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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악기 제작자 김성철씨 악기 제작 콩쿠르 입상

산업화는 기계문명을 가져왔고 이로 인해 현대 사회는 대량생산을 미덕으로 삼게 되었다. 큰 마음을 먹고 공연장에서나 들을 수 있던 오케스트라 곡이라든가 명장들의 리사이틀을 저렴한 가격의 CD 혹은 DVD를 구입해 안방에서, 심지어는 길거리에서 걸어다니면서 듣게 된 것도 이런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그럼에도 클래식 음악은 아직까지도 수공업의 미덕이 존재하는 몇 안되는 장르다. 그 가운데에서도 현악기 제작은 기계가 아직도 장인의 손놀림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테크닉을 넘어서 정신과 혼을 생산품 안에 불어넣는 악기 제작자에게 수여하는'장인(마이스터)'이라는 칭호는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유효하다. 2004년부터 하노버에서 현악기 제작을 하고 있는 김성철(37)씨 또한 그러한 장인정신의 추종자 중 한 명이다. 그는 5월8일부터 13일까지 개최된 제11회 비에냐프스키 악기 제작 콩쿠르에서 바이올린 부문에 한국인 최초로 입상했다. 국내에는 바이올린 연주 콩쿠르로 유명한 이 대회는 1935년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처음 개최되었으며 1957년부터는 5년에 한 번씩 악기 제작 콩쿠르를 병행하고 있다. 그동안 한국 출신의 악기 제작자들이 미국이나 일본에 그 활동이 집중되어 있는 것을 감안할 때, 클래식 음악의 본고장인 유럽에서의 그의 쾌거는 남달리 인정받을 만하다.이채롭게도 바이올린을 제작하기 전 그의 직업은 오보에 연주자였다. 무려 15년동안 오보에를 전공해온 그가 독일로 유학온 계기도 오보에 공부를 위한 것이었다.그러던 그에게 갑자기 호흡기에 심각한 질병이 찾아와 더 이상 오보에를 연주할수 없다는 판정을 받았다. 2년 간의 슬럼프를 딛고 2000년부터 바이올린 제작에 도전한 그의 이번 콩쿠르 입상은 개인적으로도 오랜 역경을 딛고 일어선 의미있는 일이다.다음은 김씨와 일문일답.--오보에는 관악기인데 현악기 제작으로 관심을 돌린 점이 특이한데 특별한 계기가 있는가.▲오보에를 연주하지 못하게 된 다음에도 음악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었다. 여러 가지 일들을 찾다가 현악기 제작이 눈에 들어 왔다. 오보에와 같은 관악기 제작에는 부분적으로 기계를 도입한다. 하지만 고급 현악기는 아직도 100% 기계가 아닌나무와 손을 가지고 제작하며, 이는 장인적인 작업 예술을 추구하는 정신과 상통한다고 생각했다.--악기 제작 콩쿠르는 어떤 형식으로 진행되는가.▲비에냐프스키 콩쿠르의 경우 1차적으로 블라인드 테스트를 거쳐야 한다. 악기들은 비밀번호를 달아서 제출되며 이를 가지고 심사위원들은 악기 소리, 나무제작 과정, 정교함, 색깔, 과거 명기들의 모방수준을 평가한다. 이번 콩쿠르의 경우 전 유럽에서 150명이 참여했다. 이렇게 본선에 12대의 악기가 진출하고 나면 전문 연주자들이 이 악기를 가지고 연주를 하며 관객들이 점수를 매긴다. --한국 출신의 현악기 제작자들을 살펴보면 미국이나 일본에서 공부한 이들이두드러진다. 유럽, 특히 음악의 본고장이라 할 수 있는 독일에서는 드문 이유가 무엇인지.▲현실적인 제약이 크기 때문이다. 독일에서 악기 제작 공부는 일종의 직업훈련이다. 정부로부터 노동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이 자격이 몹시 까다로워서 아예 공부할 기회 자체를 박탈당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 공부 과정과 악기 제작의 수준은 그 어느 나라보다도 정통성이 있다.--그런 까다로운 과정을 본인은 어떻게 통과했나.▲구하면 얻는다는 격언이 있지만, 나의 경우는 스승이 많이 도와주었다. 헤르포르트에서 활동하는 바이르메어라는 장인이었는데, 무작정 찾아가서 악기 제작을배우고 싶다며 열의를 적극 표현했다. 행정적으로나 법적으로 여러 가지 결격 사유가 많았음에도 그는 생면부지의 나를 오로지 나의 열정 하나만 믿고 허가를 받을 수 있도록 애써주었다. --연주자들은 정작 몇 백 년씩 묵은 스트라디바리우스나 과르넬리와 같은 악기들을 선호한다. 모던 악기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는 이들도 많은데.▲그런 점 또한 현악기가 가진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악기의 진정한 가치는 당장 제작한 순간에 인정을 받는 것이 아니라 수십년, 수백년이 지나야 알 수 있다.내가 이 일을 하는 것 또한 당장의 명성이나 부귀영화를 위해서가 아니다. 몇 백년 뒤에 내 이름으로 제작한 바이올린이 명기의 대명사로 인정을 받는다면 그 또한 기쁨이 아닐까. 또한 이와 같은 현대악기의 중요성과 잠재력을 인정하는 전문 연주가들도 적지 않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 크리스티안 테츨라프와 같은 바이올리니스트를 들 수 있다.--그렇다면 본인의 악기를 연주해 주었으면 하는 연주가가 있는가.▲누구든 빼어난 명 연주가가 나의 악기를 연주해준다면 크나큰 영광일 것이다.그러나 악기에도 궁합이 있으며, 악기 제작자가 추구하는 바와 연주가가 추구하는바가 궁합이 잘 맞아야 최고의 음악을 이끌어낼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첼리스트 조영창씨가 꼭 내 악기를 연주해주었으면 하고 바란다. 그 연주가의 따스한 소리와 음악성이 내가 악기에 추구하는 소리와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대중적으로 인기있는 전통 명기는 대체로 이탈리아에 편중되어 있다. 현악기제작 활성화에 있어 이탈리아와 독일을 비교한다면.▲전통은 물론 이탈리아가 앞서 있다. 그러나 스트라디바리우스라든가 과르넬리가 활동하던 시기에 비교하면 현대에 와서는 이탈리아는 침체된 측면이 없지 않다.그에 비하면 독일, 영국, 프랑스 등지가 월등한데 오케스트라 활동이 활성화되어 있기 때문이다.--개인적으로 악기를 제작할 때 어떤 측면에 역점을 두는가.▲모양의 아름다움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역점을 두어야 하는 것은 당연히 소리이다. 개인적으로 힘이 있으면서도 부드럽고 따스한 울림을 선호한다. 그런소리는 호소력이 있기 때문이다. --연주가에서 제작자로 전향을 하면서 아쉽거나 더 보람된 면이 있다면.▲처음에 오보에를 포기해야 할 때는 정신적으로 충격을 많이 받았다. 2년 동안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만큼 인생의 슬럼프를 겪었다. 악기 제작을 하면서 그러나 오히려 삶에 대해 연주가 시절보다도 훨씬 만족하고 있다. 음악을 만드는 만큼 악기를 만드는 성취도가 나를 즐겁게 한다. 무엇보다 한국 사람으로서 독일 본고장에서 전문성을 인정받고 살아가는 것이 가장 큰 보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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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
  • 2006.07.18 23:02

미주 한인 삶 '희곡집' 낸 이언호씨

"미국 속에 사는 우리들의 정체성을 후손들에게알리려면 이민의 뿌리부터 알아야겠죠." 하버드, 예일 등 소위 미국 명문대학에 입학하기만 해도 한국에서 유명 인사로 대접받던 시절이 있었다. 불과 20-30년 전의 일이다. 그러나 지금은 미국 명문대에입학한다거나 졸업해서도 예전만큼 주목받기 어렵다. 상원의원, 대학총장, 연방법원판사, 나사(NASA) 연구원 등 미국을 움직이는 이른바 파워 엘리트 가운데 '한인(韓人)'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100만 명에 이르는 미주 한인들의 손길은 이제 미국사회 구석구석까지 닿아 있다.최근 재미작가 사이에서 미주 한인들의 정체성과 역사의식을 조명한 작품을 잇달아 출간하는 이유도 그만큼 그들이 이민사회에 뿌리내리고 안정기에 접어들었음을반증한다.올해 초 국내 출간된 재미작가 권소희(45) 씨의 소설집 '시타커스, 새장을 나서다'가 미주 한인들의 정체성 문제를 부각시켰다면, 이언호(66) 씨의 희곡집 '사진신부의 사랑'은 100년 전 하와이 이민 초기 역사를 배경으로 미주 한인들의 뿌리를 탐색한다.표제작 '사진신부의 사랑'은 하와이 이민 초기 사탕수수 농장을 배경으로 세 젊은 남녀의 엇갈리는 사랑을 통해 미주 한인 역사의 서막을 형상화했다. 조국의 현실에 절망한 채 하와이 이민선을 탄 두 젊은이 박창규와 손을석에게 이국의 삶은 고달프기만 하다. 사탕수수밭에서 노예나 다름없는 생활도 그렇지만 짝을 찾지 못한데서 오는 고독감은 더욱 견디기 힘들다. 당시 하와이에는 한인 젊은이들과 조선에 있는 젊은 여자들이 사진교환을 통해 맞선을 보는 '사진신부 제도'가 유행했다. 일종의 사진중매지만 통신과 사진기술이 제대로 발달하지 못한 시대여서 '사고 아닌 사고'가 종종 일어나곤 했다.고독감을 못 이긴 손을석은 잘 생긴 박창규의 사진을 여비와 함께 조선에 사는 스무 살 처녀 김성금에게 보낸다. 사진을 본 성금은 창규의 모습에 마음을 빼앗겨 고향을 떠나 이역만리 타향에 도착한다. 하지만 자신을 맞이하는 사람은 겉늙어 족히 오십 살은 돼 보이는 손을석이라는 사실을 알고 절망한다. 작품은 성금의 도주, 성금과 창규의 우연한 만남, 성금과 창규가 함께 있는 것을 발견한 을석의 분노, 을석의 자살로 이어진다. 작가는 싸늘하고 적막한 사탕수수밭을 배경으로 세 젊은이의 비극적 사랑을 가슴 아프게 묘사한다.작가는 "미국에 사는 우리들의 정체성을 후손에게 알리려면 이민의 뿌리부터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이 작품을 썼다"면서 "사진신부는 역사 속에 생생히 살아있는 선조의 애환"이라고 말했다.그런데 과연 '신랑사진 바꿔치기'같은 일들이 실제로 있었을까. 작가는 "사진신부의 소재는 허구지만 신랑이 젊은 시절 사진을 보내 십대 신붓감을 맞아 갈등을 일으키는 경우가 다반사였다"며 "그 중에는 사진을 빌려 장가를 간 사람도 있었을 것으로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이번 작품집에는 '누라차앗' '모터사이클의 살' '순교자 강완숙의 콜롬바' '연극 게릭호 막 올리기' '쟈즈민이 시계 왼쪽 방향으로 도는 이유는' '코메리칸 아비의 꿈' '프로포즈' '희광이' 등 주로 미주 한인들의 정체성과 역사성을 담은 작품들이 실렸다.역시 이민자의 애환을 그린 장편소설 '공불이'를 문예지 '문학과창작'에 연재 중인 작가는 "미주 이민사에는 서사의 바다라고 할 만큼 이야기가 많다"며 "그 서사의 바다에 그물을 치듯 이민자들의 애환을 담은 인생사를 소설이나 희곡으로 계속 그려내고 싶다"고 밝혔다.지성의샘. 360쪽. 1만2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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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
  • 2006.07.18 23:02

'사모곡' 수필집 펴낸 하진형경감

경남지역의 한 경찰관이 작고한 어머니를 애타게 그리워하는 수필집을 제삿날에 맞춰 펴냈다.주인공은 마산 동부경찰서 합성지구대장 하진형(45) 경감.남해군 출신인 하 경감이 펴낸 수필집 '하얀 어머니'는 모두 279쪽으로 제1부 '어머니와 대서(大暑) 여행'과 제2부 '어머니와 나', 어머니 전상서 등으로 이뤄졌다.어머니와 대서 여행에서는 2003년 6월 말과 7월 노모가 병원에 노환으로 입원, 임종할 때까지 어머니를 곁에서 간호하면서 모자간 나눈 정겨운 대화와 꺼져가는 생명의 안타까움, 아들의 애틋한 사랑 등이 잔잔히 배여 있다.'하얀 어머니'는 화장(火葬)을 싫어하는 어머니가 화장을 하면 자식에게 해가 없고 장사법(2001년)이 발효, 강화된 후 매장제한 요건 등으로 경찰관인 아들이 법을 어길까 봐 걱정해 화장을 허락, 화장 막을 통해 나온 하얀 알 뼈를 보고 붙였다고 하 경감은 설명했다.또 어머니와 나에는 어머니가 생전에 7남매의 막내인 하 경감과의 갖가지 추억담을 담고 있다.어머니가 해준 광어미역국을 먹다 목에 뼈가 걸려 혼이 났던 어린 시절, 초등학교 졸업식 때 다른 친구의 어머니에 비해 나이가 많은 할머니 같은 어머니가 학교에와 부끄러웠다는 철 몰랐던 시절, 공군 복무때 어머니가 아들에게 보낸 철자법 틀린편지, 어머니가 용감하게(?) 놀이 기구 바이킹을 타던 모습, 어머니의 엄하면서도 자애로운 모습과 걸음걸이까지 자세히 묘사돼 있다. '어머니 편히 쉬고 계세요'로 시작하는 어머니 전상서는 하늘나라에 계신 모친의 영전에 바치는 편지로 '영원히 살아 계신 당신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우산이 돼세상의 모든 어려움으로 부터 저를 지켜주고 계십니다. 가슴 속에 계신 당신은 나의영원한 버팀목입니다'라며 구구절절하게 어머니를 그리는 애정이 가득차 있다.하 경감은 "1986년 순경 발령 통지를 받은 6월 초순 '사람이 살아가면서 남을 속여 조금 이득을 취하면 당장은 편할지 몰라도 비오는 날 오래 걷다보면 우산을 쓰고 가도 옷이 젖듯이 결국 몸을 해치니 항상 사람은 바로 살아야 한다'는 어머니의 투박한 사투리를 기억, 실천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며 "끝없는 어머니에 대한 사모의정을 돌아가신 후 비로소 느껴 3년간 틈틈이 준비해 이달 초순 기일에 맞춰 출간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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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
  • 2006.07.18 23:02

[이치백의 一日五話] 항일 민간지 ‘대한매일’ 창간

《7월 18일》①백제 패망백제가 라 당 연합군에 패망한 것은 660년의 오늘이었다. 백제는 BC 18(계묘)년에 온조왕이 건국, 31대 의자왕 20년에 이르기까지 역세 31왕, 678년이었다. 판도는 지금의 수도권을 비롯, 충청·전라도에 미쳤으나 도읍을 공주·부여 등 남쪽으로 옮기면서 줄어들었다.②대한매일 창간구한말, 1904년의 오늘, 항일 민간지 ‘대한매일’신문이 창간되었다. 영국인 베델을 내세우고 실지로는 총무에 양기탁, 주필에는 박은식을 앉혔고 신채호, 안창호도 참여했다. 영문 판까지 발행한 이 신문은 전북도내엔 전주, 군간, 태인, 고부, 부안, 정읍 등에 지국을 두었다.③미국 남북전쟁 발발미국에서 노예문제로 남북간에 벌어진 남북전쟁이 일어난 것은 1861년의 오늘이었다. 당시 민주당이 강한 남부에서 이를 반대하고 합중국에서 이탈하려 하자 링컨 대통령은 통일을 위해 5년간의 전쟁 끝에 1865년 마침내 승리를 거두고 노예를 해방시켰다. ④스페인에서 군 반란1936년의 오늘, 스페인에서 내란이 일어났다. 지도자는 44세의 육군중령 프랑코, 원인은 이해 2월의 총선에서 좌익정당들이 인민전선을 결성, 우익은 대패했다. 당시 독일·이탈리아는 프랑크를 지원했다. 내란은 1939년에 끝이 났다.⑤스모그 공해 제1호1970년의 오늘, 일본 동경의 한 고등학교에서 소프트 볼 경기를 하던 40여명의 여학생이 돌연 쓸어졌다. 그들은 숨이 막힐 뿐만 아니라, 눈과 목, 두통을 호소하여 결국 구급차로 병원으로 실려 갔다. 이는 새로 나타난 공해의 광학 스모그의 제1호로, 자동차의 배기가스가 원인이었음이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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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북일보
  • 2006.07.18 23:02

[오목대] 한국어교원 자격심사

지난 7월 13일 국립국어원에서는 한국어교원자격심사를 통해서 자격 신청자 1,533명 가운데 747명에게 한국어교원자격을 부여했다고 밝혔다. 이번 교원자격 부여가 갖는 의미는 국어기본법과 국어기본법 시행령이 2005년에 제정된 이후 처음으로 시행된 자격심사 결과이기 때문이다. 국어기본법 시행령에 명시된 한국어교원의 자격은 1, 2, 3급으로 나뉜다.한국어교원 3급 자격은 외국어로서의 한국어 교육을 부전공으로 취득한 학위자이거나 국어기본법 시행령 시행 이전에 800시간 이상의 한국어 교육 경력자 혹은 한국어교원양성 과정을 이수하고 문화관광부에서 실시하는 한국어교육능력검정시험에 합격한 경우에 받을 수 있다.한국어교원 2급 자격은 대학에서 외국어로서의 한국어 교육을 전공했거나 복수전공으로 학위를 취득한 자에 한정된다. 국외 한국어 보급과 한국어 교육 능력 검정 시험등을 주관하는 한국어세계화재단에 소개된 한국어 교사 양성기관은 아직 8개 학과에 지나지 않는다. 이처럼 관련 학과가 적은 이유는 2급 교사 자격 기준이 45학점 이상의 한국어교육 관련 과목 이수로 되어 있어서 기존의 국어국문학 분야와 별개의 교과과정으로 운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지역적으로 서울 2, 경기 1, 부산 1, 대전 1, 전남 2 그리고 전북에 1개 학과 정도가 개설되어 있는 형편이다.한국어세계화재단에서 외국인이나 재외동포에게 한국어를 가르칠 교사양성을 위한 교육대학원과 대학, 비정규 교육기관을 파악한 결과 작년 상반기 40여 곳에서 현재 5배 가량 늘어난 200여 곳으로 추산된다고 한다. 물론 새로 생긴 교육기관의 대다수는 정규 교육기관이 아닌 비정규 교육기관이다. 이들 비정규 교육기관에서는 대략 100여 시간을 교육하고 평생교육원장 혹은 대학장의 수료증을 주는 것이 전부이다. 이를 학점으로 환산하면 불과 7학점을 넘지 않는다. 이러한 교육시간으로는 한국어 교사로서의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점에 비정규 교육의 문제가 있다.그동안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한국어 교사가 될 수 있다는 인식도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번 한국어교사자격심사는 한국어교육에 대한 한 획을 긋는 일이다. 이제 표준화된 과정을 통해 전문성을 지닌 한국어 교사를 양성하는 첫 발을 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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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북일보
  • 2006.07.18 23:02

제자를 섬기는 선생님

얼마 전 초등학교 선생님이 어린 제자를 체벌하여 모든 학부모들로부터 비난과 저주를 받았었다. 우리 교원들은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다. 필자 역시 제2세 국민교육을 책임 맡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책임을 통감하며 학부모님께 백배 사죄 드린다. 체벌을 가한 여교사는 나름대로 교육에 대한 열정과 교직수행에 욕심이 지나친 나머지 저지른 행태라고 여겨진다. 세상만사가 그렇듯이 “욕심이 과하면 부족함만 못하다.”는 옛말이 실감난다. 여기 사랑하는 제자와 함께 아픔을 함께 나누었던 담임선생님과 급우들의 눈물어린 이야기를 소개함으로써 잘못을 통감하고 다시는 이러한 사례가 일어나지 않기를 다짐하는 약속을 드리고자 한다. 몇년전 어느 시골 학교에 5학년에 다니는 영수라는 학생이 있었다. 그는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좋아해서 급우들로부터 인기가 대단했다. 그러던 영수가 어느 날 갑자기 아주 몹쓸 병에 걸려 버렸다. 학교에 나오지 못하고 1년간 병원에서 병고에 시달려야 했다. 아주 독한 항암제를 투약하여 머리카락이 모두 빠져 대머리가 되었다. 하느님이 도우셨는지 영수는 가까스로 완쾌되어가는 단계에 이르렀다. 학교 공부에도 지장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영수는 한 가지 걱정이 앞섰다. 학교에 가게 되면 대머리 여서 친구들에게 놀림받을까봐 겁이 났다. 또한 담임선생님 보기에도 무척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마침내 학교에 가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때마침 담임선생님은 영수 집에 가정 방문을 하게 되었다. 학교에 나오라는 선생님의 권유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극구 버티는 것이었다. 이튿날 담임선생님과 급우들은 어떻게 하면 영수가 학교에 나와 예전처럼 함께 공부할 수 있을까? 묘안을 짜내기에 안간힘을 썼다. 다시 한번 가정방문하여 선생님과 급우들의 간절한 호소와 설득으로 학교에 나오겠다는 약속을 받아 내었다. 드디어 1년 반 만에 영수가 학교에 나오게 된 것이었다.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담임선생님과 급우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우뢰와 같은 박수로 환영하였다. 그런데 어인 일인가, 담임선생님과 급우들의 머리를 보는 순간, 아뿔싸! 모두 대머리 까까중이 되어 있는 게 아닌가? 영수는 자기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자 선생님과 급우들이 끈끈한정을 모아 머리를 깍았으리라 생각되었다. 아픈 처지의 입장이 되어 제자를 섬기는 따뜻한 선생님의 사랑, 그리고 친구의 아픔을 함께 해준 급우들의 뜨거운 정성과 성원에 영수는 하염없는 기쁨과 감동의 눈물을 연신 닦아내고 있었다. 오늘도 일선 현장에서 묵묵히 제자 섬김에 정성을 다 하고 있는 선생님들이 더 많다는 것을 학부모께서는 위안 삼아 주시기 바라며 자칫 의기소침해 있을 선생님들을 칭찬과 격려로 북돋아 주시기 바란다. 또한 이번 일을 계기로 선생님들의 제자 사랑이 더욱 깊어져서 학부모들로부터 존경받는 선생님이 되어줄 것을 당부 드린다./김재춘(완주동양초등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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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북일보
  • 2006.07.18 23:02

[딱따구리] 지역경제 외면하는 한전

최근 한전 순창지점이 모 간부의 전 직원에 대한 취업 방해에 이어 이번에는 지역업체를 외면하고 외지 업체에서 물품을 구입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비난 여론에 휩싸이고 있다.인구 3만명선 붕괴 위험 수위에 놓여 있고 도시지역과 같이 대규모 공단 하나도 없는 순창지역에서는 상대적으로 지역 상인들이 기관들에 대해 거는 기대 심리는 엄청나게 크다. 최근이를 직시한 행정에서는 매월 1일과 16일을 지역경제 활성화의 날로 정하고 공무원들이 직접 나서서 재래시장을 찾아 장보기 운동 등을 펼치며 이를 관내에 있는 유관기관들도 함께 동참해 줄 것을 권유하고 있는 상황이다.이런 분위기 속에서 이번 한전 순창지점이 지역 업체들을 외면하고 외지에서 홍보용 물품 등을 구입한 결과에 대해 주민들로부터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는 여론이다.게다가 순창지점 측이 잘못을 반성하기는커녕 지역에 이런 업체들이 있는지도 몰랐다는 식의 변명은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여기서 한번 원칙만을 놓고 따져 보자. 이 지역에 주민들, 즉 고객들이 없다면 순창에 한전지점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당연히 한전에서는 고객들이 있어야 이들을 통해 기업 이윤을 낼 것이고 또 이를 위해 홍보와 관리도 필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기본적인 상식이다.그렇다면 주민들이 지역에서 생활고에 시달려 가게 문을 닫거나 아예 지역을 하나 둘씩 떠나기 시작한다면 과연 순창에서 한전 지점이 무슨 존재 가치가 있겠는가? 그때에도 우리는 몰랐다는 말만을 늘어 놓으며 책임을 회피할 수 있을지 되묻고 싶다.

  • 지역일반
  • 임남근
  • 2006.07.18 23:02

[열린마당] 완주군의 기업유치 여건 - 임정엽

어느 자치단체나 현재의 큰 화두는 지역경제 활성화다. 갈수록 재정규모가 열악해지고, 인구는 줄어들고 있는 상황에서 자치단체의 지역경제 활성화는 이제는 더 이상 구두선이 아닌 생존전략이 되어버렸다. 비록 정부가 공공기관 이전에 따른 혁신도시 건설 등 인위적 정책을 통해 수도권과 지방의 상생 발전을 꾀하고 있지만, 지방의 자생적인 생존전략이 없는 한 이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때문에 전북도를 비롯한 도내 자치단체도 민선3기 시절,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기업유치에 사활을 걸었고,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것도 사실이다. 반면 지금까지의 기업유치 실적이 과연 지역경제 활성화로 이어졌는가에는 다소의 이견이 있다. 또한 기업유치 실적은 높지만, 실제 얼마나 많은 외지기업을 우리 지역으로 끌어들였는가도 냉정히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올 상반기에 전북에 공장을 설립한 업체는 264개에 달하지만, 타 시도에서 이전한 업체는 전체의 20.3%인 55개에 그쳤다는 점을 이유로 들고 있다. 그러나 기업유치가 얼만큼 지역경제 활성화로 이어졌는지, 외지기업을 얼마나 끌어들였는지를 불문하고, 지방의 입장에서 볼 때는 치열한 경쟁과 고착화된 수도권과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서는 기업유치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특히 산업 인프라 부족 등 내생적 발전기반이 취약한 전북으로서는 얼마나 많은 기업, 또한 지역경제를 활성화시킬 기업을 유치하느냐가 중요한 사안이라 할 수 있다. 아울러 청정 자연환경을 오염시키지 않는 친환경 고부가가치 산업을 유치하는 것이 유일한 전북의 살 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그런 관점에서 우리 완주군은 매력적인 투자지역이라 할 수 있다. 호남겮?瞞?88올림픽겢育?진주간 고속도로는 물론이고 자동차 전용도로, 철도 등 사통팔달의 교통 요충지다. 또한 청정한 자연환경 속에서 웰빙을 즐길 수 있는 주변환경을 갖추고 있는 등 쾌적하고 편리한 생활환경을 자랑하고 있다. 아울러 완주산업단지, 과학산업단지와 함께 100만평의 추가 산업단지 조성이 추진되고 있어 공장용지 확보에도 용이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완주군이 매력적인 투자지역으로 부각되는 것은 매연과 소음을 배출하지 않고도 환경과 친화되는 가운데 고부가가치 산업을 유치할 수 있는 기반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완주군은 이미 2004년 과학산단과 완주산단 등 총 194만여평이 지방과학연구단지로 지정되었다. 특히 과학산단 내 8만5천여평의 연구부지가 있어 대기업의 R&D센터 이전지역으로서 손색이 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취임과 함께 ‘나이스(NICE) 완주 3대 비전’ 가운데 하나로 친환경 고부가가치 산업 유치를 골자로 하는 그린팩토리(Green Factory)를 내걸었던 필자는 김완주 도지사와의 긴밀한 협조 아래 앞으로 대기업의 R&D센터 유치에 심혈을 기울일 계획이다. 이와함께 완주군은 현대자동차, LS전선 등의 입주로 자동차 및 기계부품 클러스터가 구축돼 있고, 신재생에너지 분야의 기업 및 연구소 유치에도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다. 아울러 기업유치 및 지원 전담반을 대폭 강화하는 등 관내 기업에 대한 최상의 행정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삼성 등 대기업은 물론 중소기업에게 ‘기업하기 좋은 지역’으로서 손색이 없다.지금 완주군은 최상의 여건을 갖추고, 기업을 부르고 있다./임정엽(완주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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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07.18 23:02

[시론] 사랑의 매는 필요하다 - 고정곤

요즈음 현장교원들의 마음을 우울하게 하는 일들이 너무나 많다.교원 평가제, 초빙 교장제, 스승의 날 실종, 방과후 교육도입, 감사원 감사 사립학교 교원 무더기 고발, 학교급식파동, 공무원 연금법 개정추진에 이어, 이번에는 학생 체벌 문제가 사회화됨에 따라 현장교원들을 더욱 당혹하게 만들면서 이로인해 교원사기에 영향을 주지 않을까 우려된다.내 자식 제일주의, 내 자식 기살리기, 자녀에 대한 과잉보호 의식이 지나치게 팽배한 시점에서 부모와 학생들에게 항의와 물의를 우려한 선생님들이 사랑의 매마저, 내동댕이쳐 학업분위기가 크게 훼손되고, 학생통제력이 상실되는 등 교실붕괴를 염려하던 와중에 빚어진 일이라 더욱 그러하다.현재의 사회적 분위기는 우리 교육현장에서 체벌을 아예 아무런 비판없이 몰아낼 기세인바, 과연 이러한 대세는 올바른 것인가? 차제에 이에 대한 논의가 바르게 이루어져 바른 체벌문화를 범국민적 합의하에 바르게 정립해야 할 때이다.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로부터 체벌은 교육의 장에서 학생지도의 한 수단으로 사용되어 왔다. 우리나라는 유교문화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모든 규범이나 질서를 유지하는 데 체벌문화를 형성하리만큼 많은 비중을 두어왔다.특히 교직을 ‘교편(敎鞭)을 잡는다’고 하고 지도를 ‘편달(鞭撻)’이라고 하듯이, 매는 곧 교육을 의미하였던 우리나라에서는 교육방법의 중요한 수단으로 회초리 사용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 오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은 시대적 변화에 따른 교육의 제반여건의 변화로 그동안 학교교육현장에서 교육의 수단으로 사용되어 온 체벌의 정도와 방법, 교육적 의의와 그 효과에 대한 논란이 엇갈리고 있다. ‘초중등교육법’에서는 “교육상 체벌이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체벌 사용을 금한다”고 규정하고 있으나, 최근에 만들어진 ‘초·중등 교육법 시행령’에서는 체벌을 부분적으로 허용하는 방향으로 방향을 잡았다.이러한 상황에서 각 시·도교육청에서 체벌에 관한 내용을 행정적 시책으로 제시한데에는 최근 학교안의 체벌의 문제가 사회적 문제로 확대되어가는 일련의 사건들 때문이다.학자들간에도 체벌교육에 대해 많은 견해를 달리한다. 이는 교육이 갖는 복잡성, 다양성과도 관련된 일이지만 그보다는 체벌의 본질성 때문이다.체벌의 교육적 순기능은 학생으로 하여금 교사의 권위에 대해 복종하게 하고, 미숙한 학생을 학교생활에 잘 순응시키고, 학생들의 이유없는 반항이나 도전 등의 행동을 통제하는 등 교육적으로 잘 활용하기만 하면 효과적인 동기유발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체벌의 교육적 역기능으로 학생들에게 정신적 고통과 상해, 반항의식을 조장하고, 인격을 모독하며, 교사와 학생간의 인간관계를 저해하고, 육체적 심리적으로 박해와 억압으로 인한 정신적인 위축을 들고 있다.이상 체벌에 관한 논의에서 보듯이, 과도한 체벌은 학생의 자발성을 억제하고 학교에 대한 흥미를 잃게 하지만, 과밀학급에서 교육을 수행해야 하는 교사들은 체벌을 전면 포기할 수 없는 실정이다.따라서 차제에 전국민적 합의하에 도출되는 바른 체벌문화를 정착시키는데 노력해야 할 때가 왔다.교육현장에서 불가피하게 이루어지는 체벌에 대한 목적과 방법에 관계없이, 체벌을 가한 교원들이 한결같이 매도된다면, 오늘날의 심각한 교실붕괴는 바로 잡을 수 없을 것이다.‘사랑의 매’를 선생님들에게 증정한 학생들도 많이 있음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된다./고정곤(서해대학 평생교육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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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07.18 23:02

[이치백의 一日五話] 우리나라 첫 민주헌법 제정

《7월 17일》①제헌절오늘은 제헌절― . 5천년의 역사를 가진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민주헌법을 갖게 된 것은 1948년 7월 17일, 이날 상오 10시에 열린 국회에서 의장 이승만이 국한문 병용, 붓글씨로 정리된 2통의 헌법 정본에 서명함으로써 마침내 민주국가 ‘대한민국’의 막은 열렸던 것이다.②태조 이성계 즉위1392년 7월 17일. 이 날은 고려왕조가 34왕 475년 만에 멸망하고 이어 조선왕조가 건국된 날이다. 이날 조선의 이성계 태조는 정도전, 조준 등의 추대로 개경의 수창궁에서 선위의 형식으로 왕위에 올랐다. 고려의 마지막 왕은 공양왕이었다.③친일파, 고종에 양위 주장1907년의 오늘, 대한제국의 어전회의에서 학부대신 이완용 농상공대신 송병준 등 친일파각료들은 고종임금에게 양위할 것을 주장했다. 이들이 이같이 나오게 된 것은 물론 일제의 사주에 의한 것이지만 그들은 이에 그치지 않고 마침내는 한일합방까지도 주장한 자들이다. ④정부, 대구로 이전1950년 6월에 일어난 한국전쟁 때 우리정부는 일단 수원으로 후퇴했다가 27일에는 대전으로 이전했었다. 이때 내무장관에 조병옥, 육참총장에 정일권을 임명했다. 그러나 전황은 게속 호전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곳에서 한달도 못되어 7월 17일에는 다시 대구로 이전했다.⑤포츠담 회담 개시“어머니! 영국의 처칠과 소련의 스탈린을 만나기 위해 떠납니다. 가고 싶지 않지만 가야합니다. 돌아올 때까지 안녕히 계십시오.” 라고 편지를 쓴 미국 트루먼 대통령은 1945년 7월 17일, 이날부터 포츠담 회담에 들어갔다. 이날로 일본의 운명은 사실상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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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07.17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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