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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혁의 글씨로 만나는 옛 글] (35)낙랑시대의 서예문화

그동안 한국서예사를 다루면서 고대 삼국을 상한선으로 잡고 5세기 초에 수립된 광개토호태왕비를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한반도에 삼국이 정립하며 각자의 문화적 정체성과 독자성을 확보하기 이전에도 고조선(위만조선을 포함)의 문화를 계승하는 한편 한의 문화를 수용하여 성대한 문화를 이룩했음을 증명해주는 유물들이 속속 발굴되고 있다. 한이 고조선을 멸하고(B.C.108) 효율적인 통치를 위해 그 영역 안에 설치한 한사군 중에서 낙랑은 그 문화의 수준이 가장 높았다.2001년 7월 17일부터 9월 2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기획한 '낙랑' 특별전이 열린 적이 있다. 이 전시는 그 해 9월 25일부터 11월 4일까지 국립김해박물관에서 순회 전시되었다. 지금 필자의 곁에는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발간한 '낙랑' 도록이 있다. 이 책에 소개된 발굴유물들을 일별하면 그 문화적 수준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낙랑의 유물 중에서 최고의 수작으로 일컬어지는 금제교구(평양 석암리 9호분 출토)는 실로 화려한 금빛을 발하며 당당하게 그 문화적 수준을 대변하고 있다. 평양에서 다량으로 발굴되었다고 전해지는 봉니(封泥)와 온전한 상태로 석암리 고분에서 발견된 귀뉴동인(龜紐銅印)과 옥인(玉印)은 특수계층의 문화생활을 보여주는 유물들이다. 여기에 창원 다호리 고분(1호분)에 발견된 붓과 삭도(削刀)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엽전, 요철 명문이 찍혀있는 다양한 벽돌들은 일상생활에서 사용된 유물로서 한자문화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이외에도 기년명칠이배(紀年銘漆耳杯)가 눈길을 끄는데, 칠기에 기년을 포함한 글귀가 선명하게 음각되어 있어 절대적으로 빈약한 문헌자료를 보충해주는 한편, 그 필의가 실재로 쓰여진 서사에 가깝다는 점에서 서예사적 의의를 안고 있다. 해설에 따르면, 기원전 85년에서 기원 102년 사이에 지금의 중국 사천성 일대에서 만들어져 낙랑으로 수입된 것이 많으며, 명문에는 칠기제작에 참여한 인물들의 이름 등 내력이 상세히 담겨 있다고 한다. 서체로 보면 한대에 유행한 죽간의 서체와 매우 흡사한데 붓이 아닌 철필로 새겨져 있어 필획의 변화는 느낄 수 없지만, 정교한 각법과 능숙한 결구를 볼 때 한문의 생활화가 이미 보편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앞서 소개한 점제현 신사비의 경우도 한문의 보급 정도와 토속신앙, 그리고 우리나라 고유 서체를 추적해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낙랑은 한사군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존속하며 문화를 일구어왔다. 비록 한의 지배 하에 있었지만 정치적 군사적 지배보다는 경제적 의미의 조계(租界)에 불과했다. 이후 옛 땅을 되찾으려는 토착세력의 질긴 저항으로 한사군이 통폐합되어 204년 대방군이 설치될 때까지 낙랑은 존속하였으며, 313년 고구려 미천왕의 공격으로 마침내 멸망하게 된다. 청동기문화에서 철기문화로 이행되어는 과도기적 문화이행기에 속하는 낙랑의 문화는 중국의 문화를 수용하여 이를 토착화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로써 널리 보급된 서예문화도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면모를 지니고 있어 새로운 다시 점검할 필요가 있다. 고조선의 토착문화를 계승한 낙랑의 문화가 후에 고구려에 흡수되는 역사적 전개에서 보면, 고구려의 서예문화 또한 낙랑과 결코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역사적 기록이 매우 귀한 이 시대의 유물을 우리보다 앞서 일본의 고고학계에서 관심을 가지고 연구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들의 고대사 조작에 의구심을 갖기에 앞서 이제라도 우리 문화에 대한 한량없는 관심과 체계적인 연구를 계속하여 우리의 역사를 제대로 자리매김해야 할 것이다. /이은혁(한국서예문화연구회 이사장)

  • 문화재·학술
  • 전북일보
  • 2010.05.26 23:02

울산박물관 명품 '조국구도' 확보

울산시 박물관추진단(단장 김우림)은 올해 상반기 2차 유물구입 공고를 통해 '조국구도(曺國舅圖)'와 '동래부순절도(東萊府殉節圖)', 호작도(虎鵲圖)' 등 명품유물 다수를 개인 소장자로부터 구입했다고 24일 밝혔다. 박물관 추진단에 따르면 '조국구도'는 도교 8선 가운데 한 명인 조국구가 악기를 들고 서 있고 좌우에 악기를 불거나 복숭아 광주리를 진 소년 3명이 그려져 있다.특히 이 그림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는 김홍도의 '신선도 8폭병풍'의 '조국구도'와 거의 같은 구성과 표현을 보여주고 있어 주목된다. '동래부순절도'는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당시 부산 동래성에서 왜군과 맞서 싸우다 순절한 부사 송상현과 백성들의 항전장면을 묘사한 그림으로 1834년 변곤(卞崑 1801∼?)이 그린 것이다.이 그림은 현재 육군박물관이 소장한 보물 제392호 '동래부순절도'(1834년작)와 구성과 구도가 거의 유사하다. '호작도'는 꼬리를 치켜든 호랑이를 소나무 위에서 까치가 내려다보는 그림으로 17세기 초반 작품으로 추정되며, 호랑이의 털이 살아있는 듯 묘사가 섬세하다. 김우림 박물관추진단장은 "내년 6월 울산박물관 개관을 앞두고 전시 및 교육자료로 활용할 수준 높은 유물을 계속 구입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 문화재·학술
  • 연합
  • 2010.05.25 23:02

[이은혁의 글씨로 만나는 옛 글] (34)점제현 신사비

근래 역사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면서 우리의 고대사가 일부 조작되었다는 주장들이 학계에서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낙랑시대의 유물로 알려진 점제현 신사비는 내용이 아닌 출토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우선 비는 점제현 신사비라고 알려져 있으나 염제현 신사비 혹은 점선현 신사비 등으로 지칭되기도 하며, 축약하여 점제비라고 일컫는다.최초의 발견 경위에 대해서는, 일본인 고고학자 세키노 타다시(關野貞)와 역사학자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1913년 평안남도 용강군(현 온천군) 성현리 토성의 서남쪽 약 485m 지점의 밭에서 발견했다고 전해진다. (사진참조)이것이 어떻게 그들에 의해 발견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현재 학계에서의 논쟁은 발견된 지점이 애초에 입비된 자리가 아니라 역사조작을 위해 한반도로 이치된 것이며, 원래는 중국 하북성 갈석산에 있던 것이라고 한다. 여러 연구 결과를 종합해 볼 때 이러한 주장은 충분한 정황적 근거와 과학적 분석을 토대로 하고 있어 설득력이 있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역사조작을 자행했을까. 조작설을 주장하는 연구자들에 따르면, 한나라가 고조선을 점령하고 그 영역 안에 사군(四郡)을 설치하였는데 이 비의 발견처가 바로 그 중 하나인 낙랑지역이라는 근거로 삼기 위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고조선의 활동무대를 대폭 축소함으로써 약소민족국가로 전락시키고자 한 것이다.일부에서는 당시 중국 한나라에서 일종의 교화를 명분으로 문화를 외부에 전파하려는 의도가 다분하였는데, 그 증거로서 중원보다도 오히려 중국의 주변에서 역사적 증거들이 출토되고 있으며, 장제(章帝) 원화(元和) 2년(85)에 세워진 점제현 신사비도 이와 다름 아니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이처럼 점제현신사비는 우리 민족의 2000년 역사를 증명하는 중요한 역사적 산물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오늘날 이 시점에서 역사적 논쟁이 된 점제현신사비를 서예사적 입장에서 점검할 필요가 있다. 아직까지 정교한 비석의 사진과 탁본을 확보하지 못했지만 일본인들이 제시한 발견 당시의 사진과 중국의 고고학자 나진옥(羅振玉 : 1866~1940)의 낙관이 있는 희미한 탁본사진으로 볼 때, 중국 한대(漢代)의 비와는 상당히 다른 특이한 풍모를 보이고 있다. 종선으로 계선이 있고 정방형에 가까운 예서가 전서형 필의로 쓰여져 있다. 일부가 파손되어 현재 판독이 가능한 글자는 80여 자에 불과하지만 그 내용으로 보아 점제현과 관련이 있고 제사와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점제현 신사비로 명명하였다고 한다. 현존하는 탁본에는 '한점제평산신사비'라고 되어 있다. 서체면에서 볼 때 상당히 정제된 자형을 보이고 있으며, 이후에 보이는 광개토호태왕비와 같은 고예(古隸) 보다 단정한 느낌이 있다. 전서에서 예서로 이행되어 가는 과도기적 서체로 보아도 무방하며, 우리나라 초기 석비 형식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라 할 수 있다. 이후에도 서술하겠지만 당시 한나라의 고예와 대비가 되며, 한편으로는 고구려 광개토호태왕비와도 일맥 상통하는 점이 있다는 점에서 그 서예사적 의의는 자못 크다. 그것이 한의 역사 속에서 한의 문화를 대변한 것이 아니라 한의 문화를 수용한 우리의 심의식과 미의식을 우리 식으로 발현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후 역사적 주목을 받게 되는 광개토호태왕비와 동질성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이은혁(한국서예문화연구회 이사장)

  • 문화재·학술
  • 전북일보
  • 2010.05.19 23:02

[이은혁의 글씨로 만나는 옛 글] (33)삼국시대 서예문화 개관

오세창은 「근역서화징」에서 신라 선덕여왕 재위기에 활동한 양지(良志)를 최초의 서가로 들고 있다. 이어서 무열왕의 둘째 아들인 김인문(金仁問)을 들고, 다음으로 한눌유(韓訥儒)를 꼽았다. '나대편(羅代編)'이라는 제하에 서화사의 권두를 장식하고 있는 이들은, 분명 우리나라에서 그 이름이 밝혀진 서가들임에 틀림없다. 전존하는 필적을 중심으로 서자가 분명하게 밝혀진 경우로 한정한 것이지만, 양지의 경우 「삼국유사」에 기록에 근거하여 '필찰(筆札)을 잘하였다'는 단평은 여러 가지를 시사한다. 그가 스님의 신분이라는 점에서 불교와 서의 관련성, 필찰이 통상 편지서체를 일컫는 말이므로 모필에 의한 필사가 보편화되었다는 점 등을 유추할 수 있다. 이렇게 인물사를 중심으로 서예를 바라볼 경우 문화의 시대가 훨씬 뒤로 밀려난다는 사실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이러한 서예사 서술의 취약점을 보완하기 위해서는 전존하는 역사적 자료를 토대로 문화사적으로 재평가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서자의 검증에 앞서 역사적 가치를 지니는 기록에 대한 검토가 우선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볼 때 고대 즉 삼국시대에 해당하는 유물들은 한결같이 역사적 가치와 더불어 미적 가치를 내포하고 있다.최초로 완정본 한국서예사를 집필한 김기승의 경우에는 점선현신사비(일명 점제비)와 광개토대왕릉비로 필두로 하여 고구려시대를 그 출발점을 삼고 있다. 고구려-백제-신라인가, 아니면 신라-고구려-백제인가에 대한 것은 「삼국사기」를 집필한 김부식(金富軾) 이래 역사서술의 관점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지만, 이것이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김기승은 한(漢)의 문화를 수용하는 입장에서 중국대륙과 연접한 고구려가 가장 우위에 있다고 보고, 한의 문화가 한반도로 동전(東傳)하는 과정 속에서 우리의 문화가 탄생되었다고 보았다. 그리고 한사군의 설치를 그 기점으로 삼았다. 최근 한사군의 설치에 대한 학계의 새로운 의견들이 개진되고, 최근 북한에서도 이에 대한 대규모의 학술토론이 있었던 점을 참고한다면, 한에 종속된 문화적 관념에서 벗어나 좀더 자유로운 해석을 가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문화적 관점에서 보면 전통적인 토속문화에 외래문화가 수용되어 조화되는 경우가 있고, 또 달리 미개지역에 선진적인 외래문화가 정착하여 토착화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문화는 물과 같아서 선진문화가 후진문화로 흘러 들어가기 마련인데, 서로 다른 두 문화가 갈등하고 융화되면서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게 된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이러한 경우에 해당할 것이다. 고대시대의 서예사료를 수집하여 일별하면 대륙의 그것과 상당한 차이가 발견된다. 서예사에서 권두를 장식하고 있는 고구려의 점선현신사비(일명 점제비, 85년 각석으로 추정)를 비롯하여 광개토호태왕비와 호우, 중원고구려비, 모두루묘지, 평양성석각 등을 비롯한 백제와 신라의 초기 석각 및 필적들은 당시 중국의 서체와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이 차이점이 곧 우리의 고대문화의 특징이며 우리 선조들의 미의식이자 삶의 방식이다.중국 대륙을 통털어 고구려의 광개토호태왕비만큼 웅장하고 당당한 자연석비는 없다. 비신의 규모 뿐만 아니라 그 서체 역시 당시 중국의 전통적인 서법으로는 검증하기 어렵다. 고구려의 역사와 정신, 나아가 그들의 역사인식과 미의식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해독불가능한 것이다. /이은혁(한국서예문화연구회 이사장)

  • 문화재·학술
  • 전북일보
  • 2010.05.12 23:02

"백제 근초고왕 때 1척은 25㎝, 1말은 2ℓ"

칠지도(七支刀)는 근초고왕 재위 때로 추정되는 369년에 백제 왕세자가 왜왕(倭王)에게 준 칼이다. 일본 나라현 덴리(天理)시 이소노카미(石上) 신궁이 소장한 이 칼은 지금까지는 주로 당시의 백제-왜 관계를 밝히는 자료로만 사용돼왔다. 칼이 하사품이라면 백제가 왜의 윗길에 있었다는 뜻이고, 헌상품이라면 그 반대일 것이라는 논쟁이다. 그런데 백제학회 회장인 노중국 계명대 사학과 교수는 칠지도의 길이가 75㎝라는 점에 착안해 당시의 도량형을 밝혀냈다.노 교수는 이 칼을 백제 왕실에서 직접 만들었을 것이므로 정확한 도량형을 사용했을 것이라고 보고, 당시 쓰였던 후한척(後漢尺. 23㎝)과 진전척(晉前尺. 23.1㎝), 서진척(西晉尺. 약 24㎝), 동진척(東晉尺. 약 25㎝) 등과 비교해봤다. 그 결과 칠지도는 '1척=25㎝'인 동진척을 기준으로 했을 때 칼의 몸길이가 2자6치, 자루가 박히는 부분이 4치로 전체 길이가 정확히 3척이 되는 것으로 드러나 당시 백제에서는 동진척을 사용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노 교수는 "지금까지는 백제가 수도를 한성에 둔 시기에는 후한척을 써왔으며 사비로 수도를 옮기고 나서 동진척을 쓴 것으로 받아들여졌다."라며 "왕실에서 만든 유물은 가능한 정확한 척도를 써서 만든다는 점에서 이 당시부터 벌써 동진척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칠지도에는 동진의 연호가 새겨져 있으며, 근초고왕은 372년에 동진으로부터 '진동장군영낙랑태수'라는 작호도 받았다는 점도 이 추측을 뒷받침해준다. 그는 이 도량형을 당시 조성했던 건물ㆍ무덤과 비교해봤다. 백제 왕실 무덤인 적석총 3, 4호분과 풍납토성 경당 유적의 44호 건물지 등의 길이와 폭, 높이 등을 동진척으로 환산해보니 숫자가 정수로 떨어지는 것으로 조사됐다. 수도 한성이 아닌 지방에서도 동진척이 쓰였음이 확인됐다. 이에 따라 앞으로 근초고왕 대의 백제 건물ㆍ무덤 발굴현장에서 노 교수가 확정한 동진척을 표준으로 작업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노 교수는 또 김해 양동리에 있는 서기 3세기 대의 무덤에서 나온 청동솥을 확인해 당시 쓰였던 부피 단위인 1두(斗. 말)가 약 2ℓ임도 밝혀냈다. 이 솥에는 '용량은 1말(容一斗)'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는데, 용량을 측정해보니 1.98ℓ였다는 것이다. 약 18ℓ에 해당하는 지금의 말과는 거의 10배나 차이가 난다. 노 교수는 "옛 도량형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라며 "도량형은 물건을 만드는 데부터 조세를 걷는 데까지 모든 영역의 기초가 되므로 당시의 경제 여건과 조세 상황을 알 수 있는 자료로 중요하다."라고 강조했다. 예를 들어 근초고왕 당시 '1척=25㎝'인 동진척이 쓰였다는 것이 밝혀지면 광개토대왕비문(414년 조성)에 백제가 고구려에 조공한 것으로 나오는 '세포(細布. 세마포) 1천필' 역시 25㎝를 기준으로 계산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와 당시의 조세 현황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1말이 2ℓ라는 추정도 백제 때 조세를 다룬 다른 문헌과 비교해보면, 당시 백제의 경제규모에 대한 큰 그림을 그려볼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노 교수는 또 이 도량형이 수도인 한성뿐 아니라 지방에서도 쓰인 증거가 유물들에서 나타나므로, 당시 중앙정부의 지배력이 지방에까지 속속들이 미쳤다는 것도 알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 내용은 백제 때의 성씨와 도량형, 의학, 농사 등의 내용을 정리해 최근 출간한 학술서인 '백제사회사상사'(지식산업사 펴냄)에 실렸다. 저자는 책에서 백제금동대향로가 삼산(三山)-오악(五岳)-제산(諸山)을 표현한 것으로, 불교와 선교(仙敎) 뿐 아니라 유교의 영향도 함께 받은 유물이라는 점도 밝혔다.

  • 문화재·학술
  • 연합
  • 2010.05.10 23:02

성주 법수사지 삼층석탑 '보물' 지정예고

문화재청은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가야산에 있는 '성주 법수사지 삼층석탑'(경상북도 유형문화재 86호)을 국가지정문화재인 보물로 승격 지정 예고했다고 6일 밝혔다. 이 석탑은 신라 애장왕(재위 800~806) 때 창건한 법수사지 내에 있으며, 가야산 계곡에 돌을 쌓아 만든 단에 자리 잡고 있다. 높이는 5.8m이며, 상ㆍ하 2층 기단에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으로, 노반(路盤. 사리탑의 맨 꼭대기 지붕 위에 놓여 상륜부를 받치는 부재) 이상의 상륜부는 남아있지 않으나 보존 상태는 대체로 양호하다. 탑의 규모가 작고 하층 기단이 높고 안상(眼象. 둥근 모양의 무늬)이 음각된 점 등 9세기 후반 석탑의 특징을 갖추고 있지만, 옥개석(석탑이나 석등 따위의 위에 지붕처럼 덮는 돌)의 받침이 5단인 점 등은 전형적인 신라 석탑의 모습을 보이고 있어 사찰 창건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문화재청은 설명했다. 또,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안동 옥동삼층석탑과 인제 한계사지 남삼층석탑 등의 하층 기단에서도 3개의 안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지역적 특성도 반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청은 30일간의 예고기간 동안 지방자치단체 및 이해관계자 등의 의견 수렴과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성주 법수사지 삼층석탑'을 보물로 공식 지정할 예정이다.

  • 문화재·학술
  • 연합
  • 2010.05.07 23:02

전주객사 명칭 '풍패지관' 변경 긍정적

보물 제583호인 '전주객사' 이름을 '전주 풍패지관'으로 바꾸기로 한 것과 관련해 학계 및 향토사학자들의 반응은 대체로 긍정적인 것으로 나타났다.문화재청은 "그동안 국가지정문화재 중 국보·보물 건조물문화재의 지정명칭의 명명 방식이 일제강점기와 근·현대를 거치며 왜곡되고 지정명칭과 관련된 통일된 기준이 없어 혼란스러웠다"며 "국민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알 수 있도록 지정명칭 일제정비 사업을 추진하게 됐다"고 밝혔다. 유형문화재과 관계자는 "원래 건물이 가지고 있는 고유이름을 찾아주자는 것"이라며 "전주객사의 경우 '풍패지관'이라는 현판이 남아있고 객사가 전주에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문화재 명칭으로 하기에는 문제가 있다는 판단을 내렸다"고 말했다.'풍패지관(豊沛之館)'은 조선에 온 중국 사신 주지번이 익산의 선비 송영구를 찾아가던 중 전주객사에 들렀다가 쓴 글씨로 전해진다. '풍패'란 한나라를 건국했던 유방(劉邦)의 고향에서 비롯된 것으로, 건국자의 본향을 일컫는다. 전주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본향으로 '풍패지향(豊沛之鄕)'이라 했으며, 전주객사는 '풍패지관'이라고 했다.이동희 전주역사박물관 관장은 "조선초기 기록에는 '객관'으로 돼있지만, 조선후기 기록을 살펴보면 '풍패관'으로 나온다"며 "우리 지역이 조선왕조의 발상지라는 것을 객사 이름을 통해 다시 한번 강조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홍성덕 전주대 교수는 "전주객사라고 하는 것은 쉽게 말해 풍남문을 남문이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객사는 통칭이고 풍패지관이 고유한 이름"이라고 설명했다.그러나 '전주객사'를 '전주 풍패지관'으로 바꾸었을 때 상당기간 혼란은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홍교수는 "풍패지관이란 명칭을 일반인들까지 자연스럽게 쓰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며 "당분간 안내판에 개정 전 명칭을 함께 병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이치백 전북향토문화연구회장은 "풍패지관으로 하면 일반인들은 잘 모를 수 있기 때문에 '전주객사 풍패지관'으로 하면 어떨지 제안하고 싶다"고 말했다.고언기 전주시 전통문화국장은 "역사를 근거로 문화재위원들과 논의해 문화재청에 지역 여론을 전달할 예정"이라며 "만약 명칭을 바꾸는 게 된다면 시민들을 대상으로 적극적으로 홍보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 문화재·학술
  • 도휘정
  • 2010.04.29 23:02

'이천 5층석탑' 반환 日에 공식 요구

일본에 약탈당한 문화재 가운데 하나인 경기도 이천 5층석탑 환수추진위원회(위원장 이상구)가 석탑 반환을 일본 측에 공식 요구했다. 현재 일본에 체재중인 이천 5층석탑 환수추진위원회 실무협상단(단장 박창희)은 이천 5층석탑을 보관하고 있는 도쿄시내 사설 박물관인 오쿠라 슈코칸(大倉集古館)을 방문해 석탑 반환 요청서를 전달했다고 21일 밝혔다. 오쿠라 슈코칸은 1915년 이천 5층석탑을 반출한 일본 오쿠라재벌의 사설 박물관으로 석탑의 소유자이며, 석탑은 현재 도쿄시내 오쿠라호텔내 오쿠라 슈코칸 뒷마당에 서 있다. 실무협상단은 석탑 환수에 대한 이천 시민의 간절한 염원을 전달하고 한일 양국의 새로운 100년 역사를 열어가는데 이천시민과 오쿠라 슈코칸이 앞장서자면서 석탑의 반환을 공식 요구했다. 지금까지 비공식적으로 5층 석탑 반환을 요구한 적은 2차례 있었으나 공식 반환 요구는 이번이 처음이다. 실무협상단은 5층 석탑 반환을 위한 범 이천시민 서명운동에 참여한 6만8천명의 서명도 함께 전달했다. 이에 대해 오쿠라 슈코칸 측은 5층 석탑이 도쿄에 있어도 일본을 찾는 한국인들이 언제든지 볼 수 있고 자신들이 석탑을 더 잘 보관하고 있으며 일본 국민도 한국 석탑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되고 있다면서 반환을 거부했다. 오쿠라 슈코칸 측은 현재로서는 석탑 소유권이 자신들에게 있으므로 반환이나 기증은 어렵다면서도 환수추진위원회가 제안한 미래지향적인 공헌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겠다고 말했다. 실무협상단은 "석탑이 일본에 있는 것은 한국이 일제의 식민지배를 받았기 때문이며 해방된 지 오래이므로 당연히 역사 청산이 되어야 하고 석탑도 한국에 돌아와야 한다"고 재차 반환을 촉구했다. 실무협상단은 일본 측이 석탑을 잘 보관하고 있다고 얘기했지만 현장 확인 결과 석탑이 놓인 자리에 배수가 되지 않아 이끼가 많이 끼고 부식이 심하다고 전했다. 고려시대에 제작된 이천 5층석탑은 이천향교 근방에 있었다고 해서 '이천향교방5층석탑'이라 불렸지만 일본인들이 명명한 이름이라는 지적에 따라 현재는 석탑이 위치했던 산기슭의 이름을 빌려 '망현산5층석탑'으로 불리고 있다.

  • 문화재·학술
  • 연합
  • 2010.04.22 23:02

[이은혁의 글씨로 만나는 옛 글] (32)한국서예사 서술의 기본입장

중국에서 근대적 의미의 서예가 태동한 시기는 한대(漢代)이다. 한대는 다시 전한과 후한, 또는 서한과 동한으로 지칭되는데 특히 후한시대에 이르러 서예미가 극에 달한다. 역사시대 이래로 많은 문자자료가 산재한다. 주술적 의미의 갑골문과 왕조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는 금문(金文), 그리고 진시황제가 전국(戰國)을 통일하고 문자통일을 단행하면서 승상 이사(李斯)가 제시했다고 전해지는 소전(小篆)이 있다. 뿐만 아니라 여러 기물이나 벽화에서 나오는 부호들 역시 문자로서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 그 자료의 다양성은 실로 방대하다. 그러나 오늘날 그것들이 예술적 행위의 소산이냐 하는 점에서 본다면 입장이 달라진다. 여기에서 말하는 예술적 행위란 쉽게 말하여 심미적 의식이 그것에 가미되었느냐 하는 것이다. 즉 문자라는 것에 개인의 미의식을 가미하여 서예미를 발현시켰느냐 하는 것인바, 속된 비유를 빌리자면 어떤 재료를 가져다가 자신의 입맛에 맞게 조리하여 음식을 만드는 것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전에는 단순히 문자가 의사를 전달하는 고유의 기능이 강조되었으나 한대에 들어서면서 여기에 서예미가 가미되어 비로소 예술성을 띠게 된다.한대를 서예의 기점으로 산정하는 데에는 몇 가지 문화적 사실이 뒤따른다. 우선 일상에서 문자를 서사하는 과정에서 획일적인 서사를 벗어나 다양한 면모를 보이며 이른바 오체(五體)가 나타난다. 종래와는 달리 일상생활의 간이함을 좇아 자연적 발로에서 비롯된 것으로 당시 문자정책을 넘어서 사회적 문제가 될 정도로 전파력이 강하였다.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한자의 서체는 이미 한대에서 자연적으로 발생되었다. 문자생활의 보편화가 주된 원인으로 꼽히며 이미 상당한 수준의 문화활동이 동시다발로 이루어졌음을 짐작케 한다. 둘째는 개인의 심미의식을 가미하여 문자를 표현하는 전문적인 서가가 출현한다는 점이다. 셋째는 문자를 심미적으로 체득한 서가가 서(書)의 미적 가치를 논하는 서론(書論)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넷째는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에 부응하여 문자의 발생과 변화를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문자학이 태동하여 근거에 입각한 서의 표현이 가능해졌다는 점이다. 이외에도 부수적인 사실이 있으나 이것만으로도 한대를 서예적 기점으로 꼽는 데에는 충분한 근거가 될 것이다.종래에 우리나라 서예의 출발점은 대략 중국에서 한자가 보급된 시점으로 산정하였다. 역사적 정황으로 보아 한사군이 설치된 이후 한반도에 한자가 유입되었을 것이라고 본 것이다. 이러한 논리를 따른다면 우리나라의 서예는 한대의 영향권 아래에서 출발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문화의 동전설(東傳說)이 일견 설득력이 있지만 이후 우리의 문화에서 나타나는 고대 서예자료들은 중국의 그것과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그것들을 굳이 중국에 예속시켜 논할 수도 있겠지만 문화가 전래된 이래 그것을 생활상에 반영하는 것은 수용자의 몫이다. 문화의 전래가 그 본래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지 못하고 변모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나타나는 초기의 문자자료들은 한자를 어떻게 활용하고 또 어떻게 미적으로 표현하였는가를 확인시켜주는 중요한 역사적 근거이자 서예사적 자료이다.이제 한국서예사를 일별하는 시점에서 문화의 보편성과 특수성이라는 관점에서 외래문화의 수용과 토착문화가 어떻게 조화를 이루며 어떤 결과로 나타나는가를 주목하고자 한다. 그렇게 된다면 중국에 예속된 문화가 아니라 우리의 삶과 미의식 속에서 우리 문화를 바라볼 수 있을 것이며, 우리 서예문화의 독자성도 자연스럽게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문화는 생활과 의식을 반영한 것이며 크게는 민족성으로 비춰진다는 점에서도 역시 그러하다. /이은혁(한국서예문화연구회 이사장)

  • 문화재·학술
  • 전북일보
  • 2010.04.21 23:02

불우한 명필, 창암 예술혼 다시 엿 보다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1770~1847)은 추사 김정희(1786~1856), 눌인 조광진(1772~1840)과 함께 조선 후기의 3대 명필로 손꼽혔다. 창암의 서예는 조선 말 석정 이정직과 일제 강점기 벽하 조주승, 유재 송기면, 효산 이광렬을 거쳐 석전 황욱과 강암 송성용으로 이어지며 전북 서단의 뿌리를 일궜다. 전북 서예가 전국적 위상을 갖는 것은 걸출한 인물들이 맥을 지켜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창암은 아쉽게도 한국 서예사에서 전북 지역 작가로만 대접 받고 있다.국립전주박물관(관장 김영원)이 개관 20주년 특별전'조선의 명필, 전북의 인물 창암 이삼만'을 통해 창암 탄생 240주년을 기념한다.창암이 '해서'(楷書·필획에 생략이 없는 서체)를 잘 썼다는 평도 있고, '유수체'(流水體·흐르는 물과 같이 쓰는 서체)'가 뛰어났다고도 한다. 이번 특별전을 둘러보면 그는 모든 서체를 넘나들며 잘 썼으며, 서예와 문학에 대한 조예도 깊었던 것으로 보인다.창암은 문집이나 유고집을 남기지 않아 구체적인 행적을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오세창의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 따르면 창암이 베에 글씨를 쓰고 빨아서 다시 썼다고도 하며, 벼루 세 개가 닳을 정도로 먹을 갈아 하루에 1000자씩 글씨를 썼다고 전한다. 얼마나 많은 노력과 정진을 해온 인물이었는가를 실감케 한다.창암은 추사와 비슷한 시기를 살았다. 추사가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수용하고 한국에 뿌리내리고자 했던 개혁적인 유학파였던 데 반해 창암은 혹독한 자기 수련과 공부로 조선의 고유색을 풀어낸 국내파였다. 광산김씨의 묘비와 김양성 묘비엔 두 사람의 글씨가 적혀 있다. 앞면은 추사가 쓰고 뒷면과 옆면은 창암이 썼다. 창암이나 추사의 서체 모두가 뛰어났다는 방증이다.창암은 스스로 진나라 주정과 당나라 유공권, 신라시대 김생의 글씨를 토대로 서체 공부를 했다고 밝혔다. 위진시대 고법과 조선 선대 서예가들을 연구하고 실험정신을 가미해 '동국진체'를 완성한 것. 이어 '창암체'를 개발해 자신만의 필법을 확립해 나갔다.그는 서법 전수를 위한 공로도 크다. 창암은 이를 위해 우리나라와 중국 서예의 대가들의 진적을 모아 「화동서법」(華東書法)으로 엮고 목판본으로 인쇄했다. 「화동서법」 뿐만 아니라 함양의 임석여, 홍주의 주경의 에게 써준 서첩을 통해 과거 시험에 대한 비판과 함께 중국과 우리나라 글씨에 대한 평가도 만나볼 수 있다.이번 특별전은 미공개 작품들을 한자리에 모아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창암의 선학과 후학의 계보를 통해 조선시대 서단의 흐름도 파악할 수 있게 됐다.김영원 관장은 "전북의 인물, 창암 이삼만 선생이 보다 많은 관심 속에서 조선의 명필로 재조명받기를 기대한다"며 "작품에 담긴 글들은 창암의 학문과 서법 연구에도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전시는 20일부터 6월13일까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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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화정
  • 2010.04.20 23:02

신라시대 공부 맹세, 임신서기석 서울나들이

"두 사람이 함께 맹세하여 쓴다. 하늘 앞에 맹세하노라. 지금부터 3년 이후에 충성의 도를 확실히 잡고 과실이 없기를 맹세한다. 만약 이 맹세를 어기면 하늘로부터 큰 죄를 얻게 될 것이다. …시(詩), 상서(尙書), 예기(禮記), 춘추전(春秋傳)을 차례로 익히기를 맹세하되 3년으로 한다."1934년 경주에서 발견된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 보물 1141호)의 내용이다. 비석 맨 앞에 임신이라는 간지가 있지만, 학자에 따라 그 연대를 552년, 612년, 혹은 732년으로 보기도 한다. 두 화랑의 맹세를 기록한 글로 널리 알려졌지만, 사실 정확한 저자에 대해서도 아직 밝혀진 바가 없고, 화랑과 관계되는지도 알 수가 없다. 국립경주박물관이 소장한 이 비석이 처음으로 서울 나들이를 한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이달 20일부터 6월20일까지 여는 테마전 '6세기 신라를 보는 열쇠-文字'에 전시하기 위해서다.국호를 신라(新羅)로 확정하고, 마립간이라 불리던 임금의 호칭을 왕(王)으로 바꾼 신라의 발전기에 문자가 이바지한 것이 무엇인지를 조명하는 전시다. 전시에는 임신서기석 외에도 신라의 영토 확장을 증명하는 북한산 진흥왕순수비(국보 3호)와 최근 발견된 포항 중성리비, 영일 냉수리비 등이 전시된다. 새로 정복한 지역에 지방관을 파견하고 성쌓기에 주민들을 동원한 모습을 보여주는 남산신성비와 댐을 쌓아 농업생산력을 늘렸다는 내용을 담은 영천 청제비 등도 볼 수 있다. 그 밖에 세금 징수 등의 내용이 있는 각종 목간과 글씨가 있는 토기도 자리를 함께한다. 전시와 연계해 20일에는 '신라의 6~7세기를 어떻게 볼 것인가'를 주제로 신형식 서울시사편찬위원장과 홍보식 부산박물관 문화재조사팀장의 강연회도 개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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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
  • 2010.04.19 23:02

미륵사지석탑 아래서 백제유물 출토

익산 미륵사지 석탑 아래에서 백제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들이 대량 발굴됐다.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김봉건)는 지난 16일 백제시대 석탑인 미륵사지 석탑(국보 11호) 기단부 발굴조사에서 토제 나발(螺髮·소라 모양으로 틀어 말아 올린 부처의 머리카락), 금동 장식편 등 백제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 27종 290여점을 출토했다고 밝혔다.석탑 1층 남측 통로 바닥석 해체 과정에서 이번에 출토된 유물들은 토제 나발, 금동장식편, 유리구슬 등을 비롯해 여성들의 머리 장식품인 청동뒤꽂이, 청동구슬, 청동방울, 청동고리 등 청동제품과 호신용 작은 손칼인 도자(刀子), 쇠못 등 철제품으로 그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특히 토제 나발은 89점으로 다량 출토된 가운데 청동뒤꽂이는 조각만 남은 다른 청동제품과 달리 형태가 온전하게 남아 있었다.이 유물들은 탑이나 건물의 붕괴를 방지하고 액을 예방하려고 땅속에 묻는 공양품들인 진단구(鎭壇具)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국립문화재연구소는 "이번에 출토된 유물들은 백제 석탑에서 발견된 진단구로서의 의의가 매우 크다"면서 "이번 유물들은 지난해 1월 출토된 사리장엄과의 관계성 및 유물의 성격 등에 대해 앞으로 계속해 심층적 조사 연구를 벌일 계획이다"고 설명했다.한편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지난 2009년 1월 석탑을 해체 보수하는 과정에서 백제 무왕 왕후가 조성한 사리봉안기(舍利奉安記),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를 발견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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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엄철호
  • 2010.04.19 23:02

익산 미륵사지석탑 아래서 백제 유물 출토

전북 익산의 미륵사지 석탑 아래에서 백제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들이 발굴됐다.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김봉건)는 백제시대 석탑인 미륵사지 석탑(국보 11호)기단부 발굴조사에서 토제 나발(螺髮: 소라 모양으로 말아 올린 부처의 머리카락)과금동장식편 등 백제시대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 27종 290여점이 출토됐다고 16일 밝혔다. 출토된 유물들은 토제 나발과 금동장식편을 비롯해 금박, 유리구슬, 여성들의머리 장식품인 청동뒤꽂이와 청동구슬 등의 청동제품들, 호신용 작은 손칼인 도자(刀子), 쇠못 등으로 다양하다. 특히 토제 나발은 89점이나 나왔고, 청동뒤꽂이는 조각만 남은 다른 청동제품과달리 형태가 온전하게 남아있었다. 이 유물들은 탑이나 건물의 붕괴를 방지하고 액을 예방하려고 땅속에 묻는 공양품들인 진단구(鎭壇具)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연구소 측은 이 유물들이 백제 석탑에서 발견된 진단구로의 의의가 크다고 설명했으며, 유물들의 성격과 지난해에 출토된 사리장엄과의 관계에 대해 심층 연구를계속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지난해 1월 석탑을 해체 보수하는 과정에서 백제 무왕 왕후가 조성한 사리봉안기(舍利奉安記),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를 발견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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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
  • 2010.04.16 23:02

대한민국 최초 항공기 L-4 연락기 문화재된다

대한민국 최초 항공기로 한국전쟁 초기에 맹활약한 'L-4 연락기'와 대한민국 최초의 전투함인 백두산함에 사용한 돛대를 비롯한 근현대 군사유물 7건이 한국전쟁 60주년을 즈음해 문화재로 등록 예고됐다고 문화재청이 15일 말했다. 공군박물관이 소장한 'L-4 연락기'(기장 6.82m, 기폭 10.73m)는 1940년대 미국에서 생산해 제2차 세계대전 중 미 육군이 사용하던 2인승 연락용 경항공기로, 1948년 9월13일 대한민국 공군 전신인 육군항공대가 미군에서 인수한 10대 중 1대다.한국 공군이 보유한 최초의 항공기인 이 경항공기는 한국전쟁 초기에는 후방석에 앉은 관측사가 폭탄을 품에 안고 출격, 투척하는 방식으로 동원됐고, 여수ㆍ순천사건 진압과 지리산 무장공비 토벌작전에도 쓰였다. 이후 육군에 파견되어 여러 기능으로 사용되다가 1954년 L-19 연락기 도입에 따라 퇴역했다. 해군사관학교박물관이 보관 중인 백두산함 돛대(폭 5.2m, 높이 11m)는 대한민국 최초 전투함인 백두산함(PC-701)에 사용한 마스트다.이 함선은 해군 창설 이후 제대로 된 전투함 한 척 없던 상황에서 해군 장병과 그 가족의 성금으로 1949년 10월17일 미국에서 구입한 것으로 한국전쟁 발발 당일 대한해협을 초계하다가 북한 무장선박을 발견하고 이튿날 격침한 '대한해협 해전'의 주인공이다.이 외에도 흥선대원군의 지시에 따라 무명 30장을 겹침으로써 총탄에 대비하고자 만든 '면천갑옷'(국립중앙박물관)과 한국광복군 갑옷(육군박물관), 대한민국 육군 초창기 깃발(육군박물관), 한국전쟁 휴전협정 체결 때 사용한 책상(전쟁기념관), 경상 안동 지방 의병장 김도현(金道鉉.1852-1914)의 칼(독립기념관)도 함께 문화재 등록이 예고됐다.

  • 문화재·학술
  • 연합
  • 2010.04.15 23:02

[이은혁의 글씨로 만나는 옛 글] (31)한국서예 순례를 떠나며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2000년 12월 29일부터 이듬해 2월 11일까지 한국서예사특별전(19)이라는 제하에 '韓國書藝二千年'이라는 전시가 예술의 전당의 기획 주최로 열린 적이 있다. 지금 필자의 손에는 그때 발간된 사진자료집과 해설집이 있는데, 돌이켜 아직껏 우리나라 서예 관련 전시 중에서 가장 대규모의 기획전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나라에도 엄연한 서예문화가 자리하고 있으며 그 역사가 2000년이라 하니 가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아쉬운 것은 그동안 우리의 서예문화가 중국문화에 예속되어 있다는 사대적 관념에 사로잡혀 그 영향관계만을 논하면서, 우리의 정체성과 독창성 등을 탐색하는 데에는 소홀했다는 점이다. 이 전시가 기획된 이후, 학계에서 우리 서예문화의 정체성과 독자성을 탐색하는 학술대회가 연이어 열리면서 새로운 입장과 시각을 달리한 연구성과들이 집적되고 있는 실정이다. 통론이 거론되고 각론들이 집적되어 하루빨리 조화와 균형을 갖춘 총론이 구성되기를 고대한다.한국서예사를 논하고자 할 때 가장 우선하는 것은 그에 대한 문헌적 자료를 갖추는 일이다. 뛰어난 감식안을 지닌 구안자가 문헌과 작품의 상관관계를 면밀하게 고증하여 논술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역대 문헌을 탐색할 수 있는 인문학적 소양과 작품을 분석할 수 있는 직관과 심안이 전제되어야 한다. 필자가 선뜻 한국서예에 대한 순례를 떠나지 못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렇다고 마냥 혜안을 갖춘 군자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릴 수도 없는 형편이다. 이러한 이유로 서재에서 그동안 홀시되었던 한국서예에 대한 자료들을 추려보았다. 그 중에서 가장 눈에 드는 것이 김기승의 「신고 한국서예사」이다.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서예가가 집필한 단행본 서예사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이와 더불어 뛰어난 감식안을 지닌 김응현의 논고들이 산견되는데 하나의 완정본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이것들은 해방 이후 체계적으로 한국서예사를 정리하기 위해 집필된 최초의 시도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좀더 거슬러 올라가면 금석학자로 이름이 높은 오세창의 「근역서화징」을 꼽을 수 있다. 역시 우리나라의 서화사 연구를 위해 역대 문헌자료를 채록한 편저인데 삼국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문헌적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1998년에 동양고전학회에서 이를 국역하여 시공사에서 발행하였다.필적을 확인할 수 있는 도판자료는 금석탁본과 진적 두 가지가 있다. 먼저 체계적인 금석탁본집으로는 조선후기 낭선군 이우(1637-1693)가 편집한 「대동금석서」(1938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에서 영인간행)와 1979년부터 원광대학교 출판국에서 연차적으로 발행한 「한국금석문대계」, 한국국학진흥원과 청명문화재단에서 발행한 「한국금석문집성」 등의 금석탁본집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진적 자료집으로는 최근 칼라영인된 「근묵」을 비롯하여 중앙일보사에서 발행한 「서예」가 비교적 풍부한 자료를 선명하게 게재하고 있다. 이와 별도로 역대 문인들을 필적을 판각하여 엮은 「해동역대 명가필보」도 있으며, 도처의 박물관 자료와 각종 기획전 등에 부수된 문헌들이 즐비하다.모두에서 밝혔듯이 우리의 서예문화는 장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금석문이든 필적이든 그것들은 기록물로서 한결같이 역사적 가치와 예술적 가치를 동시에 함유하고 있다. 이제 시대에 따라 한국서예를 순례하면서 혹 역사적 가치에 의미를 부여하고, 또 어떤 곳에서는 예술적 가치에 경탄할 것이다. 창작의 주체자인 인물됨을 통해 작품을 들여다보고, 작품을 통해서 시대의 문화를 가늠하며, 또 이를 역으로 탐색하며 추론하기도 할 것이다. 이번을 기회로 필자 역시 학문의 목표로 삼고 있는 한국서예사에 다소 공부가 되었으면 한다. 독자제현의 따뜻한 질정을 기대한다. /이은혁(한국서예문화연구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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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북일보
  • 2010.04.14 23:02

[이은혁의 글씨로 만나는 옛 글] (30)오창석(吳昌碩)의 전서연구

청말 민국초에 예원을 주도하며 중국 최후의 문인으로 일컬어지는 인물로 오창석이 있다. 오창석(1844~1927)은 초명이 준(俊), 후에 준경(俊卿)이라 하였으며, 자는 향보(香補), 창석(倉碩), 창석(蒼石)이라 하였는데 민국 원년 이후의 작품에는 거의 창석(昌碩)으로 사용하였다. 호는 부려(缶廬)를 비롯하여 고철(苦鐵), 대농(大聾), 파하정장(破荷亭長)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절강성 효풍현(孝豊縣)에서 출생하였는데 이곳이 옛날 안길현(安吉縣)에 소속되어 있었으므로 관지에 간간이 '安吉'이라 쓰곤 하였다.학서이력을 살펴보면, 29세 때부터 친구 김걸(金傑)과 항주, 소주, 상해를 유력하며 견문을 넓혔다. 항주에서 유월에게 문장과 문자훈고를 배우고, 소주에서 양견산(楊見山)에게 서법과 시문을 배웠는데 특히 양견산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또 금석수장가로 이름이 높았던 반조음(潘祖蔭), 오운(吳雲), 오대징과 가까이 지내며 고문물과 고탁본을 직접 접하였고, 그에 대한 경험은 자연스럽게 서법과 전각으로 이양되었다. 1904년에 항주 서호(西湖) 가에 인장가들의 모임인 서령인사를 설립, 초대이사장으로 추대되면서부터 예원을 주도하였다. 시집으로 「부려집」, 인보로 「삭고려인존」 「부려인존」, 서화집으로 「고철쇄금(苦鐵碎金)」 등이 전한다.흔히 오창석의 예술을 종합하여 "전각이 제일이며, 서가 다음이고, 그림이 그 다음이다."라고 일컫는데 실제로 시서화각 사절로서 손색이 없다. 특히 전각의 근간이 되는 전서를 깊이 탐구하여 독자적 서풍을 확립하였으며, 이는 다시 전각과 문인화의 밑거름이 되었다. 전각을 제일로 손꼽지만 사실 그것은 전서의 연구에서 발양된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어느 분야나 서를 근간으로 삼아야만 전각과 그림에 품격이 생긴다는 점이다. 이는 서의 격에 따라 전각과 그림의 격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오창석이 어려서부터 부친을 통해 인장을 접하였지만 유독 전서를 연구하며 필력을 연마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그가 전각가로서 또는 서화가로서 평생 임모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은 석고문(石鼓文)이다. 오창석이 임서한 석고문은 여러 본이 있다. 참고로 일본의 이현사에서 중국법서선60으로 영인한 전4폭의 임본은 75세 때에 서원사(西園寺) 공망(公望)의 부탁을 받아 쓴 것이다. 여기에 소개하는 임본은 관기에도 보이듯, 최말년기에 해당하는 82세 때(乙丑, 1925년)의 작품으로 오창석은 "을축년 한가을에 간 질환을 앓고 있던 초기에 썼으나 굳센 기운이 있다."라고 자평하였다. 오창석의 임석고문은 오늘날 문자학적 입장에서 보면 다소 이견이 있을 수 있으나 필법과 결구를 터득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다. 마종곽은 오창석이 쓴 석고문을 보고 '매화를 그리는 법으로 썼다'고 평하였는데 그만큼 금석미가 풍부함을 지적한 말이다. 이외에 창작품으로 서령인사기를 비롯하여 수진택허당기(修震澤許塘記)가 널리 알려져 있으며, 록소융시삼장(錄小戎詩三章)이 뛰어나다. 오창석의 많은 작품들을 수습해보면 법고를 통한 창신이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어떻게 자기세계를 구축해야 하는지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이상 30회를 끝으로 중국서예에 대한 순례를 마치고자 한다. /이은혁(한국서예문화연구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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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북일보
  • 2010.04.07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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