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력서] 국회의원 이광철 - 새로운 전환3
97년 2월, 무려 10개월의 법정투쟁 끝에 나는 석방되었다. 당시만 해도 간첩죄 무죄 선고는 사상 처음이었고, 당황한 검찰은 당장 대법원에 상고했지만, 대법원에서도 나는 승리했다. 그러나, 한 달 넘게 연일 간첩사건을 대서특필하던 언론도, 나와 가족들을 3년 가까이 고통스럽게 했던 국가도 모두가 무죄판결에는 침묵했다. 나는 너무나 억울하고 분통한 마음에 무죄석방의 기쁨을 마냥 누릴 수가 없었다. 간첩 아빠를 둔 죄로 딸아이가 당했을 설움을 생각하면 참을 수가 없었다. 이 억울함을 그 누구도 보상해 주지 않는 것이 조국의 현실인가. 나는 다시 국가 상대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처음엔 변호사도 승소한 전례가 없고, 무엇보다 조작됐다는 것을 증명하기 어렵기 때문에 승소 가능성이 없다며 말렸다. 그러나, 나는 결국 국가배상 판결을 받아냈고, 검찰이 제기한 '배상금 지급중단 가처분 신청' 소송에서도 대법원까지 가는 투쟁 끝에 승소했다. 이 때가 2001년 7월이었으니 1994년 6월 간첩조작사건으로 시작된 '투쟁'이 무려 7년을 넘게 계속됐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받은 배상금이 8백만원. 나 이광철 5백만원, 아내 소성섭 2백만원, 딸 이산하 1백만원이었다. 그러고 나니 그나마 억울함이 조금은 풀렸다.비록 배상금은 턱없이 작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대한민국 사람은 누구라도 간첩이 될 수 있다는 사실과 이광철만은 간첩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이후 나는 전주시민회에 복귀해 시민운동을 다시 시작했다. 그러나 손바닥만한 전주에서 전주시민회, 전주시민센터, 새전북포럼, 참여자치시민연대(준), 경실련까지 비슷비슷한 조직들이 크게 다르지 않은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1~2명의 상근자를 두고, 하는 일까지 백화점 식으로 비슷하다보니 전문성은 떨어지고, 시민참여도 제대로 안 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전문성을 중심으로 세분화되면서도 통합된 시민단체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제기했고, 결국 새전북포럼, 전주시민센터, 전주시민회 일부가 통합, '시민행동21'을 출범시켰다. 나는 98년말부터 2000년까지 이 단체의 공동대표를 맡아 활동했다. 2001년부터는 '정치가 변하지 않으면 그 어떤 것도 변화될 수 없다'는 생각에서 시민운동을 접고 2002지방선거에 출마할 새로운 정치인들을 발굴, 지원하는 일에 매진했다. '17년 1당 독점'의 폐해로 부패와 비리가 만연하고, 점차 퇴보해 가고 있는 전북을 새로운 정치로 구해 보겠다는 생각에 '전북지방자치개혁연대'를 결성, 당시 민주당에 대항할 후보자들을 결집해서, 지지-지원하는 활동을 벌이게 된 것이다. 그 때까지만 해도 젊고 민주적인 후배들이 정치세력화하는 것을 돕겠다는 생각만 했었지 내가 직접 정치를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1988년 평민당 출범 후 이해찬 등 민통련 동지들이 평민당에 입당하면서부터 선거 때만 되면 강력한 입당 및 정치입문 권유를 받았지만, 시민사회 운동에 남겠다고 십수 년 동안을 거절해 온 나였다. 때문에 2002 지방선거에서도 나는 새로운 정치풍토 조성, 새 정치인 지원이 나의 할 일이라고 생각했던 터였다. 그러다가 2002년 지방선거에서 '전북지방자치개혁연대'가 지원한 후보 32명 중에 겨우 8명만이 당선, 민주화운동 세력의 정치세력화가 좌절되고, 2002년 대선에서 민주당 노무현 후보 흔들기가 노골화되자 이에 분노한 나는 유시민, 김태년, 김형주, 유기홍, 문태룡 등과 함께 개혁국민정당을 결성해 직접 정치에 뛰어들었다. 그 후 2004년 총선까지 생활 속의 정치, 참여하는 정치, 돈 없이도 할 수 있는 깨끗하고 새로운 정치를 만들기 위해 뛰고 또 뛰었다. 그리고, 수많은 동지들과 시민들의 지원 덕분으로 국회의원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