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명표의 전북 작고 문인을 찾아서] (29)비릿한 예토의 '우렁달팽이' 시인, 이연주
이연주(1953~1992)는 군산에서 태어나 짧은 생을 살다간 비운의 시인이다. 1991년 시 '가족사진' 등으로 등단한 그녀는 불혹의 나이를 앞두고 자진하였다. '탁류'의 고장에서 태어난 탓인지, 그녀의 시 속에서는 비릿한 생선 냄새가 난다. 시장의 생선은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죽어가거나 죽어 있는 시체이다. 그 광경은 역겹다. 왜냐하면 그녀가 생전의 소원대로 "죽어 한 마리의 물고기가 되어서"('즐거운 일기') 드러누워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연주의 시는 읽기 고약하다. 그녀의 길지 않은 생애만큼이나 전기적 사실들도 미처 알려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간에 이루어진 비평적 관심조차 드물어서 관심있는 독자들의 접근을 가로막는다.또한 이연주의 시가 난해한 이유는 여기저기서 고린내와 고름냄새가 진동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녀 앞에서 시어는 세계의 위악성을 드러내는데 필요한 소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예컨대 그녀는 말초신경염, 비만증, 전염병, 백내장, 긴장형 조발성 치매증, 황달기, 매독, 공수병, 위장병, 문둥병, 실어증, 소화불량증, 진폐증, 혈전증, 천식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각종 질병을 작품 속에 퍼뜨리는 심술을 부린다. 한편으로 그녀는 코카인, 가나마이신, 항생제, 아티반, 노발긴, 포르말린, 포도당주사 등 여러 가지 약품들을 동원하여 자신의 질병을 치료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그녀는 적어도 작품상으로 '병 주고 약 주는 셈'이다. 그녀의 모순된 행동은 사회를 향한 진단과 치유행위이다. 병명의 나열은 사회의 환부에 대한 나름의 진료 기록이고, 약명은 그에 알맞은 처방전이다. 그녀의 시에서 질병은 존재의 이유인 셈이다.이연주는 세상과 소통할 수 없어서 생긴 병으로 인해 시작 생활 내내 한순간도 평화할 수 없었고, 자신의 불만과 욕망을 각종 질병으로 명명하고 치료하면서 살았다. 따라서 그녀가 기괴한 '가족사진'을 통해 다수의 작품에서 질병과 약품을 열거한 것은 사회에 퍼지게 될 전염병을 예방하기 위한 언어적 신호였다. 그녀는 시인다운 예지력으로 미구에 창궐하게 될 질병을 예측하고 경고했건만, 사람들은 "코끝을 찌르는 듯한 이상한 냄새"('외로운 한 증상')를 풍기는 그녀의 시에 등 돌리고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그녀를 고통에 들게 했던 병원들이 퍼진 후에야, 사람들은 그녀의 시를 꺼내어 병후를 알아보는 등 수선을 떨었다. 이미 그녀는 사람들 '사이'에서 빠져나가버렸는데 말이다.그녀는 생전에 날마다 꿈을 꾸었다. 그녀는 살아생전에 사람들의 '사이'로부터 탈출하는 꿈만 꾸었다. 그녀는 고상한 서정시인은 못 되더라도, 세상의 대책없는 무질서와 혼란을 외면하는 위선자가 되기 싫었다. 그녀는 패거리 문화에 휩쓸리는 권력지향적 문단 풍토를 애써 멀리 하고, 철저하게 반인문주의적인 상상력을 가동하여 감각적으로 포착하였다. 특히 그녀는 후각 이미지를 빈번하게 제시하고 있는 바 그 여파로 인해 시작품에 냄새가 진동한다. 독자들의 해독을 허용하지 않는 그녀의 '지독한' 시어들은 작품의 구석구석마다 형상으로 켜켜이 쌓여서 낯선 이미지를 형성한다. 그녀의 끈질긴 노력 앞에서 세계는 화해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온갖 모순들이 뒤엉켜 앞을 다투는 '저주의 굿판'으로 변모한 것이다.이연주는 '매음녀가 있는 밤의 시장'과 '속죄양, 유다'라는 두 권의 시집만 덜렁 남겼다. 하지만 독자들은 그녀의 시집을 펴는 순간, 기존의 시와 달리 엉망으로 난자당한 시어에 당황한다. 그녀는 아어로서의 시어를 고의적으로 폐기하고, 덧난 부위와 곪아터진 상처를 소름끼치는 막말로 시를 썼다. 이처럼 그로테스크한 그녀의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학습한 시론을 동원할 필요가 없다. 그녀는 현대시의 전통적 문법이나 사유방식을 인정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남들이 자신의 시를 읽어주는 것조차 꺼려하며 "어디에도 소장되지 않는 삶"('네거티브')을 꿈꾸었다. 그녀가 "양로원에도 갈 수 없는 나이"('그렇게, 그저 그렇게')에 극단적인 선택으로 생을 마감해버린 것은 그 꿈의 완성이다.두 시집은 그녀가 죽던 해를 에워싼 3년의 시간을 증언한다. 그녀가 두 권의 시집 속에 털어놓은 메스꺼움이란 결국 남은 자들이 감당해야 할 몫이지만, 그녀의 요구조건은 지극히 단순하다. 이제라도 세계의 정직성을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사회가 그녀에게 가했던 부자유와 불합리를 사죄받는 일이다. 더욱이 권력을 좇는 평자들의 눈 먼 독해력을 비웃었던 이연주처럼 치열했던 시인 앞에서는 우리 모두 죄인이다. 이처럼 시는 죽은 자의 작품을 통해서 살아남은 자로 하여금 현생의 삶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삶을 다짐하는 계기를 제공해준다. 이제라도 그녀가 남겨둔 두 권의 시집을 다시 꺼내어 읽으면서, 예토의 부정직성을 교정하느라 땀 흘려야 한다. 우리들이 태곳적의 형형한 눈빛을 회복할 때, 이연주의 시는 절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