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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심는 들판에 '얼쑤~ 덩더쿵~' 소리 마을이 흥겹다

■ 진안 마령 평지리- 때로는 신명나고 때로는 구슬프고■ 익산 삼기 검지마을- 벼농사 과정 따라 골고루 잘 갖춰져■ 김제 만경 소동리- 전형적인 전라도 음악 '육자배기'와 비슷■ 군산 대야 탑동마을- 방송 제작 '한국민요대전' 통해 잘 알려져■ 임실 삼계 두월리- 논매는 소리 '방개타령' 전북소리 대표곡■ 순창 학촌 들노래 마을- 전승된 9곡 모두 김매기와 관련된 노래들노래는 개인적 표출보다는 집단적 신명을 지향한다. 그것이 곧 노동요의 존재이고 남도민요의 음악적 표출이다. 들노래는 일의 동작에 따라 박자를 맞추거나 흥을 돋움으로써, 단합된 동작으로 노동의 효율성을 높이고 노동의 피로를 잊게 하는 역할을 한다. 논농사민요에는 보통 '논뀌미는소리'를 비롯하여 농경의 순차에 따라 '모찌는소리''모심는소리''논매는소리''장원례소리''벼베는소리''타작소리''등짐소리'등이 있다. 들노래가 들녘을 떠난 지는 오래 전 일이다. 이앙기가 보급되면서 모심는소리가 자취를 감췄고, 제초제가 보급되면서 논매는소리가 끊겼다. 1970년대 본격화된 이농현상도 한몫했다. 들노래를 70년대까지는 농사현장에서 직접 들을 수 있었다. 8, 90년대에도 비록 현장을 떠났지만 시골 동네 사랑방에서는 얼마든지 집단적으로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2000년대에 들어서는 그나마 고령의 총기 좋은 분이라도 만나면 행운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북지역에서 들노래가 거의 완전하게 보존되어 온 마을이 없지는 않다. 이런 마을들은 대개 민속예술경연대회에 출전했거나, 지방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거나, 아니면 전통문화와 들노래에 대한 특별한 애착심을 가진 분들이 마을에 계셨기에 가능한 경우이다. 과거에는 농사일 중에서 가장 고된 일이 김매기라고 했다. 가장 무더운 혹서기에 하는 작업인데다, 잡초의 생육이 대단히 왕성해서 약 보름주기로 서너 차례를 거듭해야 하고, 논매기 방식 자체가 허리를 최대한 숙여 호미나 손으로 흙을 파 엎는 일이기 때문이다. 팥죽같은 땀은 비오듯 하고, 나날이 자라는 벼는 살갗과 눈을 찌르기 일쑤다. 농경전통에서는 노동이 지루하고 힘들수록 집단적 힘이나 신명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해 왔으며, 그 결사체가 '두레'라고 하는 노동공동체조직이다. 게다가 노동의 고통을 결정적으로 경감시키는 예능적 장치로 두레풍장과 들노래가 한 몫 했음이 사실이다.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들노래는 진안군 마령면 평지리 들노래이다, 이 마을 들노래는 '논매는소리' 6곡과 2곡의 '장원례소리' 등 총 8곡이 전승되고 있다. 김매기 때는 하루 일과에 따라서 〈양산도〉 〈늦은 방개타령〉 〈자진 방개타령〉 〈산타령〉 〈싸오소리〉 〈뚜름마소리〉를 부른다. 평지리 들노래는 때로는 신명나고 때로는 구슬프고 때로는 한가롭고 때로는 군사들의 구령소리 같은 곡조의 노래들이 온 들판을 들썩거린다. 사설만으로는 그 감흥을 도저히 전달할 수 없음이 아쉬울 따름이지만 내용은 이렇다. 연계가 논다 병아리가 논다 금잔디 밖에서 연계가 논다양산을 가자 양산을 가자 모랭이 돌아서 양산을 가자간디 족족 정들여 놓고 밤질 걷기가 허허 난감허네헤에 헤에야 하아 헤에헤에 허 허기나 양산도로다(양산도) 해당화 꽃 한 송이를 와자지끈 끊어서 마누라 머리에 꽂아나 보세가면 가고 말면 말지 네 잡놈 따라서 내 돌아간다산이 높아야 골짝도 깊고 조그마한 여자 속이 얼마나 깊으냐에야 뒤야 허허허 허어야 허어 뒤여 산이로고나(산타령)장원례 때는 '섬마타령'과 '매화타령'을 부른다. 장월례소리란 농사 장원했다며 하는 의례를 말한다. 두벌매기가 끝나고 미리 준비한 사다리에 논주인을 태우고 풍장을 치면서 '닭잡고 술내라'고 시위하듯이 집으로 돌아오면서 부르는 노래다. 지긋지긋한 논매기가 다 끝났다는 해방감도 넘치는 노래이다. 게다가 '지심매고 나면 허물벗은 매미껍데기처럼 빼싹 말라서 사람 꼴이 아닐'정도여서 장원례놀이를 하면서 영양보충에 대한 기대감마저 실린 노래다. 오늘 해도 다 되야 가고 골목골목에 연기가 난다옥사장아 문열어 달라 불쌍한 춘향이 옥 안에 갇혀있다 팔랑팔랑 홍갑사 대기 곤때도 안 묻어 사주단자 온다네노자 좋다 젊어서 놀아 늙고 병들면 나 못노느니라에헤이 여루아 여루아 섬마 궁글려라 내사 헤에헤이(섬마타령)전북의 들노래 마을은 이 밖에도 여러 곳 있다. 익산시 삼기면 검지마을은 1970년부터 몇 차례 민속예술경연대회에 출전한 바 있어서 잘 알려진 곳이다. 이 마을 들노래는 수렁논이어서 소가 들어갈 수 없는 논을 쇠스랑으로 파면서 부르는 '논파는소리'를 비롯해서, 모심을 때 부르는 '농부가', 논 맬 때 부르는'방아타령', 마지막 논매기 즉 만두레 때 부르는 '만물산야', 그리고 낫으로 벼를 베면서 부르는 '벼베는산야', 볏단을 집으로 옮기면서 부르는 '등짐소리', 게상질로 타작하면서 부르는 '타작소리' 등이 있다. 이 마을 들노래는 벼농사 과정에 따라 골고루 잘 갖추어진 특징이 있다. 또 '만물산야'는 전형적인 경상도 민요인 '메나리'와 닮은 곡조여서 영호남 민요의 전파경로를 궁금하게 하는 노래이다. 만경평야의 시작점인 김제시 만경면 소동리에도 들노래가 전승되고 있다. 이 마을 들노래는 전형적인 전라도음악인 '육자배기'를 닮았다. 군산시 대야면 탑동마을에도 기가막힌 들노래가 전승되었다. 이 마을에는 타고난 씨름꾼이자 노래꾼인 고판남옹이 계셨지만 작고한 지도 오래 전 일이 되었다. 다행히 이 분의 목청은 브리태니커에서 제작한 '팔도소리' LP음반과 문화방송에서 CD로 제작한 '한국민요대전'을 통해서 들을 수 있다. 이 마을에서 전승되는 '만경산타령'은 '산아지타령'이라고 부르며, 잘 알려진 '진도아리랑'의 모태가 된 노래이기도 하다. 임실군 삼계면 두월리에도 아주 개성 있고 독특한 들노래가 전승되고 있다. 이 마을 노래 가운데 논매는소리인 '방개타령'은 전북지역 논매는소리의 대표곡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전북지역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가장 특징적으로 불리던 논매는소리이다.끝으로 순창군 유등면 학촌 들노래 마을이 있다. 이 마을 들노래는 논매는소리에 집중되어 있는데 자그만치 9곡이 전승되고 있다. 즉 9곡 모두 김매기와 관련된 노래이다. 논매는소리가 이 마을처럼 다채롭게 분화, 발달한 마을은 전라도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도 유례가 없을 정도이다. 농촌 사람들은 '어정칠월 동동팔월'이라고 한다. 논매기 다 마친 여름철 들녘을 바라보는 한가함이 묻어나는 표현이다. 그리고 '무궁화 꽃피면 밭농사 끝'이고, '백일홍 세 번 피면 쌀밥 먹는다'. 올 한해 풍년농사를 기원한다.

  • 주말
  • 전북일보
  • 2012.05.18 23:02

자생 차밭 - 연둣빛 자연이 우려낸 '선다일미(禪茶一味)'

세상에는 별별 오도방정(悟道方程)이 다 있다. 석가는 새벽별을 보고 문득 깨쳤다. 달마는 캄캄한 벽을 바라보고 소식을 얻었다. 원효는 해골 물을 마신 뒤 눈을 떴다. 물론 피나는 구도정신과 수행이 있고 나서였다. 그렇다면 근기가 허약하고 일상의 부름에 바쁜, 허다한 중생에게도 깨달음에 이르는 방편이 마련되어 있었을까. 있다면 그것은 좀 쉬운 것이어야 했을 것이다. 이를테면 일상다반사처럼.  차의 역사를 일별만 해봐도, 일상다반사는 그저 수사적인 뜻으로 나돌던 말이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애초에 사람이 차를 마시게 된 동기는 뻔하다. 초근목피와 어패류, 짐승을 주식으로 하던 시절, 찻잎에서 해독과 심신의 안정 같은 여러 효능을 알아채고 마시기 시작했다. 차 마시는 일이 밥 먹듯 일상이 되고, 그 일상을 통해 사람살이의 의미를 알아가고, 자기 안의 고요를 만나는 뜻밖의 순간도 있었을 것이다. 차츰 선과 차는 같은 맛이라는 선다일미(禪茶一味)가 회자되고, 차 마시는 풍습이 다듬어져 다도와 다례 같은 예법이 자리 잡은 것으로 보아 무방하다. 하지만 우리 차가 걸어온 길은 그리 순탄치 못했다.△ 기(技) 십년, 예(禮) 십년, 도(道) 십년차는 주로 불가와 선비사회에서 아낌을 받아왔는데, 오랫동안 대중의 일상생활에서 모습을 감추다시피 한 차는 1980년 앞뒤로 정부의 도움과 대중의 관심을 받으며 대중문화운동으로 살아났다. 흔히 30년쯤 차를 마셔야'선다일미'의 경지를 밟을 수 있다고들 말한다. 처음 십년은 차를 다루는 기술을 익히고 다음 십년은 차에 깃든 예법을 터득하고 마침내 마지막 십년에 차의 도에 들어선다. 지금 우리에게 차가 어떤 것인지 궁금해지는 것도 차가 대중화한 지 30년 남짓한 세월을 있었기 때문이다. 그간 차와의 첫 만남은 으레 다도를 통해서였다. 다도는 단순히 차 마시는 법도를 넘어 하나의 학문적 체계를 갖추었다고 해도 좋을 만큼 깊어졌다. 전국에 다도회가 생기고 차의 효능이 과학적으로 밝혀지고 차에 관한 책도 속속 간행되었으며, 무엇보다 다도를 배우고 가르치는 일이 쉬워졌다. 우리 곁에는 깊이와 관록을 지닌 차인이 적지 않으며, 차를 배우려는 사람도 꾸준히 늘고 학교에서 다도는 배워야 할 필수과정이 되었다. 그럼에도 차가 우리 생활과 정신에 뿌리를 내렸는가에 대해선 회의적이다. 차가 우리에게서 멀어진 이유는 간명해 보인다. 커피가 우리 생활을 잠식하게 된 것이 지난 수년 동안 일어난 가장 치명적인 변화일 것이다. 싸고 다양한 데다 풍미까지 좋은 커피는 이제 마시는 데 그치지 않고 바리스타 강좌에서 카페에 이르기까지 커피를 둘러싼 산업은 눈부시다. 이에 견주어 차 산업은 차문화 축제와 차 개발 등 재정적 행정적 지원이 쏟아졌음에도 크게 나아지지 못했다. 최근에는 친환경적인 생산과 착한 소비가 시대의 화두가 되면서 대량생산을 위해 차나무를 밀집해 심고 기계화하고 화학거름을 주는 등 차밭의 반생태적인 재배방식에도 경종이 울렸다. 또한 원산지 표시제로 인해 생찻잎이 도의 경계를 넘지 못하도록 규제됨으로써 제다공정시설을 갖추지 못한 차밭에선 두 손을 놓아버리는 일도 생겼다. 차의 소비가 줄고 중국의 발효차가 밀려드는 등 차의 문화와 산업이 안팎으로 위축되어 지칫거리는 현실에서 전북의 야생 차밭을 바라보는 이목은 사뭇 달라졌다. △ 반생태적인 차밭에서 더불어 공존하는 차숲으로차나무는 강수량이 많고 물이 잘 빠지는 바위 언덕바지에서 잘 자란다. 따뜻한 기후를 좋아하고 저보다 큰 나무들이 그늘을 드리워주면 더더욱 좋아한다. 과거 차나무는 서해 변산반도와 정읍 내장사에서 구례 화엄사와 동해안 울산 다전마을을 잇는 경계선 아랫녘에서 주로 자랐다. 최근에는 지구온난화 덕에 차나무의 재배지는 강원도까지 올라갔지만, 대규모 차밭은 여전히 남녘에 모여 있다. 널리 알려진 대로 전북은 차가 비롯된 시원의 땅답게 자생 차밭이 널리 분포되어 있다. 대표적인 곳으로 부안의 우동리, 고창의 선운사, 정읍의 내장사와 백양사, 순창 구림면 안정리, 익산 웅포 임해사지, 임실 회문산 만일사, 섬진강 상류 강경마을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 야생 차밭에서는 주로 생잎을 그대로 덖은 녹차를 생산하지만 햇볕의 열기와 찻잎 자체의 효소로 발효하는 청차, 황차, 홍차 같은 다양한 차도 만들어왔다. 자연생태적인 순환 안에서 자란 자생차여서 소규모 수제의 명차로 이어져온 셈이다. 차의 재배와 생산 과정에 쏟는 관심이 커지면서 전북의 야생 차밭이 주목을 받는 이유다. 최근에는 전북의 야생 차밭이 차를 처음으로 만나는 곳이자 심신을 치유하는 공간으로도 열리고 있다. 차의 생산에 집중하는 차산업과 차를 마시는 소비 중심의 차문화를 차가 자라는 차숲 자체로 옮겨 넓혀가는 중이다. 이런 노력이 침체된 차산업을 일으켜세울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차에 좀 더 가까워지질 수 있는 길임에는 분명해 보인다. 강경마을 야생 차밭을 거닐며 전 전통술박물관 관장으로 있었던 박시도 선생과 차숲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일찌감치 우리 차문화에서 차숲이 차지하게 될 중요성을 깨닫고 상업적 욕망을 버리고 차밭을 야생상태로 돌봐왔다. 차나무도 다양한 나무와 어울려 기운을 주고받아야 건강하게 성장해야 한다고 말하며, 그래서 그는 재배차밭의 인공적 이미지를 벗겨내고'차숲'으로 부른다. "사람도 차숲의 일부가 되어 편하게 놀아보고, 찻잎을 따서 뜨거운 솥단지에 넣고 덖어 비벼보는 사이에 분명 차가 좋아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차를 잘 알고 좋아졌는데 차를 마시지 않고 못 배길 건 당연하다." 그의 '차노래'는 쉽고 명료하다. 차숲에서 자란 차를 손으로 덖어서 편하게 마시던 처음자리로 돌아가자는 권유다. 그의 말처럼 차숲에서의 체험이 정교한 다도에서도 얻지 못한 차와의 친밀도를 높여줄 것이다. 다만 좋은 환경과 사람의 정성어린 손길로 만들어진 차를 그에 합당한 가격으로 착하게 소비하겠다는 마음만 낸다면, 차처럼 어여쁜 식물을 덖어 우려 마시는 일이 일상다반사가 되고, 선다일미의 경계를 넘나들 일쯤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김정겸 문화전문시민기자(프리랜서 작가)※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 주말
  • 전북일보
  • 2012.05.11 23:02

봄 담긴 '꽃차' 여름 품은 '잎차' 가을 스민 '열매차' 계절이 키운 '뿌리차'

언제부터인지 딱히 알 수 없지만 우리는 마시는 음료는 모두 차라고 불러왔다. 본래 차란 차나무에서 찻잎을 채취해서 만든 것만을 일컫고 차 이외의 음료는 건강음료로 부르는 것이 옳다. 차 마시는 걸 좋아한 민족이니 그 풍습의 여운으로 다른 음료에도 차라는 이름을 얹어 부르지 않았을까 짐작한다. 차 대신 마신대서 대용차라고 하고 오래 전부터 마셔왔으니 전통차라고 즐겨 호명하기도 한다. 그러자 혼란을 덜어볼 양으로 본래의 차는 따로 녹차라고 부르기도 한다. 차에 대한 애정을 늘려 진짜 차는 아니지만 기왕에 차라는 이름을 달고 우리의 생활과 건강에 깊이 관여해온 음료에 대해서도 관심을 쏟아볼 필요가 있다. 전주의 한옥마을은 가장 한국적인 마을로 소문이 자자해져 방방곡곡에서 몰려든 국내외 여행객들로 북적인다. 한옥마을의 명성은 한옥과 한식, 한지와 한복, 판소리 같은 한 스타일이 응축된 데서 비롯되었다. 그럼에도 한옥마을에서 유독 전통 다실은 보기 드물고 커피 하우스만 즐비하다. 한옥마을이 그 이름값을 하려면 전통찻집들이 더 많아져야 한다. 찻집에서는 녹차뿐 아니라 전북의 산야에서 자란 재료로 만든, 다양한 전통차를 준비해 놓으면 좋겠다. 여기에 한 가지 덧붙이자면 한옥마을에 어울리게 '한차(韓茶)'라는 타이틀 밑으로 낱낱의 음료를 불러들이는 것도 좋아 보인다. 〈표 참조〉 꽃차는 전북의 봄이 담기고 잎차는 전북의 여름이 숨 쉬며 열매차는 전북의 가을이 스미고 뿌리차도 전북의 계절이 키워낸 것이라야 한다. 전북의 특산물로 만들어진 다채로운 '한차'를 운치 있는 한옥 다실에서 마실 수 있다는 것만으로 한옥마을을 찾는 흥겨운 이유가 될 것이다. 마셔보고 좋으면 '한차' 상품을 사들고 돌아갈 수도 있고 아예 '한차' 만드는 비법을 한수 배워갈 수 있는 곳이 있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지난 30년 동안 차는 우리것찾기 문화운동을 통해 생산과 소비에서 크게 늘었을 뿐더러 차의 역사와 효능에 대한 연구에서도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한차'는 이러한 차의 길에서 배울 것이 많아 보인다. '동의보감'이나 '증보산림경제' 같은 옛 문헌뿐 아니라 민간과 한방을 통해 알려진 한차는 사실 차에 버금가는 긴 역사와 다양한 종류, 뛰어난 효능과 풍미 등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므로 전해오는 '한차'에 대한 자료와 제조법에 조금만 손을 보아 체계화와 대중화를 거친다면 한차문화는 풍성해질 것이다.지금은 축제의 춘추전국시대로 지자체마다 특색 있는 축제의 깃발을 내걸고 호객하는 정책에 몰두해 있다. 정작 들여다보면 축제야말로 '빛 좋은 개살구'여서 속앓이하기 일쑤다. 그럴수록 축제를 위한 축제에 우리의 에너지를 소진할 것이 아니라 '한차'처럼 전북의 땅과 삶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것들을 살려내 꽃을 피우는 데 공들여야 할 것이다. 한차 차림표꽃차 : 김제 청운사 연꽃차완주 생강나무꽃차임실 목련차산내 구절초차잎차 : 정읍 쑥차동상 감잎차부안 뽕잎차열매차 : 장계 오미자차고창 복분자차고산 대추차 뿌리차 : 남원 둥글레차봉동 생강차김정겸 문화전문시민(프리랜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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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5.11 23:02

한옥 미디어 파사드 - 어둠 속 한옥과 LED의 만남 '빛의 향연'

지난 3일 개막한 제16회 전주한지문화축제 개막식. 특설무대가 된 전주 공예품전시관에 색다른 실험이 시도됐다. 주제는 '한지'. 우주에서 생성된 한지가 멀고 먼 길을 돌아 공예품전시관에 도달하면서 한지를 만든 사람과 역사가 그려졌다. 9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한지가 만들어지는 과정, 그 한지 위에 그려진 사군자 병풍, 병풍을 통해 연상되는 한옥, 한옥의 확장. 칙칙한 한옥의 겉면이 갑자기 형형색색으로 빛이 나면서 영화관 스크린이 된 듯 했다. 시민들은 한동안 발걸음을 멈추고 휴대전화 카메라를 꺼내 한옥의 장관을 담았다. 정지해 있던 무채색 건물이 이제 예술과 시민과 상호 작용하는 것. 이것이 바로 '미디어 파사드'(Media Facade)다.미디어 파사드는 빌딩을 작품의 벽면으로 삼아 LED(발광 다이오드)나 빔 프로젝트의 밝기와 색상을 조절해 형태와 움직임 등을 표현하는 방법이다. 낮에는 시치미를 뚝 떼고 있다가 어둠이 도시를 덮으면 건물에 빛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미술품이 밤의 정령처럼 나타난다. 조명 입자가 크기 때문에 디테일한 이미지는 구현하기 힘들지만, 알록달록한 그림이 벽면에서 움직이도록 보여 이목을 끌게 한다. LED를 활용한 미디어 파사드는 2000년대 이후부터 전 세계 주요 도시에서 유행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2004년 서울 압구정동 갤러리아백화점 명품관에 도입된 것이 효시로 꼽힌다. 금호아시아나메인타워, 신세계백화점, 삼성그룹 본관, 하나은행 본점, LG CNS 상암IT센터와 LG텔레콤 사옥 등도 디지털 파사드를 도입했다. 갤러리아 백화점은 연인들의 사랑 고백 메시지를 미디어 파사드에 게시하는 이벤트를 전개해 많은 호응을 얻기도 했다.이곳 전주에서도 지난해부터 미디어 파사드의 세계적 흐름이 감지되고 있다. 그 중심에 30Days가 있다. 30Days는 2009년부터 전주에서 자생적으로 성장한 미디어아트 그룹으로 다양한 미디어아트의 형식과 가능성을 실험하기 위해 전주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9년 1월 처음으로 전통 한옥인 객사를 캔버스 삼아 미디어파사드 가능성을 본 뒤 6월 전주 공예품전시관의 전면을 미디어라는 물감으로 드로잉했다. 전주에서의 미디어 파사드 시도가 남다른 의미로 평가되는 것은 현대적인 건물이 아닌, 전통 한옥에 시도됐다는 점이다. 전국 최초의 시도이기도 하거니와 한 폭의 수채화를 연상시키는 미디어 파사드는 전통과 현대의 접점을 찾은 시도로 평가된다. 전주 한옥마을이 전주의 대표적인 랜드마크라면, 시각적인 볼거리와 상호 소통 가능한 놀이까지 결합 돼 단순히 대중에게 보여지는 예술은 함께 호흡하고 표출해내는 새로운 문화의 소통을 만들어 내는 중요한 매체라고 볼 수 있다. 대개 미디어 파사드는 마케팅적인 접근으로 시도돼 왔다. 기업이 많은 돈을 들여 미디어 파사드를 설치해 자사를 홍보하기 위한 목적이 크다. 그러다 보니 광고와 예술의 경계에 놓였다. 하지만 칙칙했던 건물이 미디어 파사드를 입으면서 시민들과 소통하는, 예술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게 한다. 문자와 제품 사진으로 구성된 '주입식' 광고가 아닌,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팝아트 형식을 빌리고 있기 때문이다. 기업의 선택이라기보다 정부가 시행하는 옥외광고물관리법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한 점을 감안하더라도, 미디어 파사드가 광고와 예술의 경계에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작가들이 빛의 효과가 던져주는 수혜를 입고자 너나 할 것 없이 미디어 파사드를 설치해 빛공해를 유발할까 염려되는 점이 있긴 하나 건물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LED의 마법'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특히 한옥은 미디어파사드를 통해 대안적인 도시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무궁무진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작은 한옥집에서 태어난 아이가 장가를 가서 첫날 밤을 보내는 모습을 한옥의 창호지 구멍을 통해 엿보고, 전쟁나간 아들을 위해 뒷마당 장독대에 물떠놓고 비는 어머니의 간절한 마음이 한옥을 통해 그려질 수 있지 않을까./송대규 문화전문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 주말
  • 전북일보
  • 2012.05.04 23:02

'미디어 파사드' 의미와 국내외 유명한 곳…대형건물 외벽이 '캔버스' 아름답게 펼쳐진 '빛그림'

소통은 공공예술의 핵심적인 개념이다. 상점 간판에서 도로 표지판까지 과거 도시의 커뮤니케이션은 일방적이고 기능적인 게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최근 도시는 아름다운 소통을 시도하고 있다. 이런 시도 가운데 하나가 빛의 과학이 결합해 도시의 랜드마크가 될 만한 거대한 규모의 건물들을 장식하는 것이다. 빛을 활용해 도시의 예술적인 풍광을 창조해 나가는 방법은 꾸준히 시도돼 왔다. 도시의 광고 전광판을 활용해 영상 작품을 상영하는, 즉 마치 도시가 갤러리처럼 보이게 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미디어 파사드는 좀 다르다. '미디어 파사드'는 건물 외벽을 대형 스크린처럼 꾸며 여러 가지 콘텐츠를 대중에게 선보이는 것이다. 주로 LED조명이나 빔 프로젝트의 밝기와 색상을 조절해 형태와 움직임을 표현한다. 서울역 앞 서울스퀘어는 건물 벽면을 전시 공간으로 활용하는 미디어 파사드의 명소가 됐다. 서울스퀘어는 건물 벽면 LED 조명을 활용해 영국 팝아티스트 줄리언 오피의 '걷는 사람들'을 비롯한 다양한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종각에 위치한 SK신사옥은 건물 주변외벽내부에서 영상을 보여주고, 건물 외관을 빛의 극적인 효과를 만드는 장치들로 꾸며 첨단 통신기업의 이미지를 전해준다. 서울 종로구 소격동의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공사 현장에는 벌거벗은 모나리자의 누드 그림이 그려진 가림막이 설치돼 시민들의 눈길도 끌었다. '모든 것을 보여주는 미술관'이라는 이미지를 전달하기 위해서다. LED를 활용한 미디어 파사드는 2000년대 들어 세계 주요 도시에서 유행하고 있다. 미국 시카고의 옥상공원인 밀레니엄 파크는 벽돌 형태의 LED 집적판을 쌓아 올려 얼굴 형태를 만들고 입에서는 물줄기가 쏟아지는 미디어 분수를 설치해 유명해졌다. 일본 도쿄 한복판 긴자에 들어선 샤넬타워는 화려하며 독특하고 창조적인 LED 파사드로 알려지면서 홍보 효과를 톡톡히 누리고 있다. 영국 런던의 O2 아레나, 2006 독일 월드컵이 열린 뮌헨의 알리안츠 아레나, 2008 베이징 올림픽 당시 세계의 주목을 끈 냐오차오도 미디어 파사드의 대표적인 예이다.이같은 시도는 미술 작품을 부각시켜 만들어지는 이미지를 우회적으로 마케팅에 활용하려는 시도다. 미디어 파사드 혹은 미디어 월의 확산은 이런 흐름을 반영한다. 뉴욕에서 활동 중인 '그라피티 리서치 랩'의 작품 '레이저 태그'는 서울스퀘어처럼 대형 빌딩을 캔버스 삼아 레이저 빔으로 그림을 그린다. 도시 곳곳에 스프레이로 뿌린 낙서인 '그라피티'를 디지털 미디어로 재현한 것이다. 아주 강한 초록색 레이저 빔을 건물에 쏘면 그 흔적을 따라 프로젝터가 빛을 투영하여 마치 빛으로 낙서를 한 것처럼 만들어 준다.미디어 파사드는 순수미술이 기업의 마케팅과 결합하면서 보다 대중에게 가까이 다가갈 기회로 인식되고 있다. 두 분야는 모두 대중과의 소통이 필수적이라는 점에서 바람직하다. 소통의 콘텐츠를 창출하는 작가들이 대중에게 접근하는 방식까지 만들어 내기는 어렵기 때문에 마케팅 전문가들의 힘이 요구된다. 마케팅 전문가 입장에서도 강렬하고 감성적인 시각예술은 훌륭한 홍보 수단이 된다. 도시에 그림을 입히는 미디어 파사드는 강력한 소통의 가능성이 있어 대중과 호흡하고자 한다면 미술을 새롭게 선보이는 이상적인 도구가 될 수 있다. 그 기획이 지속적인 첨단기술과 마케팅 전략, 공공예술로서 미술의 삼박자가 균형을 잘 맞출 수만 있다면 말이다. /송대규 문화전문시민기자

  • 주말
  • 전북일보
  • 2012.05.04 23:02

봄바람 살랑, 눈요기 가득…그냥 있을 수 있나요

전북도민들은 이번 주말 눈요기를 실컷 할 수 있을 것 같다. 전주국제영화제를 비롯, 남원춘향제, 전주한지문화축제, 고창청보리밭축제 등이 기다리기 때문이다. 봄을 만끽할 수 있는 축제 속으로 들어가보자.△ 얼씨구! 춘향제27일~5월1일 광한루원, 요천 수중무대, 방자거리, 춘향예술회관올 춘향제의 주제는 '얼씨구! 춘향사랑'. 시민이 참여하고 시민이 만들어 전 국민이 즐기는 축제로 만들고자 하는 남원시민의 희망과 염원을 담았다. 춘향시대속으로, 창극춘향전, 춘향그네체험, 판소리 춘향가 연창, 춘향국악대전, 춘향선발대회 등 춘향전을 소재로 한 프로그램에 집중된다.'춘향시대 속으로'는 한국 최고의 정원인 광한루원을 춘향전의 주제와 스토리를 느끼고 당시 시대상을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재현했다. 광한루 누각에서는 춘향국악대전 대통령상 역대 수상자와 남원 출신 명창 8명이 행사기간 내내 판소리 춘향가를 연창해 광한루원의 고전적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켜 춘향의 시대를 떠오르게 한다.시민들이 참여해 시내 2㎞구간에서 춘향전을 12마당으로 구성, 행렬과 퍼포먼스를 펼친다.광한루원 주변 도로 600m 방자거리엔 방자마당, 풍물장터가 마련돼 관광객에게 웃음을 선사한다. 또 목공예와 천연염색, 도예, 부채, 판화 등 참여형 체험마당도 함께한다.광한루원 앞 요천둔치 80평 규모의 특설무대에서는 시립국악단의 식전공연을 시작으로 60여 명의 국악인이 펼치는 가야금 병창, 안숙선 명창과 전주시립국악관현악단이 함께 하는 창과 관현악의 웅장하고 다이나믹한 공연도 펼쳐진다. 춘향제의 꽃인 춘향선발대회와 제1회 장원을 차지한 조상현 명창을 비롯한 우리 시대 최고의 소리꾼들의 명창 등용문인 춘향국악대전이 기다린다.△ 한지 물결, 전주한지문화축제 5월3일~5월6일 전주한옥마을, 전주한지산업지원센터, 완주 대승마을제16회 전주한지문화축제에서 전주 한지의 우수성과 다양한 쓰임새를 체험할 수 있다. '전주한지물결, 한류와 함께'를 슬로건으로 건 축제 개막식은 전주공예품전시관 특설무대에서 개막 퍼포먼스와 전주한지국제패션쇼를 즐길 수 있다. 한지패션쇼는 한스타일을 살린 생활복, 아트의상, 파티복 등 다양한 한지의상이 선보인다. 전주한지산업지원센터에서는 한지공예대전 초대작가들의 작품을 마주할 수 있고, 전주공예품전시관에서는 전국한지공예대전 수상작 전시가 이루어진다. 경기전 주차장에는 한지기겁관이 개설돼 국내 한지산업의 현주소를 살필 수 있다.전주 중앙초등학교 일대와 완주군 대승한지마을에서는 한지를 이용한 다양한 체험과 놀이의 장이 열린다. △ 초록 물결, 고창 청보리밭 축제5월13일까지 고창군 공음면 학원농장 야외에서 봄기운을 느끼며 머리를 식히고 싶다면 고창 청보리밭을 가보시라. 생생한 초록물결이 넘실거리는 청보리밭을 테마로 한 제9회 청보리밭축제가 영화제를 전후해 고창군 공음면 학원농장에서 열린다.올 축제의 주제는 '즐거움 가득한 청보리밭!'. 100ha에 이르는 드넓은 청보리밭의 아름다운 경관과 다양한 볼거리, 즐길거리가 준비됐다. 올 축제에서는 관광객의 신청곡과 사연을 방송해주는 '청보리 방송국', 보리밭 사잇길을 걷는 관광객들이 중간 중간 잠시 쉬면서 어울릴 수 있는 '작은 음악회', '양 먹이 주기양털 깎기양젖 짜기'를 직접 체험해볼 수 있는 '양떼목장', 그 옛날 보리밭의 향수와 추억을 떠올리게 해주는 '추억의 옛 물건'과 '서예한지 공예품' 전시 등이 새롭게 선보인다. 또 5월 5일 어린이날에는 TV 동물농장의 '이웅종 소장과 연예견 마루'가 함께하는 '강아지 묘기 쇼'가 등장한다. 보리밥, 보리개떡 등 보리음식과 '널뛰기, 팽이치기, 투호 던지기'와 같은 전통놀이 체험도 준비됐다.

  • 주말
  • 김원용
  • 2012.04.27 23:02

조선 최초의 '요리품평서' 익산 함열서 쓰였다…허균의 '도문대작(屠門大嚼)'

나는 자칭 올리브 마니아다. 몇 해 전 다녀온 터키, 스페인, 포르투칼에서 생애 처음 맛본 올리브 맛에 반해 지금은 밥상에 김치와 나란히 올리브를 두고 먹을 정도다. 여행을 하며, 입맛에 맞는 요깃거리를 찾았다는 행운과 더불어 3대 건강음식이라는 올리브의 참맛을 알게 된 것도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여행을 하면서, 새로운 맛의 세계에 매료되었다. 맛있는 음식은 나라, 인종, 나이 등 모든 것을 초월하는 것 같다. 그리스의 한낮 인사말은 '칼리오렉스(맛있게 드세요)'이다. 기원전 330년 세계 최초의 요리책 아케스트라토스가 그리스 작품이라는 사실이 순순히 인정된다.△ 조선 최초의 음식칼럼니스트 허균(許筠)'홍길동전'의 저자 허균(許筠)이 지은 조선시대 최초의 음식 품평서 '도문대작'. 허균이 요리 칼럼을 썼다는 사실도 흥미롭지만, 이 책이 익산의 함열이라는 고장에서 조선 최초로 집필됐다는 사실도 주목하게 된다. 유배지에서 자신이 전국을 돌며 맛보았던 음식이 그리워 기록해 놓은 각종 요리와 식재료 130여 종이 담긴 '도문대작' 속 진귀한 음식을 맛보았다.허균(許筠)은 29세에 장원급제하여 이듬해 황해도 도지사가 되지만 한양 기생을 가까이 했다는 이유로 파직된다. 그 후 여러 차례 벼슬길에 진출하지만 번번이 파직당한 후 산천을 유람하며 기생 계생과 가까이 지내기도 하고, 시인 유희경과도 친분을 유지하며 인간관계의 폭을 넓힌다. 그러다 1609년 첨지중추부사가 되고, 이어 형조참의가 되지만 이번에는 과거시험에서 조카사위를 부적 합격시켰다는 이유로 전라도로 유배가게 된다. '광해군일기'에는 허균이 죄를 자백하여 전라도 함열 땅에 정배했다는 기록이 있다. 광해군 3년(1611년 1월)이었고 그의 나이 43세다. 당시 함열 현감이었던 한회일(인조비 인열왕후의 오빠)이 그와 밀접한 관계였기에 함열 객사에서 생활했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현재 함라 어린이집 일대를 옛관아터로, 함라파출소 자리는 옛 감옥 자리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는 '함열현'에서 1613년까지 머물면서 '도문대작'이란 음식 관련 책을 쓴다. △ 도문대작(屠門大嚼) - "푸줏간의 문이나 바라보고 질겅질겅 씹으면서 달랜다"허균은 함열에서 1년여 동안 유배생활을 하면서 옛 글을 정리한 '성소부부고' 64권을 저술했으나 지금은 26권만이 전해진다. '성소부부고'는 '장독을 덮을 정도의 하찮은 책'이라는 겸손한 뜻을 지니고 있다. 시(詩)사(辭)부(賦)문(文)외에 조선 최초의 요리품평서 '도문대작(屠門大嚼)'이 실려 있다. 도문대작은 이 '성소부부고'에 실려 있다. '도문대작'은 고기를 먹을 형편이 못 되어 "푸줏간의 문이나 바라보고 질겅질겅 씹으면서 달랜다"는 뜻으로 유배된 처지로 음식을 부러워하는 자신을 가리킨 말이다. 귀양을 온 허균이 귀양지에서 그간 자신이 먹어본 팔도 음식들을 지역별로 기록한 책으로,조리서가 거의 없던 조선 중기 팔도 음식을 기록한 것이라 사료적 가치가 높다. 재미있는 것은 이 책의 서문이다. '조선시대 남성 학자들이 식생활에 대해 거의 논의하지 않았다'며 경계의 글을 남기고 있다. 팔도뿐 아니라 해역에 따른 수산물의 특색과 이를 이용한 젓갈, 포까지도 소개하고 있다. △ 맛있는 책 도문대작"내가 풍악에 구경 가 표훈(表訓)사(寺)에서 자게 되었는데, 그 절의 주지가 저녁상을 차려 왔다. 상에 떡 한 그릇이 있었는데 이것은 귀리를 빻아 체로 여러 번 쳐서 곱게 한 뒤에 꿀물을 넣어 석용(石茸: 석이버섯)과 반죽하여 놋쇠가루에 찐 것인데, 맛이 매우 좋아 찹쌀떡이나 감떡보다도 훨씬 낫다"허균은 대단한 미식가였다. '도문대작'에는 병이류 11종목, 채소와 해조류 21종목, 어패류 39종목, 조수육류 6종목, 기타 차 술 꿀 기름 약밥 등과 계절에 따라 만들어 먹는 음식 17종을 부기하였다. 도문대작에서 소개하고 있는 맛있는 요리를 보자. '방풍죽은 강릉, 석이병은 표훈사, 백산자는 전주, 다식은 안동, 밤다식은 밀약, 차수(叉手:칼국수)는 여주, 엿은 개성, 웅지정과(熊脂正果)는 회양, 콩죽은 북청의 것이 명물이다.' 경상우도의 상인이 전복을 말려서 꽃모양으로 오리거나 얇게 저미는 화복(花鰒)을 만드는 기술에 능하다고 소개하였다. 조수육류에서는 웅장(熊掌곰의 발바닥), 표태(豹胎표범의 태), 녹설(鹿舌사슴의 혀), 녹미(鹿)尾사슴의 꼬리). 방풍나물로 끓인 방풍죽. 한 번 먹으면 달콤한 향기가 입안에서 사흘을 간다는 방풍은 평양의 냉면, 진주의 비빔밥 등과 함께 팔도의 대표 음식으로 꼽힌다.'허균은 책에서 강릉의 해안에서 해풍을 맞고 자란 방풍으로 끓인 것이 아니면 그 맛이 안 난다고 했다. '도문대작'에는 각종 음식과 함께 그 음식의 명산지가 나와 있다. '병이류에서 소개한 대만두는 보만두라고도 불리며 자잘한 만두들을 거대한 만두피에 한데 넣고 다시 한번 복주머니처럼 묶은 음식으로 평안도 의주 지방 사람들이 중국 사람들만큼 대만두를 잘 만든다. 백산자(박산. 쌀로 만든 백당을 고물에 묻혀 먹는 한과)는 전주, 석이병은 금강산, 다식은 안동, 엿은 개성, 약밥은 경주 등이 잘한다.'여러 품목에 관하여 식품의 소재뿐 아니라 그 식품에 관한 음식관습까지 언급하고 있다. 특히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먹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천하게 여기는 점을 지적하면서 먹는 것은 우리 몸과 생명에 연관된 아주 중요한 것임을 강조했다. △ 음식 속에 진리를 찾다"먹는 것과 성욕은 사람의 본성이다. 더구나 먹는 것은 생명에 관계된다. 선현들은 먹을 것 바치는 자를 천하게 여겼지만, 그것은 먹는 것만 탐하고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는 자를 비난한 것이지, 어찌 먹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라고 한 것이겠는가." 허균은 '도문대작'에서 음식 타령만 한 것이 아니다. 먹을 걸 절약하지 않는 현달한 자들에게 부귀영화가 무상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려고 하였다. 음식이란 목숨만 이어가면 되는 것이라며 소박한 식사를 추구했던 정약용 같은 이가 있었던 반면, 자신을 '평생 먹을 것만 탐한 사람'이라고 자백하는 허균 같은 이도 있었다. 공자는 '논어(論語)' '리인'(里仁) 편에서 "선비로서 도에 뜻을 두고도 낡은 옷과 거친 밥을 부끄럽게 여기는 자는 더불어 도를 논의할 수 없다"고 가르쳤지만 허균은 "선현께서 음식을 위하는 자를 천하게 여겼지만 그것은 이익을 탐하고 주창하는 것을 지적한 것이지 어찌 음식을 폐하고 말라지도 말라는 것이겠는가?"라고 해석했다. 허균의 '도문대작'에는 짧게나마 음식에 얽힌 그의 개인적인 추억부터 당시의 풍습가지 기록되어 있어 더욱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음식에 관한 책이 거의 전무했던 조선시대 중기, 당시 상류계층의 식생활과 향토의 명물을 일별할 수 있다. 17세기의 우리나라 별미음식을 알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김진아 문화전문시민기자(익산문화재단 경영기획실장)※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 주말
  • 전북일보
  • 2012.04.20 23:02

익산지역 대표 음식

■ 당뇨병 치료에 탁월 1400년 맛'서동마'삼국유사의 서동요의 고장인 익산은 마의 주산지다. 서동이라는 이름은 마를 캐서 팔아다 생활했기 때문에 당시의 사람들이 그렇게 칭했던 것이다. 1400여 년이 넘는 익산의 마 재배 역사는 '삼국유사'가 보증해 주고 있다. 익산에서 1400년 전부터 마 재배와 관련된 기록이 '삼국유사 기이편 무왕조'와 '신증동국여지승람 고려사' 등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서동마는 25~30℃로 땅심이 깊고 배수가 양호한 지역일수록 수량과 품질이 보장이 된다. 최근 연구에 의하면 마는 당뇨병 치료에 탁월한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육회 듬뿍 얹어 원기 회복 '황등 비빔밥'황등 3미(味)의 하나인 황등 비빔밥. 일제강점기 5일장이 서던 황등장터에서 장터 일꾼과 상인들에게 육회를 듬뿍 얹은 비빔밥을 만들어 주면서 시작됐다. 원기 회복에 좋은 이 음식은 고된 노동을 해야 하는 장터 사람들에게 매우 인기가 있었다. 아삭한 콩나물, 시금치, 쑥갓, 미나리 등 각종 나물과 함께 비빈 뒤 쇠고기 육회를 듬뿍 얹고 참기름으로 고소한 맛을 낸다. 한 입 넣으면 토속적인 색다른 황등 비빔밥의 맛의 세계가 펼쳐진다. ■ 날씬하고 맛과 향 좋은 '탑마루 고구마'익산은 예로부터 고구마가 유명하다. 재배 면적인 975ha로 전국에서 3번째로 넓다. 익산의 토질은 고구마 재배에 매우 적합한 배수가 잘 되는 황토와 마사토가 섞여 있어 고구마 조직을 단단하게 만들어 주고, 그 단단한 섬유소는 장을 튼튼하게 해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탑마루 고구마는 손에 잡고 먹기 좋은 날씬한 모양으로 밤처럼 포근하고 맛이 좋으며 고구마 특유의 향미가 뛰어나다. 최근에 자색 고구마도 출시가 되어 인기를 끌고 있다.■ 봄철 입맛 돋우기 위해 먹는 '웅포 우어회'웅포(熊浦)의 옛지명은 곰개다. 금강은 본래 곰강이었다. '곰'은 '크다'는 의미를 지녔으니 '큰강'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지금의 웅포는 유유히 흐르는 금강을 생활터전으로 삼으면서 물자를 실어 나르는 집하지로 오랫동안 몸집을 키워왔지만, 금강하굿둑이 생기면서 해수 유통이 막혀버려 포구로서의 기능이 상실되고 말았다. 금강의 명품 맛 우어회. 청어목 멸치과에 속하는 웅어 또는 우여, 위어, 의어 라고도 불린다. 우어는 밀물을 타고 황해바다에서 흘러 들어오는 바닷물과 금강을 타고 흘러 내려오는 맑은 민물이 만나는 곳에서 잡히던 우어는 4~5월 보리가 파릇파릇 할때가 제철이다. 우어는 밴댕이하고 비슷한 습성을 가지고 있었서 그물에 걸리면 성질이 급하여 금세 죽어버리기 때문에 잡는 즉시 내장이나 머리를 떼어 내고 얼음에 채워야 한다. 주로 회무침으로 먹는다. 백제 의자왕이 봄철에 입맛을 돋우기 위해 우어회를 즐겨 먹었다고 전하는데 조선 말기에는 임금이 우어를 즐겨 먹어 행주에 사옹원 소속의 위어소를 두어 우어를 잡아 진상하였다고 전해진다. 지금도 웅포면 소재지에는 수십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간판을 붙여놓고 우어회를 선보이는 식당들이 남아 있다. 김진아 문화전문시민기자(익산문화재단 경영기획실장)

  • 주말
  • 전북일보
  • 2012.04.20 23:02

"익산은 우리나라 음식문화 중심지"

조선 최초의 음식칼럼이 익산 함열에서 집필된 사실에 주목한다. 허균은 '맛의 무릉도원'을 익산에서 본 것일까? 450년 전에 예견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상상을 해본다. 익산에 조성되고 있는 국가식품 클러스터. 향후 100년의 음식산업의 미래를 익산에서 준비해야 한다. 국가식품클러스터 조성은 R&D중심의 식품기업, 민간연구소, 연관 기업 등을 유치하여 동북아 식품시장의 허브로 육성하고자 하는 사업이다. 100여개의 식품관련 기업 및 10여개의 민간연구소가 들어설 것이다. 450년 전 허균은 고독한 유배지에서 맛있는 책'도문대작'을 집필하면서, 이미 상상했을지도 모르겠다.사실 치욕적인 일제병합 이후 일본식 국수(우동)과 정종을 취급하는 일식 음식점들이 서서히 조선 팔도를 점령해갔다. 그러나 일제의 말살정책에도 불구하고 조선음식의 자존심을 굳건하게 지켰던 음식점이 있었으니 익산의 해신관(海信館)이 그곳이다. 동아일보 1930년 1월 10일자에는 '조선 맛이 보이는 우리 요리점'이라는 기사가 실려 있다. '미려하게 건축한 현대식 콘크리트 양옥의 청결한 온돌 시설에는 순 우리 요리로 내외 인사의 발을 끌어 조선인 체면을 세운다'며 익산 해신관 사진을 함께 게재했다. 익산의 조선 음식점 해신관은 전국적인 명성을 가진 전통음식의 자존심이었던 것이다. 아쉽게도 해신관은 명맥을 이어오지 못하고 문을 닫고 말았다. 지금은 자취와 흔적을 찾아볼 수 없지만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조선요리 전문점으로 익산의 해신관이 소개된 의미는 매우 크다. 우리나라 음식 문화의 중심지가 익산 지역이었다는 방증이 되기 때문이다. 김진아 문화전문시민(익산문화재단 경영기획실장)

  • 주말
  • 전북일보
  • 2012.04.20 23:02

익산 미륵산과 서동요 - 지위·신분 뛰어 넘은 사랑의 전설

미륵산은 익산의 평야지대에서 홀로 오뚝하다. 익산과 전주, 충남 쪽으로 열린 드넓은 평야에 미륵산이 가장 전진 배치되어 있는 형국이다. 미륵산은 등 뒤로 완주 고산 쪽에서 흘러나온 노령산맥을 거느리고 평야지대를 향해 가장 먼저 달려가는 무장의 모습을 닮았다. 실제로 미륵산은 고조선과 백제의 중요한 전략적인 요충지였다. 미륵산에는 1800m에 이르는 견고한 석성이 남아 있다. 고조선의 준왕이 쌓은 성이다. 익산은 고조선의 마지막 도읍지로 알려져 있다. 뿐만 아니라 미륵산 주변의 왕궁리 일대는 백제의 수도이기도 했다. 이러한 가치가 인정받아 문화재청은 2012년 3월에 경주, 부여, 공주와 함께 익산을 고도보존지구로 선정했다. 앞으로 10여 년간 이 도시들은 문화유적 복원과 보존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질 전망이다. 무엇보다 미륵산은 선화공주와 서동의 사랑의 전설을 품고 있다. 서동설화는 어떤 러브스토리보다 아름답고 극적이며 따뜻하다. 우리가 사랑이 이야기를 떠올릴 때 멀게는 로미오와 줄리엣을 떠올리고, 가깝게는 춘향전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서동설화는 이 모든 이야기를 합친 것만큼이나 극적인 요소가 가득 내장되어 있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적대적인 집안 간의 사랑 이야기이고, 춘향전은 신분의 격차를 뛰어 넘는 사랑의 이야기이다. 사랑이란 이렇게 어떤 장애요소를 넘어설 때 극적인 아름다움을 생성한다. 그런데 서동설화는 이 모든 요소를 다 가지고 있다. 서동요와 관련된 러브스토리는 역사상 그 유래를 찾기 어려운 파격적인 사랑인 것이다. 이들의 사랑은 지위와 신분을 뛰어 넘고, 그것도 모자라 적대국이라는 경계마저 훌쩍 뛰어 넘어 버린다. 이러한 기적적인 사랑은 서동설화 이전에도 이후에도 찾아보기 힘들다. 사랑의 기적이 이 모든 현실적인 격차를 뛰어 넘어 전설을 이루어 낸 것이다. 서동설화에서 서동은 노래를 이용해서 선화공주를 꾀어낸다. 서동요가 유행했을 당시, 삼국시대에는 고유문자가 없었고, 한자가 전래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였다. 따라서 당시에 노래와 음악이란 최고의 놀이문화이자 공연문화였다는 게 일반론이다. 이러한 까닭에 서동이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노래를 이용한 것은 당시로서는 최고의 매체를 이용한 셈이다. 미륵산에 봄이 왔다. 이제 곧 온 산 불 지르듯 진달래며 철쭉이 산허리를 척척 휘감아 오르기 시작할 것이다. 서동설화가 깃든 미륵산 중턱의 사자사에 바위에 앉아 땀을 식히고 있는데 문득 솜사탕처럼 단 미풍이 코끝에 간지러웠다. 해마다 봄이 되면 여자도 아닌 내가 무담시 황냥끼가 도져 끙끙 앓곤 했었다. 올해도 그 달달한 가슴앓이가 시작될지 은근히 기대가 되었다.장용수 문화전문시민기자(소설가)※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 주말
  • 김원용
  • 2012.04.13 23:02

선화공주와 서동은 사랑했을까?…'서동요'의 진실은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정을 통해 두고서동님을 밤이면 몰래 품고 간다. 서동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마를 아이들에게 나눠주며 노래를 부르게 했다. 그래서 이 노래는 서동의 꾐에 넘어간 아이들도 부르고, 어른들도 불러 당시 신라의 수도에서 최신 유행가가 되었을 것이다. 이 노래가 신라의 시장과 거리마다 울려 퍼졌다고 상상해 보라. 서동은 선화공주를 꾀어내기 위해 당시 적국이었던 신라의 수도에 잠입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노래는 아이들이 부를 만한 노래가 아니다. 오히려 틉틉한 토주에 취한 사내가 정인을 그리워하며 불렀을 법한 내용이다. 물론 토주에 취한 사내는 서동이었고, 서동은 자신이 부른 노래를 아이들에게 부르게 했을 것이다. 이 노래에는 관음증을 자극함과 동시에 지배층을 조롱하는 질시가 담겨 있다. 시장 거간꾼과 주막 등지에서 이 노래는 불에 기름을 부은 듯이 번져갔을 것이다. 그래서 이 노래와 그로인해 발생된 유언비어 때문에 선화공주는 신라의 선량한 백성들은 물론 대신들로부터 비난을 받고 왕의 노여움을 샀을 것이다. 결국 왕가의 도덕성 실추에 대한 막중한 책임을 지고 선화공주는 쫓기듯이 신라왕궁을 떠나야 했을 것이다. 신라왕궁에서 쫓기듯 길을 나선 선화공주 앞에 서동이 나타난다. '마를 캐는 소년'에 불과했던 서동이 이웃나라 공주를 자신의 여자를 만들기 위해 꾸민 계락에 선화공주가 걸려든 것이다. 그리하여 사랑의 전설이 시작된다.동요는 참요(讖謠)적인 성격이 강하다. 참요는 일정한 목적을 가지고 일부의 사람들이 퍼뜨리는 노래이다. 따라서 참요는 노래를 널리 퍼뜨려서 사회분위기를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조장해 나가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서동요는 서동이 선화공주를 얻기 위하여, 즉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일부러 노래를 퍼뜨리고 다닌, 참요의 시발점이라고 볼 수도 있다. 서동설화의 이야기 맥락으로 보면 서동은 선화공주와의 결혼을 계기로 왕위까지 오르게 된다. 즉, 선화공주와의 결혼이 무왕의 즉위에 결정적인 요인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랑의 전설이 의심받고 있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2009년 1월 19일에 미륵사지 석탑 해체 보수 과정에서 백제왕실의 안녕을 위해 조성된 사리장엄구를 1370년 만에 발굴했다고 발표하면서 유물 683점을 공개했다. 사리장엄구 발굴과 함께 서동설화의 진위성 논란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미륵사를 창건하고 사리를 봉안하게 된 내력이 새겨진 金製舍利奉安記(이하 '사리봉안기'라 약칭함) 때문이다. 금판에 193자가 적혀 있는 사리봉안기에는 선화공주가 무왕에게 청을 해서 미륵사가 창건되었다는 서동설화의 내용과는 다른 내용이 담겨 있는 까닭이다. 이 때문에 미륵사와 서동설화와 관련한 주제로 학술대회가 연달아 개최되었다. 그리고 언론매체와 연구자들의 높은 관심 속에서 30여 편이 넘는 논고들이 발표되기도 했다. 서동설화에 대한 진위성 논란들이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진위성 논란의 핵심우리 백제 왕후께서는 佐平(좌평) 沙宅積德(사택적덕)의 따님으로 지극히 오랜 세월[曠劫]에 善因(선인)을 심어 今生(금생)에 뛰어난 과보[勝報]를 받아 萬民(만민)을 어루만져 기르시고 불교[三寶]의 棟梁(동량)이 되셨기에 능히 淨財(정재)를 희사하여 伽藍(가람)을 세우시고, 己亥年(기해년) 정월 29일에 舍利(사리)를 받들어 맞이했다. <발굴된 "金製舍利奉安記"에 대한 동국대 김상현 교수의 번역문>여기서 기해년(己亥年) 정월 29일이란, 639년 1월 29일이다. 이 기록을 통해서 우리는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첫째, 미륵사의 창건 시기가 서기 639년인 것으로 밝혀진 것이다. 이는 백제 무왕의 재위기간인 600~641년과 일치한다. 무왕이 죽기 2년 전이다. 따라서 그간의 여러 추측과 억측들이 난무했던 미륵사 창건 시기에 대한 논란은 일단락된 셈이다. 둘째, 우리가 오랫동안 믿어 왔던 선화공주와 서동의 러브스토리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삼국유사'의 서동설화에 의하면 무왕이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를 아내로 맞이하였고, 부인의 소원으로 미륵사를 창건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사리봉안기에는 백제 무왕의 왕후가 '선화공주'가 아니라 백제 귀족 사택적덕의 딸이라 명시되어 있고, 미륵사를 세우게 한 것도 선화공주가 아닌 백제 귀족의 딸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서동설화에 나오는 선화공주는 가상의 인물이라는 논의가 힘을 얻고 있으며, 설령 실존 인물이었다 해도 선화공주는 미륵사와 무관할 것이라는 추론이 득세하는 형국이다. 물론 이를 반박하는 논의 또한 적지 않다. 그렇다면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 서동설화에 대한 기존의 논의는 대략 세 가지 관점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즉, 역사학적 관점과 불교 사상적 관점, 국문학적 관점이 그것들인데, 각자의 입장에 따라 해석의 양상이 달랐다. 그런데 사리봉안기가 발견되면서 서동설화의 역사적 진위성의 논란이 압도적으로 많아졌다. 이러한 까닭에 서동설화가 지니고 있는 여러 해석학적 가능성들이 축소된 면이 있다. 이러한 접근 방식들은 서동설화의 내용 구성방식에서 기인한다. 서동설화는 서동의 출생과 선화공주를 얻기까지의 과정(문학), 무왕과 미륵사 창건에 대한 내용(역사), 지명법사의 역할과 미륵사를 창건하게 된 사상적 배경(사상)으로 구성으로 되어 있는 까닭이다. 그런데 사리봉안기의 내용도 사상, 역사, 문학적인 요소들의 조화로 구성되어 있다. 서동설화와 사리봉안기는 내용이 매우 유사한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서술방식은 당대에 일반적인 형식이었다는 추론이 가능해진다. 즉 당대인들은 사상과 역사와 문학을 따로 구분하지 않고 이들을 통합해 하나의 진실을 구성하는 도구로써 이야기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 학제간 통섭적 시선 필요실제로 서동설화가 실린 '삼국유사'를 집필하기 위해 일연은 세 종류의 책을 참고 했다고 전해진다. 그것은'옛 책(古本)', '삼국사(三國史)', '전(傳)'이다. 즉, 일연은 역사적인 사료(귀족의 입장)를 참고하면서 민간의 이야기(문학)에 접근하고, 사상적 입장(불교철학)을 더하는 방식으로 당대 현실을 입체적으로 구성해서 서동설화를 서술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양의 세례를 받은 근대적 학문체계는 학제간의 경계가 뚜렷하다. 하지만 근자에 들어 쇄말화 되어 가는 학문적 경향을 극복하고, 종합적인 인식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으로 학제간의 경계를 무너뜨리려는 현상이 있다. 이러한 현상은 인문학뿐만 아니라 자연과학에서도 종합적인 인식에 도달하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른바 '통섭'이라 불리는 이러한 방법론은 보다 종합적인 인식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지로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우리 조상들은 이런 종합적 인식론을 이미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것은 서동설화와 사리봉안기의 이야기 구성 형식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서동설화 뿐만 아니라 사리봉안기도 역사, 문학, 사상적인 면이 조화를 이루어 이야기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동설화를 역사적인 관점만으로 이해하려 들면 종합적인 인식에 이르기 어렵다. 한편 역사적 인식론에 대해서는 노에 게이치의 언급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노에 게이치는『이야기의 철학』에서 과거의 사건은 그 위로 겹겹이 퇴적된 시간의 퇴적층을 통해서 밖에 인식될 수 없다고 보았다. 곧 기억되고 상기되는 것은 정확하게 재현된 과거가 아니라 해석학적 변형과 해석학적 재구성으로 이루어진 과거라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적 사실은 절대불변의 객관적인 것이 아니며 인간이 그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이야기하는가라는 무수한 시선의 복합체, 즉 이야기의 집성으로 해석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서동설화를 종합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수한 시선의 복합체, 즉 학제간의 통섭적인 시선을 견지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왜 사리봉안기에는 선화공주가 아닌 다른 백제 귀족의 딸이 무왕의 왕비로 기록되어 있을까? 사리봉안기에는 백제의 귀족인 사택적덕의 딸이 무왕의 왕비로 되어있다. 그리고 그녀가 미륵사를 창건한 것으로 되었다. 따라서 선화공주와 서동의 러브스토리는 허구라는 주장이 가능해진다. 그리고 선화공주는 미륵사창건과는 무관하다는 주장도 더불어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사리봉안기의 기록만으로 선화공주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지나친 단견이다. 왕조 시대의 임금들은 부인을 여러 명 둔 경우가 흔했기 때문에 좌평 사택적덕의 딸은 무왕의 여러 왕후 중의 한 명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삼국사기』 백제본기 5권 무왕조(條)에는 "무왕 39년(서기638년) 봄 3월에 왕은 빈(嬪)과 더불어 큰 못에 배를 띄우고 놀았다"라는 기록을 통해 무왕에게는 정비(正妃)와 빈(嬪)을 포함하여 여러 명의 부인이 있었다고 추정한다. 즉 무왕의 왕비는 한 명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미륵사는 3원(院), 3탑(塔)의 양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미륵사의 중원은 선화공주의 주도하에, 그리고 동원과 서원은 사택황후의 주도하에 창건되었다고 추정되기도 한다. 혹은 선화공주가 일찍 사망하고 사택적덕의 딸이 두 번째 왕비가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이러한 논의들을 바탕으로 볼 때는 새롭게 발견된 사리봉안기의 내용이 서동설화의 내용과 상치된다고 볼 수 없다. 장용수 문화전문시민(소설가)

  • 주말
  • 김원용
  • 2012.04.13 23:02

블로그로 만나는 전북 - 클릭~클릭~ 전북의 매력에 흠뻑 빠지다

주5일제가 확산되면서 여행과 레저, 스포츠 등 여가문화가 빠르게 발달하고 있다. 누구나 주말을 즐길 수 있는 덕분에 매 주말이면 "어디로 놀러갈까?" 고민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이들은 매주 산으로, 강으로 가족, 친구, 연인과의 즐거운 추억을 만들기 위해 전국 곳곳으로 떠난다. 교통망 덕분에 전국이 1일 생활권에 접어든 것도 한몫 했다. 여가를 즐기려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가장 큰 혜택(?)을 보게 된 이들이 자치단체다. 그동안 각 지역의 매력을 알릴 기회가 없던 자치단체에게 주5일제 실시는 절호의 기회가 됐다. 군산이건 제주도건 강원도건 주말 이틀이면 어디든 다녀올 수 있는 세상이 되다보니 축제가 좋다고 소문나면 전국에서 수만명의 관광객이 몰리는 건 예삿일이 됐다. 좋은 세상이다.그러나 자치단체의 고민 또한 깊어졌다. 사람들이 원하는 곳이면 '언제 어디든' 갈 수 있는 여건이 되다보니 전국 모든 자치단체가 관광객 유치 경쟁에 돌입했기 때문이다. 제주도부터 서울시까지. 전주부터 강원도 두메산골까지 전국을 찾아다니는 여행객들 '모시기' 경쟁이 치열하다. 문화관광을 중심으로 한 지자체들의 경쟁은 '홍보전쟁', '축제전쟁'으로 불릴정도다. △자치단체, 온라인을 잡아라!홍보경쟁이 치열하다보니 자치단체들은 어떻게 하면 사람들과 연결될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지역의 매력을 적극적으로 알려 그들을 유치하기 위해서다. 보다 쉽고, 빠르고, 재미있게 사람들에게 다가가야만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고, 그들을 우리 지역에 관심갖도록 만들 수 있다. 그렇다면 자치단체들이 선택한 방법은 무엇일까? 바로 인터넷이다. 한국방송광고공사의 '2011소비자행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TV만큼 인터넷을 많이 접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0대와 20대, 30대는 각각 95%, 96%, 91%로 90%를 넘었고, 40대의 경우도 인터넷이 79%로 TV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매체 접촉율을 기록했다. 그만큼 인터넷을 많이, 또 자주 접하고 있다는 뜻이다. 자치단체들은 인터넷을 통한 지역 알리기에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온라인 배너광고나 이벤트 진행은 기본이고 블로그를 개설해 지역과 관련된 여행, 문화 소식을 전달하기도 한다. 최근 가장 빠르게 떠오르고 있는 소통채널인 소셜미디어(SNS)를 활용하는 경우도 많다. 그동안 보도자료를 내고 언론보도를 유도하는 수동적인 홍보에 비하면 대단히 큰 변화다. △온라인 홍보, 블로그에 빠지다가장 대표적인 온라인 홍보채널은 블로그다. 블로그는 '온라인 일기장'의 형식을 띤 미디어로 사진, 동영상, 글 등 다양한 콘텐츠를 담아낼 수 있고, 인쇄매체와 달리 지면이 무한에 가까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분량제한 없이 자유롭게 내놓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블로그의 또다른 장점은 네이버, 다음, 구글 등 국내 주요 포털사이트에서 쉽게 검색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콘텐츠를 알릴 수 있다는 점이다. 인터넷 검색에 쉽게 잡히지 않는 홈페이지와 달리, 블로그는 각각의 개별 글들이 검색결과에 등록돼 많은 사람들에게 노출되는 등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껏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블로그는 많은 기업이나 단체, 개인에게 폭넓은 사랑을 받고 있다. 삼성이나 LG, CJ, 풀무원, 농심 등 국내 대부분의 기업들이 블로그를 통해 자사의 소식을 대중들에게 전하고 있고, 청와대부터 교육과학기술부, 농림수산식품부 등 주요 정부부처, 그리고 서울시부터 전라북도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기관들 역시 블로그를 활용한 홍보에 적극 나서고 있다. 최근에는 블로그의 영역이 더욱 넓어져 모든 홍보채널의 중심으로 변화하는 모습도 보인다. 서울시는 지난달 20일 서울시 홈페이지를 워드프레스라는 블로그 시스템으로 개편해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고, LG전자는 트위터와 페이스북, 유튜브 등 다양한 홍보콘텐츠를 블로그에서 통합해 보여주는 '소셜LG(Soci al.lge.co.kr)' 사이트를 오픈해 온라인 홍보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쉽고, 재미있고, 자유롭게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다보니 블로그는 이제 온라인 홍보의 기본으로 여겨지고 있다. 요즘 주목받고 있는 트위터, 페이스북 등 소셜미디어를 이용한 홍보 트렌드 속에서도 기업들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기업블로그 개설인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블로그 홍보, 전북서도 인기 이러한 흐름은 전북도 예외가 아니다. 전북내 여러 자치단체 및 축제들은 공식블로그와 SNS계정을 개설, 운영해 지역홍보에 나서고 있다. 발빠른 자치단체들은 벌써 운영이 2년, 3년째에 달해 나름의 노하우를 축적하고 있을 정도다. 현재 운영중인 도내 자치단체 블로그로는 전라북도 블로그 '전북의 재발견'(blog.jb.go.kr), 완주군 블로그 '완주스토리'(wanjublog.com), 익산시 블로그 '익산이 날마다 좋아지고 있다'(hiksanin.blog.me), 정읍시 블로그 '단이풍이'(jeongeupnews.blog.me) 등이 있고, 축제블로그로는 전주세계소리축제 블로그 '소리타래'(blog.sor ifestival.com), 한국음식관광축제 블로그(iffe-kff.com) 등이 있다. 자치단체 블로그들은 블로그를 통해 지역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정보와 이야기를 사람들의 눈높이에 꼭 맞는 방식으로 풀어내는 것이 특징이다. 단순히 보도자료로 낼 법한 딱딱한 주제의 이야기가 아닌,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풀어낸다. 전라북도 블로그 및 소셜미디어를 담당하고 있는 홍보기획과 장경선 주무관은 "블로그는 지역의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거부감없이 재미있게 전할 수 있는 점이 매력적인 매체"라며 "블로그를 보고 전북의 매력을 느꼈다는 댓글을 볼 때마다 뿌듯함을 느낀다"고 말했다.성재민(전북일보 문화전문시민)

  • 주말
  • 김원용
  • 2012.04.06 23:02

전라북도 블로그 성공 비결은…

전국에서도 우수사례로 꼽히고 있는 전라북도 블로그. 인기있는 맛집에는 그들만의 비법이 있듯, 성공적인 블로그에도 당연히 이유가 있다. 지난 2009년 개설해 올해로 4년째 공식 블로그 '전북의 재발견'을 운영하고 있는 전라북도는 지난해 한국블로그산업협회에서 선정하는 '2012대한민국블로그어워드' 공공부문 우수상을 수상하는 성과를 거뒀다. 꾸준한 운영과 지원을 통해 그동안 1일 평균 1천여명, 현재까지 70여만명의 방문자가 다녀갔고, 블로그 구독자 수도 1,700여명에 달한다.  전라북도 블로그의 성공비결을 담당자를 통해 들어봤다.첫째, 차별화된 콘텐츠다. 수많은 정보와 미디어에 노출되어있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선 남과 다른, 차별화된 콘텐츠를 보내세워야만 관심을 끌 수 있다. 지금까지 하지 않았던 것들, 상식을 깨는 것들, 다른 곳에선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이야기들이 바로 차별화를 만드는 핵심이다. 전라북도 블로그에는 이런 차별화의 원칙을 잘 지키는 콘텐츠들이 많다. 대학MT 시즌을 겨냥해 '대학생이 말하는 전라북도MT 명소 2곳'이라던가 '임실치즈테마파크와 순창고추장마을의 체험프로그램 비교', '인기 드라마 <더킹>에 등장하는 새만금 이야기 등'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사람들이 딱딱하게 여기는 정책이야기도 쉽게 풀어내고 있다. 장수 한누리시네마를 소개한 '산골마을에 3D 영화관이 있다?'나 '영국에서 배워 완주에서 대박난 로컬푸드 스토리' 등은 무려 50여개 이상의 댓글이 달릴 정도로 사람들의 관심을 많이 받았던 글들이다. 둘째, 블로그 단과의 협업이다. 담당자는 "전라북도 블로그 운영의 중심은 직접 현장에서 발로 뛰며 전북의 소식을 전하는 도민 블로그 단"이라고 말한다. 그만큼 블로그 운영에 있어 단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대학생부터 교장선생님까지. 2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한 도민 30여명으로 구성된 블로그 단은 매월 2건 가량의 기사를 직접 취재해 블로그에 게재한다. 그들이 취재한 기사는 그 어떤 기사들보다 생생하다. 직접 현장에 가서 보고, 느끼고, 경험한 이야기들을 털어놓기 때문이다. 앞서 소개한 차별화된 콘텐츠들은 모두 도민단이 직접 자신만의 시각을 가지고 만들어 낸 소중한 작품들이다. 셋째, 방문자들에 대한 세심한 배려다. 아무리 인기있는 맛집이라도 불친절한 서비스를 받으면 다신 오고 싶은 마음이 안생긴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입소문마저 퍼뜨린다. 그래서 전라북도 블로그는 모든 방문자들의 댓글에 세심한 답글을 달아 기분좋은 경험을 선물하고 있다. 블로그에선 곧 방문자가 전라북도 여행자이기 때문이다. 실제 전라북도 블로그에 들어가보면 글마다 평균 20~30개 가량의 댓글이 달려있다. 방문자들은 "친절하게 답해주기 때문에 블로그에 더 자주 들어오게 된다"고 말한다. 성재민 (문화전문객원)

  • 주말
  • 김원용
  • 2012.04.06 23:02

아름다운 전북의 풍경 사진 볼 수 있는 블로그

인터넷을 떠돌아다니다보면 '아~' 하는 감탄을 자아낼만한 블로그들이 많다. 멋진 사진들 때문이다. 뷰파인더를 통해 보는 아름다운 전북의 풍경들을 선사하는 매력적인 블로그 세 곳을 소개한다.■ 업데이트도 빠르신 교장선생님△'빛과 바람을 그리는 건지의 사진 이야기사진을 좋아하는 어느 교장선생님이 운영하는 '빛과 바람을 그리는 건지의 사진 이야기'(blog.naver.com/singunji). 지난 2010년 네이버 파워블로그에 선정되기도 한 이 블로그에는 다양한 전북의 모습을 기록한 사진이 담겨 있다. 교장 선생님의 연륜 때문인지 꽤 많은 시간을 투자하지 않으면 만날 수 없는 멋진 사진들이 즐비하다.멋진 일출과 일몰, 느낌있는 흑백사진 등 다양한 사진들을 보고 있자면 흡사 '전북의 갤러리'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 업데이트도 거의 매일 이루어지고 있으니 사진에 관심이 많은 분들이라면 꼭 한번 보시라고 강력 추천하는 블로그다.■ 가족과 즐길 수 있는 문화 소개△'우리집' 두번째 소개할 블로그(blog.naver.com/twinkia)는 '우리집'이다. 이 블로그도 역시 멋진 사진들로 가득하다. 깨끗하게 편집된 이미지가 시원시원한 매력이다. 이 곳의 가장 큰 특징은 운영자가 자신의 두 딸과 함께 다닌 곳곳의 이야기를 전해진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사진에 빠진 이들을 '홀로 사진찍으러 다니는 이들'이라고 생각하곤 하지만 이 블로그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가족과 함께 사진을 찍는 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자녀들과 함께 전북여행을 계획하고 있는 분들이라면 무척이나 즐겁게 볼 수 있는 블로그다.■ 노력없이 찍을 수 없는 작품들△'키맨포토'어딘가로 떠나고 싶다면 이곳을 들러보자. '키맨포토'(blog.naver.com/yang713)는 전북의 '순간'이 아닌'장면'들이 담겨 있다. 앞의 두 블로그들과는 또다른 매력, 전북의 다양한 장면장면들을 포착해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어내 고 있다. 전북을 여행하며 놓쳐서는 안될 자연 풍광 사진이 일품이다. 고창 '청보리밭'으로 유명한 학원농장의 설원풍경이나 부안 솔섬 낙조 사진 등은 그 찰나를 놓치지 않으려는 노력없인 결코 만나볼 수 없는 보석이다. 성재민 (문화전문시민)

  • 주말
  • 이화정
  • 2012.04.06 23:02

해양문화의 원초적 '성소' '개양할미'의 전설 속으로

변산반도의 끝자락, 그러니까 변산반도에서도 바다로 더 돌출된 지역이 격포 죽막동이고, 여기에 수성당(水聖堂)이라는 당집이 있다. 민속학자 주강현은 '우리 해신의 위엄과 격식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신성의 성소(聖所)'라고 말한다. 한때 서해 어업의 전진기지였던 위도가 굽어보이는 칠산바다의 관망대에 해당하는 곳으로, 임진전쟁 때 왜군이 여우골로 몰려오는 것을 이곳을 지키는 여신, 즉 개양할미가 무찔렀다는 전설은 지금도 남아 전한다.이곳엔 '개양 할미', 혹은 '수성당 할미'라고 불리는 여신의 거처가 있다. 개양할미는 당굴에서 태어났다. 딸을 여덟 명 낳아서 팔도에 시집보냈다고도 하고 혹은 딸 일곱을 칠산바다에 보내 일곱 섬을 관리하게 하고 본인은 막내딸과 살았다고도 한다. 실제 격포를 마주보고 있는 섬 비안도에서는 당제지낼 때 남풍이 불어야 좋다고 한다. 그래야 수성당 개양할미가 딸네 집에 순조롭게 온다는 것이다. 개양할미는 거인여신이자 신이한 능력의 소유자다. 일테면 굽나막신을 신고 칠산바다를 저벅저벅 걸어 다녀도 버선이 젖지 않을 정도다. 서해바다의 풍랑을 잠재우기도 때론 일으키기도 한다. 또 뱃길이 위험한 곳에는 깃발 표시를 남겨 어부들이 해를 입지 않게 돌보았으며, 심지어 수심까지 재어 어부들이 알도록 했다. 한마디로 괴력난신의 힘을 보여주는 거인여성, 마고신이 아닐 수 없다. 칠산바다를 걸어 다니거나 전지전능한 괴력은 제주도 창세신화 주인공 '설문대할망'과 많이 닮아 있다. 설문대할망은 앞치마에 흙을 퍼담아 나르다가 구멍이 뚫어진 곳으로 흘러내린 흙이 360개의 오름이 되었고, 마지막 흙을 날라다 부은 곳이 한라산이 되었다고 한다. 수수범벅을 먹고 대변을 보니 성산 근처의 국망상오름이 되고, 심지어 오줌발로 성산과 우도를 갈라놓았으며, 한라산을 베고 누우면 발이 제주 북쪽 해안에서 있는 관탈섬에 가 닿을 정도의 거인이다. 해안에서 관탈섬까지는 21㎞라고 한다. 수성당 바로 옆에는 오금이 저리도록 가파른 벼랑 아래로 조수가 드나들며 여근처럼 갈라놓은 해식동굴이 있는데 일명 용굴, 혹은 당굴로 개양할미의 거처다. 바닷물이 들이치며 하얀 포말을 일으키면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로 현기증이 난다. 개양할미 신화는 본격적인 서사구조를 지니고 있지는 못하다. 그 대신 신으로서의 괴력과 어민들을 위한 역할, 고군산군도와 위도 등 다른 섬과의 설화적 위상은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개양할미 설화는 전형적인 마고신화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마고여신은 본래 천지를 창조한 창조신으로 알려져 있는데, 파미르고원의 마고성에서부터 그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래서 '서해 창건주' 신화인 수성당 개양할미가 존재하는 죽막동을 제주도 한라산 설문대할망이나 지리산 마고할매와 함께 해양문화의 원초적 신앙성을 지닌 '성소'라고 할 만하지 않은가.그런데 이곳은 국립전주박물관이 서해안 일대에 대한 지표조사를 실시하던 도중에 수성당 바로 뒤편의 평탄면에서 우연히 파편들을 발견하였고, 1992년에 정식 발굴되어 다양한 제사유적이 출토된 곳이어서 장소적 의미가 더더욱 특별한 곳이기도 하다. 죽막동 제사유적은 삼국시대에서 고려,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장시간에 걸쳐 누적적으로 의례가 행해진 우리나라 최초, 최대의 제사유적으로 각 시기별 제사양상을 단계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갖춘 유적이라고 할 수 있다. 변산반도 죽막동에 제사유적이 자리한 배경은 포구의 적격성, 자연여건의 조화, 배후지역이 농업생산의 전략지라는 점에서 이곳이 수로 및 해상교통, 교역의 요충지가 되었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이때 출토된 유물은 대부분 삼국시대의 유물인데, 3세기 후반에서 7세기 전반에 해당하는 각종 호, 기대, 옹, 잔 등의 토기류와 철촉, 철부 등 금속유물, 거울, 판갑, 도끼, 말 등과 같은 실물을 모조한 석제, 토제모조품 등이 그것이다. 그 외에도 토제류, 중국도기, 소옥(小玉), 곡옥(曲玉) 등이 정형성 없이 흩어진 채 발굴되었다. 중요한 것은 유물이 백제뿐 아니라 가야계, 중국계, 일본계 유물이 함께 출토됨으로써 원삼국시대부터 동아시아를 무대로 활동하였던 사람들의 행적을 추정해볼 수 있다는 점이다. 이윤선 목포대 교수는 동아시아 담론의 확장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공간이라면서 '부안 변산의 한 작은 공간을 동아시아라는 국제공간으로 확장시킨다는 점에서 글로컬(Glo-cal)한 문화유적의 표본'이라고 말한다. 또 죽막동에서 백제 이후 유물이 출토되었다는 것은 변산 지역이 마한을 거쳐 백제에 편입된 이후에도 죽막동 제사의 제의 담당자이자 일정한 해양교섭력을 보유했던 토호세력이 존속했을 가능성과 백제세력에 완전히 종속되지 않은 비교적 자유로운 해양세력이 상당기간 이곳을 거점으로 삼았을 가능성도 제기한 바 있다. 죽막동 수성당은 해발 22미터의 해식단애 위로 바다와 바로 접해 있으며, 주변보다 높은 지점이기 때문에 20Km 이내의 서해상의 점점이 흩어져 있는 고군산열도, 상왕등도, 위도, 식도, 비안도 등의 섬들과 서해 먼 바다까지도 조망하기에 매우 좋은 지점이다. 유적 바로 북쪽에는 육지로 10미터 정도 만입해 들어온 용굴을 비롯해 주변으로도 크고 작은 해식동굴이 발달하여 뛰어난 경관을 이루고 있다. 이렇듯 죽막동 수성당은 수많은 제사유적과 개양할미 설화, 거기에 개양할미의 거처라고 하는 해식동굴까지 있는 성소이다. 이곳을 지키는 수성당은 근래에 새로 지은 건축물이다. 물론 내부에 걸린 화본도 마찬가지다. 과거에 있던 그림은 화재로 소실되었다고 한다. 지금 죽막동 수성당은 수시로 각처에서 온 무속인과 신도들이 기도하고 굿하는 굿당으로 쓰이고 있다.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개양할미의 영험함을 믿고 의지하는 그들을 통해 이곳이 특별한 성소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한 시절에는 최소한 부족단위 이상의 거대 집단이 사해용왕과 천지신명께 드리던 제사장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지금 수성당은 거녀신에서 한참이나 강등된 채 동네신 내지는 개인적 기복신 노릇이나 하고 있으니, 누가 누구를 위로하고 위로받아야 하는지. 어질더질이다. /김성식(전북일보 문화전문시민)

  • 주말
  • 이화정
  • 2012.03.30 23:02

수성당 짓게 된 배경 담겨해양 역사 문화 보존 필요

죽막동 수성당 옆에 일명 용굴이라는 해식동굴이 있다. 그런데 여기와 관련된 다른 설화에서는 이곳 일대를 대마골(大馬)이라고 하며, 용굴은 여울굴이라고 하는데 제목은 '대마골 철마(鐵馬)'이다. 아득한 옛날 이 대마골 근처에는 마음씨 착한 고기잡이 형제가 앞 못 보는 늙은 어머니 한 분을 모시고 살고 있었다. 형은 날마다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고 아우는 산에 나가 밭도 일구고 농사일도 하며 비록 가난하게는 사나 어머니 봉양을 지성으로 하고 의좋게 살아가고 있었다. 어느 날 형이 고기를 많이 잡는 꿈을 꾸어 오늘은 고기가 많이 잡힐 것이라는 부푼 꿈을 안고 어머니께 인사드린 후 바다로 나갔다. 그런데 많은 고기를 잡아가지고 돌아와야 할 형이 이날따라 날이 저물어도 돌아오지 않아 어머니와 동생의 근심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밤늦게까지 바닷가에서 기다려도 배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튿날 동생이 형을 찾으러 바다로 나갔는데, 이제는 동생마저 돌아오지 않는다. 홀로 남은 앞 못 보는 어머니는 미칠 지경이다. 바다로 나간 작은 아들마저 소식이 없으니,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더듬더듬 바닷가로 나간 곳이 수성당 옆의 여울굴 절벽 위였다. 어머니는 바다를 향하여 소리 높여 두 아들을 부르고 또 불렀다. 그런데 그 소리가 깊은 여울굴 속에 부딪쳐 메아리로 들려오는 소리를 두 아들의 대답하는 소리로 들린 것이다. 이 소리에 어머니는 반가워 계속 부르며 한발 한발 떼어 놓다 절벽 밑 깊은 여울굴로 떨어져 푸른 물결이 삼켜 버린 채 다시는 나오지 못하고 말았다. 그 후 세월이 흘러 어느 청명한 날 순풍에 돛을 단 배 한 척이 미끄러지듯 들어와 이곳에 멈추었다. 화려한 그 배에는 잘 생긴 두 청년이 아름답게 생긴 아가씨 두 사람과 함께 타고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고기잡이 형제였다. 그들은 배에서 내려 대마골 여울굴 위의 절벽 위에 섰다. 그때 여울굴의 푸른 물이 점점 굴 위로 차오르더니 이윽고 백말에 흰 수염이 아름다운 노인 한 분이 여울물 속에서 나와 두 청년을 보고 "수고 많았다. 그러면 이제 마지막으로 너희들에게 황금부채 한 개씩을 줄 것이니 한 개를 가지고는 나라를 구하고 또 한 개로는 마을을 구하여라. 너희 모친은 편안히 잘 모시었으니 그리 알고 착한 일을 많이 하기 바란다." 하고 말을 마치자 노인은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노인의 말대로 형이 가진 황금부채로 바다를 향하여 부쳐 보았더니, 갑자기 큰 바람이 일며 성난 파도가 바다를 뒤집는 것이었다. 이번엔 동생이 가진 부채로 부치니 그 소란한 풍파가 금새 조용해지는 것이다. 두 형제는 그 노인의 은덕을 잊지 않기 위하여 여울굴 옆에 지금의 수성당을 세우고 받들어 모시었다. 그랬더니 그 여울 속에서 철마(鐵馬) 한 마리가 나왔다. 이 철마는 두 형제만이 탈 수 있으며, 평상시는 작았다가 형제가 타기만 하면 큰 말이 되었다. 외적이나 왜구가 침범하면 형이 타고 비호처럼 달려가 황금부채로 부쳐 적의 배를 모조리 침몰시켰으며, 동생은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간 마을 사람들이 풍랑을 만나게 되면 역시 부채로 부쳐 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제하였다. 그 후 아들 형제가 죽은 뒤 철마만이 여울굴 속에 남아 있었는데, 어느 마음씨 고약한 사람이 철마를 훔쳐갔는데 아무리 깊숙한 곳에 감추고 자물쇠를 채워도 열고 보면 없어지고, 여울굴에 와 보면 그 곳에 돌아와 있었다. 이러기를 수 차례 거듭하니 철마는 드디어 여울굴 속으로 깊이 들어가 버린 후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설화는 등장하는 철마는 일반적으로 희생제물의 대용으로 당에 좌정하는 경우가 많다. 죽막동 제사유적에서도 흙으로 만든 말이 출토된 것만으로도 알 수 있다. 민속신앙에서 말은 신승물(神乘物)의 존재, 영험적이고 신적인 존재, 의리를 지키고 충성을 다하는 존재라는 상징성을 지닌다. 이 설화는 수성당이라는 당집에 관한 연기설화를 내포하고 있다. 즉 당집을 짓고 신을 모시게 된 배경을 담고 있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설화는 어딘가 심청가를 차용하고 있는 듯한 모티브들이 출현하고 있다. 물론 대체되고 치환된 형태지만 심청과 봉사아버지의 관계가 청년과 봉사어머니로 대체되었고, 심청의 효행으로 봉사들의 눈을 띄우는 장면은 형제가 철마를 타고 서해바다의 왜구를 모조리 침몰시키는 장면과 치환된 듯하다. 어쨌거나 변산 죽막동의 당집인 수성당과 해식동굴인 용굴은 유적발굴을 통해서 실체가 확인된 역사적 장소성 뿐만 아니라, 판타지같은 신화와 설화가 종횡으로 중첩된 해양문화의 텃밭이자 옥답이라고 할 수 있다. 새만금사업으로 해당 지역의 해양문화는 제대로 조사조차 되지 않은 채 망실되어 가고 있다. 수많은 설화와 민속과 관습과 신앙이 새만금처럼 매립되어가고 있다. 생업을 잃고 망연자실해 있는 내수면 주민들처럼 그들의 삶의 이력과 전통마저 속수무책으로 방치되고 있다. 물론 변산 죽막동은 새만금방조제 바깥에 있다. 그래서 더 중요한 지역이라고 생각된다. 이곳에 죽막동의 역사성을 증거해 줄 수 있는 발굴 유물을 전시하고, 수성당할머니를 매개로 해양문화를 학습 및 체험할 수 있는 '죽막동 수성당 성역화 및 해양문화전시체험관 건립'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이는 해양역사문화의 보존, 계승, 체험, 연구를 위한 공간으로 지대한 역할을 할 것이다. 새만금 권역 내외에서 바다를 기반으로 살아온 사람들의 과거와 현재의 생활사를 보여주며, 도서해안지역의 독특한 민속의례인 베줄다리기 등 해양문화 관련 체험학습장을 운영하며, 새만금 지역내의 공간적, 지리적 정보를 제공하는 등 다목적인 '해양문화전시체험관' 건립을 기대해 본다. 김성식(전북일보 문화전문 시민)

  • 주말
  • 이화정
  • 2012.03.30 23:02

전북의 香 - 젊은 예술가와 섬진강 동행

2009년 프랑스 믹스아트 미릭스(MIXart Myrys)에서 아티스트 레지던시를 마치고 돌아온 후 힘겨운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외국작가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생애 또 한 번의 거대한 폭풍을 만난 것이다. 다양한 예술장르와 고유한 경험과 사상이 섞이고 나뉘고 다시 뭉쳐 거침없이 작품으로 품어져 나오는 '즉흥과 통섭의 에너지'는 감당할 수 없는 거친 폭풍 그 자체였다. 세상의 몇 가지 담론과 모순, 삶과 예술 사이의 간극이 있다는 사실만 지레짐작 할 뿐. '어디로 가야하는지? 왜 가야하는지?' 묻고 또 물으며 나침반 없는 폭풍의 소용돌이 안에 머물러 있었다. 세상은 마치 큰 강물과 같았고, 그 물살에 힘없이 떠밀려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를 하나의 작은 부유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물가에 뿌리를 단단히 박고 지난 폭우에 불어난 거친 물살을 견뎌내며, 가뭄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서있는 적송 한 그루가 부러웠다. 그런 나무가 되고 싶었던 게다!△ 섬진강을 만나다어느 날, 배낭 한 짐 들고 무작정 집을 나선다. '어디로 가야할지? 무엇을 위해 가야하는지? 얼마나 가야하는지?'는 잠시 접어두고 묵묵히 걷는다. 해질 무렵 진안 데이샘 작은 물줄기가 모여드는 섬진강 상류의 운암 옥정호를 만난다. 그 시절 섬진강과 젊은 예술가의 만남은 필연인 듯했다. 섬진강 물줄기를 만난 그 날부터 어깨에는 배낭 하나, 마음속에는 무엇인지 모를 물음표 하나를 짊어지고 9박 10일간 섬진강과의 동행이 시작된다.섬진강 물줄기를 찾아 강진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에서 임실 필봉농악전수관에 들러 물 한 모금 얻어먹으니 민주화운동이 한창이던 시절에 풍물패 이야기와 풍물패와 농민운동 그리고 우리나라의 민주정신이 한데 얽히는 대서사시를 덤으로 얻어간다. 긴 오르막길에 지쳐서 손짓 발짓하다 얻어 탄 어느 작은 학교 교장선생님의 자동차안에서는 강진의 고향마을 이야기와 강진면 다슬기해장국 맛의 풍미를 듣는다. 그리고는 강진 시외버스 터미널 맞은편에 오래된 다슬기해장국집(성심회관)에서 기어이 국밥 한 그릇 먹여주시는 인정을 맛본다. 섬진강은 강이 아니라 사람을 품고, 역사를 품고, 문화를 품어 안은 그릇이구나! 해질녘 이름 모를 717번국도 간이 버스정류장에서 잠을 청하면서 문득 생각한다.천담. 구담리를 넘어가는 고개 길은 정말 고약하다. 비까지 내리는 날은 더욱 약이 오른다. 하지만 계곡 따라 구비치는 섬진강 물줄기와 매화 향내 물신 나는 구담마을의 진경을 만날 수 있다니 어찌 반갑지 않겠는가? 구담마을 정자 위에서 바라본 장구목 너머의 작은 징검다리를 가로지르는 굽이진 강은 한 폭의 그림 위에 활력을 불어 넣는 화룡정점이다.임실을 지나 동계, 섬진강 본류와 팔공산 작은 물줄기들이 모인 오수천이 적성강을 이루기 위해 내려가는 길목에 구남교가 있다. 동네 어른들이 다리 위에 낚싯대를 널어놓으신다. 적성강은 바위가 깔린 계곡을 지나면서 많은 모래흙을 싣고 와 넓은 모래밭을 형성했는데 예전에는 이곳에서 은어들이 많이 잡혔다고 하신다.섬진강은 순창에서 또 한 번 사람을 품어준다. 섬진강 상류의 오염되지 않은 지하 암반수는 햇볕 좋은 순창의 땅에서 자란 고추를 우리민족의 고유의 전통발효식품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 맛이 세계일품인 이유 중 하나가 섬진강이다.섬진강은 순창을 지나 전라도 계를 넘어 목과에서 입천(순자강)을 만난다. 그리고 곡성에서 요천과 합류하여 구례로 흐르는 큰 강을 이룬다. 이곳에서 섬진강의 약수는 지리산 정기와 더불어 쌍계사 계곡 야생차밭의 새순을 키우고, 마을 사람들은 절기에 맞춰 정성껏 우전 세작 중작 대작을 따고, 덖고 우려내어 다관과 찻잔에 한가득 자연의 풍미와 이치를 느낄 수 있게 해준다.하동에 이르러 화개천과 합류한 섬진강은 과거 경상도와 전라도를 아우르며 지역특산품과 사람을 실어 나르는 뱃길로 삶의 터전을 만들어 주었기에 화개장터가 형성되었고, 남해의 수산물이 섬진강의 수문을 통해 교역하는 통로의 역할을 해주었다.진안 백운면 데미샘으로부터 시작된 작은 물줄기가 전라도 너른 땅과 계곡 500리를 흘러 하동에 이르니 비로소 섬진강이라 불리게 된다. 섬진강은 80리 하동 하얀 모래위를 지나 광양만 남해 앞바다로 나아간다. 그리고 본래 가야할 또 다른 여행을 바다와 함께 다시 시작한다. 열흘간의 섬진강 동행은 섬진강대교 길목에서 이렇게 끝난다. 저 멀리 보이는 광양제철소의 풍경과 바다 내음을 맡으며 섬진강을 뒤 돌아본다. 그리고 묻는다.△ 섬진강에서 나만의 물길을 찾다섬진강은 나에게 무엇인가?무작정 집을 나오면서 짊어진 무엇인지 모를 물음은 무엇인가?삶의 길, 예술의 길을 묻는 젊은 예술가에게 섬진강은 고요히 침묵을 지킨다. 하지만 섬진강은 짧은 동행중에 보여주었다. 섬진강 물길은 이렇게 흐르고, 섞이고, 구비치고, 모여서 넓은 바다로 간다고.세상의 흐름과 거친 물살을 이겨내며 홀로 견디는 적송 한 그루가 되기보다는 내 스스로가 데미샘의 한 방울의 물이고, 강을 이루고 바다를 이루는 섬진강 그 자체임을 바라본다면, 저 멀리 프랑스에서 '예술의 즉흥과 통섭'으로 느낀 경험을 섬진강처럼 사람과 역사, 문화를 품는 그릇을 되어 담아내어야 할 일이 젊은 예술가가 가야할 물길이 아닐까? 그래서 섬진강처럼, 젊은 예술가는 형식이 만들어 놓은 예술장르의 틀을 품어 안을 그릇이 되어야 한다. 섬진강처럼 흙, 모래, 바위, 계곡, 개흙을 만나 거침없이 하나 되어 이 모든 것들을 스스로 통섭하듯 세상의 삶과 개념의 모순을 섞고,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 거침없이 부딪치고, 너와 나의 다름을 만나서 본디 우리 시대를 담아내는 물길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유유히 흐를 나만의 작은 물줄기가 되어야 한다. 더불어 다른 물줄기와 함께 흘러 바다로 또 다른 여행을 시작하는 삶을 생각해야한다. 섬진강은 젊은 예술가에게 모든 것을 품어 안은 그릇이며, 그 것을 물길을 통해 증명해준 스승이 되어 주었다. △ 다시 섬진강을 만나다강은 사람을 품고 사람은 강물을 따라 자연과 벗하니 온전한 공생이라.스스로 품은 모든 것에 한 몸 다 내어주고 바다를 이루니 상선약수(上善若水)의 변이 명언일세.데미샘 아래 작은 물줄기가 바다가 되는 광양만 섬진강대교에서수순하게 쓰이고 흐를 나만의 작은 강줄기 하나 생각한다. 송대규(전북일보 문화전문시민)

  • 주말
  • 이화정
  • 2012.03.23 23:02

매실나무·들꽃…시골 어르신도'봄 마중'

섬진강 동행 후 3년이 흘렀다. 그 사이 섬진강 동행기로 느낀 생각과 깨우침을 예술작품 활동을 통해 실천해보고자 고민하하면서 정신없이 세월을 보냈다. 문화객원시민로 섬진강을 취재하기 위해 임실 구담마을을 다시 찾은 감회가 새롭다. 섬진강 스승에게 얻은 조언을 잘 실천하고 있었는지 새삼 돌아보니 부끄럽기만 하다.전주~순창간 도로(국도 72선)가 새로 개통되면서 과거 강진을 넘어 가던 717번 지방도는 인적이 드문 길이 되었다. 국도 27호선은 신호등 없는 '자동차 전용도로'여서 섬진강 구담마을을 가는 시간은 훨씬 짧아졌다. 더불어 옥정호에 세워진 운암대교(910m)는 섬진강 길목에 새로운 볼거리로 자리 잡았으며, 옥정호를 새로이 조망하기에 손색이 없는 명소가 될 듯하다. 구담마을은 봄을 준비 중이다. 밭고랑 사이로 냉이, 빌금다지를 비롯한 푸르른 새순들이 여기저기 무더기로 올라오고 매실나무 가지에는 매화꽃을 준비하는 꽃망울이 열린 듯 말듯 시간을 재고 있다. 마을 당산나무 조망대에 올라서서 섬진강이 굽이굽이 흐르는 아래 물길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바람소리와 물소리가 한데 어울려 마치 봄을 알리는 소리처럼 상쾌하게 들린다. 봄을 알리는 준비는 매화와 야생화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이른 아침, 마을 주변 작은 텃밭에는 올해 밭농사를 위해 두엄을 내는 삼계댁 할머니(박인순77)가 분주히 손을 놀리신다. 김유순 할머니(76)는 지난 여름 폭우로 강물에 떠밀려온 잡나무, 통나무들을 섬진강 개울가에서 매일 조금씩 지게에 올려 주워온 땔감이 겨울나기에 충분하다 하신다. 작은 체구로 지게를 짊어지시고는 맞은 편 징검다리를 건너는 할머니를 보니 불안불안해서 손 한번 잡아 드린다. 구담마을과 장구목을 건너 오갈 수 있는 작은 다리가 상류 쪽 위로 완공되었지만, 왠지 이 곳 작고 아름한 징검다리를 건너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다. 돌무더기와 큰 돌 사이로 흐르는 섬진강 물길 소리가 징검다리와 함께 어딘지 모를 매력을 발산한다.진메마을을 거쳐 구담마을로 들어와 장구목(8.5km)으로 이어지는 트레킹 코스는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김용택 시인의 생가가 알려지면서 주말이면 트레킹 족이 삼삼오오 찾는 이들이 늘고 있다. 이에 농식품부는 구담마을을 '녹색농촌체험마을'로 선정하여 자연생태 테마 걷기와 매화 및 야생화 농촌체험형 프로그램을 지원하고 있다.구담마을에도 고민은 있다. 마을회관에서 만난 이명순 사무장(49)씨는 구담마을 당산나무에 대해 아쉬운 이야기를 전해주신다. 마을 어른들이 한 해 무사안위를 기원하면 당산제를 모셨는데, 몇 해 전 당산제를 주재하셨던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그 맥이 끊겼다고. 그리고 구담마을이 외지에 알려지면서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하니 마을 초입의 부지를 매입하고 땅값을 노리는 투기꾼들도 제법 생겨났다고 걱정하신다. 마을주민은 나이 드신 노인이 대부분이라 그 분들이 타계하시면 이 마을은 누가 이어가고 지킬 지 걱정이다. 구담마을 넘어 장구목으로 가는 밤나무 길도 예전 그대로다. 3년전 이 길을 오르며 본 다람쥐가 지금도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천천히 섬진강 물길과 동행하며 나를 돌아보았던 그 시절로 되돌아 가기위해 장구목 길을 다시 걸어본다. 송대규(전북일보 문화전문시민)

  • 주말
  • 이화정
  • 2012.03.23 23:02

'컬러푸드'로 나른한 봄을 이기자…상큼한 맛과 향이 입안에 '가득'

따사로운 햇볕에 훈훈한 바람 등 봄 기운이 가득하다. 이 맘때면 몸이 나른해진다. 춘곤증이다. 겨우내 움추렸다 갑자기 늘어나는 활동량으로 신진대사가 활발해지면서 부족한 영양분을 채워달라는 신호다.  이럴때는 계절에 맞는 영양소가 들어 있는 제철음식이 제격이다. 예전에는 봄나물을 통해 부족한 영양을 보충했다. 그러나 요즘에는 언제든지 봄나물을 구할 수 있고, 영양제도 다양해 봄나물이 나기까지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 한발 더 나아가 영양소가 풍부하면서도 맛이 있는 채소나 과일 등의 웰빙식품을 찾는다. 최근들어 부상하고 있는 게 컬러푸드다. 채소나 과일 고유의 색깔에 따라 다른 각각의 성분과 영양소, 효능을 골고루 섭취해 우리 몸에 필요한 영양분을 공급하자는 것이다.대표적인 컬러푸드는 파프리카가 꼽힌다. 빨강, 노랑, 주황 등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 고운 색상을 지닌 파프리카는 최근들어 컬러푸드가 대세를 이루면서 일반 가정 식탁에서 자주 오르는 웰빙 식품의 대명사로 자리매김되고 있다.에너지 대사장애 완화 등에 효과가 있는 붉은색 색소인 캡산틴이 다량 함유되어 있는데다, 100g 당 11~19kcal로 열량이 낮아 대표적인 다이어트 식품으로 손꼽히고 있다. 항산화물질로 알려진 비타민C의 함유량이 매우 높고, 면역체계를 강화하고 신경계 기능을 활성화시키며, 근육과 피부의 건강을 유지해주는 효능으로 인기를 얻고 있다. 더불어 선명한 색깔과는 달리 맵지 않아 고기와 야채요리, 향신료, 드레싱, 소스, 식욕을 돋우기 위한 착색료 등으로 쓰이는 등 활용도 또한 광범위하다.인기가 높은 만큼 새로운 품종이 개발되고 있다. 품종개발에 따른 색깔도 다양해지고 있다. 기본적으로 빨강노랑초록흰색검정 등 동양에서 오방색으로 알려진 5가지 색을 갖추고 있다. 국내에서 소비되는 대부분은 빨강노랑주황색 3가지이지만, 파프리카가 많이 소비되는 유럽에서는 보라색과 검정색흰색 등 8~12가지의 다양한 색과 종류가 재배유통되고 있다. 국내에서도 그 품종과 수량이 점차 늘고 있는 추세다.국내에서는 김제가 최대의 파프리카 생산지이다. 김제 순동에 자리한 농산무역과 회원 영농조합에서 생산되는 양은 연간 5000톤 규모로, 국내 총 생산량의 25% 정도를 차지한다. 이중 절반 정도가 까다로운 일본 시장에 수출되는 등 품질과 마케팅 경쟁력이 우수하다. 농산무역 박경원 부장은 "파프리카는 식욕을 돋구는 색상에 다양한 영양소를 갖고 있어 웰빙 바람을 타고 수요가 지속 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재배면적도 확대되고 있다"면서 "생산되는 양의 절반 가량은 일본 등 외국으로 수출된다"고 말했다.도내에는 국내 유일의 파프리카 전문 연구시험장이 있다. 군산 대야의 전북농업기술원 파프리카 시험장으로, 이 곳에서는 파프리카와 관련된 다양한 연구개발이 이뤄지고 있다.전북농업기술원 파프리카 시험장의 한 관계자는 "파프리카는 비타민 AC, 철분 등이 많이 함유되어 있으며, 특히 비타민 C의 경우, 파프리카(375mg/100g)는 귤의 10배, 딸기의 4배 등 상당히 높은 함유량을 보유하고 있다"고 파프리카의 효능을 소개했다. 더불어 그는 "파프리카는 생으로 또는 가공하여 판매해도 상품성이 있어 무한변신이 기대되는 채소"라며 "파프리카의 잎과 순 등을 활용한 가공식품이 개발되고 있다"고 말했다당도가 높고 선명한 붉은색의 장점을 이용해 음식의 색깔을 낼 때 사용되는 파프리카 가루, 육류요리에 활용되는 파프리카 즙, 파프리카의 영양과 색깔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비누와 화장수 등의 생활용품, 장기저장이 가능한 파프리카 피클과 잼 등이 개발돼 판매되고 있다.

  • 주말
  • 김준호
  • 2012.03.16 23:02

달래 냉이 씀바귀…"영양제가 따로 없네"

봄철 입맛을 돋우고 피로를 푸는데 제격인 봄나물. 한 젓가락 뜨는 순간 겨우내 땅속에서 품은 생기를 입안 가득 전한다. 나물류는 채식주의 바람과 맞물리면서 더욱 각광을 받고 있다. 채취 뒤에는 고유의 향기와 영양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뿌리에 묻은 흙을 제거하고 수분이 마르지 않도록 신문지로 싼 뒤 비닐이나 용기에 담아 냉장고에 보관해야 한다. 다음은 식품의약품안전청이 소개한 봄나물의 성분과 보관 방법이다.냉이△ 특징 : 가장 많이 먹는 봄나물의 하나로 단백질 함량이 많고 비티민AC, 칼슘, 철분이 풍부.△ 섭취방법 : 국, 찌개, 무침(숙채), 나물(숙채) 등△ 채취시기 : 3월 초4월 말△ 보관방법 : 냉장, 데쳐서 냉동달래△ 특징 : 톡쏘는 매우 맛이 특징이며, 비타민C를 비롯한 영양소가 골고루 들어 있고, 칼슘이 특히 많이 함유.△ 섭취방법 : 찌개, 무침(생채), 간장양념 등△ 채취시기 : 3월 초4월 말△ 보관방법 : 냉장돌나물△ 특징 : 아삭한 식감이 있어 생채가 제격이며, 비타민C와 인산, 칼슘 등 무기질이 풍부함.△ 섭취방법 : 초무침(생채), 물김치, 샐러드 등△ 채취시기 : 3월 초5월 초△ 보관방법 : 냉장두릅△ 특징 : 맛과 향이 좋으며, 단백질이 많고 지방당질섬유질무기질인칼슘철분과 비타민C가 풍부.△ 섭취방법 : 초고추장 무침(숙채), 튀김, 두릅적(꼬치)△ 채취시기 : 4월 초~5월 말△ 보관방법 : 냉장, 데쳐서 냉동, 소금절임쑥△ 특징 :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흔한 다년초로 미네랄무기질 및 비타민A 풍부하게 함유.△ 섭취방법 : 쑥떡, 된장국 등△ 채취시기 : 3월 초3월 말△ 보관방법 : 냉장, 데쳐서 냉동씀바귀△ 특징 : 쓴맛이 나며 식욕을 증진시키고 섬유질이 풍부.△ 섭취방법 : 무침(생채), 나물, 김치△ 채취시기 : 3월 중순4월 말△ 보관방법 : 냉장, 냉동원추리△ 특징 : 이른 봄 올라오는 어린 싹을 나물로 무쳐 먹으며, 비타민이 풍부.△ 섭취방법 : 초고추장 무침(숙채), 나물, 된장국△ 채취시기 : 3월 초4월 말△ 보관방법 : 냉장, 데쳐서 건조참나물△ 특징 : 특유의 향을 가지는 대표적 봄나물로 베타카로틴과 섬유질이 많이 함유.△ 섭취방법 : 쌈, 무침(생채), 나물(숙채)△ 채취시기 : 4월5월△ 보관방법 : 냉장취나물(곰취)△ 특징 : 쌉싸름한 맛과 은은하게 풍기는 상큼한 향이 특징, 베타카로틴비타민 C칼륨 등이 많이 함유되어 있음△ 섭취방법 : 쌈, 무침(생채), 나물(숙채), 김치, 장아찌△ 채취시기 : 4월 말6월 초△ 보관방법 : 냉장, 데쳐서 냉동, 건조(묵나물)

  • 주말
  • 이세명
  • 2012.03.16 2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