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력서] 국회의원 이광철 - 새로운 운동
1990년 ‘3당합당’이라는 국민사기극의 막이 오르자 나는 “3당합당규탄및민중생존권전북대책위” 집행위원장을 맡아 야합에 맞섰고, 이로 인해 다시 2년 가까운 수배길에 올라야 했다. 87년 이후 많은 것이 달라져 갔다. 군사정권의 폭압성은 형식적 민주주의라는 ‘외투’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고, 동구권과 소련의 몰락 이후 제3세계 민주화운동도 이전과는 조금씩 다른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정치/경제의 민주화를 전면에 내걸고 대규모 거리 투쟁을 조직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시민들의 일상생활 곳곳에서 쉽게 발견되는 문제들을 시민과 함께 해결하려는 경향이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이러한 변화를 능동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1989년부터 전북지역 직장청년들의 자발적인 대중청년조직인 ‘새길청년회’(이하 새청)를 만들어 풍물, 탈춤, 글쓰기, 시사토론 등 취미별 문화 소모임을 꾸리며 활동했던 것도 이런 흐름과 맞닿아 있었다. 새청은 시민사회가 주체가 되어 시민들의 삶을 보다 풍요롭고 건강하게 하자는 의식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새청의 탄생은 전투적 청년학생운동이 시민운동과 생활운동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작은 사건이기도 했다. 새청 회원은 대략 150명쯤 되었는데, 지금도 지역에 큰 행사가 있거나 할 때면, 당시 회원들의 얼굴이 가장 많이 보인다. 문화와 생활운동으로 결합된 만남이라서 인연의 끈이 오래 가는 것은 아닐까 가끔 생각해 보곤 한다. 87년 이후 전대협, 전교조, 전노협, 전농 등 부문운동 조직이 활성화되면서 자연스럽게 연합조직은 쇠락해 갔다. 전북에서도 전북민협, 전북민련, 전북연합을 거치면서 공동의 사안들이 일상적으로 조직되기 보다는 부문운동적 성격의 의제와 활동들이 중시되었다. 전국 최초로 전북연합이 해체된 것도 이런 맥락이었다. 전북연합 해체 이후 전북의 지역운동은 시민운동과 정치운동으로 분화되기 시작했다. 정치조직은 현실 정치로 눈을 돌려 세력화를 모색하기 시작했고, 시민운동은 지역주민의 구체적 삶에 기반해 시민들이 참여하는 형태의 새로운 운동을 모색하고 있었다. 6.29선언과 문민정부 출범 이후 80년대식의 거리 투쟁이나 집회, 시위가 더 이상 대중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게 되자 운동의 변화가 모색되기 시작했고, 나도 많은 고민을 했다. 80년대식 운동이 더 이상 안 된다면 이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전주시민회준비위’(이하 시민회, 1993년)다. 시민회는 과제별, 부문별로 조직된 시민운동조직이었다. 정치개혁, 언론개혁, 환경운동 등 다양한 과제별로 소규모 부문조직들이 특화된 활동들을 벌여나가는 방식으로 사업을 전개했다. 시민회 활동 중 크게 기억에 남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리영희, 손석희, 조정래 같은 명사들을 초청해서 “보고 싶은 사람, 듣고 싶은 이야기”라는 제목의 정기 강연회고, 두 번째는 “언론이 바로서야 나라가 바로선다”는 제목의 언론학교다. 집회에도 수십 명밖에 안 모이던 시절에 강연회와 언론학교에는 수백에서 1천명 이상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시민회의 사업은 모든 것이 신선한 충격이었다. 사업을 했다하면 수백 명 이상의 시민들이 모여들었다. 모두가 신바람이 나서 즐겁게 일했다. 그러나, 신의 질투였을까. 시대가 그랬던 것일까. 내게 그런 즐거움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내 인생 최대의 시련이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