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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에 정치적 영향력은 최소화 돼야"

현 정권 들어서 문화분야와 관련한 새로운 정책은 발굴되지 않는 반면 문화계 인사들이 느끼는 정부의 권위주의와 비민주적 의사결정구조는 강화되고 있다는 주장이다.지난 11일 오후 7시 30분 전주시 경원동 참여자치전북시민연대 5층 교육관에서 열린 민주회복 3차 시국토론회에서 이종진 전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전북지회 사무처장은 "문화는 정권에 따라 좌지우지 되지 않으며 문화분야는 정치적 영향력이 가장 적게 미치는 분야여야 한다"고 밝혔다.이 전 사무처장은 "이명박 정부 들어서 문화분야를 진흥할 새로운 정책은 만들어지지 않고 정권에 맞지 않는 인사에 대한 청산작업만이 이뤄지고 있다"며 "정부 출범 2년이 다 돼 가고 있지만 정권의 철학과 비전을 실천할 문화정책은 아직도 나오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이 전 사무처장은 이어 "정책은 나오지 않는 반면 인적 청산은 꾸준히 진행돼 문화예술위원장에서 출발해 한국종합예술학교 총장 퇴출까지 기이한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며 "이로 인해 문화계가 급속도로 위축되고 있다"고 주장했다.이 전 사무처장은 "문화 분야는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 원칙이 세계적 흐름이다"며 "다행히 도내에서 지역재단 사업이 지속적으로 추진되고 있어 지역 자치단체들이 문화분야 진흥을 위한 지속적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고 제안했다.이날 양진규 전주새누리교회 담임목사는 "현 정부들어 기독교계 인사가 대거 고위직에 진출하고 친 정부성향의 기독교 단체가 세를 얻고 있지만 기독교계의 현 정부에 대한 지지도는 낮게 나타나고 있다"고 진단했다.이용준 전북사회복지사협의회 사무국장은 "이명박 정권은 복지예산을 축소하고 복지서비스를 시장화 하는 등 신자유주의 정책을 꾀하고 있어 복지정책이 시혜가 아닌 권리임을 알고 찾아가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도내 시민사회단체의 시국토론회는 다음달 학계를 중심으로 민주주의의 이론과 실천에 관해 점검하고 마무리 될 예정이다.

  • 문화재·학술
  • 임상훈
  • 2009.09.14 23:02

[행사·축제] 日 후쿠오카서 245년만에 조선통신사 재현

17세기 이후 우리나라와 일본 간 문화교류의 첨병역할을 했던 조선통신사의 화려하면서도 웅장한 행렬이 245년만인 오는 20일 일본 후쿠오카(福岡)에서 재현된다. 조선통신사문화사업회(집행위원장 강남주)는 '후쿠오카 아시안먼스 2009' 행사 기간인 이날 오전 10시 홍성률 부산시의회 부의장을 정사(正使)로 하는 조선통신사 일행이 후쿠오카 하카타(博多)항에 도착한 뒤 일본 측 환영단과 합류해 후쿠오카 마린멧세까지 행진할 예정이라고 13일 밝혔다. 또 오전 11시에는 마린멧세에서 '부산-후쿠오카 우정의 해' 기념식이 열릴 예정인데 이 자리에서 허남식 부산시장과 요시다 히로시 후쿠오카 시장은 한일 간 우호와 협력을 내용으로 하는 친서를 교환하게 된다. 이어 오후 2시30분에는 제종모 부산시의회 의장을 정사로 하고, 200여명이 참가하는 조선통신사 행렬이 레이센 공원을 출발해 카와바타 상점가를 거쳐 후쿠오카 최대의 쇼핑단지인 캐널시티까지 진행될 계획이다. 이에 앞서 19일 오후 4시 마린멧세에서 개최될 예정인 조선통신사 우정의 밤 행사에서는 비보이 그룹 XTC와 남산놀이마당의 합동공연, 부산시립무용단의 천하태평지무, 후쿠오카 힙합그룹 Be Bop Crew So와 일본 모듬북 합동공연이 있다. 이 행사에서는 또 한국 전통의상 패션쇼가 열리는데 일본 어린이 3명이 모델로 참가해 그 의미를 더할 전망이다. 이와 함께 마린멧세에서는 18일부터 20일까지 조선통신사 역사존, 부산 푸드존, 한국 전통의상 체험존 등으로 구성되는 '부산페어'가 마련된다. 조선통신사는 임진왜란이 끝난 뒤인 1607년에 467명 규모로 처음 일본에 파견된 뒤 1811년까지 모두 12차례에 걸쳐 파견됐으나 최종 목적지인 도쿄(東京)까지 가기 위해 후쿠오카를 거쳐간 것은 245년전인 1764년이 마지막이었다. 그동안 도쿄와 쓰시마(對馬島)와 오사카(大阪), 우시도마(牛窓), 오우미하치만(近江八幡), 시모노세키(下關) 등 일본 각지에서 조선통신사 행렬이 재현되기는 했으나 후쿠오카에서는 이번이 처음이다.

  • 문화재·학술
  • 연합
  • 2009.09.14 23:02

[오목대] 창암과 추사 - 조상진

창암(蒼巖) 이삼만은 1840년 9월 제주도 귀양길에 오른 추사(秋史) 김정희와 전주에서 만난다. 당시 창암은 71세의 노인이었고, 추사는 55세였다. 누가 먼저 청했는지 오르나 이 자리에는 당대 명필로 이름을 날리던 추사를 보기 위해 여러 사람이 몰렸다.창암이 쓴 글씨를 본 추사는 그 자리에서 주저없이 내뱉는다. "노인장께선 지방에서 글씨로 밥은 먹겠습니다." 그러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버렸다. 지방에서 글씨로 밥은 먹겠다? 이 말 속에는 "지방에서 행세깨나 하는 것 같으나 촌티를 벗지 못했다"는 의미가 숨어있지 않는가.어처구니 없는 일을 당한 창암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 사람이 글씨를 잘 아는지 모르지만 조선 붓의 헤지는 멋과 조선 종이의 스미는 맛은 잘 모르는 것 같더라" (유홍준의 완당평전)이와 다른 얘기도 있다. 추사가 전라감영에 들렸을 때 창암을 만나게 해 줄 것을 관찰사에게 청했다. 이에 관찰사는 창암을 만나도록 주선했다. 아무리 유배길이라 해도 오늘날 차관급인 병조및 형조참판을 지낸 인물이니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창암은 추사를 만나 밤을 새우며 서법과 서체를 논했고, 추사가 예를 다해 창암을 대하며 신필에 감탄하자 창암의 이름이 더욱 높아졌다는 것이다.그리고 어느덧 8년여의 세월이 흘렀다. 1849년 1월, 유배에서 풀려난 추사는 귀경길에 전주에 들려 창암을 찾았다. 그러나 창암은 작고한지 3년이 지난 뒤였다.그날 밤 창암의 제자를 만난 추사는 이런 말을 들었다."글씨는 한(漢)·위(魏)나라의 고전을 원전으로 삼아야지, 진(晉)나라 왕희지를 받들면 글씨가 형태만 예뻐지기 쉽다" 창암이 추사가 떠난 뒤 입버릇처럼 했다는 말이다. 이 글은 강암서예관에 소장돼 있다.이 말을 들은 추사는 깨달은 바 있어'명필창암완산이공삼만지묘(名筆蒼巖完山李公三晩之墓)'라는 묘비를 쓴다. 그리고 "어질고 위대한 서가가 누워있으니, 후생들아 감히 이 무덤을 훼손하지 말지어다"는 묘문을 남긴다. 뒤늦게 창암의 진가를 인정한 것이다.마침 창암을 기리는 휘호대회가 그의 출생지 정읍에서 열릴 예정이다. 평생 이 지역에 살며 조선 글씨의 진수를 보여준 명필의 예술혼이 새롭게 조명되었으면 한다./조상진 논설위원

  • 문화재·학술
  • 조상진
  • 2009.09.11 23:02

고창서 근대불교 대강백 '큰 스님' 조명한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 후 한국 불교를 이끌었던 대강백(大講伯·경전 강의를 잘 하는 스님) 석전 영호 대종사(1870~1948). 그를 조명하는 학술세미나 '석전 영호 대종사의 생애와 사상'이 20일 오전 10시 고창 선운사 강당에서 열린다.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 선운사가 주최하고 불교신문사와 백파사상연구소가 주관하는 이번 세미나는 석전 영호 대종사의 열반 60주기를 맞아 마련된 것. 선운사 주지 등운 법만 스님은 "석전 스님은 선승으로 한국 불교계에 그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며 "오늘날 한국 불교의 교육과 포교, 역경사업에 필요한 인재들을 양성하신 선불장으로서 후학들이 큰 스님의 학문과 덕화를 가슴 속에 새기고 계승하기 위해 세미나를 열게됐다"고 말했다.1870년 완주군 초포면에서 태어난 석전 스님은 열아홉살이 되던 해인 1888년 완주군 소양면 태조암으로 출가했다. 근대 불교의 유명한 학승으로, 미당 서정주와 가람 이병기를 비롯해 정인보, 최남선, 이광수, 홍명희, 조지훈, 신석정, 김동리 등 많은 재가 불자 문인들이 석전 스님의 가르침을 받았다. 일반인들에게는 민족의 독립을 위해 한성임시정부 건립에 참여했던 독립운동가이자 한국불교의 초대 교정을 지낸 박한영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선운사와는 추사 김정희가 하사해 선운사 백파 문중에 내려오던 호인 '석전'을 물려받아 인연을 맺게 됐다.이날 세미나에서는 혜남 스님(전 종립승가대학원장)의 기조강연 '석전 영호 스님의 강맥'을 시작으로 노권용 원광대 교수가 '석전 박한영의 불교사상과 그 유신운동', 효탄 운문사 승가대학 교수가 '석전 영호 대종사의 계율사상', 오경후 한국불교선리연구원 선임연구원이 '영호 박한영의 항일운동', 김상일 동국대 교수가 '석전 박한영의 문학관', 동국대 불표문화원 김호귀씨가 '석전의 선사상과 선종사적 배경 고찰'을 발표한다.선운사는 세미나와 함께 19일부터 11월 22일까지 '제2회 선운문화제'를 열어 석전 스님의 유묵과 '석전시초' 육필원고, 편지, 엽서 등 50여점을 전시할 예정이다. 내년까지 석전 스님이 저술한 단행본과 번역한 서적을 중심으로 전산작업을 진행, 발간하고 2012년까지 석전과 관련된 모든 자료들을 한글로 번역해 현대인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생가 복원과 석전기념관 건립도 추진될 전망이다.

  • 문화재·학술
  • 도휘정
  • 2009.09.10 23:02

[문학] 유홍준 "답사기 4,5권에 충청·서울 담겠다"

유홍준(60) 명지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창비)는 1993년 5월 첫 출간이래 꾸준한 화제를 낳아왔다. 첫 출간 당시에는 드물게 역사 학술서나 여행서 형식을 갖추지 않은 채 국내 여러 유적지를 답사하며 느낀 점을 구수한 입담으로 솔직하게 풀어썼고 현실 정치와 문화재 정책까지 신랄하게 비판해 이목을 끌었다. 1권은 물론 1994년과 1997년에 나온 2, 3권도 모두 인기를 얻었다. 1권은 2000년 100만부를 돌파했고 최근 100쇄 발행을 넘어섰다. 1∼3권을 모두 합해 7일 현재까지 230만부가 팔렸고 10일에는 200쇄 발행을 맞는다. 첫 출간 당시를 돌아보고 4, 5권 집필 계획을 소개하려 7일 기자들과 만난 유 교수는 1991년 지인들이 창간했다가 1년도 못돼 폐간한 진보계열 월간 '사회평론'에 원고료도 받지 않고 연재한 게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시작이라고 회상했다. "안병욱 교수가 월간지 구색 맞춰야 하니까 학생들 데리고 버스 안에서 떠들던 얘기를 글로 쓰라고 해서 시작했죠. 나는 문화유산을 이렇게 봤다는 얘기를 딱 3차례 쓸 테니 다음에 국문학 하는 사람, 역사 하는 사람이 바통 이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못 이어받겠다고 그래서 계속 내가 쓴 거죠."백낙청 창비 편집인이 창간호에 실린 첫 연재분을 읽고 "나중에 책으로 내자"고 청하면서 자연스럽게 책이 출간됐다. 출간 이후 책의 인기는 엄청났다. 유 교수도 "상상을 초월하는 열풍"이었다고 회고했다. "책이 계산대 바로 옆에 쌓여 있었어요. 사람들이 계산대 옆에서 바로 집어들고 살 정도였죠. 강연 요청이 많아서 1주일에 2∼3번은 했습니다. 전국 군 단위는 그때 거의 다 가봤어요."베스트셀러 대열에 오르자 책은 독자와 함께 성장했다. 휴대전화나 인터넷도 없던 시절 독자들의 편지가 '반닫이 하나' 가득 채울 정도였고 독자들의 항의와 지적으로 재판을 찍으며 고친 부분이 120군데에 달했다고 했다. 유 교수는 "왜 그렇게 사갔는지 나도 모르겠다"면서도 재차 인기 비결을 묻자 시대적으로 당시 독자들이 그런 책을 기다렸기 때문 아니겠느냐고 답했다. 이 책은 당시 "우리나라는 전 국토가 박물관"이라는 말을 유행시키면서 우리 유산에 대한 자긍심을 높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사람들이 해외여행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우리 유산은 왜 이집트 유산이나 프랑스 루브르박물관 같지 않느냐'는 생각이 있었을 때죠. 그때 '우리 눈으로 보면 우리 문화유산은 이렇다'라는 걸 보여줬던 거예요. 또 승용차 700만대 시대여서 의미 있는 여행지를 찾는 사람도 많았죠. 책이 나온 뒤에 강진 사람들이 '예전엔 대구ㆍ경북 자동차 번호판이 이렇게 많이 보인 적이 없었다'고 하더군요."또 유 교수는 문인들이 자신의 문체를 '수다체'라고 말한 적이 있다면서 "창작자 기질이 6, 학자 기질이 4인 글이라고 평가하더라"고 말하기도 했다. 유 교수는 3권 이후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이어 쓰려고도 했으나 북한행이 결정돼 '나의 북한 문화유산답사기' 상ㆍ하권을 쓰게 됐고 2004년부터 지난해 초까지 문화재청 청장을 지내면서 4권 작업과는 한동안 멀어졌다. 기약 없이 미뤄졌던 4권을 독자들은 내년 중 만나게 된다. 유 교수는 최근 전남 순천의 선암사편 1회분 원고를 썼으며 곧 지면을 골라 연재를 시작할 예정이라고 소개했다. "안 쓰려고도 했었어요. 그때는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민주화 열기로 검열 걱정 없이 글을 쓰기 시작할 때였죠. 군사 정권도 마음껏 비판할 수 있었으니 나도, 독자들도 통쾌했어요. 지금은 민주화가 다 됐으니 다르죠. 또 '문화재를 이따위로 관리하나?'라고 무책임하게 쓸 수 없고, 이제 나도 환갑을 지났는데 중견 시절에 쓴 글과 같은 톤을 유지하기도 어려워요."그럼에도, 4∼5권을 쓰기로 결심한 이유는 다루지 못한 지역 때문이었다고 그는 설명했다. 1∼3권에 충청과 제주, 서울 지역의 문화유산을 다루지 못했다는 것이다. "문화재청장 시절에 충북 지역 산성(山城)들, 지리산 지역 산사(山寺)들을 묶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 신청하는 방안을 생각했어요. 그만큼 충북 지역 산성들이 아주 멋있고, 산사들도 중국이나 일본 산사에 없는 우리만의 멋이 있죠. 산성 순례, 산사 순례를 써야겠다고 생각했어요."유 교수는 자신의 고향인 서울의 문화유산에 대해서도 쓸 계획이라면서 수도권 등지의 '옛 정취 있는 곳'을 골라 다루겠다고 말했다. "유적으로 제일 가치 있게 남은 궁궐에 대해 써야겠죠. 또 600년 왕도의 귀족이 다 살았지만, 사대문 안에 저택이 별로 남지 않았어요. 범위를 넓혀 성북동 성락원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한테 '3대 정원'을 꼽으라면 담양 소쇄원, 성락원, 보길도 부용동을 꼽을 겁니다. 그리고 인왕산에서 북악산으로 이어지는 성곽과 화가, 문인들 이야기, 경기도의 세종대왕 영릉에 대해 쓰려고 합니다. 여주 고달사지, 원주 법천사지, 흥법사지 등 폐사지들이 굉장히 멋있는데 그곳을 쓸 생각도 하고 있어요."그는 1∼3권과 시차를 두고 쓰는 4∼5권을 '시즌 2'라고 부르면서 "'부시맨', '영웅본색'은 2편이 1편보다 더 잘 나온 영화라는데 그 정도로 색채를 달리하면서도 예전 책과는 다른 메시지를 던진다면 좋지 않겠느냐?"라고 말하며 웃었다. "일단 써 보고 4권이 괜찮다고 하면 그대로 5권을 쓰고, 형편없다고 하면 분발해서 5권을 더 잘 쓰려고 합니다. (웃음)"

  • 문화재·학술
  • 연합
  • 2009.09.08 23:02

"농업 선진화 노력할 것" 정운천 전 농수산식품부장관

고창출신의 정운전 전 농림수산식품부장관이 지난 4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에서 '박비향(撲鼻香)' 출판기념회를 열고 "박비향 전도사가 되겠다"고 밝혔다.정 전 장관은 이날 "지난 '촛불정국'에 대한 아픔, 원망, 분노를 모두 다 이 자리에서 내려놓겠다"며 "과거의 갈등을 잊고 화합과 소통을 위한 전도사가 될 테니 여러분도 내게 희망의 향기를 나눠 달라"고 말했다. 그는 "정치권에 있지 않아도 농업 발전을 위해 할 일이 많다"면서 "앞으로 '박비향'브랜드를 단 친환경 농산물을 개발하는 등 농업 선진화를 위해 힘쓸 것"이라고 말했다.이날 출판기념회에는 한승수 국무총리를 비롯해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 장태평 농식품부 장관, 이영희 노동부 장관, 이만의 환경부 장관, 변도윤 여성부 장관, 이윤호 지식경제부 장관, 최경환 지경부 장관 후보자, 무소속 유성엽 의원, 박계동 국회 사무총장, 김덕룡 청와대 국민통합특보,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 백용호 국세청장, 김승유 하나금융회장, 장수만 국방부 차관, 정광수 산림청장, 오세익 한국농촌경제연구원장, 김영식 한국농업대학 총장, 전북일보 서창훈 회장, 700여명이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이명박 대통령은 축하화환을 보냈다.이날 한 총리는 축사에서 "1차 산업에 머물러 있던 우리의 농업과 수산업이 당당히 제조업 등 2, 3차 산업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터를 닦은 사람이 바로 정 전 장관이고, '농림수산식품부'란 이름도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다"고 격려했다.변도윤 장관도 "정 전 장관이 현 정부 첫 내각에 있으면서 정말 고생이 많았다"면서 "'살 맛 나는 농촌' '돈 버는 농촌'을 앞장서 외친 정 전 장관의 바람이 농촌 곳곳에 퍼져 성공하는 나라가 되길 기원한다"고 밝혔다.한편 지난해 미국산 쇠고기 파문으로 중도하차했던 정 전 장관은 이 책을 통해 대학 졸업 후 농업에 뛰어든 사연과 이명박 대통령과의 인연, 촛불시위 당시 광화문 현장을 찾았던 얘기 등을 진솔하게 풀어냈다. 제목인 '박비향'은 중국 당나라 고승인 황벽선사의 시(不是一番 寒徹骨 爭得梅花 撲鼻香)에서 따온 것으로, '코를 찌는 희망의 향기'라는 의미다.

  • 문화재·학술
  • 정진우
  • 2009.09.07 23:02

고종 '황제 어새' 보물 지정

문화재청(청장 이건무)은 대한제국 고종황제가 사용하던 '황제어새'를 보물 제1618호로 지정했다고 31일 밝혔다. 고종 황제어새는 높이 4.8㎝, 가로 5.3㎝, 세로 5.3㎝, 무게 794g으로 금ㆍ은 합금으로 만들어졌으며 인뉴(손잡이)는 거북이 형태이고 인면(印面)에는 '황제어새(皇帝御璽)' 4자가 새겨져 있다. 어새를 넣어둔 함은 황동으로 만들었으며 내부에 인주함(印朱函)이 들어있다. 이 어새는 대한제국의 국새(國璽), 어새(御璽), 어보(御寶), 보인(寶印) 등을 수록한 '보인부신총수(寶印符信總數)'에 실리지 않았고, 당시의 어보나 국새의 일반적인 크기에 비해 작아 그동안 진위 논란이 있었으나 어새가 찍힌 서신 원본이 발견돼 당시에 사용된 실물이었음이 확인됐다. 문화재청은 고종이 이탈리아 군주나 러시아 황제, 독일 황제 등에게 보낸 친서에 이 어새를 사용했다면서 일본으로부터 국권을 지키려고 비밀리에 어새를 제작해 사용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이 어새가 다른 어새보다 크기가 작고 '보인부신총수'에 실리지 않은 것도 고종이 보안을 유지하기 위해 어새를 관장한 내대신(內大臣)을 통하지 않고 휴대하기 쉽게 어새를 작게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고종은 1909년 미국인인 호머 헐버트에게 미국에 유학간 자신의 조카를 잘 돌봐달라는 편지를 보내는 등 퇴위 후 사신(私信)에도 이 어새를 사용했다. 이 어새는 합금으로 만들었으며 인면을 깎아 글자를 새겨 넣은 기법(착인법<鑿印法>) 역시 조선시대 어보 제작에 쓰이던 전통 기법을 따랐다.

  • 문화재·학술
  • 연합
  • 2009.09.01 23:02

남원서 고려시대 추정 석인상 발굴

남원의 만복사지(萬福寺址) 인근에서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인상(石人像)이 발굴됐다. 남원시는 군산대학교 박물관에 의뢰해 사적 제349호인 남원 왕정동 만복사지 주변 지역에서 석인상 1기를 출토했다고 31일 밝혔다. 현재의 만복사지 앞 도로의 갓길에서 발굴된 이 석인상은 370cm 높이며, 눈이튀어나오고 상반신에 옷을 걸치지 않은 반나체형인 점 등으로 미뤄 불교의 수호신인인왕상이나 이천상, 금강역사상일 것으로 추정된다. 전문가들은 이 석인상이 절의 입구 쪽에 자리 잡고 있어 만복사 창건 당시인 고려시대에 함께 만들어져 기도나 법회 등의 의식을 할 때 당(幢)을 달아 두는 기둥(당간지주.幢竿支柱)으로 쓰인 것으로 보고 있다. 남원시는 훼손을 막고자 이 석인상을 현재의 만복사지 내로 옮겼다. 한편, 이 석인상 인근에 같은 모양의 석인상 1기가 있는 것이 추가로 확인돼 조만간 발굴작업이 이뤄질 예정이다. 남원시 관계자는 "석인상이 당간지주로 쓰인 예가 흔치 않고, 제작 시기도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 만큼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높은 것으로 판단된다"며 "발굴작업이마무리되면 문화재 등으로 지정하는 방안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 문화재·학술
  • 연합
  • 2009.08.31 23:02

[오목대] 선유도와 이순신 - 조상진

군산항에서 배를 타고 남서쪽으로 50㎞쯤 가다보면 고군산(古群山)군도에 닿는다.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크고 작은 섬들이 어깨동무하듯 모여 있다. 행정구역상 옥도(沃島)면에 속하며 선유도를 중심으로 신시도 야미도 무녀도 장자도 등 10개의 유인도와 20여개의 무인도를 아우른다.이곳은 고려시대 이래 해운교역상 중요한 위치였다. 여송(麗宋) 무역로의 기항지로서, 몽고 일본, 멀리 대식국(아라비아) 상인까지 드나들었다. 당시는 만경현 소속이었다.조선시대 들어 태조 6년(1397)에는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해 선유도에 수군부대 만호영을 두었다. 그에 앞서 1380년 최무선이 진포(현 군산시) 일대에서 왜선 500척을 무찌른 쾌거는 유명하다. 하지만 왜구들은 수군이 있는 선유도를 우회해 금강하구지역을 노략질하곤 했다. 그래서 세종때 선유도에 있던 군산진을 진포로 옮기고 군산도(島)는 옛 고(古)자를 붙여 고군산이라 칭했다.이어 선조 2년(1569)에는 김영아문이란 관청을 설치하고 수군절제사가 상주했다. 이 수군절제사는 임피군창(軍倉) 만경 김제 부안 무장 고창 영광 등 8개 군현을 관할했다.이곳 선유도는 이순신 장군의 발자취가 남아 있다. 임진왜란 당시인 선조 30년(1597) 9월 21일 위도를 거쳐 선유도를 찾아 12일간 머무른 것이다. 명량해전에서 크게 승리한후 이 사실을 임금에게 보고하기 위해 장계를 작성하며 휴식을 취했다. 난중일기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9월 21일 새벽에 나서서 고군산도에 이르니 호남순찰사 박홍로가 내가 왔다는 말을 듣고서 배를 타고 옥구로 갔다는 것이다./ 10월 초1일 아들을 보내서 저의 모친도 보고 집안 사람들의 생사도 알아보게 하였다.… 아산(牙山)집이 적에게 분탕질 당해 잿더미가 되어 남은 것이 없다고 한다./ 10월 초3일 새벽에 배를 띄워서 법성포로 돌아왔다."또 신시도에는 신라의 대학자 최치원이 글을 읽던 월영대가 있었다.군산시는 최근 이순신 장군이 머물던 선유도 진영 복원사업을 서두르고 있다. 11월께 학술세미나를 갖고 용역을 맡길 것이라고 한다. 고군산군도는 탄력을 받고 있는 새만금사업과 함께 머지않아 국제해양관광단지로 탈바꿈될 예정이다. 이에 발맞춰 선인들의 숨결을 되살리는 것도 괜찮을듯 싶다./조상진 논설위원

  • 문화재·학술
  • 조상진
  • 2009.08.28 23:02

"전주비빔밥축제 활성화, 맛집 참여 높이고 미식가 공략해야"

전주비빔밥축제를 활성화하려면 맛집 참여도 높이기, 미식가 프로그램 도입이 적극적으로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전주대사습놀이전국대회 역시 선택과 집중을 확실히 한 체험마당을 통해 역사성과 현대성을 살리는 판으로 키워야 한다는 목소리에도 무게가 실렸다.26일 오후 2시 최명희문학관에서 열린 전주시 주최의'전주문화축제 발전 방안을 위한 워크숍'에서 정정숙 한국관광문화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전주의 축제 - 프로그램의 주민성과 예술성을 중심으로'를 통해 비빕밥축제는 2009인분의 비빔밥 비비기 등 맛집 참여도를 높인 이벤트를 강화하고, 미식가들을 적극적으로 공략하는 프로그램 마련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정 책임연구원은 이어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의 경우 30여개 유사 경연대회와 차별성을 가지려면 협력주체도 확대하면서 체험마당을 강화시켜 소리꾼만의 잔치가 아닌 모두가 어우러질 수 있는 판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강조했다.또한 정 책임연구원은 갈수록 방문객이 줄고 있는 전주약령시 한방엑스포는 체질진단, 가족영화상영 등과 같은 이벤트로 웰빙·가족주의를 지향하면서 길거리특강을 통해 한방의 산업화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을 유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이인재 경원대 교수는 "전주비빕밥축제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비빔밥인지, 비빔밥문화인지, 그것도 아니면 비빔문화인지 분명하지 않다"며 "축제의 품질은 체험 형태에 따라 결정되는 만큼 비빔밥을 문화로 접근하는 이미지 마케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전주가 전통문화중심도시를 표방하면서 내세우는 양반 이미지가 보수적으로 비춰질 수도 있지만, 역발상으로 고품격 이미지로 승화시킬 수도 있다"며 "전국에 다양한 음식관련 축제가 존재하는 만큼 어떻게 차별화할 것인지 고민해야 할 때"라고 덧붙였다.

  • 문화재·학술
  • 이화정
  • 2009.08.27 23:02

"힘 있는 봉산탈춤…대학생답게 보여주려 노력"

"선배들 사탕발림에 넘어가 동아리에 들어오게 되지만, 함께 땀 흘리며 춤을 추다 보면 생각이 달라지죠. 사람과 사람 사이에 끈끈한 정이 생기고 춤 출 때의 행복을 느끼게 되는 것 같아요."26일 전주전통문화센터에서 열린 '제14회 전국대학생마당놀이 축제'에서 '봉산탈춤'으로 대상(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을 차지한 서울예술대학 민속연구회 회장 장준혁씨(22·연기과 2). '취발이'역을 맡은 장씨는 "지난해 금상에 그쳐 아쉬웠던 만큼 올해는 더 열심히 했다"며 눈물을 글썽였다."단순히 춤만 추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가 있는 춤을 추자고 했어요. 그래서 '봉산탈춤'에 대한 연구도 많이 했죠. 무엇보다 민속연구회 역사가 32년째인데, 1기부터 선배님들이 연구해 온 것들을 후배들에게 열정적으로 전해주신 것이 큰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총 7과장 중 민속연구회가 택한 과장은 팔목중춤과 노장춤, 사자춤. 팔목중춤은 합동춤을 보여주기에 적합했으며, 노장춤은 선배들이 즐겨 추던 과장이었다. 사자춤은 '봉산탈춤'의 힘과 화려함을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 과장이라고 했다.민속연구회는 서울예대 동아리 중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 동아리. 지난 여름 영국 연극 축제 '씨어터 4 올'에 초대받았을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졸업생까지 합치면 회원이 300명이 넘지만, 이번 축제에 출전한 회원은 재학생만 20명. 연기과, 국악과, 실내디자인과, 광고창작과 등 학과는 다양하다.장씨는 "'봉산탈춤'은 다른 탈춤에 비해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며 "대학생다운 춤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한다"고 말했다. 상금 300만원은 공연을 올리거나 무료로 출연하게 될 경우 경비로 쓸 계획이라고 했다.규모가 1박2일로 확대된 올해 대회는 총 14개 단체에서 300여명이 출전했다. 김명자 심사위원장(문화재위원회 무형문화재분과 위원)은 "이 대회의 목적이 전통예술의 보존과 전승이기 때문에 연희 그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와 관련된 무대나 복식 등도 제대로 갖춰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경우가 있었으며, 개인기는 뛰어났지만 어울림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아쉬움도 있었다"고 평했다.금상은 경성대 '동래야류'와 성균관대 '강령탈춤', 은상은 서울예대·한예종·중앙대 연합 '남사당놀이'와 한남대·경상대·동아대·한국교원대·경남대·부산대 연합 '통영오광대', 동상은 한예종 '양주별산대놀이', 대불대 '정읍농악', 전북대 '강령탈춤'이 수상했다. 그러나 동상을 수상한 대불대는 심사 결과에 반발, 시상식에 참여하지 않았다.

  • 문화재·학술
  • 도휘정
  • 2009.08.27 23:02
문화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