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end news
한국 현대시조의 중흥을 이룩한 시조시인이자 국문학자인 가람 이병기 선생(1891∼1968).그러나 가람 선생이 태어나고 말년을 보낸 익산시 여산면 원수리 생가는 전라북도 기념물 제6호로 지정돼 있음에도 불구하고 관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어 폐가나 다름 없었다. 특히 가람 선생의 문학관이 없는 현실에서 생가에서 조차 선생의 문학적 업적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은 큰 문제로 지적됐다.지난 10일 방문한 가람 이병기 생가는 사람의 손길이 끊긴 지 오래였다. 한 쪽 담장은 무너지기 시작해 장마철 붕괴를 걱정케 했으며, 흙벽에 발라놓은 백회는 일부가 떨어져 나간 상태였다. 마루와 모정 바닥은 뜯어져 있었고, 건물 곳곳에는 거미줄과 곤충 사체가 흉물스럽게 방치되고 있었다. 장독이 깨져있는 등 생가 내 물품 관리도 소홀했고, 목조건물임에도 불구하고 소화기 점검 및 정비일자는 2006년 7월에 머물러 있었다.마당의 풀들은 말라죽고, 가람 생가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뒷뜰 대나무숲은 지저분하게 자라 손질이 필요했다. 생가 앞 벤치에서는 등산객들이 술을 마시고 있었으며, 주차장에는 썩은 양파들이 나뒹굴고 있어 선비의 정결함을 느낄 수 없었다.방명록으로 내놓은 학생용 연습장은 낙서장이 된 지 오래. 어린 아이들이 장난스롭게 써놓은 욕설이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방명록에는 생가의 보수와 관리에 신경 써달라는 방문객들의 목소리가 이어졌지만, 전혀 반영되지 않고 있었다.익산시 관계자는 "도 예산 지원이 줄어들어 올해는 지붕 개량 사업도 예년보다 적은 예산으로 할 수 밖에 없었다"며 "내년에 반드시 예산을 확보해 전반적으로 생가를 보수하겠다"고 말했다.가람 선생 생가에 대한 관리 소홀 문제는 이미 몇 차례 언론을 통해 지적된 바 있다. 특히 지난 5월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예술교육대회 방문단이 가람 선생 생가를 방문하려고 했지만, 생가가 초라하다는 이유로 방문 계획을 취소한 것으로 알려졌다.이택회 익산문인협회 회장은 "가람 선생 생가는 관리인이 따로 없어 가람기념사업회 회원들이 애정을 가지고 보살피고 있는 정도"라며 "관리가 소홀한 정도가 아니라 엉망이라고 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또한 생가에서 가람 선생의 문학성을 알 수 있는 자료라고는 '비2'가 인쇄된 현수막과 동상 옆에 세워진 '고향으로 돌아가자' 시비 뿐이었다. 이회장은 "해설사도 배치돼 있지 않아 누가 찾아와도 설명해 줄 사람이 없다"며 "고창 서정주나 군산 채만식 등 친일 논란이 일고 있는 문인들까지 문학관이 세워진 마당에 현대시조의 횃불을 밝히고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까지 치른 가람 선생의 문학관이 없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고 비판했다.이동희 전북문인협회장은 "가람 선생은 시조 문학의 중흥을 이뤄낸 현격한 공로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조명이 소홀했다"며 "지역사회의 문화적 자산이자 자랑으로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문학관 건립을 서둘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간문화재 35명이 자신들이 보유한 기능과 예능을 일반에 선보이는 시연 행사가 열린다.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이사장 김홍렬)은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 35명의 기능ㆍ예능 합동공개행사인 '2010 여름, 천공(天工)을 만나다'를 문화재청(청장 이건무) 후원으로 14~26일 서울 인사동 인사아트센터에서 개최한다고 12일 밝혔다. 합동공개행사란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들과 제자들이 1년에 한 번 자신들의 기능과 예능을 일반에 선보이는 일종의 의무 행사로, 2008년부터 진행돼온 것이지만 이번에는 소수 보유자가 모여 시연했던 그간의 행사와 달리 35명이 참여해 대규모로 열린다.매듭장, 소목장, 옹기장, 악기장, 불화장(佛畵匠), 나전장, 단청장 등 공예분야 26개 종목 보유자들의 시연과 이들이 만든 공예품 전시도 함께 이뤄진다. 특히 올해 새로 기능 보유자로 인정된 박명배(소목장), 김일만ㆍ정윤석(옹기장)의 시연도 볼 수 있다. 김홍렬 재단 이사장은 이날 서울 필동 한국의집에서 연 기자간담회에서 "26개 종목이 총망라돼 35명의 인간문화재가 한꺼번에 모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이번 행사는 문화재청과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이 전통문화 중에서 무형문화재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다는 징후"라고 말했다.김 이사장은 "일제강점기와 여러 동란을 거친 가운데서도 우리 전통문화가 사라지지 않고 면면히 이어온 것은 인간문화재 선생님들의 정열과 땀, 예지가 있었기 때문"이라며 "이번 행사를 통해 무형문화재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커지길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시연은 매일 오전 10~12시와 오후 2~4시에 6~7개 종목이 순서대로 펼쳐지며 휴일 없이 진행된다. 자세한 시연 일정은 한국문화재보호재단 홈페이지(www.chf.or.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입장료는 없다.
전북대학교(총장 서거석)가 '분청사기인화문대접' 등 기증받은 조선시대 유물 4점을 9일 공개했다.유물 기증자는 전북대 도서관에 근무하고 있는 조수경씨로, 집안에서 대대로 전해져 오던 것을 가족회의를 통해 대학 박물관에 기증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씨는 "8월 초 준공을 앞두고 있는 신축 전북대박물관에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기증을 결정했다"고 말했다.분청사기는 15세기 초에 발전하기 시작해 16세기 중반경에 소멸한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도자기로, 조선의 소박한 이미지를 잘 간직하고 있다. 조씨가 기증한 분청사기는 인화문(印花文)이 그릇 전체에 시문돼 있는 대접으로, 일부가 파손돼 결실된 부분이 있다. 인화분청은 왕실용(王室用)이나 관청용(官廳用)으로 많이 제작됐는데, 굽 안쪽이나 그릇 안 바닥에 관청, 생산지, 장인 등의 글씨를 새기는 예가 많았다. 그러나 기증된 유물에는 글씨가 없어 다른 용도로 쓰였을 가능성도 있다. 또다른 기증유물은 문양 없이 내외면에 백토가 입혀진 대접이다.전북대 박물관은 기증받은 유물을 체계적으로 보존처리해 전시와 학술연구에 적극 활용할 예정이다. 특히 신축박물관에 기증유물실을 마련, 기증자의 뜻과 유물 기증의 의미를 널리 알릴 계획이다.
매장문화재 보관 및 관리청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일원화하려는 움직임에 대해 전북문화원연합회(회장 이복웅)가 반발하고 나섰다.전북문화원연합회는 6일 열린 도내 문화원장 회의에서 "정부가 '매장문화재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 시행령 제정(안)'을 입법예고하고, 국가 귀속 문화재 보호·관리청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하려는 시대착오적인 시도를 하고 있다"며 이에 대한 우려를 담은 결의문을 채택, 정부 관련부처에 전달했다고 밝혔다.도내 문화원장들은 "매장문화재는 그 성격상 출토된 지역에서 보관·관리·전시되는 것이 원칙이며, 또한 유물이 출토된 현지의 박물관 및 전시관이 시설 및 인력 등 모든 제반여건을 갖추고 있다"며 "특히 전라북도는 도·시·군마다 공립박물관이 적재적소에 소재하고 있어 보관·관리 능력을 충분히 보유하고 있다는 평가를 박도 있다"고 강조했다.이들은 "발견매장문화재의 보관·관리청을 국립박물관으로 일원화하려는 것은 문화재의 관리권을 독점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문화의 지방분권화에 역행하는 처사로, 궁극적으로는 지역문화 발전을 저해하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현재 입법예고된 '매장문화재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 시행령 제정(안)'을 즉각 폐기하라고 촉구했다.
민주당 조배숙 의원과 이춘석 의원은 6일 국회의원회관 간담회의실에서 '문화재 보존·관리를 위한 올바른 입법 방향'을 주제로 간담회를 공동주최했다. 이날 간담회는 지난달 문화재청이 입법예고한 매장문화재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 시행령 제정안에 담긴 '매장문화재의 보관·관리청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일원화한다'는 조항을 둘러싼 논란의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 마련됐다.이날 간담회에는 문화연대 문화유산위원장인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 황평우 소장, 문화재청 최재혁 사무관, 중앙박물관 윤성용 연구관, 전라북도문화재위원장인 원광대 나종우 교수 등이 시행령 개정을 놓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특히 최재혁 사무관과 윤성용 연구관은 "국가귀속문화재의 체계적인 관리와 책임성의 명확화를 위해 일원화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힌 반면 황평우 소장과 나종우 교수는 "문화연대 등 시민단체와 지역사회를 중심으로 출토유물의 현지성을 살리고 문화자원의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고 맞서 이목을 끌었다.조배숙 의원은 "국립중앙박물관의 유물관리 일원화가 지방분권화 시대에 역행하는 것이 아닌지 우려감이 크다"면서 "이번 간담회를 계기로 매장문화재 보관·관리의 국립중앙박물관 일원화 시도를 재검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조 의원은 또 "문화재청 항의방문, 공청회 개최 등 올바른 입법을 위해 다양한 경로를 통한 후속조치를 취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1946년 경북 경주시 노서동 신라고분 140호에서 각종 철기와 토기, 용과 봉황의 무늬가 있는 대도(大刀)와 함께 작은 청동합 하나가 출토되었다. 청동합의 동그란 밑면에는 4자씩 4행으로 '乙卯年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우十'이라는 글귀가 양각되어 있다. 비록 16자에 불과하지만 그 의미는 자못 크다. 첫째, 을묘년은 서기 415년으로 광개토대왕비가 제작된 이듬해에 해당한다. 그런데 고구려에서 제조된 것으로 보이는 청동합이 어떻게 신라지역의 고분에 묻혔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둘째, 왕의 시호를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이라 하였는데 이는 비문에서는 '國岡上廣開土平安好太王'이라 하고, 모두루묘지에서는 '國岡上大開土地好太聖王'이라 한 것과 비교된다. 의미상 큰 차이는 없지만 눈여겨볼 대목이다. 셋째, 마지막의 '十'이라는 숫자는 호우가 여러 개임을 추측하게 하는데 아직까지 추가로 발견된 것이 없다는 점이 이상하다. 넷째, 글자의 상단 여백에 '井'자 모양의 표시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최근 도교와 관련된 벽사(僻邪)의 상징이라는 연구가설이 제시되었으나 확실하지 않다. 이처럼 청동호우는 짧은 명문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의문을 내포하고 있다.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명문의 윗 부분은 거의 나란히 맞추고 그로 인해 생기는 공간에 '井'자 모양을 표시하였으며, 아래 부분은 원형의 형태에 따라 높이를 달리하였다. 호우에 양각된 명문은 비문의 서체와 매우 흡사하며, 특이하게 쓰여진 '岡'자와 '開'자도 핍진하다. 이처럼 같은 시기의 석비와 청동에 새겨진 명문의 자형이 동일하다는 점에서 당시 고구려의 공식적인 서체라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비문과 호우가 만들어진 시기는 중국의 동진시대에 해당하며 정교한 소해(小楷)와 유려한 행초서가 유행할 때라는 것을 상기한다면, 중국 문화에 동화되지 않은 독자적인 서풍이 이미 고구려에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의 상징으로 지칭되는 호태왕비나 신라에 전해진 청동호우는 고구려의 대외적 위상과 문화적 독자성을 보여주는 귀중한 유물이다.호태왕비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사실상 한반도를 지배하고 있던 고구려는 당시 군사적으로 신라를 돕고 있었다. 고구려의 청동호우가 신라의 고분에 부장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으며, 거기에는 무슨 사연을 담겨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김용준이 제기한 흥미로운 설이 있어 요약 소개한다. 명문의 을묘년은 장수왕 즉위 3년으로 신라 실성이사금(實聖泥師今) 즉위 14년에 해당한다. 이전에 대외견제의 일환으로 고구려가 신라에게 볼모를 요구하자 내물왕은 대서지(大西知)의 아들 실성을 고구려에 보냈다. 실성은 10년 만에 환국하여 왕위에 오른 뒤, 마치 보복하듯 10세 밖에 되지 않은 내물왕의 셋째 아들 미사흔(未斯欣)을 왜에 볼모로 보내고, 11년 뒤 다시 내물왕의 둘째 아들 복호(卜好)를 고구려에 보냈다. 이 해에 광개토대왕이 승하하였다. 고구려는 장수왕 2년(갑인)에 태왕의 능을 통구로 천장(遷葬)하고 광개토호태왕비를 세웠으며, 이듬해(을묘) 청동호우를 주조하였다. 실성은 또다시 내물왕의 첫째 왕자인 눌지를 고구려에 보내 죽이려 했으나 실패하고 도리어 그에게 시해되었다. 왕권을 잡은 눌지는 먼저 볼모로 간 두 동생을 구하고자 하였는데, 이를 자원한 박제상(朴堤上)의 도움으로 418년(장수왕 6년) 마침내 복호가 환국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로 미루어, 호우를 신라로 가져온 인물은 복호일 개연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호우가 발견된 무덤의 주인 역시 복호로 추정하고 있다.당시의 대외적 관계로 볼 때 고구려는 대국이었으므로 7년 간 볼모로 잡혀있다 환국하는 복호에게 고구려를 각인시킬 수 있는 하나의 상징물로 하사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호우는 고구려왕의 시호가 새겨진 청동제기라는 점에서 다분히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호우는 비록 작지만 그 역사적 의미와 서예사적 가치는 이처럼 심대하다. /이은혁(전주대학교 한문교육과 겸임교수)
문화재청(청장 이건무)은 5일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가야산에 있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86호 '성주 법수사지 삼층석탑'을 국가지정문화재인 보물 1656호로 승격지정 고시했다고 밝혔다. 이 석탑은 신라 애장왕(재위 800~806) 때 창건된 법수사지 내에 있으며, 가야산 계곡에 돌을 쌓아 만든 단에 자리 잡고 있다. 높이는 5.8m이며, 상ㆍ하 2층 기단에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으로, 노반(路盤. 사리탑의 맨 꼭대기 지붕 위에 놓여 상륜부를 받치는 부재) 이상의 상륜부는 남아있지 않으나 보존 상태는 대체로 양호하다.탑의 규모가 작고 하층 기단이 높으며 안상(眼象. 둥근 모양의 무늬)이 음각된 점 등 9세기 후반 석탑의 특징을 일부 갖추고 있지만, 옥개석(석탑이나 석등 따위의 위에 지붕처럼 덮는 돌)의 받침이 5단인 점 등은 전형적인 신라 석탑의 모습을 보이고 있어 사찰 창건 시기인 9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문화재청은 설명했다. 또,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안동 옥동 삼층석탑과 인제 한계사지 남삼층석탑 등의 하층 기단에서도 3개의 안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지역적인 특성도 반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청은 이 석탑이 통일신라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우수한 조형미를 갖추고 있을 뿐 아니라 주변 경관과도 잘 어울리는 위치에 있다는 점 등 역사적, 예술적, 학술적 가치를 고려해 보물로 지정했다고 설명했다.
정부가 한 차례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신청하려다 다음 기회를 노리며 신청 자체를 자진 철회한 '남해안 지역 백악기 공룡 해안'의 세계유산 등재에 '적신호'가 켜졌다. 오는 25일 개막해 다음달 3일까지 브라질 수도 브라질리아에서 열리는 올해 제34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토의 안건 보고서에 '남해안 백악기 공룡 해안'과 유사한 성격인 다른 지역에 대해 '등재불가'(Not Recommended for Inscription) 의견이 나온 것. 5일 현재 유네스코 홈페이지를 통해서도 공개 중인 이번 세계유산위원회 보고서를 보면 유네스코 자문기구로 세계자연유산 실사를 담당한 세계자연보전연맹(IUCN)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공동 신청한 이베리아 반도 공룡 발자국 화석지에 대해 '등재불가' 의견을 냈다.이러한 IUCN 의견은 권고에 지나지 않지만, 세계유산위원회가 이에서 벗어나는 결정을 내린 적이 거의 없다는 점에서 이 공룡 발자국 화석지가 세계유산에 등재될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으로 관측된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이베리아반도 공룡발자국 화석지는 이전에 이미 한 차례 등재를 시도했다는 점과 화석 성격 또한 (우리와)비슷해 그 결과를 우리로서도 주시하고 있었는데 안 좋은 소식이 전해졌다"고 말했다. 한국은 조선왕릉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작년 스페인 세비야 제33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전남과 경남 일대 백악기 공룡발자국 화석지를 세계자연유산에 등재하려 했지만 IUCN이 등재불가 판정을 하는 바람에 회의 개막 직전에 등재 신청을 철회한 바 있다.유네스코는 같은 유산에 대한 두 번 이상의 등재신청을 불허한다. 하지만, 이베리아반도의 공룡발자국 화석에 대한 등재불가 판정을 반드시 비관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는 반론도 나온다. 한국백악기공룡해안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추진단 소장인 허민 전남대 지구환경과학부 교수는 "IUCN에서 여전히 공룡발자국 화석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면서 "오히려 이번 일을 계기로 한국과 스페인ㆍ포르투갈이 공동으로 공룡화석 발자국에 대한 공동 등재신청을 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고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꼭 20년이다. 공사판이 아닌 날이 단 하루도 없었다. 요즘도 공사가 한창이다. 경술국치 100년을 기념해 오는 8월15일 모습을 드러낼 광화문 복원 공사가 마무리되면 경복궁은 1990년 이후 헐떡이며 달린 지난 20년을 뒤로 하고 긴 휴식에 들어간다. 조선왕조를 개창한 태조 이성계 시대 그 법궁(法宮)으로 건립된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 완전히 불타 내려앉아 푸성귀 무성한 황무지로 변했다가 대원군 집권 시대인 고종시대에 이르러서야 중건됐다. 하지만, 조선을 계승한 대한제국이 패망하면서 경복궁은 다시금 위엄을 잃어버리고 황폐일로를 걷게 됐다. 이런 경복궁이 마침내 광화문 복원을 정점으로 새 단장을 하고 늦어도 9월이면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문화재청 박영근 문화재활용국장은 1일 "(경복궁 경내에 있는) 국립민속박물관 이전 문제가 남아 있지만,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므로 경복궁 복원은 광화문 완공과 더불어 사실상 마무리된다고 보아도 좋다"고 말했다. 경복궁 복원 20개년 계획은 공식적으로 1990년에 시작했다. 애초 2009년 마무리될 예정이던 이 사업은 총예산 1천789억원을 투입해 강녕전을 비롯한 93개동 3천250평을 복원한다는 것이다. 순차적 사업진행을 위해 정부는 복원 권역을 구분했다. 이에 따라 1990-1995년에는 왕과 왕비의 일상 생활공간인 침전(寢殿) 권역 사업을 마무리했고, 1994-1999년에는 세자를 위한 공간인 동궁(東宮) 권역 복원사업을 끝냈다. 1996-2001년에는 근정전 전면인 흥례문(興禮門) 권역을 복원했으며 1997-2005년에는 궁내 북서쪽에 있는 제례 공간인 태원전(泰元殿) 권역을 마쳤고, 2001년 이후에는 광화문 및 기타 권역에 대한 복원사업을 벌였다.이런 복원사업을 통해 경복궁은 1990년 당시 건물 기준 36개동 2천957평이었지만 이제 129개동 6천207평을 갖추게 됨으로써 고종시대 중건 당시 330여개동, 약 1만5천600평의 40%가량 수준에 도달하게 된다. 이 기간에 근정전은 새 옷을 갈아입었고, 명성황후가 시해된 공간으로 유명한 건청궁(乾淸宮)도 복원됐다. 따라서 올해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경복궁 20년 복원 계획은 고종시대 제1차 중건을 잇는 제2차 중건에 비견할 만하다. 이런 작업을 토대로 문화재청은 서울을 유네스코 역사문화도시로 등재하는 작업에 본격적으로 나설 계획이다.
모두루묘지(牟頭婁墓誌)는 1935년 광개토호태왕비와 태왕릉이 있는 중국 길림성 집안현 동북쪽의 언덕 하양어두(下羊魚頭)의 고분 내에서 발견되었다. 고분은 석실로 이루어져 있으며 전실(前室)과 주실(主室)로 나뉘어져 있는데, 모두루묘지는 전실의 정면 위쪽에 길게 회벽을 바른 위에 쓰여져 있다. 가로와 세로로 계선을 긋고 80행 800여자에 달하는 내용을 묵서하였으나 결락된 부분이 많아 현재 판독할 수 있는 글자는 250여 자에 불과하다.묘지의 일반적인 구성원칙에 따라 '大使者牟頭婁'라는 제하에 "하백의 손자이시요 해와 달의 아들이신 추모성왕께서는 본디 북부여로부터 나오셨다."는 내용으로 시작하는데, 고구려의 건국 신화가 실려 있는 광개토호태왕비의 내용과 일맥상통한다. 이후로 결락된 틈으로 보이는 비문의 내용은 모두루의 선조가 북부여에서부터 (추모)성왕을 따르며 반역사건을 진압한 것을 계기로 그의 노객(奴客)이 되었고, 고국원왕으로 추정되는 국강상성태왕 때에는 북부여를 침입한 북방의 선비족을 물리치는 등 전공을 세워 대대로 관은을 입은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묘지의 당사자인 모두루는 광개토대왕 때에 선조의 공에 힘입어 북부여 수사(守事)로 파견되었으며, 이 곳에서 광개토대왕의 부음소식을 듣고 애통해 하였음을 적고 있다. 이로써 모두루는 광개토대왕 시절 즉, 5세기 전반에 생존하며 북부여의 지방관으로 활동하였음을 알 수 있다.또 묘지에서 왕의 호칭을 '鄒牟聖王' '國岡上大開土地好太聖王' 등 공통적으로 성왕(聖王)이라 칭하고 있는 점도 흥미롭다. 이 묘지를 통해 4~5세기 고구려 왕권과 그에 대한 도전의 양상, 그리고 지방통치와 씨족 계승의식 등을 살필 수 있다.또 하나 주목을 끄는 것은 묘지가 묵서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5세기 전반기의 묵흔을 오늘날 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경이로운 일이지만, 일견 그 서체면에서 볼 때에도 광개토호태왕비와는 전혀 다른 필치를 보이고 있어 더욱 신비하게 느껴진다. 서체에 대한 일반적인 평을 살펴보면, 당시 고구려에서 상용되었던 것으로 예서의 필법이 잔존해 있는 해서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비문과 같은 금석문이 아니고 실제로 쓰여진 묵서라는 점에서 엄격한 형식적 규율보다는 자유롭게 서사된 느낌이 강하며 개성적인 필치가 많이 가미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고구려의 비에서 나타나는 질박함과는 달리 날렵하고 생동감 넘치는 거침없는 운필은 전혀 망설임이 없다. 이미 그 글씨에 일정한 체의 격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체격은 해서라기보다는 예서에 가까우며 예서 중에서도 행기를 많이 띠고 있는 간백(簡帛) 문자를 연상케 한다. 필속의 느낌이나 파책에서 급격하게 평포(平鋪)를 이루는 것, 생략된 필획을 사용하고 있는 것들이 그렇다.여기에서 고대사료들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이 있다. 고대사를 연구할 때 현재 남아있는 비문 중심으로 연구할 경우 자칫 편견에 빠질 염려가 있다는 점이다. 고대사료의 발굴은 그 역사적인 가치를 떠나 문화사적인 면에서도 충분히 검토되어야 한다. 모두루묘지와 같은 묵서 묘지는 그가 일개 지방관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초월하여 강한 민족적 자긍심을 전제하고, 자신의 씨족에 대해서도 큰 자부심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씨족적 자부심이 민족적 자긍심을 전제로 한 것임을 염두에 둔다면, 모두루묘지는 고구려인들의 민족적 의식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며, 또 그 기상을 여과 없는 생동감 넘치는 필치로 담아내고 있다. 모두루묘지 묵서는 고구려인의 예술적 기질을 유감 없이 드러낸 귀중한 1차 자료인 것이다./이은혁(전주대학교 한문교육과 겸임교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릉의능역에 대한 복원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문화재청은 조선 20대 경종과 그의 계비 선의왕후 어씨의 능인 의릉(懿陵.사적204호) 복원 사업을 세계유산 등재 1주년인 27일 시작했다고 28일 밝혔다. 이 사업은 세계유산등재 당시 유네스코가 권고한 '훼손된 능역의 원형 보전'을적극적으로 이행하기 위한 것이다. 서울 성북구 석관동의 의릉 능역은 1960년대 중앙정보부(지금의 국가정보원) 청사가 들어서면서 여러 건물이 세워지고 연못ㆍ운동장 등도 만들어져 경관이 크게 훼손됐다. 문화재청은 중앙정보부 청사 건립 이전의 지형 자료를 확보하고 전주 이씨 왕실족보에 해당하는 '선원보감(璿源寶鑑)'을 통해 훼손 이전의 능역 경관도 확인했다. 이에 따라 능에서 좌청룡 지역에 해당하는 천장산의 지형과 수계(水界) 등을 원래대로 복원하고 건물 조성으로 단절된 녹지를 연결하는 등 풍수지리적 길지(吉地)의 모습을 되찾게 될 전망이다. 또 흙 4만8천t을 쌓아 변형ㆍ훼손된 산자락을 복원하고 능침(陵寢) 주변의 외래수종을 제거하면서 대신 소나무 등 전통 수종을 심는 작업도 진행된다. 복원은 2012년 완료를 목표로 한다.
지역 미술인들을 중심으로 시민들의 다양한 문화욕구 충족을 위해 전주시립미술관이 건립돼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23일 '전주시립미술관 필요성과 바람직한 건립 방안'을 주제로 열린 마당수요포럼에서 전주시립미술관 마련은 미술인들의 염원이기도 하지만, 일반 시민들의 문화 갈증을 풀어주기 위해서도 필요하다는 의견이 주를 이뤘다. 이영욱 전주대 도시환경미술학과 교수는 "전주는 문화를 기반으로 한 경쟁력이 있는 도시지만 전통문화중심도시에 매여 젊은층의 창의적이고 생동감 있는 문화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며 "문화다양성을 충족시키는 공간에 대한 대안으로 미술관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다만 전라북도에 미술관이 있으니 전주시에도 미술관이 있어야 한다는 당위론은 위험하며, 전북미술이 시민들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키고 있는가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지적하면서 다양한 실험을 해볼 수 있는 문화창작발전소도 바람직할 것 같다고 덧붙였다.김삼열 전주미협 회장은 "한옥마을은 소프트웨어가 없다는 지적을 받고 있고, 구도심은 자꾸 쇠락해가고 있다"며 "전주시가 한옥마을 인근 구도심 건물(구 도청사)을 리모델링 해 미술관을 만들면 새로운 문화공간의 탄생으로 한옥마을과 구도심이 서로 발전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주시가 보유하고 있는 구도심 내 유휴공간을 리모델링 해 분관 형태의 미술관을 곳곳에 마련하는 것도 시민들의 문화향수권을 넓히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진창윤 전북민예총 회장은 "1970년대 이후부터 전북미술은 침체기"라며 "전주시립미술관이 문화의 허브 역할을 할 수 있는 구심점으로 만들어지면 전북미술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앞서 미술관이 작가와 시민들의 징검다리 역할을 제대로 하려면 운영주체에 대한 고민이 선행돼야 한다고 말했다.사회를 맡은 이흥재 전북도립미술관장은 "전북도립미술관이 완주에 있다 보니 완산구(평화동·효자동·삼천동) 시민들이 주로 방문한다"며 "전주시립미술관이 전주 시내에 마련되면 전북도립미술관을 보완하는 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1979년 4월 단국대학교 학술조사단에 의해 충청북도 중원군 가전면 용전리 입석(立石) 부락 입구에서 하나의 고비가 발견되었다. 입석은 비가 서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이다. 이와 비슷한 사례가 전북지역에도 있는데, 필자가 지난 2005년에 김제지역의 명비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만경의 입석산(立石山)에 송일중(宋日中)의 글씨가 새겨진 돌이 있다는 기록을 보고 탐방하였는데, 산 정상의 집채만한 거대한 자연석에 행서 필적이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하여 이를 탁본 전시한 적이 있다. 이곳의 지명도 그런 예이다. 학계에서는 발견된 비의 제액이 확실치 않으므로 발견된 지역의 이름을 붙여 '중원고구려비'라 명명하였다. 국내에서 발견된 유일한 고구려비라는 역사적 가치로 인하여 국보 205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203cm, 너비 55cm의 자연석을 다듬어 전면과 좌우측면에서 문자를 새긴 흔적이 보이는데 마모가 심하여 해독이 어렵다. 다만 高麗大王, 大使者, 大兄 등 고구려 관등이 보이는 것을 근거로 고구려가 중원을 지배한 5세기 무렵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구려 광개토호태왕비와 더불어 고구려사를 연구하는 데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비의 발견 이후 비문을 해독하면서 입비의 시기와 그 내용에 대하여 서로 다른 의견들이 제시되었다. 비문 해독의 문제는 그 내용이 이미 밝혀진 역사적인 사실과 부합해야 하고, 새로 밝혀지는 내용들은 고대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되므로 각자의 설들은 그때마다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이 논란들은 아직까지 확정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입비설과 관련하여 가장 주목을 받았던 부분은 전면부에 보이는 '十二月卄三日甲寅'이라는 내용이었다. 12월 23일이 어느 해를 가리키며, 또 간지가 갑인일에 해당하는 때는 언제인지를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여러 설들이 제시되었지만 그 중에서 서기 480년일 것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이전에 언급한 바와 같이 고대사처럼 논란이 많은 부분은 개인에 의한 단편적 연구에 의지하기보다는 애초부터 국가적 차원에서 역량 있는 학자들을 총동원하여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방법으로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중원고구려비는 한반도에서 발견된 유일한 고구려비라는 점에서 그 역사적 가치를 더한다. '5월에 高麗大王 上王公와 新羅 寐錦은 세세토록 형제같이 지내기를 원하여…'라는 구절에서 민족적 동질성을 강조하는 대목을 엿볼 수 있고, 고구려가 신라를 '東夷'로 칭하면서 의복을 하사했다는 내용에서는 고구려가 신라의 종주국으로 자리하고 있음을 확인해주는 대목이다. 이처럼 5세기 고구려와 신라와의 관계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돌의 형식으로 보아 아직 비의 형식이 정형화되기 이전의 것으로 4면으로 다듬기는 하였지만 자연석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글씨는 질박한 고예풍의 필획을 느낄 수 있으나 글자의 우측이 올라간 우견서의 형태를 보이고 있고, 자형이 해서의 결자 방식과 유사한 점으로 미루어 광개토호태왕비보다 해서화된 느낌이 든다. 광개토호태왕비의 서체와 같은 장중한 맛은 부족하지만 서체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흥미로운 것은 점제현신사비로부터 광개토호태왕비, 중원고구려비, 신라시대의 울진봉평비, 창녕진흥왕순수비에 이르기까지의 고대의 비들은 특정한 서체로 확정하기 모호한 자형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필획의 질박함과 결구의 소박함은 고졸미를 자아내어 토속적인 냄새를 물씬 풍긴다. 이전에도 우리 민족의 고유서체를 운위한 적이 있지만 고대의 석각문자에서 느껴지는 자연스러움은 무엇보다도 자연과의 합일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형식을 매우 중시하는 후대의 비들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이은혁/전주대학교 한문교육과 겸임교수)
지금까지 살펴본 광개토호태왕비에 관한 내용은 오히려 국부적인 문제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비문의 일부 내용에 천착할 것이 아니라 비문 전체에 담긴 고구려의 상징성을 조망하는 일이다. 여기에 또 하나 덧붙여야 할 것은 비문 서체에 대한 미학적 평가이다. 실상 100여 년에 걸친 종래의 연구결과를 검토해 보면 비문의 논쟁처에 대한 첨예한 의견들을 제시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어 정작 고구려의 상징성은 잘 드러나지 않았다.연구결과에 의하면 비문의 내용은 크게 세 단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 단락은 고구려의 건국신화로부터 추모왕(鄒牟王), 유류왕(儒留王) 대주류왕(大朱留王)으로 이어지는 왕위계승과 비문의 주인공인 광개토대왕의 행장을 기술하였다. 둘째 단락은 광개토왕 재위시절에 행해진 정복활동을 기록하였고, 셋째 단락은 수묘(守墓)에 관한 내용을 기록하였다. 일별하면 고구려 건국의 상징성과 광개토대왕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는 공적비이다. 고구려의 위대함을 상징할 수 있는 거대한 자연석에 장문의 비문을 통해 드러내고자 했던 것은 고구려의 위대성과 민족적 포용력이다. 고구려의 위대성은 건국신화와 광개토대왕의 업적에 잘 나타나 있으며, 민족적 포용력은 수묘에 관한 기사에 잘 반영되어 있다. 묘를 지키는 사람들을 고구려인으로 하지 않고 전쟁에서 노획한 포로들을 따뜻한 마음으로 포용하여 그들로 하여금 수묘토록 한 것은 민족적 동질성을 강조하는 고구려의 정체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다음으로 비문 서체에 대해 살펴보자. 우선 입비된 시기를 살펴보면, 비문에 "以甲寅九月二九日乙酉"라고 보이므로 장수왕 2년(414)에 세워진 것을 알 수 있으며, 중국으로 치면 동진 안제(安帝) 의희(義熙) 10년에 해당한다. 중국서예사와 관련지어 설명하면, 양한(兩漢)의 예서시대를 지나 위촉오 삼국시대를 거치고, 서진을 넘어 동진시대 왕희지가 난정서를 쓴 353년보다 61년이 지난 때이다. 굳이 중국서예사를 빗대어 시기를 설명하는 것은 광개토호태왕비에 나타난 서체가 당시 중국에서 유행하던 서체와는 전혀 다른 서풍을 띠고있음을 증명하기 위함이다. 그간의 서평을 보면, 중국의 섭창치(葉昌熾)는 "비의 글자 크기는 접시만큼 크며, 방엄(方嚴)하고 질후(質厚)한 서법은 예서와 해서의 중간서체다. 진(晉)의 의희(義熙) 10년에 건립하였으며, 고구려 건국의 무공(武功)을 자세히 기록한 것으로서 참으로 해동(海東) 제일의 보배다."라고 하였다. 일본의 니시바야시(西林昭一)는 "서체는 예서이며, 거의 방형(方形)으로 하부에 중심을 두고 있다. 이 시기 한의 고예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유유(悠悠)한 자태로 순고고아(醇古古雅)하다. 이것은 거의 같은 지역 같은 시기의 모두루제기(牟頭婁題記) 묵서가 서북지방에서 통용되던 서풍을 따르고 있는 것과 대비하여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모두 고구려의 상징성을 간과한 중국적 서평에 불과하다.필자는 광개토대왕의 영락(永樂)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비문에서 자주 언급하고, 이후에도 고구려가 건흥(建興), 연수(延壽), 연가(延嘉), 태화(太和), 영강(永康) 등의 연호를 사용한 것은 국가적 상징성을 보여주는 예라고 생각한다. 비문에 사용한 서체는 형태상 고예(古隸)로 분류될 수 있지만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 점을 상기한다면 그것은 우리 민족의 고유서체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전에 논술한 바 있는 점제현신사비와 유사성을 보이고 있으며, 또 이후에 나타나는 중원고구려비와 신라 고비와도 혈맥이 연결되어 있음을 볼 때, 고구려의 고유서체임이 분명하다. 자형면에서 볼 때에도 사용하고 있는 이체자와 풍부한 자형의 변화는 중국서예사로 쉽게 설명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은혁(전주대학교 한문교육과 겸임교수)
전주의 역사성을 규명하는 작업이 미진하다는 지적이 제기됐다.15일 전주역사박물관 녹두관에서 열린 '제11회 전주학 학술대회'에서 홍성덕 전주대 교수는 "전주는 역사적 전통에도 불구하고 호남제일성으로서의 위상을 엿볼 수 있는 문화유산이 많이 남아있지 않으며, 전라감영과 전통도시 전주에 대한 연구 또한 부진하다"며 "단순히 한옥마을 등과 같이 물리적 공간 조성 단계를 벗어나 전통도시 전주의 역사성을 규명하는 데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홍교수는 "과거 전주가 지녔던 위상과 영광을 학문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체계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이번 학술대회는 전주역사박물관(관장 이동희)이 개관 8주년을 맞아 전주학추진위원회(위원장 함한희)와 공동으로 마련한 것. 태조어진 전주봉안 600주년을 기념, '조선왕조와 전주'를 주제로 조선시대 전주를 다양한 시각에서 조명했다.특히 이동희 역사박물관장은 태조의 본향이 전주가 아니라는 설에 대한 진위를 밝히고 경기전비 건립 추진과정을 통해 전주사람들의 풍패의식을 분석한 '풍패지향 전주, 조선왕조의 발상지로서 그 역사와 성격'을 발표해 관심을 모았다. 이관장은 "조선초 풍패의 중심은 태조가 태어난 영흥과 그가 살았던 함흥 일원이었지만, 조선후기 시조가 중시되는 가문풍조가 확산되면서 전주는 태조와 직접적인 관련성이 없다는 한계를 넘어 풍패로서 의미와 위상을 확고하게 구축했다"고 설명했다. 이관장은 "전주부민들 또한 지속적으로 경기전비 건립 요청을 하는 등 풍패지향으로서 전주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고 덧붙였다.임미선 전북대 교수의 '조선의 예향, 전주'는 전주에 대한 음악학적 접근으로, 임교수는 "전주는 전통예술의 발생지보다는 전통예술을 일상에서 가까이 즐겼던 소비지향적 측면이 더 강했다"며 "우리 음악의 소중함과 그 가치에 대한 인식이 다른 지역에 비해 높다"고 평가했다.'관민협치, 전주'를 주제로 발표한 이병규 동학기념재단 연구부장은 "1894년 동학혁명기 집강소는 민족적 위기 속에서 관과 민이 손을 잡고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크다"며 "특히 관민협치의 집강소가 전주 지역에서 중심을 두고 이뤄졌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한편, 학술대회에 앞서 역사박물관 개관 8주년 기념식과 특별전 개막식이 진행됐다. 이날 행사에는 송하진 전주시장과 최찬욱 전주시의장, 이광재 전주이씨대동종약원 전북지원장 등 300여명이 참석했다. 특별전 '경기전, 조선의 가슴에 귀 기울이다'는 9월 12일까지 역사박물관에서 계속된다.
행정기관 중심에서 벗어나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해 문화재를 가꿔나가는 '한 문화재 한 지킴이' 사업. 전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문화재 지킴이들이 남원에서 만났다.문화재청이 주최하고 남원문화원이 주관한 '2010 한 문화재 한 지킴이 전국대회'가 12일과 13일 사랑의 광장, 국악의 성지 등 남원 일대에서 개최됐다.충남 부여와 최종 후보지로 올라 개최지로 선정된 남원대회는 전북지역에서는 처음 열린 한 문화재 한 지킴이 행사. 전국에서 300여 명이 참석했다.12일 오후 1시 춘향문화예술회관 대강당에서 열린 개회식에서는 남원 문화재지킴이 활동하고 있는 고등학생 장재준군과 임민정양이 문화유산헌장을 낭독했으며, 최중근 남원시장이 남원문화재 명예지킴이로 위촉됐다.우수활동 유공 단체 및 개인으로는 대동문화재단(광주광역시) 아모레퍼시픽(경기도 용인시) 충주전통문화회(충북 충주시) 하이닉스반도체(서울시) 한국의 재발견 우리궁궐지킴이봉사단(서울시)과 김경자(68·경남 진주시) 노윤지(65·경기도 성남시) 조길영씨(67·경기도 수원시)가 선정됐다. 문화재지킴이 활동 우수사례로는 LG하우시스(서울시)의 '친환경 독도천연보호구역 LG가 앞장선다'와 광주북구문화원 역사문화해설사회(광주시)의 '가사문화권 문화재지킴이'가 소개됐다.이건무 문화재청장은 대회사를 통해 "한 문화재 한 지킴이 사업을 통해 문화재 보호 분야에 민간부문의 다양한 인력과 전문지식을 활용할 수 있게 됐다"며 "자발적인 문화재 보존 운동에 전 국민이 앞장서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병채 남원문화원장은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고 할 정도로 선사시대부터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문화와 역사가 집약돼 있는 남원에서 이번 대회를 열게 돼 기쁘다"며 "우리 모두에게는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을 잘 보존하고 관리해 후손들에게 물여줘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고 강조했다.이번 전국대회에서는 '남원의 역사와 문화'를 주제로 한 나종우 원광대 교수의 특강과 황산대첩비지, 송흥록 생가, 만인의총, 만복사지, 광한루 등 남원지역 문화유산 답사가 진행됐다.
우리는 흔히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지 않고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가정을 하며 역사를 추정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 견해가 내재해 있다. 하나는 외세의 힘을 빌어 삼국을 통일한 신라가 자주적 통일을 이루지 못했다는 아쉬움이고, 또 하나는 고구려에 대한 역사적 기대이다. 통일신라를 배워온 필자로서도 가끔 그런 담론을 하곤 하였다. 그러나 광개토호태왕비의 내용을 면밀히 검토해보면 고구려가 이미 5세기에 한반도의 삼국을 사실상 지배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비문의 내용 중에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라는 구절이 있다. 백잔과 신라는 옛날부터 고구려의 속민(屬民)으로서 조공을 바쳤다는 내용이다. 여기에서 백제를 백잔(百殘)이라 칭한 것은 「맹자」에서 이른바 "인(仁)을 해친 자를 일러 적(賊)이라 하고, 의(義)를 해친 자를 일러 잔(殘)이라 한다(賊仁者謂之賊, 賊義者謂之殘)"는 것에서 기인한다. 한반도 내에 존재하는 같은 민족임을 나타내는 일종의 동인의식을 강조한 표현일 것이다.(최영성 교수의 교시)이처럼 고구려가 한반도를 사실상 지배하면서도 백제와 신라를 멸하지 않고 그들의 국가적 기반을 유지시킨 것은 역시 대제국 고구려다운 면모이다. 그러나 바다 건너에 존재하는 이민족 왜에 대해서는 분명하고 단호한 입장을 취하였다. 일본은 이처럼 숨길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을 아전인수격의 해석을 가하여 왜가 한반도 남부지역을 지배했다는 소위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며 이를 정당화하려 애썼다. 그렇게 된다면 20세기에 국치로 불리는 일제강점기 역시 정당성을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고구려 광개토호태왕비의 주체는 고구려이다. 비문 중 가장 문제가 되었던 곳은 비문의 신묘년 조이다. 잠시 여기에 소개하면 이렇다.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破百殘□□新羅以爲臣民'. 비의 탁본을 연구하여 석문하고 해독하여 발표를 선점한 일본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잔과 신라를 파하고 신민(臣民)으로 삼았다"고 해석하였다.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는 논리이지만 판독된 문자의 해독으로만 본다면 가능한 해석이다. 이에 대하여 재일사학자 이진희씨는 급기야 비문이 조작되었다고 발표하였고, 그 증거로 비문에 덧칠해진 석회를 지목하였다. 그러나 중국의 왕건군은 석회를 바른 것은 탁본을 깨끗하게 뜨기 위해 탁공들이 취한 조치이며 비문조작은 없었다는 반론을 제기하였다. 그때까지의 주요 쟁점은 일본인들의 비문조작 문제였다. 그러나 이후에는 비문의 조작문제보다 해석의 문제로 전환되었다. 즉 위의 문장에서 주어에 해당하는 '고구려'가 생략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그러할 경우 해석은 전혀 달라진다.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신라를 파하고 신민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고구려는)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신라를 파하고 신민으로 삼으려 하므로"라고 해석하는 것이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고 문맥상 타당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물론 그동안 한중일에서 수많은 학자들이 이 기사에 대해 각자의 의견을 주장하였지만, 전체 비문의 핵심은 고구려의 대내외적 위상과 민족적 포용력이다. 비록 의를 해친 백제였지만 동일 민족이라는 사실만은 부정하지 않았다.최근 류승국 교수는 100여 년의 논쟁을 검토한 연구를 발표하여 학계의 공감을 얻었는데, 그 역시 비문의 변조설을 주장하는 사람 중 하나이다. 아래에 신묘년 조에 대한 해석을 소개한다. "백제와 신라는 본시 고구려의 속민(屬民)으로서 옛적부터 조공을 바쳐 왔다. 왜가 신묘년 이래로 매양 바다를 건너 백잔(百殘)과 □□ 신라를 파(破)하여 신민(臣民)을 삼으려고 하므로, 그래서 영락 6년 병신년에 광개토대왕은 친히 수군(水軍)을 거느리고 왜적과 잔국(殘國 : 백제)을 토벌함에 고구려 광개토왕 군대가 왜적의 과구(소굴)에 이르러 공격하여 열 여덟 개의 성을 취하였다." /이은혁(한국서예문화연구회 이사장)
전주세계소리축제의 시공 확대를 위해 봄 축제와 가을 축제로 이원화하는 방안이 제시됐다. 또한 급변하는 IT 환경에 맞춰 가상공간으로 축제 무대를 확장시키고 축제에 참여하는 연령층을 확대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5일과 6일 군산대학교 인문대학에서 개최된 판소리학회 제64차 정기 학술대회. 판소리학회(회장 최동현)와 군산대 인문과학연구소(소장 정성은)가 공동주최한 이날 주제는 '판소리 문화·제도'로, 판소리를 기반으로 한 대표적인 축제로 자리잡은 전주세계소리축제의 미래전략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제기됐다."소리축제 핵심 콘텐츠를 판소리에 국한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 곽병창 우석대 교수는 "소리축제 10년 역사 동안 판소리를 중심에 둔 축제라는 이름값이 충분히 높아진 만큼, 이제부터는 축제의 콘텐츠를 다양화하고 그 외연을 넓혀야 한다"며 "대안으로 판소리를 중심에 둔 월드뮤직축제로서 위상을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소리축제 총감독을 역임하기도 한 곽교수는 "봄 축제는 대사습과 공동개최하면서 전국의 소리꾼과 명인들이 참여하는 전통음악축제로, 가을 축제는 시내 일원을 두루 활용하면서 전 세계의 현대화한 전통음악들을 한자리에 모으는 독창적인 월드뮤직축제를 만들자"고 설명했다.허문경 한양대 강사는 "급변하는 IT 환경에서 선도적 위치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공연무대에 3D 기술을 도입하고 위치기반 소셜네트워킹서비스(SNS)를 제공하는 등 홍보미디어의 다변화가 시급하다"며 "이는 물리적 공간 확대를 넘어 가상공간으로 축제 무대를 확장하고 축제참여의 연령층을 확대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전라북도가 소리축제라는 관제축제를 기획하고서도 향유계층인 대중과 지역주민의 수요를 정확히 파악하고 참여를 위한 동기부여, 즉 마켓커뮤니케이션을 위한 노력보다는 예산규모에 따라 과다하게 프로그램을 편성해 해외공연단을 초청하고 이에 따른 평가는 관객수를 기준으로 하는 기획력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며 "소리축제는 수요자와 소통이 잘되는 참여형 축제가 아닌, 일방적 커뮤니케이션에 의한 관람형축제의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고 지적했다.한편, 이날 학술대회에서는 판소리 공로상과 판소리 학술상에 대한 시상이 이뤄졌다. 판소리 공로상은 김대행 서울대 명예교수가, 판소리 학술상은 「판소리 중고제 심정순 가의 소리」(민속원, 2009)의 신은주(전주교대), '판소리 몸 담론 연구'(경희대 박사학위논문, 2009)의 서유석 회원(서강대)이 수상했다.
삼국은 기원전 1세기 무렵 거의 비슷한 시기에 태동하여 주위의 토착세력을 통합하며 점차 중앙집권적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나갔다. 마침내 한반도를 중심으로 삼국이 정립(鼎立)하며 생존을 위한 경쟁에 돌입하여 외교적 견제와 전쟁이 반복되는 가운데, 5세기에 이르면 고구려는 그 세력이 강대해진다. 관제의 개혁으로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한 고구려는 정복사업을 통해 세력의 팽창을 추진하였다. 한 이후로 중국이 삼국으로 나뉘고 다시 5호16국으로 분열된 틈을 노려 고조선 이후 점령당했던 대동강 유역을 수복하였으나 고국원왕이 전사하는 등 전쟁의 상흔 또한 만만치 않았다. 소수림왕의 개혁정치를 이어받은 광개토왕(재위 391~413)은 고구려를 동북아시아의 강력한 나라로 성장시켜 마침내 고구려시대를 열었다.광개토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장수왕은 414년에 선왕의 위업을 기리는 비를 당시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지금의 길림성) 집안(集安)의 왕릉 곁에 세웠다. 비의 정식 명칭은 '국강상광개토평안호태왕비(國岡上廣開土平安好太王碑)'이다. 높이 6.39m의 거대한 자연석(凝灰巖) 비에는 고구려의 정복활동과 삼국의 관계 그리고 왜에 관한 기사 등 1800여 자가 실려 있다. 동북아시아에서 최고 최대의 비로 알려져 있으며, 대제국 고구려의 정체성을 엿볼 수 있는 역사적 상징이다.그러나 비는 고구려와 운명을 같이 하여 오랫동안 매몰되어 있었고, 청나라 때에는 그 지역이 만주족의 발상지로 신성시되어 통행이 금지되어 역사에서 종적을 감추었다. 그리고 1876년 중국인 관월산(關月山)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어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한편 일본은 이 소식을 접하고 육군참모본부의 정보원이었던 사코 가게노부(酒勾景信) 중위가 비밀리에 중국에 파견하여 1884년 광개토대왕비를 찾아 채탁하여 갔고, 육군참모본부는 그것을 토대로 쌍구가묵본으로 만들어 1889년에 회여록(會餘錄)에 소개하였다. 이로써 비문에 대한 해독이 진행되면서 고구려의 실체와 고대 한일관계 등이 쟁점으로 떠올랐다.이후 100여 년 동안 한·중·일의 학자들의 연구가 발표되는 가운데 재일사학자 이진희(李進熙)씨에 의해 일본이 비문을 변조했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폭로되었고, 다시 이에 대한 중국인 왕건군(王健群) 반론이 제기되면서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졌다. 그런데 100 여 년이 지난 20세기 말에 동경국립박물관에서 돌연 이 쌍구본을 처음으로 공개하였다. 이를 계기로 고대사에 대한 쟁점의 부활은 물론 역사에 대한 인식이 이전보다 훨씬 강화된 상태에서 또다시 연구 결과들이 발표되었다.최근 중국은 종래의 중화주의에서 벗어나 자국 중심의 역사를 재구성하기 위해 동북공정을 단행하는 한편 광개토호대왕비를 세계문화유산에 등록함으로써 비의 보호를 이유로 접근을 통제하고 있다. 이전에도 언급하였듯이 우리의 고대사에 대하여 일본의 조작설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또 중국의 동북공정에 의해 왜곡되고 있는 현실을 생각할 때,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이다. 종래 이 문제에 대하여 일본과 중국이 국가적 차원에서 대처하고 있는 것에 비하여 우리는 특정한 몇몇 학자들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들을 문제삼기에 앞서 우리의 학문적 태도와 역사인식부터 다져야 한다. 정복의 역사는 비단 토지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과 인식에까지 해당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비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몇 차례에 걸쳐 비의 역사적 의의와 쟁점의 상황, 그리고 서예사적 가치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은혁(한국서예문화연구회 이사장)
지난해 1월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11호)에서 금동사리호(金銅舍利壺) 등과 함께 발견된 청동합(靑銅盒)이 보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26일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김봉건)에 따르면 발견 당시 청동합은 심한 외부 부식으로 인해 개봉을 미뤄왔으나 문화재보전과학센터가 보존처리를 실시하면서 국내에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유물들이 들어 있는 것으로 최종 확인했다고 밝혔다.이번에 개봉한 청동합에는 구슬류를 비롯한 금제장식, 직물류 등 다양한 공양품이 들어 있었는데 특히 원형 청동합(靑銅盒) 뚜껑에서는 이것의 원래 주인이 당시 백제 고위관리였음을 입증하는 글자도 발견하게 됐다고 덧붙여 밝혔다.청동합은 운두가 낮은 둥글넓적한 형태이며 모두 6점이다.크기는 직경 5.9-8.3cm, 높이 3.2-4.6cm 정도인데, 주조(鑄造)로 제작됐다.대부분의 합은 문양이 새겨져 있지 않았으나 6번 합에는 초화(草花)무늬와 당초(唐草)무늬가 새겨져 있었고, 1번 합 뚜껑에서는'상부달솔목근(上部達率目近)'이라고 음각된 명문이 드러나 있다.글자를 새기는 작은 칼인 도자(刀子), 혹은 송곳 같은 날카로운 도구로 새긴 듯한 이 문구를 풀이해 볼 때 "상부(上部)에 사는(혹은 본적이 상부인) 달솔 벼슬에 있는 목근이라는 사람"을 의미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미륵사 석탑을 세울 때 달솔 목근이 시주한 공양품으로 판단된다.상부는 당시 백제 서울 사비(부여)를 5개로 나눈 구역 중 북부를 의미하며 달솔은 모두 16등급으로 나뉜 백제 관직 중 2품에 속한다.또한 청동합에서는 금제구슬 370여점을 비롯한 금제고리, 금제소형판 등 많은 양의 금제품과 유리구슬, 진주, 곡옥 등 총 4,800여점의 유물이 수습된 점으로 미뤄 보석함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이 가운데 가장 큰 4번 합에서는 무려 4,400여점의 유물이 수습됐는데 1점의 곡옥은 채색된 금장식 모자가 씌워져 있는 것이 매우 이채롭다.직물과 향분(香粉)으로 추정되는 유기물질 등도 이번에 확인된 가운데 금제구슬 등은 화사한 빛을 그대로 간직할 정도로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하다.문화재보존과학센터는 향후 청동합과 수습 유물에 대한 본격적인 보존처리를 시작하여 수습된 금속, 유리류, 유기물 등에 대한 성분 분석과 제작기법 등 다각적인 조사연구도 병행 실시할 계획이다고 밝혔다.한편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청동합과 그 수습 유물에 관한 1차적인 조사 내용을 27일부터 28일까지 양일간 서울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개최하는 '미륵사 국제학술심포지엄'을 통해 공개할 예정이다.
전북과 각별…황석영 소설가 ‘금관문화훈장’ 영예
'작지만 강한' 전북도립미술관의 반란
[안성덕 시인의 ‘풍경’] 모래톱이 자라는 달
부안여성작가 13명, 30일까지 제9회 단미회展 ‘Art Memory’
전북 청년작가들의 비빌언덕, 유휴열미술관
제4회 민족민주전주영화제 14일 개막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김근혜 아동문학가, 이경옥 ‘진짜 가족 맞아요’
비구니 선사 영암당 인허 스님 입적
전북작가회의, ‘불꽃문학상’ 황보윤·‘작가의 눈 작품상’ 박복영
전북시인협회장 후보에 이두현·이광원 최종 등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