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쓰는 전북 기업사] (13) (주)전북고속②일제강점기
(주)전북고속(사장 황의종)이 오늘 창립 90주년을 맞았다. 1920년 1월15일 당시 전주 재력가 최종렬최승렬 형제가 전주읍 상생정 57번지 1에 '전북자동차상회' 간판을 내걸고 여객운송사업을 시작한 지 90년이 넘었다. 당시 차량은 5대였고, 목탄을 연료로 사용했다. 버스 노선은 전주이리, 전주남원 2개였고, 1일 운행횟수 7회에 운행거리는 963.6㎞였다. 그로부터 90년이 지난 2010년 4월1일 현재 전북고속은 최신형 디젤엔진을 장착한 버스 298대(전북고속 247대, 전주고속 51대)를 보유하고, 도내 전역은 물론 서울, 부산, 대구, 인천, 광주, 대전, 청주, 창원, 춘천 등 전국 각 시도에 걸쳐 총234개 노선(면허노선 22만 6892㎞)를 운행하는 매머드급 여객운송기업으로 우뚝섰다. ▲ 쌀 2857가마 가격으로 일본인 회사 인수 도내에서 순수 민족자본으로 설립된 첫 한국인 자동차회사인 '전북자동차상회'가 1920년 영업에 들어갔지만, 전북지역에는 이미 6년전인 1914년 일본인 야마모토가 세운 야마모토자동차부라는 운송회사를 세우고 영업에 들어갔다. 이처럼 일본인들이 우리나라에서 자동차 영업에 관심을 가진 것은 1912년 무렵으로 보인다. 1912년 4월께 일본인 곤도오가 포드T형 1대를 들여와 총독부에 자동차운송사업을 신청했다는 기록 때문이다. 곤도오는 총독부가 사업 허가를 하지 않자 이후 전남 광양만 염전에서 염전공용으로 들여온 자동차로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편법 운송사업을 했다. 한 사람당 10리에 20전을 받았다. 버스 사업 첫 기록은 1912년 8월 대구에서 일본인 오오츠까 낀지로오가 '대구경주포항'을 부정기적으로 운행한 것이다. 1914년 전주에서도 버스영업이 이어졌고, 1915년에는 충남 갑부 이종덕씨와 김갑순씨 등이 천안예산, 공주조치원 노선을 허가받아 영업했다. 이처럼 전국 각지에서 버스운송사업이 잘된다는 입소문이 퍼지면서 운송사업에 손을 대는 지주들이 많아졌다. 그러나 버스운송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상당히 많은 돈이 필요했다. 최종렬최승렬 형제가 야마모토 자동차부의 자동차 5대와 영업노선 2개를 인수하면서 지불한 돈은 2만원이었다. 당시 쌀 한가마 가격이 7원 정도였으니, 무려 쌀 2857가마 가격이었다. 최씨 형제가 자동차상회를 설립한 다음해인 1921년에는 군산의 재력가 마학진씨가 자본금 10만원으로 군산자동차부를 창립했다. 마씨는 전주군산 노선을 허가받아 최씨 형제와 경쟁했다. 이에 전북자동차상회는 물러서지 않고 일본 대판에서 생산하는 최신형 버스를 도입, 서비스 차별화에 나섰다. 당시 중고차로 영업에 나섰던 마씨는 경영난에 빠졌고, 전주사람 김진기씨에게 영업권을 넘겼다. 그러나 김진기씨의 군산자동차부는 얼마가지 않아 전북자동차상회에 양도됐다. ▲ 일제 쌀 수탈위해 닦아놓은 신작로 달려 전북자동차상회가 첫 운행노선으로 선정한 전주이리, 전주남원 노선은 당시 일제가 쌀을 수탈하기 위해 닦아놓은 신작로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전북자동차상회의 노선은 이후 전주이리군산까지 확장되고, 이어 전주정읍, 전주김제부안까지 확대됐다. 이 가운데 전주군산간 소위 전군도로는 우리나라 최초의 2차선 도로이다. 일제가 추진한 전국 주요도로 개수 7개년 사업의 제1기 사업으로 건설된 것. 1907년 5월 1일 시작돼 1908년 10월 완공된 전군도로는 노폭 7m, 길이 46.4㎞로 건설됐고, 자갈 포장 도로였다. 군산옥구 지역에서는 전군도로가 대야의 지맥(地脈)을 끊는다며 반대했지만, 결국 공사는 강행돼 대야의 주산(主山) 백마산이 두동강났다. 주민들에 따르면 백마의 목에 해당하는 자리가 잘렸다고 한다. 어쨋든 목탄차들이 직선으로 곧게 뻗어나간 전군도로를 신나게 달렸다. 버스에는 사람, 화물차에는 주로 쌀이 실렸다. 그러면 우마차를 타거나 걸어서 다니던 전주 사람이 교통 신제품인 버스를 타고 군산에 가려면 찻삯으로 얼마나 냈을까. 기록에 의하면 초기 버스 운임은 전주이리 2원, 전주남원 4원80전이었다. 거리상 전주군산 운임은 4원 정도였을 것으로 추산된다. 그러면 4원 80전은 얼마의 가치를 가졌을까. 당시 쌀 한 가마 가격이 67원 정도였다고 하니, 서민 대중이 버스를 타기란 하늘의 별따기 같은 일이었다. ▲ 최승렬 사장, 조선자동차협회 연합회 부회장에 1920년대에는 전국적으로 버스회사가 앞다퉈 설립됐다. 전북의 최종렬최승렬 사장을 비롯, 강원의 최준집 사장, 함경남도의 방의석방예석 사장, 충남의 김갑순 사장 등은 운수업계의 거물이었다. 실제로 1930년 6월1일 창립된 조선자동차협회 연합회에서 최승렬 사장은 초대회장 요시다(일본인)에 이어 부회장에 선임될 만큼 위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버스업계가 순항만 한 것은 아니었다. 왜정의 횡포와 경제적 변동 등이 커지면서 군소업체들은 경영난을 견디지 못하고 다른 회사에 인수합병되는 등 이합집산이 잦았다. 이에 조선총독부는 1933년 9월7일 조선 자동차교통사업령과 시행규칙을 발표하고 경찰이 취급하던 운수업 면허를 총독부 철도국 육운계에서도 취급하는 등 자동차 통제를 강화하고 나섰다. 이런 과정에서 전북자동차상회는 도내 3개 회사를 흡수하고, 상호도 공화자동차주식회사로 변경했다. 또 일본인 자본이 대거 침투하면서 최승렬 사장도 회사 경영에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1933년 무렵 전국 버스운송업자는 216명이었고, 운행되는 자동차도 360여대였다. 그러나 1940년에는 7326대로 20배 가량 증가했다. 버스 1156대, 화물차 3639대, 승용차 1311대, 기타 1220대로 화물차가 절반 가량 차지한 것은 눈에 띄는 부분이다. 이처럼 성장 일로에 있던 운수업계는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위축된다. 조선총독부는 1940년 1월31일 육운통제령을 통해 경유 통제를 강화했고, 운수업체들은 자동차 운행을 줄여야 했다. 경유차 운행이 어렵게 되자 목탄차가 다시 등장하고, 아세틸렌차까지 나왔다. 급기야 1943년 6월1일부터는 버스노선마저 대폭 축소돼 자동차운송사업자들은 고사 직전에 빠졌다. 조선총독부는 이어 1944년 3월25일 조선자동차운송사업령을 발표하고 '1도 1사'를 명령했다. 자동차운송사업을 완벽하게 통제하겠다는 것. 이 조치에 따라 도내 운송업계도 공화자동차(주)를 중심으로 15개 회사가 통합했으며, 상호는 '전북여객자동차주식회사'였다. 초대사장은 최승렬 사장이 맡았고, 병설사업으로 택시사업도 했다. 당시 전북여객은 시외버스 98대, 택시 20대 등 모두 118대의 차량을 등록했다. 주행거리는 월 17만 5333㎞, 일 5844㎞였다. 그러나 1년 후인 1945년 8월15일 일본이 항복, 세계2차대전이 막을 내리면서 전북여객은 해방 조국에서 경영 안정을 이루고, 전국 최고 여객운송기업으로 성장해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