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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목대] 한글의 조형미

브리트니 스피어스가 ‘신흥 호남 향우회’라는 글자가 선명한 옷을 입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우리나라와 관련이 없어 보이는 외국인들 특히 유명인사들에게서 우리의 일상을 발견한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이런 일이 결코 우연히 그리고 어쩌다가 한 번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데 있다.지난 2월 26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파리 프레타 포르테 컬렉션(Paris Pret-a-porter Collection)’에 등장한 모델들은 한글이 새겨진 옷 51벌을 소개했다. 이 행사는 세계 4대 패션 행사 중 하나로 꼽힌다고 한다. 이런 자리에서 한글로 디자인한 옷이 소개된다는 것은 한글이 미적인 소재로도 손색이 없음을 의미한다. 이런 옷을 선보인 주인공은 한국의 패션디자이너 이상봉씨이다.그가 파리에서 활동하게 된 계기는 IMF 외환위기라고 하니 자발적으로 해외진출을 생각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그런 그에게서 한글이 작품으로 다가온 것은 한국의 문화유산 중 한글이 제일 독창적이고 평한 프랑스 친구 때문이었다고 한다. 서양인이 봤을 때 다른 문화유산은 한·중·일이 비슷한 편인데 한글만은 예외적이라는 것이다. 한글이 모양새가 서양인의 눈에는 매우 독특한 구조를 가진 문자로 보인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생소하다. 우리에게는 이제 너무나 익숙한 글자꼴이 바로 한글이기 때문에 외국인의 눈에 비치는 한글의 조형미를 쉽게 놓치지 않았나 싶다.한글은 자음과 모음의 결합이 여느 문자와 다르다. 일반적으로 문자는 선형적인 순서를 취한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든지 아니면 그 반대 방향으로 적어 나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한글은 자음의 오른편에서 모음은 쓰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아래쪽으로 모음을 붙이기도 한다. 그러고 이러한 조합으로 한 음절이 마무리되는 것이 아니다. 다시 그 아래쪽으로 자음을 덧붙여 음절을 완성시키기도 한다. 이처럼 오른쪽과 상하의 방향으로 덧붙이면서 자음과 모음을 조합하는 글자가 외국인들의 눈에는 생소해 보일 만도 하다.패션다자이너 이상봉씨가 한글을 활용한 동기는 단순했다. 제품의 판매와 직결될 수 있겠다는 확신이 섰기 때문이다. 프랑스 파리의 패션시장에서 프랑스도 아닌 대한민국의 애국심에 호소한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한글이 세계의 디자인 무대에서도 통할 수 있다는 사실은 희망적이다.

  • 지역일반
  • 전북일보
  • 2006.08.29 23:02

6형제 남다른 우애·孝 실천...20여년 추도문 책으로 엮어

“20여년동안 한해도 거르지 않고 여섯형제들이 모였습니다. 마침 아버님 기일이 어버이날 즈음해 더욱 의미가 있었던 것 같아요. 형제들이 모두 추도문을 준비해 왔는데, 모으니 제법 분량이 되더군요.”‘가족문집’을 엮은 대가족이 있다. 김종원(주)야미대표) 종숙(주부) 종재(인천남구청근무) 종미(주부) 종심(통계청공무원) 종수(교사)씨 가족이 최근 가족문집 「어머니의 손」(신아출판사)을 엮어내 화제다.“가족의 위기라고들 하지 않습니까. 가정윤리가 붕괴되고, 이혼 등으로 인한 가족해체도 심각한 상황이고요. 그래서 만든 겁니다. 가족간의 화목이, 부모에 대한 효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함께 생각해보고 싶었습니다.”종원씨 형제는 남다른 우애와 효를 실천하고 있다. 아버지 유고후 20년동안 추도예배에 여섯형제가 늘 함께했다. 여름마다 가족여행도 빠트리지 않았다. 예전 같으면 남다를 일도 아니지만 개인주의가 강조되는 요즘사회에선 보기 드문 가족문화다. 추도예배때도 여섯형제가 돌아가며 추도문을 써왔다. 교육자였던 아버지의 유훈을 되새기며, 어머니에 대한 효를 다짐하고 부부간의 화목과 올바른 자녀교육을 약속하는 시간이다. “가족문집은 잊혀졌던 기억들을 되살리고 소중한 추억을 함께 간직하기 위해 엮었습니다.” 5년여전부터 가족문집을 엮어야겠다는 계획을 세웠다는 종원씨네는 실제로 문집에 아버지를 기린 추도문을 앞세웠고, 기억에 남을만한 사진과 손자 손녀들이 할머니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 각종 글과 재주거리를 모았다. 큰사위 신희교 우석대교수는 “형제들이 하나씩 보관하기 위해 엮은 것인데 묶어내니 더욱 의미가 있다”며 “다음에는 손자 손녀들이 중심이 되는 가족문집을 다시 엮어볼 계획”이라고 말했다.

  • 지역일반
  • 은수정
  • 2006.08.29 23:02

[이치백의 一日五話] '국치일' 한일 합방늑약 발표

《8월 29일》①국치일일제는 1910년 8월 22일, 강제로 한일합방늑약의 조인을 끝내놓고도 발표를 1주일 후인 오늘에야 공포했다. 이날 통감에서 총독이 된 데라우치(寺內正毅)는 기자들을 모아놓고 푸짐한 주연을 베풀었다. 오늘은 우리나라 천추의 한인 국치일이다. 다시는 이런 나라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②의제는 교육문제미국망명에서 돌아온 서재필 등이 조직한 독립협회는 1897년 오늘, 첫 토론회를 개최했다. 의제는 '조선의 급선무는 교육'이었다. 내용은 민권·자강·개혁을 위해 학교를 설립하자는 것이었다. 토론자는 이경직, 조병건, 백성기, 이건호였고, 정부측에선 이완용, 한규설 등이 참석했다.③영국, 아편전쟁에 승리아편은 영국이 인도를 지배하는 재원을 조달하는 물건이었다. 그래서 영국은 청나라에 아편을 강매하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끝내는 아편전쟁을 일으켰다. 결국 청국의 패배로 1842년의 오늘, 남경조약이 체결됐다. 이 패배로 청국은 홍콩을 영국에 대여했다.④모던 재즈음악의 개척미국에서 모던 재즈음악의 기초를 만든 명 색스폰 주자 챠리 파카는 1920년 오늘 캔자스시티에서 출생했다. 그는 스윙을 타파하고 팝 스타일로 미국의 새 대중음악을 개척한 것이다. 그런데 말년에는 마약 상습중독자로 폐인이 된 채 죽었다. ⑤버그만 암으로 사망매혹적인 허리우드 미인 여배우 잉그리드 버그만이 1982년의 오늘, 암으로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스웨덴 출신인 그녀는 미국영화계에 발탁되어 그 미모와 연기력으로 많은 인기를 누렸다. 출연한 작품'카사브랑카'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등이 유명하다.

  • 지역일반
  • 전북일보
  • 2006.08.29 23:02

[딱따구리] 꿀먹은 인사위원회

“이번 인사는 직렬을 철저히 무시하고 전문성과 형평성이 완전히 결여된 단체장의 독선입니다”.지난 25일 단행된 임실군 인사내용에 불만을 품은 공직계 일부의 목소리다.임실군의 이번 인사는 전체 190여명이 승진과 자리를 이동한 전무후무한 물갈이였다.하지만 수산과 통신 등 전문직을 읍·면으로 이동한 것과 복수직이 아닌 곳에 사무관을 배치한 점 등은 단체장의 독선임이 농후하다.더욱이 군청 계장을 읍·면 계장으로 배치한 것과 특정학교 출신을 좌천한 것도 공직계 안팎에서는 보복성 인사로 풀이하고 있다.하지만 이에대해 인사권자인 김진억 군수는 우선 해이해진 공직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불가피했다는 설명이다.또 선거와 관련 근무시간에 공무원들이 해서는 안될 짓을 자행했고 일부 부서의 공무원은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김군수의 이런 해명에 그렇다면 인사위원회는 과연 무엇을 했는 지 궁금해 진다. 인사규칙도 모르고 이같은 발령안에 쉽게 동의했느냐 하는 것이다.잘못된 인사안에 대해 부군수를 비롯한 고위 간부들이 인사규칙을 모를리 없기에 더욱 아쉽다는 반응이다.단체장이 잘하느냐 못하느냐는 부하 직원들을 얼마나 적재적소에 기용하느냐에 달려있다.김군수가 민선4기를 시작한 지 이제 두 달이 가까워진다. 앞으로도 임기가 많이 남았기에 이번 인사를 두고 차기 선거는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평가도 있다.그가 욕심을 부리지 않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면 능력과 추진력있는 인사들을 계속 발탁해 조직에 활기를 불어넣고 직원들의 사기를 북돋워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 지역일반
  • 박정우
  • 2006.08.29 23:02

[열린마당] 中企 해외시장개척 지원 확대를 - 이부웅

저는 전북대 농업생명과학대학교 동물자원과학과에서 재직하고 있고 전북대학교 연구단지내에서 식품venture社를 운영하고 있는 李富雄입니다. 그간 재직 중에 축적한 기술을 가지고 열악한 자본력으로 회사를 운영함에 있어서 수출이 유일하고도 효과적인 돌출구임을 알고 있었지만 수출은 자금과 조직이 빈약하고 무역 업무에 거의 무지하고 열악한 신생기업으로는 엄두도 낼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서 2005년 5월 처음 동남아 市開團을 시작하여 총 5회 다녀온 결과 국내 내수에 부가하여 수출의 가능성이 확실히 열려진 상태입니다. 시장개척을 다양한 지역을 다녀옴으로써 제품의 시장성, 개발방향등이 합리적으로 조기 수정되었습니다. 저희 회사는 개발초기 도청, 중기청 등의 지원을 받아 市開團을 다녀온 결과 수개의 새로운 시장성이 있는 신제품 개발을 완성하였고 구체적 상담이 진행 중에 있습니다. 여기까지 올수 있음은 도청이거나 중기청의 지원이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었음을 분명히 합니다. 이 정책은 더욱 확대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이러한 제도(정책)이 없었다면 이러한 실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회사가 정상적으로 성장해도 적어도 5년 내에는 불가능하리가 생각됩니다. 그 이유와 효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일단 회사가 개인으로 시장개척을 위해 외국방문을 한다면 buyer를 찾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고 언어문제가 있고 지리적으로 낯설음으로 인하여 길거리에서 실패할 가능성이 높고 시간과 비용과 노력도 많이 소비하고 효과를 못 얻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Kotra에서 조직하는 市開團 참가의 장점은 일단 정확한 buyer를 찾아 제한된 시간 내에 여러 명을 만날 수 있어 효율적입니다. 언어문제에 있어서 중소기업 사장님들 중에서 상담을 영어로 진행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영어권에서만 유용하고 우리에게 중요한 중국동남아에서는 영어로 쓰는 상담이 불가능하므로 현지어를 말하는 kotra의 통역주선이 대단히 중요하다. 영어가 세계 공용어이기는 하나 공항수속, Hotel찾기 등 이외 영어권이외에서는 거의 무용지물이다. 더욱이 kotra가 주선해주는 상담장소, 이동경비 및 항공료가 50%보조되기 때문에 재정비용에서까지 회사에 도움이 됨을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중소기업들의 市開團 정책은 특히 쇠약한 기업들의 수출정책에서 절대로 필요한 정책이므로 더욱 확대 육성되어야 전북기업들의 수출활로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정책입안하시는 분들에게 분명히 하고 싶은 것은 수출의 성사가 한번의 市開團 방문으로는 거의 불가능하고 여러번 다녀와야 비로서 가능한 경우가 허다함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Kotra의 모든 지원에 감사를 드립니다. 이 정책은 외국에서도 없고 앞으로 FTA협상 등이 강화되면 국가정책에 global standard 로 이러한 정책지원이 금지될 가능성도 있고 또 우리가 동남아 기타 국가보다 확실히 앞서가려면 앞으로 10-20년 동안의 국가지원이 절실히 필요하다. 지금이 과거 어느 때보다 또 앞으로 어느 때보다 수출의 전략화가 필요한 시기이다. 이미 중국 등에서 현재 여러 분야에서 밀리고 있지 않은가? 돈을 벌수 있을 때 벌어야 한다. 우리가 점령할 수 있는 오늘의 강대한 시장이 중국이나 인도 또는 남미에 추월당하기 전에 앞서가야 하기 때문입니다./이부웅(전북대교수·동물자원과학)

  • 지역일반
  • 전북일보
  • 2006.08.29 23:02

[시론] 방위산업의 경쟁력 높이기 - 김준규

군사정권은 안보정권이고 문민정권을 안보문제에 있어 불안한 정권인가 ?박정희 정권은 민주주의을 탄압 하면서도 미국과의 마찰 속에서도 자주국방력을 방위산업의 현대화에서 찾으려 부단히 노력 하였다. 박정권이 갑작스럽게 붕괴 되고 신군부가 출현 하면서 미국과의 갈등구조 속에서 자율권을 확보 하면서 전개 되어오던 한국 방위산업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80년 11월13일 육사 13기 출신인 이 정오 과기처장관을 포함한 신군부 출신의 박사들이 ‘연구개발체제 정비와 운영 방안’을 확정하고 정부산하 16개 연구소를 8개의 연구소로 통폐합하는 한편, 5개 정부부처에 흩어져있던 이들 연구소를 모두 과기처 산하로 전환하는 조치를 취하게 된다. 이어서 60-70년대 한국과학기술계를 인도해 온 과학기술원 인맥을 제거하여 과학기술원장 최형섭, 천병두 당시 과학기술연구소장, 홍재현 한국 핵연료개발공단 소장등을 해임하게 된다. 뿐 만 아니라 국과연도 대폭개편을 하여 국방관리연구소장에서 5,17 직후 안기부 차장을 맡은 김성진과 국과연 소장이었던 서정욱의 주도하에 1,800여명의 연구원 중에서 800명의 연구원을 해고하게 되는 대 수술을 감행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일대 숙청작업은 단순히 정권교체기에 나타나는 일반적인 현상이 아니라 그 규모와 내용을 살펴보면 다분히 미국을 의식한 작업이었다는 것이다. 즉, 당시 한국의 미사일 독자개발과 핵개발의 시도는 미국의 눈에 거슬렸던 것이고, 5공 출범 후 전 대통령은 이를 의식, 미국 첫 방문을 앞두고 국과연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작업을 과시적으로 시행하였던 것이다. 또한 그 내용에 있어서 감원 대상이 된 중심부서가 바로 유도탄 개발팀임을 봐도 짐작 할 수 있다. 이경서 박사가 총괄해 온 유도탄 개발은 1978년에 이미 평양을 사정권으로 하는 유도탄 개발을 마쳐 충남 한 해상에서 시험발사까지 마친 단계였다는 것이다. 그 이후 이러한 숙청과정을 통해 인적 숙청 뿐 만 아니라 90년 국과연 에 대한 특감에서 밝혀졌듯이 ,유도탄 개발에 대한 연구 자료와 실험자료 결과가 종이 한 장 남기지 않고 사라진 사실은 바로 미국을 의식한 신군부의 친미적 과학기술 실세들이 미국에 대한 독자유도탄 개발의 의혹을 남기지 않기 위한 과시적 조치라 보여 진다. 아무튼 군사정권하에서 국과연의 연구 인맥으로 대표되는 군 출신 이공계 엘리트들은 정부 내 요직과 과학기술정책 결정권을 독점함에 따라, 정부의 과학기술정책 수립과정에서 연구 집단의 다양한 의견이 무시되고 폐쇄적 인맥구조와 이해관계를 형성하였다. 따라서 이는 한국적 의미의 군.산.연 복합구조의 출연을 의도하였던 하지 않았던 간에 결과하였으며, 이러한 구조는 그들이 의식하건 아니건 간에 결국은 그들이 내세우는 방산기술의 자립화와는 오히려 역으로 대미 기술종속 구조를 유통시키는 통로 구실을 한 결과를 낳게 된다.이러한 미국의 끊임없는 견제와 이에 부응하는 한국 국가의 자율성 상실은 1985년 미 국방부의 고문인 울리히를 단장으로 하는 8명의 미국대표단의 한국방문으로 절정에 달한다. “ 그들은 정찰위성을 통해 조사한 온갖 가료를 가져왔다. 예를 든다면 이라크로 대우가 방산물자를 몰래 수출 했다는 증거 사진 등 이었다---한국이 필요로 하는 장비는 미국이 지원하겠다고 하면서 한국 방위산업을 해체한 것이다”이들은 1개월 예정으로 방위산업을 철저 하게 시찰하면서 한국의 방위 산업을 끝장내 버린 것이다.”정부는 과거를 거울삼아 첨단 무기체계의 자주 자립조달 기반이 취약한 상태에서 전시작전통제권을 무리하게 조기 환수 하므로써 역으로 미국 무기에 더 종속 되지 않도록 만반의 준비 태세를 갖추어야 할 것이다.안보는 이제 더 이상 군의 전유물 일 수 없다. 가장 바람직한 안보의 문민통제를 앞당기기 위해서는 현 정권의 수뇌부들이 역사와 국민 앞에서 겸손 해져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김준규(경제평론가·경영전략가)

  • 지역일반
  • 전북일보
  • 2006.08.29 23:02

[나의 이력서] 덕성여자대학교 이사장 이종훈 - 영원한 촌놈의 항변

나는 70평생을 살아오면서 한번도 주체적인 주류가 되지 못하고 항상 객체적인 비주류에 속했는데, 농담으로도 ‘술을 전혀 마시지 못하기 때문에’ 일생동안 ‘비주류’취급을 받았다. 그래서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적극적이고 활동적인 성격이라기보다는 공부뿐만 아니라 매사에 있어서 소극적이고 정적인 편이었다.물론 천성과도 관계가 있겠지만 초등학교 때부터 유학할 때까지도 학교주변에서 살면서 항상 학교에서 주도적인 생활을 한 것이 아니라 주변을 맴도는 생활을 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중·고등학교 때에는 기차통학을 하는 촌놈으로 불렸기 때문에 나 스스로 항상 촌놈의식이 몸에 배였으며 그래서 늘 자신감이나 배짱보다는 자격지심이나 이등인생관으로, 세상을 앞서가기보다는 뒤따라가는 소극적인 생활을 해온 것 같다.그렇다고 자존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며, 오히려 촌놈의 처지를 극복하려는 잠재의식은 강해진 것 같다. 더욱이 지방에 피난 온 대학분교를 다니다가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면서부터는 대표적인 촌놈으로 취급되어 차별대우를 받으면서 주류가 되려는 오기도 생기기 시작한 것 같다.그래서 나는 촌놈의식이 강했는데, 일본유학을 가서는 또다시 한국인이라는 생각이 강해 일본에서도 촌놈으로 비주류일 수 밖에 없었다. 하버드대학에서 공부할 때도 역시 백인이 아닌 동양의 황인종이라는 생각때문에 또다시 촌놈 처지를 면하지 못하였다. 물론 일본에서나 미국에서 차별대우를 받은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나 스스로가 주류의식을 갖지 못했고, 그 후 교수생활을 하면서도 그랬고 정치적인 의식에서도 늘 여당적인 입장이 아니었다.이렇게 나는 70평생 항상 스스로 촌놈이라고 생각하고 주도적인 삶을 살지 못한 것을 늘 안타깝게 생각하였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지구 어디를 가더라도 항상 촌놈일 바에야 차라리 철저히 촌놈의 배짱으로 주류가 되어 살아야겠다는 발상의 전환을 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촌놈이라 무시하고 차별하려는 태도는 자기가 부족하니까 상대방을 깔보며 뭉개버리고자 하는 콤플렉스의 심리상태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래서 나는 아들딸과 제자들에게 항상 주인의식을 가지라는 인생철학을 강조한다. 나야 약소민족으로서 후진국에 태어나 늘 부족한 촌놈이었지만, 너희들은 세계219개 나라 중에서 10대경제대국과 15대민족대국에서 태어났고, 세계 제1의 대학진학률을 자랑하는 문화국민이기 때문에 흔히 말하는 쪽팔리지 않는 젊은이가 되라 강조하고 있다.하버드대학의 와그너교수님을 집으로 초대한 적이 있다. 한국족보를 연구하여 박사를 받은 분이었는데, 나도 잘 모르는 우리집 족보 내용을 아들에게 들려주어 놀라게 하였다. 세계에서 전국민이 족보를 가지고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뿐이라는 것이다. 서양의 선진국은 물론이고 중국이나 일본도 전국민이 족보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 편견인 촌놈의식을 버리고 이제는 세계에 자랑할만한 역사와 문화민족으로서 자부심과 자신감과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사고로 살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 지역일반
  • 전북일보
  • 2006.08.28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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