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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에 국립박물관 설립, 국보급 백제유물 체계적 관리를

백제문화유적을 집중화하고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익산에도 국립박물관이 설립돼야 한다는 여론이다. 특히 고도보존지역으로 지정된 4곳(경주 공주 부여 익산)중 익산에만 박물관이 없어 익산지역의 국보급 유물들이 문화재청이나 중앙박물관에 보관되고 있는 실정이다. 전문가들은 현재 국회에 개정안이 상정된 고도보존법 등 관련법에 국립박물관 설립 및 운영에 관한 조항을 신설해 익산에도 국립박물관이 들어서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현재 익산에는 미륵사지유물전시관과 왕궁유적전시관, 입점리전시관, 마한관 등 전시관만 4곳 운영되고 있다. 익산과 같은 고도보존지역으로 지정된 경주와 공주 부여에는 모두 국립박물관이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더욱이 지난해 미륵사지에서 사리장엄구가 각종 유물과 함께 출토되자 미륵사지유물전시관을 국립박물관으로 승격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지만 수포로 돌아갔다. 현재 사리장엄 유물은 문화재청에서 보관하고 있다. 미륵사지 유물뿐 아니라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를 비롯해 익산지역 일원에서 출토된 국보급 백제 유물들이 중앙박물관이나 전주박물관 원광대박물관 등 곳곳에 흩어져 있다.이와관련 전문가들은 "익산 왕궁과 금마지역은 백제의 수도로 역사적 가치가 높고, 관련 유적이 잇따라 출토되고 있어 이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박물관이 필요하다"며 "익산지역에서 출토된 유물의 보관과 관리, 전시, 연구자료 활용등을 위해서 박물관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를 추진하고 있는 익산역사유적지구의 중장기적 대책을 위해서도 중심 센터로서의 박물관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한편 고도보존에 관한 특별법 개정안에는 이춘석의원이 국립박물관 설립에 관한 조항을 신설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으며, 국회 법제실은 미륵사지 유물전시관의 국립박물관 승격을 검토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내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 문화재·학술
  • 은수정
  • 2010.12.20 23:02

[2010 전북문화 결산] ⑤문화재·학술- '전주 재조명' 계기

올해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위축됐지만, 문화재·학술 분야에 있어 의미있는 사건들이 적지 않았다. 우선 태조 어진 600주년 전주 봉안을 맞아 어진박물관이 전주 경기전에 개관해 전주의 정체성과 자긍심을 널리 알리는 자리가 됐으며, 조선왕조의 발상지 전주를 재조명하는 시민강좌와 학술대회가 줄을 이었다. 전주대 인문과학종합연구소와 사단법인 한국고전문화연구원이 호남권 고전 번역 거점연구소로 지정 돼 한문 고전을 번역하고 지역별 고전번역 인재를 양성할 수 있게 됐다. 문화재청은 전주 객사(보물 제583호)를 전주 풍패지관(豊沛之館)으로 이름을 바꿨다.▲ 태조 어진 600주년 기념 어진박물관 개관태조 어진 경기전 봉안 600주년 기념 행사는 정부의 미온적인 예산 지원으로 국가행사로는 열리지 못했다. 하지만 조선시대 어진을 봉안한 과정을 재현한 기념대제는 트위터 검색어 1위에도 올랐을 만큼 시민들의 관심은 뜨거웠다. 경기전 뒷편에 건립된 어진박물관은 지상 1층, 지하 1층, 건물면적 1194㎡로 어진실과 가마실, 역사실, 수장고, 기획전시실 등을 갖춰 문을 열었다. 어진박물관은 개관 20일 만에 7만명이 넘는 관광객이 다녀간 것으로 추산됐으며, 전주가 조선왕조의 본향임을 확인할 수 있게 됐다는 평가다.▲ 전북 뿌리찾기 학술대회·시민강좌개관 20주년을 맞는 국립전주박물관은 전북과 전주의 역사성·정체성을 찾는 전시와 학술대회를 열었다. 국립전주박물관은 '조선왕실과 전주'를 주제로 한 '토요 명사 초청 강좌'로 조선의 의궤·왕과 왕위계승·도자 등을 재조명했으며, 조선 왕실문화를 주제로 국제 학술 심포지엄도 열었다. 전주역사박물관은 태조 어진 경기전 봉안 600주년을 기념하는 학술대회와 첫 전주학 연구지원사업인 '전주학 콜로키움'을 진행했으며, 이동희 전주역사박물관장과 이희권 전북대 사학과 명예교수의 공동 작업으로 전주학 총서 「경기전의」의 완간해 지역학 연구를 위한 초석을 다졌다. 전북역사문화학회도 '전북 향토사 재발견'을 주제로 한 학술대회를 처음 열어 향토사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켰으며, 학술대회를 정례화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전주대, 고전번역 거점연구소 선정전주대 인문과학종합연구소와 사단법인 한국고전문화연구원이 호남권 고전 번역 거점 연구소로 지정됐다. 이는 한문 고전을 번역하고, 한문 번역 인재를 양성하는 30년 장기 프로젝트. 연구책임자 변주승 전주대 교수를 주축으로 10년간 연구비 25억을 지원 받아 협동번역사업을 진행한다. 연구소는 올해부터 양곡 소세양, 유헌 정 황, 현곡 조위한 등 임진왜란 전후 호남 대표 시인들의 문집과 여암 신경준, 이재 황윤석, 간재 전우 등 유학자들의 문집 번역을 추진하고 있다. 지난해 조선 후기 인문지리지 「여지도서(輿地圖書)」(총 50권)를 출간한 변주승 교수를 포함한 연구진들은 2012년에 「국역 추안급 국안」(총 100권)도 간행할 예정이다.▲ 백제문화 관심·아쉬움 교차지난해 '국보 중의 국보'인 익산 사리장엄구 출토로 백제문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된 가운데 백제문화권종합개발사업이 국가 예산이 확보되지 못하면서 13개 중 5개 사업만 마무리됐다. 하지만 사리장엄구 유물이 발견 이후 관광객이 급증하고 있으며, 왕궁리유적전시관 개관 이후 일본인들의 방문도 늘어나고 있어 백제문화권종합개발사업이 적극적으로 추진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백제시대 미륵사지 석탑(국보 11호) 기단부 발굴 조사에서 토제 나발(소라 모양으로 말아 올린 부처의 머리카락)과 금동장식편 등 유물 27종 290여 점을 출토했으며, 지난해 미륵사지 석탑에서 금동사리호와 함께 발견된 청동합에서 금제장식, 직물류 등 4800여 점의 보물도 잇따라 나왔다.

  • 문화재·학술
  • 이화정
  • 2010.12.20 23:02

김제 벽골제 '현죽박물관' 건립 연기 우려

김제출신 현죽 서원석 회장((주)성원제강)이 소장하고 있는 자기류 등 고(古) 미술품 등 933점을 기증받아 김제 벽골제에 건립키로 한 현죽박물관(본보 2009년 1월21자 11면)이 무산 또는 연기될 가능성이 높아 시민들로 부터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김제시와 서원석 회장은 지난 2008년 12월16일 김제시청에서 고 미술품 기증 및 수증 약정서를 체결하고, 2010년 12월31일까지 독립된 박물관(부지면적 2000평, 건축면적 400평)을 건립해 소장품의 철저한 관리· 보관을 책임지며, 소장품의 항구적이고 안정적인 보관· 관리를 위해 특별관리행정기구를 설치키로 합의했다.또한 소장품의 영구적인 안전관리를 위해 기증자의 의견이 최대한 반영될 수 있도록 하고, 현죽박물관에는 서 회장의 기증품만 전시· 관리키로 약정했다.현죽박물관은 김제 진봉 출신인 서 회장이 소장하고 있는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자기류 등 고 미술품 933점을 김제시에 기증하기로 약정함에 따라 그동안 시민모금운동 등 물밑작업이 진행돼 왔다.서 회장이 김제시에 기증키로 한 고 미술품 933점은 시가로 수 천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전해졌으며, 서 회장은 중·고등학교 학창시절을 보낸 군산시와 주소지인 서울 종로구, 전북대학교 등으로부터 미술품 기증을 줄기차게 요청받았으나 끝내 고향인 김제시를 택해 많은 김제시민들로부터 박수를 받았었다.그러나 김제시와 서 회장이 합의한 2010년 12월31일이 며칠 남지 않은 상황이지만 현죽박물관 건립과 관련 명확한 입장 및 구체적인 계획이 정립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많은 시민들이 우려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시민 최모(51, 김제시 월촌동)씨는 "어떠한 사정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서로 합의했으면 합의한대로 좋은 결과가 나와야 되지 않겠느냐"면서 "행정이든 기증자이든 시민을 우롱하는 일이 없길 바란다"고 말했다.한편 현죽박물관 건립과 관련, 그동안 시민 모금운동을 통해 1000여만원이 모금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 문화재·학술
  • 최대우
  • 2010.12.20 23:02

[이은혁의 글씨로 만나는 옛 글] (63) 신라의 외교가 김인문의 묘비

신라의 삼국통일을 논하자면 김인문(金仁問·629~694)을 빼놓을 수 없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일부 금석서에서 태종무열왕릉비의 찬서자로 김인문을 지목하고 있으나, 그가 무열왕의 둘째 아들로서 과연 선고의 능비를 찬서했을까 의문이 앞선다. 신라가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는 데에는 김인문의 외교적 역할이 막대하였다. 신라시대 이른바 숙위(宿衛)의 대명사로 일컬어질 정도였던 그는 당(唐) 전문가였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500여 년이 지나 고려시대에 편찬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그의 전기가 비교적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김인문의 묘비는 1931년 12월 11일, 조선고적연구회 경주주재연구원이었던 일본인 아리미츠 교이치(有光敎一)와 조수 이성우(李盛雨)에 의해 경주시 서악리 서악서원(西岳書院)의 누문 아래에서 비신의 일부만 발견되었다. 비편의 내용상 김인문의 묘비임을 증명할 수 있을 뿐, 간기가 없어 세워진 연대나 서자 찬자 등의 정보를 알 수 없다. 이전에 태종무열왕릉비와 문무왕릉비를 통해서 확인했듯이 통일신라에 접어들면 비문의 형식이 정형화된다. 김인문의 묘비 또한 정형화된 비신에 정간선(井間線)을 긋고 절제된 구양순체로 새겼다. 초당의 해서 특히 구양순체가 일세를 풍미하는 가운데 세워진 비라는 점에서 신라의 서예문화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전기에 의하면, 자는 인수(仁壽), 태종무열왕의 둘째 아들로 어려서 취학하여 유가의 서적을 다독하고 노장과 불가의 설을 겸섭하였으며, 예서를 잘 썼다. 진덕왕 2년(648)에 아버지 김춘추가 당나라 사신으로 파견되어 황제를 뵙고 일곱 아들이 있으니 숙위하게 해달라고 부탁한 것이 계기가 되어 숙위하게 되었다. 당과 밀접한 외교적 관계를 유지하려 했던 신라의 노력은 결국 김인문의 외교력에 힘입어 나당연합을 통한 삼국통일의 위업이라는 결실을 거둔다. 그러나 그의 인생에도 위기는 있었다. 나당 연합으로 고구려를 멸한 후, 당이 고구려 유민을 부추겨 신라를 치려는 의도가 엿보이자 신라(문무왕)는 고구려 반란군을 받아들이고 백제의 옛 땅을 점거하였다. 이에 노한 당 황제는 유인궤(劉仁軌)를 앞세워 신라 정벌을 도모하는 한편, 숙위하고 있던 김인문을 신라왕으로 임명하여 귀국시키려 했다. 형제간의 살육을 예고하는 위기였다. 황제의 명을 거역할 수 없었던 김인문은 어쩔 수 없이 신라로 향하였으나 다행히 신라에서 급파한 사신이 당에 사죄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효소왕 3년 병에 걸려 당나라에서 죽으니 향년 66세였다. 당 황제는 수의를 내려주며 애도를 표하고 육원경(陸元景) 등에게 명하여 영구를 신라로 압송토록 하였다. 고국 신라에서는 최고의 관직인 태대각간(太大角干)을 추증하고, 그 이듬해 10월 27에 경주 서원(西原)에 장사지냈다. 일곱 번이나 당에 들어가 숙위하였는데 그 세월이 22년이었다. 인생의 삼분의 일을 당에서 보낸 것이다. 이처럼 김유신과 더불어 삼국통일의 주역으로 손꼽지만 세월은 이들의 영화로운 비신을 지켜주지 못하였다. / 이은혁(전주대 한문교육과 겸임교수)

  • 문화재·학술
  • 전북일보
  • 2010.12.15 23:02

[이은혁의 글씨로 만나는 옛 글] (62)삼국통일과 문무대왕릉비

생전에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룩한 문무왕은 그 탄생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신비한 설화가 가득하다. 선고인 김춘추(태종무열왕)가 언니의 괴이한 꿈을 산 문희(文明王后)와 혼인하여 낳은 이가 문무왕(法敏)이다. 어머니 문명왕후는 김유신의 누나이며, 신라 최고의 외교가로 꼽히는 김인문은 문무왕의 동생이다. 삼국 통일의 배경에는 이들의 절대적인 후원이 있었다. 이렇듯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문무왕에 대한 기록이 역대 어느 왕보다도 자상하다. 신비한 설화적 내용이 정치적 상황과 결부되어 묘사되었다.두 사서에서 주목되는 것은 문무왕의 유조(遺詔)이다. 삼국사기에는 그 유조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왕가의 독실한 불교 전통을 계승한 문무왕은 불교식 장례대로 자신을 화장하여 동해에 뿌려 줄 것을 명한다. 곧 산골(散骨)을 명한 셈이다. 그런데 삼국유사의 만파식적 설화에는 장골(藏骨)로 기록되어 있다. 뼈를 동해의 대왕암에 수장했다는 말이다. 해룡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유조가 새삼 숙연해지는데 수중릉이라는 대왕암에서는 아직까지 어떤 흔적도 찾을 수 없다. 유조에 따라 화장을 했지만 무언가 문무왕을 기리는 상징적인 왕릉이 있지 않았을까. 앞서 언급한 두 사서에는 왕릉을 조성했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호국불교의 정신을 담아 독특한 양식으로 건립한 사천왕사지에 문무왕릉을 조성했음을 보여주는 비편이 발견되었다. 조선후기 금석학자인 이계 홍양호가 1796년 (정조 20년) 경주 낭산의 선덕왕릉 아래에서 문무대왕릉비 비편을 처음 발견하였고, 이후 추사 김정희가 다시 두 개의 비편을 발견했다는 사실이 해동비고에 전하며, 청나라 유희해의 해동금석원에도 비편의 내용이 기록되었다. 그러나 비편은 다시 역사의 뒤안길에 묻혔다가 1960년 하단부 비편과 2009년 9월 2일 상단부 비편을 발견함으로써 비로소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금석기록과 비편을 재구성하면, 신문왕 2년(682) 7월 25일에 건립했으며, 비문을 지은 사람은 급찬 국학소경(國學少卿) 김아무개이고, 비문의 글씨는 한눌유(韓訥儒)가 썼으며, 문장은 사륙변려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만 전모는 알 수 없다.비면은 좌우보다 위아래가 약간 긴 장방형의 계선을 긋고, 그 안에 2cm 안밖의 전형적인 구양순체 필의로 새겨져 있다. 이로써 문무대왕릉비는 당과의 밀접한 교류 속에서 서예문화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역사적 자료이며, 태종무열왕릉비에 이어 비의 형식이 정형화되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비명과 찬자가 비문의 첫머리에 나오고, 서자가 비문의 끝에 자리하는 양식을 갖추었다. 구양순이 쓴 구성궁예천명과 같은 형식이다. 서자와 관련하여, 이전에 서술한 바와 같이 각석에서 이미 서자(書者)의 직함과 이름이 출현하였지만, 태종무열왕릉비와 문무대왕릉비의 경우 비의 형식이 정형화되고, 당의 전형적인 서법을 핍진하게 구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눌유는 단순히 서자보다는 서가(書家)로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신실한 불심으로 파격적인 유조를 전한 문무왕, 그러나 차마 성고(聖考)의 흔적을 지울 수 없어 세웠던 비는 이렇게 무참히 조각나고 말았다. 문무왕이 속세의 영화를 잊으려했던 이유를 여기서 알겠다. / 이은혁(전주대 한문교육과 겸임교수)

  • 문화재·학술
  • 전북일보
  • 2010.12.08 23:02

"아크릴 아교 보전처리가 회화 문화재 원형 훼손"

국내에서 전통 아교 제조 기술이 끊겨 서구식 아크릴 아교와 안료로 회화 문화재 보존 처리를 하다 보니 그 원형이 훼손되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4일 원광대 시청각실에서 '문화재 보존 수복의 실제'를 주제로 열린 원광대 문화재보존수복연구소(소장 김범수)의 학술대회에서 김범수 소장은 "회화 문화재에 대한 복원이 서구식 아크릴 아교와 안료로 사용되면서 원형이 훼손되는 악순환이 거듭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 소장은 서양 아크릴 아교나 안료를 사용하게 되면 번들거리면서 가라앉는 색감이 나와 우리나라의 전통채색화에서 보여지는 미감이 반감된다고 설명했다.김 소장은 이어 "일본은 문화재 수복 연구를 1500여 년간 진행하면서 기술력을 쌓아 우리가 일본의 기술을 빌려와야 하는 상황"이라며 "경남 양산 통도사 영산전 다보탑 벽화의 경우 일본 간고우지 문화재연구소가 2008년부터 2010년까지 자비를 들여 벽화를 복원해낸 것은 뼈 아픈 대목"이라고 강조했다.원광대 문화재수복연구소와 일본 교토대, 일본 간고우지 문화재연구소 등이 공동으로 주최한 이날 학술대회에서 간고우지 문화재연구소 야마우치 아키라 연구원은 일본 전통방식을 이용한 통도사 영산전 다보탑 벽화 복원 과정을, 기노시타 마사요 연구원은 회화 문화재를 손상시키지 않는 접착제 제조법 등을 소개했다. 미야모토 미치우 교토대학 교수는 중앙아시아(카자흐스탄) 벽화의 모사 복원 과정을, 조상완 범해문화재연구소 연구원은 영조대와 어진 복원 과정을 발제했다.

  • 문화재·학술
  • 이화정
  • 2010.12.06 23:02

[이은혁의 글씨로 만나는 옛 글] (61)삼국통일의 기틀과 파괴된 태종무열왕릉비

신라 태종무열왕(김춘추)은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임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왕위계승을 살펴보자면 24대 진흥왕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진흥왕의 장자로서 태자에 책봉되었던 동륜(東輪·銅輪)이 왕위를 계승하기도 전에 사망하자 그의 동생 금륜(金輪·舍輪)이 왕위를 계승하였는데 이는 전통적인 종법(宗法)에 의하면 맞지 않는다. 동륜의 죽음을 둘러싸고 화랑세기에는 다소 의아한 일화가 전하지만 사실 여부를 떠나 그냥 웃고 넘어가기에는 의아심이 느껴진다. 동륜 대신 왕위에 오른 금륜이 25대 진지왕이다. 그 역시 음란을 일삼다가 폐위되어 사망하였다. 진지왕은 용춘(龍春·龍樹)라는 아들을 두었으나, 왕위는 제자리를 찾아 태자 동륜의 아들이자 진흥왕의 손자인 백정(白淨)에게 전해졌다. 그가 진평왕이다. 진평은 재위시절 많을 업적을 이루었다. 그러나 아들 없이 두 딸만을 두게 되었다. 덕만과 천명공주이다. 성골의 왕위를 계승을 위하여 덕만에게 왕위를 물려주게 되는데 그가 선덕여왕이고, 천명은 진지왕의 아들 용춘과 내혼하여 김춘추를 낳았으니 그가 바로 29대 태종무열왕이다. 진흥으로부터 태종무열왕에 이르는 역사적 전개가 순탄치 않았음을 보여준다.태종무열왕은 삼국의 역사에서 고구려 광개토대왕에 비견되는 업적을 이루었다. 그러나 신라의 역대 왕 중에서 삼국통일의 기틀을 다진 태종무열왕은 그 업적에 비해 전하는 공적비는 초라하기 그지 없다. 광개토대왕비의 위상과 비교해 볼 때 더욱 그렇다. 역사를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의 공적을 기리는 비는 신라의 역대 어느 왕보다도 우월하였겠지만 현재 남아 있는 모습은 철저하게 파괴되어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다. 다만 경주 서악리에서 발견된 귀부와 이수를 통해 대략 그 규모를 추정할 뿐이다. 태종무열왕릉비의 일부로 추정되는 비편 하나가 발견되었으나 中禮라는 두 글자만이 판독될 뿐, 그에 관한 어떠한 정보도 얻을 수 없다. 그나마 발견된 이수 역시 철저하게 파괴된 역사적 상흔을 그대로 안고 있다. 신라의 번영와 쇠락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太宗武烈大王之碑라는 이수의 전액이 뚜렷하게 보임으로써 비로소 그 실체를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아무리 재위시절 위대한 업적을 이룬 왕이라 할지라도 후대의 평가는 냉정할 수밖에 없다. 신라가 독자적으로 삼국을 통일한 것이 아니라 나당연합을 통하여 삼국을 통일한 것이 후대에 비평의 대상이 되어 왔음을 보여주는 일례가 아닐까 한다.비신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추정할 수밖에 없지만, 中禮를 비신의 일부로 가정할 경우 해서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뿐, 대부분의 금석관계서에는 발견된 이수의 전액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다. 大東金石名攷의 ()太宗武烈王陵碑額()조에는 "金仁問篆 辛酉"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외에 東國金石에는 좀더 자세한 기록이 보인다. 慶州志를 인용하여 서악리에 있으며, 김인문이 비문을 썼다고 기록하였다. 아울러 전액은 양각되어 있는데 필획의 끝이 모두 말발굽(馬蹄)처럼 되어 있어 용속(冗俗)하다는 서평을 첨부하였다. 두 기록으로만 본다면 전액이든 비문이든 당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던 김인문이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 이은혁(전주대 한문교육과 겸임교수)

  • 문화재·학술
  • 전북일보
  • 2010.12.01 23:02

익산 왕궁리 유적 물길·북문·건물지 등 추가 발굴

백제 말기에 조성된 익산 왕궁리유적에서 반타원상의 물길에 의해 둘러싸인 왕궁성 후원과 연계된 것으로 추정되는 물길과 북문지, 건물지 등이 발견돼 왕궁리 유적의 연대 추정과 함께 중국과의 문화교류 양상을 살펴볼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주목받고 있다.24일 문화재청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소장 지병목)에 따르면 지난 1989년부터 백제 왕실이 직접 관여한 중요한 유적인 왕궁리유적에 대한 발굴조사를 벌이고 있는 가운데 올해 확장 조사를 실시한 왕궁리 5층석탑 북쪽에 위치한 왕궁리 유적 후원에서 물길이 확인됐다.이 물길은 반타원상의 물길에 의해 둘러싸여 있으며, 후원 공간의 규모는 최대 길이가 240m나 되고 동·서의 너비는 71m 가량에 이르는 것으로 밝혀졌다.북성벽의 중앙에서 약간 동쪽으로 치우친 평탄한 지점에서는 정면 3칸(동서 길이 4.4m), 측면 2칸(남북 폭 3.9m) 규모의 북문지가 발굴됐다이로써 왕궁리 유적에서는 동ㆍ서ㆍ남ㆍ북 모두에 걸쳐 문지(문터)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이와함께 성안으로 들어서는 즉시 물길을 만나게 되며, 이 물길을 건너기 위해 설치한 것으로 보이는 다리의 기초시설도 함께 발견됐다.올해 발견된 유적중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나타난 유구는 후원 공간에서 가장 평탄하고 사방을 조망할 수 있는 높은 곳에 위치한 평면 정사각형의 건물지다.이 건물지는 한변의 길이가 55cm 가량의 네모난 주춧돌을 사용하여 만들어졌고, 건물지 규모는 정면과 측면이 각각 4칸(10m)인 정사각형을 이루고 있다.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올해 실시한 조사에서 발견된 또다른 유물로는 북벽에서 발견된 '대관관사(大官官寺)'글자가 새겨진 기와와 5층석탑 북동편의 민묘 이장 지점에서 확인된 중국청자 조각 등이다.한편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이 건물터가 위치나 규모 등으로 봤을 때 거주 공간이 아니라 의례나 제례 등과 관련된 공간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문화재·학술
  • 장세용
  • 2010.11.25 23:02

부안 '구진마을 생활사박물관' 문 연다

부안문화원(원장 김원철)이 부안 진서면 곰소항 구진마을의 마을길을 개통하고, 생활사박물관을 연다. 한국문화원연합회(회장 최종수)의 '2010 지방문화원 어르신 생활문화 전승 프로그램'에 부안문화원이 선정, 구진마을의 역사를 재조명하게 됐다.구진마을은 수군들의 진영인 검모포가 있었던 곳이다. 고려 충선왕(1년) 때 일본 정벌을 위해 여몽연합군이 제작한 900여 척의 수송전함이 이곳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구진마을은 해방 후 물에 끓여서 만드는 전통 소금인 화염(火鹽)을 생산했던 곳이기도 하다. 마을에는 소금을 굽는 벌막, 바닷물의 염도를 높이는 섯등 등이 남아 있다.부안문화원이 개척한 마을길은 구진마을 입구에서 시작해 구진성터, 당산나무, 구진우물, 간척길, 곰소만 갯벌, 구진마을 생활사박물관, 수송전함을 제작한 곳으로 추정되는 구진 조선소터를 잇는 2㎞ 구간이다. 부안문화원은 마을을 찾는 방문객들이 쉽게 찾아볼 수 있도록 안내판을 설치하고, 마을 어르신들이 직접 해설을 맡도록 하겠다고 밝혔다.생활사박물관은 다소 소박하다. 마을 인근에 버려져 있던 198m²(60평) 규모의 비닐하우스를 리모델링해 주민들의 농기구, 어구 등 생활도구를 전시한다. 특히 곰소만에서만 볼 수 있었던 전통배 꽁댕이배 모형물을 설치, 어촌마을의 모습을 엿볼 수 있도록 했다.김원철 원장은 "구진마을은 부안에서도 잘 모르는 주민들이 많지만,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지역"이라며 "이곳을 명소로 삼기 위한 주민들의 노력에 관심을 가져달라"고 말했다. 생활사박물관 개관식은 30일 오전 11시에 열린다.

  • 문화재·학술
  • 이화정
  • 2010.11.25 23:02

익산 왕궁리 유적서 물길ㆍ문터 확인

백제 말기에 조성된 전북 익산 왕궁리 유적에서굽을 물길이 감돌아 흐르는 대형 후원(後苑) 시설과 북문터 등이 발견됐다. 1989년 이후 익산 왕궁리 유적(사적 제408호)을 발굴조사 중인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소장 지병목)는 올해 조사에서 백제시대 궁성 내부 후원과 연계된 물길 흔적을 확인했다고 24일 밝혔다. 반 타원 형태의 물길로 둘러싸인 후원은 왕궁리 5층 석탑 북쪽 구릉지대에서 발견됐으며, 규모는 남북 길이 약 240m, 동서 너비 71m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북성벽의 중앙에서 약간 동쪽으로 치우친 지점에서는 정면 3칸(길이 4.4m), 측면 2칸(폭 3.9m) 규모의 북문터가 발굴됐다. 이로써 왕궁리 유적에서는 동ㆍ서ㆍ남ㆍ북 모두에 걸쳐 문터가 확인됐다. 또 후원 공간에서 가장 평탄하고 사방을 조망할 수 있는 높은 곳에서는 정면과측면이 각각 4칸(10m)인 정사각형의 건물터도 발견됐다. 연구소는 이 건물터가 위치나 규모 등으로 봤을 때 거주 공간이 아니라 의례나제례 등과 관련된 공간이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올해 조사에서는 또 '대관관사(大官官寺)' 글자가 새겨진 기와가 북벽에서 발견됐으며 5층석탑 북동편의 민묘 이장 지점에서 중국 청자 조각이 나왔다.

  • 문화재·학술
  • 연합
  • 2010.11.24 23:02

[이은혁의 글씨로 만나는 옛 글] (60)충도를 맹서한 임신서기석

일제강점기인 1934년 5월 경북 경주시 현곡면 금장리에 있는 석장사지에서 점판암(粘板巖) 자연석에 글자가 새겨진 좁고 긴 각석이 발견되었다. 새겨진 문장의 첫머리에 壬申이라는 간기가 있으므로 임신서기석이라 명명되었다. 손상되지 않은 원형 그대로 발굴되어 쉽게 명문을 판독할 수 있는 바, 편의상 현대식 한자로 바꾸고 표점을 찍어 전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壬申年六月十六日, 二人幷誓記. 天前誓, 今自三年以後, 忠道執持, 過失无誓. 若此事失, 天大罪得誓. 若國不安大亂世, 可容行誓之. 又別先, 辛未年七月卄二日, 大誓. 詩尙書秋傳倫得, 誓三年.모두 74자로 5행에 걸쳐 가늘고 깊게 새겼다. 대략 크기는 높이 34cm, 넓이 12.5cm, 두께 2cm 정도이다. 문장의 구성은 좁고 긴 돌의 앞면 오른쪽 모서리를 따라 말하듯이 글씨를 새기다 보니, 윗면은 공간이 많이 생겨 행간이 성글고 아랫면은 상대적으로 촘촘하게 배치되었다. 각고 없이 바로 철필로 바로 새겼으며, 문장이 전환되는 4행에서는 의도적으로 띄어 쓴 흔적도 보인다.각석된 문장에 壬申과 辛未라는 간지가 분명히 보이지만, 그것이 어느 시점을 말하는지 단정할 수 있는 근거가 없기 때문에 현재까지 각석의 시기를 확정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발견된 지역이 경주 석장사지이며, 그 내용으로 보아 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대략 임신년에 해당하는 시기는 552년, 612년의 것으로 본다. 그 사료적 가치가 인정되어 2004년 6월에 보물 제1411호로 지정되었다.임신서기석은 작은 돌에 맹서문을 새긴 것이지만 그 내용과 형식이 범상치 않다. 우선 내용면에서 맨 먼저 임신년 6월 16일이라고 구체적인 일자를 기록한 뒤, 두 사람이 함께 하늘 앞에 맹서한다는 내용이 신성함과 비장함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다음에는 그날로부터 3년이라는 기간을 설정하여 충도(忠道)를 집지(執持)하고 과실이 없기를 맹서한다고 새겼다. 그리고는 만약 이 일을 잃으면 하늘에 큰 죄를 얻는다는 것을 맹서한다고 거듭 강조하였다. 여기에서 눈길을 끄는 대목은 3년이라는 기간과 충도이다. 3년이라는 기간이 명확하게 설정된 배경을 충도와 관련하여 생각해볼 때 마치 두 사람이 국가를 상대로 맹서한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즉 단순한 서민의 맹서가 아니라 국가를 위해 충도를 행하겠다는 젊은이의 다짐이다. 그 다음에 보이는 명문에서 그 의도가 보다 명확해진다. 만약 나라가 불안해지고 크게 어지러워지면 세상에 행동으로 나서야 한다는 것을 맹서하고 있다. 앞에서 맹서했던 충도가 국가를 위한 것임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일단 맹서문은 여기에서 끝을 맺는다. 조금의 여백을 둔 뒤 또 별도로 이에 앞서 신미년 7월 22일에 크게 맹서하기를 시(詩), 서(書), 추전(秋傳)을 윤득(倫得)할 것을 맹서하되 3년으로 하였다고 추기하였다. 모두 두 번의 맹서가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시는 시경이며, 서는 서경이고, 추전은 춘추전이며, 윤득은 차례로 터득한다는 뜻이다. 모두 유교경전으로서 맹서한 충도가 유교사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형식면에서 보면 문장의 구성방식이 특이하다. 각석된 문자가 모두 한문이지만 그 문장은 한글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술목 구조의 전통적 한문표기와는 확연히 구별되기 때문에 한글식으로 읽어나가면 바로 뜻이 통한다. 이러한 문장법은 이 각석의 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되며, 한문의 발달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또 명문의 執, 辛, 得자의 체세와 容자의 형태를 눈여겨보아야 한다. / 이은혁(전주대 한문교육과 겸임교수)

  • 문화재·학술
  • 전북일보
  • 2010.11.24 23:02

복원된 전주 삼산리 토제장구서 조선시대 생활상 엿보다

국립전주박물관이 '신수 문화재전'을 열고 있다. 최근 박물관에 들어온 수입품(국가귀속유물)과 토제장구, 잔무늬거울, 청동창, 백자청화문자명호 등 미공개 유물 6점을 일반에 공개한다.전시 유물 중 특히 주목을 끄는 것은 조선시대 15세기 중반에서 16세기 초반에 조성된 유적인 전주 삼산리와 고창 용산리에서 출토된 토제장구이다. 전주 삼산리 토제장구는 조선시대 생활유적에서 확인되었는데 유물의 2/3가 남아 있어 보존처리를 통해 복원되었다. 하지만 고창 용산리 출토 토제장구는 가마터에서 출토되었고, 발견 시 유물의 절반 이상이 없는 상태였다. 남아 있는 부위 만으로는 전체 모습을 추정할 수 없어 복원이 어렵다.장구는 우리나라 전통악기 중 하나로 현재 대부분은 나무로 만들어지지만, 토제장구를 통해 조선시대에는 흙으로도 만들어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백자청화문자명호와 전북지역의 초기철기시대 유적인 완주 갈동에서 발견된 잔무늬거울과 청동창이 함께 전시된다.이영범 국립전주박물관 보존처리 담당자는 "앞으로도 발굴 유물을 비롯한 소중한 문화유산들을 보존·복원하고 전시를 통해 공개함으로써 지역의 문화 중심 기관으로서 역할을 다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 신수문화재전=내년 1월 30일까지 전주박물관 2층 홀

  • 문화재·학술
  • 황주연
  • 2010.11.23 23:02

[일과 사람] "매와 동고동락 30년, 후세 양성 전념할 터"

"매사냥이 유네스코 인류 무형유산 등재를 계기로 전통문화로 널리 보급될 수 있도록 후세 양성에 전념하겠습니다."지난 16일 유네스코 인류 무형유산으로 등재된 매사냥의 기능보유자 박정오씨(69·진안 백운면 백암리)는 이같이 의지를 다졌다.매사냥과 함께 평생을 같이 해 온 박 옹은 "사라져 가는 매사냥이 유네스코 인류 무형유산에 등재됐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 기뻐 사냥을 함께하는 매와 함께 밤을 새우며 자축했다"고 전했다.매사냥이 유네스코 인류 무형유산에 등록된 데에 대한 소감에 대해 그는 "주위에서 사라져 가는 '매사냥이 인류 무형유산에 등록됐다'는 뉴스를 접하고 지금까지 매사냥의 명맥을 유지해 온 나 자신이 큰 영광으로 느끼고, 동시에 막중한 사명감도 갖게 된다"고 말했다.진안의 유일한 '매꾼'인 박 옹은 매사냥의 원조격인 마을 주민 김용기·전영태씨(작고)에게 사냥법을 배워 30여년 동안 명맥을 이어왔는데 지금은 아들 신은씨(43)에게 전수하고 있다."날 짐승을 길들인다는 것은 인내없이는 안됩니다. 매를 산에서 받아 오면 20~25일간은 습관을 들이게 되는데, 경계심을 풀고 유대관계를 가지려고 화장실가는 시간만 제외하곤 24시간 방안에서 날을 새며 매의 일거수 일투족에 관심을 두는 게 가장 어려운 일"이라고 소개했다.박 옹은 "그래도 지금은 장터에 가거나 마을회의 때면 전수자인 아들에게 맡겨놓고 가기 때문에 조금은 수월해졌다"고 옛 일을 회고하면서 "2007년 전북도 지방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매사냥을 널리 보급하고 명맥을 유지하려면 유네스코 인류문화유산 등재를 계기로 국가지정문화재로 승격돼야 한다"면서 그런 날이 오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다.서기태 진안군청 문화예술 담당은 "세계적인 무형유산이 진안에 최초로 등장함에 무한한 자부심이 든다"면서 "이를 잘 보존하는 데 행적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했다.한편 진안군에서 유네스코에 등록된 인류 무형무산은 매사냥의 박 옹이 최초이며, 이번 유네스코 등록을 위해 전북도는 지난 6일 문화재청에 관련자료 등을 첨부, 매사냥의 유네스코 등록을 추진했었다.

  • 문화재·학술
  • 이재문
  • 2010.11.18 23:02

내일 '전북 향토사의 재발견' 학술 대회

전북역사문화학회(회장 나종우 원광대 교수)가 19일 오전 11시 전북도청 중회의실에서 '전북 향토사의 재발견'학술대회를 개최한다.도내 향토사 연구의 활성화를 위해 현장에서 발로뛰고 있는 연구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심도 있는 연구성과를 발표하는 자리다.이날 대회는 나종우 회장의 기조발표 '전북향토사연구의 현황과 과제'를 시작으로 1부와 2부, 종합토론으로 오후 4시까지 이어진다.김종운 부안군청 문화재전문위원은 '부안청자의 발생과 확산', 김선기 원광대박물관 학예연구관은 '익산의 사찰유구를 통해 본 백제문화의 창의성'을 발표하며 '일제강점기 군산지역 불교현황', '남원지역의 불망비로 본 지방관', '정읍매장문화재 발굴성과와 과제', '동리정사 옛모습에 대한 재검토'등의 연구성과도 발표된다.토론자로는 한성욱 한국문화유산연구원 학예실장, 이문현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관, 최규호 남원시청 학예연구사 백덕규 김제시청 학예연구사, 노기환 김종철 미륵사지유물전시관 학예연구사가 참여한다.나종우 회장은 "우리지역은 소중한 문화적 자원이 풍부한 데도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며 "향토사 연구는 문화자원의 스토링 텔링 개발에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 문화재·학술
  • 황주연
  • 2010.11.18 23:02

부안 죽막동유적지, 세계문화유산 잠재력 갖췄다

부안 죽막동 유적지가 동아시아 해양제사 유적지로서 세계문화유산의 잠재력을 갖췄다는 평가가 나왔다. 이에 따라 죽막동 유적지를 세계문화유산 잠정 목록에 등재하기 위한 학계의 노력이 선행돼야 한다는 주장에 힘이 실렸다.12일 부안군청에서 '동아시아 해양실크로드와 부안'을 주제로 열린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세미나에서 임효재 동아시아고고학회장(서울대 명예교수)은 "동아시아 제사 유적지 중 유일하게 남은 것은 죽막동과 일본 오키노시마가 유일하다"며 "일본 오키노시마 유적지가 세계문화유산 잠정 목록에 올려진 만큼 우리도 이를 위한 준비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죽막동 유적지는 국립전주박물관이 1992년 발굴 조사한 우리나라 최초의 제사 유적지로 백제를 비롯해 대가야, 중국 남조의 제사유물 800여 점이 출토, 중국과 일본을 잇는 해상 교통의 요충지로 평가받았다. 윤명철 동국대 교수도 "죽막동 유적지가 있는 부안은 중국 강남에서 들어오는 길, 제주도에서 올라오는 길, 한반도 남부 동안에서 오는 길, 일본열도에서 오는 길이 만나는 지점이었다"며 "죽막동 유적지가 동아시아 해양 실크로드의 중심지였다는 점에서 이에 대한 재조명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임효재 회장은 이어 "오키노시마는 작은 파편까지 추려 8만여 점에 이르는 유물들을 국보급으로 지정한 반면 죽막동은 전체 유적지 중 1/10만 발굴된 상태"라며 "국내·외 학계를 중심으로 죽막동 가치를 재조명하면서, 이를 위한 교육적 시설도 갖춰야 한다"고 제안했다.송화섭 전주대 교수는 "항해 보호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당제의 역사는 백제 죽막동 해양 제사의 전통이 현재까지 내려온 것으로 보인다"며 "죽막동에서 출토된 인형이 용왕굿의 띠배보내기 의식에서 봉헌물로 바쳐지는 허세비와 흡사한 것을 볼 때 죽막동은 해양신앙의 관점에서도 가치가 높다"고 말했다. 부안군이 주최하고, 전주대 산학협력단과 변산해양문화포럼 주관한 이번 세미나는 심승구 한국체육대 교수, 곽장근 군산대 교수, 조상진 전북일보 논설위원, 이혜은 동국대 교수가 토론자로 참여했다.

  • 문화재·학술
  • 이화정
  • 2010.11.15 23:02

조소녀 명창, 고창군 '동리대상' 수상

(사)동리문화사업회는 11일 동리대상 수상자 선정 심의위원회를 열고 40평생을 판소리 중흥과 대중화에 헌신한 조소녀 명창을 수상자로 선정했다.조소녀 명창은 1941년 충청남도 아산 출생으로, 첫 스승인 박초월 명창에게 사사했으나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학습을 중단, 스물아홉에 오정숙 명창과 이일주 명창에게 본격적으로 소리공부를 하였다.끊임없는 노력으로 '하늘도 뚫을 것 같다'는 평판을 들을 만큼 소리 공력을 쌓아가지만 목에 이상이 생겨 일곱 번의 성대 결절 수술을 하였다. 그로 인해 그는 무대 활동보다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로 소리에 대한 꿈과 열정을 풀어냈으며, 그의 문하에서 공부한 200여명의 제자들은 국악계의 든든한 재목으로 성장했다.그는 1984년 제2회 남도예술제 판소리 특장부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면서 명창 반열에 올랐다. 그후 전라북도 문화상, KBS 국악대상을 수상 하였으며, 1996년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2호 판소리 춘향가 예능보유자로 지정됐다. 또 (사)완산국악제전진흥회를 설립하고 이사장에 취임, 올해 15회째 완산전국국악대제전을 개최했다.한편 동리대상은 고창군과 (사)동리문화사업회가 동리 신재효 선생의 문화예술사적 업적을 계승·발전시키고자 판소리 진흥에 업적을 남긴 연창자, 고수, 판소리 연구가 중 한 분을 선정, 매년 상장과 부상으로 일천오백만원을 수여해 오고 있는 우리나라 판소리 부문 최고 권위의 시상이다.시상식은 11월 19일 오후 2시 동리국악당에서 열린다.

  • 문화재·학술
  • 김성규
  • 2010.11.15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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