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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혁의 글씨로 만나는 옛 글] (47)백제 유일의 석비 '사택지적비'

사택지적비는 일제강점기인 1937년, '내선일체'를 내세운 일본인들이 부여 부소산 일대에 신궁을 조성하면서 도로에 깔 석재들을 수습해 쌓아놓았는데, 1948년 부여를 탐방하던 황수영 씨가 관북리 도로변 돌무지에서 발견했다고 전해진다. 화강암으로 높이 102cm, 폭 37.9cm, 두께 29cm로 전면에는 1변이 7cm인 정방형의 정간선을 치고 그 안에 글자를 음각하였다. 1행 14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4행까지 56자가 판독되었다. 이후에도 명문이 있으나 5행부터 반듯하게 잘려나가 알 수 없다. 다만 발견된 석비의 전면 글자가 거의 온전한 상태이기 때문에 판독한 글자를 토대로 대략 그 내용을 엿볼 수 있음은 그나마 다행이다. 비의 좌측면(비의 입장)에는 원 안에 봉황을 새기고 붉은 색을 칠해 놓은 것이 보인다.우선 판독된 명문의 내용은 이렇다."갑인년(甲寅年) 정월 9일 내지성(奈祇城)의 사택지적은 해가 쉬이 가는 것을 슬퍼하고 달이 어렵사리 돌아오는 것을 슬퍼하여, 금을 캐어 진당(珍堂)을 짓고 옥을 캐어 보탑(寶塔)을 세우니, 그 웅장하고 자애로운 모습은 신비로운 빛을 발하여 구름을 보내고, 그 우뚝하고 자비로운 모습은 성스런 빛을 머금어…"(甲寅年正月九日奈祇城砂宅智積, 慷身日之易往; 慨體月之難還, 穿金以建珍堂: 鑿玉以立寶塔, 巍巍慈容, 吐神光以送雲: 峨峨悲, 含聖明以…)한문에서 운율을 느낄 수 있도록 대구(對句) 형식의 문장을 사용하고 있다. 이 문장을 사륙변려체의 형식으로 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대구를 중시한 조밀한 문장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여기에서 백제시대 금석문의 문학성을 편린으로나마 엿볼 수 있다.비문 첫머리의 갑인년은 그 자체로는 연도를 추정할 수 없으나, 비의 주체인 사택지적이 의장왕 때의 인물이라는 것이 확인되어 의자왕 14년, 즉 654년으로 산정하였다. 그 다음에 나오는 '柰祇城' 세 글자는 부여를 사비성으로 지칭하는 것과 달리 새로운 지명이 등장하여 역사학계의 눈길을 끌었다. 사택지적의 출신지를 뜻하는 것으로 보이는 내지성에 대해서는 부여 인근의 은산(恩山)과 매라(邁羅)가 지목되기도 했지만 아직 정설은 없다. 사비성으로 일컬어지는 부여의 또 다른 명칭이거나 혹은 부여에 소속된 인근지역의 명칭일 것이다. 그것은 비의 주체인 사택지적의 지위가 당시 제2인자인 좌평(佐平)임을 감안한다면 그의 출신지는 적어도 그에 걸맞는 상징적인 지명이 등장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 또 하나의 미스테리가 있다. 지적(智積)의 행적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일본서기」 황극기 원년(642) 2월조에 흠명천황을 조문하러 온 사신을 통해 "지난해 11월 대좌평 지적이 졸하였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같은 해 7월조에 다시 "백제 사신 대좌평 지적 등이 (천왕을) 배알했다." "백제사신 대좌평 지적과 그 아들인 달솔(達率), 은솔(恩率)인 군선(軍善)이 왔다."는 기록이 있어 서로 모순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김태식(연합신문)은 미륵사지 출토 사리봉안기에 보이는 '좌평 사탁적덕'이 일본서기에서 641년 11월에 죽었다고 말한 '대좌평 사택지덕'일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하였다.이후 명문에서 세월이 쉬이 감을 슬퍼하며 진당을 짓고 보탑을 세웠는데, 신비로운 빛을 발하고 성스런 빛을 머금었다는 표현은 불교적인 냄새가 물씬 풍긴다. 그런데 비의 좌측에 보이는 봉황무늬가 범상치 않다. 백제대향로의 봉황을 연상케 한다. 그런 의미에서 사택지적은 불교보다는 장생불사를 염원하는 도교적 신선사상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비문의 서체는 단아한 해서로서 강한 골기가 엿보인다. 남북조시대의 금석에서 보이는 해서의 특징을 엿볼 수 있으며, 전형을 이루는 당해보다는 훨씬 소박한 결구를 지니고 있다. 귀중한 백제사료의 하나이자 유일한 백제 석비라는 점에서 서예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이은혁(전주대학교 한문교육과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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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북일보
  • 2010.08.18 23:02

'광화문 복원'에 부쳐 - 이보영

서울 '광화문'이 참으로 오랜만에 복원돼 8월15일 공개됐다. 그 동안 '광화문'의 역사에 관심을 가져온 겨레에게는 가슴 설레는 뉴스가 아닐 수 없다.'광화문'은 한국 현대사의 비극적인 증인이다. 1910년 8월 29일로 한국이 일본에게 강제로 병탄된 순간, 그 문은 닫혔고, 그 후 1927년에는 '조선총독부'청사 건립으로 인하여 해체되었으며, 한국전쟁 때는 폭격기의 폭격으로 문루(門樓)가 탔고, 4·19혁명과 5·16쿠데타도 목격했다. 그래서 '광화문'은 단순한 궁성 정문(正門)이 아니라 우리의 파란 많은 역사 과정을 우리와 함께 겪은 나머지 우리의 피붙이 같은 느낌을 주어왔다. 그 정문을 허무는 망치 소리가 우리의 가슴을 때리는 것과 같았고, 그것이 불에 타면 우리의 피부가 타는 느낌이었다.대한제국이 일제에 병탄된 순간부터 '광화문'은 조선조 궁궐을 떠나 피압박민족의 상징이 되었다. 고종과 순종은 대신들과 마찬가지로 일제의 강압에 결사적으로 저항하지 못하고 나라를 빼앗겼기 때문이다. 그들은 국권의 상징인 '광화문'의 존엄성을 땅에 떨어뜨렸던 것이다.'광화문'은 궁성의 다른 세 개의 문과 달리, 국권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경술 국치 이후에도 말썽에 휩싸였다. 첫 번째 말썽은 1923년 일제가 '광화문' 뒷 마당에서 '공진회(共進會)'를 개최함으로써 초래되었다. 요즘 말로 하면 '상품박람회'인데, 그 때 일제는 '광화문'을 온통 멍석으로 둘러싸버렸던 것이다. '광화문'을 아끼는 조선인에게 그 누추한 모습은 눈살을 찌푸리게 했을테지만, 그 중의 한 사람이 작가 염상섭이었다. 그는 「세 번이나 본 공진회」라는 수필에서 이렇게 쓴다.일본의 柳宗悅군이 와서 [광화문을]보았다면 멍석에 싸인 잔해(殘骸)를 붙들고 방성통곡(妨聲痛哭)이나 아니하였을까 하는 생각이 났다.柳宗悅(야나기 무네요시)은 한국미술을 사랑하고 아낀 일본의 미술학자이지만, 조선조 궁전의 정문이 '멍석'으로 너절하게 둘러싸인 모습을 '시체'에 비유했을 때의 염상섭의 울분을 우리는 충분히 상상하고 공감할 수 있다.그러자 일제는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을 때 '광화문'철거에 착수함으로써 더 큰 말썽을 일으켰다. 가령 야나기는 「소멸시키려고 하는 조선 건축을 위하여」라는 글에서 강제로 사라져가는 '광화문'을 슬퍼하면서 총독부에 항의하기도 했다. 예상 외의 항의에 부딛치자 일제는 헐어버린 '광화문'을 궁궐 동쪽의 '건춘문(建春文)'북쪽에 옮겨지었다. 결코 가서는 안될 어색한 위치에 선 그 '광화문'은 이전의 위세와 생명력과 미(美)를 잃고 있었다. 염상섭은 일제 강점기의 유명한 장편소설 「삼대」에서 그 '광화문'을 쓸쓸한 벌판의 '유령'같다고 비꼬았다. 그 모습이 너무나 안쓰러웠을 것이다.'광화문'은 8·15광복 후에 수십년 동안 방치되고 잊혀져 왔었는데 1968년에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불완전하게나마 중건된 것은 환영할만한 일이었지만, 또 한번 말썽이 일어났다. 문화재청에서 '광화문'의 '한글 현판'을 본래의 '한자 현판'으로 바꾸려고 하자 '한글 학회'에서 들고 일어나 반대한 결과 '한글 현판'보존론과 그 반대론이 충돌햇던 것이다.일제 강점기의 조선총독부는 정통성이 없는 통치기관이어서 '광화문'철거는 야만적 횡포였다. 그러나 '한글 현판'의 정통성이라는 문제는 예술적 정통성의 문제다. 모든 문화유산으로서의 예술품의 복원은 원형대로 해야 하며, '광화문'의 경우 그 '한글 현판'은 '건축문'을 비롯한 세 개의 궁성 문의 '한자 현판'과 조화되지 않는다. 문화유산과 관련된 역사의식은 전통의식이다. '한글 학회'사람들에게는 전통의식이 없다.이렇듯이 말썽이 반복되어 온 '광화문'은 침묵을 지켜왔다. 너무나 사연이 깊은 침묵이다.민족의 고난을 안고 본의 아닌 말썽도 일으킨 '광화문'이 경술 국치 100주년 8월 15일에 '한자 현판'을 달고서 겨레에게 공개됐다. 참으로 감동적인 사건이다. 그러나 그 복원 소식을 듣는 기쁨은 착잡하다. 망국한(亡國恨)을 안고 한국전쟁의 피해까지 받은 '광화문'복원의 기쁨은 상처입은 기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상처를 지울 수는 없고 지우려고 할 것도 없다. 조국의 미래를 위하여 그 상처를 정신적으로 극복하는 것이 '광화문'에 대한 우리의 의무일 것이다./ 이보영(문학평론가·전북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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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8.16 23:02

[이은혁의 글씨로 만나는 옛 글] (46)백제시대 사지출토 사리유물

최근 몇 년 사이에 백제시대의 사지들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귀중한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우리나라 고고학상 최대의 성과로 꼽히는 무녕왕릉 발굴에 이어 왕흥사지와 미륵사지 등에서 출토된 사리장엄구는 역사학계에 획기적인 정보를 제공하였다. 이들이 모두 불교와 관련되어 있는 점에서 백제시대 불교연구는 물론이고, 발굴된 유물 중에는 정사인 「삼국사기」의 내용을 보충할 수 있는 명문들이 포함되어 있어 고대사 연구에 크게 기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서예사 연구에도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의미 있는 발굴이었다.1995년 부여 능산리의 왕흥사지 목탑터에서 '창왕'이라는 명문이 선명한 화감암 재질의 석조사리감(石造舍利龕)이 출토되었는데 안에 봉안되었던 사리기는 이미 없어진 상태였다. 석조사리감의 양면에는 각각 10자씩 나누어 '百濟昌王十三秊太歲在丁亥妹兄公主供養舍利'라는 명문이 음각되어 있다. 백제 창왕 13년 정해(567)에 창왕의 매형과 공주가 함께 사리를 공양했다는 내용으로 구체적인 간기를 가진 귀중한 유물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위덕왕>조에 '威德王 諱昌 聖王之元子也'라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창왕은 곧 위덕왕임을 알 수 있다. 그 역사적 가치가 인정되어 1996년 5월 30일 국보 제288호로 지정되었다.뒤이어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왕흥사지 목탑터에서 3중구조 사리구(舍利具)를 발굴하여 공개하였다. 청동제 사리함 안에 은제 사리병을 넣고, 다시 은제병 안에 작은 황금사리병을 넣었다. 청동사리함 겉면에는 명문이 있는데, 5자씩 6행에 걸쳐 모두 29자(제6행은 4자)가 선명하게 음각되어 있다. 그런데 명문을 판독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문제들이 도출되었다. 정확한 판독을 위해서는 우선 명문을 서체와 문자학적 입장에서 면밀하게 고증할 필요가 있으며, 다음으로 판독된 석문을 정확하게 해독하는 일이다. 일차 공개한 석문은 '丁酉年二月十五日百濟王昌爲亡王子立刹本舍利二枚葬時神化爲三.'이며, 그를 토대로 번역하면 '정유년 2월15일 백제왕 창이 죽은 왕자를 위하여 절을 세우고 본래 사리 두 매를 묻었을 때 신의 조화로 셋이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유물이 공개된 후 亡자를 三으로 보아야 하고 葬자는 묻을'예'자로 보아야 한다거나, 立刹은 절을 세웠다는 말이 아니라 탑의 찰주(刹柱)를 세웠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는 의견들이 제시되었다. 이체자에 대한 논란도 그 중 하나이다. 과학적인 분석과 더불어 시대적 입장에서 치밀한 서체분석이 선행되어야만 정확한 석문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명문의 2월 15일은 단순히 사리를 봉안한 날을 기록한 것이라기보다 그 날이 바로 부처님의 열반일에 해당한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그 역사적 의미는 한층 더 깊어질 것이다.또 2009년 1월 14일 백제 제30대 무왕이 창건한 것으로 알려진 국보 제11호 익산미륵사지 석탑 가운데 서탑(西塔)의 기단부를 해체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과 진신사리는 또 한번 학계를 놀라게 하였다. 사리기가 출토된 것은 2007년 왕흥사지 목탑터에 이어 두 번째이며, 유물 중에는 앞뒤면에 총 193자가 새겨진 금제사리봉안기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를 토대로 그동안 전해오던 선화공주에 대한 일화가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 확인되어 세간에 화제가 되기도 했다. 발굴된 유물들은 그 해 6월 27부터 7월 26일까지 미륵사지박물관에서 '미륵사지석탑 사리장엄 및 진신사리 특별전'을 통해 세상에 공개되었다. 명문의 서체는 왕흥사지 출토 사리함과 비교하여 훨씬 정제된 체세를 보이고 있어 서예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다만 그것이 백제시대의 미감을 제대로 담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보다 체계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이은혁(전주대 한문교육과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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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8.11 23:02

조선침탈 상징 동상 서울시 무관심 속 훼손

을사늑약 체결에 앞장선 일제 강점기의 주한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1860~1939)의 업적을 기려 세운 동상 일부가 당국의 관리 소홀로 훼손된 것으로 확인돼 역사의식이 모자란게 아니냐는 지적을 받고 있다. 3일 민족문제연구소에 따르면 옛 조선통감관저 터에 방치됐던 하야시 동상 좌대 판석의 글자 '남작하야시곤스케군상(男爵林權助君像)' 중 '조(助)'자의 좌변과 '군(君)' 자의 '입 구(口)' 부분이 깨졌다. 훼손 사실을 처음 발견한 이순우 우리문화재자료연구소장은 "지난달 30일 통감관저 터에 갔다가 일부 글자가 파손된 것을 발견했다"며 "좌대 옆에 놓여 있던 돌로 글자가 새겨진 부분을 누군가 내리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하야시 곤스케는 1899년부터 7년간 주한공사를 지냈으며 한일의정서, 을사늑약, 한일협약 체결 등에 깊숙이 관여한 조선침략의 원흉이다. 문제의 동상은 1936년 그의 업적을 기념해 통감관저 앞뜰에 세워졌다. 그러나 이 동상은 그동안 세인들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잊혔다가 2006년 존재 사실이 다시 알려져 관심을 끌었다.서울 중구 예장동 2-1번지의 잔디밭에서 하야시 동상 좌대의 판석 3점이 발견돼 이 일대가 '한국 병합에 관한 조약'이 체결·공포된 조선통감관저 자리였음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서울시는 이 판석이 갖는 역사적 중요성을 고려해 보존대책을 수립하라는 역사단체 등의 요구에도 학계 고증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거절했다가 오늘날 훼손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민족문제연구소측은 비난했다. 이순우 소장은 "수치스러운 역사를 통해서도 보고 배울 점이 있는 법이다. 부끄러운 역사의 흔적이라고 감추고 지우려고만 하지 말고 최소한의 보존은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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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
  • 2010.08.04 23:02

[이은혁의 글씨로 만나는 옛 글] (45)부여궁남지출토 목간의 가치

백제의 마지막 수도였던 사비성(부여) 남쪽으로 추정되는 지역에 궁남지라는 작은 연못이 있다. 문헌기록에 의하면 사비시대 백제왕실의 정원으로서 그 축조가 신라의 안압지보다 40년이나 앞선다. 궁남지의 발굴은 1990년 궁남지발굴조사단(단장 윤무병)에 의한 1차 조사와 국립부여박물관이 1991년에서 1993년에 걸쳐 2차 및 3차 조사를 실시하였고,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1995년부터 2001년까지 발굴조사를 실시한 바 있다. 이에 대한 조사결과는 2007년 3월 「부여궁남지 발굴조사보고서(1~3차)」에 수록되었다.1995년, 궁남지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한 편의 목간은 곧바로 관련 학계의 이목을 주목시켰다. 역사학계에서는 문헌자료가 부족한 백제시대의 새로운 기록을 발견했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유물로 인정되었고, 서예계에서는 백제시대 친필로서 서예사적 의미가 담긴 선명한 목간을 확보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부여하였다. 목간은 대체로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에 나무를 평평하게 깎아 글씨를 쓴 것이기 때문에 고대의 기록문화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1차 자료이다. 특히 궁남지에서 출토된 목간은 그 내용과 형식에서 특이한 점이 있어 역사적 가치를 더한다.오늘날 1500여 년의 세월동안 간직해 온 생생한 필흔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음은 실로 안복이 아닐 수 없다. 발견 이후, 적외선 촬영을 통하여 보다 선명한 필획을 확보하고 이에 대한 해독도 이루어졌다. 모두 31자의 글자가 확인되었는데 그를 통하여 백제의 정치 및 사회문화를 엿볼 수 있다. 목간의 앞면에는 "서부(西部)의 후항(後巷)에 사는 사달(巳達)·사사(巳斯)라는 사람은 21세 이상의 사람……, 귀인(歸人) 중에 16세 이상 20세 이하인 4명, 16세 이하인 2명이 매라성(邁羅城) 법리원(法利源)에 가서 논 5형(形)을 개간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내용의 이해를 위하여 중국의 사서를 들춰볼 필요가 있다. 「주서(周書)」 백제전에는 "도성 내 민가를 상부, 전부, 중부, 하부, 후부로 나누었다."는 기록이 보이고, 「수서(隋書)」 백제전에도 "도성 내에 5부가 있고, 부에는 5항이 있는데 사인들이 거처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백제에는 5부(部)가 5항(巷)으로 나누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해독된 글자 중에는 연령대를 뜻하는 글자로서 정(丁)·중(中)·소(小)가 있는데 「당령집유」에 의하면 "3세 이하를 황(黃), 16세 이하를 소(小), 20세 이하를 중(中), 21세 이상의 남자를 정(丁)이라 한다."는 기록을 참조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 다음에 보이는 매라성(邁羅城) 법리원(法利源)은 백제의 왕후제도와 관련이 있는 것이다. 「남제서」에는 동성왕 12년 사법명을 정로장군 매라왕으로 임명했다는 기록이 보이고, 또 중국 요서에 진출한 백제군이 위기에 처하자 대륙에 장군을 파견하여 전쟁에서 승리하자 沙法名을 邁羅王, 贊首流를 ?中王, 解禮昆을 後, 木干那를 面中侯로 임명하였다는 기록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지금껏 중국의 사서에만 전해오던 매라(邁羅)에 대한 기록이 백제의 목간에서 재확인된 것이다. 이는 백제가 한반도 남부에 자리한 소국이었다는 관념을 종식시키는 중요한 대목이다. 백제는 강력한 국권을 중심으로 일정한 지역을 분할통치하는 지방관 제도를 시행하고 있었으며, 백성들에 대한 관리도 매우 치밀하였음을 보여준다. 현재 중국역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양무제의 아들 소역(蕭繹)이 그린 「양직공도(梁職貢圖)」의 내용이 이를 충분히 뒷받침한다.서예적 측면에서 보면, 자체가 구속됨이 없는 활달함을 보이고 있어 그 필세가 자유분방하다. 자형이 평정하면서도 균형을 잘 이루고 있는 점으로 보아 숙달된 서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필묵의 사용이 일반에 보편화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형화된 석각문과는 또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 이은혁(전주대 한문교육과 겸임교수)

  • 문화재·학술
  • 이화정
  • 2010.08.04 23:02

'역사마을' 세계유산 등재 과정과 의미

특정한 유산(Heritage)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될 기회는 오직 한 번밖에 없다. 유네스코는 한 유산에 대한 세계유산 등재 심사를 두 번 이상 하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등재 여부를 최종 판가름하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 앞서 각국은 등재 가능 여부를 면밀히 따져, 해당 유산이 등재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면, 회의 직전에 등재 신청 자체를 철회하는 일이 많다. 그런 점에서 유네스코 자문기구가 세계유산위원회 개최에 앞서 유네스코에 제출하는 등재 후보지 심사보고서는 이를 판가름하는 결정적인 가늠자가 된다. 이번에 한국이 10번째로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는 데 성공한 '한국의 역사마을 : 하회와 양동'처럼 등재 후보지가 '문화유산'일 때는 ICOMOS(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라는 자문기구가 현지실사를 포함한 해당 유산에 대한 광범위한 심사를 한다. 한데 '한국의 역사마을'은 지난 6월에 공개된 ICOMOS의 평가보고서에서 '등재 보류'(Refer) 판정을 받았다. 등재 보류란 말 그대로 세계유산으로서의 가치는 있지만, 현재로서는 여러 가지 미비점으로 말미암아 등재를 '보류'해야 한다는 뜻이다. '보류'가 등재 신청 자체를 해당 국가에 돌려보내는 '반려'(Defer)나, 등재 자체가 아예 불가능하다는 '등재 불가'(Not Inscribe)에 비해서는 훨씬 좋은 평가이긴 하지만, 등재를 장담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 또한 부인할 수 없다. 반면, '등재권고'(Recommended for Inscription) 판정을 받으면 이변이 없는 한 그 유산은 세계유산위원회 회의를 통해 세계유산으로 등재된다. 지난해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릉'이 ICOMOS 평가보고서에서 바로 '등재권고' 판정을 받았다. 통상 '등재 보류' 판정을 받으면, 세계유산위원회 회의 직전에 등재 신청을 철회하고, 다음 기회를 노리기 마련이다. 단 한 번밖에 기회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 지난해 조선왕릉과 함께 우리가 동시 등재를 추진한 '남해안 지역 백악기 공룡 해안'은 등재 보류 판정을 받는 바람에 우리 정부는 등재 신청을 철회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우리 정부는 하회ㆍ양동마을에 대해서는 이런 우회 방법을 쓰지 않고 정공법을 채택했다. 이것이 결론적으로는 성공했지만 성공을 장담할 수 없는 모험이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 정부가 이렇게 나간 데에는 비록 ICOMOS 평가보고서에서는 '등재 보류' 판정을 받기는 했지만, 그것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판단이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 우리 정부는 하회ㆍ양동마을이 왜 등재 보류 판정을 받게 됐는지, 그 이유를 분석했다. 그 결과 ICOMOS 평가보고서는 두 마을이 지닌 역사적 가치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두 마을에 대한 통합관리 체계를 문제로 삼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원인 진단이 나오면 처방전도 나오기 마련이다. 이에 우리 정부는 ICOMOS가 지적한 문제점을 보완하는 대책 마련에 나섰다.이에 따라 이미 ICOMOS 평가보고서가 공개되기 전인 지난 4월에 이미 중앙정부와 지자체, 문화유산보존활용전문가와 마을 주민대표까지 모두 참여한 통합관리 체계인 '역사마을보존협의회'를 구축한 것이다. 이런 대비는 ICOMOS 평가보고서를 예측한 데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함께 협의회가 만들어지기 전에도 두 마을에는 경상북도와 문화재청이 함께 관여하는 통합관리 체계가 사실상 존재했다는 점을 유네스코에 역설하기 시작했다. 그에 더해 2008년 말레이시아의 역사도시인 말라카(Malacca)와 조지타운(George Town. 喬治市)이 ICOMOS에서 '보류' 권고를 받았음에도 보완책을 마련해 세계유산위원회에서 등재된 전례가 있어 자신감을 심어줬다. 이에 따라 문화재청과 외교통상부 등은 이번 세계유산위원회 기간과 그에 앞서 유네스코 본부와 등재 여부를 결정하는 키를 쥔 세계유산위원회 21개 위원국에 대해 ICOMOS가 우려한 통합관리 체계의 마련 사실을 적극적으로 홍보하는 데 주력했으며, 그것이 효과를 발휘해 마침내 두 마을을 세계유산으로 만드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런 난관을 뚫고 하회ㆍ양동마을이 '한국의 역사마을'로 묶여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지만, 이는 한국의 세계유산 숫자 하나가 늘어났다는 의미를 뛰어넘는다. '역사도시' 또는 '역사마을'은 단순히 마을이 오래됐거나 고건축물이 많다고 해서 등재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역사마을의 문화가 지금까지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까지 판단하는 것이 보통이다. 세계유산위원회가 하회마을과 양동마을에서 주목한 것은 이곳에 이어져 내려오는 유교문화였다. 지난해 9월 하회마을과 양동마을 현장을 찾아 실사 작업을 벌인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현지 실사단은 마을 종갓집에서 손님을 맞는 모습을 하나하나 지켜보고, 씨족 마을이 하나가 되어 손님을 대접하는 데도 관심을 뒀다. 실사단은 또 직접 한국 전통 의관을 갖춰 입고 사당 참배 의식에도 참여해 큰절을 올리는 체험도 했다. 이들 마을에서 '씨족공동체'가 살아 있고, 유교문화도 면면히 흐르고 있음을 이해한 셈이다. '한국의 역사마을'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신청서 작성에 참여한 전봉희 서울대 교수는 이번 등재에 대해 "유교 본산지인 중국보다 더 철저히 지켜온 한국 전통의 유교문화가 세계의 인정을 받은 셈"이라며 "서구에서도 선구적인 동양학 연구자들은 이미 이런 평가를 하고 있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갖는 의미 자체가 바뀌었다는 해석도 있다. 전 교수는 "과거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서 '보편적 가치'를 강조해 (세계유산을) 서구중심적으로 해석했지만, 최근에는 다극화한 시각이 많이 수용되면서 다양성을 인정해주는 분위기로 바뀌었다"며 "하회마을과 양동마을의 세계유산 등재도 이런 다양성 논의에 힘입은 바가 크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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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8.02 23:02

세계유산 '역사마을', 이제는 관리가 문제

안동 하회마을과 경주 양동마을이 브라질 브라질리아에서 31일(현지시각) 열린 제34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마침내 한국의 10번째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지만, 이제는 관리가 더 시급한 현안으로 다가왔다. 이번 위원회에 앞서 두 마을에 대한 현지실사를 포함한 심사를 담당한 유네스코 자문기구인 ICOMOS의 한국위원회 위원장인 고건축학자 이상해 성균관대 교수는 등재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그 어려움을 이렇게 토로한 적이 있다. "전 세계적으로 세계유산에 등재된 전통마을치고 관광지 개발이니 뭐니 해서 망가지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전통마을 등재가 그만큼 힘든 것이며, 유네스코나 ICOMOS 쪽에서도 그만큼 까다롭게 나옵니다." 이런 언급은 세계유산 중에서도 전통마을은 유독 관리가 어렵다는 점을 예고한 대목이라 할 수 있다.◆관광지 개발과 보존의 딜레마어느 곳이나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면 관광객이 몰리는 '세계유산 특수'를 경험하게 된다. 지난해 세계유산이 된 조선왕릉만 해도 지난해에 견줘 외국인 관광객이 7배 늘었음이 최근 밝혀진 바 있다. 문제는 관광객이 느는 과정에서 숙박시설과 편의시설 등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인근에 대한 개발이 추진되는 일이 잦다는 점이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건물들이 들어서면 세계유산의 가치가 떨어지거나 유산의 보존에 문제가 생기게 마련이고, 최악에는 등재가 취소될 수도 있다. 실제로 독일의 세계문화유산이었던 엘베 계곡이 대규모 교량 건설이 문제가 돼 세계유산 목록에서 삭제된 전례도 있다.이번에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두 마을도 안심할 수 없다. 하회마을에서는 지난해 정부가 '4대강' 사업의 하나인 '하회보'를 설치하려 했다가 마을을 훼손할 우려가 있다는 시민단체와 문화재청 등의 지적을 받고 백지화한 경험이 있고, 양동마을에서도 역시 마을 앞에 건설되는 콘크리트 건물 때문에 경관을 훼손된다는 주장이 나온다. 안동시가 이달 초 하회마을의 입장객을 하루 5천명으로 제한하기로 한 것도 훼손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몰려들 관광객을 위한 숙박시설과 편의시설을 전혀 짓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도 현실성이 없다.◆"'역사마을보존협의회'로 통합관리"문화재청은 이에 대해 지난 4월 출범한 '역사마을보존협의회'를 통해 일관성 있고 통합적으로 관리하겠다는 방침이다. 협의회를 문화유산에 영향을 줄 만한 개발 행위 방지는 물론이고, 마을에 대한 보존 등을 관리할 책임 있는 협의체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실제로 협의회에는 중앙정부와 지자체, 문화유산보존활용전문가는 물론이고 마을 주민대표도 참여했다는 점에서 보존과 활용에서 중용(中庸)을 지키는 데 노력할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이 협의체가 하회마을과 양동마을을 함께 관리한다는 점에서 더 전문성을 띤 관리체계가 갖춰질 것도 기대되고 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훼손을 막고 관리를 강화하기 위해 '역사마을보존협의회'를 만든 것"이라며 관리가 문제화할 가능성은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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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
  • 2010.08.02 23:02

[전시] '고산 미인도', 21년 만에 일반인 공개

조선 숙종 때 학자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미인도가 21년 만에 일반인에 공개된다. 전남 해남군은 다음 달 1일 '고산 윤선도 유물전시관' 임시 개관에 맞춰 고산 미인도 등 해남 윤씨 문화유산 4천600여 점을 전시한다고 29일 밝혔다. 특히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전반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미인도(67cmX49cm)는 공재 윤두서의 손자 윤용이 그렸다는 설이 있는 작품으로, 종가의 소장 유물을 정리하던 중 우연히 발견됐다고 군은 전했다. 이 미인도는 사연이 많다. 지난 1989년 해남읍 고산유적지관리소에 전시된 이 미인도는 충남의 모 사찰 주지가 훔쳐 서울 인사동 고미술상에게 팔면서 세간에 알려졌다. 이후 일본으로 밀매되기 직전 절도범이 붙잡히면서 해남 윤씨 종가의 노력으로 되찾을 수 있었으나, 도난을 우려해 지금껏 보관만 해 왔다. 오는 10월 중순 정식 개관할 유물전시관은 전체면적 1천830㎡, 지하 1층 지상 1층 규모의 전통한옥양식으로 전시관과 교육관, 사무동 등을 갖추고 있다. 1층 특별전시실에 고산의 증손자인 공재 윤두서의 미술 세계를 감상할 수 있도록 전국의 각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전시돼 있던 그의 작품을 빌려 와 전시한다. 지하 1층 제1전시실에는 해남 윤씨 종가의 학문과 예술생활을 엿볼 수 있는 각종 서적과 고문서, 유물이 전시된다. 제2전시관에는 윤선도 관련 고문서와 유물과 함께 낙서 윤덕희와 윤용의 그림세계를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군은 지난 2004년부터 남해안관광 벨트 사업의 하나로 100억원을 들여 고산 윤선도유물전시관을 짓고 주변 정비 사업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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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
  • 2010.07.30 23:02

[이은혁의 글씨로 만나는 옛 글] (44)백제시대 최고(最古)의 석각 무녕왕릉지석

1972년 6월 29일, 충남 공주읍 금성동 송산리에 소재한 고분군 6기중 제5·6호분의 발굴이 시작되었다. 발굴 7일째 되는 7월 8일, 고분에서 순금왕관과 지석 2편이 발견되었는데 이로써 그 고분이 무녕왕릉이라는 것이 처음 밝혀졌다. 비록 간단하게 기술된 묘지이지만 고분의 주인공과 축조연대를 확인한 삼국시대 유일의 왕릉이 되었다.「삼국사기」에 의하면, 무녕왕의 이름은 사마(斯摩)이며 모대왕(牟大王 : 東城王)의 둘째아들이다. 신장은 8척이요, 눈매가 그림과 같았으며, 인자하고 너그러워 백성들의 마음이 그에게로 쏠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무녕왕은 백제 25대 왕으로서 501년부터 523년까지 재위하였으며, 재위시절 남조 양(梁)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웅진시대를 이끈 임금으로 기록되어 있다. 다만 집권 말기인 21년 11월에 강성해진 고구려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사신을 통해 양나라에 도움을 청하는 장문의 표문을 올렸으나 양 고조가 이를 묵살하자 후에 조공을 단절하였다. 조공을 받은 양 고조는 그 해 12월 무녕왕을 '使持節, 都督 百濟 諸軍事, 寧東大將軍'으로 봉한다는 조서를 내렸다. 그리고 재위 23년 여름 5월에 왕이 죽었으며, 시호를 무녕(武寧)이라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이와 관련하여 발견된 두 개의 묘지명은 무녕왕과 왕후의 것으로서 백제시대 최고의 석각문이다. 묘지명의 기록을 살펴보면, "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이 나이 62세 계묘년(523) 5월 7일에 붕어하시어 을사년(525) 8월 12일에 대묘에 모셨다. 묘지명의 세운 것도 좌와 같다."라고 하였다. 묘지에 보이는 '영동대장군'은 앞서 양 고조에게 받은 명호이며, 삼국사기와 달리 무녕왕의 이름이 斯摩가 아닌 斯麻로 기록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아울러 무녕왕의 출생연도를 따져볼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되는데, 「삼국사기」 보다 묘지의 기록이 우선한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가치는 매우 크다.한편 지석 위에서 오수전(五銖錢) 꾸러미가 함께 발견되었는데, 묘지명의 뒷면에 토지신에게 묘지로 사용할 땅을 매입한다는 문장이 새겨져 있는 것과 관련이 있으며, 일명 매지권(買地券)이라고도 일컬어진다. 최근(2007.9) 일본 히로시마대학의 시라스 죠신(白須淨眞) 교수는 묘지에 뚫려 있는 작은 구멍이 이 돈꾸러미를 끼웠던 흔적이라는 것과 또 묘지명 뒷면에 새겨진 십이간지 방위표에서 서쪽에 해당하는 간지가 없는 것은 묘지부지로 서쪽 땅을 샀기 때문이라는 설을 제기하여 학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동안 의문시되었던 백제 묘지명의 형식을 해소하는 연구성과로 인정되었다. 이러한 추론은 불교에서 사후 세계를 서방정토로 인식하는 것으로 비추어 볼 때 타당성이 높다. 왕과 왕비가 사망한 후 빈전에서 3년 정도 장사를 치른 후 다시 천장(遷葬)한 관례로 보아 당시 장사에서 불교의 논리보다는 도교적인 관습이 내재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특수성으로 인하여 발견된 묘지명이 과연 묘지인가 아니면 매지권인가 하는 논란이 일었다. 이것은 천장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묘지명이라는 역사적 사실 이면에 매지권을 기입함으로써 묘지의 신성함을 아울러 표시한 것이 아닌가 한다.발굴된 묘지명을 최초로 탁본을 한 금석연구가 황수영 씨는 그 감회를 상세히 밝혔는데 서체와 관련된 부분만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자체는 사택비보다도 중국 육조체다운 웅건한 풍운이 풍기는 필치로 되어 있었다. 안정된 자체와 신중한 운필 등은 백제미술의 공통적 기질인 온화한 작풍이 느껴졌다. (중략) 이 돌에 새겨진 6행 52자의 글씨(서예)야말로 그대로 최고의 국보요, 큰 자랑이기 때문이다." /이은혁(전주대학교 한문교육과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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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북일보
  • 2010.07.28 23:02

도난당한 문화재 1천200여점 되찾았다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는 4∼5년 전 도난당한 고서(古書)와 서화 등을 장물업자를 통해 산 혐의(문화재관리법 위반)로 구모(65)씨 등 골동품 업자 3명을 불구속 입건했다고 26일 밝혔다. 또, 같은 장물 업자한테서 '연구 목적'으로 도난 서적을 다량 구매한 혐의로 모 대학 교양학부 교수 김모(47)씨도 불구속 입건했다. 경찰에 따르면 이들은 전국의 향교와 재실, 고택 30곳에서 도둑맞은 어정주서백선(御定朱書百選ㆍ유학자 주희의 서간을 조선 정조가 간추려 펴낸 책) 등 고서와 고문서, 서화 등 1천200여점을 2005∼2006년 장물업자 김모(47. 2007년 당시 구속)씨를 통해 사들인 혐의를 받고 있다. 경찰 조사 결과 구씨 등 골동품 업자 3명은 김씨에게서 '껌껌한 물건(도난품)이니 일정기간(공소시효 10년) 숨겨놔야 한다'는 말을 듣고도 고서와 그림 병풍 등 300여점(2천800여만원 어치)을 사들여 대부분을 3∼12배 이윤을 남기고 처분한 것으로 드러났다. 김 교수는 '중국학을 연구한다'며 영규율수(瀛奎律髓ㆍ중국 당송시대 시선집)와 주역전의대전(周易傳義大典ㆍ유교 경전의 일종) 등 고서 900여점을 1천200여만원에 사들여 대학 연구실과 자신의 오피스텔에 보관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이 산 작품은 국보나 보물이 아닌 비(非)지정 문화재이지만, 조선 전기에 발간된 희귀 금속활자본 서적 등이 포함돼 역사적 가치가 크다고 경찰이 전했다. 이 문화재는 전북 고창 향교와 전남 영광 해주오씨 재실, 경북 영천 옥간정(玉磵亭), 인촌 김성수 생가 등 지방 주요 사적지에 보관돼오다 2005∼2006년 도둑맞았다. 경찰은 2007년 7월 붙잡은 절도단 16명 중 일부가 진술을 거부해 해당 작품의 처분 경로를 밝히지 못했으나, 이번 수사로 뒤늦게나마 문화재를 되찾았다. 경찰 관계자는 "이번에 적발된 골동품업자들은 작품의 낙관을 오려내거나 가짜 낙관을 찍는 수법 등으로 출처를 감추려고 했다. 압수한 문화재는 도난 피해를 봤던 향교 등에 반환할 예정이다"고 말했다. 경찰은 구씨 등이 작품을 처분하는 데 이용한 A 문화재 경매 사이트가 무허가 서비스라는 점을 적발해 이 사이트의 대표 김모(55)씨를 불구속 입건했다. 구씨 등 업자들이 다른 도난 문화재도 사들여 유통했을 개연성이 있는 것으로 보고 추가 수사를 벌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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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
  • 2010.07.27 23:02

[전시] 장인들의 열정이 녹아 명품으로 빚어지다

중요무형문화재 제60호 장도장의 맥을 이어온 박용기씨와 그의 외아들 박종군(장도장 전수교육조교)씨는 장도(粧刀 만들기를 대물림하고 있다. 장도는 칼집에 정교한 장식을 넣은 주머니칼. 칼날을 섭씨 800도에 달궜다가 식히는 과정을 수없이 반복해야 하기 때문에 꼼꼼함과 섬세함, 끈기가 요구된다. 이들 부자는 강함과 부드러움의 조화를 이룬 칼날의 장도를 내놓았다. 칼이라기 보다는 보석에 가까웠다.수천 년 불교 역사에서 부처가 입을 연 적은 없다. 목조각장인 박찬수씨가 선보인 '부처가 입을 열다'는 입을 다물고 자비로운 미소만 띄고 있던 불상이 입을 열어 말하는 작품으로 다가온다. 그는 1990년 자신의 호를 딴 목아박물관을 경기도 여주에 세웠으며, 1996년 최초로 중요무형문화재 제108호 목조각장으로 지정됐다. 50여 년간 목조각 외길을 달려온 그의 손끝에선 사람을 닮은 각양각색 나무의 심성이 표현됐다.전북무형문화재 탱화장인 도원 스님은 '김제 하소백련 축제'를 만들어 더욱 유명해졌다. 도원 스님은 작은 붓끝에 정성을 담아야 하는 탱화는 수행의 한 방법이라며 무서워 보여도 자세히 자주 보면 마음이 편해진다고 설명했다. 결국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붓놀림이 달라지는 것. 도원 스님은 그간 쉴새없이 그려온 탱화들을 내놓았다.전북도립미술관(관장 이흥재)이 열고 있는 '전통의 손이 빚은 공예의 숨결'전은 명인들의 손끝에서 빚어진 명품(名品)들이 전시되고 있다. 국가 지정 중요무형문화재 6명, 전수교육조교 1명, 전북무형문화재 14명 등 장인들의 작품 140여 점이 선보이는 자리로 공공미술관으로서는 이례적인 전시다.전시엔 국가 지정 중요무형문화재는 장도장 박용기, 소목장 설석철, 목조각장 박찬수, 나전장 이형만, 한지장 홍춘수, 석장 이재순 선생씨가 함께 했다. 장도장 전수교육조교인 박종군, 전북무형문화재 악기장(가야금) 고수환, 악기장(거문고) 최동식, 소목장(가구) 조석진, 소목장(전통창호) 김재중, 선자장(합죽선) 김동식·이기동, 선자장(태극선) 조충익, 선자장(단선) 방화선, 옻칠장 이의식, 침선장 최온순, 한지발장 유배근, 사기장 이은규, 탱화장 유삼영, 석장 김옥수씨도 전통 공예의 자부심을 담은 작품들을 내놓았다.이흥재 관장은 "조선 후기 전주를 중심으로 한 전북은 조선 공예의 중심지로 널리 알려졌고, 최근엔 아시아·태평양 문화유산전공이 기공 돼 우리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조명할 계기가 필요했다"며 "전통공예에 대한 이해를 돕고 우리 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가질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8월 29일까지 계속되는 이번 전시는 주말엔 가족 관람객들을 위한 부채 만들기 체험과 애니메이션 영화 상영이 무료로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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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화정
  • 2010.07.27 23:02

하회·양동마을 31일 세계유산 등재 결론

경북 안동 하회마을과 경주 양동마을의 세계유산 등재여부가 오는 31일 결정된다. 25일 경주시에 따르면 오는 26일부터 8월 3일까지 브라질 브라질리아에서 열리는 제34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한국의 역사마을-하회와 양동' 세계유산 등재 여부를 심사한다. 하회마을과 양등마을의 심사는 현지 시간으로 30일 오전 10시부터 열리는 회의의 마지막 의제로 채택돼 이르면 우리나라 시간으로 31일 새벽에 등재 여부가 발표될 것으로 보인다. 경주시는 이번 세계유산위원회에서 두 마을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될 가능성이 큰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유네스코 자문기구인 ICOMOS(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가 '한국의 역사마을-하회와 양동'의 세계유산 등재를 '보류(refer)'해야 한다는 의견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 제출했지만 사안이 경미해 등재에는 별다른 걸림돌이 되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경주시와 안동시는 ICOMOS가 세계유산으로 가치는 충분하지만 두 마을의 통합적 관리체계가 필요하다는 권고사항을 내놓자 통합보존관리 이행 협약체결, 통합관리 보존협의회 발족 등을 통해 두 마을의 통합관리시스템인 '역사마을 보존회'를 설치해 운영하고 있음을 설명했다. 이들 자치단체는 두 마을이 세계유산에 등재될 수 있도록 외교통상부, 문화재청, 경북도 관계자 등과 함께 이번 세계유산위원회에 참석해 마을을 홍보하고 21개 회원국을 상대로 ICOMOS 권고사항에 대한 조치결과를 설명할 계획이다. 경주시와 안동시, 경북도는 2008년 3월 이들 마을의 세계문화유산 공동 등재 방침을 확정했으며 작년 1월에는 문화재청을 통해 세계유산위원회에 등재 신청서를 제출했다. 이어 2월과 5월에는 국내외 전문가가 참여하는 예비실사가 2차례 진행됐고 같은해 9월에 세계유산위원회의 현지실사가 이뤄졌다. 두 마을은 전체가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됐고 양동마을은 15-16세기 이후 월성 손씨ㆍ여강 이씨 등 두 가문이 대대로 살아온 조선시대 양반마을로 크고 작은 옛 집과 23점의 지정문화재가 있고 하회마을은 국보 등 19점의 지정문화재가 있는 전통 문화유산이 잘 보존된 마을이다.

  • 문화재·학술
  • 연합
  • 2010.07.26 23:02

"문화재는 고리타분? 편견을 버리세요"

재단법인 전북문화재연구원(원장 김종문)이 문화재 발굴에 관한 시민들의 관심을 환기시키기 위해 전주시 효자동에 황방문화센터를 마련했다. 우리 지역의 문화재 발굴·복원은 그간 폐쇄된 상태로 진행돼왔다. 더욱이 시민들은 문화재 때문에 개발이 안된다며 불편을 호소하기도 했다.김종문 원장은 "황방문화센터는 문화재 발굴과 개발에 관한 절충안을 마련하고, 발굴에 관한 이해를 돕는 교육 프로그램 진행을 위해 마련된 것"이라며 "전북문화재연구원이 임실에 위치하다 보니, 접근성이 떨어져 전주에 또 다른 공간을 만들게 됐다"고 설명했다.황방문화센터는 원로 초청 간담회, 시민 문화 강좌, 발굴체험 학교 등을 추진한다. 7월부터 진행되는 원로 초청 간담회는 전북 고고문화에 헌신한 원로학자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자리. 첫 만남(23일 오후 5시)은 전영백 일본 규슈대학 문학박사가 초대됐다. 전주 출생인 전 박사는 처음으로 지방박물관을 설립했으며, 전라북도 고고학·산성학·한국청동기문화 등을 연구하며 다양한 발굴조사보고서와 학술논문, 단행본 등을 발간해왔다. 김삼룡 전 원광대 총장, 윤무병 전 충남대박물관장 등도 함께 할 계획이다.시민 문화 강좌는 8월말부터 발굴 현장에 대한 이해를 돕는 쉽고 재밌는 강의로 이어진다. 전북문화재연구원에서 발굴 현장 전문가로 활동해온 최완규 이사장, 김종문 원장, 박현수 이사, 김규정 실장 등이 생생한 발굴 현장 이야기를 들려줄 예정.발굴체험학교는 9월부터 이론 수업과 현장 탐방으로 이뤄진다. 최완규 이사장은 "그간 문화재 발굴 현장이 시민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아 불필요한 일로 인식되거나 무관심하게 바라봐왔다"며 "발굴과 관련해 꼭 알아야 할 지식을 교육한 뒤 현장을 직접 방문해 봄으로써 문화재 발굴에 대해 인식을 전환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김종문 원장은 "전국적으로 문화재 발굴 관련해 시민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부설 센터가 전북에만 없었다"며 "문화재 발굴이 지역 문화 발전에 기여한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젠 시민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마련해야 할 때"라고 덧붙였다. 문의 063) 272-5897.

  • 문화재·학술
  • 이화정
  • 2010.07.22 23:02

"임실 하가유적은 구석기 사냥도구 제작터"

임실 하가유적에서 구석기시대 사냥용 도구인 슴베찌르개 11점이 발굴됐다.조선대박물관(관장 이기길)은 임실군 신평면 가덕리 687번지 일대 구석기시대 유적인 하가유적 125㎡(약 38평)를 학교 자체 예산 1000만원을 들여 발굴 조사한 결과, 슴베찌르개 11개와 함께 지금까지 보고되지 않은 새로운 종류의 구석기 시대 찌르개 1점을 수습했다고 20일 밝혔다.구석기 전공인 이기길 관장은 "지금까지 보고된 유적 가운데 이번 발굴 조사에서 슴베찌르개의 밀집도가 가장 높았다"며 "이로써 하가유적이 구석기시대에 사냥 도구를 대량으로 제작하던 곳임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대형과 소형의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는 슴베찌르개 중 대형으로 분류되는 5점 가운데 가장 큰 것은 길이 130㎜, 너비 30㎜, 두께 15㎜이며 나머지 소형 6점은 길이 55~70㎜, 너비 15~20㎜, 두께 5~7㎜였다.이번에 새롭게 보고된 찌르개(112×17×13㎜)는 긴 자루에 날은 톱니처럼 만들고 칼등에도 자루에서 가까운 부분에 돌기를 만들었다.이 관장은 "이 찌르개는 일본열도에서 보고된 구석기인 산료센토키(三稜尖頭器)와 비교 검토할 필요가 있다"면서 "이전 하가유적 조사에서는 일본열도의 고유한 석기로 알려진 모뿔석기(각추상석기), 나이프형 석기가 나온 바 있다"고 말했다.이 관장은 "올해까지 4차 발굴을 벌인 결과 하가유적에서 크고 작은 석기제작터를 확인하고 많은 구석기 유물을 수습함으로써 한반도 구석기문화는 물론, 동북아 구석기문화의 교류 양상을 규명하는 데 도움이 되는 귀중한 자료를 확보했다"고 평가했다.하가유적 출토 구석기는 암석 재료로 보면 산성화산암이 90%를 웃돌고, 최종 구석기 생산품으로 가는 전단계나 그 과정에서 나온 석기가 많다는 점이 특징이다.

  • 문화재·학술
  • 연합
  • 2010.07.21 23:02

[이은혁의 글씨로 만나는 옛 글] (43)고구려 평양성 석각

고구려가 처음 환인에 뿌리를 내렸다가 집안(輯安·集安)으로 수도를 옮겨 중국동북부를 지배하는 강력한 국가로 성장하며 위세를 떨쳤다. 벽화 등에서 자주 나타나는 기사도(騎射圖)는 고구려의 강력한 군사력을 대변하는 하나의 역사적 증거일 뿐만 아니라 역동성을 표현한 회화로서도 가치가 높다. 그러나 고구려의 위상에 비하여 그의 기록들은 매우 미비하다. 앞서 광개토호태왕비 이외에 중원고구려비와 호우를 소개하였지만 여기에 그친다는 점이 못내 아쉽다. 또 묵서묘지에서 역사의 한 면을 볼 수 있음이 그나마 다행이다.이와 더불어 귀중한 자료로서 평양성석각을 꼽지 않을 수 없다. 고구려는 정복활동이 가장 왕성하였던 광개토대왕 때에 영토을 확장함과 동시에 이를 보전하기 위하여 여러 곳에 축성을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특히 평양에 아홉 불사(佛寺)를 창건하였고, 나라 남쪽에 일곱 성을 쌓아 백제의 침구에 방비하였으며, 나라 동쪽의 독산(禿山) 등 여섯 성을 쌓고 평양의 민가를 옮겼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들은 모두 평양과 관련이 깊은 기록이다. 평양은 정복활동에 성공한 광개토대왕이 차기 도읍지로 염두에 두었던 것이 분명하다. 평양천도는 장수왕 15년(427)에 단행되었다. 장수왕은 평양으로 수도를 옮긴 후 대규모의 안학궁을 건설하고 주위에 대성산성을 쌓아 수도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평시에는 안학궁에서 거처하고 비상시에는 대성산성을 이용하였을 것이다.당시 국제관계로 보면, 북방의 강력한 위(魏)를 중심으로 연(燕)과 거란이 대립하고 있었고, 한반도에는 신라와 백제가 점차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고구려는 대륙의 위와 연을 견제하는 한편 신라와 백제에 대해서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입장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평지는 항시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두 개의 강으로 둘러 쌓인 평양성은 그러한 결점을 보완할 수 있는 최적의 요충지였다. 평양성은 내성, 북성, 중성, 외성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그 총 길이가 무려 23km에 달하는 세계 최대 규모였다. 중국의 유명한 장안성이 16km라는 점과 비교된다. 기록에 의하면 평양성은 양원왕 8년인 552년에 지어지기 시작하였는데, 평양속지의 '本城四十二年畢役'라는 기록으로 보아 42년 만에 완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구려의 영화를 보여주는 성이 발굴되면서 그에 관한 기록들이 발견되었다. 평양성은 특이한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축조 당시 부분별로 지역을 분담하고 그 책임을 분담하였다. 각 성벽에서 발견된 각자(刻字)된 섬돌에는 시기와 해당지역 그리고 책임자의 이름 등이 기록되어 있다. 모두 여섯 개가 발견되었으나 현재는 세 개만 전하고 나머지 세 개는 기록으로만 전한다. 「삼한금석록」과 「해동금석원」에서 각자의 내용을 살펴 볼 수 있다. 특히 「해동금석원」의 기록에는 추사 김정희의 보서(補書)가 기록되어 있어 이에 대한 역사적 중요성과 서예적 가치를 반증한다. 추사가 여러 경로를 통하여 금석문을 탐문조사하고, 이를 연구하며 중국에 전파한 일은 잘 알려져 있다. 이번 사례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추사는 평양성 석각문자를 수습하여 고구려시대의 것으로 고증하고 이를 중국의 유연정에게 전해주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역관 오경석은 평양석각 편을 수습하여 소장하였는데 이후 그의 아들 오세창에게 전해졌고, 후에 이화여대 박물관에 소장되었다.(보물642호) 이것이 남한에 있는 유일한 평양성석각이며, 현재 북한의 중앙역사박물관에 나머지 두 편이 소장되어 있다. 한편 청말 민국초의 강유위는 그의 저서 「광예주쌍즙」 구비(購碑) 조에서 오경석이 소장하고 있던 평양성석각을 꼽은 뒤, 비품(碑品) 조에서 고품하(高品下)로 품평하기도 하였다. 역사적 가치와 서예사적 가치를 반증하는 기록이다. / 이은혁 (전주대 한문교육과 겸임교수)

  • 문화재·학술
  • 전북일보
  • 2010.07.21 23:02

[이은혁의 글씨로 만나는 옛 글] (42)덕흥리고분 묵서묘지

2002년 12월 6일부터 2003년 3월 2일까지 서울 삼성동 코엑스 특별전시장에서 '특별기획전 고구려! 평양에서 온 고분 벽화와 유물'이 개최되었다. 중앙일보와 민족화해협력국민협의회(민화협), (주)SBS가 공동 주최하고 조선중앙력사박물관과 재일본조선력사고고학협회가 특별 후원한 이 전시는 50년 남북 단절의 역사를 잇는 민족화해의 자리로 주최측이 4년여만에 성사시킨 값진 행사였다.고대사에서 중요하게 언급되는 대규모의 발굴유물들이 전시되어 우리 역사에 대한 자긍심을 느끼기에 충분했지만, 그에 대한 역사적 해석은 아직도 분분하여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즉 고구려에 대한 기원설조차 남북한이 다른 주장을 제기하고 있는 형편이니, 고대사 연구의 문제점을 다시 한번 실감하는 전시였다. 전시의 유물 가운데 필자의 관심을 끄는 것은 기록이 담긴 역사물이다. 청동불상의 광배에 새겨진 명문도 의미가 있지만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고분에서 발견된 묘지묵서이다. 묵서는 비명과 달리 새김의 단계를 거치지 않은 1차 자료라는 점에서 그 가치를 더한다. 안악3호분과 덕흥리 고분에서 발견된 묵서는 역사적 의미는 물론이고 서예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1976년 관개수로 공사 중 발견된 평안남도 남포시 소재 덕흥리 벽화에는 풍부한 벽화 속에 설명이 가미되어 있고, 묵서묘지까지 남아 있어 고구려사 연구에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여기에는 벽화의 주인공인 유주자사 진(鎭)이 위엄 있는 자세로 앉아서 13인의 각 지역 태수로부터 공손히 보고를 받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는데, 이를 통하여 당시 고구려의 치세영역을 산정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근거를 확보했다는 점에서 20세기의 역사적 발견이라 할 만하다. 묘지의 주인인 진은 광개토왕대의 인물이라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지만, 그의 정체에 대해서는 여전히 설이 분분하다. 다만 그가 고유한 고구려인이 아니라 고구려에 망명한 북방민족 출신이라는 점은 대체로 일치하고 있는 듯하다.임창순은 묵서묘지와 관련하여, "덕흥리 고분 벽서는 모두루묘지와 같이 전실북벽에 먹으로 쓰여 있는 것인데 그 체재는 서로 다르다. 모두루묘지는 모두루의 경력과 업적을 서술한 것이나 이것은 공주 무녕왕릉의 매지권과 비슷한 도교적인 주송(呪誦)을 쓴 것이다. 이런 예는 중국의 한진시대의 유적 가운데서도 발견된다. 자체는 모두루묘지와 같이 예의(隸意)를 지닌 해서인데 다만 모두루묘지는 행필이 표일(飄逸)하여 가볍게 춤추는 듯한 필세인데 비하여 이 글씨는 중후한 맛이 있다. 전자를 동적이라 한다면 이것은 정적인 필의가 짙게 보인다."고 평하였다.앞서 소개한 모두루묘지가 그 내용과 필치면에서 고구려인의 활달한 감성을 담고 있는데 반하여 덕흥리고분 묘지는 다소 권위적인 모습을 연상시키는 평정한 위엄을 담고 있는 것이다. 또 모두루묘지가 계선을 긋어 정해진 공간에 글자를 배열하는 치밀함을 추구하고 있는데 비하여 덕흥리 고분은 각 행의 윗 선만을 가지런하게 맞추어 자유롭게 묵사했다는 점도 대비된다. 예술적 입장에서 보면 모두루묘지가 완성도가 높은 것이 분명하지만 덕흥리고분 묘지는 그보다 시대가 앞선다는 점에서 또 다른 가치를 지닌다. 1600년이 지난 지금에도 깜깜한 현실(玄室)에서 오롯이 묵흔을 간직한 채 역사의 일면을 전하고 있는 것을 보노라면 참으로 신비하고 감개할 따름이다. /이은혁(전주대학교 한문교육과 겸임교수)

  • 문화재·학술
  • 전북일보
  • 2010.07.14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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