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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으로 만나는 익산의 역사문물 ③ 백제의 또 다른 왕도, 익산

익산지역은 일찍부터 백제의 중요한 지방 거점 가운데 하나였다. 특히 왕궁리 일대는 위덕왕대(554~598) 말기부터 이미 개발이 시작되었는데, 명실상부하게 왕도로서 익산이 자리매김한 것은 무왕대(600~641)이다.여러 설화에서는 무왕이 익산에서 태어났고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하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신증동국여지승람〉 익산군 불우(佛宇)조에 마를 캐던 서동(무왕)이 다섯 개의 금을 얻은 곳이 오금사(五金寺)라 한 것이다. 그러나 〈삼국사기〉는 무왕이 법왕의 아들이라고 전한다. 이러한 설화와 역사의 기록은 모후의 출생지가 익산이었거나 즉위 이전 무왕의 근거지가 익산이었음을 의미한다.한편 〈관세음응험기〉에는 무왕이 익산으로 천도하였다고 기록된 반면, 〈대동여지도〉로 잘 알려진 김정호는 〈대동지지〉에 익산을 백제의 별도(別都)로 기록하였다. 즉 익산은 백제의 새로운 왕도, 또는 별도였다는 것이다.익산이 백제의 새로운 왕도 혹은 별도가 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위덕왕대 백제는 사비도성 바로 앞에 있는 알야산성이 신라군에게 공격당한 적이 있었다. 신라와 본격적인 대결을 준비하던 무왕은 적의 공격으로부터 방어에 유리한 곳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와 더불어 군비를 충당하기 위한 재원이 필요했을 것이다. 거기에 부합된 곳이 바로 익산이었다. 익산지역은 북쪽의 금강과 남쪽의 만경강이 있어서 방어에 유리할 뿐만 아니라 신라로 진격하기에도 용이하였다. 아울러 익산은 너른 평야가 있어 전쟁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그렇다면, 백제의 새로운 왕도 혹은 별도였다는 증거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그 첫 번째 증거는 궁성(宮城)의 존재다. 남북 490m, 동서 240m의 규모를 자랑하는 왕궁리유적은 궁성에 부합하는 유적이다. 아울러 왕궁리유적 북쪽에는 오금산성과 저토성이 있는데, 이 두 산성은 궁성의 방어와 유사시 대피 용도로 계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왕궁리 궁성은 궁장을 설치하고 그 내부에는 경사면을 따라 석축으로 단을 만들어 대지를 조성하였다. 이렇게 조성된 대지에는 부여 왕경지역에서만 발견되는 기와를 쌓아 기단을 조성한 건물과 폭이 35m에 이르는 대형 건물 등을 지었다. 이와 더불어 공방, 대형화장실, 정원과 후원 등의 부대시설이 만들어졌다.두 번째 증거는 왕실 사찰의 존재다. 여기에 부합하는 사찰은 백제의 새로운 궁성에서 불과 1.4km 떨어진 곳에 있었던 제석사이다. 제석사는 목탑-금당-강당이 남북 중심축선상에 배치된 전형적인 백제식 가람배치를 보인다. 또한 동서 회랑의 길이가 100m이고 중문에서 강당까지의 거리가 140m로, 백제 사찰가운데에서는 미륵사지 다음으로 크다. 한편, 〈관세음응험기〉에는 무왕이 제석정사를 지었으며, 639년 벼락으로 7층 목탑, 불당, 회랑이 모두 불탔다.고 기록되어 있어, 무왕 재위 당시 제석사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세 번째 증거는 새로운 통치이념이 제시되었다는 점이다. 법왕대까지만 하더라도 백제에서는계율종과 함께 현세에서 계율을 잘 지켜 미륵보살이 상주하는 도솔천에 태어나기를 바라는미륵상생신앙이 유행하였다. 이러한 불교신앙은 개인적, 귀족적 성격이 강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무왕이 연못 속에서 출현한 미륵삼존을 보고 미륵사를 창건한 것에서 알 수 있듯, 무왕은 미륵하생신앙을 익산시대의 새로운 통치이념으로 제시하였다. 미륵사는 잘 알려진 것처럼 서원, 중원, 동원 등 세 개의 사원을 병립시킨 사찰인데, 이는 석가모니불 입멸 후 56억 7000만년 후에 나타나 세 번의 설법으로 모든 중생을 구원한다는 미륵불의 서원을 사찰의 평면에 구현한 것이다. 한편, 〈미륵하생경〉에는 성불한 미륵불을 영접한 전륜성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전륜성왕이 다스리는 나라는 평화롭고 풍요로운 통일제국이라고 한다.스스로 전륜성왕이 되기를 바랐던 무왕은 그의 원대한 포부인 삼한일통과 평화로운 세상을 실현하겠다는 염원을 담아 미륵사를 창건한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9층탑의 조성을 미루어 볼 때, 미륵사 창건을 통해 불교의 패러다임을 개인불교와 귀족불교에서 호국불교로 전환시키고자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그리고 마지막 증거는 왕릉이다. 익산시 팔봉동에 있는 두 기의 대형 고분은 무왕과 왕비의 무덤으로 알려져있으며, 흔히 쌍릉이라 부른다. 이 고분은 일찍이 1917년에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는데, 무덤의 구조와 출토품이 부여 능산리고분과 같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럼에도 이 고분이 무왕릉과 왕비릉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 자료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능산리의 왕릉과 비교해봐도 대형인 점과 부여지역의 왕릉에서 확인된 바 없는 옥장신구가 출토된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왕릉급일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백제 왕실 인사 가운데 익산과 가장 연관성이 있는 무왕과 그의 왕비릉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이처럼 익산지역은 무왕대에 왕도로 본격적으로 개발되었다. 궁성의 건설, 왕실 사찰의 조영, 그리고 새로운 통치이념을 대내외에 과시하기 위한 기념물 즉 미륵사의 창건을 볼 때, 무왕의 익산 개발은 치밀한 계획 아래 이루어졌다. 즉 금마와 왕궁 일대는 백제의 계획도시이자 또 다른 왕도였다.진정환(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 문화재·학술
  • 기고
  • 2013.11.27 23:02

왕궁리 유적 백제 궁성 후원 전모 확인

사적 제408호 익산 왕궁리 유적에서 백제 궁성의 후원(後苑)전모가 드러났다. 문화재청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소장 배병선)는 26일 익산 왕궁면 왕궁리 유적에 대해 2009년부터 현재까지 발굴조사를 진행한 결과, 백제 후원의 전모를 확인했다고 밝혔다.익산 왕궁리 유적은 백제 무왕(武王600-641) 때 조성된 궁성으로, 1989년부터 백제문화권 유적정비사업의 일환으로 연차적인 발굴이 진행됐다. 그동안 궁성과 관련된 성벽전각정원후원대형화장실공방 터 등이 조사되었고, 인장 기와중국제 자기연화문 수막새를 비롯한 중요 유물 5900여 점이 출토되어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후원 공간의 총면적은 3만9100㎡(전체 면적의 1/3)이며 2009년부터 현재까지 발굴조사를 진행, 그 전모를 확인했다. 후원에는 돌을 반듯하게 다듬어 설치한 석렬 시설, 9부 능선을 따라 구릉을 감싸는 환수구(環水溝), 구릉 정상부에 조성된 건물지 등이 확인되었다. 또 다채로운 괴석(怪石)을 자연스럽게 배치하고 물을 이용하여 경관을 조성하였다. 환수구는 그 자체가 조경시설인 동시에 구릉 정상부에서 내려오는 물을 성 외곽으로 빼내는 수로(水路)의 역할도 담당하였다. 이 후원은 백제 때 궁성의 일부로 조성된 이후, 궁성에서 사찰로 바뀌면서도 거의 원형 그대로 활용되다가, 환수구를 대체하는 곡수로(曲水路)와 구릉 정상부 방형 초석 건물지 등이 추가로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출토유물을 통해 볼 때, 후원의 사용 시기는 후삼국~고려시대까지 이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번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후원의 다채로운 괴석과 물을 통한 경관 조성은 현재까지 이어지는 우리나라 조경(造景)기술의 시원 형태이며, 또 백제 궁원(宮苑) 관련 기록을 뒷받침할 수 있는 유일한 발굴 조사 성과로서 그 의의가 크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앞으로 발굴조사 성과를 바탕으로 융복합적 연구를 통해 백제 조경 기술의 실체를 확인하고 후원을 복원, 정비할 계획이다. 문화재청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28일 11시 익산 왕궁리유적에 대한 2013년도 발굴조사 성과를 설명하고 현장을 공개할 예정이다.

  • 문화재·학술
  • 엄철호
  • 2013.11.27 23:02

익산 왕궁리 유적에서 백제 궁성 후원 전모 확인

사적 제408호 익산 왕궁리 유적에서 백제 궁성(宮城) 후원의 전모가 확인했다. 문화재청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소장 배병선)는 전북 익산 왕궁면 왕궁리 유적에 대해 2009년부터 현재까지 발굴조사를 진행한 결과 백제 후원의 전모를 확인했다고 26일 밝혔다. 익산 왕궁리 유적은 백제 무왕(武王600-641) 때 조성된 궁성이다. 1989년부터백제문화권 유적정비사업의 하나로 연차적인 발굴이 이뤄져 왔다. 이전 조사에서는 궁성과 관련된 성벽, 전각(殿閣), 정원, 후원, 대형화장실, 공방(工房) 터 등이 발굴됐다. 이 과정에서 인장(印章) 기와, 중국제 자기, 연화문 수막새를 비롯한 중요 유물 5천900여 점이 출토되기도 했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2009년부터 현재까지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한 후원 공간의 총 면적은 3만9천100㎡(전체 면적의 3분의 1). 후원에는 돌을 반듯하게 다듬어 설치한 석렬 시설, 9부 능선을 따라 구릉을 감싸는 환수구(環水溝), 구릉 정상부에 조성된 건물지 등이 확인됐다. 또 다채로운 괴석(怪石)을 자연스럽게 배치하고 물을 이용해 경관을 조성했다. 환수구는 그 자체가 조경시설인 동시에 구릉 정상부에서 내려오는 물을 성 외곽으로빼내는 수로(水路)의 역할도 담당했다. 연구소는 "이 후원은 백제 때 궁성의 일부로 조성된 이후 궁성에서 사찰로 바뀌면서도 거의 원형 그대로 활용되다가 환수구를 대체하는 곡수로(曲水路)와 구릉 정상부 방형 초석 건물지 등이 추가로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면서 "출토유물을 통해 볼 때 후원의 사용 시기는 후삼국에서 고려시대까지 이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이어 "이번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후원의 다채로운 괴석과 물을 통한 경관 조성은 현재까지 이어지는 우리나라 조경(造景) 기술의 시원 형태이며, 또 백제 궁원(宮苑) 관련 기록을 뒷받침할 수 있는 유일한 발굴 조사 성과로서 그 의의가 크다"고덧붙였다. 연구소는 오는 28일 오전 11시에 익산 왕궁리 유적에 대한 2013년도 발굴조사 성과를 설명하고 현장을 공개할 예정이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 문화재·학술
  • 연합
  • 2013.11.26 23:02

'미륵사지 사리장엄 특별전' 백제 찬란한 불교문화 유물 한곳에

2009년 연초 온 국민을 깜짝 놀라게 만든, 익산 미륵사지 석탑에서 출토된 국보급 유물인 사리장엄 유물 전부가 일반에 처음 공개된다. 전북도가 문화재연구소익산시와 함께 미륵사지석탑 복원 착수식을 기념해 27일부터 4개월간 익산유물전시관에서 사리장엄 특별전을 갖는다. 사리장엄 출토 직후 한 차례 가졌던 특별전이 일부 유물들로 이루어진 맛보기 전시였던 데 비해 4년만에 다시 열리는 이번 전시에는 전체 9900여점의 출토품 중 석탑에서 수습된 사리와 사리장엄구 9600점이 공개된다. 직물류, 도자(칼), 사리병편 등 보존처리가 완료되지 않거나 상태가 좋지 않은 일부 유물만 제외됐다. 미륵사지 석탑 사리공에서 발견된 유물은 그동안 발굴기관인 문화재연구소에서 보존 처리한 뒤 임시보관해왔다. 당시 석탑 사리공에서 발견된 유물은 금제사리봉영기, 사리기인 금동제사리외호금제사리내호유리사리병, 공양구인 명문이 쓰인 금판 등 9900여점 이상이 확인됐으며, 석탑 하부에서 발견된 유물은 토제 나발(불상의 곱슬머리) 등 200여점 이상이 확인됐다. 이는 국내 석탑 내 발견 유물 중에서 가장 많은 수량이다. 미륵사지 석탑은 현존하는 2009년 석탑 1층 심주석에서 사리장엄이 발견되면서 구체적인 석탑의 건립시기(639년)와 미륵사 창건의 성격과 발원자(백제시대 무왕의 왕후)가 밝혀져 주목을 받았다. 이와 함께 사리를 직접 봉안했던 금제사리내호와 금동제사리외호의 양식 및 제작기법은 7세기 전반의 백제 금속공예 및 미술 양식이 매우 뛰어난 수준으로 발전해 있었음을 보여주는 유물로 평가받는다.노기환 전시담당은 창건 당시 석탑의 사리공 구조 및 유물의 배치 양상을 처음으로 완전하게 확인한 예이자, 석탑 하부 구조의 조사를 통해서 석탑 하부의 사리 공양 의례 관련 유물을 본격적으로 확인했다는 점에서, 고대 백제뿐 아니라 동아시아 탑과 사리장엄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고 설명했다.석탑 기단부에 인조 나발과 손톱을 봉안하는 의례는 중국의 불교 의례를 받아들여 백제화시킨 예로 추정하고 있으며, 미륵사지 석탑에 사리를 봉안한 사리기의 내부를 다양한 종류의 값진 구슬들로 가득 채우는 양식은 이제까지 동아시아의 사리장엄구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백제만의 사리장엄 방식으로 보았다. 특히 사리장엄 일괄품은 그동안 잊혔던 백제와 신라, 중국, 일본 등 고대 동아시아 문화 교류 양상을 새롭게 밝혀주는 귀중한 불교미술품이라는 게 전시관의 설명. 이들 유물들은 화려하면서도 우아하고 섬세한 백제 미술 양식을 잘 보여주는 중요한 작품들로서, 백제 후기 불교 및 왕실 문화의 다양성과 개방성, 국제성을 잘 보여준다는 것. 사리공과 청동합에서 발견된 진주 구슬의 존재는 백제가 중국뿐만 아니라, 동남아와 직접 교류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덧붙였다.노 담당은 미륵사지 석탑 사리공에서 발견된 수많은 유물들에 대한 기초적 연구는 이제 시작되었을 뿐이다며, 앞으로 각 유물들에 대한 개별적인 고찰 및 동시대 신라, 고구려, 중국, 일본과의 관계를 심도 깊게 고찰하여 동아시아 고대사의 새로운 이해가 이 유물들을 통해서 이뤄질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 문화재·학술
  • 김원용
  • 2013.11.26 23:02

다시 태어나는 익산 미륵사지 석탑

국내 최고(最古) 최대(最大)의 석탑인 전북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11호)이 본래 모습으로 복원된다.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와 전북도는 26일 오후 1시 익산시 금마면 미륵사지에서 '미륵사지 석탑 복원 착수식'을 연다. 착수식은 미륵사지 석탑이 일제강점기인 1915년 콘크리트 보수 이후 98년 만에 '제모습 찾기'의 시작을 알리는 행사다. 미륵사지 석탑은 1915년께 서쪽면 전체와 남쪽 북쪽면 일부가 무너져 내렸고 당시 일제가 추가 붕괴를 막기 위해 시멘트를 덧씌웠다. 원래 9층이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무너진 후엔 6층까지만 남았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은 현존하는 2009년 석탑 1층 심주석에서 사리장엄(舍利莊嚴)이 발견되면서 구체적인 석탑의 건립시기(639년)와 미륵사 창건의 성격과 발원자가밝혀졌다. 국립문화재연구소와 전북도는 2010년까지 석탑의 해체와 발굴 조사를 완료했고 복원공사는 2016년까지 마무리할 계획이다. 착수식은 전통무용과 무왕행차 재현 공연을 시작으로 미륵사지 석탑 보수정비사업 계획보고와 심초석 놓기 시연 등의 순으로 진행된다. 또 미륵사지유물전시관에서는 국립문화재연구소, 전북도, 익산시가 공동으로 개최하는 '미륵사지 석탑 사리장엄 특별전' 개막식이 열린다. 특별전에선 2009년 발견된 사리장엄을 비롯해 기단부 발굴 조사에서 출토된 진단 유물이 선보인다. 금제봉영기, 금제사리내외호, 은제관식 등 사리장엄과 진단구 9천900여점이 전시된다. 특별전은 27일부터 내년 3월 30일까지 이어진다.

  • 문화재·학술
  • 연합
  • 2013.11.21 23:02

지면으로 만나는 익산의 역사문물 ② 백제의 지방 거점, 익산

익산지역에 대한 백제의 직접 통치가 이루어진 4세기 이후 이 지역에는 마한의 전통을 고수하는 집단이 있었다. 이는 마한 전통의 분구묘에서 5세기의 굽다리토기(高杯)가 다량으로 발견된 간촌리 분구묘를 통해 추론해볼 수 있다. 묵동유적 역시 백제계 분묘가 익산지역에 집중적으로 조영되는 5세기 중엽 이후에 해당하지만, 마한 토착문화의 특징을 보여준다. 묵동유적의 분묘는 마한 전통의 분구묘지만, 짧은목항아리, 곧은목항아리, 세발그릇 등 백제의 토기가 출토되었다.이처럼 마한의 전통을 유지하려는 집단이 있었는가 하면, 백제의 귀족으로 편입된 집단도 있었다. 이를 뒷받침하는 유적이 바로 웅포리 고분과 입점리 고분이다.웅포리 고분은 구덩식돌덧널무덤, 앞트기식돌덧널무덤, 굴식돌방무덤 등이 혼재되어 있다. 구덩식돌덧널무덤과 앞트기식돌덧널무덤에서는 곧은목항아리, 굽다리토기, 뚜껑접시, 쇠도끼, 쇠낫, 칼 등이 공통적으로 확인되었다. 그러나 굴식돌방무덤에서는 앞서 두 유형의 무덤과는 달리 쇠도끼 등의 철기가 보이지 않는다.쇠도끼, 쇠낫, 칼이 세트를 이뤄 부장된 널무덤이 마한 토착세력의 전통이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구덩식돌덧널무덤과 앞트기식돌덧널무덤에 묻힌 주인공들은 마한의 전통을 유지하면서도 백제의 문화를 수용한 사람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백제 중앙 귀족의 묘제라 할 수 있는 굴식돌방무덤에 묻힌 주인공들은 완전히 백제의 귀족체계에 편입된 이들로 여겨진다.입점리 고분은 굴식돌방무덤, 앞트기식돌방무덤, 구덩식돌덧널무덤, 독널무덤 등 21기가 확인되었다. 이 가운데 백제의 고분은 19기인데, 86-1호분을 제외한 나머지 무덤에서는 토기, 꺽쇠, 쇠못 등 일부만 남아 있었을 뿐 이미 파괴되거나 도굴된 상태였다.온전하게 남아있던 86-1호분에서는 금동관을 비롯하여 금동신발, 귀걸이, 재갈등자행엽 등의 마구류와 청자 등이 출토되었다. 금동관이 출토된 1호분의 조성시기에 대해서는 한성도읍기 말기인 5세기 중엽, 웅진도읍기 초기인 5세기 후반, 무령왕릉과 비슷한 시기 또는 이보다 늦은 5세기 말~6세기 초 등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궁륭형의 천장 형태와 마구 등으로 볼 때 웅진시기 초기에 해당하는 5세기 4/4분기일 가능성이 높다.한편 금동관을 착장한 입점리 고분의 주인공은 백제의 작호제(爵號制)에 따라 왕 또는 후라고 불렸을 가능성이 있다. 아울러 〈양서〉(梁書) 백제전에 언급되어 있는 22담로 가운데 하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익산지역에서 왕 또는 후라고 불리며 백제 중앙의 고위 귀족에 편입될 수 있었던 집단은 한때 마한연맹체의 맹주를 자임하였던 건마국의 지배층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그렇다면, 웅진도읍기 금강 하구를 중심으로 백제 중앙과 관련이 깊은 무덤이 집중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금강은 웅진에서 서해로 가는 가장 빠른 교통로였다. 그러나 이 강은 양날의 검처럼 전란시에는 적군의 이동로가 되었다. 이 때문에 금강유역에 대한 방비는 백제에게 매우 중요해졌다. 백제의 입장에서는 금강 하구에 위치한 웅포리와 입점리 지역의 옛 마한세력에 대한 회유를 통해 친백제 세력으로 둘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한 노력의 산물이 웅포리 고분군의 굴식돌방무덤이고, 입점리 고분에서 출토된 금동관과 금동신발, 중국제 청자라고 할 수 있다.진정환(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 문화재·학술
  • 김원용
  • 2013.11.20 23:02

정읍 역사·문화 연구 더 깊어진다

정읍의 역사와 문화를 재정립하는 움직임이 가시적인 성과로 나타나고 있다. 정읍의 민간 향토사 연구모임인 '정읍학연구회'가 오는 22일 정읍시 시기3동 청소년수련관 YMCA 세미나실에서 창립 기념식과 함께 '정읍 지역문화 연구의 주요 과제'라는 주제로 첫 학술대회를 연다. 이날 행사는 (사)민족문화연구소 주최, 정읍문화원 주관, 정읍시청 후원으로 이뤄졌다. 정읍학 연구회는 그동안 전주·김제·고창·부안 등에서는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다양한 연구를 통해 지역적 자긍심을 일깨우는데 반해 정읍은 상대적으로 연구 성과가 미진했다는 자성의 목소리에서 출범했다. 정읍의 지역사를 보다 구체적이고 깊이있는 연구를 지향하며 점진적으로 정읍학 총서를 만들 계획이다. 출범을 준비한 전북대 김익두 교수(국문과)는 "정읍 지역은 인근 여느 지역보다 사상적 측면에서 뛰어난 자원을 간직하고 있지만 특색 있는 문화관광 자원이 기억되는 고장으로는 조명 받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고 배경을 설명하며 "지방자치시대 18년째 지역문화에 대한 지역민의 관심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지역의 고대사와 근·현대사를 아우르는 민간 차원의 향토사 연구모임이다"고 소개했다.이어 김 교수는 "인근 지역의 향토사 연구모임에 비해 다소 출범이 늦은 만큼 연중 전반기와 후반기 학술세미나를 거쳐 향토사 연구 사료를 내놓겠다"고 밝혔다.정읍문화원 정창환 원장은 "정읍의 역사·문화적 자산이 지역민의 자긍심으로 키워지기 위해서는 각계각층에서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면서 "지역민과 출향인, 학계가 힘을 모아야 한다"고 말했다.

  • 문화재·학술
  • 이세명
  • 2013.11.19 23:02

남원서 12세기 초 추정 석불입상 발견

남원에서 12세기 초인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석불입상이 발견됐다.남원문화원(원장 이병채)은 910일 남원향토대학과 전국 석불문화연구회 관계자 등 40여명과 함께 남원지역의 석불과 마애불을 답사하던 중 그동안 학계에 알려지지 않은 석불입상 1구를 발견했다고 12일 밝혔다.남원시 송동면 사촌리 원통산 중턱의 옛 원통암 자리에서 발견된 이 석불은 불신과 광배가 하나의 돌로 이뤄져 있다.석불의 전체 높이는 215cm, 광배 폭은 133cm, 불신 높이는 160cm, 불신 폭은 120cm 규모다. 눈과 코, 입은 마모가 심해 정확한 형태를 확인하기 어렵고 목은 굵은 편이다.광배(光背머리나 등 뒤 광명을 표현한 것)는 곡선을 그리며 안쪽이 깊게 패인 형태로 불신이 약 20cm 앞으로 튀어나와 있다. 이 양식은 전북도 지정문화재 제47호인 낙동리 석조여래입상과 그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당시 남원지역 석불의 흐름을 파악하는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이병채 원장은 "그동안 남원지역의 석불 및 마애불을 조사한 결과, 지정문화재 17구 외에 20여 구의 석불과 마애불은 정확한 조사가 이뤄지지 않아 그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며 "이번에 발견된 송동면 사촌리 석불을 비롯해 사석리 마애불, 수지면 포함마을의 둑적골석불입상 등 비지정 석불에 대한 면밀한 조사를 통해 문화재 지정을 서둘러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 문화재·학술
  • 홍성오
  • 2013.11.13 23:02

지면으로 만나는 익산의 역사문물 ① 마한의 중심, 익산

익산은 살아있는 역사교과서다. '익산역사유적지구'는 경주부여공주와 함께 4대 고도(古都)보존지구로 지정됐으며, 세계문화유산등재를 위한 각계의 움직임도 활발하다. 이 같은 분위기 속에 국립전주박물관(관장 유병하)이 익산시전북일보KBS전주방송총국국립문화재연구소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와 공동으로 지난달 28일부터 익산에 산재한 문화유산들을 종합적으로 보여주는'전북의 역사문물전, 익산'기획전을 열고 있다(2014년 2월19일까지). 본보는 익산의 역사유물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문화적 자긍심을 높일 수 있도록 연재 기획물을 마련했다.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의 집필로 10차례에 걸쳐 진행될 이 기획은 익산의 역사유물의 가치를 다시 살펴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역사유물에 대한 상식을 넓히는 기회가 될 것이다.〈삼국지〉 위서 동이전과〈후한서〉 동이열전(東夷列傳) 한조(韓條)에 따르면, 고조선의 준왕은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긴 후 한지(韓地)지에 와서 한왕(韓王)을 자청하였다. 고조선 준왕이 정착한 곳에 대해서 〈제왕운기〉, 〈고려사〉 지리지, 〈세종실록〉 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은 금마(金馬)로 기록하고 있다.그렇다면 '고조선 왕의 남천'은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을까?익산지역은 청동기시대부터 중국, 한반도 서북부지역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곳이라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만약 전쟁에서 패한 고조선의 준왕이 바다를 건너 남쪽으로 내려간다면, 우호적인 교류가 있었던 익산지역으로 가는 것이 당연하다.이와 관련된 고고학적 증거 가운데 하나가 왕궁면 평장리에서 나온 전한경(前漢鏡)이다. 평장리유적에서는 전한경과 함께 한국식 동검 2점, 청동창과 청동꺽창 각 1점 등이 확인되었다. 초엽문과 반리문이 새겨진 전한경은 대체로 기원전 3세기 말~2세기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고조선 왕이 위만에게 쫓겨 남천한 시기로 추정되는 기원전 194년~180년 사이와 일치한다.이와 더불어 결정적 증거로 철기를 들 수 있다. 고조선은 한반도 남부에 철기가 유입되기 전에 이미 중국 연나라의 영향을 받아 철기를 사용하고 있었다. 한반도 남부에 철기가 등장한 시기는 대체로 기원전 2세기 무렵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고조선 준왕의 남천 직후와 맞물려 있다.익산시 춘포면 신동리의 널무덤에서 덧띠토기, 한국식 동검과 함께 도끼, 새기개가 출토되었다. 특히 신동리 널무덤의 형식은 청동기시대 익산지역에서 유행하던 무덤 형식과도 다르며, 삼한시대 유행했던 분구묘와도 연결되지 않아 외래 집단이 이주했음을 보여주는 유력한 증거 가운데 하나이다.그렇다면, 익산에 정착한 고조선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후한서〉 한전(韓傳)에 따르면, '준왕 후손이 절멸하자, 마한인이 다시 자립하였다.'고 한다. 이는 곧 외래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고조선 준왕의 후손을 대신하여 토착세력이었던 마한인들이 득세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익산지역에서 고조선 세력을 대체한 마한인들이 세운 국가는 건마국(乾馬國)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익산지역 마한인의 생활 흔적은 장신리유적과 송학동유적에서 살펴볼 수 있다. 2007년에 발굴된 장신리유적은 해발 9~12m의 완만한 구릉의 사면에 조성된 마을유적으로, 총 27기의 집터가 확인되었다. 여기에서는 다양한 토기와 함께 불에 탄 쌀 등의 곡물이 발견되어 마한인들의 식생활의 일면을 살펴볼 수 있다.송학동유적에서는 다른 유적에 비해 다양한 생산도구가 발견되어, 마한인들의 생산기술을 가늠해볼 수 있다. 송학동유적에서 나온 구슬 거푸집은 작은 구멍이 많이 뚫린 형태이다. 이러한 형태의 거푸집은 열에 녹인 용액을 틀에 부어 작은 구슬을 한 번에 많이 만들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또 다른 생산 도구인 받침모루는 토기 벽을 두드리는 도구로, 토기 벽의 밀도를 높여 얇으면서도 강도가 높은 토기를 만들수 있었으며, 받침모루에 새겨진 무늬에 따라 토기 표면에 두드림무늬가 생기는 예술적 효과를 줄 수 있었다.익산지역의 마한인들은 고조선 세력과는 달리 무덤 주위에 고랑을 판 분구묘를 축조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영등동 분구묘와 율촌리 분구묘인데, 낮은 분구와 주구를 가진 저분구묘인 것이 특징이다. 이와 더불어 간촌리유적의 널무덤에서는 풍요를 가져다주는 곡령신으로 마한인들이 숭배하던 새를 형상화한 토기가 발견되기도 하였다.건마국은 처음에는 고조선 준왕 세력을 대체하여 마한연맹의 맹주를 자처하였으나, 점차 그 지위를 목지국에 내줘야만 했다. 또한 백제가 성장함에 따라, 영산강 유역의 마한연맹체처럼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지 못하고 점차 백제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되었다.진정환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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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11.13 23:02

"신재효 자료 총서 발간 의미 있는 일"

고창군은 동리 신재효 선생의 자료 총서 발간사업의 일환으로 지난 9일부터 이틀간 제9회 고창판소리학술발표회를 군립도서관에서 개최했다. 동리 신재효(1812~1884) 선생은 판소리 후원가, 지도자, 이론가, 사설 집대성자로서 판소리사에 지대한 업적을 남겼다. 역사적으로 음악에 대한 뛰어난 감식안과 소양을 갖추고 음악활동을 후원했던 지도자와 후원가가 많이 있었지만, 동리 신재효와 같이 판소리를 중심으로 문화공동체를 조성하고 판소리 이론을 정립하고 가단을 이끌고 지도했던 사람은 일찍이 없었다는 평가다. 판소리는 우리 전통성악예술의 정수로서 지속될 것이며, 이러한 판소리에 그 이론의 기초를 마련하고, 사설을 집대성했으며, 판소리 발전방향을 열어나간 동리 신재효 선생의 활동을 일람할 수 있는 자료총서를 발간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이번 학술발표회 기획주제는 신재효 자료총서 발간의 과제와 전망, 판소리 자료의 재조명, 판소리 역사의 투시 Ⅲ(초기 판소리의 모습)이다. 9일 열린 제1부는 신재효와 판소리 연구 자료에 대한 몇 가지 단상(이훈상동아대학교), 신재효 자료의 현황과 총서 발간 방향(이영일고창판소리박물관)에 대해 발표했다. 제2부는 초기 심청가의 모습(서유경목원대학교)과 적벽가 원형과 형성 재검토(김상훈인하대)에 대한 발표와 토론, 10일에는 춘향전 노정기의 변모양상 고찰(이지영안동대학교), 생활양식 변화에 따른 독공의 변모양상 고찰(김정태전북도립국악원), 판소리 도제집단의 성격 변화에 관한 연구(백은철전북대학교)에 대한 발표 및 토론이 이어졌다.관계자는 "그동안 산재되어 있는 동리 신재효 선생의 사설과 자료에 대한 영인본 및 총서 발간에 대한 요구가 있어 왔으나, 지금까지 시도되지 못하고 있던 차에 이번 학술발표회를 통해 자료총서 발간의 과제와 전망이라는 주제를 집중적으로 검토하게 된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며 "초기 판소리의 모습을 고찰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대표적인 공연예술의 옛 모습과 그 발전과정을 조명하는 뜻 깊은 시간이 됐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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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성규
  • 2013.11.12 23:02

"동고산성, 후백제 유적으로 보존을" 백제·조선 잇는 가교역할…정밀 지표조사 등 필요

전주 동고산성의 원형을 보존해 전주의 역사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한국고대사학회 주관으로 지난 8일 국립무형유산원에서 열린 '후백제 왕도 전주의 재조명'학술대회에서 정재윤 공주대 교수는 "동고산성은 후백제 도성 유적으로서 보존할 만한 가치가 있고, 후백제 도성 유적 복원의 시발점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또 동고산성은 백제와 조선시대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함으로써 천년 전주의 위상을 확립하는 데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했다.이를 위해 무엇보다 종합정비계획을 세워 탐방로와 시설을 정비하고, 후백제 도성 유적이 갖는 가치를 시민과 공유할 필요가 있다는 게 정 교수의 지적이다. 이와함께 익산의 고도육성사업과도 연계해 백제-후백제를 잇는 벨트라인을 형성한다면 상대적으로 낙후된 백제권 개발에 탄력을 받을 수 있고, 전주의 다른 문화산업과도 연계해 문화적 다양성과 깊이 그리고 상승 효과를 가져올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시민들의 관심을 유도하기 위해서는 스토리텔링이 필요하며, 동고산성의 주건물지와 성황사를 연결시켜 전주 시민들을 지켜주는 영험한 산이라는 믿음을 널리 확산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서정석 공주대 교수는 "계속된 조사로 동고산성 성벽의 둘레나 축성법, 성내 시설물 현황, 출토유물의 특징 등이 어느 정도 밝혀진 상태이기는 하지만 발굴조사한 면적이 극히 일부에 불과한 만큼 전체에 대한 정밀 지표조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성정용 충북대 교수는 "1000년전 견훤이 도읍하였던 전주 고도의 실체가 향후 발굴조사를 통해 좀 더 명확하게 밝혀지고, 이를 바탕으로 정비 복원이 이루어져 전주의 옛 향기가 더욱 물씨나는 도시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이날 학술대회는 노중국 계명대 교수가 '견훤왕은 왜 전주를 왕도로 정했는가'주제로 기조강연을 했으며, 강원종 전주문화연구원 실장의 '전주 동고산성 발굴 성과와 의의', 김주성 전주교대 교수의 '후백제의 궁궐 위치와 도성규모', 신호철 충북대 교수의 '후백제의 역사적 성격'에 대한 발표로 진행됐다.학술대회에서는 또 곽장근 교수가 토론자로 나서 지난 7일 발표한 후백제 궁궐 위치를 전주 인봉리 일대라는 새로운 '설'을 제시했다.(8일자 1면).

  • 문화재·학술
  • 김원용
  • 2013.11.11 23:02

'동학혁명' 도화선 무장기포 의의 널리 알려

고창군과 역사문제연구소(소장 김동춘)는 지난 8일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역사관(서울 종로 소재)에서 제9회 동학농민혁명 학술대회를 개최했다.이번 행사는 자유와 평등의 숭고한 정신을 구현하기 위해 1894년 발생한 동학농민혁명의 가치를 계승하고 한국 근대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동학농민혁명을 재조명하며, 전국적 봉기의 시발점인 무장기포지의 의의를 널리 알리기 위해 동학농민혁명 발발 120주년을 앞두고 마련됐다.소현숙 한양대학교 연구교수 사회로 진행된 학술대회는 동학교도 및 민중의 동향과 정부의 대응, 중앙정치세력의 동향, 동학농민혁명 이전 단계의 민중의 동향 등에 대해 역사문제연구소 이이화 고문의 기조강연으로 시작됐다.제1주제 '1890년대 초반 민중운동과 민중의 동향'은 송찬섭 한국방송통신대 교수 발표와 김양식 충북학 연구소장의 토론, 제2주제 '1880~90년대 동학의 확산과 동학에 대한 민중의 인식'은 배항섭 성균관대 교수의 발표와 홍동현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의 토론, 제3주제 '1890년대 전반 중앙 정치세력의 동향'은 김용태 성균관대 교수의 발표와 노대환 동국대 교수의 토론, 제4주제 '일본 자료에서 보이는 1890년대 동학교도의 활동과 정부의 대응'은 강효숙 원광대 교수의 발표와 조재곤 전 동국대 교수의 토론, 제5주제 '19세기 후반 고창 무장지역 유학과 동학농민봉기'는 김봉곤 순천대 교수의 발표와 정진영 안동대 교수 토론으로 진행됐다.종합토론은 충북대 신영우 교수를 좌장으로, 서울대 규장각 김선경 책임연구원 발표 후 참석자 전원이 열띤 토론을 벌였다.이강수 군수는 "동학농민혁명은 안으로는 근대 시민 사회의 수립을, 밖으로는 자주독립국가의 건설을 이루고자 한 국내 최초의 근대적 혁명으로, 3·1운동, 4·19혁명, 5·18민주화운동으로 그 정신이 이어지면서 근·현대사를 움직인 민족·민중항쟁의 근원이 된 역사적 의의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이번 학술대회가 동학농민혁명 발발 직전인 1890년대 초반 조선사회와 민중 동향에 대해 이해하고, 2014년 120주년을 맞이하는 동학농민혁명을 미래화·세계화에 중점을 두고 추진함과 아울러 고창지역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의의와 가치를 확인하여 지역민의 자긍심 고취와 고유한 정신문화로 정착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 문화재·학술
  • 김성규
  • 2013.11.11 23:02

"후백제 왕궁터, 전주 중노송동 인봉리 일대"

후백제 왕궁의 위치가 전주시 중노송동 인봉리와 문화촌 일대라는 새로운 주장이 나왔다. 전주를 도읍지로 견훤이 후백제를 세웠지만 왕궁의 위치를 놓고 지금까지 여러 설만 나왔을 뿐 구체적 고증이 미흡한 실정에서 인봉리 일대가 후백제 왕궁의 면모를 밝히는 데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된다.곽장근 군산대 교수는 '후백제 왕도 전주의 재조명'학술대회를 앞두고 두달간의 지표조사와 주변 탐문 등을 통해 인봉리 일대가 후백제 왕궁일 가능성이 크다는 결론을 얻었다고 7일 밝혔다. 그의 이같은 추론은 기존에 왕궁터로 거론되어온 '전주 동고산성설''노송동설(무랑물)''전주 감영지설' 등에 문제가 있다는 데서 출발했다. 곽 교수가 왕궁터로 주장하는 인봉리 일대는 본래 방죽이 있었던 곳으로, 일제강점기에 방죽을 메워 공설운동장으로 활용했으며, 현재는 대규모 주택단지들이 들어서 있다.곽 교수에 따르면 주민들 사이에 이 일대가 왕궁터로 전해지고 있으며, 전주영상정보진흥원 옆으로 길이 50m의 토축이 남아 있는 등 왕궁터로 추정할 수 있는 흔적들이 곳곳에 있는 점을 근거로 제시했다. 곽 교수는 영상정보진흥원 동쪽에 남아있는 토축이 궁성의 서쪽 성벽으로 추정되고, 도시 개발로 본래 지형이 대부분 훼손됐지만 동남북 성벽의 경우 기린봉 산자락을 활용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자연지형을 확인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송화섭 전주대 교수도 "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전주의 고토성(古土城)이 후백제의 도성일 가능성이 크고, 무랑물에서 발견되는 초석은 궁성이 파괴되면서 나온 돌일 가능성이 있다"고 '인봉리설'을 뒷받침했다.

  • 문화재·학술
  • 김원용
  • 2013.11.08 23:02

"후백제 왕궁 위치, 인봉리·문화촌 일대" 주장 근거

후백제 왕궁 위치로 '전주 중노송동 인봉리와 문화촌 일대'라는 주장이 새롭게 제기되면서 미궁 속'후백제 왕궁'찾기에 돌파구를 열지 관심을 모으고 있다. 후백제 왕궁 위치를 놓고 기존에 몇가지 추정이 나왔지만 구체적으로 뒷받침할 만한 똑떨어진 '증거'가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새 주장에 대한 검증과 고증을 통해 활발한 논의가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곽장근 군산대 교수는 7일 현장 설명회를 통해 '인봉리 일대'가 후백제 왕궁 위치로 추정할 수 있는 근거로 왕궁을 두른 궁성 혹은 왕성으로 추정되는 성벽의 흔적을 들었다. 전주영상진흥원 동쪽에 궁성의 서쪽 성벽으로 추정되는 길이 50m 토축이 남아있다는 것. 이를 서벽으로 가정하고 궁성의 동벽(기린봉 정상부에서 북쪽의 서낭댕이까지)북벽(우성해오름아파트에서 태고종 종무원까지)남벽(아랫마당재~전주제일고~전주풍남초)을 설정했다. 평지인 서벽을 제외하고 나머지 성벽들은 기린봉 산자락을 활용했고, 주택단지 등으로 개발됐음에도 자연지형을 통해 성벽의 존재를 추정할 수 있다고 했다.인봉리와 문화촌 일대는 본래 인봉리 방죽이 있었던 곳으로, 일제강점기에 방죽을 메워 인봉리 공설운동장으로 사용했으며, 1963년 덕진종합경기장이 건설된 후 현재의 모습으로 점차 바뀌었다. 곽 교수는 인봉리 방죽의 존재에 주목했다. 후백제 멸망 이후 그 재건과 견훤의 부활을 우려해 전주에 주둔했던 군대(안남도호부)가 방죽을 만들고 도성을 의도적으로 파괴했을 것으로 추측했다. 또 인봉리 일대에 왕궁이 있었다면 지형적 특성상 그 방향은 자연스럽게 서쪽을 향하도록 되어있어 견훤의 미륵신앙과도 연결지을 수 있다고 보았다. 금산사 미륵전이 서쪽을 향하고 있는 것과 같은 이치에서다.인봉리 일대가 왕궁 위치로 할 때 도성은 종래 고토성(古土城)으로 알려진 산자락으로 불 수 있으며, 그 평면형태가 반월형으로 중심부에 왕궁터를 병풍처럼 휘감는다. 이와함께 도성을 보호하기 위한 외성도 있었을 것이며, 외성은 기린봉을 중심으로 남쪽으로 승암산을 지나 이목대와 오목대, 북쪽으로 도당산과 매봉산을 거쳐 금암동까지 이어진 산자락 등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현지조사 과정에서 아중리 구간을 외성이라고 제보한 주민도 있었다는 게 곽 교수의 설명. 곽 교수는 또 문헌(〈완산지 향리기〉)상 전주천이 오목대 아래로 흘렀다는 내용도 후백제 도성과 관련이 깊다고 보았다. 후백제 도성을 복원했을 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평지구간인 서쪽 구간이며, 지형적인 한계를 해결하기 위해 전주천 물줄기를 이용한 것으로 추정했다. 전주천이 서쪽을 보호해주는 해자와 함께 성벽의 역할도 담당했을 것이라는 추론이다. 그러나 아직 구체적 고증이 이루어지지 않아 곽 교수의 '인봉리'설은 기존 '전주 동고산성설''전주 노송동설''전주 감영지설'등과 함께 또하나의 설로 그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인봉리설'은 8일 국립무형문화유산원에서 열리는 한국고대사학회 주관 '후백제 왕도 전주의 재조명'학술대회에서 새 쟁점이 될 전망이다.

  • 문화재·학술
  • 김원용
  • 2013.11.08 23:02

'후백제 왕도 전주 재조명' 학술대회 8일 무형유산원

전주시가 주최하고 한국고대사학회(회장 임기환) 주관하는 '후백제 왕도 전주의 재조명'학술대회가 8일 국립무형유산원 공연장에서 열린다. 그동안 학계에서 후삼국 시대에 대해 고려의 통일로 넘어가는 과도기로 이해하고 후백제에 대해서도 깊이 있는 연구가 미진한 상황에서 후백제의 역사적 성격을 규명하고 후백제의 도읍지였던 전주의 유적들을 어떻게 보존할지 논의하는 자리다.학술대회는 노중국 계명대 교수가 '후백제와 전주'를 주제로 기조강연에 나서며, '전주 동고산성 발굴 성과와 의의'(강원종 전주문화유산연구원 실장)·후백제 궁궐위치와 도성규모'(김주성 전주교대 교수)·'후백제의 역사적 성격'(신호철 충북대 교수)·'후백제 지역의 사상적 동향'(장일규 한국학중앙연구원)·'후백제 도성 동고산성의 활용과 보존'(정재윤 공주대 교수) 등 5개 주제발표, 종합토론으로 진행될 예정이다.종합토론은 조법종 우석대 교수를 좌장으로, 곽승훈(충남대)·곽장근(군산대)·김선기(원광대)·김철주(문화재청)·서정석(공주대)·성정용(충북대)·송화섭(전주대)·오평근(전주시의회)·이강래(전남대)·조인성(경희대)·채미옥(국토지리원)씨가 참여한다.

  • 문화재·학술
  • 김원용
  • 2013.11.07 23:02

제23회 동리대상에 이명희 명창

판소리 부문 최고 권위의 상인 제23회 동리대상 시상식이 6일 고창읍 동리국악당에서 개최됐다. 50여 년을 판소리 중흥과 대중화에 헌신한 이명희(67) 명창이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경북 상주 출신의 이명희 명창은 14세때 부모를 따라 서울로 상경하여 한국정악원에 기거하면서 국악계에 입문, 이후 김소희박귀희 선생께 사사 받은 후 창극무대 등 다양한 공연에 활발하게 참여했다.이 명창은 1986년 12월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이수자로 지정된 후 1990년 제16회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 판소리 명창부 장원(대통령상)을 수상했으며, 1992년 대구광역시 무형문화재 제8호 판소리 예능보유자로 지정됐다. 1991년 국립극장에서 흥보가를 시작으로 춘향가 등 지금까지 6회의 완창 공연을 했다.특히, 이명희 명창은 스승인 김소희 명창이 작고하기까지 수년간 극진히 수발하며 모셨고, 스승 사후에 유품을 고창 판소리박물관에 기증하여 유업을 기리게 했다. 이날, 동리대상 시상식에 앞서 판소리박물관에서는 '만정 김소희 유품전'이 개막됐다.이명희 명창은 "판소리 사설을 집대성하고 후학 양성에 일생을 바치신 동리 선생의 위대한 뜻을 잊지 않고 계승발전에 힘써준 고창군과 지역주민에게 국악인과 더불어 감사드린다"고 수상소감을 밝혔다.이날 축하공연은 이명희 명창의 '춘향가 중 옥중상봉' 대목에 이어 '명인명창과 함께하는 국악관현악의 향연'으로 펼쳐졌으며, 가야금 명인 지성자와 해금연주자 강은일, 전라북도립국악관현악단의 합주로 창작곡으로 초연된 고창아리랑이 연주되기도 했다.

  • 문화재·학술
  • 김성규
  • 2013.11.07 23:02

국창 김소희 유품에 서린 소리 인생

고창 출신의 국창 만정 김소희 선생이 남긴 유품들을 만날 수 있는 전시회가 6일부터 2014년 5월까지 고창 판소리박물관에서 열린다. 근현대 여성명창으로서 판소리 최고봉을 이루어 국창으로 불렸던 만정 김소희 선생(1917.12.1~1995.4.17)이 타개한 지 18년만이다.만정은 일찍이 중요무형문화재 5호로 지정(1963)됐으며, 민속예술원(현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을 설립하고, 여성국악동호회, 한국국악협회 이사장을 역임했으며, 해외공연을 통해 한국 판소리의 진수를 세계에 알렸다.이번 전시회는 만정의 제자 이명희 명창이 2001년부터 2013년까지 고창군에 기증한 유품 124점과 만정의 딸 박윤초 명창이 기탁한 89점, 고창군에서 자체적으로 수집한 80여점의 자료를 바탕으로 만정의 삶과 예술을 조명하기 위해 기획됐다.선생이 사용하던 장롱, 경대, 핸드백, 비녀, 반지, 화장품 등 생활소품과 손때 묻은 소리북, 가야금 등 악기류, 공연복식소품류 등 손때묻은 일상 용품에서부터 문화재 지정증명서, 금관문화훈장, 국민훈장 동백장,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등 각종 상패와 증명서를 통해 선생의 삶의 흔적을 더듬을 수 있다. 또 송만갑정정렬박동실정응민 등 희귀 SP음반, 만정 선생이 낸 춘향가, 흥부가, 심청가 등 다양한 음반과 일제시대 녹음한 SP음반, 서예를 배우며 남긴 붓글씨 작품, 무용에도 일가를 이루었던 만정의 춤사위가 담긴 사진, 가족이 소장하고 있던 어렸을 적부터 말년에 이르는 수십 장의 사진들, 제자들과 김소희 명창과의 애틋한 정과 격려가 담겨있는 편지 등 유품 200여 점이 선보인다.특히 작고하기 전 마지막 2년 동안 제자인 이명희 명창이 운영하던 경북 청도군 판소리전수소에 머물면서 판소리를 가르치고 지도하는 모습이 담겨 있는 동영상 자료도 전시되며, 이러한 유품을 통해 만정 김소희 선생의 예술관과 판소리의 특징을 살펴볼 수 있다.만정은 생전에 제자 이명희 명창에게 보낸 편지에서, 판소리는 "첫째로 문학이요, 둘째로 음악적이요, 셋째는 극적으로 되어 있어 듣고 보는 사람의 감정을 여러 각도로 흥미진진하게 할 뿐더러 그 뜻이 또한 교육적으로 되어 있어 더욱 가치가 있다"고 적었다.6일 개막식에는 딸 박윤초 명창을 비롯, 제자 신영희, 이명희, 안숙선, 한정하, 김미숙, 유수정, 김차경, 이영태, 오정해 등 국내 최고의 명창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전시회를 축하했다.

  • 문화재·학술
  • 김성규
  • 2013.11.07 23:02

'후백제 왕도 전주' 시민강좌 ⑧ 후백제의 역사적 평가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은 어엿한 건국의 주인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역사기록을 남기지 못했다. 국호와 연호를 사용했고 통치이념과 정치체제를 수립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 등 여러 나라와 외교관계를 맺으면서 이상 국가를 꿈꾸었던 일국의 국왕이었다.그러나 왕호나 시호도 전해지지 못한 채 견훤으로 불리고 있다. 더구나 폭군이나 무능한 인물로 폄하되기까지 했다. 이러한 역사인식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일찍이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으로부터 이어져오고 있다. 그는 후백제를 독립 왕조로 인식하지 않았다. 따라서 후백제의 역사를 기록하지 않았으며, 다만 견훤 열전에서 간략하게 언급했을 뿐이다. 그것도 독립 열전을 마련하지 않고 궁예왕과 한데 묶어 반역 열전에 실었다. 이와 같은 김부식의 인식은 이후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의 역사가들에게도 이어지며, 현재의 전문 역사학자들 사이에도 널리 퍼져 있는 실정이다.최근 들어 후백제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아지며 이러한 현상은 역사 인식의 변화라는 관점에서 분명 새롭고 고무적인 현상이다. 이제는 그동안 역사 무대의 뒤편에 물러서 우리의 관심에서 멀어져 있던 후백제의 역사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아울러 견훤왕에 대해서도 기존의 역사 인식에서 벗어나 새롭게 다가가야 할 것이다.견훤왕은 신라 말 경상북도 상주 가은현에서 아자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선대는 본래 가은현의 농민이었으나 아버지 대에 이르러서는 사벌성(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의 장군으로 성장했다. 견훤은 20여세 때에 신라의 서울인 경주에 들어가 군인이 됐고, 그 후 서남해안을 수비하던 해군으로 파견되고 해군 장교로 출세했다. 서기 892년(진성여왕 6년)에 광주를 점령해 드디어 왕이라 칭하고 후백제를 건국했다. 그 후 900년에는 광주에서 전주로 천도하고 본격적인 국가체제를 수립함과 동시에 영토를 내륙으로 확장해 지금의 전라도와 충청도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광대한 영토를 지배했다. 그러나 후백제 왕실의 내분으로 말미암아 약 반세기 동안 존속했던 후백제는 멸망했고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했다.왕건이 고려를 건국할 즈음 후백제는 이미 전주로 천도해 국가 체제를 정비하고 중국과의 외교를 통해 대내외적으로 안정된 정권을 수립했다. 아울러 군사적으로도 고려군은 후백제군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양국의 전투는 최후의 몇 년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후백제가 연전연승하는 형세였다. 그러나 결국 왕건이 최후의 승리자가 되었고 그에 의해 통일이 이뤄졌다.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왕건과 견훤을 승자와 패자로 만들었는가? 종래의 평가는 전적으로 견훤 개인의 잘못으로 초래된 필연적인 결과라는 점을 강조해 왔다. 이러한 해석은 중대한 결함이 있다. 견훤의 성격이나 능력 등 개인적인 요인보다는 오히려 양국의 지배층을 구성한 정치집단의 성격, 국가의 운영체제, 대외관계, 피지배층에 대한 정책, 경제적군사적 여건 등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보다 실증적이고 다양하게 탐구 비교해야 한다. 역사상 승자와 패자의 행위가 곧 옳고 그름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이에 대해서는 이미 율곡 선생이 명쾌하게 지적한 바 있다. 그는 역사적 사건의 시비(是非)와 성패(成敗)는 무관한 것이며, 오히려 성패는 행(幸)불행(不幸)과 관련된 것이지 시비(是非)와 연결시켜서는 안되고, 성공한 자를 무조건 옳다고 해서도 안된다고 했다. 오늘날 역사를 이해함에 있어서 우리는 율곡 선생의 이와 같은 엄정한 사관을 새삼 본보기로 삼아, 그동안 견훤에 대한 평가가 기왕의 사료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거나 선입관에 따른 결과론적인 해석이 아니었는지 겸허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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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11.04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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