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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2주갑인 120년을 맞은 동학농민혁명의 의미와 기념 사업의 방향을 모색하는 자리가 마련된다.사회적기업 마당(이사장 정웅기)과 전북문화저널은 23일 오후 2시 전주 한옥마을 ‘공간 봄’ 세미나실에서 ‘동학농민혁명 2주갑,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를 주제로 제132회 마당 포럼을 연다. 이날 포럼은 원도연 원광대 교수의 사회로 문병학 (사)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이사, 박준성 역사학연구소 연구원, 이병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 ‘봉준이, 온다’의 저자인 소설가 이광재 씨가 이야기를 나눈다.이들은 그동안 동학농민혁명이 중요성과 가치에 대해서는 인정받고 있지만 동학정신과 혁명적 실천력은 계승되지 못하는 현실을 짚어보고 기념일 제정 논란, 콘텐츠 활용 방안 등에 대한 견해를 밝힐 예정이다. 마당 포럼은 지난 2002년 시작해 매달 지역문화의 화두와 다양한 문제점을 놓고 대안을 찾는 논의의 장이다.
나에게 도시는 무엇인가? 내가 살고 싶은 도시, 우리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싶은 도시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좋은 도시는 어떻게 가능한가? 이러한 명제들을 탐색하고 실현해 가는 7명의 도시기획자들이 오래된 도시, 전주 탐색에 나선다. 22일 오후 7시부터 전주전통문화관 한벽극장에서 열리는 북콘서트오래된 도시 전주, 안녕하십니까. 세상을 바꾸는 7인의 도시기획자들에게 듣는다는 부제를 달았다.북콘서트를 여는 소란출판사가 펴낸 <도시기획자들>의 저자들을 초대했다. 김병수(오래된 전주를 청년의 땅으로 바꿔낸 사회적기업 이음 대표), 오형은(이야기를 통해 사람 사는 경관을 빚어내는 커뮤니티 플래너), 유다희(예술의 사회적 역할을 고민하는 공공미술프리즘 대표), 이강오(서울숲 운영자이자 서울시 그린 정책의 핵심 브레인), 이채관(책 읽는 도시 풍경을 그려낸 서울와우북페스티벌 기획자), 천호균(도시 안에서 착한 생산과 착한 소비의 다리를 놓는 쌈지농부 창업자), 최정한(도시의 욕망 에너지에 주목한 홍대클럽데이 창안자) 씨.이들은 일찍이 좋은 도시는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문제의식을 품고 전주한옥마을과 남부시장 청년몰, 서울숲, 서울와우북페스티벌, 홍대클럽데이 등 굵직한 도시재생 프로젝트를 기획해 성공시켰다. 이들에게 도시는 인문학이며, 농부이며, 숲이며, 이야기이며, 욕망이며, 청년이며, 예술이다. 이들이 엮은 <도시기획자들>은 도시기획자 1세대라고 할 수 있는 7인이 각자 꿈꾸고 실현해 온 7가지 빛깔의 도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7인 7색의 이야기가 도시는 ( )이다는 7가지 키워드로 펼쳤다. 이날 북콘서트는 일그러진 도시의 표정에 어떻게 생기를 불어 넣을지,, 끊어진 사람 사이 관계와 이야기를 어떻게 복원할지 함께 고민하는 이야기마당이다. 도시기획에 얽힌 다양한 에피소드 등을 통해 사람과 도시의 운명공동체적 관계를 되돌아보고, 미래에 더욱 주목해야 할 소셜 잡으로서 도시기획의 매력과 필요한 자질에 대한 구체적인 조언도 들을 수 있다. 이번 행사를 기획한 소란출판사 관계자는 좋은 도시는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물음을 다시 탐구하면서 삭막한 도시를 살 만한 곳으로 바꾸는 깊은 일상의 철학을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의미 있는 자리가 될 것이다고 소개했다.북콘서트는 포럼안녕하십니까와 최명희문학관, PNB풍년제과, 홍지서림이 후원했다. 이날 북콘서트는 KBS전주 손혜원 아나운서 사회로 진행되며, 지역을 기반으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마임이스트 최경식 씨와 어쿠스틱 포크밴드 이상한 계절, 고교생 밴드인 선경이와 아들들 공연도 함께 즐길 수 있다. 문의 063)251-3800
한국 역사학계 발전에 큰 발자취를 남긴 문강(文岡) 이이화 선생(76)이 오는 22일 원광대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는다.원광대는 16일 “동학농민혁명 120주년이자 2갑자가 2014년 갑오년을 맞아 동학농민혁명의 정신과 의의를 기념하고, 평생 동학농민혁명을 비롯해 왜곡된 민족사를 바로잡는데 헌신한 국내 역사학계 거목 이이화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명예 문학박사학위를 수여하기로 했다”고 밝혔다.이이화 선생은 1936년 대구에서 태어나 유소년기를 광주에서 보냈으며, 광주고를 졸업한 뒤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중퇴하고 이후 역사학자의 길로 접어들었다.이후 민족문화추진회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등에서 연구생활을 했고, 1997년 역사문제연구소장과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사장 등을 지내면서 100여 권이 넘는 저서와 많은 논쟁적인 논문을 남겼다.특히 1980년대 중반부터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현장답사와 연구를 시작해 전북지역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동학농민전쟁인물열전, 녹두장군 전봉준 등을 집필했다.한편, 이이화 선생은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받는 22일 역사학자로서의 소회를 담은 ‘나에게, 역사란 무엇인가’를 주제로 학위수여를 기념하는 특강을 펼칠 예정이다.
귀공인지 민력인지 끝내 아득하기만 해라위로 용화산 만 길 등성이를 능가하였네천년을 두고 그 석재가 죄안을 이루었으니금마국의 무강왕이 참으로 가련하구나-김종직(1431~1492)의 익산 미륵사 석부도(益山彌勒寺石浮屠)조선시대 성리학자인 점필재 김종직(1431~1492)은 익산 미륵사 석탑을 보고 이렇게 읊었다. 백제 무왕을 마한의 무강왕으로 착각하였지만, 그는 시에서 미륵사 석탑을 미륵산의 위용을 능가하는 석탑일지라도 망국의 유물일 뿐, 부질없음을 드러낸다.마한의 중심이자 백제의 또 다른 수도였던 익산은 후백제 견훤에 의해 한때 주목받았지만 통일신라, 고려 그리고 조선시대 망국의 유허(遺墟)정도로 치부되었을 뿐이었다.그러했던 익산지역이 마한과 백제문화의 중심으로 다시 한 번 주목받게 된 계기는 1900년대 초부터 진행된 이 지역에 대한 조사연구의 성과 때문이다.현대적 의미의 학술조사라고 할 수 있는 최초의 조사는 1910년 12월 3일과 4일 이틀에 걸쳐 이루어졌다. 이때에 왕궁평, 미륵사지, 석불리 석불, 왕궁탑 등이 조사되어 세상에 알려졌다. 그러나 이때의 조사자들은 쌍릉을 마한시대의 것으로 추정하는가 하면, 미륵사지 석탑과 왕궁리 석탑을 통일신라시대 유적으로 분류하는 등 익산과 백제와의 관계를 부정하는 견해를 취하였다. 1917년~1918년에도 익산지역에 대한 조사가 있었지만 왕궁리탑의 실측도면이 작성된 것 외에는 1910년보다 심화된 내용은 없었다. 다만 1917년 조사로, 쌍릉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부여 능산리고분군과 유사하다는 점이 밝혀졌으며, 쌍릉에서 출토된 목관은 조선총독부박물관에 진열되기도 하였다.익산지역에 대한 조사와 연구가 본격화된 것은 1973년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가 창설된 이후부터이다. 마한과 백제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제문제를 조사연구하는 기관으로 발족한 마한백제문화연구소는 익산 미륵사지 동탑지 발굴조사를 시작으로 마한과 백제 관련 유적을 발굴조사하였다. 특히 마한과 관련하여 신동리 무덤, 율촌리 분구묘 등 마한 분묘에 대한 조사와 연구가 주목된다. 그리고 백제와 관련해서는 오금산성, 미륵산성 등 백제 산성과 미륵사지, 제석사지, 연동리사지 등 절터를 비롯하여 웅포리 고분, 입점리 고분, 쌍릉 등 고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조사연구가 진행되었다.이러한 마한백제문화연구소의 조사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2005년 익산이 고도(古都)로 지정될 수 있었다.조선시대 익산은 망국의 한이 서린 땅이었을 뿐이다.100년 전만 하더라도 익산은 고사에 기록된 것처럼 고조선 준왕이 왔던 곳 정도로만 인식되었다. 현재 익산은 마한의 중심이었을 뿐만 아니라 백제의 고도였다는 것이 속속들이 드러나고 있다.그러나 아직 익산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밝혀지는 것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여전히 익산지역의 실체에 대해서는 많은 의문이 남아 있다. 이 의문은 어느 연구소, 어느 박물관만이 풀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익산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누구라도 풀 수 있을 것이다. (끝)진정환(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내 손으로 전통주를 담글 수 있는 정기강좌가 마련된다.(사)수을은 전통주에 대한 궁금증을 풀고 우리술의 가치를 알리기 위해 오는 19일부터 전주시 완산구 동문길 전주전통술교육관에서 전통주 빚기 강좌를 연다. 술에 대한 기초지식을 배우는 가양주반, 가양주반 이수자를 대상으로 한 특기주반을 개설한다. 가양주반은 12주 과정으로 누룩빚기, 단양주·이양주 빚기 등을 배우며 특기주반은 10주 과정으로 당백화주·송화주 등을 통해 밑술과 덧술을 차례로 익힌다. 이번 강좌는 한국전통주연구소 박록담 소장을 초청해 진행한다.수업 일정은 매주 1차례 일요일에 이론과 실습 수업이 이뤄진다. 모집인원은 각반 선착순 20명으로 교육비는 가양주반 60만 원, 특기주반 70만 원. 할인 혜택은 부부 15%, 학생 15%, 수을회원 20%가 주어진다. 문의 전통술교육관 063)287-6320.
조선시대 익산지역에서는 여러 방면에서 많은 인물들이 배출되고 또 모여들었으며, 죽어서 묻혔다.관계를 대표하는 인물로는 성종 17년(1486)에 태어나 명종 17년(1562)에 죽은 소세양(1486~1562)을 들 수 있다. 소세양은 관직이 좌찬성까지 올랐으나, 관직을 사직한 뒤에는 익산으로 내려와 말년을 보냈다. 소세양이 익산에 터를 잡은 이유는 외손봉사를 위해 외가로 들어갔기 때문이다.소세양은 문장은 물론이고 율시와 송설체에 뛰어났으며 그의 저서로는 <양곡집>(陽谷)이 있다. 왕궁면 용화리에는 소세양 일가의 묘소가 있는데, 소세양의 아버지인 소자파(1451~1524), 소세양 본인의 신도비 등과 함께 중종 37년(1542)에 소세양이 직접 지은 어머니 왕씨의 묘비가 있다.학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유계(1607~1664)를 들 수 있다. 그는 죽어서 익산에 묻힌 경우이다. 유계는 1633년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1636년 병자호란 때 척화를 주장하여 청과 강화한 후 유배되기도 하였다. 후에 복직되어 이조참판에 이르렀다.그는 특히 학문으로 더 유명세를 떨쳤다. 그가 1639년 유배에서 풀려난 뒤 은거하면서 지은 <가례원류>(家禮源流)는 훗날 노론과 소론 사이 논쟁의 단초를 제공하였다. 1659년에는 효종이 승하한 후 대비의 복상문제가 일어나자 기년설을 주장한 노론 편에 서서 남인을 논박하기도 하였다. 말년에는 노론의 역사관을 반영하여 고려사를 재구성한 <여사제강>(麗史提綱)을 편찬하였다.유계는 이이(李珥, 1536~1584)와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의 학통을 계승하였으며, 노론의 정치적 입장을 대변하는 글을 여러 편 저술한 노론의 전위적인 학자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죽은 뒤 익산에 묻혔는데, 그의 신도비문과 묘표는 각각 현종 9년(1668)과 13년(1672)에 노론의 영수 송시열(1607~1689)이 지었다.충의를 대표할만한 인물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이보(1544~1592), 소행진 등을 들 수 있다. 연안이씨인 이보는 사재를 털어 의병을 일으키고 400여명의 익산 출신 의병과 함께 이치전투에서 전사한 인물로, 익산 은천사의 주벽으로 배향되어 있다.한편 조선 전기 문신이자 좌리공신에 오른 이숭원(1428~1491)을 파조로 하는 연안이씨 충간공파 문중에서는 다른 곳에 있던 이숭원의 위패, 영정, 교지, 공신회맹록 등을 선조대(1567~1608)에 익산으로 옮겨오기도 하였다. 후에 후손들은 어서각, 현동사(영당) 등을 세우고 이것들을 봉안하였다.예술계를 대표하는 인물은 함열 사람 호산 서홍순(1798~?)이다. 서홍순은 전주 풍남문의 호남제일성을 쓴 서예가이자, 글씨로 일가를 이룬 이삼만(1770~1847)의 제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서홍순은 초서를 잘 썼으며, 가늘게 쓴 것은 바탕의 무늬와 같아 글자가 없는 듯 했다고 한다. 이삼만이 서법의 전수를 위해 <화동서법>을 간행하였듯이 서홍순 역시 함열에서 목판으로 찍은 <호산필첩>을 간행하기도 하였다.종교계에서는 일제강점기 익산에 터를 잡은 뒤 우리나라 4대 종교로 발돋움한 원불교의 창시자 소태산 박중빈(1891~1943)을 대표적 인물로 꼽을 수 있다.원불교는 박중빈이 1916년 고향에서 얻은 깨달음에 연원을 둔다. 그러나 현재의 위상을 갖추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1924년 익산에 불법연구회를 조직한 후 부터라고 할 수 있다. 박중빈과 제자들은 6만여 평의 황무지를 개간하는 한편 낮에는 엿장수, 밤에는 교리 공부를 통해 원불교의 터전을 닦았다.진정환(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도내에 있는 자연·문화유산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기 위해서는 우수성을 입증하는 기초연구와 협력관계 구축, 국제학술대회 개최 등이 뒤따라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전북발전연구원(원장 김경섭) 문화관광연구부 장세길 부연구위원은 6일 이슈브리핑을 통해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는 지역의 자연·문화유산을 보존 및 계승하는 의미와 함께 지역공동체 주도의 보존활동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지역발전의 중요한 전략으로 평가 받고 있다”면서 “도내에서도 유네스코 등재효과 등에 대한 사례 분석을 통해 전북의 세계유산 후보군을 발굴해 등재를 추진해야 할 것”이라고 주문했다.강릉단오제의 경우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이후 세계적인 축제가 됐고, 이는 지역의 자긍심과 대외 이미지를 높여주는 것은 물론 지역발전을 이끌었다는 게 장 부연구위원의 주장이다. 그러면서 장 부연구위원은 △유산의 우수성을 입증하는 기초연구 선행 △민·관추진체 구성 및 등재추진 대내·외 선포 △국내 관련 기관과 MOU 체결 등 협력관계 구축 △분야별 전문가가 참여하는 국제학술대회 개최 △타 지역 또는 타 국가와 공동등재 적극 활용 △전라북도의 적극적인 지원 등의 추진전략을 제안했다. 그는 “전북의 자연·문화유산들이 등재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보다 적극적인 지원이 요구된다”면서 “특히 기초연구를 수행하고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하기 위해서는 많은 예산이 필요하기 때문에 각 시·군에서 재정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한편 장세길 부연구위원이 선정한 유네스코 유산 등재 전라북도 후보군은 다음과 같다.△세계유산=그리스도교 한옥 교회군, 김제 다종교 화합마을, 김제 벽골제, 부안도요지, 장수남원 가야고분군 △세계기록유산=동학농민혁명 기록물, 춘향전, 태인 고현동향약 △인류무형문화유산=한지, 젓갈문화, 짚·풀공예 △생물권보전지역=부안군, 정읍시, 동부권(무주·진안·장수·순창군) △세계지질공원=진안·임실군(마이산 및 진안분지), 고창·부안군(갯벌 및 변산국립공원) △창의도시네트워크=남원시
백제의 지방통치 조직인 5방제(五方制)를 살펴볼 수 있는 전시가 마련됐다.정읍시립박물관은 (재)전북문화재연구원과 함께 제5회 기획특별전 ‘백제의 중방문화, 고사부리성에서 찾다’ 를 다음달 2일까지 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주최한다. 백제시대 토기, 철기, 은화관식, 복식, 무사, 기와 등 150여점이 선보인다. 이번 전시는 고부 성황산 ‘고사부리성(古沙夫里城)’을 통해 정읍의 역사를 짚어보고, 당시 선조의 삶과 문화를 조명하기 위해 실시됐다. 중방 고사성(古沙城)은 백제가 사비로 천도한 뒤 개편한 5방제의 하나로 백제가 축성해 통일신라, 고려, 조선시대까지 운영됐다.전시와 함께 부대 행사로 ‘백제 성을 쌓아라, 도미노 게임’, ‘백제 굴식돌방무덤’체험, ‘백제 무사’ 포토존 등도 진행된다.
문화재청이 향교와 서원의 문화재 가치를 재발견하고 진정성을 계승함으로써 이를 활용 대표 문화재로 육성하기 위한 ‘향교·서원문화재 활용운영모델 및 기본계획’을 마련했다. 활용 대상으로 삼은 문화재는 지정문화재인 향교 230건(국가지정문화재 9건, 시도지정문화재 221건)과 서원 169건(국가지정문화재 11건, 시도지정문화재 158건)이다.이번 활용운영모델은 숙박시설 구비 여부에 따라 숙박형과 당일형으로 나누고, 다시 향교·서원문화재 주변에 참관 주민이 거주하는 자족형과 외지에서 교통편을 이용해 참관하는 유입형으로 분류한다. 나아가 연계 문화자원이 풍부하면 연계형, 부족하면 단독형으로 세분하는 등 숙박형-자족형-연계형 등 8개 모델(숙박형 4개, 당일형 4개)로 분류한다.살아 숨 쉬는 향교·서원 문화재 육성을 위해 매년 해당 지자체를 대상으로 활용 공모사업을 추진해 2018년까지 120개 프로그램을 발굴, 지원한다. 연합뉴스
고려시대 익산과 관련된 기록은 금마군, 여량현, 낭산현 등 여러 작은 고을로 나뉘어져 있었다는 것과 1344년 원 순제의 황후 기씨의 외향이라 하여 익주로 지명이 바뀌게 되었다는 것 정도에 불과하다.그러나 이렇게 역사책에 쓰인 글로 500여 년 지속된 고려시대 익산의 역사와 문화를 모두 다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을 보완할 수 있는 것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문화재를 살펴보는 것이다.고려는 태조 왕건이 훈요십조에서 첫 번째로 고려가 대업을 이룬 데에는 부처의 호위에 힘입었다고 할 정도로 명실상부한 불교국가였다. 거기에 그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산과 물가에 사찰, 탑, 석불 등이 도처에 조성되었다. 익산지역도 마찬가지 양상을 보이는데, 고려시대 익산지역에서 번성했던 사찰을 꼽자면 삼국시대에 창건된 미륵사를 비롯하여 숭림사, 심곡사 등을 들 수 있다.미륵사는 조선 <태종실록>에 실린 자복사 88곳 가운데 하나로 언급된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에도 금마의 제례를 주관하는 자복사의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숭림사 역시 고려 말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지금 실물은 없어졌지만 재산대장에 ‘지정 5년’(1345)이 새겨진 기와가 그려져 있어, 그러한 추정을 뒷받침 해준다.심곡사에는 연화대좌 형태의 기단부가 있는 칠층석탑이 있어 관심을 받아왔는데, 2012년 6월에 이 석탑의 상층기단과 지대석 두 곳에서 사리갖춤이 발견되어 세간의 주목을 더욱더 끌게 되었다. 칠층석탑 상층기단의 사리구멍에서는 백자항아리와 함께 통일신라 말~고려 초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는 금동불 2구가 봉안되어 있었으며, 지대석의 사리구멍에서는 고려 말~조선 초에 조성된 불감과 함께 금동불 7구가 발견되었다.특히 사리갖춤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지대석의 사리구멍에서 확인된 불감과 금동불이다. 불감의 문은 파손이 심하지만, 안쪽에 인왕상이 조각되어 있다는 것이 보존수복 과정에서 확인되었다. 불감 내부에서 확인된 7구의 불상 가운데 불감의 앞쪽에 있는 금동불좌상 1구와 금동보살좌상 2구가 동일한 양식적 특징을 보이는 반면, 뒤쪽에 봉안된 4구는 앞쪽의 3구와는 또 다른 특징을 보인다. 앞쪽에 안치되어 있던 아미타삼존불은 라마 불상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아 고려 말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는 반면, 뒤편 금동불 4구는 고려 전통 양식을 기반으로 하여 조선 초에 조성된 불상으로 추정된다. 한편, 여산면 원수리에서는 순금제 불상이 출토되었는데, 이 불상에 ‘신축辛丑’년이라는 간지가 새겨져 있어 주목받아왔다. 이 불상 역시 심곡사 금동불과 마찬가지로 고려 말에 유행한 라마양식 불상과 유사한 면모를 보이기 때문에 신축년은 1361년으로 추정된다.이러한 고려시대 익산사람들이 이룩한 다채로운 불교문화재는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고려시대 익산사람들의 삶과 문화를 보여주는 훌륭한 역사서라고 할 수 있다.진정환(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문화재청은 문화재수리 환경 변화에 대응하고 문화재의 가치와 진정성 유지를 위한 문화재수리 정책을 체계적·종합적으로 추진하고자 내년부터 2018년도까지 시행할 ‘문화재수리 등에 관한 5개년 기본계획’을 27일 관보에 고시했다.이번 기본계획은 ‘문화재수리 등에 관한 법률’에 근거한 중장기 계획으로, 철저한 현 실태 진단에 근거해 체계적이고 선진적인 문화재수리 정책이 이루어지도록 했다고 문화재청은 밝혔다.이를 위해 기본 계획은 향후 5년간 추진할 정책을 3개 대과제, 6개 중과제, 20개 세부추진과제로 선정했다. 이 사업에는 국비 682억 원, 지방비 57억 원을 합친 739억원이 투입된다.이번 기본계획에 따라 문화재수리 부재의 수집·보존·연구를 위한 전통건축부재보존센터(연면적 1만3000㎡)를 설립하고, 문화재 중요도에 따라 적정한 수리업자와기술인력을 배치할 수 있도록 문화재수리업자에 대한 평가·공시, 기술인력에 대한 경력관리가 가능한 시스템을 구축·운영한다.또 문화재수리기술자 국가자격시험을 개선해 전공과목을 확대 개편하고 심층 면접을 강화하며, 2012년에 처음 시행한 의무감리 제도를 적극 활성화해 감리대상을 확대하고 감리자격 기준을 강화할 방침이다. 문화재수리 전통재료 활성화를 위한 중장기 사업 추진 방안도 마련한다.문화재청은 이번 기본계획이 지자체에서 자체 실정에 맞는 세부 시행계획을 마련하는 기초가 된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연합뉴스
익산지역은 위만에게 쫓긴 고조선 준왕이 내려와 재기를 꿈꾸던 곳이며, 백제 무왕 역시 익산을 발판으로 삼고 삼국을 통일하고자 하였다. 백제와 고구려의 패망 이후에도 익산지역에는 재기와 부흥을 꿈꾸는 무리가 모여들었다. 그들 중에는 보덕국을 세운 고구려 유민이 있었고, 의자왕(재위 641~660)의 오래된 원한을 씻고 백제를 부흥시키고자 했던 견훤(867~936)이 있었다.892년 무주를 중심으로 독자적 세력을 형성하였던 견훤(867~936)은 900년 완산주에 이르러 열광하는 백성들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내가 삼국의 시초를 찾아보니, 마한이 먼저 일어나고 후에 혁거세가 일어났다. 백제는 금마산에서 개국하여 6백년이 되었는데, 신라의 김유신(595~673)이 흙먼지를 날리며 황산을 거쳐 사비에 이르러 당나라 군사와 합세하여 백제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지금 내가 감히 완산에 도읍하였으니 의자왕의 오래된 울분을 씻지 않겠는가?물론 이 연설은 이 일대의 민심을 이용하기 위한 연설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후백제 건국의 정통성을 백제, 더 나아가 마한과 연결시킨 점이다. 견훤은 후백제 건국의 정신적역사적 토대를 익산에 두었던 것이다.익산지역은 한때 준왕이 마한을 건국한 곳이었을 뿐만 아니라 건마국이 마한의 맹주로 한때를 호령하였던 곳이었다.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또 다른 도읍이 들어섰던 곳이었다. 그러나 백제 멸망 이후 그들의 땅을 고구려 유민에게 내주기도 하였으며, 보덕국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는 반란을 진압한다는 명목 아래 익산지역의 많은 백제 유민들 역시 피해를 입었다. 익산 사람들의 그러한 박탈감은 마한과 백제를 잇겠다는 견훤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로 이어졌을 것이다.후백제 개국의 정신적 토대를 익산으로 삼았던 견훤은 마한과 백제 계승의식을 대내외에 표방하기 위해 익산일대에 대한 정비를 단행하였다. 그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나온 것이 바로 미륵사 개탑開塔이다.미륵사 개탑에 대한 이야기는 <갈양사 혜거국사비>에 나온다. 혜거국사(899~974)는 고려 광종 19년에 국사가 된 승려인데, 후삼국시대에는 주로 후백제지역에서 활동하였다. 혜거는 917년 금산사에서 구족계를 받았으며, 922년에는 미륵사 개탑을 계기로 열린 선운사 선불장에 참석하기도 하였다.선불장이 열릴 정도였다면, 미륵사 개탑이 단순히 석탑의 보수에 그친 것이 아니라, 미륵사에 대한 대대적인 정비가 수반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관련하여 후백제 왕실 사찰로 추정되는 봉림사지 석조삼존불의 보살상의 손과 유사한 미륵사지 출토 청동보살 손이 주목된다. 이 밖에도 통일신라 혹은 고려로 단정할 수 없는 기와나 금속공예품 등 역시 922년 미륵사 개탑 시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충분하다.미륵사에 대한 정비뿐만 아니라, 백제 궁성터에 대한 정비도 실시하였다. 옛 백제 궁성에는 왕궁리 오층석탑을 조성하고 금동불입상을 봉안하였다. 이처럼 백제의 옛 궁성에 다시 세운 왕궁리 오층석탑은 후백제 견훤이 백제를 계승했다는 것을 대내외에 표방하기 위한 기념비적 조형물이라고 할 수 있다.진정환(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동지를 앞두고 세시풍속을 함께 하는 행사가 마련된다.전주한옥생활체험관(관장 노선미)은 21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1시까지 전주 한옥마을 내 한옥생활체험관인 세화관 대청과 마당에서 새알심 빚기와 동지팥죽 나누기를 진행한다. 세화관은 작은 설로 불리던 동지를 맞아 한옥마을을 찾는 관광객, 주민과 함께 팥죽을 나눠먹으며 새해의 무사안일과 덕담을 나눌 예정이다.이날 체험의 참가비는 없으며 재료가 떨어질 때까지 남녀노소 참여가 가능하다. 자세한 문의는 전주한옥생활체험관 063-287-6300번.
2009년 1월 14일 익산 미륵사지 서탑 해체조사 현장에서는 탄성이 터졌다. 639년 백제의 왕후가 가람을 창건하고 탑을 조성하였다는 내용이 새겨진 사리봉영기와 사리를 봉안한 사리호 외에도 다양한 공양품들이 당시 현장에 있던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한 것이었다. 이 사리갖춤과 공양품의 발견 이후 국립전주박물관의 대표적인 전시품인 왕궁리 오층석탑 출토 사리갖춤의 조성시기가 삼국시대 백제라는 견해들이 제시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주장이 정말로 타당한가를 밝히기 위해서는 먼저 두 사리갖춤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두 사리갖춤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좀 더 명확히 살펴보기 위해서는 미륵사지 서탑 사리갖춤이 봉안되기 62년 전인 577년에 봉안된 부여 왕흥사지 사리갖춤과 43년 후인 682년에 봉안된 감은사지 삼층석탑 사리갖춤을 함께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왕흥사지 출토 사리갖춤이 금제사리내호-은제사리외호-동제사리외함 순으로 중첩시킨 것과 달리, 왕궁리 오층석탑과 미륵사지 석탑 사리갖춤은 유리사리병-금제사리내함(호)-금동사리외함(호)의 순으로 중첩시켰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러한 구조는 금동전각형사리기-금동외함으로 구성된 감은사지 삼층석탑 사리갖춤과도 다른 것이다. 미륵사지 서탑 사리갖춤의 사리내외호는 비슷한 형태인데, 어깨 부분이 넓고 목이 길며 주둥이가 넓은 병 형태이다. 이러한 미륵사지 석탑 사리내외호의 형태는 위덕왕 재위 때인 577년에 봉안된 왕흥사지 사리내외호의 전통을 이은 것으로 보인다. 반면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내함은 감은사지 삼층석탑 사리외함과 같은 상자형이다.사리기 표면을 장식한 무늬를 살펴보면, 미륵사지 서탑 사리갖춤의 내외호와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갖춤의 내함에는 연꽃무늬와 넝쿨무늬가 결합된 것과 함께 구슬무늬가 공통적으로 시문되어 있다. 특히 미륵사지 서탑 사리갖춤 금동외호 아랫부분에 연속된 연꽃무늬와 넝쿨무늬를 한 부분만 떼어서 본다면,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갖춤의 장식 무늬와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면, 왕흥사지 사리기의 경우에는 별다른 무늬가 없고, 감은사지 삼층석탑 사리기에는 연꽃무늬나 구슬무늬가 없이 전면에 사천왕상이 새겨져 있다.이처럼 미륵사지 서탑 사리갖춤과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갖춤은 구성 방법, 무늬 등에서는 동일하지만 형태는 다른 면모를 보인다. 미륵사지 서탑 사리갖춤이 6세기 말의 전통이 강한 반면,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갖춤은 7세기의 새로운 경향을 살펴볼 수 있어 미륵사지 서탑 사리갖춤보다는 늦은 의자왕대에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진정환(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미륵사는 〈삼국유사〉에 따르면 백제 무왕대(600~641년)에 선화공주의 권유로 조성한 사찰이라고 한다. 실제로 1980년부터 1989년까지 발굴조사를 통해 7세기 전반, 즉 백제 무왕대 이 사찰이 조성되었음이 확인되었다. 아울러 발굴에서는 서원, 중원, 동원으로 이루어진 사지의 전모가 밝혀짐으로써 불당, 탑, 회랑이 3개소 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이 허언이 아니었음이 밝혀졌다. 그런데 미륵사 창건에 참여한 무왕과 선화공주 이야기만 부각되어 종종 미륵사는 백제 때에만 법등을 밝힌 사찰로 오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기록과 미륵사터에서 나온 유물들은 미륵사가 조선시대까지도 법등을 꺼뜨리지 않고 이어왔음을 이야기 해준다. 통일신라시대는 삼국시대 백제의 무왕이 창건했던 당시보다 미륵사가 확장되었는데, 남문과 당간지주, 남쪽의 연못이 이때에 조성되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성덕왕 18년(719) 금마군 미륵사가 벼락을 맞았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통일신라시대의 대대적인 중창불사는 이 직후에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통일신라시대 미륵사의 대표적인 유물로는 금동향로를 꼽을 수 있다. 금동향로는 2000년 10월 23일 중원의 뒤편 회랑지 부근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다. 반원형으로 높게 솟은 뚜껑과 납작한 대야 형태의 몸체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몸체는 동물 다리 형태로 된 4개의 다리와 결합되어 있어, 흔히 수각향로라고 부른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수각향로인 미륵사지 금동향로는 다소 번잡하고 섬약했던 중국 당나라 수각향로와 달리 힘찬 동세와 단아함이 돋보인다.백제의 부활을 기치로 내걸었던 후백제 역시 백제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던 미륵사를 금산사와 더불어 국가의 중요한 사찰 가운데 하나로 여겼다. 이는 〈갈양사 혜거국사비〉에 922년 미륵사 개탑을 기념하여 선불장(選佛場)을 개최하였다는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선불장을 개최한 것으로 보아 미륵사 개탑이 대대적인 중창불사였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그러나 아쉽게도 후백제가 통일신라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인지 지금까지의 연구로는 후백제의 유물로 단정지을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고려와 조선시대에도 미륵사의 법등은 꺼지지 않았다. 특히 중국 송의 도자기는 물론 고려청자, 차도구인 다연 등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차 문화가 번성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 초 전국의 사찰을 정리하여 88개의 사찰만 남길 때에도 미륵사는 익주(益州)의 자복사(資福寺)로써 명맥을 유지하였다. 이처럼 천년 가까이 번성했던 미륵사가 언제 폐사되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미륵사에서 만력15년이 새겨진 수키와가 출토된 것으로 보아 임진왜란 직전인 1587년까지만 하더라도 지속적인 중수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그러나 영정조대 문신인 강후진이 쓴 〈와유록〉의 유금마성기(遊金馬城記)에 미륵산 서쪽 기슭 옛 미륵사의 유구가 있다. 7층 석탑이 있는데 높고 크며 동방의 석탑 가운데 가장 크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다.100년 전 벼락을 맞아 반이 허물어졌다. 밭둑 사이에 초석과 석조가 널려있다.는 기록으로 보아 18세기에는 이미 폐사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이러한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미륵사는 임진년과 정유년 왜란 때 참화를 벗어나지 못하고 폐사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진정환(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정읍시가 주최하고 한국민족운동사학회(회장 황민호)가 주관한 동학농민혁명 제119주년 기념 학술대회가 5일 전북과학대 본관 3층 회의실에서 개최됐다. 학술대회에는 김생기 시장과 김승범 시의회의장, 이석문 교육장, 동학농민혁명 기념재단 김대곤 이사장, 전국동학농민혁명유족회 이왕재 회장, 전봉준장군기념사업회 전해철 이사장, (사)갑오농민동학유적보존회 김동길 이사장, 한국민족운동사회 회원, 시민등 150여 명이 참석했다.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한국사 교과서와 문학작품 속의 동학농민혁명을 대주제로 한 기조강연과 3편의 논문이 발표됐다. 기조강연에 나선 유영렬 전 국사편찬위원장은 동학농민혁명의 전개와 성격을 주제로 설명하고 동학농민혁명의 초기 전개과정에 대해서는 고부봉기와 무장기포 그리고 백산대회가 단절이 아닌 연속선상으로 이해할 것을 강조했다.특히 고부봉기는 제1단계로서 전체 동학농민운동의 시발점으로 보고, 무장기포는 2단계인 제1차 혁명전쟁의 시발점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했다. 이어 첫 번째 주제 한국사 교과서에 나타난 동학농민운동 서술의 변화에 대해서는 서인원(동국대학교) 교수, 두 번째 주제 2011 개정 교육과정 한국사의 동학농민운동 서술의 비판적 검토에 대해서는 조성운(경기대학교) 교수가, 세 번째 주제 문학작품에 나타난 동학농민혁명에 대해서는 채길순(명지전문대학교) 교수가 각각 발표했다.
백제의 궁성유적인 왕궁리유적과 관련하여 1965~1966년 5층석탑에 대한 해체조사가 있은 이래 1976~1977년 궁성 일부와 금당지 시굴조사가 이루어진 바 있으며, 1989년부터는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시작되어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유적은 동서로 뻗은 네 개의 석축이 공간을 구획하며, 그 주변은 궁장宮墻(담장)이 둘러져 있는데, 궁성의 크기는 대체로 남북 490m, 동서 240m 내외이다. 내부에서는 폭이 35m에 이르는 대형 건물지, 서북쪽 일대의 공방 관련 건물지, 화장실 등 33기의 다양한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궁성의 북쪽은 정원과 후원으로 활용되었다. 한편 무왕 사후 본격적으로 사찰 관련 건물이 들어섰는데, 5층석탑 일대가 이에 해당한다. 석탑-금당-강당이 남북 중심축선상에 배치되어 있으며, 관궁사(官宮寺), 대관궁사, 왕궁사 등의 명문이 있는 기와가 출토되었다. 특히 왕궁리유적에서는 수막새, 인장와(印章瓦) 등 백제의 수도인 사비에서 출토되는 것과 동일한 기와가 확인되었다. 수부(首府)가 새겨진 기와도 발견되었는데, 수부는 국왕이 거처하고 중앙행정기구가 있는 곳을 의미한다. 왕궁리 궁성의 후원은 네 번째 석축 동쪽 끝부분에 조성되었는데, 이곳에는 연못과 부속 건물이 들어섰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아울러 연못에 물을 공급하기 위한 수조시설이 있으며, 이 밖에도 연못으로 들어오는 물의 양을 조절하기 위한 배수시설과 연못을 통과한 물을 모으는 집수시설이 확인되었다.그리고 왕궁리 궁성 서북편에서는 3곳의 대형 화장실이 확인되었는데, 삼국시대 유적 가운데 최초로 발견된 것이다. 그 중 하나는 길이가 10.8m, 폭이 1.7~1.8m, 깊이가 3.4m에 이를 정도로 상당한 규모를 보인다. 화장실의 내부에는 나무 기둥을 일정한 간격으로 세웠으며, 변이 밖으로 빠져나가거나 지하수로 침투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벽면에 점토를 덧발랐다. 화장실과 석축 배수로는 좁은 수로로 연결되어 있어, 화장실 내부에 일정량의 오수가 차면 수로로 배출되는 구조이다.왕궁리유적에서는 궁성에서 사용되는 도구 등을 제작하기 위한 공방터도 확인되었다. 공방터에서는 연꽃모양의 구슬과 영락 등의 금제품, 동, 유리 조각 및 찌꺼기 이 외에도 이를 만들 때 사용하던 도가니, 숫돌 등이 함께 발견되었다.무왕 사후 조영된 것으로 추정되는 사찰은 궁성 남측 대지 중앙에 자리 잡고 있다. 초기 사찰은 남북 중심축선상에 목탑-금당-강당이 차례로 배치되었다. 이 사찰터에서는 삼국시대 백제의 유물부터 통일신라시대 후기 유물까지 확인되는데, 사찰과 인접한 다른 건물터에서는 통일신라시대의 유물이 거의 출토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한편 이 사찰터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왕궁리 오층석탑의 조성시기에 대해서는 백제, 통일신라, 고려 초 등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었다. 왕궁리 오층석탑 안에 봉안된 사리갖춤 역시 석탑의 조성시기만큼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석탑의 경우, 통일신라의 가구식 단층기단과 백제 석탑의 평평하고 얇은 옥개석이 결합된 것으로 보아, 후백제 견훤에 의해서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그런데 이 석탑의 1층 옥개석 중앙 적심에 뚫린 2개의 네모난 사리공과 기단 내부 방형 심초석에 品품자로 뚫린 3개의 방형 사리공에서 다양한 사리갖춤이 발견되었다. 1층 옥개석의 사리갖춤은 진신사리와 법신사리를 함께 봉안한 유일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 가운데에서도 유리제사리병과 금제사리내함은 기법과 무늬가 2009년 발견된 미륵사지 서탑 사리갖춤과 유사하여 백제 때 제작된 것을 후백제 견훤이 재봉안했을 가능성이 높다. 진정환(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정읍시가 궁중음악 수제천의 문화콘텐츠화를 추진하고 있는 가운데 지난달 28일 ‘궁중음악 수제천을 활용한 유비쿼터스형 전통문화 콘텐츠 컨설팅 중간보고회’가 정읍시청에서 열렸다.이날 보고회에는 김생기 시장을 비롯해 정창환 정읍문화원장, 수제천 보존회 이영자 이사장을 비롯한 회원, 전북과학대학교및 관계공무원등이 참석해 ‘수제천 발전방향’ 등의 안건을 주제로 토론를 펼쳤다.
제6회 동초제 판소리 기획공연 ‘판’이 지난달 30일 정읍사예술회관에서 성황리에 개최됐다.(사)동초제판소리보존회(이사장 이일주) 주최, 동초제판소리보존회 정읍지부(지부장 손경호) 주관, 정읍시와 정읍예총, 정읍농협(하나로마트)이 후원한 공연에는 김생기 정읍시장과 강광 전 정읍시장, 유남영 정읍농협조합장, 김대중 도의원, 김희선 정읍예총회장, 동초제판소리보존회 회원및 시민등 1000여명이 참석해 축하했다.공연은 △동초소리민요단의 남도민요(성주풀이, 남한산성, 진도아리랑) △김세미, 김미숙, 김선미 명창의 입제창(심청가중 심청이 임당수 빠지는 대목) △이현희 무용가의 무용(동초소리를 위한 흥춤) △김찬미 명창의 판소리(흥보가중 박타는 대목) △서영호 명인의 아쟁산조 △ 천주미, 이슬이, 우혜영 단원의 가야금병창 △ 민요(흥타령, 육자배기) △타악 연희원 아퀴의 난타 등으로 진행되며 관객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손경호 지부장은 “판소리 명창 동초 김연수 선생의 업적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김연수 선생으로 부터 사사한 오정숙 선생이 주축이 되어 결성한 동초제 판소리 보존회의 맥을 이어가고 국악의 저변확대를 위해 기획공연을 개최하고 있다”고 밝혔다.
국내 현존하는 최고(最古) 최대(最大)의 석탑인 익산 미륵사 석탑이 일제강점기에 덧씌워진 시멘트를 벗어내고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기 위한 복원공사를 시작했다.문화재청과 전북도는 26일 익산시 금마면 미륵사지 현장에서 미륵사지 석탑 복원 착수식을 갖고 탑의 중심이 되는 기둥 받침돌인 심초석(心礎石)을 원래 자리에 옮기며 복원작업의 시작을 알렸다.복원작업의 시작을 알리는 심초석 놓기에는 문화재청 최병선 건축문화재연구실장과 최종덕 문화재청 문화재보존정책국장, 월주 큰스님, 전북도 박성일 행정부지사, 이한수 익산시장, 김대오 익산시의장 등이 참여했고, 문화재청 관계자와 관람객 300여명이 함께했다.북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중요무형문화재 제120호 이의상 석장 지휘 아래 광목천에 매단 무게 1.2톤짜리 방형 심초석은 탑 중심에 조심스럽게 안치됐다. 이로써 국보 11호인 이 석탑은 일제강점기인 1915년 콘크리트로 보수한 이후 1세기 만에 콘크리트를 벗고 새 모습으로 재탄생하게 됐다. 문화재청은 이번 복원을 통해 석탑을 해체 보수 직전 모습에 최대한 가깝게 복원하기로 방침으로 정하고 원래 9층 규모 중 6층(높이 14.6m)까지만 석탑을 복원할 계획이다. 기단에서부터 2층까지는 온전하게 복원하며, 3층 이상은 해체 보수 이전 상태를 최대한 유지한다는 방침이다. 이를 위해 새 석재 사용은 최소화 하고 기존 석부재를 최대한 활용한다. 탑 복원에 쓰이는 석재는 전체 무게가 1800t에 이른다. 문화재청과 불교계는 미륵사 석탑 복원을 추진하면서 지난 2009년 미륵사지 석탑에서 발견된 사리장엄을 원래 있던 자리에 봉안한다는 계획도 수립했다. 당시 발견된 금동부처 진신사리 진품을 비롯해 모조품으로 된 발굴유물과 불교계에서 요구하는 금판발언문 등을 내년 초 봉안한다는 계획이다.월주 큰스님은 백제왕의 간절함이 담긴 사리장엄이 서기639년 미륵사 석탑에 봉안되었고 기적적으로 고귀한 사리장엄과 감동을 주는 사리가 발견됐다며 불자의 생명과도 같은 부처님을 모신 성스러운 탑이 복원되는 고귀한 자리에 섰다고 복원의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한편, 미륵사 석탑은 1998년 구조안전진단 결과를 바탕으로 역사적 가치와 진정성 회복을 위해 해체 보수가 결정된 뒤 2001년 10월31일 해체가 시작돼 2010년 완료됐다.복원의 대장정은 2016년 8월까지 계속되며, 해체에서 발굴, 복원에 이르는 총사업비는 195억원이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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