를 든 계백이 구름 같은 먼지 속에서 이쪽으로 향해져 있는 운제 3대를 보았다. 당군이 오후에는 서문을 공격할 것 같다. 머리를 든 계백이 백용문을 보았다. 전원 성벽으로 대기시키도록. 예, 은솔. 곧 백용문의 지시로 북소리가 울리더니 군사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때 백용문이 성벽을 내려가고 있는 계백에게 소리쳐 물었다. 은솔, 어디 가십니까? 나는 왼쪽 성벽에 있을 테니 장수들은 성문을 지켜라. 계백이 서둘러 내려가면서 지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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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8.19 21:42

[전북작가회의와 함께하는 전라북도 길 이야기 ] 12. 부안 ‘속살길’, 600년간의 ‘동행’ - 김형미

같이, 동행할까요? 동행이라는 그녀의 말 때문이었을 게다. 오래전부터, 아니 그녀와 내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우리가 벌써 같은 길을 가는 사람처럼 느껴진 것은. 어깨까지 내려오는 그녀의 머리카락 길이만큼의 단정한 마음의 무게까지도. 길은 어디로든 나 있다. 집 없는 수행자의 삶처럼. 그리고 무한을 꿰뚫어보는 힘을 가진 고타마 붓다처럼. 그 길 어딘가에서 이즈음 언뜻언뜻 스쳐오는 자귀꽃 향기. 달빛인가 싶기도 하고, 달에서 나는 향 같기도, 어느 귀한 별을 타고 난 사람의 인기척 같기도 해서 자꾸만 들여다보게 만드는. 내 고향 부안이었다. 비 오지 않고 바람 불지 않는 조용한 날, 그 몸서리쳐지는 꽃향기 속을, 향기 가득한 길을 가만 열어보고 싶은 곳. 언제라도 많은 정겨운 것들이, 생이, 끔찍이 사랑하길 갈망했던 것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 아아, 금방이라도 몸이 포개지면 마음이 따라와 눕는 꽃가지 하나 생길 것만 같은, 부안! 부안군청 해설사로 있는 그녀와 함께 부안의 속살길을 더듬어보기로 한 것은 참 잘한 일이다. 어차피 떠나지 않는 길은 한낱 허상일 뿐이었으므로. 청림 지나 사자동으로 해서 내소사로 넘어가거나, 반계 유형원 사당 지나 굴바위를 끼고 병풍바위가 있는 내변산길로 돌아 나오거나, 혹은 하섬 지나 적벽강으로 이어지는 해안도로를 타는 외변산길도 좋지만, 정작 부안 속의 부안을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무엇인가 죽지 않는 것을 찾아 떠나기엔 우리는 몸속에 너무 많은 뼈를 지니고 있어서였는지도 모른다. 해서 이름 붙여진 것이 속살길이라 했다. 600년 동안 지켜온 부안의 속살을 드러내는 것이라니. 그러나 속살에서 풍겨지는 느낌처럼 전혀 속되지 않음이 서운하기보다는 몇백 년을 들어도 다 못 들을 부안의 정한이 느껴지는 길. 목가시인 신석정에서 조선시대 예인 이매창에 이르는 품격 있는 인문학의 거리. 수로를 만드는 사람은 물을 끌어들이고, 화살을 만드는 사람은 정성을 다해 살을 다듬는다고 했던가. 목수는 나무를 심고, 분노가 깊은 사람은 자신을 가지런히 한다고. 그리고 길을 걷는 사람은 스스로 길을 낸다고 말이다. 어쩌면 사람은 길을 만들고, 길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서림공원으로 더 많이 불리고 있는, 부안의 주산(主山)인 성황산. 이 산의 초입에 매창이 거문고를 타고 시를 읊었던 금대(琴臺)가 있다. 매창의 서늘한 눈매가 이 산에 많은 서어나무 그늘만큼이나 선선하게 와닿는 듯한. 결이 고르지 않고 울룩불룩 근육질로 못생긴 것이 서어나무라고 했다. 한자말로는 서목이라고 해서 서쪽에 있는 나무를 뜻하는데, 서어나무가 서림공원에 유달리 많이 번성한 것도 다 그 뜻이 있을 법하다. 활쏘기를 하면서 재주를 겨루던 활터 심고정(審固亭)이 내려다보이는 이 금대에 적힌 시구들. 시인 묵객들이 시회를 열고 혜천(惠泉)의 물을 마시며 풍류를 즐긴 흔적이다. 부안에 머물렀던 현감들을 기리는 비들을 새겨보며 부안읍 성터길 따라 성황산을 한 바퀴 에돌아본다. 지금은 거의 사라지고 없지만 일부 남아 있는 성황산 자락 토성으로 된 성터길. 그 길을 따라 도는 동안, 가슴 저 깊은 곳에서 매창인지, 그 옛날 풍류객들인지, 혹은 곧 쏟아질 것만 같은 장맛비를 몰아오는 바람인지 힘 있게 술대를 내려치는 거문고 소리가 들린다. 거문고 괘를 짚듯 과거와 현재를 따악따악 짚어나가는 소리. 그리고 미래로 끌어올려질 소리. 한동안 줄곧 곧게 뻗어 있는 메타세쿼이아길까지 따라오는 그 거문고 소리를 내려놓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독성이 강해 양이 먹기를 머뭇거리거나, 먹고 나서 서성이다 죽는다 해서 척촉화(躑躅花)라 하는 철쭉. 그 철쭉이 메타세쿼이아 이쪽과 저쪽의 간격을 가득 메우고 있는 모양의 특이한 길 중간쯤, 장사꾼들이 넘나들던 상술재길이 있다. 그쯤해서 바로 밑의 향교를 비롯하여 부안읍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대에 걸터앉아 잠시 더위를 살폈던가. 작은 다람쥐가 턱 안에 고슬고슬한 알밤을 그득 물고 있는 것처럼, 작은 덩치 속에 무궁무진한 역사와 문화가 참 알차게도 쟁여져 있는 성황산. 변화와 변화를 거듭해온 600년 부안의 역사가 함께 땀을 닦아내고 있는 모습이 역력했다. 스스로 헛된 괴로움을 키우지 않기에, 평안으로부터 가까이 있게 된 부안. 최상의 고요에 도달해 있는 느낌이랄까. 때문에 다소곳하며, 쾌(快)도 불쾌(不快)도 존재하지 않으며 세속의 집착을 여읜 채 세상 속에 놓여 있을 수 있는. 그녀도, 나도,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길 수 있는 여유를 가지고서. 부안 사람들의 재력을 보여주는 돌 문화도 빼놓을 수 없이 근사한 속살을 지니고 있다. 부안읍성의 동문 안, 서문 안, 남문 안을 지키는 석당산들. 짐대라고도 하는 이 당산들 중, 동문 안 당산은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 조선 숙종 15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현재 부안읍 서외리에 자리한 서문 안 당산. 이 오리짐대에는 정확히 숙종 15년에 건립되었다는 명문이 남아 있는데, 우리나라 오리짐대와 관련된 가장 오래된 역사 기록으로 그 가치성이 무척 뛰어나다. 네 마리 거북이가 오르내리는 모습이 양각된 남문 안 당산은 서문 안 당산과 달리 오리는 없지만, 행주형지세의 마을에 순항을 바라는 비보적인 짐대로 꼽힌다. 특히나 큰 거북이 한 마리가 받침돌로써 남문 안 당산을 떠받치고 있는 모습은 참 인상적이다. 세 당산과 더불어 서문 밖에 자리하고 있는 석당간도 있다. 안과태평과 풍농을 기원하는 수호신으로 짐대할머니라 부르는 서외리 석당간지주. 용이 기둥을 감고 오르는 모양과 거북이가 양각되어 독특한 장식성으로 가치를 인정받고 있기도 하다. 눈이 열린 사람은 결코 자신의 완성을 위한 곳이 아니면 머무르지 않는다. 눈은 마음의 통로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자리를 옮겨 앉혔지만, 어쩌면 이 짐대들도 자신을 완성할 수 있는 최고의 자리에 놓여 있지 않았을까. 때문에 그 덕상(德相)을 보고 있으면, 우리의 두 눈은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올 수 있을 것만 같은 것이다. 결코 허망한 것을 향해 달려가지 않는 모습으로. 지금의 군청 청사 자리에 있었던 부안의 관아터도 눈여겨볼 만하다. 1810년 현감을 지냈던 박시수의 봉래동천(蓬萊洞天), 주림(珠林), 옥천(玉泉)이라는 글씨만 널따란 화강암 바위에 또렷이 남아 있는 관아터. 국내에서 가장 큰 초대형 초서체로 쓰인 암각서 봉래동천(蓬萊洞天)은, 신선이 살 만큼 경치가 아름답다는 뜻이라 하니, 결코 그냥 지나칠 수만은 없는 곳이기도 하다. 군청 아래쪽 가장 번화했던 본정통 거리에 거대한 붓 한 자루가 조형물로 세워져 의아했던 적이 있다. 옛 관아 터 자리에 있는 옥천의 우물을 붓으로 찍어 내려와 우리 사는 이야기와 찰나의 순간들을 과거와 현재, 미래로 이을 수 있도록 기록하기 위함이라 했던가. 붓이란, 예나 지금이나 앉은 채로 기대어 눕지 않는 꿋꿋하고 강인함이 느껴지게 한다. 보다 현대적인 거리라 할 수 있는, 군청 앞 에너지 테마 거리로 이어지는 젊음의 거리 아래쪽에는 매산리고개가 있다. 매화가 땅에 떨어진 형상의 터 매화낙지혈. 매일생한불매향(梅一生寒不賣香), 즉 일생을 추운 데서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는 지조 있고 고결한 꽃이 매화다. 많은 씨를 퍼뜨려 다산과 풍요를 상징하기도 하는 매화가 떨어지면, 향기가 사방에 퍼지기 때문에 자손의 발복이 크고 오래도록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는 혈터. 그런 혈터가 한동안은 여인숙이 즐비하여 청소년들의 발길을 돌려세우기도 했다. 지금은 손으로 꼽히는 여인숙 몇 채가 그간의 속사정을 털어놓듯 한껏 낮은 지붕을 받치고 있는 매산리고개. 그러나 그 또한 가장 고귀했던 터에서 가장 낮은 자리가 된 터의 역할과 기능을 돌아볼 수 있는 뜻깊은 시간이리라. 매산리고개를 넘어와 부안 상설시장에서 팥칼국수 한 그릇 먹는 맛은, 또 하나 부안의 속살 맛을 즐기는 일. 이유는 모르겠지만, 부안시장은 유난히 보리밥을 겸한 팥죽집이 즐비하다. 양이 많아 한 그릇으로 두세 명이 나눠 먹던 시절도 있었다. 시장 한복판에 쉼터처럼 놓여 있는 찻집에 들러 시원한 냉커피 한 잔 마시는 것도 맛을 아는 또 다른 묘미일 터. 그러다 보면 어느덧 긴 여름날의 해가 지고 밤이 된다. 선선한 밤공기를 쐬며 초대형 물고기 분수대에서 발하는 오색 조명이 아름다운 롱롱피쉬길을 경유해 첼시정원박람회 수상 경력이 있는 황지해 작가의 작품이 있는 너에게로길, 청춘싸롱이나 사께와 같은 이름의 각색의 술집들이 즐비한 청춘의 거리까지 거닐어볼 수 있는 부안의 야(夜)한 밤거리. 듬직한 재미를 느껴볼 수 있는 이 길들도, 길의 문화도, 언젠가는 역사가 되고 역사의 숨은 이야기가 되겠지. 그리고 또 그 훗날의 시대가 지금의 이야기들을 꺼내어 놓기도 하겠지. 무상한 것을 알아보지 못하는 장님 같아서 더욱 흥미진진한 거리들의 이야기. 그녀와 함께 꼬박 이틀 동안 600년간의 동행을 한 속살길 끝, 칠월 장맛비를 만났던가. 그동안 하고 싶었던 얘기를 다 쏟아내 버리기라도 했다는 듯 시원하고 우렁찬 비. 저 맹렬한 속도로 쏟아지는 장맛비처럼 매순간 우리는, 얼마나 생을 격렬하게 살고 싶었던가. 그 무엇에게든 또한 얼마나 흠뻑 젖어보고 싶었던가. 그 속에서 살고, 사랑하고, 발견하고 싶었던가. 그렇게 한참을 욱신거리고 나면, 막잠 자고 난 누에처럼 말갛게 눈 뜨는 부안. 전체가 거대한 정원도시가 되어가고 있는, 부안읍 거리 곳곳에 숨어 있는 이야기들이 막무가내로 빗소리에 지워졌다 다시 꺼내어지곤 하는. 각자의 시계를 가지고 부안이라는 큰 하나의 시계 안에서 거침없이 살아가고 있는 부안인들의 삶의 모습도. 전북의 숱한 길 중에서 그 부안의 길이 지금 우리 앞에 오롯이 속살을 드리우며 쏟아들고 있는 것이다. 자귀꽃 향기를 실은 여름 무더위 속에 제대로 한참 깊어 있는 맛깔을 내면서. 우리의 동행은, 여기서 다시 이어질 거예요. 어디로든 나 있는 것이 길이지만, 모든 길은 결국엔 하나로 귀결된다. 사람 목숨처럼 짧고 무상하며, 변하며 이지러지지 않는 곳으로. 그래, 마음이 머무는 그토록 안온한 곳으로. *김형미: 2000년 <전북일보> 신춘문예와 <진주신문> 가을문예공모, 2003년 『문학사상』 시 부문 신인상. 시집 『산 밖의 산으로 가는 길』, 『오동꽃 피기 전』, 그림에세이 『누에』 등. 불꽃문학상서울문학상목정청년예술상 수상, 2018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수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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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8.16 21:54

[안도의 알쏭달쏭 우리말 어원] (103) 담배 - 인도제도의 섬 '타바고' 유래설 등 다양

담배는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을 때 쿠바에서 토인들이 피우는 것을 발견한 데서부터 유럽으로 전래했다고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이전에 유럽에서 피웠다는 이설도 있다. 그런가 하면 인류학자 중에는 아시아에서 미국 쪽으로 전파했던 것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영어로 담배를 tobacco(토바코)라 하는데, 가까운 일본에서도 다바코(タバコ)라고 한다. 그 어원에 대해 서인도 제도의 트리니다드(Trinidad)도 북동부의 섬 타바고(Tabago)에서 유래했다는 설과 산토도밍고 토인이 흡연에 사용하는 담뱃대를 토바코라 한 데서 온 것이라는 설이 있다. 다른 편으로는 멕시코 원주민들의 토박이말에서 왔다는 설도 있다. 재미있는 것은 그것을 받아들인 나라에서의 호칭이다. 프랑스에서는 여왕초, 일본에서는 남만초, 중국에서는 반혼초 또는 상사초로 불렸다. 우리나라의 기록에는 남령초(南靈草), 남초(南草), 요초(妖草), 왜초(倭草) 따위로 불렸다. 담배의 우리나라 최초 기록은 <인조실록>에 나는데 1616~1617년에 바다를 건너 들어와 이를 복용하는 자가 간혹 있었으나 그다지 성행하진 않더니, 1621~1622년에 이르러서는 복용하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고 쓰여 있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에는 오늘날 쓰이고 있는 담배와 비슷한 말이 나온다. “담바고는 남령초라 하는데 근년에 일본에서 온 것이다”라는 대목이 그것이다. 그 이후 민요에서 담바구 같은 표기도 보이니, 토바코가 일본의 다바코를 거치고 그것이 우리나라로 건너오는 사이 담바구 같은 것으로 와전돼 담배로 된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민간 어원론 설로는 단방구 즉 달콤한 방구 같다는 데서 왔다는 말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민간 어원일 뿐, 담바구의 음절이 줄어들면서 담배로 됐다고 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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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8.16 20:22

잃어버린 동심이 살아나는 시편들

중견 시인 오봉옥이 8년 만에 다섯 번째 시집 <섯!>을 펴냈다. 오봉옥 시인은 우리나라에서 몇 안 되는 필화(筆禍)를 겪고 투옥된 인물이다. 그는 해방 전후의 좌익 활동을 연작시 <지리산 갈대꽃>(1988)과 서사시 <붉은산 검은피>(1989) 형태로 전면에 드러낸 최초의 시인이었다. 그런 그가 2000년대를 전후해 개인화된 시 혹은 자기성찰적 심리의 시를 쓰는 데 대해 혹자는 당혹감과 함께 반문을 갖기도 한다. 이에 대해 임우기 문학평론가는 “이번 시집은 시인의 30여 년간의 시력에 아로새겨진 민중시의 통념에 갈등·저항하면서도 하나의 합일을 이루어낸 치열한 고투의 산물”이라며 “시집이 품고 있는 시인됨의 고뇌와 편력을 가늠하는 것은 오봉옥 시인의 삶의 이력과 시의 변화를 이해하는 일이 될 것”이라고 설명한다. 특히 시인은 아이의 순수한 마음이야말로 시인의 존재 근원이자 시의 연원이라 믿는다. 그래서 시집은 전체적으로 시인됨의 연원 혹은 유래로 ‘아이’의 마음을 궁구한다. 현대인들이 잊어버리기 쉬운 동심의 눈으로 세상을 노래한 시편이 많은 것도 그 이유에서다. “일곱 살짜리 계집아이가 허리 꺾인 꽃을 보고는/ 냉큼 돌아서 집으로 달려가더니/ 밴드 하나를 치켜들고 와 허리를 감습니다/ 순간 눈부신 꽃밭이 펼쳐집니다// 오늘 난 두 아이에게서 배웁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등불이 될 수 있다는 걸” (시 ‘등불’ 중) ‘등불’, ‘소리를 본다는 것’ 등은 아이들의 순수한 마음이 잘 드러난 시다. 아이의 선하고 맑은 마음으로 만물의 존재를 감지하고, 지각하는 존재가 시인이라는 그의 사유가 엿보인다. 오봉옥 시인은 1985년 ‘창작과 비평’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지리산 갈대꽃>·<붉은산 검은피>·<나같은 것도 사랑을 한다>, 비평집으로 <시와 시조의 공과 색>·<김수영을 읽는다> 등이 있다. 현재 서울디지털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계간 ‘문학의 오늘’ 편집인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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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민주
  • 2018.08.16 20:22

[불멸의 백제] (160) 8장 안시성(安市城) 16

서문 좌측 성벽에 선 계백이 아래쪽 당군을 내려다보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거리를 재는 것이다. 노련한 궁사는 표적과의 거리를 거의 정확하게 잴 수가 있다. 많아야 2자(60m)정도 차이가 날뿐이다. 지금 이곳에서 이세민과의 거리는 162보, 쏘면 닿는 거리다. 이세민은 방패를 든 철기군의 철통같은 방어막 안에 앉아 있지만 여기서는 측면이 노출되었다. 가슴 위쪽이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상반신은 황금 갑옷을 입은 데다 목에는 쇠사슬 보호대를 둘렀다. 머리에 투구를 썼지만 무거워서 가끔 벗고 황금 관을 쓰기도 한다. 계백이 손에 들고 있는 각궁을 내려다보았다. 소뿔을 대어 만든 각궁은 손에 익었다. 이 거리에서 이세민을 맞출 수는 있다. 이 활은 마상에서 달리면서 쏘기에 적당하다. 1백보 거리라면 달리는 사슴, 범이라도 연달아 속사를 해서 10발 8중까지는 맞춘다. 그때 옆에 선 화청이 말했다. 은솔, 거리가 좀 멉니다. 화청은 군사 차림이었고 계백도 그렇다. 오늘도 이곳 좌측 성벽의 돌출 구역에는 군사가 대여섯밖에 없다. 계백과 화청이 군사 차림으로 이곳에 와있는 것이다. 오전 오시(12시)가 되어갈 무렵이다. 한바탕 활과 포차로 공방전이 벌어지고 난 후에 양군은 잠깐 소강상태로 들어선 상황이다. 화청이 성벽 사이로 밖을 내다보며 말을 이었다. 은솔, 이 거리에서는 맞아도 깊게 박히지 않습니다. 갑옷에 맞으면 튕겨 나갈 뿐이오. 내가 대장장이한테 철궁을 만들라고 했어. 계백이 말하자 화청이 눈을 크게 떴다. 잘 휘어질까요? 마침 좋은 철이 있더구만. 오늘밤까지 만들어 준다니 봐야겠지. 철궁은 시위줄을 대여섯번 쓰고 나서 갈아줘야 하지만 이런 경우에는 상관이 없겠지요. 손에 익지 않아서 맞추기 힘들 거야. 그리고 당기는 힘이 배가 들기 때문에 한두번 쓰고는 쉬어야 한다. 야전용으로는 부적합한 것이다. 기마군이 달리면서 쏘는 화살은 위력적이지만 1백보 안이어야 한다. 보군 궁사가 쏘는 화살은 150보까지는 정확도가 뛰어나지만 먼 거리는 무용지물인 것이다. 지금 계백과 화청은 이세민의 저격을 상의하는 중이다. 계백은 명궁이다. 추위가 닥쳐오면서 필사적으로 되어있는 당군에 치명타를 한발 날리면 퇴군을 할 명분이 생길 것이다. 그날 밤 대장장이를 찾아간 계백과 화청은 만들어진 철궁을 보았다. 각궁보다 조금 크고 가늘었지만 시위는 두배쯤 굵었다. 고구려인 대장장이가 만족한 얼굴로 철궁을 건네주며 말했다. 오랜만에 만들었습니다. 쇠가 좋아서 잘 굽혀지지만 힘은 배가 들 것입니다. 고생했네. 약속한 금화 3냥을 주었더니 대장장이가 활짝 웃었다. 철궁을 쥔 계백이 화청과 함께 곧장 성안 사대로 나갔다. 밤이어서 사대가 다 비어 있었기 때문에 계백도 군사에게 횃불을 들려 2백보 밖에 꽂아두라고 지시했다. 군사들이 2백보 거리에 세워둔 횃불은 7개다. 계백은 철궁에 살을 세우고는 힘껏 당겼다. 과연 각궁보다 두배의 힘이 들어가야 시위가 당겨졌다. 힘껏 당기고 나서 과녁을 겨눴더니 곧 활끝을 쥔 손가락이 떨렸다. 시위를 놓자 살은 번개처럼 날아갔는데 횃불 위쪽으로 날아갔다. 뒤쪽에 선 화청이 한숨을 뱉었다. 계백은 다시 시위에 살을 먹였다. 오늘밤은 50사는 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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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8.16 20:22

[불멸의 백제] (159) 8장 안시성(安市城) ⑮

진막으로 돌아온 이세민의 갑옷을 시종들이 벗기기 시작했다. 가죽에 금박을 입힌 데다 장식 대부분은 금이다. 갑옷을 벗기자 이세민의 땀에 젖은 비단옷이 드러났다. 시종 둘이 좌우에서 땀을 닦아준다. 그때 이세민이 시종 하나에게 물었다. 네 아비가 언제 온다더냐? 네? 놀란 시종의 얼굴이 금방 하얗게 굳어졌다. 시종은 바로 김춘추의 아들 김인문이다. 이세민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이번에 군량을 백제군에게 탈취당해 나한테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되었지 않느냐? 김인문이 숨을 죽였고 이세민의 말이 이어졌다. 신라에서 그에 대한 사죄사가 올 텐데 올 인물은 김춘추 뿐이다. 그러는 동안 다른 시종들이 이세민의 겉옷을 입혀주었다. 곧 용상에 앉은 이세민이 김인문에게 다시 묻는다. 어떠냐? 연락받았느냐? 아니옵니다. 짐 앞에서 거짓말을 하면 9족을 몰살시킨다는 것을 아느냐?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내용은 칼로 내려치는 것 같다. 예, 폐하. 허리를 굽힌 김인문의 얼굴은 땀범벅이 되었다. 김인문은 아직 17세다. 그때 이세민의 말이 이어졌다. 네가 시종으로 내 옆에 붙어있으면서 사흘에 한 번씩 성안에 사는 신라놈들에게 내 근황과 정세를 알려준다는 것을 알고 있다. . 그걸 알면서도 짐은 놔두었다. 신라는 당의 신하(臣下)국으로 소식이 빨리 전해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세민의 얼굴에 쓴웃음이 번져졌다. 이곳 전장에까지 네 심부름을 하는 밀정놈들이 따라왔더구나. 치중대의 내의복 관리하는 놈들이지? 그 말을 옆에서 듣던 친위대장 왕양춘이 어깨를 부풀렸다. 눈을 치켜뜨고 있어서 당장에 김인문을 도륙할 것 같다. 그때 김인문이 입을 열었다. 예, 폐하. 죽여주시옵소서. 내 말에 대답해라. 네 아비는 언제 오느냐? 곧 오실 것입니다. 김인문의 목소리가 떨렸다. 군량을 빼앗긴 사죄사로 올 것 같다고 지난번 인편으로 전해왔습니다. 그렇다면 밀정놈을 신라로 보내서 네 애비가 올 필요가 없다고 전해라. 예, 폐하. 그리고 또 있다. 용상에 등을 붙인 이세민이 지그시 김인문을 보았다. 눈빛이 깊고 차갑다. 당(唐)을 개국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이세민이다. 태원유수였던 아버지 이연을 부추겨 수(隨)를 멸망시키고 당을 세운 것이 이세민이었던 것이다. 그 이세민의 시선을 받은 김인문은 마치 독사 앞의 생쥐나 같다. 이세민이 입을 열었다. 신라에서 네 아비만 밀정을 보내고 내 주위를 맴도는 것이 아니다. 김인문을 노려본 채 이세민이 말을 이었다. 상대등 비담도 마찬가지, 그놈도 여왕 이후의 왕위를 노리고 나를 아버지라고 부른다. 난 늙은 자식을 두었다. 이세민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네 아비한테 내 말을 전해라. 비담이 다음 달 그믐밤에 여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를 예정이다. 이미 나한테 보고를 했으니 그날은 틀림없을 것이다. 김인문이 숨을 들이켰다. 큰일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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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8.15 20:02

[불멸의 백제] (158) 8장 안시성(安市城) ⑭

네 이놈들! 성 아래쪽에서 천둥을 치는 것 같은 고함소리가 울렸다. 퇴로가 끊겼으니 이제 너희들은 몰살당한다! 성 안의 쥐새끼 한 마리도 살아 남지 못할 것이다! 목소리가 커서 성벽 아래쪽에서도 다 들렸다. 당의 장수다. 목청 큰 장수여서 성안의 고구려, 백제군은 목소리에 익숙해졌다. 매일 같은 시간에 소리를 지르기 때문이다. 저놈과의 거리는 180보요. 화청이 눈을 가늘게 뜨고 장수를 내려다 보면서 말했다. 여우 같은 놈이 한발자국도 더 가깝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백제군이 소유한 각궁의 사정거리는 150보. 뿔을 덧대고 길이를 한뼘쯤 넓힌 계백의 각궁은 170보가 유효사거리다. 그 이상이 되면 활 힘이 떨어져 맞아도 깊게 박히지 않는다. 당의 장수는 그것을 알고 사정거리 밖에서 소리치는 것이다. 화청이 손으로 장수 뒤쪽을 가리켰다. 뒤쪽은 갑옷을 번쩍이는 친위군단이 늘어서 있다. 철갑을 입었기 때문에 철벽 같다. 저 뒤에 이세민이 있지요. 보이시오? 보이는군. 계백이 머리를 끄덕였다. 소리치는 당 장수 뒤쪽 30보쯤 거리에 당황제 이세민이 서있는 것이다. 말에 올라 이쪽을 응시하고 있지만 주위에 벽처럼 늘어선 친위군에 가려 상반신만 겨우 드러났다. 오전 사시(10시) 무렵, 이 시간의 안시성 서문 풍경이다. 이세민과의 거리는 210보. 계백의 눈대중은 1, 2보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 이놈들! 항복하면 목숨을 살려주는 것은 물론 후한 상급을 준다. 장수가 외치고 한걸음 비켜섰을 때 고구려 병사 차림의 사내가 나타났다. 이보게! 내가 동문을 지키던 유강이네! 오늘 밤에라도 성벽을 내려오면 금 10냥을 받네! 사내가 악을 쓰듯이 소리쳤다. 그때 계백이 화청에게 말했다. 저쪽 좌측 성벽에서는 거리가 160보 정도나 될까? 계백이 눈으로 가리킨 곳은 서문 좌측의 성벽이다. 그쪽은 급한 경사지 위에 성벽이 세워졌는데 앞쪽으로 돌출되었지만 당군이 덤벼오지 않는 곳이다. 따라서 성벽 위에는 10여명의 백제군이 지켜 서있을 뿐이다. 그때 성벽에서 시선을 뗀 화청이 계백을 보았다. 과연 그렇습니다. 화청의 두 눈이 번들거리고 있다. 160보가 조금 넘을 것 같소. 이세민과의 거리다. 계백이 말을 이었다. 내일 이 시간에도 이세민이 나오겠지. 지난번 그물로 운제에 탄 당군이 몰살당한 후부터 이세민이 이 시간에는 꼭 서문에서 남문으로 내려갑니다. 이세민이 독전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곧 고함이 그치고 나면 당군의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된다. 그때 이세민이 다음 독전지로 떠나는 것이다. 성안의 고구려, 백제군도 이제는 이세민의 동정을 다 외우고 있다. 나타나지 않는 날은 병이나 걸렸나 하고 궁금해질 정도다. 곧 외침이 그치더니 운제 2대가 굴러오기 시작했다. 포차에서 머리통만한 바위가 날아왔고 철갑을 씌운 충차가 굴러왔다. 앞으로 한시진 정도는 격렬하게 공격을 퍼붓다가 상황이 변하지 않으면 물러갈 것이다. 날아온 바위가 앞쪽 성벽을 부수며 떨어졌다. 머리만 틀어 바위 조각을 피하면서 계백이 화청에게 말했다. 당군이 부서지기 쉬운 바위를 던지는군. 성안의 군사들이 다시 쓰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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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8.14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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