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2025-11-05 04:55 (Wed)
로그인
phone_iphone 모바일 웹
위로가기 버튼
chevron_right 지역 chevron_right 지역일반

[열린마당] 국민연금법 개정돼야 한다 - 정병로

9월 정기국회 개원을 앞두고 국민연금법 개정안 처리가 또다시 뜨거운 감자로 부상할 것 같다. 정치권은 국민연금법 개정안의 관련법 개정 방향과 제도개선특위를 구성해 많은 논의를 해왔고 특위 종료 후 논의가 중단상태에 있다. 그 초점은 장기적인 재정안정달성?고령빈곤문제?가입자간 형평성문제 등을 고려한 합의가능성이 있는 개혁 방향을 모색하고, 국민신뢰 증진도모에 포커스를 맞추어야 할 것이다. 결국 현재의 저부담-고급여 체계에서 보험료를 더 내고 연금혜택은 적게 받는 방향으로 추진될 수밖에 없는 실정이며, 이러한 개정안에 대해 노동계와 시민단체가 크게 반발하고 있어 처리과정이 순탄하지 않을 전망이다. 법 개정을 추진하게 된 배경을 살펴보면, 기금소진의 주원인인 현행체계는 초기 연금제도 도입을 원활히 하기 위한 공적연금제도가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저부담- 고급여 체계문제와 설상가상으로 저출산 및 평균수명 연장으로 인한 급속한 노령화에 그 원인이 있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이유야 어찌됐건 국민연금제도는 서둘러 정비해야만 한다. 법과 제도상의 문제가 있음이 불 보듯 한데도 이런 저런 이유로 개혁을 미루는 것은 전국민의 노후보장을 담보로 정치적?사회적 갈등(이해득실)으로 비춰지고, 미래세대에게 감당할 수 없는 짐을 지우는 것 같아 안타깝기 그지없다. 국민연금제도에 대한 개혁을 서두르지 않을 경우 노후보장은 커녕 연금제도의 존재마저 위협받는 사태가 올 수 있음을 명심하여야 한다. 이 시점에 연금제도 개혁안에 반대하는 측은 용돈 연금으로의 전략?사각지대 해소대책 미흡 등을 지적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가입자 누구나 자신이 낸 국민연금 보험료보다 훨씬 후한 연금혜택을 받고 있음을 애써 간과하려는 현 세대의 이기주의가 내재되어 있다 할 것이다. 물론 국민연금 사각지대 해소를 위해서는 지속적인 연구 검토가 있어야 하겠지만 지금 당장은 엄청난 예산이 수반되므로 시간을 두고 국민적 공감대 형성이 이루어진 후에 논의가 필요하다. 일부에서는 국민연금 기금이 불안정해 연금을 납부해도 나중에 받을 수 있을지가 분명치 않다는 근거 없는 소문에 현혹되어 국민연금 보험료 납부를 기피하고 있으나 절대로 그렇지가 않다. 연금수령 문제는 어떤 경우에도 국가 연금을 지급하기 때문이다. 정부가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무릅쓰면서 연금개혁에 나서는 이유는 지금처럼 소득의 60%를 보장하는 연금 지급을 위한 필요 연금 보험료율은 19.85%이나 현재는 9%만을 부담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담과 지급이 불균형인 현행제도가 유지된다면 우리 자녀 세대들은 현재 우리가 부담하는 수준보다 3배가 넘는 30%의 보험료를 내야할 것으로 예측된다. 다시 말해 연금개혁이 지연될수록 다음세대의 부담이 증가하는 상황에서 매 5년마다 국민연금 재정수지를 분석하여 보험료율 및 급여지급수준 조정안을 국회에 제출하는 것은 법에 명시되어 있는 정부의 의무이기도하다. 개혁은 다수가 동참해야 만이 성공할 수 있음을 염두에 두고 우리 모두가 한발씩 양보해야 할 때가 지금이 아닌가 싶다. 개혁은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해야만 한다. 실현 가능성이 없는 장미 빛 공약이 되어서는 안 되며 더욱이 다음 세대의 부담을 더욱 가중시키거나 연금에 가입하지도 않은 사람에게 조세부담을 유발하는 정책은 공평하지 못하며 지속가능성이 없는 개혁안은 공염불에 불과하다. 연금개혁에 있어 국민의 반발을 최소화하려면 최저연금 설정 및 연급 급여 확대에 따른 적극적인 보완책을 마련해야 한다. 어디까지나 국민연금의 운영주체는 국가이기 때문에 국민연금 개혁은 국가적 과제로 풀어 나갔으면 하는 바램이다./정병로(국민연금관리공단 전주지사장)

  • 지역일반
  • 전북일보
  • 2006.08.18 23:02

[JJAN 클릭세상] '삼성맨이냐' '전북맨이냐' 논란

연일 35도에 육박하는 불볕더위에 몸도 마음도 모두 지쳐 늘어진 한 주, 전북도 정무부지사에 김재명 삼성코닝정밀유리 상무가 선임되자 사이버상에서는 이병학 부안군수의 구속 기소만큼이나 뜨거운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누리꾼들은 기업유치에 큰 힘이 될 것을 기대하는 환영측과 삼성과 한나라당에 이용당할 것을 우려하는 반대측으로 나누어져 대립각을 세웠다.○…"영원한 삼성맨 김제명씨! 앞으로 영원한 전북맨 김제명씨가 되어주시오! 경상도출신 김제명이 김완주와 호흡을맞추어 기업유치에 힘써주시오!..." (작성자 : 환영님)○…"정무부지사에 임명된 만큼 제2의 고향이 전북이다라는 마음가짐으로 앞으로 전북발전을 위해 힘쓰고 삼성을 군산에 유치하는데 힘써달라..." (작성자 : 적극환영님)○…"전북은 이제 끝입니다. 부산출신이 전북부지사가 말이 됩니까? 어디 전북출신도 부산부시장이나 경상도 부지사 한번 해봐요. 저분이 과연 전북을 위해 얼마나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 (작성자 : 전북인님)○…"딴나라당을 위해 전북에 오신 김재명씨 환영합니다. 다음 민선5기 전북지사로 한나라당의 호남사랑을 시작하시겠군요. 역시 딴나라당의 계획은 훌륭합니다..." (작성자 : 딴나라당님)

  • 지역일반
  • 미디어팀
  • 2006.08.18 23:02

영어 이젠 두렵지 않아요

지난 7월 24일부터 8월 12일까지 우석대에서 실시하는 3주간의 원어민 영어캠프에 다녀왔다. 처음 캠프에 참가하기 때문에 걱정과 설레는 마음으로 동생과 함께 여름방학이 시작됨과 동시에 입교했다.부모님과 떨어져 생활해야 한다는 점과 동생을 보살피면서 캠프에 참여해야 하는 형의 입장으로 걱정부터 앞섰다.동생과 함께 방을 배정받고 미국인 영어선생님로부터 간단한 영어로 질문을 받고 대답을 하고 났더니 영어회화에 대한 부담감에서 벗어나 는 느낌이었다.오전에는 영어학습을,오후에는 방과후 학습을 주로 하면서 학교에서 배우는 영어와 원어민 교사로부터 실제 사용되는 영어를 활용하여 영어에 대한 자신감을 갖는 좋은 기회가 되었던 것 같다. 이번 캠프에서 알게된 친구,선배,후배들과 함께한 운동경기,동물원 견학,수영장 체험 등 다양한 프로그램중에서 특히 벼룩시장은 참으로 뜻깊고 재미있는 체험중의 하나였다.집에서 가져온 물건을 진열해놓고 오직 영어만을 사용하여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외국여행중 선물한 기념품 몇가지를 깔아놓고 있는 힘을 다해 팔았다. 아직은 부족한 상품설명과 가격 등을 상대방이 알아들었을 때 벅차오르는 기쁨이 있었고, 영어에 더 많은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처음으로 겪는 단체생활이었지만, 함께 캠프에 참가한 친구들끼리 공부하고 마음껏 뛰어놀면서 정도 많이 들었다. 이런 생활을 통해 상대방을 훨씬 더 이해하게 되고, 개인이 아닌 공동체의 문화까지 배우게 된 셈이다. 아울러 스스로 침구를 정리하고 동생을 보살피고 집에서 하지 않았던 일들을 스스로 해결했을 때의 자부심은 가장 큰 수확이었던 것 같다. 참으로 유익하고 보람된 캠프생활이었다.내년 여름방학에는 친구들에게도 같이 가자고 권유해서 다함께 영어캠프에 참가해야겠다. 빨리 그 날이 오기를 벌써부터 기다려 진다./이상우(용소중학교 1학년 )

  • 지역일반
  • 전북일보
  • 2006.08.18 23:02

[오목대] 전주 비빔밥

평양의 냉면, 개성의 탕반과 함께 조선시대 3대 음식의 하나였던 전주 비빔밥이 요즘 뜨고 있다. 건강을 생각하는 트렌드와 맞물려 ‘웰빙 음식’으로 각광받고 있는 것이다.전주 비빔밥은 최근 문화관광부가 선정한 ‘100대 민족문화 상징’에 올랐다. 지역 명칭이 들어간 유일한 음식으로 꼽힌 것이다. 또 지난달 중국 북경에서 열린 제4회 세계미식(美食)대회에서도 우수성을 입증해 보였다. 전주 비빔밥(골동반)이 비(非) 중국요리 부문 개인전과 단체전 우승을 휩쓴 것이다. 음식 하면 어깨에 힘을 주는 중국사람들도 심사평에서 “높은 영양가를 갖춘데다, 자연 재료 빛깔이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요리”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미 대한항공은 9년전 부터 비빔밥을 기내식으로 개발해 지금까지 2000만 그릇을 냈다. 국제기내식협회(ITCA)는 1998년 대한항공의 비빔밥을 최고 기내식으로 뽑은 바 있다.전주 비빔밥이 웰빙 음식으로 인기를 끄는 것은 재료가 음양오행에 합당하고 동물성과 식물성의 비율이 2대 8로 균형을 갖춘데 있다. 또한 각각의 재료가 어우러져 새로운 맛을 내는 소위 퓨전이나 컨버전스(융합) 등 블루오션이라는 현대적 개념에 일치하기 때문일 것이다. 전주 비빔밥은 문헌상 궁중음식에서 전래한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조선시대 궁중음식의 수라(임금이 먹는 밥)에는 흰수라 팥수라 오곡수라 비빔 등 4가지가 있었다. 이 때 비빔은 점심 때나 혹은 종친이 입궐했을 때 기벼운 식사로 이용되었다. 그것이 차츰 양반계급이나 중인, 서민에게 까지 전해져 오늘에 이르렀을 것으로 짐작된다. 전주에서는 감영(監營)내의 관찰사, 풍락헌의 판관 등이 입맛으로 즐겼다. 또 전주성 내외의 양가에서는 물역(物役)이나 노역이 따랐기 때문에 큰 잔치 때나 귀한 손님을 모실 때 입 사치로 다루었다고 전해진다. 말하자면 고관들이나 양반가에서 식도락으로 즐겼던 귀한 음식이었던 것이다. 재료는 30 가지가 넘었고 부재료는 계절마다 조금씩 달랐다. 조리도 지금과 달리 까다로운 과정을 거쳤다. 밥만 해도 닭을 푹 삶은 진한 국물과 암소 등심살을 삶은 국물을 혼합해 지어냈다. 하지만 비빔밥이 수천명이 먹을 수 있는 ‘전시성’행사에 동원되고, 메뉴얼화되면서 옛 맛을 찾기가 어려워져 안타깝다.

  • 지역일반
  • 전북일보
  • 2006.08.18 23:02

[이치백의 一日五話] 후루시초프 스탈린 비판

① 37회 구속, 9번 철창생활조국의 민주회복을 위해 꾸준히 싸웠던 장준하 선생이 의문의 실족사를 한 것은 1975년 8월 17일 오후 1시20분경, 경기도 포천군 약사봉 벼랑아래였다. 그는 유신독재정권과 정면으로 맞서 싸우다가 37회나 구속되었고, 9번이나 철창생활을 한 민주투사였다. ② 이산해의 죽음선조 때의 이산해는 영의정을 두 번이나 지낸 사람이지만 파란 또한 많았다. 한때는 정철을 몰아내는데 앞장섰지만 자신 역시 쫓겨났다. 선조가 승하하자 원상이 되어 국정을 돌보기도 했다. 1609년 오늘 죽은 그는 숙부 이토정에게서 글을 배웠으며, 글씨에도 능하여 조광조의 비문을 썼다. ③ 국민의 전의를 고취프랑스의 소설가 모리스 바레스는 평론가로 국회의원으로도 많은 활동을 한 사람이다. 1862년의 오늘 탄생한 그는 신문에 정치의 부패상을 통렬히 비판하는 글을 쓰는 등 국가주의자로서 1차 대전 중에는 국민의 전의를 고취하는데도 많은 역할을 한 사람이다.④ 증기선 실험에 성공미국의 기계기사 폴턴이 개발한 외차추진식 증기선 크레아몬트 호가 1807년의 오늘 허드슨강에서 실시한 시운전에 성공했다. 조금 가다가 멈췄기 때문에 친구들은 내리려 했지만 재발진했다. 이로써 증기선 제조는 상업성을 갖게 됐다. 그는 당초 초상화가였다. ⑤ 스탈린을 맨 먼저 비판소련의 후루시초프는 공산당 제1서기, 내각 수상까지 지낸 사람이다. 광산 노동자 출신인 그는 독겮?전쟁 때는 육군중장이기도 했다. 1958년 수상이 되자 그는 스탈린을 누구 보다도 먼저 비판하면서 정적 말렌코프 등을 제거했다. 1894년 오늘 출생한 그는 1964년 4월 실각했다.

  • 지역일반
  • 전북일보
  • 2006.08.17 23:02

[나의 이력서] 덕성여자대학교 이사장 이종훈 - 교수 아닌 스승이 되고 싶다

내가 일본에서 공부를 마치고 귀국할 무렵인 70년대 후반만 하더라도 한일국교정상화 이후 한일합작투자와 일본기업의 직접투자 그리고 대일청구권자금에 의한 공공투자사업이 활발히 진행되어 몇몇 기업체로부터 같이 사업을 하든가 자문에 응해달라는 부탁이 많이 있었다. 경제적으로 고생을 많이 한 처지라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미 학자가 되기로 결심한 터였다. 지도교수님이 일본의 대학을 몇 군데 추천까지 해주셨지만 귀국하여 국방대학원의 조교수로 새 출발을 하게 되었다.대통령 발령인 조교수였지만 유신정권의 말기적인 상황과 그것도 말 그대로 국방대학원이라 학문보다는 교육이 중심이었고 국가정책이 우선인 특수대학원의 성격이 강했다. 특히 학생들이 나보다도 나이가 많은 현역 대령과 정부의 국장급 고급공무원이라 강의부담이 크게 느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신경 쓰이는 것은 강의가 있건 없건 매일 9시에 출근하고 5시에 퇴근해야 하는 생활이었다. 내가 생각한 자유스럽게 연구하는 대학교수 생활의 모습과는 달라 스스로 그만두고 나오게 되었다.자연스럽게 선배교수들의 도움으로 정들었던 중앙대학교 부교수로 오게 되어, 모두에게 감사하면서 연구와 교육에 헌신적으로 노력할 것을 다짐하고 다시 새출발을 하였다 우선은 책임시간만 강의하고 한국경제론이라는 책을 쓰는데 전력투구하였다. 그때만 하더라도 이론서적으로서의 한국경제론이란 책이 없었기 때문에 박사학위논문을 정리하여 교과서로 만드는데 노력하였다. 일반적으로 근대국가의 탄생은 정치적 민주주의, 경제적 자본주의, 사회적 평등주의를 기본으로 하는 국가로서, 이는 영국을 비롯한 서양의 선진국에서 산업혁명에 의해 이룩되었다.서양의 경우 농업내부에서 아래로부터 생산방식이 바뀌어 공업국가가 등장한 것이다. 이를 나는 원형의 근대국가라고 이름붙였다. 그리고 일본은 100년 후에 명치유신이라는 위로부터 법률과 제도로 근대국가의 모양을 만들어 냈기 때문에 변형의 근대국가라고 구별하였다. 산업혁명이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국가가 권력으로 위에서 만들어낸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는 영국과 같이 산업혁명이 일어난 것도 아니고 일본과 같이 한말의 정부가 제도적으로 만들어낸 것도 아니며, 일본제국주의가 식민지정책으로 옆으로부터 만들어냈기 때문에 특수형이라고 구분하였다. 이같은 특수형인 한국경제의 형성과정과 변화 및 발전과정을 총정리한 책이 바로 법문사(法文社)에서 출판한 ‘한국경제론’이었다.이 책으로 강의도 하고 그 일부를 서울대신문과 ‘해방전후사의 인식’에도 발표하여 경제학계에 새로운 바람도 일으켰다. 그러나 나는 무엇보다도 학생들 교육에 철저한 자세로 임하기로 마음먹고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나는 여러분에게 교수가 아니고 스승이 되고자 하니, 여러분은 나에게 학생이 아니라 제자가 되어 달라”고 당부했다. 나는 인격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제자들의 스승으로서 사표가 되겠다고 다짐한 것이다.나는 학생들에게 진정한 학자이자 스승이고자 거듭 다짐했다.연구와 교육에 있어서 우리나라에는 나보다도 훌륭한 교수가 많지만 그분들이 여러분의 스승은 아니다. 나 역시 다른 대학에서 강의하고 있기 때문에 그 중에는 여러분보다 훌륭한 학생들이 많지만 나의 제자는 아니라고 강조했다. 다시 말하면 나와 여러분은 교수와 학생의 관계가 아니라 스승과 제자의 관계라는 것을 첫 시간에 선언한 것이다. 모든 면에서 제자들의 스승이 되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그 결과로 끈끈한 사제지간의 정을 만들어 대학생활의 보람을 느끼면서 정년을 맞게 되었다. 나는 이 글의 첫 회에서 특별하지도 못한 보통사람이라고 강조한 바 있지만, 나는 보통사람 중에서도 항상 늦게 출발하고 뒤떨어진 지각생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다. 대학의 강사도 늦게 시작했으며, 외국유학도 30세가 훨씬 넘어서 떠났다. 따라서 박사학위도 다른 사람에 비해 뒤늦게 딴 것은 말할 필요도 없으며, 그 결과로 교수도 40세가 넘어서 늦게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다. 더욱이 결혼 역시 남보다 늦어 아들딸을 늦게 둔 것은 물론이고, 생활기반 역시 다른 사람보다 늦게 잡을 수밖에 없었다.따라서 나는 항상 인생의 지각생이라고 생각하며 이왕 늦었으니까 오히려 서둘지 않고 차분히 여유있게 살아가기로 마음 먹었다. 다른 교수들에 비하여 연구활동도 부족하였고 사회활동은 더욱 늦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유학기간은 군사독재시기였으며, 귀국 후의 80년대에도 반민주적인 독재정권이 이어지면서 대학사회는 온통 민주화투쟁과 이를 탄압하는 최루탄 정국으로 얼룩져 상아탑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시기였다.나 역시 동경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는 빌미로 유형무형의 감시와 탄압을 받아 사회활동을 할 수 없는 처지였다. 나는 당시의 이러한 사회적인 여건을 감안하고 학생지도는 물론이고 연구와 저술활동만으로 지각생의 부족함을 보충하는데 노력하였다. 때마침 경제성장에 따라 대외무역이 활발해지고 외자유치의 필요성이 높아지면서 일본경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하였다. 당시의 한국경제는 오늘날과는 달리 중국과 러시아와의 국교가 단절된 상태였고 유럽과의 대외무역도 미미하였으며, 동남아시아와도 경제협력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라 미국과 일본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특히 일본과의 관계는 점차 확대되어가는 추세였다.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대기업에서의 일본경제에 관한 강연 요청이 많아져서 생각하지도 않게 바쁜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내가 일본에서 6년간 공부하면서도 일본경제를 전공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경제를 체계적으로 강연하기에는 역부족이어서 다시 일본에 다니면서 일본경제를 본격적으로 공부하였다.이를 토대로 일본경제의 형성과 변질(제국주의화) 그리고 성장과 발전을 총정리한 500쪽에 달하는 ‘일본경제론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라는 책(法文社)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출판하여 경제계와 학계가 일본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모든 것이 지각생이 된 나로서는 다른 사람을 뒤쫓아 열심히 살다보니 인생의 마감도 지각생이 되어 오래오래 살 것이라는 여유도 갖게 되었다.

  • 지역일반
  • 전북일보
  • 2006.08.17 23:02
지역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