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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나눔' 책으로 만나다

국립전주박물관(관장 김영원)이 황병근 전 전북예총 회장과 황병무씨가 기증한 유물의 총목록집 「기증유물목록집-황병근·황병무선생 기증유물」을 발간했다.「기증유물목록집」은 1999년부터 2002년까지 황병근 전 전북예총 회장이 기증한 5000여점의 유물과 1999년 황병무씨가 기증한 유물 4점을 정리한 전체 목록집.황병근 전 전북예총 회장은 1997년 전주박물관이 선친인 석전 황욱 선생의 탄생 100년을 기념, 특별전을 개최하자 선친의 유작과 자신이 수집한 고서류와 서화, 간찰, 고고미술품, 민속품 등을 박물관에 기증해왔다. 전주박물관은 기증자의 뜻을 기리기 위해 2002년 석전기념실을 마련했으며, 2002년부터 2006년까지 황병근 기증 간찰 자료집 4권과 2008년 석전 선생의 서예작품을 모은 「석전 황욱의 서예」를 간행했었다. 황병무씨는 거문고와 황종윤 초상화 등을 기증했다.전주박물관 학예연구실 이경주씨는 "이번에는 그간 발간한 간찰과 석전 서예를 제외한 전적 등을 분야별로 나누어 사진자료로 소개했으며, 후반부에는 기증유물 전체 목록도 함께 실어놨다"고 소개했다.전주박물관은 도내 공공도서관과 대학도서관에 「기증유물목록집」을 우선 배포, 시민들이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 문화재·학술
  • 도휘정
  • 2009.09.28 23:02

천문대vs상징물…첨성대 성격 두고 논쟁 '후끈'

첨성대는 천문대일까, 아니면 선덕여왕을 기리는 상징물일까?24일 KAIST 시청각실에서 열린 제4차 첨성대 대토론회에서는 첨성대의 성격을 두고 열띤 논쟁이 벌어졌다. 이번 토론회는 그동안 학계에서 논란이 됐던 첨성대의 성격에 관한 논쟁의 종지부를 찍기 위해 마련됐다. 동아시아의 천문학적 전통을 근거로 첨성대의 성격을 추론한 이문규 전북대 교수는 "신라인들도 인간을 포함한 자연계를 다스리는 대상으로 하늘을 숭배했던 고대 동아시아 천문관의 전통을 공유하고 있었을 것"이라며 "이 때문에 일식, 혜성 등 각종 천문현상을 주의 깊게 관측하였을 것으로 보인다"라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이에따라 신라인들은 하늘의 세계를 더욱 효과적으로 관찰하기 위해 첨성대를 만들었을 것"이라며 "첨성대의 구조가 현대인이 보기에는 관측기구를 설치하기 불편할 듯 보이지만, 일상의 세계와 구별되는 신성함을 드러내기 위해 출입을 일부러 불편하게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첨성대는 결국 하늘에 관한 일을 전문적으로 담당했던 신성한 공간인 신라의 천문대였다고 볼 수 있다"라고 덧붙였다. 반론에 나선 전용훈 교토산교대 연구원은 "삼국유사에 나온 '첨성대'가 현재 우리가 '첨성대'라고 부르는 경주의 석조건조물인지 여부마저 불투명하다"며 "두 첨성대가 같은 것인지 확인해줄 수 있는 실증적인 증거가 현재로서는 거의 없어, 첨성대는 그 존재부터 불확실하다"고 주장했다. 전 연구원은 또 "이 같은 사실착오에서 비롯된 추론은 공중누각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조세환 한양대 교수는 "우물은 물을 담는 그릇으로 여성의 자궁에 비유될 수 있는데 첨성대는 우물형식을 하고 있기에 여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며 "이는 첨성대를 축조한 선덕여왕의 통치와 김씨계의 왕위계승을 정당화하고, 생산과 농사의 풍요를 기원하는 구조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조 교수는 이어 "이에따라 첨성대를 단순한 천문관측대로 규정하는 것은 무리가 있고, 국가적 상징과 정치적 의미가 있는 조형물로 보인다"라고 설명했다. 이용복 서울교대 교수는 "첨성대가 과학적인 구조를 가진 과학적 활동을 한 장소라는 설과 종교적 활동을 위한 제단 또는 특별한 이념적 상징성을 가진 구조물이라는 설로 압축되지만 뚜렷하게 판단하기는 무척 어렵다"고 토로했다. 이 교수는 "그러나 건축물에 함축된 천문학적 상징성만으로 첨성대가 천문현상을 관측하던 천문대라고 확정할 수는 없다"고 단정 지었다. 한편, 이날 토론회는 동아시아 천문학적 접근, 신라사적 접근, 조경학적 접근, 종교학적 접근, 현대천문학적 접근 등 매우 다양한 접근방법이 소개됐다. 또 첨성대 1∼3차 대토론회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의 원로회원인 송상용 교수가 이전의 논쟁 성과와 당시에 제시된 과제에 대해 기조강연을 했으며, 전상운 전 성신여대 총장은 한국 문명사에서 첨성대의 의미를 발표하기도 했다.

  • 문화재·학술
  • 연합
  • 2009.09.25 23:02

"박물관, 100년간 민족 정체성 지켜와"

우리나라 최초의 박물관은 1909년 11월1일 순종 황제의 명으로 창경궁 내에 개관한 대한제국 제실박물관(帝室博物館)으로 일컬어진다. 박물관 개관 100주년을 맞은 올해 '한국박물관 개관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위원장 이어령)와 국립중앙박물관(관장 최광식)은 박물관 100년의 발자취를 정리하고 앞으로의 발전을 도모하고자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어령 100주년 사업 추진위원장은 23일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박물관이 100주년을 맞았다는 의미는 매우 크다"며 "박물관에 진열된 것은 수천년 동안 국가체제와 상관없이 내려온 우리의 정체성이 있는 물건"이라고 박물관 개관 100주년의 의미를 강조했다. 이 위원장은 "박물관은 민족의 기억을 담고 만물을 한 곳에 망라한 곳으로 모든 것을 아우른다"면서 "어린 학생들이 박물관에서 학습하는 것은 과거의 기억을 재생시키고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는 것이다. 박물관은 이제 미래를 창조하는 지적 탱크로서 기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박물관이 민족의 마음을 묻어두는 '마인드마크'가 돼야한다고 강조했다. "100층 넘는 건축물을 랜드마크라고 부르면서 사방에 짓고 있는데 21세기엔 랜드마크가 아니라 온 국민의 정체성을 세울 수 있는 '마인드마크'가 필요하다. 국립중앙박물관뿐 아니라 작은 마을의 전시관이라도 마인드마크가 될 수 있다. 민족의 마음을 묻어두는 박물관이 마인드마크가 되자. 정신적 지주 없이 방황하는 한국인들이 마음을 함양하는데 닻으로서 역할을 했으면 한다"100주년 사업 집행위원장인 최광식 국립중앙박물관장은 "1909년 순종 황제는 많은 대신의 반대에도 제실박물관을 대중에게 공개했다"며 "이후 제실박물관은 이왕가박물관으로 격하되지만, 총독부박물관과 합쳐져 해방후 국립박물관이 됐다"고 설명했다. 최 관장은 "장제스가 마오쩌둥에 패해 타이완으로 쫓겨가면서도 박물관 유물을 가져간 것은 그 유물이 국가 정통성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북한도 그 때문에 한국전쟁 때 후퇴하면서 국립박물관의 유물을 가져가려 했다"며 "100주년 기념행사는 단순히 문화기관의 기념행사가 아니라 국가의 정통성과 관련된 묵직한 무게가 있는 행사"라고 말했다. 그는 "21세기 박물관은 국가 브랜드의 상징이며 문화 콘텐츠의 보고"라면서 "국립중앙박물관 주변에 자연사박물관 등 다양한 박물관을 세워 뮤지엄 콤플렉스를 조성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100주년 기념행사 중 눈에 띄는 것은 29일부터 11월8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는 '100주년 기념 특별전-여민해락(與民偕樂)'이다. 일본 덴리대 소장 '몽유도원도', 미국 메트로폴리탄박물관의 '수월관음도', '천마도' 등 해외에 있거나 보존상 이유로 보기 어려웠던 국내외 유물 120여점을 전시한다. 제실박물관 개관 100주년이 되는 11월1일에는 100주년의 상징물로 국립중앙박물관 내 거울 연못에 청자기와 정자가 건립되며 세계 유수 박물관장 등이 참석하는 국제포럼과 전국 600여개 박물관과 미술관이 참여하는 박물관 대축전도 연이어 열린다. 연말에는 한국 박물관의 100년 역사를 정리하는 책도 나올 예정이다.

  • 문화재·학술
  • 연합
  • 2009.09.24 23:02

"정조 왕릉터 '사적지정' 취소 절차상 하자있다"

문화재청이 경기도 화성시 태안3지구 부지에서 발굴된 정조대왕 왕릉터의 사적지정 권고를 취소하는 과정에 절차상 하자가 있었다는 감사원 지적이 제기됐다. 22일 정조 효문화 보존 국민연합에 따르면 최근 감사원으로부터 '문화재청이 정조대왕 왕릉터 사적지정 권고를 취소하는 과정에서 절차상 하자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돼 문화재청에 재발방지 주의를 요구했다'는 감사 결과 통보를 받았다. 감사 결과 문화재청은 문화재위원회가 태안3택지개발지구에서 발굴된 정조의 초장지(정조의 시신이 처음 묻혔던 곳)의 재실터와 건물지 등을 사적으로 지정하도록 권고했으나 대한주택공사(주공)의 이의신청을 받은 뒤 현지조사를 거쳐 2007년 12월 사적 지정 대신 역사공원으로 보전하도록 결정했다. 현행법상 유적지가 사적으로 지정되면 반경 500m 이내의 개발행위가 금지되지만 단순 보전되면 개발할 수 있게 된다. 감사원은 이 과정에서 문화재위원회의 현지조사결과 심의 절차가 생략됐고 현지조사위원 6명 가운데 2명이 주공 자문위원으로 활동했었음이 드러나 부적절했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문화재청은 "조사위원 선정과정에는 미흡한 부분이 있었다"며 "문화재위원회 재심의는 거치지 않아도 되도록 위원회 심의에서 협의된 사항으로 보전 결정에는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이번 감사 청구 주체인 정조 효문화 보존 국민연합은 문화재청에 사적 지정 재심의를 요청하고 추가 감사를 청구한 데 이어 28일 국회 포럼을 열어 문화재청의 부당성을 알리기로 해 융건릉 등 문화유적 훼손 논란이 다시 가열될 전망이다. 이 단체는 50여개 종교.시민단체가 참여해 10여년째 왕릉터 보호를 위한 태안3지구 개발 반대운동을 벌여 오고 있다. 한편 주공은 1998년 화성시 태안읍 송산리·안녕리 일원 118만여㎡를 택지개발예정지구로 지정받고 개발을 추진하다 "왕릉터 등 문화재를 보호해야 한다"는 반발에 부닥쳐 공사를 잠정 중단한 상태다.

  • 문화재·학술
  • 연합
  • 2009.09.23 23:02

문화부 '새 저작권 구상' 추진

정부가 디지털 시대에서 저작권 권리자와 이용자의 상생 및 균형을 모색하려는 '신(新) 저작권 구상'에 나섰다. 문화체육관광부는 한국저작권위원회와 함께 22일 정동극장에서 '저작권 상생협의체' 및 '저작권포럼' 발족식을 열고 이런 구상을 공개했다. 문화부는 저작권 상생협의체 및 포럼을 통해 ▲사회적 합의에 기반을 둔 공정이용 가이드라인 수립 ▲저작권 집중관리체제의 선진화 ▲확대된 집중관리제의 단계적 도입 ▲공공저작물에 대한 공유 확대 등 방안을 모색, 추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 가운데 공정이용 가이드라인은 지난 6월 포털사이트에서 5살 짜리 소녀가 가수 손담비의 '미쳤어' 노래를 육성으로 따라 부른 손수제작물(UCC) 동영상이 저작권 침해 우려로 삭제됐던 사례처럼 저작권자의 허락없이 사용할 수 있는 범위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불확실성을 해소하고 사회적인 기준을 명확히 하려는 것이다. 또 '확대된 집중관리제도'도 저작권 출처불명 등 일정한 경우에는 저작권자의 사전 허락없이 집중 관리단체의 허락을 거쳐 저작물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로, 저작권의 이용 활성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유인촌 장관은 "그동안은 저작권을 보호하고자 규제에 힘을 쏟아 미국의 지적재산권 감시대상국 리스트에서 빠지게 되는 등 성과를 냈다"며 "이제는 저작물이 정당한 가치를 주고받으며 이용이 활성화되도록 할 때"라고 말했다. 새 저작권 구상은 복제와 전송이 자유로운 디지털 시대에서 저작권을 둘러싼 분쟁과 소송이 끊이지 않음에 따라 저작권 권리자와 이용자의 상생을 모색, 콘텐츠 산업의 발전을 추구하려는 것으로 저작권 상생협의체와 포럼은 구체적인 대안을 찾고 갈등을 대화로 풀어나가는 역할을 맡게 된다. 이날 출범한 상생협의체의 상임위원은 안문석 고려대 교수ㆍ정홍택 한국저작권단체연합회 회장ㆍ허진호 한국인터넷기업협회 회장ㆍ윤종수 대전지법 논산지원장ㆍ이해완 변호사ㆍ유병한 문화부 문화콘텐츠산업실장 등 6명으로 구성됐다. 포럼에는 이상정 한국저작권법학회 회장ㆍ홍승기 엔터테인먼트법학회 회장ㆍ이대희 고려대 교수 등이 참여한다.

  • 문화재·학술
  • 연합
  • 2009.09.23 23:02

[이은혁의 글씨로 만나는 옛 글] ②왕희지와 난정서

자고로 한·중·일을 막론하고 글씨하면 떠오르는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왕희지(王羲之)이다. 그가 출현한 이후 지금까지도 서가든 서가가 아니든 글씨를 논할 때면 언필칭 왕희지를 운운한다. 단지 천하명적을 남겼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 왕희지는 오랜 역사를 통해 수없이 재평가되면서 신화를 축적하였고, 이로써 서성(書聖)의 지위에 오르며 신비로운 인물이 되었다. 한 사람이 역사를 만들고 역사가 다시 영웅을 만든 것이다.동진(東晉)시대 목제(穆帝)의 치세기인 영화(永和) 9년, 서기로는 353년,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온다는 삼월 삼짓날, 중국 회계군 산음(山陰)에 위치한 난정(蘭亭)에서 천하의 풍류객들이 모여 사악한 기운을 씻어내는 경건한 의식을 행한 뒤, 유상곡수(流觴曲水)의 잔치를 베풀었다. 쌍세창(桑世昌)의 「난정고(蘭亭考)」에 의하면 당시 행사에는 회계내사였던 우장군(右將軍) 왕희지, 그리고 그의 아들과 인척들, 사안(謝安)과 사만(謝萬), 손작(孫綽) 등 42인이 참석하였다고 한다. 동진의 권문세가인 왕(王)·사(謝)·유(庾)씨를 비롯하여 그 지역의 현사들이 참여한 유상곡수연에는 왕희지 일가만 10명이 참가하였고, 그 중에는 희지의 장자 현지(玄之)와 5자 휘지(徽之), 7자 헌지(獻之)도 포함되어 있었다. 유상곡수연은 맑은 냇물을 끌어들여 포석정처럼 구불구불한 물길을 만들고, 여기에 잔을 띄워 잔질하며 자신의 차례가 올 때까지 시작(詩作)하는 것이다. 계곡의 아름다운 풍광이 시상을 일으키고 술이 시흥을 돋구자 하나 둘씩 시를 읊어내기 시작하였다. 예민한 감성의 소유자였던 왕희지는 4언시와 5언시를 각각 1편씩 지었다. 이렇게 두 수를 지은 사람은 11인, 한 수를 지은 사람은 15인이었으며, 시를 짓지 못하여 벌주 석 잔을 마신 사람은 16인이나 되었다. 대안도(戴安道)를 찾아간 일로 유명한 희지의 5자 휘지도 두 수를 지었으나, 역사상에서 희지와 더불어 이왕(二王)으로 불리는 7자 헌지는 끝내 시를 짓지 못하였다.잔치가 끝날 무렵, 시를 한 곳에 모아 시집을 엮자는 말에 모임의 중심이었던 왕희지가 흥을 타고 즉석에서 시집 서문을 지어 쓴다. 세로 폭이 한 자를 조금 넘긴 질긴 견사지(繭絲紙)가 앞에 놓이고 쥐수염으로 만든 예리하고 탄력 있는 서수필(鼠鬚筆)이 놓여졌다. 잠시 흥기된 마음을 가라앉혀 평심정기(平心靜氣)를 이룬 후, 이윽고 필단을 곶추세워 가슴속 깊은 언저리의 흥회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누구나 그러하듯 붓을 처음 내리 찍을 때는 신중하되 과감하여야 한다. 글씨의 기상과 크기 그리고 절주가 모두 여기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永和九年歲在癸丑暮春之初…'.무슨 일이 언제 어디서 있었는지를 알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므로 문장은 이렇게 시작하였다. 붓에 흥을 싣는 데는 행서가 가장 적격이다. 첫 행이 13자로 끝나고 다음 행으로 넘어가면서 행간이 결정되고 전체적인 장법이 예견된다. 행간이 지루하지 않으면서 대소강약의 절주를 느끼기에 최적의 조건이었다. 희지가 앞서 읊었던 두 편의 시처럼 늦은 봄날의 아름다움과 한없이 즐거운 시회를 술회하는 것으로 문장은 이어진다. 동진시대 353년 늦봄에 열린 난정에서의 멋진 풍류는 이렇게 고스란히 역사에 남겨지게 되었다. /이은혁(한국서예문화연구회 이사장)

  • 문화재·학술
  • 전북일보
  • 2009.09.23 23:02

'익산목발노래' 부활한다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호 보유자였던 박갑근 선생의 빈 자리로 맥이 끊어지다시피 했던 익산목발노래가 다시 일어선다.익산 지방에서만 전해오는 목발노래는 지게 목발에다 작대기 장단을 치면서 자진 노래 장단에 자진 춤을 추는 노동요. 8kg 정도 나가는 지게를 지고 한 판을 다 돌고나면 젊은 사람도 지쳐 숨이 차오르지만, 흰 바지저고리를 입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 이들의 모습은 백의민족의 소박한 삶을 떠올리게 한다.익산목발노래는 자신이 살던 익산시 삼기면을 중심으로 농요를 발굴하던 박갑근 선생에 의해 체계적으로 정리됐다. '제12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1970)에 익산농요로 출전해 전라북도지사상을 수상하고 '제13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1972)에서 익산목발노래로 문화공보부장관상을 수상하며 그 가치를 인정받기 시작했다. 1984년 박갑근 선생이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호 익산목발노래 보유자로 지정받았지만 전수장학생이 자주 바뀌고 이수자를 제대로 배출해 내지 못한 상황에서 2005년 선생이 세상을 떠나면서 문화재 지정도 해지됐다.새타령, 육자백이, 자진육자백이, 흥타령, 등짐노래, 목발노래(일명 '콩꺾자'), 작대기타령, 둥당게타령(일명 '꿩타령'), 상사소리로 이어지는 목발노래 전 바탕을 물려받은 사람도 강매실씨과 양기호씨 뿐. 원래 판소리를 했던 강씨는 전수장학생 기간을 다 채우지 못해 이수자가 되지 못했지만 소리를 잘 한다는 소문에 박갑근 선생이 삼고초려해 데려온 제자다. 양씨는 25년간 박갑근 선생을 따라다녀 그 누구보다 목발노래에 대한 애정이 깊다.목발노래보존회를 재정비하면서 어느새 여든이 넘은 초창기 회원들은 고문으로 물러났으며 강씨가 회장을, 양씨가 부회장을 맡기로 했다. 삼기, 웅포, 함라 등 주민 50여명이 보존회에 새롭게 합류했고, 지난 4월부터는 본격적으로 연습을 시작했다. 다행히 소품으로 쓰던 지게나 삿갓, 절구, 소가죽, 꿩 등은 창고에 남아있었다.보존회를 새롭게 꾸린 이상 이들의 목표는 문화재 재지정. 그러나 더 큰 뜻은 농경문화가 사라지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에 목발노래를 농경문화의 꽃으로 피워보는 데 있다. 강씨는 "세대 교체가 이뤄지면서 아직 숙련되지 않은 회원들이 있지만, 최대한 원형에 가깝게 복원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양씨는 "당초 전주세계소리축제에서 공연을 하기로 예정돼 있었는데 축제가 취소되면서 시연 기회가 사라졌다"며 많은 사람들에게 익산목발노래를 보여줄 수 있는 자리를 알아보고 있다고 덧붙였다.

  • 문화재·학술
  • 도휘정
  • 2009.09.22 23:02

도내 3곳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지정

고창 선운산 도솔계곡과 무주구천동 일사대, 무주구천동 파회·수심대 등 6곳이 국가지정문화재인 명승으로 지정됐다.문화재청(청장 이건무) 17일 전북지역 3곳을 포함해 전북 및 광주·전남지역 6곳을 명승으로 지정했다고 밝혔다.명승 제54호인 고창 선운산 도솔계곡은 화산 암석들이 거대한 수직 암벽을 이루는 수려한 경관과 도솔천 내원궁, 도솔암, 나한전, 마애불 등 불교 관련 문화재, 천연기념물이 분포해 문화유산적 가치가 큰 곳이다.또 명승 제55호인 무주구천동 일사대는 고종 때 연재 송병선이 아름다운 경치에 반해 은거하면서 정자 '서벽정'을 짓고 후진을 양성했던 곳으로 서벽정 서쪽에 배의 돛대 모양으로 우뚝 솟은 경관이 빼어나다.명승 제56호 무주구천동 파회·수심대는 연재 송병선이 고요한 소(沼)에 잠겼던 물이 급류를 타면서 기암에 부딪쳐 휘돌아간 파회와 일지대사가 이곳의 맑은 물에 비치는 그림자를 보고 도를 깨우쳤다고 전해지는 무주구천동 수심대로 풍광이 아름답다.전남·광주지역에서는 '담양 식영정 일원'(제57호)과 '담양 명옥헌 원림'(제58호), '해남 달마산 미황사 일원'(제59호)이 지정됐다.문화재청은 이번에 지정한 6개소를 국민이 함께 향유할 수 있도록 관광자원으로 보존·활용해나갈 방침이라고 밝혔다.

  • 문화재·학술
  • 이화정
  • 2009.09.18 23:02

"농촌 전통문화서 친환경농업 찾아야"

생태계 보존 및 인간 존엄성 회복을 위한 친환경 대안농업의 지혜는 우리나라의 전통농업과 그 문화체계에서 찾아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구자옥 한국농업사학회 회장(전남대 명예교수)은 17일 전북대에서 열린 '제9회 동아시아 농업사 국제학술대회'기조발표를 통해 "현대 농업은 생태적·친환경적이어야 하고 동시에 생산성 향상을 추구해야 하는 딜레마에 직면해 있다"면서 그 해법으로 전통농업과 문화의 가치를 강조했다.구교수는 "지나치게 잘못 내달려 온 현대농법은 전통농업을 근본적으로 망각하거나 매도하게 했다"면서 "이로인해 지력감퇴와 농약공해·곡물자급률 하락은 물론, 농업의 근원적 포기현상까지 늘고 있다"고 말했다.그는 이어 "농업체계를 하루 아침에 100년 전의 상태로 되돌릴 수는 없지만 새로운 길을 찾는 노력은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면서 "농촌의 전통문화는 농가와 농지에 바탕을 두는 '두레'식 공동체 삶과 상호부조적인 정신으로 재건돼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우리나라 농촌에는 스스로 자긍심을 갖고 지켜갈 수 있는 수많은 전통 기술과 문화가 있는 만큼, 이를 되살려 현대 농업의 과제인 지속적·생태적·친환경적인 영농체계를 구축해야 한다는 설명이다.전북대 '인문한국 쌀·삶·문명연구원'이 '동아시아 전통농업의 재조명'을 주제로 한국농업사학회 및 중국·일본농업사학회와 공동 주최한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17~18일 이틀동안 한·중·일과 프랑스·러시아 등 국내·외 학자 40명이 발표와 토론에 참여한다.

  • 문화재·학술
  • 김종표
  • 2009.09.18 23:02

선운산 도솔계곡 등 6곳 명승 지정

문화재청은 고창 선운산 도솔계곡, 무주구천동일사대(一士臺) 일원과 파회, 수심대(水心臺) 일원, 담양 식영정(息影亭) 일원, 담양 명옥헌(鳴玉軒) 원림(園林), 해남 달마산 미황사 일원을 국가지정문화재의 하나인 명승으로 지정했다고 17일 밝혔다. 선운산 도솔계곡 일원(명승 제54호)은 화산 작용으로 형성된 거대한 수직암벽이있어 자연경관이 수려하고 이 일대에 도솔천 내원궁, 도솔암, 나한전, 마애불 등 불교 관련 문화재들도 있다. 무주구천동 일사대(명승 제55호)는 하천의 침식 작용에 의해 발달한 절벽으로고종 때 연재(淵齋) 송병선이 정자를 짓고 즐겼던 곳이며 파회, 수심대 일원(명승제56호)은 기암괴석이 절벽을 이루며 병풍처럼 서있어 마치 금강산과 같다고 해 일명 '소금강'으로 불리는 경승지다. 담양 식영정(명승 제57호)은 조선 명종 때 서하당(棲霞堂) 김성원이 지은 정자로, 송강(松江) 정철이 한시와 가사, 단가 등을 남겼던 곳이다. 명옥헌 원림(명승 제58호)은 조선 중기 이정(以井) 오명주가 선친인 명곡(明谷)오희도를 기리기 위해 정자를 지은뒤 주변에 연못을 파고 적송 등을 심어 가꾼 정원이며 달마산 미황사(명승 제59호)는 신라 경덕왕 8년(749년)에 창건된 절이다. <사진 설명: 무주구천동 일사대(위)와 담양 식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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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
  • 2009.09.17 23:02

미륵사지 유물전시관 새단장

미륵사지유물전시관이 새롭게 단장된다.전라북도는 이달부터 2010년 1월까지 미륵사지유물전시관의 전시와 시설을 국립박물관 수준으로 향상시키기 위해 9억6000만원을 들여 전시관 전면 리모델링 공사를 실시한다고 밝혔다.리모델링 공사는 1997년 5월 9일 미륵사지유물전시관 개관 이후 12년 만에 처음 실시되는 것으로, 유물의 안전한 보관 전시와 관람객들을 위한 보안시설과 청정 소화시설도 보완할 예정이다.리모델링과 함께 전시도 5개 주제 5개 실로 재정비된다. 1주제는 장엄한 규모의 삼국 최대 사찰 '미륵사'의 모습을, 2주제는 기록으로 알아보는 '미륵사 창건과 변천사', 3주제는 유물로 살펴보는 '미륵사의 변천', 4주제는 확인하고 만져보고 이해하는 '백제시대 미륵사 건축문화', 5주제는 탐색하고 체험하는 미륵사지 비밀의 방 '어린이 체험실'로 구성, 1000여 년간의 유물과 자료 400여점을 전시한다. 미륵사에 대한 종합설명을 담은 영상물은 한국어·영어·일어·중국어 등 4개 국어로 제작되며, 미륵사와 관련된 애니메이션과 검색 프로그램 등도 설치된다.도 문화예술과 문화재담당 박국구씨는 "현재 전시관의 전시 구성에서 백제의 호국사찰이면서 삼국 최대 규모였던 미륵사의 특징적 역사·문화 등을 적절하게 표현하지 못한 부분을 검토해 백제시대 사찰문화를 대표하는 전시관으로 위상을 재정립하고 특성화하는 새로운 출발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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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휘정
  • 2009.09.17 23:02

백련암 장경각서 16세기 희귀 禪宗 언해본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이 중국 당나라 선승의 게송(偈頌)에 주석을 붙인 한문서적을 73년 뒤에 한글로 인쇄한 16세기 희귀 언해본이 발견됐다. 해인사 백련암의 원택스님은 15일 조계종 총무원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올해 4월 중순 백련암 장경각 서고에서 성철 큰스님(1912-1993)이 남긴 장서를 정리하다가 '십현담(十玄談) 언해본'을 발견했다"며 "'십현담 언해본'은 문화재 서지목록이나 국립도서관ㆍ각 대학 서지목록에도 없는 희귀본 또는 유일본으로 보인다"고 발표했다. '십현담'은 중국 선종의 한 종파인 조동종(曹洞宗) 스님인 당나라 동안상찰(同安常察 ?∼961) 선사가 저술한 10가지 게송으로, 법화사상과 화엄사상을 포함한 조동종의 가풍과 수행자 실천지침 등을 아름다운 7언 율시로 노래한 선시다. 후에 역시 중국 선종 종파인 법안종(法眼宗)의 법안문익(法眼文益 885-958) 선사가 이 십현담에 주석을 달았다. 십현담은 우리나라에 건너와서는 조동종의 가풍에 심취했던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이 조선 성종 6년인 1475년에 다시 주석을 붙여 한문으로 쓴 '십현담 요해(要解)'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이번에 발견된 '십현담 언해본'은 김시습의 '십현담 요해'를 한글로 번역한 것으로, '십현담 요해'가 나온 지 73년 만인 1548년(명종 2년) 강화도 정수사에서 판각한 것이다. '십현담 언해본'의 서명에는 "성화 을미년 도절(桃節) 재생패(哉生覇)에 청한자(淸寒子) 필추(苾芻) 설잠(雪岑)이 폭천산에서 주를 쓰다"라고 돼 있다. 여기에서 '성화 을미년'은 조선 성종 6년, 김시습의 나이 41살 때이고, '도절 재생패'는 3월16일로 해석돼, 단종 폐위 후 20대 초반에 출가해 자신을 '청한자 필추 설잠'이라고 불렀던 김시습이 수락산 기슭 폭천정사에서 지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십현담 언해본'은 조선 세조∼성종 때인 15세기 중후반 간경도감에서 간행된 불경류를 한글로 옮긴 언해본이 아니라 16세기 전반기에 드물게 언해된 선종 서적이어서 의미가 있다고 원택스님은 설명했다. 성철스님의 상좌를 지냈고 성철스님이 오래 머무른 백련암의 감원(암자의 제일 어른스님)을 맡고 있는 원택스님은 "이번에 성철 큰스님의 서책을 정리하면서 귀한 고서와 언해본들을 발견해 서지학자들에게 자문을 구하고 있다"며 "검토결과 문화재로 가치가 있으면 문화재지정을 신청하고, 언해본들은 영인본으로 만들어 국어고문학자들의 연구자료로 활동하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성철스님은 후학들에게 '책 보지 말라'며 참선 수행만을 강조한 것으로 알려져있으나 스님은 장경각에 1만권이 넘는 장서를 보유하고 계셨으며 일일이 읽은 책 리스트를 작성하고 요약까지 해놓았다"고 전했다. 이번 '십현담 언해본'에 대해 서병패 문화재 전문위원은 "기존의 '십현담요해'에 수록된 주석을 간결하게 하여 구성한 독립적인 언해본으로 희귀본에 속한다"며 "한글에는 반치음 'ㅿ'과 꼭지 'ㆁ'이 사용되고 있어 16세기 중엽 국어사연구와 서지학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는 견해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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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
  • 2009.09.16 23:02

[이은혁의 글씨로 만나는 옛 글] ①붓길 따라 떠나는 서예순례

<< 매주 수요일 서예가 이은혁 한국서예문화연구회 이사장의 '글씨로 만나는 옛 글'이 연재됩니다. 전북 서예의 맥은 한국 서단의 중요한 한 축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오랜 역사와 단단한 뿌리를 가지고 있어, 서예에 대한 관심은 곧 우리 지역의 전통과 문화에 대한 관심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먹을 갈고 붓을 드는 것은 깊이 생각하고 여유를 가지는 일입니다. 바쁜 일상이 문제라면, 이 이사장의 '글씨로 만나는 옛 글'을 통해 묵향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세간에서 일컫는 서예는 예술의 한 분야로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옛날에는 단음절로 '서(書)'라고 하였다. 쉽게 우리말로 풀이하여 '글씨'라고 환치할 수 있는데, 여기에는 쓰는 행위와 그로 인해 남겨진 결과물 그리고 그 모양(태)까지도 포함되어 있다. '씀(書)'에는 개관적 대상물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그 대상물은 다름 아닌 문자이다. '서'가 인간의 삶에서 한시라도 분리될 수 없는 언어생활과 직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요즘 항간에 회자되는 '소통'의 매개체로서 무형의 말이 있고 유형의 문자가 있다. 말은 순식간에 행해지고 사라지는 반면 문자로 쓰여진 것은 시간적 공간적 연속성을 가진다. 여기에서 '서'의 역사성을 찾을 수 있다. 이렇듯 '서'는 역사적 가치를 지닌 채 수 천년의 세월을 우리와 함께 해온 것이다.이후, 모필(붓)의 발명은 일상적인 쓰는 행위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붓을 사용함으로써 문자의 표현방식이 보다 다양해졌고, 그로 인하여 붓을 자유자재로 제어할 수 있는 기능 또한 요구되었다. 이렇듯 개개인의 습성이 글씨에 자연스럽게 발로하는 문자서사가 생활화되면서 사람들은 자신만의 미감을 가미하였다. 그 가운데 시대의 미감을 반영한 아름다운 글씨는 하나의 형식을 이루며 대유행을 거치는데 이것이 이른바 '서체(書體)'이다. '서체'는 우리말로 '글씨꼴', 더 축약하여 '글꼴'이라 할 수 있고, 서양식 표현을 빌리자면 '스타일'에 해당한다. 이른바 전서·예서·해서·행서·초서로 불리는 서체가 시대에 따라 나타나며 마침내 이를 선도하는 전문 서가(書家)가 출현한다. 역사에서는 이 시점을 대개 중국 한대로 규정한다. 이전에도 문자가 있고 서사가 행해졌지만 주로 주술적 의미나 제왕적 권위를 대변하는 특수적 상황에서 기인하기 때문에 개인의 심미의식이 가미된 후대의 서사활동과는 구분 지어 논해야 한다.개인의 심미의식이 글씨에 투영됨으로써 비로소 서가와 서품(書品)이 세상에 공존하게 되었다. 앞서 말한 문자의 기록이라는 역사적 가치에다 예술적 가치를 보태게 된 것이다. 일치일란(一治一亂)의 순환의 역사 속에서 수많은 서가가 부침하며 다시 재현할 수 없는 불후의 필적들을 남겼다. 일필휘지로 대변되는 즉흥적인 서가 역사로서 또는 서품으로서 고색창연한 자태를 간직한 채 당당히 우리 앞에 서 있다. 중국의 서법, 우리의 서예, 일본의 서도라는 서로 다른 명칭이 있지만, 유독 서예는 예술적 감각이 탁월한 우리 민족성을 대변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유가경전에 유어예(游於藝)라는 말이 있듯, 우리민족은 일상에서 격조 있는 삶을 지향했던 것이다.우리 고장 전북은 천년의 역사를 간직하여 유난히 전통의 텃새가 강한 곳이다. 기질이 순박하고 여유가 있어 맛과 멋을 동시에 선보였고, 지금 그 여유 속에서 느림의 철학이라 할 수 있는 서예의 꽃이 만발하고 있다. 어쩌면 천년의 전통을 토대로 역사적 가치와 예술적 삶을 중시하는 성향이 맞아떨어진 필연적 결과인지도 모른다. 이제부터 역사적으로 필명을 드날린 서가들의 붓길을 따라 예술적 순례를 떠나고자 한다. 때로는 서가에 얽힌 고사나 일화가 등장할 것이고, 서품에 담긴 멋과 철학을 이야기하며 음미할 것이다. 독자제현의 성원과 가르침을 기대한다. /이은혁(한국서예문화연구회 이사장)※ (사)한국서예문화연구회 이은혁 이사장은 1990년 '대한민국서예대전' 대상을 수상, 현재 초대작가로 활동 중인 서예가이다.한문학으로 문학박사를 받아 전주대 한문교육과 겸임교수로도 재직 중이며 저서로는 「서예담론 보고읽는 서예」 등이, 역서로는 「조선환여승람(김제)」 「중국서예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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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북일보
  • 2009.09.16 23:02

" 이순신, 부하(김위) 장례 마치고 바위에 앉아 눈물 흘려"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선유도에 진영을 설치했다는 역사적 기록에 따라 군산시가 복원사업을 추진하는 데 이어 고창 첨금정(沾襟亭)에 남아있는 이순신의 명문에 대한 연구결과가 발표돼 관심을 끌고 있다.전북역사문화학회와 전라금석문연구회는 "임진왜란과 이순신하면 전남 여수나 경남 통영의 전유물로 느껴오던 차에 군산시가 복원사업을 한다고 해 고창군 무장면 송현리 논 가운데 있는 바위에 새겨진 이순신의 명문을 찾아 조사했다"며 "이 순절비가 '첨금정'이라고 불려지게 된 이유를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만력이십오년 시월 통제사 이순신 명(萬曆二十五年 十月 統制使 李舜臣 銘)'이라고 새겨져 있는 첨금정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충무공 진영의 진하장으로 임명돼 진도 전투에서 독화살을 맞아 순절한 김위(1567~1597)가 주인공.이용엽 전라금석문연구회 고문은 "'김해김씨 장사군파' 후손 김영목의 증언과 족보, 선무원종공신녹원(1965) 등을 검토했다"며 "이순신은 총애하던 부하가 전사하니 슬픔을 억제할 수 없어 출장길에 친히 관을 하사해 입관한 후 위의 본가까지 호송·치장하고 묘 앞 바위에 앉아 눈물로 갑옷을 적시며 국사를 한탄, 이 때부터 김위의 순절비를 첨금정이라고 일컫게 됐다"고 말했다.이 고문은 "순절비 명문은 충무공이 위의 장례를 마치고 바위에 앉아 눈물을 흘리며 석별의 정을 나누는 내용으로 보인다"며 "이와 같이 유서 깊은 유적이 400년이 넘도록 제대로 빛을 보지 못하고 묻혀 있어 안타깝다"고 덧붙였다.한편, 「무장읍지」(1917)에는 '첨금정은 정인 송별시 일가족이 서로 눈물을 흘리면서 석별의 정을 나누었던 곳'이라고 기록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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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휘정
  • 2009.09.15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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