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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원스톱 제작시스템 갖춘 '한국의 할리우드'

전주 한옥마을 숨은 보물장소였던 전주 향교에 외지인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왜 일까. TV드라마 '성균관스캔들'에 촬영지로 입소문이 나면서 한옥마을 투어에 나선 관광객들에게는 꼭 들러 가야만하는 필수 코스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전주 중앙동 옛 도청사는 가끔 차량 통제로 정체되는 일이 부쩍 잦아졌다. 바로 영화촬영으로 통제되기 때문이다. 정말 전주가, 전라북도가 영상영화산업의 메카로 떠오르고 있는 것일까.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에게 전북은 과연 어떤 매력을 지닌 곳일까.△ 전주 전동성당옛 도청사 등 인기 1번지 촬영지2010년 한국 영화 제작 편수가 152편인데, 전북에서 무려 43편이 촬영되었다. 2011년에는 53편이 제작되었고 올해는 55편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를 정리하면 매년 국내영화의 30%정도가 전라북도의 소재와 인프라, 콘텐츠, 인력으로 생산되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그동안 영화를 통해 소개된 전북 지역의 촬영지는 다양했다. 대표적인 곳이 전주 한옥마을(교동)에 위치한 전동성당이다. 영화 '약속'에서 소개된 이후 영화촬영지로 유명했지만, 최근에도 일본도쿄 TV 드라마 '레인보우로즈'(2011)를 통해 일본에 소개되었고, 드라마'소녀K'(2011) 영화 '전우치'(2009), '마이파더'(2007) 등 여전히 전북 최고의 로케이션 장소로 각광받고 있다. 이유는 국내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이국적인 전동성당의 외관 때문이다. 천주교사상 최초의 순교자였던 윤지충(1759~1791)의 순교지인 만큼 오랜 역사와 함께 종교적 아름다움과 미학적 정서를 주변 경관과 함께 잘 간직하고 있다. 규모 면에서는 아담하지만, 로마네스크 방식의 건축물로서 희소성도 있다.전주 중앙동의 옛 도청사도 이에 못지않다. 올해만 해도 '늑대소년', '아모레미오', '완전한 사랑:퍼펙트넘버'등의 촬영지로 로케이션 되었다. 옛 도청사가 신청사로 이전한 뒤 옛청사의 활용방안의 확정되지 않아 방치된 상태였으나, 그 허름하고 오래된 외관은 오히려 영화감독들에게 60~80년대 근현대문화를 고스란히 간직한 역사성과 향수를 자극하는 요소가 됐다는 평가다. 또한, 옛 도청사는 전북을 대표하던 공기관으로 시대정신과 독재군부에 항거하던 상징적 이미지를 갖고 있다. 때문에 우리 현대사를 배경으로 제작되는 많은 영화의 감독들에게는 옛 청사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연출할 수 있는 구조와 공간의 매력에 러브콜을 보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옛 도청사는 내년에 철거 예정이기에 아쉬움이 남는다. 이처럼 전북에서 영화 촬영지로 각광을 받고 있는 향교, 전동성당, 옛도청사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건축물로 외관도 개성있고 아름답지만, 역사과 함께 시대를 견디고 녹아든 옛 기억과 향수들이 고스란히 묻어난다는 점에서 섭외 1순위가 되고 있다. 현재 4편의 영화가 전북에서 촬영 중이다. 정기훈 감독의 '반창꼬'(주연 고수, 한효주)는 전주종합촬영소와, 팔복동철길도로, 효자동 신시가지 일대에서 로케이션 중이고, 박훈정 감독의 '신세계'(주연 이정재, 최민식, 황정민)'는 완주군의 한결종이뱅크 폐공장, 군산교도소, 김제 저수지 일대에서 촬영을 마쳤다. 이 뿐만이 아니라 다음 포털사이트 '만화 속 세상'에 연재된 웹툰 '전설의 주먹'(이종규원작)으로 각색한 강우석 감독의 '전설의 주먹(주연 유준상, 황정민, 윤제문)도 로케이션 촬영이 한창이다. 반미운동이 거셌던 1985년 문화원 검거농성사건을 소재로 한 육상효 감독의 코믹영화 '구국의 강철대오'(주연 김인권, 유다인)도 촬영 중에 있다. △ 전주영상위 등 원스톱 제작 인프라와 시스템 뒷받침여기에 전주시와 전라북도가 영화산업의 메카도시를 선포하며 지원하고 조직한 전주정보영상진흥원, 전주영상위원회, 전주국제영화제 등 유관기관들의 노력으로 빚은 원스톱 제작 인프라와 시스템이 뒷받침한다. 전주영상위원회가 영상산업 관계자 팸투어, 로케이션 촬영지원사업 등을 통해 영상물 유치 관련 홍보와 프로모션을 활성화하고, 영화제작을 위한 프로덕션포스트 프로덕션까지 갖춰졌기 때문이다. 영상콘텐츠를 제작할 수 있는 전주영화종합촬영소와 완공 예정인 다목적특수촬영스튜디오, 전주영화제작소로 이어지는 원스톱 영화제작시설 덕분. 영화 제작사의 이동 비용 절감과 편의성을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충무로를 중심으로 한 영화 제작사와 감독들에게 전북권으로 로케이션을 결정하는 이유가 되고 있다. 또한 전주영상위는 영화 창작공간 지원을 통해 역량 있는 영화감독들이 전북에서 시나리오를 집필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전주국제영화제 중단편 공모사업을 통해 지역 콘텐츠를 기반으로 하는 신진작가를 지원하는 등 영상영화 활성화에 노력하고 있다. 전주영화제작소는 3~4개월 전에 예약해야만 촬영이 가능하다고 한다. 현재 가동률 90% 로 수많은 영화들이 이곳에서 제작되고 있다. 영상위 촬영지원팀의 주요 업무가 전국 영화사와 감독들로 하여금 전북에서 영화를 제작하게 하고, 전북을 소재로 한 다양한 장소를 배경으로 영화 속 스크린을 채우는 실제적인 성과를 내고 있다. 전주영상위원회(이하 전주영상위)는 2001년 출범된 비영리법인으로 전주시와 전라북도가 국내 영상영화산업의 중심지로 성장하기 위해 필요한 실제적인 기획홍보와 촬영지원, 인력양성교육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다. 전주영상위는 도내의 로케이션 촬영지원 및 전주종합촬영소 운영을 통해 서울 중심의 투자사와 영화제작사에게 경제적인 인센티브와 각 프로덕션 제작환경에 맞는 최적의 원스톱 서비스를 지원함으로써 감독과 스텝들이 영화를 찍기 위해 전북을 찾도록 각종 지원 사업을 운영하고 있다.

  • 주말
  • 전북일보
  • 2012.07.20 23:02

"영화속 배경 찾아 전북 곳곳 누벼요"

우리나라에도 그리스의 산토리니섬이 있다? 영화, 드라마, CF 속에 등장하는 아름답고 이국적인 배경이 우리나라에 촬영된 것이라면 믿을 수 있을까. 하지만 국내에서 촬영된 배경이다. 카메라 앵글 속에 작품의 사실성과 감독의 진정성을 담아내기 위한 중요한 요소 중 한 가지가 배경과 공간이다. 이처럼 영화제작자와 감독이 원하는 이색적이고 의미있는 공간을 제공하기 위해 로케이션 매니저가 있다. 전주영상위원회의 촬영지원팀에서 일하는 김선태(32) 이대영(30) 유정훈(32)씨는 전북에서 유일하게 활동하는 공식 로케이션 매니저다. 이들에게는 영화 제작 지원 외에도 또다른 중요한 임무가 있다. 전북에 아직 발견되지 않은 매력적이고, 참신한 영화의 배경이 될 숨은 지역을 찾아다니는 일이다. 올해 종영된 드라마 '발효가족'의 경우 완주군 소양면의 위봉화성 인근 저수지를 배경으로 새롭게 물색된 장소에 촬영세트를 지었다. 이대영 씨는 가장 인상 깊은 로케이션 장소로 '완주군 공기마을 숲'을 꼽았다. 영화 '최종병기 활'(2011)에서 숲 속 추격신과 전투신을 담아내 알려진 이곳은 편백나무 숲으로 사극 영화제작팀들이 늘 탐내는 곳이 되었다. 실제로 '최종병기 활'의 김한민 감독은 2일 정도의 로케이션 일정을 계획했다가 공기마을 숲을 방문한 뒤 너무 맘에 들어 8일 동안 로케이션을 연장했다. 유정훈 씨는 한옥마을의 전주향교를 손꼽았고, 김선태 씨는 군산의 '히로스 가옥'을 손꼽았다. 이밖에도 고창읍성, 경기전, 군산 철길마을, 완주아원 등 전북의 다양한 삶과 역사의 공간이 영화 스크린을 통해 전 세계인들에게 소개되고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로케이션 매니저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씨는 로케이션 촬영지의 업무보고를 위해 제작현장을 기록 촬영하는 작은 일마저도 까다롭다고 하소연한다. 배우들의 초상권과 영화계의 제작환경상 개봉 전 외부 노출을 꺼려하기에 지원과 협조를 해주면서도 실랑이가 오가는 일이 있기 때문. 유씨는 진안 보릿재 도로 촬영 때는 바로 옆에서 트렉터작업을 하시는 농부를 설득하는라 맨발로 논밭을 누비면서 막걸리를 공수하는 수고로움까지도 감수했다. 촬영을 마친 감독 이하 스텝들이 철수하고 뒷정리하는 것까지 일일이 신경써야 하는 점도 민감한 사안. 배우와 촬영팀이 떠난 자리가 그대로 원상 복구되어야 그곳에서 활동하는 주민들에게 민원이 제기되지 않는 데다, 지역 주민에게 좋은 이미지를 남겨야 이후에도 촬영 협조가 이뤄질 수 있기에 더욱 중요하다. 촬영지원팀의 제일 중요한 자산은 말 그대로 촬영지이기 때문이다. 로케이션 매니저 3인방은 주간엔 외근이 잦은 편이다. 현장 촬영을 하고, 로케이션 상황을 지원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야간에는 영상위 사무실로 돌아와 문서를 작성해야 한다. '영화제작사와 감독들이 전북에서 왜 영화를 찍나요'라는 물음에 이들은 "밥이 맛있어서." 라고 농담 섞인 이유를 댄다. 영화배우, 스텝, 감독 누구나 전라도를 대표하는 맛의 고장인 이곳의 밥맛을 좋아한다. 거기에 전주 막걸리까지 더해지니 '금상첨화'다.

  • 주말
  • 전북일보
  • 2012.07.20 23:02

익산 중앙시장 ' 터줏대감들' "켜켜이 쌓인 情에 못 떠나죠"

익산 중앙시장에 가면 고소한 사람 냄새가 가득하다. 1947년 개설이 되어, 올해로 65년의 전통과 역사를 가진 시장이다. 호남선의 교통 요충지인 익산역 부근에 있어 인근 충청도, 전라도 지역의 명물 시장이었다. 최고의 호황을 누렸던 그 옛날의 영광은 이미 대형마트에 뺏긴 지 오래, 발 디딜 틈 없던 시장 골목은 인적이 뜸해 무섭기까지 하다. 중앙시장을 떠나지 못하고, 그 곳의 정(情)을 지키고 있는 익산 중앙시장의 터줏대감들을 만나본다."우리집은 기계로 안 혀, 다~아 손으로 하지"중아시장 터줏대감 '오복떡집'. 30년의 세월이 묻어난다. 2층은 떡 방앗간, 1층은 매장. 손주 녀석들과 함께 가게에 앉아 계신 할머니에게 떡 맛을 여쭤보니 "징~그럽게 맛있어, 한번 잡숴봐, 아~ 입 벌려~"하신다. 쫀득쫀득 달콤 달콤한 맛이 입안 가득이다. 30년 전통의 맛이 그냥 만들어 지는 게 아니구나!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30년 이어온 손맛은 딸과 며느리에게 고스란히 전해져 대를 이어 떡 맛을 이어가고 있다. 요즘엔 신세대 주부를 겨냥한 제사 맞춤음식과 반찬도 함께 판다. 예전에 가격 흥정만하고 가는 손님에게 "안살라면 뭐 할라고 물어봐"라고 핀잔을 줬지만 요즘엔 절대 그런 일 없단다. 불경기 탓에 오는 손님이 그저 반가울 뿐이다."뭐 믿으라고? 안 혀, 안 믿어"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서자 날아오는 할머니의 짜증스런 목소리. 요즘 종교인들이 자주 드나들었나 보다. '함열집'으로 간판을 걸고 있는 선술집이 중앙시장 구석진 골목 끝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아는 사람들이나 간신히 찾을 법 한 길이다."한잔에 1000원인데 둘이 와서 갈라먹기도 하고 셋이 와서 두잔 먹기도 하고 그려, 없는 사람들이라, 와서 한 병 먹는 사람도 없어" 김치와 콩나물 국물에 막걸리 한 사발. 드나드는 손님들도 그저 다른 말없이 한 사발 쭉 들이키고서 금방 이어서 나간다. 커다란 술독에 가득 차 있는 막걸리를 한바가지 퍼서 판다. 이 집에서 가장 명당은 아담한 술독이 차지하고 있었다. 43년 전 수도집의 국밥 한 그릇은 200원. 500원으로 기억하는 40년전 대학생. 물가상승률보다는 더딘 걸음이지만 현재 국밥 한 그릇 가격은 3000원. 중앙시장 골목 끝자락에 자리한 백반집 '수도집'. 말린 시래기 삶는 냄새가 구수하다. 시장과 함께 한지 벌써 43년 째인 할머니는 손가락과 팔목 성한 곳이 한군데도 없다. 그런 속내도 모르는 단골들은 "병원에 입원해도 장사하세요" 라며 은근 압력을 준단다. 43년 째 팔팔 끓어 구수한 향을 품어내는 우거지 된장국에 시장을 찾은 손님들 어찌 밥 한술 말지 않고 지나치겠는가~.'코코 샤넬'도 울고 갈 수선 솜씨. 중앙시장 수선골목에 가면 기가 막힌 솜씨의 명장들을 만날 수 있다. 그때 그 기억을 간직한 희망 수선집에서는 30년 된 가위, 칼, 네 번을 땜질한 다리미 그리고 도란스(트랜스)에 연결해야 사용할 수 있는 110V 일본산 재봉틀 '브라더 미싱'이 놓여져 있다. 낡은 재봉틀은 '드르륵 드르륵' 손님들 기다리며 앓는 소리를 한다. 20년 전만 해도 명절이면 골목마다 설빔 들고 찾는 손님들로 가득 했단다. 지금은 잊지 않고 찾는 몇몇 단골 손님으로 겨우 겨우 일감을 놓지 않고 있다. 좁다란 2층에서 솔솔 풍기는 고소한 냄새를 쫓아 본능적으로 따라가다 보면 40년 전통이라는 문구가 눈앞에 들어온다. 바로 기름집이다. 주로 깨를 볶아 참기름, 들기름을 짜다보니 이 근방은 언제나 고소한 향이 진동한다. "첨엔 약하게 볶다가 좀 싸게 했다가, 다시 또 약하게 그러고 뜸 들이재, 불 조절을 잘 해야 혀" 자매라고 믿기엔 약간 어색한 맏언니(72)와 막내 동생(55) 자매간이 함께 일하고 있는 이 집은 오랜 단골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고 있다. 한창 장사가 잘되던 그 옛날에는 사람들이 1층까지 줄을 서 있었을 정도란다. 몇시간씩 기다릴 줄 아는 인내력 강한 사람만이 고소한 참기름 한병을 손에 넣을 수 있었던 바로 그곳이다. 오랜 단골은 비가 내리는 날에도 버스를 타고 오셨단다. "이 집이 찌꺼기도 적고 맛이 좋기로 소문이 났지. 딴 집에 가면 깨볶을 때 덮어놓고 볶았사 타고 그런디 이 집은 안 그려, 집에서 오는 길에 기름집을 세 군데나 그냥 지나치고 여기까지 일부러 왔어요." 이때 옆에서 묵묵히 기름을 짜고 계시던 사장님이 한마디 던지신다. "요즘 사람들은 대기업 기름 맛에 길들여져서 진짜 맛을 모르니까. 그게 그냥 좋은 걸로 아는데, 사실 이 맛을 한번 알면 평생 단골 되는 거지." 참기름 한 방울에 깨소금 쏟아지는 정이 오고 간다. 김진아 문화전문시민(익산문화재단 문화예술사업국장)

  • 주말
  • 이화정
  • 2012.07.13 23:02

시장 - 그곳에 가면 고향이 있다

선거철만 돌아오면 정치인들은 전통시장에 나타난다. 그리고 시장 국밥을 먹고, 길거리 떡볶이를 찍어 먹으며, 생선과 과일을 산다. 삶이 우울한 사람들에게 의사는 새벽 시장에 다녀오라는 처방을 내리기도 한다. 왜 전통시장일까. '아프리카 전통시장에서는 기린도 판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아쉽게도 아프리카에 가본 적이 없어 확인은 불가능하지만, '전통시장에는 없는 게 없다'는 애교 섞인 과장으로 미뤄 짐작해 본다.전통시장. 이 단어를 떠올릴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허전하고 죄스럽고 밀린 방학 숙제가 한아름 쌓인 답답함을 느낀다. 지난 봄부터 전주를 중심으로 전통시장을 살리기 위한 특단의 조치가 취해졌다. 기업형 슈퍼마켓, 대형마트의 주말 강제 휴무.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시행된지 몇 달이 흘렀지만, 사람들이 전통시장을 찾는 횟수가 눈에 띄게 늘었다는 속 시원한 통계는 아직 발표되지 않고 있다. 전통시장 상인들의 체감온도로 보면 그다지 효과는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사람사는 문화가 녹아드는 장(場) 5일마다 한 번씩 마을의 중심 혹은 시장의 중심에서 열리는 시장을 보통 우리나라의 전통시장이라 한다. 시장 인근에 사는 농가들이 키운 병아리나 돼지·송아지 등 가축을 내다 팔기도 하고 배추·고추·무 등 채소류나 산나물 등을 직접 들고 나와서 팔기도 하는데 가난한 농가들에게는 꽤 쏠쏠한 보탬이 되었다. 장(場)은 이 동네 저 동네 사람들이 한 번씩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되면서 세상 소식을 듣는 유일한 소통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소비자들이 직접 생산자를 만나서 필요한 물건을 살 수 있기 때문에 대체로 5일장의 물건들은 가격도 저렴한 데다 믿을 수 있었다. 그날 하루 동안 자신의 물건을 홍보하기 위한 각종 호객행위가 볼만한 구경거리이기도 하다. 자연히 오랜 세월을 통해 그 지역의 특색 있는 상품이나 놀이가 발달해 자리를 잡게 되는데, 그 고장의 문화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장(場)은 사람 사는 문화가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곳이다.△ 대형마트에 밀리는 전통시장최근 7년 사이 전국의 전통시장 178곳이 사라졌다. 중소기업청과 시장경영진흥원 등 집계를 보면, 전통시장은 2003년 1695곳에서 2010년 1517곳으로 감소했고, 전통시장의 점포 수도 2005년 23만9200개에서 2010년 20만1358개로 5년 사이 3만7000개 이상 줄었다. 우리 지역이라고 해도 상황이 다르지 않다. 도내 전통시장은 총 73개로, 상설시장 32개, 상설시장·5일장 8개, 5일장 33개로 점포수는 총 6619개이다. 전주와 군산, 익산 등 시단위 상설시장은 그나마 상황이 나은 편이지만, 군단위 5일장(정기시장) 중 상당수는 전통시장으로서의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대형마트와 기업형 슈퍼마켓의 공세에 밀리면서 남아있는 전통시장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다. 도내 몇 군데 전통시장의 역사를 보면, 조선시대 남문밖 시장이 오늘까지 이어져 남부시장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일본 상인들이 진출하면서 동·북·서문밖 시장이 쇠퇴하고 1923년 전주남문시장으로 통합되면서 해방 이후에도 전북의 상업 금융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1977년 (사)남부시장 번영회가 점포들을 사들여 남부시장이 전성기를 구가하면서 전국의 생산 및 유통정보가 이곳에 총집결했다고 과언이 아닐 정도. 덕분에 신선한 농수산물은 남부시장, 전주에선 두번 째로 큰 규모를 자랑했던 중앙시장은 값싸고 질 좋은 의류 등을 파는 곳으로 분류됐다. 익산시 남중동 북부시장은 경기도 성남 모란시장에 이어 전국 두 번째로 큰 5일장이다. 장날이면 5배 크기로 상설시장이 선다. 인근 군산, 논산 상인들은 물론 전남 구례, 곡성과 충남 서천, 서산 등지에서 1000여 명의 상인이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룬다.97년 역사를 자랑하는 군산 공설시장은 2002년부터 합선으로 인한 화재 등이 잇따르면서 기존의 건물을 허물고 국내 최초 '마트형' 전통시장으로 새 단장해 지난 3월 개장했다. △ 젊은 장사꾼 시장속으로… 전통시장 눈물 겨운 노력'범이네 식충이(식충식물화원'), '그녀들의 수작(핸드메이드 소품 체험공방'), '같이 놀다 가계(키덜트 놀이문화 술집)', '뽕의 도리(뽕잎 수제버거)', '미스터리 상회(재활용 업싸이클링 공방'), '송옥여관(디자이너들이 운영하는 잡화점)'. 간판이 톡톡 튄다. 젊은 사람들이 사장이다. 참으로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최근 17명의 '청년 사장'들이 전주 남부시장에 모여 장사를 시작했다. '문전성시 청년장사꾼 만들기'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남부시장 2층에 각자의 개성과 철학을 담은 상점을 열었다. '전통시장의 부활' 프로젝트답게 버려진 가구, 목재, 돌 등 재활용품을 이용해 새로운 공간을 창출해 내는 톡톡 튀는 아이디어를 내놓고 있다. 또한 다양한 재주를 가진 청년 사장들이 공동으로 기획하는 음악, 설치미술 등 각종 문화행사가 열리기도 한다.'마트형' 전통시장인 군산 공설시장은 지상 3층 건물은 층마다 자동보행로(무빙워크)로 연결되어 있고, 3층에는 여성들이 자주 드나드는 문화센터가 들어섰다. 옥상에는 주차장이 마련됐다. 1층에는 대형마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방앗간, 영양원 등을 비치해 시장의 향수를 자아내고 있다.이같은 시도는 시장을 단순한 소비 장소가 아닌 전통문화를 느끼는 체험공간으로 재탄생시키는 사업이라는 점에서 호평을 받고 있다. 특히 젊은 상인들이 '전통과 현대를 잇자'는 철학을 가지고 주변 상인들과도 소통하기 위해 노력도 아끼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 사람(人), 정(情)이 있는 그 곳 전통시장 살리기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경쟁 유통업계와 차별화되는 소프트웨어 개선 등 근본적이고 체계적인 처방책이 마련되고, 상인들도 근시안적인 당장의 지원책에만 매달릴 것이 아니라 시장을 되살릴 수 있는 지속 가능한 대책 마련에 지혜를 모아야 하지만, 이미 시장을 떠나버린 이들의 마음을 되돌리는 것은 변심한 애인 마음 돌리기보다 더 어려울 것이다. 과연 경제적인 분석과 마케팅 전략으로 전통시장이 대형마트보다 경쟁력을 갖출 수 있을까. 답은 '아니다'이다. 우리네 장(場)이 사람(人), 정(情) 이 두 단어로 귀결되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한다. 왜 우리는 힘을 얻고 싶을 때, 어려울 때 시장을 떠올리고, 정이 그리울 때 그곳을 찾는지 말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 냄새 그리운 그 곳이 아직 우리 곁에 숨 쉬고 있다는 걸 잊지 말아달라는 것이다. 우리 가족의 입맛을 기억해 주고, 나의 소비 패턴을 눈여겨 볼 줄 아는 눈썰미 좋은 시장 아주머니들이 시장에 계시다는 사실을 말이다.

  • 주말
  • 이화정
  • 2012.07.13 23:02

완주·진안 얼음골마을 - 장수굴·풍혈냉천·…자연의 신비·전설을 품다

지금은 잊힌 '전설의 고향', 완주 구이면 치마산. 전주에서 27번 옛길을 따라가다 구이 저수지 끝머리에서 왼쪽을 바라보면 망산마을 뒤로 우뚝 솟구친 산이 있다. 치마산(馳馬山)이다. 마치 장군이 말을 타고 후백제의 도읍지 전주를 향해 질주하는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하지만 매스컴을 타지 않아 '아는 사람만 아는' 은근하고 조용한 산이다. 이 산에 한여름의 무더위를 식혀주고 일상의 짜증을 가셔줄 '비밀병기'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찾아갔다.마산(607m)은 아이를 등에 업은 어미 모습의 모악산(793m)을 건너다보고 있다. 산의 무릎께는 용광사라는 작은 절집이 있는데, 이 절집의 이영재씨가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를 알려왔던 것. 그는 이 자리에 절집을 처음 앉힌 도일 스님의 아들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첫눈에 용광사는 허름한 대웅전과 요사채, 종탑과 약사여래상 등으로 겨우 절집 모양을 갖춘, 퇴락한 암자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절집에 들어서면 낯설면서도 낯익은 광경을 목격하고 놀란다. 진안 마이산 탑사를 빼닮은 우람한 돌탑들이 대웅전을 호위하고 있어서다. 아니나 다를까. 도일 스님은 마이산 탑사를 세운 이갑룡 선생의 큰 손자다. 절집 마당에는 음양수라 일컫는 약수가 커다란 돌확 가득 찰랑거린다. 한때 500여 명의 신도와 인근 사하촌인 두암과 망산, 항가리 마을 사람들에게 피부병과 당뇨병 같은 질병을 예방하거나 낫게 해준, 말 그대로 '약수'(藥水)다. 차고 단 물은 산허리 얼음골에서 흘러내려온다. 절집을 왼쪽에 끼고 5~6분 올라가면 얼음골이다. 냉골로도 불리는 이 골짜기에 들어서면 단박에 선뜩한 기운이 느껴진다. 커다란 넓적바위들이 얼기설기 쌓여 숭숭 구멍을 만들어놓았는데, 구멍마다 오소소 한기든 바람이 새어나온다. 이것 참 신기하다. 여기 사람들은 이곳을 '베틀굴' 혹은 '삼신굴'로 부른다. 이야기가 없을 수 없다. 선녀들이 내려와 베틀에 앉아 천의무봉의 옷감을 짜고, 삼신 할미는 굴속에 들어앉아 마을 여인들에게 자식을 점지해 주었던 곳이다. 선녀와 삼신할미의 마음에 얼마나 쏙 들었길래 그런 전설이 전해진 것일까. 아닌 게 아니라 굴 앞에 앉아 있으면 마냥 머물고 싶어지고, 어느덧 생각과 마음이 가지런해지고 온몸은 소슬해진다. 여기서 다시 5~6분 산길을 올라가면 지혜롭게 생긴 장수바위 이마가 불쑥 나타난다. 장수바위는 사방 20여 m에 높이 15m 되는, 하나의 거대한 바위다. 치마산의 주인공답게 늠름한 자태로 저 먼 곳을 내다보고 있다. 장수바위 둘레에는 흥미롭고도 슬픈 내력이 깃들어 있고 아름답고도 기이한 형상들이 둘러싸고 있어서, 눈에 담아두고 가슴에 새길 만한 볼거리와 느낄거리가 빼곡하다. 장수바위 앞쪽 펀펀한 곳은 무성한 칡넝쿨과 웃자란 잡초들이 점령하고 있지만, 1300여 년 전에는 장수바위를 배경으로 장수사가 서 있던 절터다. 장수바위 가슴을 장식한 마애석불이 그 무렵 혜안국사에 의해 새겨진 것으로 전해져와 그리 짐작한다. 마애석불은 보려고 애써야만 간신히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두 눈을 질끈 감고 입을 꾹 다문 얼굴로 연꽃 위에 가부좌한 모습이 흐릿한 기억처럼 남아 있다. 세월에 풍화되고 한국전쟁 때 총탄세례를 맞고 사람들의 몹쓸 손길에 훼손된 탓이다. 장수바위 아래쪽에는 장수굴이 있어서 여름에 찬바람이 불고 겨울에는 더운 김이 솟아나온다. 굴 안에는 온천 같은 샘이 있는데, 그 옛날 장수사 절집에서 이 물로 절집 살림을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예전에 담이 큰 마을청년들은 새끼줄을 허리에 매고 4m를 곧추 내려가 미로처럼 생긴 굴속을 탐험하며 여름날을 보내기도 했다는데, 마을어른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따르면 굴 입구에서 불을 피우면 진안 마이산 쪽에서 연기가 나온다고 전한다. 하지만 한국전쟁 때 빨치산을 소탕하면서 굴 대부분이 파괴되고 지금은 굴 입구도 돌로 메워져 있다. 장수바위 뒤쪽으로 돌아가면 할아버지와 두꺼비 형상, 쌓다만 돌탑, 고인돌 같은 넓적바위 등이 저마다의 이야기를 들려줄 듯 발걸음을 붙잡는다. 밧줄을 타고 15m의 장수바위 위로 올라가면 기이하고도 멋드러진 천년송들이 흙도 없는 바위를 움켜쥐고 늙어간다. 한그루는 용트림 무늬가 선명하고 그 음전한 형태가 여자의 그것처럼 뚜렷하다. 바위 절벽에 가까스로 붙어 이리저리 가지를 내뻗은 소나무는 신선이 앉아 있던 자취가 선명하다. 낭떠러지 끝에 방석처럼 튀어나온 자리는 도일 스님을 비롯해 수많은 수행자들이 명상에 잠겼던 곳이다. 온통 자연의 신비와 비밀스런 전설이 깃들어 있다. 이곳이 왜 '전설의 고향'으로 회자되었는지 알 만하다. 둘러본 대로 치마산은 이를테면 거대한 바위들로 이루어진 굴 위에 떠 있는 덕산인 셈인데, 신령한 산기운을 단박에 알아본 옛사람들이 산의 지형을 말이 달려 나가는 형상으로 정확하게 짚어낸 것은 생각할수록 놀랍다. 어쨌든 감탄만 할 게 아니라, 지금은 지리학자와 고고학자, 인류학자들이 달려들어 산의 신비를 과학적으로 밝혀내고, 흩어지고 스러진 유적과 이야기들이 더 흐려지기 전에 본래의 모습을 찾아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을 미뤄서는 안 될 때다.치마산을 내려오면서 문득 깨달은 생각 하나는, 사람들의 유별난 모악산 사랑에 가려 지척에 있으면서도 치마산을 오래도록 방치했고 그것이 치마산의 행복이자 불행이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고즈넉한 치마산의 매력이 까발려지면 사람들 발길로 북적이고 그럴수록 더욱 훼손되는 건 아닐까, 지레 걱정스럽다.△ 천연 냉풍이 쌩쌩, 냉수가 콸콸콸, 진안 풍혈냉천 치마산의 베틀골 같은 지형을 '풍혈'이라 한다. 산등성이나 산기슭에 있는 풍혈은 여름엔 냉풍이, 겨울에는 온풍이 나오는 구멍이나 바위틈을 이르며, 바람의 길인 땅속 굴을 통해 구멍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한여름에도 얼음을 볼 수 있을 정도로 냉풍이 불면 '풍혈'이라고 하지 않고 '얼음골'이라고 부른다. 이런 희귀한 지형 아래 흐르는 물은 매우 차가워 '냉천'이라 하며 광물질이 많아 '명수'(맛있는 물)로 꼽는다. 그 첫손에 꼽히는 곳이 진안 양화마을의 풍혈냉천이다. 안 가볼 수 없다. 진안 대두산의 냉천은 조선시대 명의 허준이 약 달이던 물로 소문나면서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탄 여름철 명소다. 또 위장병과 피부병, 무좀과 땀띠에 효험이 있다고 알려져 늘 사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평일이고 이른 아침이어선지 관광객은 눈에 띄지 않으나, 소문대로 냉천은 30도가 넘는 무더위 속에서도 섭씨 3도의 차가운 물을 콸콸 쏟아내고, 언덕 바위틈 풍혈에서는 안개처럼 서늘한 냉기가 뿜어 나와 풀잎마다 이슬이 맺히고 바위마다 푸른 이끼가 끼어 있다. 찬바람이 가장 많이 불어 나오는 산 아랫도리를 빙 에둘러 돌과 시멘트로 담을 쌓아 만든 공간도 있는데, 동굴처럼 어둑한 그곳은 습습한 한기로 으스스하다. 온도계를 보니 섭씨 4도를 가리키고 벽에서는 연신 냉풍이 불어 나온다. 한구석에는 몇 달 전 갈무리한 싱싱한 배추가 쌓여 있고 지난해 김장김치가 담긴 통들이 늘어서 있다. 냉장창고로 이용하면서 닭도리탕과 민물매운탕 등을 파는 식당을 겸하고 있다. 자연은 한여름 불볕더위를 내려 우리를 고달프게 하기도 하지만 그것을 이겨낼 서늘한 풍혈냉천을 함께 선사하여 우리를 감탄시키고 살아갈 힘을 얻게 만든다./김정겸 문화전문시민(프리랜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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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7.06 23:02

여름철 전주지역 시원한 명소 - 남천교 누각 싸전다리 밑 상쾌한 바람~

지난달 21일에는 사상 처음으로 전력비상훈련이 있었다. 연일 30도를 웃도는 무더위에 냉방기기 사용량이 늘면서 정전사태가 일어날 것을 대비한 훈련이었다. 단 20분간의 정전으로 5백만kw의 전력을 아낄 수 있었다고 한다. 이제 에어컨과 선풍기 없이 여름을 보낼 수 있는 훈련이 새삼 필요해진 것이다. 올여름은 그 어느 해보다 긴 가뭄과 무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두 달 남짓 남은 올 여름나기는 심각하다. 여름날 시원한 공간으로 사랑을 받는 곳을 찾아보았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다리 밑.△ 싸전다리 밑에서 펼쳐지는 노년의 여름날 전주천 다리 가운데 전주교로 불리는 싸전다리가 역사로 보나 역할로 보나 첫손에 꼽힌다. 남문시장과 풍남문이 가깝고 시내 중심을 관통하는 탓에 자연 차량이 많고 사람들이 꼬이는 다리다. 사실 멋없이 크기만 한 이 다리는 1922년에 시멘트로 만들어져 전주천에 가로 누운 이래로 우릉우릉 소리를 울리며 짙은 그늘을 드리워 더할 나위 없이 시원하다. 싸전다리 밑은 주로 나이 지긋한 노인들로 북적인다. 여름이면 서늘한 그늘에서 화투로 소일하기도 하고 개울에서 다슬기도 잡기도 하며 인생의 황혼을 보낸다. 좀 구질스럽고 퀴퀴해 보이지만, 이만한 놀이터가 또 있을까 싶을 만큼 그들에게는 정들고 기분을 달뜨게 만드는 공간이다. 최근 전주시가 고향의 강 살리기 사업을 발표하고 안전과 홍수 피해를 이유로 낡은 쌍다리를 현대식 교량으로 교체하기로 결정하고 철거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어은동의 주민들이 쌍다리에 얽힌 추억을 담은 사연들을 다리난간에 내걸었다. 한결같이 여름철 더위를 피하는 피서지이자 먼 길을 돌아가야 하는 수고를 덜어주었던 다리를 지키고 싶어했다. 이처럼 싸전다리와 쌍다리를 비롯해 전주천에 놓인 수많은 다리들을 주민들에게 안전하고 쾌적한 쉼터로 재발견하여 돌려주는 일도 현대식 교량을 세우는 일만큼이나 중요해 보인다. △ 전주천의 명품 여름공간, 남천교 청연루예전에는 안경다리 혹은 무지개다리로 불렸던 남천교는 3년 전 옛 지도에 그려진 원래의 모습을 본떠 놓여졌다. 화강암으로 으리으리하게 쌓아올린 홍교 위에는 18칸 짜리 청연루가 위풍당당하게 앉았는데, 이렇듯 크고 근사한 한옥누각이 다리 위에 올라앉은 것은 청연루가 유일하다고 한다. 전통양식으로 공들여 지어진 청연루에 올라가면 동쪽으로 탁 트인 시야에 승암산이 뛰어든다. 그 산에서 내려오는 산바람과 한벽루 절벽을 지나 흘러오는 전주천의 강바람이 누각 안으로 시원하게 불어든다. 한옥마을을 돌아 나온 관광객들이 삼삼오오 모여앉아 노곤한 다리를 뻗고 쉬거나 마을사람들이 마실 겸 나와 정담을 나누며 여름날을 보낸다. 먼 곳에서 놀러온 손님들과 마을사람들이 어우러져 한여름 백일몽의 추억을 만들어간다. 남천교 다리 밑 그늘도 그냥 묵히기 아까운 곳이다. 평상처럼 앉아 쉴 수 있는 널찍한 공간이 마련돼 있다. 개를 앞세우고 전주천변을 걷다가 쉬거나 무람없이 누워 오수를 청하는 사람들의 사랑방 노릇을 한다. 이렇듯 남천교는 전주천의 여느 다리들이 본받아 좋을 만큼 다리 밑에서 또 다리 위에서 여름의 무더위를 쫓아내는 여름공간으로 사랑받는다. 김정겸 문화전문시민(프리랜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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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북일보
  • 2012.07.06 23:02

"헤이! 비보이, 전통가락에 맞춰 춤을 춰봐"

누군가는 전주를 보며 '화이부동(和而不同)'의 도시라고 했다. '화이부동', 남과 사이좋게 지내기는 하나 무턱대고 어울리지는 않는다는 뜻으로, 서로 다른 성질의 것이 함께 있지만 자신의 성격을 잃지 않고 조화롭게 어울린다는 뜻이다. 쉽게 서로 다른 재료가 섞여 있음에도 재료 본연의 맛을 간직해 새로운 식감을 만들어낸 전주의 대표 음식 비빔밥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흔히 '화이부동'을 '비빔밥 정신'이라고도 한다. 전주시는 지난 2008년 1월, 그 해의 시정 목표로 화이부동을 선정하기도 했다. 전주와 비빔밥, 그리고 화이부동. 전주의 '비빔밥 정신'은 생각보다 곳곳에 퍼져 있다. 서로 다른 문화의 상징이지만, 마주보고 있는 경기전과 전동성당, 한옥 속에 자리한 모던한 카페 등 전주의 화이부동을 설명할 수 있는 문화는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그 중 전통과 현대가 제대로 어우러진 콘텐츠는 비보이(B-Boy)다.△ '라스트 포 원'으로 시작된 전주의 비보잉40세 이상의 중장년층은 전주를 떠올릴 때 가장 먼저 '판소리'와 '예향', '전통문화'를 떠올리겠지만 30대 이하의 청년층은 조금 다르다. 그들이 생각하는 전주는 전통의 도시이기도 하지만, 세계적인 비보이들을 배출하고 있는 역동적인 도시다. 지난 2005년 한국 비보이팀들이 '배틀 오브 더 이어' '비보이 챔피언십' 등 세계적인 비보이 댄스 대회를 석권하며 불기 시작한 '비보이 한류', 그 진원지의 중심에 바로 전주 출신 멤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전주가 '비보이의 도시'가 된 것은 조금 뜬금없는 면이 있다. 2005년 세계적인 비보이대회 '배틀 오브 더 이어'에서 전주 출신 비보이팀 '라스트포원'(Last for One)이 우승을 차지하면서 갑작스레 주목받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 대회에서 우승하기 전까지만 해도 연습 환경이나 분위기는 썩 좋지 못했다. 우승 당시 라스트포원은 "배울 수 있는 시설이나 강사가 없어서 외국 사이트를 뒤지고 비디오를 보면서 연습했다"고 말했다. "초창기엔 서울을 왕래하면서 일일이 연습용 비디오를 복사해서 익혔다"고도 말했다. 비보이 초반만 해도 전주를 비롯한 모든 지방이 열악하고 척박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당시 상황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지방팀이 한국 대표로 발탁되고, 세계대회를 거머쥔 것은 처음이에요. 우리나라 비보이팀의 95%는 서울에 몰려 있거든요. 아니, 한 98%쯤 될 거예요. 저희는 경비가 없어서 큰 대회나 행사에 출전하지 못할 뻔한 적도 있어요."연습실도 마땅치 않았던 당시 전주 YWCA 청소년 문화의 집에서 제공한 연습실이 가장 큰 힘이 됐다. 처음 그들이 우승할 때까지만 해도 유일하게 축하 현수막을 내건 곳 또한 이곳이 유일했다.△ '댄스 한류'로 시작된 전주, '비보이 도시'로 변화하다 초기엔 열악했지만, '라스트 포 원' 이후 전주시는 빠르게 변하기 시작했다. 충분히 세계를 재패할 수 있는 실력의 비보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안 전주시가 '제2의 라스트포원 키우기'에 나선 것. 그들은 먼저 비보이들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공간 만들기에 주력했다. 전주 오거리 문화광장에 '라스트 포 원' 멤버 12명의 핸드프린팅을 새겨넣고, 작은 공연장도 만들었다. 실력있는 비보이들을 꾸준히 배출하기 위해 매년 여름 전국적인 비보이 대회인 '비보이그랑프리'도 개최하고 있다. 처음 '라스트 포 원'을 길러냈던 전주 청소년 문화의 집은 이제 '비보이 육성의 메카'가 됐다. 비보이들이 자유롭게 활동하고 연습할 수 있도록 지하 60여㎡ 넓이의 연습실과 3층에 220㎡ 규모의 공간이 마련된 이곳에는 평일이면 하루 평균 20~30명, 주말에는 70~100명 가량의 비보이들이 모여들만큼 인기를 끌고 있다. △ 힙합에서 우리 가락으로 '메이드 인 전주' 비보이 진화 국제대회 우승으로 주목받은 비보이들이 시의 전폭적인 지원까지 더해지니 비보이도 진화하기 시작했다. 단지 힙합에 춤을 추는 비보이가 아닌, 전주만의 특색을 가진 새로운 형태의 비보이가 됐다. 그들이 선택한 것은 전주의 대표 문화라 할 수 있는 우리의 전통음악. 전주 비보이의 1세대라 할 수 있는 '라스트포원'을 중심으로 국악과 비보이를 접목시키는 노력이 시작됐고, 그 결과는 전주 비보이들만의 퓨전 국악 퍼포먼스로 이어졌다. 지금은 흔히 볼 수 있는 퓨전 국악이지만, 2007년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퍼포먼스였다.지난 2005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던 '라스트포원' 등장 이후 전주는 비보이의 도시가 됐다. 전주국제영화제나 전주세계소리축제가 열릴 때면 곳곳에서 비보이 공연을 만날 수 있고, 전북의 축제에서도 빠지지 않는 단골 공연이 됐다. 사람들은 매주 전주 오거리 문화광장에서 전주를 빛낸 비보이들의 핸드 프린팅을 보고, 그들처럼 되고 싶다는 청소년들은 이제 그곳에서 비보이 공연을 한다. '라스트 포 원'이후 아직 세계가 주목할 만한 팀은 없지만, 전주는 조바심내지 않는다. 그저 천천히 비보이를 도시의 대표 문화로 키워나가는 중이다. 지금도 비보이를 꿈꾸며 전주 곳곳에서 땀방울을 흘릴 많은 친구들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 전통 가락에 춤추는 비보이를 만날 수 있는 도시, 국악과 힙합이 한데 어우러진 화이부동의 도시. 그곳이 바로 '화이부동' 전주다. /성재민 문화전문시민기자(선샤인뉴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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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6.29 23:02

"딴따라의 괴상한 춤 아니라 부가가치 높은 문화 콘텐츠"

전주에서 시작된 비보이 문화. 전북을 넘어 전국으로, 세계로 퍼져나가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할까. 가장 좋은 방법은 많은 사람들이 함께 즐기고 느끼는 것이다. '자녀를 이해하기 위해선 자녀들이 좋아하는 것을 함께 해보라'는 말처럼, 어떤 문화를 이해하려면 그 문화를 직접 겪어보고, 체험해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 비보이가 '전라북도 특산품' 되려면지난 1990년대부터 미국에서 우리나라로 건너온 비보이 문화. 전주에선 비보이들이 거둔 눈부신 성과 덕분에 평가가 비교적 좋은 편이지만, 여전히 중장년층은 비보이를 잘 모르고 '딴따라'라고 무시하는 경우도 있다. 아무리 '비보이의 도시'인 전주라고 하지만, 그건 대부분 30대 이하 청년층이다. 40대 이상 중장년층에서는 아직 전주, 전북이 '비보이' 보다는 '전통문화'의 도시로 비춰진다. 비보이를 '전라북도 특산품'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좀 더 깊은 고민과 노력이 요구된다. 첫째, 비보이를 '딴따라'라는 색안경을 벗고 바라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비보이도 하나의 당당한 문화다. 엔터테인먼트는 최고의 고부가가치 산업이다. 일부 무시하는 시각과 달리 비보이는 충분히 경쟁력을 갖춘 문화산업이 될 수 있다. 둘째, 시대의 변화를 인정해야 한다. 과거에는 엔터테이너가 '딴따라'라고 불리며 경시됐지만, 지금은 10대 청소년들이 가장 되고 싶어 하는 직업 1위가 엔터테이너다. 시간이 그만큼 변했다. 시대의 변화를 인정하면 비보이도 하나의 당당한 문화로 보인다. '비보이'가 전주를 대표하는 문화가 되려면 성별세대를 초월하는 이해와 관심이 있어야 한다. 여러 세대들이 직접 비보이 문화를 느낄 수 있는 행사나 이벤트의 개최가 절실하다. △ 소울스트릿, 비보이 문화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축제비보이 문화를 직접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행사가 다시 열린다. 바로 익산시가 주최하는 '소울스트릿 2(SouL Street Volume. 2)'가 그것이다. 30일과 7월 1일 이틀간 익산솜리문화회관 대공연장에서 열리는 이번 행사는 비보이를 비롯해 튕기는 듯한 안무가 특징인 팝핀댄스, 창작댄스 등 거리춤을 소재로 한 팀들이 참여해 열린다. '팝핀'은 브레이크 댄스의 한 장르로 근육의 수축과 이완을 통해 몸에 힘을 전달함으로써 몸이 끊기거나 멈추는 느낌을 보여주는 기술을 뜻한다. 익산시가 주최하고 한국공연문화예술연구소가 주관하는 이번 행사는 지난해 구절초 축제 일환으로 열렸다가 올해는 전국의 춤꾼 160여 개 팀이 출전해 실력을 겨루는 전국 수준의 대회로 치러진다. 본래는 경연이 기본이지만, 경연 곳곳에 심사위원들이 직접 나서는 신나는 무대도 준비 돼 있다. 심사위원에는 전주, 전북을 대표하는 비보이 '라스트포원'의 멤버들을 비롯해 '팝핀' 등 비보이 부문에서 Poppin J. Hozin, Style M, Leety, James, Soul 찬, K 등이 참여한다. 성재민 문화전문시민(선샤인뉴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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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북일보
  • 2012.06.29 23:02

中, '동북공정' 가속…'단오' 마저 왜곡하다

낼 모레면 단오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4대 명절이라고 했다는데 지금으로서는 그 말이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많이 쇠락했거나 잊혀져가고 있는 게 분명하다. 단오 문화가 시들해진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그 중에서 이앙법 보급과 같은 농경방식의 변화로 인해 단오를 즐길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어졌다는 것이 보편적이다. 즉 과거에는 보리를 수확한 뒤 약간의 시간적 여유를 두고 모내기를 하기 때문에 단오를 즐길 수 있었지만, 이앙법이 도입되어 모내기가 보급된 조선후기 이후에는 농사일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이라 점차 단오 풍속이 쇠퇴하였다는 것이다. 그나마 전주는 과거부터 덕진연못을 중심으로 전해오던 단오풍속이 끊기지 않고 전승되고 있어서 다행이다. 근자에는 민가에서 행하던 단오풍속이 단절된 대신 지자체나 관련단체에서 이를 계승, 재현하려는 노력을 보이고 있다. 전주 덕진공원에서는 이날 덕진물맞이, 단오기원제, 단오부채만들기 등 다양한 행사가 마련된 단오축제를 벌인다.농경사회에서 단오는 밭에 뿌린 씨앗이 성장을 시작하거나, 모내기를 마치고 한숨 돌릴 수 있는 즈음이다. 그리고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는 시절이다. 속담인지 노랫말인지 "동지때 부채 팔아 마누라를 샀는데 오월 단오 다시 오니 부채 생각 간절하네."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단오는 그런 시절이라 모내기를 마친 고단한 몸으로 가까운 물가에 가서 물맞이를 하며 피로회복을 하거나, 약초를 뜯어 원기회복을 도모한다. 더위를 함께 나기 위해 부채를 만들어 선물하는 풍속도 유래가 깊다.요즘은 영토전쟁과 다름없이 문화전쟁도 치열하다. 총성만 없을 뿐이다. 우리는 특히 수천 년을 이웃해 살고 있는 중국과 심한 마찰을 빚고 있다. 중국이 이른바 '동북공정' 프로젝트로 공격적 역사만들기를 수행하면서 문화전쟁 총성이 시작되었고, 2005년에는 한국이 '강릉단오제'를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시킴으로써 역공에 성공하였다. 이때 중국은 단오의 원조를 자처하며 격심하게 항의하였다. 공교롭게도 이 사건 이후로 유네스코 지정제도가 바뀔 정도였다. 즉 이전에는 격년제로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국가별 무형유산 등재를 신청 받아 지정해 왔지만, 2006년부터는 각국의 무형문화유산을 한데 모아 일종의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는 대표목록(R epresentative List) 제도로 바꾸어 버렸다. 다시 말하면 어느 나라든 자국의 문화재로 지정만 되어 있으면 무제한으로 신청할 수 있는데, 이때 심사는 자국이 하고 유네스코는 승인만 하는 제도가 된 것이다. 그러자 다시 중국이 재역공을 시작하였다. 2006년부터 중국은 '문화적 동북공정'을 노골적으로 강행하기 시작했는데, 중국 조선족의 농악, 널뛰기, 그네타기, 장구춤, 전통혼례 등을 자국의 무형문화유산으로 등록시켜버렸다. 이는 다분히 바뀐 세계문화유산 제도를 틈타 자국의 문화유산으로 먼저 등록함으로써 자격을 갖춘 후에, 곧바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받으려는 전략의 일환이다. 결국 중국은 2009년에 '농악'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중국의 문화유산으로 등재하는 데 성공하였고, 급기야 작년에는 '아리랑(阿里郞)'을 중국의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하고 말았다. 한국이 방심하였거나 뒷짐지고 있는 사이에 중국은 '어우동' 복장으로 '장구춤'을 추는, 한국의 전통문화를 해괴망측하게 왜곡하여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소유하게 된 것이다. 단오는 중국에서 유래한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강릉단오제는 한국의 단오 풍속이다. 중국의 단오와 아무 상관이 없다. 이것에 대해서 중국이 원조타령을 하는 것은 마치 재즈음악이 아프리카계 흑인음악이기 때문에서 미국음악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문화는 그런 것이다. 북한에서 단기간 배워 흘러들어간 개량된 조선족의 문화를 자국의 문화로 주장한다고 해서 그 나라의 전통문화가 되는 것도 아니고, 비록 전래된 문화라고 해도 오랜 세월동안 자국의 토양아래 퇴적된 문화는 더 이상 전래문화가 아닌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이다. 중국 단오절은 여러 유래를 가지고 있다. 그 중에서 널리 알려진 단오의 유래는 전국시대 초나라의 충신으로 유명했던 굴원(屈原)에 대한 고사에 기원을 둔 설이다. 그 내용은 이렇다.초나라에 굴원이 생존하던 전국시기에는 제, 초, 연, 한, 조, 위, 진나라 등 일곱 나라가 있었으며, 그 중 진나라가 가장 강하여 항상 다른 여섯 나라를 침략하곤 했다. 굴원은 초나라의 대부로 국가의 위기를 보고 여러 차례 왕에게 내정과 외교를 개혁하고, 다른 나라들과 연합하여 진나라에 대항해야 한다고 충언하였다. 그러나 굴원의 주장은 반대파에 의해 번번이 묵살되었으며, 급기야 초나라 왕은 반대파들의 말만 듣고 그의 관직을 박탈하고 도성에서 내쫓기까지 하였다. 후에 진나라가 초나라의 도성을 함락시키자 굴원은 자신의 희망이 모두 물거품이 되었음을 깨닫고 비통한 마음으로 멱라강에 몸을 던져 죽었다. 이것이 기원전 278년 5월 5일이었다. 굴원이 죽을 때 큰 돌을 안고 멱라수에 몸을 던졌으므로, 그 지방 촌민들이 충신 굴원의 시신을 물고기가 뜯을까봐 '종자'(찹쌀에 대추 등을 넣어 댓잎이나 갈잎에 싸서 쪄 먹는 단오 음식)를 던지며 급히 노를 저어서 다투어 그의 시신을 건졌다고 한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이날이 되면 종자를 만들어 먹으며, 용 모양으로 장식한 배로 경주하는 놀이인 '용선경도'(龍船競渡)를 하는 풍속이 생기게 되었다. 중국의 용선경도는 충신 굴원의 원혼을 위로함으로써 재앙이 물러가고 행복이 돌아오리라는 기대심리와, 가뭄에 비가 내려 풍년과 무사태평을 기원하는 소망을 담고 있다. 이밖에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음양오행설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즉 1, 3, 5, 7, 9는 양에 속하는 수로, 이들 숫자들은 오묘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 중에서도 양월 양일이 겹치는 날, 즉 1월 1일, 3월 3일, 5월 5일 등은 양기가 최고조에 이르는 시기를 가리키며, 이는 곧 균형이 어긋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금기의 날을 말한다. 그 중에서도 5월 5일은 양기가 가장 왕성한 날이기 때문에 이날은 천지귀신에게 제사지내고, 풍년과 복을 기원하는 날로 정했다는 것이다.중국의 전통적인 단오풍속의 이면에는 5월을 악월(惡月)로 여기는 관념이 지배하고 있다. 즉 5월은 음기와 양기가 아주 치열하게 투쟁하는 달이기 때문에 자칫 삼가지 않으면 생명의 양기가 쇠약해지고, 죽음의 음기가 점차 강대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단오절에 악귀를 물리치기 위한 벽사의 풍속이 집중되어 있다. 창포나 쑥물 등에 목욕하는 것도 그렇고, 높은 곳에 오르는 등고(登高)를 하는 까닭도 그렇다. 양기가 쇠퇴하고 음기가 왕성해지므로 높은 곳에 올라가는 것은 음기를 피하기 위해서이다. 또 이날 창포의 뿌리로 술을 담그는 것도 나쁜 기운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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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북일보
  • 2012.06.22 23:02

"잡귀야 물렀거라" 쑥떡 먹고 모래찜질… 세시풍속 각양각색

우리나라에 유독 단오굿이 강하게 남아있는 지역들이 있다. 강원도 강릉단오제를 비롯한 동해안지역, 전남 영광 법성포, 경북 경산 자인, 경남 창녕 영산면 등이다. 이 지역은 고대 5월제와 같이 풍농, 풍어 의례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그 중에서 단연 압권은 강릉이다. 강릉단오제는 지역 수호신에게 지내는 제의의 연장선상에서 펼쳐지는 축제이다. 음력 4월 5일 제사에 필요한 술인 신주빚기를 시작으로 4월 15일의 대관령 산신제, 대관령 국사성황제, 봉안제를 거쳐 5월 3일 국사성황신과 국사여성황신을 강릉 남대천 가설굿당으로 모셔오기 위한 영신제를 지내고, 영신행렬 후에 단오제 본제를 지내게 된다. 5월 4일부터 7일까지 매일 아침에 조전제(朝奠祭)를 지내고, 동해안 세습무당들이 총출동하여 나흘동안 20여 굿거리가 넘는 단오굿을 연일 펼친다. 마치는 날 저녁에는 국사성황신과 국사여성황신을 송신하는 송신제를 지낸다. 그리고 본제가 열리는 기간에는 관노가면극, 씨름 등의 각종 연행과 세시놀이, 공연, 난장 등이 연일 펼쳐진다. 강릉단오제를 압도하는 것은 단오장으로 불리는 난장이다. 드넓은 남대천 단오장은 색색의 천막 아래 온갖 장사꾼들과 시민들로 왁자지껄해서 우리의 전통적인 축제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기록된 부족국가시대부터 주야로 남녀가 한데 어울려 음주가무했다는 전통은 바로 여기를 두고 한 말인 듯할 정도이다. 이제 우리지역 단오풍속을 보자. 부안군 모항마을에서는 단오날 쑥으로 쑥떡을 만들어 먹고, 쑥다발을 대문에 걸어 재앙을 방지하였다. 특히 단오날 오(午)시에 뜯는 쑥이 약효가 가장 좋다고 하여 이때 약쑥을 뜯는 풍속이 있다. 단군신화 이래로 쑥은 단순한 식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액을 물리치는 신성한 식물로 여기왔던 것 같다. 또 부녀자들이 뒷산에 올라 나무에 줄을 매고 줄타기를 하거나 그네뛰기도 하였다. 진안 백운면에서는 익모초를 베어 즙을 내어 마셨다. 단오 무렵이 익모초의 약효가 가장 좋은 때라고 한다. 부안군 계화면 원창마을에서는 약쑥을 캐다가 삶은 물로 머리를 감기도 하고, 말려서 떡을 해먹기도 하였다. 또 바닷가로 가서 모래찜질도 하였다. 순창군 구림면 금상마을에서는 단오날이면 두룽정이나 물통골로 물맞이를 갔다. 이날 물맞이를 하면 부스럼이 나지 않는다고 하여 그런 풍속을 지켰다. 또 아침에 상추잎에서 이슬을 받아 얼굴에 바르면 버짐이 없어지고 여름에 땀띠가 나지 않고 피부가 고와진다고 한다. 완주군 용진면 두억리에서는 창포를 삶은 물로 머리를 감거나 목욕을 했다. 이렇게 하면 창포에서 나는 독특한 냄새 때문에 바쁜 병이 범접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또 창포 뿌리를 깎아 비녀를 만들고 붉은 연지로 색칠을 하여 머리에 꽂았다. 이른바 창포잠이다. 이렇게 하면 나쁜 역귀를 쫓는다는 속신이 있었다. 이상고온이라며 연일 덥다. 게다가 전국이 쩍쩍 타들어가는 가뭄으로 농민들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번 단오제는 벽사보다 기우제로 돌려서 풍농을 더 기원해야 할 것 같다. 단오기우제로 단오 굿덕 좀 보기를 앙망축원하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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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6.22 23:02

얼쑤~ 부채에 신바람 싣고 한바탕 놀아보세

옛말에 "단오 선물은 부채요, 동지 선물은 책력이라"고 했다. 과거 조선시대 궁중에서는 단오 무렵에 왕이 신하에게 부채를 선물했다. 또 궁중에서 애호(艾虎쑥으로 호랑이 모양을 만든 것)를 신하에게 선물했다. 이 풍속은 중국에서 전래된 것으로 악을 물리치기 위한 벽사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와서 전주 단오를 대표하는 콘텐츠는 씨름, 창포물맞이, 부채로 요약된다. 전주시가 주최하고 풍남문화법인(이사장 선기현)이 주관하는 제54회 전주 단오(23~24일 전주 덕진공원 일대)는 단오의 정체성을 강화하면서 대동 축제 한마당으로 풀어내기 위해 부채를 전면에 세웠다. 가장 정성들여 준비한 행사는 단오 명인 부채 특별 기획전(20~24일 부채문화관덕진시민갤러리). 도내 무형문화재급 선자장명인들이 출품하는 부채는 실용성예술성을 겸비한 작품으로 선보인다. 단선 부문은 조충익 방화선, 합죽선 부문은 김동식 노덕원 문정자 박인권 박계호 박상기 엄재수 이신입 정금옥 차정수 한경치가 하나밖에 없는 부채를 내놓았다. 임금님 부채의 진상을 재현하기 위해 부채 명인은 내빈에게, 더위를 이겨내기 위해 내빈은 시민에게 부채를 전달하는 자리도 마련됐다. 지난해 인기를 모은 단오씨름대회(24일 오후 3시 민속놀이마당)는 올해도 관전 포인트. 국민생활체육전라북도씨름연합회가 진행하는 이번 대회는 남자부여자부3판 2승제로 나뉘어 치러진다. 이같은 여세를 몰아 내년부터 단오씨름대회는 전주 단오를 대표하는 전국대회로 탈바꿈할 계획이다. 더위를 피하기 위한 물맞이 행사에는 창포물에 머리 감기(23~24일 취향정)와 창포물놀이 이벤트(23~24일 수변무대)가 준비됐다. 전통 단오 음식인 수리취떡과 전통 음료인 제호탕도 즐길 수 있다.올해 푸른음악회 선정 공연인 미리암스 발레단의'Dream of dream way'(23일 오후 8시20분)와 단오 夜 콘서트(23일 오후 9시)에 초청된 퓨전단체'에스페란자'의 영화음악 공연은 한 여름밤의 잊지못할 추억을 선물한다.시민 동아리 한마당(23~24일 오전 10시 특설무대후문쌈지 뜨락민속놀이마당)에서는 40여개 단체 500여 명이 민요, 통기타, 풍물 등을 특설무대와 후문쌈지 뜨락, 민속놀이마당에서 선보인다. 시민들이 운영하는 알뜰한 벼룩시장과 아이들의 단오 놀이터, 노인복지시설 65세 이상 어르신들이 참여하는 어르신 윷놀이 대회도 볼거리를 더한다.부대 행사로 전통 풍습을 계승하기 위한 손목에 오색실 묶기, 단오 부적 찍기 등이 진행되며, 가족 단위 관람객들을 위한 상담한지 공예 체험 등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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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6.22 23:02

'콩쥐팥쥐'의 발원지…한국의 신데렐라, 완주 앵곡·구암마을 곳곳에 숨쉬다

부처님 오신 날 즈음이다. 다문화가정 초청 공연으로 한참 분주하신 스님이자 아동작가인 소야 신천희 씨의 초대로 김제 금구면 무주암에 들렀다. 스님은 올해 새한국인(이주여성) 세 분에게 처가에 갈 항공티켓을 보시했다 한다. 선행을 한다기보다는 이 무주암 인근이 한국의 대표적 권선징악형 한글고전인 '콩쥐팥쥐'의 발원지인 만큼 멀리 타지에서 이주해온 처자들을 위한 행사가 하나쯤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이 아니냐는 취지에서 실천한 것이라 한다. '콩쥐팥쥐'의 발원지라. 스님에게 '왜 이 곳이 콩쥐팥쥐전의 발원지인가?'하고 물음을 던지니 소설 속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지명이 지금의 김제시 금구면 일대에 지명과 매우 유사하다고 한다. 고지도 자료 분석과 등장인물 분석, 소설 속 지명 분석 등을 통해 현재 '콩쥐팥쥐' 배경으로 가장 유력한 마을은 완주군 이서면에 위치한 앵곡마을로 연구된 사례와 이를 통해 김제시와 완주군의 사이에 콩쥐팥쥐 설화의 발원지를 두고 갈등했던 에피소드 등 그간의 사연을 들으니 콩쥐팥쥐의 배경마을이 되는 김제시 일원을 답사 겸 취재를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콩쥐팥쥐'의 발원지는 '조선 이조 중엽 시절에 전라도 전주 서문 밖 30리 쯤 되는 곳에 한 퇴리가 있으니, 성명은 최만춘이라 하였다.' 소야 스님의 이야기를 따라가면 지금의 김제시 금구면 산동리 구암마을과 둔산마을 일대에 해당한다. 그 곳에 퇴리 최만춘이 살았는데 지금의 둔산마을로 전주 최 씨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그리고 최만춘의 부인은 조 씨로 인근 하천리가 조 씨 집성촌이고, 두 번째 부인은 배씨인데, 근처 상리가 배씨 집성촌이다. 팥쥐기방죽 팥쥐가 콩쥐를 죽인 곳이라고 하여 붙은 이름으로 완주군 이서면 두죽리에 있으며 은교리, 앵곡마을 등과 함께 금구면에 속해 있다가 1914년 군 분할시에 완주군 이서면으로 귀속되었다. 또 두월천은 콩쥐가 넘은 천이라하여 두월천이고 두은산은 콩쥐가 은혜를 입는 산이라고 하여 두은산이다. 두은산이 지금의 둔산이다. 이 둔산의 뒷산은 정말 소가 누운 듯한 형상이다. 또 그 근방에는 애통리와 분토리라는 지명이 있다. 최만춘이 콩쥐가 죽었다는 애통한 소식을 들은 곳이라 하여 애통리이고, 분통리는 최만춘이 계모 배씨와 팥쥐가 짜고 콩쥐를 죽였다는 분통 터지는 소식을 들은 곳이라 하여 분통리다. 예전의 분통리가 지금의 분토리가 되었다. 참 신기하고 재미있다. 콩쥐팥쥐 이야기를 현재 금구면 산동리 일대의 마을이름과 산 이름, 하천 이름을 빗대어 풀어보면 이러하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지명만이 아니다. 이야기속의 하나하나의 단서를 찾아 더 들어가면 정말 이 곳이 그 곳인가? 혹은 콩쥐팥쥐가 실존인물은 아닐까? 하는 작은 믿음이 만들어질 것 같다.콩쥐의 아버지 퇴리 '최만춘'이 살았던 동네는 콩쥐의 고향으로 거북바위가 있다고 해서 이름이 붙여진 구암리다. 구암리는 '대섶들' 또는 '묵은들'이라 불렸는데,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지만, 지금의 둔산마을이나 구암마을 보다 낮은 평야지대에 있었다고 한다. 구암리를 '대섶들'혹은 '묵은들'이라 불린 이유는 팥쥐가 콩쥐를 팥쥐기 방죽에 밀어 넣어 죽인 날 밤부터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물난리가 났다고 한다. 그때 구암리가 물에 쓸려 흔적도 없이 살아졌다. 당시 구암마을이 있었다는 자리의 논에서 서까래와 기단석이 출토되었다는데, 마을이 있었다는 증거로 대나무가 있어 '대섶들'이라 불리워졌다. 동네 어르신들은 그 기단석을 보고 콩쥐가 빨래를 했던 '빨래바위'라고 불러왔다. 또 물난리로 농토가 초토화되어 한동안 농사를 지을 수 없었던 이유로 '묵은들'이라 부르기도 했다는 것이다. 콩쥐의 외갓집은 금구 관아에서 멀지않은 '하천리'로 콩쥐의 엄마 조 씨는 하천리에서 태어나 구암리에 사는 최만춘에게 시집을 왔다. 팥쥐의 고향은 분통리다. 배씨가 구암리 근처 배씨들이 모여 살고 있는 상리에서 태어나 분통리로 시집을 왔다. 그 당시 구암리 사람들 중 최 씨들은 지금은 둔산(두은산)에 새로 터를 잡았고 일부 다른 성을 가진 사람들은 지금의 구암리에 터를 잡아나뉘어 살게 되었다. 이처럼, 마을 사람들과 스님의 주장은 전주 서문 밖 30리에서 시작한 앵곡, 둔산, 구암마을 일대는 여러 요소에서 '콩쥐팥쥐'이야기가 만들어질 충분한 공간적 배경을 갖고 있다.△ 콩쥐팥쥐는 실존인물일까그럼 진짜 콩쥐팥쥐는 실존일물일까? 아버지는 퇴리 최만춘는 어떨까? 조선 중엽 전주 최 씨 족보 가운데, 최만춘 이라는 이름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 소설 속 최만춘은 실존인물이 아닌 가공인물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조법종 우석대 교수의 '콩쥐팥쥐전 배경마을에 대한 역사 지리적 고증'(2004)에서 등장인물과 관련된 성씨는 최씨조씨배씨인데, 콩쥐의 부친 최만춘은 가공의 인물로 당시 가장 유명한 전주 최 씨를 활용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승철 완주문화연구회 회장 또한 '콩쥐팥쥐'현장을 찾았다. 2004〉에서 '퇴리 최만춘은 아전이 많은 전의 퇴리라 추정할 수 있지만, 조선 중엽 전주 최 씨 족보에 최만춘이란 이름이 없는 만금 실명이 아닐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어 앵곡마을에는 마방자리(마구간 딸린 주막)와 말을 맨 돌자리의 흔적이 남아있었다는 마을 주민의증언은 이곳이 전주에 예속된 역참이 존재한 마을이었던 까닭에 앵곡마을은 왕래인이 많았을 것을 것이고 이곳의 지명과 함께 객들의 농담거리, 잡담 거리 등의 다양한 이야기가 수집, 정리되는 지리적 공간성을 확보하고 있다는 근거를 갖는다. 문화인류학자인 Jared Diamond가 쓴 'Guns, Germs And Steel'에서 콩쥐팥쥐를 'hodge and podge'란 재미있는 어구로 표현하면서 지역의 토속적 색깔이 반죽처럼 혼합되었다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는 이유 또한, 앵곡마을이 조선시대의 남북을 잇는 큰 길가에 위치해 있어 많은 사람들의 왕래가 있어왔고, 여러 지역 색이 뒤엉키는 과정에서 탄생한 작품임을 반증하고 있다. '콩쥐팥쥐'는 어느 미상의 작가가 실화가 아닌 설화 혹은 구전된 이야기들을 한데 모아 이 곳의 지명과 환경을 배경으로 소설화한 고대소설이자 한글소설인 것이다. 즉 문화원형 그 자체가 무형의 유산이다.△ 보편적 인류문화원형으로써의 '콩쥐팥쥐'완주군과 김제시의 경계 사이에 자리 잡은 '콩쥐팥쥐'의 배경마을인 앵곡구담둔산마을 일대는 한때 이슈가 되기도 했다. 완주군은 지난해 지명을 활용한 창작동화 공모전을 주최하고, 콩쥐팥쥐이름을 딴 도로명을 새로이 만드는 등 여러 방면으로 그 성과를 드러내려 하고 있다. 그러나 행정구역상, 정치 논리적 관점에서 작가미상인 한글소설의 배경이 된 지명의 유사성만으로 발원지를 주장, 보존, 관광 상품화 한다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 중요한 것은 한국의 신데렐라 버전인 '콩쥐팥쥐'의 인문학적 가치와 문화콘텐츠의 다양한 방식의 접목을 통해 차별화된 브랜드를 개발해야 한다는 점이다. 취재를 통해 본 팥쥐기 방죽, 거북바위, 구월천, 콩쥐빨래돌 등의 사적들은 역사적으로도 검증할 수 없고, 인문학적 가치 혹은 문화적 가치로도 보존개발할 만한 콘텐츠는 아니었다. 그러나 둔산마을의 어르신들은 마을 앞에 놓여있는 널은 바위돌 하나가 진짜로 콩쥐가 빨래를 했던 그 빨래바위라 믿고 계신다. 어릴 적부터 그렇게 들었고 그렇게 사신 게다. 또한 구암마을 구암바위는 거북이 모양이라 믿으신다. 사진 속 구암바위는 거북이 같지는 않았지만, 왠지 그 분들의 말을 믿고 싶다.

  • 주말
  • 전북일보
  • 2012.06.15 23:02

고소설 활용 문화콘텐츠 개발 어떻게…인류 보편적 가치 찾아내 전세계 알리는 작업 필요

우리나라를 배경으로 설정된 고소설 중 현재 그 배경지가 주목받고 있는 작품으로 '홍길동전', '허생전', '배비장전', '춘향전', '흥부전', '심청전' 등이 있다. 지방자치단체들의 새로운 관심으로 떠오른 고소설의 배경지 고증은 바로 지역문화정체성에 기반을 둔 지역문화축제 또는 이것과 연관된 문화콘텐츠 산업의 새로운 아이템 찾기와 맞물려 있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고소설 주인공의 지역 연고성을 확보한다는 것은 지역문화의 정체성을 더욱 공고히 하고, 성공적인 문화관광을 이끌어 낼 수 있기에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는 효과가 있다. 이에 전라북도의 각 지방자치단체들 또한 이러한 맥락에 여느 지자체와 마찬가지로 고소설의 배경지를 활용한 문화콘텐츠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러나 각 지방자치단체간의 과도한 경쟁은 또 다른 불씨를 만들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고소설 '홍길동전'의 지역연고성 문제로 대립하고 있는 강원도 강릉시와 전남 장성군의 경우다. 작가 허균의 출생지인 강릉시와 '홍길동전'의 실존인물 홍길동의 생가인 장성군 사이의 마스코트 특허권 및 캐릭터 상표권 분쟁으로 이어졌다. 결국 홍길동 컨셉의 문화적 전략 추진에 뒤쳐진 강릉시가 시의 상징으로 사용해오던 홍길동 마스코트 사용을 중단함으로써 장성군이 고소설 '홍길동'을 차지하게 된다. 이와 비슷한 사례가 전북에서도 일어났다. 전북 완주군과 김제시 간에 벌어지고 있는 '콩쥐팥쥐전'을 둘러싼 지역 간 연고권 분쟁이 그것이다. '콩쥐팥쥐전'에 배경지를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현재 논쟁은 강릉과 장성군의 경우와 다른 행정구역상의 문제이다. 현재 완주군이 콩쥐팥쥐동화마을 개발을 위한 2차 용역이 발주되고 등장 캐릭터개발과 저작권, 문자등 115건을 특허청에 등록함으로서 좀 더 유리한 고지에 있다. 김제시 또한 콩쥐팥쥐전의 연고성에 대한 근거를 주장하고 있다. 이견이 첨예화되자 완주군은 지명과 역사적 고증, 주민들의 증언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김제와 완주의 접경지역을 공동으로 캐릭터로 개발하는 방안도 강구하겠다면서 한발 물러섰다. 문제는 이후의 문제이다. 지역 전통소재의 예술, 자연, 역사 등의 문화자원을 캐릭터상품으로 개발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콩쥐팥쥐전'의 캐릭터 선점과 저작권, 상표권 등록만이 지역특성화 전략의 결과로 받아들이고 테마파크 조성 등 전시성 문화콘텐츠 건립에만 선전하려는 발상은 한계가 있다. '디즈니랜드는 실제 미국이 디즈니랜드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프랑스 철학가 장보드리야르가 말한 '시뮬라시옹', 즉 실재로부터 멀어진 이미지가 현실을 압도하고 있는 사례를 언급한 대표적인 문구처럼 오늘날은 이미지와 미디어의 시대임이 확실하다. 그의 불안한 예측은 오늘날, 수많은 미디어가 현실을 압도하며 진일보하는데 더욱 기여한 게 아닌가 생각한다. 그리하여 '애플'(Apple)하면 사과 대신 아이폰이 떠오르는 이미지 전략의 시대가 됐다. 그리하여 캐릭터 상품화 방안과 전략이 모든 지자체 핵심 비용으로 소모된다. 어느 지방자치단체이건, 지역축제이건 캐릭터 상품화 개발은 수많은 비용을 들이지만, 지역특산품과 연계한 상품화 방안일 경우를 제외하고 고소설의 배경지를 중심으로 캐릭터 디자인과 상품화 전략으로 성공한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고소설의 배경지로 문화콘텐츠의 아이템을 찾는 데는 다른 시각의 필요하다는 것이다. 고소설 '콩쥐팥쥐'의 행정구역간의 표면적인 갈등보다 전북의 지자체가 함께 기록유산무형유산의 문화콘텐츠에 대한 새로운 대안과 전략의 궤도 수정에 힘을 기울이는 게 더욱 건설적이지 않을까. '2012 전북방문의 해' 선포와 함께 전라북도 각 지자체들은 지역의 새로운 문화콘텐츠를 개발하고 유치하기 위해 또다시 노력하고 있다. 이를 통해 관광산업발전과 지자체의 경쟁력 강화를 한 목소리로 외치고 있지만, 정작 내용과 형식이 '거기서 거기'인 이유는 무엇일까.이 의문은 콩쥐팥쥐의 발원지에서도 찾을 수 있을 듯하다. 즉, 물질적인 원형이 존재하지 않는 문화콘텐츠에 대해 지자체든, 축제프로그래머이든, 문화예술관련 종사자든 어떤 시각을 가지고 바라보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콩쥐팥쥐는 인류가 함께 공유하고 정서 속에 존재하는 원형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보물이다. 아울러 우리나라 남녀노소 다 알고 있는 그 유명한 콩쥐팥쥐이야기이며, 전 세계가 함께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신데렐라버전의 하나이다. 향후 기록유산의 활용을 위한 새로운 연구와 아이디어, 인류 보편적 시각의 정서를 담아 낼 수 있는 그 무엇을 찾을 때 비로소 콩쥐팥쥐전과 그 배경이 되는 발원지가 전북을 대표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관광명소가 될 것이다. 또한 그 보물을 포장하기 위해 천편일률적인 테마파크를 만들 계획이거나 어느 축제와 똑같은 축제 프로그램 안에서 캐릭터와 축제로고만 새롭게 꾸미기만 해서는 안 될 일이다.우리나라 남녀노소 누구다 다 알고 있는 콩쥐팥쥐전의 외형적 인지도는 껍데기에 불과하다. 남녀노소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콩쥐팥쥐 이야기 속에 문화심리학적 의미와 전 세계의 신데렐라 버전으로 존재하는 내재된 인류의 보편성을 가치를 가만히 들여다보는 시간이 길어지기를 희망해 본다.

  • 주말
  • 전북일보
  • 2012.06.15 23:02

세계문화유산 등재 기다리는 도내 한옥공소 3곳, 박해 견뎌낸 한국 천주교회의 모태

지난해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가 천주교 관련 한국의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 29건을 내놓았는데, 그 가운데 전북지역의 유산은 7건으로 가장 많았다. 앞서 설명한 완주 되재성당과 익산 나바위성당을 비롯해 전주 전동성당과 치명자산 순교자묘, 정읍 신성공소, 진안 어은공소, 장수 수분공소 등이다.  100년 남짓 박해를 치르는 동안 천주교도들은 목숨을 잃고 믿음을 지키기 위해 남부여대하며 깊은 산속으로 숨어 들어가 교우촌을 이루고 살았다. 이들 교우촌을 공소라고 불렀다. 여기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세 한옥공소를 찾아 한국천주교회 어머니 노릇을 했던 공소의 어제와 오늘을 둘러보았다.신성공소는 꼬불꼬불한 들길과 산길 끝에 견고한 돌성벽에 둘러싸여 있다. 보천교의 돌담을 사다가 쌓았는데, 관군의 급습을 경계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1886년 병인박해를 피해 모여든 교우들은 산허리에 화전을 일궈 담배농사를 지으며 생계를 잇고 믿음을 지켰다. 1907년 미알롱 신부의 지휘 아래 철옹성 같은 성벽을 쌓고 가까이에 기와를 굽는 공장까지 마련하여 성당과 사제관, 사랑채를 지었다. 8칸의 성당은 바실리카 양식을 한옥 안에 접목시킨 경건한 집이었다. 그러나 성당은 1936년 교우들의 눈물어린 반대를 무릅쓰고 정읍 본당의 공사비를 충당하기 위해 매각되어 어느 문중의 제각으로 팔려 사라졌다. 지금은 공소 경당으로 쓰이는 옛 4칸의 사제관과 이엉으로 지붕을 올린 6칸의 사랑채, 검붉은 녹을 뒤집어쓴 종탑만 남아 있다. 오디 수확을 하다 달려온 임춘남(베드로) 공소회장은 한 달에 한 번 첫째주 목요일에 신부님이 방문하여 미사를 올린다는 말끝에 헐린 성당이 꼭 제 모습을 되찾기를 소원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어은공소 역시 병인박해를 피해온 교우촌에서 비롯되었다. 산속 막다른 길에서 붉은 빛이 도는 점판암 돌너와를 지붕에 올린 어은공소를 보는 순간, 순정한 믿음을 동경하는 마음이 되고 만다. 민도리 홑처마에 팔작지붕에 亞자형으로 이루어진 성당은 어디 하나 화려하거나 밉보이는 것이 없이 소박하다. 내부는 한옥성당 특유의 바실리카 양식으로 되어 있다. 어은성당은 1900년에 전주 성당에서 분가하여 본당이 되었고, 1904년에 김양홍 신부의 진두지휘 아래 세워졌다. 목재는 머우내 앞산과 오리골 뒷산에서 벌목해 지게로 운반하고 기둥은 헌 목재를 사다가 지었으며 무거운 돌너와는 백운 백암마을에서 지게로 날랐다. 이렇게 공들여 지은 성당은 1921년 한들본당과 1952년 진안본당으로 본당 자리를 넘겨주고 공소로 물러났다. 이제는 30여 가구가 산비탈에 고랭지 채소를 심거나 한봉을 치며 한 달에 한 번 방문하는 신부를 맞아 미사를 올리며 믿음의 끈을 놓지 않고 살아간다. 섬진강과 금강이 시작되는 깊은 산골마을에 자리한 수분공소는 얼핏 보면 초라하고 어설프기만 하다. 주황색 칠이 벗겨진 함석지붕에 무너지려는 벽기둥을 떠받친 통나무, 휑하게 빈 내부 등 근대문화유산등록 문화재라는 팻말이 무색하다. 그러나 겉모양은 이리 허술해도 수분공소는 병인박해 훨씬 이전부터 교우들이 모여 살았던, 아주 특별하고 유서 깊은 곳이다. 1840년과 1850년대 최양업 신부와 다블뤼 신부가 공소를 세웠으니 170여 년 전이다. 1921년 부실한 공소를 대대적으로 보수했는데, 이때 함양의 기와공장에서 등짐으로 기와를 나르고 번암에서 나무와 돌을 메어 와 성당을 지었다. 1954년 장계성당이 생길 때까지 본당 노릇을 하며 성당에 딸린 소화학원에서 아이 어른들에게 글을 깨우쳐 주었고, 한창 때인 1935년에는 무려 1300여 명의 교우가 신심을 덥힌 성전이었다. 지금은 50여 명의 교우들이 어서 빨리 번듯하게 복원되어 붉은 신심을 이어갈 수 있기를 서원하고 있다.김정겸 문화전문시민(프리랜서 작가)

  • 주말
  • 전북일보
  • 2012.06.08 23:02

전북의 한옥성당 - 믿음의 신비와 한옥의 아름다움 오롯이

'세상의 쾌락에서 멀리 떨어져서 그들의 초가를 내려다보는 높은 산으로 마치 울안의 땅에 갇혀 있는 듯이 둘러싸여 기도와 밭일로 일생을 보내는 이들은, 세속 사람들이라기보다는 수도자들과 비슷합니다.  이 황량하고 외딴 환경에도 불구하고, 내 사랑하는 은둔소는 마음이 곧은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가 되었으니, 그들은 진리와 하늘의 길을 찾아 이리로 온 것입니다.' ('천주교 전주교구사'재인용 ) 1893년 어느 선교사의 말이다. 믿음의 땅으로 알려진 전북의 두메산골에서 화전민으로 살아가야 했던 천주교도들은 그 시대의 극빈자였다. 그러나 부지런하고 신실했던 그들은 은둔소(공소)를 중심으로 고단한 삶을 헤쳐 나갔다. 그들의 사랑하는 공소 가운데 한옥으로 지어진 아름다운 성당들이 지금껏 살아남아 우리에게 믿음의 신비와 한옥의 아름다움을 일깨운다. 이들 한옥성당은 역사와 종교건축과 미학 등 어떤 기준을 놓고 보아도, 오늘날 우리가 각별히 기억하고 생명을 불어넣어야 할 유산이다.△ 최초의 한옥성당, 되재성당고산의 첩첩산중, 멀고도 낯선 되재마을에 한옥성당이 있다. 이 되재성당은 우리나라에서 서울 약현성당(1893)에 이어 두 번째로 세워진 성당(1895)이자 최초의 한옥성당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다. 팔작 기와지붕에 아담한 성당은 동남쪽을 바라보고 앉았는데 높직한 십자가 종탑을 앞에 두었고, 마당에는 여기가 믿음의 집이 틀림없다는 걸 알리는 성모상과 예수상이 서 있다. 되재성당의 첫인상은 드물게 아름다운 집이라는 것이다. 더군다나 복원한 지 4년 남짓하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더욱 놀랍다. 이렇듯 티나지 않게 쓰러져 가는 옛것을 근사하게 되살렸다는 사실에 고마움마저 인다. 성당 외양은 앞면 5칸에 옆면 10칸이지만, 내부는 앞면 3칸에 옆면 8칸의 삼랑식으로 이루어졌다. 덤벙주춧돌 위에 선 둥근 기둥 스무 개가 나란히 지붕을 떠받치고, 양쪽 6개의 방문 앞마다 툇마루가 놓이고, 벽은 어른 키 높이까지 돌과 흙으로 쌓아올리고 그 위쪽에 창문을 냈다. 성당 안은 겉모습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에 잠겨 있다. 앞쪽 제단을 빼고 방 한가운데는 높직한 칸막이가 방을 둘로 갈라놓았다. 예전의 세속 풍습대로 남녀의 자리를 구별하기 위해서다. 물론 드나드는 문도 달라서 남자는 동남쪽 방문을 이용했고 여자 신도는 북동쪽 문으로 드나들었다. 채광용 높은 창문에서는 바깥 빛이 스며들고, 삼각형으로 높이 솟은 천정은 대들보와 서까래를 그대로 드러내어 상승감을 주며, 길쭉한 장방형 양쪽 끝에 제대와 출입문을 멀찍이 마주 보게 하여 공간의 깊이감을 더한다. 이를테면 한옥의 측면을 한옥성당에서는 정면이 되고 한옥의 정면은 한옥성당의 측면으로 바뀌는 셈이다. 이런 내부구조를 흔히 바실리카 양식으로 불리는데, 되재성당은 한옥의 외양에 바실리카 양식의 내부 특징이 교묘히 어우러져 한옥성당 특유의 아름다움과 경건함을 갖춘 성당으로 이름 높다. 여러 차례 박해를 피해 되재에 모여든 교우촌은 1984년 프랑스인 비에모 신부의 주도로 성당을 짓기 시작했다. 동학혁명의 어지러운 시절이었는데, 목재는 완주 화암사와 은진 쌍계사에서 사서 옮겨오는 등 우여곡절을 끝에 이듬해 완성되었다. 400여 명이 미사를 볼 만큼 규모가 컸던 되재성당은 논산본당이 서면서 공소로 위축되고, 한국전쟁 때는 불타버렸다. 1954년 그 자리에 다시 세워졌고 얼마 전 새로이 복원되었다. 뮈텔주교의 일기와 사진자료 등을 통해 전해오는 성당의 본래 모습과는 차이가 있으나, 그럼에도 되재성당은 복원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모범으로 손색없다. 지금은 일 년에 두 차례 미사를 올려, 아쉽게도 실용적 목적보다는 상징적 가치가 더 앞선 성당이 되었다. △ 김대건 신부 첫 발 내디딘 나바위성당나바위성당은 금강의 강변이 굽어다 보이는 익산의 화산에 서 있다. 첫눈에 성당의 자태는 당당하다. 둥근 아치형 벽돌 기둥들이 십자가가 달린 고딕식 뾰족 종탑을 하늘로 힘껏 떠받쳐 올리고 온통 발그레한 감빛으로 빛난다.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갖게 되는 고요한 광채다. 그런데 옆으로 돌아가 바라보면 돌연 아름답고 경이로운 광경에 맞닥뜨린다. 길게 내달리는 높은 용마루와 기와지붕은 잿빛이 감돌고 기왓골은 참빗처럼 가지런하며 두 겹 지붕 사이에는 33개의 팔각 채광창이 뚫려 있다. 나무기둥 여덟 개가 아래쪽 지붕처마를 떠받쳐 회랑을 이루고 마지막 세 칸은 막혔다. 정면 5칸에 측면 10칸으로 된 한옥이다. 나바위성당은 바실리카 양식을 한옥으로 조화롭게 번역해냄으로써 완벽한 건축적 미학에 다가갔다는 평을 받는다. 한때 나바위성당의 교세는 전국에서 가장 컸는데, 프랑스인 베르모렐 신부는 신도들이 한 자리에 모여 미사를 볼 수 있는 성당을 짓기 위해 오래 전부터 화산에 공을 들였다. 신부는 1916년에 마침내 화산에 터를 닦고 공사를 시작하여 1907년에 완공했다. 설계는 명동성당을 설계한 프아넬 신부가 맡아서 한국인의 정서에 맞는 한옥으로 지었다. 목재는 임천 후록에서 벌목하여 끌배로 운반하고, 목수일은 주로 중국인이 맡았다. 그후 1916년에 무너져 내리는 흙벽을 벽돌로 바꾸고 용마루에 있던 종탑은 헐어냈다. 대신 성당 입구에 고딕식 종탑을 세우고 외부 마루는 회랑으로 바꾸었다. 성당 내부에는 전통적인 유교 관습에 따라 남녀 자리를 구분한 칸막이 기둥이 남아 있다. 얼마 전 창마다 한지 성화로 장식하여 성당 안의 분위기가 한결 그윽해졌다. 화산(華山)이라는 이름답게 성당 둘레 경관은 빼어나게 아름답다. 서북쪽 언저리는 조선인으로서 최초의 사제 김대건 신부가 1845년 10월 12일에 중국에서 사제품을 받고 입국할 때 첫 발을 디딘 곳이다. 성당 뒤쪽 언덕을 휘돌아 김대건 신부상과 화산 정상에 망금정 정자를 비롯하여 십자가의 길, 야외 미사를 볼 수 있는 터 등이 고즈넉하게 이어져 묵상하는 순례자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사실 아름다운 것은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그 자체가 모든 걸 말해주는 법이다. 그럴수록 아름다운 한옥성당과 한옥공소로 이어진 순례길은 믿음의 있고 없음을 떠나 꼭 해보아야 할 인생의 중대사가 아닐까. 아니면 즐거운 숨바꼭질 놀이가 될 수도 있겠다. 이를테면 술래가 되어 숨은 아이를 찾아가듯 산속 깊이 꼭꼭 숨은 공소들을 찾아나서는 것이다. /김정겸 문화전문시민기자(프리랜서 작가)

  • 주말
  • 전북일보
  • 2012.06.08 23:02

금강의 역사와 애환 - 물길 잃은 강물이 운다… 울음소리마저 멈췄다

"금강이 울었지. 내가 80이 넘었는디, 한 20년 전까지는 울었제. 근디 지금은 울지 않아. 20년 전에 하구둑이 쌓이면서 물길이 변했어. 그 뒤로는 강이 울지 않아."익산시 웅포면에서 '금강이 운다'는 전설(?)이 전한다. '전설의 고향'에서나 나올 법한 이 이야기는 금강을 끼고 있는 익산시 웅포면성당면 부근 마을에 가면 들을 수 있다. 어떤 강 울음 소리일까 궁금해진다. 바람 소리와는 분명 다르다고 증언하는 지역 주민들, 살아있는 강이 운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강이 속삭이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지금은 그 이야기를 들을 수가 없다. "밤이면 강이 우~하고 우는 거야. 바람 소리하고는 달라. 어릴 적 우리 할머니가 마을에 변이 생기거나, 기이한 일이 있기 전에 강이 우는 소리가 났다는 거야. 우리 동네 사람들이 다 들었당게. 근데 지금은 강이 안 울어. 하구둑이 막히고 나서 물길이 변하면서 이젠 강이 더 이상 울지 않아 하구둑으로 물길이 변했어. 수위가 겁나게 올라가서 작은 섬들도 다 없어지고, 예전엔 섬에 들어가 농사도 짓고 그랬는디."사람들이 강바닥을 파헤치고 강줄기를 틀어 막고 인공댐을 쌓기 시작하면서부터다. 그런 뒤부터 금강은 더 이상 울지 않는다.△ 금강의 물줄기금강은 한반도의 강으로 소백산맥에서 발원해 충북과 충남, 전북의 경계를 흘러 서해로 흘러들어간다. 금강은 한강, 낙동강에 이은 대한민국 3대 강으로 장수군 장수읍의 뜬봉샘에서 발원해 군산만에서 서해와 만나는 401km의 강이다. 금강은 호수처럼 잔잔하다고 호수 같은 강 즉 '호강'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호남이라는 지명은 호강 즉 금강의 남쪽 지역이라는 뜻이다. 대전광역시 금강 유역에 대청댐이 있으며, 하류에는 금강하구둑이 있다. 부여군에서는 백마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국가하천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그 구간은 진안군 하신천의 합류점부터 금강하구둑이다. 지류로는 갑천, 유등천, 무심천, 유구천, 논산천, 미호천 등이 있다.금강이 옥천 땅에 들어오면 대청댐에 물길이 막혀 대청호를 이룬다. 대청호로 인하여 금강 하류에 빈번하였던 홍수는 멎게 됐다. 그러나 금강의 수량을 줄여 금강하구언과 함께 금강의 수운이 쇠퇴하게 만들었다.금강이 웅진 즉 고마나루에 이르면 '곰강'으로 이름이 바뀐다. 북쪽에서 이주해온 곰의 후손인 백제인들은 새로운 도읍에 흐르는 강의 이름을 곰강이라고 불렀다. 곰강은 곧 금강이 되었다.군산과 장항 사이의 금강하구둑은 총 1841m로 1990년 완공됐다. 금강하구둑은 충남과 전북의 경계를 이루며 농업용수와 공업용수를 공급하고 금강 인근 물을 조절한다. 담수 공급량은 연간 3억 6000만 톤이다. 이 둑의 완공으로 강경은 큰 배가 드나들지 못하고 물류의 집산지로서 기능을 잃게 됐다. △ 금강에서 태어난 예술금강은 예로부터 뱃길로 이용되었고, 역사적 사건들이 많이 얽힌 곳이기도 하다. 역사적 사건들과의 관계는 문학작품 속에서도 그대로 반영되는데, 금강은 백제의 멸망, 동학운동, 일제하에 있어서의 쌀의 수탈 등의 사건과 연계되어 한(恨)의 강으로 그려지고 있다. 구비문학에서 금강과 관련된 대표적인 설화로는 '곰나루 전설'과 '조룡대전설'이 있다. '곰나루전설'의 내용은 한 남자가 큰 암곰에서 붙들려 살다 달아나자 여기에 상심한 암곰이 새끼와 함께 강물에 몸을 던져 죽은 뒤 자주 복선이 돼 사당을 짓고 고사를 지냈다는 것이다.유현종의 소설 '들불'에는 "금강을 이용해 왜인들이 쌀을 가져가고 그로 인해 백성들은 파헤쳐 아사 직전까지 이르게 했다. 뿐만 아니라 권력자들도 금강을 타고 오르며 뇌물을 거둬 들이기에 정신이 없었고 백성들은 점점 어려워만 진다" 라고 해 금강이 백성을 수탈하는 길로 이용됐다. 이러한 금강의 역사적 사건들은 후대 문학작품에서 빈번히 서술되고 있다. 장효문의 서사시 '전봉준'에서는 "물에 몸을 던지는 사람은 / 호남이 제일 많아서 이만이요 / 충청이 그 다음으로 일만이요 () 금강에 뛰어들어 수혼원귀"라고 해 민족의 비극적 역사를 드러내고 있다.금강을 소재로 한 문학작품으로는 신동엽의 '금강', 유현종의 '들불', 장효문의 서사시 '전봉준' 외에도 1930년대 후반의 우리 민족이 처하여 있던 역사사회적 현실을 배경으로 한 채만식의 '탁류'를 들 수 있다. 이 작품에서 금강의 맑은 강물이 탁류로 변하는 과정은 우리 민족인 일본의 압제 속으로 전락하게 되는 역사적 과정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이렇게 에두르고 휘몰아 멀리 흘러온 물이 마침내 황해바다에 다가 깨어진 꿈이고 무엇이고 탁류째 얼러 좌르르 쏟아져 버리면서 강은 다하고 강이 다하는 남쪽 언덕으로 대처(大處) 하나가 올라앉았다."라고 했으며, 줄곧 일제의 압박과 지배를 받는 민족의 표상이며, 시대적 고통이 개입된 강으로 표현하고 있다. △ 금강이 통곡하다2012년 금강은 크고 시원하다. 보기에는 그렇다는 얘기다. 4대강 사업으로 강은 포크레인이 강바닥을 헤집고, 강의 수위도 오르락내리락 불안정하다. 겉보기에는 평온해 보이는 금강이 멍들고 있다. 1600년 간 숱한 애환을 수장한 채 굽이굽이 흐르는 금강은 올해 모습이 확 바뀌었다. 이명박 정부가 추진한 4대강 살릭 토목공사의 여파다. 친수공간 조성과 보 건설, 홍수터 정비 등을 대대적으로 추진했으나 기대효과가 크지 않자 최근엔 살짝 뒤로 물러서 자전거길 홍보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낭만적으로 보이는 이 길이 22조원이나 쏟아 부은 4대강 살리기 사업의 대표적인 치적이다. 금강 자전거길을 달려본 사람이면, "자전거를 타긴 좋은데 돈을 너무 많이 쓴 게 아니냐"는 반응이다. 효율성을 따져 봐도 4대강 자전거길은 주말 레저용에 한정될 수밖에 없다. 농번기를 맞은 해당 주민에게 레저용 자전거길이나 캠핑장은 '그림의 떡'이다. 토목논리를 앞세우다 보니 금강변은 중장비로 밀어내 평평한 황야로 변했다. 금강은 역사적 소용돌이에서도 잔잔하게 흘러왔다. 사람들에게는 삶의 터전이자 안식처를 줬고, 숭배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자연의 섭리를 들려줬다. 그렇게 금강은 수천 년 동안 사람들에게 말을 건넸다. 간혹 몇몇 지혜로운 사람들은 강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우둔하고 욕심 많은 인간들은 금강의 우는 소리에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벙어리가 되어 버린 금강. '꺼어억~ 꺼어억' 목 놓아 울고 싶지 않을게다. 아무도 듣는 이가 없어 울음소리 새나가지 않게 입을 틀어 막고, 속울음을 울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금강이 미련한 인간들을 위해 다시 울어주는 날을 기다린다. /김진아 문화전문시민기자(익산문화재단 경영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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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6.01 23:02

웅포 곰개나루 - 잔잔한 강물 웅장한 낙조

웅포 곰개나루는 대한민국 최고의 일몰을 볼 수 있는 곳이다. 강물은 호수처럼 잔잔해 석양이 질 무렵에는 하늘 밑 강물 위에도 똑같은 해가 떠 있다. 탁 트인 바다도 아니고 높은 산도 아닌 강가에서 바라보는 일몰은 색다른 기분을 체감할 수 있어 많은 사진작가와 시민들이 즐겨찾는 명소다. 인근에 위치한 웅포대교에서 보는 금강, 낙조, 갈대, 철새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낸다.익산에는 금강과 맞닿은 웅포 곰개나루가 '서해낙조 5선'으로 이미 큰 인기를 얻고 있다. 끝없이 펼쳐진 물은 바다와 같이 크지만 또 바다의 파도처럼 활기차지 않아 잔잔함 속의 웅대함으로 다가오는 곳이다. 이곳에 저녁 무렵 해가 뚝뚝 떨어지는 풍경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금강을 끼고 있는 곰개나루와 덕양정에서 바라보는 해넘이 속으로 잠시 발걸음을 옮겨보자. 곰개나루는 곰이 금강물을 마시는 듯한 포구의 지형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덕양정이 있는 언덕은 물을 마시기 위해 내민 곰의 머리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덕양정에서 바라보는 강은 닿을 듯 말 듯해 더욱 애타는 심정으로 다가선다.덕양정이 있는 이곳에는 400년 전 진포대첩 때 고려 말 최무선 장군과 함께 왜구의 침입을 물리치다 수장된 장병들을 기리던 '용왕사'라는 절이 있었다. 절은 세월에 묻혀 사라지고 없지만 예부터 용왕제를 지냈으며 지금도 이곳에서는 익산문화원의 주최로 용왕제가 열리고 있다. 절대신 정자로 그 모습을 바꾼 덕양정에서 바라본 금강은 잔잔하며 웅장한 모습을 오묘하게 조화시켜 서해로 향해 흐른다. 금강 하구둑이 없던 과거에는 배가 이곳을 거쳐 충남 강경까지 드나드는 큰 포구였으나, 지금은 쪽배 몇 척이 그 명맥을 유지하며 호젓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이곳의 물줄기는 장수군의 깊은 계곡에서 시작 돼 전라도와 충청도를 돌아 바다에 닿기 전 이곳 곰개나루로 흘러든다. 생명의 원천이자 삶의 터전이었던 금강은 역사 속에서 문화를 꽃피우고 사람과 물류를 움직이는 근원이다. 덕양정 위쪽 관망대에서 바라본 금강에는 웅포대교도 한눈에 들어오고 병풍처럼 둘러싸인 금강의 절경과 함라산의 산세가 절경이다. 요즘에는 철새들의 장관이 멋지게 연출 돼 겨울철 눈요기가 되고 있다.이곳의 풍경도 장관이지만 무엇보다도 강변을 따라 뻗어있는 산책길은 가족과 연인이 함께 찾기에 제격이다. 자전거나 인라인을 준비해 온다면 여유 있는 재미도 쏠쏠하다. 서해에서 금강으로 거슬러 올라오는 뱃길에는 자연스레 포구들이 자리 잡으면서 여러 마을이 형성되는데 곰개마을이 가장 번창해 웅포면이 됐다. 해방 전후만 해도 정초가 되어 웅포에서 용왕제를 지낼 즈음이면 인근의 무속인들이 '웅포로 돈 벌러 나간다'면서 누가 따로 부르지 않아도 찾아들던 마을이었다. 웅포가 얼마나 도회지였고, 웅포의 용왕제가 얼마나 큰 규모였으며, 웅포 사람들의 씀씀이가 얼마나 크고 화려했었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다. 도도하게 흐르는 금강의 물줄기가 한 눈에 보이는 곰개나루터에 올라서면 그 위용 앞에 누구나 의연해질 수 밖에 없다. 최근에 곰개나루 오토캠핑장이 개장해 시원한 강바람을 벗삼아 아름다운 일몰을 만끽하고 싶은 전국의 캠핑족들을 유혹하고 있다.

  • 주말
  • 전북일보
  • 2012.06.01 23:02

서점 바닥에 앉아 책 읽던 시절… "아! 옛날이여"

지난 2006년 문을 연 교보문고 전주점이 지난 3월 18일 영업을 종료했다. 그간 경매에 부쳐져 있던 입주 건물이 어느 대기업에 낙찰되면서다. 교보문고측은 "건물주가 바뀌게 되면서 양도계약이 무효화됐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일부에서는 당초 매출이 영 신통치 않았던 교보문고 전주점이 이번 계약변경을 이유로 철수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보내기도 했지만, 어찌됐건 그동안 교보문고를 이용하던 전북 도민들에게는 무척이나 안타까운 일이다. 지난 2006년 처음 교보문고가 들어서면서 지역 서점들은 큰 타격을 입었다. 지역 서점을 대표하는 서점들이 매출에 큰 타격을 입었고, 정든 자리를 떠나야 했다. 지역 서점들은 대부분 고사했고, 지역 도서 시장은 앙상해졌다. 그런데 이제, 교보문고마저 떠나버렸다.△ 교보문고 빈자리에서 지역 서점을 추억하다 교보문고가 떠난 자리를 바라보며 문득 6년 전이 떠올랐다. 교보문고가 들어오기 전까지, 지역의 대표 서점은 홍지서림과 민중서관이었다. 4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두 대표 서점은 지금은 '구도심'이라 불리는 경원동, 고사동 일대를 상징하는 장소였다. "민중서관 앞에서 만나." "홍지서림에는 (책이) 있을 거야." 와 같은 말은 전주 시민들의 일상 용어였고, 누구나 다 알아듣는 지역 공통어이기도 했다. 두 서점은 전주시민들의 소통창구였다.홍지서림의 역사는 지난 196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창업자 천병로씨가 전주시 경원동에서 165㎡ 남짓한 공간에 문을 연 홍지서림은 지금보다 더 문화적 혜택이 열악한 시절 시민들의 교양과 상식을 채워주는 공간이었다. 당시 마땅한 서점 하나 없던 전주에서 꽤 규모있는 서점이었기에 전주의 문청(文靑)치고 이곳에서 공부하지 않은 사람 없었고, 홍지서림이 타 서점들과 다르게 허용했던 서점 바닥에 앉아서 죽치고 책읽기는 많은 청소년들을 서점으로 모이게 만든 중요한 이유가 됐다.소설가 양귀자 은희경 최명희 등은 홍지서림에서 책을 읽으며 성장한 대표적인 문인들이다. 당시 홍지서림에는 어찌나 사람이 많았던지 천병로 회장은 "학기 초에는 참고서를 사려는 학생들이 서점 앞 큰 길까지 줄을 서는 바람에 경찰이 배치 돼 교통정리를 해야 할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전주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진 홍지서림과 비할 수 있는 서점이 있다면 바로 민중서관이다. 과거 전주 최고의 번화가였던 관통로 사거리에 위치한 민중서관은 홍지서림보다 6년 늦은 1969년 조정자 대표에 의해 처음 문을 열었다. 서점 이름은 조 대표가 다니던 출판사 이름을 그대로 따다 쓴 것이다. 이후 1992년부터 강준호 대표가 사업을 이어받아 운영했다.민중서관은 전주의 역사를 온몸으로 겪어낸 곳이다. 대로변에 위치해 있어 큰 사건사고 대부분 민중서관 앞에서 벌어졌다. 서슬 퍼렇던 1980년대에는 연일 이어지는 가두 집회와 시위로 최루탄 냄새가 가실 줄을 몰랐고, 2002년에는 붉은 응원 물결로 넘실댔다. 2008년에는 광우병에 분노한 시민들이 모여 촛불을 밝히기도 했다. 40여 년 동안 한결같은 자리에서 민중서관은 전주의 역사를, 시대의 흐름을 지켜왔다. 두 서점 모두 시민들의 뜨거운 사랑과 지지를 받으며 성장한 곳이다. 두 서점을 꾸준히 애용하고, 사랑하고, 아껴온 시민들의 사랑이 있었기에 학생들에게 문제집을 팔던 서점이 다양한 장르의 책들을 구비한 종합서점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창업자들 역시 "우리 서점은 지역민들이 키웠다"고 말할 정도가 됐다.△ 지역 서점의 추억 하나 없는 사람 있을까두 서점이 갖는 오래된 역사만큼이나 시민들이 갖고 있는 추억들도 다양하다. 아직 어린 학생부터 나이 지긋한 중년들까지 두 서점을 '학창 시절 문제집 하나 사러 길게 줄을 섰던 곳','친구들과 항상 만나던 약속 장소','지인에게 소중한 책을 골라 선물했던 곳'이라고 입을 모은다. 필자 역시도 서점은 어린 시절 추억이 가득한 곳이다. 어린 시절 많이 했던 일 중 하나는 읽던 책을 홍지서림 근처에서 헌책방에 팔고, 그 돈으로 새 책을 사서 보는 일이었다. 3000원에 산 책을 1000원 밖에 쳐주질 않았지만, 어린 나이에 그 돈은 무척 귀한 것이었고, 기꺼이 다 읽은 책을 헌책방에 팔고 홍지서림이나 민중서관에 들러 새 책을 사곤 했다. 책을 사읽을 상황이 안되면 주말마다 홍지서림에 갔다. 원하면 누구나 책을 훑어볼 수 있고, 마음에 들면 서가 한켠에 쭈그리고 앉아 하루종일 책을 읽는 일도 가능했다. 오전 10시 쯤 서점에 가면 집에 오는 건 빨라야 4시 쯤이었다. 서점에 가면 나처럼 바닥에 앉아 하루종일 책을 읽는 아이들이 많았는지 어린이 서가는 항상 자리잡기 경쟁이 치열했다. 화장실이라도 다녀오면 금새 누군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버려 투덜거리며 집에 가는 것도 예삿일이었다. 중고교생 시절엔 홍지서림민중서관 앞이 만남의 광장이었다. 휴대전화가 막 보급되던 시절, 누구나 휴대전화를 가지고 있던 것은 아니어서 약속은 꼭 장소와 시간을 미리 정해두어야 했다. 두 서점은 약속장소로 딱이었다. 누구나 알고 있고, 시간을 때우기도 좋은 곳. 그래서 학생들에게 두 서점은 사랑받지 않을 수 없는 곳이었다. △ 대형서점에 밀려 축소폐업한 지역 서점그러나 2006년, 대기업 프랜차이즈 서점이 전주에 상륙했다. 시내 한복판에 큰 규모로 서점을 열다보니 지역서점들에게는 큰 위협이었다. 매출은 급감했고, 경영은 악화됐다. 두 서점도 마찬가지였다. 두 서점 모두 본점이 교보문고와 가까이 위치해 있어 타격이 컸다. 교보문고에 빼앗긴 매출은 쉽게 회복되질 않았고, 여러 동네로 파고드는 동네 지점을 확장해 본점의 적자를 메우는 아이러니한 상황도 발생했다. 그러던 지난해 2월, 심각한 경영난에 시달리던 민중서관이 먼저 본점 문을 닫는 상황이 발생했다. 같은 자리에 본점 문을 연 지 41년 만의 일이다. 당시 운영을 맡고 있던 강준호 대표는 "민중서관의 상징성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면 문을 닫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누적된 적자를 견딜 수 없어 폐점을 결정했다"고 말했다. 대형 프랜차이즈 서점의 등장으로 인해 전주 도서 역사의 한 축인 민중서관은 폐업했고, 홍지서림은 매출에 적지 않은 타격을 입었다. 그리고 6년 만에 프랜차이즈 매장은 사라졌다. 남은 것은 상처입은 지역서점 뿐이다. 교보문고가 사라졌다고 해서 다시 지역서점이 회생할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갈수록 인터넷 서점의 점유율이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한 출판사 관계자의 말을 들어보니 3년 전까지만 해도 전체 매출의 25~35%에 불과하던 인터넷 서점의 매출이 최근에는 50%를 넘어서는 수준까지 올랐다고 한다. 지역 서점들은 또다시 인터넷서점들과 경쟁해야할 판이다. 우리가 떠올리는 서점은 아련한 추억과 향수와 책향기가 남아있는 곳이다. 그래서 막연하게나마 지역서점을 추억하며 약간의 기대를 가져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교보문고가 떠난 자리를 바라보며 많은 시민들이 "답답하다"고 말한다. 그 공허한 빈자리에서 홍지서림과 민중서관의 추억이 떠오른다. 성재민 문화전문시민기자(선샤인뉴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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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북일보
  • 2012.05.25 23:02

'만남의 장소' 사라지고 '책읽기 흥미' 반감 우려

지난 2006년 처음 교보문고가 전주에 입점했을 때만 해도 "대형 서점이 지역상권 죽인다"며 크게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았다. 실제로 개점 이후 인근에 있던 민중서관과 대한문고가 문을 닫는 등 그 여파가 적지 않았다. 문제는 그들이 폐업한 이후 교보문고 전주점이 실질적인 지역 대표 서점 역할을 수행해 왔다는 점이다. 다른 서점들을 제치고 지역의 대표서점 역할을 해왔던 교보문고가 지난 3월 영업을 종료하면서 그 자리는 공석이 됐다. 교보문고가 있던 자리가 휑해질 만큼 지역주민들의 마음도 휑해질 것 같다. 이제 전북에는 대형 서점이라 부를 만한 곳이 없다. 교보문고의 빈자리는 단지 서점 하나가 사라진 정도가 아니다. 시민들은 교보문고 영업 종료로 인해 소중하게 여기던 세 가지를 잃었다.첫째, '삶의 질'을 잃었다. 자유롭게 책을 고르고 독서할 수 있다는 것은 사람들의 문화적 소양을 충족시켜주는 일로, 무척이나 중요하다. 교보문고가 사라지면 전라북도 내 가장 큰 서점이 문을 닫게 되는 셈이고, 중소형 서점들에서 구할 수 없는 책들은 인터넷을 통해서 구해야만 한다. 아무리 인터넷이 발달했다고는 하지만 직접 책을 만져보고 구입하는 일에 비할 수는 없다. 책을 만져보고, 살펴보고, 훑어보는 다양한 경험의 기회를 잃게 된 것이다. 둘째, '만남의 장소'를 잃었다. 대형 서점은 다양한 책들을 볼 수 있어 좋은 곳이기도 하지만, 대개는 약속의 장소로 쓰여지기 마련이다. 교보문고 전주점도 구도심 한복판에 위치해 많은 청춘남녀가족연인들의 약속장소로 활용돼 왔다. 상대를 기다리면서 책을 구입하기도 하고, 책을 둘러보다가 흥미를 얻기도 한다. 이 지역의 젊은 세대들에게 "교보 앞에서 봐."라는 말은 일상어가 됐다. 그러나 이번 영업 종료로 인해 그들은 약속장소를 잃었다. 셋째, '책에 대한 흥미'를 잃었다. 무엇이든 사람들이 흥미를 얻기 위해서는 자주 접해야 한다. '몸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말처럼 가까워지려면 무엇이든 자주 보고 자주 접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번 교보문고 영업 종료로 인해 사람들은 다양한 책을 접할 기회를 잃었다. 동네 중소형 서점들도 있지만, 다양한 책을 구비할 수는 없을 뿐더러 자주 들르게 될 요인이 부족해 사람들에게 책의 매력을 전달하기엔 부족한 장소가 됐다. 약속 때문이건, 지나가다 들렀건 간에 유동 인구가 많은 구도심 한복판에서 만날 수 있었던 교보문고 전주점은 사람들에게 책의 매력을 알리는 전도사 역할을 해왔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문제는 당장 책을 사야하는 사람들이다. 교보문고가 전주에서 영업하던 지난 6년간 서점들은 많이 사라지거나 축소됐고, 헌책방 역시 그랬다. 동네에서 서점을 찾아보기가 어렵게 됐다. 게다가 동네 서점에서 원하는 책을 사기엔 구비된 종류가 한정 돼 있다. 동네 서점들은 주로 학생용 문제집이나 베스트셀러 위주로 판매하기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책을 마음껏 고르기 위해선 인터넷 서점을 한참이나 뒤져야 할 판이다. 아무리 인터넷이 좋아졌다 한들 원하는 책을 손에 쥐고 서점을 나설 때의 기분을 대체할 수 있을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책은 인터넷 서점에서 사야 할까. 인터넷 서점 구매는 지역민들의 문화생활비를 타지역으로 유출되도록 만든다. 구매는 편리할 수는 있을지언정 지역 경제에는 피해를 가져온다. 인터넷 구매를 선호하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지만, 적어도 지역 서점에서 책을 구매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럴만한 무언가가 필요하지 않을까. 동문 사거리의 책방 골목이 다시 살아나건, 또다른 서점이 생겨나건, 현재 전주 시민들에게는 책을 만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하다. 성재민 문화전문시민기자(선샤인뉴스 대표)※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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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5.25 23:02

"어 여 어 여 어허루 상사뒤여~" 농요 부르며 논농사 시름 달래다…모내기철 풍속, 들노래

지난 오월 첫 주에 지리산 둘레길에 다녀왔다. 남원 산내면에서 시작하여, 인접해 있지만 도 경계를 지나 경남 마천에 이르는 코스였다. 이 길은 어느 정도 진입하면 나타나는 올망졸망한 다랭이논과, 그 너머에 펼쳐지는 천왕봉, 제석봉, 두리봉 등 고래등같은 지리산 능선을 조망하면서 걷는 풍광이 압권이다.   이때가 절기로는 입하(5. 5)였다, 그런데 그곳 다랭이논들은 논물이 찰랑찰랑 넘치고, 벌써 모를 심고 있었다. 아무리 해발이 높은 산골이고 비닐하우스로 모를 키운다지만, 과거에 비하면 산골로는 한 달이, 들녘에 비하면 한 달하고도 보름 정도가 빠른 셈이다. 전통농경으로 산골은 곡우(4. 20) 때 볍씨를 담그고, 망종(6. 5) '전삼일 후삼일'이 모심는 적기라고 했다. 반면에 들녘은 하지(6. 21) '전닷세 후닷세'를 적기로 했다. 산골 사람들의 말에 "보리는 들녘에서 먹어 들어오고 나락은 산중에서 먹어 나간다."고 한다. 즉 산골은 모를 일찍 심고 일찍 거둔다는 말이다.   이제 모심는 철이 다가오고 있다. 오늘은 전통농경 과정에서 불렀던 '들노래'에 관한 내용인데, 그 중에서도 요즘 절기에 즈음하여 '모심는소리'가 주인공이다. 들노래는 '농요'라고도 하고, '들소리'나 '논농사민요'라고도 한다.△"보리는 들녘에서 먹어 들어오고 나락은 산중에서 먹어 나간다."들노래를 부르며 모심던 시절, 모심는 적기는 지역에 따라 망종 전삼일 후삼일, 또는 하지 전닷세 후닷세라고 말한 바 있다. 시절 따라 농사짓던 사람들은 이렇듯 절기에 맞춘 표현이 있는가 하면, 일종의 알람시계같이 일머리를 알리는 알람식물, 알람동물이 있다. "참쭉나무 이파리가 참새만 하면 못자리할 때고, 감꽃 피었다 지면 모심을 때다.", "개구리 울면 못자리 하고, 뜸부기 울면 모심는다.", "찔레꽃 피면 모심고, 찔레꽃 세 번 비 맞으면 풍년든다."찔레꽃은 모내기철에 피기 시작하여 약 한 달 동안 지속된다고 한다. 모심고 난 후, 꽃이 피어 있는 동안 세 차례나 비가 온다는 것은 물이 가장 필요한 생육기에 충분한 물이 공급된다는 것이니 풍년농사는 충분히 예측 가능한 일이다. 이와 같은 표현은 그들의 오랜 경험칙에 의한 지표이자 속신이다. 그런데 과거에는 천수답 논이 대부분인지라 모심을 철에 하늘만 바라보고 발만 동동 구르는 일도 허다했다. 오죽하면 "사월에는 소발자국에 물만 괴어도 막아야 한다,"고 했겠는가. 그러나 한량없이 비를 기다리며 모내기를 미룰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밤송이를 겨드랑이 찡궈봐서 안아프면 심궈도 된다."거나, "대추를 콧구멍에 찡궈봐서 아직 들랑거리면 심궈도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초복이 지나도 비가오지 않으면 호미로 파서 모를 심는 서종이나, 작대기로 구멍을 파는 작대기모를 준비해야 한다. 그러다 말복까지 지나면 도리없이 체념하고 서숙이나 메밀을 심을 수밖에 없었다.△"개구리 울면 못자리 하고, 뜸부기 울면 모심는다."전북지역의 경우 '모심는소리'는 두 종류의 대표적인 가창방식이 있다. 판소리에 수용되어 잘 알려진 '농부가'처럼 한 사람이 앞소리를 메기면 나머지 사람들이 일제히 뒷소리(후렴)를 받는 방식을 '선후창'이라고 하며 익산, 옥구, 김제, 정읍 등 농경지가 많은 서부평야지역의 형식이다. 예컨대 선소리꾼이 "여보시오 농부님에 이내 한 말 들어 보소 / 일락서산 해 떨어지고 월출동령에 달 솟아온다"라고 앞소리를 부르면 이어서 "어 여 어 여 어허루 상사뒤여"라고 후렴을 일제히 부르는 가장 일반적인 형태이다. 선후창 방식의 경우, 마을에 제법 인정받는 앞소리꾼이 있어야 한다. 메기는 소리가 시원치 않으면 받는 사람들의 신명을 끌어내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목청도 좋고, 장단도 정확하고, 사설도 풍부하고, 즉흥적 작사 능력도 있고, 유머도 있고, 리더십도 있어야 앞소리꾼으로 행세할 수 있다. 사정이 그렇다보니 어지간해서는 앞소리꾼으로 인정하지 않아서 그런 사람을 수소문하기도 쉽지 않다. 제보를 부탁하면 당신들끼리 다투기도 한다. '그게 무슨 소리냐', '그 정도면 잘하지 않냐', '그럼 니가 해봐라;' 등등. 자고로 이런 지역에서 큰 소리꾼이 나왔던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한 사람이 메기고 모든 사람이 받는 선후창 방식반면에 두 패로 짝이 나뉘어 한 패가 한 소절을 부르면 다른 한 패가 그에 상응하는 내용으로 나머지 한 소절을 부르는 방식으로 '교환창'이라고 한다. 교환창은 암수로 나뉘어 서로 대구를 이루는 가사를 주고받지만 후렴은 없다. 진안, 무주, 장수 등 주로 동부산간지역에서 많이 부르는 형식이다. 예컨대 한 패가 "해다지고 저문날에 골골마다 연기나네"라고 부르면 다른 패가 앞 내용에 맞추어 "우리님은 어디가고 연기낼줄 모르는가"라고 부르는 식이다. 교환창 방식의 가사는 2행으로 된 한 편의 시를 방불케 한다. 몇 소절만 옮겨보자. "이 논에다 모를 심어 장잎이 훨훨 영화로세 / 어린 동생 곱게 길러 갓을 씌워 영화로세""서마지기 논배미가 반달만치 남았구나 / 지가 무신 반달인가 우리님이 반달이지""물꼬 철철 물실어 놓고 쥔네 양반 어디갔나 / 문어야 전복 손에 들고 첩에 방에 놀러갔네""방실방실 웃는 님을 못 다 보고 해 다 졌네 / 지는 핼랑은 접어나 두고 돋는 해로 다시나 보세" "한산 모시 적삼 안에 박속같은 젖좀 보게 / 많이야 보면 병난단다 담배씨만큼만 보고가소""날오라네 날오라네 산골처자가 날오라네 / 오라길랑 오래다놓고 문고리 잡고서 벌벌벌 떠네"△교환창 방식의 들소리는 한 편의 2행 시모심는 철은 '부지깽이도 거들어야 할 정도'로 바쁘다. 과거 전통농경시절, 이맘때를 '수제비타령'에 비유했다. 즉 모심는 기간이 한 달 정도 소요되기 때문에 한쪽에서 모찌는 사람, 써레질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른 쪽에서는 모심는 사람이 있고, 그러는 사이에 모를 일찍 심은 사람은 어느새 김매기도 해야 한다. 수제비라는 것이 끓일 때 보면 크게 띤 것도 있고, 적게 띤 것도 있고, 먼저 넣은 것은 익어서 퍼지고 있고, 나중에 넣은 것은 아직 설익고... 모내기철은 영낙없는 수제비타령이다. 그런데 들노래의 실상을 보면 어느 지역이건 간에 모심는소리는 그렇게 발달하지 못했다. 정신없이 바쁜 모내기철이 '상사소리' 부를 정도로 한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절기가 닥쳐와도 비가 제때 내려야 모를 심고, 적당히 비가 오면 써레질부터 모내기까지 동시다발적으로 동원되기 때문에 노래 부를 물리적 여유가 없다. 그래서 논농사민요의 핵심은 '논매는소리'에 있다. 들노래의 지역적 분포와 정체성, 수없이 분화되는 다양한 악곡, 민속놀이가 수반되는 노래까지, 들노래의 하이라이트는 논매는소리가 아닐 수 없다.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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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5.18 2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