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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99)바람을 전하는 부채

펴지고 겹쳐지는 것은 대쪽 때문인데 / 맑은 바람이 솔솔 이는구나 / 유월 손에 들고 부치면 / 무더위가 어디로 사라지는지 몰라 / 그러니 여러 사람과 마땅히 나눠야 하네 / 청량한 맛을 어찌 차마 혼자만 차지할꼬 관청에서 보낸 부채를 받은 심정을 담은 고려 문인 이규보(1168-1241년)의 시구이다. 여름 생색에는 부채, 겨울에는 책력이라는 속담과 옛 시구에서도 살펴볼 수 있듯이 부채는 여름을 준비하며 주고받는 선물로 인기가 많았다. 선조들이 여름을 맞으며 부채를 선물한 데에는 무더위를 잘 견디는 것은 물론이고 나쁜 기운까지도 날려 버리라는 바람도 담겨 있다. 그 귀한 의미가 담긴 여름맞이 풍속은, 생활방식이 변하면서 선풍기와 에어컨 그리고 다양한 디자인의 손 선풍기의 등장에 희미해졌다. 부채는 오랜 세월 더위를 쫓는 등 생활에서 사용하며 의례와 주술 용도로 큰 나뭇잎이나 새의 깃털 등을 이용하다 점차 바람을 일으키기 편리하게 만들고 종이가 발명되면서 발전했다. 부채란 명칭도 손으로 부쳐서 바람을 일으키는 채인 부치는 채의 줄임말이다. 부채의 한자어 선(扇)은 새의 깃털인 우(羽)와 드나드는 문인 호(戶)가 합하여 새의 날개처럼 바람을 일으킨다는 뜻이며, 그 명칭은 모양과 재료 쓰임에 따라 다양하게 불렸다. 부채는 풍속화와 부채에 그림이나 글을 새긴 서화선(書畵扇)과 다양한 문헌의 기록으로 남아있는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흔적으로는 기원전 삼한시대의 것으로 추측되는 다호리 유적의 부채 자루와 북한의 국보 제28호 고구려 고분인 안악3호분에 그려진 깃털 부채를 든 인물의 모습이 있다. 『삼국사기』에는 견훤(867~936)이 고려 태조 왕건의 즉위 소식을 듣고 공작선(孔雀扇)을 선물했다는 기록이 남아있고, 접는 부채 등 다양한 부채를 사용한 고려 시대에는 비단으로 만든 부채의 매매를 금지하며 백성들의 사치를 경계한 법령이 『고려사』에 전해진다. 조선에 들어와서도 부채는 많은 사랑을 받았는데, 선비들은 올곧음을 상징하는 대나무와 기품 있는 한지로 조화롭게 만들어진 부채를 극찬했다. 특히, 대의 껍질을 얇게 깎아 맞붙여 부챗살을 만드는 합죽선을 선호했으며, 부채를 멋과 풍류를 즐기는 삶의 도구로 팔덕선(八德扇)이라 칭했다. 부채가 바람을 일으켜 더위를 쫓고, 방석으로 쓰이며, 밥상으로도 쓰고, 머리에 이고 물건도 나르며, 햇볕을 가리고, 비를 막으며, 파리나 모기를 쫓고, 얼굴을 가리는 쓰임으로 인해 여덟 가지 덕을 지녔다 한 것이다. 매년 단옷날이면 전라도와 경상도의 감영통제영이 부채를 만들어 조정의 관원들에게 두루 선물하는 일이 예로부터 전해 오는 것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대나무를 조달하기 쉬운 전라도와 경상도의 주요 산지에는 종이를 뜨고 관리하는 지소(紙所)가 있어 부채를 만드는 환경이 좋았다. 전라도 지역에서는 대나무의 주산지인 담양, 구례, 장성, 나주 등과 최상품 한지를 생산하는 전주(당시 완산)가 부채의 생산지로 명성이 자자했으며. 전주에 있는 전라감영은 각 지역에서 제작된 부채를 모아 임금에게 진상했다. 전라도 관할기관인 전라감영 내에 부채를 제작하고 관리하는 선자청(扇子廳)과 지소를 두었는데, 『완산부지도』를 비롯한 여러 고지도에 잘 묘사되어 있다. 현재 완산경찰서 민원실 뒤편으로 위치가 추정되는 큰 규모의 선자청을 보면 전주가 부채의 주요 생산지임이 확인된다. 전주의 선자청이 활성화되자 타지방의 부채 장인들이 전라감영 근처로 모여들어 공방을 형성했고, 일제강점기인 1920년 폐쇄되기 전까지 선자청은 부채를 제작했다. 선자청이 없어진 이후에도 전주 부채는 일본인이 자본을 대고 부채 장인들이 부채를 제작하여 전국에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당시 전주 부채의 명성은 풍류와 향기를 실은 이 여름의 부채라는 신문의 기사 제목에 조선의 부채라고 하면 전주를 생각한다는 것과 전주의 합죽선을 제일로 친다는 기사로 엿 볼 수 있다. 해방 후 부채 장인들은 부채골로 불리는 인후동의 가자미 마을과 아중리의 석소마을 그리고 새터, 성황당, 안골 등에 집단 거주하며 부채를 제작했지만, 선풍기의 보급에 따라 부채의 수요가 줄어들자 영세함을 면치 못했다. 대다수의 부채 장인들이 부채 제작을 그만두었지만, 부채를 만드는 기술이 뛰어난 장인을 칭하는 선자장의 명맥은 김동식(1943년생) 선자장에 의해 이어지고 있다. 김동식 선자장은 가자미 마을 출신으로 14세가 되던 1956년 아버지의 권유로 외가에 들어가 부채 제작 기술을 배웠다. 나주와 장성을 거쳐 석소마을에 정착한 그의 외가는 합죽선으로 유명한 집안이었다. 오롯이 옛 기술을 그대로 전승받은 김동식 선자장이 제작하는 부채는 기품이 있고 부챗살이 탄력이 있으면서 바람이 잘 일어난다. 2007년에 그 가치를 인정받아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0호 선자장, 2015년에는 문화재청에 의해 국가무형문화재 제128호 선자장으로 지정되었다. 현재는 아들인 김대성(1976년생)이 합죽선의 가치를 5대째 이어가고 있으며, 전라북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선자장들이 전통 부채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이제 하지를 지나 점점 더워지니 옛 선조들의 취향을 더한 부채가 그리운데, 이규보의 이로부터 해는 더디기도 하여 / 사람은 붉은 불이 되는구나 / 언제나 하늘까지 뻗친 부채를 얻어 / 키질하듯 온 천하를 부채질하리란 시구가 눈에 들어온다. 비록, 천하를 키질하듯이 시원한 바람을 일으킬 부채까지는 아닐지라도, 부채의 고장 전주를 찾아 얼굴에 송송 맺히는 땀방울을 다스리며 마음 한 가닥 청아한 바람을 일으키는 멋과 여유를 느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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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6.23 16:32

[참여&소통 2021 시민기자가 뛴다] 내가 싼 똥이 썩지 않는다면

요새 제로웨이스트가 핫하다. 기업이나 각국 정부에서 친환경 관련 제품이나 정책을 전면에 내걸고 있다. 제로웨이스트는 포장을 줄이거나 재활용이 가능한 재료를 사용해서 쓰레기를 줄이려는 세계적인 움직임을 일컫는다. 즉, 웨이스트(낭비)를 제로(0)으로 만들겠다는 뜻이다. 도서 '대한민국 화장품의 비밀' 필자가 처음에 제로웨이스트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화장품 때문이었다. 2011년, 여드름 피부로 고생해서 어떤 화장품을 써야 할지 난감하였다. 뭘 발라도 불안하고, 얼굴은 뒤집어지기 십상이고, 여드름은 도통 해결되지 않았다. 화려한 광고 속 제품을 바르고 싶은데, 돈은 별로 없고 스킨, 로션, 수분크림, 에센스의 차이도 모르겠고 알 수 없는 것 투성이었다. 마침 대한민국 화장품의 비밀-많이 바를수록 노화를 부르는이라는 책을 접할 수 있었다. 국내 굴지의 화장품 회사에 다녔던 저자들이 화장품 회사의 화려한 마케팅 뒤에 존재하는 진실과 화장품의 정체에 대해 꼼꼼히 탐구한 책이다. 이 책을 읽기 시작한 후 내 삶은 달라졌다. 화려한 브랜드, 광고, 주변인의 추천을 뒤로하고 화장품 전성분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지금은 백색 바셀린과 썬크림으로 모든 화장품을 대체한다. 아, 간편해. 무엇보다 피부에 좋은 걸. 화학적 제품보다 천연 성분이 피부에 좋은 것처럼 우리 몸에는 되도록 가공하지 않는 것들이 좋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여성에게 화장품은 몸 치장을 해야 하는 성차별적 관습과 맞물린 코르셋으로서 평등권, 건강권 차원에서 접근할 수 있다. 직접 체감하자 화장품에 대한 의심으로부터 시작된 연쇄적 변화는 삶에서 천천히 몰려왔다. 그다음 수순으로 먹을 것에 관심이 옮겨갔다. 내가 먹고 있는 것들은 어떻지? 어떤 성분으로 이뤄졌지? 건강한 것들인가? 마찬가지로 제품 뒷면에 표기된 전성분을 살펴봤다. 미국산, 아스파탐, 보존료 등 화학성분으로 버무려져 있었다. 더 이상 안심하고 먹을 수 없었다. 국내에서 좋은 재료로 만든 생활협동조합(자연드림, 한 살림)에 조합원비를 내고 가입하였다. 이 당시 나에게 윤리적 소비에 대한 의미는 내 몸에 좋은 것과 대기업에 후려치기 당하지 않고 공정한 거래를 통해 농부들이 잘 살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일이었다. 한동안 호구 아닌 현명한 소비자로 살아가는 일에 만족하였다. 주변 지인들 중 몇몇은 동물권을 생각하며, 채식을 하였는데 커다란 울림은 없었다. 돈까스는 너무 맛있고, 치킨은 소울 푸드였다. 아니 이런 걸 왜 포기한단 말이야! 그러다가 뭔가 삶의 위기를 느끼기 시작한 건 최근의 일이다. 미세먼지 없이 마음껏 창문을 열거나 공기를 마시는 일은 점점 어려워졌고, 꽃은 때도 모르고 피고 지고, 지구 반대편에서 산불이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르고, 코로나19는 일상이 되었다. 이러다 지구 망하는 거 아닌가. 유년 시절에 뛰어놀던 맑은 하늘과 물, 흙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인간이 먹고 마시고 사는 일이 이렇게 지구를 더럽히고 오염시키는 일인가. 그레타 툰베리와 같은 다음 세대는 어른들이 만든 난장판을 책임지고 끝까지 치울 겁니다.라고 일침 했다. 2015년 '파리 기후변화협약' 로고 불행히도, 그 어른들이 나를 가리키는 건가. 되돌아보니, 이 난장판을 만드는 데 기꺼이 기여해왔다. 나름 쓰레기 분리배출에 열심이었지만, 쓰레기의 양은 크게 줄지 않았으며 근본적으로 자연 분해되지 않는 각종 플라스틱을 포함한 물건들을 소비-폐기하고 있다. 어른들의 범주에는 개개인의 시민뿐만 아니라 기업과 각국 정부도 포함된다. 개별 시민으로서 환경 문제를 자각하여 텀블러를 휴대하고, 샴푸바를 사용하는 건 매우 고무적인 일지만 이런 행동만으로 시스템 자체가 변화하지 않는다. 한국의 경우 기업에서 사용하는 플라스틱의 종류가 10여 가지가 넘어, 재활용되기 어려운 현실이라 정부 차원에서의 관련 법규와 정책적 변화가 절실하다. 또한 2018년 폐비닐 대란 사건으로 알 수 있듯이, 환경 문제는 주변국으로 떠넘길 수 없는 전 지구적인 협력이 필요한 일이다. 2015년 파리 기후변화협약은 195개국 당사국의 참여로 산업화 이전 수준 대비 지구 평균온도가 2℃ 이상 상승하지 않도록 온실가스 배출량을 단계적으로 감축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에 따라 협약에 가입한 한국은 2020년에 2050년 장기 저탄소 발전전략을 수립 제출했다. 정부는 2050년까지 그린 뉴딜 정책 선언했지만 서울환경운동연합에 따르면, 현재 건설 중인 7기의 신규 석탄발전이 포함돼 있어 2034년까지 석탄발전이 최대 발전원이 되며 2050년대 중반까지도 석탄발전을 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더 이상 환경 이슈는 보호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인간 중심의 오만한 발상이다. 보건, 식량, 생태, 기후, 동물에 대한 문제는 서로 연결되어 있고,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단 하나뿐인 지구별 아래에서 생태계 한 종에 불과하다. 산업화 이후의 자연과 관계 맺는 방식에 대한 전환이 필요하다. 개별 시민과 기업은 소비-회수-재활용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100년 후의 미래 세대와 자연에게 무엇을 남겨줄 것인가? 남겨주는 것은 고사하고, 우리가 싼 똥은 치우고 가야 하지 않을까. 썩지 않는 똥은 거름도 못되니까 말이다. /소해진 여성생활문화공간 비비협동조합 조합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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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6.21 16:54

[뉴스와 인물] “천안함 생존 장병에 대한 예우 적절치 못해” 송기춘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장

송기춘 위원장 군 사망사고 진상규명위원장에 송기춘(60) 전북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임명됐다. 지난 14일부터 출근한 송 위원장 앞에 놓여져 있는 천안함 재조사, 공군 여중사 사망사고 등 복잡하고 중요한 사안이 수두룩하다. 송 위원장을 만나 앞으로의 계획 등을 들어봤다. -군 사망사고 진상규명위원장에 임명되셨습니다. 어깨가 무거우실 것 같습니다. 제 연구 주제 가운데 하나가 군인의 인권 문제입니다. 그 동안 학자로서 군사제도와 군인 인권보장에 관한 글을 쓰고 강의를 해 왔는데,이 문제를 아주 구체적으로 해결하는 데 봉사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서 기꺼이 하게 되었습니다. 소임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많은 응원을 부탁드립니다. -군 사망사고 진상규명위원회가 어떠한 일을 하는 곳인지 설명해 주시죠. 군 사망사고 진상규명위원회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발생한 군 사망사고 가운데 사망원인이 불명확하거나 의문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건에 대한 규명을 신청하면 이러한 사건에 대해 조사하고 결정해 국방부와 보훈처에 적절한 예우를 요청하는 일을 합니다. 위원회가 직권으로도 조사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사망사고의 원인을 밝히고 당사자와 유족의 명예를 회복하고 피해를 보상받을 수 있도록 하고, 군에 대한 신뢰도 회복되고 하여 군인의 인권증진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위원회의 목적입니다. -지난해 군 사망사고 진상규명위원회가 천안함 사고에 대해 재조사를 결정했다가 번복하면서 국민 신뢰가 많이 떨어졌습니다. 천암함 사건은 아직도 사회적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만, 이미 국가가 주도해 구성한 전문적인 위원회에서 내린 결론에 따라 전사로 예우하고 있습니다. 제가 취임 첫날 대전 현충원에 있는 천안함 46용사 묘소를 찾은 것도 아직도 논란에 힘들어 하시는 분들에게 조금의 위로라도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였습니다. 법령에 의하면 우리 위원회가 다룰 수 있는 사건이라는 해석도 가능하지만 위원회를 구성한 법률의 취지를 고려하면 적절한 접근방식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안에 대해 잘 살펴 잘 마무리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국가유공자 심사에 대해서도 말이 많습니다. 천안함 사고 생존 예비역 34명 중 국가유공자 인정을 받은 사람은 13명에 그치고 있습니다. 국가유공자 심사는 보훈처의 소관사항이기도 하고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는 사망한 사고에 대한 조사와 구제를 위한 결정을 하는 권한을 가진 터라 생존 장병의 유공자 인정에 대해서는 특별히 언급할 내용은 없습니다. 다만, 사망한 경우에도 국가유공자나 보훈보상대상자 인정에 아직은 미비한 점이 있고, 생존한 장병에 대한 유공자 인정에도 치밀하지 못해 적절하게 예우되지 못한 부분이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아직도 당시의 피해로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계시는데 치료비도 본인이 부담하고 있다는 보도도 있어서 안타깝습니다. 우리 위원회의 활동을 통하여 국가유공자와 보훈보상자 관련 제도도 더욱 치밀하게 다듬어지도록 하겠습니다. -최근 공군 여중사 사망사건과 부실급식의 문제가 연이어 터지면서 병사들에 대한 인권문제가 화두입니다. 현재 공군 여중사 사망사건은 군사경찰이 현재 조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우리 위원회에서도 조사와 수사가 적절하게 이뤄졌는지에 대해 현재 유심히 지켜보고 있습니다. 만약 조사와 수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고 할 때 직권조사를 할 계획도 세우고 있습니다. 군에 대한 문제는 기본적으로 이 사건 하나의 문제가 아닙니다. 부대 전체를 지배하는 분위기, 부대의 고착되어 있는 문화, 간부들의 사고방식이나 행태가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공군 여중사 사건이 마무리되더라도 언제라도 다시 발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국방부를 비롯한 각 군부대에 대한 철저한 감찰을 실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군 사법기관의 제도적 정비에 대한 필요성도 언급되고 있습니다. 군 사법제도가 한번쯤 재편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이번 사건을 계기로 군사법원을 폐지하자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습니다. 국방부의 군사법원을 통일적으로 둔다는 방안인데 군의 수사와기소 그리고 재판이 한 관할관 안에서 이뤄지고 있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다른 지휘계통을 가지는 기관에 의해서 수사와 기소가 지휘권에 있는 사람들과 무관하게 이뤄져야 하고, 재판도 사건 발생시 군사법원을 소집해 개입할 소지도 없게 만들어야 합니다. 군의 특수성을 고려해도 지금의 사법제도는 사법의 본질 헌법과 법률 대입해서 정의로운 해결을 저해할만한 문제가 있습니다. -전북대학교에서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도 활동 중이십니다. 최근 사람의 사람에 의한 사람만의 위한 법이라는 책도 내셨는데 법이란 어떤 것이라 생각하신가요. 법은 뭔가 정의로운 것이고 객관적이 공정한 것이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태도가 가지는 장점도 있습니다. 법집행을 위해서는 그게 중요한 관점이니까요. 그러나 저는 그러한 믿음의 허상을 말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습니다. 물론 이것이 법을 무시하라고 말씀을 드리려는 것은 아닙니다. 법은 사람이 만들고, 사람이 해석하고 적용하고, 결국 사람이 만드는 작품이라는 측면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법은 따뜻한 것이어야 하고, 사람의 아픈 곳을 치유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도민을 비롯한 국민들께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군의 문제는 모든 국민의 문제로 볼 수 있습니다. 군대가 정말 좋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군대가 많은 국민들이 관련된 조직입니다. 군대가 국민에게 필요하고, 보람있는 기관이 되어야하는 이유입니다. 군대에서의 생활이 알찬 곳이 될 수 있도록 상상력을 발휘해서 국민들께서 국방에 대한 지원을 많이 해주면 좋겠습니다. △송기춘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장은 송기춘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장은 전주고와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대학원에서 법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민주주의법학연구회장과 한국공법학회장을 역임했으며, 전북평화와인권연대 공동대표 및 교육부 사학분쟁조정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전북평화와인권연대의 공동대표만 10년이 넘게 활동했다. 전북학생인권조례를 제정하고 학생인권보장을 위한 노력을 했다. 지난해에는 경기도 광주 나눔의집 민관합동조사를 통해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내세운 모금의 문제 등을 밝혀냈다. 송 위원장은 인권단체의 활동을 통해 괄목할 만하지는 않지만 조금씩 세상이 나아지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고 자부심을 드러냈다. 송 위원장을 표현하는 또 다른 단어는 헌법학자다. 전북대 법학전문대학원에서 헌법을 가르치면서 인간이 가져야할 인권과 권리 등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 기획
  • 최정규
  • 2021.06.20 16:10

[전북명산, 회문산의 속살] ②핏빛 어린 회문산-산이 기억하는 빨치산

한국전쟁 당시 종군기자로 빨치산에 가담했던 이태(1922~1997)는 저서 <남부군>에서 토벌군의 공격을 받고 후퇴하면서 수 개월간 의지했던회문산에 대한 소회를 이렇게 적었다. 이태가 1988년 내놓은 수기 형식의 <남부군>은 회문산을 일약 빨치산 활동의 중심무대로 올려놓았다. 그때까지 빨치산 관련 이야기는 토벌군 입장에서 소수 소개됐고, 이 또한 토벌군에 쫓기며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지리산권 중심으로 다뤄졌다. 참여정부 때 진실화해위원회가 발족돼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 규명이 이뤄지며 빨치산 관련 사실들이 좀 더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남북분단 아래 이데올로기적 제약 등으로 빨치산 관련 문제는 지금도 어려운 숙제다. 특히 본의든 아니든 빨치산과 연루돼 오랫동안 고통을 겪어온 회문산권 주민들에게 빨치산 이야기는 상처일 수밖에 없다. 빨치산에게 보금자리였던 회문산이 정작 지역민에게는 아픔의 산이 된 셈이다. 회문산 빨치산 활동이 시작된 것은 1948년 10월 여순사건과 관련돼 있다. 제주도 4.3항쟁 진압에 반대하며 일어났던 여순 봉기사건 참여자들이 진압을 피해 지리산 회문산 덕유산 등으로 들어가 유격 투쟁을 벌인 것이다. 6.25 이전 입산한 이들이 구 빨치산이다. 6,25 전까지 회문산 주변 산악지에서 활동하던 구 빨치산은 토벌 작전으로 거의 진압 단계 있었으나 전쟁 발발 후 세력을 확대했다. 회문산이 빨치산 본거지로 전면에 등장한 것은 9.28 서울 수복 이후다. 9, 28 서울 수복 후 조선노동당 각 도당 위원회 조직이 모두 산악지대로 이동했고, 전주에 있던 전북도당도 이즈음 회문산으로 들어갔다. 전북도당 유격사령부가 처음 자리를 잡은 곳은 회문산 인근 순창군 구림면 여분산 골짜기로 전해진다. 이태는 <남부군>에서 전주에서 대피해온 도당 간부들을 중심으로 인근 쌍치 구림 팔덕 덕치 운암 강진 청웅 태인 등의 민청원, 여맹원 등 300여명이 풀밭 둘레에 초막을 지었다고 당시 사령부 모습을 소개했다. 전북도당 위원장 겸 유격대 사령관은 경남 거제 출신의 방준표(1906~1954)였다. 그는 대구사범을 졸업하고 월북한 후 모스크바 유학을 다녀온 중앙당의 신임을 받은 엘리트 당원으로, 1954년 덕유산에서 토벌대에 체포되기 전 수류탄으로 자폭한 것으로 알려졌다. 도당 사령부는 이후 회문산 기슭으로 옮겨 세를 확대시켰다. 회문산에서 활동한 빨치산 수에 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평균 대략 400~500명 정도로 추산된다. 빨치산이 가장 득세했던 1951년 2월경에 그 수가 1000명을 넘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전북도당은 여러 차례 조직을 바꿨다. 전성기 때는 병단체제로 운영하며 탱크 병단까지 뒀다. 전투부대와 별도로 사령부에 병원과 피복과 병기제작을 담당하는 기구에다 노령학원이라는 정치군사 훈련소를 뒀다. 또 현재 회문산자연휴양림 입구 안시내 마을에서 생산된 창호지로 당보인 <전북도당통신>를 발간했다. 사령부 연예대가 농가의 넓은 마당에 가설무대를 만들어 모닥불을 피우고 위문공연을 벌였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회문산 빨치산들은 험준한 지형을 이용한 게릴라 전술로 통신 체계를 교란하고, 관공서 습격과 우익세력 살상, 좌익 사상 선전교육 등을 벌였다. 전북도의회가 1994년 조사한 보고서에 따르면 구림 동계 복흥 쌍치 등 순창 4개면에서 빨치산에 의해 279명이 희생됐다. 공산치하 인민군이 점령했던 순창경찰서만 해도 수복 10일만에 빨치산에 의해 두 차례나 전소됐다. 회문산 빨치산에 의한 순창지역 피해 상황은 순창문화원이 발간한 <내가 겪은 6,25>(1988)에 생생히 전해진다. 순창이 고향인 김병로 대법원장의 부인도 부산으로 간 가인과 떨어져 친정인 순창 인근 담양에 머물다 빨치산에게 총살을 당했다. 현직 대법원장 부인이 빨치산에게 희생당했다는 사실은 한국전쟁의 비극을 보여줌과 동시에 가인의 공인 의식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한인섭 서울대 교수는 저서 <가인 김병로>에 적고 있다. 빨치산이 발호하면서 군경의 토벌작전도 강화됐다. 최덕신 사단장이 이끄는 11사단은 남원에 사령부를 두고 1950년 11월부터 1951년 3월까지 견벽창야(堅壁淸野)(말썽의 소지가 있는 곳을 초토화)라는 작전을 수행했다. 군경의 대대적인 토벌작전에 견디지 못한 전북도당 사령부는 회문산을 탈출해 운장산으로 거점을 옮겼다. 이 때가 1951년 3월로, 6개월여의 빨치산 회문산 시대가 사실상 막을 내렸다. 전북도당은 이후 1951년 7월 덕유산 6개 도당회의를 거쳐 이현상이 이끄는 지리산을 거점으로 한 남부군 산하로 흡수돼 활동을 계속 이어갔다. 회문산 빨치산 잔당 활동은 56년 서남지구 공비토벌작전을 통해 마침표를 찍었다. 회문산 빨치산 활동으로 인한 회문산권 주민들의 피해는 컸다. 9.28 서울 수복 이후에도 빨치산으로 인해 쌍치 등 일부 회문산권 지역은 미수복지구로 남아 군경과 빨치산 사이 교전이 지속됐다. 순창 관하 전지서가 완전 수복된 것이 1952년 2월이었다. 미수복지구 주민들은 살아남기 위해 빨치산에 협력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 과정에서 국군과 빨치산 양쪽으로부터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특히 군경에 의한 순창지역 희생자가 1028명으로, 빨치산에 의한 희생자보다 훨씬 많다는 게 전북도의회 조사 결과다. 지금의 회문산에서 빨치산의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다. 당시 빨치산이 만들었을 방호나 초소 모습은 오간데 없다. 다만 능선을 따라 나뭇잎으로 두텁게 쌓인 곳을 어렴풋이 방호가 아닐지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회문산이 빨치산 무대였음을 알려주는 것이 회문산 휴양림 안에 설치된 회문산역사관과 위령탑, 비목공원 정도다. 회문산 역사관은 90년대 후반 빨치산 사령부가 사용했던 지하 벙커 모습으로 만들어졌으나 빨치산 관련 유물은 아예 없다. 사령부 모습을 짐작케 하는 작은 부조물 하나가 고작이다. 그 곁에 빈틈을 노리는 국가안보의 위협을 111로 지켜주세요라고 적힌 국정원 홍보판이 서 있다. 영화촬영지에 대해 흔히 지방자치단체에서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홍보하지만, 회문산에서 영화 <남부군> 촬영지라는 안내판을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 빨치산 활동에서 비롯된 회문산의 비극을 그저 부끄러운 역사, 감추고 싶은 역사로만 치부하는 안타까운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이제 그 역사를 정면으로 마주할 때도 되지 않았나.

  • 기획
  • 김원용
  • 2021.06.17 16:32

[문화&공감 2021 시민기자가 뛴다] 현존(現存)하는 가치(價値) 그 이상을 지닌

최근 들어 지역 고유의 이야기를 간직한 관광지 및 상품이 각광 받고 있다. 많은 시민들과 관광객들이 그 지역만이 가지고 있는 향수와 역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 것이다. 지역의 이야기가 주제화됨에 따라 지역 보존에 대한 관심 역시 점점 더 높아지는 추세이다. 이와 더불어 그 지역이 지닌 유무형문화재의 모습 또한 그 이상의 가치(價値)를 나타내며 우리에게 전승과 보존의 중요성을 다시금 실감케 하고 있다. 국어사전에서는 가치의 뜻을 1.사물이 지니고 있는 쓸모. 2.대상이 인간과의 관계에 의하여 지니게 되는 중요성. 3.인간의 욕구나 관심의 대상 또는 목표가 되는 진, 선, 미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로 정의하고 있다. 가치 있는 지역의 대표적인 예로 전통문화의 보고(寶庫) 전라북도는 한민족 역사와 삶 미래를 담아내고 있다. 전라북도는 韓스타일을 체험 할 수 있는 한국을 대표하는 특별한 전통문화 도시이자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장소이다. 도시 전체가 전통을 그대로 간직함과 동시에 체험의 장이라는 점 역시 사람들이 전라북도로 발걸음 하는 이유일 것이다. 이에 정부와 지자체에서는 지역 특색을 살린 관광 상품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으며, 이러한 전라북도 무형문화재는 기능분야와 예능분야를 합쳐 85건이 지정되었고 55종목으로 보유자 73명, 보유자 없는 단체가 11단체, 겨루기 태권도 1건으로 구분되어있다. 무형문화재는 대부분 전통사회 구성원들에 의해 입을 통하거나, 몸으로 전달되는 것, 즉 문자화되지 않은 것으로 설명 할 수 있다. 이것은 곧 전통문화의 전승이 현재의 시장경제로서의 논리가 아니라, 우리의 문화적 뿌리이자, 민족의 정체성을 후대에 물려 줄 의무가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도내 시군중에서도 전주시는 전라북도 전체 무형문화유산 가운데 가장 많은 문화재 기능보유자들이 거주, 또는 활동하고 있는 지역으로, 전국적으로 문화특별시라고 자부 할 만큼 많은 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교동미술관은 이러한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 분들의 신념과 역할에 존경의 마음을 표함과 동시에 전통문화에 대한 지역민들의 인식 향상과 무형유산에 대한 가치와 의미를 재고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이달 15일부터 27일까지 본관 1전시실에서 <현존하는 가치>展을 개최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대한민국 명장으로 지정된 김종연(목조각장), 소병진(소목장), 김동식(선자장) 명장을 비롯하여 전라북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방화선(선자장), △최종순(악기장), △고수환(악기장), △박강용(옻칠장), △장동국(사기장), △유배근(한지발장), △윤규상(우산장), △최대규(전주나전장), △안시성(옹기장), △김혜미자(색지장), △김선애(지승장) 기능보유자와 전승공예작가 △전경례(전통자수), △장정희(침선), △박순자(침선), △김선자(매듭), △김정화(칠보), △이병로(도자기) 등 총 20人명인들의 작품 약40여점이 전시 된다. 이번 전시는 국가중요무형문화재 및 전라북도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 전승공예가들을 한 공간에서 만나볼 수 있는 자리로, 전통문화 계승발전시키고 시민들에게 무형유산의 아름다움을 선사하기 위해 기획된 전시이다. 김완순 교동미술관 관장은 <현존하는 가치>展을 통해 무형유산의 보호와 우리 전통에 대한 관심을 유도하고, 전라북도 무형문화의 우수성을 널리 알림과 동시에 무형유산의 중요함을 공감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하였다. 며 이번 전시를 통해 전통의 맥을 잇고 있는 무형문화재 기능 종목을 알리고, 나아가 다양한 작품을 통해 무형문화재의 이해를 도움과 동시에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인식 확산 및 저변확대 및 무형유산이 지닌 문화적 가치를 높이고자 한다. 라고 강조했다. 무형유산은 무형의 문화적 소산(所産) 가운데서도 역사적 또는 예술적으로 가치가 높은 문화유산을 말한다. 이는 형(形)이 없는 살아있는 예술로서 형체가 드러나는 유형유산과는 조금 다른 의미를 지녔다고 할 수 있다. 무형유산은 후대가 이어받아 계승하거나 또는 그것을 물려주어 잇게 하지 않으면 그대로 소멸될 수 있는 예술이다. 그렇기에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분들의 역할과 신념이 중대한 비중을 차지하는 분야인 것이다. 전통의 맥을 계속해서 이어나가기 위해 무거운 짐을 지고계심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후학양성과 전통기법 전수와 계승에 힘쓰시는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분들이 자리하고 계시기에 현재까지 귀중한 우리의 전통이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 아닐까. 유배근(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31호)作_한지전통발, 100x65cm, 대나무 국가와 지역의 변화 및 발전은 단순히 새로운 개발만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유무형의 문화자원을 토대로 이루어진다. 즉, 과거,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도시야 말로 진정으로 역사성 있는 지역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지역 문화자산, 즉 문화유산 보유와 가치에 대한 의미 재고는 지역발전에 중요한 인자로 작용 할 것이다. 결국, 가치 있는 유무형의 문화재를 제대로 보존전승하여 후대에 전달하는 것이 현재 우리의 소명이라고 할 수 있다. 문화재는 조상들의 얼(魂)이 담긴 창조의 유산으로서 전통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가지게 하고, 우리가 속한 민족의 자부심의 근원이 된다. 더불어 문화재를 접하며 국가와 민족,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 대한 한없는 애착과 긍지를 되새겨 볼 수 있는 문화자산이기도 하다. 이에 지역이 유무형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알리는 작업은 꼭 필요 한 일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김효원 교동미술관 학예사 전시나 공연 등을 통해 무형문화재 보유자분들의 능력을 공개적으로, 또 지속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도모하는 제도와 기회를 마련하는 것도 소중한 우리의 문화유산을 보호하는 지자체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일 것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 기획
  • 기고
  • 2021.06.16 17:28

[뉴스와 인물] 이형규 전라북도 자치경찰위원장 "자치경찰은 주민자치의 완결편, 맞춤형 서비스 제공 노력”

지방경찰이 자치단체의 권한과 책임하에 지역주민 맞춤형 치안 서비스를 자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자치경찰제 운영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하지만 처음 도입하는 제도이다보니 다양한 과제와 산적한 현안 해결을 위한 시행착오가 불가피해 보인다. 7월 본격적인 자치경찰 시행을 앞두고 전북자치경찰위원회의 초대 위원장으로 발탁된 이형규 전 전북도 정무부지사를 만나 부임에 대한 소회와 앞으로 진행될 전북자치경찰의 밑그림을 그려봤다. 이형규 전라북도 자치경찰위원장 -전북자치경찰위원의 초대 위원장으로서 인사 말씀과 각오 말씀 부탁드립니다. 자치경찰시대를 여는 전라북도 자치경찰위원회의 초대 위원장을 맡게 되어서 남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은 것 같습니다. 전라북도는 동학농민혁명의 집강소를 통해 주민자치를 맨 처음 시작한 곳이기 때문에 위원장으로서 무게감을 더욱 느낍니다. 자치경찰위원회에서 가급적 주민들의 많은 의견을 듣고 정책에 반영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전북자치경찰위원회에 대한 소개부탁드립니다. 법에 규정되어 있는 대로 경찰이 국가경찰, 자치경찰, 수사경찰로 나누면서 자치경찰에 대한 집행은 기존 전북경찰청장이 하지만 자치경찰 시대에 맞게 자치경찰위원회에서는 새로운 시책을 발굴하고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치경찰에 대한 주민들의 기대심리는 높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도입 초기이다 보니 미비한 점이 많습니다. 앞으로 인력, 예산은 물론 제도적으로 미비한 부분 등이 보완될 것도 많습니다. 이제 첫발을 뗀 만큼 좀 더 나아지는 방향으로 노력하겠습니다. -위원회 구성이 편향된 구성이라는 말도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위원회 위원 중 시민단체에서 인권 운동을 전문적으로 활동했던 분이 없기 때문에 그런 시각은 충분히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법률상에도 인권전문가를 위원 추천을 권장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지적에 대해서 일정 부분 공감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위원 추천권자가 다르다 보니 추천권자끼리 서로 누구를 추천할지 조율할 수도 없습니다. 결과를 두고 보면 여성위원이 적다거나 인권 전문가 없다는 의견에 대해서는 공감하면서도 초기 법 제도에 문제점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위원 추천에 대해서 너무 조율하다 보면 추천권자의 권한을 제한할 수도 있습니다. 저희와 마찬가지로 아마 다른 시도에서도 앞으로 위원을 추천할 때 인권 전문가와 여성을 어떻게 추천해야 할지 고민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 자치경찰위원회 협의회 등을 통해서 보완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논의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전북자치경찰의 지향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자치경찰시대이기 때문에 경찰 위주의 행정보다는 주민을 위한 행정으로 가야 할 것입니다. 주민들이 원하는 사항이 무엇인지 파악해보고 주민들이 원하는 서비스 제공해야 합니다. 경찰 인력이 크게 늘어나지 않은 상태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을 것이나, 자치경찰시대에는 자율방범 활동과 같이 경찰과 주민들이 같이 할 수는 방안에 대해 연구와 논의가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민과 치안을 담당하는 경찰이 함께 범죄예방기능을 강화하고 순찰도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주민들과 대화 자리를 마련하여 충분히 이야기해나가면서 문제점도 보완해 나갈 계획입니다. -자치경찰 운영과 관련해 재정 부담, 자치경찰공무원 복리후생 부문, 경찰 내부 갈등 등 앞으로 넘어야 할 과제 많은데요. 앞으로 어떻게 극복해 나갈 계획이신지요. 자치경찰 운영과 자치경찰공무원 복리후생 부문은 예산이 수반되는 문제입니다. 법에서 자치경찰에 대한 인사, 예산권을 자치단체가 갖도록 되어 있다면 예산도 자치단체가 부담하는 것이 맞지만 현실적으로 지방자치단체 여건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이것을 부담하기가 어렵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자치단체의 어려움을 생각해서 현재처럼 경찰의 인건비를 국가에서 부담하는 것보다는 일단은 자치경찰시대에 맞게 자치단체가 부담하고 그 인건비에 해당하는 부분을 다른 명목으로 국가에서 보조해주는 방안 없는지 기획재정부에서의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당위성보다는 현실적인 것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아마 시도지사님과 시도지사협의회에서 더욱 논의가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진정한 자치경찰제 되려면 그런 방안을 마련되어야 하지만 재원 분배하는 문제는 쉬운 문제가 아니고, 법을 개정해야 하기 때문에 하루아침에 바뀌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외국처럼 자치단체가 경찰공무원 인사와 예산을 부담하는 형태로 가기에는 당분간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입니다. 지향은 그렇게 해야 되겠지만 어떻게 할 것인지는 좀 더 논의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경찰 내부 갈등을 대해서는 좀 파악을 해봐야 할 것 같지만 국가경찰, 자치경찰, 수사본부 간에 자치경찰 공무원이 차별을 받거나 인사의 보직에서 불이익 등으로 내부 갈등이 있다면 경찰청과 협의하면서 반드시 개선될 수 있도록 노력을 해나갈 것입니다. -전북도민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전라북도는 동학농민혁명 때 집강소를 통해서 주민자치를 처음으로 시작한 곳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치경찰은 주민자치의 완결편이라 볼 수 있습니다. 전라북도 자치경찰이 제대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위원회나 경찰만이 아닌 도민들께서 협조를 해주셔야 합니다. 위원회에서 주민 스스로 자율방범 기능을 강화한다거나 아동보호를 위한 학부모 연계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도움 주고, 그분들이 사명감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위원회에서는 주민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에 맞는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려고 노력해야하고, 주민들께서도 자치경찰에 대한 기대심리가 높을 것이나 자치경찰시대에 맞게 주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없는지도 같이 논의해보고, 역할과 협력방안에 대하여 대화와 소통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필요하다면 협의체 구성을 통하여 논의하는 과정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도민들과 충분히 협의하고 상의해서 지방행정, 치안 행정에 대해 주민들과 충분히 의견을 나눠가면서 좋은 대안이 나오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형규 전북자치경찰위원장은 진안 출신인 이 위원장은 전주해성고와 성균관대를 졸업하고 미국 시라큐스대학교에서 행정학 석사, 성균관대 대학원에서 행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지난 1974년 성균관대(통계학과) 3학년 재학 중 행정고시(16회)에 합격해 공직에 입문한 그는 최연소 합격이라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국무총리실에서 공직을 시작한 그는 2003년 전북도 행정부지사에 임명됐다. 당시 지방경험이 없어 파격 인사라는 말이 있었지만 이 위원장은 중앙부처와의 업무협조는 물론 행정 내부장악, 의회 관계도 뛰어났다는 평이다. 이후 2006년 7월 전북도를 떠난 그는 대한지방행정공제회 이사장과 전주대 행정대학원 특임교수, 국무총리실 새만금 위원 등을 역임하면서 2014년 전북도 정무부지사로 다시 복귀했다. 특히 새로운 변화에 끊임없이 도전하고 트렌드와 스마트함을 강조하는 이 위원장은 자치경찰이라는 새로운 출발에 있어 적임자라는 말도 나온다. 이 위원장은 자치경찰은 그간 범죄 예방에 초점을 뒀던 경찰 업무에 다양한 행정적 제반을 같이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앞으로 같이라는 가치에 대해 더욱 많은 고민과 소통을 통해 자치경찰 실현에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 기획
  • 엄승현
  • 2021.06.16 17:17

[참여&소통 2021 시민기자가 뛴다]노인이 가장 무서워하는 질병, 치매

영화 더 파더 조금씩, 천천히 안녕 내 머릿속의 지우개 스틸 앨리스 아무르 장수상회 그대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TV드라마 나빌레라 눈이 부시게 하나뿐인 내편 등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치매를 소재로 한 작품이라는 점이다. 그 중 올해 4월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더 파더(The Father)는 치매환자의 시선에서 스토리가 전개된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또 영화 아무르는 은퇴한 음악가 부부에게 어느 날 치매라는 불행이 찾아온다. 부인을 간호하던 남편은 종국에 치매에 걸린 부인의 고통을 보다 못해 베개로 눌러 간병살인을 저지르고 만다. 이처럼 치매를 그린 영화와 드라마는 우리 주변에 넘쳐난다. 그만큼 이 병이 우리 일상에 깊숙이 파고들었다는 반증이다. 유명인 중에도 이 병에 걸려 사회적 관심을 받는 경우가 적지 않다. 로럴드 레이건 전 미국대통령은 말년에 치매로 자신이 대통령이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부인 낸시 여사도 몰라봤다. 영화 벤허의 주인공 역을 맡았던 찰턴 헤스턴도 마찬가지였다. 1960-70년대를 풍미했던 배우 윤정희(77)도 얼마 전 치매로 가족 간 갈등이 불거져 나왔다. 치매는 인지기능 상실로 인해 일상적인 활동이 어려워지는 대표적인 노인성 질환이다. 세계보건기구(WHO)가 발표한 세계적으로 7번째 높은 사망원인으로 노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질병이다. 중앙치매센터가 2014년 실시한 치매 인식도 조사 결과, 우리나라 노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질병 1위가 치매였다. 43%로 2위인 암 33%를 크게 앞질렀다. 치매(demantia)는 예전에 망령, 노망이라 부르면서 하나의 노화현상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치매는 후천적으로 다양한 원인으로 인해 기억, 언어, 판단력 등의 인지기능이 떨어지는 뇌질환(대한노인정신의학회)이다. 일본에서는 치매라는 어감이 좋지 않다하여 인지증(認知症) 또는 인지기능 장애라 표현한다. 치매는 단순한 건망증과 다르다. 예를 들어 어떤 약속을 했을 경우 건망증은 힌트를 주면 잊었던 것을 기억해 내지만 치매는 약속 자체를 기억하지 못한다. 치매가 발생하면 최근 기억력이 저하되는 증세가 나타나다가 점차 장기기억도 하지 못하고 길을 잃거나 복잡한 작업의 수행이 불가능해진다. 그러나 치매는 어느 한 순간 발생하는 게 아니다. 10년 이상 진행되는 경우가 많아 조기진단으로 진행을 최대한 늦추는 치료가 중요하다. 중앙치매센터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2020년 65세 이상 노인 중 추정치매환자수는 84만명(전북 2019년 4만1617명)이며 유병률은 10.3%에 이른다. 노인 10명 중 1명이 치매를 앓고 있는 셈이다. 2025년엔 107만명, 2050년엔 302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치매 유병률은 연령 증가에 비례했다. 60-64세의 경우 0.61%, 65-69세 1.38%, 70-74세 3.85%, 75-79세 11.81%, 80-84세 20.91%, 85세 이상 38.61%였다. 나이가 들수록 급격히 높아짐을 알 수 있다. 그리고 65세 이상 치매환자 84만명 중 76%가 알츠하이머성 치매, 8%가 혈관성 치매, 15%가 기타로 분류되었다. 65세 이상 경도인지장애 환자수는 184만6000명에 달해 인구대비 유병률이 22.69%였다. 치매환자 1인당 연간 관리비용은 2010년 1851만원에서 2019년 2072만원으로 추정되며 국가치매관리비용은 16조5000억원(전북 8624억원)으로 GDP의 0.86%를 차지했다. 국가치매관리비용은 2050년엔 103조가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치매는 급격한 고령화와 더불어 더 이상 개인의 문제가 아닌 우리 사회가 대처해야 할 당면과제가 되었다. 우리나라는 2011년 치매관리법을 제정해 5년마다 치매관리종합계획을 수립하고 치매의 예방과 관리를 위한 종합대책을 마련하고 있다. 2017년 9월에는 치매국가책임제를 도입했다. 개별 가정 차원이 아닌 국가 돌봄 차원으로 해결하겠다는 게 핵심이다. 2019년 말까지 전국에 256개 치매안심센터를 설치했고 매년 9월 21일을 치매극복의 날로 지정했다. 이날은 치매극복 걷기대회, 치매안심마을 시범사업 추진, 치매 파트너 양성, 전국민 대상 치매교육 등을 실시한다. 한편 치매는 돌보는 사람도 함께 치료해야 효과를 볼 수 있다. 보호자 케어가 중요하다는 얘기다. 치매 초기라면 환자 스스로 의사결정을 할 수 있지만 병이 악화되면 모든 의사결정과 판단은 보호자의 몫이 된다. 이때 보호자가 지쳐 쓰러지면 치매환자의 진료도 끝장이 나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보호자는 배우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치매환자는 갑자기 괴팍해지거나 엉뚱한 행동을 하는 등 다양한 증세를 보인다. 증세별로 대처법을 보호자에게 교육하고 보호자의 심리상태를 살펴 같이 케어 해야 한다. 치매를 완치할 수 있는 약은 현재까지 없다. 치매는 더 이상 영화나 드라마의 소재로 쓰이는 남의 일이 아니다. 내 가족이나 나의 일이 될 수 있는 질병이다. 2018년 OECD 보건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평균 기대수명은 82.7세이고 우리가 평균 기대수명까지 산다고 보면 두 가정 중 한 가정은 치매환자를 돌봐야 한다. 우리 사회가 이제는 치매를 공포가 아닌 일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치매 친화적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치매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병이다. 기억을 잊다 점차 자신을 잃어가기 때문이다. 치매를 예방하려면 젊을 때부터 뇌를 가꾸는 일이 중요하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은 치매를 예방하려면 규칙적인 운동, 독서 등을 통해 뇌를 적극 사용하고 음주흡연 등을 멀리하고, 조기발견을 위해 검진을 받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매일운동을 하면 알츠하이머병이 생길 확률이 80% 낮아진다. 사회활동을 하지 않고 혼자서 외롭게 지내면 치매에 걸릴 확률이 1.5배 높고 TV 시청과 같이 수동적인 정신활동도 치매에 걸릴 확률을 10% 높인다. 이화여대서울병원 정지향 교수(신경과)는 치매예방법으로 일주일에 3회 이상, 매회 30분 이상의 유산소 운동을 할 것, 생선 등을 통해 단백질 섭취를 늘릴 것, 커뮤니티 활동에 참여해 다른 사람과 소통할 것, 스마트 폰과 신문을 적극 활용할 것 등을 제안했다. 또 식약처는 치매예방수칙 333을 강조하고 있다. 운동 식사 독서를 즐기고(3권-즐길 것), 술 흡연을 줄이고 머리를 다치지 않게 조심하며(3금-참을 것), 건강검진과 치매조기발견, 가족 친구와의 소통(3행- 챙길 것) 등이 치매를 예방하는 건강한 생활습관이라는 것이다. /조상진 전 전주시노인취업지원센터장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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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6.14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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