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명절을 보내고
민족의 대명절인 설을 보내고 이제는 평온한 일상을 되찾았다. 지난 설날에도 어김없이 이 땅의 많은 아들딸들은 장시간의 교통 혼잡을 겪고 고향에 내려갔다. 부모님께 한 아름의 선물과 용돈을 안겨 드리고 오랜만에 본 조카들의 훌쩍 큰 키에 놀라고 차례를 지내고 떡국 한 그릇을 먹고, 그렇게 우리 모두는 나이 한 살을 더하였다.연로한 부모님 두 분만 사시는 고향집은 장성한 자녀들에게는 이제 좁고 답답하게 느껴진다. 그래도 아들들은 어린 시절 자신이 살았던 집이라 그나마 견딜만하지만 아파트의 편리함에 익숙해진 도시의 며느리들에게는 좁고 추운 시골집에서의 생활이 아무리 하룻밤이라 해도 불편하기 그지없다. 며느리들은 하루 종일 전을 부치고 나물을 무치는 등 음식준비를 하고 북적거리는 대식구의 식사를 준비하고 설거지 하느라 몸과 마음이 모두 피곤하다. 음식준비와 불편한 잠자리로 숙면을 취하지 못하여 피곤한 며느리들은 명절이 반갑지 않다.필자의 어린 시절 설날은 참 명절 분위기가 났다. 외가가 잘 살아서 자주 잔치를 벌였는데, 특히 설에는 가족과 친척들뿐 아니라 동네 사람들까지 며칠 간 맛있는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 외할머니의 총지휘 하에 숙모들과 이모들이 열흘 전부터 음식장만을 시작하여 한과, 다식, 약밥, 떡, 수정과, 식혜, 잡채, 나물, 전, 산적, 편육, 육회, 홍어회 등 온갖 산해진미를 준비하였다. 삼촌들이 떡메를 치고 외할머니께서 콩고물을 묻혀 바로 만든 쫄깃한 인절미를 조청에 찍어먹었던 기억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커다란 돼지 한 마리를 잡아서 편육과 불고기를 푸짐하게 만들어 세배 오는 손님과 동네 이웃들에게 나누어 준 것도 기억난다. 또 이런 명절에는 가난한 이웃들과 거지들까지 초대되어 모두 한 상 가득 음식을 대접받았다. 보일러가 없던 시절이라 볏짚과 나무로 불을 때야 했고 수도가 없어 물을 길어다 음식 준비를 해야 했지만 아무도 일이 힘들다거나 춥다고 불평 하지 않았다. 여자들이 명절에 음식을 만드는 것은 조상에게 차례를 지내고 가족, 친지, 이웃들을 배불리 먹이기 위한 하나의 중요한 의식이었기 때문이다.그렇지만 급속한 산업화의 영향으로 가족들은 서울을 비롯한 여러 도시로 뿔뿔이 흩어져 살기 시작했고, 명절만 닥치면 고속도로에 자동차가 넘쳐나고 장거리의 경우 5~6시간이 넘게 운전을 해서 달려가는 귀향길이 그리 즐겁지만은 않다. 오랜만에 만나 서먹하게 느껴지는 부모님과 친척들, 익숙하지 않은 부엌에서의 음식준비는 유독 여자들에게 피로를 주어 명절증후군이라는 용어까지 생겨났다. 명절증후군은 일이 많고 힘들어서가 아니라 농업사회의 대가족 문화가 산업사회의 핵가족 문화로 변화되는 과정에서 생긴 부산물인 듯하다. 도시에 사는 여자들이 남편과 자신의 자녀 외에는 가족으로 여기지 않고, 요리하는 것을 귀찮게 여겨 자주 외식하는 습성도 한 원인이 될 것이다. 명절이 아니더라도 평소에 고향에 계시는 부모님께 전화도 드리고 좀 더 자주 찾아뵙자. 또 형제, 자매 사이에도 가끔 안부 전화도 하고 더 자주 얼굴을 마주 대하자. 그러면 명절이 더 이상 귀찮고 번거로운 의례가 아닌 가족 간의 즐거운 만남의 장이 될 것이다. 또한 이것이 '효'와 '가족애'라는 고유한 한국 문화의 콘텐츠를 보전하는 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