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목대] '동북 9 城'
윤관(尹瓘) 9성 역사바로잡기 운동본부가 최근 교육부 장관앞으로 “수정건의서”를 냈다고 한다. 그 내용에 의하면 고려시대 윤관 장군이 개척한 동북 9성(城)중에 최전방 거점인 공험진(公?鎭)은 두만강 북쪽에 있으며 이를 교과서 개편때 반영하여 식민지 사관의 왜곡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마땅히 고려 해보아야 한다.동북 9성(城)축조는 우리 국토 관리에 대한 우리 선조들의 애환을 보여주는 한대목이다.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여진족과 잦은 충돌을 빚은 고려는 이 지역을 강화 할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고려군대는 여진족의 상대가 되지못했는데 그이유는 여진족은 기마부대 인데 비해 고려군대는 보병이었기 때문이었다. 기마부대와 보병과의 싸움은 어른과 어린이의 대결이었다. 윤관의 건의에 따라 숙종은 별무반의 설치를 명령하여 기마병으로 구성된 신기군을 중심으로 보병의 신보군, 특수병으로써 도탕군, 경궁군,정노군,발화군, 그리고 승군(僧軍 )까지 가세하는 항마군을 구성하였다. 이는 나이 스물이상의 모든 백성들이 입대하는 의무군이었다. 조선사회와 달리 여기에는 예외가 없어 문무 양반은 물론이고 아전, 농민, 장사치,승려 심지어 군대편입이 금지된 노비까지 포함되었다. 그래서 별무반은 20만 군대의 당당한 모습을 갖게되었다. 이런 거국적인 진압작전으로 여진족은 고려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윤관의 대활약에 힘입어 고려는 영주,복주,웅주,길주 4주(州)와 함주, 공험진을 합쳐 6성(城)을 구축했으나 윤관은 이에 만족치 않고 의주, 평융, 통태 세곳을 합쳐 결국 9성을 쌓은 것이다. 그러나 후에 9성을 지키지 못하고 여진족의 간절한 요구에 따라 9성을 반환해벼렸고 나중에 윤관은 여진정벌을 문제삼는 반대파 문신들에 의해 불명예 퇴직을 할 수밖에 없었다. 9성의 지역은 후에 조선조 세종때 김종서의 6진 개척과 연관이 된다. 그러나 위의 건의서에 대해 우리학계에서는 아직은 정설이 없다는 애매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 반면, 북한 교과서는 공험진은 두만강 이북에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정설이 없으면 지금처럼 굳이 식민지 사관대로 동북 9성을 기술할 필요가 없을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