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쓰는 전북 기업사] ⑤백화양조-(2)백화수복의 탄생
1950년 6월에 터진 6.25전쟁은 조선양조에게 기회를 제공했다. 일부 기계가 파손되는 등 피해가 없지 않았지만 9.28 수복 후 강정준 사장은 전열을 정비, 청주 생산을 재개했다. 한 때 중공군이 거세게 밀고 내려왔지만 충주 부근에서 격퇴됐기 때문에 군산의 조선양조는 안정적으로 청주를 생산할 수 있었다. 대부분 주류 회사들은 전화를 입고 술을 생산하지 못했다. 이 때 조선양조의 청주 '조화'는 목포를 비롯해 장항, 대구, 부산, 대전 등 타지역으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공병이 모자라 술을 담을 수 있으면 아무 용기에나 담아 팔았다. 술을 사려면 현금과 함께 용기가 있어야 가능했다. 실제로 1947년 168석(1석=180ℓ)이었던 청주 생산량은 1951년 698석, 1952년 1516석으로 급신장했다. 강정준 사장은 날로 늘어나는 판매량에 대비, 공장 창립 당시 300400석 규모이던 생산저장시설을 늘렸다. 배합저장용탱크를 143개에서 155개로 늘렸고, 쌀을 찌는 대형 가마솥도 3개에서 6개로 확충했다. 이런 가운데 1951년 당국이 '한강 이남 지역 관리업체 민간인 불하 공포'를 하자 조선주조 연고권을 갖고 있는 강정준 사장은 곧바로 불하 신청, 회사를 불하받았다. 또 1952년 2월 상호를 대한양조(주)로 변경했다. 청주 상표도 변경했다. 그동안 논산의 조선주조와 함께 사용하던 '조화'를 1952년말까지만 사용하고, 1953년부터는 새로운 상표'백화(白花)'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청주 시장에서 '조화'인지도가 워낙 좋았기 때문에 백화 상표 아래 '구 조화'를 새겨넣는 등 백화 브랜드 관리에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당시는 양질의 청주를 안정적으로 생산하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식량난과 물가 폭등 등 경제난이 계속되자 정부는 1953년 2월14일 화폐개혁을 단행(100대 1 평가 절하)하고, '원'을 '환'으로 변경했다. 이같은 경제상황에 대응, 대한양조는 쌀을 주원료로 하는 청주보다 합성청주를 더 많이 생산했다. 대한양조는 1953년 회계연도에 청주 1급 289석, 합성청주 1급 66석, 합성청주 2급 1314석을 생산 판매했다. 1952년 합성청주 2급은 77석 생산에 불과했다. 합성청주 상표는 '군화'였으며 1급은 노란색, 2급은 남색으로 구분했다. 이처럼 쌀을 주원료로 하는 청주 생산이 힘들어지자 대한양조는 이 때 증류식 소주(1954년 생산 중단), 주정에 향료 및 기타 물료 등을 희석한 모조 위스키와 브랜디(1956년 생산 중단) 등을 생산하기도 했다. ▲ 품질 또 품질, 백화 시대가 열리다 강정준 사장은 6.25전쟁 동안 조선주조 불하, 상호(대한양조) 및 상표(백화) 변경 등을 통해 기업 기반은 물론 경쟁력을 완전히 갖췄다. 특히 이 기간동안 전국 청주시장에서 제품 인지도를 크게 높이는 성과를 거뒀다. 대한양조가 청주 시장을 석권할 수 있는 기반은 '주질본위'의 경영방침이었다. 청주 품질 향상을 위해 끊임없이 연구 노력한 결과, 1950년 5월8일 제1회 전국주류품평회 최우등상, 1953년 6월 광주 주류업조합 품평회 우등상, 10월 제2회 전국박람회 장려상, 1954년 전국 국산품 선전 박람회 우등상, 국산품 부흥 선전 박람회 재무부장관상 수상, 제3회 전국 국산품 박람회 최우등상, 1955년 10월 제2회 주류품평회 최우등상 등 각종 상을 휩쓸며 고품질 청주 '백화'이미지를 구축해 나갔다. 이처럼 '백화'의 브랜드 이미지가 크게 향상되면서 조해주조의 '조해'와 조화주조의 '조화'가 시장을 선점하고 있던 서울과 충청지방에서도 주문이 들어왔다. 이에 1957년 10월 서울시 종로구 관철동에 첫 서울출장소 문을 열고, 서울 시장 공략에 본격 나섰다. 백화 청주 주문이 잇따르는 것과 때를 같이 하여 1957년 10월 제1회 전국 산업기술전람회에서 재무부장관상, 같은 해 12월 제1회 전국 양조식품 전시회 특선, 1959년 제3회 주류품평회 최고 우등상 등 각종 수상이 잇따랐다. 특히 백화 청주는 주류품평회 13회 대회를 연달아 석권, 백화 청주의 높은 품질을 인정받았다. 브랜드 가치가 높아지면서 판매량도 크게 늘어났다. 1960 회계연도에 1만745석을 판매, 사상 처음으로 1만석을 돌파했다. 이는 전국 청주생산량 10만 9644석의 9.8%였다. 총매출액은 7억5000만환, 주세는 2억4471만 5000환, 당기순이익은 1849만 6000환이었다. ▲ 특급청주 수복 쌀로 빚어내는 청주는 품격 높은 고급 양조주로서 사랑받았지만 해방 후 이어진 식량난과 쌀값 폭등, 높은 주세 등 생산 환경은 크게 열악했다. 막걸리는 28℃ 이상 고온에서 발효시키지만, 청주는 16℃ 이하 저온에서 발효시켜야 하는 특성을 갖고 있다. 이 때문에 여름에 공장을 가동하지 못하는 것도 문제였다. 현대식 생산설비를 갖춘 롯데주류BG 군산공장의 경우 중앙제어조정실에서 발효탱크의 온도변화를 자동으로 제어하며 연중 생산하고 있다. 1961년 5.16쿠데타가 일어난 후 정부는 제1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투자재원 확보를 위한 조세정책을 폈다. 그 결과 1962년 1월1일 주세를 대폭 인상, 청주 업계가 큰 타격을 받았다. 특급청주의 세금은 석당 3600원에서 1만800원으로 200% 인상됐고, 1급청주는 2100원에서 3200원으로 53%, 합성청주는 1250원에서 2650원으로 112% 올랐다. 세금 폭탄으로 주류 소비가 감소하고, 세수 전망도 흐리다고 판단한 정부는 결국 1962년 8월19일 특급청주와 탁주맥주의 세율을 20%씩 인하했고, 이에따라 특급청주 주세는 8640원으로 떨어졌다. 또 그해 11월28일 주세법을 개정, 특급청주와 1급청주 주세를 8540원으로 단일화 했다. 정부는 식량난이 더 극심하자 1963년 7월18일 양곡을 원료로 하는 주류의 제조 제한조치까지 내렸다. 이로 인해 청주는 그해 10월까지 제조가 금지됐다. 이에대해 대한양조는 1.8ℓ짜리 10병들이 상자당 출고가를 1800원에서 2300원으로 인상하는 한편 쌀을 원료로 하지 않는 합성청주(청주 원료를 조금만 넣거나, 주정만으로 만든 청주) 생산에 주력, 매출 공백을 메웠다. 1만석을 넘던 출고량이 1962회계연도에 4748석(특급청주 95석, 1급청주 4653석)에 그쳐 적자를 기록했다. 하지만 합성청주를 많이 판매한 1963회계연도(특급 246석, 1급 1383석, 합성 4366석)에는 546만 1486원의 흑자를 냈다. 이처럼 싼 합성청주가 대거 출고되면서 상대적으로 희귀해진 특급청주의 인기가 높아졌다. 시중에는 특급청주 품귀현상까지 나타났다. 이에 대한양조는 1963년 10월 특급청주의 명칭을 '수복(壽福)'으로 변경, 차별화를 꾀했다. 수복이란 '오래 살면서 길이 복을 누리라'는 뜻. 백화수복은 포근한 정취를 풍기며 소비자들에게 쉽게 다가서 큰 인기를 얻었다. 대한양조는 1964 회계연도에 166㎘, 1965 회계연도에 483㎘가 판매된 수복에 힘입어 큰 성장을 이뤘고, 백화수복은 청주의 대명사로 자리잡아 갔다. 일부 요정과 음식점에서 다른 청주를 백화수복이라고 속여 파는 경우가 생길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