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력서] 국회의원 이광철 - 새로운 전환2
나도 모르는 사이 간첩이 돼 버린 나는 일단 몸을 피했다. 그렇게 시작된 ‘간첩’생활. 그것은 내 인생 최대의 시련이었다. 보안대 지하 대공분실, 상무대 영창 등 안 가본 데가 없고, 연금, 구류, 수배, 고문도 수없이 당해봤지만, 이렇게 힘든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대한민국에서 간첩은 ‘죽음’보다 공포스러운 것이었다. 우선 사람들의 눈길부터 달랐고, ‘간첩’을 바라보는 싸늘한 시선은 지금 생각해도 오싹하다. 마땅히 피할 곳도 없었다. 간첩을 숨겨주거나, 신고하지 않으면 불고지죄가 되기 때문에 지인들에게는 정말 못할 짓이었다. 나는 광화문 네거리에서 할복이라도 해서 간첩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너무나 억울하고 분했다. 이제서야 요가 강의로 생활비도 조금씩 벌고, 신바람 나게 시민운동을 하기 시작했는데, 간첩이라니, 나는 또 다른 ‘좌절’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무엇보다 ‘세 여자’에 대한 미안함으로 가슴이 아팠다. 그렇게 1년 여 동안 도피 생활이 계속됐고, 결국 ‘간첩 이광철’은 95년 8월 추석 때 집에 돌아왔다. 아니, 잡아가라는 듯이 당당하게 집에 돌아와 버렸다. 그런데 공안당국은 다음해 어버이날까지 간첩인 나를 그냥 내버려두었다. 1년여의 시간이 지나면서 간첩체포 효과(?)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8개월이 넘도록 안기부와 경찰이 번갈아가며 신변보호(?)를 해 주던 95년 어버이날 무렵 ‘간첩 이광철’은 안기부 전주지부에 출퇴근 조사를 받게 된다. 공안당국은 도피생활 시작부터 줄기차게 호남 조직책 류모씨로부터 공작금 1백만원을 받았다는 것과 노동당에 입당했다는 것만 시인하면 기소유예 하겠다고 나를 회유해 왔다. 심지어 전주 안기부 직원은 간절히 애원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하지 않은 일을 자백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치욕인가. 나는 결코 비굴하게 거짓자백을 할 수 없었고, 결국 안기부로 호송돼 1주일간의 밤낮 없는 조사를 거쳐 서울구치소에 수감됐다. 재판은 매주 2회씩 느리고 신중하게 진행됐다. 재판 때마다 재판정은 전주의 어르신들과 동지들로 꽉꽉 찼으며, 그로 인해 선고가 몇 차례 연기되기도 했다. 당시 사건을 담당했던 변호사가 바로 동료 국회의원인 임종인이다. 그와 나는 80년대에 같이 학습을 하기도 했던 친구 사이였다. 그러나 마침내 구속시한 마지막 날 내려진 1심 판결은 나를 또 한번 좌절시켰다. 징역 3.6년에 자격정지 3.6년! 나는 구치소 내 방에서 땅을 쳤다. 조작간첩사건에서 사법부에 기대를 걸었던 내 자신에 대한 한탄과 독재정권의 짜여진 각본에 놀아난 것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이었다.그래서 항소를 포기하려했다. 그러나, 끝까지 나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사명(간첩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는)감에 항소를 했다. 그러나 형량이나 줄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항소심에서 뜻밖에 무죄가 선고됐다. 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와’하는 함성에 무죄판결이 내려졌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을 정도였다. 3년 가까운 투쟁에서 마침내 나는 작은 승리를 거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