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체육 비사] (27)전북체육계의 산 증인 라혁일 전 사무처장
전북에서 운동을 해 온 선수나 지도자를 망라하고 10대에서 80대까지 라혁일(64) 전 도 체육회사무처장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젊은 시절부터 평생을 체육계에 몸담아오면서 전북 체육사의 고비고비마다 온몸으로 치열하게 부대껴온 그의 특이한 이력 때문이다.체육인 라혁일, 그가 겪어온 전북 체육의 역사와 잘 알려지지 않은 에피소드를 들어봤다.전주종합경기장 입구에 있는 '전북체육회관'은 체육인들의 요람으로 도내 체육인들의 긍지와 자긍심을 상징하는 건물이다.무려 20년 넘게 체육계 원로들이 체육회관 건립을 위해 힘을 모았지만, 결국 체육회관을 만든 것은 라혁일 전 처장이었다.그가 체육계를 떠난 뒤 준공됐지만, '라혁일'하면 맨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가 체육회관 건립임을 부인키 어렵다.김제시 신풍동에서 태어난 라혁일 전 사무처장은 김제중, 김제고, 전주대 영문과를 졸업한 뒤 전주대 행정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김제 중앙초 시절 그는 꽤 운동을 잘해 육상 선수를 지냈다.훗날 핸드볼 국가대표 선수를 거쳐 김제 봉남중 교장으로 퇴임한 김홍식, 역시 핸드볼 선수를 거쳐 현 도체육회 감사를 맡고 있는 권오형 등이 그와 어린 시절 함께 운동했던 사람들이다.고교때는 태권도와 복싱도 곧장 잘했으나, 그는 상급학교에 진학하면서 운동보다는 공부쪽을 택했다.태어난지 단 백일만에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그의 조부모님은 "집안의 대를 이를 독자인데 운동을 시킬 수 없다"며 공부를 권했다.하지만 고교 졸업 후 그는 대학진학에 실패하면서 한동안 서울이나 전주 등지에서 방황하는 시간을 지냈다.그때 만난 사촌 형(정익환 전 한국일보 전북 주재기자)의 따끔한 충고 하나가 그의 인생을 바꾸게 된다.도 축구협회 섭외이사였던 정익환씨의 소개로 라 전 처장은 1971년 도 축구협회 사무국장으로 체육계에 첫발을 내딛는다.당시 도 축구협회장은 이동원 동진농조조합장이었다.그때만 해도 도 축구협회는 체육회 산하 경기단체중 가장 규모와 영향력이 컸기에 젊은 시절 라혁일에겐 많은 사람을 알게되고, 일을 추진하는 흐름을 익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당시 한창 날리던 차경복·최재모·최길수·정태훈·권이운 등 내로라하는 축구 국가대표 선수들이 모두 전북 출신이었다.요즘같으면 전북 출신 축구 국가대표는 십년에 한명이나 나올까, 말까 할 정도여서 당시 전북의 축구 위상을 가늠케 한다.도내 경기단체 첫 유급직원으로 들어간 그는 전주대(당시엔 야간)를 다니며 '주경야독' 했고, 대학졸업과 동시에 영어 교사로 임용돼 1975년 진안 안천중 교사로 부임했다.하지만 도 체육회 유평수 사무처장은 그를 불러 교사를 그만두고 체육회에서 근무할 것을 권유했다.도 축구협회 직원으로서 일을 센스있게 처리하는 그를 눈여겨 본 때문이다.유평수씨의 권유로 도 체육회에 몸담은 라혁일은 1976년 11월부터 2006년말까지 만 30년간 근무한다.도 축구협회를 포함, 만 35년간 근무하면서 잊지 못할 추억들이 수없이 많다.1974년 서울서 열린 제55회 전국체전때 전북이 전무후무하게도 종합 준우승을 했던 쾌거는 지금도 가슴에 생생하다.폐회식 직전 메인스타디움서 열린 전북대 전남간 축구 일반부 결승전은 시도간 순위를 바꾸는 중요한 결전이었다.허정무 등이 포진한 전남은 한수위였고, 선취골까지 허용했으나 전북은 차경복·최재모 등이 투혼을 불사르며 2대 1 역전승을 거둔다.생활이 어려웠던 넝마주이, 구두닦이, 중국집 배달원 들이 특별역차로 서울역에 도착하는 전북출신 선수단을 열렬히 환영하는 모습을 보면서 향토애가 어떤 것인지 깨달았다.체육분야에서 만큼은 전국 수위를 다투는 모습에 출향인들은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곤 했다.1977년 광주에서 열린 전국체전때도 전북은 종합 3위의 쾌거를 일궈냈다.1973년 10월부터 78년 12월까지 도백을 지냈던 황인성 전 지사는 별명이 '황총화'였다.도민총화를 제일성으로 부르짖었고, 그 수단은 바로 체육이었다.체육계 인사를 만날때마다 황인성 전 지사는 "당신들이 잘해줘야 돼, 차별받고 고통받는 도민들이 어디에서 기쁨을 찾겠어"하며 독려하곤 했다.1976년 대구체전이 막바지에 이르면서 전북은 경기도와 3위 자리를 놓고 수십점 차이로 경합하게 된다.이때 전북 출신 전영인 선수(태권도 패더급)를 대회 전날 그의 소속팀(인천체육전문대) 감독이 데리고 잠적하면서 전북은 4위에 그친다.대회는 끝났지만, 도내 체육인들이 발끈해 이를 문제삼자 인천체육전문대 학장이 전주를 찾아 사과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라혁일은 세상의 이치를 깨달아갔다.라 전 처장은 1973년 전주대 축구팀 코치로서 겪었던 웃지못할 일화도 있다.차범근, 황재만 등이 포진한 고려대는 그해 단 한번도 패하지 않은 무적함대였다.전국체전서 전주대는 준결승에서 고려대와 맞섰는데 전주대가 선취골을 넣었다.하지만 기쁨도 잠시, 경기 결과는 1대 10으로 전주대의 대패였다.체육회에서 잔뼈가 굵은 그는 2004년말 꿈에도 그리던 체육회 사무처장 자리에 오른다.체육회에 말단 직원으로 들어가 사무처장에 오른 것은 전국 16개 시·도 체육회에서 그가 첫번째였다.전북 체육의 문제점과 해법은 물론, 시시콜콜한 부분까지 워낙 잘 알았지만 처장 취임 첫해인 2005년 울산에서 열린 전국체육대회에서 치욕의 14위를 하면서 그는 추락하는 전북의 위상을 실감했다.바로 다음해 그는 지사 선거때 정치에 개입했다는 이유로 일부의 미움을 사면서 '자의반 타의반' 체육회를 떠나는 아픔도 겪는다.체육계를 떠난 그는 아쉬웠지만, 새롭게 출발했다.한국자유총연맹 전북지부회장을 역임했고, 지금은 '한국청소년야생동식물보호단'총재로 활동하면서 손자뻘되는 어린이들을 지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