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칼럼] 가을하늘이 드높은 까닭은 - 공요셉
하늘은 점점 더 높아지며 파란 에메랄드빛으로 바뀌어가고 나뭇잎들은 형형색색 단풍 옷으로 갈아입는 가을입니다. 우리고장 내장산에도 오색단풍이 절정이라는 요즈음, 깊어가는 가을을 찾아 삶의 여유를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요? 우리도 자연의 일부일진데, 아름다운 계절 가을의 한 쪽이 되어봄직 합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가을이 깊어가는 11월을 ‘위령성월’이라 이름 지어 보냅니다. ‘위령(慰靈)’이란 죽은 이들의 영혼을 위로한다는 의미로 11월 한 달을 세상을 떠난 이들을 보다 더 기억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때로 정한 것이지요. 이는 10세기 말 프랑스 클뤼니 지방의 수도원에서부터 시작된 교회의 오랜 전통입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조상들과 가족, 지인들을 위해 기도하는 이 시기엔 특별히 죽음 그 자체에 대해 묵상하고 자기 자신의 죽음을 미리 준비해 보는 때이기도 합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언젠가는 사라지고 맙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겠지요. 성경의 시편도 우리 인생의 무상함을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인생은 기껏해야 칠십 년, 근력이 좋아야 팔십 년, 그나마 거의가 고생과 슬픔에 젖은 것, 날아가듯 덧없이 사라지고 맙니다.’(시편 90,10). 현대의학이 아무리 발전한다 하더라도 유한한 존재인 우리 인간의 생명을 영원한 것으로 바꾸어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단지 몇 년을 더 연장해 줄 수는 있겠지요. 어려서 성경의 첫 부분인 인간창조에 관한 얘기를 읽었을 때가 생각납니다. 하느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빚어 숨을 불어넣으시니 영혼을 지니게 되어 낙원에서 살게 되었는데, 어느 날 하느님께서 따먹지 말라고 명령하신 나무열매를 따먹은 죄로 인해 다시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얘기에 얼마나 안타까움을 느꼈는지 모릅니다. 최초의 사람인 아담과 이브가 그 나무열매를 따먹지 않았던들 죽지 않고 영원히 살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에 그들이 원망스럽기까지 했지요. 그러나 낳고 번성하라는 하느님의 축복과 영원한 생명이 인간에게 동시에 주어진 낙원이 가능할까요? 태어나기만 하고 아무도 죽지 않는다면 아무리 좋은 곳이라도 그곳은 더 이상 낙원일 수 없겠지요. 아마도 성경의 깊은 뜻은 하느님의 숨결인 인간의 영혼이 하느님을 거스른 죄로 인해 다시 그분께 되돌아감을 두려워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려 함이겠지요. 몸은 몸대로 영혼은 영혼대로 왔던 곳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일 테니까요. 종교와 신앙을 떠나서 우리는 ‘죽는다’는 것을 ‘돌아간다’라고 표현합니다. 언젠가는 누구나 왔던 곳으로 돌아가야 함을 우리 선조들도 깨달았던 모양이지요. 죽음은 사실 우리 삶의 한 부분, 어쩌면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화룡점정(畵龍點睛)의 의미처럼 우리 삶의 아름다운 마침표가 죽음이겠지요. 그래서 그 죽음을 미리 체험해보는 것을 통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더 나은 삶을 준비하기도 합니다. 유서를 쓰고, 준비된 관속에 누워 애도하는 사람들의 기도나 진혼곡을 듣는 체험을 해보기도 하고, 내게 단 하루라는 시간만이 존재한다면 무엇을 할 것인지를 진지하게 적어보는 체험을 통해 우린 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가을하늘이 맑고 드높은 것은 여름의 대기 중에 머물던 습기와 먼지가 사라져 하늘 본연의 모습이 드러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나뭇잎에 오색단풍이 드는 것도 봄과 여름 내내 광합성작용을 위해 지녔던 초록색 엽록소를 버리고 자기 본래의 색소를 드러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처음 모습으로,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것들이 아름답습니다. 매일의 분주한 삶 속에 자칫 잊기 쉬운 우리의 본 모습을 되돌아보는 가을, 아름다운 죽음을 미리 성찰해보는 계절이 되었으면 합니다. 갈수록 날이 차가워지는 때에 모두 몸과 맘으로 건강하세요! /공요셉(신부, 전주가톨릭신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