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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향에서] 추석이 다가 옵니다 - 황의영

추석이 며칠 남지 않았다. 올해에도 어김없이 민족의 대이동이 시작될 것이다. 고향으로 달려가는 차들이 전국의 고속도로와 주요도로를 주차장으로 만들 것이다. 특히, 이번 추석은 연휴기간이 짧아 고향을 찾는 출향인들이 예년에 비해 더 많은 시간을 길에서 보내야 할 것 같다. 길에서 소비하는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고향을 찾는 행렬은 꼬리에 꼬리를 물것이다. 또한, 지체되는 차속에서도 마음은 벌써 고향에 도착하여 정든 고향산천을 둘러보고 부모님과 다정한 이웃에 인사를 드리고 담소를 나눈다. 항상 부족함을 감싸주셨던 어머님 품속 같이 따뜻하고 정다운 고향을 찾아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고향은 그렇게 넉넉한 곳이다.추석은 중추절(仲秋節), 가배(嘉俳), 가위, 한가위라고도 부른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제3대 유리이사금 9년(서기 32년)에 부녀자들이 7월 16일부터 8월 15일까지 베를 짜는 시합을 하고 시상잔치를 벌였는데 이를 가배라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참으로 오래 동안 우리민족의 정서가 어린 고유한 명절로 이어져 오고 있는 것 같다.추석은 풍성했다. 봄부터 땀 흘려 농사지어 수확한 햇곡식으로 음식을 장만하여 햇과일과 함께 조상님들께 풍성한 수확을 이룰 수 있도록 보살펴 주심에 감사드리는 차례를 지냈다.또한, 신도주(新稻酒)라 하여 햅쌀로 빚은 술을 차례상에 올렸다. 넉넉하게 장만한 음식을 일가친척 이웃과 나누면서 정(情)을 키웠다. 추석의 대표적인 음식으로 송편을 빼놓을 수가 없다. 송편은 햅쌀로 빚는다. 송편속으로는 콩팥깨밤대추 등을 넣는데 모두 햇것으로 했다. 열 나흗날 저녁 밝은 달을 보면서 가족들이 모여 앉아 그 동안에 못 다한 정겨운 이야기를 나누며 송편을 예쁘게 빚었다.요즘의 추석은 우리 어릴 때의 추석만큼 풍성하지 않은 것 같다. 이웃끼리 나누는 정도 예전만 못하다. 경제적으로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성장했지만 오히려 그 만큼 내 고향 농촌은 활력을 잃어버린 느낌이다. 골목골목 그득하던 어린 아이들의 모습은 할아버지 집을 찾은 몇몇 어린이가 대신한다.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사라진 내 고향, 어른들의 한숨소리가 높아졌다. 고향을 떠난 이가 살던 집은 폐허가 되어 헐려 나가고 동네모습은 이 빠진 얼레빗의 모양이 되고 말았다. 문전옥답 장구배미에서 생산한 쌀은 남아돌아 천덕꾸러기가 됐고 수입농산물에 밀려 어떤 농사를 지어야 할지를 모르고 허둥대며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는 우리 이웃들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을 것이다.그 때 그 활력은 기대하지도 않는다. 우리가 떠나온 그 곳에서 묵묵히 고향을 지키고 있는 농업인들이 희망을 잃지 않고 농사를 지을 수 있을 정도만이라도 되었으면 한다. 그러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은 없을까? 내 고장의 쌀, 채소, 과일과 축산물을 애용하는 작은 애향 활동이라도 했으면 좋겠다. 작년과 재작년 추석에 고향을 찾는 이들에게 전주톨게이트에서 도지사님 등 기관장님들과 도의원님들을 모시고 농업인들과 함께 고향을 찾는 이들에게 견본품을 나누어 주며 우리쌀을 애용하자고 호소하던 생각이 난다. 그렇게라도 해서 그들에게 고향을 생각게 하고 기름진 땅과 맑은 청정자연에서 햇빛 가득 머금고 자란 우리 농산물을 애용하게 함으로써 가족의 건강을 지킴은 물론 고향에 활력도 찾게 하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부질없는 나만의 꿈이었을까./황의영(농협중앙회 상호금융총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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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09.10 23:02

[타향에서] 기쁨과 슬픔을 나누는 삶 - 김성중

지난 일요일, 우리 가족은 400여명에게 밥을 퍼드리느라 땀을 많이 흘렸다. 서울 구로구에 있는 (사)지구촌사랑나눔 외국인근로자쉼터에서는 기쁜 일이 있는 이들이 몇십만원의 부식값을 내어 외국인근로자들에게 한끼니라도 고기반찬을 마련하여 주고, 온 가족이 함께 밥을 퍼주는 '자축 밥퍼봉사' 프로그램을 전개하고 있는데, 우리는 두달전에 큰딸을 결혼시켰기 때문에 이 프로그램에 참여한 것이다. 가뜩이나 키가 큰 사위는 1시간반 동안을 꾸부리고 밥과 반찬을 퍼주느라 허리가 아팠을터인데도 싱글벙글하였고, 딸아이는 신기하고 재미있었다고 좋아했다. 남을 도우면 도움을 받는 사람보다 돕는 사람이 더욱 기쁘고 행복해지는 것 같다.부끄러운 일이지만 필자는 30여년간 공직생활을 하면서 봉사를 거의 해보지 못하였다. 기껏해야 봉사단체에 조금씩 기부를 하거나, 명절때 고아원이나 양로원등을 찾아가 금일봉을 전달하는 정도였다. 많은 기업에서는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하여 갖가지 봉사활동을 전개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공직에는 봉사활동이 별로 확산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오죽하면 필자가 지난해부터 외국인근로자 돕는 일을 하겠다고 했더니 많은 후배들이 체면떨어진다며 하지 말라고 만류를 하기도 했었다.그러나 공직을 떠난 후 외국인근로자를 위한 상담뿐 아니라 무료 병원, 무료 급식소, 쉼터, 이주민 어린이집 등을 운영하는 (사) 지구촌 사랑나눔에서 일하면서 살펴보니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여러 형태로 자원봉사 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개업을 하고 있는 의사들이 주말에는 십여명씩 찾아와 무료 진료를 해주는가 하면, 약사들은 약품을 싸가지고 와서 무료투약을 하기도 했다. 외국인근로자와 이주여성들을 위한 한글교육 7개 과정과 컴퓨터 교육 5개 과정은 전원 자원봉사자들로만 구성되어 운영하고 있었다. 특이한 것은 봉사자중에 공직에 있는 분들은 찾아볼 수가 없고, 나이든 사람들도 찾아보기 힘들며, 40대보다 30대, 20대가 더 많다는 것이다.참으로 놀라운 것은 젊은 사람들일수록 기부도 많이 한다는 사실이었다. 필자가 월드비젼이라는 단체에 가서 재원을 어떻게 확보하느냐 물었더니 기업의 지원은 적고 거의 100만명이나 되는 개인 후원자들이 매월 기부를 하고 있는데, 남성보다는 여성이, 나이는 젊을수록 참여자가 많다는 것이었다. 그러한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6.25 전쟁때 생겨난 이 조직이 이제는 오히려 외국의 도움을 받지 않고 국내의 가난한 사람들뿐 아니라 수많은 외국인들을 돕고 이북 동포들을 돕는 단체로 성장하게 되었다.돈도 적고 바쁘게 살 수 밖에 없는 젊은이들이 더 열심히 남과 나누는 모습을 보면서 필자는 새삼 우리 민족의 앞날에 큰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에게 맡겨놓으면 될 일인가. 이제는 나이든 사람들도, 가진 자들도, 공직자들도 일상생활에서 남과 나누는 삶에 적극 참여해야 할 때이다. 콩 한조각도 나눠먹는 집안은 흥성하고, 부자 3대가지 못한다는 말이 있지 않던가. 정녕 슬픔은 나눌수록 적어지고, 기쁨은 나눌수록 커진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김성중(전 노사정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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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09.03 23:02

[타향에서] 금융위기 이후와 서민경제 - 김상국

사람들이란 참 묘하다. 얼마 전 까지 금융위기라면서 기업들을 살리기 위해 정부는 과감한 재정정책을 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위기가 조금 잔잔해 지니까, 이제는 정부가 돈을 너무 많이 풀어 인플레이션이 걱정된다고 한다. 어찌 보면 걱정 많은 것이 사람인가 보다. 우선 그들의 말을 들어 보자. 스트로스칸 IMF 총재는 "경기가 오는 9~10월을 전환점으로 완연한 회복세로 돌아서겠지만, 위기가 끝나면 전 세계적으로 급격한 인플레이션이 걱정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폴 쿠루그만 교수나 요시마사 일본 경제재정상은 오히려 "세계적인 디플레이션이 걱정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판단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것은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금융위기 이후가 인플레이션이 될지 디플레이션이 될지를 논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플레이션을 걱정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최근 금융위기는 투자은행들이 파생상품을 너무 많이 만들어서 시중에 너무 많은 돈(유동성)을 제공한 것이 문제인데, 정부가 이 문제 해결을 위해 또 더 많은 자금을 공급하였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선 당장 문제는 해결하였지만 미래에는 더 큰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즉 인플레이션이 올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상당히 타당성이 높은 주장이다. 그러나 미래의 예측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첫 번째로 우선 각국 정부가 이번 금융위기 해결을 위해 쓴 돈의 규모를 살펴보자. 미국을 예로 들면 오바마 대통령이 위기 해결을 위해 투입한 돈은 약 7,890억 달러다. 정말 대단한 금액이다. 그러나 미국 파생상품의 규모가 200조 달러라는 것을 알면 0.8조 달러의 오바마 예산이 얼마나 작은 규모인가를 쉽게 짐작 할 수 있다. 그러나 더욱 흥미로운 점은 이 작은 규모의 돈으로도 미국 금융위기가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다른 것이 아니다. 미국의 금융위기는 단순히 파생상품의 붕괴가 아니라 금융시스템에 대한 '신뢰의 붕괴'였다는 것을 뜻한다. 미국 정부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정부가 금융시스템에 크게 관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투자은행들은 무리한 금융상품들을 만들어서 문제를 일으킨 것이다. 금융위기가 터지자 사람들은 불안하여 금융투자를 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금을 회수하였다. 그래서 문제가 더 커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번 사태로 지금까지 감춰져 있던 모든 치부가 들어나고, 정부가 그것을 해결하려는 강력한 의지를 보임으로서 사람들은 신뢰를 회복하고 다시 투자를 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전체 규모에 비해 턱 없이 작은 돈으로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던 이유다. 마치 물이 안 나오는 펌프에 약간의 물을 집어넣고 펌프질을 함으로서 지속적으로 물이 나오게 하는 것과 비슷한 논리다. 또한 암이라고 불안해서 병원을 가지 않았던 사람이 병원에서 진단을 받고 올바른 치료를 함으로써 회복이 빨라지게 된 것과도 유사하다. 그러나 금융위기 이후에도 우리 서민들은 기업의 회생과는 무관하게 상당히 어려울 것 같다. 첫째는 돈 구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이번 위기의 원인이 자금을 너무 많이 풀어서 발생한 것이기 때문에 앞으로는 기업이나 개인에 대한 규제가 강화될 것이다. 그것은 주로 대출한도를 줄이거나 대출심사를 엄격히 하는 형태가 될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미래에는 인플레이션 보다는 디플레이션이 될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 다음으로 어려운 점은 실업율이 높아질 것이라는 점이다. 자금 빌리기가 어려워지면 경쟁력 있는 기업과 경쟁력 없는 기업 간에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심화된다. 줄어든 소비시장을 대상으로 많은 기업들이 더 큰 경쟁을 함으로써 승자와 패자의 차이는 더 커질 것이다. 실업율은 당분간 더 높아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 보통 사람은 좀 더 현명해져야 한다. 누가 뭐라고 해도 저축은 미덕이다. 지나친 저축도 문제지만 높은 소비율은 더 큰 문제이다. 버는만큼 써야하고, 벌지 못하면 쓰지 않아야 한다. 둘째는 직장의 눈높이를 낮춰야한다. '청년실업이 문제다'라고 하면서 우리나라는 외국에서 근로자를 수입하고 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미래에 원하는 직장을 대부분의 사람이 갖는 호시절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직장에 대한 눈높이를 낮춰야 한다. 셋째는 경쟁력이다. 기업이든 개인이든 마찬가지다. '내가 만들 수 있는 제품을 만들어서 파는 것'이 아니라 '사갈 수밖에 없는 상품'을 만들어야 한다.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잘 안다. 그러나 그래야 한다. 우리의 미래는 밝다. IMF에서 말했듯이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회복세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당분간 쉽지 않은 시절을 현명하게 보내야할 것이다./김상국(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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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08.27 23:02

[타향에서] 천덕꾸러기가 돼버린 우리의 생명줄 '쌀' - 황의영

"보릿고개", "초근목피", "장리쌀", "부황" 등은 1960년대 이전 우리의 생활 속에서 자주 들었던 말이다. 당시 우리 경제는 먹기 위한 몸부림들이 대부분이었다. 늙으신 부모님께 하얀 쌀밥 한 그릇 지어 올리는 것이, 사랑하는 자식에게 배불리 쌀밥 한 그릇 먹이는 것이 자식들의 효도요 부모들의 희망이었다. 한마디로 쌀이 우리의 "삶" 그 자체였었다.그런데 최근 웃지 못 할 희한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소중한 쌀이 곳간에 가득 쌓여있어 농민들이 더욱 어려운 상황에 빠지고 있으니,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창고에 쌀이 그득하다면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기본적으로 필요한 의(衣), 식(食), 주(住)중에 으뜸인 먹을거리가 풍족하니 말이다.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작년에 풍년이 들어 쌀이 더 생산이 됐었다. 통상적으로 쌀값은 수확기가 지나면서 서서히 올라가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한 달만 지나면 이른 햅쌀이 나올 단경기인데도 지금 쌀값은 작년에 수매한 가격 아래로 떨어져 있다. 그런데도 팔리지 않아 지금 농협의 창고 안에는 쌀이 가득 쌓여있다. 공기나 물이 사람이 살아가는데 꼭 필요하지만 평소 그 소중함을 느끼지 못하듯 쌀이 너무 많다 보니 소중함을 느끼기는커녕 푸대접을 받는 천덕꾸러기가 돼버린 것이다.쌀이 이렇게 남아도는 데는 풍년에 따른 공급량 증가가 주원인이다. 여기에 UR(우르과이라운드)협상 이후 의무적으로 수입해야 하는 MMA(최소시장접근) 물량의 증가도 영향을 미쳤다. 반면, 2008년 연간 국민1인당 쌀 소비량이 75.8kg으로 2001년 대비 13.1kg 감소했고, 대북지원도 끊기는 등 소비량도 줄었다. (그렇다보니 쌀값은 떨어지고 농협은 많은 재고로 손실을 감수하고라도 판매할 수 없는 아주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앞으로 특단의 대책 없이 이런 상태가 매년 계속 된다면 쌀 재고 부담으로 점점 더 깊은 어려움의 수렁으로 빠져들지 않을까 우려가 된다.그렇다면 대안은 없는 것일까? 6천년 동안 우리 민족을 지탱해준 소중한 먹을거리를 이대로 방치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 대안으로 필자는 우선적으로 전 국민들이 적극적으로 쌀 소비에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쌀에 대한 적정한 가격이 보장되는 시장을 제대로 작동하게 하여 농민들이 안정적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쌀 소비는 국민 건강에도 큰 도움이 된다. 사실 쌀은 '영양의 보고'이고 '다이어트식품'이며 성인병 예방에도 큰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이는 쌀눈에 있는 가바(GABA) 성분이 혈액의 중성지방을 줄이고 스트레스를 억제하며 간 기능을 좋게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뇌에 산소공급을 늘리고 신경 안정 및 집중력을 높여줘 특히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좋다고 한다. 우리 모두 아침밥 먹기부터 떡은 물론 쌀빵, 쌀라면, 떡볶이, 쌀음료까지도 즐겨 먹고 마시는 쌀 소비운동에 동참해 개인건강은 물론 국가경제에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최근 정부는 농협중앙회로 하여금 10만 톤의 쌀을 매입, 시장격리토록 하는 계획을 발표하였는데 이번 조치가 쌀 값 안정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보다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 쌀 소비 진작방안에 대해서도 정부에서 적극 검토한다고 하니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다.내가 어릴 때 어쩌다 수채구멍에 몇 알의 밥알이라도 보일 때에는 할아버지께서 여지없이 야단치시며 "쌀은 생명줄이다. 귀하게 알아라"고 하시던 말씀이 귓가에 맴돈다. 그렇다 쌀은 우리에게는 생명줄이다. 할아버지가 귀하게 여기셨던 쌀이 앞으로도 반드시 귀하게 대접받는 시절이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확신을 갖는 것이 나만의 기대일까?/황의영(농협중앙회 상호금융총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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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08.20 23:02

[타향에서] 나와 남, 그리고 우리 - 김성중

며칠전 행정안전부에서 올해 지방자치단체 외국인 주민 현황을 조사하였더니, 5월1일 기준으로 110만 6884명으로서 주민등록인구의 2.2%를 차지했다고 밝혔다. 외국인 근로자가 57만5657명, 결혼이민자는 그 다음으로 많은 12만 5673명에 이르며, 주민등록인구대비 외국인 주민이 많은 곳은 영등포지역이 11%, 금천이 9.1%, 구로가 8.2%이며 지방에서도 전남 영암이 8.4%, 포천이 6.4%, 김포가 5.7%, 음성이 5.9%라 하였다.    우리나라에 와서 살고 있는 외국인이 110만명을 돌파한 사실을 보면서 많은 이들이 깜짝 놀랐을 것이다. 이 사실을 두고 통탄하는 사람도 보았다. 어쩌다 우리가 이렇게 되었느냐고. 그러면서 이주민들이 우리 국민들의 일자리를 빼앗는다고 분개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싫다고 하는데 그들이 억지로 들어온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급격하게 나타난 저출산 고령화 경향과 탈농촌화 추세와 인력부족을 해결하기 위하여 우리가 그들을 불러들인 것이다. 여자들이 농촌지역에 사는 총각들에게는 결혼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심각한 실업 사태에 처하였으면서도 사람들은 이른바 '기름밥'은 먹지 않겠다는 생각이 공고하여 중소기업들은 일손을 구하지 못하는 인력난을 호소하고 있는 실정에서 기인하기도 했다. 외국인들은 우리나라에 와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기피하는 일을 하면서 우리 경제를 지탱해주고 있다. 만약 이들이 다 떠나고 나면 농촌지역의 젊은이들은 어떻게 살겠으며 우리 산업은 어떻게 되겠는가.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에 너무 많이 들어와서 수천년 내려온 단일민족의 전통을 깨뜨렸다고 개탄할 일이 아니다. 한민족은 한반도에 살고, 외국인들은 제 나라에 살아야 한다는 말인가? 우리 민족이 외국에 나가 사는 숫자는 훨씬 많다. 외교부에서 발표한 2009년 재외동포현황을 보면, 외국에서 살고 있는 우리 민족은 682만명이라고 한다. 미국에 사는 한국민은 210만명에 이른다. 이제는 오히려 우리 민족들이 비좁은 한반도에 안주할 것이 아니라, 세계로 우주로 나아가야 할 때가 아닌가. 마찬가지로 외국인들도 우리 나라에 와서 살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주는 만큼 받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나라에 온 사람들을 대우한 만큼 한국인도 세계 속에서 인정받고 대우받으며 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국민들은 '나'와 조금이라도 인연이 있는 사람들은 '우리'로 생각하고 참으로 헌신적으로 대접하는 반면, 아무런 연고가 없으면 '남'으로 보고 얼굴조차 마주치지 않고 오히려 적대감마저 갖는 경우가 많다. '우리 가족', '우리 친구'들에 대해서는 빚을 내어서라도 도와주려 하지만 이웃을 위한 기부에는 지극히 인색하다. 외국출생자들을 '남'으로 보아 외면하거나 차별하고 핍박하는 대신 따뜻하게 맞아들여서 '고마운 이웃'으로 받아들일 때에 '더 큰 우리'가 만들어지고, 우리 민족이 지구촌의 선진주민으로서 떳떳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김성중(전 노사정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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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08.13 23:02

[타향에서] 역사는 흐른다 - 김년균

광복절이 다가온다. 해마다 이맘때면 일제 강점기를 되돌아보게 된다. 사람 모습을 지니고서도 짐승보다 못되게 굴던 일본인들. 훔치고, 빼앗고, 짓밟고, 죽이고, 온갖 못된 짓을 일삼던 그들의 만행에 진저리를 친다. 그들은 그만큼 잔인한 민족이었을까.그러나 이상하게도 일본인을 개별적으로 만나보면 그렇지 않게 느껴져서 마음이 헷갈린다. 겉과 속이 달라서일까. 그들은 여전한데 내 마음만 흔들린 것일까.얼마전 일본의 오사카에 '문학기행'을 다녀왔다. 일본 속의 백제문화를 살펴보자는 것이었는데, 관심있는 문인 수십명이 동참했다. 옛부터 백제인이 모여 살던 '구다라스(百濟洲)'여서인지, 백제의 유적지가 널려 있는 곳이다. 백제문화가 얼마나 찬란했던가를 짐작케 한다.맨먼저 찾아간 곳은, 백제 무령왕이 일본 왕실의 친동생 오호도 왕자(계체왕)에게 보낸 '인물화상경'(국보)이 보관되어 있는 와카야마현의 '스다하치만신사'였다. 그곳의 강당에서 백제의 문화를 찬양하는 '백제시 낭송회'를 가졌다. 일본땅에서 이런 행사를 갖는 일도 처음이다.다음으로 오쓰신궁을 찾았을 때는 사토 히사다나 궁사(宮使)가 반갑게 맞아주며, '우리들의 방문을 신에게 알리는' 신궁의식까지 치러주었다. 그리고 접대실로 초대하여 차를 대접해주었다. 궁사는 '백제가 나당 연합군과 싸울 때 이 지방에서 27만명의 지원병을 보냈고, 백제가 멸망할 땐 피난민들을 일본이 받아주었다'면서 '백제사람들은 잘생기고 아름다운 것이 특징이다'고 했다. '당신도 백제의 피를 받았느냐'고 일행이 묻자 궁사는 빙긋이 웃기만 했다. 은연중 인정한 셈이다.그 다음으로 다카시노신사에 들렀을 땐, 건물의 위용에 압도되었다. 백제인들이 세웠다는 이 거대한 건물 안에 들어앉은 목조의 불상은 너무도 웅장하고 장엄하여 감탄을 금치 못했다. 부처의 주위를 한바퀴 돌고나서 한쪽 구석의 가게에 이르자, 지붕을 덮는 기왓장을 팔고 있었다. 한 장을 사서 거기에 '百濟萬歲'라고 썼다. 이 기왓장은 이제 신사의 지붕에 올려져 하늘과 마주보리라. 백제만세. 하늘도 박수치며 기뻐하리라.똑같은 일본인이면서도, 백제를 '구다라(큰나라)'라고 칭송하는 지식인이 있는가 하면, 아직도 한국인을 비하하며 역사의 사실조차 숨기려는 옹졸한 사람이 있고, 한발 더 나아가 우리땅(독도)을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극우세력이 있다. 일본사회의 복잡한 의식세계를 엿보게 한다.일본은 지금 세계의 경제대국이다. 그러나 과거엔 백제 때문에 일어선 나라이다. 백제의 왕인(王仁) 선생이 '천자문'과 '논어' 등을 가지고 일본에 건너가 그들을 가르치지 않았더라면, 백제인들이 그 땅에서 문화를 일으키지 않았더라면, 오늘의 일본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 일본의 왕족도 백제인이라고 한다. 일본의 아키히토 천왕이 '내 몸에도 한국인의 피가 흐른다'고 말한 것은 매우 정직하다.역사는 흐른다. 모두 흐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남겨놓고 흐른다. 역사는 감추는 것이 아니라 찾는 것이고, 되돌아보고, 배우고, 깨닫는 것이다. 그것을 반면교사로 삼으면 아름다운 세계가 열린다.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광복절이 일본인에게는 자성의 기회가 되기 바란다./김년균(한국문인협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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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08.06 23:02

[타향에서] FTA와 우리의 농촌 문제 - 김상국

얼마 전 우리나라와 EU간 FTA가 체결되었다. 그런데 과거 우루과이라운드와 한미 FTA 때에 비해 너무 조용한 것이 놀라웠다. 비정규직 문제, 미디어법, 북한의 로켓트 발사 등 굵직한 문제에 덮혀 버렸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과거와는 너무 달라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앞으로 있을 한중 또는 한아세안 FTA와 연관하여 우리는 UR과 FTA가 우리경제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먼저 UR을 설명하도록 하자. 우루과이라운드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쌀의 문제 또는 농수산물의 문제만이 아니다. 쌀과 농수산물이 가장 중요한 문제이기는 하지만 사실 UR은 우리생활 모든 분야에 철저하게 영향을 미치는 대단히 중요한 협상이다. 우리나라와 아세아권을 휘몰아 쳤던 IMF 경제위기도 상당부분은 바로 UR에 기인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UR을 아주 짧게 본질만 설명한다면 "전 세계 모든 나라가, 우리가 돈을 주고 사고파는 모든 상품에 대해서, 관세 7%를 제외하고는, 자유무역을 방해하는 모든 제약을 없애 달라는 것"이다. 쉽게 설명하면, 그 나라가 세계 최고의 국가인 미국이든 아프리카에 있는 콩고이든 관계없이, 그것이 쌀이든 자동차든 상관없이, 관세 7%만 내면 자유스럽게 아무나라에서 어떻게 사업하든 관계하지 말라는 협정인 것이다. 미국이나 일본 같은 선진국은 콩고에 판매할 상품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콩고가 미국이나 일본에 판매할 수 있는 상품이 얼마나 될지 궁금하다. 우리는 흔히 FTA와 UR을 별개의 문제로 생각한다. 그러나 UR과 FTA는 모두 자유무역을 확대하자는 것이고, 다만 FTA는 UR 보다 더 넓게 자유무역을 허용하자는 것일 뿐이다. 즉 7%의 관세까지도 없애거나 UR에서 제외됐던 품목도 개방하자는 내용이다. 언뜻 생각하면 FTA는 우리경제에 나쁜 영향만을 미칠 것 같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개인적 의견으로는 한일 FTA와 농촌의 경우에는 한중 FTA의 농산품 규정을 제외하고는 우리경제에 오히려 플러스 효과가 더 클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훨씬 더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FTA를 어떻게 이해하고 대처하느냐인 것이다. UR과 FTA를 더 간단히 줄여 설명하면 "국내시장이나 국제 시장을 불문하고 관세 7%와 운반비를 제외하고는 세계 어느나라가 세계 어느나라에서 장사를 해도 아무런 제약이 없다."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단 한가지, 우리 상품이 경쟁력이 있냐는 것이다. 농산품 경우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우리는 농촌이 어렵다는 말을 많이 하였지만 그래도 우리끼리 경쟁이었기 때문에 최소한 버틸 수는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우리와는 다른 품목으로, 우리보다 훨씬 더 넓은 땅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과의 직접경쟁인 것이다. 가장 간단한 것은 오렌지 값을 생각해 보면 된다. 우리나라에서 오렌지를 생산하면 지금 시장에서 팔리는 가격으로 생산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자. 그러나 경제의 묘미는 한미, 한칠레 FTA가 체결되었지만 우리의 감귤농사나 우리의 포도농사가 망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즉 도전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서 우리는 오히려 더 경쟁력이 생길 수 있다는 사실이다. 미래 농촌을 살리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다. 농산품의 가격을 바로 높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농촌의 수입을 높이는 다양한 방법은 있다. 우선 최종소비자가 지불하는 가격에서 직접생산자에게 돌아가는 몫이 얼마인가를 살펴보자. 도시에서 삼천원에 팔리는 배추가 생산지에서는 상차비도 안 나오는 것이 문제이고, 힘들여 키운 유기농산품이 판로가 없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우리가 농산물을 먹고 살 수밖에 없는 한 농업은 영원한 부밍비지니스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생산한 농산품을 소비자에게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팔릴 수밖에 없는 농산품(農産品)이 아닌 농상품(農商品)을 제공하는 것이 중요하다. 정부, 각종 연구소 그리고 농민 모두의 노력이 바로 여기에 집중되어야 한다./김상국(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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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07.30 23:02

[타향에서] 농협 상호금융! 내 고향 농촌발전에 불씨가 되라! - 황의영

고향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면 내 의식속의 시간은 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마도 60년대 중반쯤 상급학교에 가기 위해 고향을 떠나 왔기 때문일 것이다.그 당시 우리 농촌은 매우 어려웠다. 몇 되의 쌀과 보리를 시장에 내야 삽과 괭이 등의 농기구를 구할 수 있었으며, 계란꾸러미라도 들고 가야 고무신이나 학습장을 얻을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이런 상황이니 얼마 안 되는 학교 등록금조차 기한 내에 납부하는 학생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또한, 농촌지역에는 제도권 금융 기관이 없다 보니, 농민들은 급히 돈이 필요하면 월 5부 이상의 고리 사채를 얻어야 했다. 하지만 고리 사채는 이를 갚기 위한 빈곤의 악순환으로 이어져, 가난의 굴레를 더욱 고착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말 그대로 식구라도 줄이기 위해 많은 농촌의 아들딸들이 남의집살이를 가야했고, 공장의 근로자로 떠나야 할 만큼 어려웠던 것이다. 드라마나 영화속의 한 장면 같지만 실제 사실이었다.이런 현실을 타개하여 후손들에게는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 그 당시 전 국가적으로 근대화 사업과 새마을운동이 대대적으로 추진되었다. 전국 각지에 공업단지가 조성되어 중화학 공업을 강력 하게 추진했으며, 자조,자립,협동의 새마을운동을 통해 변화를 추구했던 것이다.이 시기에 농협은 그런 국가적 시책에 부응하여 1969년 7월 20일 전국의 150개 지역 농협에서 여수신의 신용사업을 처음으로 시작했다. 그 당시 농촌에 만연하고 있던 고리사채를 해소하고 농업인 스스로 자금의 잉여와 부족을 해결하기 위한 상호금융이 시작된 것이다.초창기 상호금융은 근면성실 내핍정신에 기반을 둔 새마을부녀회의 절미(節米)운동 등을 통하여 저축 증대 운동을 추진 했다. 마땅한 저축재원이 없었던 그 시절 우리의 어머니들은 끼니때마다 한 두 숟가락의 쌀을 좀도리 쌀통에 모으고 일정기간이 지나면 마을회관에 쌀통을 가져와 한데 모아 팔아 농협에 저축했던 것이다.이렇게 시작한 농협의 상호금융 예수금이 40주년을 맞이한 현재 170조원을 넘었다. 국내 은행들과 비교해도 당당할 만큼 성장했다. 특히, 농촌지역의 고리사채 해소, 영농자금 지원 등 각종 정책자금 지원창구역할, 서민 금융기관으로서의 역할 등을 병행하며 이룩한 성과라 더욱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부 경제 발전론자들이 생산성이 낮아 경쟁력이 없으며 마치 경제발전에 미운 오리 새끼쯤으로 여겼던 농업분야의 발전에 든든한 자금줄 역할을 톡톡히 해왔던 것이다그러나, 여전히 도시민들과 비교하면 농업인들은 아직도 열악한 환경에 놓여 있다. 한눈팔지 않고 열심히 일을 했는데도 도시에 사는 사람과 비교하면 여전히 어려운 형편이다. 농업이 갖는 한계나 특수성이 있다고는 하지만, 혹 우리의 관심과 사랑, 지혜 그리고 노력이 부족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누구에게나 정서적 이유뿐만 아니라, 믿을 수 있는 먹을거리 확보측면에서도농업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특히, 농협의 상호금융을 총괄하는 필자에게는 더욱 무거운 의미로 다가온다. 고향을 생각하며, 농협이 농업 생산의 종자 돈이 되고 내 고향 농촌을 회생시키는 불씨가 되도록 더욱 노력해야겠다는 의지를 다시 가다듬어 본다. 내가 나고 자란 고향을 묵묵히 지키고 있는 우리의 정다운 이웃, 농업인들이 함박웃음을 웃는 그 날을 기대하며./황의영(농협중앙회 상호금융총본부장)▲ 황의영 본부장은 전북대 대학원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고 서울대 최고경영자과정 재학중이다. 농협 본부 종합기획부 과장, 교육개혁단 단장, 안성교육원 원장, 제32대 본부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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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07.23 23:02

[타향에서] 문학을 알면 후회하지 않는다 - 김년균

고향을 떠나온 지 40년이 넘는다. 이쯤이면 변할 법도 한데, 고향에 대한 생각은 예나 지금이나 조금도 다르지 않다. '고향의 산천은 어떠한 이름난 명승지보다도 아름다운 곳이다'(조지훈)고 했는데, 그래서일까. 가난밖에 모르던 시절, 쪽박처럼 해진 몸뚱이로 철없이 천방지축 놀아대던 기억들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되살아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겨울의 눈내리는 밤이면, 마을 어른들이 조그만 내 집을 찾아와 밤참을 들며 새벽까지 <춘향전> <흥부전> <장화홍련전> 등을 노랫가락에 맞춰 구성지게 읽어주던 기억이 새롭다. 그것이 씨앗이 되었던지 나는 문학의 길로 들어섰고, 평생을 글 속에 파묻혀 살고 있다.문학은 인간의 삶을 천착하는 예술이다. 문학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지혜와 깨달음을 준다. 문학작품 속에 담긴 아름다움과 향기로움, 문학작품 속의 기이한 사건과 행동, 문학작품 속에 흐르는 정신과 사유는, 어느 누구도 겪지 못한 미지의 세계이다. 작가가 창조한 픽션인 까닭이다. 그러한 세계를 경험하면 상상력이 발달하고 창의력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이것이 문학의 가치요 힘이다.호메로스의 <일리아스>나 <오디세이>는 쓰여진 지 3천년이 지났지만, 오늘도 그 작품이 우리들의 책장에 꽂혀있다. 왜 그럴까. 작가는 죽어도 작품은 죽지 않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든 깨어있는 나라는, 그 나라의 문호들이 살던 집, 작품 배경지, 작가의 육필이나 유품 등을 귀한 보물로 여기고, 그 보물들을 영구히 보존한다. 그러면 세계의 이방인들이 구경하려고 몰려든다. 나라의 위상도 높이고 돈도 벌 수 있으니, 일거양득이다. 실제로 문호의 유품 하나가 온국민을 먹여살리는 나라도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그것을 깨달았던지, 유명작가의 문학관을 짓거나 명작의 소재를 본뜬 테마마을을 만드는 일들에 요즘 붐이 일고 있다. 기대가 부풀지만, 한편으론 걱정이 되기도 한다. 통계를 보면 1년에 책을 한권도 안 읽는 국민이 대다수라고 하는데, 그게 잘될까 생각하니 웬지 불안하다. 그러나 우리 국민은 현명하므로, 잘될 거라고 믿고싶다. 한국문인협회가 벌이는 '책, 함께 읽기' 캠페인도 그를 위한 문학운동의 일환이다.공자는 아들에게 '시(문학)를 모르면 앞이 막힌 것과 같다'고 했다. 이광수는 평론에서 '문학은 오락이 아닌 종교'라고 했고, 파스퇴르는 편지에서 '문학은 과학의 위를 날은다'고 했다. 영국인들은 세익스피어 하나를 놓고서도 '인도와 바꾸지 않겠다'고 했다. 문학은 그만큼 위대한 '인류의 스승'이다.고향을 떠나온 지 40년이 넘었는데, 이제와서 무슨 푸념이냐고 꾸짖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번 고향을 가졌던 사람에게는 지을 수 없는 흔적이 남아 있어 피를 따라 그것이 되살아나온다'(池明觀)고 했다. 몸에서 피가 멈추지 않는한 마음에서 떠날 수 없는 곳이 고향이기도 하다. 시골의 초가집 호롱불아래서 어른들이 읽어주던 소설이야기에 감동을 받던 아이, 그 아이가 가슴에 꿈을 품고 서울에 올라와 평생 문학과 함께 살면서 깨달은 생각을 한마디 전하고 싶다. "문학을 알면 후회하지 않는다."/김년균(시인한국문인협회 이사장)▲ 김년균 시인은 전북 김제 출생으로, 1972년 「현대문학」(수필)과 「풀과 별」(시)을 통해 문단에 등단했다. 시집으로 「하루」「그리운 사람」 등 11권, 수필집으로 「날으는 것이 나는 두렵다」 등 2권이 있다. 한국현대시인상, 예총예술문화대상, 윤병로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현재 한국문인협회 이사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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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07.16 23:02

[타향에서] 더불어 살아야 하는 세상 - 김성중

처음으로 '타향에서' 칼럼을 쓰게 되면서 타향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타향'이란 말은 어쩐지 외롭고 쓸쓸하게 느껴진다. 익숙한 고향 산천을 떠나, 따뜻하게 정을주고받던 고향 사람들을 그리워하며 고적하게 살아가는 '타향살이'란 얼마나 서럽고 고통스러운가. 고향을 떠나 객지에 나가 사는 것만도 그러할진대, 고국마저 떠나 타국을 떠도는 신세란 더할 나위 없이 외롭고 불쌍하고 쓰라릴 것이다. 그런데 돌아보면 고향에 사는 분들도 타향살이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살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것도 딴 지역에서 이사 온 사람들이 아니라, 낯설고 물선 머나먼 딴 나라에서 온 사람들 바로 외국인 근로자, 외국인 주부들이다.필자는 지난해 노사정위원장으로 재임하다가 사의를 표명한 뒤, 무엇을 하고 살까 고민했었다. 학교를 마치자 바로 공직을 시작한 후 어언 32년 세월이 흘렀고, 장관급 위원장까지 하면서 좋은 대우를 받았으니 이제부터는 무엇인가 갚고 가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것은 우리나라에서 '타향살이'를 하면서 가장 열악한 위치에 있는 외국인 근로자를 돕는 일이라 생각하였다. 그래서 작년 8월부터 구로동에 있는 한국외국인근로자 지원센터에 나가 외국인 근로자들에 대한 상담을 시작하였다.막상 맞닥뜨려보니 참으로 어처구니없고 부끄러운 일들이 많았다. 불법 체류자라면서 임금을 주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인가 하면, 임금 50만원을 2년째나 주지 않는 사업주도 있었고, 여권을 압류하고 합숙소에서 도저히 먹기 힘든 음식을 주면서 반노예처럼 부리는 경우도 많았다. 게다가 폭행, 사기, 강도, 강간 심지어 어떤 사람은 조선족 처녀와 결혼하고 난방도 안 되는 골방에 가둬두고 밥도 제대로 주지 않고 수시로 구타하는 경우도 있었다. 차마 지면으로 옮기기 힘든 여러 경우를 상담하면서 너무나 부끄러웠다.우리가 어떻게 해서 오늘의 부를 이룩하였는가 목숨을 걸고 월남에 가서 노동을 하고, 독일에 가서 광부로 간호사로 고생하고, 열사의 중동에서 돈을 벌어 그를 재원으로 우리나라 경제를 발전시키지 않았는가. 그게 불과 얼마 전 일이 아닌가. 그런데도 불쌍한 외국인들을 종처럼 부려도 된다는 것인가. 가난한 죄로 이역만리를 날아와 낯선 남자를 남편으로 맞아들이고 한 평생을 살아가려는 여인네들을 학대해도 된다는 말인가. 얼굴색이 검다고, 못사는 나라 사람들이라고 천대해도 되는가. 앞으로 십여 년 후면 다문화가정에서 낳은 아이들이 휴전선에 가서 나라를 지켜야 할텐데.어차피 이제는 단일민족을 내세울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지구촌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져 살아야 하는 세상. 우리 모두 또한 인생이란 낯선 곳을 여행하다 가는 나그네 아니던가. 자기와 다른 사람들을 더욱 가깝게 여겨주고, 자기보다 약한 사람들에게 더 잘해주는 열린 마음이 간절히 필요한 때 같다./김성중(전 노사정위원회 위원장)▲ 김성중씨는 전북대를 졸업, 미 cornell대학교 경제학석사, 원광대 경제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노동부 근로기준국장, 고용정책실장, 기획관리실장등을 거쳐 노동부 차관, 경제사회발전 노사정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현재 한국외국인근로자지원센터 고문, 법무법인 태평양 고문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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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07.09 23:02

[타향에서] 고향을 생각하며 - 김상국

강진에서 차축제가 있었다. 차를 좋아하는 나는 마침 시간 여유가 있어 참가하게 되었다. 강진을 가기위해 고속도로를 타다보면 반드시 고향인 김제를 지나게 된다.그런데 옆에 앉아있던 아내가 뜬금없이 "고향 옆을 지나니까 그렇게 기분이 좋아요?" 한다. 그 말을 들은 나는 갑자기 당황스러워졌다. "아니 왜?" 고향 옆을 지난다고 내가 아내에게 말하지도 않았고, 특별한 행동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런데 고향 옆을 지나니 그렇게 좋냐니 도대체 무슨 말인가. 그러나 나의 질문에 아내는 너무나 예상치 못한 답변을 하였다.강진을 방문할 시간 마련을 위해 나는 조금 무리하게 일을 앞당겨 처리하였었다. 피곤한 나는 거의 말이 없이 계속하여 운전만을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김제 안내판이 보이면서 부터는 아내에게 말을 걸기 시작하였고, 막상 김제 옆을 지날 때는 흥얼거리며 콧노래를 부르더라는 것이다.'아, 이것이 나도 모르게 나에게 갖는 고향인가 보구나'라는 생각을 아니할 수 없었다. 사실 교통이 발달한 요즈음에는 고향을 찾는다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특별한 일이 아니면 찾지 못하게 되는 것이 현실인 듯하다.과거의 글이나 노래를 보면 고향이 그리워도 가지 못하는 것이 대부분의 내용이다. 타향살이라는 노래의 가사도 그렇고, 수구지심, 왕소군의 얘기도 그러하다.그러나 현대를 사는 우리는 가고 싶으면 얼마든지 갈 수 있는 것이 고향이다. 그런데도 자주 못가는 이유는 대부분 경제적인 이유이거나 시간이 없어서일 것이다. 경제적인 이유야 사람마다 다를 것이니 말할 필요가 없고, 가장 자주 듣는 이유는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그런데 우리가 정말 시간이 없어서 고향을 찾지 못하는지는 생각해 볼일이다. 진정한 이유는 시간을 낼만큼 욕망이 강하지 못하다는 것이 더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젊었을 때는 무슨 할 일이 그렇게 많은지. 지금도 나이가 많지는 않지만 젊었을 때 보다는 나이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나이 먹는 것이 좋을 것은 없지만 조금은 지혜로와지는 것 같다. 나에게 지혜롭다는 의미는 일에 선후를 좀 더 가릴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징계맹경(김제만경) 너른 평야는 나에게는 너른 평야가 아니다. 그냥 내가 놀던 곳이고, 검정 고무신에 송사리를 잡았던 곳이며, 무엇보다 또랑에 나무 발을 막아놓고 게장 담는 참게를 잡았던 곳이다. 하서리의 모종은 쓰러져 없어졌고, 거기에는 사슴농장이 들어섰지만 아직도 나에게는 봄철에 삐비풀의 단 새순을 뜯어 먹던 곳이고, 매운게 풀꽃의 알싸한 입맛이 남아있는 곳이다. 4대강 개발에 어떤 영향을 받을지는 모르지만 만경강은 지금도 질펀한 갯벌이 허리춤을 채우고 있고, 크지 않은 고깃배가 허리를 옆으로 하고 누워있는 곳이다. 고향을 자주가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일년에 두세번은 방문하고, 지나기는 자주한다.그런데 요즈음 고향을 지나면서는 과거와 같은 향수보다는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고향을 위해서 무었을 하였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나를 낳아주고 길러준 곳인데 내가 고향 발전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못한 것을 생각하면 부끄럽기만 하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것이 절대적 기준이 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것은 귀중한 덕목이다.서해안 시대라고 하는데 그것이 우리 고향에 어떤 의미를 갖게 되고, 어떻게 진행되어야하는지 좀 더 심도 있게 고찰하고 싶다. 공과대학에 있지만 경영전략을 전공한 사람으로써 고향의 장기발전을 생각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일인지 모르겠다. 고향이 고향이기 위해서는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이 함께 있어야 한다. 우리 고향은 언젠가는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다./김상국(경희대 산업공학과 교수)▲ 김상국 교수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대통령 비서실 정책기획자문위원, 동서정책전략개발연구소장, 재정경제부 정부투자기관 경영평가교수, 공정거래위 시장구조조정분과위원, 국가과학기술위 정책전문위원장을 역임했다. 현재 한국경영정보학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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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07.02 23:02

[타향에서] '한식의 세계화'와 전북에 거는 기대 - 이길형

이달 초 제주에서 열린 한ㆍ아세안 특별정상회의가 주목을 받았던 것은 북핵 공동성명 발표와 FTA 타결 같은 정치적 이유도 있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한식 세계화의 데뷔 무대가 펼쳐졌기 때문이다. 환영 만찬과 정상 오찬이 모두 한식으로 준비됐고, 대통령이 직접 앞치마를 두르고 각 국 정상들에게 한식 꼬치를 요리해주는 사진이 언론에 소개되기도 했다.2017년까지 한식을 세계 5대 음식으로 만들겠다는 정부의 야심찬 선언 이후 '한식세계화 추진단'도 발족되면서 우리 고유의 맛으로 세계의 입맛을 잡으려는 노력이 거국적으로 펼쳐지고 있다.세계 식품시장의 규모는 4800조원인데 절반 정도인 2400조원이 외식산업이고, 앞으로 20년 후에는 외식산업이 자동차와 IT산업을 합친 것보다 더 큰 시장이 될 것이라는 통계도 있는 것을 보면 한식의 세계화 노력은 늦은 감이 없지 않다. 더욱이 음식은 필연적으로 문화를 동반할 뿐만 아니라, 동남아에 머물렀던 '한류'가 전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는 첨병 역할을 하게 돼 한식의 세계화는 서둘러야 할 과제임에 분명하다. 한식이 세계인의 식탁에 다가갈수록 우리의 농업과 식자재, 관광, 문화산업도 동반 성장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한식의 세계화에 거는 기대가 크다.전북지역은 예로부터 우리 고유의 맛과 멋이 어우러진 대표적인 고장으로 알려졌다. 전주를 빼놓고 한식을 얘기할 수 있겠는가? 순창을 제쳐놓고 우리의 장류문화를 논할 수 있겠는가? 전주비빔밥은 고유명사가 돼 이미 세계화의 길을 걷고 있다. 한국의 대표 음식 가운데 하나로 이름을 날리고 있고, 한국을 오가는 여객기 기내식의 기본 메뉴로도 자리 잡았다. 정부가 한식 세계화의 대표상품 가운데 하나로 비빔밥을 내세우고, '비빔밥연구소' 설립을 추진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어디 이뿐인가. 요즘 전국적으로 새롭게 각광을 받고 있고, 일본에서도 인기를 끌고 있는 막걸리의 문화가 끊임없이 이어진 곳도 전주요, 전통주인 이강주의 고장도 전주다.때문에 한식의 세계화에 대한 전북의 역할과 기대가 클 수밖에 없고, 또 그만큼 책임과 부담도 늘어날 수밖에 없다. 일본과 태국이 정부의 적극적인 노력과 지원을 통해 자국의 음식을 세계화하는데 성공했다지만 음식은 그 나라의 독특한 환경과 문화의 산물인 만큼 정부와 관의 주도를 통한 세계화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각 나라의 보편적인 입맛과 식습관에 맞게 식단을 표준화ㆍ현지화하는 노력이 선행돼야 하고, 이것은 모두가 함께 노력해야 할 과제이다. 한식의 세계화는 바로 우리 주변의 음식문화 개선으로 우선 실천돼야 하고, 전북과 전주가 바로 그 중심에 섰으면 하는 바람이다. 간단한 식사에도 수많은 반찬이 나오는 것이 꼭 자랑만이 아니라 메인 음식을 분명하게 하는 식단을 만들고, 스테이크의 익힘 정도를 고객이 주문하듯 맵기와 짜기 정도를 단계별로 표준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한식의 대표고장으로서 자긍심을 갖고, 음식점과 주민들의 적극적인 동참이 요구되고, 중앙정부도 투자와 지원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최근 경남의 진주 비빔밥이 미국 진출에 나섰다는 보도가 있었고, 경북 문경시도 산채비빔밥을 상품화해 보급에 나섰다. 이런 세계화ㆍ표준화 바람 속에 비빔밥의 대명사인 전주비빔밥도 명성에만 의존하지 않고 끊임없는 연구 개발을 통해 세계의 입맛 속으로 더욱 다가가려는 노력이 절실하다./이길형(CBS 마케팅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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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06.25 23:02

[타향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과 전북 - 윤승용

노무현 전 대통령이 급작스럽게 유명을 달리한 이후 전북에서도 타지역 못지않게 추모의 물결이 줄을 이었다. 김완주 도지사를 비롯한 지역기관장뿐 아니라 많은 전북인들이 김해 봉하마을의 분향소를 찾았고 전북지역 곳곳에 설치된 분향소에도 눈물의 조문객이 끊이지 않았다. 이 같은 분위기속에 전북 일각에서는 "참여정부가 상대적으로 전북을 홀대했었는데"라며 섭섭한 감정을 털어놓기도 한다고 한다. 나에게도 이 같은 심정을 전해온 인사들이 더러 있었다.전북은 2002년 민주당 대선후보 국민경선과정에서 노무현이 후보로 당선되는 데 광주 못지않게 결정적 공헌을 했다. 당시 노 후보는 광주에서 기적같은 1위로 성가를 올렸으나 이후 여타지역에서 이인제후보에게 밀려 제대로 탄력을 받지 못하다 전북경선에서 다시 정동영과 이인제를 2, 3위로 밀어내고 1위를 함으로써 기사회생했다. 전북도 역시 지역연고가 있는 정동영을 제쳐두고 광주처럼 노 후보를 미는 '전략적 선택'을 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정을 감안해보면 일부 전북인들이 참여정부 5년동안 전남 광주보다 전북이 홀대받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필자의 판단은 다르다. 한번 되돌아보자.전북은 인사측면에서 양적으로는 전남(광주를 포함)에 비해 혜택을 덜 본 게 맞다. 그러나 워낙이 인적자원이 풍부한 그 쪽에 견주어 보면 그리 섭섭한 대우를 받은 것은 아니다. 청와대 비서진의 경우 전남은 비서실장과 인사민정혁신관리홍보수석 등 많은 자리를 차지했다. 전북은 박주현 참여혁신수석, 김용덕 경제보좌관 및 필자(홍보수석) 등 수석비서관급 이상은 3명에 불과했다. 장관직의 경우도 한덕수 윤영관 정동영 정세균 김명곤 장관 등과 김용덕 금융감독위원장, 김성중 노사정위원장 등 10명 남짓한데 비해 전남은 20여명에 이른다. 그러나 전북은 김원기 국회의장, 한덕수 국무총리, 이강국 헌법재판소장 등 이른바 5부요인을 두루 차지해 질적으로는 크게 뒤지지 않는다.정책적 지원도 마찬가지다. 한가지 에피소드를 들어보자."전북에 해준 것이 뭐 있냐? 참 섭섭하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계신 것으로 압니다. 얼마나 밀어줬는데. 의리 없이 그럴 수 있느냐 하는 말들을 들으며 사실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상대적으로 전남에 좀 더 관심을 기울였던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이유는 전북이 전남보다 행정수도에 더 가까워서 전남에 특별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생각하고 집중했던 겁니다."2007년6월8일 저녁 노무현 대통령이 전주 리베라호텔 만찬장에서 전북지역 각계인사 300여명에게 한 마무리말씀이다. 굳이 이 언급을 거론하는 것은 사실 오늘날 전북의 3대 성장동력이라 할 새만금사업, 복합소재기술원, 식품클러스터사업 등이 당시 노 대통령의 전북 방문당시에 밑그림이 그려졌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의 전북방문은 그 자체만으로도 사건이었다. 노 대통령은 당시 국내의 여러대학의 명예박사학위 수여 제의를 놓고 고심하다 원광대에서 받기로 결정했다. 여기에는 지역균형발전 차원에서 수도권보다는 지방대학, 그리고 이왕이면 연고지인 영남보다는 호남에서 받기를 원했는데 이 가운데서 사학재단의 건전성과 지역사회기여도가 가장 높게 평가된 원광대에서 받기로 한 게 그 배경이다. 아울러 당초에는 새만금사업 현장을 헬기로 둘러본 뒤 당일 상경키로 했으나 그 전달에 광주에 들러 1박을 하고 무등산 등산을 한 행보와의 형평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참모의 건의에 따라 역시 전주에서도 1박을 했다. 노 대통령은 만찬 직전 김완주지사의 독대건의를 수용해 20여분 만났다. 정책실장과 필자가 배석한 이 자리에서 김지사는 새만금사업 조기추진, 새만금국제공항 건설, 복합소재기술원 및 식품클러스터사업 등을 건의했다. 노 대통령은 이 가운데 공항문제를 제외한 사업의 임기내 법적절차 확보및 예산배정 등을 약속했다. 노 대통령은 이 약속을 만찬장에서 방문선물로 공개키로 했었으나 판소리 창이 어우러진 만찬장의 열기에 휩싸이는 바람에 깜빡하고 보따리를 현장에서 풀지 못하는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 약속은 마침내 그해 말 국회에서 새만금특별법 제정과 복합소재기술원 등에 대한 예산배정으로 이어졌다. 참여정부의 마지막 해에 전북발전의 초석이라 할 법규와 예산이 이루어졌던 것이다.노 대통령의 이 같은 조치는 비단 전북에 대한 애정때문에 이루어진 것은 아닐 것이다. 그의 지칠 줄 몰랐던 지역균형발전이라는 그랜드플랜이 그 밑바탕에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윤승용(전 청와대 홍보수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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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06.18 23:02

[타향에서] 태극기 휘날리며 - 박철곤

엊그제 6일은 현충일이었다. 날씨도 쾌청하고, 휴일의 도시는 참으로 조용하고 한가하였다.아침에 태극기를 꺼내어 반기(半旗)를 달다가 문득 몇 년 전,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던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가 떠올랐다.전쟁의 원인과 책임문제를 떠나서, 같은 민족끼리, 같은 형제끼리 그리도 치열하게 싸워야 했던 전쟁의 그 숨막히는 상황과 참혹함, 그리고 그 속에서 너무나 허약하기만한 인간의 모습들이 생생하게 그려진영화의 장면들이 뇌리를 스쳐갔다.국기를 달고 베란다에서 창밖으로 보이는 평화롭고 번창한 도시를 내다보노라니 영화 속에 나오던 서울의 모습이 오버랩되어 오는 것을 느꼈다.영화에서는 전쟁의 참혹함과 비인간성 외에도 가난했던 우리 삶의 터전 조차 얼마나 처참한 폐허가 되고, 그 속에서 굶어죽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얼마나 몸부림쳐야 했는가를 실감나게 보여주었었다.6.25직후, 우리나라는 지구상 모든 나라 중에 가장 가난한 나라였다.심지어 기근으로 매일 수많은 어린이가 죽어가고 있는 아프리카의 최빈국 에티오피아보다도 가난한 나라였다.서울수복 후에 서울에 온 맥아더 원수는 이 나라를 다시 재건하는데는 적어도 100년 이상이 소요될 것이라고 말했다.그러했던 우리나라가 지금 세계11위의 무역대국, 세계최고의 IT강국, 세계조선1위국이 되어있다. 많은 사람들이 잘먹기보다 체중 줄이는 걱정을 하며 살고 있다.지금 눈앞에 펼쳐지는 저 평화와 풍요가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름모를 산하에서 아까운 목숨을 바쳐야 했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가족을 잃고, 가족과 헤어져서 낯선 거리를 헤매고 가슴저미며 살아야 했던가.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땀흘려 일해 왔던가.그런데 우리는 지금 당장의 풍요와 평화에 취해 있을 뿐, 지금까지 이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의 공을 잊고 지내는 것은 아닐까.북한에서는 핵실험에, 연이은 미사일 발사에, 심지어 휴전협정의 무효화까지 선언하고, 군사적 위협까지도 마다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도 우리는 6.25의 참상을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가.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의 공적을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가.심지어 호국보훈의 달, 현충일에서 조차 우리는 이를 잊고 있는 것은 아닐까.6.25전쟁결과 한반도 전체가 적화(赤化)되었었다면 어찌되었을지 상상은 해 보았는가? 역사에 가정은 의미가 없다지만, 만약 그리 되었다면 지금 휴전선 이북에서 벌어지고 있는 저 참담한 현실이 한반도 전체로 확대되어 있을 것이라는 단순한 결과에 전율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나 역시 휴일의 평화로움을 만끽하며 아파트 베란다에서 이런 상념에 잠겨있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을까?/박철곤(전 국무총리실 국무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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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06.11 23:02

[타향에서] 잘사는 지역과 못사는 지역 - 박삼옥

지구상에는 잘사는 나라와 못사는 나라가 있다. 그러나 잘사는 나라와 못사는 나라는 정해진 것이 아니고 시대에 따라 변해왔다. 산업혁명이 영국을 중심으로 유럽에서 일어나기 전에 한 때 중국이 세계 GNP의 1/3을 차지했었다고 경제사학자들이 평가하는 점은 그 한 예이다. 이는 지금 잘사는 나라가 앞으로도 계속 잘사는 나라로 평가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모든 국가가 다 잘살기를 원할 턴데 왜 지구상에는 잘사는 나라와 못사는 나라가 존재할까?인류의 긴 역사를 놓고 보면 기술의 혁신과 창조적 지식의 창출이 잘사는 나라와 못사는 나라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볼 수 있다. 산업혁명 이전에는 풍부한 자원을 바탕으로 농업 생산 활동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기술과 지식을 개발한 나라가 잘살았다. 그러나 산업혁명이후 제조업을 중심으로 기술혁신을 통한 새로운 생산체계를 운영한 나라가 부유했다. 생산활동이 잘 이루어질 수 있도록 원료의 공급과 제품 수요의 과정에서 생산연계가 잘 이루어지고 작업과정에서의 학습이 잘 이루어지는 생산체계를 운영하는 나라가 잘사는 나라였다. 1960년대에 구소련의 대규모 콤비나트는 이러한 생산체계를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사례라 볼 수 있다.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서는 효율적인 생산체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이제 시장을 효율적으로 조직하고 기업을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제도나 방법이 발달한 나라가 경쟁력을 갖게 되었다. 효율적인 생산체계만 중시한 구소련의 경제가 약화되기 시작한 것도 바로 구소련에서 효율적인 기업체계를 운영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하여 1990년대 이후부터는 효율적인 생산체계와 기업체계를 통합하여 경제주체들이 상호 연계되어 새로운 기술과 지식을 창출할 수 있는 혁신체계가 발달한 나라가 잘사는 나라가 되었다.잘사는 나라와 못사는 나라를 결정짓는 이와 같은 요인의 변화는 바로 잘사는 지역과 못사는 지역을 구분하는 데에도 적용할 수 있다. 1970년대 우리나라에서 중화학공업을 육성하기 위하여 공업단지를 개발하여 생산체계를 효율적으로 운영하고자 하였다. 당시 중화학공업단지가 개발된 지역은 오늘날 경제가 발전하고 인구가 증가하였다. 1960년에 인구 2만대의 소규모 도시에 불과했던 울산이 광역시로 성장한 것이나 구미, 창원 등의 중화학 공업도시가 성장한 예가 바로 그것이다.그러나 이제 상황이 변하고 있다. 중화학공업이 발달한 지역은 연구개발을 통한 새로운 기술개발과 혁신체계를 구축하지 않으면 낙후될 수 있다. 또한 중화학공업을 중심으로 한 생산체계가 발달되지 않았더라도 창조적 지식과 기술을 개발하고 확산시키는 기반이 구축되면 지역의 성장동력이 마련될 수 있다. 비록 과거에 못살던 지역도 지식정보사회에서 지역의 다양한 경제주체들이 협력하여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창출하고 산업을 발전시키는 시스템을 개발할 경우 생동감이 넘치고 경제가 발전하여 잘사는 지역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공업화시기에 낙후되었던 지역이 지식정보사회에 새로운 성장동력산업을 육성하여 지역발전의 새로운 장을 열수 있다. 지난 50여년의 세계 경제활동공간변화의 역사가 이를 말해주고 있다.지식정보사회에 이러한 새로운 성장동력의 창출을 통하여 잘사는 지역이 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창조적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서 사람에 대하여 투자하는 것이다. 새로운 지식을 창출하고 기술을 개발할 수 있는 인재들이 양성되고 이들이 모여서 생활하는 지역이 바로 장차 잘사는 지역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못사는 지역이 잘사는 지역으로 변하기 위해서는 창조적인 인재교육을 위한 프로그램 운영, 지속적인 인력의 훈련과 재훈련 기회의 마련, 고령사회에 대비한 퇴임인력의 재교육과 활용, 인재들이 모일 수 있는 주거환경의 조성, 지역 특유의 문화와 자원을 활용하여 새로운 지식을 창출할 수 있는 시스템의 개발, 주요 경제주체들인 산-학-연-관의 협력 등이 활발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지난 공업화과정에서 낙후되었던 지역은 창조적 인력양성을 통해서 잘사는 지역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이 실현되기를 기대한다./박삼옥(서울대 평의원회 의장지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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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06.04 23:02

[타향에서] 추모 열기, 그리고 우리 모두의 몫 - 이길형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추모의 열기가 전국을 뒤덮고 있다. 봉하마을을 향한 애도 순례행진이 끊일 줄 모르고, 전국 방방곡곡 분향소마다 눈물의 조문 행렬이 줄을 잇고 있다. 정부가 마련한 분향소보다 훨씬 많은 분향소가 시민들의 손에 의해 자발적으로 만들어졌다. 서울 도심 한복판 넓은 시청광장을 철통같이 막아놓은 경찰버스 행렬, 그리고 대한문 앞 좁은 보도 한쪽에 놓인 분향소와 길게 늘어선 조문객의 모습은 묘한 대조를 이루며 애도 분위기를 더욱 처연하게 만들고 있다.노 전 대통령은 한 달 전쯤 자신의 홈페이지에 "무슨 말을 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의 분노와 비웃음을 살 것입니다. 더 이상 노무현은 여러분이 추구하는 가치의 상징이 될 수 없습니다. 저를 버리셔야 합니다."라고 스스로 정치적 사망선고를 내렸다. 그러나 그가 죽음이라는 극단의 선택을 하고 나자 그를 지키지 못한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확산되고 있다.이러한 배경에는 과거 전직 대통령들이나 유명 정치인들과 비교할 때 그가 과연 벼랑 끝으로 몰릴 만큼 모욕을 당하고 부패한 정치인으로 낙인찍힐 만한지에 대한 반문과, 생전에 그를 좋아했든 그렇지 않았든 그의 정치적 목표와 진정성에 대해 대부분 공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가 추구한 것이 모두가 함께 추구해야 할 가치로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우리 정치 현실에서 여전히 풀기 어려운 숙제인 지역주의에 정면으로 맞선 대표적 정치인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을 꼽는데 누구도 이의를 달 수 없을 것이다. 90년 3당 합당을 거부하면서 스스로 가시밭길을 택했고, 매번 고배를 마시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줄기차게 지역주의에 도전장을 내밀었던 뚝심은 '바보 노무현'이라는 애칭까지 만들어냈다.그는 원칙이 성공한다는 것을 당당하게 보여준 정치인이다. 대통령 임기 중에도 계속된 지역주의 타파 개혁은 아직 미완인 채 현재 진행형으로 남아있지만, 이것은 여야 정치권뿐만 아니라 국민 모두가 함께 지고 해결해야 할 몫이다. 그리고 지역주의 타파 노력이 저비용 고효율의 새로운 정치문화로 발전했다는 점에서도 정당한 평가를 내려야 할 것이다.그의 소신과 원칙은 '노사모'라는 열성 팬들의 모임으로 이어졌고, 이것은 막대한 자금과 인력 동원 없이도 지지자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통해 정치가 가능한 전례 없는 모델을 만들어냈다. 뿐만 아니라 권위주의를 배격한 '노무현의 도전'은 퇴임 이후 시골 고향에 내려가서도 그대로 투영돼 평범한 서민으로, 밀짚모자를 쓴 시골 아저씨 같은 모습으로 새롭게 각인되기도 했다. 물론 노무현식 새로운 정치 실험은 끊임없는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심지어 재임 중에도 보수는 물론 진보의 공세에까지 시달려야 했고, 아마추어리즘이라는 평가절하를 당하기도 했다.그가 없는 지금, "특권과 반칙이 없는 사회,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사회, 부정부패와 정경유착이 없는 사회"를 주창하면서 대한민국의 업그레이드를 시도한 그의 신념과 철학은 이제 우리 모두가 함께 나눠 가져야 할 몫이 되었다. 정부는 국민을 아프고 힘들게 하고 있지는 않은지 다시 살펴봐야 하고, 여야 정치권과 종교계, 시민단체들도 새로운 결단이 필요하다. 특히 애도 분위기를 이끌고 있는 말없는 다수, 우리 국민들이 앞장서 그 역할을 담당해야 할 때다./이길형(CBS방송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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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05.28 23:02

[타향에서] 다시 개헌을 촉구한다 - 윤승용

'박연차 게이트'가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다. 박연차라는 영남지역의 한 통 큰 기업인이 사업하면서 주변에 마구 돈을 뿌리고, 그 돈의 댓가로 다시 기업을 더 키운 과정이 낱낱이 드러나고 있다. 세간에서는 요즘 박연차씨가 뿌린 검은 돈을 '연차수당'이라 희화화하며 그와 다소 안면이라도 있는 사람중에 돈을 못 받은 인사를 ''연차수당'도 받지 못한 '허당거사'라고 비아냥댄다고 한다. 실소를 금치 못할 노릇이다. 그의 이번 행각이 과거 한국의 재벌기업 총수들이 수백억원대의 뇌물을 '통치자금'이란 미명아래 대통령에게 청와대에서 직접 상납하고 대신 각종 사업적 특혜를 누린, 우리 기억에도 생생한 5공및 6공화국 비리에 비하면 조족지혈(鳥足之血)이라 하겠지만 죄질로 보아서는 오십보 백보임에 틀림없다.나는 이번 사건이 검찰수사로 하나씩 실체를 드러내는 것을 보며 참담한 심정을 금치 못하고 있다. 검찰의 수사가 정치보복적 먼지털이식 수사라는 일부의 비판 때문만은 아니다. 정경유착 탈피와 특권배제라는 도덕적 가치를 앞세워 집권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핵심 피의자로 몰리고 있기 때문이기도하다. 사법적 유죄 여부를 떠나 전직 대통령이 피의자 신분으로 멀리 김해로부터 한양천리까지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노 전대통령 개인으로나 국가적으로나 부끄럽기 짝이 없는 노릇일 터이다. 한때 그 분을 곁에서 보좌했던 필자로서도 유감스럽기는 매한가지다.하지만 마냥 "이놈이나 저놈이나 똑 같다"며 정치권을 싸잡아 욕지거리를 해댄다고 이번 사건의 근본원인이 뿌리뽑히는 것은 아니다. 우린 싫든 좋든 다시 선거로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인을 뽑아야하며 그들이 다시 나라를 좌지우지 할 것이다. 때문에 우린 사태의 본질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이번 사건의 원인은 여러 각도에서 그 배경을 살펴볼 수 있지만 대통령이라는 한 개인에게 너무 과도한 권력이 집중된 현재의 '5년단임 대통령중심제'라는 통치시스템에 가장 큰 이유가 있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이미 대통령제의 폐해에 대해서는 많은 인사들이 지적한 바 있다. 김원기 전 국회의장은 지난 해 11월 "세계화정보화로 환경이 엄청나게 변화하고, 한편으로 양극화가 심화되는 상황에서 국가의 모든 운명을 한 사람에게 책임지우는 현재의 대통령제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하고 "의회의 강력한 견제 없이 비상대권을 갖고 있고, 검찰경찰감사원에 대한 통제권을 가진 현 대통령제는 미국과 달리 권력이 집중화된 기형적 제도"라고 비판했다. 그는 "이러한 제왕적 대통령은 결국 망명, 재임중 자식 구속, 임기 후 구속 등 자기파괴적 현상을 초래했다"며 "국가와 안보는 대통령이, 경제와 일반 행정 등 내치는 의회에 대해 책임을 지는 총리가 각각 나눠 맡는 '분권형 대통령제'가 국민 통합을 위해 바람직한 대안"이라고 말했다. 그의 지적이 아니더라도 현재 OECD 국가중에 대통령제를 실시하는 나라는 미국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다. 더구나 한국처럼 사실상 제왕적 대통령이 군림하는 나라는 독재가 판치는 후진국에나 존재할 뿐 선진국중에는 사실상 없다. 대부분의 선진국은 내각제나 이원집정부제 등 분권형대통령제를 실시하고 있다. 대통령 1인에게 통치권의 모든 것이 집중된 한국의 대통령제는 아무리 대통령 본인이 자제하고 조심한다고 해도 부패와 독직, 인사전횡의 적폐가 재발할 수 밖에 없음을 이번에 노 전 대통령이 여실히 보여주었다.노 전대통령은 임기를 1년여 앞둔 2007년1월9일 '대통령 4년 중임제'를 내세운 원포인트 개헌을 제창했었다. 노 전 대통령은 ▲1987년 제정된 현행 헌법은 시대적 소명을 다했고▲국회의원 선거와의 주기차이로 인한 국정불안정 및 선거비용 과다▲단임제의 폐해 등을 내세워 정치권의 수용을 요구했다. 하지만 정치권, 특히 야당과 보수언론은 ▲정계개편과 정국주도권 장악을 위한 정략적 발상▲대선판도 개입의도설 등을 내세워 극력 반대했다. 결국 차기 정부 출범후 개헌논의를 한다는 정치권의 합의를 조건으로 노 전 대통령은 그해 4월14일 개헌안을 철회했다.그러나 정치권은 당시의 약속을 팽개친 채 지난 1년을 허송했다. 이제라도 정치권은 당시의 약속을 지켜야한다. 내각제냐, 대통령 4년 중임제냐는 국민다수의 뜻에 따르면 될 일이다. 그 길만이 이번 사건에서 우리가 배워야할 참 된 교훈이다./윤승용(전 청와대 홍보수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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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05.21 23:02

[타향에서] 오월과 기념일 - 박철곤

오월이다. 참으로 눈부신 계절 오월이다.산과 들, 온누리에 싱그러운 새순이 돋고 화려한 봄꽃과 새들의 노래 소리가 절로 기쁨을 샘솟게 하는 계절 오월이다.  계절의 여왕, 청춘의 계절, 생명의 달 등등. 오월에 대한 찬사와 오월의 아름다움을 묘사한 글들은 셀수도 없이 많고 그 표현의 훌륭함과 적확(的確)함에 대해서 감히 견줄수도 없는 필자의 필력으로는 오월의 아름다움을 운위하는 것 자체가 무리 일런지도 모른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월을 찬(讚)하지 않을 수 없다. 오월은 솜털 보송보송한 청소년의 청순함과 발랄함이 피어나는 계절이고, 이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동식물의 생기가 피어나는 희망의 계절이기도 하다.오월은 모든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새로운 의욕이 샘솟게 하는 묘한 마력을 지닌 달인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오월에는 무슨 무슨 기념일이 참으로 많다. 1일 노동절로 부터 시작해서 5일에는 어린이날, 8일에는 어버이날, 15일은 스승의날, 19일에는 발명의날 등등 있는가 하면 21일은 부부의날로 지정되어 있기도 하다. 둘이서 하나가 된다는 뜻이라고 한다.그리고 부처님 오신날도 오월에 들어 있다. 오월의 기념일은 이들외에도 수없이 많아 여기서 일일이 다 열거 할수 없다. 아예 오월은 통째로 '가정의 달', '청소년의 달'로 지정되어 있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오월에는 각종 기념행사와 나들이 기회도 참 많다. 모든 기념일마다 기념식과 기념행사가 줄줄이 이어지고 이때마다 여러종류의 표창과 상훈이 많은 이들에게 주어진다. 그뿐인가, 각종 공연과 음악회, 전시회, 체육대회 등등이 수도 없이 개최가 되고 이런자리에 참석한 사람들마다 오월의 아름다움을 빠뜨리지 않는다.올해에도 어김없이 오월은 찾아왔고 온 산하가 연초록색 신록으로 새단장을 하고 있다. 매년 그러하듯 곳곳에서는 연례행사들이 줄줄이 이어지고 기념식과 축하행사가 열리고 또 열리고 있다.이 많은 행사들, 이 자리에서 행해지는 수많은 축사와 기념사들, 그리고 유공자들에게 주는 서훈과 찬사들을 보면서 필자의 상념은 또 깊어만 간다. 이 하나 하나의 행사와 기념일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그 뜻을 진정으로 기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저 매년 돌아오는 행사이다 보니, 기념일이다 보니 의례적으로 지난해와 같은 날, 같은 방식으로 하루를 보내는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들은 없을까?어린이날에 미래의 주역이 될 어린이들을 제대로 키우기 위한 우리의 역할과 과제를 생각하는 부모, 어버이날에 진심으로 효(孝)를 생각하는 자녀, 스승의날에 스승에게 마음으로 부터의 고마움을 느끼는 학생들이 얼마나 될까?파릇파릇 신록이 자라고 참으로 눈부신 철쭉이 피는 오월에 이들 기념일을 정한 뜻을 우리는 얼마나 헤아리고 있는 것일까? 또 하루 기념행사가 끝났으니 내년에 다시 같은 날을 맞을때까지 그런 기념일이 있었다는 것조차 잊고 지내지는 않을까?먼 타향에서 고향쪽 하늘을 바라보며 내가 어릴때의 오월을 생각하면서 공연한 상념에 젖어본다./박철곤(前 국무총리실 국무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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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05.14 23:02

[타향에서] 대학이 변해야 국가의 미래가 있다 - 박삼옥

대학은 미래발전의 온상이다. 역사적으로 국가의 발전은 대학의 발전과 더불어 이루어졌다. 흔히 대학은 학생을 교육하는 기관으로만 인식한다. 그러나 대학은 교육과 더불어 연구와 지역사회발전의 세 가지 기능을 하고 있다. 이 세 가지 기능 중 어떤 것을 우선으로 해야 하는가는 시대에 따라 지역에 따라 다를 수 있다.1970년대 이전에 대학은 학생들에게 지식을 전달하는 교육을 중시하였다. 소위 주입식교육만으로도 산업발전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대학은 상아탑의 사고 속에서 지역사회발전에 대한 관심은 별로 없었다.그러나 20세기 말부터 상황은 달라졌다. 정보통신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새로운 기술과 산업이 쉴 새 없이 개발되고 정보가 빠르게 확산되었다. 제품의 수명이 매우 짧아졌다. 이에 따라 대학에서는 교육뿐만 아니라 연구도 중요해졌다. 21세기에 접어들어서 우리가 BK사업, 누리사업 등 연구와 대학원생의 교육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한 것도 이러한 연유에서이다. 최근에 대학의 연구기능을 강화한 결과 연구들이 국제학술지에 출판되어서 한국대학의 위상이 높아진 것은 사실이다.그런데 이러한 단기적인 연구활동의 강화과정에서 학부의 창의적 교육이 소홀히 되고 있다는 우려가 높다. 연구비의 혜택으로 연구성과가 나오고 대학원생들의 연구활동이 활성화 되고 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교수들이 연구비 때문에 논문편수를 늘리는 수적인 연구 성과만 집념하다보니 정작 학부의 창의적 교육이 소홀히 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지식정보사회에서는 교육이나 연구 중 어느 하나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교육과 연구 및 지역사회발전의 세 기능이 상호 연계되어 상승효과를 내야 한다. 이제 교육은 지식의 전달만이 아니라 새로운 지식을 창출할 수 있는 인재의 육성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창의적인 인재의 양성을 위해서는 창의적인 교육이 필요하고, 창의적인 교육은 창의적인 연구와 동행하여야 한다. 또한 창의적인 연구결과는 사회에 필요한 신산업을 발전시키는데 활용되어야 한다. 신산업의 발전은 다시금 창의적인 연구와 교육을 활성화하는 동력이 되어 교육, 연구, 지역발전의 세 기능이 상호 유기적으로 상승작용하게 된다.이제 대학연구에서 논문편수에만 집착할 것이 아니라 수준 높은 연구를 통하여 창의적인 교육을 활성화하도록 변해야 한다. 또한 대학은 상아탑의 안일한 사고에서 벗어나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지역사회를 창의적인 시민사회로 변화시키는 중심이 되도록 지역사회와 호흡을 함께해야 한다. 이는 단순히 최고 경영자과정, 최고기술과정 등 재정확보를 위한 교육만이 아니라 일반 시민의 질적 수준을 높일 수 있는 교육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신기술의 확산과 산업화에 공헌해야 한다는 것이다.대학이 세 기능을 조화롭게 수행하기 위해서는 대학의 자율성과 다양성 및 창의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모든 대학이 똑같은 학과를 설치하고 일률적인 교육을 한다면 앞으로 경쟁력을 가질 대학은 몇 개 되지 않을 것이다. 이제 대학은 지역의 특성에 맞게 학과도 특화해야 하고 교육방법과 연구분야도 차별화해야 한다. 대학이 위치한 지방의 특성을 살려서 특정분야를 세계적인 수준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소프트웨어분야의 산업과 대학으로 특화한 인도의 방갈로는 좋은 예가 된다.대학이 변하기 위해서는 대학의 노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정부가 변해야 한다. 정부가 대학에 대한 투자를 중시하지 않고 자율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대학의 창의성과 다양성은 죽어간다. 정부는 권위주의에서 벗어나 대학이 연구와 교육에서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서비스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 대학 내에서도 대학 집행부는 교수들이 창의적인 교육과 연구를 할 수 있는 여건과 환경을 조성하는데 서비스하는 것이 중요하다. 앞으로 대학이 변하여 자율과 창의적으로 세 가지 기능을 조화롭게 수행할 수 있을 때 지역과 국가의 미래가 밝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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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05.07 23:02

[타향에서] 지역축제도 구조조정이 필요하다 - 이길형

이렇다 할 특산물도, 관광자원도 없던 전남 함평군이 해마다 백만 명 이상의 관광객을 불러들이며 '관광 함평'으로 이름값을 하고 있는 것은 순전히 <나비축제>에서 비롯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해에는 입장료 수입만으로 100억 원을 벌었다고 하니 축제의 위력을 짐작할 만하다.전국은 지금 바야흐로 축제의 계절을 맞고 있다. 뉴스와 광고를 통해 하루걸러 새로운 지역축제들이 소개되면서 축제의 홍수를 이루고 있다. 계절적으로 봄가을에 축제가 몰릴 수밖에 없지만 지방자치단체별로 경쟁적으로 쏟아지는 행사들이 과연 진정한 축제의 역할을 하고 있을까 의문이 든다.전국에서 1년 동안 펼쳐지는 축제 행사는 천여 개 가까이 된다는데, 이 가운데는 이름도 내용도 비슷비슷한 축제가 상당수에 이른다. 축제에 벚꽃이나 진달래, 철쭉, 단풍 같은 이름을 붙인 것이 수십 개이고, 사과, 딸기, 수박, 주꾸미 등 지역의 특산품 이름만 붙인 축제도 수두룩하다. 전북도 예외가 아니어서 해마다 50여 개의 지역축제가 펼쳐지고 있고, 이 가운데 4분의 1 가량은 단순히 특산물 위주의 행사라고 한다.물론 축제가 지역 홍보와 더불어 지역민들의 화합을 도모하고, 자긍심과 애향심을 고양시키는 긍정적 의미가 없지 않다. 그렇지만 요즘의 축제는 단순한 지역 행사에 그치지 않고, 관광객 유치를 통한 경제 효과 창출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는 것이 일반적 추세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렇다 할 차별성을 찾을 수 없는 행사가 난립하다 보니 축제가 다양한 역사와 문화체험을 통해 지역의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기는커녕 여전히 먹자판, 놀자판 아니냐는 눈총을 사고 있어 안타깝다.철따라 바뀌는 자연환경의 볼거리나 특산물을 보고 즐기는 행사라면 굳이 지자체가 적극적으로 지원하거나 나서서 '축제'라는 거창한 명칭을 쓰지 않더라도 주민들이나 관련 단체들이 직접 홍보하고 가꿔나가면 될 일이다. 그런데도 몇 년 사이 우후죽순처럼 축제가 급격히 늘어난 것은 지역별 경쟁 심리도 있겠지만 민선이후 지방자치단체장들의 홍보와 치적을 위한 수단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같은 단체장 얼굴 내밀기 행사에 자치단체들이 막대한 선심성 예산을 지원하고 있어 혈세를 낭비하고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높다. 오죽하면 자치단체가 자발적으로 축제지원 예산의 비율을 낮추면 인센티브를 주겠다는 중앙정부의 개선방안까지 나왔겠는가.나비축제를 성공사례로 일군 함평군은 행사를 하게 된 동기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지역경제 활성화와 군민소득 증대를 위해 유채꽃 축제를 추진하려고 했지만 유채꽃으로는 경쟁력과 차별화를 기할 수 없어 친환경지역임을 가장 잘 알릴 수 있는 나비를 테마로 축제를 기획하게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나비축제는 지금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지역의 대표적인 명품축제로 자리 잡았고, 이것은 함평군의 주요 소득원으로 막대한 경제적 효과까지 누리고 있다.이제는 지역축제도 구조조정이 필요하다. 겉치레만 요란한 알맹이 없는 축제를 연례행사라고 해서 계속할 필요는 없다. 차별화된 콘텐츠를 갖추지 않은 축제는 과감히 줄이고 역사와 문화, 체험이 어우러진 대표축제, 명품축제를 육성해야 한다. 이제라도 자치단체와 전문가, 주민들이 머리를 맞대고 기존의 축제를 세밀하게 재점검하는 노력이 절실해 보인다./이길형(CBS방송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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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04.30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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