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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향에서] 한 해를 마무리 하면서

며칠 전에 금년 한 해에 일어났던 모든 일을 덮어버리려는 듯 무척 많은 눈이 내렸다. 함박눈을 보면서 내가 태어나서 고등학교 시절까지 살았던 전주 완산칠봉이 생각났다. 요즈음은 지구 온난화 현상으로 겨울이 춥지 않지만, 예전에는 겨울 날씨가 너무 추웠고 눈도 많이 왔다. 눈이 오면 완산칠봉에 올라가서 대나무 스키를 신나게 타고, 얼어붙은 논에서 썰매를 타곤 했다.완산칠봉 정상에 있는 팔각정에서 전주 시내를 모두 볼 수 있었고, 울창한 편백나무 숲과 약수터는 시민들에게 휴식과 운동을 같이 제공해 주는 보금자리였다. 어린 시절의 완산칠봉은 이렇게 어머니의 품과 같은 아늑한 공간이었다.금년 한 해는 문자 그대로 다사다난한 해였던 것 같다.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김연아 선수가 사상 처음으로 여자 피겨 스케이팅에서 금메달을 획득했을 때 온 국민이 환호하였고, 남아공 월드컵에서 비록 8강 진출에는 실패하였지만, 원정경기 16강 진출이라는 쾌거를 거두어 커다란 기쁨을 맛볼 수 있었다.그렇지만, 북한 잠수정의 천안함 공격으로 우리 해군 장병들이 희생되고, 연평도 포격으로 해병대원과 민간인들이 다시 희생되자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가 긴박하게 전개되었고 남북관계가 급속도로 냉각되었다. 북한이라는 현존하는 위협에 대해 그동안 느슨해졌던 우리의 안보의식과 대응자세를 다시금 가다듬게 된 도발이었다.중소기업 분야에서의 가장 큰 이슈는 대중소기업 동반성장이었다. 815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대통령께서 공정사회라는 원칙을 제시한 이후, 정부에서는 기업, 학계, 연구기관 등의 의견을 수렴하여 9월 29일에 대중소기업 동반성장 전략을 발표하였다. 대책의 주요 내용은 일방적인 납품단가 인하, 구두발주 후 취소, 기술탈취 등 대기업의 불공정한 거래행위의 시정,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전략적 동반성장 확산, 중소기업의 자생력 강화, 지속적인 모니터링 및 점검 시스템 구축 등 네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이러한 대책이 효율적으로 추진될 수 있도록 이번 달에 민간동반 성장위원회를 구성하였고, 내년 상반기까지 중소기업 적합업종과 품목을 선정하여 고시하고, 동반성장 지수 발표 및 1조원의 기금 운영 업무를 담당하게 된다. 대중소기업 동반성장 대책이 제대로 추진되어 우리 경제가 선진화되고 기속적인 성장동력이 창출되기를 기대해 본다.내년은 토끼의 해인 신묘년이다. 토끼하면 산토끼 노래에서 나오는 '깡충깡충'이라는 친근한 이미지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멀리 뛰고 빠르고 발전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내년에는 우리 나라의 모든 분야가 토끼처럼 도약하고 비약하는 한 해가 되어,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서로 돕고 같이 성장하고, 전통시장과 자영업자 등 어려운 서민경제가 안정되고, 세계로 나아가는 글로벌 중소기업이 더욱 많이 나오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한다.특히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하는 새만금 종합 개발계획이 차질없이 진행되어 전라북도가 신산업의 메카로 그리고 명품 국제 업무단지로 발돋움하기를 바란다./ 최수규 (경기지방중소기업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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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12.30 23:02

[타향에서] 좋은 손금(手相)을 만들려면

한 해가 저문다. 세월의 빠름을 새삼 느낀다. 이 시기엔 우리 삶이 어떻게 될까, 새해엔 어떤 '운'이 찾아올까에도 관심이 쏠리게 된다. 『토정비결』을 끄집어내고, 신문 잡지의 '내년의 운수' 기사에 눈길이 간다. 그게 맞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알 수 없는 미래에 작은 희망이라도 잡기 위해 약간의 관심을 쏟을 뿐이다. 필자도 그런 류의 미래예언에 관심이 없다. 인생이 미리 결정돼 있다면, 인간의 노력은 필요가 없어진다. 점쟁이에게서 황제가 될 관상을 가졌다는 말을 들은 한 농부가 농사를 팽개치고, 아내를 황후로 큰 아들을 황태자로 부르며 "짐(朕)이 어찌 그런 일을" 하다가 굶어죽었다는 옛 얘기도 있다. 인생은 개척하는데 의의가 있다.손금과 관련한 에피소드, 1970년 1월 일본 도쿄(東京)의 화려한 도심 긴자(銀座)에서의 일이다. 일요일 오후, 왕복 4차선의 긴자 거리는 차없는 날이어서 사람들 천국이었다. 최고급 백화점 등 건물도 볼만했지만, 못사는 나라 국민인 내게는 가족 단위로 거리를 걷거나 길 옆 파라솔 밑에 평화롭게 앉아 있는 모습이 부러웠다. 당시는 우리가 북한보다 못살던 시절.신기한 모습도 보았다. 점쟁이들이 좌판을 벌여놓고 있는데, 부인들이 줄 지어 기다리는 등 손님이 제법 많았다. 우리가 미신으로 타기하는 점쟁이들이 선진국 일본에서 성업중인 모습은 이상하게 보였다. 조금 걸으니 깃발에 손금을 그려놓은 수상(手相) 전문가가 있었다. 막 지나치려다 걸어놓은 깃발에 눈이 가는 순간, 저절로 발걸음이 멈춰졌다. 깃발에 그려진 손금이 내 손금과 꼭 같았기 때문이다. 그 사람에게 손을 내밀며 봐달라고 하니, 깜짝 놀란다. 깃발 봤느냐면서, 누구 손금인지 아느냐고 묻는다. 일본을 4백년 이상 지배한 에도바쿠후(江戶幕府)의 창건자 도꾸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손금이란다. 일본에선 그의 손금을 최고로 치는데, 같은 손금을 가진 사람을 만났다며 희한하다는 표정이었다. 나도 기분이 좋았다. 도꾸가와 이에야스의 손금이라니, 내 손에 천하가 쥐어진 것 같아 우쭐하는 기분도 들었다.이튿날 귀국 비행기를 탔다. 하네다(羽田)비행장 이륙 직후 뻥 하는 소리와 함께 기체가 크게 흔들렸다. 승객 모두는 크게 놀랐고, 이제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지나 비행기가 순항고도에 이르렀을 때 기장의 방송이 나왔다. 두 개의 제트 엔진 중 한 개가 이륙 직후 폭발했는데, 엔진 한 개로도 정상비행이 가능하고, 서울이 가까운 곳이라 계속 비행하겠으니 동요하지 말라는 것. 그로부터 1시간 40분, 비행기 바퀴가 김포공항 활주로에 닿는 순간까지 200여 승객은 모두 죽음을 옆자리에 태운 기분이었다. 바퀴가 땅에 닿는 순간 누구랄 것도 없이 모두 박수를 쳤다.비행기 안에서 많은 생각을 했다. 나같은 손금은 비명횡사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설마 내가 여기서 죽으랴 하는 생각도 했고, 비행기가 제대로 착륙해서 모두 살게 된다면 그것은 내 손금 덕분이라는 생각도 했다. 그 와중에도 사업 핑계로 고향에 계신 어머님 모시는 게 소홀했다는 자책감이 들었다. 살아난다면 어머님께 효도를 다 하리라 맹세했다. 그 후 어머님을 성심으로 모셨다.내가 손금 덕에 오늘을 이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손금이 인생을 결정하지 않는다. 손금의 음덕이 있다 해도, 본인의 노력이 있어야 그 덕이 발휘된다. 또 손금은 내가 그리는 게 아니다. 태어나면서 이미 그려져 있는 손금, 그 손금이 좋다면 그것은 조상들의 음덕 탓이 아닐까? 후손들이 좋은 손금을 가지고 태어나게 하고 싶으면, 지금 음덕을 쌓아야 한다. 연말, 소외된 이웃을 위해 작은 정성을 아끼지 않는 자세가 바로 그런 자세가 아닐까?/ 송현섭 (재경 전라북도민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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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12.23 23:02

[타향에서] 고향 나들이

고향 가는 길은 늘 설렌다. 비록 이제는 버선발로 뛰어나오시며 깜짝 반가워하시던 어머니는 안 계시지만 일가 친척들이며 옛 친구들이 있어 반갑다. 고속버스가 오리정 길목으로 슬며시 머리를 틀 때부터 소년처럼 가슴이 설레는 것이다. 고향에만 오면 세월을 건너뛰어 예나 이제나 어린 아이가 되어 버리는 것처름 느껴지곤 한다.지난 11월 초에도 고향 나들이를 했다. 남원시청의 초청강연 때문이었다. 시청 강당에서의 행사가 끝나고 저녁에는 옛 친구들과의 식사모임이 예정되어 있었다. 시청에는 중학생 시절 아주 가까이 지내던 두 친구가 재직하고 있어서 그 친구들의 극진한 환대를 받았다. 어린 나이였지만 모든 면에서 나보다 성숙하고 의젓하던 친구들이었다. 건방을 떨고 다니던 문학소년이었던 나를 두 친구는 잘 챙겨주었는데 오랜만에 시청에서 다시 만난 것이다.옛날 심성들로 미루어 보건대 공무원으로도 성실할 게 분명한 친구들이었다. 밤에 만난 옛 친구들은 제각기 하는 일들이 달랐지만 열심히 살고 있는 것 만은 분명했다. 든든하게 고향을 지키고 있는 그들이 새삼 미덥고 고마웠다.친구들과 헤어져 여장을 춘향가(家)라는 새로 들어선 듯 보이는 숙소에서 풀었다. 한실로 꾸민 방들이 그렇게 정갈할 수가 없었다. 간혹 일본을 여행하다가 전통 료칸(여관)에 묵곤 하던 생각이 났다. 사실 고향은 좋아도 내려가면 잠자리가 여간 문제가 아니었다. 연세 드신 누님댁에 연락을 드리면 부산을 떨게 해드리는 것 같아 적절히 묵을 곳을 찾아도 환경이 마땅한 곳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보료 깔린 숙소에서 어디선가 은은히 들려오는 국악소리를 들으며 오랜만에 달콤한 잠에 빠져들었다.다음날 옛집을 혼자 둘러보았다. 대문 너머로 보니 마당엔 잡초만 우거져있다. 어머니가 밤낮으로 가꾸시던 그 채마밭은 돌보는 이 없어 폐허처럼 바뀌어 버리고 장독대에는 낙엽이 수북하다. 당장이라도 어머니께서 "거 뉘?" 하시고 문으로 다가오실 것만 같다. 내가 빌려온 문학책을 밤새워 읽어대던 길가로 난 골방도 옛모습 그대로였지만 이제는 퇴락해 손만대도 파삭 내려앉을 것 만 같다.가끔 다니러 올 때면 인사를 드리던 골목안 노인들도 이제는 모두 저세상으로 떠나시고 안계셔서 적막하기 그지없다. 그 중에는 나만 보면 불러세우시고 근심섞인 목소리로 아직도 고시가 안됐느냐고 물으시던 분이 계셨다. 제가 하는 일은 그런 일이 아니라고 아무리 설명드린다 해도 이해 못하실 어른이셨다.옛날 내가 멱감고 물놀이 하던 요천변으로 나갔다. 지금은 거의 사라져 버렸지만 백사장이 있어 천렵을 하던 곳이었다. 쌀이 귀하던 시절, 집에서 쌀을 한 움큼씩 가져와 하얀 쌀밥을 지어 갓 잡은 피라미 매운탕에 먹으면 정신이 핑 돌만큼 맛있었다.천변을 따라 길게 걸으면 내가 좋아했던 여고생 누나가 살던 집이 있었는데 지금은 다른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그 집에는 풍금이 있었고 간혹 담 너머로 그 누나가 치는 풍금 소리가 들려오곤 했다. 교복을 단정히 입고 우리집 골목으로 오가는 누나를 보기위해 일부러 물가에서 서성대곤 했었다.옛 생각에 잠기며 골목을 걷고나니 해가 설핏하다. 돌아보면 거기 변함없이 내 유년시절이 있는 곳. 가난했지만 저녁밥상머리 오순도순 둘러앉아 식구들과 함께 화기애애하던 그 곳. 철 모르고 들로 산으로 뛰어놀며 꿈을 꾸던 그 곳. 언제라도 한 나절 버스에 몸을 싣고 가면 만날 수 있는 그 고향이 있어 나는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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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12.09 23:02

[타향에서] 선택과 집중, 그리고 취약분야 자생력 강화

지금 국회에서 내년도 예산안 심의가 한창 진행 중에 있다. 중소기업 분야의 예산안을 보게 되면, 금년의 8조 8천억원 보다 4.7%, 4천억원이 늘어난 9조 2천억원이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서 논의되고 있다. 고향에서 열심히 사업을 하고 계신 기업인들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뜻에서 개략적으로 중소기업 정책방향과 내년도 중소기업 예산안에 대하여 소개를 드린다.정부의 중소기업 정책 방향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먼저 벤처기업, 이노비즈 기업 등 혁신형 중소기업을 선택과 집중을 통해 지원하여 중견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독일, 일본 등에 비하여 취약한 산업의 허리를 보강하여 건강한 산업생태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업형 슈퍼마켓의 출점 확대, 내수시장의 침체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소상공인, 전통시장 등 자생력이 미흡한 계층과 분야에 대한 보호와 지원을 강화하여 서민생활 안정을 도모하는 것이다.내년도 중소기업 분야의 예산안은 미래 성장동력 확충, 일자리 창출을 위한 창업 활성화, 중소기업의 경영안정, 대중소기업 동반성장, 소상공인과 전통시장의 경쟁력 강화에 중점을 두었다는 것이 특징이다. 먼저, 미래 성장동력 확충을 위하여 중소기업 기술개발 지원규모가 처음으로 6천억원을 넘어섰고 금년보다 12.7%가 증액된 6,300억원을 반영하여 중소기업의 기술혁신을 지원하게 된다. 기술개발 지원예산은 녹색신성장 산업, 창업초기기업, 제조기반기술, 대학연구기관과의 R&D 협력 등 중소기업의 기술경쟁력을 강화하는 사업에 대한 지원이 대폭 강화된다.둘째, 좋은 일자리 창출을 위하여 창업, 인력구조 고도화 및 벤처투자 분야에 3,000억원이 편성되었다. 지역에서 성공창업의 요람 역할을 하고 있는 대학과 연구기관의 창업보육센터 건립 지원에 330억원, 기술창업 활성화에 790억원, 신기술 창업 인프라 구축에 350억원, 산학협력 기술기능인력 양성에 310억원이 지원된다. 특히, 창업선도대학에 대해서는 대학당 40억원까지 지원하여 청년들의 창업활동을 제대로 도와줄 수 있도록 한다.셋째, 중소기업진흥공단에서 3조 2천억원을 융자하여 중소기업의 원활한 자금조달을 지원한다. 융자자금은 창업기업, 기술개발기업, 전략산업 분야에 우선적으로 배분이 되고, 연대입보 면제도 확대하여 중소기업의 부담을 덜어 준다. 무역촉진단 파견, 해외규격 인증 획득 등에도 700억원을 지원하여 중소기업의 수출을 촉진한다.넷째, 대기업과 중소기업간의 동반성장 및 소상공인과 전통시장의 자생력 강화를 위하여, 대중소기업간 협력사업, 나들가게 육성, 전통시장 현대화, 중소 물류센터 건립 등에 3,500억원을 지원하여 서민생활 안정에 도움이 되도록 할 계획이다.이러한 중소기업 지원예산을 전라북도의 중소기업들이 많이 활용하고, 중소기업 지원기관들이 유기적인 협조를 통하여 중소기업이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서, 내년에는 매출이 두 배, 네 배로 성장하는 기업들이 늘어나기를 기대해 본다. 경기도 기업인들과의 모임에서 항상 이야기 하는 '따블, 따따블'이라는 구호가 전라북도에서도 메아리 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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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12.02 23:02

[타향에서] 경험이 말 시키는 '황혼잔소리'

사람이 살다보면 여러가지 일을 겪게 된다. 좋은 일도 있고, 궂은 일도 있다. 좋은 일이야 기뻐하고 즐기면 되지만, 궂은 일은 여러 가지 후유증을 남긴다. 좌절감을 느끼기도 하고, 잘못한 행위에 대한 후회로 가슴앓이를 하기도 한다. 좌절과 후회가 길어지면 인생 자체가 엇나갈 수도 있다.나이가 들면서 이런 경험이 늘어난다. 후배나 자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아지기 마련이다. 경험이 그들에게 말을 시키기 때문이다. 선배들의 말은 그의 인생이 농축된 표현이다. 성공했다고 인정받건, 실패자로 보이건 간에 크고 작은 경험이 한마디 한마디에 녹아 있다. 문제는 살아가는데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얘기만 하는데도, 그 말이 잔소리로 들린다는 점이다.나도 많은 경험을 했다. 작은 성취에 우쭐한 적도 있었고, 맘 먹은 대로 일이 풀리지 않아 잠 못이룬 밤도 많았다. 그런 경험 하나하나가 내 인생을 풍부하게 만들었다. 나의 경험이 특히 후배들에겐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교훈이 될 수 있다는 자부심도 있다. 비슷한 또래들을 만나면 「부인 잘 모시라」는 말을 자주 한다. 부인을 황후처럼 모시면 내가 황제 대접을 받는다. 특히 늙어서 부인의 도움을 받지 못하면 인생이 쓸쓸하고 괴로워진다. 건강도 못 챙긴다. 오래 살려면 부인의 도움이 꼭 필요하다.후배들에게는 「친구 사이에 돈 거래 하지 말라」는 얘기를 강조 한다. 친구 잃고 돈 잃게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친구가 어려울 때 도와주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다. 대가 없이 도와주는 것은 칭찬 받을 일이다. 도와주는 것과 거래는 다르다. 이 말에도 물론 몇 번의 경험이 실려 있다.516 후 군사정부는 전격적으로 화폐개혁을 했다. 일정 금액만 신권으로 바꿔주고 나머지는 모두 은행에 예치토록 했다. 마침 찾아온 친구에게 한도가 넘는 돈을 어떻게 바꿀까 고민이라고 했더니, 아는 사람이 은행에 있어 모두 바꿔줄 수 있다는 거다. 가진 돈을 모두 맡겼다. 그런데 감감 무소식. 주소도 몰랐다. 물어물어 단칸방에서 살고 있는 친구를 한달만에 겨우 찾았다. 그 돈으로 작은 사업을 시작했다며 벌어서 갚겠단다. 기가 막혔다. 당시 나도 집 한 채 없는 상황. 빨리 갚겠다니 더 할 말도 없었다. 그런데 또 무소식. 다시 찾아가니 이사 가고 없었다.성공한 젊은 사업가 시절이던 70년대, 사업을 하는 한 친구가 급전이 필요하다며 잠시 빌려달란다. 당시로서는 거금을 빌려줬다. 한달 쯤 뒤 소식이 없던 그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미국에 있는데, 내일 부도가 난다는 것. 미안하다며 내 돈은 꼭 갚겠다고 말했다. 황당했다. 그래도 친구니까 성공해서 갚으라고 했다. 몇 번 편지는 왔지만, 결국은 무소식. 나중에 들어보니 계획적 도피였다. 어쨌건 그 돈으로 인해 나도 부도위기에 몰렸다. 잘 나가던 사업가가 부도 내고 교도소 갈 형편까지 됐다. 다행히 그 위기를 극복했다.마음이 평온할 수 없었다. 그들이 미웠고, 자다가도 그 생각이 나면 벌떡 일어났다. 그래봐야 내 몸과 마음만 상한다는 걸 알았다. 어느 순간 돈받기를 포기하고, 그들을 용서했다. 마음이 편안해졌다. 내가 성인군자여서가 아니다. 단념할 것은 빨리 단념하는 게 좋겠다는 판단 때문이었다.문제는 돈이 관련되니 친구가 곁을 떠난다는 점이었다. 친구라는 호칭으로 부르는 사람들을 그런 식으로 잃는 게 안타까웠다. 베풀 수 있는 한 베푸는 게 인생의 도리다. 도와주려면 그냥 베풀어야지, 친구 간에 돈거래는 안된다는 철리를 깨우쳤다. 후배들을 만날 때마다 그렇게 얘기한다. 얼마나 가슴 깊이 새겨듣는지는 모르겠다. 필요한 얘기니까 한다. 살아가는데 작은 도움이라도 됐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괜한 잔소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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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11.25 23:02

[타향에서] 시험의 추억

평생을 선생으로 사는 친구가 지금도 예비고사장에서 문제를 풀지 못해 쩔쩔매는 꿈을 꾼다며, 가슴 아픈 시험의 추억을 털어놓곤 한다. 벌써 수십 년이 흐른 학창시절의 추억이 아직도 잠결에 재생되는 걸 보면 그때 수능 시험의 압박이 정말 강했던 것 같다. 그때만이 아닐 것이다.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수험생이 받는 압박감은 더 심해지는 것 같다. 올해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르는 71만여 명의 태도와 실력은 모두 다르지만, 수능에 10대의 모든 것을 걸겠다는 전투적 자세는 공통적이다. 그래서인지 인생의 큰 산을 넘어야 할 고비를 맞은 수험생들이 수능에 대처하는 방식은 애처롭기까지 하다. 생리 주기를 피하기 위해 시험 전 한 달 동안 피임약을 복용하며 호르몬을 조정하기도 하고, 우황청심환을 먹고 시험장에서 잠들어버리기도 한다. 도시락에 체하는 학생들에게 선생님은 아예 밥 대신 초코바로 열량을 보충하라고 권하며, 시험장 분위기에 긴장해 기절한 감독관도 있다. 학부모의 마음은 더하다.중학생이 집에 불을 질러 가족들을 몰살케 한 얼마 전 사건은 충격적이다. 경찰은 부자간의 불화가 원인이라고 했다. 아들이 법대에 진학하기를 바라는 40대 아버지는 춤과 노래에 흥미를 보이는 아들이 실망스러워 골프채로 배를 찌르고 혼을 내며 막다른 길로 몰아붙였고, 철부지 아들은 차라리 아버지 없는 세상이 좋겠다고 생각했단다. 판검사가 되라며 공부를 강요하던 아버지가 아들을 몰아붙인 결과는, 가족들의 희망과는 전혀 다른 끔찍한 불행의 얼굴로 되돌아 왔다. 자식보다 더 자식의 진로에 관여하는 부모, 수험생보다 더 애쓰는 학부모가 부지기수다. 그 간절한 소원은 자녀 사랑의 발로일 것이 분명하지만, 모든 수험생이 만점 받는 일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수험생 중 이번 수능에서 제대로 실력을 발휘 못해 아쉬워하는 학생이 98%에 이를 것이라고 전문가는 조언한다. 고득점에 해당하는 상위 1~2 %에 들어가지 못하는 대부분의 자녀들은 부모의 높은 기대치를 만족시키지 못해 소리 없이 좌절하며, 나쁜 시험의 추억을 남길지도 모른다.닉 부이치치(Nick Vujicic) 씨가 지난 달 서울의 한 대학에 왔다. 페이스북과 인터넷을 통해 최근 세계적인 유명인사가 된 닉 부이치치는 테트라-아멜리아 신드롬(Tetra-Amelia Syndrom)이라는 희귀병으로 발가락 2개가 달린 작은 발 하나만을 가진 채 1982년 호주에서 태어났다. "나는 팔다리가 없이 태어났고, 발가락 2개가 있을 뿐이지만, 대학에도 갔고, 지금까지 38개국에서 1,500번의 강연을 했으며, 두개 단체의 회장이다. 지금까지 35만 명과 포옹했고, 골프, 수영, 서핑을 즐기며, 아직도 배울 것이 많아 기쁘다"며 유쾌하게 강연을 시작했다. 그는 강연 말미에 일부러 단상에서 넘어졌다. 짚을 손이 없는 부이치치는 성경책에 머리를 박고 스스로 일어나는 모습을 보여 줘 청중을 숙연하게 만들며 큰 감동을 남겼다. 발가락으로 키보드 음악을 신나게 연주하고, 어린 시절 절망에 빠져 자살을 기도했던 일화를 소개하며 한 시간 내내 청중을 압도한 그가 뜨거운 가슴으로 전한 메시지는 "Never Give Up"이다. 팔다리가 없기 때문에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격려할 수 있었다던 부이치치가 청중에게, 살아오는 동안 기적을 체험하지 못했다면 자신이 다른 사람의 기적이 되어 주라던 눈빛이 잊히지 않는다.소수의 성공자와 다수의 실패자를 만들어내는 수능시험을 사회적 독약에 비유하는 사람도 있다. 오늘은 수험생에게 점수를 묻기보다 위로와 칭찬을 먼저 건네며 그들의 청소년기를 따뜻하게 보듬어 줄 일이다. 런던타임즈가 뽑은 행복한 인생 1순위는 바닷가에서 지금 막 모래성을 완성한 어린이다. 아기를 목욕시킨 후 눈동자를 바라보는 어머니, 작품을 완성하고 손을 터는 예술가, 죽어가는 생명을 수술로 살려낸 의사도 뽑혔다. 오늘 대한민국에서는 수능이라는 자신과의 경주를 멋지게 치르고 돌아온 자녀를 가슴에 안은 아버지가 행복한 인생 1순위가 아닐까. 그 행복감을 공유하며, 성적에 절망하는 아픈 추억이 아닌, 사랑에 둘러싸인 달콤쌉싸름한 시험의 추억을 남길 일이다./ 허미숙(전 CBS TV 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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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11.18 23:02

[타향에서] 생활 속의 스승들

공자님 말씀 중에 참 맞다 싶은 것이 많지만 그중에 유독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그 중 반드시 내 스승이 있다'라는 말씀에는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아닌게 아니라 살다보면 뜻밖의 장소와 낯선 시간 속에서 마음의 사표로 삼음직한 이들을 만나게 된다.몇 년 전부터 주말이면 퇴촌에 자주 가는데 거기서도 나는 마음의 스승들을 만나게 되었다. 언젠가 식사자리에서 그런 고백을 했더니 본인들은 정색을 하며 농담으로 받아들였지만 나는 마음속에 이미 퇴촌의 벗들을 스승의 반열에 두고 있다. 내가 퇴촌의 스승들이라고 부르는 이들은 전남 곡성을 고향으로 둔 한 사십대의 젊은이들인데 세 사람 모두 고건축과 고미술 쪽에 종사하고 있고 서울 근교의 새로운 고미술 거리로 형성되고 있는 도마 삼거리에서 퇴촌까지 옹기종기 모여살고 있다.원래 곡성은 아주 작은 고을인데 유난히 고미술 쪽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많이 배출한 지역이다. 누누누구하면 '아!' 하고 고개를 끄덕일만한 사람들이 그 지역 출신이다. 이 퇴촌 삼인방은 그러나 말쑥한 고미술상들이 아니라 벗어부치고 닥치는 대로 일을 하는 점이 이채롭다. 못하는 일이 없을 정도다. 이를 테면 한옥 짓는 일 또한 이론으로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실기에도 능한 것이다. 직접 뛰어들어 나무를 다듬고 땅을 파며 석축을 놓는 일을 하는 것이다.이 퇴촌 삼인방은 얼마 전 눈썰미와 손이 좋은 목수팀과 함께 '함양당(含陽堂)'이라는 날아 갈듯한 한옥 한 채를 지어냈다. 한 채의 조선집이 지어지는 동안 곁에서 홀로 감동적인 장면들을 많이 보게 되었다. 이를테면 일이 모두 끝난 뒷자리를 아무리 어두워도 셋 중에 누군가는 반드시 남아 뒷정리를 한다든지, 한 사람이 몸살이라도 날라치면 다른 두 사람이 흠집 없이 그 사람 몫을 해내는 것이다. 그야말로 누가 보던말던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본인들의 집을 짓는대도 그보다 더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집이 지어지고 나서도 수시로 와서 둘러보고 가곤 한다. 이 세 사람 중에는 이론에 더 밝은 쪽이 있고 실기에 더 강한 쪽이 있어서 서로 짝을 잘 맞추어 나간다는 것도 특징이다. 실기 중에는 목공일이나 보일러에서부터 벽돌쌓기며 기와 잇기에 이르기까지 두루 만능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 가지에 정통해서 일가를 이룬 사람도 있다.그런데 이들의 특징은 이러한 자신들의 장기나 실력을 별로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내가 보기엔 대단한 실력인데도 불구하고 한사코 감추려 드는 것이다. 그뿐 아니다. 의자며 침상 같은 것을 짜달라는 주문이 들어와도 꼭 받을 것만 받고 그만이다. 실력에 비해 너무 싸다 싶어도 더 받는 법이 없다. 아침부터 밤이 으슥하도록 일을 하고 집에 들어가 자고 나와서는 다시 일하기를 계속한다.나는 서재에 이 퇴촌의 벗들이 만들어 준 의자를 쓰고 있다. 앉고 일어설 때마다 마음새를 가다듬게 된다. 이토록 견고하게, 이토록 정성을 다해 만들어준 의자에 앉아 하릴없이 시간이나 축내고 있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언제 봐도 이 퇴촌의 세 친구는 늘 온화한 모습이다. 살다보면 간혹 서로 간에 의견충돌 같은 것도 있을 법 하건만 절대 그런 일이 없다. 늘 화기애애하고 정겨운 모습들이다. 생활의 매너리즘에 빠질 때마다 나는 퇴촌으로 가서 한나절 내내 그들의 일하는 모습을 보고 돌아온다. 톱밥이 날아오르는 나무를 켜고 못질을 하며 구슬땀을 흘리는 모습들을 바라보면 내 스스로가 정화되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 셔츠가 땀에 흠뻑 젖도록 일하고 점심을 먹는 모습을 보면서 노동의 신성을 절절히 느끼게 된다. 때로는 그들의 삶 자체가 등짝에 내리는 죽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정말이지 스승은 도처에 있다. 주말쯤에는 다시 퇴촌의 스승들을 만나러 갈 생각이다./ 김병종 (화가서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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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11.11 23:02

[타향에서] 옥정호의 아름다운 경관

나무들이 울긋불긋한 옷으로 갈아입고 온갖 맵시를 자랑하는 가을이 오면 중학교 때 낚시를 했고 작년 가을에 아내와 함께 여행을 했던 옥정호의 아름다운 경치가 머릿속에서 아른거린다. 전라북도 사람들에게는 매우 익숙하고 유명한 호수이지만, 사진작가들을 제외한 다른 지역의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내가 어렸을 때에는 운암댐이라고 하였지만, 지금은 옥정호라는 지명으로 불리우는 아름다운 호수가 임실과 정읍을 가로지르고 있다. 전주에서 20분 정도 거리에 위치한 옥정호는 새벽에 일출과 함께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아침 경관이 너무나 환상적이어서 전국의 유명한 사진작가들을 불러 모으는 곳이라고 한다. 하천 길이 212㎞, 유역 면적 768㎢, 저수량은 4억 3천만 톤이나 되는 매우 큰 호수로서 김제평야 등에 농업용수 등을 공급하는 다목적댐이다. 예전에는 붕어가 많이 잡히는 낚시터로 유명하였으나, 현재는 상수원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낚시는 할 수가 없다.중학교 3학년 때 친구 2명과 주말에 1박 2일로 밤낚시를 했던 적이 있다. 텐트를 치고 밥을 지어 먹고 야광찌와 떡밥을 매단 낚시 줄을 멀리 던지고 고기가 물때까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우정을 나누었다. 한 친구는 어린 나이였지만, 언제 배웠는지 거의 어부 수준으로 붕어를 잘 잡았던 기억이 난다.그리고 작년 가을 어느 월요일에 휴가를 내서 아내와 함께 정읍 산내 한우마을에서 둘이 오붓하게 맛있는 한우를 도시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저렴한 가격으로 먹고 옥정호를 들른 적이 있다. 국사봉 전망대의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서 본 옥정호의 경치는 매우 아름다웠다. 특히 호수 한 가운데에 있는 붕어섬은 1999년 미국 유학시절 여름방학 때 구경하였던 캐나다 서부에 있는 밴프재스퍼 국립공원의 멀린 호수에 있는 스피릿 아일랜드라고 하는 자그마한 섬과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섬은 세계적인 사진작가들이 꿈의 촬영장소로 손꼽는 곳이다. 주변에 만년설이 쌓여 있는 웅장한 산들이 둘러싸고 있고 호수물의 색깔은 비취빛으로 물속까지 투명하게 보일 뿐만 아니라 사슴, 산양, 곰 등 야생동물들이 도로가를 여유있게 거닐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시사철 전 세계의 관광객들이 끊이지 않고 방문하고 있으며, 관광수입만으로도 주민들이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동쪽으로 1시간 거리에 있는 캘거리를 제외하고는 인근에 산업시설이 거의 없다.최근 우리나라 사람들의 관광 경향을 보면, 정신없이 돌아다니면서 기록사진을 찍기 보다는 아름다운 경치를 보면서 편히 쉬고 사색도 하고 맛있는 음식도 먹고 건강도 챙길 수 있는 선진국 형태로 바뀌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추세에 맞추어서 아름다운 옥정호, 단풍이 절경인 내장산과 강천산, 건강회복에 좋은 편백나무 숲이 울창한 축령산, 그리고 소고기라는 먹거리가 있는 산내마을을 엮어서 2박 3일, 3박 4일 또는 1주일 정도의 다양한 웰빙 관광상품을 개발하고 적극적으로 홍보하여 관광객들을 유치하면 지역경제 활성화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전주에서 순창으로 이어지는 4차선 도로의 완공을 통해 접근성을 높이고 부족한 숙박시설을 확충함과 아울러, 관광 종사자들과 주민들이 서비스 마인드를 갖추는 것이 시급하다고 본다. 국내와 아시아뿐만이 아닌 전 세계인들이 찾아오는 글로벌 관광전북이라는 즐거운 상상을 해 보는 가을이다./ 최수규(경기지방중소기업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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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11.04 23:02

[타향에서] 인생의 세 고비

사람이 살아가는데 세 번의 고비가 있다고 한다. 세 번의 기회가 찾아온다는 말도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로부터 전해오는 이 말을 믿지 않지만, 그렇다고 꼭 안 믿는다고 말하기도 애매한 것 같다. 삶이 예측가능한 게 아니고, 내 삶을 지배하는 뭔가가 있는 것 같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도 그렇다. 믿는 것도, 미신이라고 매도하지도 않는다.살아가다보면 누구에게나 고비는 있다. 어느 정도까지의 위기가 고비인지, 그것이 옛말에서 말하는 그 고비인지, 또 인생에 유의미한 고비가 꼭 세 번이어야 하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러나 지난 날들을 생각하면, 내게도 세 번 정도의 고비 혹은 위기가 있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내 경우 고비는 생명의 위기였다. 모두 물과 관련이 있다. 칭찬받을 일이기도 했다. 물에 빠진 생명을 구해줬으니까. 하지만 내 수영실력이 동네 개천의 개헤엄 수준이란 걸 생각하면, 용기는 가상했지만 생명의 위기였다고 할 수 있다.첫 번째는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고향 칠보에서의 일. 물살 센 동진강을 사이에 둔 송산마을과 시기마을은 얼기설기 엮은 나무다리로 연결돼 있었다. 내가 다리 옆 둑에 있는데, 나무다리 위로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보이는 아이가 굴렁쇠를 굴리며 오는 게 보였다. 그런데 굴렁쇠가 다리의 나무 사이에 걸리는 것 같더니 아이가 물 속으로 떨어졌다. 나도 모르게 뛰어들어가 아이를 끄집어냈다. 50m 정도 떠내려온 아이는 물은 좀 먹었지만 괜찮은 것 같았다. 괜찮느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집에 가라 하니 일어나서 갔다. 나도 경황이 없어서 누군지 물어보지도 않았다. 그 후 그 아이를 만나고 싶어 계속 수소문했지만, 누구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두 번째는 대학생 시절의 여름. 한강으로 놀러갔다. 당시 서울시민의 휴식처는 남산과 한강인도교 부근의 백사장뿐이었다. 친구와 보트에 올랐다. 부근에서 여자 두 명이 보트를 타고 있었는데, 그 배가 한 쪽으로 기울더니 한 명이 물에 빠졌다. 물에 뛰어들어 구해냈다. 내가 구해준 젊은 여성은 생명의 은인에게 술 한잔 대접하겠다며, 종로3가의 술집에 있으니 그리 오라고 했다. 나도 생명을 구했다는 자부심으로 매우 흐뭇했지만, 갈 수는 없었다. 당시 종3이 뭐하는 곳인지 아는 사람은 이해할 것이다.세 번째는 역시 대학시절, 안양에 사는 친구를 찾아 버스를 탔다. 안양 부근에서 버스가 둑길에서 냇물로 굴렀다. 세 번 정도 구른 것 같다. 버스 안으로 물이 반쯤 차올랐다. 30여명 승객이 모두 부상을 입었다. 나는 긁힌 상처 하나 없이 말짱했다. 기적으로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는 상황. 다친 승객들을 한 사람씩 업고 물 밖으로 옮겼다.며칠 전 신기한 경험을 했다. 캐나다 교포라는 남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와 친척 되는 어머니가 만나보라고 말씀하셔서 전화했노라고 했다. 약속을 하고 커피숍에서 기다리는데, 순간적으로 '이 사람이 혹시 물에서 구해준 그 아이는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든 생각,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다. 그 사람에게 "어렸을 때 다리에서 떨어져 물에 빠진 적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동생에게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 앞뒤를 맞춰보니 내가 구해준 그 아이가 맞았다. 지금 서울에서 잘 살고 있단다. 동생에게 전화했더니, 다리에서 떨어져 물에 빠진 것까지만 생각나고, 그 뒤의 일은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 그 때 상황을 설명해주니, 생명의 은인을 이제야 뵙게 됐다며 감격했다. 며칠 뒤 가족을 데리고 인사를 왔다. 만나고 싶어하던 사람을 57년 지난 뒤에 만난 것. 기적같은 만남이 매우 기뻤다.(나이는 61세. 이름은 한종석. 정말 반가워 부둥켜 안고 꿈만 같았다.)살아오면서 좌절도 있었고, 여러 고비를 겪기도 했다. 죽음과 관련된 고비도 겪었다. 이젠 죽을 고비는 다 넘겼나 하는 생각도 든다. 최소한 '물'과 관련돼 잘못 되는 일은 없겠지 생각하며 웃음 짓기도 한다. 이 나이가 되면 잔병도 없어진다니, 좋은 일만 있을 것 같다. 과욕인가?/송현섭(재경 전라북도민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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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10.28 23:02

[타향에서] 그들 속의 목계

몇 해 전 고향에 있는 지인의 집무실에서 '목계(木鷄)'를 처음 봤다. 글자 그대로 나무로 만든 닭이다. 미동도 없이 늠름한 자세로 서 있는 그 수탉은 금방이라도 홰를 치며 숨을 쉴 듯 생생해 한참을 살펴본 기억이 난다. 짧은 기간에 규모의 기업을 일궈낸 그 젊은 경영자는 집무실에서 나무닭을 보며, 스스로의 혈기와 교만함을 경계했을 것이다. 장자(莊子) 달생편에 이 목계 이야기가 나온다.주나라 임금 선왕은 닭싸움을 좋아했던 것 같다. 쓸 만한 투계 한 마리가 생기자 기성자라는 당대 제일의 조련사에게 최고의 싸움닭으로 키워달라고 부탁했다. 열흘이 지나 어떠냐고 묻자, 기성자는 고개를 저었다. "교만해서, 자기가 최고인 줄 알고 마구 덤비려고 합니다." 열흘 후 다시 물었다. "교만한 건 버렸지만 상대방의 소리나 그림자만 봐도 싸우려고 반응합니다." 열흘 후 왕이 또 물었다. "아직 아닙니다. 상대방을 노려보는 눈초리에 살기가 남아 있습니다." 열흘이 더 지난 다음에야 기성자가 대답했다. "이제 된 것 같습니다. 상대방이 아무리 소리를 지르고 덤벼도 반응이 없습니다. 마치 나무로 깎아놓은 '목계'같습니다. 이제 마음의 평정을 찾았습니다. 덕이 충만해서 그 모습만 봐도 싸우지 않고 도망갈 것입니다." 싸움닭인 투계가 싸우지 않고 상대를 제압하는 경지에 이른 것이다.국내 굴지의 대기업을 창업자가 아들에게 목계의 故事를 예로 들며 '경청'과 '몰입'이라는 경영철학을 물려줬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투계 조련사의 의견을 귀 기우려 듣고 네 번의 기회를 준 임금의 경청 리더십과, 여기에 호응해 목계라는 최고의 명작을 만들어낸 장인의 자발적인 몰입을 통하면, 기업은 최고의 성과물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핵심이다. 최근에는 사내 인트라넷 화면에 두뇌게임 '아나그램'을 띄워놓고 'L I S T E N' - 경청과, 이 단어를 재배열한 새로운 단어 만들기의 정답 'S I L E N T' - 침묵을 강조하며, 경쟁심을 초월하라고 말하고 있다.고향집을 지키며 희수(喜壽)를 넘기신 둘째 형님이 요즘, 갑자기 아주 사소한 것에 마음의 평정이 흔들린다며 자기검열을 하신다. 어제도 텃밭을 다듬다가 채소에 약을 쳐야겠네, 혼잣말을 했더니 형부가 '거름을 줘야지, 알지도 못하고...' 한 것뿐인데, 그 말이 섭섭해 마슴에 잔물결이 지나간다고 웃으신다. 스무 살에 대청마루 넓은 댁 며느리로 시집간 형님은 시부모님과 외조모님을 함께 모시는 맏며느리로 살면서, 손아래 다섯 시동생과 당신의 여섯 자녀를 키워내며 57년을 현장 지휘관으로 사셨다. 내 기억으로는 그 얼굴에서 미소가 떠난 적이 없지만, 격변기를 사시며 대소가에 번다한 일이 많았던 생애를 짐작해보면, 고비마다 그 풍랑을 어떻게 그리 고요히 견뎠을까 싶어 물었더니, 마음속 깊은 곳에 싸움닭 한 마리가 살았단다. 그 많은 내전을 치르고도 이렇게 상처 없이 승자가 된 형님을 보면, 아마도 그가 평생 가슴에 키워온 것은 투계가 아니라 장자의 목계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뛰어난 투계는 많지만 목계를 만나기가 쉽지 않은 세상이다. 쌈닭은 한쪽이 죽을 때까지 쪼고 뜯지만 결국 이긴 닭도 오래 살지는 못한다. 사리사욕을 위해 온갖 싸움의 기술을 가르치는 세상에서, 승패에 집착하지 않는 사람만이 무적의 강자이며, 무념무심이 최대의 무기라니, 칠순의 형님처럼 마음속에 목계 한 마리 키워낸 어른들의 지혜가 빛나는 가을이다./ 허미숙(전 CBS TV 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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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10.21 23:02

[타향에서] 어느 배달소년의 추억

전북일보가 60주년을 맞았다. 사람으로 치면 환갑인 셈이다. 실로 위업이라 할 만하다.전북일보 60년의 기사를 보면서 낡은 흑백사진처럼 옛날의 기억들이 살아나왔다. 중학교 2학년 때 나는 고향에서 처음으로 신문배달을 시작하였다. 전북일보는 아니었지만 같은 지방지였는데 석간이었다. 왜 그랬는지 그때는 석간을 밤에 돌리곤 했다. 내게 주어진 부수가 40매쯤 되었던 것 같다.이른 저녁을 먹고 지국에서 신문을 받아 골목을 걷거나 뛰다보면 두 시간이 후딱 지나갔다. 1967년 무렵이었는데 그때 최희준의 '종점'이라는 노래가 유행이었다. 신문을 돌리다보면 담을 넘어 '너를 사랑할 땐 한없이 즐거웠고...'라는 가사의 노래가 유난히 많이 들려왔다. 이 노래가 좋아 가끔은 담벼락에 쪼그리고 앉아 끝날 때까지 듣곤 했다. 어느 집 모퉁이를 돌면 '종점'이 들리고 어느 집 문 앞을 지나칠 때면 그 시간에 시작하는 연속극 주제가가 들려오곤 했다.그런데 내가 신문을 돌려야 하는 곳 중엔 보선사무소라는 데가 있었다. 역에 딸린 부속사무실이었는데 훗날 생각해보니 아마 선로를 관리하는 곳이었던 것 같다. 이 곳은 명포 밭을 지나 한참을 가야했는데 사무소 입구에 희미한 불빛 하나뿐 주위는 늘 깜깜했다.밤마다 이 외딴 보선사무소까지 가기가 아주 죽을 맛이었다. 한없이 이어진 키 큰 명포 밭을 지나갈 때면 머리끝이 쭈삣거릴 만큼 무서웠다. 달이라도 휘영청 뜬 날 밤이면 그나마 나았지만 깜깜할 때면 일부러 최희준의 '종점'을 크게 부르며 그곳까지 가곤했다.어느 날 밤인가는 역시 '종점'을 부르며 가고 있는데 명포 밭에서 남학생과 여학생 하나가 걸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한해 선배로 소문난 불량학생이었다. "이놈아 노래 좀 작게 부르고 다녀." 그는 나를 지나치며 그렇게 말했는데 슬쩍 보니 곁에선 여학생 모습이 참 예뻤다. 그 후 가끔씩 학교에서 껄렁한 모습의 그를 볼 때면 이쁜 여학생의 모습도 함께 떠올랐다.신문을 돌리는 것은 특별히 어려울 것이 없었지만 보선사무소까지 가는 것이 너무 싫어 슬쩍슬쩍 빼먹기도 했다. 어느 날 지국에서 신문을 봤는데 총무가 배달소년들에게 화를 냈다. "보선사무소 어떤 놈이야. 제대로 돌리지 않으면 잘라 버릴거야." 으름장에도 불구하고 한달 너댓 번씩은 보선사무소에 신문을 넣지 않았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결국 나는 자청하여 배달 일을 그만두겠다고 했다.그 후 대학생이 되어 내려가 보니 고향집에서 전북일보지국을 하고 있었다. 사무실은 어수선했고 배달소년들은 들락거렸지만 마음의 고향에 돌아온 듯 신문냄새도 상큼하게 느껴질 정도였다.지금도 나는 나의 배달소년 시절의 추억을 꼭꼭 숨겨놓은 연애편지처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그때의 어두운 밤길을 터벅터벅 걸으며 날마다 동심의 키가 한 뼘 정도씩은 자랐던 것 같다. 조숙한 문학소년 때여서 밤길의 작은 풀벌레소리 하나에도 감성의 촉수들이 예민하게 일어서곤 했다. 배달에서 돌아오면 이런 경험들을 글로 적곤 했다. 수필인지 소설인지 정체가 애매한 글을 한도 없이 썼고 때로는 그림까지 곁들여 보관하곤 했던 것이다.폭풍처럼 휘몰아친 아버지의 죽음과 집안의 몰락 같은 사건들 속에서 그나마 나만의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라는 시간이 친구도 되었고 위로도 되었던 것 같다. 한차례 자꾸만 흘러내리는 신문을 껴안고 터벅터벅 걸으며 어린 나는 자신과 참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던 듯 하다. 그뿐인가 지국에서 한달 월급을 받으면 친구와 자장면 몇 그릇을 사먹고 남는 돈으로는 화구며 책을 살 수 있어서 참 좋았다. 돌아보면 내 배달소년 시기야말로 내 생애의 몇 손가락에 꼽을 만치 소중한 시간이었던 것 같다./ 김병종(화가, 서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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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10.14 23:02

[타향에서] 장애는 짐이 아니다. 편견이 짐일 뿐이다 - 최수규

책상 앞 지난 달력을 넘기다 4.20일 장애인의 날에 빨간 동그라미와 함께 '장애는 짐이 아니다. 편견이 짐일 뿐이다.' 라는 문구를 발견했다. 이는 한국장애인개발원에서 시행한 2010년 제30회 장애인의 날 행사 공모에서 입상한 슬로건 중 하나로 장애인기업을 지원하는 기관장으로써 마음깊이 새겨야 하기에 적어 놓은듯 하다. 한국인 평균 행복지수는 평균 64.13점. 10대의 행복지수가 71.43으로 가장 높았고, 가장 왕성하게 활동을 하는 30대와 20대는 각각 63.32, 61.94 순으로 최하위를 기록했다. 우리가 하루에 몇 번이나 찌푸린 얼굴로 일하고 있을까 생각해 본다. 그러나 내 힘으로 일해서, 나를 믿어주며 따라주는 직원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 아직도 가슴이 벅차시다는 (주)가인그린텍 전은선 대표가 있다.2007년 설립한 종업원 7인의 장애인기업으로 정부의 새주소 사업과 관련한 현수막 및 주소판 제작 전문기업이다. 이 기업은 조달청 MASS 등록 및 관련특허, 디자인등록증을 보유하여 기업 경영시 가장 애로사항으로 조사된 판로(51.5%)분야를 스스로 개척하고 있었다. 그러나 원자재 구매를 위한 운전자금을 지금까지 대표자와 직원들이 가까스로 해결했다는 한마디에 말 못할 미안함과 장애인기업 지원시책 홍보가 적극적으로 필요함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이에 경기중소기업청에서는 9.30일, 정부의 장애인기업 지원방향 및 지원시책 안내, 공공기관 전자입찰 교육, 우수 성공사례 발표순으로 정책설명회를 진행하였다. 이날 행사는 단 1명의 이석자 없이 4시간 동안 진행되었으며 오랫동안 엉켜 있었던 실타래가 풀린듯한 느낌을 받았다는 참가자도 있었다.2008년 중소기업청 용역보고서에 의하면 우리나라 장애인 기업은 전체 중소기업의 1.1%로 조사된바 있다. 장애인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2005년(38.2%)에서 2008년(41.1%)로 소폭 증가 되었으나 평균 매출액 178백만원, 자본금 147백만원, 종업원 2.9인의 영세한 구조로 운영되고 있다. 그러나 일반기업에 비하여 장애인 고용율이 24배나 높으며 일반 노동시장 진출이 어려운 장애인들을 고용하여 '고용'과 '훈련'을 동시에 감당함으로써 장애인들의 일자리와 소득창출을 간접 지원하는 지렛대 역할을 수행하는 중요기업으로 인식되어야 한다.정부에서는 2005년 장애인기업지원촉진법을 제정하여 장애인기업협의회, (재)장애인기업종합지원센터 설립을 통한 장애인기업 원-루프(One-Roof) 시스템을 갖추었고, 공공기관 장애인기업제품 우선구매제도, 특례보증지원 제도운영 등을 통해 장애인기업의 자립을 지원하고 있다. 특히 중소기업청에서는 창업강좌 및 컨설팅, 창업경진대회, 장애인기업 CEO 연수 및 국내외 전시회 참가 지원, 기술개발사업 선정시 가점부여 등 다양한 시책을 통해 잠재 장애인기업 발굴 및 사업 활성화에 올해에도 20억원 예산을 지원하고 있다. 아울러, 지역신용보증재단에서는 올해 300억원 규모로 담보부족과 낮은 신용등급으로 자금난을 겪고 있는 장애인기업을 대상으로 보증금액 5천만원(제조 및 지식기반서비스업은 1억원 이내) 이하인 경우 보증금액 사정을 생략하고 보증료를 고정 1%만 부과하는 등 완화된 조건으로 보증지원을 하고 있다.아기가 제대로 걷기까지 2000번을 넘어진다고 한다. 장애인기업에게는 같은 시기에 걸을 수 있도록 정부가 손을 잡아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걸음마 이후에는 끊임없는 제품개발 노력 및 판로개척을 통해 일반기업과 동등한 위치에서 경쟁할 것이며 장애인을 경제활동에 참가시키는 주체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한다.기고를 쓰면서 다시 한번 슬로건을 되새겨 본다. '장애는 짐이 아니다. 편견이 짐일 뿐이다.'/ 최수규(경기지방중소기업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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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10.07 23:02

[타향에서] 야박한 서울, 기회의 서울, 그리고 귀성

추석을 보냈다. 민족의 대이동, 귀성의 물결이 전국에 넘실거렸다. 고생길 마다않는 행렬, 고향과 가족을 찾는 연례행사였다. 4천만이 움직였다는 보도다. 명절 때 고향을 찾는 건 우리만이 아니다. 중추절을 맞아 고향길에 나서는 중국인의 수자 단위가 ??억??이다. 크리스마스 시즌에 고향과 부모를 찾는 서구의 경우도 마찬가지.길은 막히고 짜증 나는 때도 많다. 그런데도 귀성을 중단하지 않는 것은 왜일까? 인간의 유전자에 고향을 찾는, 연어의 모천회귀 같은 본능이 있는 걸까? 나 역시 귀성 행렬에서 예외가 아니다. 젊은 시절부터 이 나이에 이르기까지 계속된 고향길이 고생스럽지만은 않았다. 막히는 길에 짜증도 냈겠지만, 그런 기억은 남아있지 않다. 그저 반갑고 즐거웠던 추억 뿐이다.고향, 늙은 어머니가 나를 기다리시는 곳. 최근까지 고향은 내게 그런 곳이었다. 이제는 어머니가 기다리시지 않는다. 몇 년 전 타계하셨다. 1백2세, 그래도 좀 더 오래 잘 모시지 못한 불효자의 회한이 가슴을 저민다.대학시절, 방학만 되면 나는 이불보따리 들처 매고 집으로 달려갔다. 가족이 보고 싶기도 했지만, 방학 두 달 동안의 하숙비 절약이라는 현실적 이유도 있었다. 방학을 마치고 이불 한 채 등에 지고 서울행 야간열차를 탈 때마다 어머니는 여러 가지를, 특히 밥 굶지 말고 꼭 챙겨먹으라고 당부하셨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굶지 않는 것이 최고의 가치였던 6?25 직후였다. 서울에 도착하면, 다시 하숙집 구하느라 이집 저집을 헤맸다. 이불 짐 맨 채로.서울 인심은 야박했다. 취직을 위해 거의 무작정 상경한 친구가 하숙집으로 찾아왔다. 하숙집 주인은 매몰찼다. 밥 한 그릇 더 주지 않았다. 내 밥을 나눠먹었다. 주인아주머니가 나를 호출, 친구가 언제 가느냐고 물었다. 며칠 더 있을 것같다고 대답하니 자신에게 피해가 크단다. 그러면서 ??하숙집을 옮기라??고 한다. 밥 한 그릇 더 주는 것도 아닌데, 무슨 피해???밥 먹고 자는 건 학생 것 나눠서 하는 것이지만, 수돗물 쓰고 화장실 차는 건 생각하지 않느냐??는 핀잔이다. 수돗물 좀 쓴다고, 화장실 좀 쓴다고 시비하는 서울 인심이 야속했다. 결국 그 집을 나왔다. ??자의 반 타의 반??이었다.후배에게 들은 얘기도 비슷한 경우다. 서울로 유학 온 한 후배가 학교 부근 술집에 갔다. 막걸리를 한 주전자 시켰는데, 주인과 후배 모두 상대방에게 인상 쓰고 있더란다. 후배는 ??막걸리 시켰는데, 왜 안주를 안주나??했고, 주인은 ??저 학생은 술만 시키고 왜 안주를 안시키나??하고 있더란다. 이게 전주와 서울의 차이다. 술 시키고 안주 따로 시키는 서울 인심에 적응하는데 시간이 걸린다. 자취하던 어느 날 새벽, 느닷없이 장정들이 방에 들어오더니 내 짐을 길바닥에 들어내놓는다. 집주인이 부도를 내 강제명도하는 과정. 전세금이 날아갔다. 벼락 맞았다는 표현 외에는 할 말이 없었다.야박한 서울,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도 그 서울은 우리에게 기회의 땅이었다. 성공의 기회를 찾기 위해 오늘도 서울로 사람이 몰린다. 재경 향우들 수자가 도민들보다 많은 연유이다. 우리 집안도 그랬다. 나를 따라 가족들이 서울로 올라왔다. 이제는 5대 180명이 서울에 산다. 식구들이 많다고 ??케네디가족??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다.이제 고향에서 산 기간보다 몇 배의 긴 시간을 서울에서 보냈다. 그렇지만 마음 속에서는 고향에서 산 기간이 길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건 행복이다. 마음 속의 희망뿐일지라도.우리 아이들은 서울 사람이다.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고향을 생각하는 마음이 우리 세대와 같을 수 없다. 그리워해야 할 것도 적다. 그들에게 뿌리가 전라북도임을 가르치는 일이 우리의 과제다. 돌아갈 곳을 만들어주는 것, 그들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고단한 귀성길이 그런 교육의 한 현장이다. 귀성의 물결은 그래서 오늘도 아름답다./ 송 현 섭(재경전라북도민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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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9.30 23:02

[타향에서] 태풍 이후

태풍 "곤파스"의 위력은 실로 대단했다. 수십년씩 된 가로수가 뽑혀 나가고 전신주가 동강 나기도 했다. 뉴스에 보니 고종의 칠백년 넘은 향나무가 부러지기도 했다고 한다. 작업실 마당의 참나무도 우지끈 뚝딱! 하는 소리와 함께 한밤중에 부러져 버렸다. 세찬 비바람 소리에 일어나 창 앞에 섰지만 휘몰아치는 광풍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는 수밖에는 없었다. 전날 태풍의 소식이 있었지만 여름의 뒷끝이면 의례 오는 것이겠거니 하고 생각하고 잠자리에 들었던 것인데, 그 위세는 상상 이상이었다. 아침에 보니 작은 마당이 온통 아수라장이었다. 흡사 점령군이 쓸고 지나간 것처럼 참담했다. 그중에도 하늘을 가리우며 나뭇잎을 빽빽이 달고 있던 수십년된 참나무가 동강난 채 쓰러져 있던 것이 눈에 들어왔다. 참나무가 넘어진 자리에 파란 하늘이 보였고 그 아래 키 작은 소나무가 힘겹게 서있는 모습도 보였다. 참나무는 마당의 주인 격 이여서 몇 그루 나무는 그 아래서 주군을 모시는 부하들처럼 올망졸망 서 있었는데, 참나무가 넘어지고 나니 비로소 키 작은 몇몇 나무들의 존재가 제대로 드러나는 것이었다. 혼자서는 힘겨워 근처 농원에서 사람을 불러 넘어진 참나무를 자르는데 연세 지긋한 그 분이 혼잣말처럼 말했다."참나무 참 잘 쓰러졌다."이 무슨 악담인가 싶어 "잘 쓰러지다니요?" 했더니"잘 쓰러지지 않았다구요?" 하고 되받는다.그 분의 말인즉슨 햇빛을 가리운 참나무가 태풍에 넘어졌기 때문에 비로소 하늘이 열려졌고 소나무며 작은 나무들이 햇빛을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참나무 아래 비비 꼬이며 힘들게 서 있는 소나무를 잘 살리는 것이 훨씬 가치 있는 일이라고 했다. 만약에 이번 태풍에 참나무가 쓰러져 주지 않았던들 소나무와 다른 몇 몇 나무들은 그 그늘에 가려 세월이 가도 제대로 자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과감하게 참나무 쪽을 감벌해 주어야 하는데 태풍이 대신해 주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참나무 잘 쓰러졌다고 했다는 것이다.고개가 끄덕여 졌다. 그분과 땀을 흘리며 한나절 손을 보고 나니 참담했던 정원은 새로운 모습으로 정돈이 되었다. 늘 서 있던 키 큰 참나무가 사라지게 되어 섭섭하긴 했지만 햇빛이 환히 비치는 모습이 나쁘지 않았다. 더구나 영양실조처럼 보이던 작은 소나무는 그 햇빛 속에서 모처럼 제대로 숨을 쉬는 것 같았다. 태풍이 언제 있었냐는 듯 새도 나아와 지저귀고 있었다. 모든 것을 쓸어 가버릴듯 한 태풍의 위세는 무서웠고 그 바람에 손실도 있었지만 가만히 보니 태풍으로 얻어진 것도 많았다. 햇빛과 하늘을 얻게 되었을 뿐 아니라 소나무며 작은 나무들까지 얻게 되었다. 오래 방치되어 있던 마당도 정리할 수 있게 된다.우리네 인생에도 어느 날 태풍이 몰아칠 수 있다. 그것은 때로 사나운 기세로 우리가 가진 것들에 손실을 입히며 절망과 두려움으로 몰아간다. 벼랑 끝에 몰린 것처럼 캄캄하여 한발짝도 앞으로 내디딜수 없을 것처럼 느끼게도 한다. 그러나 자연의 태풍처럼 인생에 불어오는 태풍을 잘 견디면 뜻밖의 선물을 주고갈 수도 있는 것 같다. 삶의 지혜와 겸손 그리고 감사의 미덕 같은 것이 바로 태풍이 인생에게 선물로 줄 수 있는 것들이 아닐까 싶다. 태풍도 그 섭리와 의미를 되새김질 해보라. 그리고 그 속에서 감사를 발견하라.태풍 "곤파스"가 일깨워준 것들이다./ 김병종 (화가, 서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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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9.09 23:02

[타향에서] 전북인의 높은 기상을 보여주는 기업인 - 최수규

8월말에 강원도 춘천의 문화복합산업단지 내에서 거행된 중소기업 K사의 공장건축 착공식에 다녀왔다. 이 회사는 경기도 김포에서 수배전반을 제조하고 있는 중견기업으로, 이명박 대통령께서 취임 이후 처음으로 방문하신 전기에 IT와 디지털 기술을 결합한 기술기업이다. 18만평이라는 넓은 땅에 6년간에 걸쳐 7,318억원을 투입하는 문화복합산업단지 공사는 산업과 문화, 예술과 기술, 인간과 산업이 만나는 드림 소사이어티를 건설하기 위한 것으로 K사가 기존의 안정적인 사업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는 것이다. 강원도와 춘천시는 문화복합산업단지가 2014년에 완공되면 강원도의 새로운 랜드마크가 될 것이고, 지역경제 활성화와 일자리 창출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전통적으로 전북 사람들은 관계, 학계, 언론계 등으로의 진출은 많았지만 기업을 영위하는 경우는 많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전북을 대표하는 기업은 삼양사, 일진그룹 정도인 것 같다. K사를 타향에서 지면을 통해서 소개하는 것은 이 회사의 P사장이 전북인의 진취적인기상을 드높이고 있고, 도전과 모험으로 상징되는 기업가정신의 표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P사장은 고창 고수면 출신으로 1989년에 용산 전자상가에서 단돈 80만원을 가지고 전기공사업을 시작하였고, 1998년 IMF 외환위기 때 중전기 제조업 분야에 뛰어들어 연평균 32%라는 경이적인 성장과 제조업 11년만에 연 매출 2,000억원이라는 성과를 거둔 입지전적인 기업인이다.이 회사는 수배전반, 태양광 시스템, LED 등 200여 가지의 제품을 생산하고 있으며, 마음껏 꿈꾸고 춤추며 설렘으로 잠을 이룰 수 없는 곳을 만들겠다는 비전을 가지고 2013년 매출 1조원 달성을 위해서 지금도 쉬지 않고 달리고 있다. 그리고 '완벽에의 도전, 그리고 승리'라는 모토 하에, 대한민국 경제의 5%를 책임지는 신화를 창조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가지고 세계를 향해 도전하고 있다. 또한 건설 중인 문화복합산업단지 내에 9개의 협력업체를 입주시켜 생산설비, 복지시설 등을 공유함으로써 중소기업 간의 상생협력을 앞서 실천하는 모범을 보이고 있다. 김포공장에는 고창 선운사 인근에서 생산된 복분자를 구입하여 일정한 온도가 유지되는 토굴에서 모차르트 음악 등 클래식을 들으면서 숙성된 복분자 술을 만들어 선물로 제공하고 있다고 한다. 여기에서 그의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이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앞으로 K사가 전북을 대표하고, 우리나라를 대표하고, 세계 속에서 우뚝 서는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7월말에 개최된 비상경제대책회의에서 청년층의 녹색기술 창업과 도전정신 회복을 통한 우리경제의 활력회복과 질 좋은 일자리 창출을 위하여 청년 기술지식창업 지원대책을 마련하여 추진하기로 하였다. 꿈과 땀이 실현되는 청년창업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창업과 재도전이 원활한 기업 생태환경을 구축하겠다는 것이 주요내용이다. 정부의 이러한 지원과 함께 전북도 지역 대학, 지역 연구기관 등이 함께 노력한다면 젊은이들의 창업이 활성화 되어 지역경제의 역동성이 높아질 것으로 생각한다. 앞으로 P사장과 같이 기업가정신이 충만한 전북의 많은 젊은이들이 글로벌 마인드를 가지고 세계를 향해 도전하고 모험하여 5대양 6대주를 누비는 가슴 벅차는 모습을 그려본다./ 최수규(경기지방중소기업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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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9.02 23:02

[타향에서] 친애하는 500만 전라북도민 여러분! - 송현섭

"서울을 왜 서울이라 부르는지 알아?". 한참 젊을 때 한 선배가 물었다. 갑작스런 질문에 대답을 제대로 못했다. '서울'의 어원에 대해서는 고등학교 때 배운 게 있다. '서라벌' 어원설이다. 신라의 옛 이름이자 도읍지의 이름인 서나벌(徐那伐), 서벌, 사라(斯羅), 사로(斯盧)의 순수 우리말인 이 수도를 뜻하는 '서울'의 어원이라는 것.그 선배의 질문이 학술적인 게 아님은 분명했다. 내가 대답을 못하자 그는 웃는 얼굴로 답을 말해줬다. "서서 울고 다니는 사람이 많아서 서울이라고 한다". 그 때 내가 같이 웃었는지, 심각하게 받아들였는지는 기억이 없다. 단지 그 말이 단순한 우스갯소리로 들리지 않았던 기억은 확실하다.'눈 뻔히 뜨고 있는데 코 베어가는' 곳이 서울이라고 들었다. 그런데 '서서 울고 다니는 사람이 많은 곳'이라고? 당시의 내 처지를 봐도 맞는 표현이었다. 대학생이 돼 상경한 내게도 서울은 '서서 울고 다녀야 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처음 와본 서울, 아무 연고가 없어 하숙집부터 구해야 했다. 하숙집이라도 있어야 누워서 울겠는데, 하숙집 주인들로부터 "전라도 학생 안받는다"는 싸늘한 대답을 들어야 했다. 나의 대학생활은 매 학기 초 하숙집과 자취집 구하는 '쉽지 않은 일'로 시작됐다.어느 날 밤 남산에 올랐다. 서울은 전기불로 화려했다. 지금하고는 비교가 안되겠지만, 당시 내 눈에는 그랬다. 야간열차 타고 밤 새워 올라온 전주촌놈에겐 불 밝힌 서울이 서러웠다. 저 많은 집들 중에 내 문패를 단 집이 생길 수 있을까, 당시 내 소원이었다.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시 공무원생활을 잠깐 하다가 사업을 시작했다. 주위에선 너무 젊은 나이에 돈도 없이 시작하는 사업이 무모하다고 말렸지만, 뭐든 부딪쳐보자고 덤볐다. 얼마 뒤 집 한채를 샀다. 당시 왕십리는 서울시 분뇨를 버리는 곳, 제일 집값이 싼 곳이었다. 냄새는 났지만, 내이름 크게 쓴 문패를 달았다. 스스로에게 대견했다.사무실은 을지로였는데,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도시락을 뒤에 싣고 다녔다.어느날 누가 훔쳐 갔다. 오토바이를 샀는데, 전차 선로에 바퀴가 끼어 전차운행을 방해한 사건이 벌어졌다. 파출소에 가서 훈계 받고 처분했다. 다행히 사업이 잘 돼 지프차를 샀다. 운전기사를 둔 성공한 젊은 사업가의 모습이었다. 폼 나는 시절은 오래 가지 못했다. 운전기사가 "오랫동안 자가용 몰았지만, 도시락 싸가지고 다니는 운전수는 못하겠다"는 편지를 남기고 사라졌다.서울생활 50년이 넘었다. 남들로부터 성공했다는 칭찬도 들었다. 마음 한 구석에는 언제나 고향이 있었다. 내 고향 칠보는 내가 살던 때와는 비교가 안되게 달라졌지만, 인구도 줄고 활기도 전만 못하다. 8천명의 인구는 3,800명으로 줄었고, 720명의 초등학교는 90명의 초미니학교로 작아졌다.인구 감소는 어쩔 수 없는 일, 먹고 살기 위해서, 혹은 보다 발전하기 위해서 소위 '대처'로 가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런 태도가 없는 곳에 발전은 없다. 어렸을 때 칠보에서는 전주로 가는 게 최고의 목표였다. 전주에 오니 서울 진출이 목표가 됐다. 나뿐만 아니라 남들도 그랬다.인구가 줄어든다고 걱정하는 소리가 높다. 고향이 살기 좋으면 인구가 줄어들리 없다. 늘어나는 고향이 됐으면 좋겠다. 그러나 현재로선 인구감소에 별뾰족한 타개책이 없다. 그렇다면 생각을 바꾸면 어떨까? 인구감소라 하지만 고향에 사는 사람이 줄어든다는 거지, 그 인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당장 수도권에만 3백만의 향우들이 자신과 고향의 발전을 위해 일하고 있다. 이들이 남인가? 아니다. 이들도 엄연한 내 고향 사람들이다. 좁은 고향에서 복닥거리는 것보다 널리 퍼져 사는 게 좋을 수도 있다.각종 모임에서 "친애하는 2백만 도민 여러분"하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전북도민이 모두 2백만은 아니다. 전북에 거주하는 도민의 수자만 그렇다는 것이다. 이렇게 바꾸면 어떨까? "친애하는 5백만 도민 여러분!"./ 송현섭(재경전라북도민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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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8.26 23:02

[타향에서] 페이스북을 열면 - 허미숙

디지털이 만들어내는 속도가 눈부시다. T.G.I.F - 트위터(Twitter), 구글(Google), 인터넷(Internet), 페이스북(Facebook)으로 상징되는 TGIF는 지구촌 사람들을 빛의 속도로 연결하며 새로운 문명을 만들고 있다. 인류가 가진 자산을 융합하고 공유하기 위해 트위터는 끊임없이 '지금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묻고, 페이스북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묻는다. 페이스북의 '담벼락'과 트위터의 '타임라인'이 없었다면, <연금술사>를 쓴 파울로 코엘료가 월드컵 경기를 보면서 흥분하며 갈겨쓰는 관전평을 동시에 즐길 수 없었을 테고, 작가 이외수가 던지는 비오는 저녁 쫄깃한 글들을 라이브로 감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지구 반대편으로 유학 간 아들이 저녁식사 하러간 식당과 마을길을 안방에 앉은 채 둘러볼 수 있고, 함께 메뉴를 고르고, 맛이 어떤지 대화가 가능한 세상. 소셜미디어에 비친 한국사회는 전통적 미디어가 보여주던 그것과는 확연하게 다른 속도가 지배하고 있다.올해 미국 대학에 입학한 신입생들의 인식을 조사한 것 중에 흥미로운 대답이 있다. '손목을 손가락으로 톡톡 가리키는 것이, 시간을 알려달라고 하는 제스처인지 전혀 인식 못함', '줄이 달린 전화를 사용해본 일 없음', '이메일은 거의 안 씀. 왜? 느려서.' 그래서 2014년쯤엔 손목시계나 이메일이 사라질 것이라고 보고서는 전망한다. 지난 석 달간 세계적인 인터넷 가게 아마존에서는 종이책 100권당 전자책 143권의 비율로 전자책이 더 많이 팔렸다고 한다. 지난달에는 전자책 180권에 종이책 100권 비율로, 갈수록 격차가 커졌다. 아마존이 15년 넘게 종이책을 팔았고, 전자책을 판 건 이제 겨우 3년이라고 생각하면 변화의 속도가 정말 놀랍다. 통계를 보면 아직은 아니지만, 전문가들은 불과 몇 년 내에 전자책 판매량이 종이책을 가볍게 넘어설 것으로 보고 있다.우리도 2013년부터 디지털교과서를 전국 초등학생들에게 보급해 '책 없는 학교' 시대를 열기위해 관계부처가 준비 중이다. '디지털 원주민(Digital Native)'인 현재의 초중등 학생들은 태블릿PC를 이용해 동영상과 사진, 인터넷 상의 방대한 자료 등을 함께 활용하면서, 학교로부터의 유비쿼터스 시대를 활짝 열어 갈 것이다. 이들이 성인이 된 10년 후 한국사회는 어떤 문화와 문명을 만들어내고 있을지 예측하기 어렵지 않다. 벌써 전국 110개 초등학교, 1만 6700명이 디지털 교과서로 시범 학습을 진행 중이라고 한다. 이제 도서관에서 향긋한 종이책을 뒤지는 '책벌레'들의 시대가 디지털의 속도에 밀려, 사라질 것인가. TV와 종이신문 같은 전통적 미디어 매체들 또한 어떻게 진화할 것인가 스스로 고민이 무겁다.우체국 네거리 찻집에 앉아 연인을 기다리며 애태우던 김추자의 '커피 한 잔'은 이제 없다. 스마트폰에 대고 손가락 몇 번 까딱거리면 여자친구를 화면으로 불러낼 수 있는 요즘 시대의 사랑은 단막극일 수 밖에 없다고, 손편지 한 통이 도착하는 데 사흘이 걸리고 손목 한 번 잡는 데 삼 년이 걸리는 아버지의 시대에는 사랑 또한 대하극일 수 밖에 없었다는, 그러니 어느 쪽이 진짜 사랑이냐는 노 작가의 물음에 트위터리언들은, 답할 여유조차 없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소통을 말하고 그리워하는가. 더 효율적인 삶을 향해 달리느라고 놓치고 온 가치와 행복이 소셜미디어가 회복시킨 문명의 한 부분으로 들어앉게 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새로운 문명의 탄생 앞에 서서 소셜미디어 시대의 시대정신을 묻는다. 가을이 오는 어느 아침 페이스북을 열면, 맨발로 달려 나가도록 반가운 글 한 줄 담벼락에 씌어있지 않을까. 페이스북은 젊은 날 동구 밖을 바라보며 기다리던 우체부 같다./ 허미숙(전 CBS TV 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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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8.20 23:02

[타향에서] 숲이 경쟁력이다 - 김병종

내가 속한 <미래상상연구소>라는 단체에서는 몇 년 전부터 아름다운 도시와 마을운동을 펼치고 있다. 동호인모임의 이 작은 연구소에서는 각자의 호주머니를 털어 이에 관한 세미나를 열고 다른 나라의 아름다운 도시와 마을을 탐방하기도 했다. 작년에는 아름다운 마을로 소문난 영국의 다이버리 지역을 돌아보고 왔다. 그런데 아름답다고 알려진 마을이나 도시일수록 몇 가지 특징이 있었다. 첫째는 건물이나 간판들이 잘 정돈되어 있고 미적으로도 거슬리는 데가 없다는 점이었다. 절제와 배려의 미덕이 잘 발휘되어 있어서 쾌적한 도시공간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시뻘겋거나 파란 원색의 대형 간판들을 거의 볼 수 없었을 뿐더러 디자인 또한 세련된 것들이었다. 둘째는 세월의 더깨가 앉은 오래된 건축물들이 많다는 점이었다. 한 도시나 지역의 역사와 전통이 고스란히 건축물에 베여있어서 도시의 품격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두드러지게 공통적으로 발견되어지는 것은 잠시만 걸어도 나타나는 숲이었다. 그 서늘한 숲에 들어가 땀을 식히며 쉬다보면 인간의 삶이란 결코 자연과 떨어져 존재할 수 없는 것임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숲이야말로 도시의 허파라는 사실을 새삼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오랜 세월동안 다양한 개발의 요구와 유혹을 견뎌내며 도시공간에 자리한 숲들을 보노라면 자연스레 그 지역이나 지역인에 대한 외경심을 갖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비로소 돌아보면 소위 선진국이라고 알려진 나라, 문화도시라고 알려진 도시일수록 예외 없이 일정면적이 나무와 숲으로 채워지고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파리의 볼로냐 숲이나 베를린의 그뤼네발트(검은 숲)은 이미 도시의 상징이자 자랑스러운 유산이 된지 오래이다. 바야흐로 숲이 도시의 최고 경쟁력인 것이다. 하지만 눈을 우리 쪽으로 돌리고 보면 형편이 여의치 않다. 도시공간에 자리한 숲의 면적은 턱없이 부족할뿐더러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다. 더구나 정책이 바뀌면 하루아침에 오래된 나무들도 잘려나가고 그 자리에 건물들이 들어서기가 일수이다. 유서 깊은 광화문 광장에 줄지어 서있던 늙은 은행나무들이 어느 날 모조리 자취를 감춰버린 것도 한 예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매년 가장 살고 싶은 도시로 꼽히는 과천은 기적 같은 도시라고 할 수 있다. 과천에 작업장을 정하고 일해 온지 20여년이 가까운데 가끔 산책을 하다보면 내가 여행 다녔던 유럽의 어느 도시를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숲과 나무가 건물들과 적절히 조화되며 펼쳐져 있는 이 그린시티에는 건물이며 간판들 또한 잘 정비되어 있고 교육기관이며 복합 예술 공간과 도서관, 심지어 야생화 전시장까지 적절히 자리하고 있다. 세계적 자연생태도시이자 교육문화도시로서 손색이 없다. 과천을 방문하는 나의 외국인 친구들도 참 아름다운 도시라고 감탄할 정도인 것이다. 개발의 광풍이 태풍처럼 몇 차례씩이나 휩쓸고 지나가기까지 이토록 아름답게 도시를 가꾸고 지켜낸 과천시와 시민들은 박수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그런데 그 아름다운 녹색도시 과천마저 요새 흔들리고 있다. 정부종합청사 이전 소식과 함께 온갖 개발의 소식들이 난무하고 그린벨트 또한 전에 없이 위협받고 있는 것이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시대에 섬처럼 외로이 떠있는 과천만이라도 부디 후손에게 자랑스럽게 물려줄 아름다운 그린시티로 남겨지길 간절히 바란다./김병종(화가서울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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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8.12 23:02

[타향에서] '명품' 중소기업 육성 - 최수규

중소기업이 우리경제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상을 설명할 때 일반적으로 9988이라고 한다. 전체 기업체 수의 99%가 중소기업이고, 전체 고용인원의 88%가 중소기업에서 근무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중소기업 사업체 수는 300만개에 달하고 있고, 1,115만명이 중소기업에서 종사하고 있다. 그리고, 1998년부터 2007년까지 10년간의 고용동향을 분석해 보면, 중소기업은 연평균 4.2%가 증가하였지만, 대기업은 4.5%가 감소하였다. 중소기업이 우리경제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계속 증대되고 있고, 특히 고용창출에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전라북도의 중소기업 수는 106,688개로 전체 중소기업의 3.5%이고, 5인 이상 중소제조업체 수는 2,606개로 2.3%를 차지하고 있다. 5인 이상 중소제조업체를 업종별로 분석해 보면, 식료품 제조업체 463개(17.8%), 비금속 광물제품 제조업체 316개(12.1%), 금속가공제품 제조업 245개(9.4%) 등의 순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중소제조업체의 70% 이상이 5인 미만의 소규모 업체이다. 또한, 신설법인은 2008년 12월에는 119개, 2009년 12월에는 172개로 전체 신설법인의 3.1%에 불과하여, 기업가정신의 대표적인 지표인 창업이 미흡하다. 이러한 통계자료들을 볼 때, 전라북도의 산업구조가 아직까지 고도화 되어 있지 않고 창업, 성장, 글로벌화로 이어지는 기업 생태계가 원활하지 못한 실정이다.특히, 성장성과 수익성이 높고 일자리 창출효과가 큰 혁신형 중소기업 현황을 보게 되면, 이러한 사실을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2009년 12월말 기준으로 전라북도의 벤처기업과 이노비즈 기업을 포함한 혁신형 중소기업은 1,122개로 전체 혁신형 중소기업 49,675개의 2.2%로서 5인 이상 중소제조업체의 비중 2.3% 보다도 낮다. 매출액이 1,000억원이 넘는 벤처기업은 4개로 전체 242개의 1.7%에 불과하다. 그리고, 대부분의 광역지방자치단체에는 벤처캐피탈이 설립되거나 벤처투자펀드를 조성하여 지역 중소기업에 투자를 적극적으로 확대하고 있다. 광역지방자치단체 중 벤처펀드가 조성되어 있지 않은 것은 전라북도가 유일하다. 금년도에 벤처캐피탈이 전라북도 업체에 신규로 투자한 실적은 1개 업체, 30억원 뿐이다. 중소기업들에 대한 투자 등 금융환경도 그다지 좋지 않은 것으로 보여진다.최근 정부에서는 중소기업이 중견기업, 대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중견기업 육성전략을 마련하여 추진하고 있다. 창업 10년 이내의 중소기업을 3,000~5,000개 선정하여 기술개발, 판로, 인력 등 정책수단을 집중하여 중견기업으로 육성함으로써 우리경제의 허리를 튼튼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전라북도에서는 경제와 산업 그리고 관광을 아우르면서 동북아 경제 중심지로 비상할 녹색성장과 청정 생태환경의 글로벌 명품 새만금 개발사업을 최우선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전라북도의 명운이 걸린 엄청나게 중요한 사업이다. 정부의 중소기업 지원사업, 지역산업 육성정책과 전라북도의 새만금 개발사업이 효과적으로 연계되어 시너지 효과를 거둘 수 있기를 바란다. 앞으로 전라북도에 많은 혁신형 중소기업이 창업하여 중견기업, 대기업, 글로벌 기업으로 뻗어 나가는 발전적인 모습을 그려본다. 내 고향 전북에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명품 중소기업들이 많아져서 좋은 일자리가 넘쳐나고 지역경제가 비약적으로 성장하기를 기대한다./최수규(경기지방중소기업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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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8.05 23:02

[타향에서] 여성과 청년들이 앞장 서면 - 송현섭

지난 6월 9일 제9대 재경전라북도민회 회장으로 선출됐다. 총회에 참석한 많은 회원들이 이사회에서 추천한 나를 만장일치로 뽑아주셨다. 영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내 나이 이미 7순, 많은 경험을 했다. 기쁜 일도, 어려운 일도 수없이 겪었다. 어떤 일이 닥쳐도 마음 흔들리지 않고 차분하게 현실을 직시하고, 대응책을 모색했다. 그렇지만 총회에서 회장으로 선출됐다고 발표되는 순간은 그렇지 못했다. 순간적으로 여러 생각이 들었다.나는 이미 은퇴를 선언, 모든 일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이다. 이제까지 나라와 고향, 그리고 가족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다고 자부하면서 살아왔다. 그리고 어떻게 사는 게 은퇴 이후를 보람 있게 사는 삶일까, 많은 생각을 했다. 세속적인 욕심은 더 이상 없다. 이제는 나와 내 주위가 아닌 많은 사람들과 우리 공동체를 위해 봉사하는 게 여생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주위를 위해 봉사하는 게 지금 할 수 있는, 그리고 해야 하는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생활하고 있다고 감히 자부하고 있다. 당연히 모든 공적 사적 직책에서 벗어나 있고, 어떤 자리에도 취임할 생각이 없다.그러나 그런 나도 유지하고 있는 「자리」가 있다. 한국효도회 회장과 재경정읍시민회 회장직이다. 돈이나 명예와는 관계 없는, 나름의 봉사를 할 수 있는 역할이기에 아직도 그 자리에서 노력하고 있다.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는 것, 그리고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을 위하는 일에는 정년도, 은퇴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도민회장도 그랬다. 그게 영광스럽기만 한 자리라면 고사했을 것이다. 도민회의 발전을 위해 내가 적임자일까 하는 고민도 있었다. 나보다 훌륭하신 분들도 많은데, 내가 꼭 나서야 될지도 많이 생각했다. 그렇지만 고향 발전과 출향 도민을 위해 작은 힘이나마 봉사할 수 있다면, 마다할 일이 아니었다. 남들에게서 성공했다고 평가받는 사람들이 가지는 의무이기도 하다.재경회원들과의 만남은 매우 소중하고 또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서울이란 대도시에서 고향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바로 내고향 전북과의 만남이요, 고향의 부모형제와 오랜 벗을 만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고향과 회원들의 발전을 위해 함께 일 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가슴 뿌듯한 일이다.취임사에서 나는 몇가지를 약속했다. 먼저 여성과 청년의 참여를 확대시키겠다고 말했다. 길게 이야기 할 필요 없이 여성의 역할은 중요하다. 여성회원들의 자기계발은 본인과 가정은 물론, 고향과 나라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친다. 특히 각 시군 향우회 여성회원들의 적극적 참여는 전라북도와 전북경제살리기도민회의 등과의 교류 협력을 통해 고향에서 우리 부모 형제들이 피땀 흘려 재배한 농?수산물의 직거래 유통망을 구축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그리고 효(孝)사상 고취를 위해 노력하겠다. 이 활동을 통해 부모와 소원한 관계에 있는 젊은이들이 부모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했다.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은 바로 고향사랑 정신과 통한다. 부모에 효도하는 마음, 내 고향 전북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젊은 회원들이 우리 모임의 전면에서 일 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또 회원 자제들의 학업 성취를 위해 제공하는 장학생 수를 현재의 30명에서 점차 늘려나가도록 하겠다. 최소한 60명으로 배증할 계획이다. 나부터 앞장서고, 뜻있는 향우들의 도움이 있다면, 어렵지 않게 목표를 달성하리라 기대한다.이외에도 해야 할 일은 많다. 전임 회장들께서 구축한 기반 위에서 전북도민, 회원들과 머리를 맞대고 좋은 의견을 모아 도민회의 활발한 운영을 위해 노력하겠다. 모든 일은 내 혼자 힘이나 생각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많은 분들의 도움과 동참을 기대한다./송현섭(재경전라북도민회 회장)▲송현섭 회장은 121315대 국회의원으로 현재 15대 국회의원 동우회장과 호성개발 회장, (사)한국효도회 회장 등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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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7.29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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